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선동열"을(를) 전체 찾아보기

선동열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배영수 . . . . 9회 일치
         대표적인 별명으로는 삼성 시절의 {{{#blue 푸른 피의 에이스}}},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일본전에서 30년 발언으로 비록 오해지만 한국에서 밉상으로 찍힌 [[스즈키 이치로]]에게 빈볼을 던져 얻은 '''배열사'''가 있다.[* 모바일 게임인 [[게임빌 프로야구/2011]]에서도 배영수의 이름이 배열사로 나온다. 사족으로 본인의 의사보다는 고참이였던 구대성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4/26/2010042601473.html|입김]]이 있었다고 한다.] 또 한때는 "'''초'''절정'''미'''소년'''배'''영수"에서 따온 '''CMB'''로 삼성 팬들 사이에서 불린 적도 있다. 그리고 [[슬러거]] 유저 한정으로 배[[포크]][* 이거 때문에 배영수가 정통포크를 던질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사실 배영수의 포크는 반(半)포크성으로 스플리터에 가깝다. 떨어지는 각도는 적지만 스피드는 빠른.]란 별명도 있다. 물론 못할 때에는 얄짤없이 배영구,[* 왠지 모르게 순박해 보이는 외모에 초년생때는 영구와 비슷한 까까머리를 하고 다닌 데다가 이름이 비슷하기도 해서인지 평상시에도 애칭으로 배영구라고 불리는 일도 있다.] 더 내려가면 배민폐, 패영수, 배0승으로 격하되며 심할 경우엔 '''패왕'''[* 말 그대로 '''敗'''王. 특히 1승 12패를 기록한 2009년이 절정이었다. [[선동열|이 사람]] 때문이라는 변명의 여지가 있지만... 그 때 배영수는 야구를 그만두려는 생각도 했다고 한다.]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다만 아래 이야깃거리를 읽어 보면 알겠지만 배영수의 부진 원인이 06시즌의 역투다 보니 삼성 팬들에게는 이래 저래 아픈 손가락이라 부진한 성적에 비해 옹호를 매우 많이 받았'''었'''다. 성적과 컨디션에 상관없이 '''[[참교육|영쑤]]'''라는 별명도 자주 쓰인다.
         2004년 35경기 동안 4완투(2완봉) 하면서 17승 2패 평균자책점 2.61로 다승과 승률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는 1990년 [[선동열]] 이후 14년 만에 정규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전체 투수로는 선동열 이후 배영수가 받기 전까지 1996년 [[구대성]]이 구원 투수로 정규리그 MVP에 오른적 있다.][* 이후로 2008년까지 매년 투수가 MVP를 수상하게 된다. 순서대로 [[손민한]](롯데)-[[류현진]](한화)-[[다니엘 리오스]](두산)-[[김광현]](SK)]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s-3.4|한국 시리즈 4차전]]에서 '''10이닝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였으나, 팀 타선 또한 한점도 못내는 바람에 0대0 상황에서 연장 11회초 [[권오준]]에게 마운드를 넘겨주며 해당 경기의 개인 노히트 노런 기록은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가서 시간 제한[* 2004년 당시에는 경기 시작 후 4시간을 넘기면 새 이닝을 시작할 수 없고 바로 무승부로 처리되는 ~~병맛같은~~ 규정이 있었다. 결국 [[2004년 한국시리즈]]는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무려 '''9차전'''까지 가는 등 역대 한국시리즈 중 제일 길게 간 시리즈였고, 무승부가 제일 많은 시리즈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단점으로 인해 경기 후 4시간을 넘기면 무승부로 처리되는 규정은 2004년 한 해에만 시행되고 사라졌다.]에 걸려 0:0 무승부로 끝났는데, 경기 중 권오준이 안타를 맞아 팀 노히트 노런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안습]].
