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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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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화용 . . . . 25회 일치
         우여곡절 끝에 고향팀인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게 됐지만 주전 자리에는 K리그의 레전드인 '''[[김병지]]'''가 버티고 있었고 포항 유스 출신으로 기대받던 송동진, 1년 전 이미 입단해서 청소년 대표에서 뛰고 있던 '''[[정성룡]]'''까지 있어서 김병지의 백업 자리를 두고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2005 시즌이 끝나고 송동진은 군 입대, 김병지가 이적하면서 신화용은 정성룡과 주전 경쟁을 하게 된다. 2006년에는 정성룡이, 2007년에는 신화용이 더 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2007년 플레이오프부터 정성룡의 독무대가 또다시 펼쳐지며 정성룡에게 주목을 받게 된다.
         2008년 정성룡이 성남으로 갔지만 같은 해 김지혁이 이적해오면서 리그 경기 대부분을 김지혁에게 내줬지만 ACL에서만큼은 6경기 전경기에 출전했다. 그러다가. 2009년 초부터 김지혁을 밀어내고 신화용의 독무대가 시작되었다. [[K리그]]는 물론[[AFC 챔피언스 리그]] 에서 선방쇼를 보여주며 포항 팬 한정으로 골머리를 앓던 수비[* 이 때 포항의 주력 수비수가 [[황재원]], 김형일. 타 팀 팬들은 군침 흘리며 탐을 냈지만 매주 포항의 경기를 지켜보는 포항 팬들은 가끔씩 벌이는 정줄 놓는 수비에 그냥 뒷목만 잡았다.]문제를 혼자서 다 커버했다. 2009년 포항은 플레이오프에서 성남에게 패배하여 리그 3위로 시즌을 마쳤지만 이러한 선방쇼 덕에 신화용은 다른 쟁쟁한 골키퍼들을 제치고 처음으로 '''시즌 베스트 11에 뽑힌다.'''[* 당시 경쟁자들이 모두 실점률 1점대를 찍을 때 홀로 0점대(0.95) 실점률을 기록했다.]
         '''[[김승대]]가 [[연변 FC]]로 20억에 팔리면서''' 여기서 생긴 돈으로 결국 신화용, 황지수, 손준호 핵심 3인방은 다시 잡는데 성공했다. 매시즌 1~2월까지 거취문제로 포항팬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것에 비하면 12월 중순이 지나가기도 전에 재계약 기사가 떴고, 덤으로 배슬기, 김원일, 김광석 센터백 3인방도 그대로 포항에 남으면서 적어도 16시즌 수비만큼은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 계약은 2년 계약이라 최소 2017년까지 포항에 잔류하게 되었다. 신화용 본인말로는 비싼 연봉을 부른 팀이 있었지만 '가족'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http://sports.media.daum.net/sports/soccer/newsview?newsId=20151224152139569|###]] ~~포항밖에 모르는 바보~~[* 다만 포항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해주고 있는 것이 15시즌이 끝나고 공개된 연봉공개에서 신화용은 국내선수 중 4위. 6억 3천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키퍼 포지션에서 신화용보다 연봉이 높은 선수는 수원에서 7억 넘게 받은 정성룡 뿐이며 선수단 연봉 총액이 70억 내외인 포항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는 편이다. 그만큼 포항 프런트도 긴축재정으로 구단 예산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신화용 만큼은 반드시 잡고 간다는 반증인셈.][* 다만, 기본급은 정성룡보다 한참 낮은것이 맞다. 연맹에서 발표하는 연봉공개 내역은 기타 수당을 다 합친 금액을 발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15시즌 전경기 출장+17경기 클린시트 보너스를 합친 신화용의 연봉은 이러저러해서 시즌을 절반가량 날려먹은 정성룡과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다.]
         이 정도 실력이면 충분히 국가 대표 팀에 선발될 만도 한데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국대에 뽑히질 못하고 있다. 2012~2013 시즌에는 [[정성룡]]이 잘했고 정성룡이 부진한 2014 시즌에도 백업으로 [[김승규]], [[이범영]] 라인이 굳건하여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다. [[슈틸리케호]] 체제에선 기존 김승규에 [[김진현(축구선수)|김진현]]이 부각되면서 역시 뽑히지 못하고 있다.
