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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상하
         그는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호락논변(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당쟁기 이후 사회적으로 학문과 독서를 하는 분위기를 만들려 노력했다. 그는 [[조광조]]와 [[백인걸]]을 거쳐 [[이이]](李珥)와 [[성혼]]으로 계승된 학파와 [[송익필]]로부터 시작되는 학파에서 [[김장생]], [[김집 (1574년)|김집]]을 거쳐 송시열에게로 계승된 기호서인학파(畿湖西人學派)의 종장이었으며, [[이황]]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이]]와 [[성혼]]의 학설 중에서는 [[이이]]가 주장하는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채택하여 정론이라 선언하고 이를 지지하였다.
  • 김굉필
         [[김장생]]은 예학은 [[송익필]]에게 수학했지만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일로 학문적 연원이 김굉필을 거쳐서 김종직까지 올라가게 된다.
  • 김장생
         처음에 구봉 [[송익필]]에게 [[예학]]을 배우고 후에 율곡 [[이이]]에게 [[성리학]]을 배워 예학파 [[유교|유학]]의 거두가 되었으며, 그 뒤 우계 [[성혼]]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1578년]](선조 11년) 학행(學行)으로 천거받아 관직에 올라 창릉참봉, [[돈령부]]참봉 등을 지낸 뒤 [[순릉]][[참봉]](順陵參奉),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를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후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司圃署)·사옹원(司饔院) 봉사가 내렸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인조반정]] 이후로는 [[서인]] 산림파(산당) 영수로 공신 세력에 대항하여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송익필]]과 [[이이]], [[성혼]] 등의 제자이자 계승자로 [[기호학파]]를 형성, 확장하는데 기여하였고, 예학에 정통하였다. [[김집 (1574년)|김집]], [[송시열]] 등을 길러냈다. 사후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의정부시|의정부]]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
         [[1548년]] [[7월]] 할아버지는 지례현감 호(鎬)이고, 아버지는 [[사헌부]] [[대사헌]] 황강(黃岡) 김계휘(金繼輝)이며, 어머니는 정부인 평산신씨(平山申氏)로 [[의정부]][[우참찬]] 이간공(夷簡公) 신영(申瑛)의 딸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으로 자(字)는 희원(希元), 호는 사계(沙溪)이다. 숙부는 [[김은휘]]로 후일 아버지 [[송사련]]의 죄로 환천당할 뻔한 [[송익필]], [[송한필]] 형제의 피신을 적극 도와주기도 했다. 그 중 [[송익필]]이 훗날 그의 스승이 된다.
         할아버지 김호는 손자 김장생이 총명한 것을 보고 큰 인물이 되리라 예상하였다. 그러나 손자가 병약한 데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 것을 불쌍히 여겨, 항상 자신의 곁에 두고 밖의 스승에게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할아버지인 김호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지만 그는 공부는 멀리하였고, [[과거 시험]] 공부 역시 멀리하였다. 나중에 김장생 본인도 사계전서 4권에 실린 '왕언첩서'에서 '나는 기질(氣質)이 어리석고 둔하여 어려서부터 배움을 잃고 과거의 글공부에도 뜻이 없었다.'며 유년기를 회상했다. [[1557년]] 구봉 [[송익필]]의 문하에 들어가 글을 배우고 사서(四書), 육경(六經), 근사록(近思錄) 등을 수학하였다.
         아버지 [[김계휘]]의 친구가 [[율곡 이이]](李珥)와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이었으므로 특별히 그들을 찾아가 수학하였다. 또한 아버지 김계휘는 사암 [[박순]], [[기대승]] 등과도 친구로 지냈으므로 훗날 사계는 그들의 문인들과도 인맥을 형성하였다. [[송익필]]은 본래 서자의 후손이었지만 사람을 가리지 않던 아버지 [[김계휘]]와삼촌 [[김은휘]]는 [[송익필]]과 [[송한필]] 형제를 각별히 아끼고 친구로 사귀었다. 사계는 [[1557년]](명종 12년) 열살의 어린 나이로 [[예학]]자 구봉 [[송익필]](宋翼弼)을 찾아가 사사하였다.