         배영수는 2006년 결국 팔꿈치 통증을 호소한다. 그리고 [[선동열|선뚱]]은 그런 그를 위해 등판을 늦추거나 하다가 시즌 말미에는 불펜진에 합류시켰다. 한국시리즈에서 '''2승 1세이브 1홀드'''를 기록한 배영수(이긴경기 모두 등판)였으나, 경기 후에는 팔꿈치가 안 펴지고 경기에 나서기 전에 '''진통제'''[* 흔히 대포주사라고 알려진 '''데포메드롤'''. 이 주사는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박철순]]도 맞은 적이 있다.][* 그런데 대포주사에는 [[스테로이드]] 계열의 물질인 메틸프레드니솔론이 포함되어 있다. 아나볼릭 스테로이드로 분류되는 일반적인 약쟁이들이 즐겨찾는 계열은 아니나 소염효과가 강력해서 치료목적으로 자주 이용되던 약물이다. 하지만 염증이 자연스럽게 치유되면서 가라앉는게 아니라 부상이 그대로 남은채로 염증만 가라앉기 때문에 선수의 몸을 망가뜨린다. 그 때문에 현재는 금지되어있다.]'''주사를 맞아야''' 할 정도로 그의 팔꿈치는 심각한 상황이었다. 실제로 이미 시즌 말미인 9월부터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01&aid=0001414827|팔꿈치 통증이 심각해]] 한국시리즈 엔트리 승선 조차 불분명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자신의 팔꿈치와 삼성의 통합우승을 맞바꾼 셈... 이 때 당시의 희생으로 영구 까방권을 획득해 이후 몇 년씩 부진해도 대다수의 삼팬들은 그를 욕하지 않았다. --물론 2009시즌 부진 때 멋도모르는 뉴비들은 패왕이라고 씹어댔다.--
         수술 소식을 들은 [[박찬호]]는 배영수에게 "(재활기간)2년 생각해라"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게다가 배영수는 선천적으로 간수치가 높아 예정보다 2달 가량 늦게 [[http://foto.sportschosun.com/news/ntype2_o.htm?ut=1&name=/news/sports/200701/20070129/71912005.htm|수술]]했다. ~~하지만 [[선동열|당시 감독]]은 박찬호의 말을 무시하고 말았는데...~~
         하지만 이 후 5경기의 선발 등판에서 1번의 ND와 4번의 패전을 떠안게 되는데, 8월 11일 사직 롯데전의 3이닝 7실점을 제외하면 선발로써 최소한의 역할은 해냈지만, 유난히 배영수의 선발 등판 때 상대팀 역시 에이스를 출격시키면서 타선의 지원을 --여름삼성 치고는-- 적절히 받지 못한 것이 패를 쌓게 된 부분이기도 했다. 선동열 감독은 이후 배영수를 다시 계투로써 활용하며 컨디션 조절을 하도록 했고, 8월 22일 무등에서 열린 기아와의 원정경기에서 선발 차우찬이 3⅓이닝 만에 6사사구를 남발하며 투구수가 폭발하자 다음 투수로 구원등판해 2⅔이닝 동안 4탈삼진 무실점 투구를 하며 시즌 6승을 챙겼다. 특히 전광판에 시속 146km까지 찍히기도 했다. 진짜 잃어버린 구속 10km를 드디어 찾는 것인가...!
         ~~[[선동열|배영수 더 추해지기 전에 은퇴해야...]]~~ ~~이미 추할대로 추해졌다~~
         5월 30일 NC전에서는 초구에 선두타자 박민우에 홈런을 맞는등 5이닝 3피홈런 4실점으로 부진했으나[* 배영수가 1경기에서 3피홈런을 기록한 것은 4년여만으로 한화 오고난 2015시즌부터 처음 있는 일이다.] 타선이 2회에만 8점을 뽑아내준 덕에 승리투수가 되었다. 통산 137승으로 현역 최다승 기록을 스스로 갱신했다. 선동열의 대기록 -7.
          * [[김응용]]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 사장직에서 물러나며 한 인터뷰에서 그가 있었던 팀에서 생각나는 선수 3명을 꼽아달라는 질문에, [[선동열]], [[이종범]], 그리고 '''배영수'''를 꼽았다.