         국내 리그 활약상은 국대 주전 골리 [[정성룡]]과 [[김승규]]에게 밀릴 게 없지만 기량 차이가 월등하지 않는 이상 변화를 잘 주지 않는 골키퍼 포지션의 특성 때문에 김진현, [[김승규]] 경쟁구도에 경험많은 [[정성룡]]이 후배들을 받쳐주는 형태가 구축된 대표팀 골키퍼 라인업에서 신화용의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김승규가 나오지 못한 2014년 9월 A매치에서 조차 김진현과 [[이범영]]에 밀려 국대 승선에 실패했다.
         키가 큰 골키퍼를 선호하는 김봉수 코치 때문에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저 소문일 뿐이다. 김봉수 코치는 오히려 김병지, 이운재, 카시야스를 거론하며 골키퍼는 키보다 경기 운영능력, 판단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http://www.sportnest.kr/1564|관련 기사]] 정성룡 때문에 덩달아 미운 털이 박혀서 본인이 한 말과 정반대의 말이 퍼져 인터넷에서 공연히 욕을 먹고 있다.[* 덧붙여 굳이 김봉수의 양아들을 찾자면 정성룡이 아니라 A매치 달랑 1경기 뛰어본 이범영이다. 유소년 시절부터 가르친 선수로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4강 UAE전에서 한국에서 패널티킥 방어가 가장 뛰어난 김승규를 빼고 승부차기 대비용으로 넣을 정도로 신뢰를 보였다. 정성룡은 부진할 때 코치로서 변호해준 게 다인데 어쩌다 보니 양아버지란 낙인이 찍혔다.] 신화용이 뽑히지 못한 건 잘한다고 무한정 돌려 쓸 수 없는 골키퍼 포지션의 특수성 때문이지 다른게 아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 최악의 경기인 2015 K리그 클래식 홈 개막전 울산과의 경기를 슈틸리케 감독이 보도진 몰래 [[포항 스틸야드]]에 암행정찰을 왔다. --왜 잘 할 때는 안 오고-- 이 날 모습을 생각한다면 국대와의 거리가 더욱 멀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신화용 >>>>>> 정성룡을 외치던 K리그 팬들을 입 다물게 한 반면에, 오히려 K리그까들로부터 '''정성룡이랑 뭐가 다르냐, 정성룡보다 더 못하다'''라는 평가를 받으며 조롱받고 있는 중. 기량이 제대로 폭발한 이후로 실수가 상당히 줄어든 키퍼인데 역대급 실수를 엄청나게 보여주면서[* 그것도 공중파 전국 생중계였다. [[KBS]]가 올 시즌부터 K리그 클래식을 전격 중계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 --아니, 왜 잘할 때는 중계를 안 해주고-- 참고로 KBS의 K리그 클래식 전격 중계는 [[이영표]]가 해설위원이 되면서 내건 조건으로 KBS는 이를 받아들였다라고만 서술하면 이영표 해설위원 혼자서 다 한 거 같게 느껴지는데 사실 정확하게 말하면 프로축구연맹에서 따낸 계약 조건이라고 보는게 정확하다. 이영표 해설위원이 아무것도 안한 건 아니지만 엄밀히 말하면 프로축구연맹>>>이영표의 기여도 차이가 있는 일이다.] 엄청 평가가 떨어졌다. 다만 이 경기를 관람한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에서는 언제든 실수가 나올 수 있다.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실수였고, 선수들은 이런 실수가 나오는 데 대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했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a_match&ctg=news&mod=read&office_id=343&article_id=0000047475|관련기사 1]],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108&article_id=0002396186|관련기사 2]]
