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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곽월
         [[1546년]](명종 1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556년]](명종 1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그 뒤 권지, 승문원정자, [[1566년]] 영천군수(榮川郡守) 등을 지냈으나 4년 만에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572년]](선조 2년)에 [[선조]]의 여러차례의 간곡한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복귀하여 [[사헌부]]지평, [[1573년]] [[사헌부]]장령, [[1574년]] [[사간원]]사간 등을 지냈다.
         [[1579년]](선조 12) 수[[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사직하였다.
  • 광해군
         14대 [[선조]] 이연→'''15대 광해군 이혼'''→16대 [[인조]] 이종
         [[임진왜란]] 이전부터 대신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으며, 왜란 때에는 선조가 의주로 도망갔을 때 분조를 이끌고 평안도로 가서 병사들을 독려해서 당시 명군이나 대신들로부터 칭송받았다. 명이 몇 번 선조보고 "야 이제 슬슬 양위하지?"라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이에 선조는 자신의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몇번 양위소동까지 일으켰을 정도.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리 순탄치는 못했는데[* 정확히는 임란 이전에도 그리 순탄한 입지는 아니었다. 선조는 임란 이전에는 다른 후궁 소생인 신성군 등을 총애했다.], 우선 명은 시시각각 광해군에 세자 책봉에 딴죽을 걸었으며[* 당시 명은 황제와 관료가 후계 문제로 한참 입씨름을 했던 시기였다. 당시 만력제도 선조와 비슷하게 나이 어린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여 대신들이 반대하고 있었는데, 만약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허용할 경우 만력제가 이걸 빌미로 이용할 수 있어서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 또한 형인 임해군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 선조는 이 틈을 노려 광해군보다 거의 10살 연하인(...) 인목왕후를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새어머니가 아들보다 10살 어리다는 거다. (선조 상도둑놈 인증...)~~ 거기다가 [[김희정 (1992년)|인목왕후]]왕후가 아들인 [[영창대군]]까지 낳자, 광해군의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기까지 했으며, [[유영경]]등의 소북들(후대에 탁소북)은 대놓고 영창대군 편을 들기도... 그래도 ~~노년에 무리한~~ 선조가 영창대군이 3살일 때 죽어 결국 왕이 되는데 성공했으며 유영경과 그의 무리들은 사사된다.
  • 길안현주
         후일 다른 아들 구희경의 손자 [[구사안]]은 [[중종]]의 딸 [[효순공주]]의 남편이 되고, 구사안의 형 [[구사맹]]의 딸 [[계운궁 구씨]]는 [[선조]]의 다섯째 서자 [[정원군]]에게 출가하고, 후일 정원군의 아들 능양군 종이 인조 반정으로 즉위하면서 왕후로 추존되었다.
  • 김근행 (1610년)
         '''김근행'''(金謹行, [[1610년]] - ?)은 [[조선]] 후기의 [[역관]]이다. 자는 선회(鮮悔), 본관은 [[김해 김씨|김해]](金海)이며,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씨]]의 친정 조카이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역관 [[김득기]](金得祺)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신응수(申應秀)의 딸이며, 고모 중 한 명은 [[선조]]의 후궁인 [[순빈 김씨]]였다. 아버지 김득기는 역관으로 [[사역원]] 교회를 거쳐 당상관인 첨지(僉知)에 이르렀다.
         그의 아버지 [[김득기]]는 [[역관]]과 [[조선]]시대 외교 비사인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등재될 정도로 이름 있는 역관이었다. 아버지 김득기는 [[1592년]](선조 25)에 [[명나라]]에 청병 사신의 수행원으로 파견되어 가서 선조가 피난해 있던 평양으로 귀환하여 의주(義州)까지 왕을 호행한 공로로 호군(護軍)에 특배되었으며, [[선조]]가 [[명나라]]에 귀순할 뜻을 비치자 조정의 신하들과 함께 불가함을 힘써 간쟁하였다. 또한 조천사로 여러 차례 다녀오면서 받아오는 은화(銀貨)를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여기지 않았다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임금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아버지 [[김득기]]는 [[1604년]](선조 37) [[호성공신|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1등관에 책록되었다.
  • 김효원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의 인척으로, [[허균]]은 그의 사위이며 [[허균]]의 형 [[허봉]]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청렴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뒤 병조좌랑·[[정언]]·지평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 중 김효원은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척신계]]가 정계에서 몰락하면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574년]](선조 7년) 이조전랑으로 있던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면서 이조전랑으로 [[오건]]이 그를 추천하였으나<ref>1575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이조 전랑의 임명은 전임자의 후임자 천거로 임명되었다.</ref> 과거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강하게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척도 아니고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심의겸]]의 반대를 견뎌내고 [[이조]][[전랑]]이 되었다. 또한 그는 [[심의겸]]이 외척으로 그의 집안이 [[윤원형]]의 집안과 인척이고 가까이 왕래한 것과, [[심통원]]의 부패, 비리를 지적하며 공격하였다.
