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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기선교 . . . . 23회 일치
[[기독교]]의 [[선교]] 활동 가운데 하나. 지원자를 모집하여 짧은 기간 동안 선교지에 투입되어 선교 활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현실적으로, 단기선교는 말 그대로 '선교'로서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 선교라고 해도 기껏해야 방학이나 휴가 기간의 몇주 정도인데, 참가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아마추어이고 선교 기간이 짧은 만큼, 실질적인 선교로서 효과가 나오기를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 기존에 활동하던 단체를 지원하는 경우가 고작인데, 이것도 참가자의 자질이 부족하고 단기에 그치므로 크게 효과는 기대하기 어렵다. 짐이 안 되면 다행.
그래서 교회 등에서 모집하는 단기선교라는 활동은 명목상으로만 '선교'를 내걸고 있는 [[체험]] [[관광]] [[여행]]에 가까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단기선교를 비판적으로 보는 의견도 있다.
[[대한민국]] 교회의 단기해외선교 활동은 1989년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화 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다만 1990년대 중반까지 단기선교는 일반 참가자가 아닌 해외 선교사 육성을 위하여 선교사 양성 프로그램의 일환으로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로,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체험여행에 가까운 형식으로 일반인을 모집하여 단기선교를 하는 프로그램이 많이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는 일종의 이벤트 사업으로서 대형교회의 재정적 이유가 배경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기선교는 현실적으로 현지인에 대한 봉사 보다는 참가자를 위한 체험 활동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러한 단기선교는 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 없이 마치 관광여행처럼 프로그램 되어 있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참가자들의 자질이나 현지 활동은 현실적으로 관광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관광'이 아닌 '선교'를 목적으로 하며, 관광사업에는 아마추어인 교회 조직이 선교를 추진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현지 문화와의 마찰을 빚는 문제, 현지에서의 안전에 대한 배려가 없어서 안전 사고를 겪거나, 심지어 테러에 휘말리는 경우도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단기선교를 꾀하는 집단이 '선교'를 목적으로 하고 있어 관광객이라면 피할 위험을 감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안전 보장에서 철저하지 못하고 아마추어적인 모습을 보이기 때문에 위험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유명한 것으로는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단기선교에 나섰던 분당샘물교회 신도와 인솔자들이 [[탈레반]]에 납치당한 사건이 있다. 해당 일행은 대한민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으로 풀려났지만 협상이 이루어지기 전 두명이 탈레반에 의해 처형되었다.
- 박옥수 . . . . 15회 일치
[[대한민국]]의 [[종교인]]. [[개신교]] 계통 [[신흥종교]]인 [[기쁜소식선교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산하 단체로 국제청소년연합(IYF)을 설립하여 활동하고 있다. [[음력]] [[1944년]] [[6월 2일]] 출생이며, 출생지는 [[경상북도]] [[구미시]].
기쁜소식강남교회[* [[경부고속도로]]에서 [[서울특별시]]로 올라올 때 보이는 그 [[교회]]이다. 참고로, 이 교회 건물은 불법건축물이라고 한다. [[그린벨트]] 내에 건축제한이 있는데, 그걸 상큼하게 씹어먹은 것. 서초구청에서 강제 집행을 하려고 했었으나, 교인들이 죄다 나와서 막았다고...] 담임[[목사]]로도 활동하고 있으나, 국내외 기성교단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적도 없고, 한국에 구원파 [[신앙]]을 들여왔다고 불리는 미국인 [[선교사]] 딕 욕에게 안수를 받았다는데, 이에 대해서조차 논란이 있다.[* 문제는 이 선교사가 공식 선교사거나 정식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도 아닌 등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자세한 것은 [[구원파]] 참조. 게다가 딕 욕 본인은 안수를 준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목사안수 논란 문단을 볼 것.] 물론 어디까지나 [[신흥종교]]인 만큼 해당 교단 내에서 쓰는 직급으로 볼 수는 있다.
여담으로 기쁜소식선교회 산하 집단인 국제청소년연합의 약자와 마크가 [[IYF]]인데 Y자 모양이 유명 선교단체인 [[IVF]]와 헷갈리기 딱 좋게 되어있다.
