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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준길
         [[1661년]](현종 2년) [[윤선도]]가 유배된 [[삼수]]는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허목]] 등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은 윤선도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남인들은 송시열과 송준길이 잔인하다며 성토했다. 그러나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 윤선도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조선 효종|효종]], [[조선 현종|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조선 효종|효종]]과 [[조선 현종|현종]]의 [[왕세자|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때 서인 [[유계]]가 그가 올린 상소를 불태워야 한다고 건의하여, 그의 상소를 불태워 버렸다. 1차 [[예송논쟁]]이 진행되는 가운데 그는 송시열이 [[조선 효종|효종]]의 종통을 부인했다는 과격한 상소를 올렸으나 오히려 자신이 역공격을 받고 [[부호군]]으로 체임되었다가, [[1660년]] 6월 [[함경남도]] [[삼수]](三水)에 유배되었다.
         [[서인]]들은 윤선도를 귀향시키는 데 그친 현종의 처분이 너무 약하다 하여 연일 상소를 올렸다. 이에 따라 왕은 "선도를 [[삼수]](三水)로 귀양보내라"는 하교를 다시 내리게 되었다.<ref name="leedeok250"/> [[1660년]] [[4월]] 명이 바뀌어 함경도(咸鏡道) 삼수군(三水郡)에 유배령을 받고 출발, 그해 [[6월]]에 [[삼수군|삼수]]에 도착하였다. 그해 겨울에 <예설 禮說> 2편을 지어 복제 문제를 소상히 밝혀 놓았다. 여기서 그는 장자가 죽고 차자가 왕위를 계승했으면 장자로 보는 예설의 근거 조목을 찾아서 정리, 저술하였다.
         그의 장남 윤인미(尹仁美)는 또한 학식이 많기로 알려져 명성이 있었다. 윤선도가 [[삼수]]에 유배중일 때 장남 [[윤인미]]가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서인]]들에 의해 아버지 윤선도에 연좌되어 관직임용에서 배척당한다. 이후 윤인미는 [[금고형]]을 선고받아 관직을 제수받지 못하고 13년간 금고생활하다가 윤선도가 죽고 3년 뒤인 [[1674년]](현종 15년)에 죽으니, [[1677년]](숙종 3년) [[사간원]] 헌납(司諫院 獻納)을 [[추증]]된다.
         [[1661년]] 전국적으로 가뭄이 들어 흉년이 일어났다. 4월에 가뭄이 극심해지자 이때 [[삼수]]도 흉년과 기근이 심하여 그의 유배지를 [[북청]]으로 옮기는 논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때 [[송시열]]과 [[송준길]]이 그의 유배지를 옮기는 것을 반대하여 [[허목]] 등과 언쟁이 벌어졌고, [[송시열]]과 [[송준길]]의 뜻이 관철되어 윤선도의 유배지는 옮겨지지 못했다. 흉년이 계속되자 현종은 구언(求言)을 하였고, 이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조경]](趙絅)이 상소를 올려 윤선도를 동정하며 유배지를 옮겨줄 것을 청하였다.
         이어 [[송준길]]이 그의 유배지를 좀더 나은 곳으로 옮겨줄 것을 청하여 윤선도를 삼수(三水)보다 풍토가 나은 북청(北靑)으로 이배하도록 하였으나, 뒤이어 [[조경]](趙絅)이 윤선도를 옹호한 소를 올렸다가 다시 논란이 되었다.
         [[조경]]은 윤선도를 옹호하며 흉작지에 유배된 윤선도를 구명하였으나 [[서인]]의 탄핵상소가 빗발쳤고, [[조선 현종|현종]]은 분노하여 [[조경]](趙絅)을 삭탈관작하였다. 이어 [[1660년]] [[겨울]], 윤선도가 유배지 삼수에서 지은 <예설 禮說>이 문제가 되어 다시 [[서인]] 삼사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해 [[5월 15일]]에는 이배의 명이 취소되고 [[6월 13일]]에는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죄를 추가하여 [[위리안치]](圍籬安置) 형이 추가되었다. 이듬해인 [[1662년]] [[3월 28일]] [[위리안치]]를 철거하였다.
         [[1665년]] [[1월]] 흰무지개가 해를 꿰뚫고 [[2월]]에는 [[혜성]]이 나타나자 현종은 자신을 책망하며 구언(求言)을 하였는데 이때, 그해 [[2월 21일]] 유학(幼學) [[성대경]](成大經)이 구언에 따라 상소를 올려 윤선도의 방환을 탄원하였다. 이를 계기로 [[허목]]과 [[윤휴]] 등 [[남인]]에서는 계속 윤선도를 구명하는 상소를 올렸다. [[2월 27일]]에 다시 재앙으로 큰 가뭄이 발생하였는데, 그 결과 윤선도를 전라도(全羅道) 광양(光陽)으로 이배의 명이 내려졌다. 윤선도는 [[4월]]에 [[삼수]]를 출발, [[6월]]에 [[전라남도|전남]] [[광양시|광양]]에 도착하여 아래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그의 아들에게도 [[연좌제]]가 적용되어 장남 [[윤인미]](尹仁美)는 그가 [[삼수군|삼수]]에서 귀양살 때 급제하였으나, 금고형 13년형을 선고받고 그가 죽은지 4년 뒤 [[1674년]](현종 15년)에 병사했다. [[1675년]] [[1월]] 그에게 가해진 [[유벌]]을 풀어주기를 청하는 [[윤휴]]의 상소로 유벌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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