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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보성(배우)
         이쯤 되면 김보성과 이름이 같은 차와 소리의 고장인 [[보성군]]의 지역 홍보에도 도움이 될 만한 소재인데도, 섭외를 요청하거나 하는 등의 반응을 왜 보이지 않는 것인지 정말 이상하다. 여담으로, 보성군은 실제로 으리의 고장이 맞긴 하다.[* 보성군 출신 역사인물 중에는 [[이순신]]과 함께 싸워 한산도 대첩에 기여한 무관 선거이, 역시 무관으로서 이순신 휘하에서 싸웠고 [[의병]]도 일으킨 최대성, 역시 의병을 일으킨 유학자 [[안방준]], 일제의 국권침탈에 맞서 정미의병으로 활동한 일으킨 [[안규홍]], [[독립협회]]를 세운 대표적인 개화파인 [[서재필]], 일제에 맞선 신흥 종교 [[대종교]]를 세운 [[나철]] 등 우리나라를 지키기 위해 외세에 맞서 싸운 사람들이 여럿 있다.]
  • 김성수 (1891년)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시, 김성수는 [[이승만]]으로부터 [[재무부|재무장관]] 제의를 받았으나 모욕적이라고 생각한 인촌은 거절하였다.[[1948년]] 9월 출국하는 [[서재필]]을 면담하고 선물을 전달하였다.<ref>《송건호 전집 13 서재필과 이승만》(송건호, 한길사, 2006) 302</ref> 뒤에 [[장택상]]이 거듭 찾아와 재무장관에 취임해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김성수는 거절하였다. 그 뒤 김성수는 농지개혁법 시행법령 제정을 마냥 지연시켜<ref name="dd430">한중일 국가기원과 그 역사 (김성호 지음 | 맑은소리 | 2009)</ref> 당시 [[농림부|농림부 장관]]이던 [[윤영선 (1896년)|윤영선]](尹永善)에게 [[이승만]]은 "춘경기가 촉박했음으로 추진상 적지않은 곤란이 유할 것이나 만난을 배제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하라"는 특별 유시를 하게 된다.<ref name="dd430"/>
  • 김온순 (1812년)
         이후 공조참판,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등을 거쳐 [[1891년]] [[정헌대부]]가 되고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최종 관직은 [[보국숭록대부]] 판의금부사에 이르렀다. [[김조순]], [[김달순]], [[김익순]], [[김옥균]] 등의 일족이었다. 서예가 겸 관료 해사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아버지이며, 승지를 지낸 김병억의 할아버지이고,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자 자작을 역임한 [[김호규]]의 증조 할아버지이다.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송재 [[서재필]]의 양외할아버지이기도 하다.
         ***** 외손자 :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 [[서재필]]
         [[분류:1812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서재필]][[분류:안동 김씨 (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윤정 (1869년)
         그는 [[서광범]], [[이범진 (1852년)|이범진]], [[이승만]], [[김규식]](金奎植), [[서재필]], [[하란사]](河蘭史) 등과 함께 초기 조선인 [[미국]]유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 김호규
         '''김호규'''(金虎圭, [[1911년]] [[11월 22일]] ~ [[1961년]] [[8월 5일]])는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 출신 관료, 사회운동가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기소되기도 했다. 본관은 [[안동 김씨|안동]],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이며 자작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손자이다. 독립운동가 [[서재필]]의 양 외종질이 된다.
         그의 대고모의 양자가 [[서재필]]로 [[서재필]]은 그의 내종숙, 그는 [[서재필]]의 내종질간이었다. 또한 내종숙인 [[서재필]]은 그의 할아버지이자 서예가, 학자인 [[김성근 (1835년)|김성근]]의 문하생이기도 했다. [[갑신정변]]의 지도자였던 [[김옥균]]의 일족이었다. 그러나 김옥균이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므로 돌림자를 바꿔서 이름을 규로 지었다.