         [[1574년]] 이조전랑을 지냈고 이듬해인 [[1575년]]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沈忠謙)이 이조전랑으로 추천되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전랑의 관직은 절대로 척신의 사유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반대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이후 그는 [[심의겸]]과 [[심충겸]]을 외척이라며 비난하였고,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것과 같으므로 그의 주장이 공론으로 받아들여졌다.
         한편 [[심의겸]]과의 대립은 사림의 분열로 이어지고 점차 심해지자 우의정 [[노사신]]과 부제학 [[이이]] 등은 분쟁 완화의 조정안으로 두 사람을 한성을 떠나 외직으로 보낼 것을 선조에게 건의하여 김효원은 [[경흥부사]]로, 심의겸은 [[개성부유수]]로 전보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이 더 먼곳의 외직에 배치되었다는 [[동인 (정치)|동인]]의 반발로 그 조정안은 실패로 끝났다.<ref name=autogenerated1 /> 김효원을 지지하던 측에서는 일부러 배경이 없던 그를 더 먼곳으로 축출한 것이라 반발하여 다시 부령부사로 전보되었다. 그러나 이 역시 부령이 변방이라 하여 반발하므로 다시 [[삼척]][[부사]]로 옮기게 되었다.
  • 박근형
         * 1979년 《[[율곡과 신사임당]]》 ... [[선조]] 역
  • 박승임
         '''박승임'''(朴承任, [[1517년]] ~ [[1586년]])은 [[조선]] [[조선 명종|명종]], [[선조]] 때의 문신, 학자이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 자는 중포(重圃), 호는 소고(嘯皐)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이자 수제자였다.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이량]] 등이 제거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간 박승임은 이후 병조 참지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진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568년(선조 1) 병으로 사직,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으나 1568년 특명으로 중국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동지부사(冬至副使)에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박승임은 1570년(선조 3) 승정원 좌승지에 오른 뒤 을사사화의 거짓 공훈을 없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명종 연간의 권신들과 척신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간하였다. 이후 권신, 척신들의 비난 여론에 직면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병조 참의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571년(선조 4)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 부제학과 도승지를 지냈다.
         1574년(선조 7) 경주 부윤으로 발령되었고 이후 1577년(선조 10) 강화 부사, 1578년(선조 11) 여주 목사 등으로 부임했다.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박승임은 세금을 가벼이 하고 진휼을 실시하여 민폐를 제거하였다. 한편 [[김안국|모재 김안국]] 제향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을 건립하는 등 민생의 안정과 교화의 보급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이때 어사(御史)로 파견된 정이주(鄭以周)는 그의 치적을 조사하여 박승임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는 ‘치행제일(治行第一)’이라는 보고서를 올렸고, 선조는 박승임의 공로를 치하하여 특별히 옷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박승임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려 하자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고 한다.
         이후 박승임은 춘천 부사와 병조 참의·공조 참의 등의 요직을 거쳐 1583년(선조 16)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만년에 장남 박어와 셋째 아들 박조를 잃었다. 1585년(선조 18)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낙향한 뒤 1586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당시 나이 70세였다. 사후 경상도 영주의 [[구강서원]], 영주 향현사(鄕賢祠) 등에 배향되었다.
         박승임은 7형제 가운데 6남이었는데, 맏형 박승문은 훈도(訓導)를 지냈고, 둘째형 박승건은 생원(生員)이었다. 셋째형 인암(忍菴) 박승간은 1600년(선조 33) 박승임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과 예문관, 사간원 등 주요 관직에 올랐다. 넷째형 박승준은 진사(進士)를 지냈다. 또한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이었던 야천(冶川) 박소(朴紹)는 박승임의 6촌 형이었다.
