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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중
         진산 파동이 수습되고 1971년 [[5월 25일]] [[대한민국 8대 총선|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차 일본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위해 도쿄에 체류하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측근인 [[송원영]]의 설득으로 [[미국]] 망명을 결심한다. 유신 선포 직후 김대중은 [[고노 겐소]]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정치인들과 회견을 갖고 일본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를 비판했으며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주장하는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정력적인 반 유신 투쟁을 벌인다. 1973년 [[하와이 섬|하와이]]를 경유하여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대중은 [[조윤형]], [[김상현 (1935년)|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게 된다.<ref name="손세일"/> 3월 25일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 사회에서 강연 및 반정부 시위 활동을 벌인다. 초대 서울시장 [[김상돈]], [[미주민주국민회의]] 의장 [[임창영]], 전 [[한국신학대학교|한국신학대학장]] [[김재준]], 예비역 해군제독 [[이용운]] 등 교포 사회에서 활동중인 여러 지식인, 예비역 장성들과 뜻을 모은 김대중은 7월 6일 워싱턴에서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초대의장에 추대된다. 7월 10일엔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위해 일본에 입국, 비록 8월 8일에 납치되긴 했으나 15일 결성된 한민통 일본지부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교포를 규합하며 유신 반대 민주화 운동을 벌이게 된다.<ref>《전후일본외교사》, 이리에 미치마사, 1983년</ref><ref>[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96686 [81회] 한민통 발족위해 동분서주] 후광 김대중 평전</ref>
  • 장면
         [[민족일보]]는 [[2월 8일]]에 체결된 [[한미경제원조협정]]이 [[2월 28일]] 국회에 통과되기까지 7회에 걸쳐 사설을 통해 집중타를 가하였다. 비판이 격렬하자 장면은 민족일보가 정권을 무너뜨린다고 생각했다.<ref name="도각공세1">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60년대편 1》 (인물과사상사, 2006) 254페이지</ref> 장면의 공보 비서였던 [[송원영 (1928년)|송원영]]은 회고록에서 민족일보는 창간 직후부터 계속 도각(倒閣) 공세를 폈다고 회고했다.<ref name="도각공세1"/>
         [[1961년]] [[2월]] 말 [[대한민국 국무원|국무원]] 사무처에서 장면 정권에 대한 비난을 계속하던 민족일보에 대한 인쇄중단을 지시했다. 이는 연일 장면 정부를 비난하는 논설을 내보내자 공보 비서 송원영을 보내서 기사를 빼달라고 사정하기도 했으나 호응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민족일보는 곧 [[장면 정권|제2공화국]]의 언론 탄압이라며 다시 공세를 퍼부었다.
         장면은 기자회견을 주 1회로 정례화했다. [[국무총리실]] [[공보]][[비서관]] [[송원영]]에 따르면, 장면의 주례 기자회견은 20여 평 되는 작은 방에서 열렸기 때문에 기자들이 내뿜는 담배연기가 장면의 얼굴에 사정없이 밀려오기도 했다.<ref name="ReferenceA"/> 이를 보다못한 비서관들이 기자들에게 아버지도 없느냐고 따로 불러서 주의를 주기도 했다. 그런데 장면은 [[흡연]]은 개인의 취향인데 그것을 왜 그대가 혼내느냐며 오히려 비서관들을 책망하였다.
         봉두완은 그를 ‘청렴함’과 ‘온화함’의 상징으로 평가하였다.<ref name="봉두완2">봉두완, 《앵커맨》 (랜덤하우스코리아, 2009) 97페이지</ref> 바티칸 특시 당시 지원과 협력을 얻어낸 것에 대해 “지원자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것은 장면의 인품과 신앙의 힘이 음양으로 작용한 것”이라고 보았다.<ref name="봉두완2"/>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낸 이원교와 장면의 측근이었던 [[송원영 (1928년)|송원영]]은 “장면 박사야 말로 이 나라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속죄양이었다”라고 평가하였다.
         * [[송원영 (1928년)|송원영]]
         * [[송원영 (1928년)|송원영]], 《제2공화국:송원영의 정치체험》 (샘터, 1990)
         * [[송원영 (1928년)|송원영]], 《내일을 위한 대화》 (한국정경사,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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