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서광"을(를) 전체 찾아보기

서광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정재학 (1856년) . . . . 5회 일치
         '''정재학''' (鄭在學, 1858~1940)은 [[대한민국]] [[금융업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민족자본은행]]의 [[개척자]]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은행산업의 대부다 .<ref name="ReferenceA">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51~367</ref><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19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19편"</ref> 조선 말기부터 일제 치하에서는 [[은행]] 경영진들이 [[관료]]나 [[왕실]] 지방 토호 가운데에서 배출됐지만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맨주먹으로 일군 자금으로 55세 무렵 [[은행장]]에 오른 경우는 그가 유일하다.<ref name="ReferenceB">고승제, <<끝없는 도전 세기의 기업-기업가 이야기>> (한국경제신문, 1991), 제7편 2. 정재학/은행업의 개척자 p.351~363</ref><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667~670</ref>
         27년 간 이어진 그의 은행경영 노하우는 아들과 손자에게 넘겨졌다. 숱한 합병 과정을 거치면서 [[민족계은행]] 자본의 총집결지였던 [[조흥은행]]에서 같은 가문의 한국인 행장을 두 명이나 배출했다. 5대 [[정종원]] 행장과 해방 후 첫 한국인 행장에 오른 2대 [[정운용]] 행장이 각각 그의 3남이고 장손이다. [[정재학]]이 [[대구은행]]과 [[경상합동은행]]에 투입한 민족자본은 정씨 가문 지분으로 상속되면서 고스란히 [[조흥은행]]에 남겨졌다.<ref name="ReferenceC"><<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83~87</ref><ref><<조흥은행 90년사>>, (조흥은행, 1987) p.412~431쪽 역대임원</ref><ref>서광운, <<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0) p.684 조흥은행 계보도</ref>
         그는 일본인들의 경영권찬탈 시도가 이어지자 경찰 출신의 일본인 지배인을 선임하는 등 경영권 방어전략으로 맞섰다. 또한 총독부와 일제강점기 중앙 은행이었던 조선은행이 자신을 행장 자리에서 줄기차게 몰아내려 했지만 그들의 시도는 번번히 실패했다. 주주총회에서 한국인 주주들이 정재학 행장에게 표를 몰아줬기 때문이다,<ref>경향신문 1981년 6월 15일 9면 경제인록 = 금융계 일제하의 금융인</ref><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17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7편</ref> 31년간 민간은행장 자리를 유지한 사례는 전 세계 어디 서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제 치하에 설립된 수많은 [[민족계은행]]이 있었지만 일제의 강제합병 과정에서 사라져갔지만 정재학 행장은 생의 마감 직전까지 저항했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창조사, 1970) P.674 "조흥은행 되기까지"</ref>
         [[조흥은행]]은 1943년 10월 1일 민족자본에 기반을 둔 9개은행( [[한성은행]] [[대구은행]] [[한일은행]] [[호서은행]] [[호남은행]] [[동래은행]] [[주일은행]] [[구포은행]] [[해동은행]])의 다단계 합병에 의해 탄생했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2) p684쪽 조흥은행계보도</ref> 해방직후 [[조흥은행]]의 지분구성을 보면 일본인 5.1%, 한국인 53.7% 그리고 은행상호보유주 41.0%로 나타났다.<ref><< 조흥은행90년사 >> (조흥은행, 1987) p113~114</ref> 한국인지분 가운데 [[대구은행]]을 설립한 [[정재학]] 가문과 [[한일은행]]의 경영권을 장악한 [[민대식]] 가문 등 두 가문의 비중이 가장 컸다.<ref>경향신문 1955년 10월22일 3면</ref>
         대구 근대 100년 대구 거부실록 정재학가</ref><ref>서광운, << 한국금융백년>> (창조사, 1970) p.684 조흥은행 계보도</ref>
  • 오세창 . . . . 1회 일치
         [[박규수]]의 문인이자 아버지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던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등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 이정훈(배우) . . . . 1회 일치
         * [[1990년]] [[문화방송|MBC]]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1990년 드라마)|대원군]]》 ... [[서광범]] 역
  • 정성왕후 . . . . 1회 일치
         ***** 조카 : 증 좌찬성 서신수(贈 左贊成 徐信修) - [[서광범]]의 5대조
  • 정운용 . . . . 1회 일치
         정운용 조흥은행장은 미 [[군정청]] 골든 재무부장(중령)과 친밀한 관계였다. 해방 후 중앙은행이 정해지지 않은 상태여서 조흥은행은 강력한 중앙은행 후보로 꼽혔다. 조흥은행은 민족자본비중이 절반을 넘은데다 일본자본의 침투가 가장 적었다.<ref><<조흥은행 100년사>>, (조흥은행, 1997), p.222</ref> 하지만 1946년 광복1주년을 맞이하여 미 군정청 내각 전원이 한국인으로 채워진다. 골든 재무부장이 본국으로 돌아갔고 윤호병이 신임 재무부장으로 선임됐다. 조흥은행 대신 조선은행이 중앙은행으로 선정됐다.<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 >> (창조사, 1970) p.237</ref> 정운용 행장 역시 1947년 10월 군정장관의 명령에 의거 행장에서 물러났다.<ref>경향신문, 1947년 10월 18일 2면 정운용 행장 해임</ref>
  • 정종원 . . . . 1회 일치
         [[조흥은행]]은 [[동일은행]] [[한성은행]]의 통합으로 1943년 출범했고 앞서 1941년 [[경상합동은행]]은 [[한성은행]]에 흡수 합병된 바 있다.<ref>윤재실, <<팔도명인전>>, ( 진명사, 1979) p.236</ref><ref>국가문화유산 포털 조흥은행 역대은행장 사진첩 제1권</ref><ref>고승제, <<한국금융사연구>> (일조각, 1970) p.210~226</ref><ref>서광운 <<한국금융백년>>(창조사,1970) p.684 조흥은행 계보도</ref><ref><<대구사회비평 2003년 7~8월 통권 10호>> 문예미학사
  • 천호진 . . . . 1회 일치
         | 서광태 역
  • 하현우 . . . . 1회 일치
         음악 외적으로 미술과 책에 관심이 많다. 가수로 전업하기 전에 미술을 전공했었고, 시 쓰는 걸 좋아해서 시인을 꿈 꾼 적도 있다고. 군 복무 시절 기타 치기와 노래 부르기를 모두 금지당해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부대의 모든 책을 독파했다고 한다. 나중에는 읽을 게 없어서 [[동의보감]]을 읽었다고 하니, 이 정도면 독서광 인증.
11532의 페이지중에 8개가 발견되었습니다 (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