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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상하
         그 뒤 [[송시열]]의 비문을 찬하면서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윤증]]이 (사사로운 마음으로) [[윤휴]](尹鑴), [[허목]]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는 내용을 비문에 기록하여 [[소론]]계 유생 [[유규]](柳奎) 등 8백 여명의 [[성균관]] 소론계 유생들에게 비판을 받고 [[사간원]][[대사간]] [[이관명]](李觀命), [[홍문관]][[수찬]] [[어유구]](魚有龜<ref>경종의 장인이다.</ref>) 등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당하였으나 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715년]]에는 [[윤선거]](尹宣擧)와 [[유계]](兪棨)의 공저인 가례원류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윤선거와 유계의 후손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자, 그 서문에서 유계의 저술이라고만 하여 소론의 영수 윤증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이어 스승 [[송시열]]의 묘비명을 지을 때 송시열이 화를 당한 것은 [[장희빈]] 소생 원자 책봉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윤증]]이 [[윤휴]]의 무리와 함께 조작한 것”이라 주장하며 이를 그대로 송시열의 비문에 기록하여 [[소론]]계 유생 [[유규]](柳奎) 등 8백여명과 [[소론]]인 [[사간원]][[대사간]] [[이관명]](李觀命), [[홍문관]]수찬 [[어유구]](魚有龜) 등 [[소론]]이 반발, 소론측으로부터 비문을 수정하라는 항의를 받기도 하였다.
  • 김만기 (1633년)
         1653년 별시문과에 을과 3인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그 뒤 장예원 주서, 승문원 주서, 시강원 설서 등을 역임하고 예조,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 등을 지냈다.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 부교리에 임명되었다. [[1657년]](효종 8) 교리(校理)로 재직 중 글을 올려 [[오례의]](五禮儀)』의 복상제(服喪制) 등 잘못된 것을 개정하기를 청하였다. 관료생활 초반 김만기는 문장력과 재주를 인정받아 [[조선 효종|효종]]은 "나와 더불어 일을 함께 할 자는 그 누구인가? 법도에 맞게 지적하여 인도해 줄 자는 경 등 약간의 사람뿐이다."라고 지칭하기도 했다. 1659년 [[조선 효종|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다가 그해 [[5월]] 갑자기 승하하자, 효종의 계모인 [[예송논쟁|자의대비의 복상문제]]로 논란이 일자 송시열, [[송준길]] 등의 기년설을 지지하였다. 이후 [[서인]]으로 활동하며, 3년설을 주장하는 [[윤선도]](尹善道), [[윤휴]] 등 [[남인]]을 공격했다. 이후 흥문관 응교, 사헌부 집의,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1660년(현종 4) [[수찬]]이 되었다. 1661년 응교, 사복시정, [[성균관]] 사성, 의정부 사인, 통정대부로 승자하여 [[승정원]]동부승지 등을 거쳐 1666년(현종 8) [[전라도]] 도사로 임명되었다가 다시 특별히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으나 편모를 떠나 멀리 갈 수 없다고 사양하니 사간원[[대사간]]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곧 승정원 [[좌승지]]로 옮겼다. [[1667년]] [[예조]][[참의]]에 승진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그 후 광주부윤에 제수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 김질 (1422년)
         [[음서]]로 무관이 되고, 부사직(副司直)에 이르렀을 때 사가독서(賜暇讀書)를 청원하여, 특별히 허락받았다. 그 뒤 [[1447년]] 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1450년]](문종 즉위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수찬, 사간원 우정언, 성균관 사예 등을 거쳐 [[1455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여러 번 기회를 놓치고 위험을 느끼게 되자, 뜻을 바꾸어 [[조선 세조|세조]]에게 사육신의 거사를 알렸으며 이 공로로 1456년(세조 2) 6월 25일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가 되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D%8C%90%EA%B5%B0%EA%B8%B0%EA%B0%90%EC%82%AC 세조 4권, 2년(1456 병자 / 명 경태(景泰) 7년) 6월 25일(계해) 2번째기사] "윤사로와 정창손에게 품계를 더하고, 박중손·성봉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1455년 9월 5일 [[좌익공신]](佐翼功臣) 3등과<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A%B9%80%EC%A7%88+3%EB%93%B1 세조 2권, 1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9월 5일(정축) 1번째기사] "좌익 공신을 정하다"</ref> 1459년(세조 5) 8월 25일 상낙군(上洛君)에 봉해졌고<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_king.jsp?tid=kga&pos=0&mTree=0&inResult=0&indextype=1&keyword=%EC%83%81%EB%9D%BD%EA%B5%B0 세조 17권, 5년(1459 기묘 / 명 천순(天順) 3년) 8월 25일(갑술) 3번째기사] "윤사흔·조석문·김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뒤에 부원군으로 진봉되었다.
