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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준호(배우)
         연기 외에 인맥으로도 유명하다. [[박찬호]], [[장동건]], [[신현준(배우)|신현준]] 등등 연예, [[정치]], [[사회]]계를 망라하고 친분이 깊은 사람들이 많아 그의 [[핸드폰]]에 [[전화번호]]가 등재된 인물 수만 [[무려]] 3,000여명이라고 밝힌 바가 있다.
  • 정칠성
         '''정칠성'''(丁七星, [[1897년]] ~ [[1958년]]?)은 [[대한제국]]의 기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 [[페미니스트]], 언론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페미니스트]]이다. 별칭은 '''금죽'''(錦竹 또는 琴竹)이다.
         유년 시절에 기녀가 되어 “금죽”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고, 후일 필명이자 아호로 사용하였다. 기생학교에서 수료한 후 한남권번의 기생으로 있다가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고, [[여성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허정숙]](許貞淑),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 여성들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였고, [[일본]] 유학 중 1925년 도쿄에서 여자유학생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했다.
         해방 후 조선부녀총동맹을 결성해 부위원장이 되고, [[조선공산당]]과 [[민족주의민주전선]]에서 활동하다 [[1948년]] [[4월]]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남북협상]]에 참가한 뒤, 그해 [[8월]] 미군정의 좌익 탄압을 피해 해주 남조선인민대표자 대회차 월북했다가 내려오지 않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8월]]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48년]] [[10월]] [[조선민주여성동맹]] 중앙위원, 1955년 민주여맹 부위원장, 1956년 4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57년]] [[8월]] 제2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재선되었다. [[1958년]] 국내파 [[공산주의]]자 및 사회주의자들을 제거할 때 숙청되었다.
         19세 때에는 말 타고 나라를 구하는 외국여걸들의 전기를 읽고 자신도 그와같은 유명한 여장부가 되려고 승마를 배우기까지 하였다.<ref name="dispose">[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19971223.00000014.000010&newsType=old < 대구.경북 근.현대인물사 . 38 > 정칠성]</ref> 여자가 집 밖으로 다니는 것을 꺼려하고, 말을 탄다는 것은 금기시되기조차한 사회에서 그녀의 행동은 도발적인 것이었다. 정칠성은 이때의 경험을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유쾌했던 일로 회고하는 글을 잡지 '별건곤(別乾坤)' 에 싣기도 하였다.<ref name="dispose"/>
         [[3.1 운동]]에 참여한 [[기생]]의 한사람이었으며, [[조선총독부|총독부]]의 눈을 피해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여자기예학교]]를 수학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제목=3·1 독립운동 뛰어든 ‘사상기생’ 사회주의 운동가로 활동
         그는 작문에도 능하여 글과 논설을 지어 발표하였는데, 여성의 계몽, 교육의 장려, 사회 부조리의 개선, 위생 청결론 등을 주장하여 이른바 '사상 기생'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당시 태화관을 출입하던 소설가 장혁주는 그의 존재를 인상깊게 기억했다가 회상하기도 했다. [[1920년]]에는 [[김일엽]], [[나혜석]], [[김명순 (1896년)|김명순]] 등과 함께 잡지 [[신여자]]지의 필진으로 참여하였으나 [[신여자]]지는 재정난으로 곧 폐간되었다. 이후 그는 [[조선]]의 역사 관련 서적, [[사회주의]] 사상과 [[페미니즘]] 관련 서적들을 구해서 독서하였다.
         [[1923년]]말부터 [[허정숙]],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여자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가부장제]]의 억압과 남성들의 억압, 제국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날 것을 주장하였다. 이어 [[허정숙]], [[정종명]] 등과 함께 여성사회운동단체를 조직하려고 여학생과 부인 중에서 동지를 규합하기 시작하였다. 이 중 신분과 배경을 보지 않고 사람을 사귀던 [[허정숙]]과는 특별히 친하게 지냈으며, 이후 정칠성은 [[허정숙]]과 함께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상을 조선에 소개하는데 앞장섰다.