         [[분류:1911년 태어남]][[분류:1961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자작]][[분류:서재필]][[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안동 김씨 (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김홍집 (1842년)
         * [[서재필]]
         [[분류:1842년 태어남]][[분류:1896년 죽음]][[분류:한국의 살해된 사람]][[분류:화기에 죽은 사람]][[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사상가]][[분류:온건개화파]][[분류:통역사]][[분류:과거 급제자]][[분류:한국의 섭정]][[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조선-일본 관계]][[분류:갑신정변]][[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영의정]][[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친일파]][[분류:경주 김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나향욱
          * [[서재필]]: 문서 참고
  • 남궁억
         [[1895년]] [[12월]] [[서재필]]이 귀국하자, 이후 귀국한 [[서재필]](徐載弼), [[유길준]], [[윤치호]], [[이승만]] 등과 개화 운동을 펼친다. 또한 서재필과 함께 언론사 창립을 추진한다. [[1896년]] 초에는 [[서재필]], [[윤치호]]와 [[독립신문]] 창간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의 기자이자 필진의 한사람으로 활동하며 독립정신을 고취하였다. 그해 [[2월]] [[아관파천]]이 단행되자 관직을 사퇴하였다.
         그해 별군직으로 임명되었으나 한직이었다. [[1896년]] [[7월 2일]]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등과 [[독립협회]]의 창립총회에 참여했으며, 이때 남궁억은 독립협회의 중앙위원 겸 수석 총무로서 또 서기가 되었다가 [[독립협회]] 평의원, 사법 위원을 겸하였다. [[1897년]] 관직을 사퇴하였다. 한편 [[독립협회]] 기관지인 《대조선독립협회회보 (大朝鮮獨立協會會報)》의 발행에도 참가하였다.
         * [[서재필]]
  • 민겸호
         * [[서재필]]
  • 박규수
         [[박지원 (실학자)|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셔먼호 사건|제네럴 셔먼 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박지원 (실학자)|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을 계승하는 이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병자 수호 조약|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박규수의 문하생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순)
         1878년(고종 15년) 11월 1일 문익(文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윤웅렬]], [[김홍집 (1842년)|김홍집]], [[윤치호]], [[홍영식]], [[서재필]] 등에게 계승됐다. 그가 죽은 후에도 [[유대치]], [[오경석]] 등이 문하생들의 훈육을 맡았다. [[양무 운동]] 모델의 동도서기를 주장했던 박규수와 달리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 모델의 급진적인 개화를 향해 나아간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그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등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대거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갔다. 문하생들이 역도들이 되자 이미 사망한 그 역시 관작을 모두 삭탈당했으며, 집은 헐려 공터가 됐다가 1906년 [[보성중학교 (서울)|보성중학교]] 부지가 됐다.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 그는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백의정승 [[유대치]], 중인 출신 외교관 [[오경석]] 등과는 신분을 초월하여 친구로 사귀었고, 승려 [[이동인]]은 사상을 떠나 친구로 지냈다. 박규수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평가해야 된다고 했다. 박규수는 자신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박정양]], [[서재필]], [[김윤식]], [[김홍집 (1842년)|김홍집]], [[유길준]], [[어윤중]], [[윤웅렬]] 등의 제자, 문인들을 길러냈다.
         * [[서재필]]
         [[분류:1807년 태어남]][[분류:1877년 죽음]][[분류:종묘배향공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실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화가]][[분류:사상가]][[분류:혁명가]][[분류:통역사]][[분류:통상 개화론자]][[분류:개화파]][[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화가]][[분류:박지원 (1737년)]][[분류:유길준]][[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지도 제작자]][[분류:노예제 폐지론자]][[분류:제너럴셔먼호 사건]][[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병사한 사람]][[분류:반남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9세기 한국 사람]]
  • 박서양 (1885년)
         [[1885년]] [[9월 30일]] [[한성부]] 종로방 관자골에서 백정 박성춘과 그의 부인 조씨(趙氏)의 아들로 태어나 1908년 [[제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그의 집안이 어떻게 박씨 성을 얻게 되었는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 박성춘은 [[백정]]의 천한 신분으로 태어났지만 [[기독교]]를 접하고 새로운 사람이 되겠다는 뜻에서 이름을 성춘이라 하였다. 아버지 박성춘은 그뒤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유길준]],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한성부]]지역 연사, 간부로 활동하였다.