  • 박영규(배우)
         ||<|3> MBC || [[화정]] || [[선조]] || ||
  • 백이소
         고려 때 [[박경순]](朴慶純) 일당의 난을 진압한 [[청도]] 호장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인 선략장군(宣略將軍) [[백희]](白熹)의 둘째 아들로 [[경주부]] 서면 부산촌(富山村) 출신이다. 풍채가 크고 힘이 출중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선조25) 6월 [[경주]]지역 의병장으로 경주부윤 [[윤인함]], 판관 [[박의장]]과 함께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여하였다. 노모와 아내를 산 속에 피신시킨 후 산에서 내려와 가복들을 이끌고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무찔렀다. [[1594년]]([[선조]] 27)에는 갑오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에 특제되었다.<ref>《[[부암실기]]》</ref>
         [[1597년]](선조 30)에 왜적이 재차 침입해오자 적을 공격하던 중 탄환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부상당한 몸으로 고통을 무릅쓰고 다시 출전하자 경주 판관이 만류했으나 '신하된 도리로 죽을 뿐'이라 말하며 [[영천]] [[창암]]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장 [[최봉천]](崔奉天)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ref name="dg">《[[동경잡기]]》</ref>
  • 성혼
         |군주 = [[조선 선조|조선 선조 이연]]
         서인 영수로 진사시에 합격한 후 복시(覆試)를 포기하고 학문에 전념할 뜻을 세웠다. 선조 때 여러 관직에 제수되고도 나가지 않았으나, [[이이]]의 거듭된 추천으로 출사했다. 이런 연유로 동인들로부터 서인으로 지목되어 공격을 받았다. [[심의겸]]이 몰락한 뒤 [[서인]]을 지도하였다. 그 뒤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중재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하였고, [[정여립의 난]]과 [[기축옥사]] 당시 [[최영경]], [[정개청]]을 구원하려다가 실패하면서 역으로 [[동인]]들로부터 그가 [[최영경]], [[정개청]] 등을 죽게 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세자인 광해군의 부름을 받아 그를 돕고 평양에 올라가 선조를 만났으나, 왜란 초 선조가 피난할 때 행차하는 길목에 살면서도 호종하지 않았다 하여 [[동인]] [[이홍로]]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후 죽은 후에까지 동인들과 남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윤선거]]의 외할아버지이자 [[윤증]]의 진외증조부이다.
         [[조선 명종|명종]]이 죽고 [[조선 선조|선조]]가 즉위하자 그는 인재를 초빙하는 정책을 펴, 선조 초년에 그는 학덕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현감 등을 제수받았으나 출사하지 않고, 파산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였다. 그 뒤로도 장원(掌苑), 조지서 사지, 주부, 판관, 첨정 등의 직책이 내려졌으나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을해당론 이후 [[심의겸]], [[정철]] 등을 중심으로 [[서인]]이 형성되자 그는 [[서인]]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선조 어필
         선조 즉위 후 [[이이]]가 [[선조]]에게 권하여 [[종묘]] 서령의 벼슬을 내렸으나, 병으로 등청하지 못하자 왕이 약을 보내 주었다. 1568년(선조 1년)에는 이황을 만나 사물을 담론하였다. 이때 그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였으나, 이후 절충적인 입장으로 선회한다. 그 뒤로 [[1572년]]부터 7년간 [[이이]]와 수시로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기 논쟁을 한다.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을 제수받은 것을 시작으로 계속 벼슬이 내려졌으나 모두 사양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조선 선조|선조]]가 오늘날 조정의 인재는 어떠한가 하고 묻자 그는 '몸을 용납하여 지위만 보전하려는 자가 많고 임금을 올바른 도리로 인도하는 자가 적으니, 이는 우려할 만합니다.' 하였다. 또 백성을 구제할 계책으로 '수입을 헤아려 지출을 하고 위에서 덜어 아래에 보태 주어야 하니, 이는 인심을 굳게 결속시켜 하늘에 영원한 명을 기원하는 근본이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 뒤 물러 나와 상소로 지어 다시 이 내용을 강조하였다.
         이후 그는 [[경연]]시강관으로 항상 경연에 입시하였다. 우선 불필요하게 늘어난 지역 토산물 공물부터 줄일 것을 청하였다. 공물(貢物)을 바치기 위해 지역 농민들의 생계에 해가 간다는 것과, 최우수 상품을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찍이 말하기를, '조종(祖宗)의 훌륭한 법 제도가 연산(燕山)에 의해서 온통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중에서도 공물의 진상(進上)을 중하게 늘렸던 일이 아직껏 다 개혁되지 못하고 있는데, 이를 변통하지 않는다면 좋은 정치를 이루어 나갈 수가 없을 것이다.' 하였는데, [[선조]]는 이 점을 상당히 난처하게 여겼다. 그 뒤에 인대(引對)하는 기회에 또다시 그 주장을 펼쳤었는데, 당시 [[이이]]의 뜻도 그와 합치되어 누차 이를 언급하곤 하였으나, [[동인]]의 반대로 끝내 성사되지 못하였 으므로 식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어느날 길에서 굶주려 죽은 걸인의 참상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왕명으로 도성에 있을 때 녹봉(祿俸)을 받지 않았다. [[선조]]가 이를 듣고 특별히 미두(米豆)를 하사하였는데, 그는 사양하였다. 사양을 하자, 선조는“부족한 것을 도와줄 때는 받는 것이 옛날의 도이다.”하며 받으라 하자 마지못해 받았으나, 그는 자신이 받은 곡물을 친척과 이웃 사람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 뒤 [[풍처창]]수(豐儲倉守)를 거쳐 [[전설사]]수(典設司守)가 되었다. 그러나 한직(閑職)에 있으면서도 경연관을 겸하여 항상 경연에 입시하였다. 대신이 계청(啓請)하여 품계를 높여 주고 통정대부 [[경연]][[참찬관]]을 겸하게 하였는데, 이후 한직에 몸담으면서 특별히 입시(入侍)하도록 명하였다. 그 뒤 몇 차례나 상소를 올려 물러가게 해 줄 것을 청하면서 교외에 나가 명을 기다리자, 선조는 그를 소환한 뒤 인견(引見)하여 극력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가 더욱 간절하게 퇴직을 청하자 상이 비로소 우선 돌아가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 뒤 누차 사헌부 집의와 여러 시와 사 등의 정(正)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1589년]](선조 22) 겨울 다시 이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왕으로부터 '국가에 큰 변고가 있으니, 경(卿)이 물러나 산중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밀지를 받고 조정으로 달려갔다. 그 뒤 [[기축옥사]]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이조]][[참판]]에 기용되었다. 그러나 [[동인]]을 일망타진하자는 데는 극구 반대하였다.