  • 강영식 . . . . 5회 일치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좌완에 키도 자신과 비슷하고 자기 구속 보다 더 빠른 150km/h대의 공을 던지며 나이도 더 젊은 [[권혁]]과 경쟁이 붙으면서 위기에 빠졌다. 이 당시 김응용의 너무 큰 총애와, 경쟁에 대한 압박감으로 늘 마운드에서 도망칠 생각만 했다고. 그 특유의 새가슴은 여기서 유래했다. 여기에서 나온 별명이 '불펜 [[선동열]]'
         투수 오타쿠 [[선동열]]이 버릴[* 강영식은 훗날 [[선동열]] 감독이 자신에게 '사람이 해선 안 될 말'까지 서슴없이 하며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강영식은 적어도 '''[[선동열]]이 있는 삼성'''에겐 미련이 없었다는 걸 볼 수 있다. 즉 [[선동열]]과 강영식 둘 다 서로 딱히 같이 동업할 이유도, 동기도 없었던 것이다.] 정도라는 삼성 팬들의 말이 있을 정도로 불안한 투구를 보였다. 어느 날인가도 ~~평소처럼~~ 마운드에서 부진한 뒤 라커룸에서 개털렸다고 한다. 강영식은 이날 털리면서 "아 나는 정말 여기까지인가보다"하는 자괴감이 들어 남들 보는 앞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 딱한 처지를 보고 코치들이 트레이드를 권유했고, 마침 좌완 [[중간계투]]가 없는 롯데와 짝이 맞으면서 트레이드 되었다. [[신명철]] 역시 롯데에서는 [[박정태]]의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공갈스윙만 하고 영 궤도에 못 오르는 2루수였기에 [[트레이드]] 시점부터 ~~둘 중 하나만 터져도 되니까~~ 윈윈으로 평가받은 특이한 사례다. 결론적으로 신명철은 [[박종호]]의 노쇠화로 인해 삼성의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2009년 [[20-20 클럽]]도 가입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고 강영식도 롯데 불펜의 일원으로 활동했으니 나름 서로 윈윈한 트레이드인 셈. 롯데에서는 [[강병철의 양아들]] 시리즈에 들면서 매우 자주 등판했다. 사실 당시 롯데에 쓸만한 좌완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 권혁 . . . . 5회 일치
         '''[[선동열|삼성 팬덤의 주적]]이 만들어낸 최악의 희생양 [[권오준|4]][[배영수|인]][[양준혁|방]]중 하나'''
         2002년 연고구단 삼성의 1차 지명을 받고 입단한 뒤 2년차였던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등판하기 시작했다. 2003년 시즌 초부터 ~~덩치좋은 좌완파이어볼러 덕후 [[김응용|코감독]]의 눈에 들어~~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몇 차례 기회를 갖다가 9월 6일 수원 현대전에서 선발 등판해 5⅓이닝 1실점으로 프로 첫 '''선발승'''을 따냈는데,[* 프로 입단 후 첫 승은 2003년 8월 16일 불펜으로 등판해 거두었는데 공교롭게도 그 때도 수원 현대전이었다.] 상대 선발투수는 '''선발 21연승 행진'''을 이어가던 [[정민태]]였다.[* 우연의 일치로 정민태와 권혁은 12년 뒤인 2015년부터 한화에서 선수-코치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2004년에는 37경기 81이닝을 소화하면서 삼성 불펜의 한 축으로 떠오르기 시작했고 그해 9월 18일 두산전에서 156km/h의 구속을 찍으며 다시 주목을 받았지만, 시즌 후 [[토미 존 서저리]]를 받으면서 2005년 시즌은 등판하지 못했다. 2006년 후반 1군에 복귀한 뒤로부터 슬슬 완성형 투수로 자리잡는데, 선발보다는 계투진에 중심을 두는 [[선동열]] 감독의 방침에 따라 철벽 불펜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됐다. 2007년 평균자책점 2.79, 7승 1패 19홀드로 중간계투요원으로 100탈삼진을 달성했다.