         * [[서재필]]
  • 박정양
         [[1896년]](고종 33년)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 [[김홍집]]이 수구파, 위정척사파 측에 의해 살해되자 내부대신으로 [[총리대신]] 서리와 [[궁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 서리를 겸임했다. 이해 양력 9월 내각을 [[의정부]]로 개혁하자 [[의정부]]참정대신(參政大臣)이 되고 [[1896년]](건양 1년)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다. 이어 [[윤치호]], [[이상재]] 등의 주도로 [[만민공동회]]가 조직되자 정부측 대표로 참석, 이후 만민공동회에 계속 참석하였다.
         [[이상재|월남 이상재]]는 그의 문하생이다. 조선 말기의 불편부당한 온건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가지고,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 개화파인사들의 정치적 후견인으로 이들을 후원하였다.
         * [[서재필]]
         * [[서재필]]
         [[분류:1841년 태어남]][[분류:1905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온건개화파]][[분류:통역사]][[분류:갑신정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사상가]][[분류:한국의 섭정]][[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독립협회]][[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반남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변수 (1861년)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와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ref name="매경">[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6&no=246277 美 메릴랜드大, 피오리나ㆍ매코맥ㆍ슈왑 등 美 실력자 배출] 매일경제 2006-07-03</ref>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용되었으며, [[8월]]에는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가 며칠 뒤 바로 [[군국사무아문]]의 [[주사]]로 재발령되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파견된 사관생도들이 귀국함에 따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 거사에 가담하고, 행동대의 하나를 이끌게 되었다.
         * [[서재필]]
         [[분류:1861년 태어남]][[분류:1891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통역사]][[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급진개화파]][[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갑신정변]][[분류:미국의 공무원]][[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메릴랜드 대학교 동문]][[분류:원주 변씨]][[분류: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신석린
         [[한성부]] 출신으로 어릴 때는 한문을 수학했다. [[1896년]]에 [[오사카 시]]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등 일찍부터 [[일본]]을 오가며 개화파로 활동했다. 일본 정치인 [[하야시 곤스케]]와는 친밀한 사이였다. 그뒤 [[1897년]] [[서재필]], [[양기탁]], [[윤치호]], [[안창호]] 등과 함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등에 참여하였다.
  • 신응희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의 심복이 되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8월]] 귀국하였다. 이후 남행부장 겸 사과, 후영군사마 등을 역임하여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으며, [[1886년]] [[5월]]에는 [[박영효]],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조선]] 조정이 파견한 [[지운영]](池運永)을 [[김옥균]]의 유인책으로 [[유혁로]], [[정난교]], [[이규완]] 등과 함께 유인하였다.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한참 안심시킨 뒤 [[지운영]]을 유인하여 암살 계획을 폭로하였다.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주선으로 [[서재필]], [[정란교]], [[이규완]] 등 13명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1883년]] [[10월 3일]] [[일본 육군]]의 [[부사관]] 양성기관인 [[육군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 [[1884년]] 5월에 졸업하였다.<ref name="hang1">1883년 5월~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 {{서적 인용
         |쪽=174쪽}}</ref> 1883년 5월 그는 일본에 건너가자 마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신중모]] 등과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에 입학했으며, 그는 [[10월 3일]]에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였다.<ref>서재필은 1884년 1월, 이규완은 1884년 2월에 게이오의숙을 수료하고 도야마 하사관학교로 진학하여 각각 진학 시기가 다르다.</ref>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ref name="hang1"/>
         [[1884년]] [[7월]] 여비가 떨어져 수료후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操鍊局)에서 교관의 한 사람으로 근무하며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맡았고, [[김옥균]], [[박영효]] 및 미리 귀국해 있던 [[서재필]], [[이규완]] 등과 갑신정변 준비에 가담하였으며 [[1884년]] [[8월]] 남행부장 겸 사과(南行部將兼司果), [[8월 28일]] 부장(部將), [[9월]] 후영군사마(後營軍司馬)를 거쳐 [[10월]] 남행군직(南行軍職)에 임명되었다.