박옥수는 지난 45년간 딕욕 선교사를 통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딕욕 선교사는 “박씨에게 안수를 준 적 없으며 목사 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라 답했다.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는‘Shield of Faith Mission’ 선교학교에 입학(1962~1964년) - 딕욕, 말론 베이커 등 외국인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신학교 졸업, 딕욕(Dick York) 선교사로부터 목사 안수(1971년)라고 게시되어 있다. 하지만 딕욕 측이 운영하는 ‘믿음의 형제들’ 홈페이지에는 박씨에게 “안수를 준 적이 없다”고 명시되어 있다. 또한 “자신(박옥수)이 자신에게 안수를 준 것”이라 덧붙였다.
딕 욕은 2010년 9월 30일 사당 청소년 문화의 집 강당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교회에는 성직제도가 없어야 된다고 그들(故[[유병언]], [[이요한]], [[박옥수]])에게도 가르쳤고, 지금도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6월 22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진○○(박씨와 같은 혐의를 받고 있다) 측 변호사는 박씨가 딕욕 선교사에게 안수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박씨는 4월 20일 수백억 원의 주식을 사기로 판매했다는 혐의로 전주지방법원에서 첫 공판을 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현재 항소심에서 무죄로 판결되었다.) 진○○ 측 변호사는 미국의 딕욕 선교사에게 이메일을 보내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고 말했다. 딕욕 선교사가 박씨에게 목사 안수를 준 적이 없다고 답해왔다며 박씨는 가짜 목사라고 밝혔다. [[http://hdjongkyo.co.kr/news/view.html?section=22&category=1007&no=14622|기사 전문]].
박옥수의 교회인 기쁜소식선교회에서는 신도가 운영하는 기업 운화의 제품인 또별~~[[무안단물]]~~이라는 식품을 마치 의약품이자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홍보하였다. [[산삼]]배양근 등에서 추출한 식물 [[줄기세포]]를 함유했다는 이 제품은 허가조차도 건강기능식품이나, 음료(차류)로 받은 제품이다. 박옥수는 이를 직접 공식적인 자리에서 의약품처럼 과대 광고를 했던 것이다.[* 의약품이 아니므로 구체적인 질병 치료기능 선전은 건강기능식품이어도 금지된다.]
- 토탈워: 쇼군 2/요원 . . . . 10회 일치
* 아군 병력에 배속시 이동력을 늘리고 상대 승려/선교사의 사기 꺾기 성공률을 줄임
말 그대로 닌자. 다른 가문에게는 쉽게 보이지 않는다. 메츠케에게 약하지만 승려와 선교사에게 강하다.
다이묘의 비밀 경찰. 닌자를 쉽게 찾아내지만 승려나 선교사에게 약하다.
== 선교사(Missionary) ==
>선교사는 기독교가 나아가고자 하는 방식의 열성적인 전도자입니다. 이들은 적군의 사기를 꺾을 수 있고 적 마을에서 불안을 조성할 수 있는 선동가일 뿐만 아니라, 아군 부대의 사기를 증진하고 읍성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습니다. 또한, 선교사는 경건하게 살아가는 속죄의 삶을 통해 기독교로 백성을 개종할 수 있고 적 요원이 임무를 단념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들은 특히 메츠케에 맞설 때 효과적입니다.
* 다른 가문의 병력과 접촉시 선교로 상대의 사기를 꺾을 수 있음.
포르투갈인 선교사. 다이묘가 기독교를 믿을때만 생산할 수 있다. 메츠케에게 강하지만 닌자에게 약하다.
* 선교사(Proselytizer) - "주님의 믿음에 대한 설득은 어떠한 한계도 있지 않다."
고무, 선교자 스킬 요구
- 한선교 . . . . 9회 일치
| 이름 = 한선교
'''한선교'''(韓善敎, [[1959년]] [[6월 23일]] ~ )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출신 정치인이다.
