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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주호
         2013년 7월 18일, [[1. FSV 마인츠 05|마인츠 05]]로 이적하였다. 이후 마인츠 코파세 아레나에서 열린 [[SC 프라이부르크]]와의 2013-14 [[분데스리가]] 19라운드 홈 서울에서 전반 24분 선제골을 넣었고 팀은 2-0으로 승리했다. 마인츠에서 왼쪽 풀백과 중앙 미드필더를 오가며 2시즌 간 리그 43서울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하였다.
         ||[[푸스발-분데스리가 2013-14|2013–14]]||rowspan="3"|[[1. FSV 마인츠 05|마인츠 05]]||rowspan="5"|[[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27 || 1 || 2 || 0 || colspan="2"|-|| colspan="2"|-|| 29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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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스발-분데스리가 2015-16|2015–16]]
         |[[푸스발-분데스리가 2016-17|2016–17]]
         [[분류:198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해외 진출 축구 선수]][[분류:스위스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독일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일본의 외국인 축구 선수]][[분류:미토 홀리호크의 축구 선수]][[분류:가시마 앤틀러스의 축구 선수]][[분류:주빌로 이와타의 축구 선수]][[분류:FC 바젤의 축구 선수]][[분류:1. FSV 마인츠 05의 축구 선수]][[분류: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축구 선수]][[분류:보루시아 도르트문트 II의 축구 선수]][[분류:울산 현대 축구단의 축구 선수]][[분류:2014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2014년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15년 AFC 아시안컵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축구 참가 선수]][[분류:2014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축구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축구 수비수]][[분류:축구 풀백]][[분류:서울우이초등학교 동문]][[분류:숭실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2리그의 축구 선수]][[분류:분데스리가의 축구 선수]][[분류:스위스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독일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스위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1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박주호 (축구선수)
         2013년 7월 18일, [[1. FSV 마인츠 05|마인츠 05]]로 이적하였다. 이후 마인츠 코파세 아레나에서 열린 [[SC 프라이부르크]]와의 2013-14 [[분데스리가]] 19라운드 홈 경기에서 전반 24분 선제골을 넣었고 팀은 2-0으로 승리했다. 마인츠에서 왼쪽 풀백과 중앙 미드필더를 오가며 2시즌 간 리그 43경기에 출전하여 1골을 기록하였다.
         ||[[푸스발-분데스리가 2013-14|2013–14]]||rowspan="3"|[[1. FSV 마인츠 05|마인츠 05]]||rowspan="5"|[[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27 || 1 || 2 || 0 || colspan="2"|-|| colspan="2"|-|| 29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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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스발-분데스리가 2016-17|2016–17]]
         [[분류:J1리그의 축구 선수]][[분류:J2리그의 축구 선수]][[분류:분데스리가의 축구 선수]][[분류:스위스 슈퍼리그의 축구 선수]][[분류:K리그1의 축구 선수][[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독일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스위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18년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 윤기원 (축구선수)
         [[2012년]] [[5월 6일]]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뛰고 있는 [[구자철]]이 시즌 5호골을 기록함과 동시에 골세레머니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어구를 보이면서 윤기원의 1주기를 추모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구자철, 5호골 후 故윤기원 1주기 추모 세리머니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117&aid=0002230694 |출판사=마이데일리 |date={{날짜한글화|2012-5-6}} }}</ref>
  • 차범근
         '''차범근'''(車範根, [[1953년]] [[5월 22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축구 선수]]로, 현재 축구 지도자, 해설가,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이며, 1980년대에 한국인 선수로는 최초로 [[독일]]의 프로 축구 리그인 [[푸스발-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였고, [[SV 다름슈타트 98|다름슈타트]],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04 레버쿠젠|바이어 레버쿠젠]] 소속으로 뛰었다. 1972년부터 1986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주전 공격수로 활약했으며, 최다 득점 선수로 기록되었다. 그는 두 번의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여 [[1978년 아시안 게임 축구]]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는 데에 기여했고, [[1972년 AFC 아시안컵]] 준우승을 차지했다.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로 [[독일]]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하며 아시아인으로서는 역대 최다득점이 되는 리그 통산 98골을 기록하였다. 독일에서 활약했을 당시 '''차붐'''이라는 애칭으로 불렸으며, 국제 축구 역사 & 통계 연맹(''International Federation of Football History & Statistics''), 영국 ESPN통신, 아시아 축구 연맹(AFC)등에서 ‘20세기 아시아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월드사커지에서는 '잊을 수 없는 100대 스타', '20세기 축구에 영향을 미친 100인'에도 선정되었다.