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소개 ¶
에도 시대에 시행된 제도. 다이묘들이 에도에 처자를 두고 본래 부임 영지와 에도를 왕복하도록 한 제도이다. 지방의 다이묘들로 하여금 가족들은 에도에 머물게 하는 한편 다이묘 본인도 1년은 에도에, 1년은 본래 번에 있도록 정하고, 반복해서 오가도록 한 제도이다. 각 다이묘들은 에도에 출장소를 만들게 된다.
이는 중세 봉건제도의 관습에 근거하여, 하급자인 사무라이가 상급자인 대귀족[1]이나, 사무라이를 통솔하는 막부의 쇼군에게 '참배'하여 그들을 호위함으로서 '병역'을 봉공으로 바치고, 그 댓가로서 영지를 보유할 권리(은상)을 얻는다는 개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2. 역사 ¶
이전부터 사무라이들은 일종의 군역으로서, 중앙에 상경하여 귀인을 호위하는 관습을 가지고 있었다. 헤이안 시대에는 교토대번역(京都大番役)이라고 하여 지방무사들이 교토에 상경하여 호위를 맡는 관습이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가마쿠라 대번역(鎌倉大番役)이라고 하여 가마쿠라에도 상경하도록 어성패식목(御成敗式目,가마쿠라 시대의 무가법률)에 지정되어 있었으며, 교토에 상경하여 호위하는 임무도 무사들마다 균등하게 분배하였다. 이러한 관행은 일본에서 어느 정도 통일 세력이 나타날 때마다 반복되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정권에서도 오사카에 각 영주들을 상경하여 주둔하고 가족을 인질로 두게 만들었다.
이러한 관습에 따라서 도쿠가와 막부가 열리고 에도 시대가 시작되자, 다이묘들은 에도에 처자를 두고 영지와 에도를 오가면서 생활하는 관행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관행이 무질서하게 시행되었기 때문에 폐해가 많아, 도쿠가와 이에미츠가 반포한 간에이령(寛永令) 무가제법도(武家諸法度)의 제2조에 지정되어 공식적인 제도가 되었다. 법령으로 정해진 까닭은 이전까지는 참근하는 관행이 있었으나, 그 시기가 정확하지 않아 오히려 다이묘들이 불편[2]하였기 때문에 1년 간격으로 하도록 명확하게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법령이 정해짐으로서 다이묘들이 막부에 '인사'를 오는 것이 명확하게 결정되어, 막부와 다이묘의 상하관계가 완성되었다.
3. 특징 ¶
일반적으로 행렬을 통해 각 번의 경제력을 소모시켜 반란을 막는 것이 목적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결과론적인 얘기로, 실제 모반 방지는 다이묘의 가족들이 에도에 머무르는 것으로 충분했고, 다만 다이묘들이 체면을 중시하여 행렬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에 집착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과도한 지출로 이어진 것이다.
일반적으로 육로 이동이 대부분이지만 규슈와 시코쿠 지역의 다이묘들은 배로 이동하기도 했는데, 해로의 경우 당시의 낙후된 선박 및 항해기술의 한계로 인해 육로와는 달리 일정을 맞추는 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에도 장거리 항해는 꺼리고 되도록 육로 위주로 이동했다.
이러한 인질 정책 때문에 오히려 다이묘의 가족(본처와 적자)들은 지방 영지에 내려가지는 것이 금기시 됐다. 그래서 다이묘들은 지방에 첩과 서자를 두는 것이 보통이었다.[3] 그래서 초기에는 본래 영지가 지방에 있는 다이묘가 '상경'하는 현대의 관점에 맞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으나, 후기에는 오히려 본래 수도 출신이었던 다이묘가 지방으로 '하향'하는 이미지에 가깝게 된다. 다이묘들은 대부분 에도에서 태어나서, 유년기를 에도에서 지내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적자가 대를 이을 수 없는 경우가 되서 지방에 있던 서자가 대를 이어받게 된 경우라면 '상경'하는 이미지가 될 것이다.
다이묘들은 서로 체면치례를 하려고 경쟁적으로 행렬을 화려하게 만들었는데, 이 때문에 에도 막부에서는 규제를 정해서 다이묘들의 석고에 맞춰서 일정한 수의 인력만을 동원하도록 했다. 당초에는 각 번의 번사(번에 소속된 사무라이)들이 실제로 행렬에 참가했으나, 후기에 가면 경제적 문제로 다이묘 행렬에만 전문으로 참가하는 일용직을 동원하게 됐다. 이러한 일용직들은 겉치레는 사무라이였지만, 실상 단순한 아르바이트 코스플레이어(…)에 가까웠다. 일설에는 사쿠라다문의 변(桜田門外の変)이 단 10인으로 성공했던 것도 이러한 저질 일용직 행렬이었기 때문에 실제 전투가 벌어지자 다들 도주했기 때문이라고.
4. 영향 ¶
이처럼 각 번의 재정에 부담을 주던 제도였으나, 반대로 이러한 '다이묘 행렬'을 접대하는 숙박시설과 역참 제도가 정비되었으며, 이를 통해 일본 내 상업 및 서비스업이 발달하는 효과를 낳았다.[4] 오가는 길마다 다이묘가 체면치례를 위해서 돈을 뿌리고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다. 각지에서는 다이묘 행렬을 접대하고 팔기 위하여 '특산물'을 만들었다. 이로서 전국의 부가 집중된 에도는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지방 다이묘 측에서도 나쁜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정치 중심지인 에도에서 정치적, 경제적으로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수집하고, 번영하는 에도의 문화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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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대에는 실권을 사무라이가 쥐게 되었지만, 당초 사무라이는 대귀족을 따르는 호위무사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 [2] 일일이 참근할 것인지, 영지에 돌아갈 것인지를 막부에 물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 [3] 막부 말기에는 이 금제가 해제되었는데, 그 때문에 인질 걱정없이 반란을 일으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날 수 있었다(…).
- [4] 이 당시 상업의 발달에 대해서는 "오사카 상인이 노하면 전국의 다이묘들이 벌벌 떤다"는 말이 대변해 준다. 다이묘들이 너도나도 거상들에게 돈을 빌리다 보니 나중엔 그들에게 번의 재정까지 목줄을 쥐이고 만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