1984년부터 [[문화방송]]에서 아나운서로 일하다가 1995년부터 프리랜서가 되었다. 2004년 [[한나라당]] 대변인이 되었고,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의 국회의원|용인시 병]]에 출마하여 제[[대한민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17]]·[[대한민국 제18대 국회의원 선거|18]]·[[대한민국 제19대 국회의원 선거|19]]·[[대한민국 제20대 국회의원 선거|20]]대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1년 제7대 [[한국농구연맹]] 총재에 선출되었다.<ref>박세운.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9&aid=0002256700 KBL 신임 총재에 한선교 "스킨십 소통으로 프로농구 살리겠다"]{{깨진 링크|url=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079&aid=0002256700 }}. 노컷뉴스. 2011년 6월 3일.</ref>
|후임자 = (용인시 처인구)[[우제창]]<br />(용인시 기흥구)[[박준선 (1966년)|박준선]]<br />(용인시 수지구)한선교
|전임자 = (용인시 갑)[[우제창]]<br />(용인시 을)한선교
|후임자 = (용인시 갑)[[이우현 (1957년)|이우현]]<br />(용인시 을)[[김민기 (정치인)|김민기]]<br />(용인시 병)한선교
|전임자 = (용인시 처인구)[[우제창]]<br />(용인시 기흥구)[[박준선 (1966년)|박준선]]<br />(용인시 수지구)한선교
|후임자 = (용인시 갑)[[이우현 (1957년)|이우현]]<br />(용인시 을)[[김민기 (정치인)|김민기]]<br />(용인시 병)한선교<br />(용인시 정)[[표창원]]
|전임자 = (용인시 갑)[[이우현 (1957년)|이우현]]<br />(용인시 을)[[김민기 (정치인)|김민기]]<br />(용인시 병)한선교
- 현석문 . . . . 8회 일치
그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신부]]가 [[순교]]하고 사흘 뒤에 순교하였다. 현석문은 [[앵베르]] [[주교]]를 [[조선]]에 데려오고 [[샤스탕]] 신부를 도와 여러 곳을 다니며 [[선교]] 활동을 함께 한 사람들 중에 하나이다.
현석문은 온 생애를 [[선교사]]들과 교우들을 돕는데 바쳤다. [[교황청]] 문서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를 기린다.:
현석문은 순교로 아버지를 여의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어머니와 누나와 함께 독실한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그는 [[조선 헌종|헌종]] 2년([[1836년]])에 [[의주]]로 가서 [[앵베르]] 주교를 [[조선]]으로 맞아들였다. [[1837년]]에 [[샤스탕]] [[사제|신부]]가 입국하자, 현석문은 그의 [[복사 (기독교)|복사]]가 되어 신부와 함께 [[선교]] 여행에 동참하는 한편, 교인들의 신앙지도에 힘썼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시작될 때에, 현석문은 [[관아]]에 [[자수]]하기를 원했지만, [[선교사]]들이 그를 말렸고 살아남아서 교우들을 돌보라고 말했다.
[[앵베르]]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될 때, 현석문은 [[한양]]의 회장으로 임명되었다. 주교는 [[순교]] 전에 [[조선]]의 [[교회]]를 맡겼다. 이 사실은 주교와 교우들이 그를 얼마나 크게 존경했는지를 보여준다. 현석문은 체포를 피하기 위해 이재영이라는 [[가명]]을 사용하였다. 그는 새로 입교한 교우들을 격려했고 여러 [[선교]]지들을 다니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아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뒷바라지 하였다.
그는 빈번히 [[베이징]]으로 전령을 보내 [[선교사]]들과 연락하였다. [[1845년]] 그는 [[부제 (기독교)|부제]] [[김대건]]과 함께 작은 나무배를 타고 [[상하이]]로 가는 험란한 항해에 동참하였고, [[천주교 서울대교구|조선교구]]의 제3대 [[교구장]] [[페레올]] [[주교]]를 맞아들였다. 현석문은 [[한양]]으로 돌아온 뒤, 위험을 무릅쓰고 김대건 [[사제|신부]]의 집을 자신의 명의로 [[등기]]하였다. [[1846년]]에는 [[병오박해]]가 일어났다. 현석문은 김대건 신부의 [[체포]] 소식을 듣고 새로운 집을 구입하여 교회의 모든 재산을 그곳으로 옮겼으며, 김 신부의 처소에 남아 있던 여성 교우들을 새 집으로 피신시켰다.
