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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한 (1909년)
이후 영화 미술, 연극의 무대장치, 간판 가게 설립, 다방 운영 등 다방면에서 활동하였으나, 영화 출연을 주요 직업으로 삼았다. [[1937년]] [[서광제]], [[이규환 (영화 감독)|이규환]], [[문예봉]] 등과 [[성봉영화원]]을 세우고 《군용열차》에 출연했고, [[1939년]] [[신경균]]이 연출한 영화 《처녀도》에서는 목장에 휴양차 내려왔다가 목장 주인의 딸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 주인공 역을 맡았다.
- 박기채
이 시기 영화계의 또 다른 흐름 중 하나는 영화 기업화론이었다. [[발성 영화]] 등장으로 제작비가 크게 상승하면서 이전과 같은 제작 방식이 한계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박기채는 대규모 [[스튜디오]]를 창설하여 조선 영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진 그룹 중 한 명이었다. 결국 [[안석영]], [[최남주]]와 함께 발성 영화 촬영소를 설립하기로 하고 실업가들의 지원을 받아 1937년 [[조선 영화 주식회사]]를 창립하였는데, 창립작으로 촬영한 《무정》이 비평과 흥행에서 모두 성공을 거둔데다 박기채의 연출 기법을 둘러싸고 박기채-[[서광제]] 논쟁까지 불러온 화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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