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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윤정 (1869년)
         인천부 경무관으로 있다가 정부유학생으로 [[미국]], [[영국]]을 유학하였으며 주미조선공사관의 3등 서기관과 1등 서기관, 주미공사 직무대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광무 8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귀국하여 [[태인군]] 군수, [[1906년]] [[인천부]] 부윤 겸 감리사를 역임했다.
         [[한성부]] 출신으로 관직에 올라 [[인천부]] 경무관을 지냈다. 인천부 경무관 재직 중 일본인 스치다 조스케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김구|김창수]](金昌洙, 뒤에 [[김구]]로 개명)을 심문하였다. 당시 인천부윤은 [[이재정]]이었다.
         [[태인군]] 군수를 거쳐 [[1906년]] [[인천]][[부윤]]으로 발령받았다. [[김구]]의 《[[백범일지]]》에 따르면 [[1896년]] 치하포에서의 일본인 살인 사건으로 인천에 압송된 김구가 김윤정에게 심문받은 것으로 되어 있으나<ref>김구, 《백범일지》 상권 - [[s:백범일지#기구한 젊은 때|1.2 기구한 젊은 때]]</ref>, [[손세일]]은 김윤정의 나이와 유학 시기, 인천부윤 발령 시점을 고려할 때 연대가 맞지 않는다며 이를 김구의 착각으로 보았다. 그러나 [[김구]]의 [[백범일지]]에 의하면 당시 인천부윤 겸 인천감리사는 [[이재정]](李在正)이었고 [[김윤정]]은 [[경무관]]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 신면
         [[1471년]](성종 2년) 윤 9월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추록되었다가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홍귀달(洪貴達)·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 최한정(崔漢禎)의 반대로 추탈되었다. [[숭록대부]] [[좌찬성]] 겸 [[이조 판서]](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兼吏曹判書) 행 [[가선대부]] [[관찰사]] 겸 [[함흥]][[부윤]](行嘉善大夫咸吉道觀察使兼咸興府尹)에 [[추증]]되었다가 [[조선 중종|중종]] 때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되었다.
  • 심의면
         [[1860년]]([[조선 철종|철종]] 11년) [[오위도총부]] 도총관, [[형조판서]]를 지내고, [[1864년]]([[조선 고종|고종]] 1년) 지[[의금부]]사에 이르렀으나, 이전에 [[인현왕후]]의 집이었던 감고당(感古堂)을 함부로 개축하여 사용한 죄로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아, 사판(仕版)에서 영구히 삭제되고 방축향리(放逐鄕里)되었다. 또 다시, [[삼사]](三司)의 탄핵으로 자신은 공주목(지금의 충남 공주)에 찬배(竄配)되는 [[유배]]형을, 아들 [[부윤]] [[심이택]](沈履澤)은 [[제주시|제주도]]에 [[가극]](加棘)되는 [[유배]]형을 당하였다. [[1865년]]([[조선 고종|고종]] 2년) 심의면은 [[유배]]지인에서 죽었고, 사후 죄가 탕척(蕩滌)되었다. 아들 [[심이택]]은 방축향리(放逐鄕里)로 형벌이 감해졌다.<ref>《헌종실록》《철종실록》《고종실록》</ref>
  • 윤휴
         아버지 [[윤효전]]은 [[남해군]] 때에 [[영월군]]의 옥사를 주관했고, [[대사헌]], 지의금부사 등을 지냈으나 [[1617년]](남해군 9)에 [[사헌부]][[대사헌]]으로서 대비의 유폐를 반대하다가 [[경주시|경주]][[부윤]]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당색이 [[북인]](北人)이었고, [[광해군]] 정권에 참여했으며 [[임해군의 옥사]]를 지지했던 탓에 후일 [[서인]]이 아들 윤휴의 가계전력을 문제삼는 원인이 되었다. 윤휴는 아버지 [[윤효전]]이 후처 김씨에게서 늦게 얻은 만득자로, 그에게는 6년 연상의 서형(庶兄) [[윤영]](尹鍈)이 있었다.
         윤휴는 3세 때 [[경주시|경주]][[부윤]]으로 있던 아버지 [[윤효전]]이 갑자기 별세하자 여주 선산에다가 장례를 치르고 잠시 서울로 올라가 살았으나 [[1623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여주시|여주]]로 피난, 은신하였다. 이후 불우한 유년기를 보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는 외가가 있는 [[충청북도]] 보은군(報恩郡)의 삼산(三山)에 머무르면서 외조부 [[김덕민]]으로부터 글을 배웠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무렵 그는 가솔들을 이끌고 외할아버지와 계외조모, 어머니와 함께 [[보은군]]에 머물렀다.
  • 전성군 (1488년)
         ** 아들 : [[이즙]](李楫, [[전주]][[부윤]], 1503년 ~ ?년 2월 10일)
  • 희빈 장씨
         숙종실록에는 장씨 소생의 왕자가 9월 16일에 사망하였는데 태어난지 열흘이 지났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승정원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6월에 이미 [[산실청]]이 설치되었으며 7월 19일 중궁전(장씨)이 해만(解娩: 해산)한 후 약방(藥房)과 정원(政院), 옥당(玉堂)이 대전과 중궁전의 안부를 물었다.<ref>[[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19일 (무신) 원본342책/탈초본18책 (10/14)</ref> 다음 날인 7월 20일, 중전 장씨의 해만 상태와 산후 기후가 편안하다는 보고가 있으며 2품 이상 관원들이 문안을 올렸다. 22일에는 장씨의 유즙(乳汁: 젖)이 나오지 않아 약을 의논하는 기사가 있다. 7월 26일에는 산실청 의관이 입진하여 중궁전(장씨를 말한다)이 해만(解娩: 해산)한 지 제7일이 되었으니 산실을 철파(撤罷)하겠다는 계를 올렸다.<ref>승정원일기 숙종 16년 7월 26일 (을묘) 원본342책/탈초본18책 (8/13)</ref> 같은 날 [[조선 숙종|숙종]]은 산실청 전(前) [[도제조]]와 [[우의정]] 및 여러 관원과 의관들에게 각 [[말]] 한 필과 안장을 하사하였다. 다음 날 27일에는 산실청 담당 의관이었던 [[김유현]] 등에게 숭록(崇祿: 종1품 문무관 관직)을 제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대로 수령(守令)<ref group="주">고려ㆍ조선 시대에,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들을 통틀어 이르는 말. [[절도사]], [[관찰사]], [[부윤]], [[목사]], [[부사]], [[군수]], [[현감]], [[현령]] 따위를 이른다.</ref> 직을 제수하였는데, 이는 [[조선 숙종|숙종]]이 의관에게 종1품 숭록의 위를 제수할 만큼 대군의 탄생을 각별히 기뻐했음을 알 수 있다.<ref group="주">이 기록 역시 숙종실록에는 누락되어 있는데 반면에 [[숙빈 최씨]]가 [[조선 영조|영조]]를 출산하자 [[조선 숙종|숙종]]이 [[호산청]] 담당 내시와 [[의관]]에게 말을 하사한 것은 강조하여 기록하였다.</ref> 이러한 승정원일기의 기록은 장씨가 출산한 왕자가 9월 10일 경에 탄생된 것으로 기록한 숙종실록의 기사가 허위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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