         덕분에 실제로도 [[선동열]] 감독도 2010 포스트시즌에 그런 그의 활약을 기대했으나...
         결국 2011년에는 평균자책점 1~2점대를 유지하는 좌완 릴리버라는 점만으로도 이래저래 팀에 유용하긴 했지만, 예전처럼 [[선동열|유일무이]]한 절대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평균자책점과 WHIP을 보면 알지만, 본인이 볼질하고 내려갔다가 [[안지만]], [[정현욱]] 같은 흠좀무한 불펜이 전부 막아준 경우가 꽤 많았다. 그렇지만 삼성이 권혁 없던 시즌 초중반에 심하게 헤매던 것을 생각하면 어쨌든 삼성에서 없어선 안되는 중요한 릴리버임은 분명했다.
         공교롭게도 그가 강속구 투수로 이름을 날리던 시절과 기량이 떨어지기 시작한 시점이 [[선동열|삼성의 본래 팀 컬러와 영 맞지 않았던 모 감독]]의 재임기와 사퇴 시기와 맞물려 있다. 이 때문인지 삼성 팬덤에서는 [[배영수]], [[권오준]] 등과 마찬가지로 2000년대 후반 삼성 투수진 혹사의 피해자 중 한 명으로 보기도 하고 있다.
  • 김시진 . . . . 4회 일치
         육군중앙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치고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입단 첫 해에 17승(14선발승으로 [[장명부]](28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그 뒤 1986년 16선발승으로 [[선동열]](17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을 올리면서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활약했는데 [[6월 15일]] 롯데전(대구)에서 완봉승을 거둔 후<ref>{{뉴스 인용
         {{s-aft | after = [[선동열]]}}
         {{s-bef | before = [[선동열]]}}
         {{s-aft | after = [[선동열]]}}
  • 김재박 . . . . 4회 일치
          * 삼성이 한창 FA영입에 열을 올리던 시절 '''삼성처럼 돈으로 우승을 사면 누가 우승 못하나'''는 발언으로 삼성팬들의 뒷목을 잡게 만든 전과가 있다. 그리고 2016년 FA와 용병의 영입으로 과감히 돈을 투자하고도 성적이 안나오는 한화 이글스를 동시에 비판하는 명언으로 남았다. ~~사실 이 발언은 [[선동열]]을 겨냥한 것에 가깝다. 2013년에 와선 재평가받고 있는 김재박의 드립이다.~~ ~~우승 못하고 [[556]]만든 [[김성근|이 사람]]은 뭐여~~ ~~자아비판에 가장 가깝다. FA 영입만 없다 뿐이지 강탈급 현금 트레이드들로 모았던 막강한 초기전력을 생각하면...~~
          * 2013년 [[kt 위즈]] 창설로 또다시 감독 후보로 올랐으나, 이번에도 패하여 [[조범현]]이 그 자리를 가져갔다. 이후 사상 최악의 추락을 경험한 기아의 선동열, SK의 이만수 감독이 흔들리면서 기회를 찾는 듯 했지만 두 팀 모두 일단 감독의 임기를 지켜주기로 결정. 당분간 야인으로 남게 되었다. 다만, 2014 시즌이 끝난 후에는 감독 임기가 만료되는 팀이 3팀에다 도중하차 가능성이 있는 팀도 2팀이나 있어서 다시 얘기가 나오는 중. 그러나 기아는 일단 선동열의 임기를 2년 연장했다는 발표를 하고, SK는 [[김용희]]를, 한화는 [[김성근]]을 감독으로 선임하였다는 발표가 나면서 야인 생활은 연장될 전망이다. 그리고 기아는 선동열이 팬들의 여론 악화를 견디지 못하고 자진사퇴를 하면서 또 얘기가 나왔으나 [[김기태(1969)|김기태]]가 선임되었다는 발표가 나면서 무산.
