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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빈 장씨 . . . . 39회 일치
희빈 장씨는 [[사역원]] 봉사(종8품)를 지냈던 [[장형 (조선)|장형]](張烱)<ref group="주">장형(張烱)의 형(烱)은 경으로도 읽을 수 있다.</ref>(1623~1669)과 그의 후처인 [[파평 윤씨]](1626~1698)의 막내딸로 태어났다. 동기로는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의 전처였던 [[제주 고씨]](?~1645)의 소생인 이복 오빠 장희식(1640~?)과 윤씨 소생의 동복 언니<ref group="주">[[장희재 (조선)|장희재]]의 누나이다. 따라서 1650년 이전 생임을 알 수 있다.</ref> 한 명, 동복 오빠인 [[장희재 (조선)|장희재]](1651<ref group="주">《승정원일기》 숙종 27년(1701년) 11월 2일 기록에 장희재의 나이가 당 51세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651년 생임을 알 수 있다.</ref>~1701)가 있다. 최근까지 그녀의 생년에 대해 흔히 미상이거나 [[조선 숙종|숙종]]의 2세 연하, 혹은 5살 연상 등으로 기록되기도 하는데 《숙종실록》에 수록된 국청죄인 자근례의 공초 내용 중에 희빈 장씨가 기해생(1659년 생)이라고 언급되어 있다.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은 [[사역원]] 봉사를 재직하였지만 일찍 은퇴하고 집에서 [[거문고]]를 뜯으며 음률을 즐기다가 장씨가 막 11세가 된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그녀보다 19세 연상인 이복 오빠 장희식은 18세의 나이로 1657년 식년시 역과에 장원을 하여 사역원 직장(종7품)이 되었지만 곧 사망하였다. 장희식의 아내 이씨는 절충장군 이천연의 딸이다. 할아버지 장응인은 《통문관지》에 행적이 기록된 [[조선 선조|선조]] 때의 명역관으로, 생전 최고 관직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무관직)에 이르렀고, 전쟁 중에 무관으로 참전한 바 있으며 시재(詩才)도 뛰어난 인물이었으며 선(善)을 가훈으로 삼아 이 단어를 쓴 종이를 항상 품에 넣고 다녔다고 전한다. 할머니 남포 박씨는 산학 별제 박심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윤성립(尹誠立, 1689년 정경으로 추증)은 일본어 전공의 사역원 첨정(종4품)<ref group="주">사역원 역관의 품작은 정3품 정(正) 1명으로 시작하여 아래로는 종3품 부정(副正) 1명, 종4품 첨정(僉正) 1명으로 내려간다.</ref> 이었으며, 1653년에도 생존했던 기록이 《승정원일기》에 남아있다.
언니는 관상감 관원인 김지중에게 출가하여 1691년 당시 관직이 종7품 직장이었다. 오빠 장희재는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희빈 장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후궁이 되기 7년 전인 경신년(1680년)에 키가 크고 외모와 무술이 뛰어난 명문가의 자제만으로 구성된 [[내금위]]에 재직<ref>《조선왕조실록》숙종 35권,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ref> 하였으며 1683년에는 좌포청 부장으로 있었다.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의 사촌형인 [[장현 (조선)|장현]]은 [[조선 효종|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고 숙종 1년에는 이미 종1품 숭록대부에 올라 공을 세워도 더이상 품계가 올라갈 수 없어<ref group="주">생전에 정1품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건 [[문관]]에게 한정된다. 《동의보감》의 저자이기도 한 명의관 [[허준]]은 [[광해군]]에게 정1품 [[보국숭록대부]]를 제수받았다가 문관의 반발에 의해 취소되었고, 사후에야 비로소 추증됐다.</ref> 자식과 조카가 대신 승봉되어야 했던 거물 역관으로 재산은 국중거부의 명성을 얻을 정도였으며, [[장현 (조선)|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무관 및 역관, 혹은 의관으로 고위직에 있었다. 그녀의 일족이 비록 문신 사대부 가문은 아니었지만 조선에서 손 꼽히는 대부호였으며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1683년]] 10월, [[조선 숙종|숙종]]이 두질(豆疾: 두창, 마마, [[천연두]])을 앓았다. [[조선 숙종|숙종]]의 모후 [[명성왕후|왕대비(王大妃)]] 김씨는 [[인현왕후|중전]] 민씨와 함께 [[조선 숙종|숙종]]의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 무당의 권고대로 절식을 하고 매일 속옷 차림으로 냉수욕을 하며 치성을 올리다가 감질(感疾: 감기)에 걸렸는데 [[조선 숙종|숙종]]이 와병 중이라 쉬쉬하며 치유치 않다가 점점 위중해졌고, [[조선 숙종|숙종]]이 온전히 병석에서 일어나지 못한 12월 5일에 [[열병]]으로 사망하였다.<ref group="주">이 사실을 발고한 [[박세채]]의 상소에 대해 [[조선 숙종|숙종]]은 [[명성왕후|대행왕대비(사망한 왕과 왕후에겐 대행을 붙인다)]] 김씨가 무속을 싫어하였다며 강력히 부정했다. 『숙종실록 9년(1683 계해 / 청 강희(康熙) 22년) 12월 15일(임자) 2번째기사』 하지만 다음해 2월 박세채의 주장이 사실이었음이 증명되어 무녀 막례가 유배되었다. 『숙종 15권, 10년(1684 갑자 / 청 강희(康熙) 23년) 2월 21일(정사) 3번째기사』 실제로 [[명성왕후 김씨]]는 전속 무당을 두었을 만큼 무속을 신봉했고, [[조선 숙종|숙종]]도 무속에 대해 너그러운 편이었다.</ref>
==== 숙종의 총애와 후궁 책봉 ====
서인 영수이자 [[송시열]]의 최측근인 [[김수항]], [[김수흥]]의 종손녀 김씨가 간택되어 3월 28일에 숙의로 봉해졌고 노비 150명이 하사되었다. 5월 27일에는 소의로 진봉되었으며 얼마 뒤에는 종1품 귀인으로 봉해졌는데 회임은 고사하고 [[조선 숙종|숙종]]의 사랑도 받지 못한 김씨에게 이러한 특별진봉이 거듭된 것은 서인 영수의 종손녀라는 신분과 장씨를 향한 [[서인]]과 [[인현왕후]]의 견제를 의식한 [[조선 숙종|숙종]]의 방어책이었다.<ref group="주">김씨가 [[조선 숙종|숙종]]의 총애를 받지 못한 것은 숙종 17권,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에 언급되어 있다.</ref>
숙종은 [[인현왕후]]와 [[영빈 김씨|김씨]]에게서 장씨를 떨어뜨리기 위해 중궁전과 후궁의 처소가 있는 [[창덕궁]]이 아닌 [[창경궁]]에 비밀리에 인부를 불러 장씨의 처소를 새로 건축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숙종이 직접 장씨를 종4품 숙원으로 봉해 정식 후궁으로 만듦<ref group="주">승은궁녀에게 첩지를 내리는 것은 내명부 수장인 중전의 고유권한이었다.</ref> 으로서 인현왕후의 처지를 위해 장씨의 출궁을 종용하던 서인은 더이상 숙종에게 장씨를 출궁시킬 것을 강력히 요구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장씨를 숙원으로 봉하며 하사하기로 한 노비 100명과 전답은 흉년을 이유로 무기한 연기하도록 하였다.<ref group="주">[[조선 숙종|숙종]]이 [[장희재 (조선)|장희재]]에게 최초로 관직을 내린 것은 원자 명호를 취소할 것을 주장한 [[송시열]]의 상소로 인해 [[남인]]이 정계로 돌아온 후이며, 승진이 아닌 부서 이동에 불과했던 것으로 미루어 장씨가 후궁이 되고도 친정이 혜택을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숙종 15년 2월 11일 (기유) 원본333책/탈초본17책 (5/26)』</ref>
[[1688년]] 소의(昭儀 ; 내명부 정2품)로 승격한 장씨는<ref group="주">승정원일기 기록상 1688년 3월까지 장씨의 품작은 숙원이었다. 시기 상 숙원 장씨가 소의로 진봉된 것은 회임을 한 이유임을 알 수 있다.</ref> 같은 해 10월 28일, 드디어 왕실이 그토록 고대하던 [[조선 숙종|숙종]]의 장남‘균’(昀)<ref group="주">실록에선 윤으로 읽기도 하고, 균으로 읽기도 한다. 균이라 번역된 기록에도 한자는 윤(昀)으로 쓰여있다. 숙종의 세 아들(昀, 昑, 昍)은 모두 '日'자를 부수로 썼다. 그러나 실제로 조선 왕들의 이름은 현재의 독음과 다르게 읽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고종 대에 편찬된 《열성어휘(列聖御諱)》에 경종의 휘는 "균'으로 읽는다[音勻]"고 명시되어 있다.</ref> 을 낳았고 이 왕자가 후에 조선 왕조 제20대 왕 [[조선 경종|경종]](景宗)에 오르게 된다.
[[임해군]]의 동복 동생인 [[광해군]]은 큰 아들이 아니기에 당연히 원자가 아닌 신분으로 세자가 되었다. 후궁 소생이 원자가 될 자격이 없지는 않지만 서른이 되지 않은 [[조선 숙종|숙종]]이 후궁 소생을 원자로 정한 것은 비정상적으로 급한 결정이었다.그러나, 부왕인 [[조선 현종|현종]]이 34세에 죽었고, 왕의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대였던 만큼, 30세가 다 되어가도록 후사가 없는 상황이 비정상적이었다는 반론이 있기도 하다.</ref> 하고 있던 서인은 숙종의 선언에 당황했지만 제대로 반대를 하거나 저지를 할 준비도 되지 않은 상황 속에 [[조선 숙종|숙종]]은 불과 닷새 후인 1월 15일에 왕자 윤에게 원자 명호를 내려 종묘 사직에 고했다. 또한, 숙종은 원자 윤의 생모 소의 장씨를 정1품 빈(嬪)으로 책봉하여 귀인 김씨를 제치고 후궁 1위로 만들었다.<ref group="주">숙종실록에는 15일에 빈으로 책봉된 것으로 기록됐지만 승정원일기에는 17일로 기록되어 있다.</ref> 앞서 [[조선 숙종|숙종]]이 원자 정호에 대한 불만이 있으면 관직을 내놓고 떠나라는 선언이 있었으며, 이미 종묘 사직에 고한 일을 무르라는 것은 선대 왕들을 한꺼번에 능멸하는 행위이자 신권이 왕권의 위에 있음을 입증하는 행위나 다름없기에 [[서인]]은 소극적인 반박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 밖에 없었고, 숙종은 이 또한 용서하지 않아 그들을 파직하였다.
숙종 15년(1689) 2월 1일에 [[인현왕후]]의 외가 친척이기도 한 [[송시열]]이 이미 종묘에 고한 원자 정호를 철회하라는 비판상소를 올리자 [[조선 숙종|숙종]]은 진노하여 [[송시열]]을 치죄하라는 명을 내리지만 [[서인]]으로 이루어진 [[승정원]]에서 명을 받들지 않았다. 앞서 [[조선 숙종|숙종]]이 [[김만중]]의 치죄를 명할 당시와 흡사한 배경<ref group="주">[[김만중]]을 추포하여 문초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승정원에서 항명하여 전지를 봉입하지 않았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은 입직한 승지에게 전지를 쓰라고 명하였지만 붓이 없다는 핑계로 거절되었으며 사관 [[송상기]]는 붓을 빌려주라는 [[조선 숙종|숙종]]의 어명을 거부했다.</ref><ref>숙종실록 13년(1687 정묘 / 청 강희(康熙) 26년) 9월 11일(병술) 3번째기사</ref> 이었기에 [[조선 숙종|숙종]]은 분개하여 삼사와 [[승정원]], [[사간원]] 등 왕의 최측근 요직에 있던 서인을 파직하고 경신환국 때 실권하여 은신 중이었던 [[남인]]을 조정으로 불러 교체해버린다. 동시에 [[조선 숙종|숙종]]은 2월 2일 장씨의 선조 3대를 정승으로 추증(追贈)했다.<ref group="주">추증은 위로 올라갈수록 한 등급씩 감하는 것이 관례여서 장씨의 아버지 [[장형 (조선)|장형]](張炯)에게 영의정을 증직하면, 조부에게는 종1품 찬성(贊成)을 증직해야 했다. 숙종은 “사체(事體)가 다름이 있으니, 모두 의정(議政)을 증직하라”고 명해 [[장형 (조선)|장형]]은 영의정, 장수(張壽)는 좌의정, 장응인(張應仁)은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3대가 모두 정승에 증직된 드문 경우였다.</ref> 다음 달 3월엔 그녀의 외조부인 일본어 역관 윤성립을 2품 정경으로 추증하고, 외삼촌인 윤정석에게 사포별제<ref group="주">품계로는 6품에 이르나 녹봉이 없는 무록관이다.</ref> 직을 내려 장씨가 더이상 비천한 역관에 불가한 가문 출신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 하였다.
=== 왕비 진봉과 폐위 ===
[[인현왕후]]가 폐출된 후 [[조선 숙종|숙종]]은 새로이 계비를 간택하지 않고 원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를 왕비로 삼을 것을 선포하였다. 5월 13일, 희빈 장씨의 왕비 명호가 정해졌다. 이는 후궁 소생의 원자가 왕비 소생의 정통성을 얻게 되는 사건임과 동시에 중인 출신이자 궁녀 출신인 후궁이 국모의 위에 오르는 조선 역사상 최초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장렬왕후|대왕대비]] 조씨의 복상 기간이 끝나지 않은 탓에 장씨가 정식으로 왕후로 책봉된 것은 다음 해인 1690년 10월 22일이다. [[조선 숙종|숙종]]은 장씨의 부모인 [[장형 (조선)|장형]](張炯)과 [[장형 (조선)|장형]]의 첫 아내 고씨는 옥산부원군(玉山府院君), 영주부부인(瀛洲府夫人)으로 추숭되었고, 장씨의 생모인 윤씨는 파산부부인(坡山府夫人)으로 책봉되었으며 [[장형 (조선)|장형]] 묘소에 옥산부원군 신도비를 세우도록 하여 장씨가 새로운 왕비가 되었음이 기정사실화 되었다.
==== 왕비 책봉 ====
1690년 6월 16일 원자 윤이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장씨가 출산한 성수(盛壽)<ref group="주">숙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성수(盛壽)라는 신생 대군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는 1700년에 보수된 선원계보록에 기록된 이름이다.</ref> 는 정식 책봉과 군호(君號: 대군과 군의 작위 앞에 붙이는 두 글자의 호)를 받지 않은 갓난아기였지만, 탄생 직후부터 대군(大君: 왕비 소생의 적통 왕자에게 내리는 작위명)으로 불렸으며 대군으로서의 예우와 영토와 녹봉이 내려지는 대우를 받았다.
대군 성수는 탄생한지 100일이 되지 않은 9월 16일에 돌연 급사하였다.<ref group="주">만일 성수가 정식으로 대군 책봉식을 거친 후에 사망했거나 갑술환국이 발생한 이후에 사망했다면 인현왕후가 복위하여 장씨가 후궁으로 강봉되는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법도에 따라 적서 상관없이 자동으로 적처(왕비)에게 입적되는 후계자(왕세자, 원자)와는 달리 그 외 자녀는 생모의 처첩 여부에 따를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장씨를 후궁으로 강봉하려면 성수도 함께 대군에서 군으로 강봉하거나 장씨와 성수를 함께 폐서인할 수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ref> 조정에서 신생대군(新生大君)의 사망에 대한 원인이 논의되었다. 6월부터 산실청이 세워지고 산모인 장씨가 불안한 상태임이 거론되었는데 출산을 하고난 이후에도 장씨의 상태가 불안하다는 기록이 있으며 9월 16일 신생대군이 사망하였을 때에도 상태가 미완하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난산]]이었거나 장씨의 건강이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숙종|숙종]]은 조정 백관 앞에서 울음을 터트리며 마음이 진정되지 않는다고 토로했을 만큼 둘째 아들을 잃은 안타까움을 표했다. 1692년, 전 해(前年)에 조졸한 신생대군방에 절수된 영토와 녹봉을 거둘 것을 주청하는 건의가 반복되어 허가되었다.
둘째 왕자가 사망한 다음 달인 1690년 10월 22일에 책봉식을 올려 정식으로 왕비가 되었다.
1693년 2월, 중전 장씨의 머리 부위<ref group="주">승정원일기 본문에는 뇌후(䐉後)로 기록되어 있다.</ref> 의 절환(癤患: 부스럼증)과 창증(瘡症: 종기)이 감소하였다는 기록과 의녀의 시침 기록이 승정원일기 중에 다수 존재하며, 숙환(=오랜 병, 고질병)으로 담화(痰火)<ref group="주">효종의 비(妃) [[인선왕후]]가 담화로 사망했다.</ref> 가 있어(宿患痰火之症) 1694년, 후궁으로 강봉되기 직전까지 치료법에 대한 논의와 뜸을 받은 기록이 존재한다.<ref group="주">왕후와 세자빈의 중병은 국사(國事)로 간주되어 조정에서 논의되기에 기록으로 남지만 후궁의 병은 논의되지 않는다. 따라서 장씨의 병이 후궁으로 강봉된 후에도 지속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다만 1701년 무고의 옥으로 궁녀들이 국문을 받을 당시에 장씨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언급이 있다.</ref>
이때 숙종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는데, 이를 불러 [[갑술환국]]이라 한다. [[민진원]]은 그의 저서인 《단암만록》에 숙빈 최씨가 봉보부인을 통해 [[김춘택]]과 전략을 나누어 거사를 이룩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이로 인해 장씨의 부모인 [[장형 (조선)|장형]]과 윤씨·고씨는 부원군과 부부인의 작호가 취소되었으며, 장씨 역시 강봉되어 취선당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으며 그녀의 왕비 옥보는 관례대로 부수어져 승정원에 묻혀졌다. [[인현왕후]]의 복위가 확정된 직후 [[장희재 (조선)|장희재]]는 [[갑술환국]] 발발 직전에 유생 김인이 고발했던 [[숙빈 최씨]]의 독살 사주 혐의로 국문된다.
- 봉준호 . . . . 28회 일치
| 이름 = 봉준호
| 사진설명 = 2013년 프랑스 도빌영화제에서의 봉준호
'''봉준호'''([[1969년]] [[9월 14일]] ~ )는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영화감독]], [[영화 각본|각본가]]이다.<ref>[http://www.cine21.com/do/person/detailView?person_id=3778 씨네21 프로필]</ref><ref>[http://movie.naver.com/movie/bi/pi/basic.nhn?code=9479 네이버영화 프로필]</ref>
1993년 6mm 단편 영화 《백색인》을 연출하여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2번째 단편《지리멸렬》은 큰 화제가 되었다. [[배두나]]가 출연하였던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 (영화)|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 실패했으나 이후 [[송강호]]와 김상경이 출연한 《[[살인의 추억]]》을 개봉하였는데 크게 흥행하였고,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잡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06년 7월에 3번째 장편 영화 《[[괴물 (2006년 영화)|괴물]]》을 개봉했다. 2008년 그는 [[미셸 공드리]], [[레오 카락스]] 감독과 함께 [[도쿄도|도쿄]]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도쿄!]]》에 참여하였다. 3편의 영화 중 "흔들리는 도쿄"에서 [[카가와 테루유키]], [[아오이 유우]]와 호흡을 맞췄다. 이 영화를 통해 멜로적 감수성 또한 인정 받았다.
2009년 5월 4번째 장편 《[[마더 (2009년 영화)|마더]]》를 개봉했다. 살인 사건에 연루된 아들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의 이야기이며, [[김혜자]]의 파격적인 연기 변신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소를 배경으로 비현실적이고, 이질적인 느낌이 드는 장면을 포착하고, 영화 속 주인공들의 난감한 행동에 웃음을 터뜨리도록 유도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에 서늘한 풍자를 심어 놓는 특유의 영화 감각을 가지고 있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805071055411120 봉준호 감독 '무(無)평에 상처받은 적 있다'], 마이 데일리, 2008년 5월</ref>
영화 《[[마더 (2009년 영화)|마더]]》가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비평가 협회에서 받은 외국어 영화상만 무려 7개로 보스톤평론가협회, 남동부비평가협회, 샌프란시스코 영화비평가협회 등에서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인 [[김혜자]]는 헐리우드 톱배우들을 제치고 LA 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2011년 미국 최고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프랑스]] 만화를 각색한 《[[설국열차]]》를 준비한후,<ref>[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050627 네이버 책 '설국열차'], 뱅자맹 르그랑, 장 마르크 로셰트, 자크 로브 저, 김예숙 역, 현실문화, 2009년 8월 5일</ref> 2012년 초 크랭크인하여 2013년 7월 31일에 개봉하였다.<ref name="설국열차">[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6&cid=307165&iid=364668&oid=020&aid=0002268463&ptype=011 프랑스 만화 각색한 ‘설국열차’ 400억대작 이끄는 봉준호 감독], 동아일보, 2011년 8월 16일</ref>
* 봉준호의 외조부는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로 유명한 [[소설가]] [[박태원 (1909년)|박태원]]으로서, [[한국전쟁]] 당시 장녀를 데리고 [[월북]]했고, 봉준호의 어머니를 포함한 그 외 2남 2녀는 서울에서 자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2&aid=0001951696 '천변풍경'의 구보 박태원, 청계천변서 다시 만나다] 프레시안. 2009년 06월 15일</ref> 2006년 6월 제14차 금강산 [[이산가족 상봉]]에서 이들 모녀가 재회화여 화제가 되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1988703 호랑이가 고양이 낳으랴..3대 이은 예술명문가] 스타뉴스. 2009년 06월 30일</ref>
! [[변희봉]]
!영화 제목!!비고!!개봉(제작) 년도
!영화 제목!!비고!!개봉(제작) 년도!!역할(담당)
| {{small|*}} 《거장, 한국 최고의 흥행 영화 감독》||다큐멘터리||2013년||에피소드2. 봉준호 감독 편
* {{KMDb 사람|00001843|봉준호}}
* {{언어링크|ko}} [http://movie.naver.com/movie/bi/pi/basic.nhn?code=9479 봉준호] - Naver 영화
* {{언어링크|ko}} [http://movie.daum.net/personInfo?pkey=309 봉준호] - Daum 영화
* {{언어링크|ko}} [http://www.cineseoul.com/movies/people.html?peopleID=4224 봉준호] - CineSeoul
* {{언어링크|ko}} [http://www.movist.com/movies/movist.asp?id=2512 봉준호] - Mov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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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튼 토마토 사람|joon_ho_bong|봉준호}}
- 킹덤/523화 . . . . 24회 일치
* 조군 좌익은 선봉을 맡는 문제로 장수들 간에 작은 신경전이 벌어진다. 악영은 안면이 없는 조아룡, 마남자를 신용하지 못한다.
* 한편 진군 우익은 왕전의 심복 [[아광]]이 횡진을 펴서 마치 왕분의 옥봉대를 감추는 듯한 포진을 시작한다. 이는 왕전과 아광이 짠 작전.
* 아광이 교전은 자신들만으로 하고 기회가 생기면 옥봉대에 전령을 보내 참전하게 하겠다고 작전을 전하자 왕분이 "특별취급"이라며 반발한다.
* 마침내 개전. 조의 선봉은 악영. 이에 아광도 직접 선봉에 서서 부딪힌다.
* 조군의 좌익은 총 3만 병력에 보기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맹장 셋이 배치되었다. 우측부터 [[조아룡]], [[마남자]], [[악영]]이 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니거니와 함께 작전을 수행해본 적도 없었다. 이런 셋을 한 군으로 편성한 [[이목(킹덤)|이목]]은 무슨 생각이었을까? 역시나 시작부터 신경전이 벌어진다. 선봉을 누가 맡는지 문제를 놓고 악영이 먼저 나서며 다른 두 장수를 무시했다. 마남자는 자기가 말을 꺼냈는데 냉큼 악영이 받아먹으려 들자 그를 "창쟁이"라 부르며 뭐하는 짓이냐 따졌다. 악영이 차가운 태도로 잘 알지도 못하는 둘에게 이 전장의 첫 칼날을 맡길 수는 없다고 쏘아붙였다. 그러자 조용히 있던 조아룡이 중재했다. 우선 악영이 마남자를 잘 모른다고 했으나 그럴 리는 없다. 마남자는 대단한 체격의 거한이면서 그 이목의 부관을 맡을 만큼 검증된 인물. 악영이 그 개인과 친분이 없을 지라도 그를 "보통내기"로 여기고 있을 리 없다고 지적한다. 악영도 그 지적을 부정하지는 못하지만 이번엔 조아룡을 두고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냐고 험한 소릴 입에 올린다. 조아룡은 쓴웃음을 짓고 말이 심하다고 할 뿐,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선전하지 않았다.
* 진군의 우익이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먼저 옥봉대의 전방에 포진했던 아광군이 넓게 횡진을 펼쳤는데 마치 옥봉대를 뒤에 숨기려는 듯한 배치다. 아광군이 한참 부산한데 옥봉대에는 아무런 지시사항이 오지 않았다. [[반상]]이 여기에 안달이 났다. [[관상]]을 붙들고 정말 아광군에서 전령이 오는게 맞긴 하냐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관상이라고 더 자세히 아는 것도 아니므로 그만 죽을 맛이었다.
작전이란 결국 이런 식이다. 아광군이 단독으로 적과 맞서 싸우고 옥봉대는 "일격필살의 유격대"로 전력을 보존하며 대기하다가 아광군 측이 전령을 보내면 그때 지시에 따르면 된다. 언뜻 듣기에는 좋은 말들이다. 하지만 왕분이나 관상은 그 참 뜻을 바로 이해했다. 왕분이 누가 이런 작전을 짰냐고 묻자 아광은 자신과 왕전이 짠 것이라 대답한다. 왕분은 더는 참지 않았다.
이 말이 떨어지자 옥봉대의 장교들이 식겁해했다. 아무리 총대장의 자식이라지만 직책과 계급으로서 왕분은 말단에 가깝지 않은가? 총대장이 직접 작성한 작전지시를 오천인장이 다시 짜라 마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광이 "도련님"에게 "우책이 아니다"고 잘라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 왕분은 지금 작전의 전술적 착오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한다. 지금 옥봉대는 적이 1만이라 해도 대등하게 겨룰 수 있을 만큼 상태가 좋다. 총 전력이 적에 비해 적인 진군이 옥봉대를 쓰지 않고 빼두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다. 따라서 옥봉대가 횡진의 좌측을 맡아 전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다. 여기까지도 왕분은 흥분을 내비치지 않았으나 아광이 대답하는 말에 격분하고 만다.
>그러면 첫날부터 옥봉이 너무 많은 피를 흘립니다.
이 상황에서 옥봉대를 쓰지 않는다, 거기에 타당한 이유 따위가 어디있는가? 그런데도 옥봉대를 뒤로 물려놓는다는건 한 가지 의미 밖에 없는 것이다. 왕분이 분을 참지 못하고 그 말을 입 밖에 내려하자 아광이 "자만하지 마십쇼"라고 잘라버린다.
아광은 부대로 돌아가기 전, 누그러진 목소리로 타일렀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작전을 전달하러 온게 뭘 뜻하는지 고려해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옥봉대의 힘이 필요할 때, 괜한 교전으로 힘이 줄어있다면 전술적 가치를 잃어버린다는 말도 덧붙였다. 부디 냉정을 유지해줄 것을 당부하며, 왕분이 안절부절하지 않아도 어차피 이 전투는 아광군, 옥봉대가 함께 사력을 다 해야 겨우 승기를 잡을 거라고 말했다.
* 조의 선봉은 결국 악영으로 정해졌다. 제 1진 1만이 구름처럼 몰려오자 아광고 1만을 뽑아 응전하고 적장이 있다는 깃발을 발견하자 자신도 곧 전장으로 달려간다. 옥봉대가 있는 위치에선 이러한 움직임이 한 눈에 보였다. 아광 장군이 선봉에 나서는게 보이자 관상이 넌지시 왕분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아광을 "잔꾀를 꺼리는 무인"이라 평했다. 그건 관상 개인의 소견이 아니었고 옥봉대 사이에서 공통적인 의견이었다.
* 가령 제 2장 마광은 왕전군 최강의 공격력을 자랑하나 의외로 책략을 잘 쓰는 인물. 반면 아광은 "정면에서 당당하게 적과 부딪히는" 성격이었다. 아광의 병사들 또한 마치 지휘관의 복사판 같은 인물들. 겁이라는 걸 모르듯 그저 장군을 따라 적진으로 향하는 자들이다. 옥봉대에도 몇 번 아광 밑에 편성됐던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한결 같이 "악몽 같은 경험. 다시는 편성되고 싶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이런 증언을 입증하듯 조군의 전열이 가속하자 아광군도 맞서서 가속, 한 복판에서 그대로 충돌한다.
- 하정우(영화감독) . . . . 23회 일치
기초군사훈련이 끝나고, 연극 전공자여서 그랬는지 국군 홍보 관리소에 [[자대배치]]를 받게 되는데 군대 동기가 개그맨 [[강성범]]이고, 군대 선임이 [[무한도전]]에도 종종 출연했던 [[최대웅]] 방송작가였다. 복무가 1년 정도 지나 상병이 된 2000년 초에 호주에서 하는 국군공연으로 파병가자고 속인 강성범 때문에[* 원래는 육각수 멤버 [[조성환]]이 가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안 가게 되어 아무것도 몰랐던 하정우가 가게 된 거라고..--안습--] 내전 중인 [[동티모르]] 원주민 위문 국군공연단으로 배를 타고 해군들과 함께 3개월 간 파병까지 가게 되었다고 한다. 가는 데만 17일이 걸렸고 멀미 때문에 상당한 고생을 했다고 한다. 대신 원래 긍정적인 성격 탓인지 본인 말로는 가서 [[바나나]]도 많이 먹고, 강성범과 만담 공연도 하면서 평소에 강성범의 [[수다맨]][* 당시 강성범은 제대 후 개그콘서트에서 이 수다맨 코너 + 봉숭아 학당 코너의 연변총각 개그로 개그계 스타로 떠올랐다.] 연습을 돕기도 하는 등 나름 재미있게 적응했다고 한다.
하지만 연이어 개봉한 영화 《[[비스티 보이즈(한국 영화)|비스티 보이즈]]》에서 주연을 맡아 찌질한 [[호스트]]를 연기한 것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추격자》의 촬영기간이 길어지면서 3주 정도 《비스티 보이즈》와 촬영기간이 겹쳤다고 한다). 그 후 개봉한 영화 《[[멋진 하루]]》에서는 넉살 좋고 낙천적인 백수 조병운 역을 맡아 발랄함과 능글맞은 특유의 연기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박찬욱]] 감독은 2015년 한 인터뷰에서 하정우의 영화 《멋진 하루》를 가장 좋아한다며 이윤기 감독과 하정우가 만든 조병운이라는 캐릭터는 한국 영화사에 기억될 만한 남성 캐릭터인 것 같다고 칭찬했다.
그 이듬해인 [[2009년]] 개봉 영화 《[[국가대표]]》에 주연으로 출연해 대박이 났으며 하정우의 주가 역시 급등했다. [[2010년]]에는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황해(영화)|황해]]》가 비록 흥행은 못했지만 호평을 받는 등, 이제는 완전히 흥행 배우 중 하나로 인정받는 중이다. [[2011년]]에는 《[[의뢰인]]》에서 범죄자가 아닌 변호사로 출연하여, 능글능글하고 매력적인 변호사의 모습으로 연기자로서 또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연 연기자 셋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다.
[[2012년]] 개봉한 영화 《[[범죄와의 전쟁 : 나쁜놈들 전성시대]]》에서 [[최민식]]의 항렬상 조카뻘 되는 [[조직폭력배]] 두목 역으로 나와 유들유들하면서도 가족마저 내칠 수 있는 비정한 역을 선보이며 다시 한 번 흥행에 성공하였다. 영화 막판 클라이맥스신을 보면 정말 사람 잡을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 개봉작 《러브픽션》에서도 [[공효진]]과 함께 주인공을 맡아 --찌질한 먹물-- B급 글쟁이 역으로 호연, 이제는 로맨스 코미디로도 연기의 폭을 넓혀가고 있다.
[[2013년]]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영화)|베를린]]》에서 주인공 [[표종성]] 역을 맡아 열연했다. 영화가 관객 수 700만 명을 넘기면서 당대 최고의 흥행 배우로 입지를 굳혔다는 평. 또한 같은 해 7월에 개봉한 《[[더 테러 라이브]]》는 하정우의 단독 주연작에 같이 개봉하는 《[[설국열차]]》가 있어서 흥행하기 힘들 것이라는 평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550만을 넘기며 흥행에 성공했다.
[[2014년]] 다시 한 번 [[윤종빈]] 감독과 함께한 영화 《[[군도: 민란의 시대]]》에서는 백정 돌무치로 변신해 머리까지 밀고 열연하였지만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했다. [[2015년]] 1월 하정우의 두 번째 연출작인 《[[허삼관]]》이 개봉했지만 여러가지 평가 속에서 흥행하지 못하였고, 7월 영화 《[[암살(2015)|암살]]》에서는 청부살인업자 하와이 피스톨 역을 맡아 큰 인기를 얻으며 데뷔 후 첫 천만 영화를 보유하게 되었다.
차기작인 [[박찬욱]] 감독의 작품 《[[아가씨(영화)|아가씨]]》에서는 백작 역을 맡아 2015년 11월 초 크랭크업 되었으며 2016년 6월 1일 개봉.
[[소재원]]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터널(영화)|터널]]》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터널 속에 갇힌 38세 자동차 딜러 [[이정수(터널)|이정수]] 역을 맡아 열연했다. 2016년 8월 10일 개봉되어, 개봉 12일 만에 500만 관객을 돌파하여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최종관객은 712만 명으로 흥행 대성공.
2017년 12월 20일에 개봉한 《[[신과함께(영화)]]》에서는 저승사자 강림 역을 맡았다. 주호민 만화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신과함께(영화)]]》는 그의 두 번째 천만 영화가 되었다. 2017년 12월 27일 개봉한 [[장준환]] 감독의 《[[1987(영화)|1987]]》에서 검사 역할도 맡았다. 황해 이후 오랜만에 [[김윤석]]과 호흡을 맞추고, [[유해진]], [[강동원]], [[김태리]] 등 쟁쟁한 배우들과 함께 작업했다. 하정우가 주연을 맡은 또 다른 영화 《[[신과함께(영화)|신과함께]]》와 개봉 시기가 비슷하여, 그의 영화 두 편이 동시에 영화관에 걸리게 되었다. --하정우 대 하정우-- 이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성공했다.
[[1987(영화)|1987]] 촬영이 끝난 뒤에는 [[더 테러 라이브]]의 감독 김병우와 함께하는 두 번째 작품 PMC 촬영에 들어갔다. 이번 영화에서는 [[이선균]]과 함께 출연해 연기한다. 하정우의 대사 중 80%가 영어 대사라고 하여 기대감을 모으는 중이다. 2018년 여름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그 외에도 [[류승완]] 감독의 영화 《[[베를린(영화)|베를린]]》 후속도 시나리오 작업 중이며, 한 인터뷰에서 아직 밝히지 않은 한 작품이 더 있다고 말했다.
2018년 1월 현재 [[신과함께-죄와 벌]]과 [[1987(영화)|1987]]이 동시에 흥행하면서 약 2,100만 명의 관객을 모았고, 단숨에 누적 관객수 9,300만 명을 돌파했다. 이는 [[한국 영화]] [[배우]] 누적 관객수 6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2018년]] 8월, [[신과함께-인과 연]]이 기록적인 흥행을 이어나가며 개봉 6일 차인 8월 6일, 만 40세로 역대 최연소 1억 관객 돌파 기록을 세웠다. 주연작만 계산하면 [[송강호]]에 이어 역대 두 번째 1억 관객 돌파 기록이며, 주조연작을 포함하면 역대 다섯 번째 1억 관객 돌파 기록, 전체 동원 관객 수 5위에 해당한다.
=== [[국토대장정]] 영화 577 프로젝트로 개봉 ===
[[2011년]] 연말, 말 한마디 잘못 했다가 국토대장정을 떠났다. [[2011년]] [[5월]]에 열린 제47회 [[백상예술대상]]에서 작년도 수상자로서 남우주연상 시상자로 나와서 2년 연속으로 수상하게 되면 국토대장정을 떠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황해(영화)|황해]]> 하정우.'''' 라고 발표하며 어색하게 웃었고 '''진짜로 갔다.'''[* 이 당시 그와 함께 시상자로 참가했던 [[하지원]]은 그 이후로 공약에 대해서 묻지 않는단다. ~~하정우처럼 했다 또 그러면?? 그 땐 하지원도 가야지.~~] 그리고 다른 배우들과 같이 국토대장정 하는 소재로 --반쯤 다큐인 영화-- '577 프로젝트'가 [[2012년]] [[8월 30일]]에 개봉했다. 제목이 지어진 배경은 이 프로젝트를 --작당-- 계획한 장소가 압구정의 '577술집'[* [[영화]]에서도 회의 장소로 나온다. 하정우의 단골집이기도 하다.]이기 때문.--577km 아니었어?--
* 비가 오던 어느 날 영화에서처럼 모자를 쓰고 아파트에 들어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그 때 옆에 서 있던 여자가 하정우를 보고 고함을 질렀다고 한다. 영화 추격자 개봉 후 한동안 사람들이 하정우를 직접 마주하면 ~~연예인 봤다고 좋아하는 게 아니라~~ 무서워했다.
* 2008년 개봉한 히어로 영화 [[아이언맨|아이언맨1]]에서 당시 [[만다린(마블 코믹스)|만다린]] 역에 캐스팅 제의를 받고 오디션까지 봤다고 한다. 시나리오의 변경에 따라 만다린 배역은 없었던 것이 되었고, 그 만다린 역할은 다시 부활하여 [[아이언맨 3]]에서 [[벤 킹즐리]]가 맡게 되는데… --[[맥주/목록#s-2.1|우리는 지구상 최강의 맥주 먹방을 할리우드에서 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런데 만다린과 관련한 새로운 [[Marvel One Shot#s-2.5|떡밥]]이 나옴에 따라 어쩌면 다시 가능성이… 생기는걸까?
||<rowbgcolor=#EA3C53>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활동}}}''' || '''{{{#white 배역}}}''' || '''{{{#white 관객수(명)}}}''' || '''{{{#white 흥행}}}''' ||
||<|2> 2014 || 제34회 황금촬영상 || '''연기대상'''[* 지난 해 사정상 열리지 못해 늦게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전년도 개봉한 영화를 기준으로 수상자가 선정되었다.] || 더 테러 라이브 ||
- 서영춘(코미디언) . . . . 21회 일치
[[한국]]의 [[코미디언]]. 1세대 코미디 트로이카([[서영춘]], [[구봉서]], [[배삼룡]])중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린 전설적인 코미디언이다. 다만, 이들 중에서 가장 늦게 데뷔하고 가장 먼저 단명했다. [[이주일]]을 시작으로 전성시대를 맞이한 1980년대 코미디계에서 다른 2명과 다르게 원로 코미디언으로 활약을 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1961년]] [[MBC]]의 개국과 더불어 방송가에 입문하였다. '[[웃으면 복이와요]]' 등 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60년대에 스타덤에 오르며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구봉서]]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60년대를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그의 극장식 패키지쇼. 이른바 서영춘쇼 또한 큰 히트를 치게 된다. 당시 별명은 살살이.
1970년대 중반 [[동양방송|TBC]]로 자리를 옮기며 [[고전 유모어극장]] 등을 통해서 70년대 중후반 부터, 80년대 초반 [[이주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코미디계 부동의 1인자 자리를 유지하였다. 1960,70년대 [[구봉서]], [[배삼룡]] 등과 코미디 트로이카로서 인기를 나눠 가졌다고는 하나, 당시를 아는 사람들에게 그들 중 누가 1인자였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영춘]]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 분명하다. 여담으로, [[이주일]]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도 바로 서영춘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방송국 대기실에 들어온 이주일을 본 서영춘은 속으로 '저 놈 방송에 나오면 무조건 뜬다!'라고 예상했는데, 약간의 곡절을 겪은 후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다만 전성기 시절에 관한 부분은 더욱이 자세히 봐야 하는것이 서영춘이 구봉서, 배삼룡보다 데뷔 시기나 주목받은 시기가 확실히 눈에 띄게 늦은 편이다. TV 방송 이전 악극단, 영화 시절 그리고 웃으면 복이와요 초창기 시절만 보더라도 메인은 서영춘이 아닌 구봉서, 배삼룡이었다. 실제로 웃으면 복이와요 초기 오프닝을 보면 배삼룡, 구봉서의 이름이 맨 처음에 등장하고 이 두 명을 중심으로 오프닝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https://youtu.be/CxMGWjLKOYA|1969년 당시 웃으면 복이와요 오프닝 링크]]
사실상 말이 트로이카지 사실상 구봉서, 배삼룡의 인기가 조금 식어갈 시기에 서영춘이 원톱급으로 발돋움한 시기가 맞물렸으며 사실상 당시를 보면 완전한 트로이카 체제보다는 구봉서, 배삼룡 - 서영춘으로 이어진 세대교체로 봐도 좋을 정도였다.[* 정확히는 악극단 시절부터 70년대 초까진 구봉서, 배삼룡이 우위였고 70년대 중후반 경부터 서영춘의 우위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서영춘 역시 악극단 시절부터 최고의 톱스타였으며 구봉서, 배삼룡 역시 70년대 중후반에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렇듯 전성기 시절 3명이 팽팽하게 인기를 가져갔으며 트로이카라는 말이 괜히 나온것이 아니다.] 즉, 시대적으로 약간의 개인차가 있었을 뿐 누구 한 명이 어느 특정 시대에 완전히 압도했던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이들이 엎치락 뒤치락 하던 시기가 한동안 지속되던 때에 [[이주일|다들 알다시피 어느 얼굴천재가 홀연히 나타나 모든것을 뒤바꿔 버렸으니....]]
서영춘은 바보 연기에 특화된 [[배삼룡]], 노래와 신체 조건을 이용한 개그가 장기였던 [[이기동(코미디언)|이기동]], 미남 역을 자주 담당했고 선역과 정극 연기도 능했던 [[구봉서]]와 달리 강한 개성으로 어필하였다. 특히 얼굴 표정 연기에 능하였고 연기도 두루 잘 하는 편이었으며 영화에서도 활약했다. 예외로 미국 물(미군 8군 무대)을 먹은 [[곽규석]]이 미국식 스탠딩 개그와 성대모사, [[남보원]] [[백남봉]]은 성대모사를 장기로 한 쪽이다.
게다가 사적으로 [[구봉서]]와는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는데, 한때 주당으로 유명한 구봉서가 싫다는 서영춘을 억지로 술자리에 매번 데려갔다고 한다. 훗날 구봉서는 [[개신교]]에 귀의해 술을 끊었고, 뒤늦게서야 서영춘의 음주습관을 말리려 했으나 너무 늦은 뒤였다. 이 때문에 구봉서는 이를 두고두고 애통해하며 그때 서영춘을 억지로 술자리에 데리고 다녔던 것을 크게 후회했다고 한다.
한번은 구봉서가 서영춘의 건강을 걱정하며 술을 끊으라고 충고하자, 서영춘은 '형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라 대들었다. 구봉서는 그 말을 듣고 너무 미안해서 아무 말도 못하고 뒤돌아 울었다고. 참고로 서영춘이 사망한 다음날(1986년 11월 2일)은 하필이면 구봉서의 [[환갑]] 날이었다. 구봉서는 이를 회고하는 언론 인터뷰에서 '자식들이 마련해준 환갑 잔치인데도 도무지 웃음이 나질 않았다'라고 회고하였다.
가족으로는 [[딸]] [[서현선]]과 [[아들]] [[서동균]]이 있고 둘 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코미디언]], [[배우|연극배우]]의 길을 밟았다. 서현선은 1990년대 초반 [[KBS]] '한바탕 웃음으로'에서 레귤러로 이름을 알렸다. 현재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봉숭아 학당]]'에서 [[오서방]]([[오재미]])과 합을 맞추는 미녀 [[코미디언]]이 바로 그녀이다. 동료들이 서영춘의 성대모사를 시전하자 발끈하는 모습을 (물론 개그로) 보여주기도 했다. 서동균은 [[개그콘서트]] 초중반기 멤버로 참가하며 로보캅 연기로 인지도를 쌓았으나 이후 [[이정수(1979)|이정수]]처럼 연극 및 뮤지컬 배우로 전업하였다.
- 서울특별시/인물 . . . . 21회 일치
* [[기리보이]] - 도봉구
* [[김소희(정치인)|김소희]] - 도봉구
* [[김현수(1988)|김현수]] - 도봉구
* [[나비(가수)|나비]] - 도봉구
* [[문보경]] - 도봉구
* [[문준영]] - 도봉구
* [[봉중근]] - 강북구
* [[박희우]] - 도봉구
* [[변희봉]] - 성북구
* [[신봉선]] - 송파구
* [[임현식(BTOB)|임현식]] - 도봉구
* [[양요섭]] - 도봉구
* [[윤산하]] - 도봉구
* [[이수(가수)|이수]] - 도봉구
* [[이청용]] - 도봉구
* [[정봉주]] - 노원구
* [[조성환(야구)|조성환]] - 도봉구
* [[정인봉]] - 종로구
* [[태민(1993)|태민]] - 도봉구
* [[홍문종(정치인)|홍문종]] - 도봉구
- 서상일 . . . . 20회 일치
1952년 전쟁중 임시수도인 부산 충무동 광장에서 열린 6ᆞ25기념식장에서 당시 현역의원인 2대국회의원 김시현의 사주를 받은 전의열단원 유시태가 이승만 대통령을 권총으로 저격하려다가 미수에 그친 일이 있었는데 당시 기념식 행사를 촬영중이던 국립영화제작소의 촬영카메라에 김시현이 쓰고있던 중절모에서 권총을 꺼내 유시태에게 건네주는 장면이 포착되어 두 사람은 모두 특무대에 체포되었다 배후를 수사하던 특무대는 전국회의원 서상일이 당시 현역의원이던 김시현에게 거사자금으로 2백만원을 지원한 사실을 밝혀내고 그를 구속했다 그런데 의아한 점은 당시 치안국장(오늘날 경찰청장) 윤우경도 사전에 암살음모 첩보를 입수했음에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김시현을 불러다 한번 다그친 후에는 차량이 없는 그에게 경찰찌프차와 운전사까지 대여해주었던것이다 구속된 서상일은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왔지만 피선거권이 박탈되어 1954년의 3대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수 없게 되자 자신의 선거구(대구 을구)에 조병옥을 대신 출마시켜 당선되도록 했다 이런 인연이 있음에도 후일 서상일이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가를 설득하자 조병옥은 냉정히 거절하였으며 이때문에 두 사람은 멱살잡이와 욕설까지 주고 받게 된다.그런데 이때 조병옥 장면 김준연 등 주로 보수야당 한민당 출신들이 조봉암의 민주당 합류를 반대했던 것은 이승만의 사사오입개헌 발의안에 서명까지 했던 자유당 출신 김영삼도 아무 이의없이 받아들인것을 감안하면 매우 자가당착적인 것이었다
결국 1954년 이승만의 3선저지를 위해 결성된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였던 서상일은 [[박기출]], [[장택상]] 등과 함께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참가를 반대하는 [[조병옥]], [[김준연]], [[장면]], [[박순천]] 등에게 항의하고[[호헌동지회]]를 탈퇴했다.그런데 그후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을 창당하는 과정에서 조봉암이 원래 서상일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기로 했던 두 사람간의 밀약을 깨고 조봉암 자신이 대통령후보로 나서려하자 이때문에 심기가 상한 서상일은 조봉암과 사실상 결별의 수순에 들어가 후일자신을 당 대표로 한 민주혁신당을 창당하였다
일단 서상일은 1956년 3월 31일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 참석하기는 하였으나 진보당전국추진위원대표자회의에서 [[대통령]] 후보에 [[조봉암]], [[부통령]] 후보에 서상일을 지명하자 한사코 이를 고사해 나중에 [[박기출]]로 바뀌었다.<ref name=autogenerated1>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7</ref> 서상일은 선거대책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부 당국에서 이 회의에 참석한 진보당추진위 대표들에게 협박·공갈·회유를 했고, 대회장에는 정치깡패 유지광이 이끄는 폭력단이 난입해 테러를 자행했다.<ref name=autogenerated1 />
56년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여론에 떠밀려 제일야당 민주당과 진보당은 후보단일화협상을 갖게 되었는데 협상장에서 진보당 대통령후보 [[조봉암]]은 민주당 [[대통령]] [[신익희]]에게 양보의사를 밝히는대신 [[부통령]] 후보는 중요하지 않으니 민주당측이 양보해달라는 의사를 전했다.<ref name="서158">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158 페이지</ref> 일단 [[신익희]]는 이 제의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민주당 (1955년)|민주당]] 으로서는 이것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였다. 왜냐하면 당시 신구파연합체였던 민주당은 당내경선에서 구파의 영수 신익희와 신파의 영수 장면을 나란히 정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던 것인데 신익희가 신파를 설득하는것도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익희ᆞ조봉암 회동이 이루어진지 6일만에 호남유세에 나섰던 신익희가 호남선 열차안에서 뇌출혈로 급사함으로써 사실상 후보단일화는 엉뚱하게 조봉암으로 되어버렸지만 민주당은 당차원에서 조봉암을 밀 생각은 전혀 없었고 오히려 민주당 최고위원 김준연은 조봉암의 사상적 문제점을 들어 이승만 지지를 공개선언하기까지 했다.
이때 서상일은 후보 단일화 문제를 놓고 [[조봉암]]과 끊임없이 토론하고 좋은 결론을 심사숙고하려 했다. [[조봉암]], 서상일 등은 원래는 선거가 종반전에 들어갈 때 정부통령 후보를 모두 민주당측에 양보하는 것에 합의했으나 신익희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조봉암이 사실상 대통령 단일후보가 되자 선거말미에 가서 부통령 후보 박기출만을 사퇴시켰던것이다. <ref name="서158"/> 대선이후 서상일은 겉으로는 [[조봉암]]과 함께 [[진보당]] 결성 운동을 추진했으나 이미 대선후보 결정당시 [[조봉암]]과 감정이 상했기 때문인지 [[진보당]] 결성에는 참여하지 않았고 사실상 1인정당인 민주혁신당을 창당했으나 이 당이 사실상 힘을 쓰지 못하자 서상일 또한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처해지게 되어 정계은퇴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된다. [[1962년]]에 [[서울]] [[종로구]] [[명륜동]]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사망했다.
* [[조봉암]]
[[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호헌동지회]][[분류:윤보선]][[분류:윤치호]][[분류:조봉암]][[분류:장택상]][[분류:민주당 (대한민국)]][[분류:진보당 (대한민국) 정치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구 서씨]][[분류:간 질환으로 죽은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울진군 . . . . 20회 일치
||<bgcolor=#04B431> {{{#FFFFFF '''2'''}}} ||<bgcolor=#CEF6CE> 방유봉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 ||
||<-2><bgcolor=#08088A> {{{#FFFFFF '''국회의원'''}}} ||<bgcolor=#CEE3F6>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br][[강석호]]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3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외딴 [[섬]]이나 [[반도]] 지형이 아니면서도 [[철도가 지나지 않는 시와 군]]과 [[고속도로가 지나지 않는 시와 군, 구]](정확히는 금강송면 서부지역에 200m가량 영동선철도가 지나긴 한다. 하지만, 정차역은 없다.) 에 모두 이름을 올린 얼마 안 되는 지역 중 하나다. 과거에는 [[승부역]]이 울진군에 속해 있었다. [[양원역(영동선)|양원역]]이 군 경계에서 가깝기는 하나, 교통 오지의 역이므로 그 마을에서만 이용하는 실정, 그나마 울진군 이용객이 있는 역은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에 있는 [[분천역]]이기는 하다. [[분천역]] 서쪽으로는 [[영동선]]보다 [[36번 국도]]가 좀더 나은 관계로 울진군의 철도 이용객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의외로 거리는 서울-영주-봉화-울진이 서울-동해-삼척-울진보다 짧다. 전자는 300km, 후자는 340km. 하지만 [[36번 국도]]의 상태는 굉장히 나쁘다. 반면 [[7번 국도]]는 거의 준 고속도로급이기 때문에 [[강릉시]]에서 1시간 30분 밖에 걸리지 않으며 예전에 3시간 가까이 걸리던 [[포항시]]도 역시 버스로 1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무정차에 한해서지만....완행노선은 여전히 3시간 정도 걸린다
현재 [[삼척시]]와 [[포항시]]를 연결하는 [[철도]] [[동해선]]이 공사 중에 있다. 2020년 예정대로 완공되면 지금보다 교통편은 훨씬 나아질 듯 하다. [[분천역]]과 [[울진역]]을 잇는 [[울진-분천선]]도 장기계획으로 추진 중이며 개통시 봉화-춘양-분천-울진-평해-영덕으로 직결 운행하기 위해 울진역은 읍내보다 조금 남쪽에 건설한다.
[[교통카드]]는 [[경상북도]]의 동해안권인 [[포항시]]에서 쓰는 [[T-Money|티머니]]를 공용한다. 인근 [[봉화군]]과 [[영덕군]]도 사용 예정.
백암[[온천]], 덕구[[온천]], 성류[[동굴|굴]], 불영계곡, [[불영사]] 등의 관광지가 있다. 이 가운데 불영계곡을 지나가는 불영계곡로는 매우 구불거려 이곳을 처음 지나가는 초행자는 자칫하면 토할수도 있다.--[[흠좀무]]-- 아예 이곳을 지나가는 [[시외버스]]에는 [[M6724|비닐봉지를 달아놨을 정도다.]]그러나 반대로 --가도가도 끝이 안보이는-- 계속되는 왕복2차선짜리 곡선도로을 지나가는 스릴또한 있어서 나름 [[버스 동호인]]한테 유명한 코스이며 [[자전거]] 라이딩 코스로도 인기가 많다.
* 봉평신라비전시관
[[신라]]시대의 비석인 [[국보]] [[울진 봉평리 신라비]]를 전시하는 시설. 죽변면 봉평리 소재. 바로 옆에 해수욕장도 있다.
지역 전체를 둘러봐도 영화관이 한군데도 없어서 과거엔 결혼 예식장에서 영화를 개봉하곤 했으나 --읍내리에 있던 울진소극장은 사라졌더라--현재는 군에서 청소년 수련관, 울진문화예술회관, 울진남부도서관,한울 원전 원자력 홍보관에서 개봉일이 좀 지난 영화를 무료로 상영해주다가 최근부터 1000원에 관람료를 받고 상영해주고 있다.
경북 북부 지역에도 영동 방언 스런 "~아이래요.", "~아니드래요." 라는 표현이 존재하는데, 재미있게도, 억양은 전형적인 [[동남 방언]] or 동남 + 영동 ([[동남 방언]] 억양이 좀 더 주된 양상) 이다. 이렇게, 경북 북부 지역 (예천, 영주, 안동북부, 봉화)에서도 [[동남 방언]]과 영동/강원 방언의 점이적 특징이 일부 보인다.
울진군은 [[진천군]], [[영동군]], [[홍성군]], [[무안군]], [[울주군]]과 함께 군인데도 불구하고 [[TOEIC]] 시험장이 있는 동네 여섯 곳 중 하나이다. 그래서 [[영양군]], [[영덕군]], [[봉화군]] 등 인근 군에 사는 토익 응시생들이 시험을 보러 원정을 오는 동네이기도 하다.
|| {{{#C9151E '''영양·영덕[br]·봉화·울진'''[* 지역구 국회의원 : [[강석호]]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3선)]}}} ||<:>16.72%||<:><bgcolor=#C9151E>{{{#FFFFFF 59.73%}}}||<:>13.29%||<:>5.65%||<:>3.33%||<:>{{{#808080 ▼43.01}}}||<:> 73.48 ||
|||| 울진군 || 영양군-[br]봉화군-울진군 || 봉화군-울진군 ||<-4>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
울진은 [[봉화군]], [[영덕군]], [[영양군]]과 선거구가 같은데 울진에서는 김중권 후보가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봉화는 비등한데 영덕에서 밀리는 식이다. 영양은 애초에 판세에 영향줄 만큼 인구가 많지 않다. 대표적으로 [[2012년]]에 있었던 19대 총선의 경우, 김중권 후보는 울진에선 51.63%를 득표해 40.21%를 득표한 새누리당 [[강석호]] 후보를 이겼으나 나머지 지역에서 강석호 후보에게 밀렸다. 특히 영덕에서는 강석호 후보가 70.64%를 득표했다. (물론 이는 강석호 후보의 고향이 영덕인 까닭이다.) 격차는 55:36으로 19%나 났는데 민주통합당 후보가 4.5%, [[녹색당(대한민국)|녹색당]]이 3%를 득표했다. 김중권 후보의 울진 득표는 16대 이래 50.90 -> 31.95%(범민주를 더하면 53.36%) -> 55.69% -> 51.63%으로 건재하나 아마도 이번이 마지막 출마가 될 것 같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2/05/2013020501995.html|#]]
- 전태일 . . . . 20회 일치
|직업= 재봉사, [[노동자]], [[노동 운동]]가, 인권 운동가
'''전태일'''(全泰壹, [[1948년]] [[9월 28일]] ~ [[1970년]] [[11월 13일]])은 [[대한민국]]의 봉제 [[노동자]]이자 [[노동운동가]], [[인권]] 운동가이다. [[1960년대]]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 봉재공장의 [[재봉사]], [[재단사]]로 일하며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였다.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울]]로 올라와 [[청계천]] 피복 공장에 취직하였다. [[1965년]]에는 청계천내 삼일회사 재봉사로 일하다가 강제 해고된 여공을 돕다가 함께 해고되었다. 이후 [[한미사]]의 재단보조로 있다가 재단사가 사장과의 갈등으로 해고되자, 그가 재단사가 되었다. [[1968년]] [[근로기준법]]의 존재를 알게 되어 [[1969년]] [[7월]]부터 [[노동청]]을 방문, 노동자들의 열악한 환경 개선과 위생 환경 개선을 요구하였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 남산동의 가난한 노동자인 전상수와 그의 부인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때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가내수공업도 했으나 거듭 실패했다.<ref name="ganaess">[http://h21.hani.co.kr/arti/special/special_general/28419.html 전태일의 시간·공간·생각] 한겨레 21 2010.11.05 제834호</ref> 그러다 재봉사였던 아버지 전상수가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서울]]로 올라와서 생활 전선에 뛰어들었다. [[1954년]] [[서울]] [[남대문국민학교]](남대문초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다.
그의 가족은 처음에 [[서울역]] 근처 [[염천교]] 밑에서 노숙했다.<ref name="ganaess"/> 한때 그의 어머니는 만리동 일대를 다니며 동냥했다.<ref name="ganaess"/> 그러나 봉제 일을 하던 아버지가 취직하여 월세방을 마련하면서 월세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1960년]]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 이후 그는 정규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고 거리에서 삼발이를 만들어서 파는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불우한 유년기를 보냈다.
[[1963년]] [[3월]] 대구 청옥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지만<ref>1971년 문교부 시책으로 중학교, 고등학교가 분리되기 전까지 한국의 학교들은 중고등학교가 함께 운영되었다.</ref>, 가정 사정으로 1학년 재학 중 그해 [[12월]] 자퇴하였다. 1963년 겨울 그의 아버지 전상수는 아들에게 자퇴를 강요하였다. 아버지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고 강요했다. 학교를 다닐 수 없게 된 것에 좌절하여 한때 가출, 집을 뛰쳐나갔다가 3일만에 귀가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돈을 벌어야 공부도 할 수 있는 것이라며 그를 발길질로 차고 구타하여 강제로 학교를 그만두게 했다.
아버지에게 재봉 일을 배웠으나 [[1964년]] 동생 전태삼을 데리고 다시 가출, [[서울]] 청계천으로 올라와 서울 평화시장의 의류제조회사에서 시다(견습공)로 일하였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배운 재봉 기술로 서울 평화시장의 피복점 보조로 취업해 14시간 노동을 하며 당시 차한잔 값이던 50원을 일당으로 받았다. [[1965년]] 구두닦이로 구두통을 메고 [[평화시장]]을 돌아다니던 중, 그해 가을 의류제조 회사인 [[삼일사]]에서 시다를 구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삼일사에 입사했다.
[[1965년]] [[평화시장]] 내 [[삼일사]]의 미싱사로 옮겨 재봉사로 일하며 어린 여공들이 적은 월급과 열악한 근무환경과 위생 환경,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것을 보며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특히 함께 일하던 한 여공이 가혹한 노동 환경으로 인한 직업병인 [[폐렴]]으로 강제 해고 되는 옳지 못한 일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도 여공을 도왔다는 이유로 회사에 밉보여서 [[1966년]] 여름 해고된다.