         김진현이 2015 시즌 중반 부상으로 아웃되면서 기회가 오나 싶었지만 이번엔 역시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던 [[권순태]]에게 기회가 돌아가며 뽑히지 못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골키퍼 3명 중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줄 한 명을 제외하면 젊은 선수 위주로 선발하고, 한 살 아래 권순태도 나이 때문에 김승규, 김진현에게 밀리는 상황이라 신화용의 대표팀 발탁은 요원해보인다. ~~무슨 지옥같은 스페인 국대 골키퍼 경쟁인줄~~[* 김승규, 김진현, 정성룡에 권순태와 이범영. 올림픽 대표팀에서 기대받고 있는 구성윤과 김동준, 이창근에 청대 출신 골키퍼 조현우(구성윤은 2015년 동아시안컵 때 백업으로나마 성인 대표팀에 뽑혔고 김동준은 예비 명단에 들었던 바 있다. 조현우도 예비명단에는 올랐었다.)까지 포함하면 유래없는 골키퍼 풍년이다. 게다가 이 선수들 2016년 기준으로 전부 한창 나이다. 거기에 리그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중인 이호승과 윤보상, 가장 포텐이 기대가 되는 [[김로만]]과 전종혁 등등 K리그 역사상 최대의 인재풀이 가동되어 있다.] 하지만 ACL 우라와전을 비롯하여 슈틸리케 감독이 꾸준히 포항 경기를 찾아오고 있는 것을 보면 [[손준호]]와 더불어 국대 발탁 희망이 아주 없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조금이라도 있다고는 말 못한다.~~
         본인이 뛰어난 실력을 가짐에도 불구하고 국대 키퍼들 때문에 국대 자리에 못 올리는 것처럼, 포항의 서브 키퍼들도 전부 연령별 대표팀이라던가 한 실력들 하는 후배들임에도(...) 신화용의 벽에 막혀서 전부 빛을 못 보고 있는데 본인은 오히려 이에 대해 미안해하기보다 '''"나는 후배들이라고 긴장을 푼 적이 한 번도 없다. 후배들이 잘해서 넘어야 한다."'''한다고 단칼에 자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화용 본인이 [[김병지]], [[정성룡]] 밑에서 구르고 구르며 지금의 자리를 차지한 만큼 후배들에게도 엄격한 모습을 보이는데 포항의 차세대 수문장으로 손꼽히는 [[김로만]]에 대한 평가도 신화용의 반응은 귀여운 후배가 아닌 10년 아래의 신인 선수임에도 '''"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포지션의 경쟁자"''''라고 칭할 정도. 그러다 보니 신화용에 막혀 이미 팀을 떠난 황교충, 김다솔을 비롯하여, 이준희는 결국 경남 FC로 2016 시즌 임대를 가서 주전 자리를 먹고 있고, 포항에 남은 [[김진영]], [[강현무]], [[김로만]]은 말 그대로 속이 타들어가다 신화용이 2017 시즌 이적함으로서 겨우 숨통이 트이게 되었다(...).[* 사실 포항의 키퍼 라인은 지금까지 무혈입성한 선수가 거의 없다. 유일한 예외가 김병지뿐인데 포항 이적 당시 김병지는 이미 국대 주전이었기 때문에 무혈입성이 가능했던 거지 당장 그 후임이었던 정성룡도 신화용과 로테이션을 돌며 주전 경쟁을 해야했으며 신화용도 정성룡이 떠난 뒤에 김지혁과 로테이션을 돌며 주전 경쟁을 해야했다. 어떻게 보면 신화용은 포항의 팀 문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셈. 그런 이유에서인지 포항은 김병지 이후 정성룡, 신화용, 강현무를 거치는 동안 주전 백업 가리지 않고 골키퍼로 문제를 겪은 적이 없을 정도로 K리그 최고의 골리진을 유지하게 되었다. ~~문제는 수비~~] ~~그리고 그 자리를 무혈입성(...)한 것은 [[노동건]]...~~ --노동건이 결장한 사이 [[강현무]]가 인생경기를 펼치며 신화용의 장기집권이 얼마나 어마무시했는지 증명했다.--
         K리그 클래식 주전 골키퍼 중에서도 수준급의 기량을 선보이며, 특히 수비 리딩은 정상급이다.[* 덕분에 2017시즌의 수원 수비가 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반사신경, 상황판단력등이 모두 평균이상이라 안정성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과감히 수비라인을 전진시키며 전진압박을 유도하는 과감성을 갖추고 있다.[* 실제로 신화용이 골리였을 때인 2017년과,정성룡,양형모,노동건이 골키퍼였을때의 수비 라인 유동성이 크게 다르다.] 경기 중 말이 상당히 많은 편인데, 이를 통해 작전이 쉽게 전달되지만 상대 공격진에게 간파당할수 있는 위험성 역시 갖추고 있다. 거기에 골리치고는 단신에 속하는 신장인지라 공중볼 처리에 약점이 있으며, 역시 프리킥 상황에서도 안정성이 급격히 떨어지는 편이다. 그러나 이 작은 몸 탓인지 날렵한 편이라 반사신경과 더불어 슈퍼세이브를 많이 만들어내는 골리이다.