         {{인용문2|나는 근사록을 구봉 송익필에게서 배웠는데, 구봉은 매우 영리하고 비범하여 글을 보면 막힘이 없었다. 남도 자기와 같은 줄 알고, 한번 읽고 지나가면 전혀 해설해 주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정신이 아득하여 배우지 아니한 것 같았다. 물러나 바르게 앉아 보고 또 본 것을 다시 보면서 몹시 애썼으며, 읽고 생각하며 읽기를 밤낮으로 계속하였더니 점점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러나 천백번 생각하여도 마침내 깨닫지 못한 것은 묻기를 청하였으니 글읽기를 나같이 부지런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1560년]] [[송익필]]로부터 사서(四書)와 《근사록 近思錄》 등을 수학하였다. 훗날 스승 [[송익필]]이 아버지 [[송사련]]이 자신의 외가를 모함한 죄로 핍박받을 때 스승을 변호한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이 김장생이었다. 김장생의 학문에 대한 열정을 직접 들은 송시열은, 다시 그의 문인들에게 자신의 스승에 대해 말했다.
         {{인용문2|일찍이 선생에게 듣기를, ‘어려서 구봉 [[송익필]]에게 가서 글을 배울 때 간장도 없이 소금으로 밥을 먹었다. 해를 넘겨 돌아오는 길에, 한 노비의 집에서 비로소 나물국이 있는 식사를 하였는데, 그 아름다운 맛을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고 하시니 선생의 각고의 학문을 가히 알 수 있다.}}
         [[송익필]]의 문하에서 수업할 때 행동이 무게가 있고 말이나 웃음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송익필]]은 그가 제자임에도 눈여겨봤고, 그를 제자임에도 함부로 대하지 않고 깍듯이 대우하였다. 김장생은 과거에 뜻을 두지는 않았으나, 학문에 대한 열의와 정성이 남달랐다. 이를 본 식자들은 장차 덕성을 갖춘 큰 인물이 될 것이라 말했다. [[1561년]](명종 16년)에 김장생은 [[지례면|지례현감]]으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김호를 따라 [[경상도]] [[지례]](知禮<ref>경상북도에 있던 지역으로 김천군에 편입되었다.</ref>)로 갔으나, 그 해 [[12월]] 지례현감으로 있던 할아버지 김호가 사망했다. 이에 김장생은 고향인 [[연산군]]으로 돌아가 아버지 [[김계휘]]와 함께 연산에서 3년 상(三年喪)을 치렀다. [[1564년]](명종 19년)에 아버지 [[김계휘]]가 복직되자 [[한성부]]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김장생은 [[이이]]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율곡 이이가 구봉 송익필에게 글을 보내 말하기를 “김장생이 와서 20여일 머물면서 조용히 학문을 강론하고 있었는데 그의 부친이 불러 돌아가게 되니 이 때로부터 상장(相長)의 이익이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했다.
         온갖 유혹과 아쉬움과 번뇌가 있었지만 청소년기의 김장생은 이를 극복하고 주색잡기의 유혹을 물리쳤다. 그 뒤 [[율곡 이이]]와 [[송익필]]의 천거로 [[경기도]] [[파주군]] [[파산]](坡山)의 에 있는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다. 성혼은 [[조광조]]의 수제자인 [[백인걸]]의 문인임에도 [[이황]]의 주리론(主理論)과 이이의 주기론(主氣論)을 종합하는 독특한 의견을 보이고 있었다. 후일 그는 '나는 율곡에게는 마음으로 기뻐하며 진실로 복종하여 항상 더 할 바가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우계에 대하여는 차등적인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계 문하인이 불평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 후에 자주 왕래하여 그 풍채와 용모[氣貌]를 살펴보고 그 의논을 들은 후에야 율곡이 도의로서 사귄 이유를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이]], [[성혼]] 등은 "남이 다른 의견을 제기할 때 자기만 옳다고 하지 않는 것은 어렵다. 더구나 이는 재주가 뛰어나고 학력이 풍부한 사람으로서는 갖기 어려운 덕목"이라며 김장생을 높이 평가했다. 스승 구봉 [[송익필]]은 김장생의 이런 점을 "매우 아름답고 아름답다"고 칭찬했다. 그 뒤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 연구와 학습에 몰두하다가 [[1575년]](선조 8년) 아버지 [[김계휘]]를 따라 관서지방을 유람하다 [[평양]]에 갔었는데 언제나 조행이 방정하여 세인의 칭송을 받았다.