그는 여러가지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다. 친구들을 규합하는 어려움, 주변의 냉소와 비야냥거림, 노동청과 근로감독관, 언론들의 기만극, 생계를 책임져주기를 바라는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 속에 서있었다.<ref>《녹색평론 78호 (2004년 9, 10월호)》 (녹색평론, 2004) 59페이지</ref> 일부 미싱사와 봉제 노동자들은 그가 죽은 뒤에도 "자기 하나 죽는다고 뭐가 해결되느냐<ref name="ganaess"/>"라고 비판하였다. 이 당시에 어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 라고 썼다.<ref>조영래, 《전태일평전》 (돌베개, 2001) 183페이지</ref>
{{인용문2|1970년 여름 무렵, "아마도 한두 달 동안" 전태일은 김씨의 외삼촌이 운영하는 봉제공장에서 재단사로 일했다. 그가 노동운동을 했다는 이야기는 아주 나중에 들었다. 재단사 전태일은 키가 작았다. 얼굴도 작았다. "땅땅했다"라고 김씨는 회고했다. "뭐랄까, 아주… 아주 자그마했어.<ref name="ganaess"/>"|[[1970년]] [[8월]]~[[9월]] 무렵 전태일이 근무하던 미싱회사 사장 외조카의 증언}}
[[1970년]] [[9월]] 전태일은 [[한미사]]의 재단사가 되었다가, 같은 [[9월]] [[왕성사]]의 재단사가 되었다. 재봉사보다 지위가 높은 재단사로 일하며 이전의 바보회를 발전시킨 [[삼동친목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임되었다. 그 뒤 다시 노동실태 조사 설문지를 돌려 126장의 설문지와 90명의 서명을 받아 '[[평화시장 (서울)|평화시장]] 피복제품상 종업원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진정서'라는 이름으로 [[노동청]]에 진정서를 제출한다. 이 내용이 [[경향신문]]에 실려 주목을 받자, 전태일 등 삼동회 회원들은 본격적으로 임금, 노동 시간, 노동환경의 개선과 [[노동 조합]] 결성 등을 위해 사업주 대표들과 협의를 벌였으나, 일을 무마하려는 [[정부]]의 약속 위반으로 인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으며, [[자본가]]들도 삼동회는 [[사회주의]] 조직이라고 헐뜯음으로써 [[노동자]]들이 노동운동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방해하였다. 그해 [[10월]]부터 그는 [[노동권|근로조건]]개선 시위를 주관하였다.
이에 따라 전태일은 삼동회 회원들을 이끌고 [[1970년]] [[11월 13일]] 근로기준법은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법이라고 고발하는 뜻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하기로 결의하고, [[플래카드]] 등을 준비해 평화시장 앞에서 노동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피켓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자본가들과 경찰의 방해로 플래카드를 빼앗기고 시위가 무산된 뒤 점심 식사를 마친 그는 공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평화시장 골목 근처에 있다가 오후 1시 30분경, 시장 골목에서 몸에 [[석유]]와 [[휘발유]]를 붓고 라이터를 켠 뒤, 평화시장 앞길로 뛰쳐나왔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 하라!", "노동자를 혹사하지 말라"라고 외치며 시장 앞길을 뛰어다녔다. 이때 전태일의 친구였던 이름 미상의 남자가 그에게 불을 붙였다고 한다. 그의 이름을 알 수 없었던 [[조영래]]는 [[1983년]] [[전태일 평전]]을 집필하며 이 남성의 이름을 김개남이라는 가명을 붙였다. 그러나 정체불명의 남성에게 김개남이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이 민종덕이라는 설도 있다. 그에 의하면 '<전태일 평전>에 나오는 가명인 전태일의 벗의 이름 '김개남(가명)'은 민종덕의 창작물이라고 본다. 그는 전태일을 자신의 고향, 고부에서 출정한 동학 전봉준에 비견하였고 비슷한 위용을 떨쳤던 김개남을 전태일 친구의 가명으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7042 전태일·조영래와 함께한 휴가] 오마이뉴스 2007.08.08</ref>'는 것이다.
=== 봉제 노동자 월급 조사 ===
[[1970년]] 당시 전태일은 봉제 노동자들의 월급 액수를 설문 조사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1970년]]도 당시 전태일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대체로 시다가 월 1천8백 원에서 3천 원, 미싱사가 7천원에서 2만 5천원, 미싱보조는 3천원에서 1만 5천원, 그리고 재단사가 1만 5천원에서 3만원까지 받고 있었다.
그의 삶은 [[1983년]] 출판된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전태일재단에서 전태일 평전이 개정판으로 다시 출판되었다. 1990년대에 전태일의 생애를 다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란 영화가 제작되었는데, 전태일 역을 맡은 배우 [[홍경인]]과 내레이션 역할을 맡은 배우 [[문성근]]은 이 영화에 무료로 출연하였다.<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033100209138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03-31&officeId=00020&pageNo=38&printNo=22812&publishType=00010 영화「전태일」주역 확정 문성근 홍경인 무료출연] [[동아일보]] 1995년 3월 31일 작성</ref> 2000년에는 전태일 30주기에 맞춰 제작된, 전태일열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인터뷰를 엮은 영화 《전태일의 기억》이 개봉하였다.<ref>[http://www.cine21.com/movie/info/?movie_id=34429 씨네21-전태일의 기억]</ref> 연극으로는 자유학교 물꼬 학생들의 연극모임 '터'의 9기 학생들이 선보인 《스물 한살》이 있다.<ref>[http://www.chuntaeil.org/?c=30&p=3&uid=742 전태일 재단-[영화/다큐멘터리<nowiki>]</nowiki> 목록]</ref>
70년대 봉제공이던 전태일의 경우 당시 월급이 2만원 가량이었다.<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021128034008960 민주화운동보상금 60억5천만원 첫 지급]</ref>
- 한명회 . . . . 20회 일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ref name="park115">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15페이지</ref>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조선 세조|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인용문2|[[한 고조]]가 비록 장량(張良), 진평(陳平)의 계략을 쓰기는 했지만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을 썼고, 당 태종이 비록 방현령(房玄齡)ㆍ두여회(杜如晦)를 임용하였지만 전벌(戰伐)에는 포공 단지현(褒公 段志玄))과 악공 울지경덕(鄂公 尉遲敬德)을 선봉으로 세웠습니다.}}
[[1456년]] [[5월]]에는 [[명나라]] 황제가 [[태감]](太監) [[윤봉 (조선)|윤봉]](尹鳳)을 보내서 그에게 특별 선물로 그에게 관복(冠服)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육신]] 에 대한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세조 집권 초반부터 변방의 성곽 수축과 병력 양성을 건의하고, 해안가에도 성곽을 쌓고 병력을 보내 방비를 튼튼히 해야 하며 미구에 있을 왜구와 [[여진족]]의 침략을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456년]]부터 [[조선 단종|노산군]]과 [[금성대군]]을 처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조선 세조|세조]]가 듣지 않았다. [[1457년]](세조 2년) 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고 [[이조판서]] 겸 판의금부사와 [[오위도총부]]도총관을 겸한 뒤,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었다. 그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순흥]][[부사]] [[이보흠]]의 모의를 적발하여 처형시켰다. 그해 겨울 [[조선 예종|해양대군]]의 [[왕세자]] 책봉을 주청(奏請)을 위한 [[세자]][[책봉]] [[주청사]]가 되어 [[명나라]]의 [[연경]](燕京)에 들어갔다.
세자 책봉을 성사시키고 [[1458년]] 봄에 귀국,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여름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의 3도에 흉년이 들어, 그를 특별히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3도 순찰사(巡察使)에 특별히 임명되어 구호물자를 싣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순시하며 백성들을 구휼하고 돌아왔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다시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임명되고 [[판병조사]](判兵曹事)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이 되었으며,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1481년]](성종 11년)에 새 왕비가 된 [[정현왕후]]의 책봉 고명과 궁각(弓角)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책봉 [[주청사]](奏請使)로 [[명나라]]에 가니 황제가 충직한 노한(老韓)이 다시 왔다며 충성정직(忠成正直)으로 표창받고 돌아왔다. [[1484년]](성종 15년) 봄에도 나이 70으로 벼슬을 사임함에 왕이 경은 나라의 으뜸 공로자이며 인간적으로는 덕있는 노인이며 사직(社稷, 나라를 지켜주는 신)에는 하늘의 기둥(천주, 天柱)과 같은 존재이다" 하며 사임을 물리쳤다.
[[1484년]](성종 14년) 70세가 되어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한편 그의 정자 [[압구정]]이 화려하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명나라]] 사신과 [[일본]]의 사신들이 와서 구경하려 하자, 그는 궁중에서만 쓰는 [[용봉차일]](龍鳳遮日)을 쳐서 화려하게 꾸미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성종|성종]]이 허락하지 않자 이에 노골적으로 좋지 않은 기색을 보이게 되었다. 이어 [[대간]]과 [[사헌부]]로부터 무례하다는 이유로 탄핵 대상이 되어 외지로 유배되었으나 배소로 가던 도중 사면되어 곧 풀려났다.
[[1484년]](성종 14년) 세자 책봉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니 황제가 '충직한 노한이 또 다시 왔다'면서 금전(金錢)과 채단(彩緞, 채색한 비단)을 선물하였다. 이후 사재를 털어 [[도서관]]을 마련하여 유생들에게 한문을 권하였고 [[1485년]](성종 15년)에 병을 이유로 [[치사]]를 청하였으나 [[조선 성종|성종]]이 이를 듣지 않고, 오히려 성종에게서 [[지팡이]]와 의자를 선물로 하사 받았다. 그러나 [[1485년]]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들을 사사로이 불러서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다.
정실 부인 민씨와 여러 첩이 있었으나, 첩실의 존재는 네 명이 확인되고 있다. 이 중 정종화(鄭宗和)의 딸 연일 정씨와 전주 이씨는 [[조선 세조|세조]]가 특별히 [[신애라]]에 봉작하였으므로, 이후 정식 부인으로 대우하게 되었다.
** 장녀: 한씨(韓氏) - 고령부원군 [[신숙주]]의 장남 봉례랑 신주(奉禮郞 申澍)의 처.
* 《[[뿌리깊은 나무 (2011년 드라마)|뿌리 깊은 나무]]》 ([[SBS]], [[2011년]]~[[2011년]] 배우: [[조희봉]]<ref>극중에서는 '한가놈'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다가, 최종회에서 한명회임이 밝혀졌다.</ref>)
집안에서 상하를 막론하고 두 부인을 부인으로서 대우하지 않았다. 어느 날 [[조선 세조|세조]]가 그의 집에 방문하니 정종화의 딸 정씨, 이씨가 모셔서 술을 나누니 왕이 누구인지 물으니 양 부인이 뜰에 엎드려 그 원통한 사실을 울면서 하소연하자 [[조선 세조|세조]]가 형수(兄嫂)라고 부르며 입시하도록 하여, 특별히 가져온 종이와 먹에 어필로써 직접 써서 교지를 전하고 양 부인에게 정경부인(貞敬夫人)을 봉하는 옥새를 눌러주니 온 집안이 이때부터 양 부인을 괄시하지 않고 부인의 예로써 대했다.
* [[봉석주]]
* 신봉승, 《소설 한명회 1, 2》 (갑인출판사, 1992)
- 한확 . . . . 20회 일치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명나라]]의 [[영락제]]의 후궁으로 간택된 누이 여비를 호송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명나라]]의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건너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으며, 귀국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를 거쳐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다.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과 [[세조 찬위]]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가 서원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 [[여비 한씨]], [[선덕제|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은 그의 넷째, 다섯째 누이이다. 검소하고 청렴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를 도왔고, [[1418년]]의 [[세종]]의 책봉 고명과 [[1455년]] [[조선 세조|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는 누이들이 황제의 후궁인 점을 활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둘째 딸은 [[조선 세종|세종]]의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 증]]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딸은 [[조선 세조|세조]]의 장남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비 [[인수대비]]로서 [[조선 세종|세종]], [[조선 세조|세조]] 2대에 걸쳐 사돈이 되었다. [[한명회]]의 일족이다.
[[음서 제도|음보]]로 출사하여 부사정(副司正)이 되었다. [[1417년]](태종 17년) 가을 넷째누이 [[여비 한씨]]가 영락제의 후궁으로 낙점되자 [[명나라]]에 파견되는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녹사(錄事) 김덕장(金德章)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들어가는 황씨(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여 [[연경]]에 갔다가 그해 말 귀국하였다. 그뒤 누나가 여비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에 가서 [[명나라]]의 [[봉의대부]]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 세종 책봉고명과 외교 활동 ====
[[1418년]] 태종의 양위로 [[조선 세종|세종]]이 즉위하자 책봉 고명을 위한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년) [[1월]] [[명나라]] 황제의 책봉 고명서를 받들고 [[명나라]]의 책봉정사(冊封正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 유천(劉泉)과 함께 귀국하여 판한성 부사가 되었다.
그뒤 창성(昌盛)과 윤봉(尹鳳)이 또 한영정의 막내딸이 얼굴이 아름답다고 [[명나라]]에 고하자 그의 막내 누이도 명나라로 뽑혀 가게 되었다.<ref name="han01">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1427 정미 / 명 선덕(宣德) 2년) 5월 1일(무자) 4번째기사 "진헌할 처녀로 간택된 한영정의 막내딸이 혼수로 준비했던 재물을 나눠주다"</ref> 병이 나게 되어 한확이 약을 주니, 한씨가 먹지 않고 말하기를,
[[1435년]](세종 17년)에 자헌대부 행중추원부사,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7년]] 그의 딸 한씨가 계양군(桂陽君) 이증과 혼인하고 정선군 부인(旌善郡夫人)에 봉작되었다. 그의 또다른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 [[조선 덕종|도원군 숭]]과 결혼하는데 이 딸이 바로 후일의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된다.
[[1443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를 겸하였고, 그해 다시 [[판병조사]] 겸 지중추원사를 거쳐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44년]] [[경상도]], [[전라도]]의 진상품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해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이때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5년]] 중추원지사 겸 [[판병조사]](병조판서)를 겸하다가, 다시 판이조사(이조판서)가 되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1447년]] 이조 판서가 되고, 행[[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그해 행[[평안도]][[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였다. [[1448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그 후 판이조사·[[좌찬성]] 등을 거쳐 [[조선 세조|세조]] 때 서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1453년]](단종 원년)에 [[계유정난]]이 성공하면서 [[정난공신]]으로 책록된 뒤 [[우의정|우의정부사]]로 발탁되어 서성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이어 [[계유정난]] 당시 [[명나라]]에서 외교적인 문제를 제기할 때 [[명나라]] 사신을 설득하여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히 하였다. [[계유정난]]의 성공 이후 수양대군을 도와 그해 11월 좌찬성이 되었다가 다시 수충위사협찬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의정부 우의정 서원 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작되었다.
[[1454년]] 왕비 책봉의 공로로 상을 받았다. [[1455년]](단종 3년) 초 형조 판서 이변(李邊)·도승지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벽제역]](碧蹄驛)에 가서 [[명나라]]의 사신을 영접하였다.
세조의 책봉고명을 성사시킨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되었다.
귀국길에 올라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음력 9월 11일]] 사하포(沙河浦)에서 갑작스럽게 객사하였다. 당시 향년 56세였다.<ref>1400년생 설을 따를 경우</ref> 사망 당시 가사에 대한 말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했고, 여섯째 딸은 [[소혜왕후|인수대비]]로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며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어머니였다.
* [[봉석주]]
- 신화용 . . . . 18회 일치
2012 시즌 이후 FA로 풀리면서 소속팀인 포항과 연봉계약에 난항을 겪었으나 결국 ACL 선수등록 전날에 협상을 완료. 시즌 시작 후 타 팀 팬들에게도 '''아니 저렇게 잘하는 골키퍼 왜 국대 안 뽑음요?''' 하는 소리를 듣고 있다.
그리고 이어진 활약상으로 2013 K리그 3라운드 수원과의 경기에서 선방쇼를 보여준 끝에 3라운드 MVP로 뽑혔다. 수상 소감 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2012 시즌 후 FA로 풀리는 과정에서 포항과 있었던 연봉 협상[* 이 때 [[황진성]]과 더불어 연봉협상에 제일 난항을 겪었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ACL 선수등록 하루 전에 협상을 마무리하며 아슬아슬하게 팀에 남게 되었다.]의 뒷 이야기도 풀어놨는데 포항의 모기업인 포스코가 경영악화로 신화용에 걸맞는 연봉을 못 주는 상황에서 일본 클럽이 2배에 가까운 연봉을 제시했지만, 포항 유스 출신으로서 포항과 포항팬들에 대한 애정과 [[황선홍]] 감독에 대한 믿음 때문에 남는 것을 결정했다고 한다. ~~포스코 경영진들 보고 있나?~~ ~~경영정상화 되면 두고봅시다.~~ 이때 인터뷰에서 한 정확한 발언은 "감독님이 첫 번째 이유다. 전지훈련 도중 떠난다는 말을 못하겠더라. 감독님과 두 번 다시 안 볼 사이도 아니다. 그리고 나를 믿어준 동료들도 있었다. 고향이고 팬들도 마음에 걸렸다. 남아야할 이유가 더 많았다. 떠날 이유는 돈 뿐이었다."[[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241&article_id=0002124687&date=20130319&page=2|보러가기]]
그 공을 인정받아 포스코가 경영정상화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포항의 FA 선수들 중 먼저 재계약을 하였다. 구단은 2년 계약을 제시했지만 신화용 본인의 요청으로 계약 기간은 1년, 연봉은 비공개로 합의했지만 상당히 올랐을 것으로 추정되며 결정적으로 연맹 정책때문에 14 시즌 중에 다 공개가 되기 때문에 비공개의 의미가 없다.
사실 후반기의 포항 경기는 '''어떻게든 득점->신화용 선방쇼''' 구도라서 2015년 FA로 다시 풀리는 신화용이 포항을 떠날까봐 팬들은 걱정했다. 하지만 황선홍감독의 인터뷰를 보면 이미 [[김태수(축구선수)|김태수]]와 함께 재계약이 완료된 상태라고 한다.[* 신화용 본인도 인터뷰에서 "지난 2년간 연봉협상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올해는 홀가분하게 출발하고싶다."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FA로 풀린 것을 보면 아직 세부사항을 조율중인 것으로 보이지만, 서브 키퍼인 김다솔이 '''"신화용의 재계약이 확실해지면 자유롭게 이적할 수 있다."''' 계약조건으로 [[대전 시티즌]] 이적을 확정하면서 사실상 신화용도 포항과 제계약 했음을 시사했다. '''그리고 드디어 재계약 완료기사가 떴다!!!''' 포항팬들은 신규영입들보다 더 반가워 하고 있다. 기존 선수들 중에서 대체 불가능한 인물인지라 2014 시즌에 신화용이 결장한 경기 승률이 바닥이라는 것이 모든걸 이야기 해주고 있다.
'''[[김승대]]가 [[연변 FC]]로 20억에 팔리면서''' 여기서 생긴 돈으로 결국 신화용, 황지수, 손준호 핵심 3인방은 다시 잡는데 성공했다. 매시즌 1~2월까지 거취문제로 포항팬들의 가슴을 졸이게 했던 것에 비하면 12월 중순이 지나가기도 전에 재계약 기사가 떴고, 덤으로 배슬기, 김원일, 김광석 센터백 3인방도 그대로 포항에 남으면서 적어도 16시즌 수비만큼은 안심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이번 계약은 2년 계약이라 최소 2017년까지 포항에 잔류하게 되었다. 신화용 본인말로는 비싼 연봉을 부른 팀이 있었지만 '가족'을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고 한다.[[http://sports.media.daum.net/sports/soccer/newsview?newsId=20151224152139569|###]] ~~포항밖에 모르는 바보~~[* 다만 포항에서도 상당한 대우를 해주고 있는 것이 15시즌이 끝나고 공개된 연봉공개에서 신화용은 국내선수 중 4위. 6억 3천의 연봉을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키퍼 포지션에서 신화용보다 연봉이 높은 선수는 수원에서 7억 넘게 받은 정성룡 뿐이며 선수단 연봉 총액이 70억 내외인 포항 입장에서는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는 편이다. 그만큼 포항 프런트도 긴축재정으로 구단 예산이 줄어드는 상황에서도 신화용 만큼은 반드시 잡고 간다는 반증인셈.][* 다만, 기본급은 정성룡보다 한참 낮은것이 맞다. 연맹에서 발표하는 연봉공개 내역은 기타 수당을 다 합친 금액을 발표하는 것이기 때문에 15시즌 전경기 출장+17경기 클린시트 보너스를 합친 신화용의 연봉은 이러저러해서 시즌을 절반가량 날려먹은 정성룡과 비슷하게 나올 수 밖에 없다.]
특히 신화용은 자신의 성적이 좋았던 시즌에도 포항과의 의리를 지키려고 구단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해 '''연봉을 스스로 깎고 포항에 남았는데,''' 정작 16시즌 팀 성적과 신화용의 개인 성적이 하락하자 바로 신화용을 시장에 내논사실을 알게 된 신화용은 배신감을 느끼며 결국 포항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후 사정을 알게 된 [[최순호]]가 급하게 구단에 강력요청하여 신화용을 잡기 위해 다시 협상을 하게 되나[* 사실 이것도 말이 안 되는 것이 감독의 의사와 상관없이 이미 프런트에서 자기들 마음대로 팀의 레전드급 선수를 팔겠다는 계획을 독단적으로 내렸다는 것이다. 2010년대 이후 포스코의 낙하산 사장에 휘둘리는 포항 프런트가 얼마나 막장으로 전락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이미 신화용의 마음은 포항을 떠났고 결국 신화용은 새팀으로 이적했다. 포항은 이적료+'''[[노동건]] 임대'''를 하는 형식으로 신화용을 내줬다. 노동건이 아직 리그 정상급 기량은 아니지만 [[2014 인천 아시안 게임/축구|인천 아시안 게임 금메달]]로 군면제를 받은 20대 골키퍼라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수원 프런트가 '과연 군필 골키퍼를 임대 후 이적 조건으로 포항에 줬을까?' 를 생각해본다면 즉전감 키퍼를 받고 후보 키퍼를 빌려줘 경험치도 먹이려는 [[호구]]딜일 가능성이 높다.
키가 큰 골키퍼를 선호하는 김봉수 코치 때문에 대표팀에 뽑히지 못한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저 소문일 뿐이다. 김봉수 코치는 오히려 김병지, 이운재, 카시야스를 거론하며 골키퍼는 키보다 경기 운영능력, 판단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http://www.sportnest.kr/1564|관련 기사]] 정성룡 때문에 덩달아 미운 털이 박혀서 본인이 한 말과 정반대의 말이 퍼져 인터넷에서 공연히 욕을 먹고 있다.[* 덧붙여 굳이 김봉수의 양아들을 찾자면 정성룡이 아니라 A매치 달랑 1경기 뛰어본 이범영이다. 유소년 시절부터 가르친 선수로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4강 UAE전에서 한국에서 패널티킥 방어가 가장 뛰어난 김승규를 빼고 승부차기 대비용으로 넣을 정도로 신뢰를 보였다. 정성룡은 부진할 때 코치로서 변호해준 게 다인데 어쩌다 보니 양아버지란 낙인이 찍혔다.] 신화용이 뽑히지 못한 건 잘한다고 무한정 돌려 쓸 수 없는 골키퍼 포지션의 특수성 때문이지 다른게 아니다.
- 임수정(탤런트) . . . . 18회 일치
《[[장화, 홍련]]》 에 캐스팅이 된 것은 그녀의 연기인생의 큰 터닝 포인트가 된 일이었다.(사실상 마지막 오디션이기도 했다.) 여동생 역으로 나온 [[문근영]]과 자매연기를 한 그녀는, 여동생에 대한 집착으로 정신적으로 혼란한 언니의 연기를 보여 주며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2003년 여름에 개봉되어 국내 공포영화 중 최다관객 기록. 이 기록은 아직 깨지지 않고 있다. 이 작품으로 그녀는 2003년 각종 영화제에서 신인상을 휩쓸었다. 특히 청룡영화상에선 심사위원 만장일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리고 10년간 콩라인에 떠돌다가 청룡영화상에서 결국 상을 받는다.~~
2005년 많은 인기를 얻은 그녀는 영화 《새드무비》에 출연했으나, 영화가 높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당시 최고의 주가였던 임수정을 포함 [[정우성]], [[신민아]], [[염정아]], [[차태현]], [[손태영]], [[이기우(배우)|이기우]], [[여진구]]가 나오는데 흥행하지 못한 게 신기할 뿐;; 정우성이 2000년대 중반 놈놈놈을 제외하고 '새드무비’ ‘데이지’ ‘[[중천(영화)|중천]]’ ‘호우시절’ ‘검우강호’ ‘아테나: 전쟁의 여신’까지 모조리 망해가던 침체기였고 임수정도 거품이라는 말이 생기던 시점에서 차기작을 흥행필패로 여겨져서 여배우건 남배우건 기피하던 동물영화로 선택했다. 영화 《각설탕》 이 그것이다. 2006년 개봉한 영화는 동시기에 개봉한 《[[괴물(영화)|괴물]]》 강세 속에서도 150만 관객을 동원하며 존재감을 보여줬다. ~~여담으로 이 작품의 후속작은 [[김태희]]가 출연하여 16만 관객으로 폭망~~
곧이어 2007년 개봉한 《[[행복(한국 영화)|행복]]》에서는 다소 나이 차가 있는 [[황정민]]과 커플 연기[* 당시 영화 개봉 전 나온 예고편에서의 베드신과 영화 내용 때문에 [[황정민]]은 없던 안티 카페가 생겨 버렸다.(...)]를 보여주었다. 그 동안의 소녀 이미지와 거리가 있는 모습으로 나왔다. 2006년에 이어 2007년 역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작품은 [[허진호]] 감독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이다.
2008년에는 작품 발표를 하지 않고 공식행사, CF촬영, 그리고 2009년 개봉예정인 영화 《[[전우치(영화)|전우치]]》 촬영에 매진했다. 전우치 촬영은 2009년 상반기에서야 끝났다. 그 해 12월 개봉하는 《전우치》 의 개봉 전에 태국 푸껫에서 단편영화 《푸껫》을 촬영했고 부산국제영화제에 발표했다. 그녀의 [[영어]] 대사를 볼수 있다고 알려져 있고 부산국제영화제와 푸껫행 비행기에서 상영되었다고 한다. 전우치에서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긴 했지만 남자배우들과 비교해서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연기력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사실 비중이 크지 않은 반면에 캐릭터는 여러가지였다. 오히려 [[최동훈]] 감독이 그녀에게 비중이 크지 않은 역을 준 것에 대해 미안해 하기도. 그럼에도 불만 없이 와이어 액션까지 소화하며 최선을 다했다고 볼 수 있다. 캐스팅 된 작품에서 자신의 비중이 줄어들자 출연을 취소한 배우들이 종종 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와 대조적인 태도다.] 12월 《전우치》 일정 도중 과로로 남은 무대인사를 불참했다.
이후 휴식을 취하며 차기작을 고르다가 2010년 뮤지컬 원작의 《[[김종욱 찾기(영화)|김종욱 찾기]]》에 [[공유(배우)|공유]]와 함께 촬영을 했고 그 해 12월에 개봉이 되었다.
2010년 9월에는 [[현빈]]과 함께 [[저예산 영화]]인 《사랑한다, 사랑하지 않는다》에 출연하게 되었고 2011년 2월 24일 개봉. 두 배우 모두 무보수로 나온다고. 거기에 함께 스태프의 회식과 간식 비용까지 책임졌다고 한다. 오오 [[대인배]]. 영화로 2011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 [[전도연]] 이후 2회 이상 3대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은 2번째 한국 여배우가 되었다.
2012년 5월 17일에 개봉한 영화 《[[내 아내의 모든것]]》에 여주인공인 '정인' 역을 연기했다. 어떻게 보면 무거울 수도 있는 주제인 결혼 후 [[권태기]]를 코믹하게 잘 풀어낸 영화. 같이 연기한 [[이선균]], [[류승룡]]과의 호흡이 돋보이며 특히 [[류승룡]]의 코믹 연기가 일품이다. 그리고 여기서 수위가 매우 높은 연기를 보여준다. 흡연은 물론 집에서 '''[[티셔츠]]와 [[팬티]]'''만 입고 있다거나, 남편 [[이선균]] 앞에서 옷을 훌렁훌렁 벗어던진다든가 --YEAAAAAAAAH!--, [[검열삭제]] 직전까지 간다거나 --[[이선균]] 이 나쁜 놈--...
||<rowbgcolor=#c0c0c0>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관객수'''}}} || {{{#ffffff '''비고'''}}} ||
|| 푸켓 || 진 || 단편영화(미개봉) || 태국진출작 ||
흥행성적이 좋은 작품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장화 홍련》은 300만이 넘는 관객 수를 기록했고, 《각설탕》도 140만, 《행복》도 123만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이외에 《김종욱찾기》도 109만 명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아바타]]》에 밀리긴 했지만 《전우치》로 600만을 돌파하며 흥행력이 뒤떨어지는 배우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다만 《전우치》는 비중이 그다지 크지 앉아서, 대부분 [[강동원(배우)|강동원]], [[김윤석]]의 영화로 기억한다.] 2012년 개봉작인 《내 아내의 모든 것》이 450만 명으로 흥행했다.[* 전국 관객수 4,588,395명 출처: 영화관입장통합전산망] 그런데 [[유연석]]과 함께 출연한 2014년작 《은밀한 유혹》은 손익분기점 200만에 14만으로 완전히 실패했다.
[[허진호]], [[최동훈]], [[박찬욱]], [[김지운]]이라는 충무로 최고의 감독들과 작품을 해 본 '''유일한''' 여배우고, 독립영화부터 영화제용 영화에 여러가지 장르와 배역에 도전하는 연기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이다. 또한 세간의 평과 다르게 여배우 치고는 다작을 하는 배우로, [[2015년]]에는 2개의 작품 개봉이 예정되어있다.
* [[봉준호]] (영화감독)
'''[[콩라인]]'''에 속해있다.[* 2006년, 2007년 '''2회''' 연속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에 지명되었으나 당시 막강했던 《[[타짜]]》의 [[김혜수]]와 《[[밀양]]》의 [[전도연]]에 '''두 번''' 다 '''2위'''로 밀렸다. 이들이 정작 활동이 없거나 후보가 되지 않을때는 하필 그녀도 활동을 안하던 시기였다.(...) 이들이 안 나온 영화제 여우주연상 후보에도 올랐으나 역시나 밀렸다.(...) 2006년 《각설탕》 개봉기간 괴물에 밀려 내내 흥행 '''2위''' 2009년 《전우치》 개봉기간 《아바타》에 밀려 내내 흥행 '''2위''']
- 헌경왕후 . . . . 18회 일치
|부모 = [[홍봉한]] / 한산부부인 이씨
조선 선조때의 문신 [[홍이상]]의 7대손이다. 모계로는 [[조선 선조|선조]]의 외6대손으로, 선조의 부마 영안위 [[홍주원]]과, 선조와 인목대비 소생 [[정명공주]]가 5대조부와 5대조모가 된다. 그가 태어날 때 할아버지 [[홍현보]]는 태몽을 꾸고, 그가 태어나자 아들 내외에게 특별한 아이라고 예상하였다. [[1735년]](영조 11년) 한성부 반송반에서 [[홍봉한]](洪鳳漢)과 한산부부인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나, [[1743년]](영조 19년) 사도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었다. 할아버지 홍현보는 예조판서까지 역임했지만 [[한중록]]에 의하면 아버지 [[홍봉한]]은 여러 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했고, 그의 가계는 빈한하여 언니를 시집보낼 때와 그가 출가할 때 혼수품이 넉넉하지 않았다 한다. 그가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릴 때, 얼굴도 모르고 처음 보는 친척들이 나타나서 자신의 이름을 알아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바로 영조의 특명으로 아버지 [[홍봉한]]은 그에게 《소학(小學)》, 《내훈(內訓)》, 《어제훈서(御製訓書)》를 가르쳤다 한다. 영조 20년인 [[1744년]](영조 20년) 10세의 나이로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리고 낳은 아들로는 [[의소세손]]과 [[조선 정조|정조]]가 있다. 영조는 첫 손자인 의소세손 이정이 태어나자 기대가 남달랐으나 의소세손은 곧 요절했다. 그러나 2년 만에 둘째 아들 세손 이산이 태어났다.
{{출처|날짜=2010-10-31|임오화변의 원인으로 영조가 노론을 견제키 위해 키운 외척계 탕평당인 홍봉한 계열과 영조의 탕평에 반발하던 노론계의 대립으로 기행을 일삼던 사도세자 문제가 정치적으로 떠올랐는데 반 탕평파에서 홍봉한을 공격하기 위해 그의 약점이던 사도세자 문제를 정치 문제화 시켰다는 주장도 있다. 홍봉한은 이를 덮기 위해 뇌물까지 제공하며 은폐하려 했지만 나경언의 고변까지 들어가고 더이상 어쩔 수 없는 상태까지 오자 영조가 종사를 위해 아들을 포기했고 손자를 지키기 위해 홍봉한에게 자신의 명을 따르도록 종용했다고 한다.}} 당시 상당한 상소에서 사도세자의 비행을 은폐하는 홍봉한에 대한 공격이 나온다.
홍봉한은 [[1770년]](영조 46년)경 반대파 김귀주, 정후겸의 공격으로 정계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봉조하의 직함으로 교외에 거주했으며 이후에도 이복동생이던 홍인한과 사이가 좋지 않았고 형을 배신했다고 정조가 말한적이 있다. 사도세자 생전부터 있었던 정순왕후 외척가문과의 정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후에도 김귀주 정파의 홍봉한 탄핵이 여러번 있었으며 정조 즉위초에도, 정조 사후에도 이들이 홍봉한에 대한 공격을 주도했다. 사도세자의 추숭에 대해 당시 세손이던 정조와 사석에서 홍봉한이 나눈 이야기를 김귀주가 영조에게 고자질해서 홍봉한을 역적으로 몰기도 했었다.
생전 그는 효강 자희 정선 휘목 혜빈(孝康慈禧貞宣徽穆惠嬪)의 존호를 받았다. [[1805년]](순조 5년)부터는 담현증(痰昡症)을 앓아 오래 병석에 누웠다. [[1815년]](순조 15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81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며 헌경빈(獻敬嬪)의 시호를 받았다. 이는 총명하고 예지(睿知)함을 헌(獻)이라 하고 밤낮으로 경계함을 일러 경(敬)이라 하였다 한다.<ref>순조실록 18권, 순조 15년(1815 을해년 / 청 가경 20년) 12월 25일(을해) 2번째기사, "빈청에서 혜경궁의 시호를 다시 의논하여 올리다"</ref> 순조 즉위 직후 혜경궁은 아들 [[조선 정조|정조]]의 약속을 이유로 친정에 대한 신원을 요구했고, [[1814년]](순조 14년) 그의 친정집은 신원, 복권된다. 또한 [[홍봉한]]의 죽음 직전에 그를 비난했던 정이환, 이심도 등의 처벌을 요구한다. 이심도는 사형에 처해진다.
***** '''아버지''' : 영풍부원군 익정공 [[홍봉한]](永豊府院君 翼靖公 洪鳳漢, 1713~1778)
- 김재규 . . . . 17회 일치
해방 후 김천중학교[* 現 김천중학교&[[김천고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하다가 1946년 [[육군사관학교|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입교하여 1946년 12월 졸업하였는데, 졸업당시성적은 196명 중 14등으로 우수한 성적이었다. 그러나 중대장 대리로 복무 중에 군경체육대회 때 [[미 육군]]과 충돌을 일으킨 죄로 면관당한 후 잠시 낙향하여 김천중학교와 대륜중학교[* 現 [[대륜중학교]]&[[대륜고등학교]]] 교사 생활을 하였다. 그 후 복직되어 22연대 정보주임으로 안동지구 공비토벌작전에 참가하여 큰 공을 세워 충무무공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의 공을 인정받아 3사단 22 연대 제 2 대대장으로 부임하는데, 공교롭게도 부임일에 6.25 사변이 발발한다. 김재규는 2대대를 지휘하며 의정부·대구·영덕 지구의 전투에 참여하여 북한군과 혈전을 벌였고, 6.25의 전투 중 치열하기로 손꼽혔던 황간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에 선봉에 서서 함경남도의 땅까지 밟으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황이 악화되어 남으로 후퇴하게 되고 이후 여수 제 2 보충연대장으로 부임한다.[* 참고로 박정희는 6.25때 후방에서 보급병과 장교로 근무하느라 전공은 커녕 북한군과 마주친 적조차 없다.] 1970년에는 [[한양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57년에 [[육군대학]] 부총장을 지낸 후 방첩부대장, 육군보안사령관, [[제3군단]]장을 역임한 후 육군 [[중장]]으로 전역하였다.
>구국여성봉사단이라는 단체는 총재에 최태민, 명예총재에 [[박근혜]] 양이었는 바, '''이 단체가 얼마나 많은 부정을 저질러왔고 따라서 국민, 특히 여성단체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어왔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아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영애가 관여하고 있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아무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 민정수석 박승규 비서관조차 말도 못 꺼내고 중정부장인 본인에게 호소할 정도'''였습니다. 본인은 백광현 당시 안정국장을 시켜 상세한 조사를 하게 한 뒤 그 결과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던 것이나 박 대통령은 근혜 양의 말과 다른 이 보고를 믿지 않고 직접 친국까지 시행하였고, 그 결과 '''[[최태민]]의 부정행위를 정확하게 파악하였으면서도 근혜 양을 그 단체에서 손떼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근혜 양을 총재로 하고, 최태민을 명예총재로 올려놓아''' 결과적으로 개악을 시킨 일이 있었습니다.
위의 항소이유보충서에서 나왔듯이, 청와대 내에서 실세 권력이 높았던 박승규 [[민정수석비서관]]조차 방법이 없어서 김재규에게 직접 하소연했다는 내용을 생각해보자. 당시 [[박근혜]]는 단순한 [[공주]]가 아닌 육영수의 분신이었고, [[육영수 저격 사건|저격 사건]]으로 죽은 영부인의 딸이란 동정표까지 더해져, 당시 노인들은 박근혜만 보면 '''"[[공주]]님 오셨다"'''며 큰 절을 올리며 눈물 흘릴 정도였다.[[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11042107005|#]] 더욱이 마음에 안드는 경찰청장이나 도지사를 호출하여 호통칠 정도로 국정을 농단하는 최태민에게 분노한, 김재규는 [[박정희]]에게 [[최태민]]과 박근혜를 떼어놓으라고 직언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김재규의 직언을 듣기는 커녕 박근혜를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직에 올리고 최태민을 명예총재직에 올리는 조치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 그리고 이때 느꼈던 절망감이 [[10.26 사건]]의 동기가 되었다고 김재규는 증언하였다.
이밖에도 자신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고 알아주는 사람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김영삼]]의 구속을 반대하는 동시에 [[김대중]]의 가택 연금을 일시적으로 해제시키고 김영삼과 만나게 승인했으며, [[차지철]]과의 갈등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승진과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다가 발생한 갈등이 아니라 국정 방향에 대한 이견으로 인해 갈등이 생겼다는 증언이 나오고 있다. 박정희를 추앙하는 조갑제조차도 김재규가 사욕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는 칼럼을 개시했을 정도였다. 김영삼의 측근이었던 김봉조의 회고에 의하면 김재규는 중앙정보부장 시절 자신을 방으로 불러 격려하며 김영삼은 한국을 위해 큰 일을 할 인물이고 앞으로 김영삼이 정치활동을 하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자신있게 잘 모시라며 격려하였다고 한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73|#]]
>김재규의 거사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지만, 여성 연예인들이 저런 식으로 대통령의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큼은 확실히 차단했다. [[윤보선]] 전 대통령은 김재규의 구명을 호소하면서 우리의 민주화가 김재규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민주화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그 여성 연예인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우리 역사에는 또다른 10·26 사건이 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쏜 날이 [[1909년]] [[10월 26일]]이었다. 70년을 두고 2개의 10·26 사건이 있는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해 군사독재가 왔는데, 일본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토의 제삿날과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의 제삿날이 같다는 것은 단순한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중략)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졌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으면서도 박정희의 명예는 끝까지 지켜주고자 했던 김재규는 대가 끊겼던 한국 보수우익의 계보학에서 돌출한 마지막 대륙형 인간이었다.
[[김영삼]]의 측근으로 현재 민주동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봉조(1939)|김봉조]] 전 의원도 처음에는 김재규를 유신정권의 사냥개쯤으로 여겼으나, 자신을 직접 찾아와 격려하며 김영삼에게도 격려와 덕담을 전해 달라는 김재규의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가 박정희를 죽인 이유는 사심이나 감정적인 이유 때문이 아닌 역사 앞에 정의감 때문이었다며, 훗날 이런 사실이 밝혀질 것이라 주장했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52773|#]]
정말 더 간단한 예를 들어 반박할 수도 있다. '''그래서 [[북한]]은 주민들이 다 멍청이라 3대 독재가 이루어졌나?''' 박정희는 헌정사상 독재자 중 가장 군을 잘 장악한 인물이었다. 박정희는 공무원, 군인 등을 다룰 때 소위 '금일봉 정치'라는 것을 행하였다. 이는 누군가에게 포상을 줄 때, 훈장이나 공적 상금 등의 공식적 포상을 주지 않고, 지극히 사적인 포상인 '금일봉'을 전달하여 포상을 주는 사람이 바로 '박정희'라는 것을 부각, 충성심을 유도하는 정치행위였다. 이는 조선시대에 국왕이 [[내탕금]]을 가지고 자신이 총애하는 신하에게 포상을 주는 것과 동일한 중세 수준의 정치행위였지만 효과는 매우 굉장했다. 이런 금일봉 정치는 상당한 비자금을 필요로 해서 박정희 휘하 3,4공 실세들은 정치자금 확보에 혈안이 되어 있었고, '''특히 출처나 사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중앙정보부]]의 돈이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활용되었고, 관행이 되었다.''' 당장 2010년대에만 해도 대통령이 [[국정원]]의 돈을 개인 쌈짓돈 마냥 써서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이라는 희대의 사건이 터졌는데, 이는 박정희 당시, 정보기관이 대통령에게 돈을 갖다 바치던 '관례'가 고스란히 유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만 [[노무현]], [[김대중]]의 경우 특수활동비에 대한 사적유용을 하지 않았다는 주장도 많다. 그러나 진위여부가 불분명한 두 대통령과 달리 박정희 이후의 '''나머지 대통령은 다 받았다.''']
박정희의 금일봉 정치는 단순히 금전을 제공해 충성심을 유도하는 것으로 사용된 것 만은 아니었다. [[전두환]]에게 고급 자동차를 선물한 것처럼, 박정희는 자신이 해당 군인에게 가지고 있는 '총애'의 표현수단으로 사용하였다. 아무리 금일봉이라지만 '누구에게 얼마를 주었다더라.'는 여기저기 소문으로 퍼져나갔고, 이는 박정희가 그 '누구'에게 보이는 '[[전투력|총애의 정도]]'가 되었다. 돈 자체도 좋지만 금일봉의 액수는 박정희가 자신에게 보이는 총애와 관심이었고, 유신 정권 아래에서 이는 곧 '''자신의 발언권과 권력'''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 수뇌부는 충성 박치기를 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사실상 박정희의 사병(私兵)이 되었다. 국토를 수호하고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할 군이 마치 [[조선인민군]]마냥 독재자 개인의 친위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김재규의 거사는 자유민주주의 회복엔 완전히 이르지 못했어도 여성연예인들이 대통령 술자리에 불려가는 일만은 확실히 차단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득세한 나라에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김구]]로 상징되는 보수우익 의사의 계보는 대가 끊어지고 말았다.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쏜 김재규가 뒤를 이은 셈이다.
>끝으로 나의 부하들은 착하고 순한 양 같은 사람들입니다. 무조건 복종했고 선택의 여유나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저 하나가, 중앙정보부장 지낸 사람이 총책임 지고 희생됨으로써 충분합니다. 저에게 극형을 주고, 나머지는 극형만 면해 주도록 부탁합니다. 특히 박 대령은 단심이라 가슴 아픕니다. 매우 착실하고 결백하며 가정적인 사람입니다. 청운의 꿈이 있던 사람입니다. 군에서 곤란하더라도 여생을 사회에서 봉사 할 수 있도록 극형을 면해 주시기 바랍니다. (김재규의 최후 진술)
- 유승민(정치인) . . . . 16회 일치
1999년부터 시상된 '백봉신사상'은 백봉 라용균 선생을 기념하는 기념사업회에서 매년 정치부(국회출입기자)들 사이의 설문조사를 기반으로 그해의 가장 모범적인 국회의원을 뽑는 상이다. 정직성, 사회·국민에 대한 헌신, 정치적 리더십, 의회민주주의 실천, 소통능력 등이 평가 대상이며, 사실상 기자들 사이의 국회의원 인기를 가늠할 수 있는 상이다. 유승민 의원은 이전에도 수차례 베스트 10에 이름을 올렸지만, 2015년과 2016년은 각각 대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정의화 국회의장은 시상기념사에서 '''"유승민 의원은 압도적인 표차로 1위에 선정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2015년 정의화 국회의장, 2016년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백봉신사상 대상을 수여받는 유승민'''
* 2017 제19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 2016 제18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대상
* 2015 제17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신사상 대상
* 2014 제16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 신사상
* 2013 제15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 신사상
* 2009 제11회 백봉 라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백봉 신사상
* 2005년 12월 사학법 개정안 처리를 두고 국회가 난장판이 된 와중에 [[정봉주]] 당시 열린우리당 의원과 몸싸움이 빚어졌다. 아무래도 체격 차이도 있고 정 의원이 어릴 때부터 무술을 연마한 전적이 있다보니 상당히 밀리는 모양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5/1980921_19610.html|MBC 뉴스]]
- 배영수 . . . . 15회 일치
특히,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기록했던 3년 연속 2점대 평균자책점을 찍기도 했다. 2006년 시즌엔 8승 9패로 비록 10승을 달성하진 못했다 하더라도, 팔꿈치 부상을 가진 상태로 평균자책점 2.92(...).[* 2007년 [[윤석민(투수)|윤석민]], 2008~2009년 [[봉중근]], 2012년 [[류현진]], 2015~2016년 [[메릴 켈리]]의 [[윤석민상|원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팀 타선 지원을 받지 못했다. (2006년 득점지원율 0.97) 무려 1점도 되지 않는다!][* 뻥뻥 터지던 삼성의 타선은 이상하게도 배영수가 등판하던 날엔 버로우탔다. 문제는 현재까지도 그런다는 거. 그러나 2013년 드디어 타선지원을 받게 되는데 이번에는 평균자책점이...] 심지어 후술한 것 처럼 2006년에는 정규시즌 내내 팔꿈치 통증을 달고 뛴 선수의 기록이 저 정도라니... 아니, 이게 사람인가?
2004년 35경기 동안 4완투(2완봉) 하면서 17승 2패 평균자책점 2.61로 다승과 승률 부문 1위를 기록하며, 선발 투수로는 1990년 [[선동열]] 이후 14년 만에 정규리그 MVP로 선정되었다.[* 전체 투수로는 선동열 이후 배영수가 받기 전까지 1996년 [[구대성]]이 구원 투수로 정규리그 MVP에 오른적 있다.][* 이후로 2008년까지 매년 투수가 MVP를 수상하게 된다. 순서대로 [[손민한]](롯데)-[[류현진]](한화)-[[다니엘 리오스]](두산)-[[김광현]](SK)] 특히 [[2004년 한국시리즈#s-3.4|한국 시리즈 4차전]]에서 '''10이닝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였으나, 팀 타선 또한 한점도 못내는 바람에 0대0 상황에서 연장 11회초 [[권오준]]에게 마운드를 넘겨주며 해당 경기의 개인 노히트 노런 기록은 달성하지 못하게 되었다. 경기는 연장 12회까지 가서 시간 제한[* 2004년 당시에는 경기 시작 후 4시간을 넘기면 새 이닝을 시작할 수 없고 바로 무승부로 처리되는 ~~병맛같은~~ 규정이 있었다. 결국 [[2004년 한국시리즈]]는 이러한 규정으로 인해 무려 '''9차전'''까지 가는 등 역대 한국시리즈 중 제일 길게 간 시리즈였고, 무승부가 제일 많은 시리즈가 되었다. 결국 이러한 단점으로 인해 경기 후 4시간을 넘기면 무승부로 처리되는 규정은 2004년 한 해에만 시행되고 사라졌다.]에 걸려 0:0 무승부로 끝났는데, 경기 중 권오준이 안타를 맞아 팀 노히트 노런도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안습]].
2005년에는 정규시즌 동안 11승을 올리면서 147개의 탈삼진으로 탈삼진왕에 오른적이 있다. 이 활약으로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06년 제1회 WBC]]의 국가대표 A팀에 승선하여 중간계투로 활약했으며, 특히 1라운드 A조 3경기 일본과의 경기에서 6회말 1사 후 봉중근을 구원하여 올라와 ⅔이닝을 잘 소화한 다음 7회말 일본의 공격 때 선두타자였던 [[스즈키 이치로|이치로]]를 초구부터 141km/h짜리 속구를 엉덩이 쪽으로 던져 맞춘 것이 유명해져 [[https://youtu.be/Gw8MEjLD3iM|배열사]]라는 칭호를 얻기도 했다.
그리고 윤성환은 배영수보다 데뷔가 4년 늦었다는걸 감안해도, 팀내 토종 1선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FA 전까지는 연봉이 배영수보다 높았던 적이 없다.'''
12월 15일 보상선수로 [[정현석]]이 지명되었으나 선수 개인 사정과 삼성 프런트의 실책으로 인해 결국 연봉 300%의 보상금으로 바뀌었다. 자세한 내용은 [[정현석]] 문서 참고.
||||||<#c0c0c0> {{{#0066b3 완투, 완봉 기록}}} ||
||<rowbgcolor=#0066b3> {{{#ffffff 연도}}} || {{{#ffffff 완투}}} || {{{#ffffff 완봉}}} ||
|| 2003년 || 1완투 || 0완봉 ||
|| 2004년 || '''{{{#red 4완투}}}''' [br] (1위) || '''{{{#red 2완봉}}}''' [br] (1위) ||
|| 2005년 || '''2완투''' [br] (3위) || '''1완봉''' [br] (2위) ||
|| 2012년 || '''2완투''' [br] (5위) || 0완봉 ||
|| 2014년 || 1완투 || 0완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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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cdcdc> 통산 || 11완투 || 3완봉 ||
* [[이대호]]처럼 어린시절이 상당히 불우했던 선수 중 하나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이혼해서 도망치고 할머니와 누나가 함께 돌봐줬다고 한다. 그러나 2005년 4월 2일 롯데와의 시즌 개막전 때 완봉승을 챙기는 날 임종하셨다고 한다. 이 날 경기할 때 모자 챙 안쪽에다 '할머니 생각'이라고 써놓았다.
- 의성군 . . . . 14회 일치
군 중심지인 의성읍이 비교적 군 동쪽에 치우쳐 있기 때문에 중부의 봉양면(도리원)과 서부의 안계면이 각각의 소중심지 역할을 한다. 각각 안동/군위와 상주로 가는 시외버스도 따로 운행되고 있다.
[[중앙고속도로]]와 [[중앙선]] [[철도]], [[5번 국도]]가 군의 남북을 관통한다. 영천, 군위를 거쳐 예천, 영주로 연결되는 [[28번 국도]]와 [[59번 국도]]도 있다. [[25번 국도]]는 단밀면을 잠깐 지나친다. [[의성시외버스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안계면에서 별도로 [[동서울터미널]]행 시외버스가 있다. 다만 원주 방면에서 의성으로 갈 때는 [[의성IC]]가 아닌 [[남안동IC]]를 이용한다. [[의성IC]]가 의성군 남쪽의 봉양면에 설치되어 있기 때문이다.
|| 10 || 도리원초등학교 || 봉양면 도리원5길9 ||
|| - || 안평초등학교 신평분교 || 신평면 봉호로 2436 ||
||<|8> 공립 || 1 || 의성중학교 || 의성읍 구봉길 172 ||
|| 6 || 봉양중학교 || 봉양면 봉호로 14 ||
|| 7 || 옥산중학교 || 옥산면 금봉로 27 ||
|| 6 || 봉양정보고등학교 || 봉양면 봉호로 14 ||
|| '''봉양면''' ||<:>10.79%||<:>{{{#C9151E 70.12%}}}||<:>11.93%||<:>3.86%||<:>2.60%||<:>{{{#808080 ▼59.33}}}||<:> 75.99 ||
|| '''면 지역'''[* 단촌면, 점곡면, 옥산면, 사곡면, 춘산면, 가음면, 금성면, 봉양면, 비안면, 구천면, 단밀면, 단북면, 안계면, 다인면, 신평면, 안평면, 안사면] ||<:>11.07%||<:>{{{#C9151E 69.24%}}}||<:>11.83%||<:>4.49%||<:>1.90%||<:>{{{#808080 ▼58.17}}}||<:> 75.21 ||
- 이경영(1960) . . . . 14회 일치
2002년에 [[원조교제]] 혐의로 기소되어 형사재판을 받았다. 재판 결과 미성년자 L양과 3차례 성관계를 가진 것이 드러났으며 첫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몰랐던 상태에서 했으므로 원조교제 혐의 무죄, 두번째와 세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했으므로 원조교제 혐의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징역 10개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선고받게 되었다.
* 2002년 8월 12일: 형사재판 1심 판결 선고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
||1심 재판결과 이경영이 미성년자인 L모양과 3차례 성관계를 가진 것이 인정되었는데, 첫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모르고서 했으므로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 정확하게 표현하면, 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 무죄, 두 번째와 세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고서 했으므로 미성년자 성매매 혐의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형량은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이었다. 아래는 당시 판결을 보도한 기사다.||
>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영화배우겸 감독인 이경영(41)피고인에게 160시간의 사회봉사명령과 함께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인천지법 형사 합의11부(재판장 이원규 부장판사)는 12일 이 사건 선고 공판에서 "이 피고인이 이모(18)양과의 첫 번째 성관계 시 미성년자인 줄 몰랐다는 점은 인정되나 두 번째는 성관계 전 이 양이 '나이를 말했다'는 진술이 신빙성이 높아 유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피고인이 제작한 영화에 이 양을 출연시켜 줄 것 같은 느낌을 준 점도 인정된다"며 성 관계의 대가성 부분에 대해서도 유죄 판결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220298|#]]
* 2002년 10월 25일: 형사재판 2심 판결 선고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
>서울고법 형사2부(재판장 이성룡ㆍ李性龍 부장판사)는 25일 청소년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영화배우겸 감독 이경영(41)씨에 대한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1심대로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160시간의 사회봉사명령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모(18)양과의 3차례 성관계 중 첫 번째 성관계를 맺을 때는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몰랐다는 피고인의 주장을 인정, 이 부분에 대해 무죄를 인정한 원심 판결은 정당한 것으로 보여 검사 항소를 기각한다"고 밝혔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157848|#]]
* 2002년 11~12월: 형 집행(사회봉사명령 이행)
||2심 재판 후, 검찰과 이경영은 대법원에 [[상고(법률)|상고]]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이 사건 재판은 2심에서 종료됐다.[* 대법원에 상고하였다는 기사도 없고, 대법원 판결을 보도한 기사도 전혀 없다. 또한 2002년 10월 25일에 2심 판결이 있었고, 곧바로 2002년 11월에 형이 집행(사회봉사명령 이행)되었다는 사실을 통해서도, 대법원까지 가지 않고 2심 판결대로 형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따라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의 형이 확정되었고, 곧이어 2002년 11월, 12월에 형의 집행(사회봉사명령 160시간 이행)이 이루어졌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8&aid=0000157848|#]]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1&oid=014&aid=0000052234|#]]||
* '''형사재판''': 3차례 성관계 중 첫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임을 몰랐으므로 원조교제 혐의 무죄, 두 번째와 세 번째 성관계는 미성년자임을 알고 있었으므로 원조교제 혐의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짐.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의 형이 선고됨.
오랜 자숙 기간을 거쳐 [[2011년]] 이후 영화 등장이 늘었다. 여자문제로 출연금지당했으나 영화로 재기한 선배 [[송영창]]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고 있는 셈. 《[[부러진 화살]]》에서 악역으로 판사역을 맡았고, 2012년엔 같은 감독의 《[[남영동1985]]》에서 [[이근안]]을 모티브로 한 고문경찰 이두한을 연기했다. 같은 시즌에 함께 개봉한 《[[26년(영화)|26년]]》, 《[[베를린(영화)|베를린]]》에도 모두 출연,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일본 영화인 《외사경찰》(外事警察 その男に騙されるな)에서 까메오이면서 악역인 북한군 장교로 등장한다. 주로 주인공의 든든한 조력자 ~~그리고 사망~~[* 악역, 최종보스 역도 많이 맡기 때문에 그만큼 많이 죽는다. 당당 [[사망전대]].] 혹은 카리스마 있는 악역을 맡아 이경영을 모르는 신세대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주고 있다. 2013년에는 《[[더 테러 라이브]]》에서 [[하정우]]와의 연기 호흡을 선보였다. 그 이후에도 [[장준환]] 감독의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에서도 화이의 친아버지인 임형택으로 출연하면서 악역이 아닌 무고하고 불쌍한 피해자도 연기했다. 이렇듯 자신만이 가진 유니크함으로 여러 영화에 캐스팅되며 (비록 공중파는 못 나오지만)완벽히 재기한 상태.
거의 한 달에 한번 꼴로 영화가 개봉하고 있다. 게다가 10월에 방영된 드라마 《[[미생(드라마)|미생]]》에도 출연했다!~~[[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뭐야 이 아저씨 무서워]]~~ 이를 두고 네티즌들은 농담조로 한국영화에는 '[[스크린 쿼터제|이경영 쿼터제]]'가 있다고 하기도...--또 경영--
[[오달수]], [[유해진]]에 이어 대한민국 배우 영화 누적 관객수 3위이다. 엄청난 다작 배우이다. 지금까지 출연한 영화는 80여편이 넘으며 00년대에 잠시 주춤했다가 2010년대 들어 온갖 영화에 출연 중이다. 특히 2015년에만 10편의 출연작이 개봉하며 다작의 끝판왕을 보여줬다.
- 김연경(배구선수) . . . . 13회 일치
2013-14 시즌에 김연경은 소속팀 페네르바흐체의 CEV 컵 우승의 선봉장으로 서며 또다시 MVP가 되는 위엄을 보여줬다. 오오. 갓연경. 게다가 [[엠스플]]에서 김연경 출전 경기를 중계해 줄 정도로 김연경의 위상을 다시 한번 올려주는 시즌이 되었다. 그런데 아로마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 페네르바흐체는 바키프방크를 넘지 못하고 준우승에 머물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연경은 득점 1위, 공격종합 1위를 기록했다. 역시 갓연경. 한편, 챔피언 결정전 1차전 때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로 김연경은 실종자·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태극기 문양을 넣은 검은색 팔꿈치 보호대를 하고 경기를 치렀고, 팀 동료들도 유니폼에 검은 리본을 같이 달고 뛰었다. 김연경의 본가가 안산에 있고, 또한 초·중학교를 안산에서 나온 만큼 귀국 후 사고 피해자들을 위해 할 일 수 있는 일을 고민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종료 후 아제르바이잔 리그, 중국 리그 등 타국 리그의 팀에서 연 20억을[* 세계배구계에서는 사실상 최고 연봉 금액이다. 야구, 축구, 농구 등 리그 풀이 큰 리그의 고액연봉자에 비해서는 분명 많은 편은 아니지만. 참고로 [[안산 OK저축은행 러시앤캐시]]의 [[로베르틀란디 시몬 아티스|로베르틀란디 시몬]]의 연봉이 이 정도다.] 제시하는 등 적극적인 구애 속에서도 거취 문제 당시 도와줬던 것을 잊지 않고 페네르바흐체와 2년 재계약에 합의했다.[[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08&aid=0002300250|관련 기사 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4&oid=366&aid=0000247757|관련 기사 2]]
게다가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은 김연경을 [[JT 마블러스]]와 [[페네르바체 여자 배구|페네르바체]]에 임대했을 당시 기부금 명목으로 매년 선수 연봉 중 6천만 원을 갈취했다는 의혹이 있다.[* 원래는 1억이었는데 선수가 항의를 하니 무려 6천만원으로 깎아줬다. ~~대인배 코스프레~~] [[터키]] 아로마리그에 참가하는 배구팀인 [[페네르바체]]에 김연경을 임대하면서 김연경이 받아야 할 연봉인 100만 유로 중 20만 유로를 [[인천 흥국생명 핑크스파이더스|흥국생명]]이 착복했다는 의혹이 일었다. 선수의 신분을 두고 대립했던 문제가 구단의 금액 착복 문제까지 겹치자 결국 이 사건은 시궁창 싸움으로 변하고 말았다
우선 남자 프로구단은 한 시즌 동안 정규리그 36경기를 치른다. 여자팀은 이보다 6경기가 적은 30경기를 소화한다. ~~여자배구 구단을 새로 만드는 것을 반대해서 그렇다~~ 이는 자연스럽게 시즌을 더 많이 뛰어야 하는 것을 기준으로 연봉 책정에 반영됐다. A구단 관계자는 "남자부가 팀 당 경기 수도 많기 때문에 당연히 연봉도 더 높게 책정해야 된다."라면서 "게다가 남자 선수들은 군 입대를 해야 되는 선수들까지 고려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샐러리캡이 여자보다 더 많을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남자부 신인의 경우는 대부분 대학을 마치고 들어오는 선수들이 많다. 평균 나이도 여자부에 비해서 높고 대학 시절의 경력을 무시하지 못한다."라고 전했다. A구단 관계자는 또 남녀간 연봉 격차가 시장 가치가 오랫동안 쌓여 반영된 결과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는 "여자부가 최근 상승세에 있고, 좋은 분위기인 것은 맞지만 한 두해만으로 남녀부가 엇비슷하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며 "대표팀을 떠나서 프로만 보면 남자부가 쌓아온 것이 더 많다. 여자부는 더 쌓아가야하는 단계로 본다."라고 대답했다.