         [[갑신정변]] 계획에서 그는 [[서재필]], [[이규완]], [[서재창]] 등과 함께 군사 지휘관으로 내정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고 [[서재필]], [[정난교]], [[서재창]], [[윤경순]], [[유혁로]], [[이규완]] 등과 함께 생도들, 장사패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부대, [[이규완]]이 인솔하는 부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등 10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박영효]], [[서광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 [[서재필]]
         [[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박중양]][[분류:평산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오경석
         훗날 아들 [[오세창]]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어떻게 해야 [[조선]]사회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느냐고 묻자, 오경석은 [[김옥균]] 등의 개혁적 성향의 북촌 양반들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는“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경석이 [[베이징]]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은 [[이동인]]이 구해온 박물, 서양어 서적, 태엽기계, 거울, 망원경, 돋보기 등과 함께 [[유대치]], [[강위]], [[박규수]] 등에게도 전달되었고, 이들을 통해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 [[서재필]]
         [[분류:1831년 태어남]][[분류:1879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역관]][[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작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사상가]][[분류:통역사]]<!-- 역관 -->[[분류:금석학자]][[분류:조선의 상인]][[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주 오씨]][[분류:개화파]][[분류:통상 개화론자]]
  • 오세창
         [[박규수]]의 문인이자 아버지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던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등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대통령장 수훈자]][[분류:독립협회]][[분류:민족대표 33인]][[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한국 전쟁 관련자]][[분류:한국독립당]][[분류:의친왕]][[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종교인]][[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서예가]][[분류:김규식]][[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이승만]][[분류:이회영]][[분류:해주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유홍기 (1831년)
         [[윤치호]],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 등의 편지와 서신을 보면 대치장(大致丈)이라는 칭호로 많이 쓰인탓에 그것이 그의 이름보다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한의사였던 그는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와 조선을 오가며 가져다 준 신 문물을 일찍이 접하였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 났으므로 신분상 중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무관이었으므로, 그는 한의업에 종사한 양반 출신 유의였다.
         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그로부터 [[금석문]]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 이후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을 탐독, 개화에 눈을 떴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이 그의 무하에 출입하며 [[오경석]], [[박규수]] 등과 문인들을 길러냈다. 그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교]] 사상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본 그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으며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 지식도 해박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고 한다.
         1877년 초기개화파 형성에 참여했던 [[박규수]]가 병으로 죽자, [[오경석]]을 통하여 박규수의 영향 아래 있던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洪英植), [[서재필]], [[서광범]](徐光範), 백춘배(白春培), [[유길준]], [[오세창]], [[윤치호]], 정병하(鄭秉夏), 이종원(李淙遠), 이정환(李鼎煥), 박제경(朴齊絅), 이동인(李東仁), 탁정식(卓挺植)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게 되었다. [[1879년]] [[오경석]]이 병으로 죽게 된 뒤로는 혼자서 이들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연고로 세간에서는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음력10월17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유홍기는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吳世昌)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파주시|파주]]로 피신하였다가 [[12월 8일(음력10월21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혹시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로 수구파가 급진 개화파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행할 때 암살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한양 유씨]][[분류:갑신정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개화파]][[분류:통상 개화론자]][[분류:강릉 유씨]]
  • 윤경순 (1855년)
         '''윤경순'''(尹景純, [[1855년]] ~ [[1885년]] [[12월 23일]])은 [[조선]] 말기의 상인, 무신, 혁명가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에 행동대장의 한사람이자 [[서재필]]의 휘하에서 1개 분견대를 지휘하였다. [[박영효]], [[서재필]] 등을 만나 감화되어 그들의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처음에는 [[한성부]] [[동대문]] 밖에서 장작 장사를 했고, 그의 동생 [[윤경완]]은 무청(菁根) 장사를 하였다. 그는 장작장사를 하면서 [[박영효]]와 [[서재필]]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되어 동지가 되었다. 이후 [[박영효]], [[서재필]] 등의 집에 드나들면서 [[서재필]], 이인종(李寅鍾), [[이규완]](李圭完), 황용택(黃龍澤), 최은동(崔恩同), [[서재창]], [[신중모]](申重模) 등을 만나 알게 되었으며, [[압구정]]에서 회합하고 [[1884년]]의 [[갑신정변]]에 참가하였다.
         [[1883년]] 관비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일본]]으로 유학, [[도야마 육군하사관학교]]에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과 함께 입학하였다. [[1884년]] [[7월]] 수료하고 귀국, [[병조]] [[조련국]]의 교관이 되어 사관생도를 양성하였다. [[갑신정변]] 거사 직전 [[서재필]]의 지휘하에 있던 개화당의 행동대원으로 활동하며 거사를 준비, 모의하였다.