  • 정성룡(야구선수) . . . . 11회 일치
         ||<:> '''이름''' || 정성룡(鄭成龍 /Sung-Ryong Jung) ||
         || [[박영진(야구)|박영진]](1982~1983) || → || '''정성룡(1984)''' || → || [[이해창(1953)|이해창]](1985~1986) ||
         || || → || '''정성룡(1985~1986)''' || → || [[손상득]](1987~1988) ||
         || [[박찬(1955)|박찬]](1982~1985) || → || '''정성룡(1987~1988)''' || → || 이규창(1990~1993) ||
         || [[장효조]](1983~1988) || → || '''정성룡(1989~1992)''' || → || [[양준혁]](1993~1998) ||
         || [[박노준]](1992~1993) || → || '''정성룡(1993~1995)''' || → || [[장성호]](1996) ||
         [[삼성 라이온즈]]와 [[해태 타이거즈]]에서 뛰었던 야구선수. ~~골키퍼 [[정성룡]]과 이름이 같다.[* '''한자까지''' 똑같다., 심지어 출신고교도 같다!]~~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재학 시절 김성범[* 1982년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류명선]], 염창무, [[정윤수]], 최해명 등의 동기들과 팀의 첫 전국대회 진출을 이끌었지만 전국대회에서 준우승만 3번 하는 데 그쳤다. 이들 중 정성룡은 '''제2의 [[장효조]]'''라 불릴 정도로 타격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당시 매서운 타격으로 정평난 포철공고 타선의 선두에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교 졸업 후 삼성에 1차 지명되어, 바로 프로에 입단했다. 이로 인해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고졸신인 3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다른 두 명은 해태의 [[문희수]]와 롯데의 [[조용호]]. 84년 이들이 지명되기 전까지 신인드래프트에서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가 지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쟁쟁한 선배들이 자리 잡은 상태였기에 결국 백업이나 2군[* 당시 [[KBO 퓨처스리그|2군 리그]]가 있기 전이었지만 삼성에서는 이미 2군을 운용하고 있었다.]을 전전해야 했다. [[장효조]]가 1989년 롯데로 이적한 후 그의 10번을 물려받을 정도로 여전히 기대받는 유망주였으나, 그동안 정성룡은 오랜 2군 생활 속에 제2의 장효조가 아닌 제2의 [[정동진]]이라 불릴 정도로 살이 쪘다.
         김응용 감독은 정성룡의 스윙을 보고 "저 스윙으로 3할을 못 치는 건 말이 안 된다."며 큰 기대를 했으며, 1993년 시즌에는 해태 타선의 몇 안 되는 좌타자로서 원포인트 대타나 지명타자로 쏠쏠한 활약을 하여 해태의 우승에 공헌했다. 이 해 타율은 0.246이고 홈런은 10개. 타율은 별로였지만 전반기에는 규정타석만 채우면 [[양준혁]]과 [[강기웅]] 등을 위협할정도로 3할1~2푼 수준을 유지했으나 후반기에서 까먹은 것. 홈런을 심심찮게 터뜨렸으며[* 1993년이 126경기 체제에서는 가장 적은 18명의 두자릿수 홈런 타자를 배출했다.] 경기를 승리로 이끄는 한방이 많았다. 프로 데뷔 후 최다 출장인 107경기에 출장했다. 그리하여 당시 지명타자 골든글러브도 유력했으나 [[김기태(1969)|김기태]]의 지명도에 밀려[* 팀 성적은 물론이거니와 김기태 본인의 성적이 별로였던 점을 감안하면..] 타지 못했다.
         고교 시절 그에 대한 평가를 생각해 본다면 졸업 후 바로 프로 입단한 게 독이 됐다. 만약 [[류명선]]이나 정윤수 등의 동기들처럼 대학에 진학했었더라면 1980년대 말 삼성 외야진이 세대 교체를 할 즈음에 입단해, 입단하자 마자 많은 기회를 받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위안거리라면 당시 정성룡과 같이 포철공고의 타선을 이끌었던 김성범과 염창무는 아예 프로 지명조차 받지 못했다.
  • 김홍미 . . . . 5회 일치
         향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나 바로 대과를 보지 않고,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했으며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이후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근무하였으며 형제가 옥당에 근무하여 사대부들의 부러움을 샀다. [[정여립의 난]] 관련자로 누명을 쓰고 [[기축옥사]] 때 불이익을 받았다. 당색으로는 [[동인]]이었다가, 뒤에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질 때 [[남인]]이 되었다. 남명 [[조식]](曺植),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문인이며, [[류성룡]]의 조카사위이고 [[류운룡]]의 사위이다.