반면 현대캐피탈은 올 시즌 경기당 3,300만 원 가량 수익을 올렸다. 단순히 남자부와 여자부 차이로 보긴 어렵지만 여자부 1위 팀 수준이 이와 같다는 사실은 분명 주목할 대목이다. 한 시즌 티켓 수입을 모두 합쳐도 팀내 최고연봉 선수에게 줄 돈도 안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배구연맹 측이 왜 남녀 연봉차를 줄일 생각을 안하고 과연 결과적으로 더 늘리는 식의 결정을 했는지 합리적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남자 배구가 관중 수는 조금 더 많아도 관중의 차이가 2배 이상 나는 것도 아니며 TV 시청률은 오히려 여자쪽이 더 높다. 게다가 여자 배구 쪽은 전통적으로 남자 배구에 비해 불리한 시간대 (여자 배구는 대체로 평일 취약 시간대인 오후 5시에 시합을 하며, 남자 배구는 7시에 시합을 한다)를 배정받는 상태임을 감안하면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또한, 프로 리그에서 뛰는 운동선수는 전문직이라 남녀 둘 다 연봉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것임에도 남자는 3시즌 동안 샐러리캡이 1억씩 오르는 데 왜 여자는 1년 오르고 2년 동결이 되어야 하는지 합당한 이유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태다.
짧았지만 강한 인상을 남긴 1년 간의 중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터키리그로의 복귀가 결정되었다. 이전 소속구단인 페네르바체가 아니라 엑자시바시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엑자시바시와의 계약은 2시즌으로, 상하이와의 재계약을 고민하는 가운데 엑자시바시의 관계자가 한국까지 찾아와 고액 연봉은 물론 김연경의 고민을 덜어주기 위해 체력 안배가 가능한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고, 이에 혹해 계약을 맺은 듯. 금액만 비교했을 때 상하이가 더 높은 금액을 제시했지만, 여러 여건을 고려하여 터키로 복귀한 것이 추측된다. 이에 대해 국내 팬들은 환호하는 중.
- 어쌔신 크리드 III/아이템/대번포트 농지 . . . . 13회 일치
엘렌 레벨2 부터 제작 가능. 노루 가죽+재봉실. 총알 소지량이 8 늘어난다.
엘렌 레벨3 부터 제작 가능. 여우 가죽+재봉실. 총알 소지량이 16 늘어난다.
엘렌 레벨1 부터 제작 가능. 비버 가죽+산토끼 가죽+재봉실. 독다트 소지량이 2 늘어난다.
엘렌 레벨1 부터 제작 가능. 산토끼 가죽+재봉실. 올가미 소지량이 10 늘어난다. (?)
UPlay에서 MP로 패키지를 구매해야 사용 가능.빅 데이브 레벨4, 엘렌 레벨3 부터 제작 가능. 재봉실+구리 광석. 말에게서 총알 같은걸 보급할 수 있게 된다.
엘렌 레벨1 부터 제작 가능. 늑대 가죽+재봉실. 올가미 소지량이 5 늘어난다.
엘렌 레벨1 부터 제작 가능. 소 가죽+재봉실. 연막탄 소지량이 2 늘어난다.
엘렌 레벨2 부터 제작 가능. 소 가죽+여우 가죽+재봉실. 트립마인 소지량이 2 늘어난다.
* 재봉실(Sewing Threads)
존스타운 마을의 상자에서 설계도 획득 가능. 엘렌 레벨2 부터 제작 가능. 라쿤 가죽+재봉실.
존스타운 마을의 상자에서 설계도 획득 가능. 엘렌 레벨2 부터 제작 가능. 여우 꼬리+재봉실.
보스턴 중부 상자-경비견이 지키고 있음-에서 설계도 획득 가능. 엘렌 레벨2 부터 제작 가능. 면모교직물+재봉실+염료.
보스턴 중부 상자-경비견이 지키고 있음-에서 설계도 획득 가능. 엘렌 레벨2 부터 제작 가능. 양모+염료+재봉실.
- 울릉군 . . . . 13회 일치
[[국회의원]] 선거구는 엉뚱하게 [[포항시]] [[남구(포항)|남구]]와 묶여있다. 그런데 정작 포항에서 울릉도로 들어가는 관문인 포항 구항은 북구에 있다.--신나는 [[월경지]]-- 이는 포항 남구보다 포항 북구 인구가 미묘하게(2~3만 명 정도) 많아서 그렇게 묶은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 비례를 생각하면 경상북도의 농촌 선거구에 옮기는게 맞겠지만, 선거운동하기가 힘들어지는 문제가 있다. 배편이 있는 울진군에 엮으면 될 것 같지만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선거구만으로도 벅차다. 네 군 모두 벽지 중의 벽지긴 한데 울진은 그나마 낫다. 다시 [[강원도]]로 옮길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지방자치가 본격화된 이후로 행정구역 옮기는 것 자체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쉽진 않다. 행정적으로 경상북도에 속한 이후로 말투도 경상북도 사투리가 발달했다. 거기다 원래 울릉도에 살던 강원도 사람들은 대다수 이미 사망하였거나 외지로 떠났고 현재 울릉군 주민들은 경북 출신들이 대다수. 경계가 애매한 지역들은 양쪽 사이에서 소속감이 애매한 사례가 비일비재한데, 면적도 좁은데다 고립된 섬이라는 특수성까지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경북쪽 정서로 비슷해진 느낌이다.
* 봉래폭포-성인봉에서 내려오는 폭포. 바로 저동 위에 있다. 가는 길에 유일한 찜질방이 있다고. 올라가는 길에 풍혈이라고 부르는 천연 에어컨이 있으며 위에는 사방댐과 봉래폭포가 있다. 이 물은 5천명의 저동사람들이 식수로 쓴다고 한다.
* B 코스-울릉도 관광업계에서 보통 B 코스라고 부르는 게 있는데, 도동에서 출발해서 봉래폭포와 내수전을 돌아보는 코스이다. 대중교통으로 접근하면 바닥에서부터 올라가야 하는 내수전을 전망대 조금 전까지 차로 올려주는 점이 장점.
* [[성인봉]]-울릉도에서 제일 높은 산이며 해발 984m에 달한다. 울릉읍, 북면, 서면에 걸쳐 있으며, 여러 등산로가 있지만 아무래도 제일 유명한 길은 도동에서 올라가는 루트와 반대쪽에서 나리분지를 통해 올라가는 루트로 나뉜다. 도동 쪽은 3시간이면 주파하고 흙산이라서 올라가기가 그리 어렵지 않지만, 나리분지쪽은 나무계단이라서 생각보다 어렵고 6시간 가까이 걸린다고도 한다. 올라가는 길에 아름다운 원시림이 있다. 특히 구름이 껴있으면 원시림과 고사리들이 펼치는 몽환적인 분위기는 장관. 허나, 정상에 올라가면 아무것도 안 보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정상에서는 바다와 울릉도 전체가 스펙터클하게 보인다고 한다. 매우 날씨 좋은 날이면 독도도 보인다고. 허나, [[매의 눈]] 같은 시력과 운이 따라야 한다. 보통 일년에 50일 정도 독도를 볼수 있는 날씨가 된다고 한다. 정상이 맑은 날을 노리려면 겨울이 좋다고. 하지만 겨울엔 눈이 퍼부어대는 울릉도 특성 상 쉽지 않을 것이다.
* 나리분지-울릉도에서 유일한 평지로, 나리꽃이 많은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투막집과 너와집과 같은 울릉도 전통 가옥을 볼 수 있는데, 2017년 9월 현재 너와집은 공사중이어서 볼 수 없다. --보통 인식은 도동 루트로 성인봉 등산하고 나리분지로 내려와서 마지막에 술 한잔 하는 곳.-- 주변의 알봉 둘레길도 가볼만한 장소.
* 울릉도는 [[화산]]으로 이루어진 화산섬이다. 그 안에는 화구가 함몰된 나리 분지(위의 사진)와 알봉 분지라는 2개의 거대 칼데라 분지가 있다(맨 위 지도에서 안쪽에 허옇게 보이는 두 분지다). 알봉은 칼데라 이후 화산활동에 의해 만들어진 용암돔이다. 지도에서 나리 분지나 알봉이라는 지명이 보이면 일단 울릉도부터 떠올릴 것(그런데 알봉이라는 지명이 다른 지역에도 있어서 가끔 낚이기도 한다).
특별한 식당 먹거리로는 약초해장국(항구 근처에서 멀미에 좋다며 대접하는데 효과는 과연...), 호박막걸리(봉래폭포 입구 가게가 원조라고 한다. 맛은 톡 쏘지 않고 아주 부드럽지만 취기가 빨리 올라온다는 평. ~~하지만 단 한번도 주민들이 마시는 모습은 본적이 없다~~ ~~주민도 외면하는 그 맛~~), 약소 고기(추가바람)가 있다. 횟감은 어차피 포항에서 실어오는 것이고(그래서 물회 한 그릇 시세는 포항보다 비싸다), 오징어와 전복 등은 현지 산물이라고 한다.
- 흥친왕 . . . . 13회 일치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 [[1912년]] [[9월 9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군인·정치인이자 [[대한제국]]의 황족·군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嫡長子)이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친형이며 [[영선군 이준]]의 아버지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었다가 [[1910년]] 흥친왕(興親王)으로 진봉되었다.
[[1874년]] [[11월]] 이후 [[흥선대원군]]은 그의 아들 [[이준용 (1870년)|이준용]]을 [[조선 고종|고종]]과 [[민비]]를 몰아내고 추대하려 했고, 4회의 쿠데타를 기도했다가 실패했다. 이후 그는 고종의 냉대를 받았고 [[1899년]](광무 2) [[조선 장조|사도세자]]가 장종으로 추존된 뒤에도, 당시 황제의 친형이었음에도 4대 승습에 따른 작위를 받지 못했다. [[1907년]](융희 1) 완흥군에 책봉되었고, [[1910년]](융희 4) [[8월]] 흥친왕으로 진봉되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공작]]으로 강등되어 이희 공이 되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고, 처음 이름은 재록(載錄), 자는 무경(武卿), 호는 우석(又石)이고 나중에 개명하여 이희(李熹)로도 알려져 있다. 첫 작위가 완흥군이었으므로 '''완흥군 이재면'''으로도 부른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풍산 홍씨 홍병주(洪秉周)의 딸과 결혼하여 [[이준용]], [[이문용]] 형제와 2녀를 얻었으나 일찍 죽고 뒤에 38년 연하인 참봉 이인구(李麟九)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밖에 1명의 첩에게서 서녀 1명을 보았다. 남달리 나서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그는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의 뜻을 거슬리지 않았다.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그런 그보다 영특하고 야심만만한 손자 [[영선군]] [[이준용]]을 더욱 총애한다. 그는 여러번 [[과거 시험]]을 준비하였지만 그때마다 번번히 낙방하였다.
대원군의 구조 요청을 비밀리에 접한 흥친왕은 배편으로 [[1884년]] [[6월]]부터 [[텐진]]의 보정부로 왕래한다. 그해 [[12월]] 그는 [[인천항]]을 출국, [[청나라]]에 유폐중이던 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1883년]] [[3월]]에 일시 귀국하였다. 다시 그해 [[5월]]에 다시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을 봉양하다 귀국하였다.
[[1900년]](광무 4년) [[4월]] 완흥군(完興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을미사변]]의 관련자로 지목되어 언관들의 탄핵을 받았다. 이재면이 [[을미사변]]에는 직접 참여하거나 동조하지 않았으나, 을미사변으로 생겨난 제1차 [[김홍집]] 내각에서 궁내부 대신을 역임한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한동안 벼슬이 없던 그는 생활이 곤란한 처지에 놓였다.<ref>"韓國의 名建物 (2) 雲峴宮", 경향신문 1984년 10월 10일자 9면, 생활/문화면</ref>
==== 친왕 진봉과 강제 병합 ====
[[1910년]] 8월 15일 한일합방 조약 서명을 불과 수일 앞두고 흥왕(興王)에 봉해져 이름을 이재면에서 이희(李熹)로 고치고, 합방 공포 하루 전인 28일에 책봉식을 가졌다. 책봉식 다음날 일제에 의해 왕에서 강등, 세습할 수 있는 공(公)족으로 분류되어 이희 공(李熹公)에 봉해졌다.
* 둘째 부인(계실) : 흥친왕비 여주 이씨(驪州 李氏, [[1883년]] [[6월 7일]] ~ [[1978년]] [[1월 8일]]), 참봉(參奉) 여주인(驪州人) [[이인구]](李麟九)의 딸.
- 강영식 . . . . 12회 일치
2008 준 플레이오프가 끝난 뒤에는 신명철이 삼성으로 이적하면서 '포스트 시즌용'이라는 첨부 설명서가 동봉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동시에 강영식에게는 '페넌트레이스용'이라는 첨부 설명서가 동봉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함께 밝혀졌다. 하지만 로이스터는 외국인이라 한글로 쓰인 설명서를 읽지 못했던 모양이다.
6승 2패 16홀드 2세이브, 56⅓이닝 소화 평균자책점 2.88, WHIP 0.85 로 입단 이후 최고의 성적을 올려, 연봉도 2008년 6,800만원에서 2009년 1억원으로 억대 연봉에 진입하였다.
2010시즌을 마치고 FA가 될 예정이었으나 구단과 모종의 계약 때문인지 FA 신청을 연기하고 롯데 자이언츠와 무려 '''연봉 3억'''에 1년 재계약을 하였다.[* 이로인해 붙은 별명이 강억삼. 주로 못할때 까는 용도로 사용한다.] FA 영입 금액이라고 여기면 싼 편이기는 했다.
6월에 이르도록 불안불안한 투구내용을 이어갔는데, 팬들은 3억 연봉을 잘하는 다른 선수에게 나눠주라고 조롱하였다. 그리고 6월 중순이 넘어가자 불안하긴 해도 꾸역꾸역 막는 쪽으로 상태가 좋아졌다.6월 SK전에서는 트레이드를 통해 롯데로 이적한 [[용덕한]][* 박기혁, 강영식, 용덕한은 고등학교 시절 동창이다. 이날 경기 전 강영식은 용덕한에게 '내 공을 받으면 놀랄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잘 던져 용덕한이 경기 후 공이 나무랄 데 없이 좋아져 놀랐다고 대답했다.] 과 호흡을 맞추어 2이닝동안 깔끔하게 상대 타선을 틀어막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여름이 오기는 온 모양.
시즌 종료 후 FA를 신청하였다. 11월 16일 4년 17억원에 롯데에 잔류하였다. 계약금 4억, 연봉 '''3억''', 옵션 1억으로 대체적으로 좀 많이 준 것 같긴 해도 나름 깔끔하다는 평가. 그래도 어쨌든 쓸만한 좌완투수이긴 하다. 연봉이 3억이라 억삼이란 별명이 아직 유효하다는 것도 포인트(...)[* 3년전 FA권리를 획득했으나 권리를 포기하면서 얻은 3년 9억과 FA총액 17억을 합산하면 7년간 26억에 쓰는 격이다. 나이대도 30~37세로 불펜투수치고는 저렴한 편이다. 성적차이는 나지만 [[정현욱]]이 4년간 28억6천만에 계약한것과 비교하면 FA이후 금액은 상당히 저렴하다.] 계약 자체는 마지막 날에 했지만, 강영식은 그동안 쭉 사직야구장에서 연습을 했다고 한다. 팬들 사이에서는 맛난 호텔 밥 더 먹고 싶었던 것 아니냐는 개드립이 나돌고있다. 애초에 딱히 떠날 마음도 보이지 않았던 선수니만큼. 어쨌든 이로써 롯데는 삼성의 뒤를 이어 집단속에 성공한 두번째 구단이 되었다.
시즌 초반에는 부상으로 인해 전력을 이탈했으나 5월 중순부터 복귀를 했다. 그놈의 불안한 불펜덕분에 매일매일 롯데시네마가 개봉되자 '''억삼이형 어딨냐'''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으나 진짜 롯데시네마 회장님이 돌아오실줄은 몰랐다는 평. 평균자책점 9점대의 사나이라는 ~~애칭~~ 별명이 붙어버렸다. [[KBO 올스타전/2015년|2015 올스타전]]이 지난다음 랜디영식모드로 전환할뻔 하다가 또 X랄병이 도져서 볼질을 시전하는 중.
뱀발로 롯갤에서는 강영식이 부산저축은행에 연봉을 저축했었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실제로 그렇다면 [[예금자 보호|연봉 3억이 아닌 연봉 5천만 원을 받고 뛴 것이 된다.]] 물론 밝혀진 사실은 없지만.
- 경순왕 . . . . 12회 일치
[[935년]] 11월 그는 재위 8년만에 신라의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하고, [[고려]] 조정으로부터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군되었다. 또 정승공(政承公)에 봉해지고 [[경주시|경주]]를 식읍으로 하사받았는데 그 품위가 [[태자]](太子)보다 높았다. 신란궁(神鸞宮)을 하사 받고, [[경주시|금성]]의 [[사심관]]에 임명되어 [[고려|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935년]] 10월에 경순왕은 민심이 신흥 [[고려]]로 기울어짐에 따라, 군신회의를 소집하여 천년 사직을 [[고려]]에 양국(讓國) 하기로 결심하자, [[마의태자|태자]]와 막내아들 [[김덕지]] 및 이순유(李純由) 등이 불가함을 극력 간(諫)하였으나, 경순왕은 이들의 반대를 뒤로하고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왕건]]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일설에는 어전에서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935년]] 11월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시켜 항복 국서를 [[고려 태조]]에게 받치니 천년([[기원전 57년]] ~ [[935년]])의 [[신라]](新羅)는 멸망했다.
[[935년]] 12월 경순왕을 정승공(正丞公) 상주국(上柱國) 낙랑왕(樂浪王)에 봉하고 위계를 태자(太子)의 위에 두고 녹봉으로 1,000섬을 주었다. 또 왕을 모시고 온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다 관직을 주어 등용시켰다. 신라를 [[경주]]로 고치고 식읍으로 삼도록 하고,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하여 [[고려]]시대 사심관 제도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고려 경종|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고려 경종|경종]]은 그를 특별히 배려하여 상보령(尙父令)으로 삼고 식읍과 녹봉을 더해 주었다. 그는 [[고려 태조]]부터 [[고려 혜종]]·[[고려 정종|정종]]·[[고려 광종|광종]]·[[고려 경종|경종]]대까지 5대에 걸쳐 살았으며, [[고려 태조|태조 왕건]]이 죽은 후에도 왕 다음으로 높은 존재로 인식되고 그 영향력이 컸다.
*** 1남: 김은열(金殷說), 고려조 경주군(慶州君), [[경주 김씨|경주김씨 은열공파]] 시조<ref>부왕 경순왕의 식읍(食邑)을 습봉함 </ref>
고려에 항복 후 경순왕은 첫째딸을 [[고려 태조]]의 손자인 [[고려 경종|경종]]에게 출가시켰는데, 그녀가 [[헌숙왕후]](獻肅王后) 김씨이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승공(正丞公) 상보령(尙父令)에 봉해지고 식읍과 녹봉을 더 받았다.
경순왕의 어진을 처음 제작한 것은 [[통일 신라]]가 멸망한 직후인 고려 초였다.<ref name="kydy">[http://news.donga.com/Culture/3/07/20100602/28785354/1 ‘비운의 경순왕’ 초상화 첫 공개] 동아일보 2010년 06월 02일자</ref> 경순왕을 추모하기 위해 그린 이 어진은 강원 원주시 고자암에 봉안해 놓았다.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829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경남매일 2008년 12월 08일</ref>
- 박근혜 . . . . 12회 일치
어머니 [[육영수]]는 [[충청북도]] [[옥천군]]의 대지주인 [[육종관]]과 부인 [[이경령]]의 차녀로 태어나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현재의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현재의 [[옥천여자중학교]])에서 가정과 교사로 1년 반 동안 봉직한 경력이 있었다. 외조부 육종관은 딸이 과거 혼인 경력이 의심스럽고 가난한 군인에 불과한 박정희와 결혼하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박정희와의 결혼 결심을 굳힌 육영수가 어머니 이경령, 동생 [[육예수]]와 함께 박정희가 있는 [[대구]]로 가서 결혼식을 강행하였다.
[[1982년]] 박근혜는 [[육영재단]] 이사장에 취임하였고, 최태민도 육영재단에 합류하였다. 이후 박근혜와 최태민은 함께 [[1989년]] 육영수를 추모하는 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를 추모하는 월간 신문인 [[근화보]]도 발행하였다. 1년 뒤인 [[1990년]] [[9월]] 근화보는 15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고, 박근혜와 여동생인 [[박근영]]과의 육영재단 운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 박정희, 육영수 숭모회는 다툼의 원인은 최태민이 박근혜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육영재단의 운영을 전횡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는 [[1987년]] [[9월 2일]] 어린이회관 노조원들이 외부세력 물러가라며 1주일 동안 농성하였던 것은 최태민을 겨냥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싫어하면서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박근혜는 [[1990년]] [[11월]] 육영재단 이사장 퇴진 기자 회견에서 아래와 같이 밝혔다.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628031405843] 김봉기 기자, '경제 민주화' 원조 김종인… 내달 출범 박근혜 캠프 맡는다, 조선일보, 2012.6.28.</ref>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0160408085] 이제훈, 재벌이 싫어하는 헌법 조항, 한겨레21,2012.8.20.</ref>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ref name="hani.co.kr">[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2826.html] 류이근, 성연철 기자, 박근혜 "법인세 인하"…친박서도 "경제민주화와 모순", 한겨레신문, 2012.7.17.</ref>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ref name="hani.co.kr"/>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ref name="hani.co.kr"/>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또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에 대한 구체적인 실현방안으로 2014년 3월 28일 독일 통일의 상징 도시인 드레스덴에서 인도적 문제해결, 남북한 공동 인프라 구축, 남북 동질성 회복 등 평화통일 기반 구축을 위한 3대 제안을 북한에 제시하는 '[[드레스덴 선언]]'을 천명하였다.<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4032888471 朴대통령 '드레스덴 선언'이산상봉 정례화 등 인도적 문제부터 해결…核 버리면 經協 확대]</ref> 이어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박 대통령은 "통일 준비는 시대적 소명"이라면서 북한에 대해 하천·산림 관리 공동 협력 사업, 이산가족 상봉, 남북한 광복 70주년 공동기념 문화사업 준비 등 남북이 실천 가능한 사업부터 행동으로 옮기자는 작은 통일론을 제안하였다.<ref>[http://www.fnnews.com/news/201408151515276744 박 대통령 8.15 경축사 행간에 담긴 의미]</ref> 2015년에 들어와서는 박 대통령이 신년사를 통해 광복·분단 70주년을 맞는 2015년에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통일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언급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1412/e2014123117402393130.htm |제목=[박근혜 대통령 신년사로 본 새해 구상] 경제회복 최우선… 남북관계 개선 통해 통일기반 구축 |확인날짜=2015-02-1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214093238/http://economy.hankooki.com/lpage/politics/201412/e2014123117402393130.htm |보존날짜=2015-02-14 |깨진링크=예 }}</ref>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대결 정책이며<ref>[http://www.ajunews.com/view/20140503193440291 북한 노동신문,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비난']</ref>하였고 드레스덴 선언에 대해서도 이산가족 상봉이나 지원에 따른 인도주의적 문제 해결이 북남관계 개선의 선차적인 고리가 아니라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가 최우선이라며 맹비난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0029 북한 국방위 "박근혜 '드레스덴 연설' 공식 비난"]</ref> 또한 8.15경축사에서 제안한 대화 및 협력에 대해서도 금강산 관광객 총살이나 천안함 및 연평도 도발에 대한 사죄없이 5.24 조치 해제 등 대북정책 기조전환을 압박했다.<ref>[http://www.nocutnews.co.kr/news/4074931 北, 朴 8.15 경축사 비난…5.24 조치 해제 촉구]</ref>
|이산가족 상봉, 여자 쇼트트랙 금메달,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증거조작 논란
박근혜는 원칙, 신뢰,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가 장점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녀는 세종시 문제, 2007년 대선 후보 경선 등을 통해 한 번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거나 원칙을 중시한다는 이미지를 얻었다. 2012년 대선에 출마한 후보로서, 이러한 이미지는 국정운영에서의 안정감에 대한 기대로 연결된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한 이미지는 지지층에서만 통할 뿐이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겐 소통도 안 되고 감동도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고 평가되기도 했다.<ref name="mk1">[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199680 <매경이 만난 사람> 공천 탈락후 정계은퇴 선언한 강봉균 3선의원]매일경제, 2012년 3월 30일</ref><ref name="mk">[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425368 원칙·소신 두각 vs 불통·신비주의 한계] 매일경제, 2012년 7월 11일</ref><ref>[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2&no=629300 박근혜·문재인·안철수 SWOT분석] 매일경제, 2012년 9월 28일</ref><ref>[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391745 SWOT 분석으로 본 대선 주자들…장단점은?] 서울방송 8시뉴스, 2012년 9월 20일</ref><ref name="kh">[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8272200245&code=910402 [새누리 후보 박근혜 뒤집어보기](1) 원칙인가, 독선인가] 경향신문, 2012년 8월 27일</ref>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일부 대선 공약을 수정해 반대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10161539471&code=940100]</ref>
[[2007년]] 대선 이전에 있었던 경선에서 박근혜는 이명박과 경쟁하며 갈등을 겪어왔다. 경선 당시 박근혜 진영은 이명박이 전과 14범이라는 주장을 하거나,<ref>{{뉴스 인용|제목 = 朴캠프 "이명박 후보는 전과 14범" 주장 논란|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2&aid=0000231787|출판사 = 경향신문|저자 = 손봉석 기자|쪽 = |날짜 = 2007-02-28|확인날짜 = 2010-02-11}}</ref> 위장전입 문제도 파헤쳐<ref>{{뉴스 인용|제목 = 박근혜+범여권,이명박 위장전입에 파상공세|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143&aid=0000064154|출판사 = 쿠키뉴스|저자 = 김도훈 기자|쪽 = |날짜 = 2007-06-17|확인날짜 = 2010-02-11}}</ref> 이명박은 이 때문에 국민들에게 사과를 해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자녀교육 때문에 위장전입" … 사과|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0970807|출판사 = 한국경제|저자 = 김인식 기자|쪽 = |날짜 = 2007-06-17|확인날짜 = 2010-02-11}}</ref> 이러한 갈등은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왔다. 친박계 의원들의 한나라당 공천 탈락에 대하여 박근혜는 "국민도 속았고 나도 속았다"라는 말을 하여 파장을 일으켰으며,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한 촛불파동때는 재협상을 요구했고, [[2009년]] [[용산 참사]] 때는 경찰의 강경진압을 비판하였으며,<ref>{{뉴스 인용|제목 = MB-박근혜, 누적된 '불신과 앙금'…화해 될까?|url =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0709623|출판사 = SBS|저자 = 김윤수 기자|쪽 = |날짜 = 2010-02-11|확인날짜 = 2010-02-11}}</ref> 한나라당에 의해 [[대한민국 미디어 관련법 개정 논란|미디어법]] 개정 추진 당시에도 박근혜가 "개정안에 반대표를 던질 것"이라는 말을 던지는 등<ref>{{뉴스 인용|제목 = 박근혜, 미디어법 '반대 투표' 발언|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14&aid=0000111835|출판사 = MBC|저자 = 황외진|쪽 = |날짜 = 2009-07-20|확인날짜 = 2010-02-11}}</ref> 정책 문제에 대한 시각차이와 개인적인 갈등들이 복합적으로 남아있었다.
1970년대부터 [[최태민]] 목사는 그의 측근으로 활동하였다. 그 과정에서 [[최태민]]과 그 일가들의 비리 행위를 묵인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박근혜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 등을 운영하면서 그를 보좌하였던 최태민의 비리 문제는 오랫동안 도마에 올랐다. 7개의 이름과 6번 결혼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구국선교단, 구국봉사단 총재 등으로 박 후보를 보좌하면서 박 후보의 이름을 팔아 이권에 개입한 의혹을 받았다.<ref name="choiui">[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707200324291&code=910100 의혹의 중심엔 '부적절한 인연?'] 경향신문 2007년 02월 20일자</ref> 박근혜의 정계 입문 이후 이 문제는 수면 위로 떠올랐다.
또한 '검증위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초에 중정은 최 목사를 구속하자고 건의했고, 검찰이 조사하여 보니 중정 조사보다 훨씬 많은 비리가 나왔다. 결국 최 목사가 봉사단 총재에서 물러나는 선에서 이 문제가 일단락됐다. 그런데도 최 목사의 비리 혐의가 불확실하다고 할 수 있느냐<ref name="chung01"/>'는 질문에 대하여서도 "대검에서 엄청난 비리가 나와서 문제가 있다면 당연히 처리해야지 왜 덮나. 또 정권이 바뀔 때마다 세무조사, 검찰 조사가 있었는데 왜 법적 조치를 안 했는지 의아하게 생각한다.<ref name="chung01"/>"고 반박하였다.
* [[2012년]] [[6월 22일]] "파업이 너무 장기화되고 있는데 노사가 서로 슬기롭게 잘 풀었으면 좋겠다" <small>(봉사활동 중 기자들의 [[2012년 MBC 노조 총파업]]에 대한 질문에)</small><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622165409777] 김화영 기자, 박근혜 "MBC파업, 노사 슬기롭게 풀어야", 연합뉴스, 2012.6.22.</ref>
- 영양군 . . . . 11회 일치
||<bgcolor=#FA5858> {{{#FFFFFF '''국회의원'''}}} ||<bgcolor=#F8E0E6>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br][[강석호]]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3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경상북도]] 동북부에 있는 군. 면적은 815.14㎢ , 서쪽은 [[안동시]], 북쪽은 [[봉화군]], 남쪽은 [[청송군]], 동쪽은 [[영덕|영덕군]], [[울진군]]과 접하고 있으며 인구는 2018년 2월 기준 약 1만 7천 명. 영양군보다 인구가 적은 [[기초자치단체]]는 [[경상북도]] [[울릉군]]뿐이다. 그나마도 울릉군은 자그마한 섬이라는 특수성이 있으니, 이 영양군이 (섬을 빼고) [[육지#s-2|육지]] 중엔 사실상 한국에서 인구가 가장 적은 셈이며, 이는 [[팔라우]] 전체 인구와 거의 비슷하다. 아울러 인구 밀도 21명/㎢로 전국에서 [[강원도]] [[인제군]]에 이어 두 번째로 인구밀도가 낮은 시군이다. 참고로 인제군의 인구밀도는 20명/㎢. 그러나 주민등록을 옮기지 않고 인제군에서 군 복무를 하는 대다수 군인들을 감안하면, 실제 인구밀도는 오히려 영양군이 인제군보다 더 낮을 수도 있다.
전국적으로 가장 낙후된 지역을 이르는 말인 [[BYC|B'''{{{#red Y}}}'''C]]([[봉화군]], 영양군, [[청송군]]) 중 하나다. 그중에서도 특히 낙후되었다.
해발 고도가 대부분 200m 이상이고 북쪽으로 갈수록 고도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제대로 된 평지는 찾아보기 힘들다. 최고봉은 일월산(日月山, 해발 1219m)이다. 여름은 한여름에도 해가 떨어지면 쌀쌀할 정도로 일교차가 크고 서늘한 편이다. 이로 인해 영양고추의 맛이 좋다고... 겨울은 [[봉화군|윗동네]]에 묻히는 감이 있지만 이 곳도 여타 남부지방에 비해 매우 추워 겨울 기온이 -10°C 이하로 심심치 않게 떨어진다. 많이 추울 때는 영하 25도 안팎까지도 떨어진다. 또한 눈도 제법 많이 내리는 편이며 지형적인 영향으로 수비면 동부 일대에는 상당히 많은 폭설이 내리기도 한다.
인구수에서 알 수 있듯 전국적으로 가장 낙후된 지역 가운데 하나로 이웃한 [[봉화군]], [[청송군]]과 함께 [[BYC#s-2|BYC]]로 불린다. 다른 지역에서 대중교통편을 이용하여 영양으로 가려면 대부분 이웃한 [[안동시]]를 경유해야만 한다. 고속도로, 철도편은 전혀 없으며 국도는 [[31번 국도]], [[88번 국도]]가 있다. 여기서 [[영덕군]]으로 가려면 [[918번 지방도]]를 이용하거나 청송군 진보면으로 빠져나와 [[34번 국도]]를 이용해야 한다.
참고로 어지간한 [[구(행정구역)|구]]는 물론이거니와 인구가 많은 [[동(행정구역)|동]]의 학교보다 개수가 적다. 대표적으로 [[강서구(서울)|강서구]] [[화곡동]]과 더불어 [[관악구]] [[신림동]]과 [[봉천동]], [[노원구]] [[상계동]]이 그 예이다.
|| {{{#C9151E '''영양·영덕[br]·봉화·울진'''[* 지역구 국회의원 : [[강석호]]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3선)]}}} ||<:>16.72%||<:><bgcolor=#C9151E>{{{#FFFFFF 59.73%}}}||<:>13.29%||<:>5.65%||<:>3.33%||<:>{{{#808080 ▼43.01}}}||<:> 73.48 ||
|||| 영양군-봉화군 || 영양군-[br]봉화군-울진군 || 청송군-[br]영양군-영덕군 ||<-4>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
- Crusader Kings 2/특성 . . . . 10회 일치
* 봉신들의 의견 -5
''공정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 결점은 봉신과 가신에게 환영 받지 못합니다.''
* 봉신들의 의견 -5
''자신의 본분에 만족해 합니다. 충성스러운 봉신이 될 수 있지만 음모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 봉신들의 의견 +5
''신체적 위협에 당당히 맞섭니다. 봉신들이 보내는 존경과 겁쟁이들의 선망의 시선을 즐깁니다.''
* 봉신들의 의견 +5
* 봉신들의 의견 -5
* 봉신의 의견 +5
* 봉신들의 의견 +5
- 김시진 . . . . 10회 일치
|연봉 =
육군중앙경리단에서 병역을 마치고 [[1983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으며, 입단 첫 해에 17승(14선발승으로 [[장명부]](28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그 뒤 1986년 16선발승으로 [[선동열]](17선발승)에 이어 선발승 2위)을 올리면서 [[삼성 라이온즈]]의 에이스로 활약했는데 [[6월 15일]] 롯데전(대구)에서 완봉승을 거둔 후<ref>{{뉴스 인용
}}</ref> [[7월 9일]] 삼미전(대구)에서 8회 강우콜드 완봉승을 기록하여<ref>{{뉴스 인용
}}</ref> 순수신인 최초 2완봉승 도달 투수가 됐고 결국 그 해 5완봉승으로 마감했는데(당시 전구단 상대 완봉승) 이 기록은 아직까지 순수신인 최다 완봉승 기록으로 남아 있다. 프로 데뷔 이후 5년 만에 [[KBO 리그]] 사상 최초로 개인 통산 100승을 올렸다. [[1985년]] 25승(21선발승으로 최다 선발승이었는데 전년도(15선발승)에 이어 2년 연속 최다 선발승 1위) 5패, 10세이브, 201탈삼진으로 소속 구단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기 통합 우승을 이끄는 등 [[삼성 라이온즈]]에서만 111승을 올렸다.<ref name="ohmynews" />
[[2008년]]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을 이유로 [[키움 히어로즈|히어로즈]]에서는 [[이광환]]을 경질하고 그를 감독으로 임명했다. 그는 구단과 계약 기간 3년, 계약금 2억원, 연봉 2억원 등 총 8억원에 계약을 맺으면서 [[키움 히어로즈|히어로즈]]의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고, 2008년 [[10월 10일]] 감독 취임식을 가졌다.<ref>《한겨레》, 2008, 10, 11.</ref> [[2009년]]에 6위를 기록하였지만, 시즌 후반 [[삼성 라이온즈]], [[롯데 자이언츠]]와 치열한 4위 다툼을 벌이기도 했고, 시즌 초반에는 한때 선두를 달리기도 했다. 특히 [[강윤구 (야구 선수)|강윤구]]와 [[강정호]], [[황재균]] 등의 젊은 선수들은 [[이택근]], [[이현승 (야구 선수)|이현승]], [[장원삼]]의 [[넥센 히어로즈의 트레이드 파동|트레이드 파동]] 때 "트레이드 불가"로 못박을 정도로 좋은 활약을 보여 주었다. [[2009년]] [[8월 6일]] [[SK 와이번스|SK]]전에서 감독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년|연<br /><br />도]]!!소<br /><br />속!![[나이|나<br /><br />이]]!![[승리 투수|승<br /><br />리]]!![[패전 투수|패<br /><br />전]]!![[승률|승<br /><br />률]]!![[평균 자책점|평<br />자<br />책]]!!출<br /><br />장!![[선발투수|선<br /><br />발]]!![[완투|완<br /><br />투]]!![[완봉|완<br /><br />봉]]!![[세이브 (야구)|세<br />이<br />브]]!![[홀드 (야구)|홀<br /><br />드]]!![[이닝|이<br /><br />닝]]!![[안타|피<br />안<br />타]]!![[홈런|피<br />홈<br />런]]!![[볼넷|볼<br /><br />넷]]!![[고의 사구|고<br /><br />4]]!![[삼진 (야구)|탈<br />삼<br />진]]!![[몸에 맞는 볼|몸<br /><br />맞]]!![[보크|보<br /><br />크]]!![[폭투|폭<br /><br />투]]!![[실점|실<br /><br />점]]!![[자책점|자<br /><br />책]]!![[타자 (야구)|타<br />자<br />수]]!![[WHIP|W<br />H<br />I<br />P]]
- 박신혜 . . . . 10회 일치
박신혜는 이후 단막극 《[[드라마시티]] - 첫차를 기다리며》(2004), 《[[MBC 베스트극장|베스트극장]] - 베리 메리 크리스마스》(2004), 《새 아빠는 스물 아홉》(2005)와 《한뼘 드라마》(2004), 《베스트극장 - 어느 멋진 날》(2005), 《드라마시티 - 키다리 아저씨》(2005)와 시트콤 《[[혼자가 아니야]]》(2004-05), 《[[귀엽거나 미치거나]]》(2005)에 출연하며 배우로서 연기력을 다져나갔다. 2004년부터 2005년까지 박신혜는 사전 제작 된 퓨전 사극 드라마 《[[비천무]]》에 캐스팅 되어 중국 로케 촬영하였다. 그리고 2006년 2월, 첫 방영한 드라마 《[[천국의 나무]]》에서 여주인공 하나 역에 캐스팅 되었고, ‘천국의 계단’에서 그녀를 발탁했던 이장수 감독은 여주인공으로 고등학생이었던 박신혜를 또다시 발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인터뷰> 드라마 '천국의 나무' 여주인공 박신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1197151|출판사 =연합뉴스 |저자 =정열 |날짜 = 2006-01-16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4월, 영화 《[[도마뱀 (영화)|도마뱀]]》으로 첫 스크린 데뷔를 하였다. 이듬해, 2007년 황인뢰 감독은 드라마 《[[비천무]]》의 제작 현장에서 눈여겨본 박신혜에게 드라마 《[[궁S]]》의 귀족 소녀 신세령 역으로 캐스팅했으나 이 드라마는 전작과 달리 진부한 내용과 설정으로 흥행에는 크게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잘 자라줘서 고마워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02569|출판사 =텐아시아 |저자 =최지은 |날짜 = 2009-10-28 |확인날짜 =2015-04-18 }}</ref> 같은 해 5월 개봉 된 호러 영화 《[[전설의 고향 (2007년 영화)|전설의 고향]]》과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에 출연했다. 7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깍두기 (MBC)|깍두기]]》에서는 절에서 자란 여주인공 장사야 역을 맡아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긴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등 파격 변신을 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문희' 후속 드라마 '깍두기' 주인공 확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0081490|출판사 =OSEN |저자 =김지연 |날짜 = 2007-07-19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2007년부터 2008년까지 예능 프로그램 《[[환상의 짝꿍]]》의 진행을 맡아 [[MBC 방송연예대상]] 쇼버라이어티부문 여자신인상을 수상했다.
박신혜는 2011년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에서 가야금을 전공하는 상큼한 여대생 이규원 역을 연기해, [[정용화]]와 다시 공연했다. 예술대학을 배경으로 풋풋한 청춘의 사랑과 우정을 그려내겠다는 취지로 시작 됐지만 연이은 시청률 부진으로 15회로 조기 종영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시청률 부진 속 <넌 내게 반했어>, 15회로 종영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47&aid=000198457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이미나 |날짜 = 201-08-09 |확인날짜 =2013-09-01 }}</ref><ref>https://www.soompi.com/2010/09/01/george-hu-is-park-shin-hyes-combat-butler/</ref> 이듬 해, 2012년에는 단막극 《[[KBS 드라마 스페셜]] - 걱정마세요 귀신입니다》에서 본인이 귀신이란 걸 자주 망각하는, 사람보다 더 사람같은 생기 넘치는 귀신 연화 역을 연기해 호평을 받아 [[KBS 연기대상]] 단막극 여자연기상을 수상했다. 박신혜는 2013년 초 개봉 되어 역대 여덟 번째로 천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7번방의 선물]]》에 성인 예승 역을 연기했다.<ref>{{웹 인용|title='Miracle in Cell No. 7' third most-viewed Korean film|url=http://english.yonhapnews.co.kr/culturesports/2013/03/15/27/0701000000AEN20130315007900315F.HTML|work=[[연합뉴스]]|accessdate=2013-03-20|date=15 March 2013}}</ref><ref>{{웹 인용|title='Miracle in Cell No. 7' third most-viewed Korean film|url=http://nwww.koreaherald.com/view.php?ud=20130315000902|work=The Korea Herald|accessdate=2013-03-20|date=15 March 2013}}</ref><ref>{{웹 인용|last=Ji|first=Yong-jin|title=MIRACLE IN CELL NO. 7 Passes MASQUERADE to Become 3rd Most Successful Korean Film|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2324|work=Korean Film Council|accessdate=2013-03-20|date=19 March 2013}}</ref> 같은 해 1월 첫방영 된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에서 사람 만나길 두려워 하는 히키코모리 고독미 역을 연기했고, 제 나이와 성격에 어울리는 밝고 씩씩한 여대생의 매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ref name="mbn" /><ref>{{웹 인용|url=http://www.soompi.com/2012/10/31/park-shin-hye-and-yoon-shi-yoon-to-star-in-new-drama-flower-boy-next-door/|title=Park Shin Hye and Yoon Shi Yoon to Star in New Drama "Flower Boy Next Door"|date=June 26, 2012|accessdate=February 7, 2012|publisher=soompi}}</ref> 박신혜는 코오롱스포츠 40주년을 기념하여 제작 된 '웨이 투 네이처 필름 프로젝트 단편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에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지운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사랑의 가위바위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47&aid=000202356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이선필 |날짜 = 2013-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2014년 11월부터 방영 된 드라마 《[[피노키오 (드라마)|피노키오]]》에 캐스팅 되어 《[[천국의 나무]]》 PD였던 조수원 감독과 9년만에 재회하게 됐다.<ref>{{뉴스 인용 |제목 ='피노키오' 박신혜 "작품 기다리는 배우, 취준생의 심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1&aid=0000404814|출판사 =엑스포츠뉴스 |저자 =김승현 |날짜 = 2014-11-06 |확인날짜 =2014-11-10 }}</ref> 이 작품은 방송국 사회부 기자들의 삶과 24시간을 함께 하며 전쟁같이 보내는 이들이 설레는 관계로 발전해가는 풋풋한 청춘을 그린 드라마로 박신혜는 거짓말을 하면 딸꾹질을 하는 가상의 증후군인 '피노키오 증후군'을 앓고 있는 최인하 역을 연기하였고, 실제 사회부 기자들의 실상이나 문화를 현실적으로 잘 반영해 호평을 받았다.<ref>{{웹 인용|url=http://www.koreaherald.com/view.php?ud=20140904000373|title=Park Shin-hye confirmed to star in ‘Pinocchio’|publisher=The Korea Herald|accessdate=2014-09-08}}</ref><ref>{{웹 인용|title=Cultural Exports to Surpass 1 Trillion Won This Year|url=http://www.businesskorea.co.kr/english/news/lifestyle/8231-culture-trade-balance-cultural-exports-surpass-1-trillion-won-year|work=Business Korea|accessdate=2015-10-24|date=2014-12-26}}</ref><ref>{{웹 인용|title=‘Pinocchio’ sells distribution rights to China for record price|url=http://kpopherald.koreaherald.com/view.php?ud=201411241750324868840_2|work=Kpop Herald|accessdate=2015-10-24|date=2014-11-24}}</ref> 박신혜는 [[SBS 연기대상]] 중편드라마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과 베스트 커플상, 10대스타상 3관왕을 수상했다. 또한 제51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으며,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 연속 인기상을 수상하는 대기록을 세웠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5년 연속 인기상 수상…대세 여배우 입증 [51th 백상]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612085|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이은지 |날짜 = 2015-05-26 |확인날짜 =2017-09-20 }}</ref> 같은 해 12월, 개봉 된 사극 영화 《[[상의원]]》에 왕비 역을 연기하였다.
2016년 6월, 첫 방영 된 메디컬 드라마 《[[닥터스 (드라마)|닥터스]]》에 캐스팅 된 박신혜는 학창시절 무기력한 반항아에서 사랑이 충만한 국일병원 신경외과 펠로우 의사로 성장하는 유혜정 역을 맡아<ref>{{뉴스 인용|제목=박신혜·김래원, '닥터스' 본방사수 독려 "오늘 첫방 아시죠?"|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606210100156110010947&servicedate=20160620|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정유나|날짜=2016-06-20|확인날짜=2016-06-20}}</ref> 한층 더 발전한 연기력을 선보였고,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21.3%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많은 사랑을 받으며 따뜻한 감성 드라마로 호평를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닥터스' 박신혜, 이게 바로 인간 승리…'공부의 신' 됐다 (종합)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8&aid=0000162374|출판사 =스포츠서울 |저자 =김수현 |날짜 = 2016-06-21 |확인날짜 =2016-06-21 }}</ref> 연출을 맡은 오충환 감독은 제작발표회 당시 박신혜에 대해 “촬영장 공식 명칭이 ‘우리 신혜’다. 오전, 오후로 미담을 만들어 내고 있다. 처음으로 내가 열심히 해서 배우를 잘 되게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연기도 좋고 인성도 좋다”고 말했다.<ref name="mbn" /> 박신혜는 연말 [[SBS 연기대상]] 장르&판타지드라마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10대스타상 3관왕을 수상했우며, 제53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 후보에 올랐다. 이 작품을 통해 박신혜는 20대 여배우 중 가장 주목 받는 한류 스타이자 대표하는 ‘흥행배우’로 성장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닥터스' 종영기획②] '3연속 흥행퀸' 박신혜, 믿고 보는 20대 女배우 우뚝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807409|출판사 = 마이데일리|저자 =최지예 |날짜 = 2016-08-24 |확인날짜 =2016-09-01 }}</ref><ref>{{뉴스 인용 |제목 =[SS이슈]'닥터스' 박신혜,안방 흥행여왕+20대 CF퀸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8&aid=0000169345|출판사 =스포츠서울 |저자 =조현정 |날짜 = 2016-07-12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6년 11월 개봉 된 코미디 영화 《[[형 (2016년 영화)|형]]》에서 국가대표급 오지랖 유도코치 이수현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만났다하면 케미퀸…이번엔 조정석x도경수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923745|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수정 |날짜 = 2016-11-08 |확인날짜 =2016-11-10 }}</ref>
박신혜는 2017년, [[정지우 (영화 감독)|정지우]] 감독의 영화 《[[침묵 (2017년 영화)|침묵]]》에서 변호사 최희정 역을 연기했다. 영화는 약혼녀가 살해당하고 그 용의자로 자신의 딸이 지목되자, 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건을 쫓는 남자 ‘임태산’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ref>{{뉴스 인용 |제목 =최민식x박신혜x류준열 '침묵' 11월 개봉 확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988848|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수정 |날짜 = 2017-09-20 |확인날짜 =2017-09-20 }}</ref> 2017년 11월 개봉을 앞두고 있다. 박신혜는 2017년 6월부터는 지난 2013년 첫 투어 이후 4년만에 2017 아시아투어의 첫 스타트 무대를 홍콩에서 성황리에 마쳤으며, 이번 아시아투어는 올 해로 네 번째로 투어 수익금 전액은 기아대책에 기부되었다. 이외에도 대만, 필리핀, 일본, 싱가포르, 태국에서도 열릴 예정이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아시아투어 첫 무대 성료…"MC 없이 단독진행"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3105412|출판사 =스포츠조선 |저자 =정유나 |날짜 = 2017-06-12 |확인날짜 =2017-09-12 }}</ref><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한류여제’ 파워 과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576478|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 =이정연 |날짜 = 2017-07-04 |확인날짜 =2017-09-12 }}</ref>
박신혜의 가족은 5대째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어린 시절부터 교회에서 주최하는 해비타트 집 짓기 봉사에도 자주 참석해왔고,<ref>{{뉴스 인용 |제목 =‘닥터스’ 박신혜 ‘5대째 기독교’… 부모도 교회서 만나 결혼 |url =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92772/20160801/%EB%8B%A5%ED%84%B0%EC%8A%A4-%EB%B0%95%EC%8B%A0%ED%98%9C-%EC%99%B8%EB%AA%A8%EB%A7%8C%ED%81%BC-%ED%9B%88%ED%9B%88%ED%95%9C-%EB%B4%89%EC%82%AC%ED%99%9C%EB%8F%99-%ED%99%94%EC%A0%9C.htm|출판사 = |저자 = |날짜 = 2016-08-01 |확인날짜 =2013-09-01 }}</ref> 성인이 된 후에는 생일이 돌아오면 가족과 함께 '밥퍼' 봉사를 꾸준히 하고 있다고 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닥터스’ 박신혜… 최일도 목사 “조용한 하늘나라의 심부름꾼” |url =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292011/20160704/%EB%8B%A5%ED%84%B0%EC%8A%A4-%EB%B0%95%EC%8B%A0%ED%98%9C%E2%80%A6-%EC%B5%9C%EC%9D%BC%EB%8F%84-%EB%AA%A9%EC%82%AC-%EC%A1%B0%EC%9A%A9%ED%95%9C-%ED%95%98%EB%8A%98%EB%82%98%EB%9D%BC%EC%9D%98-%EC%8B%AC%EB%B6%80%EB%A6%84%EA%BE%BC.htm|출판사 =크리스천투데이 |저자 =김진영 |날짜 = 2016-07-04 |확인날짜 =2013-09-01 }}</ref>
박신혜는 매년 팬미팅 수익금을 현지 NGO나 사회단체에 기부해오고 있다. 2007년, 박신혜는 드라마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의 순수제작비를 제외한 작가, 연출자, 연기자들의 원고료와 연출료 및 출연료 전액 등의 수익금을 NGO 단체를 기부하는 것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원고료-출연료 기부...첫 도네이션 극 방영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006327|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진도 |날짜 = 2007-05-14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2년에는 한국 공식팬클럽 ‘별빛천사’와 함께 한 한국 팬미팅 티켓 판매금 전액을 팬들과 대표적인 [[NGO]] 단체 ‘기아대책’에 기부하며, 박신혜가 봉사를 다녀온 아프리카 가나의 별빛 천사 마을을 위해 후원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노래선물, ‘팬 위한 노래’ 직접 작사한 곡 ‘최초 공개’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38&aid=0002231659|출판사 =리뷰스타 |저자 =김숙희 |날짜 = 2012-02-20 |확인날짜 =2013-09-01 }}</ref> 같은 해 7월, 드라마 《[[넌 내게 반했어]]》의 후지TV 방송을 기념해 [[정용화]]와 함께 7월 15일과 16일 두 차례에 걸쳐 열린 팬미팅 행사를 성공리에 마쳤고, 팬미팅 수익의 일부를 국제기아대책기구를 통해 동일본대지진의 지원금으로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정용화, '넌 내게 반했어' 日 팬미팅 수익금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6&aid=0002236717|출판사 =스포츠조선|저자 =김표향 |날짜 = 2012-07-17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3년 일본 팬미팅 후에는 기아대책 일본지부에, 필리핀 팬미팅의 수익금도 현지에 되돌려 한류의 이미지 제고에 앞장서오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中 반려동물 성금 기부… 경시풍조에 경종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69&aid=0000056438|출판사 =한국일보 |저자 =이현아 |날짜 = 2015-04-05 |확인날짜 =2015-04-07 }}</ref> 같은 해 1월, 드라마 《[[이웃집 꽃미남]]》 제작발표회에서 팬들에게 받은 쌀 화환을 나눔의 집에 기부했고, 같은 해 2월, 한국 팬미팅 수익 전액과 일본 팬미팅 수익 일부를 기아 대책에 기부했다. 4월에는, 서울 영등포 타임스퀘어 CGV 스타리움에서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쇼케이스 행사에 참석한 박신혜를 응원하기 위해 일본 팬클럽과 공식 팬클럽 회원들은 쌀 화환 520kg과 공식 팬클럽은 '별빛천사는 사랑의 가위바위보를 응원합니다' 등의 메시지를 적은 쌀 화환을 보내고, 이날 받은 쌀 화환 520kg은 박신혜가 지정하는 기부처로 전달돼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쌀 화환 520kg 어려운 이웃에 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330294|출판사 =조이뉴스24 |저자 =권혜림 |날짜 = 2013-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6월 24일, 영화 《사랑의 가위바위보》의 청각장애인을 위한 한국어 대사와 해설 자막, 시각장애인을 위시·청각 장애인들도 비장애인과 함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제작한 배리어프리 버전 녹음을 진행했고, 박신혜는 영화의 앞부분에 내레이터로 재능 기부에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지운 감독·박신혜, 시청각 장애인 위해 재능기부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348112|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김미리 |날짜 = 2013-06-24 |확인날짜 =2013-09-01}}</ref>
박신혜는 또한 2011년부터 기아대책 홍보대사로 활동, 서부 아프리카 가나에 있는 결연아동 아반네를 결연후원 해오고 있으며 팬들과 해외 빈곤국에 센터 세우는 일에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팬과 함께 봉사활동 나선 별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196660|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 =김원겸 |날짜 = 2014-04-08 |확인날짜 =2014-04-09}}</ref> 국내외 팬들과 전 세계 빈곤국가 아이들의 교육적, 정서적 지원을 위한 ‘별빛천사마을’ 만들기 프로젝트를 진행해왔다. 1호 센터로 서부 아프리카 가나 ‘신혜센터(Shin Hye Center)’가 2013년 11월 완공되어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이용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기아대책 홍보대사 박신혜, ‘러브백’ 특별행사 참여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405291628173210|출판사 =뉴스엔 |저자 =김찬미 |날짜 = 2014-05-29 |확인날짜 =2014-05-30}}</ref> 2014년에는 세월호 희생자 가족을 위해 희망브리지 전국재해구호협회를 통해 5,000만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이어 소속사도 1000만원 기부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9&aid=0003189349|출판사 =매일경제 |저자 =이슈팀 |날짜 = 2014-04-23 |확인날짜 =2014-04-24}}</ref><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이어 소속사도 1000만원 기부 "작게나마 위로가 됐으면" |url =http://stoo.asiae.co.kr/news/view.htm?idxno=2014042515493577725|출판사 =스포츠투데이 |저자 =김은애 |날짜 = 2014-04-25 |확인날짜 =2014-04-26 }}</ref> 또한 자신의 SNS 트위터 프로필 사진을 노란리본 사진으로 변경, 노란리본 캠페인에도 동참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기부 이어 노란리본 캠페인 동참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44&aid=0000242446|출판사 =스포츠경향 |저자 =온라인뉴스팀 |날짜 = 2014-04-23 |확인날짜 =2014-04-24 }}</ref> 2015년, 박신혜는 ‘2015 Dream of Angel’ 타이틀로 아시아투어에 나섰고, 상해 팬미팅 수익을 [[NGO]] 단체 ’기아대책’의 별빛천사마을 만들기와 중국의 유기동물 보호단체 ‘타소원’에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박신혜, 상해 팬미팅 수익금 전액 기부.."한류스타 이례적 행보"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3217288|출판사 =이데일리 |저자 =강민정 |날짜 = 2015-03-30 |확인날짜 =2013-09-01 }}</ref> 4월, 박신혜는 큰 피해를 입은 [[네팔]] 국민들을 위해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를 통해 3,000만원을 기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네팔 지진 희생자 위해 3천만원 후원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054697|출판사 =OSEN |저자 =정유진 |날짜 = 2015-04-30 |확인날짜 =2013-09-01 }}</ref> 2016년 7월, 박신혜는 아프리카 가나의 신혜센터에 이어 필리핀 마닐라에 신혜센터의 건립을 진행했다. 이에 박신혜와 소속사 솔트 엔터테인먼트 직원들은 센터건립에 앞서 필리핀 쌈빨록 지역의 아이들과 1:1 결연을 맺었고, 지난 3월 박신혜는 필리핀의 결연아동의 집을 직접 방문하고 아동결연센터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가지며 센터 건립에 앞서 건축기념식을 가졌다.<ref>{{뉴스 인용|url=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489585|제목=박신혜가 또… 필리핀에 아동복지시설 ‘신혜센터’ 건립|출판사 =스포츠동아 |저자=홍세영|날짜 = 2016-07-22|확인날짜=2016-12-09}}</ref>
- 박휘순 . . . . 10회 일치
** 《제3세계》 육봉달 역
** 《리얼 사운드》 동창회 특집 출연, 육봉달 역
** 《봉숭아학당》 최배달 역, 고시생 역, 프로듀스 102등 장오복([[장문복]]) 역, 졸라박 역, 77년생, 박어준 역
** 《봉대봉대》
* "맨손으로 북경오리를 때려잡고, 떡볶이를 철근같이 씹어먹으며 달리는 [[수원시의 마을버스|마을버스 2-1]]에서 뛰어내린..." - 《개그콘서트》 〈제 3세계〉코너에서 육봉달 역으로
* 전 아무말도 안했어요. (봉숭아학당) 프로듀스 102등 장오복(장문복) 역으로
* 102등 복중의 복 장!오복이에요. (봉숭아학당) 프로듀스 102등 장오복(장문복) 역으로
* 좋아보여요? (봉숭아학당) 졸라박 역
| 현재명 = [[유세윤]], 박휘순, [[안영미 (1983년)|안영미]], [[신봉선]]
- 우현(배우) . . . . 10회 일치
|| '''출생''' ||<(> [[1964년]] (만 53세) 용띠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
김천감로화오일뱅크주유소 를 졸업했다. 이로 인하여 2016년 우현이 1:100에 출연할 때 100인 중에 김천대화오일뱅크주유소 학생들이 초청되었고, 그 중 한 학생은 우승까지 했다! 재학 중 학생운동을, 그것도 운동 최전선에서 움직이던 간부일 정도로 열성적으로 행했다. 그래서 옥살이만 2번을 해서 소집제외되어 군[[면제]].[[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community/2078/read?articleId=20656465&nil_id=14&objCate1=497&bbsId=G005&t__nil_ruliweb=best&itemId=143&t__nil_ruliweb=best&nil_id=14|#]] 학번상 [[6월 항쟁]]의 선봉에 섰는데, 6월 항쟁의 시발점이 된 [[이한열]] 열사 최루탄 사망사건 항의 집회에서 최선봉에 섰기 때문에 [[타임지|미국 시사잡지]]의 1면 메인을 장식하기도 했다. 당시 학생회장이 이미 그전에 잡혀간 뒤라 지휘할 사람이 필요하여, 다른 간부였던 우현이 선두에서 지휘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1987년]] [[6월 항쟁]]에 최선봉에 섰던 우현인데 아이러니하게도 훗날 영화 [[1987(영화)|1987]]에서 당시 치안본부장 강민창(...) 역할로 등장했다.
또한 [[무한도전 못·친·소 페스티벌 시즌 2]]에 참가자 자격으로 참여했다. 등장만으로도 많은 참가자들이 경의를 표하며 엄청난 [[노안]] 캐릭터를 보여줬다. [[이봉주]] 등장 전까지 많은 참가자들이 못생긴 순위 1위로 찍었으며[* [[이천수]]는 우현을 '''레전드급이라고 평했다'''.] 이봉주가 등장하기만을 고대했다. 시즌1의 [[고창석]][* 배우, 노안, 참가자들의 경의를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다.]과 유사한 역할일 듯. 등장만으로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했다. 결국 못·친·소 페스티벌 시즌 2의 최고의 매력남으로 뽑혔다.[* 정작 우현과 절친한 사이인 우상호 의원은 그가 못친소에 출연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의외였다고 한다. 그는 한번도 우현이 못생겼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 [[고봉실 아줌마 구하기]] (2011,TV조선) - 천만금 역
* [[마음의소리(시트콤)|마음의소리]](2016,KBS) - 애봉이 아버지 [* 애봉이 어머니이자 아내 역은 진짜 우현의 아내인 조련이 맡았다.]