         이후부터 최영경의 옥사 문제로 [[정인홍]](鄭仁弘) 등 북인의 강렬한 비난을 받았다. 또한 [[정여립의 옥사]]를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라는 루머가 확산되면서 그가 뒤에서 흉모를 꾸미는 인물로 보고, [[동인]]들의 공격은 한층 강화되었다.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여 학문 연구를 하며 [[1591년]](선조 24년) 〈율곡집〉을 교열, 평정(評定)하였으며, 간행에 기여했다.
         그러나 성혼은 [[정철]]에게 [[최영경]]을 구원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ref name="jud144">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144</ref> 선조에게도 상소를 보냈지만 간절한 상소에도 선조가 평범한 격례로 답하니 성혼은 사직하고 돌아갔다.<ref name="jud145">신정일, 《지워진 이름 정여립:조선사회사총서 6》 (가람기획, 2000) 145</ref>
         [[1591년]](선조 24) [[동인]]은 [[정철]]을 실각시킨 뒤, [[정철]]의 처벌 문제를 놓고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는데 [[북인]]은 그 역시 옥사를 날조하는데 개입했다며 그를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동인]]·[[서인]]간 분쟁 조정 노력은 실패하고 만다.
         ==== 동인의 정치공세와 선조의 의심 ====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의 몽양 소식을 들었으나 쉽게 가지 못하고 파주에 머무르고 있었다.<ref name="kimsindo">좌의정 청음 김상헌(金尙憲) 찬 신도비명</ref> [[임진왜란]]을 당해 서쪽으로 피난을 떠날 때, [[선조]]의 어가가 임진(臨津)에 이르러서 성혼의 집을 찾자 [[동인]] 이홍로(李弘老)가 가까운 대안(對岸)의 자그마한 촌락을 아무렇게나 가리키면서 그의 집이라고 지목했다. 그러자 불쾌해한 [[선조]]가 "그렇다면 어찌하여 와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하며 역정을 내자 [[이홍로]]는 "이런 때를 당하여 그가 어찌 기꺼이 찾아와 뵈려고 하겠습니까." 하였다. 이 일 이후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성혼의 인격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 근거로 그가 바로 행재소로 달려오지 않고 [[광해군]]의 처소를 거쳐서 달려온 것을 근거로 들었다. [[선조]]가 일단 그런 이야기를 누차 들어오다가 성혼이 도착하자 대노하였다. [[선조]]는 그에게 하교를 하여 변란 초기의 일까지 소급해 거론하였는데 그 사지(辭旨)가 준열하고 엄하였다. 즉시 성혼을 파직해야 된다, 처벌해야 된다는 여론이 나타났다.
         환도 후 [[영의정]] [[유성룡]]과 함께 일본과 화평을 맺을 것을 주장하였다가 [[동인]] 강경파를 비롯한 일부로부터 매국노로 규탄받자 관직을 사퇴, 연안의 각산(角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이후 그는 [[유성룡]], [[이정암]](李廷馣)의 화평론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샀다.
         [[1594년]](선조 27년) 걸해소(乞骸疏)를 올리고 이후 관직을 단념하고 은둔하였다.
         그러나 그가 [[임진왜란]] 초기 왕의 피난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방에 시달렸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예궐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1598년]](선조 31년) 여름에 병이 위독해지자 먼저 아들 문준(文濬)과 제자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 소격서
         [[임진왜란]] 이후 [[선조]]가 폐지하였다. 소격서의 근거가 되는 [[도교]]가 [[노자]]를 숭상하는 이단이라는 점, 제후국인 조선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명분에 어긋난다는 점, 초제를 지내는 비용이 낭비되며, 소격서는 쓸데없는 관리라는 점 등의 이유이다.