         그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잘 외웠다 한다. 어려서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 가서 수학하였다. 나중에는 류성룡의 형인 운룡(雲龍)의 딸과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다.
         * [[류성룡]]
  • 김륵 . . . . 3회 일치
         그 뒤 이순신이 투옥됐을때는 [[유성룡]] 등과 함께 구명운동을 벌였다. [[정유재란]]이 종결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났다. 다시 관직에 올라 대사헌으로 시무16조를 올려 민심수습책을 제시한 뒤 1599년(선조 32)에는 형조 참판과 예조 참판을 거쳐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었는데, 이때 이순신의 공로를 조정에 아뢰며 그 집안의 조세 부담을 감면해 줄 것을 청하였다.
         * 임진왜란 종전 직후 안동에 체류하며 류성룡과 더불어 [[정몽주]]의 문집인 포은집(圃隱集)의 교열, 교정에 참여하였다.
         * [[류성룡]]
  • 김상중(배우) . . . . 3회 일치
          * 2015년 [[KBS 대하드라마]] [[징비록(드라마)|징비록]]에 주인공 [[류성룡]] 역으로 캐스팅되었는데 기사가 나오자마자 덧글에는 '그런데 말입니다'를 비롯한 그것이 알고싶다 관련 드립들이 달리고 있다. 그런 드립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이 방영 초기에는 '그것이 알고싶다'의 톤과 겹쳐서 [[디시인사이드]] 징비록 갤러리 내에서 [[호불호]]가 갈린 바 있다. 멘트의 고조가 사극의 전형을 구현하면서 자신의 장기인 조곤조곤하면서 정확한 대사전달을 능히 하고 있어 연기력 자체에 대한 불만은 아니다고 볼 것이다.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두운 세트에서 깔끔하게 슈트를 차려 입은 중년이 생각나는데 조선시대 공복을 입고 있으니 그리고 마침내 징비록 40화에서 '그런데 말입니다'가 대사로 나와버렸다! 덧붙여서, 선조의 찌질함에 열받은 네티즌들은 김상중의 훌륭했던 악역 연기에 힘입어 [[https://www.youtube.com/watch?v=qR_0MJVAnGY|선조를 대놓고]] [[https://www.youtube.com/watch?v=Q4jfZU9um2M|비난해대는 영상을]] [[https://www.youtube.com/watch?v=D9HYf8cTLk8|만들고 있다.]]
          * [[징비록(드라마)|징비록]](KBS1, 2015) - [[류성룡(징비록)|류성룡]]
  • 김효원 . . . . 3회 일치
         김효원은 [[1542년]]에 태어났다. 증조부는 상원서 직장 수현(秀賢)이며, 할아버지는 전생서 직장 덕유(德裕)이다. 아버지는 영유 [[현령]](永柔 縣令) 홍우(弘遇)이며, 어머니는 윤은좌(尹殷佐)의 딸 [[해평 윤씨]]이다. 아래로는 동생 [[김이원]] 등이 있었다. 일찍이 [[한성]]에 올라와 한성부 남부 건천동(乾川洞)에서 살았는데 이때 [[류성룡]] 등을 만나 알게 되었다.
         김효원을 지지했던 사림으로는 [[김우옹]], [[류성룡]], [[이산해]], [[정구 (1543년)|정구]], [[허엽]], [[임제]], [[이발]], [[정지연]], [[우성전]], [[정유길]]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개 [[이황]], [[조식]]의 제자들과 화담 [[서경덕]]의 문인과 손제자들이었다. 이들을 [[동인]]이라 하고, [[심의겸]], [[이이]], [[성혼]], [[윤두수]] 등을 [[서인]]이라 칭했는데 이는 당시 김효원의 집이 서울 동쪽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에 동인이라 하게 되었고, 심의겸의 집은 [[한성부]] 서쪽 정릉방에 있어 [[서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 [[류성룡]]
  • 배성룡 . . . . 3회 일치
         '''배성룡'''('''裵成龍''',[[1896년]] [[10월 28일]] [[경상북도]] [[청도군]] ~ [[1964년]] [[12월 8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언론인, 경제평론가, 정치인이다. 본관은 [[성주 배씨|성주]](星州). 필명은 수성(秀星)·성산학인(星山學人)·성산생(星山生)·성산인(星山人)·별뫼이다.