* 또한 현재 사는 아파트 말고도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에서도 주택이 있으며, 실제로 가족들과 3여 년간 살았었다. <유자식 상팔자>에서 김천에서 살게 된 이유가 밝혀졌는데, 주유소들이 학교 생활을 힘들어해서 장모님의 추천으로 아들의 정신 건강을 치료할 겸 진도에 내려와 집을 지었다고. 가족들은 김천에서 지냈고, 본인은 일 때문에 [[대구]]과 진도를 오가면서 살았었다.[* 때문에 몇 년간 주말부부로 지내야만 했고, 주변에서는 "이혼한 거 아니냐"고 종종 오해를 받기도 했다.] 참고로 그 진도 집은 [[동물농장]] 견스테이와 유자식 상팔자 특집 코너[* 대표적으로 아빠, 삼시세끼를 부탁해! 코너. [[홍서범]] 과 함께 코너를 진행했다]를 진행하기 위한 장소로 사용되었다.
- 킹덤/525화 . . . . 10회 일치
* [[아광]]은 교전 직전까진 옥봉대가 대기하고 있을 것을 지시했으나 막상 위기의 순간 [[왕분]]과 옥봉대가 나타나자 그들과 힘을 합쳐 적을 막고자 한다.
* [[악영]]의 조군 1진을 성공적으로 붕괴시키고 있던 [[아광]]군은 [[마남자]]군에게 측면을 내주면서 급격히 위기에 처한다. 마남자가 선두를 이끌고 아광에게 쇄도하자 전방의 악영군과 교전에 힘쓰고 있던 아광으로선 대응할 수단이 마땅치 않았는데, 그때 대기를 지시했던 [[왕분]]의 옥봉대가 전장에 난입해 마남자군을 요격하면서 전황은 다시 바뀐다.
악영의 부하들은 지시를 어긴 옥봉대가 못 마땅한 듯 했지만 아광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부하 장교에게 군을 이끌게 하고 자신은 백 여기를 이끌고 적장 마남자에게 향했다. 옥봉대와 합류해 적장을 직접 처리할 작정이었다.
* 아광군을 한 번의 돌격으로 막아세웠던 마남자는 자신도 같은 처지에 처했다. 그들이 아광군을 한참 몰아세우던 사이 옥봉대가 우측을 깊게 찔러 들어오자 부대가 앞뒤로 분단되고 마남자도 고립됐다. 이윽고 이쪽을 노리고 달려오는 적 기병대의 선두가 보였다. 깃발의 숫자를 보면 적장. 상황이 숨가쁘게 변하고 있었고 결코 유리하지 않았으나 마남자는 어찌된 일인지 미소를 머금었다.
후위에 있는 병사들은 마남자를 고립시키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했으나 왕분이 펼치는 창술 앞에 부질없이 목숨을 잃었다. 옥봉대의 공격이 쐐기처럼 박히고 상황이 난전으로 전환됐다. 왕분은 현장을 [[관상]]에게 맡겼다. 이대로 적의 후위가 올라오는걸 막고 적장의 고립 상태를 유지한다. 그동안 자신은 직접 적장의 목을 취할 것이다. 관상은 이 같은 지시에 별 반대 없이 무운을 빌었다. 그리고 [[영강]]에게 부탁에 왕분의 호위를 맡겼다. 늘 한 마디씩 토를 달던 관상이었다. 아무 반대도 없어 미심쩍기도 했으나 왕분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곧 [[반양]]과 함께 출발했다.
* 그의 고분고분한 태도가 이상한건 [[흑금]]도 마찬가지였다. 싸우던 그가 다가와 "별 일이다"고 말을 걸었다. 관상은 자기가 사사건건 반대만 하는건 아니라고 대꾸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확실히 이상하다. 아광이 내린 대기명령을 대놓고 위반하지 않았나? 깐깐한 관상이 한 마디 할 법도 한데. 흑금이 그렇게 말하자 관상이 "고립유군으로서 틀린건 아니다"고 대답했다. 마남자의 돌격은 아광군의 큰 위기였는데, 옥봉대가 끼어들면서 그 고비를 넘겼고 오히려 적장을 궁지로 몰아세웠다. 이대로 적장을 쓰러뜨린다면 진군 우익의 싸움은 초반부터 크게 우세해지는 격. 지시야 어떻든 전술적으로 틀린게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흑금은 새삼 왕분의 전술안이 보다 날카로워진다 감탄했다. 관상도 그게 틀림없다고 동의했다. 하지만 흑금이 "역시 피는 못 속인다"고 하는 말에는 한참 뜸을 들이더니 떨떠름하게 "맞아"라고 대답하는데.
* 그리고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불길한 예감은 구체적인 형태를 드러냈다. 왕분이 노리고 있던 적장 마남자, 그가 코 앞에 나타났다. 마치 옥봉대를 통채로 썰어버릴 기세로 칼을 들어올리고 있었다.
* 마남자가 휘두르는 한 칼이 전방의 병사들을 반으로 갈랐다. 영강은 철구를 들어 재빠르게 막았지만 힘에서 밀려났다. 영강은 무기가 부러졌지만 낙마했을 뿐 경상에 그쳤다. 옥봉대 병사들의 떨어져 나간 몸뚱이가 흩날렸고 돌격은 저지됐다. 병사들이 왕분을 지키려고 모여드는 동안 왕분은 죽은 부하들의 시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폐비 윤씨 . . . . 10회 일치
}}</ref> ~ [[1482년]] [[8월 29일]] ([[음력 8월 16일]]))는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 [[윤기견]](尹起畎, 또는 윤기무, 尹起畝)<ref>조선왕조실록에는 둘 모두 쓰였으나, 윤기무라는 이름이 비교적 적게 등장하므로 {{출처|날짜=2009-03-14|윤기견의 오기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한편 작가 [[신봉승]]은 자신이 집필한 드라마 《[[한명회 (드라마)|한명회]]》의 제94회에서, 윤기무는 윤기견의 아우로 슬하에 자식이 없었음이 [[함안 윤씨]]의 세보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고, 이를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바로 잡아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ref> 와 고령 신씨(申氏)의 딸로 [[조선]]의 제9대 임금 [[조선 성종|성종]]의 계비이자 둘째부인으로 투기와 남편인 [[조선 성종|성종]]의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위되었다.
[[1473년]] [[조선 성종|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淑儀)의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廢妃)되어 사사되었다. 아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齊獻王后)로 추존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삭탈되면서 죽을 당시의 폐서인 신분으로 돌아갔다.
봉상시 판사(奉常寺 判事)를 지낸 [[윤기견]]과 고령 신씨의 딸로 태어났으며, 3명의 이복 오빠와 1명의 친오빠가 있었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6JOa_A1445_2_0019315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ref>.
윤씨는 [[성종]] 4년(1473년) 4월 15일(음력 3월 19일)에 후궁간택으로 숙의(淑儀)에 봉해졌다.
당시 윤씨는 임신 중인 몸으로, [[8월 27일]]([[음력 8월 9일]]) 왕비(王妃)로 책봉되어 3개월 뒤인 [[11월 23일]]([[음력 11월 7일]])에 적통대군인 [[조선 연산군|원자]]를 낳아 중전(中殿)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졌다.
바로 그의 아버지는 의정부 영의정(議政府 領議政)에 [[추증]]되고 함안부원군(咸安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두 어머니는 각각 정경부인 [[양성 이씨]](貞敬夫人 陽城 李氏) 장흥부부인 [[고령 신씨]](長興府夫人 高靈 申氏)로 추숭되었다.
[[인수대비]]는 원자가 더 자라서 자신의 어미얼굴을 기억할까봐 하루빨리 새 중전(中殿)을 세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훗날의 [[정현왕후]]가 되는 [[정현왕후|숙의 윤씨]](淑儀 尹氏)를 왕비(王妃)로 책봉시켰다.
회묘 근처에는 후궁 묘역이 있으며, 그 중 윤씨의 묘소는 봉분이 크고 석물들이 존재하고 있다.
** 아버지 : 봉상시판사 [[윤기견]](奉常寺判事 尹起畎, 생몰년 미상)
- 홍국영 . . . . 10회 일치
| 어머니 = [[우봉 이씨]] 부인
[[1772년]] 9월 정시(庭試:별시의 일종) 문과에 병과 11위<ref>15명 중에 15위였다. 출처 조선문과방목 영조48년 정시</ref> 로 급제하였다. 대과에 급제하고도 6개월간 보직을 받지 못하다가 이듬해 2월부터 가주서(假注書)로 벼슬살이를 시작한다. 계속해서 이 해 [[4월]] [[정민시]]와 함께 한림소시에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영조]]를 보좌하는 사관으로 봉직하기 시작했다. [[한중록]]에서는 그가 사관으로 봉직할 당시 [[영조]]가 홍국영을 "내 손자"라고 부르며 총애했다고 쓰고 있다. 이듬해인 [[1774년]] 3월에는 동궁시강원 설서(說書)로 임명된다. 세간에 홍국영이 과거 급제와 동시에 설서에 임명되었다는 설이 많이 퍼져있는데<ref>박광용《영조와 정조의 나라》(푸른역사, 1998)와 이덕일《정조와 철인정치의 시대1》(고즈윈, 2008)에서는 홍국영이 과거 급제한 달에 바로 세손의 시강원에 임명되었다고 적고 있다. </ref> 이는 잘못된 내용이다. [[조선 정조|정조]]와는 동궁시강원 설서가 되면서부터 가까워진 것으로 보인다. 정조는 이 당시 궁료들이 서연에서 아뢴 말들을 모아 《현각법어》(賢閣法語) <ref>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규6836</ref> 라는 책을 펴냈는데, 실제로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홍국영의 언행이라고 한다. 《명의록》 등은 이 시기 홍국영이 "세손의 오른날개(右翼)"라고 불렸다고 적고 있다.
원빈 사망 당일 정조는 자신의 서제 은언군 아들 완풍군을 원빈의 수원관으로 삼았다. 후일 홍국영이 이 완풍군을 "내 조카"라고 부르며 그를 통해 대계를 저지하려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기록에 일관성이 없어 완전히 신뢰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이 완풍군(完豊君) 준(濬)은 홍국영의 몰락 후, 상계군(常溪君) 담(湛)으로 개명(改名) 개봉(改封)되며 왕실 세력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결국 5년 후인 정조10년([[1786년]])에 생을 마감했다.
[[1779년]] [[음력 9월 26일]] 홍국영은 자신이 맡고 있던 모든 조정의 실직(實職)에서 물러난다는 뜻을 담은 은퇴 상소를 올렸으며, [[정조]]는 당일 이를 수락한다. 이때 정조는 불과 32세의 홍국영에게 [[봉조하]] 직함을 내려주는데, 일찍이 백발의 봉조하는 있어도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이제 있게 되었다고 하여 그는 “흑두봉조하”라고 불리게 된다. 《한중록》과 《정종대왕행장》 등 사후적인 기록에서는 공통적으로 홍국영이 자진 사퇴의 형식으로 물러난 것 자체가 정조의 뜻이었다고 전하고 있어 정설로 통하나, 이와 같이 사퇴시킨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확인된 바 없다.
** 어머니 : [[우봉 이씨]]
* [[홍봉한]]
- 강동우 . . . . 9회 일치
|| [[류중일]](1987~1999) || → || '''강동우(2000~2005)''' || → || [[강봉규]](2006) ||
|| [[강봉규]](2000~2005) || → || '''강동우(2006)''' || → || [[이승엽(1982)|이승엽]](2007) ||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을 마치고 2000년 시즌 막판에 겨우 복귀해서 다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지만, 신인 시절의 성적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류중일]] 코치가 선수 시절에 달던 1번을 달고 뛰며 타격에서는 나름대로 제몫을 하며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동했고, 2002년 [[김응용]] 감독 아래에서 타율 0.288, 9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2001년 데뷔하여 삼성의 붙박이 타자가 된 왕년의 좌타 [[라이벌]] [[박한이]]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뤄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타율이 2할 중후반에 머무르는 바람에 '비운의 톱타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후 [[선동열]] 감독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외야진 보강 차원에서 2006년 3월 [[두산 베어스]]의 [[강봉규]], [[김창희(야구)|김창희]]를 상대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 삼성 팬들은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 이는 훗날 [[양준혁]]의 등떠밀기식 은퇴, [[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는 발언 등과 함께 [[선동열]]의 삼성 프랜차이즈 내치기 사건 중 하나다.
2008 시즌 종료 후 [[신종길]]을 상대로 [[한화 이글스]]에 트레이드되었다. 2009 시즌 붙박이 1번 타자 겸 [[중견수]]로 기용되면서 놀랍게도 맹활약을 펼쳤고, 1998년 이후 12년 만에 3할 타율과 준수한 출루율을 기록하였다. 또한 팀 내에서 가장 적극적인 주루 플레이를 보이서 부활의 날개를 펼쳤다. 한화가 간만에 건진 수준급 1번 타자. 농담으로 [[FA로이드]]를 복용했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로 2009 시즌 종료 후 [[FA 제도|FA]]를 선언했고, [[한화 이글스]]와 1년 총액 3억 원(계약금 1억 5천+연봉 1억 5천)의 조건으로 재계약에 합의했다. 팬들은 반짝 활약이 아니기를 바랐으나...
후반기에 타율을 많이 끌어올린 덕분에 타율 0.288로 훌륭한 성적을 내고 시즌을 마무리했다. 팀 내 '''타자 고과 1위(!!)'''에 홈런 개수로 커리어 하이고, 타점도 순도높은 타점들이 상당히 많아 38살 나이임에도 차기 시즌에도 충분히 좋은 활약을 펼칠 수 있으리라 기대되었다. 한편 [[FA 제도|FA]] 대상자였지만 시즌 종료 후 FA 신청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봉은 고작 5천만원이 올랐는데, 강동우의 생각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객관적으로 인상액이 너무 적다는 인상이 짙다. 물론 노장선수의 연봉은 상대적으로 인상폭이 적은 경우가 종종 있지만 이 시기 한화 프런트진의 연봉 인상 정책에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 강동우는 물론이고 [[이대수]], [[박정진]] 등 A+급 활약을 보인 선수들의 연봉 인상폭이 똑같이 5천이었다. 이는 선수들의 동기부여 실패로 이어졌고, 2012년 한화가 최악의 시즌을 맞이하는데 적지 않은 일조를 한다.
선수시절 등번호는 20-1-24-31-2-3번 순이다. [[삼성 라이온즈]]의 1번 라인인 [[황규봉]]-[[류중일]]-강동우-[[윤성환]] 중 한 명. '''불사조같은 선수시절을 보낸 선수.'''
- 심현섭(코미디언) . . . . 9회 일치
[[1999년]] [[개그 콘서트]]의 [[사바나의 아침]]에서 추장 역을 맡아 많은 [[유행어]]를[* 예를 들어 '''"빰바야~ 까스토미또르쌈바~"'''] 낳으며 긴 [[무명]] 생활을 마치고 스타덤에 올랐고, [[봉숭아 학당#s-2|봉숭아 학당]]의 [[심맹구]]라는 2대 [[맹구]] 역할로도 인기를 끌어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그 당시만 해도 [[김영철(개그맨)|김영철]], [[강성범]] 등과 함께 개콘과 KBS를 대표하는 젊은 [[개그맨]]이었다. 다만 그의 개그에 대해선 '웃기다'보다는 '대단하다'가 더 잘어울렸다. 각종 성대모사 및 요상한 효과음 내는 것은 발군이었지만 정작 너무 잘해서 웃는 걸 잊어버릴 때가 많았다. 이때 심현섭은 정체 불명의 대사를 읊는 게 특기였는데 그게 워낙 재미있어서 뭔 뜻인지도 모르고 따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002년]] 1월 13일자 개콘의 '봉숭아 학당' 촬영 중, [[방송사고]]가 있었다. [[심맹구]] 역으로 "정부느은! 왜 공짜를 좋아하면 [[탈모|머리가 벗겨지는지]] 알아?" "바지가 벗겨지면 이상하잖아~"라는 내용의 대사를 했다.[* 당시 데모하는 학생 기믹으로 출연하던 박성호의 유행어를 따라하는 것이다.] 그리고 김준호가 [[애드립]]으로 [[바지]]를 내렸는데 '''실수로 팬티까지 벗겨지는 바람에......''' [[이하생략]].
전남 광주 출신이다. [[아버지]]가 호남전기 사장, 전남매일신문 사장, 광주일보 회장이자 [[대한민국 국회의원|11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 [[총재]][[비서실장]]을 지냈던 [[심상우]]로, [[1983년]]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사망했다.[* 심상우가 떠나기 전 아들에게 당시 돈으로는 상당한 2천 원을 용돈으로 줬는데 그것이 아버지의 유품이 되어버렸고, 심현섭은 지금도 그걸 간직하고 있다. 2014년 현재 돈가치로 따지면 9만 원~10만 원 정도이다.] [* 훗날 테러당시 현장에 있었던 기자들에게서 이야기를 듣었는데,[[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10271525151001|평소 밝고 활달했었던 아버지가 테러 당일에는 표정이 어두웠고 말수도 적었다고 한다]].그것은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 항목에 실린 참석자들의 마지막 사진에서 확인할 수 있다.]그래서 한때 잘 나가던 부잣집 도련님(할아버지부터가 호남전기공업[* 1945년 창립 이래 심씨 가문이 소유했으나, 1970년 큰아버지 심상하 회장 사후 부인 진봉자의 전횡으로 회사가 어려워져 1976년에 남봉 김남중(1917~1987) 전남일보 회장 등 호남 연고 기업가 6명에게 팔렸으나, 경영권 분쟁 발생 후 1978년에 김남중이 단독으로 인수해 1982년부터 '로케트전기'로 바꿨다. 그러나 1997년 외환위기와 에너자이저 등 해외 건전지들에 밀려 1998년부터 '로케트' 브랜드를 질레트에 팔고 하청업체로 전락하여 2015년에 회사가 정리되었다. 반면 같은 '로케트' 브랜드를 쓰는 자동차 배터리 부문은 1978년에 세방기업 매각 후 '세방전지'로 분리되어 현재 잔존중이다.] 창업주 심만택이었다.)이었다가 아버지 타계 이후로 상경하여 많은 고초를 겪게 되었다고 한다.[* 이미 1976년에 숙모 진봉자 여사의 전횡과 사촌 심홍근 사장의 운영미숙 등으로 호남전기를 팔았으며, 1980년 11월에 [[언론통폐합]]으로 전남매일을 잃게 된다.]
* [[꽃봉오리 예술단]]
* [[봉숭아 학당#s-2|봉숭아 학당]] - [[심맹구]] 役
- 양시칠리아 왕국 . . . . 9회 일치
19세기에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위치한 [[부르봉 왕조]]의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은 남부 이탈리아 지방(나폴리 왕국)과, 시칠리아 섬 지방(시칠리아 왕국)을 겸하였다는 칭호이다. 빈 회의 이후에 성립된 부르봉 왕조의 양 시칠리아 왕국은 공식적으로 1816년에서 1860년 까지 유지된 것으로 본다.
[[부르봉 왕조|부르봉 왕가]]에 의한 양 시칠리아 지배는 1734년에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 동안에, 스페인 계 부르봉 왕가의 돈 카를로스가 오스트리아의 지배하에 있던 나폴리 지방과 시칠리아를 정복한 것에서 시작된다.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나폴리 지역은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에 정복되고, 부르봉 왕조는 시칠리아만을 유지하였다. [[빈 회의]] 이후에 두 지역은 부르봉 왕조의 통치 하에 들어갔으며, 1816년 12월 '양 시칠리아 왕국'으로 공식적으로 명명되었다.
하지만 민족주의, 개혁사상을 배척하는 부르봉 왕조의 통치는 불안정하여, 1820년, 1848년에 부르봉 왕조의 통치에 반발하는 혁명이 일어났으며, 결국 1860년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천 명의 [[붉은 셔츠 부대]]가 시칠리아 왕국에 상륙한 것을 시작으로 붕괴하기 시작한다. 붉은 셔츠 부대가 시칠리아 왕국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이미 불만이 팽배하던 시칠리아 전역에서 호응이 일어나 양 시칠리아 왕국은 시칠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한다.
- 영주시 . . . . 9회 일치
[[경상북도]] 북부에 위치한 [[시(행정구역)|시]]. 인구는 2016년에 들어 10만 9천여 명으로 계속 인구가 줄고 있다.[* 1995년경에는 인구가 약 15만명이었다. 이때부터 따져도 매년 거의 2천명 꼴로 인구가 줄어든 셈. 그런데 2018년 현재 약 16만인 안동시 인구도 그 당시에는 거의 20만명에 달했다. ~~그때가 좋았지~~] 시의 동부에 [[봉화군]], 남부에 [[안동시]], 서부에 [[예천군]]이 있으며 북부는 죽령을 경계로 [[충청북도]] [[단양군]], 마구령을 경계로 [[강원도]] [[영월군]]과 맞닿아 있다.[* 영월군으로는 육로로 직결이 안 되어있어서 단양군 영춘면을 통과해야 한다.]
부석면의 봉황산 자락에는 그 유명한 [[부석사]]가 있다. [[교과서]]에도 등장하는 부석사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최순우 작가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배경)과 부석사 소조 아미타여래 좌상을 볼 수 있다. 무량수전과 함께 [[고려]]시대 문화재인데, 이 좌상은 향토색이 강조되고 인체비례적 아름다움에서는 약간 떨어지는 ~~저퀄~~고려 불상과는 달리 [[신라]] 불상의 양식을 계승해 균형미를 갖춘 불상으로 평가된다.
[[동남방언]] 중에서도 안동, 봉화, 예천 등 경북 북부지방 방언권에 속한다. 그러나 그나마 평야가 많은 안동, 예천 등과 달리 산악에 걸터앉은 지형인지라 영주-봉화 사투리는 안동과도 미묘하게 다르다. 때문에 경상북도에서도 사투리가 조금 이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곳이다. 사실 제주도를 제외한 육지 지역에서는 사투리가 가장 심한 지역 중 하나인데, 서울에서 가장 먼 부산보다 그나마 수도권과 가까운 영주의 사투리가 더 알아듣기 어려운 이유는 강원도 남부지방과 충청북도 동부([[제천시]], [[단양군]]) 이들 지역의 사투리가 조금씩 섞여있기 때문. [[부산]]을 비롯한 경남 해안가 사람들은 북한이라고 하면서 어설프다고 놀리기도 한다. 가끔 수도권 사람들이 사투리 별로 안 쓴다고 하기도 한다. 다음은 영주 사투리의 예문이다.
|| '''봉현면''' ||<:>{{{#696969 13.21%}}}||<:>{{{#C9151E 64.28%}}}||<:>14.17%||<:>5.24%||<:>2.25%||<:>{{{#808080 ▼51.07}}}||<:> 74.75 ||
|| '''읍·면지역'''[* 풍기읍, 이산면, 평은면, 문수면, 장수면, 안정면, 봉현면, 순흥면, 단산면, 부석면 (구 영풍군)] ||<:>15.15%||<:>{{{#C9151E 60.00%}}}||<:>14.06%||<:>6.98%||<:>2.75%||<:>{{{#808080 ▼44.85}}}||<:> 73.60 ||
[[경상북도]] 지역답게 보수정당 강세 지역이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는 영주시 단독 선거구였으나,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인구 부족으로 인해 [[문경시]]-[[예천군]] 선거구와 통합되었다. 그런데 문경, 예천 선거구와 통합된 건 잘못되었고, [[생활권]]이 같은 [[봉화군]]과 선거구를 통합하는 것이 타당했다는 의견이 있다.
* [[봉태규]] : 탤런트
* [[우병우]] : 전 청와대 민정수석. 엄밀히 말하자면 출생지가 [[경상북도]] [[봉화군]]이므로 '''영주 출신은 아니고''', 초(?)중(영주중학교)고(영주고등학교) 유년기 학창 시절을 영주시에서 지냈다.
- 이승엽 . . . . 9회 일치
|연봉 =
감독이 그의 아버지와 협상했다가 불발됐고 그는 야구를 시작할 때까지 단식하겠다고 하여 그의 아버지를 설득시켜 야구를 시작했다. 투구와 타격 모두 뛰어난 자질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좌완 투수로 좀 더 이름을 알렸다. 그는 경상중학교 재학 당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고, 재학 시절 [[청룡기 전국고교야구 선수권대회|1993년 청룡기 대회]]에서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우수 투수상을 수상했다.<ref>[[스포츠 조선]] - 2010년 5월 기사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16/2010051601132.html "최동원, 선동열, 이승엽, 추신수, 봉중근, 이대호, 류현진… 청룡기가 낳은 한국 야구 대들보"]</ref> [[1994년]] 청소년 국가 대표로 선발된 그는 투타에서 고루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ref>''[[OSEN]]'' - 2007년 12월 기사 [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이승엽-이대호, 모교서 방망이 날세운다"]{{깨진 링크|url=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712260021&code=110100 }}</ref><ref name="homerun">스포츠 춘추 - 2010년 9월 [[박동희 (기자)|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463 "이대호로 본 ‘홈런 타자는 어떻게 탄생하나’"]</ref>
1995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를 통해 계약금 1억 3200만원, 연봉 1,000만원의 조건으로 투수로 입단하였다. 좌완 투수 유망주였으나 시절 당했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ref>[[문화일보]] - 2009년 9월 기사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9091701032230073002 "이의수의 마흔 이후 남자의 생존법 - 실패는 성공을 잉태한다"]</ref><ref>[[동아일보]] - 2010년 8월 기사 [http://news.donga.com/3/all/20100820/30624874/1 "투수 → 타자 변신 성공시대… 타자 → 투수는 왜 잘 안 될까"]</ref> 입단 초기부터 투수 훈련에 애를 먹은 그는 첫 스프링 캠프에서 당시 타격코치였던 [[박승호 (야구인)|박승호]]로부터 1년만에 타자로 뛸 것을 권유받았고, 이후 좋은 반응을 보여 1루수로 완전히 전향했다.<ref>[[마이 데일리]] - 2010년 8월 기사 [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이대호·이승엽·추신수, ‘잘 던져야 잘 친다’… 투수 출신들 맹활약"] {{웨이백|url=http://www1.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8101138562229# |date=20140814152842 }}</ref> 그가 타자로 전향하자 ‘좌승엽 우승관’으로 불리며 기대를 받았던 입단 동기 내야수 [[김승관]]은<ref>엑스포츠 - 2010년 7월 기사 [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추신수와 부산고의 황금 시대를 이끈 한화의 김백만"]{{깨진 링크|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123613 }}</ref> 상대적으로 기회가 줄어 [[2004년]] [[롯데 자이언츠|롯데]]에 트레이드된 후 [[2007년]]에 방출돼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타자로 완전히 적응하며 프로 첫 해부터 가능성 있는 모습을 보였다. 점차 그는 거포로서의 재능을 뽐내며 붙박이 3번 타자 겸 1루수로 자리매김했지만 내야수 [[이동수 (야구인)|이동수]]에게 밀려 데뷔 첫 해에 신인왕 수상에는 실패했다. 프로 입단 3년차인 [[1997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타격이 정점을 찍기 시작하면서 그는 아시아 프로 야구 역사상 최고의 타자로 거듭났다.<ref>스포츠 춘추 - 2009년 12월 박동희의 칼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38 "양준혁이 말하는 ‘선구안 향상법’"]</ref>
FA 자격을 취득한 후 [[2003년]] 12월에 계약했다. 연봉은 2억엔이었는데, 당시 팀 멤버 중 그를 제외하고 2억엔이 넘는 선수는 마무리 투수인 [[고바야시 마사히데]]밖에 없었음을 감안하면 파격적인 대우였다. 이런 파격 대우 때문에 팀 내 다른 선수들이 불만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이는 팀이 타 선수들의 대우를 전면적으로 개선하는 것으로 진정됐다. 이듬해인 [[2004년]] [[3월 27일]] 개막전 4번 타자로 선발 출장했고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스|세이부]]의 에이스 투수였던 [[마쓰자카 다이스케|마쓰자카]]로부터 2루타를 기록했다. 하지만 좋았던 첫 시작과 달리 시즌 후 14홈런, 2할대 타율, 50타점이라는 비교적 저조한 성적을 기록했다.
[[2006년]] 시즌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 진출하려고 했던 그는 그 계획을 팀의 우승 후로 연기했다.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팀이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000만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팀의 1루수 [[로베르토 페타지니|페타지니]]의 7억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었다([[로베르토 페타지니|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엔을 받고 있었다).
방출 후 [[2010년]] [[12월 2일]] 1년간 1억 5,000만엔에 옵션이 포함된 연봉을 계약했다. 이 때 투수 [[박찬호]]와 같은 팀이 됐다. 이로써 [[2005년]] 이후 6년만에 다시 [[퍼시픽 리그]]로 돌아와 등번호도 3번으로 정해졌다. 그는 연봉을 대폭 낮추는 등의 백의종군 모습을 보였지만 시즌 전 반발력이 적은 공인구로 교체해 찾아온 극심한 투고타저의 영향을 받아 2할대 타율로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팀의 꼴찌가 확정된 후반기 들어 맹활약하며 시즌 총 15홈런을 쳐 퍼시픽 리그 홈런 순위 8위에 오르는 기대 이상의 모습도 보여줬으나 타율은 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규정 타석 미달로 인해 순위권에 들지 못했다.
[[2011년]] [[10월 21일]] 기자 회견을 열어 8년 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한다는 의사를 밝히고 영구 귀국했다.<ref>{{뉴스 인용|제목='국내 복귀' 이승엽, 日서 기자회견 '굿바이, 오릭스'|url=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979943.htm|출판사=스포츠서울|날짜=2011-10-21|확인날짜=2012-11-2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007070317/http://news.sportsseoul.com/read/baseball/979943.htm#|보존날짜=2013-10-07|깨진링크=예}}</ref> 이후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6&aid=0002218871 이승엽, 와이프에게 어쩔 수 없는 경상도 남자인가 보다] - 스포츠조선</ref> [[2011년]] [[12월 5일]] 연봉 8억원, 플러스 옵션 3억원에 계약을 체결하며 복귀했다.
** [[여유만만]] - 역대 연봉 스포츠 스타로 키운 사연 (2009년 7월 31일)
- 현이와 덕이 . . . . 9회 일치
1971년 '중요한 건 마음뿐이고 필요한 건 사랑뿐'이라는 동양 사상 뿐철학에 심취한 아버지를 따라 장현 · 장덕 남매는 [[도봉산]]의 사찰 비슷한 청기와집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그 곳은 외부와 통제된 곳이라 두 남매는 학교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 장덕은 5살 위인 오빠 [[장현]]에게 처음으로 기타를 배우게 된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갈 무렵(1976년) 장덕은 어머니에게 [[안양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말한다. 어머니는 처음엔 1년을 더 다녀야 된다며 말렸지만 하도 졸라대서 안양예술고등학교에 찾아갔고 다행히도 현이와 덕이로 연예계에 데뷔한 후라서 그 재능을 인정받고 입학을 허락받는다. 그 해 4월 장현 · 장덕 남매는 [[드래곤 래츠]]에서 현이와 덕이로 듀엣명을 바꾸고 <친구야 친구>, <사랑한다고 말해주오> 등 3곡이 수록된 [[옴니버스]] 형식의 [[컴필레이션 음반]] 《[[친구야 친구]]》를 발표한다. 그리고 그해 11월 개봉된 [[김응천]] [[감독]], [[임예진]] · [[이덕화]] · [[전영록]] [[주연]]의 [[영화]] [푸른교실]에서 현이와 덕이는 오라오라에 출연해 불렀던 <꼬마인형>, <일기장>을 [[사운드트랙]]으로 싣게 된다.
1977년 4월 고등학교 1학년의 장덕은 명보극장에서 개봉된 임원식 [[감독]]의 [[영화]] <[[내 마음 나도 몰라]]>에서 [[주연]]으로 출연한다. 장덕은 몇몇 영화에서 단역을 맡아 본 적은 있었지만 주연으로 출연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한달 뒤(5월) 장덕이 어머니와 함께 살던 때 이사로 인해 집들이에 참석한 가수 [[송창식 (가수)|송창식]]은 장덕이 중학교 2학년(만 14세) 때 작사 · 작곡한 <[[소녀와 가로등]]> 을 [[장현]]이 기타 연주와 함께 노래를 불러주자 감탄을 하며 이후 서울국제가요제에 출품할 것을 적극 권한다. 결국 [[송창식]]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장덕은 <[[소녀와 가로등]]>을 곧 데뷔하게 되는 신인가수 [[진미령]]에게 주며 [[작사]] · [[작곡가]]로서 제1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가요제]](제 2회 대회부터는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가요제]]에서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로 이름이 바뀐다.)에 출전한다. 당시 가요제 규정상 작곡가도 가수가 함께 무대를 꾸며야 했기 때문에 장덕은 빵모자를 눌러 쓴 깜찍한 모습으로 나와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진풍경을 연출하였고 많은 사랑을 받게 된다(입상). 같은 해 7월 명보극장에서 개봉한 박태원 [[감독]]의 [[영화]] <[[선생님 안녕]]>에서 [[장현]]은 [[임예진]]과 함께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삼각관계가 얽힌 영화로 비록 단역이지만 장덕 또한 [[장현]]의 동생 역으로 출연하였다. 현이와 덕이는 이 영화에서 [[사운드트랙]] <정말>도 싣게 된다.
1978년 4월 장덕은 1970년대 하이틴 [[영화]]의 붐을 주도했던 세 명의 명[[감독]] [[김응천]] · [[석래명]] · [[문여송]]이 모여 [[옴니버스]] 형식으로 만든 [[영화]] <[[우리들의 고교시대]]> 제1화에서 다시 [[주연]]으로 출연, 음악을 전공하는 청순한 여고생 역을 맡아 열연하며 하이틴 [[스타]]로 거듭난다. 당시 그녀는 자신을 짝사랑한 팬들에게 다섯 번씩이나 납치를 당했을 정도로 대단한 큰 인기를 누렸다. 가는 곳마다 밀려든 팬들의 사인 요청이 이어졌다(10여 편의 [[영화]]에 [[주연]] 또는 [[조연]]으로 출연). 그 해 7월 장덕은 제1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오빠 [[장현]]이 부른 <더욱 큰 사랑>의 [[작사]]/[[작곡가]]로서 출전, 2년 연속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게 된다. 이 시기 오빠 장현은 오라오라에 출연했을 때 부터 알게 된 부산연예협회지부장이자 왕년의 작사가였던 천봉의 딸 천인실과 극도로 가까워지면서 결혼까지 하게 되고 아이까지 갖게 된다. 그리고 장덕은 결혼한 오빠의 집에서 같이 살게 된다. (1978년 [[현이와덕이]] 정규1집 <[[순진한 아이]]>가 발표 되었다. <[[순진한 아이]]>, <꼬마인형>, <일기장>, <[[소녀와 가로등]]>, <정말>, <작은소녀의 사랑 이야기> 등 11곡+경음악1곡 수록, 같은 해 <크리스마스 캐롤집> 발표)
1984년 10월 [[이미례]] [[감독]], [[김진아]] · [[남궁원]] [[주연]]의 개봉 [[영화]] <[[수렁에서 건진 내딸]]>에서 장덕은 [[음악감독]]을 맡았다. 11월에는 타이틀곡 <[[사랑하지 않을래]]>를 비롯 <사랑의 꿈>, <사랑과 인생>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2집을 발표한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조용한 편이었다. 이에 장덕은 솔로 활동에의 어려움을 느끼고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우울히 보냈고 식음을 전폐하며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혼자만의 세계에서 신음하게 된다. 어린 시절 뭣 모르고 음반을 내고 노래를 불렀던 그 때와 한 동안 공백기를 가졌다가 성인이 되어 복귀, 겪게 되는 지금의 연예계는 너무도 달랐다. 혼자 라는 점, 그리고 모든 것을 혼자 해내야 한다는 점 또한 그녀를 힘들게 만들었다. 방송국에서 전화가 와도 "장덕이 없어요" 한 마디만 던지고 전화를 끊을 정도였다. 동생의 이런 안타까운 소식에 현이와 거룩한 성의 리더이자 보컬로서 활동하고 있던 오빠 [[장현]]이 1985년 4월 울산에서 서울로 상경, 장덕에게 현이와 덕이의 재결성을 제안하게 된다. 장덕의 볼 위에 장현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장덕은 오빠가 너무 고마웠다. 결혼해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오빠에게 차마 부탁도 못하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1987년 7월 장덕은 타이틀곡 <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비롯 <이별인줄 알았어요>, <이 노래를 들을때면>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4집《[[이런게 아니었는데]]》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두봉엔터프라이즈를 통해 발매되었으며 재킷에 <골든앨범1집>이란 타이틀이 표기되어 발매되었다. 이 앨범에서는 <이별인줄 알았어요>가 가요톱10 등 가요 순위에 오르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이 시기 장덕의 오빠 장현도 타이틀곡 <마지막 진실>을 비롯 <연민>, <어느날>, <만날 수 없는 사랑> 등의 곡들이 수록된 솔로 데뷔 음반 《마지막 진실》을 발표하게 된다. 수록곡들은 대부분 장덕 작사/작곡의 곡들로 채워져 있어 장덕이 오빠 장현을 위해 만든 앨범으로도 여겨진다.) 9월 장덕은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 3회 [[ABU]](아시아 태평양 방송연합) 가요제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게 되는데, 당시 불렀던 노래 <너를 기다릴거야>는 1989년 발매된 장덕의 정규 6집 《[[예정된 시간을 위해]]》에 재편곡되어 수록되게 된다.
1988년 9월 장덕은 다른 [[싱어송라이터]] 김파, [[김범룡]]과 함께 작업하며 타이틀곡 <얘얘>를 비롯 <내 말 좀 들어요>, <서울의 밤거리>, <나의 꿈 이야기> 등의 곡들이 수록된 정규 5집《[[얘얘]]》를 발표한다. 이 앨범 역시 두봉엔터프라이즈를 통해 발매되었는데 <골든앨범2집>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 앨범에서는 특히 타이틀곡 <[[얘얘]]>가 무대 위 장덕의 귀엽고 깜찍한 [[율동]]과 [[춤]]으로 주목을 받았다.
오빠 장현이 설암으로 쓰러지고 가수활동을 중단하며 오빠의 병간호를 하던 장덕은 점점 수면제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하며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된다. 1990년 1월 21일 장덕은 모처럼 가요 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출연하는데 이것이 장덕이 대중 앞에 선 마지막 모습이었다. 1990년 2월 4일 오전 3시 마포구 염리동 진주아파트 2동 1008호 안방에서 장덕은 다량의 수면제와 기관지 확장제 등 세가지 약을 일시에 복용, 이상증세를 보이며 신음 중이었는데, 이것을 본 의상 담당 문인옥씨가 발견하고 장덕의 아버지에게 연락, 서대문 고려병원으로 옮겼으나 상승작용에 의한 쇼크로 장덕은 세상을 떠나고 만다. 향년 28세였다. 문인옥씨에 따르면 장덕은 불면증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당시 경찰은 장덕이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있는 오빠 장현의 병간호를 오래 해왔으며 최근 이은하 · 조영남 · 최진희 · 변진섭 · 김승진 · 하춘화 등 동료 가수들에게 곡 의뢰를 받고 신곡 작업까지 하는 등 빽빽한 일정으로 무리를 해왔다는 주변의 진술에 따라 과로와 감기증세 때문에 과다복용한 약이 부작용을 일으켜 숨진 것으로 판명했다.<ref>이상열 앵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0/1830767_13421.html 가수 장덕, 수면제 과용으로 사망], 《[[MBC 뉴스데스크]]》, 1990년 2월 4일 작성, 1990년 2월 4일 확인.</ref> 하지만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알려진 그녀의 죽음에 대해 충격과 더불어 자살설까지 나돌며 세간의 관심이 불거졌다. 이후 그녀의 유작 앨범은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것이라는 소문과 함께 호기심을 증폭시켰다. 동생 장덕이 세상을 떠나자 장현은 인터뷰에서 "동생의 죽음이 자신을 대신하는 것 같은 죄책감이 앞선다"고 고백했다. 봉천동 자택에서 거행된 영결식은 가수 이태원의 사회로 남궁옥분 등 50여명의 동료 가수들의 오열 속에 진행되었다. 그 해 6월 장덕 · 장현 남매의 매니저로서 그들이 죽는 날 까지 항상 함께 했던 김철한의 기획하에 [[전영록]], [[이선희]], [[김범룡]], [[박혜성]], [[최성수]], [[진미령]], [[임종환]], 위일청, 지예, 양하영, [[임지훈]] 등 11명의 동료가수들이 참여한 장덕 추모앨범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가 발표된다. 이 음반은 장덕이 생전 발표한 기존 곡들을 리메이크 하고 있는 형태이지만 <일어나> 등 악보로만 남아있던 미발표곡들도 수록되어 있으며 동명 타이틀곡 <예정된 시간을 위하여>는 1990년 한해 총결산 가요순위 톱10 안에 들게 된다. 설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장현]]은 7월 중순경 병세가 악화돼 경기도 성남시 성남병원으로 병원으로 옮겨졌고 혼수상태에서 인공호흡으로 연명했지만 8월 16일 오후 4시 20분경 11살난 아들 원이를 남겨둔 채 어머니가 지켜 보는 앞에서 향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별세하고 말았다.<ref>{{웹 인용 |url =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04533|제목 = ‘불후의 명곡’ 고 장덕 추모 특집…요절한 가수 장덕은 누구?|저자 = 이투데이|날짜 = 2013년 3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14일}}</ref> 남매의 연이은 비극적 죽음을 접한 대중의 충격은 너무나 컸다.
- 효령대군 . . . . 9회 일치
|그림설명 = 효령대군 영정(연주대 효령각 봉안)
그는 10세 시절이던 [[1405년]] '''효령군'''에 책봉되었으며 12세 시절이던 [[1407년]]에 해주 정씨 부인(정역의 딸)과를 가례를 치렀고 17세 시절이던 [[1412년]]에 '''효령대군'''에 진책되었다. [[1417년]] 자신의 [[호 (이름)|아호(雅號)]]이기도 한 '''연강'''(蓮江)이라는 [[법명|법명(法名)]]으로 수계를 받았다. 그는 어릴적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30세 전에 이미 학문과 덕성을 이룩하였고 붓글씨에도 능해 명필이었다고 전해진다. 활쏘기에 능숙하였고 효성이 지극하여 부왕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았다.
슬하에 7남을 두었으며 [[1459년]](세조 4) 정월, 여섯째 아들 원천군(原川君)을 병사한 아우 [[성녕대군]]에게 출계시켜 대를 이어 제사를 봉향할 수 있도록 하였다.
**** 손자 : 무송군, 잠성정, 운림도정, 서림도정, 봉성군, 영신군, 총곡수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 [[관악산]] 연주봉 남쪽 기슭에는 연주암(戀主庵)이라는 사찰이 있는데 관악산의 최고봉인 연주봉(629m) 절벽 위에 [[연주대]](戀主帶:경기도 기념물 제20호)가 자리하고 있다. 그곳에서 남쪽 과천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연주암이 있다.
연주대는 [[이성계]]가 무학대사의 권유로 의상대 자리에 석축을 쌓고 30m<sup>2</sup> 정도의 대를 구축하여 그 위에다 암자를 지은 것이라 한다. 이곳에 특이하게도 효령각을 만들어서 효령대군의 영정([[경기도]] [[문화재]] 제81호)을 봉안하고 있다. 찾는 등산객의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것으로 소문이 나있는 곳이기도 하다.<ref>{{뉴스 인용|url=http://er.asiae.co.kr/erview.htm?idxno=2009042321152119354|제목=연주암 점심공양 300그릇에서500그릇으로 늘어나,관악산 체감경기|성명=이형구 기자|날짜=2009-04-28|출판사=이코노믹리뷰|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0-05-15}}</ref><ref>{{뉴스 인용|url=http://news.mk.co.kr/outside/view.php?year=2009&no=550624|제목=이웃과 함께하는 열린 종단 일궈낼 것|성명=문일호 기자|날짜=2009-10-23|출판사=매일경제|언어=한국어|확인날짜=2010-05-15}}</ref>
* [[효령대군영정]]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81호, 가로70cm X 세로90cm, 경기도 과천시 연주암 봉안
- 상디 . . . . 8회 일치
다만 이 때문에 '''적이라도 여자라면 절대 손을 못댄다.''' 물론 상황에 따라서는 직접 치지 않고 제압하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상대방이 예쁘든 추하든 일단 여자라면 절대 발로 차지 못하고, 하다 못해 죽도록 공격당하면서도 반격을 못 한다. 여자는 절대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이 상디의 원칙인데, 이 원칙은 상디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 깨트리려 해도 절대 깨질 수가 없다.[* 이런 상디지만 [네펠타리 비비]의 적이었던 미스 올 선데이(니코 로빈)이 처음 등장하자 '''총을 겨눈 적이 있었다!'''(13권 114화) 그 이후에 로빈 능력으로 갑판에 쓰러진 다음 "자세히 보니 예쁜 누님이잖아!"라고 한 걸 보면 단순히 비비가 당황해하고 있으니 앞뒤 안 재고 들이댄 것 같다. 애초에 상디는 위스키 피크 편 내내 자느라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는 상태였고, 결정적으로 총을 쏜건 아니니 설정파괴는 아니다. Cp9 칼리파에게도 위협정도는 했었다.] 거의 로봇의 기본 3원칙 수준으로 각인되어버린 수준. 이 때문에 나미로 분장한 [[봉쿠레]]와의 결투와 [[CP9]]의 여성 멤버인 [wiki:"칼리파(원피스)" 칼리파]와의 결투에서는 상당히 고전했다. 칼리파의 경우는 신체능력만으로는 상디가 훨씬 위라서 거꾸로 제압당하기도 했지만, 이것도 상디가 제압만 했지 마무리는 안 했기 때문에 상디가 당한 것이다.[* 만약 상디가 칼리파를 진심으로 상대했다면 1분도 안되서 '''"이겼다! 열쇠 확보 끝!"'''상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빙판에서는 구슬의 시련 담당인 사토리를 여자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에 여자를 패버리는 상디가 나와버렸다(...)] 이런 점을 반영했는지 GBA로 나온 원피스 일곱섬의 대보물이라는 게임에서는 상디가 여성형 적한테 접근하면 '''공격을 못하는 상태이상'''에 걸린다.[* 게임에 의외로 여성형 적이 많은 편이고, 애로사항이 피는 시점은 일행하고 따로 나눠져서 [[알비다]]를 상대해야하는데 같이오는 동료가 [[우솝]], [[wiki:"나미(원피스)" 나미]]라서 실질적으로 상디가 딜러로서 봉인된다.] 또 [[원피스 해적무쌍 시리즈]]에서는 여성 적을 때릴 수는 있는데 가하는 데미지가 1로 고정된다!(...) 키즈나 어택으로는 데미지가 들어가지만 정말 못할 짓인게 사실인 만큼, 상디를 골라서 여성 적이 나오는 스테이지를 하려고 하면 '''경고 메세지가 출력된다.'''
왠지 적들에게 모습이 알려지지 않는 징크스가 있는데 [[바로크 워크스]]와 싸우게 되었을 때 위스키 파크에서 초상화가 그려지지 않거나 Mr.3일당과 전투에서도 열외되었고, [[Mr.2 봉쿠레]]가 왔다 갈 때 일당중 유일하게 그 자리에 없어 본의 아니게 얼굴이 알려지지 않게 되어 [[크로커다일]]을 두 차례나 낚았고, [CP9]와 싸울 때도 혼자 해상 열차에 숨어들어 화려하게 깽판을 쳐주는 등 의도치 않게 중요한 순간마다 히든카드가 되어 대활약. [[에니에스 로비]]에서 깽판쳐서 수배서가 배부 될 때에도 상디만 렌즈 커버를 안 벗겼는지 사진이 새까맣게 나와서 거의 추상화급 몽타주로 현상 수배서 사진이 대체된 상황이라[* 그리고 상디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해상 레스토랑 [[발라티에]]에서는 그 수배서를 받아보고는 주인인 [[제프(원피스)|제프]](그만 쿡쿡거리며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긴 했다)를 제외한'''요리사들 모두가 눈물나도록 배터지게 웃어가며 그 수배서를 손님들에게 광고지 뿌리듯 쫙 돌리기까지 했다.'''] 상디가 계속 '''히든카드'''로서 활동해 나갈 가능성에 힘이 더해져가는 중. 하지만 이렇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것이 없다보니 이 후 [[엠폴리오 이반코프]]에게 자신이 루피의 동료라는 것을 증명하는 데에 무진장 고생했다.[* 이반코프는 이게 어디가 닮았냐고 믿지 않았지만 반대로 [[오즈(원피스)|오즈]]는 이걸 보고 상디를 바라보곤 "판박이네."라고 공격했었다. ~~오즈는 [[바보]]니까~~]
* [[Mr.2 봉쿠레]] - 비비를 구할 겸, 우솝의 고글을 되찾을 겸 맞붙었다. 이 당시 둘은 초면.[* 극장판 8기에서는 메리호에서 이미 만나고 봉쿠레의 오른손을 거부하지만 극장판이니 넘어가자.] 봉쿠레가 나미 얼굴로 변신해서 치사하게 노는 바람에 고전하지만 이내 간파했고, 각종 기술들이 난무한 처절한 대결 끝에 송아지고기 슈트 풀코스로 종결지었다.
> 사람은 마음이다! - Mr.2 봉쿠레의 복사복사 몽타쥬에 대한 반응[* 그런데 그래놓고는 나미로 변신한 봉쿠레에게 쪽도 못쓰고 당할 정도로 고전했다(...) 그래도 복사복사 열매의 맹점을 알고 난 뒤부터는 어느정도 대처했지만.]
- 의천도룡기(영화) . . . . 8회 일치
본래 의천도룡기에서는 오래전의 인물로서 언급만 자주 나오고 직접 등장하지는 않았으나, 여기에서는 소림사에서 무공을 훔쳐배운 뒤, 장삼봉과 대결하여 패배한 것으로 되어있다. 무당산의 계곡에 추락하면서 허리가 부러져서 반신불수의 몸이 되었고, 자신의 몸을 거대한 [[바위]]에 묶어서 내공력으로 날아다니는 기괴한 괴인이 되었다.
괴팍한 성격으로 장무기에게 구양신공을 전수해서 장삼봉에게 복수하려 했으나, 장삼봉을 할아버지처럼 따르는 장무기는 당연히 그런 부탁은 들어주지 않고 들어주려는 척 구양신공만 전수받은 다음 바위를 박살내서 화공두타를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 만들어버리고 소소와 함께 튄다. --악랄하게도-- 구양신공을 익히게 해줬으니 그 은혜로 죽이지는 않겠다고 하고(…).
무당산을 공격했을 때 장무기와 대결, 일단 형식상으로는 이 영화의 최종보스 격. 조민은 장무기에게 3가지 조건으로서 구양신공과 건곤대나이를 쓰지 못하게 하여, 장무기는 장삼봉에게 즉석에서 태극권을 전수받으면서 싸우게 된다. 싸우면서 장삼봉의 시범을 보면서 즉석에서 태극권을 마스터하는 묘사가 굉장히 재미있다. (장삼봉) "네 이름이 뭐냐?" (장무기) "모르겠습니다!" (장삼봉) "됐다" 이러는 대사가 나온다.
원작에서도 찌질캐였지만, 영화에서는 더욱 형편없는 찌질캐로 전락. 주지약과 공모하여 장무기를 속여넘기겨 놀리고, 제자들을 시켜서 구타하게 만드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장무기가 절벽에 떨어졌는데도 사고로 죽었다고 둘러댄다. 조민, 현명이로와 협력하여 장삼봉을 암습했다가 실패하고, 현명이로가 장무기에게 패해서 조민이 물러간 뒤에는 무당산에 남겨진다. 장무기가 죽이려고 하자 필사적으로 목숨만 살려달라고 빈다. 장무기는 송원교 사숙이 대를 이어야 한다며 무공만 폐하고 목숨은 살려주는데, 송청서는 "고맙다 무기야 고맙다"하면서 비굴하게 웃으면서 거듭해서 절을 해대는 비참하고 찌질한 모습으로 전락한다. 원작과는 달리 죽지 않지만 그 대신에 찌질도가 미친듯이 늘어났다.
- 이재학 . . . . 8회 일치
두산 시절에도 순박한 얼굴과 특유의 빨간 볼[* [[http://youtu.be/8iTg4pqyDDQ|XTM 담벼락토크]]에서 투구수가 많이 늘어날수록 얼굴이 빨개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온 영상이 2013년 시즌 8월 7일 LG전에서 9실점했을 때(...)]로 신인 중 귀요미 소리를 들었다. 빨간 볼과 여드름 때문에 선수들 사이에서의 별명은 '능금', '[[딸기]]'. NC 이적 후부터는 아예 딸기가 공식 별명이 되었고, 활약하는 날이면 Strong+Strawberry='''STRONGBERRY'''가 된다. 이 문구는 이재학의 개인 첫 완봉승 기념 티셔츠에 적혀있다. 한때 [[마산 야구장]]에 있는 다이노스 카페에서는 아예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382&article_id=0000188568|딸기주스 '''이재학''']]을 판매했을 정도.[* 2017년 현재는 그 자리엔 '더리터'로 입주 업체가 바뀌었다. 이재학을 팔지 않는 대신 [[박민우(야구선수)|민우에게 바나나]]를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632340520109998&id=241899065820824|팔고 있다.]]]
||창단 첫 완봉승이자 개인 첫 완봉승을 거둔 후.||
||||||<#000000> {{{#ffffff 완투, 완봉기록}}} ||
||<#315288> {{{#ffffff 연도}}} ||<#315288> {{{#ffffff 완투}}} ||<#315288> {{{#ffffff 완봉}}} ||
|| 2013년 || 2완투 || 1완봉 ||
|| 2014년 || 1완투 || 0완봉 ||
|| 2018년 || 1완투 || 0완봉 ||
- 정도복 (고려) . . . . 8회 일치
'''정도복'''(鄭道復)은 [[고려]]시대 말기, [[조선]]초기의 문신이다. [[고려]] 말에 과거에 급제하여 승선, 상시 등을 지내고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으며 밀직제학, 한성부우윤,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했으며 형 [[정도전]]이 암살되자 관직을 사퇴하고 성주 유학교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 뒤 인녕부사윤에 이르렀다. 본관은 [[봉화 정씨|봉화]](奉化)이고 자(字)는 내지(來之)이고 호(號)는 일봉(逸峯)이다. 형부상서(刑部尙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며, [[정도전]](鄭道傳)의 친 아우이다.
고려 충정왕 3년(1351년) 영주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의 나이 16세에 양친 부모님을 모두 잃고, 큰형인 삼봉 [[정도전]]이 묘막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우연히 처음으로 [[성리학]]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20세 때까지 4년여간 [[성리학]]을 수학하였다. 이후 진사시(進士試)에 올랐으며, 우왕 11년에 지공거 염국보(廉國寶)와 동지공거 포은 [[정몽주]]가 주관한 과거에 제11위로 입격하였다.<ref>당시 우현보의 아들 우홍명(禹洪命)이 장원급제하고 함부림(咸傅霖), 변계량(卞季良), 한상덕(韓尙德), 박석명(朴錫命), 권원(權遠), 김자지(金自知), 이맹균(李孟畇) 등 기라성 같은 인물 33인이 급제한 과거에서 그는 제11위였다.</ref>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공양왕 2년(1390년)에 승정원 좌승선이 되었다. 그 뒤 [[고려]]에서 상시(常侍)에 이르렀다. [[1392년]] 형 [[정도전]] 등과 함께 조선 건국에 참여하였다. 조선이 개국 되면서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폈으나, 아직 초창기여서 불교를 숭상하는 구습이 그대로 성하고 있어, 선생은 유생들에게 큰형 삼봉선생이 지은 『심문·천답』과 『심기리』3편을 강석하는 등 불교의 폐단을 바로잡음에 양촌(陽村) 권근(權近)과 더불어 힘썼으며, 유학(儒學)을 진흥시키고 사회 기강을 잡는데 기여하였다.
얼마 아니 되어 밀직제학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올라 성균관대사성을 겸임 했으며, 태묘공신의 봉호를 받았다. [[1398년]] 왕자 난 때 큰형 삼봉선생이 화를 입은 뒤 문하찬성사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이후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 태종 3년(1403)에 성주 유학교수(星州儒學敎授)에 부임하여 7년여 동안을 교육에 힘쓰다가 동왕 9년(1409) 8월에 인녕부사윤(仁寧府司尹)으로 부임하였다.
[[분류:봉화 정씨]][[분류:조선의 공신]][[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태종무열왕 . . . . 8회 일치
즉위 직후 무열왕은 아버지 [[김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공주]]를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봉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였으며, 5월에는 이방부령(理方府令) 양수(良首) 등에게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제정하게 하였다.<ref name="신라-654"/> 무열왕 2년([[655년]])에는 문희 소생의 맏아들 법민(法敏)을 태자로 삼고, 나머지 문희 소생의 왕자들에게도 관등을 수여하였다. [[대각간|대각찬]](大角湌) 김유신에게는 딸 [[지소부인|지소공주]]를 시집보내 중첩된 혼인관계를 이루었다.<ref name="신라-655">《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ref>
당에도 즉위를 알리는 사신을 파견하여, 무열왕 즉위년에 [[당 고종|고종]](高宗)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 신라왕의 책봉을 받았으며,<ref name="신라-654"/> 무열왕 2년(655년)에 당에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과 더불어 군사를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의 33개 성을 탈취하였음을 전하면서 구원을 요청하였고, 당은 3월, 영주도독(營州都督) [[정명진]](程名振)과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ref name="신라-655"/> 또한 무열왕 3년([[656년]])에는 {{출처|날짜=2018-06-30|1=신라의 개국 공신인 사로 6촌장을 왕으로 추존하였고,}} 당에서 귀국한 김인문을 [[군주]](軍主)로 삼았으며, 가을 7월에는 김문왕을 다시 당에 보내 조공하게 하였다.<ref name="신라-656">《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3년(656)</ref> 귀국한 뒤 문왕은 무열왕 5년([[658년]]) 정월에 부왕으로부터 집사부의 [[중시]](中侍)로 임명되고,<ref name="신라-658">《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5년(658)</ref> 김인문도 무열왕 6년([[659년]]) 여름 4월에 백제를 치기 위한 원병 파병을 요청하는 사신으로서 당에 파견되는 등,<ref name="신라-659">《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6년(659)</ref> 친족 중심의 내각을 구성하여 왕권을 안정시켰다. 즉위에 절대적으로 기여한 김유신에 대해서는 무열왕 7년([[660년]]) 정월에 [[상대등]](上大等)으로 임명해<ref name="신라-66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ref> 왕권을 보다 전제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삼국사기》는 태종 무열왕의 무덤이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있다고 기록하였으며, 지금의 경주시 서악동 842번지의 선도산 동쪽 구릉에 소재한 서악리 고분군의 다섯 고분 가운데 가장 아래에 위치한 원형봉토분이 태종 무열왕의 능으로 비정되고 있다. 봉분의 면적은 14,169m<sup>2</sup>로, 신라의 왕릉 가운데 피장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몇 안 되는 무덤으로서 가치가 있으며 [[1963년]] 1월 21일에 대한민국 사적 제20호로 지정되었고, [[1972년]]부터 [[1973년]]에 걸쳐 주변 정비가 이루어졌다. 굴식 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으로 추정되는 이 무덤은 다른 왕릉에 비해 봉분 장식이 소박한 편으로 무덤 주위에 자연석으로 둘레돌을 돌렸다.
[[성덕왕]](聖德王)은 태종 무열왕의 명복을 빌고자 [[봉덕사]](奉德寺)를 지었으며,<ref name="유사-성덕왕">《삼국유사》 권제2 기이 성덕왕</ref> [[혜공왕]](惠恭王)은 오묘(五廟)를 정하면서 김씨로서 처음으로 왕이 된 [[미추왕]](味鄒王)과 더불어,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을 대대로 헐지 않는 신주(世世不毁之宗)로 삼았고,<ref>《삼국사기》 권제32 잡지 제1 제사(祭祀)</ref> 이것은 [[애장왕]] 2년([[801년]])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만 따로 떼어 모시는 사당을 지어 신주를 옮길 때까지 계속되었다.<ref>《삼국사기》 권제10 신라본기 제10 애장왕 2년(801)</ref> 9세기 중엽 신라의 문장가였던 [[최치원]](崔致遠)은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寺郞慧和尙白月普光塔碑)』([[890년]]경 건립)에서 무열왕의 8세 손으로 당에 유학하여 불법을 배우고 돌아온 승려 [[낭혜화상]]의 행적과 무열왕의 업적을 교차대비시켜 "이때(태종 무열왕의 입당 후 귀국)부터 우리는 한 번 변하여 [[노나라]]가 되었다(自玆吾土一變至於魯)", "두 적국(敵國)을 평정하고 문명에 접하게 하여 주셨다(平二敵國俾人變外飭)"고 하여 태종 무열왕이 신라 국내의 제도를 당풍으로 개편하여 '문명화'시키고, 당시 신라뿐 아니라 중국에게도 적국으로 여겨지던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여 평화를 가져왔다고 찬양하였으며, 또한 [[진성여왕]] 7년([[893년]])에 당의 태사시중에게 보내는 글에서 옛날 고구려와 백제의 강성함과 당 태종의 고구려 침공, 그 직후 무열왕이 당으로 들어가 수교를 맺고 원병을 청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과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에 의해 세워진 [[발해]]와 당, 신라의 충돌 등의 사실들을 열거하면서 "3백여 년 동안 한쪽 지방은 무사하고 넓은 바다가 편안한 것은 곧 우리 무열대왕의 공로"라고까지 평가하였다. [[고려]]나 [[조선]]의 유학자들도 대부분 이와 비슷한 인식이었다.