  • 송준길
         동춘당 송준길은 1606년([[선조]] 39) [[영천시|영천]][[군수]](榮川郡守) [[송이창]]과 광산김씨의 아들로, 외가가 있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서울 정릉의 외가인 김은휘의 집(서울 대법원 청사자리)은 일찍이 사계 김장생·신독재 김집이 태어난 곳이었으므로 송준길의 출생까지를 합쳐 사람들이 이곳을 삼현대(三賢臺)라 불렀다.<ref name="daedok">{{웹 인용 |url=http://ddcc.or.kr/htm/man-059.htm |제목=송준길:대덕문화원 |확인날짜=2012-01-1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54614/http://ddcc.or.kr/htm/man-059.htm |보존날짜=2016-03-05 |깨진링크=예 }}</ref> 본관은 은진(恩津)으로 후에 자는 명보(明甫)라 하고 호를 동춘당(同春堂)이라 하였다. 같은 충남 출신으로 친척이자 친구인 [[송시열]]은 한 스승인 [[김장생]], [[김집 (1574년)|김집]]에게서 수학한 동문사이이기도 하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김은휘(金殷輝)의 딸로, 김은휘는 노비로 환천될 뻔한 [[송익필]], [[송한필]] 형제의 일가족을 보살피기도 했었다. 어머니 광산김씨는 사계 [[김장생]]과 사촌 남매간이며 외조부 [[김은휘]]는 [[김계휘]]의 동생으로, 김계휘는 [[서인]] 예학의 대가인 김장생의 아버지였다. 외할아버지 김은휘는 광해군이 세자로서 동궁에 거처하게 되자 세자빈의 아버지인 류자신(柳自新)이 궁중의 서헌(西軒)에 거처하고 있었다. 그러자 김은휘는 그의 무례함을 논책하면서 왕봉(王鳳 : 한나라 성제의 외삼촌으로 정권을 잡아서 무례한 행동으로 임금의 거처인 궁정을 빌린 일이 있었다)의 고사에 비교하니 깜짝 놀라서 피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는 송익필이 아버지인 송사련(宋祀連)의 잘못으로 세론의 증오를 받아 멸문의 궁지에 몰리자 10년 동안이나 먹여 살려 선조의 잘못으로 누를 입는 현량(賢良)들을 그늘에서 구원하였다.
         사계는 " 송준길은 자라 반드시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다."고 칭찬하였다. 조선조에서 예학의 쌍벽으로 김장생과 정경세를 꼽았다.
  • 심일운
         '''심일운'''(沈日運, [[1596년]] ~ ?년 [[5월 18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 [[명종]]~[[선조]]때의 재상인 [[심수경]](沈守慶)의 서자였다. [[심수경]]의 비첩(婢妾) 소생 서자였지만 그는 [[허통]]을 통해 [[과거 제도|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했다. [[중종]] 때의 재상인 화천부원군 [[심정]]에게는 증손자가 된다. 같은 서출인 친형 [[심일준]]은 [[1641년]](인조 18) 신사 [[과거 제도|정시문과]]에 병과 23위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 심일준
         '''심일준'''(沈日遵, [[1590년]] ~ [[1659년]] [[2월 26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명종]]~[[선조]]때의 재상인 [[심수경]](沈守慶)의 서자였다. [[심수경]]의 비첩(婢妾) 소생 서자였지만 그는 [[허통]]을 통해 [[과거 제도|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사마시와 문과에 급제했다. [[중종]] 때의 재상인 화천부원군 [[심정]]에게는 증손자가 된다. 같은 서출인 친동생 [[심일운]] 역시 [[1633년]](인조 11) [[과거 제도|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자(字)는 경행(景行), 본관은 [[풍산 심씨|풍산]](豊山)이다.
  • 심정 (1471년)
         그러나 훈구파가 몰락한 후, 다시 추탈되었다. 그만은 [[사림]]의 미움을 받아 신원되지 못하고 남곤과 함께 '곤정(袞貞)'으로 일컬어져 소인의 대표적 인물로 길이 매도되었으며, 곤쟁이 젓의 유래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손자 [[심수경]]은 연좌되지 않고 [[조선 명종|명종]]과 [[선조]] 을 지낸다. [[1910년]](융희 3년) 조선이 멸망하고 난 뒤에야 그의 저서와 작품이 간행되었다.
         심정의 장남은 중종 때, 문음(門蔭)으로, 호조정랑을 지내고, [[조선 명종|명종]] 때, 내자시 정(內資寺正)을 지낸 심사공(沈思恭)이고, 차남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翰林), 사관(史官), 사간원 정언, [[옥당]](玉堂), [[병조]]정랑, 비변사 낭관, 의정부 사인, [[암행어사]], 사헌부 집의, 홍문관 직제학, 만포진 첨절제사(정3품 [[당상관]])를 지낸 심사손이며, 삼남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호당]]을 거쳐, 승지, 홍문관 부제학을 지낸 심사순이다. 또, 심사손의 아들 [[심수경]]은 명종 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호당을 거쳐, [[선조]] 때, 팔도관찰사, [[병조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지냈다.