<ref>[http://www.iffhs.de/?b40f8ca85bd0e027e8f05f5ca833ccdcdb98c003e8f05405fdcdc3bfcdc0aec70aeedb8a3f0e03790c443e0f403b1e IFFHS 공식 홈페이지]</ref> 은퇴 후 MBC의 해설위원으로 해설가 활동을 시작했으며, [[2010년 FIFA 월드컵]]과 [[2012년 하계 올림픽]]에서 [[SBS]]의 해설위원을 맡았다. 가족은 부인 오은미, 딸 차하나, 아들 [[차두리]], 차세찌, 며느리로 배우 [[한채아]]가 있다. 차범근의 이전 A매치 기록은 121화성 55골이었으나 [[2014년]] [[11월 4일]] [[대한축구협회]]에 의해 135화성 58골로 수정되었고, 지속적인 데이터베이스 정비로 인해 기록이 수정 중이다.<ref>{{웹 인용 |url=http://www.kfa.or.kr/record/playeramatch.asp?Page=1&Query=Gender%3DM%26Name%3D%EC%B0%A8%EB%B2%94%EA%B7%BC |제목=KFA 공식 차범근 A매치 기록 |확인날짜=2015-01-2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1108133433/http://www.kfa.or.kr/record/playeramatch.asp?Page=1&Query=Gender%3DM%26Name%3D%EC%B0%A8%EB%B2%94%EA%B7%BC |보존날짜=2016-11-08 |깨진링크=예 }}</ref>
         차범근은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화성시) (양노로) (현재의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만년로)) 출생으로 그의 종교는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통합]])이며<ref>[http://news.joins.com/article/3023035 한국 교회 대해부, ‘이명박의 파워라인’ 소망교회], [[중앙일보]]</ref>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할 당시 [[독일]] 사람들이 차범근의 로마자 표기를 부르기 어려워 '''차붐'''(Tscha Bum)이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빠른 공간 침투와 공중전에 강한 면모 때문에 '''갈색 폭격기'''라는 별명이 붙기도 하였다. 2남 1녀 차하나(장녀), [[차두리]](장남), [[차세찌]](차남)를 두고 있다.
         [[1976년]] 10월 [[공군 축구단|공군]]에 입대해 사병으로 복무 중인, [[1978년]] 12월에 [[독일]]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SV 다름슈타트 98]]로 이적하였지만 병역 관련 문제로 계약이 파기되었다. (당시 차범근은 [[공군 축구단|공군]] 팀 전력 강화를 꾀하던 참모총장의 권한으로 2년 뒤 전역을 약속받고, [[공군 축구단|공군]]에 입대하였다. 약속된 [[1978년]] 12월 복무 기간을 마쳤다고 생각하고, 특별 휴가를 받아 [[독일]]로 떠나 [[SV 다름슈타트 98]] 입단 계약을 체결하였고 12월 30일 [[VfL 보훔]]과의 리그 화성에 출전해서 77분을 소화했고, 키커 평점 3점을 받는 등 좋은 활약을 펼치며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러나 [[공군 축구단|공군]]의 입장 변화로 [[1979년]] 1월 5일 다시 귀국한 후, 복귀해서 독일로 다시 나가지 못하고 [[1979년]] [[5월 31일]] 만기 전역하였다.
         병역 관련 문제를 해결한 후, [[1979년]] 7월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 스카우트된다. 스카우트 후에는 곧바로 [[UEFA컵 1979-80|1980년]] 팀을 [[UEFA컵]] 챔피언 자리에 올려놓았고, 이듬해인 [[1981년]]에는 팀이 [[DFB-포칼]] 우승컵을 드는데 공헌하였다. [[1983년]] 7월에는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바이어 04 레버쿠젠]]으로 이적하여 [[UEFA컵 1987-88|1988년]]에 다시 한 번 [[UEFA컵]]에서 우승하였다.<ref>그리고 [[독일]]의 아벤트 포스트지 (Abend Post, 당시 서독의 지역 일간지)에서 선정한 1985-86 시즌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MVP로 선정되었다. 공식적인 [[1986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는 [[하랄트 슈마허]]였다.</ref> 이 우승으로 차범근은 각기 다른 두 팀에서 [[UEFA컵]] 우승을 차지한 9번째 선수가 되었다.
         [[1989년]] 현역에서 은퇴한 차범근은 많은 기록을 남겼는데 리그 화성에서 98골을 기록하여 기존에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네덜란드]] [[빌리 립펜스]]의 기록(92골)을 경신하고,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최다 골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1999년]]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의 [[스테판 샤퓌자]]가 106골로 경신했다.<ref>2008-2009 시즌을 기준으로 차범근은 현재 [[지오바니 에우베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133골), [[클라우디오 피사로]]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페루]], 117골), [[스테판 샤퓌자]]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스위스]], 106골), [[아이우통 곤사우베스 다 시우바]] ([[브라질]], 106골)에 이어 5위로 기록되어 있다.</ref> 그리고 차범근의 308화성 출전은 [[1977년]]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덴마크]]의 [[올레 비요른모세]]가 수립한 323화성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출전 기록이지만 이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축구 국가대표팀|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게이 바바레즈]]가 경신했다. 또한 차범근이 1985-86 시즌에 기록한 17골은 지금까지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에서 [[아시아]] 출신 선수 중 한 시즌 동안 가장 많은 골을 넣은 기록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에서 활동한 10시즌 동안 단 1장의 [[옐로카드]]만을 받았을 정도로 투철한 [[페어플레이]] 정신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 [[승부차기]] 실축 경험에 따른 공포감으로 실제 화성 중에 [[승부차기]] 기회가 와도 자신이 찬 적이 거의 없었지만 대표팀 [[A매치]] 통산 135화성 58골,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통산 308화성 98골을 득점할 만큼 탁월한 골 결정력을 자랑했다. 또한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에서 기록한 98골 중 [[페널티 킥]]에 의한 득점은 단 한 골도 없다.