         그해 [[집현전]] [[수찬]]에 뽑혔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이 되었다가 [[1452년]](문종 2) [[2월]] 정기인사 때 승의랑(承議郞)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 등을 지냈다. 그 무렵 그는 [[성삼문]], [[최항]], [[신숙주]] 등과 함께 문종의 각별한 지우와 총애를 받았다.
  • 박규수
         1850년(철종 1년) [[전라북도]] [[부안군|부안]][[현감]]으로 부임한 그는 [[실학|대실학자]] [[유형원|반계 유형원]]의 사적지를 찾아 [[반계수록]] 등 그의 저서들을 입수해 탐독한 후, 세상을 구할 학문이 쓰이지 못했다며 찬탄했다 한다. 그 해 [[사헌부]] [[지평]]으로 궁에 복귀한 뒤 [[홍문관]] [[수찬]]이 됐다.
  • 윤선도
         [[1652년]](효종 3년) [[1월 23일]] 통훈대부 행[[성균관]][[사예]](通訓大夫行成均館司藝)가 되어 부임하였으며, 그해 3월에 사직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3월 27일]] 특명으로 [[통정대부]] [[동부승지]]겸 [[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에 제수되자 두 번씩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이 반려하였다. 그러나 4월 초 정언(正言) 이만웅(李萬雄)이 탄핵했다는 말을 듣고 다시 사직소(辭職疏)를 올려 허락을 받았다. 바로 하직인사 후, 고향인 [[해남]]으로 내려 가려다가 효종의 만류로 고산(孤山)에 머물렀다. [[1652년]](효종 3년) [[4월 5]]에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의흥위]]부사직(行義興衛副司直)에 임명되었다가 [[4월 9일]] 동반직인 [[절충장군]] 행[[용양위]][[부호군]]으로 전임되었다.
         [[허목]]과 [[윤휴]]가 계속 그의 석방을 청하는 탄원서와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묵살당하였다. [[1663년]] [[홍문관]][[수찬]] [[홍우원]](洪宇遠)이 또 상소하여 종통, 적통의 주장을 하며 윤선도를 너그럽게 풀어달라고 청하나, [[조선 현종|현종]]은 이를 거절했다. [[1663년]] [[4월]] [[홍우원]]은 다시 윤선도의 석방을 탄원했으나, [[조선 현종|현종]]은 도리어 [[홍우원]]을 [[금고형]]에 처하였다. 유배지에서도 시문을 짓고, 그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명사들과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그런데 그가 유배지에서도 [[음악]]을 즐긴다는 소문이 돌자 이를 염려한 용주 [[조경]](龍洲趙絅)은 [[1664년]]초 그를 염려하며 자숙하라는 편지 서신을 보낸다. 이에 그해 [[9월]] 윤선도는 [[조경]]에게 자신의 음악론을 피력한 <답조용주별폭 答趙龍洲別幅>을 보냈다. 한편 [[윤휴]]와 [[허목]]은 계속해서 윤선도를 석방할 것을 청원하는 탄원서를 계속 조정에 올렸다. [[1665년]] 다시 가뭄으로 흉년이 계속되자 배소를 옮겨 [[전라남도]] [[광양시|광양]](光陽)으로 이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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