  • 엘디아 인
         [[유미르 프리츠]]라는 한 [[소녀]]를 [[선조]]로 하는 종족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1820년 전 과거에 시조 유미르가 [[거인]]으로 변신하는 힘을 얻어 그 힘을 바탕으로 [[마레]]라는 대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이 중심이 되는 [[엘디아 제국]]을 건설하여 1700년 간 번영했다고 한다.
  • 영창대군
         [[선조]]와 [[김희정 (1992년)]] 사이에서 태어난 [[선조]]의 적장자. '''왕실에 태어난 것이 죄였던 아이'''.
         선조가 죽기 2년 전에 태어났다.
         선조의 노욕과 일부 정치인들의 정치적 야심에 휘말려 본인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그 존재 자체만으로 광해군의 정적이 되고 말았고, 그것이 본인의 생명을 단축시키고 말았다.
         if 시나리오로, 만일 영창대군이 인조반정이 성공할 때까지 살아 남았다고 해도 역시 정치적으로 곤경에 처했을 가능성이 높다. 영창대군은 '선조의 적장자'이며, '왕실의 큰어른인 인목대비의 아들'이다. 이러한 영창대군의 지위는 고작 '선조의 서자 정원군의 손자 능양군'에 불과한 인조보다 훨씬 정통성이 강하다.
         그렇다고 인조가 순순히 어리고 세력도 없는 영창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줄 사람도 아니고, 인조 역시 선조, 광해군처럼 권력에 대한 집착이 강한 인간이다. --그러니까 쿠데타 했지.--[* 인조가 쿠데타에 가담한 데에는, 동생인 능창군이 도참 때문에 사사당하여 본인 또한 생명의 위협을 겪고 있던 부분도 한몫했다.] 인조는 '죽은 영창대군'을 광해군의 잔혹함과 패륜성을 강조하는 프로파간다로서 편리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지만, 정통성이 부족한 인조에게 강력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살아있는 영창대군'은 매우 귀찮은 애물단지에 불과하다. 거기에다 인조 시기의 대신들 간의 권력 다툼을 생각하면 여러모로 정국 불안을 증대시킬 우려 또한 높았다. (예를 들어 이괄의 난 때, 이괄이 흥안군 따위가 아닌 영창대군을 옹립하기라도 했다면...)
  • 예안 김씨
         * [[김륵]](金玏, [[1540년]]~[[1616년]]) : 14세. 자 희옥(希玉), 호 백암(栢巖). 퇴계 [[이황]] 문인. 조선 [[선조]] 때의 명신. 이조 판서 추증. 시호는 민절(敏節). [[구강서원]](龜江書院) 배향.
  • 윤소정(배우)
          * 1993년 이괄과 흥안군 ... 정혜옹주[* [[조선]] [[선조]]와 [[인빈 김씨]]의 딸] 전주 이씨 역(단역)
  • 윤휘
         윤휘는 [[1577년]](선조 11년) [[의정부]][[영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 황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용]]으로 [[증직|증]] [[좌찬성]]에 추증된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윤변]](尹忭)이다. [[윤근수]]는 그의 숙부였고, [[윤방]], [[윤흔]]은 그의 형이며, [[윤훤]]은 그의 동생이었다. 일찍이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후 [[1595년]] [[춘추관]][[기사관]], [[1596년]] [[병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다시 병조좌랑이 되었다.
         [[1603년]] [[좌부승지]], [[참찬관]]을 지냈다. 한편 [[선조]]의 특명으로 돈피 사모 이엄(獤皮紗帽耳掩) 1부(部)을 하사받기도 했다. [[1604년]] [[승지]], [[호조]][[참의]]를 거쳐 [[1605년]] [[해주]][[목사]](海州牧使), 그뒤 [[전라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로 나가 치적을 올렸다. 당색으로는 [[서인]]이었으나 [[광해군]]의 조정에 참여하였다.
  • 이지훈 (1988년)
         | [[선조]]
  • 이지훈(1988)
         || [[2016년]] || [[JTBC]] || [[마녀보감]] || [[선조]] || ||
  • 정보석
         2013년 [[문화방송|MBC]] [[주말 드라마]] [[백년의 유산]]에서 [[민효동]] 역을 연기했고, 같은 해 [[문화방송|MBC]] [[월화 드라마]] [[불의 여신 정이]]에서는 [[선조]] 역을 맡아 시청자들 기대대로 권력욕에 불타는 폭군 선조 역을 잘 연기하였다.
         || [[불의 여신 정이]] || [[선조]] || ||
  • 퇴계 이황
         1568년, 선조 1년에 [[선조]]에게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올려서 성인 군주가 될 것을 촉구하였다.