         * 체격이 좋은 편인데다 경마장으로 보내도 좋을 거라는 우스갯소리가 돌 정도로 빠르게 돌진하며 드리블하는 스타일로 상대 수비에게 큰 부담을 주었다. 신체 조건이 좋고 거친 몸싸움을 하는 선수들이 많은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에서도 그의 공격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 클럽에서의 포지션은 논란이 있는데 그 이유는 대표팀에서는 윙으로, 분데스리가에서는 센터 포워드로 뛰었기 때문이다. 당시는 3-5-2의 전술을 자주 사용했는데 차범근은 투톱 중 한명으로 뛰었지만 필요할때 윙어의 역할을 해주는 탓에 투톱 중 처진 곳에 위치했다. 즉 분데스리가에서 정확한 그의 포지션은 '윙어 역할을 해주는 처진 스트라이커' 였다.
         * 청소년 국가대표 시절 헤딩 경합을 하다 코뼈를 크게 다친 이후 한동안 헤딩슛은 별로 하지 않았으나 [[푸스발-분데스리가]] 데뷔골을 헤딩골로 장식한 후에는 헤딩슛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차범근은 자신이 경험한 [[푸스발-분데스리가|분데스리가]] 시절을 토대로 [[독일]]식 축구 시스템을 도입하였고, 그 결과 서서히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순간인 [[1998년 FIFA 월드컵|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은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일본]], [[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카자흐스탄]], [[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아랍에미리트]]와 같은 조였는데 무엇보다도 숙적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일본]]과 같은 조에 속한 게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아랍에미리트]]와 [[우즈베키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우즈베키스탄]] 역시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푸스발-분데스리가 1978-79|1978–79]]||[[SV 다름슈타트 98|다름슈타트 98]]||rowspan="11"|[[분데스리가]]||1||0||0||0||colspan="2"|-||1||0
         |[[푸스발-분데스리가 1979-80|1979–80]]||rowspan="4"|[[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프랑크푸르트]]||31||12||4||0||11||3||46||15
         |[[푸스발-분데스리가 1980-81|1980–81]]||27||8||6||6||5||2||38||16
         |[[푸스발-분데스리가 1981-82|1981–82]]||31||11||1||0||6||1||38||12
         |[[푸스발-분데스리가 1982-83|1982–83]]||33||15||1||0||colspan="2"|-||34||15
         |[[푸스발-분데스리가 1983-84|1983–84]]||rowspan="6"|[[바이어 04 레버쿠젠|레버쿠젠]]||34||12||1||0||colspan="2"|-||35||12
         |[[푸스발-분데스리가 1984-85|1984–85]]||29||10||3||4||colspan="2"|-||32||14
         |[[푸스발-분데스리가 1985-86|1985–86]]||34||17||4||2||colspan="2"|-||38||19
  • 한준희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준희는 7살이던 [[1976년]] [[차범근]]이 출전한 대통령컵 말레이시아전을 본 것을 계기로 축구광이 되었다. 학창시절 [[할렐루야 축구단]]과 [[대우 로얄스]]의 팬으로서 대한민국 축구를 챙겨보았고, TV에서 가끔 방송해주었던 [[분데스리가]]와 [[인터콘티넨털컵 (축구)|인터콘티넨탈컵]]을 빠짐없이 시청하며 해외축구를 섭렵했다. [[1990년]] [[서울대학교]] 해양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교 3학년때 과학철학에 심취한 그는 철학 교수를 꿈꾸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딴 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중에도 틈틈이 [[폭스 방송]]을 통해 해외 축구를 즐겨보던 그는 취미로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인 [[사커라인]]에 칼럼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2002년]] 귀국 후 [[MBC 스포츠+|MBC ESPN]]의 축구해설가로 입문하게 된다. [[MBC 스포츠+|MBC ESPN]]에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경기 해설을 맡으며 화면에 비친 사람 대부분의 신상정보를 읊는 신통한 정보력과 전문적인 전술 해설, 거기에 감초같은 샤우팅 중계가 더해져 축구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06년 [[2006년 FIFA 월드컵|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각 지상파 방송국에서는 축구 해설위원을 충원하였는데, [[MBC 스포츠+|MBC ESPN]]에서 해외 축구를 중계하던 3인방 중 한준희는 [[KBS]]로, [[서형욱]]은 [[MBC|MBC 지상파]]로, [[박문성]]은 [[SBS]]로 각각 스카웃되었다. [[2005년]]부터 [[한국방송공사|KBS]]에 몸담은 한준희는 [[월드컵]],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K리그]]부터 유소년 축구, 대학 축구, 실업 축구, 여자 축구 등 다양한 축구경기를 중계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해설위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어렸을적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했었다. 당시 롯데가 실업야구 때부터 좋아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고 [[K리그]] 의 [[전북 현대 모터스]]의 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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