         [[1924년]] [[5월 15일]] 그는 [[경성]] [[천도교당]]에서 [[허정숙]], [[주세죽]], [[김조이]], [[정종명]], 박원희, 김필애 등과 함께 한국 최초의 여성 사회운동 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朝鮮女性同友會)를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여성동우회 창립발기식의 사회자로 활동했다. 바로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이어 신사회 건설과 여성해방운동에 참여할 여성의 단결 등을 목표로 설정하였고,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사회운동을 벌였다.
         정칠성은 정종명, 오수덕 등과 함께 종래의 소극적 여성운동을 극복하고자 여성해방단체조직에 착수하였다.<ref name="dispose"/> 당시 여성의 사회활동이란 생소한 것이었기에, 정칠성은 일반 부인을 대상으로 직접 회원모집에 나섰다.<ref name="dispose"/> 이후 그는 각지의 순회강연과 칼럼, 기고를 통해 여성 계몽운동에 나섰고, 경성에서 다른 여성단체의 일을 보면서도 [[1925년]] [[3월]]까지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을 겸직하였다. [[1924년]] [[7월 20일]]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으로, 인천노동총동맹회 상무위원(仁川勞働總同盟會常務委員)에 선출, 겸임하였다. 또한 대구여자청년회 집행위원 일도 겸하였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체류 중, [[1925년]] [[3월]] [[도쿄]]에서 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이현경]],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의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조직, 삼월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3월 8일]] [[대구]]부내 노동공제회에서 [[대구여자청년회]] 주최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인데이]] 기념행사에 연사로 초빙되어 '국제부인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5년]] [[3월 22일]]에는 [[대구청년회관]]에서 경북지역 인사들이 모인 사회주의 연구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3월 31일]] 다시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여자기예학교]]에 복학하였다.
         [[1925년]] [[11월]] [[일본]] 정부에서 가상의 적을 대비하여 각급 중고등학교에 군사훈련 및 각종 군사교육을 실시하자, 정칠성은 군사교육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다. [[11월 7일]] [[홋카이도]]의 소준고등학교 강당에서 일본내 시민단체, 여성단체, 사회주의 운동단체 및 조선인 유학생단체, 삼월회, 일월회(남성 단체) 공동 주최로 열린 [[군사교육 반대 집회]]에 그는 [[삼월회]]의 대표 자격으로 박경희(朴慶姫)와 함께 참여하였다. 그러나 [[일본]]경찰 2백 명이 급히 투입되어 진압하자, 바로 피신하였다.
         사회주의 여성운동가 중에서도 정칠성은 유독 원리 원칙에 충실했다. 그는 평소 이론을 떠난 개인적 경험담은 가급적 자제하며, 동지들에게는 [[사회]] 운동과 여성의 해방이 더 중요하므로 가정을 뛰쳐나오라고 권유하였다.<ref name="mungongs">[http://culturedic.daum.net/dictionary_content.asp?dirView=no&Dictionary_Id=10028184 정칠성]</ref> 그는 일찍부터 노동여성의 고통에 공감하며 계급해방을 당당히 외쳤지만 당대 사회가 지닌 제약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조선사회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 성과 사랑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했다.<ref name="mungongs"/> 그는 여성이 권리를 찾기 위해서는 여성이 해방되어야 하고, 여성이 해방되는 길은 결혼과 가족, 가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했다.
