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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굉필
         |사망지= [[조선]] [[전라도]] 순천군 철물시
         |거주지= [[한성부]] 정동, [[달성군]] [[현풍]], [[합천군]], 평안도 희천(유배지), 전라도 순천군 승평(유배지)
         |배우자= 순천 박씨
         |자녀= [[박순천 (배우)]]
         이때 그는 [[김일손]], [[권오복]], [[남곤]] 등의 동문이며 [[김종직]]의 문도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평안도 희천(熙川)에 유배되었고, 2년 뒤에는 전라도 순천에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힘썼고 특히 지방관으로 부임한 [[조원강]]의 아들 [[조광조]]를 만나 그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김굉필이 유배지(流配地)를 [[평안도]] [[희천]]에서 [[전라도]] [[순천]](順天) 승평(昇平)에 있던 친한 후배 [[정여해]]의 집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기자 [[정여해]]는 항상 병으로 가마를 타고 김굉필을 방문하여 위로했다. 한번은 [[정여해]]가 그를 찾아와 김굉필의 신구를 청하는 상소문(上疏文) 초(草)한 것을 보이고 그를 구하려 하였다. 그러나 김굉필은 그 상소문을 살펴보고 안 된다고 하며 '만약 이 소장을 올리면 우리 동지들이 더 큰 화를 입게 될 것이니 올리지 말라'고 만류하였다. 실망한 [[정여해]]는 그날부로 상소문을 불살라 버리고 어찌할 수가 없음을 알고 통곡하며 [[순천]]의 집으로 돌아와 이후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며 은거하였다.
         유배지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학문 연구와 인재 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정여해]] 등의 친구들이 그를 방문하여 위문했다. 저서로 《경현록》, 《한훤당집》이 전한다. 그는 그림에도 능했다 한다. [[1504년]](연산군 10년) 다시 [[갑자사화]]가 발생하자 궁중파의 탄핵을 받고 [[전라도]] [[순천]]에 유배, 그해 [[10월 7일]] 철물시(鐵物市)에서 효수(梟首)하라는 명을 받고 유배지에서 사형당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51세였다.
         죽은 뒤 그의 수급은 효수(梟首)되어 [[순천부]]의 철물시장에 걸려졌다. [[중종 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짐에 따라 [[증직|증]] [[승정원]][[도승지]]겸 [[경연]][[침찬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았다. [[이황]]은 그를 '근세 도학(道學)의 조종(祖宗)'이라 하여 [[성리학]] 도통의 정통으로 규정했고, 그의 제자 중 [[조광조]]와 그의 문인 [[백인걸]], [[백인걸]]의 문인 [[이이]], [[성혼]] 등을 통해 기호학파를 형성하고, 이들은 다시 [[조선 선조|선조]] 때에 [[서인]] 당을 형성하게 된다.
         [[1610년]](광해군 2년)에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과 더불어 동방 5현으로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다. [[아산]]의 [[인산서원]], [[서흥]]의 [[화곡서원]], [[회천]]의 [[상현서원]], [[현풍군|현풍]]의 [[달성 도동서원|도동서원]], [[순천시 (전라남도)|순천]]의 [[옥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 부인 : 순천 박씨
  • 김부겸(국회의원)
         그러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 총선]]에서는 [[지역주의]] 타파라는 기치를 내걸고 [[새누리당]]의 본거지인 [[대구광역시|대구]]로 내려가 [[수성구 갑]]으로 지역구를 옮기는 --패기--파격적인 행보를 벌였다. 비록 선거에서는 [[이한구]] 후보에게 밀려 낙선했지만, 40.4%라는 고무적인 득표율을 받았다.[* 잘 알려진 대로 TK와 호남은 지역주의가 강해 지역주의에 반하는 정당 후보가 출마하면 20%도 잘 건진 것이라 평할 정도다. 당장 문재인 대통령의 대구 득표율도 22%가 조금 안 됐다. 이와 비슷한 케이스를 찾아보자면, 새누리당 이정현 의원이 2012년 19대 총선에서 광주 서구에 출마했을 때 39.8% 득표를 받은 적이 있다. 후에 청와대 홍보수석을 거쳐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전라남도 순천시 & 곡성군에 출마해 마침내 호남 입성에 성공했다.] 그리고 2년 뒤 2014년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6.4 지방선거]]에서는 대구시장 선거에 출마하였다. [[19대 총선]] 때처럼 [[새누리당]] [[권영진(정치인)|권영진]] 후보에게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지만, 40.3%라는 괄목할 만한 득표율로 선전하며 정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였던 [[수성구]] 갑 지역구에서는 김부겸 후보의 표가 [[새누리당]] [[권영진(정치인)|권영진]] 당시 후보의 표보다 더 많이 나왔다.
         [[대구광역시]]는 우리나라에서 [[새누리당]] 지지세가 제일 강력한 지역[* 특히 [[달성군]]과 [[서구(대구)|마주]][[달서구|보는]] [[남구(대구)|지]][[북구(대구)|역]]은 굉장히 심하다.]이라 승리를 낙관할 수는 없었지만, 김부겸은 선거 시즌 내내 가상 대결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2014년 [[2014년 상반기 재보궐선거|7.30 재보선]]에서 [[전남]] [[순천]]·[[곡성]]에서 출마해 당선된 [[이정현(정치인)|이정현]] 의원에 이어 이변을 연출할 기대주로 관심을 받았다. [[김문수]] 전 지사가 경북 영천, 경북고등학교 출신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정치 경력을 [[경기도]]에서 쌓았기 때문에 연고지로서의 혜택은 없어지다시피했다. 김부겸은 이러한 점을 노리고 [[김문수]] 전 지사의 [[대구광역시]] 출마를 명분 없는 선거라고 비판한 적도 있었다.
         김부겸이 당선된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지역 기반을 조용히 다졌기 때문이다. 2번의 낙선 뿐만 아니라, 원외 활동에서 [[권영진(정치인)|권영진]] 대구시장과도 협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서 자신은 ~~순천의 [[서갑원]]처럼~~ [[대구광역시]] 발전에 발목을 잡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공약에도 [[더불어민주당|민주당]]을 발목만 잡는 야당에서 협력하는 야당으로 바꾸겠다고 천명하기도 했기 때문에 민주당의 반감이 희석된 것도 영향이 컸다.
  • 김숙자 (1389년)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 최동
         본관은 [[해주 최씨|해주]]이며 [[한성부]] 출신이다. [[전라남도]] [[순천시 (전라남도)|순천군]] 군수를 지낸 아버지 [[최정익]]을 따라 [[순천]] 지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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