         * [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09b0550a 브리태니커 - 배성룡]
         * [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96_1_0025723&curSetPos=0&curSPos=0&isEQ=false&kristalSearchArea=P 한국역대인물 - 배성룡]
  • 남명학파 . . . . 1회 일치
         붕당이 형성되면서 이들은 처음에는 퇴계등 기타 영남학파와 함께 [[동인]]을 형성했으며, 이후 정철의 처리문제로 인해 류성룡등 퇴계파와 갈라져 북인을 형성하다. 이후 유영경등 일부 소북인사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결국 대북으로 완전히 갈라진다. 선조 말기 이들은 후계로 [[광해군]]을 지지했고, 광해군의 가장큰 지지세력으로 남았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광해군 즉위뒤 유영경등의 탁소북이 제거되고 난뒤, 그들은 청소북과 함께 광해군 시기 정국을 장악했으며, 광해군 중기때엔 아예 국정의 중심을 대북이 잡기까지 한다. 아예 광해군 말기때는 그가 대북을 견제하기 위해 서인의 세를 키운 행적까지 보일 정도였다. [* 그 보답은 인조반정으로 돌아오지만....]
  • 박주영 . . . . 1회 일치
          * 토템박, 토템풋볼 : 아스날 시절 시작된 별명이다. 신비적, 주술적 요소를 듬뿍 함유하고 있는 별명으로 박힐러, 프리스트 박 등과 그 얼개를 함께 한다.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추태로 인해 더욱 널리 알려졌다. 주로 퐈이야와 짝지어 불린다.[* 월드컵에서의 [[정성룡]]은 좀 억울한 바가 있지만.] 이들 둘은 필드에 서 있을 때는 무용지물이지만 벤치에 앉고 나서야 마치 옥침대와 같이 이로운 영향력을 은은하게 발휘한다는 취지의 별명이다.
  • 선조 . . . . 1회 일치
         조선의 인재풀의 포텐이 폭발할 때 재위에 올랐으며[* 이순신, 권율, 류성룡, 이이, 정인홍, 이덕형, 이항복, 이원익 등 '''당대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칭송받을 수 있는 인물들이 모두 이 시기 사람들이다!'''] 본인의 인재 보는 안목도 나쁘지 않았다.[* 당시 왠 하급 군관을 10계급 특진시키냐면서 말이 많았던 때도 있었는데 '''그 군관 이름이 이순신'''.] ~~그러나 본인의 인성이 문제여서...~~ '기축옥사' 같은 경우에는 다소 수단이 음습했으나, 이 때만 해도 '왕권 강화를 위한 수단'이라고 실드칠 여지는 있었다.
  • 의성군 . . . . 1회 일치
          * [[류성룡]] : [[하회마을]]에 종가가 있어서 안동 출신으로 알려진 편인데, 사실 태어난 곳은 외가가 있던 의성이다. 점곡면 사촌마을 출생.
  • 이경영(1960) . . . . 1회 일치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이성룡ㆍ李性龍 부장판사)는 25일 청소년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영화배우겸 감독 이경영(41)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1심대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160시간의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모(18)양과의 3차례 성관계 중 첫 번째 성관계를 맺을 때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은 정당한 것으로 보여 검사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157848|#]]
  • 이승현(농구선수) . . . . 1회 일치
          * 축구선수 [[정성룡]]을 닮았다.
  • 이재룡(1964) . . . . 1회 일치
         || 2004년 || KBS || [[불멸의 이순신]] || [[류성룡]] || ||
  • 인교진 . . . . 1회 일치
         * 2011년 [[서울방송|SBS]] 주말극장 《[[내일이 오면 (2011년 드라마)|내일이 오면]]》 ... 이성룡
  • 절대가련 칠드런/462화 . . . . 1회 일치
         목욕탕 카운터를 보고 있는 인물은 [[시이나 타카시]]의 전작 [[엽기열탕 카나타]]의 주인곤 카나타. 머리 위에 있는건 [[성룡도]]다. 워낙 망한 작품이라 작가 본인도 흑역사 취급에 "절대로 공식에선 그리지 않겠다"고 공언한 물건인데 왠지 카메오로 등장.
  • 주윤발 . . . . 1회 일치
         * [[성룡]]
  • 최덕희 . . . . 1회 일치
         * [[성룡의 CIA]] ([[SBS]]) - 크리스틴 ([[미셸 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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