         [[1927년]] [[4월 26일]]에 [[경성]] 중앙유치원에서 좌우합작의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설될 때 [[유각경]], [[황신덕]], [[김선]], [[허정숙]]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연합체인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의 결연을 주선하였다. [[4월 28일]] [[근우회]]를 발족되자 [[근우회]] 회원모집부 부원이 되어 [[대구]]로 내려가 홍보, 회원을 모집하고 근우회 경상북도지회 조직을 주관하였다. 정칠성은 근우회가 전국에 지회를 결성할 때 대구지회 결성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집행위원(당시 21명)을 구성하는 데까지 활약하였다.<ref name="dispose"/>
         [[1927년]] [[5월 19일]]의 [[근우회]] 총회에서는 [[4월 16일]]을 [[여자의 날]]로 정하는데 참여하였다.<ref>동아일보 1927.05.29 2면, 사회면</ref>
         [[10월 6일]] [[박원희]]와 함께 [[근우회]] 조사위원 겸 전권위원에 임명되어 [[경성]]에서 [[함흥]]으로 파견되었다. 바로 [[근우회]] 함흥지회를 개설하고, 함경도지역 조사 후 [[10월 6일]] [[함흥]] 오로리의 오로여자상조회(五老女子相助會)에서의 강연을 계획하였으나 함흥경찰에 의해 체포, 강연회 자체가 무산되고 되돌아왔다. 정칠성과 박원희가 경성으로 되돌아간 뒤 [[함흥여자청년회]]와 함흥기독청년회 주최, [[동아일보]], [[조선일보]] 후원 하에 부인문제대강연회가 열리자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러나 경찰의 방해로 집회가 무산되자 오히려 사회단체의 집회를 방해한다 하여 지식인층의 반발을 불러오게 됐다. [[10월 16일]] 근우회 집행위원으로 대구에 다녀온 뒤 다시 함흥으로 가서 근우회 함경남도 지부 조직에 착수하였다.
         1928년 5월 12일 경성부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근우회 창립1주년 기념식 때 사회자이자 연사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근우회 창립 일주년 기념식을 맞으며'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6월 5일]]에는 [[경상북도]] [[영천]]에 파견되어 [[근우회]] 영천지회 조직에 착수하였다. [[6월 7일]]에는 근우회 영천지회 창립발기식을 지원하고 근우회 조직 취지를 설명하였다.
         여자직업사의 수자수 교사와 근우회 각 지회설치 활동을 하면서도 동아일보, 삼천리지 등에 칼럼과 논설을 발표하였다. [[1928년]] [[5월 20일]]에는 황주청년회관에서 [[신간회]] 황해도 황주지회가 주최한 '사회문제대강연회'에 연사로 참여, '여성운동과 신간회'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강연 주제 중 그는 '우리 조선여자들은 남자들의 완롱물이요, 남자의 위안물이며, 남자들의 일개의 생식기계에 지나지 않는 노예였다.'는 내용이 문제시되어 임석경찰관에 의해 강제로 연행되었다가 풀려났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의 사랑과 섹스가 무관하다는 관점은 [[1920년]]대 [[1930년]]대 조선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정칠성은 사랑과 성이 무관하다는 콜론타이의 이론을 수용, [[조선]]에 소개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사랑과 섹스는 무관하며 사랑 없이도 섹스가 가능하다는 주장은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고, [[성리학]]자들과 남성 문필가들로부터 음란하다는 비난과 반발을 초래하였다.
         [[1927년]]에 조직된 항일여성운동단체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던 정칠성은 '적연비판, 콜론타이의 성도덕에 대하여 (삼천리, 1929.9)에서 기자가 '콜론타이의 "연애와 성욕은 별문제"이며, 사회운동을 하느라 연애하기 힘든 상황에서 필요에 따라 성욕을 해소해야 한다는 입장에 대해 의견을 물었을 때, 정칠성은 "현실을 잘 본 말이외다. 성욕과 연애는 당연히 갈라져야 하겠지요. 그러고 결혼의 자유, 이혼의 자유가 아주 완전하게 없는 곳에서는 그렇게밖에 더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ref name="seoji193">서지영, 《역사에 사랑을 묻다》 (도서출판 이숲, 2011) 193페이지</ref>
  • 허정숙
         '''허정숙'''(許貞淑, [[1902년]] [[7월 16일]] ~ [[1991년]] [[6월 5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며 여성운동가, [[사회주의]]자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법관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언론 활동과 [[사회주의]] 운동, [[신간회]]와 [[근우회]]의 조직 등에 참여했다. [[일제 강점기]] 당시 [[자유연애]]주의자로도 유명하였다.