         13세부터 송익필의 문하에서 그리고 20세부터 [[이율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지만, 과거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학문은 이미 당대 유학계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스승인 [[송익필]], [[이이]], [[성혼]] 등은 [[과거 제도|과거 시험]]을 보라고 여러번 권고하였다. 그러나 스승들의 권고에 답하면서도 [[과거 제도|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다.
         이후 [[1584년]](선조 17년) 3년상을 마치기 직전에 기복(3년상을 마치기 전에 왕명으로 관직을 내림)되어 [[순릉]][[참봉]](順陵參奉)이 되었다가 얼마 뒤 병으로 사퇴하였으나, [[평시서]]봉사(平市署奉事)로 승진했다. 그러나 관직에서 물러나 다시 스승 [[송익필]]의 문하와 [[성혼]]의 문하를 출입하며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후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 등을 내렸다. [[사향원]][[봉사]], [[통례원]][[인의]]를 역임했다.
         아버지 김계휘가 사망하자 그는 3년상을 치루었다. 김장생은 상례(喪禮)와 제례(祭禮)를 한결같이 가례(家禮)대로 하고, 아울러 초막을 짓고 살면서 무덤을 지키며 [[시묘살이]]를 냈다. 다음해 김장생은 송익필에게 편지 써서 상중(喪中) 복제(服制)에 대해 의논했다. 예학 중 가장 중요한 복제문제에 대한 의견은 스승인 [[송익필]], [[성혼]]에게 묻고는 그대로 3년상을 마쳤다. 김장생은 죽은 지 1년만에 지내는 제사(소상(小祥)) 이후부터, 죽은 지 2년 뒤에 제사 지내는 대상(大祥)을 치른 그 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담제(禫祭))때 입는 상제의 옷[練服]에 대해 물었다. 송익필이 답하기를 “전후 두 차례의 서신이 정의(情誼)와 예의(禮意)가 극진하니 예학(禮學)에 진보가 있음에 깊이 탄복하였다”고 했다. 김장생의 예학적 지식을 칭송하는 대목인데, 바로 그 해 김장생은 '[[상례비요]](喪禮備要)'를 완성했다.
         [[1584년]](선조 17년) 스승 율곡 [[이이]]의 상을 접하였다. 이 때 김장생은 아버지의 3년상으로 시묘살이 중이었으나 스승에 대한 예를 다하였고, 그 뒤로도 율곡 [[이이]]의 기일(忌日)에는 목욕재계하고 소복을 입었다. 또한 [[율곡 이이]]의 자손에게도 친가족과 같이 대우하는 정성을 보였다. 이러한 정성은 [[송익필]]의 상을 당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1586년]](선조 19년)에는 부인 조씨가 병사하였다. 그는 김수언(金秀彦)의 딸인 순천 김씨를 둘째 부인으로 맞이하였다.
         [[1598년]](선조 31) 군자감 첨정, 호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고, 그해 가을에 근사록해의(近思錄解疑) 1권을 저술했다. 그해 스승 성혼이 죽었을 때 조문하였고, 스승이었던 구봉 송익필이 죽었을 때에는 장제(葬祭)하는 절차와 모든 일을 몸소 관장하여 정성을 다하였다.