  • 류중일 . . . . 4회 일치
         [[2006년]]·[[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및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되어 활동했다. [[1999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2000년]]부터 [[김용희 (야구인)|김용희]], [[김응용]], [[선동열]] 감독 밑에서 코치로 보좌한 후, [[2010년]] [[12월 30일]] [[선동열]]이 경질되자 [[선동열]]의 후임으로 [[2011년]] [[1월 5일]]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09&yy=2011 류중일 감독 "신인 패기로 KS 우승 데뷔 축포 쏜다" ] - 매일신문</ref>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오랜만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ref>최초의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 감독은 [[서정환]]이고, 류중일은 [[삼성 라이온즈|삼성]] 출신 선수 중 선수 및 코치로 활동하면서 단 한번의 팀 이동 없이 감독이 된 첫 번째 경우이다.</ref> [[2011년]] 감독 부임 첫 해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1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으며, "야구 대통령"을 줄인 '''"야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ref>[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109280100191240017032&servicedate=20110927 류중일호, 우승을 가능케 한 키워드 4개] - 스포츠조선</ref> [[대한민국]]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2011년 아시아 시리즈]]에서 [[일본]] 챔피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소프트뱅크]]를 꺾고 [[대한민국]] 프로 야구 팀 최초로 [[아시아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325476 '야통' 류중일 감독, 야신도 못한 亞 정상 위업] - OSEN</ref> [[2012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과 [[2012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 냈다. [[2013년]] 정규 리그 우승과 [[2013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 후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으나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3년]] 시즌 후 계약 기간 3년의 조건으로 계약금 6억 원, 연봉 5억 원 등 총액 21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와 재계약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72898 류중일 감독, 3년 재계약…총액 21억원 사상 최고 대우] - OSEN</ref> [[2014년 아시안 게임|2014 인천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1라운드 탈락의 쓰라림을 딛고 우승을 이뤄냈다. [[2014년]]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4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사상 최초 통합 4연패를 달성하였고, [[2015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으로 5년 연속 정규 리그 우승으로 새 역사를 썼지만,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가 개최되기 전, 삼성 투수들의 해외 원정도박 파문으로 인해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두산 베어스]]에게 내주고 만다. [[2016년]]에는 [[박석민]], [[야마이코 나바로|나바로]], [[채태인]]을 잃었고, 외국인 선수 농사 실패, 선수들의 줄부상과 부진으로 팀 최초 정규리그 9위에 머물게 되자, [[2016년]] [[10월 15일]] 계약 만료로 [[김한수 (야구인)|김한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기술고문을 맡게 되었다.
         |전임자 = [[선동열]]
  • 박석민 . . . . 3회 일치
         ||<-5> '''[[NC 다이노스]] 등번호 18번'''[* 홍성용의 kt 위즈 이적 이후 [[배재환]]이 18번을 달려고 하였으나 박석민이 [[배재환]]의 동의를 얻어 18번을 달게 됨. --사실 배재환이 선동열을 닮아서 배동열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어서 18번을 달려고 했지만, 박석민의 영입으로 실패(?)하게 된 것--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396&aid=0000363216|관련기사]]] ||
         2008년 시즌 초반 [[선동열]] 감독이 구상했던 [[양준혁|양]][[심정수|심]][[제이콥 크루즈|크]] 트리오가 각각 부진, 시즌 아웃, 방출로 인해 중심 타선이 무주공산이 되었으나, 그 공백을 [[최형우]], [[채태인]]과 함께 잘 메워 냄으로써 본격적인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후 세 명 모두 신인 치고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 2008년 삼성 타선의 세대교체가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때까지 거의 김인식 감독 수준으로 유망주들을 박대했던 [[선동열]] 감독이 직접 키운건 당연히 아니었고 [[김응용]] 前 감독이 진작부터 밀어주던 양아들이었다. 박석민은 물론 [[채태인]], [[최형우]]의 기용도 감독 외에 사장과 프런트의 입김이 들어가 있었다.]