         [[일본]]과 [[중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 귀국, [[여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24년]] [[조선여성동우회]], [[1924년]] [[5월]]의 [[조선여성해방동맹]] 등 여성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했다. [[조선공산당]] 조직에도 참여하여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신간회]]와 [[근우회]] 등의 조직에도 참여하였다. 또한 [[동아일보]]의 기자와 논설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26년]] [[5월]] 도미했으나 이듬해 귀국,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 때 여학생들 선동을 이유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1936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 [[민족혁명당]], [[조선독립동맹]] 등에서 활동하였다.
         허정숙은 자신의 어머니 정보영을 통해 '여성의 삶'을 처음 발견했다.<ref name="hanis0">[http://legacy.www.hani.co.kr/section-005100032/2002/01/005100032200201281825008.html 금욕·순정…전통적 여성성 반기] 한겨레신문 2002.01.28</ref> 아버지 허헌은 늦게까지 공부하였고, 남편과 가족의 뒷바라지를 하던 어머니 [[정보영]]을 통해 여성의 삶에 대해 회의하였다. 모든 것을 가족에게 투자하고 '자신의 욕망을 근원적으로 포기하고 가족을 위해 우직하게 헌신했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허정숙은 '이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ref name="hanis0"/> 훗날 그는 과연 [[가족]]과 [[가정]]이 인간의 행복한 삶을 보장하는지 의심스러워지기 시작했다고 회고하였다.
         어려서 허정숙은 [[기독교]] 교회에 다녔다. 아버지 [[허헌]]은 [[1910년]] [[원산]]에서 기독교를 전도하는 [[이동휘]]를 만나 [[기독교]]인이 된 후 향리와 [[한성]]에 [[교회]]를 세우고 청년교육에 전념하면서 당시 항일 운동가를 도왔다고 하니 허정숙의 어린 시절에 기독교 영향도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ref name="shinyoung132"/> 그러나 후에 [[사회주의]] 사상과 [[페미니즘]] 사상을 접하면서 기독교를 버렸고, 오히려 [[기독교]]는 [[자본주의]]의 첨병으로서 인간을 지배자의 노예로, 여성을 남성의 노예로 만드는 사상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착한 사람, 선량한 사람이 되자면서 평일에는 속된 인간으로 변모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허정숙으로 하여금 종교에 대한 환멸감을 갖게 만드는 원인이 됐다.
         그의 집에 드나들던 [[사회주의]] 운동가들과 독립운동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받으며 유년기를 보낸 허정숙은 일찍부터 여성문제에 대한 글을 쓰고 [[경성여자청년동맹]]을 결성하면서 여성 해방 운동을 시작했다.<ref name="pyung01">[http://kdlpnews.org/reader/view_pastarticles.asp?id=200109141000000030 <nowiki>[</nowiki>한국의 여성운동가들-4<nowiki>]</nowiki> 허정숙 "계급해방"과 "여성해방" 사이에서]</ref>
         기숙사 생활 외에도 그는 끝내 학교생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1919년]] [[3월]], [[3·1 운동]] 직후 귀국하였다. [[경성]]에서 그는 [[3·1 운동]] 이후 계속 이어지던 만세 대열에 참여하였지만 만세 운동은 곧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검속을 피해 은신하였다. 그는 [[일본]] 유학생활 중 습득한 [[사회주의]] 사상을 연구, 공부한 뒤 귀국 후에는 [[사회주의]] 운동과 [[페미니즘]] 운동에 참여한다.