- 토탈워: 쇼군 2/세력 기술 . . . . 6회 일치
* 기독교: 예배당(Chapel)을 선교회(Mission)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게 됨
* 선교사의 행동 스킬 비용 -20%
* 선교자의 행동스킬 성공확률 +10%
* 기독교: 선교회(Mission)를 교회(Church)로 업그레이드 할 수 있게 됨
* 선교사의 행동스킬 성공확률 +10%
* 선교사의 행동스킬 비용 -25%
- 마니교 . . . . 5회 일치
파티크, 앗다, 아브자카야는 로마 영토였던 시리아 지역으로 선교하게 된다. 이 무렵 제노비아 여왕의 지도 아래 [[팔미라 왕국]]이 독립하고 있었는데, 앗다는 마니가 전해준 "거대한 복음"이라는 저작을 바탕으로 하여 제노비아 여왕의 여동생에게 포교하는데 성공하였다. 아브자카야는 시리아 에데사 지역에서 포교에 성공하고, 마니는 시리아에서 기독교 사도를 이어받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앗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포교를 하며, 마니의 저작을 정리하여 기독교인을 대상으로 "모디우스"라는 저서를 출판한다. 그리고 이집트에도 마니교가 퍼지게 된다. 마니는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혀 있던 로마 병사들에게 선교를 하였고, 이들이 귀환하면서 마니교는 로마 제국 동부로 널리 퍼져 나가게 된다. 또한 [[아라비아]]에도 마니교 선교가 행해졌다고 한다.
좌천되었지만 마니는 선교를 멈추지 않고 바트 왕을 개종시킨다. 하지만 이것이 바흐람 1세와 킬데르의 노여움을 불러, 바트 왕은 출두명령을 받게 되고 마니는 미프르 샤에게 도망쳐서 보호를 부탁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실각한 상태였다. 마니는 마니교의 세력이 강한 중앙아시아로 도주하려 하지만, 이미 출국이 금지되어 있어 감시당하는 몸이 된다. 마니는 제자 아브자크야와 함께 바흐람 1세를 찾아가서 탄원을 요구한다. 하지만 바흐람 1세는 듣지 않고, 마니에게 무허가로 궁정에 찾아온 죄, 황제의 여동생의 치료에 실패한 죄, 신흥 종교를 포교한 죄를 물어 쇠사슬로 묶어서 감금한다.
명나라 시기에 명교는 오히려 박해를 받게 되는데, 이는 왕조의 국명과 같은 명(明)을 사용하는 탓에 불경죄로 여겨진 것이다. 하지만 명나라 시대에는 어느 정도 명교의 가르침은 기록으로 남게 된다. 명 말의 기록에는 마니에 대한 기록이 어느 정도 정확하게 기록되었는데, 하교원(何喬遠)의 기록에 따르면 208년 3월 12일 발제(抜帝, 파티크)의 처 만염(満艶, 마르얌)이 청정한 채로 가슴으로 낳은 것이 마니(摩尼)이며, 마니는 대식(大食,아라비아), 불림(佛林, 로마), 토화라(吐火羅, 이란 동부), 파사(波斯)에서 선교하여, 266년에 파사에서 사망했다. 저서는 7권이며, 가르침은 대모도(大慕闍)에게 맡겨졌다고 기록되었다. 모도란 모자크로 마니교에서 제2의 위계에 해당한다.
- 창작:치킨교 . . . . 5회 일치
|| 용도 || 선교 ||
한국인들은 KFC 교단의 선교를 독자적으로 해석하여 한국의 신앙전통에 맞는 형태로 탈바꿈시켰고 이것이 오늘날의 치느님과 치킨교이다.