         갑신정변 직전 그는 다른 무사들과 함께 정보 입수를 맡아보았다. 정변이 계획되었다는 소문이 확산되자 그는 신속히 정보 정탐과 무기 구입을 맡아보았다. [[1884년]] [[11월]] 고종이 김옥균을 소환하자 개화파는 긴장하였다. 이때 개화파는 평소부터 양성 규합해 둔, [[이규완]], 임은명, 정란교, 이인종, 윤경순 등의 사관생도와 그밖의 장사패 수십 명을 지휘하여 연일 각 방면의 정보를 수집하고 무기구입에 착수하였다.<ref name="songkun51">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1페이지</ref>
         [[12월 2일]] 박영효의 집에 모여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서재필]]이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미 이인종, [[홍영식]], [[서광범]], 김옥균의 동지들과 함께 모이기로 한 여러 장사들, 이규정(李圭貞), 황용택, [[이규완]], [[신중모]], 임은명, 김봉균, 이은종(李殷種), 윤경순 등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의논한 결과 [[12월 4일]]에 거사키로 하고만일 그 날 비가 오면 다음날인 [[12월 5일]]로 연기하기로 최종 확정하였다.<ref name="songkun58">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8페이지</ref>
         수구파 대신 척살을 계획했을 때 그는 [[민영익]] 담당을 맡게 되었다. 실행할 담당자는 요인들 한 사람에게 두 사람씩 배정하되 한 사람은 단검을, 또 한 사람은 단총을 소지하기로 했다.<ref name="songkun59">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9페이지</ref> 또 만일 그 장소에서 실패하는 때에는 예비로 특별히 조선 옷을 입은 일본 사람 네 사람으로 각각 한 사람씩 감당키로 했다. 그리하여 [[민영익]]은 윤경순, 이은종 두 사람이, [[윤태준]]은 박삼룡, 황용택이, [[이조연]]은 최은동, 신중모가, [[한규직]]은 [[이규완]], 임은명 두 사람이 담당키로 했다.<ref name="songkun59"/> 그러나 사건 당일 민영익은 [[서재창]]의 피습을 당해 한쪽 눈을 찔렸다고 한다.
         [[12월]] [[갑신정변]] 당시 사관생도를 이끌고 [[우정국]] 근처에 매복해 있다가, [[우정국]] 축하연에 참석하러 온 [[민영익]](閔泳翊)을 습격하였지만 실패하였다. 이어 당시 [[경복궁]]을 지키던 [[윤태준]] 등을 철퇴로 척살하였다. [[윤태준]]은 당시 [[소중문]] 밖에서 대기하던 [[이규완]], 윤경순에게 일격지하에 처치되고 말았다.<ref>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70페이지</ref>
         [[경우궁]]에 당도한 이조연이 "내 주상께 뵈옵고자 하노니 들어가게 하라"고 큰 소리로 말하면서 국왕 앞으로 나가려고 했다. 이에 서재필이 칼을 빼어들고 "내가 이 문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이상 어떠한 사람일지라도 문안에 들어가리를 허락할 수 없다."고 하고, 서재필의 부하장사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만일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대로 둘 수 없다는 태세를 보였다.<ref name="songkun70">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70페이지</ref> 이에 이조연과 한규직은 뒷문으로 나아갔다. 막 문밖에 나아가자 황용택, 윤경순, 이규완, 고영석 등에 의해 타살당했다.<ref name="songkun70"/> 이어으로 군사를 이끌고 들어가 당시 당시 정부 고관인 [[민영목]](閔泳穆), [[조영하]](趙寧夏) 등을 살해하였다.