         [[1920년]] 가을, [[상하이]]로 유학, [[이동휘]]의 집에 머무르면서 사회주의 사상에 빠져들었고, 그의 집에 있으면서 상하이 기독교청년회에서 연 외국어강습소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다가 [[상하이 외국어 학교]]에 입학했다. [[상하이 외국어 학교]]에서 [[영어]]와 [[일본어]]를 배웠다. [[상하이 외국어 학교]] 재학 중 허정숙은 [[공산주의]]운동가인 임원근을 만났다. 그는 상하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임원근]]을 만나게 된다.<ref name="shinyoung137">신영숙,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조신성과 허정숙을 중심으로〉역사학회, 《역사학보 150호 (1996년 6월호)》 (역사학회, 1996) 137페이지</ref> 그리고 임원근을 통해 [[박헌영]], [[김단야]], [[주세죽]], [[조봉암]], [[김조이]] 등을 만났고 사회주의 서적들을 접하게 된다. 이후 [[임원근]]과 자주 만나다가 연인관계가 되었고 허정숙은 아버지 [[허헌]]에게도 편지를 주고 받으며 이 사실을 알렸다 한다. 아버지 [[허헌]]은 둘의 관계를 흔쾌히 수락하였다. [[1921년]] [[진링 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하려 하였으나 [[늑막염]]으로 귀국하였다.
         [[일본]], [[중국]], [[미국]] 등지로 유학을 하면서 당시의 진보적인 이론과 비판적인 사회의식을 길렀다.<ref name="shinyoung133"/> 동시에 잘못된 [[가족제도]]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ref name="shinyoung133"/> 유학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그는 [[조선]] 여성들을 억압하는 가장 큰 원인이 [[식민지]]와 계급의 문제임을 깨닫고 이른바 '인습 타파'와 '교육 계몽'에 중점을 두는 기존의 [[부르주아 여성운동]]과는 또 다른 [[사회주의]] 계열의 [[여성주의|여성운동]]을 주도하게 된다.<ref name="pyung01"/> 한편 유학생 [[공산주의]]자들 끼리의 만남도 주선하여 [[박헌영]]과 [[주세죽]]의 만남을 적극 주선하기도 해 주었다.
         [[자유주의]]자 여성들이 위생에 좋고 편리하며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단발을 했다.<ref name="sizs106">최규진, 《근대를 보는 창 20:인간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 묶음이 곧 역사이다》 (서해문집, 2007) 106페이지</ref> 그에 반해 허정숙, 주세죽, 심은숙, [[정칠성]] 같은 [[사회주의]]자 여성들은 여성 해방과 반봉건운동 차원에서 단발을 하였다.<ref name="sizs107">최규진, 《근대를 보는 창 20:인간을 둘러싼 여러 이야기 묶음이 곧 역사이다》 (서해문집, 2007) 107페이지</ref> [[성리학]]자들은 모던걸을 자칭하는 그와 일부 여성들을 가리켜 毛斷 걸, 못된 걸, 못된 년이라는 단어로 희화화하여 불렀다. 허정숙은 [[대한제국]] 때의 남자 [[단발령]] 조차도 매국으로 간주하던 당시의 성리학자들을 아집이 강한 꽁생원이라며 조롱하였다.
         당시 여성 지식인들 중 가장 먼저 단발을 했던 허정숙은 다시 머리를 기르면서 그것(단발)은 모두 필요에 의한 것일 뿐, 특별하게 겉모습에 신경 쓴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ref name="somm99"/> (머리 감는데) 시간도 절약되고 위생적이므로 개인적인 필요에 의해 단발을 단행했으나 여성운동을 해나가면서 일반 여성들에게 더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서 사회적 필요에 의해 도로 머리를 기르게 되었다는 것이다.<ref>이상경, 《한국근대여성문학사론》 (소명출판, 2002) 100페이지</ref> 이후 여학생들 사이에 단발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는 머리를 기르기도 했고 단발하기도 하였는데, 단발에 대한 비난이 계속되자 나중에는 공개 단발 퍼포먼스를 감행한다.