* 신채호, 《조선상고문화사 (독사신론, 조선사연구초, 사론, 외)》 (박기봉 역, 비봉출판사, 2007)
- 한교원 . . . . 8회 일치
인천 입단 후 한교원은 성실한 훈련 태도로 [[허정무]] 감독에게 눈도장을 찍었고 데뷔시즌 초반부터 꾸준히 출전기회를 잡는 행운을 얻는다. 당시 동포지션의 경쟁선수들이 동반 부진, 부상 등에 빠졌던 이유도 있어서 행운이라 한 것. 경기마다 좋은 모습을 보여주며 출전시간을 점점 늘려나가더니 인천 공격진에 없어서는 안 될 선수로 부상한다. [[허정무]] 감독이 사임하고 [[김봉길]]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은 후에도 신임은 여전했다. 한교원의 2011 시즌 스탯은 '''29경기 3골 2도움'''. 공격포인트가 부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교체출전 또는 교체아웃된 경기가 많았고 센터백으로 뛰는 등 포지션 변경이 많았음을 감안해야 한다. 게다가 인천구단 자체가 이해에 빈공에 시달려 한교원이 공격포인트 1위였다.
이에 전북은 한교원에게 [[http://sports.media.daum.net/sports/soccer/newsview?newsId=20150524152117735|2000만원의 벌금과 80시간의 사회봉사를 내렸다.]]--요즘도 봉사활동했던 영아원을 가끔 찾아간다고 한다.-- 본인 역시 크게 잘못을 뉘우치고 박대한에게 전화를 해 사과했으며 박대한 역시 이를 받아들이고 다음 경기에서 악수를 하고 사과를 끝내기로 했다.
전북구단은 베이징 궈안과의 AFC 챔피언스리그 16강 2차전 명단에서 그를 제외시켰고 자체적으로 벌금 2,000만원, 사회봉사 80시간의 징계를 내렸다. 프로축구연맹은 28일 열린 상벌위에서 6경기 출정정지와 제재금 600만을 부과했다. 다이렉트 퇴장으로 인한 2경기 출장정지까지 합쳐 총 8경기 출장정지에 구단 자체징계까지 합쳐 벌금이 2,600만원, 사회봉사 80시간이다. 팬들은 한방에 1,300만원하는 주먹질이라며 혀를 찼다. 연봉의 거의 절반이 날아갔다.
* 위 논란과 관련해 '''한퀴아오''' '''봉동꿀주먹'''이란 별명이 붙었다.특히 [[전북 현대 모터스 마이너갤러리|전북갤]]에서는 아예 우리꿀이라 불리며 전북선수들이 거친파울을 당할때마다 우리꿀 불러오라는 글들이 올라온다
- 김영철(배우) . . . . 7회 일치
MBC주말드라마 [[가화만사성(드라마)|가화만사성]]에서는 [[봉삼봉]] 역할을 맡았는데 따뜻하지만 무뚝뚝한 전형적인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연기했다. 가족들과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마음의 어긋난 벽이 무너지고 마침내는 아내를 위해 마음을 표현 방법에 있어서도 자상하게 변하는 봉회장 그자체로 열연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큰 울림을 이끌었다. 다만 중간중간 극중 캐릭터 붕괴로 이기적이고 자기주장만 관철하는 부분도 많이 나왔는데, 그런것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2017년 초에는 KBS 주말드라마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타이틀 롤인 아버지 변한수 역을 맡게 되었다.[* 드라마 오프닝에도 첫 등장.] 여기서는 평생 일과 가족밖에 모르고 산 그야말로 부정의 끝판왕. 과거 카리스마를 겸비한 강한 역할을 많이 맡던 김영철이 이런 가정적인 캐릭터도 잘 소화하는 것을 보아 그의 연기폭이 얼마나 넓은지를 알 수 있다. 주로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많이 맡았는데도 불구하고 자상한 아버지 역할에 아무 위화감이 없다. 여담으로 이 극에서 딸인 변혜영 역은 이전 출연작인 가화만사성에서도 김영철의 딸 [[봉해령]]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소연(배우)|김소연]]이 맡을 예정이었으나 하차하고 대신 [[이유리(배우)|이유리]]가 그 역을 맡게 되었다. 회차가 거듭될수록 숨겨진 비밀이 드러나는데.. 여담으로, 자신을 생부로 착각하는 [[이준(배우)|이준]](안중희 역)의 모친이 [[김서라]](안수진 역). 두번의 [[공주의 남자|전]][[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남자|작]]에서 '''아내'''..
[[삼시세끼]]에서 아들(?) [[손호준]]과 밤에 옥순봉에서 입수를 했다(...) [[이순재]]를 깍듯이 모시면서 동시에 후배 연기자들을 따뜻한 마음으로 챙기고 보살피는 모습을 보여주어 시청자들의 호평을 받았다.
|| 2016년 || '''[[가화만사성(드라마)|가화만사성]]''' || MBC || '''[[봉삼봉]]''' 역 ||
- 김충공 . . . . 7회 일치
[[헌덕왕]]과 [[흥덕왕]] 때의 실권자였고, [[823년]] [[김헌창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 [[흥덕왕]]의 아들이 [[당나라]]를 다녀오다가 사고로 죽자 그가 [[태자]]로 임명되었지만 그도 [[흥덕왕]]보다 앞서 사망하였다. 아들 [[김명]]은 [[838년]](희강왕 3) [[1월]] 정변을 일으켜 [[희강왕]]을 죽이고 자립하여 민애왕이 되었다. 딸 정교(貞矯)는 희강왕비 문목부인(文穆夫人)이 되었다. 아들인 민애왕이 즉위하면서 선강대왕(宣康大王) 또는 갈문왕(葛文王)으로 추봉되었다. 일설에는 [[흥덕왕]]의 비 정목왕후가 그의 딸과 동일인이라는 설도 있다.
[[원성왕]]의 손자이며, [[민애왕]]의 아버지이고, [[김인겸|혜충태자(惠忠太子) 인겸(仁謙)]]의 넷째아들이다. 아버지 인겸은 형 [[소성왕]]이 즉위하면서 왕으로 추봉되어 [[혜충대왕]]이 되었다. [[헌덕왕]], 김숭빈(金崇斌), [[흥덕왕]], 김제옹(金悌邕)의 동생이 된다. 보통 그는 인겸의 넷째 아들로 보나, 신라 김씨 선원세보에 의하면 인겸의 아들 [[소성왕]]의 셋째 아들이며 [[애장왕]], [[김체명]]의 동생이라 한다.
[[831년]] [[흥덕왕]]의 왕자 김능유(金能儒)가 흥덕왕의 명을 받들어 9명의 승려와 함께 [[당나라]]에 진봉사로 갔다가, 이 해 7월 돌아오던 도중 바다에 빠져 익사하였다. 흥덕왕은 후사가 없었고 그가 태자로 책봉되었다. [[835년]] 여름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출생년대는 알려져있지 않으며 사망 원인도 역시 미상이다.
그의 딸은 [[희강왕]]의 비인 [[문목왕후]](文穆王后)이고, 아들인 [[김명]](金明)은 [[희강왕]]을 추대했다가 나중에 희강왕을 자살하도록 위협하고 스스로 민애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민애왕]]이 즉위한 뒤 아버지인 김충공은 선강대왕(宣康大王)으로 [[추봉]]하고, 어머니인 [[귀보부인]](貴寶夫人)을 선의태후(宣懿太后)로 [[추봉]]하였다. 일설에는 [[갈문왕]]으로 추봉했다는 설이 있다. 《삼국유사》에는 선강[[갈문왕]](宣康葛文王)이라는 칭호도 나타난다.
- 몽키 D. 루피/작중행적 . . . . 7회 일치
이후 금남의 섬 [[아마존 릴리]]에 떨어진 루피는 형 [[포트거스 D. 에이스|에이스]]가 임펠 다운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고, [[보아 행콕]]의 도움으로 임펠 다운에 잠입한다. 그리고 에이스가 갇혀있는 LEVEL 6로 가던 중 LEVEL 1에서 [[버기(원피스)|버기]], LEVEL 2에서 [[Mr.3]], LEVEL 3에서 [[Mr.2 봉쿠레]]와 합류해 임펠 다운을 휘젓는다. 그러다 LEVEL 4에서 만난 임펠 다운의 형무소장인 [[마젤란(원피스)|마젤란]]의 [[독독 열매]]의 능력 앞에 패배, 맹독에 중독된 채 LEVEL 5로 이송되고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 때 [[Mr.2 봉쿠레]]는 '친구를 죽게 할 순 없다'며 LEVEL 5까지 내려와 감방에서 그를 꺼내주고 기적을 일으킨다는 전설의 오카마를 찾아 루피를 해독시켜주려 돌아다니다가 계속되는 늑대들의 습격으로 결국 쓰러진다. 이 때 루피가 무의식적으로 패왕색 패기를 발동. 늑대들을 쫓아낸 뒤 쓰러진다.
친구를 감싸는 모습에 감동한 오카마 왕 [[엠폴리오 이반코프]]는 빠른 치료를 원하는 루피에게 '10년 분의 수명을 깎아' 자기치유력을 급격히 활성화시키는 방법을 시술한다. 본래 사형 시간을 넘겨서야 회복될 몸이었지만, 봉쿠레의 응원과 근성으로 20시간만에 회복에 성공하고 LEVEL 6로 향하지만 에이스는 이미 사형장으로 이송된 상태였다. 여기서 임펠 다운을 벗어나기 위해 크로커다일과 [[징베]]를 파티에 합류시킨다.
크로커다일, 징베, 루피, 이반코프, [[이나즈마(원피스)|이나즈마]]라는 전 칠무해 2명과 혁명군 간부 2명이 포함된 무지막지한 팀이 결성되자 임펠 다운의 수감자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광대 버기가 이 혼란을 이용, 각 층의 죄수들을 풀어 대혼란을 야기시킨다.
LEVEL 3으로 가는 길목에서 마주친 [[한냐발]]을 때려 눕히지만 끝까지 버티고 계속 일어나는 한냐발에게 발이 묶인다. 그러다 [[마샬 D. 티치|검은 수염]]의 뒷치기에 한냐발이 당해 쓰러지게 되고, 루피는 자신이 [[자야]]에서 만난 남자가 바로 검은 수염이란 것을 알게 된다. 분노한 루피는 검은 수염에게 싸움을 걸지만 [[징베]]의 설득으로 일시 휴전 상태에 들어간다. 임펠 다운을 벗어나기 직전, 마젤란에게 쫓겨 수세에 몰리고 Mr.2 봉쿠레의 희생으로 정의의 문을 넘어 임펠 다운을 탈출한다.
전세계에서 가장 강한 자들이 모인 거대한 전쟁 속에 단지 위대한 항로의 반을 돈 해적들 중 [[루키]] 취급을 받는 정도에 불과한 루피가, (원군은 있었지만) 동료는 아무도 없이[* 사실 루피가 동료들과 떨어져 단독으로 움직이는 일이야 자주 있는 일이지만 그런 경우는 동료들과 일정 거리 내에서 흩어져서 같은 목적을 위해 행동을 하는 것이다. 동료들과 어떠한 협력도 이룰 수 없는 상황에서 홀몸으로 싸운 것은 정상결전이 처음이었다.] 단신으로 뛰어 든 그야말로 태풍 속에 개미 한 마리와도 같은 에피소드였다. 그러나, 세계 최강의 남자인 흰 수염과 그의 해적단 2번 대대장인 [[포트거스 D. 에이스]]가 죽은 이 전투에서, 그것도 해군 3대장과 한 번씩은 근거리에서 전투를 벌이고 살아남았으니, 루피의 천운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려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게다가 참전 당시부터 루피는 임펠 다운의 연이은 싸움에 의한 데미지와 피로, 결정적으로 마젤란의 독에 죽다 살아나 며칠간의 회복기가 필요한 것을 이반코프의 텐션 호르몬으로 간신히 버티는. 즉 쓰러져야 정상인 몸을 반 근성으로 억지로 움직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봉에 서서 대장들과 겨루고 에이스 구출까지 하는 활약을 했으니 사실 '개미'로 치부될 전력은 아니었다. 또한, 스모커와 같은 자연계 능력자가 아닌 한, 루피가 그렇게 적에게 밀린 적은 없고 네임드가 나서지 않는 한 꽤 날뛴 편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기어도 거의 쓰지 않았다. 적어도 당시의 루피는 거인족 중장인 호리모 중장을 기어3로 한방에 쓰러뜨렸기에 패기는 못썼지만 적어도 거인족 중장 수준은 되었다.[* 하지만 거인족 중장들 치고 좋은 꼴 본 놈은 아무도 없었다.] 거기에 이 전투가 전세계에 생중계되고, 비밀로 해야 했던 루피의 혈통까지 알려졌기에 차후 루피의 행보는 이전과는 다르게 될 것이다.
정상결전이 끝나고 정신을 차렸을 때, 자기보다 강한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심지어는 뭐가 해적왕이냐고 스스로를 부정했다.''' 사실 에이스랑 동료들을 못 지키고, 봉쿠레를 자신 때문에 또 한 번 희생시켰다. 심지어 에이스는 마린포드에서 최후를 맞이했고, 친할아버지인 가프에게 주먹을 날렸다. 루피로서는 너무나 괴로운 사건들이 계속 일어났고, 언제나 자신만만한 루피가 정말 처절하게 절망했다. 이런 사실은 샤본디에서 동료를 모두 잃은 일이 첫 번째 좌절이다. 다만 샤본디에서 동료들과 흩어지고, 잠시도 못 쉬고 정상결전까지 겪었다. 결국 좌절을 곱씹을 겨를도 없지만, 이때는 모두가 살아남았으니까 본인이 겪는 부담은 전혀 다르다. 심지어는 에이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끔 하고 몸을 해치는 일을 말리려는 징베와 몸싸움을 벌일 정도로[* 사실 징베 입장에서도 어지간히 속이 상할 만한 상황이다. 흰수염 본인과 에이스 외에도 흰수염 해적단의 수많은 해적들이 루피 하나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정작 그 본인은 상처가 벌어지는데도 날뛰어 대서 혼자 개죽음을 겪으려 하는 상황이니 징베까지 덩달아 격동해서 루피를 죽이려고 까지 했었다.] 불안정한 상태였다. 징베가 '''"잃은 것만 보지말고 남아 있는 것도 봐라! 너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도 있지 않느냐!"'''고 일갈하자 울며 날뛰던 루피도 '''[[밀짚모자 일당|사랑스런 동료들]]'''을 떠올리면서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서 '자기 해적단'을 남아있는 것 한 가지로 세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 한 명을 떠올릴 때마다 손가락을 일일히 하나씩 꼽아가며 세고는 남아 있는 것이 잔뜩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모습이 참으로 루피다운 모습.
- 문무왕 . . . . 7회 일치
[[진덕여왕]] 4년([[650년]])<ref group="주">[[진덕여왕]] 4년부터 [[신라]]의 독자 연호가 아닌 [[당나라|당]]의 연호를 쓰기 시작했다.</ref>에 [[당나라|당]]에 사신으로 파견돼 [[당 고종|고종]]에게 〈[[한국의 삼국시대 시가#치당태평송|치당태평송]]〉(致唐太平頌)을 바쳤다.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법민에게 태부경(太府卿)이라는 벼슬을 내렸다.<ref name="삼국사기-65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진덕왕 4년(650)</ref> [[654년]] 아버지 [[김춘추]]가 [[진덕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뒤 [[파진찬]]으로써 [[병부령]]직에 임명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1">《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년(661)</ref> [[655년]] 태자로 봉해졌다.<ref name="삼국사기-655>《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2년(655)</ref> [[태종무열왕]] 7년([[660년]])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칠 때, [[김유신]]과 함께 5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멸망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60">《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 무열왕 7년(660)</ref> 이어 [[태종무열왕]] 8년([[661년]]) 부왕이 승하하자 곧 즉위하였다.
2년([[662년]]) 봄 정월에 당은 문무왕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상주국(上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 [[신라]]왕으로 책봉했다. 2월에는 [[탐라국]] 임금 도동음률(徒冬音律)이 항복해 와 신라의 속국이 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2"/> 이때 [[신라]]에서는 [[백제]]에 주둔하고 [[고구려]]를 치는 당군의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식량을 보내고 옷을 보내고 하느라 창고에 쌓아둔 양식은 고갈되고, 농사 때를 망쳐 백성들이 풀뿌리도 오히려 부족할 지경이었지만, 반대로 [[웅진도독부]]에 있는 당군의 군량 창고에는 쌀이 남아돌다 못해 썩어나고 있었고 [[웅진도독부]]에서는 그 뒤로도 수시로 [[신라]]에 군량을 요구하였다. 3월에 내린 대사면령은 이러한 가운데서 오는 민심이반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고 추정된다.{{출처|날짜=2018-06-27}} 7월 왕은 왕제(王弟) [[김인문|인문]](仁門)을 사신으로 당에 보내는 한편,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지라성(支羅城)과 윤성(尹城), 대산(大山)과 사정(沙井)의 [[백제]] 목책을 깨뜨리고 [[신라]]군과 합세해 진현성(眞峴城)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신라]]의 군량수송로를 열었다. 8월<ref group="주">《[[동사강목]]》에는 7월로 표기됨</ref>에는 [[김흠순|흠순]] 등 19장군을 시켜 내사지성(內斯只城)의 [[백제]] 부흥군을 깨뜨렸고, 대당(大幢) 총관(摠管) 진주(眞珠)와 남천주(南川州) 총관 진흠(眞欽)이 병을 핑계로 한가로이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는다는 죄를 물어 처형하고 그 일족까지 멸했다.<ref name="삼국사기-662"/>
5년([[665년]]) 가을 8월에 왕은 당의 칙사 유인원,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웅진 취리산<ref group="주">지금의 충남 공주시 연미산(鷰尾山)</ref>에서 모여 다시 맹약을 맺었다. 백마를 잡아 그 피를 마시고 “서로의 경계를 넘어 침범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골자로 한 맹약의 글은 유인궤가 지은 것으로 제물들은 취리산 제단의 북쪽에 묻고, 맹약문은 신라의 종묘에 보관되었다.<ref name="삼국사기-665">《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5년(665)</ref> 또한 그 회맹한 지점을 백제와 신라의 경계로 삼고 푯말을 세워 백제와 신라 양국의 국경으로 삼았다.<ref name="삼국사기-671"/> 이는 전쟁이 끝난 뒤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에 귀속된다는 당초의 약속을 어긴 당의 일방적이고 독단적인 처사였다. 같은 달, 왕자 정명(훗날의 [[신문왕]])을 태자로 책봉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65"/> 겨울에는 일선·[[거열주|거열]] 두 주의 백성들을 시켜 군수물자를 [[명주 (9주)|하서주]]로 운반하게 하면서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했다.<ref name="삼국사기-665"/>
10년([[670년]]) 봄 정월, 당 고종은 신라의 사신 김흠순에게는 귀국을 허락하였지만 김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마침내 감옥에서 죽었다. 이것은 신라가 백제의 땅과 유민을 취한 데 대한 보복 조치였다.<ref name="삼국사기-670">《삼국사기》 권제6 신라본기 제6 문무왕 10년(670)</ref>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각각 병사 1만 씩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옥골(屋骨)에 이르렀다. [[4월 4일]] 개돈양(皆敦壤)에 주둔하고 있던 [[말갈족]]<ref group="주">당나라의 지휘를 받고 있었다</ref>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후 당나라가 병력을 지속적으로 충원하자 백성(白城)<ref group="주">지금의 [[경기도]] [[안성]] 일대</ref>으로 후퇴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6월]]에는 고구려 대형(大兄) [[검모잠]]이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검모잠은 [[안승]](보덕왕)을 왕으로 추대하고 신라에 충성을 약속했다. 문무왕은 이들을 금마저(金馬渚)<ref group="주">지금의 [[전라북도]] [[익산]]</ref>에 머물게 하였다. 7월, 백제의 남은 세력이 배반할까 의심하여 대아찬 김유돈(金儒敦)과 옛 백제의 주부(主簿) 수미(首彌)·장귀(長貴)를 웅진도독부로 보내, 신뢰 차원에서 양측간의 인질 교환을 제의했다. 웅진도독부는 이에 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군사와 말을 모아 신라군에 대한 야간 기습을 수차례 반복했다.<ref name="삼국사기-671"/> 한편 김흠순 등이 귀국해 당에서 가져온 지도를 바쳤는데, 그 지도는 신라가 차지하게 되어있던 옛 백제령을 모두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다.<ref name="삼국사기-671"/> 신라는 이를 빌미로 앞서 웅진도독부에서 파견한 백제의 사마(司馬) 예군(禰軍)을 첩자의 혐의를 물어 억류하고, 군사를 일으켜 웅진도독부를 쳐서 땅을 빼앗았다. 이때 신라 장수들 중 싸우지 않고 퇴각한 이들도 있었는데, 이들에 대해서는 특별히 처벌 대신 면직으로 매듭지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같은 달,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했다.<ref name="삼국사기-670"/> 12월, 한성주(漢城州) 총관(摠管) 수세(藪世)가 반란을 도모하려 하자, 대아찬(大阿湌) 진주(眞珠)를 보내 목을 베었다.<ref name="삼국사기-670"/>
13년([[673년]]) 2월부터 9월까지, 문무왕은 당의 침략에 대한 대응으로 서형산성(西兄山城)과 사열산성(沙熱山城)을 비롯해, 국원성(國原城)<ref group="주">옛 완장성(薍長城)</ref>, 북형산성(北兄山城), 소문성(召文城), 이산성(耳山城), 수약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ref group="주">질암성(迭巖城)이라고도 한다.</ref>, 달함군의 주잠성(主岑城), 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삽량주(歃良州)의 골쟁현성(骨爭峴城) 등 여러 성을 쌓게 하고, 대아찬(大阿飡) 철천(徹川) 등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게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3">《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3년(673)</ref> 한편 이 사이에 국가의 원로이자 재상이었던 태대각간 김유신이 죽고, 아찬 대토(大吐)가 모반하여 당에 붙으려다 발각되어 처형당하는 등의 사건도 일어났다.<ref name="삼국사기-673"/> 거듭되는 전쟁에서 신라는 말갈·거란의 병사까지 끌어들인 당군과 맞서 아홉 번의 전투를 통해 2천 명을 죽이고, [[임진강|호로하]](瓠瀘河)와 왕봉하(王逢河)에서도 당군을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ref name="삼국사기-673"/> 겨울에 당병은 고구려의 우잠성(牛岑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거란·말갈의 병사들은 대양성(大楊城)과 동자성(童子城)을 쳐서 멸했다.<ref name="삼국사기-673"/> 한편 신라는 주(州)와 군(郡)에 처음으로 외사정(外司正)을 두고, 백제 멸망 뒤 [[무열왕]]에 의해 폐지되었던 수병제(戍兵制)를 부활시키는 등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해나갔다.<ref name="삼국사기-673"/>
14년([[674년]]) 1월 당에서 숙위하다 귀국한 대나마 덕복(德福)이 가져온 신력(新曆)을 반포했다.<ref name="삼국사기-674">《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4년(674)</ref> 같은 달 문무왕이 고구려 유민을 받아들이고 백제령을 지배하에 두는 것을 보고 화가 난 고종은 조서(詔書)로 문무왕의 관작을 깎아 없애려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4"/> 왕의 동생으로 당에 머무르고 있던 우효위원외장군(右驍衛員外大將軍) 임해군공(臨海郡公) 김인문을 신라왕에 봉하면서, 그를 귀국시키는 편에 많은 군사를 딸려보내 대규모로 신라를 치려 했다.<ref name="삼국사기-674"/>{{refn|group=주|인문은 이를 간곡히 사양했으나 고종이 들어주지 않았다.<ref name="김인문">《삼국사기》 권제44 열전 제4 김인문</ref>}} 문무왕은 8월에 서형산(西兄山) 아래에서 대규모 사열식을 벌이고, 9월에는 영묘사(靈廟寺) 앞길에서 다시 대규모 사열식과 함께 아찬 설수진(薛秀眞)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하는 등의 군사훈련을 실시한다. 그리고 이 달에 고구려왕 안승을 다시 [[보덕국|보덕왕]]으로 봉했다.<ref name="삼국사기-674"/>
- 박영진(코미디언) . . . . 7회 일치
그리고 성공한 대박 코너론 저 위의 대사로 히트친 [[집중토론(개그 콘서트)|집중토론]]과 본격적으로 날리기 시작한 [[박대박]], [[춘배야]] 등이 있으며 [[봉숭아 학당(개그 콘서트)|봉숭아 학당]]에서의 [[이수근]]의 궤변론자 은사역과 [[뿌레땅뿌르국]]으로 한창 주가를 날렸다.
특히 봉숭아 학당의 궤변론자는 [[디시인사이드]] [[코미디프로그램 갤러리]]에서 아주 폭발적으로 반응이 좋은데 애칭은 '디스박'. 어느 정도냐 하면 봉숭아 학당에 박영진이 등장하면 '디스박 ㅋㅋㅋ' 로 2페이지 가량이 도배된다.
허경환이 봉숭아 학당에서 '있는데가이' 역할에서 퇴출당하자 조금씩 주춤했다. 게다가 PD는 재미도 없는 [[박휘순]]과 박영진을 연결시켜 재미를 보았다[* 처음에는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최근은 그나마 좀 나아진 상태인 듯.][* 박휘순과 박영진의 개그코드가 너무나도 차이가 나서 그런 것이 아닐까 싶다.]. 설상가상으로 현재 허경환이 [[두캅스]]의 기믹으로 화려하게(?) 귀환해서 이때까지 허경환을 괴롭힌 업보를 톡톡히 받고 있는 상태이며 2010년 2월 18일 자 해피 투게더에서는 박성광과는 달리 크게까지는 활약하지 못했다.
2010년 한때 봉숭아 학당에서 엑스파일 요원이라는 캐릭터로 활동했는데 그 '엉뚱한 내용 트집 잡는' 기믹은 여전했다. 할 말 다 하고 "정말(정마알) 미스테리합니다" 를 말하는 게 포인트. 겨울에 들어서는 졸업생이라는 캐릭터를 들고 왔다. "후배들아, ~같은 전형적인 방법으로는 못 ~한다! 나는 ~해서 ~했다(어이없는 예시, 태클 걸리면) 이렇게 세상을 모른다!" 라는 레파토리.
* [[봉숭아 학당]] - [[이수근]]의 [[은사]] 役, 역궤변론자 役, [[엑스파일]] 요원 役, 졸업생 役.
- 봉화군 . . . . 7회 일치
{{좌표|36.8931128|128.732575|type:city|display=title|format=dms}}<!--봉화=36°53′35″ 128°43′57″-->
|이름 = 봉화군
봉화읍'''||奉化邑||4,722||10,596|| 74.32||https://upload.wikimedia.org/wikipedia/ko/thumb/c/cc/Bonghwa-map.png/450px-Bonghwa-map.png
봉성면'''||鳳城面||1,105||2,255|| 66.69
춘양면 (봉화군)'''||春陽面||2,365||4,588||167.30
[[분류:봉화군 출신|봉화 출신 인물]][[분류:경상북도의 군]][[분류:1895년 설치]][[분류:1914년 폐지]][[분류:1914년 설치]]
- 이정재(영화배우) . . . . 7회 일치
우습게도 청룡영화상의 저주인양 거의 10년간 암흑기가 지속된다. 물론 이영애랑 작품했던 선물도 잘되고[* 무려 [[김태희]]가 이영애의 아역으로 나온 영화다] 태양은 없다의 홍기역의 연장선상에 있는 [[오! 브라더스]]는 [[이범수]]와 함께하면서 잘된작품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지만 둘다 아주 크게 대박난 작품은 아니었다. 문제는 이 동안에도 활동을 활발히 했다. 물론 90년대 중후반에 비해서 줄어들긴 했지만 꽤나 많은 일을 했는데 청룡영화상을 받은 해에 개봉했던 [[이재수의 난]]은 배우들 모두가 고생은 고생대로 했음에도 흥행 참패. 당대의 여배우였던 [[심은하]]의 은퇴작 인터뷰도 망했다. 장진영과 함께한 오버더레인보우, 이미연과 함께한 [[흑수선]], 곽경택 감독이 천만을 노리고 [[장동건]], 이정재를 캐스팅해 만들었던 [[태풍]]은 대대적인 홍보 및 밀어주기까지 했으나 500만에 그쳤다. 문제는 제작비가 어마어마한 작품이라 500만도 적자였다는 것. 이 후 [[에어시티]]로 복귀하면서 드라마에서라도 재기를 꿈꿨으나 [[최지우]]-[[이진욱]]만 연결해주고 끝났고 [[커피프린스 1호점]]의 감독이 각잡고 만든 [[트리플]]에 출연했으나 역시 보기 좋게 망했다. 1999년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사의 이정재는 흥행부도수표라는 평가를 받으며 2009년에는 거의 퇴물급의 배우가 되어갔다.
이후 영화 빅매치에 이어 2015년 7월 22일 개봉한 영화 《[[암살(2015)|암살]]》에서 두 얼굴의 독립군인 염석진 역할을 하며 [[천만영화]] 두편을 지닌 배우가 되었다.[* 이 캐릭터의 불안정하고 이중적인 심리를 드러내기 위해 두 달 간 체중을 15킬로그램 감량한 것은 물론, 촬영 전 48시간 동안 깨어있는 상태로 준비했다고 한다. 똑같이 불안정한 캐릭터인 이자성을 연기할 땐 저절로 살이 빠졌다고.]
2016년 7월 27일 개봉한 '인천상륙작전' 에서 맥아더의 명을 받고 X-Ray 작전을 수행하는 장학수 대위 역할을 하였다.
* 2013년 9월 28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데뷔 20주년을 맞아 이정재를 위한 특별전이 열렸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특별전은 여러번 있었지만 41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의 배우를 대상으로 한 특별전은 이정재가 처음. 주제는 '''"영원한 젊은 남자 이정재"'''로 데뷔 후 처음으로 팬들과 만나는 자리였다.[* 일본에서는 두 번의 팬미팅을 가진 적이 있으나 한국에서는 팬미팅 류의 행사를 한 적이 없다.] 행사의 공식명은 GV, 즉 관객들과 영화에 대해 토론하는 심도 깊은 자리였으나, 곧 400여명이 함께한 팬미팅으로 변질 되었다. 약 한시간 반 동안 팬들과 출연작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물론 노래도 부르고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즉석에서 걸어 달라는 팬들의 요구에 걸어도 주는 등 팬미팅을 방불케 했다. '''이 날의 하이라이트는 [[이정재]]가 직접 준비한 클레이 비누를 일일이 팬들에게 선물해 주면서 포옹을 해 준 것''' 준비한 선물보다 사람들 수가 더 많아서 선물을 받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에게 포옹을 해주었으니,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에겐 꿈 같은 1시간 반이었다. 관객 절반 이상이 여성들이다 보니 400여명과 포옹이 끝난 후 이정재의 수트 상의 한쪽 부분이 온갖 화장품으로 범벅이 되어 하얗게 색이 변해 있었다. 여담으로 당시 [[신세계(영화)|신세계]]와 [[관상(영화)|관상]] 개봉으로 이정재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을 때라 표 구하는 게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전날부터 밤샌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새벽 5시에 나온 사람들도 10등안에 들지 못했을 정도. 12시에 온 사람들은 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으며 한국영상자료원 측도 이런 진풍경은 처음이라며 매우 놀라워 했다. 항간에 들리는 바로는 옆건물인 CJ E&M 사옥의 (엠카 보러 온) 줄보다 길었다고 하니... 본격 40대 아이돌 탄생.
* 영화 [[암살(2015)|암살]] 개봉 당시 관객 수 815만명이 넘으면 프리허그를 하겠다고 공약을 내 건 것. 8월 7일 관객수 815만명을 돌파하며 100여명이 넘는 팬들과 프리허그 행사를 가졌다.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팬들과 포옹해 준 결과 또다시 수트 상의가 화장품 범벅이 된 것은 덤. 2년 전과 마찬가지로 선착순에 들기 위해 행사가 저녁 8시에 시작됨에도 새벽부터 줄을 선 팬들이 많았다. 이런 정성에 보답이라도 하듯, 애당초 약속한 100명이 아닌 120여명과 프리허그를 해주고, 엄청난 팬서비스도 보여준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leejungjae&no=56694&page=1&search_pos=&s_type=search_all&s_keyword=%ED%95%98%ED%8A%B8|하트 춤 추는 이정재는 그야말로]] [[충공깽]]
* 2013년 2월 21일에 개봉한 [[신세계(영화)|신세계]]에서 언더커버 경찰 이자성 역을 맡아 호평을 받고 있다. 속으로 삭히고 갈등하는 내면 연기를 잘 보여줬다는 평. 특히 정체가 들통날 위기에 처하는 인천 창고 씬이 많이 회자되고 있다. 과거를 다룬 신세계 프리퀄이 나온다면 본편과는 다른 마구 날뛰는 이자성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박훈정]]감독이 과거 이자성은 칼부림도 막 하고 다녔다고.
||2016||역전의 날||주연||미개봉|| ||
- 이종화 (1949년) . . . . 7회 일치
|출생지 = [[대한민국]] [[경상북도]] [[대구시]] 봉덕동<br />(현.[[대구광역시]] [[남구 (대구광역시)|남구]] 봉덕동)
|봉급 =
'''이종화'''(李宗和, [[1949년]] [[7월 16일]]~ , [[대구]] [[남구 (대구광역시)|남구]] 봉덕동)은 [[대한민국]]의 전직 공무원으로, [[대구광역시]] [[북구 (대구광역시)|북구]]청장을 역임했다.
* 1949. 07. 16 : [[경상북도]] [[대구시]] 봉덕동(현.[[대구광역시]] [[남구 (대구광역시)|남구]] 봉덕동) 출생
* 봉화내성초등학교
- 정형돈 . . . . 7회 일치
| 가족 = 정운봉(부), 박경순(모), 슬하 2녀 <br/> 정유주, 정유하 (쌍둥이 자매)
* [[KBS]] 《[[개그콘서트]] - 도레미 트리오Ⅰ·Ⅱ, 봉숭아 학당(갤러리정 / 영원한 친구 / 셜록홈돈), 유치개그, 걸인의 추억, 전위예술, 보디가드, 어머니의 이름으로, 예술의 전당, 어우야, 꽃보다 아름다워, 달력개그 등》
* [[SBS 파워FM]] 《송은이, 신봉선의 동고동락 81회 (2월 27일) : 게스트》
* 2007년 《미스터 총알》 - 형사 역 (미개봉)
* 2014년 11월 7일 《졸업생 멘토링 특강 - 도니선배와 함께하는 TALK SHOW》 - 연사 (인덕대학교 은봉관 로비층 은봉홀)
* 3편 - 개봉박두! 파격신상
- 주나라 . . . . 7회 일치
호경에 도읍하던 시기를 서주라고 한다. 호경은 현재의 시안(西安) 지역으로, 진나라 때는 함양, 당나라 때는 장안이 건설된 지역이다. 왕국 건설 당초 [[삼감의 난]] 등의 문제를 겪기도 하였으나, 서주는 봉건제도를 이용하여 중원 각지의 지배권을 확보한다.
=== 봉건제도 ===
지방 통치에서 주나라는 [[봉건제]]를 실시했다. 무왕은 자신의 형제들을 노(魯), 위(衛), 채(蔡), 조(曹), 등(滕)의 16개국에 봉하였고, 무왕의 아들은 진(晉) 등 4개국에 봉해졌다. 주공 단의 자식들은 형(邢) 등 6개국에 봉해졌다. 강태공의 후손이 봉해진 제(齊) 등, 그 외 약 140개의 제후국이 존재했다.
- 추봉 (배우) . . . . 7회 일치
| 이름 = 추봉 <br /> 秋峰
'''추봉'''(秋峰, [[1922년]] [[3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배우]]이다.
* 1940년 《봉화》
* 1961년 《구봉서의 벼락부자》 - 대부 계장 역
* 1996년 《[[박봉곤 가출 사건]]》- 김 노인 역
* 1940년 극단 '성군'에서 연극 《봉화》 등 다수 출연
* {{KMDb 사람|00000763|추봉}}
- Crusader Kings 2 . . . . 6회 일치
샤를마뉴와 그의 동생 카를로만이 주요 인물인데, 이게임에서 샤를마뉴는 미친듯한 사기능력치와 함께 12기사들이 속속들이 합류하는 이벤트, 카를로만의 아들이 망명하는 곳[* 보통 롬바르디아, 가끔 아스투리아(...)]에 클레임이 생기는 이벤트, 작센을 정복하는 이벤트까지 겹쳐 사기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힘을 보여준다. 반면 그의 동생인 카를로만은 어머니가 찾아와 독약을 건네주는 이벤트등 온갖 디버프가 쏟아지는 안습인물. 그래도 가~끔 샤를마뉴가 전쟁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전사하거나(...) 수행불능이 되버리거나 해서 카를로만이 실권을 잡는경우가 있기는 하다.
4. 출병 금지 토글. 이걸 눌러놓으면 군대를 직접 이끌지 않는다. 이로인해 전장에서 전사할 확률을 원천봉쇄할 수 있다.
5. 가문의 정보. 예시의 우어 켄셀라이그 가문은 기독교를 믿으며, 봉건제 정부를 두고있다. 오른쪽에 있는 버튼들로 가문의 계보도 등을 볼 수 있다.
* 직할령 크기: 플레이어가 가지고 있는 직할령의 양과 그 한계. 기본적으로 관리력에 비례한다. 직할령을 과도하게 소유하면 세금 수입이 감소하며 봉신들이 불만을 가지게 된다.
* 봉신 한도
* 봉신: 해당 캐릭터가 밑에 거느리는 영주들.
- 김국진(MC) . . . . 6회 일치
[[1993년]] [[2월]] 감자골은 당시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였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고별인사를 하고 [[미국]]행을 하기로 했는데, 녹화가 시작되기 직전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프로그램을 열 개씩 하던 감자골이 갑자기 그만 둔 것은 MBC로 이적하기 위함이였다!]]" 라면서 임하룡을 제외한 '''방송 3사 코미디언들 모두'''가 MBC로 쳐들어와서 녹화를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난동을 피우는 통에 김국진은 스태프들을 따라서 개구멍으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김국진을 숨겨준 사람이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라고 라디오스타에서 밝혔다. 19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코미디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씁쓸해지는 대목. 감자골은 ~~[[이경규]]가 선처를 호소해서 선배들에게 줄빳다만 맞고~~ 자신들이 다른 곳으로 이적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은퇴하고 이민가는 것이다. ~~니들 밥줄 끊을 염려 없으니 놔줘라~~ 라고 설득해서 겨우 시청자들에게 고별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자골은 '''방송 3사 코미디언 협회에서 제명당한다.''' 이들의 KBS 선배 개그맨 [[이봉원]]은 후일 방송에서 감자골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당시 나는 SBS로 이적한 상태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파렴치한 변명을 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상한 사건.
김국진을 제외하고 전국민적 인기를 누린 개그맨을 말하라면 [[유재석]]이 첫손에 꼽히는 일이 많기에 인터넷 상에서는 '전성기 김국진 vs 현재 유재석'이라는 떡밥이 항상 돌고 있는데 장기적인 커리어가 아닌 단기적인 최정점의 포스를 따지자면 김국진이 우위에 있다는 것이 중론. 물론 예능계에 있어서 종합적인 인기와 지지도, 커리어까지 본다면 유재석이 훨씬 더 앞선다. 비유하면 '''김국진은 2등과의 점수차가 굉장히 큰 전국 1등을 3~4년 한것과 같고 유재석은 2등과 점수차가 그리 크지는 않은 전국 1등을 15년 가까이 차지한것과 같은 느낌이다.''' 전성기가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지만 그 절반 정도의 기간을 [[강호동]]이라는 강력한 대항마가 공존했었던 유재석과 달리 전성기의 김국진은 개그계에서 라이벌이 존재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가수나 배우들을 통틀어서 인지도와 인기로 그를 넘볼 대상이 없던, 그야말로 연예계 혼자 1등이라 할만한 절대적인 인기를 누렸다. 특히, 김국진은 개그맨이 연예계 최고 스타가 된 정말 몇 안되는 희귀 사례로 꼽힌다.[* 개그맨, 예능인이 가요계, 연기계를 넘어 연예계 전반에 걸쳐 최고의 위상을 지닌 톱스타가 된 경우는 정말로 극히 드물다.현재 예능계 최고의 MC들인 이경규, 강호동, 신동엽도 연예계 종합 최고 스타의 위상을 가져본적은 없으며 역대로 꼽으면 80년대의 이주일과 심형래, 전성기 김국진, 현시대 유재석 정도만이 달성한 매우 극히 드문 케이스라고 볼 수 있다.] 당시 김국진은 '''코메디 30년을 통틀어서 최고의 코메디언'''에 선정되었는데, '''2위가 한국 코미디계의 영원한 대부 [[구봉서]]'''. 또한 '''광복 50년 최고 연예인'''으로 선정되었는데, '''2위가 대중가요의 황제이자 전설 [[조용필]]'''. 광복 50년 최고의 연예인 설문조사에서 2위를 기록한 가왕 조용필을 이겼다는 건 그야말로 당시 중장년층을 넘어 노년층의 인기마저도 지배했다는 이야기이다. 김국진을 제외하고 코미디계를 넘어 연예계 전반 최강의 포스를 보여준 코미디언은 1980년도에 말 그대로 2주일만에 원톱이 되어 80년대 초중반 내내 연예인 소득 1위를 차지했던 코미디의 황제 [[이주일]], 그리고 영화로도 전국 300만 관중을 돌파할 수 있었던 전성기 [[심형래]] 정도 밖에 없다.
과거 [[구준엽]]과 철봉 매달리기 대결에서는 구준엽은 얼굴이 시뻘개져 떨어지고 난 후에도 생글생글 웃으며 철봉에 매달려 있기도 했다.
라디오스타 '[[라디오 스타(황금어장)/2013년 상반기|괜히 바꿨어 특집]]'에 출연한 [[나나(애프터 스쿨)|나나]]가 [[봉춤]]을 선보이자 '''직접''' 해 보기도 했다. 다리 힘만 가지고 봉에 매달리기를 시전할 정도. --[[살아있네]]!-- 이후 2016년엔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김동현(종합격투기)|김동현]]에게 기습을 해서 김동현의 항복을 받아낸다.
- 다크 유니버스 . . . . 6회 일치
[[미이라(2017년 영화)|미이라]]가 2017년에 개봉했다. 늑대인간을 다룬 울프맨도 각본을 준비 중이라 하며 투명인간도 리메이크 소식을 밝혔다. 좀 더 진행되는 것을 봐야 알 터이나 프랑켄슈타인의 괴물과 길맨, 반 헬싱도 영화화될 듯. 다만 미이라의 실패 이후, 계획이 취소되었다가 다시 재게되는 등 진행 여부는 아직 지켜봐야 할 상황이 되었다. 프랑켄슈타인의 신부는 예정된 상황. 현재 투명인간이 나온 상황이다.
미이라 개봉 이후 예정 타이틀이 공개되었다.
미이라 개봉 후에 공개된 타이틀. 괴인 팬텀이 등장할 듯 하다.
미이라 개봉 후에 공개된 타이틀. 콰지모도 주연이 아닐까 예상된다.
* 영화 [[드라큘라: 전설의 시작]]은 이 세계에 소속된 영화였으나 현재는 취소되었고, 2017년에 개봉한 미이라가 다크 유니버스의 첫번째 영화가 되었다. 미이라 개봉 후에 공개된 예정 타이틀을 보면 드라큘라를 다크 유니버스에 등장시키려는 생각은 있는 듯 하다. 그런데 다크 유니버스 자체가 취소되는 일이 있기도 해서 먼저 프랑켄슈타인의 신부가 나와봐야 알게 생겼다.
- 모레아 전제국 . . . . 6회 일치
현재의 그리스 남부의 펠로폰네소스 반도 지역에 있었던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국이다. 이 지역은 본래 전통적으로 비잔티움의 유럽 방면 영토였으나, 통치력이 잘 미치지 않아 독립성향이 강했고 [[제4차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이 지역에 세워진 '아카이아 공국'의 영향으로 비잔티움의 봉신국이 되었다.
전제공(δεσπότης,despótēs,데스포테스,데스포티스)이란 비잔티움 제국의 작위로서, 본래 이 말은 '전제 군주'라는 의미였으며, [[로마 제국]] 시기에 라틴어 '도미누스(주인, 군주)'의 번역어로서 그리스어에서 쓰이게 되었고, 그리스어권에서 [[로마 황제]]의 별칭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이를 군주와 혈연이 있는 고위 귀족, 황족에게 주는 '작위'로서 사용했으며, 제4차 십자군 이후 망명정권의 하나였던 에페이로스의 군주가 황제를 칭하기 이전에 전단계로서 '데스포테스'를 사용하면서 독립 국가 군주의 칭호로 등장하게 되었다. 에페이로스의 '데스포테스'는 니케아 제국에 패배하였으나 니케아 제국은 에페이로스를 봉신으로 삼고 '데스포테스'의 칭호를 쓰는 것을 인정하여, 데스포테스는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 작위로 여겨지는 관례가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전제공','전제후'로 번역된다.[* 다만 이는 확고하게 널리 쓰이는 번역어는 아니다.]
14세기 이후에 비잔티움 제국은 각지의 봉신국에 황제의 동생이나 아들 같은 가까운 황족을 봉하여 행정, 군사, 사법 전권을 행사하며 통치하도록 했다. 전제공의 작위는 종신 보유가 되며, 행정관 임기도 기본적으로 종신이었으나, 전제공의 직위는 세습되지 않았다.
- 몽키 D. 루피 . . . . 6회 일치
엄청난 정신력을 가진 다이아몬드급 멘탈의 소유자로, 어린 시절에 해적에게 납치당해 피곤죽이 되도록 얻어터지고도 끝까지 ~~자기를 처리하려 한~~ 사보와 에이스의 행방을 털어놓지 않았으며, 스릴러 바크 편에서는 어지간한 인간은 2~3개 이상 넣으면 의식이 못 버틴다는 그림자들을 100개나 넣고도 거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스토리를 맞추기 위한 사기급 주인공보정 능력~~ 정상결전 편 임펠 다운 탈출한 뒤에 벌어진 싸움도 이미 몸이 망가진 상태에서 정신력으로 버텨낸 것. 어린 시절부터 엄청난 꼴을 당했는 데도 이런 낙천바보로 성장한 것 자체가 멘탈갑이다. 루피가 정신적 충격으로 [[멘탈붕괴]]를 일으킨 것은 에이스가 죽었을 때 뿐이며, 정확히는 에이스의 죽음을 기폭제로 그간 중첩되어 있던 막대한 정신적[* [[샤본디 제도]]에서 상황상 동료들이 [[바솔로뮤 쿠마|쿠마]]에 의해 사라지는 걸 막지 못했다는 책임감과 [[임펠 다운]]에서 탈출하기 위해 봉쿠레를 희생시킨것] , 신체적[* [[샤본디 제도]], [[임펠 다운]], [[마린 포드]]에서 받은 신체적 부담감] 부담이 터진 것이다.
하지만 [[보아 행콕]]의 정신계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는다. 여성들도 예외없이 걸리는 능력인데다 전보벌레는 물론이고 무생물(벽)도 돌로 만드는 능력이다. 단지 [[동자공]] 혹은 [[고자]]라서 무사할 수 있었다는 변명만으로는 모자랄 듯. 게다가 보아 행콕의 알몸을 보고도 전혀 동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알라바스타 왕국]]편에서는 [[나미(원피스)|나미]]의 알몸을 보고 두 번이나 코피 흘리기도 했던 걸 보면[* 한번은 [[Mr.2 봉쿠레]]가 나미 모습으로 변신한 뒤 '''이렇게도''' 변신할 수 있다며 나미의 알몸까지 재현해 보여줄 때(...)와 싸움이 끝나고, 여탕 엿보다가 나미가 보여줬을 때. 그러나 나미가 직접 보여주기 전에는 아무 생각 없는듯한 표정으로 보고있는 듯했다. --고자는 고자일 뿐--]...그러나 루피가 이런 성적인 묘사에 흥분하는 건 옆에 우솝이 있을 때 (분위기를 타고)한정이라는 설정이 단행본의 SBS코너에서 나왔다.
* '''[[버기(원피스)|버기]]''' - 최초 능력자간 배틀. 나미의 도움으로 작아져버린 버기를 고무고무 바주카로 날려버린다. 이후 로그 타운에서는 밑을 참고. 임펠 다운 탈옥 직후 봉쿠레 이야기 때문에 시비 붙어서 또 싸우고 또 이겼다.
* [[각성한 동물계 능력자|미노타우로스]] - 버기, Mr.3, Mr.2 봉쿠레와 함께 상대했으며 버기가 먼저 특제 마기탄, 봉쿠레가 이어서 그 겨울날의 추억을 퍼붓고 Mr.3의 양초를 팔에 장착해 고무고무 망치창으로 기절시켰다.
* [[파시피스타]] - 위에 적혀 있듯이 샤봉디 제도에서 루피와 동료들을 궁지로 몰아넣고 패배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 문근영 . . . . 6회 일치
[[2009년]] 개봉한 [[얏타맨]]는 약 310만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국민 여동생으로 자리잡았다.
[[2006년]] [[성균관대학교]] 인문학부에 특별전형 지원으로 합격했다. 입학 전 [[수능]] 성적으로 [[대학]]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고 수능 당일날 교실 하나를 혼자 쓰면서 요란하게 수능까지 봤다. 그런데 막상 원서 쓸 때가 되니까 특별전형, 그것도 연예인들이 으레 가는 '''[[연극영화과]]가 아닌 [[국어국문학과]]에 응시했고''' 간단히(?) 합격해 버려서 당시 [[고3]]들에게 엄청난 [[어그로]]를 끌어버렸다. 아무래도 본인 수능성적이 예상 이하였던 모양이다.[* 문근영이 고3이던 당시, 모교인 [[국제고등학교(광주)|국제고등학교]](일반계 고등학교)를 방문한 졸업생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하다. 영화 [[댄서의 순정]] 이후 학업에 열중하겠다는 언플이 있었으나, 영화 개봉과 무대인사가 모두 끝난 5월 말까지도 등교가 아닌 외부활동(교사의 말에 따르면 [[칸 영화제]]를 '구경'갔다고 한다.)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미 특별전형을 고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참고로 영화 <사랑따윈 필요없어> 개봉 와중에 특례입학하는 바람에 '''수능 따윈 필요없어'''라는 비아냥조의 [[패러디]]가 나오기도 했다. 이 특례입학 과정에서 수능으로 당당히 입학하겠다는 약속을 번복한 것에 대해 호감 이미지가 상당량 깎인 듯.
어린신부가 개봉해서 [[디시인사이드]]를 중심으로 갑자기 늘었고 어미는 '~근영'으로 맺는다. 나중에 근영체는 [[나영체]] 등의 바리에이션도 탄생했다. [[나영체]]가 등장하고 의문문에 쓰기 곤란한 근영체와 평서문에 쓰기 곤란한 [[나영체]]를 같이 쓰는 경우도 있다.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f08080><rowbgcolor=#f08080><tablebgcolor=#ffe4e1>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이름'''}}} || {{{#ffffff '''관객수'''}}} || {{{#ffffff '''흥행'''}}} ||
|| [[2006년]] ||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사랑따윈 필요없어]][* 상술했듯이 이 영화 개봉 직후 문근영이 약속을 깨고 [[성균관대학교]] 특별전형에 지원 합격해 버리는 바람에 인터넷에서는 '''수능따윈 필요없어'''로 패러디된 짤방이 유행했었다.] || 류민 || 54만 명 || 실패 ||
- 박주영 . . . . 6회 일치
* '''따봉박''' 또는 '''박따봉''' 또는 '''꿀엄지''' : 유래는 너무도 명확하다.
* 따봉[[벌레|충]](-蟲)[* 이 말은 [[페이스북]] 유저 비하 표현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의 추천 버튼인 '좋아요'(영어로는 'Like') 버튼에 그려진 아이콘이 엄지를 치켜드는 것([[따봉]])이기 때문.]
* 봉와주영 : 소위 황제훈련 도중 봉와직염을 앓으면서 유래했다. 많은 남성들이 군대 시절 행군과 함께 접하게 되는 병명이다. 대부분의 남성은 군생활 도중 행군경험이 있으므로 약간의 위생관리만으로도 발병을 억제 가능함이 널리 알려진 바이며, 주로 더럽고 게으른 고참이나 게으르진 않지만 바짝 쫄아붙어 있는 이등병들이 자주 걸리며 모두의 골머리를 썩게 하는 병으로 유명하다. 친숙하면서도 동시에 짜증스러운 주제였기 때문에 수많은 네티즌들은 프로 축구선수의 위생관리에 대한 의문과 함께 위생상태 불량에 관한 혐오감을 표시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러나 애초에 더러운 질병이라 생명력이 길 수 없는 별명으로 잠시잠깐 반짝했다.
- 안지만 . . . . 6회 일치
|연봉 =
[[2002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2년]] [[삼성 라이온즈]]의 2차 5순위(전체 40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2005년]]에 [[오승환]]과 함께 불펜에서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2010년]]에 뛰어난 모습을 보여 주며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했다. [[권혁]], [[정현욱]]과 함께 불펜의 '안정권' 트리오라는 별칭이 있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200005 오치아이 코치가 바라보는 안정권 트리오] - OSEN</ref> [[2011년 한국시리즈]]에서 4홀드로 맹활약하며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2013년]] [[8월 17일]] [[넥센 히어로즈|넥센]]전에서 우완 [[투수]]로써 최초의 100홀드를 기록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377859 삼성 안지만, 우완 투수 최초 100홀드 대기록] - 스포츠조선</ref> 그리고 [[2014년]] 프로 데뷔 12년 만에 FA 자격을 획득하여 계약금 35억, 연봉 7억 5000만원으로 총액 4년 65억에 [[삼성 라이온즈|삼성]]과 재계약하였다. 그 뒤 [[2015년]] [[6월 5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는 [[KBO 리그]] 최초 개인 통산 150홀드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윤성환]], [[임창용]]과 함께 해외원정 불법도박 혐의로 [[2015년 KBO 한국시리즈|2015년 한국시리즈]]에 승선하지 못했고 [[2015년 WBSC 프리미어 12|2015년 프리미어 12]]에도 탈락하였다. [[2016년]] [[7월 20일]]에 검찰로부터 불법 스포츠 도박사이트 자금 투자와 관련한 혐의를 받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오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다음날 계약 해지를 발표함에 따라서 유니폼을 완전히 벗게 되었고, 구단에서 퇴출되었다. 퇴출 이후에는 사회인 야구 선수들을 가르치며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다.
결국 지인의 도박 사이트 개설 자금 지원과 관련한 1심 재판에서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 120시간의 사회 봉사 명령을 선고받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468&aid=00002349</ref> 검찰은 수익금을 분배 약정을 했다는 점에서 안지만을 공범으로 판단했는데, 그나마 재판부에서 직접적으로 사이트 운영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은 데다 그동안 이로 인해 언론의 도마에 오르내리며 손해를 받은 점을 참작해 집행 유예 처분이 내린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안지만은 항소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01&aid=0009035460</ref> 안지만의 항소로 재판이 장기화되는 데다, 앞서 언급했듯이 재판부도 안지만을 도박 사이트의 공범으로 판단했기 때문에<ref>그동안 법원 판례에서 불법 도박 사이트에 돈을 댄 사람도 공범으로 인정해 왔다.</ref> 향후 야구계 복귀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4월 20일, [[대구지방법원]]은 도박 개장의 혐의를 인정하여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을 선고했던 원심을 깨고 징역 6개월, 집행 유예 2년, 사회 봉사 활동 80시간을 선고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016&aid=0001383332</ref>
![[년|연<br /><br />도]]!!소<br /><br />속!![[나이|나<br /><br />이]]!![[승리 투수|승<br /><br />리]]!![[패전 투수|패<br /><br />전]]!![[승률|승<br /><br />률]]!![[평균 자책점|평<br />자<br />책]]!!출<br /><br />장!![[선발투수|선<br /><br />발]]!![[완투|완<br /><br />투]]!![[완봉|완<br /><br />봉]]!![[세이브 (야구)|세<br />이<br />브]]!![[홀드 (야구)|홀<br /><br />드]]!![[이닝|이<br /><br />닝]]!![[안타|피<br />안<br />타]]!![[홈런|피<br />홈<br />런]]!![[볼넷|볼<br /><br />넷]]!![[고의 사구|고<br /><br />4]]!![[삼진 (야구)|탈<br />삼<br />진]]!![[몸에 맞는 볼|몸<br /><br />맞]]!![[보크|보<br /><br />크]]!![[폭투|폭<br /><br />투]]!![[실점|실<br /><br />점]]!![[자책점|자<br /><br />책]]!![[타자 (야구)|타<br />자<br />수]]!![[WHIP|W<br />H<br />I<br />P]]
- 오세창 . . . . 6회 일치
임정 환국 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ref>
은퇴 후, 조용히 있다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터지자 [[대전]]을 거쳐 [[대구]]로 내려가, [[1951년]] [[4월 16일]] [[나인협]]의 장례식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대구 대봉동 31번지의 집에서 병석에 누운 지 1년만에, [[1953년]] [[12월]] 대구 대봉동 자택에서, 향년 90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장례식은 사회장(社會葬)으로 장례가 치러졌다.
- 이요원 . . . . 6회 일치
이요원은 [[1980년]] [[4월 9일]] [[경기도]] [[성남시]]에서 태어났다. [[1997년]] 고교 방송반으로 활동중 별 기대없이 출전한 연예인 캐스팅 컨벤션의 모델캐스팅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후 월간 잡지 '피가로' 11월호의 모델로 데뷔했다. [[1998년]] 당시 [[명세빈]]의 아역을 찾던 [[장현수 (영화 감독)|장현수]] 감독이 이요원의 잡지화보를 보고 바로 캐스팅했으며 이어 영화 《[[남자의 향기 (영화)|남자의 향기]]》를 통해 연기자로 정식데뷔한다. [[1999년]] [[KBS]] 청소년드라마 《[[학교 2 (드라마)|학교 2]]》와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에 아르바이트 주유원으로 출연하며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2001년]] [[청룡영화제]] 여우신인상을 안겨준 《[[고양이를 부탁해]]》와 [[KBS]] 드라마 《[[푸른 안개]]》로 연기력을 인정받아 차세대 톱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KBS 드라마 《[[순정 (드라마)|순정]]》과 영화 《[[서프라이즈 (영화)|서프라이즈]]》에서 주연을 맡았다. 《[[모래시계 (드라마)|모래시계]]》 [[김종학]]-[[송지나]] 콤비의 [[2002년]] [[SBS]] 드라마 《[[대망 (2002년 드라마)|대망]]》에서 여주인공 윤여진 역을 맡은 후 잠시 연기자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2년간의 공백 이후 [[2005년]] [[SBS]] 드라마 《[[패션70s]]》로 화려하게 복귀에 성공했다. 이후 [[2007년]] [[SBS 연기대상]]에서 10대스타상, 최우수상, 인기상, 베스트커플상 4관왕을 안겨준 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와 730만 관객동원 영화 《[[화려한 휴가]]》가 연이어 대박을 터뜨리며 흥행보증수표로 자리잡았고,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타이틀롤을 맡아 열연을 펼쳐 [[2009년]] [[MBC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연기상, 베스트커플상을 수상했다. 이후 다시 [[SBS]]로 돌아와 드라마 《[[49일]]》에서 좋은 연기를 선보여 드라마가 동시간대 시청률 1위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 후 드라마 《[[마의 (드라마)|마의]]》에서 주인공인 강지녕 역을 맡아 조승우와 호흡을 맞추었다. [[2013년]] 드라마 《[[황금의 제국]]》에선 차갑고 냉철한 재벌가 상속녀를 맡아 호소력 있는 감정연기로 최서윤 역을 완벽 구현하며 열연을 펼쳐 [[2013년]] [[SBS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연기상, 10대스타상을 수상하며 많은 호평을 받았다.
