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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휴
         그는 [[허목]]과 함께 맏며느리의 예에 따라 1년복 설을 주장하였는데, 현종의 의중이 1년복 설에 있었으므로 승리를 거뒀다. [[1674년]](현종 15) [[7월]] 중국에서 [[오삼계]](吳三桂)의 반청(反淸)반란이 일어난 소식을 듣자 윤휴는 [[조선 현종|현종]]에게 '이 때가 전날의 치욕을 씻을 수 있는 기회'라며 북벌을 주장하는 상소인 대의소(大義疏)를 올렸다. 그러나 현종은 곧 사망했고 그의 상소는 묻혀졌다.
         ===== 북벌 상소와 개혁안 제시 =====
         [[1674년]](숙종 즉위) [[12월 1일]] 상소를 올려 [[병자호란]], [[정묘호란]]의 일을 언급하며 '복수설치'(復讐雪恥)를 주장하면서 북벌 계책을 담은 밀봉한 책자(冊子)를 함께 상소로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밀봉 [[북벌]] 상소는 화제가 되었고, [[12월 2일]] [[조선 숙종|숙종]]은 [[영의정]] [[허적]](許積)과 [[예조판서]] [[권대운]] 등을 불러 그의 상소를 놓고 의견을 물었으나 부정적으로 봤다. [[조선 숙종|숙종]]은 [[허적]]에게 "윤휴의 상소는 화(禍)를 부르는 말이다"고 평했다. 이에 [[허적]]은 "그 뜻은 군신 상하가 잊을 수 없는 것이지만 다만 지금의 사세와 힘으로는 미칠 수 없으니 다만 마땅히 마음에만 둘 뿐입니다"며 숙종의 말에 찬동했고, 역시 [[남인]]이었던 [[예조판서]] [[권대운]](權大運)도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큰소리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심히 불가하다"며 비판하였다. 이후 여러 번 밀소(密疏)를 올려 [[호포법]](戶布法)․[[상평제]](常平制)의 실시를 주장하여 [[전정]](田政)의 개혁을 도모하였고, 북벌을 위해 군권(軍權)을 통합한 [[도체찰사]]부의 설치와 전차의 제조를 주장하였으나 모두 거절당했다.
         한편 [[서인]]이 [[강화군|강화도]]에 있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여 반역을 도모한다고 헐뜯으며 [[허목]], 윤휴 등은 끝끝내 [[송시열]]을 죽음으로 몰아가려 했다.<ref name="yiyihwa91">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91</ref> [[서인]] 출신 유생들은 과거 볼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하면, 유적(儒籍)에서 이름을 삭제당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권력의 핵심에 선 윤휴는 [[북벌론]]을 다시 주장하면서 어린 [[조선 숙종|숙종]]의 마음을 휘어잡았다.<ref name="yiyihwa91"/>
         ===== 북벌론과 군사력 강화 주장 =====
         윤휴는 이미 유명무실해진 국초의 [[오위제]](五衛制)를 회복하고 [[오위도총부]]를 강화하며 양반에게도 병역을 부과하고 [[호포]]를 거둬야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양반 역시 임금의 보살핌을 받는 국가의 백성임을 강조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를 실시하자고 역설하였다. 또한 무사양성과 병력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만인과]](萬人科)를 설치하고 [[북벌]]을 위한 정예부대로서 [[체부]](體府)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북벌 지휘부를 구성할 것과 병거(兵車)를 제조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서얼 허통론]]을 실시하여 인재 확보의 폭을 넓혀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윤휴는 또 당시 [[중국]] 대륙의 상황을 근거로 들었다. 당시까지 [[명나라]]에 충성하고 [[청나라]]를 거부하는 중국의 대의 지사들이 존재함을 알리고, [[청나라]]에게 위협적인 [[오삼계]](吳三桂) 세력과 [[타이완]] 정금(鄭錦)의 세력, 그리고 [[몽골]] 지역의 제 부족들의 존재를 주장하고, 이들의 세력이 각각 확장되어 [[청나라]]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조선]]이 정금과 교통하여 [[청나라]]를 친다면 승산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윤휴에게 비판적이었던 [[송시열]] 조차 그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그러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같은 [[남인]]계 [[허적]], [[권대운]] 비롯한 중신들의 반대로 좌절된다. 한편 [[1679년]](숙종 5년) [[오삼계]]의 죽음 이후 그의 이러한 [[북벌]] 주장은 완전히 설득력을 잃게 된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는 이미 조정 중신들의 비밀 회의기관으로 전락, 유명무실화된 [[비변사]]를 폐지하고 도체찰사부(都體察使府)를 설치하여 조정의 관료가 도체찰사부의 체찰사와 부체찰사를 겸하여 군권을 쥐고 상시 전시체제로 운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 북벌론의 정략적 이용 =====
         {{참고|북벌론}}
         허목, 윤휴 등은 [[서인]]이 [[강화군|강화도]]에 있는 [[소현세자]]의 아들을 새 임금으로 추대하여 반역을 도모한다고 헐뜯으며 송시열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려 했다. 서인 출신 유생들은 과거 볼 자격을 박탈당하는가 하면, 유적(儒籍)에서 이름을 삭제당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이때 권력의 핵심에 선 윤휴는 북벌론을 주장하며 어린 숙종의 마음을 휘어잡았다.<ref>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130</ref> 효종이 죽고 난 뒤 복상(服喪) 문제로 두 차례에 걸쳐 치열한 [[예송논쟁]]에서 [[청나라]] 정벌을 주도하던 서인이 1674년 정권에서 밀려나자 북벌론은 사장되는 듯 했다.<ref name="leelee92">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92</ref>