         ** 동생 : [[윤경완]](尹景完, [[1860년]] ~ [[1885년]] [[12월 23일]]) 또는 [[윤계완]](尹啓完)<ref>《승정원일기》에는 윤계완으로 되어 있고, 《갑신일록(甲申日錄)》과 《서재필박사자서전》에는 윤경완으로 되어 있다.</ref>
         * [[서재필]]
         *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분류:1855년 태어남]][[분류:1885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상인]][[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갑신정변]][[분류:급진개화파]][[분류:사형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경완
         '''윤경완'''(尹景完, [[1860년]] ~ [[1885년]] [[12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상인, 무신으로 [[갑신정변]]의 행동대원이었다. [[한성부]]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무청 장사를 하다가 [[박영효]], [[서재필]] 등에 의해 발탁되어 [[1883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8월]] [[일본 도야마하사관학교]]를 유학하고 [[서재필]] 등과 함께 귀국, [[병조]]의 [[조련국]] 교관 겸 전영 소대장에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실패하고 피신, 체포되었다가 [[1885년]] [[12월 23일]] 참수당했다. 다른 이름은 윤계완(尹啓完)이다.<ref>《승정원일기》에는 윤계완으로 되어 있고, 《갑신일록(甲申日錄)》과 《서재필박사자서전》에는 윤경완으로 되어 있다.</ref> 함께 [[갑신정변]] 거사에 가담한 [[윤경순]]은 그의 형이다. [[한성부]] 출신.
         당초 갑신정변 계획에는 나이가 어려 참여하지 않다가 형 [[윤경순]]으로 인해 참여하게 되었다. [[갑신정변]] 직전 거사에 참여하여, [[12월 5일]] 조련국 사관장 [[서재필]], [[조련국]] 소속 병사 이응호(李應浩), 민창수(閔昌洙), 전흥룡(全興龍), 김창기(金昌基), 최성욱(崔聖郁), 이점돌(李點乭) 등 부하 50명과 [[이규완]], 형 [[윤경순]]과 함께 갑신정변 때 행동대원으로 가담하여 군사를 지휘, [[조선 고종|고종]] 내외를 [[창덕궁]]에서 [[경우궁]]으로 이어(移御)하는 일과 경우궁의 수비책임을 맡았다.
         * [[서재필]]
         * 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분류:1860년 태어남]][[분류:1885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상인]][[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군인]][[분류:육군 군인]][[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급진개화파]][[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갑신정변]][[분류:사형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기선
         * [[서재필]]
  • 윤덕주 (농구인)
         * [[서재필]]
  • 윤치영
         [[1924년]]초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 본부이사 겸 재무부장에 선출되었다. 1924년 [[11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으로부터 해군군비 축소와 태평양 및 극동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제2차 태평양 회의에 파견, [[한국인]] 대표로 참석한 [[이승만]]을 수행하여 일본의 침략적 야만성을 폭로하기도 하였다. [[태평양]] 연안 국가 17개국이 참가한 이 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서재필]]을 대표단장으로, [[신흥우]], [[유억겸]], [[이승만]], [[양유찬]]과 윤치영을 대표단원으로 임명하는 임명장을 전보로 보내왔다.
         그는 [[이승만]]이나 [[임시정부]]를 모른다며 잡아떼었다. 그러자 [[종로경찰서]] 형사들이 종로구에 있는 그의 집을 뒤져서 그의 서재에서 [[이승만]], [[서재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부원들과 촬영한 사진, [[대한민국 임시정부]] 명의의 독립공채표 등을 찾아내 그에게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는 모른다며 부인했고, 일본 형사들은 그에게 고문을 가한다.
  • 윤탁구
         * [[서재필]]
  • 이경희 (1880년)
         * [[서재필]]
  • 이호성 (대한제국)
         '''이호성'''(李鎬性, [[1842년]]/[[1843년]] - ?)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다. [[1864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음서 제도|음서제]]로 출사하여 태자[[시강원]]첨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우봉 이씨|우봉]]이며, 자는 사명(士明)이다. 독립운동가 [[서재필]], [[갑신정변]]에 참여한 [[서재창]]과는 사돈간으로 그의 손녀딸이 [[서재필]], [[서재창]]의 형 [[서재춘]]의 손자며느리였다.