2016년 [[JTBC]] 드라마 《[[욱씨남정기]]》에 출연하여 물오른 연기로 인생캐릭터를 만났다는 극찬을 받았다. 2016년 11월 [[MBC]] 《[[불야성 (드라마)|불야성]]》에서 이요원이 연기하는 서이경은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자신의 왕국을 세우려는 거대한 야망을 품은 황금의 여왕이자, 탐욕은 죄가 없다고 믿는 냉정과 열정의 화신이다. 여리한 외모와는 달리 피도 눈물도 없는 차가운 심장을 가진 얼음여왕. 말 한마디에 거액이 오가는 협상 테이블에서도 평온한 말투와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상대를 굴복시키는 철의 여인이다. 디즈니 배급 영화 《그래,가족》는 2017년 2월 15일에 개봉되었다. 영화는 핏줄이고 뭐고 모른 척 살아오던 삼남매에게 예상치 못한 막내동생이 나타나면서 벌어지는 치열한 가족의 탄생기를 그린 코미디 가족영화에서 잘난 체해도 결국 흙수저인 둘째 오수경 기자 역할을 연기했다.
| 《[[외과의사 봉달희]]》
| 봉달희
* 2010년 3월 세무서 일일 명예 민원봉사실장(역삼, 삼성, 서초)<ref>{{뉴스 인용 |제목=[포토]위촉장 받는 이요원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277&aid=0002330409 |출판사= 네이버 |날짜= 2010-03-03 }}</ref>
| rowspan="4"| [[외과의사 봉달희]]
- 이재용(배우) . . . . 6회 일치
[[영화]] [[친구(영화)|친구]]에서 묵직한 부산 사투리로, 동수([[장동건]])를 앞에 두고 일장연설을 하는 장면으로 [[미친 존재감]]을 알렸다.[* 실제로 이재용은 유년시절을 마산시에서 보냈기 때문에 부산 사투리가 능숙한 건 일도 아니다.] [[이재용|동명의 재벌 후계자]]가 있는 관계로 이재용이라는 [[본명]]을 기억하는 사람보다는 친구의 차상곤, [[야인시대]]의 [[미와 와사부로(야인시대)|미와 경부]], 제5공화국의 [[이학봉]] 등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피아노(드라마)|피아노]]의 [[독사]], [[야인시대]]의 [[미와 와사부로(야인시대)|미와 경부]], [[주몽(드라마)|주몽]]의 부득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의 [[이학봉]], [[해신]]의 [[조장길]], [[뿌리깊은 나무(드라마)|뿌리 깊은 나무]]의 [[조말생]] 등이 있다. [[동명이인]] 감독 이재용의 망한 영화 [[다세포 소녀]]에서는 모든 교사 역으로 출연했다. [[무려]] '''1인 9역!'''
* '''굉장한 [[노안]]이다.''' [[놀러와]]에서 배우 [[이계인]] 씨는 [[본인]]보다 나이가 적다는 사실을 알고 놀랬다. [[제5공화국(드라마)|드라마 제5공화국]] 후반부에서 안기부 실세 콤비로 함께 호흡을 맞춘 [[장세동]] 역의 배우 '''[[홍학표]]보다 2살 동생'''이라는 사실은 그야말로 [[충공깽]]. 물론 이건 [[홍학표]]가 상당한 [[동안]]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공교롭게도 [[이학봉]](1938년생)이 장세동(1936년생)보다도 2살 동생이다.] 사실 그거보다 더 [[충공깽]]인 게 있는데,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에서 (이재용의) 부인 역으로 나온 서승현은 사실 이재용보다 '''20살 누나'''라는 것이다(...) 그리고 딱 3개월 차이이긴 하지만, '''[[최수종]]보다도 한 살 어리다'''[* [[최수종]]은 1962년 12월 생이고 이재용은 1963년 3월 생이다.]. 그래도 본 위키에 항목이 있는 [[동명이인]]들 중에서는 가장 나이가 많다.
|| KBS || [[천명(드라마)|천명]] || 천봉 스님 || ||
|| [[쩐의 전쟁(드라마)|쩐의 전쟁]] || 갈매기파 보스 오재봉 || ||
||<|2> 2005년 || MBC ||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 || [[이학봉]] || ||
- 정봉수(역사) . . . . 6회 일치
정봉수(鄭奉守)는 1935년 김천시 증산면 유성리 옥동마을에서 부유한 농가의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증산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육상을 시작해 경상북도 내 크고 작은 육상 대회에 출전해 입상하고 시온중학교에 진학한 후 16세에 경상북도 단거리 육상 대표로 선발되었다. 1950년 육군에 입대해 육군 육상 대표가 되었고 3군 대항 체육 대회에서 우승하고 육군 육상부 감독, 3군 대항 체육 대회 총감독, 88올림픽 꿈나무대표팀 감독을 지냈다.
군대를 전역한 후 1987년 코오롱 마라톤 팀의 창단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선수들에게 소식(小食)과 풍부한 단백질 식단을 집중 공급하는 방안을 도입하고 과학적인 선수 관리로 1990년과 1992년에 김완기가 한국 신기록을 세우고, 1992년 황영조가 2시간 10분벽을 넘어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이봉주 선수와 김이용, 권은주를 발굴해 세계적인 마라토너로 키우면서 한국 마라톤을 육성, 발전시켜 세계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김천시 증산면민들은 우리나라 마라톤의 주역을 키워낸 정봉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1999년 2월 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700여 만 원의 성금을 모아 1999년 5월 6일 증산초등학교 운동장에 공적비를 세웠다. 높이 2m인 3단으로 된 오석에 정봉수의 업적이 새겨져 있다.
정봉수는 2001년 7월 5일 말기 신부전으로 사망하여 7월 9일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 금릉공원묘원에 안장되었다.
-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 . . . 6회 일치
한편으론, 비잔티움은 황제 요안네스 8세가 죽고, 그의 동생 콘스탄티노스가 콘스탄티노스 11세로 즉위한다. 그는 모레아의 친왕으로써 모레아를 비잔티움의 봉신인 모레아 전제국으로 일통하고, 바르나 십자군에서 그리스 지방 거의 전체를 일시적으로나마 탈환할 정도로 능력있는 자였으나... 바르나 십자군에 협력한거 때문에 초강대국이었던 오스만의 지도자였던 무라트 2세에게 찍혀서 재혼[* 당시 그는 두 번의 결혼을 치뤘으나 두 번 모두 자식이 없었다]도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대관식도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모레아에서 치뤘고 콘스탄티노플에 올때도 카탈루나 배를 빌려타고 온 안습한 처지가 되었다.
한편, 메흐메트가 그를 유럽의 기독교 군주들처럼 애송이로 생각한 카라만의 이브라힘 베이가 게르미얀,아이딘,멘테세의 지도자들과 연합해 일으킨 봉기를 진압한 뒤, 그는 예니체리의 봉급 인상문제로 한차례 곤경을 겪는다. 이문제는 봉급을 인상시키는대신 지휘관을 강등하는것으로 끝이 났으나... 이걸로 술탄의 지배력이 어느정도 약화된다. 이틈을 노렸던건지,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메흐메트에게 사절을 보내 이때 콘스탄티노플에서 머물고 있던 오르한의 생활비를 더욱 지급하지 않으면, 그와 그의 추종자를 다시 풀어놓겠다는 사실상의 협박을 하기 이른다.
다른 발칸의 정교회 국가인 왈라키아와 세르비아는, 당시 오스만의 봉신이었으며, 봉신으로써 오스만에게 병력을 징집해 보내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이들은 헝가리의 개입없이는 절대 오스만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 홍인한 . . . . 6회 일치
|친척= 형 홍봉한, 사촌형 홍상한, 조카 혜경궁홍씨, 조카사위 사도세자, 외종손 정조, 외종손 의소세손, 8촌형 홍창한, 9촌조카 홍낙춘, 10촌 종손 홍국영
'''홍인한'''(洪麟漢, [[1722년]] ~ [[1776년]] [[7월 5일]])은 [[조선]] 후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이다. 자는 정여(定汝), 본관은 풍산(豊山). [[예조]][[판서]] [[홍현보]]의 아들이고 [[영의정]]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삼촌이 된다. [[홍국영]]의 일족이기도 하다. 당색으로는 [[노론]]이며 노론내 외척당의 지도자였다.
선조의 6대손이자, 정명공주와 영안위 홍주원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예조판서 [[홍현보]]이고 어머니는 성주이씨로 이세황의 딸이다. [[홍봉한]]의 이복동생이다. [[혜경궁 홍씨]]의 이복 작은 아버지(숙부)이며, 관찰사를 지낸 홍창한은 8촌 형이 된다. 친동생은 [[홍용한]], [[홍준한]] 등이 있다.
아버지 [[홍봉한]]이 탄핵당할 때는 결사적으로 반대하던 [[혜경궁 홍씨]]도 그의 사사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한다.
*** 이복 형 : [[홍봉한]](洪鳳漢, 1713 ~ 1778)
* [[홍봉한]]
- 김륵 . . . . 5회 일치
그러나 사마시 합격 이후 생부 김사명과 스승인 퇴계 이황이 연이어 사망, 그는 고향 영주시에 머무르며 퇴계 이황의 위패를 영주시 이산서원(伊山書院)에 배향하는 일을 추진하였으며 이후 영천(영주시) 지역 사림의 중심인물로 부상하게 된다. 그는 흑석사(黑石寺)와 [[소수서원]] 등에서 수학하다 [[1576년]](선조 9)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오리 [[이원익]], 학봉등이 그의 동방이었다.
이후 영주시내에 귀학정과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 천운정을 짓고 시문으로 소일하며 이수광·한석봉등 당대의 명사들과 교류했는데, 이때 석봉 한호로부터 친필 글씨로 귀학정 현판을 선물로 받았다. 1616년(광해군 8) 병으로 사망했다. 묘소는 경북 봉화군 상운면에 있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 [[광해군]] 시절의 행동이 참작되어 1653년에 이조 판서로 증직되었다.
* 영월군수로 부임해서 5년간 재직하는 동안 [[노산군]](魯山君<ref>단종은 숙종 때 가서야 복권된다.</ref>)의 묘에 사당을 세우고 위판(位版)을 봉안하는고 위령제를 지냈다. 아무도 수습하지 않는 단종의 시신을 비밀리에 매장한 영월 호장 [[엄홍도]]의 후손들을 찾아내 호역<ref>군역과 각종 세금</ref>을 면제해주기도 하였다.
- 김숙자 (1389년) . . . . 5회 일치
[[1389년]](고려 창왕 1)에 [[경상도]] [[선산군|선산]] 영봉리(迎鳳里)에서 태어났다. 광위(光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은유(金恩宥)이고, 아버지는 김관(金琯)이며, 어머니는 유인귀(兪仁貴)의 딸, 유씨이다.<ref name="김숙자"/>
[[1440년]](세종 22) [[선교랑]], 1441년(세종 23) [[1월]] 김해교수관 노호(盧浩)와 보직상환 변경되어 [[김해]]로 내려갔다. 이듬해 2월 남부령(南部令)이 되었다가 특별히 동반직을 받아 승의교위(承義校尉)에 제수되고,중군섭부사직 겸 성균관주부(中軍攝副司直兼成均注簿),남학교수관(南學校授官)이 되었다가 그해 11월 승훈랑(承訓郞)이 되어 고령현감(高靈縣監)으로 나갔다. [[1445년]] [[2월]] 승의랑이 되었다가, 지방의 수령들의 직급을 1계급씩 강하한다는 명에 따라 강임되었다. [[1447년]](세종 29) 10월 다시 승의랑으로 환급되고, 11월에 [[성균관]]주부 겸 남학교수관, [[1448년]] [[7월]] [[교서관]]교리가 되었다가 한달만에 전제경차관(田制敬差官)에 임명되어 [[전라도]] [[남원]], [[옥과]], [[장흥]], [[순천]], [[장흥]] 등을 순시하고 그해 [[10월]]에 봉훈랑으로 승진한 뒤, 12월에 도성으로 되돌아왔다.<ref name="ginyon"/> [[1450년]](문종 즉위) [[8월 13일]] 지풍기군사(知豊基郡事)로 발령, 부임하였다.
[[1453년]](단종 원년) [[12월]] [[사재감]]부정, 54년 2월 성균관사예(司藝)를 거쳐 8월 봉렬대부로 승진하여 성주교수관이 되어 내려왔다. 그해 12월 봉정대부(奉正大夫)로 승진, 중훈대부(中訓大夫)로 승진되었으나, [[1455년]] [[12월]] 사직하고 [[1456년]] 처가가 있는 [[밀양]]으로 내려가서 그 해 [[3월 2일]]에 [[밀양군]] 대동리 정침에서 죽었다. [[1455년]](세조 1년) [[12월 12일]] [[세조반정]]에 참여하거나 기여한 관료들을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으로 포상할 때 [[좌익공신|좌익]][[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16세기에 사림에 의해 확립된 도통(道統)의 계보에서 길재의 학문을 아들 [[김종직]](金宗直)으로 하여금 잇게 하였고 [[성리학]]의 계보 중, [[정주학]](程朱學)을 발전시켰다.
[[1646년]](인조 24) 선산의 낙봉서원(洛峯書院)에 제향되었고, [[1786년]](정조 10) 김광형(金光泂)을 소두로 하는 [[경상]], [[충청]], 원춘(原春), [[경기도]] 등 4도 유생의 사액 하사 건의로 이듬해 사액이 내려졌다. [[1905년]](광무 8) 설립된 거창 남상의 일원정 (一源亭)에는 아들 [[김종직]] 및 스승 [[길재]], [[정몽주]], 기타 [[김굉필]], [[정여창]] 등과 같이 배향되었다.
- 김형준(배우,가수) . . . . 5회 일치
* 11월 7일 SS501 전원과 함께 [[신동엽(코미디언)|신동엽]], [[신봉선]]의 샴페인에 출연했다.
* 4월 17일 [[개그콘서트]] [[봉숭아 학당]]편에 출연했다.
* 12월 12일 더블에스301 멤버들과 함께 해요TV K-COOK STAR에 출연했다. 삼행시도 짓고 철가방속에 있는 글씨를 맞춰야 요리을 먹을수 있는데 철가방을 순식간에 열고 닫아서 맞추기도 어러웠는데 찜닭 이라고 외쳐 정답을 맞춰서 맛있는 찜닭을 먹었다. 닭 CF도 찍고 김규종이랑 막춤까지 추며 요리 대회에서 [[모일봉]]이랑 닭갈비랑 치즈 과일꼬치 요리를 했는데 팬들은 김형준의 [[요리치|요리실력]]을 잘 알기 때문에 당연하듯 허영생, 김규종 팀에게 압도적으로 표를 주었고 김형준은 요리 대회에서 져서 벌을 받았는데 허영생이 싸이팬으로 김형준 얼굴에 그림(...)을 그렸고 김형준은 해요TV 시청자 들에게 웃음을 안겨 주었다.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00BFFF><rowbgcolor=#00BFFF><:>{{{#000000 '''개봉'''}}}||<:>{{{#000000 '''제목'''}}}||<:>{{{#000000 '''배역'''}}}||<:>{{{#00000 '''비고'''}}}||
* 2017년 6월 24일 경상북도 김천시 문화예술회관 열리는 교통 봉사자와 함께하는 음악회 홍보단 뮤지컬 갈라 2곡 인스타 라이브에 나왔다.
- 김효원 . . . . 5회 일치
김효원은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이조]][[전랑]]직에 천거되자 외척이 인사권을 장악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하였다. [[심의겸]]과 [[심충겸]]은 [[조선 명종|명종]]비 [[인순왕후]]의 동생들로, [[선조]]가 [[조선 명종|명종]]의 양자 자격으로 임금이 되었으므로 그의 주장이 인정되었다. 사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이조판서]]로 [[추증]](追贈)되었다. 교산 [[허균]]과 [[허난설헌]]의 인척으로, [[허균]]은 그의 사위이며 [[허균]]의 형 [[허봉]]의 딸이 그의 맏며느리였다. [[동인]]과 [[서인]]의 붕당 분열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지만, 생전에는 청렴한 선비로서 신진 인사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의 딸 중에 한명은 [[허균]]의 후처가 되었고, [[허균]]의 형인 [[허봉]]의 딸은 그의 아들 김극건의 부인이 된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당될 때 그의 동생 [[김이원]] 등은 [[북인]]에 가담했고, 동생 [[김이원]], 증손 [[김세렴]] 등은 모두 [[북인]]의 당원이었다.
**** 자부 : 양천허씨 - [[허봉]]許篈의 딸
**** 사위 : [[허균]](許筠, [[허봉]](許篈)의 동생)
* [[허봉]]
- 드래곤볼 . . . . 5회 일치
작중에서 혹성 프리더나, 프리더의 우주선에 설치되어 있으며, 구형과 신형이 있다. 혹성 프리더에서는 지구에서 돌아온 베지터가 회복할 때 사용, 자봉에게 당한 베지터를 회복시킬 때나, 기뉴와의 전투로 부상을 입은 오공을 치료할 떄 사용되었다. 구형이라도 상당한 중상을 입은 오공을 40분~50분 내에 치료할 수 있는 성능을 지니고 있다.
* 여의봉
서유기에 나오는 여의봉과 기본적으로 비슷한 기능을 갖고 있다. 탄성이 매우 크고 원하는 대로 늘어난다. 후에 손오공이 '신'이 살고 있는 궁전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용하면서 그대로 용도폐기(?).
내퍼, 라데츠와 함께 행성을 하나 정복하고 돌아오지만 프리더에게는 무시당하고, 내퍼가 항의하지만 자봉이 자신들이라면 하루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내퍼는 분개하여 프리더에게 덤벼들려 하지만 베지터가 그만두라고 저지한다.
갈릭 주니어는 [[신의 궁전]]에 나타나서 미스터 포포를 봉인해버린다.
- 류중일 . . . . 5회 일치
|연봉 = 5억원 (2018년)
[[1982년]] 3학년 재학 때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 개장 기념으로 열렸던 와의 우수 고교 초청 대회 결승전에서 [[투수]] [[김종석 (1964년)|김종석]]을 상대로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잠실야구장]] 개장 1호 홈런을 기록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410&aid=0000011188 류중일 감독, 손주인-강명구에게 특별한 선물] - 매일경제</ref> 1981년 봉황대기 미기상고 주장을 맡은 1982년 대통령배 감투상, 대붕기 최우수선수상을 수상. 초고교급 유격수로 발돋음하고. [[한양대학교|한양대]] 체육학과(1983학번) 시절 1985년 ~ 1986년에 3학년, 4학년 때 대학야구 올스타 [[유격수]]로 선정되었다.
[[한양대학교]] 체육학과(1983학번) 졸업 후 [[1987년]] 1차 2순위 지명을 받아 연고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계약금 2천만 원, 연봉 1천 2백만 원)하여 견고한 수비를 바탕으로 팀 성적에 기여했다.<ref name="obbest">[[일간 스포츠]] - 2010년 4월 기사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372186 "OB의 재구성 - 삼성 역대 최고 타선"]</ref> [[유격수]]로 주로 출장했고 골든 글러브([[유격수]] 부문)를 2번 받았다. 현역 시절에는 [[2루수]] [[강기웅]]과 함께하였던 키스톤 콤비가 막강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현역 시절에는 단 한 번도 [[한국시리즈]] 우승을 경험하지 못했고, 코치로 활동하면서 소속 팀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맛보았다.
[[2006년]]·[[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및 [[2010년 아시안 게임|광저우 아시안 게임]] 국가대표팀 코치로 발탁되어 활동했다. [[1999년]]을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고 [[2000년]]부터 [[김용희 (야구인)|김용희]], [[김응용]], [[선동열]] 감독 밑에서 코치로 보좌한 후, [[2010년]] [[12월 30일]] [[선동열]]이 경질되자 [[선동열]]의 후임으로 [[2011년]] [[1월 5일]]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하였다.<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09&yy=2011 류중일 감독 "신인 패기로 KS 우승 데뷔 축포 쏜다" ] - 매일신문</ref> 그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삼성 라이온즈]]는 오랜만에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 감독을 맞이하게 되었다.<ref>최초의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 감독은 [[서정환]]이고, 류중일은 [[삼성 라이온즈|삼성]] 출신 선수 중 선수 및 코치로 활동하면서 단 한번의 팀 이동 없이 감독이 된 첫 번째 경우이다.</ref> [[2011년]] 감독 부임 첫 해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1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으며, "야구 대통령"을 줄인 '''"야통"'''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ref>[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109280100191240017032&servicedate=20110927 류중일호, 우승을 가능케 한 키워드 4개] - 스포츠조선</ref> [[대한민국]]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한 [[2011년 아시아 시리즈]]에서 [[일본]] 챔피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소프트뱅크]]를 꺾고 [[대한민국]] 프로 야구 팀 최초로 [[아시아 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325476 '야통' 류중일 감독, 야신도 못한 亞 정상 위업] - OSEN</ref> [[2012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과 [[2012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뤄 냈다. [[2013년]] 정규 리그 우승과 [[2013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 후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었으나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2013년]] 시즌 후 계약 기간 3년의 조건으로 계약금 6억 원, 연봉 5억 원 등 총액 21억 원에 [[삼성 라이온즈]]와 재계약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72898 류중일 감독, 3년 재계약…총액 21억원 사상 최고 대우] - OSEN</ref> [[2014년 아시안 게임|2014 인천 아시안게임]]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되어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2013 WBC]] 1라운드 탈락의 쓰라림을 딛고 우승을 이뤄냈다. [[2014년]]에 정규 리그 우승과 [[2014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끌면서 팀의 사상 최초 통합 4연패를 달성하였고, [[2015년]] 역시 정규 리그 우승으로 5년 연속 정규 리그 우승으로 새 역사를 썼지만,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가 개최되기 전, 삼성 투수들의 해외 원정도박 파문으로 인해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 우승을 [[두산 베어스]]에게 내주고 만다. [[2016년]]에는 [[박석민]], [[야마이코 나바로|나바로]], [[채태인]]을 잃었고, 외국인 선수 농사 실패, 선수들의 줄부상과 부진으로 팀 최초 정규리그 9위에 머물게 되자, [[2016년]] [[10월 15일]] 계약 만료로 [[김한수 (야구인)|김한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기술고문을 맡게 되었다.
2017년 10월 3일 정규 시즌 최종전에서 계약기간 3년에 총액 21억원(계약금 6억원, 연봉 5억원)에 계약하며 [[LG 트윈스]] 1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09&aid=0003631314 오피셜 LG 공식발표, "양상문 단장-류중일 감독"] - OSEN</ref>
- 박명수(MC) . . . . 5회 일치
이렇게 무한도전 대박까지 캐릭터에 큰 변경이 없는 박명수의 흥망성쇠는 2000년대 방송의 개그 프로그램 트렌드의 변화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본인에게 한계가 있는 콩트라는 장르는 명백히 몰락하고 있었고, 인지도는 어느 정도 있지만 방송사를 대표할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개그맨들은 소속 방송사라는 둥지를 떠나 활동하기 시작한다. 박명수 역시 그러한 개그맨의 하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자기만의 개성있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었던 박명수는 무한도전과 X맨에서 출연과 하차, 재투입을 거듭하여 리얼버라이어티에 적응해냈고 이윽고 대표 예능인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리얼버라이어티의 선봉장에 위치한 것이 무한도전인 점을 생각해보면, 오늘 날 박명수를 논함에 있어 무한도전 전후는 커다란 기점임에는 분명하다. ~~하하 曰 : 형수님이 무한도전 보고 결혼한 건데 하차한다고 하니까 난리가 난 거야~~
[[유재석]]에게는 말로는 너만 없으면 내가 1인자였다느니 언젠가 내가 널 밟고 올라설거라니 떠들어대지만 속으로는 무명이었던 자신을 스타로 만들어준 그를 무척이나 아끼고 유재석 또한 이런 박명수를 못 버린다.[* 이것을 잘 보여준 때가 2012년 [[무한도전]]에서 [[무한도전 말하는대로|말하는대로 추격전]]을 할때인데 추격전이 끝나갈 무렵, 재석의 버스에 '왜'를 붙여주기로 한다. 그런데 말로는 잘되는 네가 '''꼴보기 싫으니까'''라고 했는데 막상 메모지에 적은 말은 잘 되는 네가 '''부러우니까.''' 이것만 봐도 그가 유재석을 질투하고 시샘하는건 그저 컨셉이란걸 알수있다.] 그런데 [[이윤석]]의 증언에 의하면 유재석이 MBC 진출할 때 선봉에 서서 반대한 사람이 박명수라고 한다. 그 때 당시에 유재석이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는 라이벌이라 여겨서라고 한다. ~~물론 지금은...~~
그 뒤로 개그맨이 되었지만 딱히 유명한 개그맨도 아니고 해서, 집안에서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첫 CF를 찍은 출연료를 현금으로 바꿔서는 검정 비닐봉투에 넣어서 아버지께 가져다 드렸다고 한다. 그때서야 폭풍 눈물을 흘리시며 '''"너를 [[쌍둥이]]로 낳을걸 그랬다"'''고 하셨다고 한다. ~~피는 못 속인다~~
* [[무도드림]]으로 영화 <아빠는 딸>에 카메오 촬영하고, 개봉을 기다리던 중 주연인 [[윤제문]]이 [[음주운전]]을 하였다.
2016 MBC 연예대상에서 고인인 구봉서가 공로상을 수상하자 제일 먼저 일어나 존경의 표시를 했고 뒤이어 유재석을 포함해 무한도전 팀이 일어났고, 다른 참석자들 전부 기립 박수를 하며 시상 끝까지 일어나 존경의 표시를 했다.
- 박철우(배구) . . . . 5회 일치
[[1985년]]생으로 [[김요한]]과 나이상 동기지만, 프로 데뷔가 엄청나게 빨랐던 것은 그가 고졸 자격으로 현대캐피탈에 입단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남자 배구판에서는 20년 전 경북사대부고에서 럭키금성(現 [[의정부 KB손해보험 스타즈|KB손해보험]])으로 직행한 김찬호 현 [[경희대학교|경희대]] 배구부 감독에 이어 2번째인 고졸 현역 데뷔 선수. 가난한 집안 사정과 [[이경수]] 드래프트 파동으로 인해 대학-실업 간 선수 수급에 대한 합의 등이 없던 상황을 이용해 당시 현대캐피탈 감독이자 ~~주로 부정적인 쪽으로~~[[스카우트]]의 귀재인 [[송만덕]]의 아이디어로 프로행을 선언, 초고교급 대어였던 박철우를 잡기 위해 삼성화재와 현대캐피탈이 모두 계약을 시도했고, 경쟁의 승리자는 현대캐피탈이 되었다. 학교 지원금(공식적으로 명지대에 일반 학생으로 입학한 케이스)을 포함해 총 '''계약금 8억 원'''을 받고 현대캐피탈에 입단했다. 이것이 대학연맹과 실업연맹 간 갈등 악화를 부채질했고, 결국 [[이경수]] 드래프트 파동이 정상화되었을 때 대학배구연맹은 '''고졸 선수의 프로 직행을 금지하는 조항'''을 프로 연맹에 요청해 공식적으로 명문화되었다.[* 이후 2013년 드래프트부터 이 조항이 삭제되어 고교졸업 예정 선수들도 드래프트에 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개정에 따라 지명된 선수가 송림고등학교 졸업 후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대한항공]]의 지명을 받아 입단한 [[정지석]]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런 중대한 결정을 주도한 당시 현대캐피탈 [[송만덕]] 감독은 그 해가 가기도 전에 [[방신봉]]의 항명 파동으로 인해 현대캐피탈 감독직에서 사실상 해임되었다는 것.[* 사실 박철우의 고졸 프로 진출보다 더 파격적인 사례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1990년대 초반 중학교 졸업 후 [[구미 KB손해보험 스타즈|럭키화재]]에 입단했던 이상욱. 그러나 이상욱은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1994-1995 슈퍼리그 직전 슬그머니 방출되었다.]
2라운드에서 다시 LIG를 만났는데 이 때 그가 얻은 점수는 '''1점'''! 3억 연봉을 받는 선수가 한 경기에서 이런 점수를 낸다면 이건 잘못되어도 보통 잘못된 게 아니다. 한 마디로 배구 FA 최초의 먹튀 사례를 만들었다는 것 말고 할 말이 없다. 더 기가 막힌 건 그나마 얻은 1점도 '''다이렉트 킬'''이기 때문에 공격 성공률은 0%이었다는 것! 2010년 1월 25일 열린 [[아산 우리카드 한새|우리캐피탈]]전에서도 또 한 번 1경기 1점을 올렸다. 정규 시즌에 1점을 기록한 경기가 두 번이 되었다. --이거 해결사 맞아?--
게다가 [[가빈 슈미트]]와 레오나르도 '레오' 마르티네스로 이어지는 삼성화재 외국인 선수 공격 점유율을 많이 내준 탓인지 공격감이 현대캐피탈에 있을 때보다 많이 떨어졌다. 그래서인지 정규시즌에도 박철우의 비중은 적어졌고, 설령 공격을 해도 벽치기가 잦아서 '''벽철우'''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2013 KOVO컵에서도 그 현상은 여전히 드러났다. 그런데도 팀 공헌도가 박철우보다 객관적으로 높은 [[여오현]]보다 많은 돈으로 FA 재계약을 했는데, 연봉이 무려 '''3억 3,000만 원'''이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FA가 된 [[여오현]]이 삼성화재로부터 2억 6천만원을 연봉으로 제시받았는데, [[여오현]]은 이를 거부하고 [[천안 현대캐피탈 스카이워커스]]와 연봉 2억 9천만 원에 3년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여오현]]은 KOVO컵에서 여실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며 현대캐피탈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 배슬기(배우) . . . . 5회 일치
2009년 당시 최고로 잘 나가던 작곡가 [[용감한 형제]]의 곡을 타이틀로 'Big show'라는 이름의 앨범을 내고 다시 복귀했다. 그런데 봉 마이크 2개를 놓고 좌우로 고개를 왔다갔다하며 노래를 부르는(...) 묘한 컨셉으로 나왔으며, 결국 이 앨범은 타이틀 곡 제목과 같은 운명을 맞고 침몰했다. 「'''지겨워'''」
뜻밖에도 월드컵 당시를 배경으로 한 한국, 독일 합작영화 Finale에 킬러 역으로 캐스팅, 영화를 찍어버렸다. 과연 그녀에게도 도약의 기회가 올 것 인가....영화는 개봉연기 끝에 2011년에 나올 예정이긴 하다. 참고로 그 영화 참가진 중 음악은 조영욱[* [[올드보이]]의 음악가로 유명하다.](...), 무술감독은 [[정두홍]](...).
2013년, 9월 27일 [[신성일]]과 출연하는 '야관문'이라는 영화 개봉 소식이 올라왔는데 '''배슬기 노출'''이라는 [[언플]] 속에 검색어에도 올라왔다. 문제는 하필 이날이 본인의 생일이라는 게... 야관문은 [[11월 7일]] 개봉했으나, 역시나 떠들석한 언플치고는 노출 수위는 그렇게 높지 않았고 시나리오 수준도 엉망이며 평가가 좋지 않다. 거기다 중간에 한 번 나오는 뒤태 나체 장면은 '''대역으로 밝혀졌다.'''
||<#c0c0c0> {{{#ffffff '''개봉연도'''}}} ||<#c0c0c0> {{{#ffffff '''제목'''}}} ||<#c0c0c0> {{{#ffffff '''배역 이름'''}}} ||<#c0c0c0> {{{#ffffff '''비고'''}}} ||
- 삼감의 난 . . . . 5회 일치
[[상나라]]의 왕족으로 [[주왕]]의 아들인 무경(武庚)은 [[주나라]]에 항복하여 옛 상나라 영토에 봉해지고, 이를 [[주문왕]]의 아들들([[주무왕]]의 동생들)이 감시하게 되었다. 감시를 맡은 주나라 왕자들을 삼감(三監)이라고 한다. 무경은 덕(德)이 있어 옛 상나라 영토를 부흥시켰고, 본래 감시를 맡은 주나라 왕자들은 오히려 무경에게 충성을 바치게 되었다. 반면 주나라는 주무왕이 젊은 나이에 병사하고, 어린 [[주성왕]]이 즉위하며 [[주공단]]이 섭정을 맡아 보좌하는 상태가 되었다.
제나라 제후로 봉해진 태공망 여상이 토벌에 나섯으나 3년에 걸쳐 싸워도 승리를 얻지 못했다. 이에 주공단은 제후들을 모아 친정에 나서게 된다. 본래 '친정'이라면 천자인 주성왕이 전장에 나서야 하지만, 어린 나이였던 주성왕은 나서지 않고 섭정인 주공단이 사령관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주공단이 왕위에 올랐다는 설도 있다.
삼감의 난이 진압된 뒤, 주공단은 상나라 세력을 분할하게 된다. 상나라의 제사는 주왕의 남동생 미자계(微子啓)가 이어받게 되며, 그는 [[송나라]](宋)에 봉해진다.
상나라의 옛 영토와 백성들은 주공단의 동생 강숙봉(康叔封)이 봉해지고, 이를 위나라(衛)라고 하였다.
- 손예진 . . . . 5회 일치
손예진의 다음 작품으로는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외출 (영화)|외출]]》(2005)로 두 편의 영화 모두 [[일본]],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등 아시아 전역에서 대히트를 기록하였으며,<ref>{{웹 인용|title=The Best Selling Films of 2004|url=http://www.koreanfilm.org/kfilm04.html|work=Koreanfilm.org|accessdate=2013-08-08}}</ref><ref>{{웹 인용|title=A Moment to Remember breaks Japanese record|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326|work=Korean Film Council|date=14 December 2005}}</ref><ref>{{웹 인용|title=Son Ye-jin to Star Alongside Bae Yong-joon in New Film|url=http://www.koreanfilm.or.kr/jsp/news/news.jsp?mode=VIEW&seq=163|work=Korean Film Council|accessdate=24 December 2004}}</ref> 《내 머리 속의 지우개》는 국내에서도 256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흥행하였다. 한편 일본에서는 각각 200만 관객을 동원하며 일본에서 개봉 된 역대 [[대한민국]] 영화중에서 흥행 기록 1, 2위를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손예진, ‘日 2005 외국영화 흥행 톱10’서 2관왕|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32332|출판사=마이데일리|날짜=2005-12-16}}</ref><ref>{{웹 인용|title=Films Starring Sohn Ye-jin Attract 10 Mil. Viewers in Korea, Japan|url=http://english.kbs.co.kr/hallyu/entertainment_news_view.html?No=147|work=KBS Global|date=28 December 2005}}</ref> 특히 《외출》에서 손예진은 20대 중반 주부이면서 남편과 불륜 관계였던 여자의 남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되는 여자 서영의 감정을 잔잔하면서 깊이 있게 그려내며 호평을 받알고, 이 영화로 제50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출연한 영화 《[[작업의 정석]]》에서 손예진은 최고의 선수, 작업계의 고수 한지원 역을 맡아 이 작품에서 과감한 섹시 댄스를 선보이는 등 이미지 변신에 성공하였고, 234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오싹한 연애> 손예진, <작업의 정석> 뛰어넘을까?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sec&oid=047&aid=0001991399|출판사 =오마이뉴스 |저자 =하성태 |날짜 = 2011-12-17 |확인날짜 =2017-09-16 }}</ref>
2010년, 손예진은 이새인 작가의 동명 소설을 기반으로 한 TV 드라마 《[[개인의 취향]]》로 1년 9개월여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고, 개인 날 태어났다고 개인이란 이름을 얻은, 이름처럼 밝고 털털하고 유쾌한 캐릭터이자 무늬만 여자인 덜렁이 아가씨 박개인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개인의 취향' 손예진 "나이에 맞는 역 하고싶었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023820|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김현록 |날짜 = 2010-03-25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듬 해, 2011년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 (드라마)|시크릿 가든]]》의 최종회에서 톱스타 역할으로 특별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시크릿가든' 카메오…'숨길 수 없는 폭풍 미모'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116195|출판사 =마이데일리 |저자 =강선애 기자|날짜 = 2011-01-17}}</ref> 같은 해 손예진은 호러 로맨스 코미디 영화 《[[오싹한 연애]]》로 2년 만에 스크린에 복귀했고, 기를 쓰고 쫓아다니는 귀신 때문에 연애는 커녕 가족과 친구로부터 버림받은 여자 강여리 역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오싹한 연애’로 컴백…그녀, 인생을 말하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81&aid=0002245920|출판사 =서울신문 |저자 =임일영 |날짜 = 2011-11-29 |확인날짜 =2017-09-16 }}</ref> 영화는 300만 관객수를 기록해 자신이 출연한 모든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흥행시키며 '로맨틱 코미디의 퀸'임을 입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역시 손예진, '오싹한 연애' 300만 개인 최고 흥행기록 달성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96&aid=0000005946|출판사 =스포츠월드 |저자 =김용호 |날짜 = 2012-01-17 |확인날짜 =2017-09-16 }}</ref><ref>{{뉴스 인용 |url=http://news.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newsType=&page=&contain=&keyword=&mi_id=MI0094703987|제목=<오싹한 연애> 최근 6년간 개봉한 로맨틱 코미디 중 최고 성적 |출판사=맥스무비|날짜=2012-01-03|확인날짜 =2017-09-16}}</ref> 2012년에는 재난 영화 《[[타워 (영화)|타워]]》에 출연하였고, 영화는 518만명의 관객수를 기록하며 성공을 거뒀다.<ref>{{웹 인용|title=Queen of romance returns in disaster flick|url=http://nwww.koreaherald.com/view.php?ud=20121217000947|work=The Korea Herald|date=17 December 2012}}</ref>
2013년, 손예진은 5월부터 7월까지 방영한 TV 드라마 《[[상어 (드라마)|상어]]》로 3년여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하였다. 또한 10월 개봉한 스릴러 영화 《[[공범 (영화)|공범]]》에서 정다은 역을 연기했다. 영화는 대한민국을 충격에 빠뜨린 유괴살인사건 공소시효 15일 전, 범인의 목소리를 듣고 사랑하는 아빠를 떠올리게 되면서 잔인한 의심을 갖게 되는 딸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본 영화에서 공동 주연을 맡게 된 [[김갑수 (배우)|김갑수]]와는 ‘연애시대’ 이후 두 번째로 호흡을 맞춘 작품이며, 김갑수의 부녀 역할을 맡아 연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스투매거진] 공범, 손예진 당신을 스릴러의 여왕으로 임명합니다.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77&aid=0003140577|출판사 =아시아경제 |저자 =장영준 |날짜 = 2013-11-28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 작품으로 제35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ref>{{뉴스 인용 |url=http://osen.mt.co.kr/article/G1110020088|제목=손예진, '해적'·'공범' 2관왕 후보가 의미하는 것|출판사=OSEN|날짜=2014-11-29}}</ref> 그리고 손예진은 2014년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서 카리스마 넘치는 해적단 대단주 여월 억을 연기했다. 영화는 조선의 옥새를 삼켜버린 귀신 고래를 잡기 위해 바다로 내려온 산적 장사정이 여자 해적 여월과 함께 바다를 누비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해적' 손예진 "女해적 여월, '으리으리'한 캐릭터"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1&aid=0000384846|출판사 =조이뉴스24 |저자 =권혜림 |날짜 = 2014-07-02 |확인날짜 =2017-09-16 }}</ref> 866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으며, 역대 출연작 중에서 가장 많은 관객수을 기록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해적' 손예진, 알고보면 변신의 여왕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42336|출판사 =텐아시아 |저자 =최보란 |날짜 = 2014-08-25 |확인날짜 =2017-09-16 }}</ref> 작품의 성공으로 3000만 배우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3000만 배우' 손예진이 충무로서 갖는 의미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532716|출판사 =TV리포트 |저자 =김수정 |날짜 = 2014-08-20 |확인날짜 =2017-09-16 }}</ref> 손예진은 이 작품으로 제51회 [[대종상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ref>{{뉴스 인용 |url=http://osen.mt.co.kr/article/G1110014441|제목='대종상' 손예진, 연기·흥행 갖춘 유일무이 女우 탄생|출판사=OSEN|날짜=2014-11-22}}</ref> 2015년에는 한중합작 코미디 액션 영화 《[[나쁜놈은 죽는다]]》에 출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나쁜 놈은 죽는다' 손예진, 카리스마+살벌한 분위기 풍기는 액션배우로 변신 |url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70216.99002115403|출판사 =국제신문 |저자 =디지털뉴스부 |날짜 = 2017-02-16 |확인날짜 =2017-09-16 }}</ref>
2016년에는 손예진이 주연을 맡은 두 편의 영화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 (영화)|덕혜옹주]]》가 개봉 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손예진 "'비밀'덕혜'가 2016년의 나..말그대로 다사다난"(직격인터뷰①)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578621|출판사 =스타뉴스 |저자 =김현록 |날짜 = 2016-12-21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경미 감독의 영화 《비밀은 없다》는 비록 25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손예진은 평론가의 호평을 받으며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제22회 [[춘사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비밀은 없다' 손예진 연기, 촬영·미술이 살렸다? |url =http://www.munhwa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75111|출판사 =문화뉴스 |저자 =양미르 |날짜 = 2017-09-02 |확인날짜 =2017-09-16 }}</ref> 대한민국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삶을 그린 [[허진호]] 감독의 영화 《덕혜옹주》는 560만명의 관객수를 동원하며 여성 원톱 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흥행도 일궈냈으며, 손예진의 인생작이라는 호평을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핫 아이콘★②] 손예진 "'덕혜옹주'·'비밀은 없다', 두려움 많았던 작품"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427&aid=0000026414|출판사 =OBS 독특한 연예뉴스 |저자 =조연수 |날짜 = 2017-01-02 |확인날짜 =2017-09-16 }}</ref> 이 작품으로 제37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5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부문 여자최우수연기상을 수상하였다.
2017년 5월, 손예진은 스릴러 영화 《[[협상 (영화)|협상]]》에 캐스팅 되었다. 영화는 서울지방 경찰청 위기협상팀의 유능한 협상가가 상사를 납치한 인질범과 대치하며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작품으로 위기협상팀 경위 하채윤 역을 연기한다.<ref>{{뉴스 인용 |제목 =[스타와치]덕혜옹주→경찰, 제복 입은 손예진에 거는 기대 |url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706231109536710|출판사 =뉴스엔 |저자 =배효주 |날짜 = 2017-06-23 |확인날짜 =2017-09-16 }}</ref> 그리고 다음 작품으로 [[지금 만나러 갑니다|동명의 영화]]를 기반으로 한 멜로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18년 영화)|지금 만나러 갑니다]]》에 캐스팅 되었다. 영화는 1년 후 비가 오는 날 다시 돌아오겠다는 믿기 힘든 약속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아내가 기억을 잃은 채 남편과 아들 앞에 다시 나타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2018년 개봉되었다.<ref>{{뉴스 인용 |제목 =[취중토크③] 손예진 "치열했던 20대 보다 30대가 더 좋아요"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682769 |출판사 =일간스포츠 |저자 =김연지 |날짜 =2017-06-16 |확인날짜 =2017-09-16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70917033455/http://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682769# |보존날짜 =2017-09-17 |깨진링크 =예 }}</ref>
- 신민아 . . . . 5회 일치
한 때 CF쪽에서는 활발한 활동을 하였으나, 유독 [[영화]]와는 인연이 없는지,--드라마라고 아닌건 아닌데..-- 아니면 작품을 선택하는 안목이 낮은건지 출연한 작품 중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 '''말아먹었다'''. 그 덕분에 ''''한국 영화사 최고의 [[핵잠수함]]'''', ''''[[충무로]]의 흥행 [[부도]] [[수표]]''''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데[* 의외로 이름난 드라마작가나 유명 [[영화 감독]]들과 작품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하게 CF나 영화에 캐스팅되고 있어서 '[[스폰서]]가 빵빵하다', '[[언론플레이]]에 능하다'라는 의견도 다수 가지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공히 '히트작이 없음'에도, 'CF에 있어서는 가히 도배'를 하고 있는건 미스테리다. 흥행 관련해서는 비슷한 내용이 [[봉태규]] 항목에도 똑같이 존재한다. 2010년대 들어서는 남배우로 봉태규보다 ~~새로 떠오르는 국밥배우~~ ~~흥행전선 먹구름~~[[김강우]]와 더 많이 비교되는 것 같다. 다만 김강우의 경우 2017년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살아난다는 차이점이 있다.
* 13년 조선족 감독인 [[장률]]의 신작 [[경주(영화)|경주]]에 캐스팅 되었다. 이미 [[엄태웅]]과 [[윤진서]] 뿐만이 아니라 비전문배우에게도 명연기를 끌어낸 감독인지라 어떻게 될지 귀추가 주목되었는데, 2014년 인디 영화급으로 소규모 개봉을 해서 흥행에는 재미를 못 봤지만 연기는 호평을 들었다.
* 2014년 10월에 개봉한 <[[나의 사랑 나의 신부(2014)|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비수기임에도 비슷한 시기에 대형 경쟁작이 적어서 그런지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흥행을 하고 있기에 '''드디어''' 잠수함이라는 오명에서 벗어났다. 사실상 신민아의 영화계 데뷔 이후 첫 흥행작이라고 할 수 있다. 최종 214만 명 달성.
* 2015년 10월 15일 약 7년째 꾸준히 기부를 해온 사실이 기사로 나왔다. 새터민들을 돕는 단체 및 사랑의 열매를 통한 매달 200만원, 연말에는 5천만원에서 1억정도의 액수를 기부해 왔다고 한다. 그 외에도 싱글맘들을 위해 분유를 기부하기도 하고 다문화 가정 아이들을 돕기도 하는 등 그동안 기부한 액수가 약 10억 원 정도라고 한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9&aid=0003178574|관련 기사]] 특히 새터민들을 돕는 행사는 몇 년전 공개 행사를 할때 참석하였는데 드라마 작가인 노희경씨와 함께 하기도 하였다. 불교 단체를 통해 기부한 적도 있는데, 재미있게도 신민아는 개신교 신자. 이따금 절에서 목격담이 있기도 하고, 오래 전 인터뷰에서 자주 가는 장소 중 하나가 봉은사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타종교에 대한 편견은 없는 모양. --드라마 고사장에서 절을 하지는 않는 정도--
- 안기효 . . . . 5회 일치
2014년 9월쯤부터 아프리카 방송을 시작했다. 토스계의 지영훈의 포지션이 되었다. 초창기 실력은 처참한 수준이였으며 [[하늘(1994)|하늘]]의 저그에게도 지는 모습을 보인다. [[전태규]]와 [[김봉준]]의 라이벌 포지션이며 회사도 그만두고 방송에 전념하고있다.
2018년 2월 25일 ASL 시즌5 부산 예선에 참가하였다. 예선 3조 2라운드에서 [[박수범]], 예선 준결승에서 [[김봉준]]을 차례로 격파하고
||||||||||||<table align=center><:>'''철봉기쌍'''||
||<:>[[철구(BJ)|철구]]||||<:>[[김봉준]]||||<:>[[기뉴다]]||||<:>'''안기효'''||
||<:>[[강민]]||||<:>[[전태규]]||||<:>'''안기효'''||||<:>[[김봉준]]||
- 안석환 . . . . 5회 일치
* 1999년 [[SBS]] 특별기획 미니시리즈 《[[고스트 (드라마)|고스트]]》 ... 축구하다 죽은 귀신 허봉구 역
* 2003년 [[SBS]] 드라마 스페셜 《[[때려]]》 ... 봉기봉 관장 역
* 2009년 [[KBS2]] 월화미니시리즈 《[[꽃보다 남자 (대한민국의 드라마)|꽃보다 남자]]》 ... 잔디의 부, 금일봉 역
* 2018년 [[tvN]] 토일드라마 《[[나인룸]]》 ... 봉사달 역
- 안재욱(배우,가수) . . . . 5회 일치
2004년 [[문화방송|MBC]] 천생연분에서 능청스러운 연하남 김석구 역할을 맡아 상대작이 천국의 계단이었음에도 불구,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또 그해 [[KBS 2TV]] 오 필승 봉순영에 출연해 그해 연기대상에서 최우수상을 받게된다.
|| KBS || [[오! 필승 봉순영]] || 오필승 || ||
||<rowbgcolor=#c0c0c0> {{{#white '''개봉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2004년 한국방송촬영감독연합회 그리메 시상식 최우수남자연기상 《오필승 봉순영》
* 2004년 [[KBS 연기대상]] 최우수연기상, 베스트커플상(with [[박선영(1976)|박선영]]) 《오필승 봉순영》
- 왕당파 . . . . 5회 일치
* 귀족, 성직자 등 왕정의 기득권 세력이 핵심 인력풀을 형성하는 경우가 많다.(다만 왕당파가 곧 기득권 세력이라고 볼 수는 없다. 하층민들 가운데서도, 공화제 이념에 의식화 되지 않았거나, 봉건적 충성심에 감화되어 왕당파를 지지하는 경우는 적지 않다.)
[[프랑스]]의 경우, [[프랑스 혁명]]을 시발점으로 하여 공화파와 왕당파가 나타났다. 왕당파는 [[부르봉 왕조]]의 복권을 주장하였으며, 혁명을 일으킨 공화파와 피를 피로 씻는 혈투를 벌였다. [[부르봉 왕조]]는 군주의 지위를 상실했지만, 수백년간 프랑스를 다스린 왕조였기 때문에 부르봉 왕조의 권위는 여전히 상당히 높아서 주로 보수적인 농촌을 중심으로 막대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였다가 실각한 이후, [[보나파르트 왕조]]를 추종하는 왕당파도 나타나는데 이들은 보나파르트 주의라고 한다. 부르봉 왕조는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프랑스 왕위에 얻어 복고왕정을 시작했으나, 재차 혁명으로 타도되면서 왕당파는 몰락하게 되고 유의미한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됐다. 보나파르트 주의는 루이 나폴레옹이 [[대통령]]을 거쳐서 [[나폴레옹 3세]]로 즉위하면서 실현되었으나, 역시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하면서 보나파르트 주의도 침몰하게 된다.
- 원피스/872화 . . . . 5회 일치
* 옥갑은 개봉하면 대폭발을 일으키는 장치가 있었는데, 그걸 모르는 상태로 루피에게 주어졌던 것. 그게 빅맘에게까지 간 것이다.
* 이런 사실은 외부로 알려지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고, 옥갑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형태로 개봉, 폭발을 일으켜 홀케이크 성을 붕괴시킨다.
* 그렇게해서 현재. 다과회와 암금왕 루 펠드와 스튜시 등이 얽혀서 복잡한 경로로 개봉된 옥갑은 재기능을 충실히 이행했다. 성 밑으로 떨어진 옥갑이 깨지면서 기폭장치가 작동, 홀 케이크 성 절반을 날리는 거대한 폭발을 일으켰다. 홀 케이크 아일랜드 바깥에서 관측될 정도의 대폭발. 성 안은 난데없는 폭발음과 성 일부의 소실, 이어지는 기울음으로 아비규환이다. [[타마고 남작]]이 상황을 종합해 보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가능성이 떠올라 버렸다.
>설마... 쓰러지고 있는 건가봉
>홀 케이크 성이!! 쓰러지고 있는 거다봉!!
- 은혼/627화 . . . . 5회 일치
* [[헤도로]]의 꽃을 꺾어버린 [[사카타 긴토키]]. 헤도로의 꽃은 그의 사악한 본성을 막는 봉인이었다. 곧바로 마왕의 재림이...
* 마왕의 봉인은 완전히 풀리지 않았지만 헤도로는 선한 인격의 "헤도로"와 사악하고 파괴를 꿰하는 "헤도라"의 인격이 공존하는 위험한 상태가 된다.
* [[헤도로]], 요괴 군단 등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적들이 속속 등장하자 해방군은 대오도 없이 도주하기 시작한다. 힘겹게 싸웠던 가부키쵸 주민들은 거짓말처럼 무너지는 해방군을 바라보며 비로소 자신들의 승리를 실감한다. 해는 지평선에 걸려있고, 승리를 자축하는 주민들의 환호성이 에도에 울려퍼진다. [[가구라]]와 [[시무라 신파치]]는 대장이자 선봉장이었던 [[사카타 긴토키]]를 찾아 승리의 기쁨을 나누려 하는데...
다시 마왕의 봉인이 열렸다. 사악한 헤도로는 인류 따윈 그저 자신이 살려두고 있었을 뿐인 힘없는 꽃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이번엔 긴토키가 심혈을 기울여 강력 본드로 접착을 시도한다. 효과가 있어서 다시 헤도로를 선한 인격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지만 너무 강한 접착력 때문에 긴토키의 손까지 붙어 버린다.
긴토키는 필사적으로 손을 떼려고 하다 그만 파라파헤븐 꽃을 뿌리째로 뽑아버리고 만다. 좋은 이야기를 하던 헤도로는 꽃이 떨어지자 구멍이란 구멍에서 전부 피를 토해낸다. 그리고 온건했던 그가 긴토키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고 탓하며 "그 녀석"의 봉인이 풀렸다고 소리치기 시작한다.
- 이경희 (1880년) . . . . 5회 일치
[[1919년]] [[3·1 만세 운동]]이 좌절을 당하자, 만주에서 무장 투쟁을 계획하였다. 그러다 [[지린 성]](吉林省)에 [[김원봉]](金元鳳), [[김시현]], 유시태(柳時泰), 이성우(李成宇), 곽경(郭敬), [[김지섭]](金祉燮) 등이 찾아오자 이들과 함께 [[의열단]](義烈團)의 조직에 참여하고, 가입하였다. 이후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자금과 무기를 마련하는데 노력했다.
[[1923년]] [[의열단]] 단원으로 비밀거사를 준비하여 5월의거를 계획, 국내에 잠입하였다. [[1923년]] [[김원봉]] 의 지령아래 [[김지섭]], [[김시현]](金時顯), 유시태(柳時泰), 홍종우(洪鍾佑), 황옥(黃鈺) 등과 모의하여 [[중국]]과 [[만주]]로부터 무역 목적으로 [[안둥현]]에서 [[쌀가마]]에 숨겨서 국내로 반입해온 폭탄 36개, 권총 13정, 폭탄장치용시계 6개와 뇌관 여러정, 수류탄 10발,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혁명선언서]](革命宣言書)의 인쇄 사본 및 [[조선총독부]] 관공리에 대한 투항권고 격문 사본 2,000매 등을 반입, [[1923년]] [[3월 15일]] 이를 국내에 반입시키는데 성공하였다.
시신은 [[대구시]] 무태 동변동(현 [[대구광역시]] 북구 동변동) 가람봉에 안장되었다.
* [[김원봉]]
[[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구광역시장]][[분류:의열단]][[분류:신간회의 인물]][[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윤치호]][[분류:안창호]][[분류:김구]][[분류:이회영]][[분류:김원봉]][[분류:허정숙]][[분류:조병옥]][[분류:이승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인천 이씨]]
- 이대근 (조선) . . . . 5회 일치
아버지는 도촌 [[이수형]]이고 어머니는 문절공 무송헌 [[김담]](金淡)의 딸 예안김씨이다. 연산 2년(1496)에 진사하고 음직으로 감찰과 홍천현감을 역임하였다. 그가 선영길에 순흥 청다리를 지날 때마다 말이 피해가기에 살펴보니 금성대군이 화를 당한 곳이었다. 그날 밤 [[금성대군]]이 그의 꿈에 현몽하여 봉축하고 단을 쌓았다.
《순흥읍지(順興邑誌)》에 의하면 그는 선영을 다녀오던 중 순흥 청달리를 지날 때 그가 탄 말이 길을 피하여 비껴가는 곳이 있으므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하마 후 살펴본 뒤 이곳이 금성대군이 피흘린 곳이라 생각하여 의심을 품은 채 지나갔다. 그날 밤 이대근의 꿈에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나타나 그 곳은 자신이 피흘린 곳임을 말함으로써 곧 府事와 함께 사람을 시켜 조사한 후 이 곳을 봉축하고 단을 쌓았다. 이를 [[금성단]](錦城壇)이라 부른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사제동 후곡 아도유좌 상하연봉 고상비하 제사가 있고 10월12일에 시제를 지낸다.
- 이소선 . . . . 5회 일치
이소선은 1947년 전상수와 결혼하였다. 전상수의 아버지는 대구시 남산동에서 포목상을 하였다. 전상수는 의류 제조 공장에 다니다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사건]]에 가담하였다. [[미군정]]과 경찰의 잔혹한 탄압으로 사건이 마무리 된 후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봉틀을 마련하여 직접 옷을 만들어 팔았다. 이소선은 중매로 결혼하였고 결혼 전에야 신랑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304180521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25) - 결혼하기 싫어 사흘 굶어], 경향신문, 2009년 2월 25일</ref> 이소선은 남편에게 그리 정이 가지 않았다. 1948년 음력 8월 24일 첫 아들 [[전태일]]을 낳았다. 전태일을 갖을 때 잉어가 구슬을 가슴에 안겨주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85093 "시집가기 싫어"... 아버지 산소로 도망가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4), 2014.06.12</ref>
서울에서 다시 이리 저리 떠도는 생활을 하던 가족은 시동생의 권유에 못이겨 대구의 시댁으로 내려갔다. 전태일은 부산까지 떠돌다 비쩍 마른 모습으로 대구에 왔다. 대구에서 다시 모인 가족은 다시 재봉일을 하며 살았고 정식으로 초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한 전태일은 청옥고등공민학교에 입학하였다. 전태일은 스스로 쓴 수기에서 이 학교에 다니던 시절을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기억했다. 그러나 전상옥의 사업은 결국 망했고 다시 술에 의지하게 되었다. 이소선은 술에 취해 아이들을 때리는 전상옥을 보며 절망을 느꼈다. 전상옥이 집을 나가 버리자 남은 가족들은 꼼짝없이 굶게 되었다. 1964년 이소선은 일을 구하기 위해 홀로 서울로 상경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04520 몽땅 굶어죽을 판... 서울로 가자],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24), 2014.06.12</ref>
하혈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게 되자 식당에서 번 돈은 모두 병원비로 쓰였다.<ref name="오마이뉴스27">[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04699 애들 부끄럽지 않게... 미군 지프차를 돌려보내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27), 2014.06.12</ref> 이소선은 병원을 나온 뒤 시장에서 우거지를 주워 삶아 팔았다.<ref name="경향42" /> 이소선과 함께 살게 된 전태일은 남대문시장을 돌며 구두닦이며 신문팔이를 하며 지냈다. 그러던 어느날 거지들 틈에서 동생 전태삼을 발견하였다. 전태삼은 어머니와 형을 찾아 무작정 서울로 온 뒤 거지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이후 전태일은 남대문에서 돈을 벌고 태삼은 달동네의 물지게를 지어 생계를 도왔다. 전태일은 아동보호소에 맡긴 순덕이를 찾아오기 위해서라도 집을 마련하고 싶었고 [[평화시장]]의 미싱 보조가 되었다.<ref name="오마이뉴스27" /> 가족은 지인 집 마루에 자리를 마련하고 지내고 있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19181908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4) - 봉제공장‘시다’로 첫 출근], - 다시 만난 母子의 다짐], 경향신문, 2009년 4월 26일</ref>
당국은 이재민에게 천막 하나를 주고 [[도봉동]] 개울가로 내몰았다. 이소선의 가족은 [[쌍문동]] 공동묘지 근처 208번지로 이사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2175815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5) - 판자촌에 다시 모인 가족], 경향신문, 2009년 4월 22일</ref> 이소선이 살던 쌍문동 집은 무허가 판잣집이었다. 간혹 단속반이 와서 헐고 갔기 때문에 시멘트 블럭만을 쌓아 올려 벽을 만들었다가 헐리면 다시 세웠다. 전태일은 단속반이 집을 헐며 블럭을 부수면 다시 사야하기 때문에 단속반이 온다는 소리를 들으면 미리 집을 헐어 두었다고 한다.<ref name="경향46">[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31745425&code=2100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6) - 쌍문동 208번지], 경향신문, 2009년 4월 23일</ref> 이 무렵 전태일은 평화시장의 미싱사가 되었으며 동생 순옥이 만한 어린 소녀들이 퀴퀴한 다락방에서 쉴 새 없이 일하다 폐병을 앓는다고 안타까워 했다. 전태일은 공장에서 있었던 일을 어머니께 자세히 말하곤 했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4261859022&code=210100&s_code=af07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47) - 춥고 배고픈 어린 시다들], 경향신문, 2009년 4월 27일</ref>
* 1995년 11월 18일 영화'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개봉 상영 참석.
- 임기영 . . . . 5회 일치
|연봉 = 1억 3,000만원 (2018년)
[[2017년]] [[4월 18일]] [[kt 위즈]]와의 경기에서 시즌 2승이자 데뷔 첫 완봉승을 기록했으며<ref>{{뉴스 인용
[[2017년]] [[6월 7일]]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시즌 7승이자 시즌 두번째 완봉승을 거뒀다<ref>{{뉴스 인용
| 제목 = [카스포인트] '완봉승' 임기영, 한화 상대로 16이닝 1실점 '호투'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정성왕후 . . . . 5회 일치
1692년 음력 12월 7일 술시에 가회방 사제에서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년), 연잉군(延仍君, 훗날의 영조)과 길례를 행하고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봉해졌다.
혼인 첫날 밤 연잉군이 그녀의 손을 보고는 왜 이리 곱냐고 물어보자 고생을 안한 덕에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아 그리하였다고 대답하니 연잉군이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를 깔본 것으로 간주하고 이후로 찾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1721년]],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자 세제빈(世弟嬪)이 되었으며 [[1724년]], [[조선 경종|경종]]이 승하하고 왕세제인 연잉군이 조선의 21대 국왕(國王)으로 즉위하자 왕비(王妃)로 책봉되었다.