         윤휴는 두 글에서 온통 [[청나라]] 정벌의 대의명분과 당위성을 말하고, 조선의 군비가 잘 정돈되었으며 만약 북벌을 단행하면 중국 내지의 여러 세력이 호응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송시열과 효종이 주장한 내용을 되풀이하거나 과장되게 부풀려 적었을 뿐이다. 굳이 다른 점을 들어 본다면 새로운 무기인 무강차(武剛車)를 만들어 만주 벌판을 달려야 한다는 정도가 더 보태졌을 뿐이다. 윤휴는 14세의 어린 숙종을 앉혀놓고 문답을 주고받으며 세뇌를 시켰다.<ref name="leelee93"/>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의 잔여세력이 여기저기서 난을 일으켜 오삼계(吳三桂) 등이 이들을 소탕하느라 다소 혼란을 겪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청나라의 번왕(蕃王)인 오삼계 역시 1673년 양자강 주변의 남쪽 지대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켜 몇년 간 변경이 떠들썩했다.<ref name="leelee94">이이화, 《한국사 이야기 13:당쟁과 정변의 소용돌이》 (한길사, 2001) 94</ref> 윤휴는 조정에 몸담고 있던 3년 동안 이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재야의 선비들 중에서도 북벌을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허목, 허적 등 원로들은 애써 이를 막았다. 숙종은 귀가 솔깃했으나 어린 임금이 단행할 정도의 사안이 아니었다.<ref name="leelee94"/>
         ==== 북벌론 추진 준비와 실패 ====
         [[1674년]]부터 [[허적]]과 윤휴 중심으로 [[북벌론]]이 계획되었다. [[김석주]] 역시 북벌론 재개에 지지 의사를 표했고 곧 체부(도체찰사부) 부활과 만과 설치, 병력 선발 등의 안이 건의되었다. [[송시열]]은 유배소에 있으면서도 이 점에는 깊이 공감하고 지원하라는 글을 문하들에게 보낸다. 도체찰사부를 설치하고, 무과인 만과(萬科)를 설행하는 한편, 병거(兵車)인 전차와 화차(火車)의 개발을 고안해 보급하고자 한 것 등은 모두 평생의 신념이던 북벌을 실현시키려는 뜻이었다.
         한편 1676년에 연중(筵中)에서 [[대사헌]] 윤휴(尹鑴)가 북벌의(北伐議)를 주장하니 [[병조판서]] [[김석주]](金錫胄)가 말하기를 군사를 출전시킬 시기는 이미 정하여졌으나 군량이 부족한 것이 걱정이라고 말하니 당시 [[이조]][[참판]]인 [[심재]](沈梓)가 나가서 말하기를 복수하여 설욕하는 대의는 진실로 좋으나 작은 나라로서 위험한 때에 군사를 일으켜 국경을 넘는다는 것은 그 때가 아니라고 하였다.<ref>심재 신도비문</ref>
         [[서인]], [[남인]]의 당론이 일치하면서 일시적으로 통합이 가능하였으나 [[남인]]의 당수였던 [[허목]]이 불가함을 들어 강하게 반대했다. 장정을 많이 징발하면 국가의 일꾼이 없어진다는 것과 [[청나라]]는 대국이고 조선은 소국에다가 국론까지 분열되었는데 상대가 가능하냐는 것이었다. 여기에 [[남인]] 강경파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북벌론은 다시 묻혀진다. 결국 [[송시열]]은 윤휴의 북벌론 주장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북벌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 뒤 [[의정부]][[좌찬성]]이 되었다가 [[1679년]] [[비변사]]제조에 다시 임명되었다. [[1679년]](숙종 5년) [[9월]]에 [[우찬성]]이 되었다. 이후 윤휴는 삼정승의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그러나 [[1680년]] [[허적]]이 자신의 조부 [[허잠]]의 시호를 받는 연시연 때 비가 오자 왕이나 왕실의 허락 없이 기름 천막을 임의로 가져다 쓴 사건이 확대되어 [[허견의 옥사]]가 발생했다. 그러나 윤휴는 [[허견의 옥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나 여러가지 죄목이 복합되어 파직되고 의금부에 갇혀 국문을 당한다. 또한 [[1675년]]의 [[홍수의 변]]에서 [[김우명]] 등이 [[복창군]], [[복평군]]을 무고했다고 논파한 것을 그가 [[복창군]], [[복평군]]을 지지하는 것이라는 공세가 가해졌다. [[비변사]]를 폐지하고 체부(體府)를 신설하여 북벌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결과가 안좋아 폐지되었다. 한편 이복 형인 [[윤영]]은 [[도체찰사부]]를 근거로 [[서인]]이 역모로 몰수 있으니 염려하라며 당부하였으나 그는 듣지 않았다.
         그는 [[유교]] 학문을 [[성리학]] 위주로만 이해하는 것에 반발하였다. 그는 늘 세상의 이치를 주자만이 알고 다른 사람들은 모르느냐며 [[주자학]]([[성리학]])과 [[주자가례]]로 사물을 보려는 당시 시각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고, 윤휴는 일반 유학자들처럼 이단배척의식이 강하였다. 그가 북벌을 주장한 것도 이단이며 사이비인 야만족이 중국을 정벌한 것에 대한 반감에서 유래한 것이다. [[도학]]과 [[노장 사상]], [[불교]]는 배척하였다.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조선의 역사의 기원을 [[기자 (고조선)|기자]]로 보고, [[기자조선]]이 정통이라고 인정하는 것 역시 다른 성리학자들과 다르지 않다.
         === 북벌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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