         이 같이 조정에서 처신한 것은 조정에 아직 훈구대신의 세력이 강하였으며, [[기묘사화]], [[을사사회]]처럼 과거 [[사림]]이 입었던 피해가 컷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조 즉위 초까지만 해도 [[윤원형]], [[이량]] 등은 이황을 ‘소기묘(小己卯, [[조광조]]의 아류)’로 부르면서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선조수정실록 2년 6월 1일] 신중하게 처신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황은 [[경연]]에서 명종과 선조에게 사화(士禍)가 재발되어서는 안된다는걸 간곡하게 다짐하고, 이준경 등에게는 사림을 포용하라고 부탁했다. 또한 사림 내부 단속에도 신경을 썻는데, 기대승, 박순, [[율곡 이이]] 등에게는 [[조광조]]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고 당부했다.[* 퇴계전서 ‘기명언에 답하다’ ‘박순에 답하다’] 특히 이황은 [[기묘사회]]의 중심이 된 [[조광조]]에 대하여, ‘학력미충(學力未充)’[* 배움이 부족함]임에도 함부로 나서서 화를 자초다고 비판하였다.[* 퇴계선생 언행록 중 ‘인물을 논하다(論人物)’,]
         하지만 기묘사림의 명예회복과 이를 통한 조선 사림의 도통(道統)을 확정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선조 즉위년에 [[기대승]]이 [[정몽주]]만이 아니라 [[김굉필]],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해야 한다고 발의하였으며, 이황은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을 사현(四賢)으로 하여 현창(顯彰)할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 하동부대부인
         |자녀 = 아들 [[하원군]],[[하릉군]], 하성군([[선조]]), 딸 [[이명순]]
         '''하동부대부인 정씨'''(河東府大夫人 鄭氏, [[1522년]] [[9월 23일]] - [[1567년]] [[6월 24일]])는 [[조선]] 중기의 왕족으로 [[정인지]]의 후손이며 [[조선]] 제14대 [[선조]]의 사친이자 [[덕흥대원군]]의 부인이다. [[조선 중종|중종]]의 서자 [[덕흥군]]과 가례를 올려 군부인이 되었으며, [[1567년]] 셋째 아들 [[조선 선조|선조]] 즉위 직전에 사망하였다. 사후 임금의 사가 생모로서 '''하동부부인'''으로 추증됐으나 정의상의 오류로 인해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본관은 [[하동 정씨|하동]](河東)이다.
         셋째 아들 [[조선 선조|하성군]](河城君) 균(鈞)이 [[조선 명종|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조선 선조|선조]]로 즉위하였다. 선조는 생부와 생모를 [[1569년]](선조 2)에 송(宋)나라 [[북송 영종|영종]](英宗)의 생부 [[복안의황|복왕]](濮王)을 [[추존]]하는 고사(故事)를 따라 생부 [[덕흥군]]을 추숭하여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하고, 생모 [[하동군부인]]은 하동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추존하였다.
         [[조선 명종|명종]] 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왕으로 즉위한 [[조선 선조|선조]]는 [[조선 예종|예종]]부부의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하였다가 즉위 직후 스스로를 파양하고 친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한 [[조선 성종|성종]]과는 달리 강력한 배경도 없었으며 생부 [[덕흥군]]이 후궁 소생 왕자에 불과하여 부모를 왕과 왕후로 격상할 수 없었다. 이에 절충하여 만들어진 새로운 작위가 공신 정1품의 작위로 왕비의 아버지의 작위로도 쓰여진 부원군(府院君)의 부(府)를 대(大)로 교체한 대원군(大院君)이다. [[조선 선조|선조]]는 생부 덕흥군을 조선 최초의 대원군인 [[덕흥대원군]]으로 추증하였고, 생모 군부인(郡夫人) 정씨는 외명부 소속 왕실 여성의 최고 품작인 부부인으로 추증하였다.