         [[1921년]]부터 각지에서 여성 단발운동이 벌어지자 허정숙은 단발을 감행하였으며 이후 여성 단발 운동을 지지하고, 적극 주도하였다. [[1923년]] [[조선일보]] 기사에는 "이것(단발)을 본 여러 군중들은 물밀듯 모여들어 혼잡을 이루는 동시에, 그 해괴함을 놀내지 안이하는 이가 없섯다더라."며 조선일보 1923년 3월 26일자에 실린 황해도 해주의 야학강습소 여교사 이춘봉(李春鳳)의 단발(斷髮)을 알리는 기사가 보도되었다.<ref name="chossdd">[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10/11/2011101102429.html <nowiki>[</nowiki>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nowiki>]</nowiki> <nowiki>[</nowiki>68<nowiki>]</nowiki> "단발한 여자는 후년(後年)에 대머리가 된다"] 조선일보 2011.10.12</ref> 이 교사의 단발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그는 단발의 편리함, 위생성과 머리 감을 때의 간단함을 이유로 들어 반박하였다. 또한 [[단발령]]을 큰 잘못이자 망국의 원인으로 규정한 [[성리학]]자들에 대해서도 사회가 부패하고 정치인들의 잘못으로 [[조선]]이 망한 것이며 [[단발령]]과는 무관하다며 반박하였다.
         이후 '세상이 귀찮아 중이나 되겠다고' 단발했든(조선일보 1924년 7월 21일자), 부부싸움 끝에 남편이 강제로 삭발을 시켰든(1923년 12월 13일자), 여성의 단발은 빠짐없이 기사로 소개됐다. 군산 기생 강산월(康山月)이 더 이상 '유산계급 노리개'를 할 수 없다며 단발했을 때는 박스기사로 크게 소개됐다.(조선일보 1925년 3월 20일자)<ref name="chossdd"/> 그러나 [[단발령]]을 최대의 불효와 패륜으로 규정한 [[성리학]]자들은 그가 사회를 금수처럼 만들려 한다, 뉘집의 딸이냐며 비방하였다. 단발 운동을 지지, 주도하던 그는 [[1925년]] 다시 공개 단발을 감행한다.
         [[1922년]]부터 사회주의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1922년]] [[1월 24일]] [[조선여자교육회]]가 정식으로 [[조선여자교육협회]]로 승격되자 창립 멤버의 한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3년]] [[소련]]으로 건너가 [[모스크바]]의 [[동방노력자공산대학|모스크바 공산대학]](Коммунистиче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трудящихся Востока)에 입학하였다. [[1924년]] [[1월]]초 [[모스크바공산대학]]을 중퇴하고 김찬웅 등과 함께 [[만주]]를 거쳐 국내에 들어오던 중, [[평안북도]][[경찰부]] 형사 [[이성근]](李聖根), [[김덕기]](金德基) 등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풀려났다.
         ==== 사회주의 운동 참여 ====
         귀국 직후 그는 '여자도 한 사람의 인간이다'라고 주장하여 화제가 되었다. 귀국한 뒤 [[박헌영]]과 [[주세죽]], [[김단야]]와 [[고명자]], [[조봉암]]과 [[김조이]] 부부 등과 함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허정자는 이때 박헌영, 김단야와 함께 [[화요회]] 3인방으로 불리던 [[임원근]]과 결혼하여 부인이 되었다. 그 후 중국에서는 이름 정자 대신 정숙을 사용하였다. 허정숙은 여자들이 봉건 이래로 남자와 사회로부터 부당한 억압과 순종을 강요당하였으며, 일제로부터도 억압당한다고 보았다. 그는 조국의 독립에 앞서 당면 과제로 여자들이 우선 남자들로부터 독립하고,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설수 있어야 된다고 주장했다. 남자들로부터 독립하려면 의식이 깨어야 하고, 그 다음으로는 경제적으로 독립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1925년]] 허정숙은 '[[화요회|신사상 연구회]]'(후일의 [[화요회]]로 개명)에 가입하였고, [[1925년]] [[4월]]에는 [[경성]]에서 [[사회주의]] 활동가인 [[박헌영]]등과 [[안티 기독교]] 공개 강연회를 개최하였다가,[[기독교인]]들이 이들의 강연회를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신고하여 일본 경찰을 피해 한동안 은신하기도 했다. [[1926년]] 5월[[미국]]으로 유학할 때까지 그는 각종 [[안티 기독교]] 강연에 참여하였다. 그 뒤 [[송봉우]]와 한때 동거하기도 했다.