  • 강동우 . . . . 2회 일치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을 마치고 2000년 시즌 막판에 겨우 복귀해서 다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지만, 신인 시절의 성적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류중일]] 코치가 선수 시절에 달던 1번을 달고 뛰며 타격에서는 나름대로 제몫을 하며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동했고, 2002년 [[김응용]] 감독 아래에서 타율 0.288, 9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2001년 데뷔하여 삼성의 붙박이 타자가 된 왕년의 좌타 [[라이벌]] [[박한이]]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뤄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타율이 2할 중후반에 머무르는 바람에 '비운의 톱타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후 [[선동열]] 감독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외야진 보강 차원에서 2006년 3월 [[두산 베어스]]의 [[강봉규]], [[김창희(야구)|김창희]]를 상대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 삼성 팬들은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 이는 훗날 [[양준혁]]의 등떠밀기식 은퇴, [[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는 발언 등과 함께 [[선동열]]의 삼성 프랜차이즈 내치기 사건 중 하나다.
  • 세정(구구단) . . . . 2회 일치
         여러 명의 뛰어난 연습생들 사이에서 실력뿐만 아니라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훌륭한 인성으로도 주목을 받았고, [[프로듀스 101]] 방영 내내 각종 투표 및 평가에서 잇따라 1위를 차지하며 '''갓세정, 퀸세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후추닷컴의 [[최동원]]-[[선동열]] 평가에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 [[프로듀스 101]] 사상 단 한 명의 여자 연습생을 뽑는다면 아마도 그 1등은 [[SIXTEEN|식스틴]] 팬덤을 안고 출연한 [[JYP엔터테인먼트|JYP]] 연습생 [[소미|전소미]]가 될 것이다. 하지만 전소미([[선동열]])를 출연시키고도 승패의 결과가 가장 불확실할 것 같은 연습생 한 명을 꼽는다면 그건 바로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젤리피쉬]] 연습생 김세정([[최동원]])일 것이다.] [[프로듀스 101/11회|마지막 방송]]에서는 [[소미|전소미]]에 이어 최종 순위 2위를 차지하여 프로젝트 걸그룹 [[I.O.I|아이오아이]]에 합류했고, [[2016년]] [[5월 4일]]에 [[데뷔]]하여 [[I.O.I|아이오아이]]의 멤버로 활동했다.
  • 윤태진(아나운서) . . . . 2회 일치
          * [[KIA 타이거즈]]의 열혈 팬이라고 한다. 어머니가 [[선동열]]의 광팬이라 '타이거즈 키즈'가 됐다고. [* 그래서인지 몰라도 [[KIA 타이거즈]]의 영구결번인 선동열의 18번이 달린 유니폼을 입고 시구했다.] 2017년 8월 16일 광주 NC 전에서 시구를 했다. 해당 경기는 기아가 이겼는데 이후 4연패....그래도 2017년은 기아 우승.
  • 백일섭 . . . . 1회 일치
         * [[2007년]] 《[[스카우트 (2007년 영화)|스카우트]]》 ... [[선동열]] 부 역
  • 송창현 . . . . 1회 일치
          * 여담이지만 [[선동열|김응용 감독의 수제자이자, 0점대 방어율 투수]]와 상당히 닮았다. 트레이드 당시에도 뭐가뭔지 모르는 야구팬들 사이에서 '''송창현을 선택한 진짜 이유'''라는 우스개 소리로 돌아다니는 짤. ~~얼굴은 선동렬인데 제구는 [[김정수(1962)|김정수]]...는 무리인가~~
  • 이강돈 . . . . 1회 일치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048405|[전설을 찾아] 빙그레 캡틴 이강돈, “원래 나는 삼성 선수였다” 上]][br][[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048612|[전설을 찾아] 이강돈, “준우승만 네 번, 선동열 못 넘었다” 中]][br][[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048731|[전설을 찾아] 이강돈, “한화는 언젠가는 돌아갈 고향” 下]]
  • 이상목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대표적인 [[포크볼]] 투수이며 [[1990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였지만 별 활약을 보이지 못해 [[1993년]] 시즌 중에 [[포수]] [[박선일]]을 상대로 [[빙그레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빙그레에 이적한 후 선발 투수로 자리매김하였고 시속 140km대의 직구와 낙차 큰 [[포크볼]]로 많은 승수를 얻었으며 [[1999년]] [[한화 이글스]]의 한국시리즈 우승 멤버로 활동했다. [[2003년]]에 15승 7패를 기록하여 한화에서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낸 후 FA 자격을 얻어 [[롯데 자이언츠]]에 이적하였다. 그러나 [[2006년]]을 제외하고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해 [[2007년]]에 방출되었으며 [[선동열]] 감독의 부름을 받아 [[2008년]] 친정 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했다.