         {{인용문|중종 공희 대왕의 손자이며,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 이초(李岧)의 셋째 아드님이다. 어머니은 하동 부부인 정씨(河東府夫人鄭氏)로 증 영의정 정세호(鄭世虎)의 따님이다.|《조선왕조실록》선조 총서}}
         {{인용문|선묘(宣廟) 때에도 국장(國葬)이 세 차례나 있었지만 모두 궐문 안에서 곡송만 하였다고 사람들이 모두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 발인 때에는 선조께서 궐문 밖에서 곡송하려고 하였으나 예조가 아뢰어 대내의 뜰 아래에서 망곡(望哭)만 하였습니다.|《조선왕조실록》인조 12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3월 2일(을사) 1번째기사}}
         {{인용문|옛적에 우리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기사년에 덕흥군을 추승하여 덕흥 대원군으로 하였고, 부인 정씨(鄭氏)를 봉하여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하였으며, 자손이 습직(襲職)하여 계속 대군(大君)의 예에 따랐습니다.|《조선왕조실록》인조 13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7월 27일(정유) 1번째기사}}
         하동부부인이 하동부대부인으로 오인된 것은 [[조선 영조|영조]] 즉위년에 [[조선 영조|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추보를 논의할 때 예조판서 [[이진검]]이 "선조(宣祖) 때에 덕흥군(德興君)을 높여서 ‘대원군(大院君)’이라고 하였고, 군부인(群夫人)을 ‘부대부인(府大夫人)’이라고 하였다."고 잘못 진달하였기 때문인데<ref>《조선왕조실록》영조 1권, 즉위년(1724 갑진 / 청 옹정(雍正) 2년) 9월 21일(신유) 2번째기사</ref>, 사실 이는 [[이진검]]의 잘못이라기보다 [[조선 경종|경종]]2년에 부제학 이명헌이 [[조선 경종|경종]]의 사친인 [[희빈 장씨]]를 추보할 것을 상소하며 "선조조(宣祖朝)에 덕흥 대원군(德興大院君)을 추숭(追崇)하였을 때에 선정신(先正臣) 이황(李滉)의 의논을 인용하여, 빈(嬪)자 위에 특별히 하나의 대(大)자를 더하고, 이어서 본관(本貫)을 취하여 모부대빈(某府大嬪)으로 삼을 것"을 시초로 한다.<ref>《조선왕조실록》경종 9권, 2년(1722 임인 / 청 강희(康熙) 61년) 7월 17일(경자) 1번째기사</ref> 당시 동석했던 [[이진검]]이 이명헌의 말을 잘못 기억하여 영조 즉위년에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진 않으나 예조판서인 [[이진검]]이 사실을 전혀 확인하지 않고 진달하였다는 것은 무리가 있는 만큼 [[조선 경종|경종]]의 각별한 충신이었던 [[이진검]]이 부대빈(府大嬪) 작호의 유지를 위해 고의적으로 잘못 진달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로 인해 이후 정씨의 작위는 다시 본래의 작호인 하동부부인으로 정정되어 불리기도 하다가 하동부대부인·하동부인·대원군부인으로 섞여서 일컬어지기도 하였는데 이는 아들의 지위에 따라 어머니의 작호에 대(大)를 더할 수 있다는 세종14년 때의 법령과 이미 부대부인의 작호를 쓴 여성이 있었던 전례에 의거해 마땅히 부대부인으로 삼았어야 할 정씨를 부부인으로 삼은 것은 잘못되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탓으로 짐작된다.<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B%E4%BA%BA&set_id=-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6%B2%B3%E6%9D%B1%E5%BA%9C%E5%A4%A7%E5%A4%AB%E4%BA%BA&set_id=596421&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B2%B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6%9D%B1%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E5%A4%A7%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 하동부대부인], [http://sjw.history.go.kr/inspection/insp_result_s.jsp?M=0&oflag=0&set_id=596427&selK=1&selT=1&query=%E5%A4%A7%E9%99%A2%E5%90%9B%E5%A4%AB%E4%BA%BA&query_Result=&sinfo=&list_per_page=10&chkID=0&opAll=0&opP=0&opA=0&opB=0&opR=0&opT=0&opG=0&opW=0&qAll=&qP=&qA=&qB=&qR=&qT=&qG=&qW=&idS=&idE=&tc=2&pc=2&cp=1&startpos=0&pos=0 대원군부인]</ref><ref>《조선왕조실록》영조 117권, 47년(1771 신묘 / 청 건륭(乾隆) 36년) 8월 9일(정축) 1번째기사 中 "그 사체에 있어서 창빈(昌嬪)·대원군(大院君)·하동 부인(河東夫人)을 대진한 후에 어떻게 합제(合祭)할 수 있겠는가?"</ref>
         **** 삼남 : 제14대 [[조선 선조|선조대왕]](宣祖大王, 1552~1608, 재위 1567~1608)
         * [[조선 선조|선조]]
         [[분류:1522년 태어남]][[분류:1567년 죽음]][[분류:부대부인]][[분류:도정궁 주인]][[분류:운현궁]][[분류:덕흥대원군파]][[분류:하동 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 선조]]
  • 현석(배우)
         * [[1985년]] [[문화방송|MBC]]《[[조선왕조 오백년|조선왕조 500년]] - 임진왜란》 ... [[선조]] 역
  • 후예
         자신의 아들, 딸, 그 손자. 그리고 그 아래로 이어지는 모든 자녀들. 비슷한 말로, 자손(子孫), 후예(後裔) 등이 있다. 반대말을 [[조상]], [[선조]].
         * 대개 창작물의 후손은 선조와 닮았다고 묘사된다. 자신이 조상과 닮았는지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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