** 조모 : 증 정경부인 [[안동 김씨]](贈 貞敬夫人 安東 金氏, 1630~1709) - 참봉 김정지(參奉 金鼎之)의 딸
*** '''어머니''' : 잠성부부인 '''[[우봉 이씨]]'''(岑城府夫人 牛峰 李氏, 1660~1738)
- 정칠성 . . . . 5회 일치
|저자=전봉관
1938년 5월 함경남도 장진에서 삼포금광배급소 주임으로 일하면서 생활하였다.<ref name="dispose"/> 정치 활동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여 [[조선총독부]]의 의심의 눈을 피한 그는 지하활동을 하는 [[박헌영]], [[김조이]], [[조봉암]] 등과 수시로 연락하며 정세를 살폈다.
[[1945년]] [[8월]]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고 [[조선공산당]]이 재건되자 [[경성]]으로 올라가 [[박헌영]]의 재건파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다. [[8월 16일]]부터는 [[건국준비위원회]]에도 참여하였다. [[미군정]]이 시작되자 [[서울]]에서 [[좌익]] 운동에 참여하였다. [[1945년]] [[9월]] [[대구]]의 [[조선공산당]] [[경상북도]]지구당 부녀부장이 되고,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에도 선출되었다. 그러나 정칠성은 시중의 조롱과 멸시를 당했다. 당시 [[조선공산당]]은 "봉건유제 타파하여 여남평등 이룩하자!"고 부르짖던 진보적 정당이었고, 그는 공산당의 간부였지만 여전히 기생을 팔반천인의 하나로 여기던 시절이었고, 정칠성은 기생 출신이 정치를 한다고 야유를 보냈다.
정칠성은 일제라는 식민지 억압구조와 조선의 봉건적 구습의 테두리 속에서 얽매여 있던 여성들의 의식부터 깨우고자 노력하였다. 그녀는 '가정과 사회에서 무시당하고 열등한 인간취급을 받던 여성들에게 잠에서 깨어나라고 강하게 호소하였다. 그리고 평생을 여성해방운동을 위해서 투신하였다. 정칠성이 화류계에서 벗어나서 사회주의여성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었던 힘도 자유로운 한 인간으로서의 해방을 갈망했던 몸부림에서 나왔으리라<ref name="dispose"/> '는 시각도 있다.
* [[김원봉]]
- 킹덤/513화 . . . . 5회 일치
* 위나라의 [[봉명]], 한나라의 [[왕안왕]], 초나라의 [[와린]]도 해방 소식을 듣고 각기 생각이 복잡해진다.
* 위의 봉명은 진이 실패할 것으로 내다보고 연합군이 소멸하길 기다려 진을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 와린도 진의 전략을 간파하고 봉명이 진나라를 칠 것도 예상, 거기에 맞춰 초나라가 북상하면 초나라가 중화를 손에 넣는다고 생각한다.
* 진의 군대가 열미를 빠져나왔다는 소식은 빠르게 중화 전토로 퍼진다. 위나라의 의자성. 전선에서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봉명]]은 진나라의 진군 소식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인다.
* 장소는 다르지만 봉명의 의견도 와린과 일치한다. 그는 주광에게 그러한 견해를 전하며 개맹군을 의자성으로 불러들이게 지시한다. 조에서 진군이 소멸하는 것에 맞춰 대치 중인 [[등(킹덤)|등]]군을 격파하고 진나라를 칠 것이다.
- 킹덤/524화 . . . . 5회 일치
* [[왕분]]의 측근인 [[관상]]은 이런 점을 설명하며 분하지만 지금은 아광과 그 부대가 왕분과 옥봉대의 몇 배는 더 강하다고 냉정히 평한다.
* 대기하고 있으란 명령을 들었던 왕분의 옥봉대가 독단적으로 전장에 끼어든 것이다.
* [[왕분]]과 옥봉대는 총대장 [[왕전(킹덤)|왕전]]의 지시로 전장에서 물러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광군이 적과 비등하게 부딪히자 모두가 감탄했으나 [[관상]]만은 그저 맞먹을 뿐이 아니며 아광군이 강한건 지금부터라고 말한다. 곧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양군의 제 1열은 적과 부딪히면서 큰 희생자를 냈다. 아무리 급박한 전장이라도 이렇게 격돌하고 나면 서로 부상자와 시신에 가로막혀 잠시 물러설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아광군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제 1열의 병사들을 방패로 삼고 넘어뜨리고 짓밟으면서 계속 전진했다. 관상은 선두의 기마들은 설사 그 앞에 있는게 자기 가족이라 해도 결코 속도를 늦추지 않으며 무엇이든 짓밟고 무너뜨릴 각오 뿐이라고 말했다.
* 그 차이야 말로 아광군이 정면에서 격돌해 결코 패배한 적이 없는 강군으로 만들었다. 곧 전선의 균형이 크게 깨지며 조군을 밀어냈다. 관상은 지금 옥봉대의 기마대도 충분히 강하며 진군 전체를 통틀어봐도 손꼽히는 수준이라 인정했다. 그러나 저같은 냉혹함 승부욕을 발휘한 적은 없었다.
* 이 정체불명의 기마대는 마남자의 눈에도 들어왔다. 그 기마대는 곧 말머리를 돌려 마남자가 있는 주공 3천을 향해 돌진해왔다. 분명 진군의 별동대다. 주공의 중심을 쳐서 전위를 고립시키려는 계산이다. 마남자는 [[친비]]를 시켜 우측에 나타난 새로운 적을 방어하도록했다. 친비는 기마대를 이끌로 적이 접근하기를 기다려 요격을 가한다. 그러나 적의 선두가 눈부신 창술을 펼쳐 친비와 그 부하들을 일소한다. 이들은 왕분과 옥봉대였다. 그렇게 얌전히 있으라고 일렀건만 결국 멋대로 전장에 들어와 버린 것이다. 관상이 나중에 아광에게 한 소리 듣겠다 투덜대지만 왕분은 "시끄러" 한 마디로 대꾸했다.
- 토리코/393화 . . . . 5회 일치
* 하지만 그가 스스로 "어리석다"고 말한 것에 블루 니트로 페어는 수긍하지 못한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그 시절. 아카시아와 동행하던 페어는 문득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동포들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은 아카시아 안에 있는 네오의 존재와 블루 니트로가 세운 봉인 계획을 설명하던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아카시아가 자세히 묻자 페어는 실언이었다며 그런거 보다 봉인 계획에 협조를 부탁한다고 당부한다. 하지만 아카시아는 어딘지 석연치 않은 표정이다.
* 그로부터 얼마 후. 아카시아는 페어의 협조요청을 받아들이고 네오의 봉인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 페어에게 이것저것 지식을 얻던 아카시아는 문득 "식욕의 악마에게 잠식 당하지 않는 법"에 대해 묻는다. 아카시아는 그것이 네오에게 먹힌 식혼들을 구하는 열쇠가 될지 모른다고 여긴 것이다. 그는 만약 그 식혼들이 네오 안에서 살아 있는 거라면 반드시 꺼내줄 방법도 있을 거라고 역설하는데 페어는 쓸데없는 소리라 일축하며 혹시 네오 때문에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거냐고 묻는다. 페어는 과거 네오의 소행은 악행도 뭣도 아닌 그저 식사이며 지금와서 아카시아가 책임을 느낄 이유는 없다고 말한다. 아카시아는 그저 자신 안의 식욕에 대한 수수깨끼를 해결하고 싶은 거라고 항변하지만 페어는 귀담아 듣지 않고 풀코스의 출연이 가까웠으니 플로제의 설득이나 신경쓰라고 말한다.
페어의 선역화와 함께 어느 정도 가능성이 생겼던 아카시아의 선역화가 기어이 완성. 사실 아카시아가 선한 목적을 가지고 위악하고 있을 거라는 설은 꾸준히 있었지만 지로를 죽이던 시점에서 완전히 폐기되다시피했다. 아카시아의 계획은 네오 안에 갇힌 식혼들을 구하고 블루 니트로들이 잃어버린 동포와 식재들을 복구한다는 것. 우주적인 입장에서 보면 네오에게서 동맥경화 일으키듯 막혀버린 맛의 순환이 재개되는 것이니 블루 니트로들이 세운 봉인 계획에 비해 훨씬 이로운 것이다.
또 페어는 센터를 먹은 아카시아를 네오에게 먹여 완전히 부활시킨 후 봉인하려 들었고 이게 원래 합의됐던 계획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아카시아에게 설득 당해 다른 블루 니트로들에겐 비밀로 새로운 작전을 짠 걸로 묘사된다. 이 또한 모순된 묘사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요원 . . . . 5회 일치
* 선봉 - "최초가 된다는 것에 미덕이 있다."
선봉 스킬 요구.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부대의 돌격 보너스 +5,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함선의 현측 손상도 +15%, 해안포격 사거리 +2
선봉 스킬 요구.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부대의 정확도 +5,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함선의 정확도 +5%, 해군 화력지원의 반경 -10m
수호자, 선봉 스킬 요구. 지휘력 +1, 이 요원의 영향력 범위 +40%,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부대 및 함선의 유지비 -15%
선봉, 불굴의 무사 스킬 요구.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부대의 재보충률 +10%, 이 요원이 지휘하는 모든 부대의 캠페인 이동력 +10%, 이 요원이 머물고 있는 지방의 억제력 +2, 약탈 수입 +15%
- 판타스틱 포(2015년 실사영화) . . . . 5회 일치
[[미국]] [[영화]]. [[마블 코믹스]]의 [[판타스틱 포]] 실사영화다. 2015년에 개봉했으며 개봉일은 8월 7일(미국기준). 국내 개봉은 8월 20일.
로튼토마토 지수가 20%로 시작하더니 그것이 14%로 하락했다.(...) 그리고 이후 더 하락.(...) 이외에도 각지에서 안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에서도 개봉했는데 역시 평이 안좋다. 반지닦이에서 유래해 고무닦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엑스맨 실사영화 시리즈]]와 크로스오버에 대한 이야기가 돌았으나 영화 개봉 이후 그럴 일은 없다고 한다. 본 영화의 참패가 많은 영향을 줬을 것으로 추측된다만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 페어리 테일/503화 . . . . 5회 일치
* 루시 자신도 결박되어 있는데 범인은 디마리아. 자신이 잡혔을 때처럼 마봉석을 이용해 묶어놨다.
* 단순히 의자에 묶어놓은게 아니라 마봉석까지 사용했는데, 범인은 디마리아.
* 루시는 브랜디쉬가 살아있는 걸 기뻐하고 브랜디쉬는 마봉석 수갑으로 디마리아를 구속하라며 그녀의 마법이 시간정지라고 알려준다.
* 디마리아가 어디서 갑자기 마봉석을 꺼내왔는지는 불명. 구출될 때 챙겨온 건가?
* 그녀 말에 따르면 제국엔 마봉석 같은 아이템은 없는 모양이다.--후진국이네--
- 하동부대부인 . . . . 5회 일치
{{인용문|옛적에 우리 선조 대왕께서 즉위하신 지 3년째 되는 기사년에 덕흥군을 추승하여 덕흥 대원군으로 하였고, 부인 정씨(鄭氏)를 봉하여 하동 부부인(河東府夫人)으로 하였으며, 자손이 습직(襲職)하여 계속 대군(大君)의 예에 따랐습니다.|《조선왕조실록》인조 13권, 4년(1626 병인 / 명 천계(天啓) 6년) 7월 27일(정유) 1번째기사}}
이를 전례로 삼아 [[조선 인조|인조]] 역시 자신의 어머니 구씨를 부부인으로 책봉하여 연주부부인으로 삼았다가<ref>《승정원일기》[http://sjw.history.go.kr/inspection/search_result_list.jsp?oflag=0&M=0&query=%E9%80%A3%E7%8F%A0%E5%BA%9C%E5%A4%AB%E4%BA%BA&set_id=596444&selK=1&selT=1&query_im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9%80%A3%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7%8F%A0%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BA%9C%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5%A4%AB%3C%2Fspan%3E%3Cspan+class%3D%22newbatang%22%3E%E4%BA%BA%3C%2Fspan%3E&x=21&y=7 연주부부인]</ref>, 이후 [[인헌왕후]]로 추존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 철종|철종]] 즉위 후 [[조선 철종|철종]]의 생부로서 대원군으로 추증된 [[전계대원군]]의 세 부인이 부대부인으로 봉해졌으며<ref>《조선왕조실록》철종 1권, 즉위년(1849 기유 / 청 도광(道光) 29년) 6월 17일(계미) 1번째기사</ref>, 이후 [[조선 고종|고종]]의 생모 여흥민씨 역시 부대부인으로 봉해져 왕족부인으로서 왕의 사친이 된 여성은 부대부인으로 봉작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현대 국어사전에는 부대부인을 왕의 사친의 작위로 정의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동부부인은 본래 작위인 하동부부인이 아닌 하동부대부인으로 소개되고 있다.
- 강구열 . . . . 4회 일치
재미있는 사실은, 이같은 강구열의 행보를 그대로 답습한 선수가 이후에도 계속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CJ 엔투스의 [[주현준]],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 등이 '시드 확보→졸전→광속 탈락'의 전례를 밟은 것. 팬들은 이들을 한데묶어 '강라인'이라 칭하기 시작했고, 이는 커뮤니티 사이에서 폭발적인 반응을 이끌어내며 '대세'로 자리잡았다.
* 그밖에 [[박카스 스타리그 2008]] 4강에서 완패한 [[박찬수]]([[KTF 매직엔스]], 현재 영구제명), [[네이트 MSL 2009]] 8강에서 셧아웃당한 [[김대엽]]([[KT 롤스터]]), [[빅파일 MSL 2010]] 8강에서 [[김택용]]에 1대3으로 패해 탈락한 [[염보성]]([[제8게임단]]) 역시 강라인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네임밸류가 높다는 이유로 인해 거의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특히 박찬수는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 우승함) 최근 [[로스트사가 MSL 2009]]에서 박찬수에게 셧아웃당한 [[김명운]]([[웅진 스타즈]])등이 신규 멤버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8강에 진출하면서 광속 탈락을 피해가 가입 실패하고 말았다. 이중 1명은 영구제명, 1명은 사실상 은퇴. 또한 [[박카스 스타리그 2010]] 4강에서 [[송병구]]에 셧아웃당한 [[김현우 (프로게이머)|김현우]]([[STX 소울]])도 차기 [[진에어 스타리그 2011]] 8강에 진출해 강라인 가입에 실패했다. [[유병준 (1993년)|유병준]]([[삼성전자 칸]])도 [[ABC마트 MSL 2011]] 8강에서 [[이제동]]에게 3대1로다가 패하면서 다음 MSL에서 광탈하면 강라인이 될 뻔했으나, MSL이 없어지면서 유병준도 강라인 가입은 면했다. 유병준도 2012년 6월 은퇴. [[진에어 스타리그 2011]] 4강에서 [[허영무]]에 셧아웃당한 [[어윤수]]([[SK Telecom T1]])도 강라인이 될 뻔했으나 [[티빙 스타리그 2012]] 8강에 진출하면서 강라인 가입은 면했으며, [[김정우 (프로게이머)|김정우]]도 본래 강라인이었으나 [[대한항공 스타리그 2010 시즌1]]에서 우승하면서 탈퇴가 확정됐고, 영구제명된 [[박명수 (프로게이머)|박명수]]도 [[박카스 스타리그 2009]]에서 준우승하면서 탈퇴, 임의탈퇴한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도 [[아발론 온라인 MSL 2009]]에서 준우승하면서 탈퇴, [[이영한]]도 8강에 3전전승으로 진출하면서 강라인에서 탈퇴하게 되었다.
- 고경표(배우) . . . . 4회 일치
2015년 11월 이루어진 고경표의 페이스북에서는 "너무 나대서 불편하고만"이라는 글과 함께 tvN 초인시대에서 [[응답하라 1988]]을 풍자하는 [[유병재]]에 대해 비난조의 글을 게시한다. 당시 tvN 드라마 '초인시대'에서 유병재는 "올해 하반기에 '응답하라 1988'이 방영합니다. '너무 옛날로 돌아가는 거 아니야', '그래서 공감을 얻을 수 있겠느냐' 뭐 이런 우려들이 있는데, 저는 오히려 조금 더 옛날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답하라 1894', [[동학농민운동]] 때로 돌아가서 그 안에서 벌어졌던 풋풋한 사랑 이야기, 여자 주인공 전봉준과 탐관오리 조병갑 사이에서 누구한테 갈까 이런 내용으로 시청자들과 밀당한다면..."이라는 등 응답하라를 풍자하는 내용의 콩트를 하였는데, 당시 응답하라를 출연 준비중이었던 고경표가 이에 대해 '너무 나대서 불편하고만'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 2010년 || [[한국방송공사|KBS2]] || [[정글피쉬 2]] || 봉일태 || 데뷔작 ||
||<tablebordercolor=#8b5a00><#8B5A00> {{{#white '''개봉 연도'''}}} ||<#8B5A00> {{{#white '''제목'''}}} ||<#8B5A00> {{{#white '''배역'''}}} ||<#8B5A00> {{{#white '''비고'''}}} ||
|| 2010년 || [[정글피쉬 2|정글피쉬 2 - 극장판]] || 봉일태 || 조연 ||
- 그레이터 데몬 양식 . . . . 4회 일치
[[위저드리 1]]의 비법. 마법이 봉쇄된 그레이터 데몬이 동료를 부를 경우, 불려온 그레이터 데몬 역시 마법이 봉쇄된 상태라는 것을 이용하는 비법이다. 그레이터 데몬은 전체공격 마법을 사용하는 무서운 적이지만, 마법이 봉쇄된 상태에서는 크게 무섭지 않기 때문. 의도적으로 그레이터 데몬의 마법을 봉쇄한 다음 계속 동료를 부르게 하고 계속 죽여나가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천문학적인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 금일봉 . . . . 4회 일치
-- 금을 만든 봉투 --
[[돈]]을 집어넣은 [[봉투]]. 쉽게 말하면 '돈봉투'. 시상식 등에서 점잖게 말할 때 금일봉이라고 한다.
- 김갑수(배우) . . . . 4회 일치
대중들에게 본격적으로 각인된 작품은 1994년에 개봉한 영화 [[태백산맥(영화)|태백산맥]]. [[안성기]], [[김명곤]]을 포함하여 [[신현준(배우)|신현준]], [[오정해]] 등등의 젊은 배우들이 기대 이하의 연기를 선보이며, 우익단체의 상영반대에 협박을 당하였다는 총체적 난국인 상황에서 유일한 연기로 압도하고 관객과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영화 개봉일에 관객들이 사인받으려고 저 네명의 배우에게 많이 몰렸는데, 겨우 1회 상영이 끝나자마자 갑작스럽게 김갑수에게 관객들이 몰렸다고 한다. 금홍아의 금홍아나 TV 소설 등에서 난장질 치는 아저씨 연기는 일품.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윈터스 소령을 연기한 데미안 루이스와 너무 닮아서 윈갑스 소령이란 별명이 붙기도 했다. 연극 배우 출신으로, 지금도 대학로 등지에서 꾸준히 연극 활동을 하고 있다. 대학로 맥도날드에 가끔 나타나서 일행들과 햄버거를 먹으면서 얘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역]]과 [[악역]][* 악역을 예로 들자면 드라마 '타짜'의 아귀, '연개소문'의 수양제, '개와 늑대의 시간'의 국정원 국장 역을 꼽을 수 있다.]을 둘 다 소화해내는 몇 안되는 배우 중 한 명이다.[* 비슷한 타입으로 김상중은 연극에서는 경박한 연기도 했지만 TV에서는 그런게 없다!]
||<rowbgcolor=#c0c0c0> '''개봉 연도''' || '''제목''' || '''배역''' || '''활동''' || 사망여부[* 출연작의 경우 죽은 역할의 옆엔 ☆ 표시][[추가바람]][* 특별, 우정출연이 많아서 그런지 그닥 많지 않다...] ||
|| SBS || [[이혼변호사는 연애중]] || 봉인재 || 조연 || ||
- 김동욱(배우) . . . . 4회 일치
2017년 [[자체발광 오피스]]에서 서현 역을 맡아 큰 호평을 받았다. 이어 12월에 개봉한 [[신과함께-죄와 벌]]에서 원작의 [[유성연]]을 재구성한 김자홍의 동생 김수홍을 연기해 화제를 일으켰고 "진주인공이다" 라는 말이 나왔을 정도로 호평을 보여줬다.[* 특히 현몽신에서는 웬만한 관객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또한 영화 개봉 후 언론과 공식 인터뷰를 가졌다. 후속작인 [[신과함께-인과 연]]에는 주연으로 출연한다. 정작 본인은 [[이정재]]와 같은 특별출연으로 출연할거라고 생각했지만 알고보니 꽤나 중요한 역할을 맡아 놀랬다고 한다. 또한 영화가 1300만 관객을 돌파하자 여동생이 가장 기뻐했다고 한다.[[http://sports.khan.co.kr/sports/sk_index.html?art_id=201801030858003&sec_id=540401|기사]]
2018년에는 아직 차기작은 없으나 트레이드 러브[* 하지만 출연진 중 한명이 미투 논란으로 무기한 연기되었다.]와 [[신과함께-인과 연]]이 개봉하였고 [[탐정 리턴즈]]에 우정출연한다고 한다.
||<tablebordercolor=#6482b9><rowbgcolor=#6482b9>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ffffff '''비고'''}}} ||
- 김미숙(1959) . . . . 4회 일치
1998년 [[장동건]]과 <[[사랑]]>에서 8살 연상연하 커플이라는 당시에는 파격적인 설정의 멜로 연기를 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보다 시청률이 저조하자 연출이 다짜고짜 '''주연 여배우를 갈아버리는''' 만행을 저지른다. 그에 따라 극중 김미숙은 갑작스레 암에 걸림 -> 그 회에 바로 사망이라는 역대급 퇴장을 하게 된다. 그리고 여주인공은 [[최지우]]로 변경. ~~이쯤되면 데스노트~~ 김미숙은 이 때를 회고하며 당시 '''라디오 진행을 위해 마이크 앞에서 입만 떼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배우 인생에 가장 힘든 때였으나 역으로 배우의 가치를 깨닫게 해 준 시기였다고. 이 때 주말극 [[사랑해 사랑해]]에서 푼수끼 넘치지만 대인배적인 인물 '조봉자' 역할로 연기 변신에 성공한다. ~~말이 그렇지 사실상 고소감~~
* [[1989년]] [[KBS 2TV]] 《[[울밑에 선 봉선화]]》
* [[1998년]] [[SBS]] 《[[사랑해 사랑해]]》 ... 조봉자 역
* [[2011년]] [[SBS]] 《[[내사랑 내곁에(SBS 드라마)|내사랑 내곁에]]》 ... 봉선아 역
- 김용국 (야구인) . . . . 4회 일치
|연봉 =
[[1997년]] 그는 무보수 방문 코치로서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의 루키 리그 야구단 [[헬레나 브루어스]] ([[:en:Helena Brewers|Helena Brewers]])에서 코치로 있다가 그해 9월 마이너 리그 내의 교육 리그, [[애리조나 폴 리그]] ([[:en:Arizona Fall League|Arizona Fall League]])에 속해 있던 야구단 [[메사 솔라 삭스|선 시티즈 솔라 삭스]] (Sun Cities Solar Sox; 現 메사 솔라 삭스 [[:en:Mesa Solar Sox|Mesa Solar Sox]])에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255979 <프로야구>김용국, 애리조나 폴리그 코치 영광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한 달간 경험을 쌓은 뒤 다시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의 싱글A 야구단 [[스탁턴 포츠]] ([[:en:Stockton Ports|Stockton Ports]])에서 수비 및 주로 코치로 일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294321 <프로야구> 김용국, 미국 프로야구 지도자로 데뷔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1998년 말, 1년간 그를 지켜본 [[스탁턴 포츠]]는 그에게 연봉 3만 달러를 제안함과 동시에 1999 시즌부터 정규 시즌 코치로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1999 시즌이 끝난 뒤엔 연봉이 3만 5천 달러로 오르면서 트리플A 야구단 [[인디애나 인디언스]] ([[:en:Indianapolis Indians|Indianapolis Indians]])의 코치로 승격되었다. 2000 시즌 도중에는 [[스카우트]] 자격으로 한국에 2주 동안 출장을 오기도 했는데, 그때 한국의 4개 프로 구단으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았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코치에 도전해 볼 생각도 있었으나 [[LG 트윈스]]의 강력한 러브콜로 인해 국내 복귀를 택했다.<ref name="imaeil" />
[[대한민국]]에서 연봉 5천만원에 [[LG 트윈스]]의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551908 <프로야구소식> LG, 김대진, 김용국코치 영입]</ref> 그는 추후 자리를 옮겨 [[2006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6 시즌]]부터 [[2009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9 시즌]]까지 친정 구단 [[삼성 라이온즈]]에서 수비 코치로 활동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20171 삼성, 김용국·강성우 코치 영입]</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60865 [사진]김용국 코치,'아픈 데는 괜찮나?'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60876 [사진]김용국,'글러브 가볍고 괜찮네!'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2009년]] 친정 팀의 코치 재계약에 실패한 후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10 시즌]]엔 [[넥센 히어로즈]]에 자리를 옮겨 2군 수비·작전·주루 코치로 활동하다가<ref>''OSEN'' - 2009년 11월 기사 [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911190106 "히어로즈, 김용국 전 삼성 코치 영입"]</ref> [[류중일]]이 감독으로 부임한 후 부름을 받아 친정 팀의 코치로 복귀했다.
- 김윤아(1974) . . . . 4회 일치
2005년 [[10.26 사건]]을 다룬 임상수 감독의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서는 [[심수봉]]을 모티브로 한 초대 가수 역을 연기했으며 여기서 [[엔카]]인 [[기타노 야도카라]]를 하도 맛깔나게 불러서 역시 김윤아라는 찬사를 받았다.[[https://www.youtube.com/watch?v=GTHtKv4KgF8|극중 즉석에서 부른 기타노 야도카라]] 더 무서운 점은 김윤아는 따로 녹음을 하지 않고 '''촬영 현장에서 그냥 즉석에서 불렀다고 한다(!)'''.[* 참고로 기타노 야도카라를 불렀다는 것은 영화의 창작. 심수봉 본인의 말에 따르면 당시 엔카인 [[가나시이 사케]](가수 [[미소라 히바리]])를 불렀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은 이를 듣고 "어디서 일본 애를 데려왔냐"며 크게 화를 냈다고.] 덕분에 영화 OST에선 수록되지 못했다(...). 5집을 발표하던 시기와 맞물려 후속곡 'Truth'의 뮤직 비디오가 [[그때 그 사람들]] 세트에서 진행되었다. 영화 화면을 편집한 것은 아니고 같은 세트에서 따로 촬영했고 [[백윤식]]이 출연해주었다.
2011년에는 비슷한 (약 10년의 세대차이는 있지만) '홍대 마녀'라는 별명을 가진 [[오지은(가수)|오지은]]과 한 음악프로그램에서 듀엣곡을 부른 적이 있다. 김윤아의 'Tango Of 2'[[http://www.youtube.com/watch?v=GRLEsw3amJI|링크]][* 김윤아 1집 수록. 본래는 [[유앤미블루]]의 방준석과의 듀엣곡이다. 1절은 [[한국어]], 2절은 [[스페인어]]로 된 곡인데, 오지은의 전공을 살려 고른 노래인 듯.][* 노래를 부르고 김윤아가 "역시 전공자는 뭐가 다르군요"라는 멘트를 치자 오지은이 "전국에 계실 진짜 전공자 분들께 미안하다"라고 하기도.]와 심수봉의 '사랑밖엔 난 몰라'. 따로따로 진행된 김윤아와 오지은의 무대는 각각의 음악 세계를 잘 보여주는 훌륭한 무대였다. 오지은은 아주 좋아하는 무대라며 트위터에 올렸을 정도. [[https://twitter.com/heaventomorrow/status/756530445878038528|링크]]
2011년 7월 25일부터 [[자우림]]으로서 나가수에 합류한다고 하여 화제가 되고 있다. 락밴드인 [[YB]]와의 대결 구도 등 여려가지 흥미로운 모습을 기대하는 목소리 또한 높았다. 자우림이 출연하는 5차 경연은 31일 방영되었으며 비록 (처음 경연에 참가하는 관계로) 7번째 경연이라는 혜택이 있었지만 특유의 압도적인 카리스마와 중저음을 내뿜으며 1위에 등극했다. 이후 비밀번호 776이라는 최악의 코드 달성까지 하지만 '재즈카페' 라는 곡으로 다시금 1위를 달성하며 이후 원곡의 코드를 자우림화 시켜 시청자들의 대찬사 를 받은 '가시나무', 김덕수 사물놀이패와 함께 꾸민 조용필 특집의 '꿈' 퇴폐적인 술집 마담과 항구의 뱃사장의 끈적한 사랑을 연상시켜 곱디곱게 노래한 심수봉도 깜짝 놀랄 법한 무대를 꾸몄던 '사랑밖에 난 몰라' 실향민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모던록 편곡의 '라구요' 그만 '자브라교'를 창시해 버린 '아브라카다브라' 깊은 감정몰입을 해 모두에게 진한 감동을 주었던 록발라드 표 '1994년 어느 늦은 밤'. 이 사람의 비주얼의 끝은 어디인가 하며 감탄을 자아내게 했던 '얘기할 수 없어요." 내마주교를 창시하며 산울림 특집 2위를 차지했던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는 김윤아가 사랑하는 인디 친구들 후배들이 함께한 멋진 무대였고, 그 후 인디밴드 후배들과 함께 만든 신나고 유쾌한 무대인 '정신차려' 그리고 스페니쉬 리듬을 가미하여 초상집 복장으로 처연하게 부른 '하루 까지. 총 14곡의 팔색조 변신으로 모든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 김태희 . . . . 4회 일치
김태희는 이후 [[대구 도시철도|도시철도]]에서 광고대행사 [[디자이너]]를 우연히 만나 2000년 "화이트" 광고를 찍으면서 연예계에 데뷔했다.<ref name="네이버">{{웹 인용|url= http://movie.naver.com/movie/bi/pi/basic.nhn?code=31893|제목=네이버 영화 김태희|웹사이트=[[네이버]]| 확인날짜=2011-01-20}}</ref><ref name="일요시사">{{웹 인용|url=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45954|제목=<이색설문> 연예인 별별랭킹 베스트|웹사이트=일요시사|저자=최현경|날짜=2013-11-12|확인날짜=2014-02-2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228224215/http://www.ilyosisa.co.kr/news/article.html?no=45954#|보존날짜=2014-02-28|깨진링크=예}}</ref> 광고 촬영 이후 여러 곳에서 모델 제의가 들어왔고 그녀가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더 화제가 되었다.<ref name="MBC">{{에피소드 인용|제목=[MBC 스페셜] 태희의 재발견|url=http://www.imbc.com/broad/tv/culture/mbcspecial/commingsoon/1792451_27375.html|네트워크=[[MBC]]|날짜=2011년 4월 1일|회=516}}</ref> 2001년 영화 《[[선물 (영화)|선물]]》에서 중등 정연 역을 맡으며 스크린에 첫 데뷔했다.<ref name="네이버"/> 당시 [[영화 감독]] [[오기환]]은 잡지 표지모델로 섰던 김태희를 보고 테스트도 안 해도되니 그냥 데려 오라고 말했다.<ref name="MBC"/> 이후 대학생활의 숙원이었던 어학연수를 가기 전 홍두현 감독의 독립영화 《[[신도시인]]》 출연을 제안받아 출연했고 2002년 개봉했다.<ref name="씨네21"/> 같은 해 경험삼아 [[SBS 시트콤]] 《[[레츠고 (시트콤)|레츠고]]》에 출연했으나, 2개월만에 종영되고 배우의 길에 대한 고민을 했다.<ref name="MBC"/>
김태희는 2009년 4년 만에 첩보액션 드라마 《[[아이리스 (드라마)|아이리스]]》의 여주인공 최승희 역할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아이리스`, 가장 진지하게 준비한 작품"|url=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273866|출판사=MK 뉴스|저자=진향희|날짜=2009-05-12|확인날짜=2014-03-05}}</ref> 드라마는 최고 시청률 39.9%, 평균 시청률 30%대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아이리스’ 실체 추적하는 감성적 액션 주목하세요… 블록버스터 드라마 ‘아이리스2’ 제작발표회|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6627557&cp=nv|출판사=국민일보|저자=진정희|날짜=2012-11-14|확인날짜=2014-03-05}}</ref> 연기력에 있어서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으나, 일부에서는 첩보원 역할에 걸맞지 않다는 평도 있었다.<ref>{{뉴스 인용 |제목='멍때리는' 김태희? 연기논란 재점화 |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102914300874627&type=1&outlink=1 |출판사=머니투데이 |날짜=2009-10-29 |확인날짜=2010-01-02}}</ref> 그 해 [[KBS 연기대상]]에서 처음으로 연기력으로 우수연기상을 받았는데,<ref>[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883 김태희, '아이리스'로 연기력 논란 극복하고 상도 받고 눈물 '펑펑']{{깨진 링크|url=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220883 }} 리뷰스타 2010년 1월 1일</ref> 이에 대해 “우수연기상은 인기로 받은 인기상이 아닌 연기자로 인정받은 최초의 상이었다. 연기로 인정 못 받고 있다고 그간 생각했다.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저자1=김지연|제목=김태희 "연기력 논란, 항상 마음의 무거운 짐"|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91500362265489&type=1&outlink=1|날짜=2010-09-15|확인날짜=2015-12-14|뉴스=머니투데이}}</ref> 2010년 1월 김태희는 소속사를 [[나무엑터스]]에서 자신의 형부가 설립한 루아엔터테인먼트로 이적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1인 기획사 대열 합류… 전 소속사와 협업관계 유지 |url=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305720 |출판사=[[일간스포츠]] |날짜=2010-01-11 |확인날짜=2010-01-11}}</ref> 9월 16일에는 영화 《[[그랑프리 (영화)|그랑프리]]》에서 서주희 역할로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추석영화열전⑥]'그랑프리' 김태희, 연기논란 잠재우고 흥행퀸 '찜'|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10091608154987413|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조범자 |날짜=2010-09-16|확인날짜=2015-07-17}}</ref> 김태희의 연기력은 이전보다 나아졌다며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으나, 16만 명의 관객수를 끝으로 상업적 실패를 거뒀다.<ref>{{뉴스 인용|제목=[울림과스밈] ‘그랑프리 실패’ 김태희에게는 ‘약'|url=http://www.hani.co.kr/arti/culture/movie/442216.html|출판사=한겨레|저자=김진철|날짜=2010-10-05|확인날짜=2015-07-17}}</ref> 11월 22일에는 몇몇 내용을 편집해 만든 《[[아이리스: 더 무비]]》가 개봉했다.<ref>{{웹 인용|제목=씨네21 - 아이리스 더 무비|url=http://www.cine21.com/do/zlgam/detail/main?prodSeq=1623|출판사=[[씨네21]]|날짜=2010|확인날짜=2012-02-2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4124525/http://www.cine21.com/do/zlgam/detail/main?prodSeq=1623#|보존날짜=2016-03-04|깨진링크=예}}</ref> 12월 13일에는 《[[아이리스]]》의 스핀오프작 《[[아테나: 전쟁의 여신]]》 1회에 회상신으로 특별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짧아서 아쉬워"..이병헌·김태희 `아테나` 깜짝 등장|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138166593198520&DCD=A10102|출판사=[[이데일리]] |날짜=2010-12-14|확인날짜=2012-02-29}}</ref>
2004년 김태희는 헤럴드경제 기업사랑 캠페인 홍보대사로 활동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6&aid=0000148878 'I Love Companies'`기업사랑 캠페인` 본궤도 올랐다] ''헤럴드경제'' 입력일자 2004-09-21</ref> 2005년에는 남편 [[이완 (1984년)|이완]]과 함께 수호천사로 위촉돼 [[독도]] 사랑 캠페인을 벌였고, 같은 해 5월 [[스위스]]에서 친선문화대사로 선정 돼 "독도 우리땅"이라는 문구를 새긴 티셔츠와 리메이크 앨범 등을 나눠주는 활동을 했다.<ref name="광주일보"/><ref>[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SWISS FRIENDS 2005] {{웨이백|url=http://www.myswitzerland.co.kr/etc/entertainer/friends/main.html |date=20110813103724 }} 스위스관광청 홈페이지</ref><ref>[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50217085145988&p=yonhap 김태희, 스위스친선문화대사 선정] 연합뉴스 입력일자 2005.02.17</ref> 이후 2007년 유방암의 위험성을 알리는 핑크리본 홍보대사로 활동을 했고, 7월 22일 부산 [[해운대]]에서 열린 핑크리본 사랑 마라톤 대회에 참여했다.<ref>[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070419123412761&p=SpoChosun 김태희, 유방암 조심하세요 핑크리본 홍보대사] 스포츠조선 입력일자 2007.04.19</ref> 또한 12월에는 [[BC카드]]의 후원을 받아 서울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밥차 배식 봉사활동을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밥차 배식 봉사활동 펼쳐|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3&aid=0000027316|저자=탁진현|출판사=[[네이버]]|날짜=2007-12-05|확인날짜=2011-09-15}}</ref> 김태희는 2005년부터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2006년에도 난치병 어린이들과 함께 자선 활동을 계속 했다.<ref>{{뉴스 인용 |제목=김태희, 난치병 어린이들과 따뜻한 만남|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846672|저자=김가희|출판사=[[네이버]]|날짜=2006-05-16|확인날짜=2011-09-15}}</ref> 뿐만 아니라 2011년에는 난치병 아동들로 이루어진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앨범에 참여했는데, "Make-A-Wish"를 녹음했다.<ref>조성훈 [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배우 김태희, ‘메이크어위시 합창단’ 음원 참여] {{웨이백|url=http://www.gaonchart.co.kr/main/section/hotnews/kpop/view.gaon?idx=527 |date=20120316165433 }}, 《[[가온 차트]]》, 2011-09-15 작성. 2011-09-15 확인.</ref>
- 동군연합 . . . . 4회 일치
'''가장 유명한 경우'''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이 아라곤의 왕과 결혼하면서 생긴 연합. 이로서 '스페인 왕국'이 형성되게 된다. 다만, '부르봉 왕조' 집권 이전 합스부르크 왕조 스페인은 카스티야, 아라곤, 레온, [[포르투갈]](!) 등의 왕국 연합체나 다름없어서(…) 통합은 완전하지 않았다. 부르봉 왕조 이후는 스페인 왕위계승 전쟁으로 지방세력이 갈갈히 찢기고 초토화 되면서 이웃 강국 [[프랑스]]를 등에 업은 마드리드 중앙정부의 권위가 강화된 것(…).
여담으로, 브란덴부르크가 핵심지였지만, 이후의 국명은 '프로이센'이 되는데 이는 프로이센이 당시 '독일 바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독일왕'을 겸하므로 독일영역 내부의 영주는 별도의 왕위를 주장할 수 없다. 프로이센은 본래 독일인의 영역이 아닌 발트계 민족 프루사 족의 땅이라서 별도의 왕위로서 '프로이센 왕'이라는 칭호를 내세우는게 가능했던 것이다.(마찬가지로 체코 지역도 본래의 독일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보헤미아 왕'을 칭할 수 있다.) 다만, 역시 프로이센 공작위도 엄밀히 말하자면 본래 폴란드 왕의 봉신인 신세라 이걸로 트집이 잡힐걸 우려해서인지 'King of Prussia'(프로이센 왕)이 아닌 'King in Prussia'(프로이센 안의 왕)이라는 일종의 외왕내제식 편법을 썼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시기에 'King of Prussia'라는 칭호를 쓰게 됀다.
남프랑스 전역을 거의 장악하던 아퀴텐의 여공인 엘레오노르가 잉글랜드 왕의 헨리2세와 혼인하면서 결성된 동군연합. 이로 인해 당시 잉글랜드 왕은 프랑스령에서는 명목상 프랑스 왕의 봉신이면서 정작 프랑스 왕보다 더 쎈 기묘한 위치를 차지했다(...). 사실 이 플랜태저넷 왕조 - 일명 '앙주 제국'의 정체성은 단지 '잉글랜드 영토'라는 식으로 국한하기는 좀 복잡했다.
- 라미란 . . . . 4회 일치
||<table align=center> '''개봉 연도''' || '''제목''' || '''배역''' || '''관객수(명)''' ||
|| [[2007년]] || 마을금고 연쇄습격사건 || 미쎄스 봉 || 123,770 ||
||<|2> [[2016년]] || [[봉이 김선달(영화)|봉이 김선달]] || 윤보살 || 2,051,277 ||
- 로베르 기스카르 . . . . 4회 일치
그는 노르망디의 소귀족인 오트빌가의 탕크레드의 12아들중 6째로 그가 후처 프레센다 사이에 낳은 6아들중에서는 첫째다. 당시 할일없고 영지를 상속받을 가망도 없는 노르만 귀족들이 으레 그랬듯이 '용병'으로 복무하기 위해 남이탈리아로 건너갔다.[* 당시 비잔티움 제국내에서 '용병'이란 '용병대'가 아니라 영지를 봉급으로 외부의 기사들을 복무시켜 비잔티움 편제로 훈련시키는걸 말한다.] 그리고 그곳의 노르만 용병들이 그의 셋째 형인 '강철팔'기욤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킬때, 기스카르는 형을 따라 종군하면서 비잔티움에 맞써 싸운다.
이후 기스카르는 그해 12월에 콘스탄티노플에 대사로 퐁투아즈 백작 라뒬프를 보냈는데, 표면적으로 그가 온 이유는 니케포로스 3세에게 헬레나에게 만족스러운 대우를 해달라고 요구하기위해서였지만, 그의 진짜 목적은 제국의 수도에 있던 노르만 용병들의 세력을 결집시켜 원정에 끌어들이는것과, 당시 내무대신이자 실세로 떠오르던 알렉시오스 콤네노스의 협조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예상치못하게 알렉시오스가 니케포로스로부터 제위를 찬탈해 알렉시오스 1세로 즉위해버렸고, 노르만족들을 결집시킬 역할을 했어야될 라뒬프 백작은 오히려 알렉시오스에게 감화되어서 그와 우호관계를 구축하자는 기스카르의 의도와는 정반대인 답을 해버린다(....) 라뒬프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난 기스카르는 라뒬프를 ~~갈군~~호되게 질책한 뒤, 브란디쉬와 오트란토에 이미 모여있던 그의 원정군들을 아드리아해 너머 비잔티움령에 보내려 했다.[* 이미 아드리아해 너머에는 그의 장남 [[보에몽 1세|보에몽]]이 이끄는 선봉대가 상륙해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기스카르가 돌아가고 남은 군대를 맡게 된 보에몽은 절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그의 형이자 당시 세바스토크라토르라는 관직에 있던 이사키오스가 성 소피아 성당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과거 교회의 금과 은을 녹여 전쟁포로들을 되찾아온 전통을 상기시키면서 교회 재산을 모두 몰수한다고 선언해 겨우 전쟁자금을 구할 수 있었지만, 보에몽은 야니나와 아르타에서 알렉시오스에게 대승을 거두면서 그리스일대를 장악하고 테살로니카로 진군하고 있던 것이다. 그러나 알렉시오스는 어찌저찌 라리사에서 전세를 역전시킬 승리를 거두었고, 이후 보에몽의 군대에 항복한 노르만 병사들에게 더많은 봉급을 주고 용병으로 재고용해주겠다고 보에몽의 진지에 소문을 퍼뜨리게까지 했다. 결국 연패를 거듭한 보에몽은 그리스에서 쫓겨난다.
한편 기스카르는 즉각 이탈리아로 돌아와 1083년 한여름 안에 아벨라르와 그의 형제인 에르망의 난을 진압하고, 산탄젤로성에서 외롭게 저항하고 있는 교황을 구원하기 위해 새로운 군대를 모집했고, 이듬해 초여름에 로마로 향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기스카르와 직접 싸움을 걸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그가 로마성문으로 들이닥치기 사흘전에 군대의 대부분을 거느리고 롬바르디아로 숨어버린것이다. 한편, 기스카르는 5월 27일 밤에 병력을 거느리고 조용히 도시의 북쪽으로 돌아가,섀벽에 공격을 개시했고, 순식간에 돌격대의 선봉이 플라미니우스 성문을 뜷고 도시로 진입했다. 로마 시민들은 노르만군에게게 격렬히 저항했지만 그들을 막을 수는 없었고, 마르티우스 광장 전역이 불타는 지역으로 변했다. 이후 노르만 병사들은 로마를 약탈하고, 말그대로 개판으로 만들어버렸다. 격분한 로마 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한때 군중들이 기스카르를 포위해 그대로 끔살시킬뻔하기까지 했다(...) ~~아깝게도~~ 그에게는 다행히도 그의 차남인 로제르 보르사가 병력 1천명을 이끌고 그를 구원해 겨우 목숨을 건진 기스카르는 노르만군들에게 도시를 모조리 불태우라고 명령한뒤, 교황을 데리고 남이탈리아로 돌아가 비잔티움에 대한 후속 원정을 준비한다.[* 참고로 이때 기스카르의 나이는 예순 여덟이었다!! 그것도 서양식이니 한국식이면 칠순(....) 대단한 집념이라 할 수 밖에 없다.]
- 마재윤 . . . . 4회 일치
2010년 6월에 공판이 진행 되었고, [[KeSPA]]로부터 영구제명되었으며,<ref name="제명">{{뉴스 인용|url=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6070267|제목=승부조작 전·현직 프로게이머 11명, 전원 영구제명|날짜=2010-06-07|저자=교용준 기자|출판사=오센}}</ref> 2010년 10월 22일 최종적으로 징역 1년, 집행 유예 2년, 사회 봉사 120시간이 선고되었다.<ref name="징역">{{뉴스 인용|url=http://www.fomos.kr/board/board.php?mode=read&keyno=110028&db=issue&cate=&page=1&field=&kwrd=|제목= 속보 - 원모씨 징역 2년-추징금 300만, 마모씨 징역 1년 6개월 구형|날짜=2010-08-20|저자=심현 기자|출판사=포모스}}</ref> 현재는 [[아프리카TV]] BJ로 활동하고있다.
Spris MSL 2004에 진출한 때와 비슷한 시기인 2004년 7월 13일, 마재윤은 [[KTF 매직엔스]]와의 [[팀리그]] 승자전 4강 경기에 선봉으로 출전한다. 당시 KTF 매직엔스는 주요 대회 우승, 준우승자 출신인 [[홍진호]], [[강민 (프로게이머)|강민]], [[박정석]], [[변길섭]], [[조용호]] 등이 포진한 최고의 팀이었으며, 이미 2004년 2월 팀리그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강팀이었다.
그러나 위너스리그가 시작되면서 마재윤은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마재윤은 스파키즈전 1:1 상태에서 차봉으로 나와 [[문성진]], [[신상문]], [[박명수 (프로게이머)|박명수]]를 연달아 물리치고 3킬을 기록하였고, 이스트로전에서는 1:2 상황에서 중견으로 출전해 [[박상우]], [[신상호]], [[신대근]]을 잡아내며 또다시 3킬을 기록, 마삼킬이라는 별명을 얻으며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다.
2010년 6월에 진행된 공판에서 마재윤은 1년 6개월을 구형받았으며, [[10월 22일]] 최종 선고에서 징역 1년, 집행 유예 2년, 사회 봉사 120시간을 선고받았다. 최근 오토바이 토탈업체인 온라인 쇼핑몰 아미티에를 오픈했다.
- 박노식(1971) . . . . 4회 일치
아무튼 그 이후로 영화 [[괴물(영화)|괴물]]의 [[흥신소]] 직원으로 나와 박희봉([[변희봉]] 분)의 삥을 뜯는 역으로 나왔고 [[미녀는 괴로워]]에도 주인공 한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짜장면 배달부로 나오지만 그럴듯한 배역은 잘 맡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 미생의 함차장이나 영화 [[명량]]의 [[김억추]][* 김억추장군도 강진군 출신이다.] 장군 등 단역으로 은근히 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그러다 2016년에는 [[삼국지]]를 원작으로 만들어진 [[특촬물]] [[레전드히어로 삼국전]]에 [[노식]][* 이 쪽은 외자로, 성이 노 이름이 식이다.]으로도 레귤러 등장.
||<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2> 2009년 || 나는 행복합니다 || 봉철 || ||
- 박술희 . . . . 4회 일치
|복무=[[태봉]](泰封)/[[고려]](高麗)
|지휘=태봉/고려
혜성(현재의 [[당진시|당진]])의 호족 출신으로 18세 때 [[궁예]]의 호위병이 되고, 뒤에 ([[고려 태조|태조]])의 휘하로 들어와 그를 섬겨 많은 공을 세워 두터운 신임을 얻어 대광(大匡)이 되었다. [[고려 혜종|혜종]]을 정윤(왕태자)로 책봉할 때, [[장화왕후]]가 [[왕건]]의 의중을 박술희에게 전달하게 하여 [[왕무]]가 정윤이 되었으므로, 박술희가 [[왕무]]의 후견인이 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935년]]에는 [[견훤]]을 탈출시키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보이는 나주 탈환 작전에 [[홍유]]와 더불어 지원하였으나 백성의 마음을 얻기 힘들다는 것을 이유로 [[왕건]]은 그들 대신 [[유금필]]을 파견하였다. [[943년]] [[고려 태조|태조]]가 사망하기 직전에 [[고려 태조|태조]]로부터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부탁받고,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전수받았으며, 자신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고려 혜종|혜종]]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었다.
[[분류:암살된 사람]][[분류:생년 미상]][[분류:945년 죽음]][[분류:신라의 왕족]][[분류:태봉의 군인]][[분류:고려의 무신]][[분류:고려의 정치인]][[분류:고려 태조]][[분류:고려 혜종]][[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분류:면천 박씨]]
- 백일섭 . . . . 4회 일치
* [[2002년]] [[MBC]] 주말연속극 《[[여우와 솜사탕]]》 ... 봉진석 역
* [[2007년]] [[MBC]] 일일연속극 《[[나쁜 여자 착한 여자]]》 ... 김봉달 역
* [[2011년]] [[KBS2]] 주말연속극 《[[사랑을 믿어요]]》 ... 김수봉의 친구, 백일섭 역(특별출연)
* [[2013년]] [[MBC]] 단막극 《[[MBC 드라마 페스티벌|드라마 페스티벌]] - 햇빛 노인정의 기막힌 장례식》 ... 김구봉 역
- 백진희 . . . . 4회 일치
1990년 2월 8일 [[경상북도]] [[김천시]] 봉산면 (김천시) (봉산로) 에서 태어났다. 2008년 독립영화 《사람을 찾습니다》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했고, 《[[반두비]]》로 주목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저자1=윤희성|제목=백진희│My name is…|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3538|날짜=2013-06-18|확인날짜=2016-01-27|뉴스=텐아시아}}</ref><ref>{{뉴스 인용|저자1=최은화|제목=[쿠키人터뷰]‘어쿠스틱’ 백진희, “한국판 아만다 사이프리드? 좋죠~”|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1288698003&cp=nv|날짜=2010-11-02|확인날짜=2016-01-27|뉴스=쿠키뉴스}}</ref>
| 라봉희
<!--실제로는 2008년이지만 영화가 2009년 개봉해 2009년부터 활동하였다..-->
- 부산광역시/인물 . . . . 4회 일치
* [[김두봉]] - 기장군
* [[강봉규]] - 부산진구
* [[조희봉(배우)|조희봉]] - 수영구
- 연경흠 . . . . 4회 일치
2001년 [[청주기계공업고등학교 야구부|청주기공]]의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봉황대기]] 돌풍 주역으로, [[노병오]], [[박정규]], [[신주영(야구선수)|신주영]]과 함께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한국프로야구/2002년/신인드래프트|200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2차 12순위(전체 90번)에 지명되었으나 [[송광민]], [[김태완(1984)|김태완]]과 마찬가지로 대학행을 선택했고[* 당시 신인드래프트는 지금처럼 지명권 2년 유효 제도가 아니어서 하위픽은 지명만 해놓고 대학으로 보내는 경우가 있었다. 대학입학에 필요한 전국대회 8강 경력이 없어 진학이 어려울 뻔 했으나 봉황대기 우승으로 극적으로 인하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었다고 한다.], 인하대에서 4번타자를 맡았다. 위의 둘과는 달리 외야수를 봤기 때문에 미래의 외야자원감으로 꼽혔으며 졸업 후 2006년에 입단했다. 장타력이야 이미 검증되었기 때문에 차세대 거포 외야자원으로 촉망받았다.
당시 한화 외야엔 [[조원우|조로켓]], [[제이 데이비스|남연이 형]], [[고동진(야구선수)|고봉사]]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김인식]]감독의 꾸준한 신뢰로 많은 타석을 부여 받았다.
- 영덕군 . . . . 4회 일치
||<bgcolor=#F781F3> {{{#FFFFFF '''국회의원'''}}} ||<bgcolor=#F8E0F7>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br][[강석호]] ([[자유한국당|{{{#C9151E '''자유한국당'''}}}]])[br]3선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
|| {{{#C9151E '''영양·영덕[br]·봉화·울진'''[* 지역구 국회의원 : [[강석호]] (새누리당 → 자유한국당, 3선)]}}} ||<:>16.72%||<:><bgcolor=#C9151E>{{{#FFFFFF 59.73%}}}||<:>13.29%||<:>5.65%||<:>3.33%||<:>{{{#808080 ▼43.01}}}||<:> 73.48 ||
||<-3> 청송군-영덕군 || 청송군-[br]영양군-영덕군 ||<-4> 영양군-영덕군-봉화군-울진군 ||
* [[강석호]] : 영덕군을 비롯해 [[영양군]], [[봉화군]], [[울진군]] 지역구의 국회의원이지만 실제로는 아랫동네 [[포항시]] 출신이다.
- 원피스/847화 . . . . 4회 일치
* 다양한 종족이 산채로 봉인된 "책"으로 모두 살아있지만 책 속에 갖혀 있다. 그 중엔 희귀한 인종이나 혼혈 인종도 있다.
* 빅맘은 어인섬에서 상납한 국보 "옥갑"을 내일 다과회에서 개봉한다고 말한다.
* 빅맘 샬롯 링링은 성의 도서실에서 자신의 "컬랙션"을 과시하고 있다. 그녀의 컬렉션은 아들 샬롯 몬도르의 작품. 그의 능력으로 살아있는 생물을 "책" 속에 봉한 것이다. 그는 여러 페이지를 펼쳐서 수집한 생물을 보여준다. "검은 수염"이 임펠다운을 습격했을 때 유출된 "만티코어"나 "유니콘" "그리폰" 같은 전설적인 생물도 있다. 마치 표본처럼 못이 박혀 있는데 하나같이 살아서 몸부림친다. 심지어 사람도 들어가 있는데 펑크 하자드에 있던 "켄타우로스"나 수장족과 족장족의 혼혈인 "수족장인간" 같은 희귀한 인간도 들어가 있다.
* 빅맘은 뜬금없이 루피가 어인섬에서 가로챈 과자값으로 준 어인섬의 보물 이야기를 꺼낸다. 그때 루피가 줬던 보물 중에는 어인섬의 국보인 "옥갑"이 섞여 있었다. 넵튠이 왜 이런 것까지 루피한테 줬는지 모르겠다며 웃으며 내일 다과회에서 개봉하겠다고 선언한다. 이 이야기는 루피를 도발하기 위해서 한 말 같지만, 정작 루피는 거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여전히 상디의 결혼 문제에 화를 내는데, 급기야 샬롯 푸딩을 언급하며 그녀가 자신들의 친구니 만나게 해달라고 발언한다. 나미는 그 발언을 막으려 하는데 빅맘은 그저 둘러대는 말이려니 하고 귀담아 듣지 않는다.
- 윤상현(배우) . . . . 4회 일치
[[내조의 여왕]]에서 부하 직원의 부인을 사랑하게 된 사장 허태준 역으로 태봉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주가가 대폭 상승했다. 일명 중년 구준표.[* 머리스타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민호(1987)|이민호]]랑 어딘지 비슷하게 생겼다.]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2> 2009년 || MBC || '''[[내조의 여왕]]''' || '''허태준'''[* 사실 '태봉'씨가 더 익숙하다.] || ||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4E84B0><rowbgcolor=#4E84B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작품명}}}'''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봉숭아 물들다 (2015)
- 윤주상 . . . . 4회 일치
* [[2005년]] 《[[형사: Duelist]]》 ... 봉출 역
* [[2012년]] [[KBS2]] 미니시리즈 《[[학교 2013]]》 ... 조봉수 역
* 인물실록 봉달수
* [[KBS1]] 《[[다큐공감]] 254회 : 꽃따라 삼천리 이동양봉》 (2018년) 내레이션
- 이규환 (영화감독) . . . . 4회 일치
[[1932년]]에 귀국하여 제작한 작품이 《임자 없는 나룻배》이다. [[나운규]]와 [[문예봉]]이 출연한 이 영화는 좋은 평가를 받고 문예봉을 스타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이후 제작비 문제 등으로 순탄치 않은 영화 작업을 계속했다. [[1937년]]에는 [[성봉영화원]]을 설립하고 로컬리즘 색채가 강한 《나그네》를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성봉영화원이 [[조선영화주식회사]]로 통합된 뒤 이 회사에 들어가지 않고 [[만주]]로 떠나, 일제 강점기 말기의 [[군국주의]] 영화 제작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 이만섭 . . . . 4회 일치
* [[김봉근 (배우)|김봉근]] - [[1993년]] ([[제3공화국 (드라마)|제3공화국]]), [[MBC]] 드라마
* [[김봉근 (배우)|김봉근]] - [[1998년]] ([[삼김시대 (드라마)|삼김시대]]), [[SBS]] 드라마
- 이병욱(스트리머) . . . . 4회 일치
||[[https://youtu.be/AxaDEakjubw|선물받은 생일케익 솔직리뷰 및 선물개봉기 #1]]||
||[[https://youtu.be/Qxs7ndNOsLc|선물받은 생일선물 개봉기 #2]]||
* 그의 방송을 한번쯤 본 적이 있었다면 알겠지만 상당히 마초적인 기질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느금마 엔터 패밀리들과 스카이프 통화를 하면서 다시 태어나면 여자로 태어날거냐 남자로 태어날거냐는 주제가 나왔었는데 이병욱만 다시 태어나도 남자로 태어나겠다고 말했다. 재밌는건 이때 [[로봉순]]도 있었는데 로봉순은 다시 태어나도 여자로 태어나겠다고 했다.
- 이성민 (야구선수) . . . . 4회 일치
|연봉 =
[[2013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13년]] 특별우선지명을 받아 [[NC 다이노스]]에 입단하며 즉시 전력감 [[투수]]로 주목받았으나, 기대와 달리 시즌 초에는 별로 좋지 않았다. [[2013년]] [[4월 2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개막전에서 선발 [[애덤 윌크|아담]]을 대신하여 7회에 구원 등판하였으나 [[박종윤 (1982년)|박종윤]]에게 2점 홈런을 허용해 구단 첫 패전 [[투수]]가 됐다.<ref>[http://sports.donga.com/3/all/20130402/54154104/1 ‘제 9구단’ NC, 1군 데뷔전에서 롯데에 영봉패] - 스포츠동아</ref> 이후 필승계투로 활동하였으나 기대에는 못 미치는 부진한 투구와 팔꿈치 통증까지 겹쳐 잠시 C팀(2군)에 내려가기도 했으며, 자신감을 되찾은 후 [[7월 14일]] 올스타 휴식기를 맞아 [[이재학 (야구 선수)|이재학]]을 대신해 1군에 등록된다.
== 연봉 ==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이인 . . . . 4회 일치
*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페이지</ref>
- 이지아(배우) . . . . 4회 일치
스캔들 5개월 후 [[2011년]] [[문화방송|MBC]] 드라마 [[나도 꽃]]의 여주인공 순경 차봉선 역을 맡았다. 아래 후술된 스캔들의 여파를 고려하면 생각보다 빨리 현장에 복귀한 셈이다. 이때까지 드라마에서 이지아와 함께 출연한 배우는 배용준-김명민-김혜수-정우성으로 죄다 연기대상 수상자이고 정우성 또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미남 배우로 이름을 알렸었다. [* 다만 정우성과 출연할 당시엔 드라마의 메인 히로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역은 [[윤시윤]]. 다행인지 불행인지 경쟁작인 [[뿌리깊은 나무]]의 임팩트가 워낙 독보적이라서 예상보다 그렇게 화제를 모으진 못했다. 배우의 연기나 드라마 자체는 그럭저럭 입소문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으나 [[영광의 재인]]과 [[뿌리깊은 나무]]와의 경쟁에서 시청률 참패를 당하면서 조기 종영되었다.
||<table bordercolor=#C3C03A><rowbgcolor=#C3C03A> '''{{{#white 개봉 연도}}}''' || '''{{{#white 작품}}}''' || '''{{{#white 배역}}}''' ||'''{{{#white 비고}}}''' ||
|| 2011년 || MBC || [[나도 꽃]] || 차봉선 || ||
2009년 6월,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에 있는 맑은내 배꽃마을에서 굿네이버스와 함께 자원봉사활동을 한 바 있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다녀온 사람이 추가바람.