         [[1924년]] [[1월]]부터 그는 여성 해방 사상을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YMCA청년회와 [[사회주의]] 모임, 여성 계몽 강연에 나가 여성해방론을 소개하였다. 그리고 국내의 여성 지식인들의 참여와 자각을 호소하였다. [[1924년]] [[5월]] [[주세죽]]·허정숙·[[박원희]] 등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했던 여성운동가들이 [[조선여성동우회]]를 만들었다.<ref name="yeosong182">역사학연구소,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 2004) 182페이지</ref> [[1924년]] [[5월 23일]] 허정숙은 [[조선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하고 집행위원이 되는 등 본격적인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작성한 [[조선여성동우회]]의 강령 초안에는 '사회진화의 법칙', '신사회 개척', '조선여성해방운동' 등이 있었다. 또한 그는 [[동아일보]] 등에도 글과 컬럼을 기고했는데 이때 그는 '수가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고<ref>영어 sky를 한글 음운으로 순화한 것이다.</ref>, 한자로는 '秀嘉伊'라 하였다.
         [[김명순 (1896년)|김명순]], [[김일엽 (승려)|김일엽]], [[나혜석]], [[윤심덕]], [[박인덕]] 등 [[3·1 운동]]을 전후하여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와 [[1920년대]] 중반까지 문화계에서 활동을 한 여성들이 신여성의 대표로 알려졌다.<ref name="sinmun345">한국여성문학학회, 《한국 여성문학 연구의 현황과 전망》 (소명출판, 2008) 345페이지</ref> 또 [[1920년대]] 대중들 앞에 등장한 허정숙과 [[정종명]]은 의식적으로 사회 해방을 추구하고, 낭만적 사랑보다는 동지애를 중시했다는 점에서 지향점은 그들과는 달랐지만 신여성으로 통칭되었다.<ref name="sinmun345"/>
         허정숙은 당시에 풍미하던 [[엥겔스]], [[베벨]], [[콜론타이]] 등의 [[여성 해방론]]을 수용, [[한국]] 사회의 특성에 맞게 그 이론 틀을 모색하고 실천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 적용하고자 노력한 대표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가였다.<ref name="shinyoung143">신영숙, 〈일제시기 여성운동가의 삶과 그 특성 연구:조신성과 허정숙을 중심으로〉역사학회, 《역사학보 150호 (1996년 6월호)》 (역사학회, 1996) 143페이지</ref> [[1922년]] 귀국 이후 활동 초기부터 그는 수가이라는 필명으로 신문, 잡지 등에많은 글을 발표하였다.<ref name="shinyoung143"/> 또한 칼럼과 계몽 강연 활동에도 수시로 나갔다.
         허정숙은 여성의 해방을 위해서는 사회의 변화가 필요함을 확신하였다. 그리고 한 사람의 개인의 참여가 사회를 바꾸는 중요한 동인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1924년]]에는 [[여성동우회]]의 주요 멤버로, 그리고 [[1925년]] [[조선공산당]]이 결성되었을 때에는, 직접 참여는 않았지만 그는 여성해방은 궁극적으로 사회 변혁 속에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이념을 가지고, [[사회주의]] 사상을 적극 지지하였다.<ref name="shinyoung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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