  • 이승엽 . . . . 1회 일치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재학 시절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ref>[[스포츠 조선]] - 2010년 5월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6/2010051601132.html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추신수, 봉중근, 이대호, 류현진… 청룡기가 낳은 한국 야구 대들보"]</ref>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ref>''[[OSEN]]'' - 2007년 12월 기사 [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이승엽-이대호, 모교서 방망이 날세운다"]{{깨진 링크|url=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ref><ref name="homerun">스포츠 춘추 - 2010년 9월 [[박동희 (기자)|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463 "이대호로 본 ‘홈런 타자는 어떻게 탄생하나’"]</ref>
  • 임현준 . . . . 1회 일치
         [[2007년]] [[경성대학교]] 진학하여 윤영환 감독으로부터 체계적인 [[투수]] 수업을 받은 뒤 입학하자마자 당시 4학년이었던 [[고창성]]과 함께 [[경성대학교]]의 간판 [[투수]]로 떠올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11&aid=0000213906 홍희정의 아웃사이더 삼성 새내기 좌완 임현준 "선동열 감독께 눈도장 받고 왔어요"] 《조이뉴스》 2010년 12월 5일</ref>
  • 최태원 (야구인) . . . . 1회 일치
         하지만 [[2011년]] [[KIA 타이거즈]]가 준 플레이오프에서 [[SK 와이번스]]에 1승 3패로 패하여 플레이오프 진출이 좌절되면서 [[조범현]]이 경질되었고, [[조범현]] 사단의 해체와 동시에 [[선동열]]이 새로 감독에 부임하자 옛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 선배였던 [[김기태 (1969년)|김기태]]가 감독으로 선임되어 부름을 받아 [[LG 트윈스]]로 이적했다.
  • 최한경 . . . . 1회 일치
         당시 150km대를 던지는 투수는 [[선동열]]하고 [[박동희(야구선수)|박동희]] 정도로 많지 않았던 상황에서, 쌩 고졸신인이 평균 150km의 공을 던진다는 것은 일약 센세이션에 가까웠다. 마무리 활동 당시 삼성전 중계 방송에서는 최한경까지만 가면 삼성이 이길 수 있다는 말이 자주 나오곤 했는데, 이는 그가 94년 한정 당대 최고의 마무리였음을 입증한다. 공은 가볍다는 소리를 들었을지언정 속도만큼은 엄청났고, 이 때문에 94년 주전으로 활약했지만 오히려 속구를 던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5회부터 등판하고, 선발로도 나오는 등 아직 몸이 다 만들어지지 않은 고졸신인에게는 가혹할만치 엄청난 혹사를 당했다.
  • 홍효의 . . . . 1회 일치
         대학 졸업 후 삼성에 신고선수로 입단했다. 2009 시즌 마무리훈련에도 참가해 [[선동열]] 감독이 칭찬했었지만, 막상 본 시즌에 들어가보니… 21경기 등판해 47⅓이닝 1승 3패 '''72사사구''' 38실점 평균자책 6.08을 기록했다.
11532의 페이지중에 19개가 발견되었습니다 (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

Valid XHTML 1.0! Valid CSS! powered by MoniWiki
last modified 2019-09-09 22:23:01
Processing time 0.0211 se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