         그는 오히려 반정 공신들에게 새 임금을 잘 보필할 것을 부탁했다. 반정 공신들에게 '군의 덕을 도와서 잘 인도하고..... 조정을 잘 보전하며....' 라는 글을 보내고 또한 [[중종 반정]] 직후의 반정 3공신의 권력남용의 과오를 밟지 말도록 충고하면서 “인심이 흡족한 뒤라야 가히 뒷날에 할 말이 있고 선생과 친구를 배반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했다. 이는 정치가 나가야 할 기본방향을 제시한 것이었는데, 임금과 공신이 모두 탄복했다 한다. 또 경연에서 임금의 위로 말씀이 간절하므로 차문(箚文)을 올려 제왕의 학문하는 길을 아뢰는 소를 올렸다. 인조 즉위 직후 상소를 올려 자신의 스승의 한사람이자 서얼출신인 [[송익필]]이 그의 아버지 [[송사련]](宋祀連)이 [[안당]] 일가를 무고한 일로 환천(還賤)된 것에 대한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송익필]]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서성(徐渻), 정엽(鄭曄) 등과 신변사원소(伸辨師寃疏)를 올렸다.
         동서의 공방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인의 사주를 받은 안씨 일가에서 그의 스승 중 한 사람인 [[송익필]]의 신분을 들어 환천(還賤)시켜 줄 것을 제소했다. 이로써 1586년(선조19) 마침내 그와 그 형제를 비롯해 일족 70여 인이 환천되었다. 이후 [[송익필]]은 김장생의 삼촌 [[김은휘]]가 숨겨주었다가 김장생․정철․이산해의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냈다. 김장생은 불운했던 그의 스승 송익필을 정성껏 주선하여 집에서 쉬게 하고 정성을 다해 봉양했으며, 죽자 장례의 절차까지 맡아 해 주었다. 또한 [[이이]], [[성혼]]이 죽었을 때에도 3년간 상복을 입고 그들의 기일이면 목욕재계하고 경건하게 보냈다.
  • 김효원
         * [[송익필]]
  • 박지일 (1960년)
         * [[2015년]]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드라마)|징비록]]》 - [[송익필]] 역
  • 박지일(배우)
         * [[2015년]]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 (드라마)|징비록]]》 - [[송익필]] 역
  • 서성 (1558년)
         '''서성'''(徐渻, [[1558년]] ∼ [[1631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현기(玄紀), 호는 약봉(藥峯), 본관은 [[대구 서씨|대구]](大丘)이다. [[이이]], [[송익필]]의 문인이다.<ref name="gwe">u.a.(n.d.)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인명사전/한 국 인 명/ㅅ#서 성|《서 성》]].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 2017년 9월 15일 확인함.</ref>
         경상북도 안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함재 서해는 퇴계 [[이황]]의 문인이었으나 그는 [[이이]]·[[송익필]]의 제자가 되어 [[서인]]이 된다. 생후 1년만에 아버지 서해를 [[한성부]]로 상경, 중부인 서엄의 집에서 생활하였다.