후라이드 치킨교도들이 흔히 "제1차 외식전쟁"에서 죽을 쑤자 나타난 종파였다. 제1차 외식전쟁은 미국의 위대한 선지자 맥도날드와 피자헛이 한반도에 선교를 하러 오고, 한국인지 일본인지 애매한 하이브리드인 롯데리아가 참전하면서 시장통을 지배하던 후라이드 치킨교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 결과로 치킨교는 제법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 피해로 인해 후라이드 교는 일종의 종교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내부에서도 별도의 총대주교(소스) 세력에 불과하면 양념파가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결정적인 빌미가 된 것.
* 커낼 샌더스 : 최초의 치느님 선교 단체 [[KFC]]를 만들어, 전 세계에 치킨교를 선교하였다.
- 현경련 . . . . 4회 일치
현경련은 [[한양]]의 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릴 때 [[주문모]] [[사제|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녀는 [[1811년]]에 [[순교자]] [[최창현 요한]]의 아들과 결혼했지만, 그녀의 남편은 3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친정]] 어머니에게 돌아왔다. 그녀는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으며 평온한 삶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하며 살았다. 그녀는 또한 사람들의 성화와 [[문맹]]의 예비 신자를 가르치기, [[냉담자|냉담교우]]를 격려하기,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병자]]들을 돌보기 그리고 죽을 위험에 처한 이교도 자녀들에게 [[세례]]를 베풀기 등에 엄청난 노력을 쏟았다. [[선교사]]들이 방문한 동안에, 그녀는 자신의 집에 사람들을 불러들여 [[성사]]를 보도록 해주었다.
[[1893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 초기에, [[교리]] [[선생]]이 된 현경련은 박해를 피해 숨었지만, [[6월|6]] [[7월]] 경에 [[체포]]되었다. 관리들은 현경련이 [[선교사]]들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던 [[현석문]]의 누나인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가 숨은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더 가혹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녀는 여덟 차례 [[심문]]과 두 차례의 [[주뢰형]] 그리고 300 여대의 [[장형 (형벌)|장형]]을 받았다. 형리들은 선교사들을 체포해서 포상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기 위해 더 혹독하게 그녀를 고문했다. 그러나 현경련의 강한 의지로 인해서, 그들의 탐욕적인 노력은 허사로 돌아갔다. 그녀는 [[형조]]로 압송된 후에, 다리를 거의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격심하게 매질을 당했다. 그녀의 온몸에 상처가 깊어서 피와 [[고름]]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또한 그녀는 [[감옥]]에서 [[콜레라]]에 걸려 앓았다.
- 이갑성 . . . . 3회 일치
연당 이갑성은 [[1889년]] [[10월 23일]] [[대구시|대구]] 출생으로 어려서부터 고향에서 한학을 배웠다. 11세 때 한문 서당을 수학하고 돌아오던 길에 샤록스(A. M. Sharocks) [[기독교]][[선교사]]를 만나 개종, [[기독교]] 신자가 되었다.
[[경성부]]에 도착한 그는 처음에는 [[남대문교회]] [[함태영]] [[전도사]]를 만나 [[함태영]] [[전도사]]의 집에서 하숙하면서 [[그리스도 신문]]을 배달하였다. 그뒤 신문을 보던 한 선교사의 추천으로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를 만나 [[1906년]] [[경신학교]]에 입학했다.
[[3·1 운동]] 당시 [[한국]]의 독립운동 장면을 사진으로 촬영해달라는 [[석호필]](스코필드)의 부탁을 받고 [[경성부|경성]] 시내에서 학생들의 만세 장면을 카메라 사진으로 여러장 촬영해서 주기도 했다. 학생들의 만세 장면과 [[조선총독부]] 헌병들의 사격장면 등을 담은 이 사진들은 [[스코필드]]와 [[조선총독부]] 치하 [[조선]]에 와 있던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들을 통해 서방세계로 알려지게 되었다.
