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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친왕
         | 종교 = [[유교]]([[성리학]]) →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세례명]]: 비오)
          | 종교 = [[유교]]([[성리학]]) →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세례명]]: 비오)
         그 후 여러 차례 [[일본]]으로부터 건너올 것을 계속 강요받았으나 거절하였고, 끝까지 [[일본 제국|일본]]을 배척하는 정신을 지켰다. 이후 [[일본 제국|일제]]로부터 형식적인 공(公)의 지위가 박탈되었다. 임종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의하였으며, 세례명은 '''비오'''이다.
         [[1955년]] [[8월 9일]]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로 개종, 병석에서 [[장면]](張勉) [[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세례명 [[요한]])을 대부로 하여 영세하였다.<ref>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장면박사 회고록》 (가톨릭출판사, 1967) 558페이지</ref> 의친왕의 세례명은 '''[[비오]]'''이다.
         의친왕은 죽기 전에 [[로마 가톨릭교회]] 귀의를 할 것을 약조하였다. 이는 조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도 수만 명을 사형시킨 것에 대한 참회의 성격도 있었다. [[1955년]] [[8월 9일]]을 기하여 의친왕 이강은 천주교 교우이던 구왕실(舊王室) 서무계장과 [[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을 지낸 [[장면]] 등과 연락, [[8월 15일]]경 그들의 영향으로 서울 가회동성당 박우철 신부를 불러다가 비오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고 [[8월 16일]]에 영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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