         숙부 서엄에게서 글을 배우다가 뒤에 [[이이]], [[송익필]]의 문하생이 되어 글을 배웠다. 그 뒤 [[조선 선조|선조]]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피란시켰으며 그 후, [[암행어사]]·경기도 관찰사·판중추 부사 등을 지냈다. [[1608년]]에는 [[조선 선조|선조]]의 임종 당시 유교 7신의 한 사람으로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기도 했다. [[광해군]] 때 [[계축옥사]]에 연관되어 11년간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되었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에 왕을 피란시켰다. 그는 [[이인기]]·[[이귀]] 등과 남지 기로회를 조직하여 역학을 토론했으며, 서화에도 능하였다. 저서로 《약봉집》이 있다.<ref name="gwe" />
  • 성혼
         [[이황]]의 이기이원론과 [[이이]]의 이기일원론의 절충을 취하였으며, 학문 연구를 하다 생애 후반에는 관직에 투신하여 [[찬성]](讚成)에 이르렀고, [[서인]]의 당수로 활동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해군|광해 세자]]를 모시었고, [[1594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에 임명되어 취임했다. 그해에 [[좌찬성]]으로 승진했고 [[비변사]] 회의에 참여하여 시무 12조를 올렸다. [[1594년]] 좌참찬으로 있을 때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주화론을 주장한 일이 문제되어 매국노로 낙인찍혀 정계에서 은퇴한다. 율곡 [[이이]], 송강 [[정철]], 구봉 [[송익필]]과 친분이 깊었다. [[조헌]], [[김덕령]], [[정철]], [[윤황]], 황신, [[이귀]], [[김자점]] 등이 그의 문하생이다. 아버지 [[성수침]]과 휴암 [[백인걸]]의 문인.
         동시대인이자 친구인 [[율곡 이이]]는 그를 평하기를 "우계는 학문에 힘쓰는 착실한 선비이다"라고 평했고, 자신과 비교함에 있어서는 "재주는 소신이 우계보다 좀 나으나 수신과 학문의 힘씀에 있어서는 우계에 미치지 못하다"라고 하였다. 작품성에 있어서 청명 임창순은 "송익필의 초서는 기운이 넘쳐흐르고, 이이는 재기발랄하며, 성혼은 아버지 청송 성수침의 글씨를 이어받아 온화하면서 힘이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 [[송익필]]
  • 송준길
         한성부 정릉동에서 세 살 때 회덕 송촌으로 아버지 따라 내려왔다. 아버지 송이창은 관직이 군수에 이르렀지만, 학자로서 처음에 [[신응시]], [[김계휘]]에게서 [[성리학]]을 배우고 다시 [[이이]], [[송익필]], [[서기]]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회덕 송촌으로 이주한 뒤 김장생, 송갑조, 이시직<ref>이시직은 이석형의 6대손으로 조호익, 김장생의 문인이다.</ref> 등과 시주를 즐기는 등 교류하며 여생을 보냈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김은휘(金殷輝)의 딸로, 김은휘는 노비로 환천될 뻔한 [[송익필]], [[송한필]] 형제의 일가족을 보살피기도 했었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사계 [[김장생]]과 사촌 남매간이며 외조부 [[김은휘]]는 [[김계휘]]의 동생으로, 김계휘는 [[서인]]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 김은휘는 광해군이 세자로서 동궁에 거처하게 되자 세자빈의 아버지인 류자신(柳自新)이 궁중의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은휘는 그의 무례함을 논책하면서 왕봉(王鳳 : 한나라 성제의 외삼촌으로 정권을 잡아서 무례한 행동으로 임금의 거처인 궁정을 빌린 일이 있었다)의 고사에 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피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익필이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론의 증오를 받아 멸문의 궁지에 몰리자 10년 동안이나 먹여 살려 선조의 잘못으로 누를 입는 현량(賢良)들을 그늘에서 구원하였다.
         9세에 아버지 [[송이창]]의 지도를 받아 [[성리학]]에 입문하고 공자, 주자, 율곡의 학문을 공부하였다. 그가 11세가 되던 해에 송이창의 외사촌 아우인 [[송갑조]]의 아들 [[송시열]]이 송이창의 문하가 되어 한 집에서 동문수학하였다. 어려서부터 [[이이]]를 사숙(私淑)하였고, 18세 때 송시열과 함께 이이, [[성혼]], [[송익필]]의 문인인 사계 [[김장생]]의 문하생이 되었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고 글재주가 있었으며 사람을 매혹시키는 재주 등을 두루 갖췄으므로 스승 김장생은 일찍이 그가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하였다.
  • 윤흔
         * [[송익필]]
  • 정난정
         * [[송익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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