- 건즈 고어 앤 카놀리 . . . . 2회 일치
SS. 럭키가 떠그타운에 정박하려는 무렵, 얼굴에 물린 상처가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SS. 럭키에 올라가 선교의 선원들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객실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선교의 선원들이 몰살당하는 소리를 들은 카놀리는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깨닫고 권총을 꺼내든다.
- 이소선 . . . . 2회 일치
* 1975년 11월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창립 7주년 공로상<ref name="연표" />
* 1975년 11월 23일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창립 7주년을 맞이하여 공로상 받음.
- 토탈워: 쇼군 2/가문 . . . . 2회 일치
* 선교사의 행동스킬 비용 감소
다이묘는 오토모 요시아키, 후계자는 오토모 요시시게. 게임 시작시 선교사 한명이 기본적으로 주어진다.
- 토탈워: 쇼군 2/건물 . . . . 2회 일치
* 해당 지역에서 선교사를 고용할 수 있게 됨
===== 선교회(Mission) =====
- 홍병선 . . . . 2회 일치
홍병선이 귀국한 해에 과거 경성학당 교장이었던 일본조합교회의 와다세(渡賴常吉)가 정식 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에 파견되어 왔고, 홍병선은 와다세가 설립한 한양교회의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동시에 [[보성전문학교]], [[피어선기념성경학원]], [[배화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2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출판사=한국컴퓨터선교회
- 김도균 . . . . 1회 일치
보기와는 달리 독실한 [[개신교]]([[장로회]]) 신자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 송파구에 위치한 산돌선교교회 집사로 성가대 지휘를 하고 있고, 자신의 앨범에 다수의 성가곡을 작곡하여 수록했으며, [[https://www.youtube.com/watch?v=e7EQAJUZ3aU|인터넷 기독교 TV방송인 RUTC TV의 '예능']]을 비롯한 다수의 기독교 프로그램에 출연했다.
- 김민기(가수) . . . . 1회 일치
이렇게 되자 다른 민중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제도권 음악계의 도움 없이 비밀리에 작곡과 연주 활동을 진행했는데, 1978년에는 [[개신교]] 계열 시민단체인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후원을 받아 노래극 [[공장의 불빛]]을 제작했다. 이 노래극은 당시 대학 노래패들의 노래와 연주로 [[송창식(가수)|송창식]]의 집에서 몰래 녹음되었고, 녹음 직후 [[카세트 테이프]]로 복사되어 보급되었다. 대담하게도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행한 작업이었는데, 당연히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별 처벌 없이 풀려났다.[* 당시 김민기는 분명히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있었지만, [[높으신 분들]]은 그 동안 자신들이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공개적으로 탄압하다가 국내외에서 많은 비난을 받은 것 때문인지 김민기만은 활동 금지만 시키고 자멸하도록 방치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했다고 한다.]
- 김석훈(탤런트) . . . . 1회 일치
||<bgcolor=#3B485A> {{{#FFFFFF '''종교'''}}} ||<(> [[개신교]]([[장로회]])[* 이촌동 충신교회 연예인선교회 멤버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
- 김숙자 (1389년) . . . . 1회 일치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 맥스 페인/줄거리 . . . . 1회 일치
카론의 선교에 도착한 맥스는 누군가 카론에게 무전을 보내는걸 발견한다. 안젤로 펀치넬로였다. 무전기를 든 맥스는 펀치넬로가 이성을 잃도록 도발한 후 무전을 끊어버린다. 그러고는 보리스 다임과 무기를 찾기 위해 선실로 내려간다.
- 박근혜 . . . . 1회 일치
1970년대부터 [[최태민]] 목사는 그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최태민]]과 그 일가들의 비리 행위를 묵인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근혜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면서 그를 보좌하였던 최태민의 비리 문제는 오랫동안 도마에 올랐다. 7개의 이름과 6번 결혼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구국선교단, 구국봉사단 총재 등으로 박 후보를 보좌하면서 박 후보의 이름을 팔아 이권에 개입한 의혹을 받았다.<ref name="choiui">[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7200324291&code=910100 의혹의 중심엔 '부적절한 인연?'] 경향신문 2007년 02월 20일자</ref> 박근혜의 정계 입문 이후 이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 . . . . 1회 일치
선교사 던컨 리틀은 갱단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리들도 뭉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코너와 리틀은 갱단과 맞서기 위해 부두로 향한다.