         * 사돈 : [[서재필]](徐載弼, [[1864년]] [[1월 7일]] ~ [[1951년]] [[1월 5일]]) - 손녀사위 [[서태원]]의 종조부
         * [[서재필]]
         [[분류:18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재필]][[분류:우봉 이씨]][[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
  • 정성왕후
         ***** 조카 : 증 이조참판 [[서덕수]](贈 吏曺參判 徐德修) - [[서재필]]의 6대조
         [[분류:1692년 태어남]][[분류:1757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세자빈]][[분류:조선의 왕비]][[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 영조]][[분류:조선 정조]][[분류:서재필]][[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구 서씨]][[분류:조선 진종]]
  • 최동
         최동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개화파]]의 [[박영효]], [[서재필]], 계몽운동 계열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장해서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에 크게 영향 받아 본업인 의학 연구 외에 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 최현배
         최현배는 "조선민족의 병폐를 가져온 원인으로 온갖 예절이 조선 사람의 생활을 구속했고, 생기를 잃게 했다<ref name="yangins">양창삼, 《인간관계 필드북》 (경문사, 2002) 171페이지</ref>"며 [[서재필]]의 안경 일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 홍영식
         [[1872년]] 칠석제 과거에 합격하고 [[18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일본 군사시설에 대한 보고서 <일본육군 총제(總制)>, <일본육군 조전(操典)> 등을 고종에게 올렸다. 1883년에는 고종의 특사 [[민영익]]의 부사로 미국에 다녀와 국내에 농기계를 최초로 도입시켰다. [[병조]][[참판]]을 거쳐 [[1884년]] [[3월]] [[우정국]] 총판에 임명되어 [[우정국]] 설치에 전력하다가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과 함께 정변을 모의, 그해 [[10월]]의 [[갑신정변]]에 가담하였으나 3일만에 실패당하고 처형당했다.
         [[1868년]](고종 5년) 그는 양주 조씨와 결혼하였으나 사별하고 후에 이씨와 재혼하였다. 1869년경부터 [[박규수]]의 문하생으로서 지도를 받으며 [[서재필]], [[김옥균]], [[김윤식]],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이동인]] 등과 서로 잘 알고 지냈다. [[박규수]]의 문하에서 [[청나라]]인 위원의 《해국도지 海國圖志》, [[청나라]] 사람 서계여의 《영환지략 瀛環志略》 등 중국의 개화서와 박지원의 《연암집》 등을 읽으면서 개화사상을 형성해나갔다. 또한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글을 배웠다. 1876년 박규수가 죽은 뒤에는 유대치로 알려진 [[유홍기]]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1883년]](고종 20년) [[6월]], 그 전해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의 사절이 [[한성부]]를 방문하고 돌아간 뒤, 그해 [[6월]] [[미국]]의 사절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 정부에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가 파견될 때 그는 보빙부사 겸 전권부대신에 임명되어 보빙사 겸 전권대신 [[민영익]]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민영익]],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 [[6월 5일]]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전권부대신으로 출국하였다.
         그는 수완이 있었고 해외 사정에 밝았다 한다. 그는 문벌도 좋았고, 성품도 모나지 않고 학식이 해박하고 온후, 순박하여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한편 매천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홍영식을 건방지다고 혹평하였다.<ref name="노컷" /> 그는 서예와 시에 능하였으며 [[서재필]]과 [[윤치호]]는 그가 시를 지을 때 앞 시조의 끝부분 뒷 시조의 끝부분을 절묘하게 맞추는 재주가 있었다고 하였다. [[박영효]]는 그가 [[김옥균]]과 함께 정변 계획을 구상한 '모의 총람의 제 일인자'라고 평하기도 했다.
         * [[서재필]]
         [[분류:1856년 태어남]][[분류:1884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우편]][[분류:우표]][[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혁명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갑신정변]][[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홍명희]][[분류:급진개화파]][[분류:사형된 사람]][[분류:살해된 사람]][[분류:부관참시된 사람]][[분류:남양 홍씨 (당홍)]][[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사상가]]
  • 흥친왕
         [[1884년]] [[김옥균]], [[홍영식]], [[서재필]] 등에 의해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개화파]]와도 인간 관계를 형성했던 그는 정변 내각의 [[의정부]][[좌찬성]](左贊成) 겸 좌우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은 3일만에 진압되었고, 그도 좌찬성 겸 좌우참찬에서 해임되었다. 판종정경의 직위를 받았으나 [[갑신정변]] 당시 고위직에 임명되었다는 이유로 민씨 일파의 공격을 받았으며, 정변 관련자들과 내통하였다는 의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친형이라는 이유로 불문율에 붙여진다. 그 후 흥친왕은 7년간 [[운현궁]]에서 칩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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