- 울릉군 . . . . 1회 일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이 약한 제주도 같은 사례를 제외하면 해안, 섬 지역은 선교사의 포교가 용이한 관계로 기독교의 비율이 높은 편인데 이 곳 역시 [[불교]]가 초강세인 영남권에 있음에도 유일하게 [[개신교]]의 교세가 강한 곳이기도 하다. [[포항시|포항]]이나 [[거제시|거제]] 역시 영남권에서는 [[개신교]]의 교세가 강한 편이지만, 울릉군의 개신교 강세를 따라잡을 수준이 안된다.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 주민의 47%가 [[개신교]] 신자로, 33%인 [[불교]] 신자 비율을 상회한다. 물론 영남도 대도시는 [[천주교]] 및 [[개신교]] 교세가 꽤 큰 편이라 이상할 건 없다. 당장 [[부산광역시]]에는 초대형 교회도 여럿 있고 [[대구광역시]]를 관할하는 [[가톨릭]] 교구는 무려 대교구([[천주교 대구대교구]])이며 [[부산]]에서 WCC총회도 열린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 이대근 (조선) . . . . 1회 일치
[[음서 제도|음보]](蔭補)로 출사하여 선교랑 관상감 주부(觀象監主簿)가 되었으며, 연산(燕山)2년 병진(丙辰1496)년에 [[생원시]]에 입격하여 [[성균관]] [[생원]](生員)이 되었다. 그 뒤 통훈대부로 승진, 사헌부 감찰을 거쳐 홍천현감으로 나갔다.
- 이열희 (1924년) . . . . 1회 일치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31272&yy=2013 美 선교사 치의학교 설립 추진] 매일신문 2013년 06월 24일자
- 이평 (1572년) . . . . 1회 일치
[[1612년]](광해군 4) 임자(壬子) 증광시(增廣試) 생원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바로 전시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져 그해의 [[9월 9일]]의 [[증광 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으나 관직에 발령되기 전에 병으로 사망한다. [[선교랑]] [[홍문관 부수찬]]이 증직으로 추서된다.
- 전국 BASARA . . . . 1회 일치
이국에서 신의 말씀을 전하러 온 선교사. 두개의 소형 대포를 사용한다. 모티브는 프란시스코 하비에르. 이츠키로 천하통일 모드를 클리어하면 해금된다.
- 최창흡 . . . . 1회 일치
최창흡은 [[1786년]] 경에 [[한양]]에 있는 한 [[중인]] 신분의 관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13살일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천주교]]의 [[교리]] 수업을 시작했지만, [[세례]]는 받지 않았다. [[박해]]로 인해, 그는 교우들과 멀어진 이래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1815년]]에 그는 한 천주교 공동체에 입회하여 교리를 다시 배웠다. 그는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므로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호의적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신유년의 박해]] 동안에, 그의 집안은 파산하였다. 그러한 곤궁한 상황 속에서, 그는 [[손소벽]]과 결혼하였고, 열한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들 중 아홉 명은 어릴때 운명을 달리했다. [[1821년]]에, [[조선]]에 [[콜레라]]가 창궐하여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는데, 최창흡은 그 무렵에 세례를 받았다. 그때부터,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의 모든 의무를 지켰다.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했을 때, 최창흡은 가장 독실한 신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제가 젊어서 저지른 [[죄]]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들을 속죄하고 제 [[영혼]]을 구원받기 위해서 [[하느님]]을 위해 죽어야만 합니다."
- 추경호 . . . . 1회 일치
|전임자 = [[한선교]]
- 홍병주 . . . . 1회 일치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의 박해]] 동안에,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주었다. 따라서, 배교자 [[김여상]]이 [[체포]]되어야 할 명단에 그들의 이름을 기록해 놓았다.
- 황치열 . . . . 1회 일치
* 2015년 10월 18일 외방선교회 설립40주년 기념 음악회 초대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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