- 이하영(강사) . . . . 4회 일치
2016년 2월 5일 공지사항을 통해 셋째 아이를 임신했다고 밝혔다.[* 사실 그 전에 [[강봉균]] 선생님이 강의에서 이하영 선생님의 임신 사실을 먼저 말했었다.] 이로 인해 2017 [[수능특강]]과 [[수능완성]] 강의는 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2016년 11월 '고2 학평기출의 7대 함정' 강의로 돌아왔다.
ebsi의 사회탐구 영역 담당의 모 피디[* 진리 피디라고 불린다.]와 쌍둥이처럼(!) 닮았다. 실제로 지리과의 [[강봉균(강사)|강봉균]] 선생님 라이브 클래스에 둘이 같이 나온 적이 있다!!! 단 2013년 라클이라 지금은 아쉽게도 지워져 볼 수 없다. 강봉균 강사와 상당히 친하다.
- 이효린 . . . . 4회 일치
'''이효린'''(李孝麟, 1540년 - 1622년)은 조선시대의 유학자, 의병장이다. 본관은 우계이고, 도촌 이수형의 증손이며 참봉 이은의 넷째 아들이다. 자는 원서(源瑞),
[[이수형]](李秀亨)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혜민서 참봉 은이고 어머니는 공주이씨 이성의 딸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생으로 수학하였다. 순흥 재향지에 의하면 음사로 관직에 나갔다 한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촌형 [[이흥문]]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김개국]] 의병장 휘하에서 왜적에 대항하였다. 그 공로로 [[내자감]] 주부(內資監主簿)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고, 80세에 수계(壽階)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할아버지 이준근(李峻根, 승사랑 예빈시 참봉)
* 아버지 이은, 장사랑 혜민서 참봉
- 장원준 (야구선수) . . . . 4회 일치
|연봉 = 10억원 (2018년)
2011 시즌 후 입대하였다. 입대 후 [[봉중근]]의 부상으로 좌완 투수 자원이 부족하여 2013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국가대표로 발탁되었다.
[[2014년]] [[11월 29일]] FA 타 구단 협상 셋째 날 [[두산 베어스]]와 4시즌 동안 계약금 40억원, 연봉 10억원, 옵션 4억원 등 총 84억원 규모의 계약을 체결하였다.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정종철 . . . . 4회 일치
**〈봉숭아 학당〉
* "헤헤헤헤헤헤헤헤헤! 얼굴도 못 생긴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 적어도 내 얼굴 정도는 돼야지!", "너라뇨? 제 이름은 옥동자에요!"([[박미선]](봉숭아학당 선생님 역)이 정종철(옥동자 역)에게 왜 끼어드냐고 물을 때에 나오는 정종철의 대답), "선생님! 제가요, 어저께요~ 디자이너 앙드레 김 / 탤런트 이덕화 샘을 만났는데요~ 아, 그 분이 글쎄~", "선생님 제가 뭐라고 그랬는 줄 아세요?", "헤헤헤헤헤헤헤헤헤! OOO한 것들이 잘난 척하기는! 내 얼굴처럼 OOO해지려면 OOO하지 말고 (얼굴에다가) OOO했어야지! / 태어날 때부터 OOO을 마셨어야지!" - 개그콘서트 코너 '[[봉숭아학당]]' 중 옥동자 역
* "본인은! 옥장군이야~", "뭐라고!, OO하라 그래!", "또 절로 들어가야 되나~"- 개그콘서트 코너 '[[봉숭아학당]]' 중 옥장군 역
- 조성모(가수) . . . . 4회 일치
|| '''가족''' ||<(> 3남 2녀 중 [[3남|막내]][* 큰형은 성이 [[주(성씨)|주씨]]로 [[이부형제]]이다.], 아내 구민지, 아들 조봉연 ||
2010년에 공채 탤런트 출신 구민지와 결혼하여 유부남이 되었다. ~~아아 들린다 여심이 단체로 쪼개지는 소리가~~ 다만 결혼 전에 아내와 관련된 좋지 않은 루머가 돌아 둘다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조성모가 직접 나서 결혼식 당일 있었던 기자회견에서 울먹거리며 아내에 대한 해명을 해야 했었다. 눈시울까지 붉힌 그의 진심이 전달된 덕인지 이후로는 여론도 안정을 찾아 별다른 소음이 일지 않았다. 여담이지만 상당히 애처가이다. 부인 얘기만 나와도 눈에서 꿀이 떨어지고 함박웃음이다. 어느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결혼 이후, 설거지 탓에 주부습진에 걸렸다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다. 이를 들은 다른 남성 출연자들의 어색한 반응에, 설거지는 당연히 남자가 하는 것 아니냐는 투로 대응한 바 있다. [* ~~물론 그것 역시도 그 자리 남성 출연자들에게 공감을 사지는 못하였다. 그의 말에 네?? 하고 멍하니 쳐다만 볼 뿐..~~] 결혼 4년만에 임신 소식이 전해졌고, 2015년 10월 득남하여 한 아이의 아빠가 되었다. 2018년 8월 26일, KBS2TV [[슈퍼맨이 돌아왔다]] 방영분에 아들 조봉연 군이 잠깐 등장하였는데 조성모를 쏙 빼닮은 외모로 눈길을 끌었다. 배우 [[봉태규]]의 아들인 봉시하 군의 가장 친한 친구라고.
- 진구 . . . . 4회 일치
| [[쎄시봉 (영화)|쎄시봉]]
| [[쎄시봉 (영화)|쎄시봉]]
- 청송군 . . . . 4회 일치
[[경상북도]] 중동부에 있는 군. 인구는 약 2만 6천여명이다. [[아오안|전국적으로 매우 낙후된 지역 가운데 하나로]], 이웃한 [[봉화군]], [[영양군]]과 함께 [[BYC#s-2|BY'''{{{#red C}}}''']](...)로 불리기도 한다. 또한 전국에서 공시지가가 가장 낮은 동네이기도 하다. 청송 출신 [[연예인]]인 [[심진화]]가 농반진반 국내 3대 [[오지(지리)|오지]] 중 하나라고 칭할 정도니 말 다 했다.
전 지역이 [[산(지형)|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자연환경이 수려하다는 장점도 가지고있다. [[봉화군]]만큼은 아니지만 [[겨울]]에 꽤 추운 동네이다. [[분지]] 지형이기때문에 [[기온 역전 현상]] 등을 감안하면 겨울철에 사람이 느끼는 추위는 [[서울특별시]]보다도 더 크게 느껴질 것이다.
* [[김봉조(1905)|김봉조]](1905~1983)
- 최희암 . . . . 4회 일치
| 소속 = 서울 고려용접봉 사장 <br/> 前 [[연세대학교]] 겸임교수 <br/> 前 [[동국대학교]] 겸임교수
최근에는 대학 농구 감독과 프로 농구 감독 시절 활약담을 수필집으로 집필하여 발표하였고 기업인으로도 변신하면서 전자랜드의 계열사인 고려용접봉 중국법인 지사장을 역임하였으며 이후 고려용접봉 중국법인 지사 기업을 대한민국 법인 기업으로써 인수하여 2014년 현재 접봉 부회장으로 재직중이다.
- 토리코/365화 . . . . 4회 일치
attachment:봉인.png
* 심지어 지금은 100% 힘을 발휘한 것도 아니고 노킹이 해제되고 있는 단계. '''지로 몸에 박혀 있던 피어스가 봉인구였다.'''
* 마침내 등에 있던 봉인구까지 떨어지며 지로는 마침내 100%의 파워를 해방한다. 이 '''봉인은 과거 아카시아가 했던 것'''으로 100%의 '''지로는 놀라울 정도로 젊어진다.'''
- 판타스틱 포 . . . . 4회 일치
또한 판타스틱 포는 '''정체를 숨기지 않는다'''. 코스튬도 대놓고 얼굴을 드러내놓고 있으며 자경단보다는 [[자원봉사]]단에 가깝다[* 실제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1에서 스파이더맨에게 "우린 자원봉사야"라고 얘기한다].
* [[스파이더맨]]은 히어로 생활 초창기 돈도 없고 입장도 난감할 때 판타스틱 포에 합류하려 했다. 그러나 '봉급을 받지 않는 [[자원봉사]]'라는 말을 듣고는 그냥 돌아갔다.(...)
- 페어리 테일/544화 . . . . 4회 일치
* [[루시 하트필리아]]의 작전대로 마룡을 봉인할 수 있을 듯 했으나 아크놀로기아의 무서운 힘은 페어리 스피어의 봉인 마저 깨뜨리려 한다.
* 페어리 스피어는 마침내 마룡의 육체를 봉하는데 성공하고 그것이 시간의 틈새에 있는 정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쳐 움직임을 막는다.
* 현세를 파괴하고 있는 마룡의 육신. 그 육신을 봉하기 위한 작전이 가까스로 성공했다. [[그레이 풀버스터]]와 [[리온 바스티아]]가 합작하고 [[쥬비아 록서]]가 조종하는 얼음의 배에 [[엘자 스칼렛]]과 [[미라젠 스트라우스]]가 아크놀로기아를 유인, 기습을 걸어 태우는데 성공시킨다. 때를 노려 [[루시 하트필리아]]가 하루지온에 모인 모든 마도사의 힘을 합친 페어리 스피어로 마룡을 잡는다. 이것으로 모든 게 끝나는 걸까?
- 페이데이 2 . . . . 4회 일치
주무기 산탄총 2개(M1014, Raven)와 보조무기 산탄총(Street Sweeper), 삽, 칼, 진압봉, 토마호크가 들어있는 DLC. 산탄총용 트리플 오 벅샷, 고폭탄, 플레셰트탄, 철갑 슬러그탄도 준다. 이게 가장 핵심.
저격소총(Nagant), 기관총(Buzzsaw 42), 기관단총(Patchett L2A1), 권총(Broomstick), 지휘봉, 막대 수류탄(근접무기), 군용 대검, 성조기가 들어있는 DLC.
아일랜드인 갱단원 클로버와 스텔스에 최적화된 Burglar 퍽 덱, 돌격소총(Queen’s Wrath), 아일랜드풍 목제 곤봉이 들어있는 DLC.
하이스트, 권총(Baby Deagle), 아이스 바일, 다이빙 나이프, 셀카봉, 정글도가 들어있다. 솔직히 이게 콜라보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 하일권 . . . . 4회 일치
=== 삼봉이발소 ===
{{본문|삼봉이발소}}
2006년 파란 웹툰에서 연재하여 총 조회수 1천만 회를 넘기며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외모에 심각한 콤플렉스를 가진 사람들이 자괴감에 빠져 ‘외모 바이러스’에 걸려 발작을 일으키고, 이발사 ‘삼봉’이 저마다의 상처를 안은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해준다는 이야기이다. 하일권의 작품들 중 첫 연극화가 되어 2011년 11월 24일부터 12월 19일까지 공연하였다. 2012년 5월 2일부터 연극이 다시 열린다. 2012년 3월 네이버에서 재연재되고 있다.
2011년 연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때밀이인 주인공 허세는 우연히 목욕탕 금자탕에 피신하게 되고, 그 곳에서 회장에게 목욕의 신 태미러스의 손을 가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허세는 결국 금자탕의 목욕관리사가 되고, 때밀이 대회에서 1등을 하기 위해 노력을 하며 꿈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하일권 역대 만화 중 가장 높은 누적수를 기록하였다. 또한, 만화에서 나온 목욕투의 폭발적인 인기의 힘입어 목욕투 애플리케이션이 출시되었고, 2012년 4월 영화화가 결정되어 2013년에 개봉될 예정이다.
- 홍순언 (1530년) . . . . 4회 일치
사신이 탄 말이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류씨 부인과 하인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사람이 되어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은 금수만도 못한 것이라며 비단을 받기를 거듭 부탁하며 하소연하니 비단을 받아서 되돌아왔다.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공으로 홍순언은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고, 면천 허통하여 [[자헌대부]] 당성군(唐城君)에 책봉되었다.<ref>홍순언은 서자의 신분이었다.</ref> 후에 우림위장(羽林衛將)이 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허봉]]은 그가 말을 잘 한다고 평가하였다. '홍순언의 말은 조리가 있어서 기록할 만하고, 들어도 싫증나지 않으며 오래 들으면 피로도 잊었다<ref>허봉, 《조천기 》(상) (민족문화추진회), 《국역 연행록선집 1》 (경인문화사, 1976) pp.86-169</ref>'고 높게 평가하였다.<ref>김영숙, 〈역관 홍순언과 조명외교〉,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제70집 (2011년 02월호)》 (중국사학회, 2011) pp 195</ref>
* 허봉, 《조천기 》(상) (민족문화추진회)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장관 . . . . 3회 일치
* Armored Spearhead Doctrine(기갑 선봉 교리)
>이 육군 사령관은 기갑 선봉 교리에 따라 지상군을 지휘한다. 선봉을 맡은 전차들의 빠른 공격과 그 뒤를 이은 보병들의 포위 작전으로 적을 소모시켜 승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 MC메타 . . . . 3회 일치
'''한국 힙합계의 대부이자 선봉장''' [* 혹은 가리온 1집의 '가리온'이라는 곡에서 썼던 가사처럼 '한국 힙합의 마지노선이자 최전선'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한국 힙합 문화의 발달에도 관심이 많다. 그러한 일례로 2013년부터 누구나 마이크를 잡고 랩을 하자는 취지의 '모두의 마이크' 행사를 나찰, [[김봉현]] 평론가와 진행하고 있다. 메타의 말을 빌리면, 마스터플랜처럼 '물리적인 공간에서 서로 랩을 하고 서로 호흡하는 그런 지점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시와 랩에 중간 지점인 [[포에트리 슬램]] 행사인 '포에틱 저스티스'를 김봉현씨와 개최하고 있다.
- 고아성 . . . . 3회 일치
고아성은 6살 때인 1997년 길거리 캐스팅을 통해 외환카드 광고 아역 모델로 연예계 데뷔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자체발광' 고아성 "은호원으로 희로애락 다 펼쳐…시즌2 희망" |url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9268211|출판사 =연합뉴스 |저자 =이정현|날짜 = 2017-05-16|확인날짜 =2017-09-07}}</ref> 이후 그는 2004년 어린이 드라마 《[[울라불라 블루짱]]》의 타이틀롤을 맡아 배우로서 정식 데뷔했다. 2006년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 (2006년 영화)|괴물]]》에서 박강두([[송강호]])의 딸 역을 연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의 연기는 평단의 호평을 받아 대한민국영화연기대상 영스타상, [[청룡영화상]] 신인여우상, [[디렉터스 컷 시상식]] 올해의 신인연기자상을 수상하였다.
| [[봉준호]]
| [[봉준호]]
- 구승빈 . . . . 3회 일치
약한 팀의 전력과 본인의 과도한 공격성향으로 인한 미친 듯한 데스누적은 임프의 후반 한타 실력에 대해 호불호가 갈리게 만든다. 시즌 4에 미스틱은 NLB 전용 왕자님이었고 우지는 중국 미친개였지만, 우지와 미스틱이 한국식 운영을 모방하는 팀에서 공격적인 라인전 능력에 뒷받침되는 엄청난 한타 안정감을 보여주며 시즌 7 롤드컵 4강을 찍는 시점에서 LPL 바닥을 떠도는 임프와 사실상 신세가 역전되어버렸다. 시즌 5만 해도 임프가 연봉과 커리어를 다 가진 상황이었지만, LPL의 수준이 올라가고 몬테에 의하면 LPL에서 VG보다도 더 부패했다는 LGD(...)에 사로잡힌 임프는 자신이 메타와 트렌드의 발전에 맞게 진화했음을 검증받을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연봉과 커리어를 교환한 셈이 되어버렸다.~~루키는 2년을 참으니 재키러브가 떡상하는데 임프는......~~
2014년 12월 4일 ~~커플티를 입고~~ [[김보겸]] 방송에 등장했다. 2박 3일 동안 김보겸집에서 먹고 자면서 합동방송을 한다. 처음엔 어색해하다가 차차 보겸과 친해진 [[인섹]]과는 달리, 초장부터 보겸의 개그에 ~~심하게~~빵빵 터지는 등 어색함 없이 매우 친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김보겸은 새벽부터 사골국과 한라봉을 들고 300km 떨어진 임프네집을 찾아가 데려왔다고 한다. 그러한 정성이 본인은 꽤 마음에 들었는지 닉네임을 보겸셔틀임프로 바꿨다.
- 구자욱 . . . . 3회 일치
|연봉 = 2억 5,000만원 (2018년)
스프링캠프와 시범 경기 때 맹활약하며 기대를 받았으나, 외야의 [[최형우 (야구 선수)|최형우]], [[박해민]], [[박한이]], 내야의 [[채태인]], [[박석민]]을 제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범 경기 때 부상을 당한 [[채태인]]을 대신해 개막전 엔트리에 들어갔으며, 3월 28일 [[SK 와이번스]]와의 개막전에 선발 출전하게 되었다. 데뷔 첫 타석에선 유격수 땅볼로 물러났으나, 두 번째 타석에서 우측 펜스를 직격하는 2루타를 쳐, 데뷔 첫 안타와 타점을 기록하였다. [[4월 1일]] [[kt 위즈|kt]]전에서 [[정대현 (1991년)|정대현]]을 상대로 솔로 홈런을 기록하며 데뷔 첫 홈런을 기록하였다. 그러나 시즌 초반 아쉬운 1루 수비를 보여주었다. 두 번째 홈런을 기록한 [[4월 3일]]을 기점으로 타격감이 안좋아지자, [[강봉규]]가 한동안 1루수로 출전하게 되었다. [[4월 9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강봉규]]의 대타로 타석에 나와 [[김승회]]를 상대로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며 데뷔 첫 끝내기 안타를 기록하였다. 다음날 경기에서 부상당한 [[채태인]]이 1군에 올라와 시즌 첫 선발 출장을 했으나, 한 타석만에 그와 교체되었고, 그는 홈런 포함 3타수 2안타로 맹활약하였다. [[채태인]]이 다시 2군으로 내려가며 주전 자리를 이틀만에 꿰찼지만, 다시 타격감이 안 좋아져 [[김정혁 (야구 선수)|김정혁]]이 주전으로 나섰다. 그러나 [[김정혁 (야구 선수)|김정혁]]도 기대 이하의 실력을 보여주었고, [[4월 29일]]에 그는 다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리면서 데뷔 첫 3안타를 기록하게 되었다. 그 뒤로 꾸준히 타격감을 끌어올린 그는 [[채태인]]이 부상에서 돌아오자, 타격 부진에 빠진 [[박해민]]을 대신해 중견수로도 출장하며 꾸준히 경기에 나섰다. [[5월 21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윤명준]]을 상대로 홈런을 기록하였고, 이 홈런은 [[삼성 라이온즈]]의 4000번째 홈런이 되었다. [[6월 3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이승엽]]의 [[KBO (야구)|KBO]] 최초 400호 홈런이 터지던 날, 대수비로 출전한 그도 나란히 홈런을 기록하며 자신이 포스트 [[이승엽]]의 자격이 있다는걸 증명했다. 꾸준히 타격감을 올린 그는 [[6월 18일]] 경기에서 3타수 2안타를 치며 3할고지를 돌파하였고, 시즌 끝에는 3할 4푼 9리의 좋은 성적을 보여주었다. 그 뒤 그는 부상으로 빠진 [[박석민]]과 [[박한이]]를 대신하여 3루 수비와 우익수 수비도 소화하며 수비에서의 재능도 보여줬다. 그는 전반기 0.329의 타율과 9개의 홈런으로 [[2015년]] [[올스타전]] 드림 올스타의 1루수로 뽑히게 되었다. 그는 [[8월 4일]] [[kt 위즈|kt]]전에서 [[저스틴 저마노|저마노]]를 상대로 안타를 기록하며 신인 최다 경기 연속 안타인 22경기 연속 안타를 기록하였고, 다음 날 경기에서도 안타를 기록하며 23G 연속 안타로 기록을 늘렸다. [[8월 22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5타수 5안타 5득점 1홈런으로 맹활약하며 생애 첫 5안타, 5득점에 두 자릿수 홈런까지 달성하였다. [[9월 20일]] [[롯데 자이언츠|롯데]]전에서 타격 후 옆구리 통증으로 시즌을 아쉽게 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역대 신인 최고 타율을 갱신하였다. 최종 성적은 11홈런, 17도루, 57타점, 97득점이었다. 이는 타율 3위, 득점 10위, 출루율 10위의 대단한 성적이였다. 비록 [[2015년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에서는 0.286의 타율로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며 팀은 준우승을 하였으나, [[김하성]]과 [[조무근]]을 제치고 신인왕에 오르게 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11/24/0200000000AKR20151124125600007.HTML?input=1195m '타격 3위' 삼성 구자욱, 2015 신인왕 수상] - 연합뉴스</ref>
- 권혁 . . . . 3회 일치
8월 2일 넥센전까지 38경기 11홀드 1블론 ERA 2.70 WHIP 1.33 30이닝 23피안타(1피홈런) 18사사구 15K를 기록 중이다. 뭐 충분히 뛰어난 성적이긴 하다. 그러나 이름값과 1억 9천만 원이라는 연봉을 생각하면 기대에 많이 못미친다. 보면 알겠지만, 경기당 1이닝이 안되는 수치로서 이는 당초 기대되던 강력한 셋업맨이 아니라 LOOGY, 즉 [[원 포인트 릴리프]]다.[* 물론 예전과 달리 선발 투수들의 소화 이닝이 6이닝 이상까지 올라갔으며 8회에는 [[안지만|힙합전사]]가, 9회에는 [[오승환|인간투석기]]가 풀가동 중인 점을 감안하면 이는 6~7회의 아웃카운트 4~6개를 [[정현욱]], [[권오준]]과 나눠 소화하게 되기 때문에 납득하지 못할 변화도 아니다. [[권오준]]만 해도 경기당 1이닝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LOOGY들에게 가장 금물이라 할 수 있는 '''볼질'''이 심해졌다. 작년만 해도 73K/19BB였고 통산 K/BB도 2를 넘는데 올해는 어째... 물론 [[삼성 라이온즈]]나 국내 야구판에 권혁만한 레프티 릴리버가 있어도 얼마나 더 있겠냐마는, 이전에 비해 좀 안습인건 사실이다.
2014년 11월 28일, [[한화 이글스]]와 FA 계약을 체결했다. 4년 총액 32억 원(계약금 10억 원, 연봉 4억 5,000만 원, 옵션 4억 원)으로, 거품이 가득 낀 FA 시장 상황에서 세간의 예상보단 낮은 금액으로 계약을 맺었다. 정말 돈보다는 필승조나 마무리를 보장받길 원한 듯하였다.
비록 김성근 감독의 투수기용 방식처럼 투수들을 노예 수준으로 혹사시키는 것보다 덜하지만 지난 해 본인이 개처럼 굴렸던 투수들이 후반기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을 목도하고서도 전혀 배운 게 없이 또 굴리는 감독도 있다. 한화 팬들이 김성근에게 바랬던 모습은 그의 이미지로 여겨졌던 [[쌍방울 레이더스]][* 그러나 김성근 재임 당시 이 팀의 연봉 총액이 1위였다. 게다가 모기업이 튼튼하지 못해 이는 몰락의 단초가 된다.] 로 대표되는 "약체 팀을 강하게 만드는 감독"이었는데, 정작 김성근은 그 이미지에 집착한 탓인지 성적 조급증에 미쳐서 베테랑 선수 팔을 갈아넣는 감독의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 김상중(배우) . . . . 3회 일치
|| '''학력''' ||<(> 봉서초등학교[br]완주중학교[br]완주고등학교(전북)[br][[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
* [[특근]](2016) - 박정봉
* 님이여(MBC, 1992) - [[윤봉길]]
- 김성현 (1989년) . . . . 3회 일치
|연봉 =
2012년 초, 투수 [[박현준 (야구 선수)|박현준]]과 함께 [[2012년 한국프로야구 승부조작 사건|2012년 한국 프로 야구 승부 조작 사건]]의 당사자로 밝혀졌다. 박현준과 마찬가지로 혐의를 부인했지만 검찰 수사 결과 2012년 2월 28일, 국민 체육 진흥법 위반으로 [[대구지방검찰청|대구 지방 검찰청]]에 체포되었고, 3월 1일 범죄 사실이 소명되고 증거를 없애거나 도주할 염려가 있다는 이유에서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김성현은 8시간 가량 조사를 받았고, 넥센 시절이던 2011년 시즌 4~5월 브로커와 짜고 두 차례에 걸쳐 일부로 '1회 첫 볼넷'을 던져 승부를 조작하고 이에 따른 사례금 1,000만 원을 챙긴 혐의를 받았다. 2012년 4월 18일, [[대구지방법원|대구 지방 법원]]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집행 유예]] 2년, 추징금 700만 원을 선고하고 사회 봉사 활동 120시간을 명령했다. 이에 따라 2012년 3월 6일, 박현준과 함께 같이 LG 구단에서 웨이버 공시되고 [[KBO (단체)|한국 야구 위원회]](KBO) 상벌 위원회는 4월 18일자 재판 결과를 근거로 김성현을 영구 제명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5588057</ref>
!년도 !!팀 !!평균자책 !!경기수 !!승 !!패 !!세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김정난 . . . . 3회 일치
||<tablebordercolor=#c0c0c0><rowbgcolor=#c0c0c0> '''{{{#ffffff 개봉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이름}}}''' || '''{{{#ffffff 비고}}}''' ||
|| 2001년 || MBC || [[여우와 솜사탕]] || 봉인화 || ||
* [[1991년]] 12월 11일 첫 회가 나간 뒤 시간대가 자주 변경되어 오다가 [[1995년]] 2월 7일부터 화요일 오후 7시 5분으로 고정된 [[SBS]] [[코미디 전망대]]를 같은 달 28일부터 개그맨 [[김병조]] [[이봉원]], 아나운서 [[김성경]]과 공동 MC를 맡았으나 그 해 봄 개편으로 김성경 아나운서와 함께 두 달 만에 하차했다. 사족으로, 코미디 전망대는 김정난 뿐 아니라 다른 방송사에서 활동해 오던 여자 진행자들이 정통 드라마 출연 경력을 가졌다.[* MBC 공채 MC 출신 [[이매리]], KBS - [[MBC]]에서 활동해 온 개그우먼 [[조혜련]]]
- 김혜옥 . . . . 3회 일치
* [[2002년]] [[MBC]] 특집드라마 《[[가리봉 엘레지]]》 ... 주인 아줌마 (동숙 모) 역
* [[2005년]] [[MBC]] 단막극 《[[MBC 베스트극장]] - 가리봉 오션스 일레븐》 ... 장여사 역
* [[2011년]] [[TV조선]] 주말연속극 《[[고봉실 아줌마 구하기]]》 ... 박원숙 역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0화 . . . . 3회 일치
타마키는 공언한 대로 자기 혼자서 이 셋을 상대하겠다 재차 선언한다. 단발머리는 세츠노. 개성은 "절도". 대머리는 호죠. 개성은 "결정". 빵봉투는 타베. 개성은 "식". 이상 세 명이다. 타마키는 패트껌 사무소에서 타코야키를 충분히 먹어서 문어다리의 숙련도도 최고조에 달했고 지난 번 사건의 경험으로 원거리 공격에도 민감해진 상태다. 그는 이런 조무래기들 상대로 프로히어로가 몇 명이나 묶여 있는 거야 말로 적들이 바라는 일이라며 일행에게 먼저 가라고 한다. 후배인 [[미도리야 이즈쿠]]와 키리시마가 주저하나 이런 상황일 수록 프로들의 개성을 아껴두는게 좋다고 상사인 패트껌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나라면 혼자서 3명을 완봉할 수 있어!
>그런 인간이 "완봉할 수 있다"고 단언했다. 그럼 맡길 수밖에 없잖어.
- 멸사봉공 . . . . 3회 일치
『전국책(戦国策)』의 「봉책(秦策)」편이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15년 발표된 「군인칙유(軍人勅諭)」, 메이지 23년 발표된 「교육칙어(教育勅語)」 등에서 멸사봉공을 강조하였으며, [[절대주의]] [[군국주의]] [[미카도이즘]] 사회를 상징하는 표어로 삼았다.
* 중국에서는 이를 극기봉공(克己奉公)이라 하였다.
- 몬스터버스 . . . . 3회 일치
2014년에 개봉한 [[괴수]][[영화]] 고질라를 포함한 배경 세계 공유 괴수 영화 프랜차이즈. 관련 회사는 [[레전더리 픽처스]], [[워너 브라더스]]다.
[[고질라]]가 개봉하고, [[킹콩]]이 등장하는 콩: 스컬 아일랜드가 2017년에 개봉할 예정이며 이서서 고질라 2가 예정되어 있다. 심지어 고질라와 킹콩이 한 스크린에 등장하는 고질라 VS. 콩이 예정되어 있다.
- 박상면(배우) . . . . 3회 일치
|| '''학력''' ||<(> 봉서초등학교(전학)→봉서초등학교 (졸업)[br]완주중학교(전북)(졸업)[br]완주고등학교(전북)(졸업)[br][[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전문학사)[br][[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 ||
||<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박석민 . . . . 3회 일치
2010년 8월 13일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화 이글스]]와의 경기에서 4회말 2사 상황에서 [[강봉규]]가 안타를 기록할 때 2루 주자로 나가 있었는데, 3루를 돌아 홈으로 달려오면서 막판에 [[포수]] [[신경현]]의 태그를 피하다가 신경현과 홈 대치 상황을 만들기도 했다. 이에 심판은 결국 박석민을 바로 아웃시켜 버린다.(...)[[http://yoonseokmin.tistory.com/650|관련 포스트]]
[[최형우]]가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에 빠진 상황에서 4월 한달동안 0.344의 타율과 5개의 홈런을 날리며 [[이승엽]]과 함께 삼성의 중심타선을 지탱했다. 1번 [[배영섭]]과 4번 [[최형우]]가 슬럼프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중일]] 감독은 9번 김상수를 1번으로, 5번에서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던 박석민을 2번으로 전진배치한다. 박석민은 2번 타순에서도 맹타를 휘둘렀지만 박한이가 부상에서 회복될 때까지의 임시직이라고 한다. 박석민 본인도 5번을 선호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최형우의 슬럼프가 길어지자 최형우가 5번으로 내려가고 박석민이 4번을 치게 되었다. 결국 최형우가 2군으로 내려가고 나서는 이승엽이 4번으로 가고 박석민은 3번을 치게 되었다. 최형우가 1군으로 복귀한 이후는 최형우를 이승엽 뒤에 세우지 않겠다는 류중일 감독의 뜻에 따라 박석민 - 이승엽 - [[강봉규]] - 최형우 또는 최형우 - 이승엽 - 박석민의 타순을 따라 3번 또는 5번 타자로 나서다가... 최종적으로는 4번으로 고정되면서 삼성의 중심 타선은 '''3번 이승엽 - 4번 박석민 - 5번 최형우'''가 되었다.
2018년에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에 성화봉송 주자로 나섰다.~~왜 하필 박속닌?~~
- 박용우(배우) . . . . 3회 일치
이후 2006년의 개봉 [[영화]] 조용한 세상과 [[2007년]]의 뷰티풀 선데이에서는 연타로 냉철한 형사 역할을 맡으며 몸으로 뛰는 연기를 소화하는가 하면 [[2009년]] 개봉한 [[핸드폰]]에서는 정반대인 [[찌질이]] 악역도 멋지게 소화하는 등, 극과 극을 오가며 연기 스펙트럼이 무척 넓다.
* 원스 어폰 어 타임 (2008) - 봉구 역
- 박정민(배우) . . . . 3회 일치
2016년 2월 17일에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영화)|동주]]>에 [[강하늘]]과 함께 주연으로 참여했다. 강하늘은 [[윤동주]] 역, 박정민은 윤동주 시인의 사촌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 역으로 분했다. 탄탄한 연기로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송몽규 열사의 재조명과 함께 그 자신도 조명받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동주로 같이 작품을 하게 된 이준익 감독에 따르면, "저예산 영화계의 [[송강호]]"라고. 그리고 이후 인터뷰에서 관련 언급을 하면 자신은 "그러지 마세요 제발"이라며 난감해한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서퍼트 중후군을 가진 진태역을 맡았다. 연기를 위해 장애 아동들을 찾아가 행동을 배우고, 건드려 본 적도 없다던 피아노를 배워 촬영에서 완벽하게 해내는 등 열정이 돋보이며, 이 덕에 [[이병헌]]에게 찬사를 받았다. 다만 피아노를 연주하는 손동작은 실제 연기가 맞지만 연주 자체는 다른 연주자의 소리를 입힌 것이다. 영화 내에서 나오는 곡들은 초보자가 몇 개월 연습한다고 칠 수 있는 곡이 절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개봉된 염력의 경우 흥행에 실패했을 뿐더러 맡은 배역 또한 혹평을 받았다.
||<tablebordercolor=#4682b4><rowbgcolor=#4682b4>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활동'''}}} || '''{{{#white 배역}}}''' || '''{{{#white 관객수}}}''' || '''{{{#white 흥행}}}''' ||
- 북한의 역사왜곡 . . . . 3회 일치
2016년에 영화 인천상륙작전이 개봉하고 [[우리민족끼리]] 웹사이트에서, 반박문을 올리며 인천상륙작전에서 북한이 승리를 거뒀다고 주장했다.
>- 광주 인민봉기가 일어나 미 국무장관 머스키, 국방장관 브라운, 대통령안보담당보좌관 브레진스키, 미 중앙정보국장 터너 등은 긴급모의를 벌려놓고 광주 인민봉기를 진압할 흉계를 꾸미었다.
- 블랙 클로버/124화 . . . . 3회 일치
* [[잭스 류그너]]와 [[아스타(블랙 클로버)|아스타]]가 [[네르슈 버밀리온]]을 처리하는 동안 양팀 여성진의 격돌이 있었다. [[미모사 버밀리온]] 대 [[솔 마론]]. 마론이 골렘을 앞세워 그녀를 덮쳐왔으나 미모사는 식물마법 "마포의 꽃"으로 골렘을 분쇄한다. 마론은 그녀가 예상이상으로 강적이란걸 인정했지만 그녀를 오래 상대할 생각은 없었다. 마포의 꽃의 레이저를 맞고 날아간 골렘의 오른팔이 공중에서 형태를 바꿨다. 흙마법 "흙덩이 봉인". 하늘에서 거대한 토사가 미모사를 덮쳤다. 거기에 파묻힌 미모사는 당분간 움직임을 봉쇄 당했다.
* 잭스의 독설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만큼 상대의 상태도 가리지 않았다. 아스타의 일격으로 네르슈는 기절. 계속 마력을 빨리도록 그 위에 반마법의 검을 얹어 봉인조치까지 했다. 그래도 잭스는 독설을 퍼부었다. 이런 "원시적인 함정"에 걸렸으니 기사단이고 부단장이고 뭐고 다 때려치라고 빈정거린 그는 "어쨌든 기분 나쁜 나르시스트"라는 원색적인 욕설까지 잊지 않았다. 이 상황을 합작한 아스타 조차 적당히 봐주라고 한소리했다.
- 서신애 . . . . 3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E2A6B4><#E2A6B4> '''{{{#white 개봉 연도}}}''' ||<#E2A6B4> '''{{{#white 제목}}}''' ||<#E2A6B4> '''{{{#white 배역}}}''' ||<#E2A6B4> '''{{{#white 비고}}}''' ||
|| [[2013년]] [[11월 9일]]~[[2013년]] [[11월 16일]] || [[MBC]] || 2013 코이카의 꿈 || 봉사원 || ||
* [[Apink|에이핑크]]와 인연이 있다. [[박초롱]]의 경우 2013년쯤에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 봉사를 같이 다녀왔고, [[김남주(Apink)|김남주]][* 첨언하자면 [[김남주(Apink)|김남주]] 역시 아역배우 출신이다. 연예계에 있어서도 서신애의 3년 선배며, 2001년 [[LG전자]] CF로 데뷔했다.]의 경우는 [[성균관대학교]] 선후배 사이다. 재미있는 게 [[지붕뚫고 하이킥]]에서 상대 역할로 나왔던 [[진지희]]는 [[걸스데이]]와 인연이 있다는 데 있다.[* (지금은 드림티가 탈예당했지만) 한때 같은 웰메이드예당 소속이었고, [[혜리]]의 경우 [[진지희]]와 함께 선암여고 탐정단에 출연했다.]
- 성훈(배우) . . . . 3회 일치
||<#368AFF> '''{{{#white 개봉 연도}}}''' ||<#368AFF> '''{{{#white 제목}}}''' ||<#368AFF> '''{{{#white 배역}}}''' ||<#368AFF> '''{{{#white 비고}}}''' ||
||<|2> 2018 || 《[[돌아와요 부산항애|돌아와요 부산항애]]》 || 김태성 || 2018. 01. 17. 개봉 ||
|| [[Mnet]] || 《Sing스트리트》 || 출연[* 2016년 10월 26일~12월 14일 방송. EDM의 선구자~~(?)~~인 박명수에게 디제잉을 배웠다..막방공연 전에 박명수에게 청국장파스타를 해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우월한 기럭지에 조각같은 외모, 노래도 수준급, 요리도 잘해, 거기다 성격도 좋고 겸손함까지.. 도대체 못하는게 뭐임?~~ 막방 공연때 허리통증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했고 대중은 환호했다.. 결국 3표 차이로 봉태규에게 1위를 내 주었다.] ||
- 세정(구구단) . . . . 3회 일치
* [[I.O.I]] 활동 종료를 앞두고 녹화가 있었던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2017년|2017 설날 아육대]]에 출전하며 2017년 1월 30일 방영된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아육대]] 무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구구단(아이돌)|구구단]]은 세정과 [[하나(구구단)|하나]]가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2017년|아육대]] 육상 60m에 출전했는데 [[어서옵SHOW]] 웨딩편에서 레전드로 남은 '''등근육'''을 눈여겨본 캐스터 [[정은지]]가 세정이 육상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거라고 언급했고, [[정은지]]의 예상대로 보란 듯이 예선에서 중간에 삐끗한 [[TWICE|트와이스]]의 [[채영(TWICE)|채영]]을 꺾는 이변을 일으키며 [[채영(TWICE)|채영]]마저 [[펠레의 저주|윤여춘의 저주]]에 걸려들게 만들었다.[* 이 날 [[와일드카드(스포츠)|와일드카드]]를 받은 출전자는 [[베리굿]]의 [[서율(베리굿)|서율]](10.25)뿐이다. 여자부가 5개 조로 경기했기 때문.] 결승전에서 [[비니(오마이걸)|비니]]보다 단 0.03초 늦은 기록으로 4위에 그쳐 아깝게 [[구구단(아이돌)|구구단]]의 첫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아육대]] 메달을 놓쳤지만, 첫 출전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결승전 기록은 [[구구단(아이돌)|그룹명]]이 딱 연상되는 '''9.90'''.[* 예선 통과 때 기록은 10.02였다. 결선 때 기록이 더 좋았지만, [[루이(H.U.B)|상대들이]] [[유주(여자친구)|너무]] [[비니(오마이걸)|강해서]]...] 이 날 [[I.O.I]] 시절 한솥밥을 먹었던 [[연정(우주소녀)|유연정]]도 [[아이돌스타 육상 선수권대회|아육대]]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지만, 세정과 달리 [[연정(우주소녀)|연정]]은 경기에 나서지 않았다.[* [[리듬체조]] 동메달 이후 울고 있는 [[성소]]를 위로해 주는 장면만 나갔다.] 뒷이야기지만, 이 날 [[유주(여자친구)|유주]]를 무너뜨리며 강한 인상을 남긴 [[루이(H.U.B)|와타나베 루이]]는 세정이 말동무가 되어 주어서 고맙다고 말했다. [[루이(H.U.B)|루이]]가 혼자 팀을 대표하여 나서다 보니, 세정이 [[루이(H.U.B)|루이]]에게 [[구구단(아이돌)|구구단]] 멤버들이랑 이야기하고 같이 있자고 했다고 한다.[[차오루]]의 [[리듬체조]]([[클럽|곤봉]]) 때는 놀라서 입을 쩍 벌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 10월 13일 빅픽처패밀리 4회에서는 깜짝 생일파티의 주인공이 되었다. 차인표와 류수영이 세정을 검색(갓세정이니까 갓씨야? 곽씨인가,,,)하다가 녹화당일이 김세정의 생일임을 알아내고 생일상을 준비하는 에피소드가 메인테마였다. 훈훈한 생일카드 읽기와 20년전 나에게 말해보기 등의 촉촉한 얘기들이 오갔다. 김세정은 3살 세정이에게 "울어라. 그때 울지 않으면 23살 때 3살처럼 울게 된다"고 말했다. 관련 예로 입양아 봉사 시절 경험을 들어 2년 전 SNS와 대형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됐던 입양 예정아 태린에게 쓴 편지[* 태린아 ~ 너의 눈은 강을 닮은 것처럼 예쁘고 코는 오똑하니 자리잡아서는 조그마한 입술로 웃어줄 때마다 누나들의 마음이 사그러든단다.너의 울음소리가 시원하게 세상에 퍼질 수 있도록누나가 늘 응원할게! 눈만큼 예쁜 꿈을 꾸는 태린이가 되면 좋겠다ㅎㅎ 웃는 모습만큼 우는 모습도 예쁜 태린아. 세상앞에 움츠려 들지마. 넌 사랑받아 마땅한 아이니까. 사랑해 태린아 이 세상 모두가 널]가 다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프로듀스 101 1회에서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한것처럼 닮은꼴 유명인이 상당히 많은 편. 웃는 모습이 놀라우리만큼 만화가 [[이말년]]과 닮았다.~~정준영, [[한승연]], [[강균성]], [[추사랑]], 영화 '인사이드 아웃'의 "슬픔이"도 닮았다~~ ~~[[우희진]]과도 닮았다~~ 웃는 모습이 [[민아(걸스데이)|방민아]], 눈웃음과 아재스러움이 [[오 나의 귀신님]]의 [[나봉선]]과 똑같다는 이야기도 있다. [[김소현(1975)|김소현]], [[지민(AOA)|신지민]], [[혜리]], [[강민경]]도 닮았다는 얘기도 나온다. 또 [[백종원]][* 김세정이 [[정채연]]과 함께 3대천왕에 출연했을때, 백종원이 김세정을 보고 장난삼아 자신의 딸이라고 했다. 김세정 본인 또한 닮은꼴임을 인정했다. 백종원은 자기 둘째 딸이 자기 판박이라서 걱정이 많은데 김세정 때문에 안심이 된다라는 말도 했다], [[첸(EXO)|첸]]과도 상당히 닮은 편이다. --닮은꼴 부자-- ~~[[김윤아]] 판박이 아니었어??~~ ~~도대체 닮은꼴이 몇 명이나 되는거야~~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주요임무 . . . . 3회 일치
이후 자신의 상품이 사라진걸 본 대처는 분노, 요새를 봉쇄하고 요새에서 나가려고 하는 모든걸 쏴버리라고 명령한다. 하지만 헤이덤에게 쓰러져 처치의 총에 생을 마감한다.
>코너: 애덤스와 핸콕, 그리고 그들이 봉사하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넌 그 사람들을 죽일 작정이었지.
다음날 새벽, 코너는 수제 열쇠로 감방 문을 열려고 했지만 실패한다. 낮이되자 코너는 윔스를 찾아가 열쇠가 맞지 않는다고 따진다. 그러자 윔스는 그 열쇠는 교도소장의 진짜 열쇠와 바꿔치기 하는 용도라고 한다. 그냥 열쇠를 훔쳐가면 들키지만 열쇠를 바꿔채면 못 알아볼것이며, 열쇠를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 윔스는 교도소장에게 접근할 방법으로 싸움을 일으켜 교도소장이 감독하는 "구덩이"로 끌려가는 방법을 말한다. 한두명 쥐어패는 정도로는 간수들 여흥거리 밖에 안 되니 가능한 많이 때려눕혀야 한다고. 코너는 윔스의 말대로 다른 수감자들에게 시비를 걸어 7명의 죄수를 때려눕힌다. 이후 간수들이 진압봉으로 코너를 두들겨 패고는 "구덩이"에 처넣어버린다.
- 오봉 . . . . 3회 일치
우란봉에(盂蘭盆会-백중맞이)를 줄인 말로, 일본의 중요한 명절이다. 평일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름 휴가를 얻어서 시골로 귀성하므로 회사가 업무를 쉬는 회사가 많다. 오봉의 시기는 전국 대부분이 양력 8월 15일이지만, 다른 날짜에 행사를 하는 지방도 있다.
「봉오도리(盆踊り)」 : 강강술래처럼 빙빙 돌면서 춤을 춘다. 각 지방마다 특색이 있다.
- 원빈(배우) . . . . 3회 일치
같은 해 [[가을동화]] 당시만 해도 "'''사랑? 웃기지 마. 이젠 돈~~똥~~으로 사겠어! 얼마면 돼?'''"가 칭찬 반 놀림 반으로 화제가 되었으나[* 잘생기면 사랑도 똥(...)으로 사냐며 많이 패러디되었다] [[태극기 휘날리며]](2004년)를 거치고[* 이때만 해도 [[장동건]]에 묻어간다, 조연 배우 일부발로 나온 이야기 중 싸가지 없다더라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다만, 원빈의 성격은 나름대로 겸손한 편이라고 알려져있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영화)|마더]](2009년)에서 연기력 논란을 확실히 떨쳐버렸으며 [[아저씨(영화)|아저씨]]에서는 영화 한 편을 혼자서 끌고 나갈 수 있는 원톱 흥행 배우로서 자리매김했다.
결국 광고는 계속 찍고 연기는 안 하냐는 식의 기사도 나왔다. 사실 [[2018년]] 현재 기준으로 [[아저씨(영화)|아저씨]]가 개봉한지 거의 8년이 다 되어가는데 '''작품이 단 한 편도 없다'''. 아저씨의 상대역이었던 [[김새론]]이 아역배우인 것을 감안해도 차기 영화 7편, 드라마 11편으로 현저히 비교된다. 김새론 기사가 올라오면 '''얘가 이렇게 클 동안 원빈은 작품을 하나도 안했다니...'''같은 네티즌들의 반응이 줄을 잇는다. 심지어 황정민은 원빈이 아저씨 한 편 찍는 동안 영화 15편 드라마 한 편에 뮤지컬까지 찍고 있다.
||<#FF8200> '''{{{#white 개봉 연도}}}''' ||<#FF9100> '''{{{#white 제목}}}''' ||<#FFA500> '''{{{#white 활동}}}''' ||<#FFA400> {{{#white '''배역'''}}} ||<#FF9100> '''{{{#white 관객수}}}''' ||<#FF9100> '''{{{#white 흥행}}}''' ||
- 월드 인 컨플릭트/줄거리 . . . . 3회 일치
톰슨 이병은 국방부에 전화를 건다. 본래 워싱턴 주방위군이었지만 시애틀 함락 당시 정규군으로 편입된 바람에 봉급 체계가 혼선되어 봉급을 받지 못한 것. 톰슨은 시카고에 있는 전처에게 돈을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공무원은 중대 행정병에게 451-A 서류를 받아서 제출하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에 톰슨은 지금 미국이 침공당했는데 무슨 서류니 법정이니 무슨 상관이냐며 따지지만 미국이 침공당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전화는 말싸움으로 끝나버린다.
공격이 시작되기 전 브리핑 시간. 소여는 소련군 사령부가 있는 강 너머에 몇차례 포격을 가한 후, 전위대를 투입할 계획을 세운다. 그것이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사바티에는 한시라도 빨리 소련군을 자국 국토에서 몰아내고 싶다며 불만을 표시했지만, 소여는 오늘이 지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소여는 파커 소위의 중대에게 전위대를 맡기고, 배넌 대위의 전차 중대는 만일을 위해 남겨둔다. 이 말을 들은 배넌은 자신의 중대가 선봉이 되어야 하면서 불만을 표한다. "우리 중대가 전투를 놓칠지도 모른단 말입니다!"라는 배넌의 말을 들은 소여는 이곳에서 영광과 명예같은 것을 찾고있냐며 배넌을 윽박지른 후 그의 중대로 보내버린다. 얼마 되지 않아 강 건너에 연합군의 포격이 가해지기 시작하고, 소여는 나머지 지휘관들도 각자의 부대로 보내 전투를 준비하게 한다.
- 유동근(배우) . . . . 3회 일치
[[어린이 드라마]]와도 인연을 맺은 일이 있다. [[우리 아빠 홈런]]은 유동근이 1990년대 들어와 부드러운 이미지를 겸비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고, 1999년에는 KBS 2TV [[누룽지 선생님과 감자 일곱 개]]의 주연을 맡아 활약했다.[* 이미 대상까지 탄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으로 소외받는 시간대의 어린이 드라마에 출연한 것은 이 드라마의 연출자인 이교육 PD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용의 눈물》 조연출자였다가 이 드라마가 연출 입봉작이었고, 선생님 역 캐스팅에 난항을 겪자 유동근이 의리로 출연한 것. 《용의 눈물》의 또 다른 중심축이었던 배우 [[김무생]] 또한 이 드라마에서 마을 이장역으로 출연하는 위엄을 보여준다...]
정도전이 종방한 후 정말 짧은 휴식기를 가지고 바로 [[주말 드라마]] [[가족끼리 왜 이래]]에 출연하였었다. 바로 전작에서 박력 넘치는 무골 이성계를 연기했던 것과 정 반대로 여기서는 나이들어 쓸쓸함을 느끼면서도 자식 걱정에 마음을 쏟는 순박한 아버지 [[차순봉]] 역할로 나와서 정도전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채 보면 엄청난 괴리감을 받게 된다. 달리 말하면 유동근이라는 배우의 연기력과 그 스펙트럼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 그야말로 1년 내내 KBS 드라마의 주역으로 미칠듯한 활약을 했고 그 열연의 결과로 2014 [[KBS 연기대상]] 대상을 수상, 3번째 대상의 영광을 품에 안았다. 이번 대상을 수상한 당시 나이 만 58세로 [[김혜자]]의 뒤를 잇는 최고령 연기대상 수상자로 남자 배우 중에선 두번째로 최고령 수상자.[* 2014년 수상 당시에는 남자배우 중 최고령 수상자였으나, 2017년에 [[아버지가 이상해]]에서 열연한 [[김영철(배우)|김영철]]의 대상 수상으로 그 기록이 깨졌다.(수상 당시 만 64세.)]
배우 [[엄태웅]]이 조카사위이다.[* 유동근이 [[엄태웅]]의 아내 윤혜진 씨의 외삼촌이다. 즉 (유동근의 누나 유예원과 결혼하였다는) 원로배우 [[윤일봉]]이 매형.] 엄태웅의 누나인 [[엄정화]]와는 유동근, 김을동 부부와 사돈지간이다. 현재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하는 엄태웅의 딸 엄지온에게는 유동근, 김을동 부부가 사실상 [[할아버지]], [[할머니]] 뻘이 된다.
- 유민상(개그맨) . . . . 3회 일치
그런데 소비자 고발 당시 맛을(?) 좀 봤는지 은근히 평범하고 건실한 사람이지만 '''주위 사람들이 이상하게 몰아가는''' 캐릭터를 하고 있는게 종종 보인다. 거기다 최근엔 여장에도 맛이 들리기 시작했는지 몇 몇 코너에서 보여준 [[OME]]스러운 여장 모습으로 [[선생 김봉투]]에서 고정 등장한 적이 있었다.
참고로, 개콘에서 자꾸 뚱뚱한 애들한테 여장을 시키는 이유는 [[신봉선]]이 사라진 뒤 대체할 만한 캐릭터가 없어서라고 한다.
* [[선생 김봉투]]
- 유태웅(탤런트) . . . . 3회 일치
||<#ABEEB0><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ABEEB0> '''{{{#127B1B 개봉 연도}}}''' ||<#ABEEB0> '''{{{#127B1B 제목}}}''' ||<#ABEEB0> '''{{{#127B1B 역할}}}''' ||<#ABEEB0> '''{{{#127B1B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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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해진(배우) . . . . 3회 일치
2014년 개봉작 《[[해적: 바다로 간 산적]]》에 철봉역으로 출연하여 영화를 [[하드캐리]]한 공으로 2014년 [[대종상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을 수상하였다.
||[[해적: 바다로 간 산적]]||철봉||8,666,208||성공||
- 윤종신 . . . . 3회 일치
'''극사실주의 작사의 최고봉'''
[[2001년]] 여름 콘셉트 앨범인 9집 '그늘'을 내놓았다. [[이규호(음악인)|이규호]]가 작곡한 '''팥빙수'''가 들어간 앨범. [[이한철]] 등의 동료 가수들이 호평했다. 2010년 백비트 김봉현과의 인터뷰에서 본인의 베스트 앨범으로 9집을 [[http://hyunjiwoon.tistory.com/1331|꼽은 바 있다]].[* 윤종신 曰, "9집이(나의 베스트 앨범이)다. 제일 창의적인 작품이었다. 수목원에서 같은 곡은 우리나라에서 나만 할 수 있다. 버릴 곡이 하나도 없었다. ... 음악을 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팥빙수가 그렇게 만만한 노래가 아니다. [[이규호(음악인)|이규호]]가 곡을 호락호락하게 쓰지 않았다. 어렵게 만들었는데 쉽게 들리는 노래가 멋있는 노래다. 9집은 전곡이 어쿠스틱 모양새가 나온다."]
국내에 1월에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코코(애니메이션)|코코]]의 주제가 [[Remember Me]][* 번역된 제목은 '기억해 줘'] 한국어 더빙판을 담당해 불렀으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 윤휘 . . . . 3회 일치
윤휘는 [[1577년]](선조 11년) [[의정부]][[영의정]] [[윤두수]](尹斗壽)와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 황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용]]으로 [[증직|증]] [[좌찬성]]에 추증된 [[윤희림]](尹希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자감정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윤변]](尹忭)이다. [[윤근수]]는 그의 숙부였고, [[윤방]], [[윤흔]]은 그의 형이며, [[윤훤]]은 그의 동생이었다. 일찍이 우계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조선]] 조정의 특명전권대사로 [[청나라]]군과 [[남한산성]]을 오가면서 화의 교섭을 노력, [[청나라]]군사들을 설득시키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였다. 환도 후 [[도승지]]에 임명되어 [[청나라]]와의 외교를 전담하였고, 사신으로 [[청나라]]와 [[명나라]]를 여러 번 다녀왔다. 이 과정에서 [[청나라]]의 [[조선]]의 정벌 여론을 무마시키기도 했다. [[1638년]] [[한성부 판윤]], [[형조판서]]를 거쳐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책봉[[주청사]](奏請使)가 되어 [[청나라]]에 가서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러나 귀국 도중 [[담배]](南草)를 [[가마]]속에 숨겨갖고 왔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사신직에서 파직당했다.
- 윤흔 . . . . 3회 일치
도재 윤흔은 [[1564년]] [[조선 선조|선조]] 때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오음 [[윤두수]](尹斗壽)와 참봉 황대용(黃大用)의 딸 황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증직|증]] [[의정부]][[좌찬성]] 윤희림의 증손으로, [[조선 인조|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방]](尹昉)의 동생이다.
묘비는 [[1640년]](인조 18)에 세워졌으며 학곡(鶴谷) [[홍서봉]](洪瑞鳳)이 비문을 짓고, 전서(篆書)의 대가였던 [[신익성]](申翊聖)이 글씨를 썼다. 그의 7대손이 [[윤웅렬]], [[윤영렬]] 형제였고, 8대손은 독립운동가 겸 사상가 좌옹 [[윤치호]]였다. 9대손은 [[대한민국]]의 [[대한민국의 대통령|제4대 대통령]]을 지낸 [[윤보선]]과 [[서울대학교]]의 부총장과 [[서울대학교의 총장|총장]]을 지낸 [[윤일선]]이었다.
* [[봉석주]]
- 은혼/599화 . . . . 3회 일치
* 해방군 말단의 약탈행위와 이에 봉기한 가부키쵸 주민들.
* 해방군은 금방 물러갔지만 그건 주민들의 봉기를 빌미로 진압군을 밀어넣기 위한 책략.
* 큐베는 야규 가문의 이름을 걸고 각지의 민중들을 하나로 규합, 봉기할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
- 은혼/609화 . . . . 3회 일치
* 이어 지상군은 타케미카즈치를 원호하고 지구군이 방해활동을 하지 못하게 봉쇄한다.
* 킨토키와 타마는 포대에 붙은 제어구에 들어가 '''킨&타마'''로서 '''저 봉에서 무언가를 발사'''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단 포대가 되는 봉이 있고 양 옆의 구슬은 제어구인데 여기에 킨토키와 타마가 들어감으로 해서 정말로 '''킨타마'''가 완성된다.
- 은혼/617화 . . . . 3회 일치
* 여기에 부응하든 니시노가 기세를 올리며 선봉에 선다. 그는 야규류의 이름을 우주에 떨쳐주겠다고 호언을 하려는 찰나, 흔적도 없이 모습이 사라진다.
* [[오우가이]] 등장. 그가 휘두르는 철봉이었다.
니시노는 그 철봉에 맞아 벽에 처박혀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그 가공할 힘이 의용군들도 경악한다.
- 은혼/630화 . . . . 3회 일치
해방군 모함 아메노토리후네는 함 전체의 구조를 변화시켜 파괴병기 "히노카구츠나"로 변신한다. 해방군 모함은 단순한 우주전함이 아니다. 우주의 정수가 집결된 파괴병기 히노카구츠나를 안전하게 사용하기 위한 안치대인 것이다. 그 포격 한 방으로 행성을 파괴하는 위력 때문에 오랜시간 봉인되어 있었으나 해방군이 봉기하며 봉인을 풀었다. 위력이 큰 만큼 사용에도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지만 이미 충전이 끝났다. 히노카구츠나는 곧바로 발사 준비에 들어갔으녀 지금으로부터 6시간 뒤, 지구를 우주에서 지워버릴 것이다.
- 이광호 . . . . 3회 일치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의문학]]》 편집위원(1992~1999), 《포에티카》 편집위원, 《[[문학과사회]]》 편집동인(1999~2010)을 역임했다. [[2001년]] 제13회 「[[소천비평문학상]]」,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2007년]] 제18회 「[[팔봉비평문학상]]」, [[2009년]] 제17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부터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2007년 제18회 「[[팔봉비평문학상]]」
[[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서울예술대학교 교수]][[분류:196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분류: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자]][[분류:대산문학상 수상자]]
- 이민우(배우) . . . . 3회 일치
그러다가 2013년작인 [[홍상수]] 감독 영화 《우리 선희》에 오랜만에 나왔는데 전국 40개 극장에서 개봉한 저예산 영화임을 생각하면 전국 관객 68,770명으로 꽤 성공했다.
서울 모 어린이 집에서 아이들에게 골프를 가르쳐주는 봉사 활동을 했다.
||<table align=center><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이민호(1987) . . . . 3회 일치
2015년 초에 개봉한 [[강남1970]]의 [[김종대#s-2]] 역할로 영화 첫 주연작품을 찍었다. 이민호의 새로운 연기 변신에 호평을 받았고 눈빛 연기, 액션 연기 쪽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청불임에도 불구하고 첫 주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하며 총 관객수 220만 명으로 막을 내리는 걸로 스크린 데뷔식을 치렀다. [[강남1970]]으로 2015년 52회 [[대종상영화제]] 남자신인상 수상, 19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 프로듀서초이스상을 수상하였다.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009dec><#009dec> '''{{{#white 개봉 연도}}}''' ||<#009dec> '''{{{#white 제목}}}''' ||<#009dec> '''{{{#white 배역}}}''' ||<#009dec> '''{{{#white 비고}}}''' ||
|| 2016 웨이보 영화의 밤 || 아시아 영화 선봉 인물상 || ||
- 이상백 (1904년) . . . . 3회 일치
[[일제 강점기]] 당시 서자들을 차별대우하는 문제인 '서얼차대(庶孽差待)의 연원에 대한 일문제'를 [[진단학회]] 학보에 기고한 것을 시작으로, [[조선]] 전기와 건국 초기 분야에 대한 것을 연구하였다. 그는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 이조 태조의 사전개혁운동(私田改革運動)과 건국 후의 실적, 위화도회군고(威化島回軍考), '우창비왕설(禑昌非王說)에 취하여', '[[고려]]말 이조초에 있어서의 이성계 일파의 전제개혁운동(田制改革運動)과 그 실적' 등 고려 말, 조선 건국, 조선 전기 분야의 정치, 사회적인 현상에 대한 연구와 분석을 시도하였다.
'삼봉인물고(三峰人物考)'를 발표한 이래 그는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린 것은 [[정도전]]의 잘못도 있지만 [[정도전]]의 정적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비난, 부정적인 시각만 강조되어 왔음을 주장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로 고대사와 중세사, 상고사를 연구하는 타 학자들과 달리 그는 주로 조선 왕조사의 연구에 집중하여 힘썼으며 [[조선]] 건국과 조선 초기 분야의 연구에 업적을 이룩하여 [[1963년]] [[건국훈장]]과 [[문화훈장 대통령장]](大統領章)을 수여받았다.
***** 재종손서 : 박영철, 대봉정형외과 원장
- 이상호 (1989년) . . . . 3회 일치
|연봉 = 7,500만원 (2018년)
==연봉==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이시영(배우) . . . . 3회 일치
|| '''학력''' ||<(> 봉서초등학교[br]완주중학교[br]완주고등학교[br][[동덕여자대학교]] 의상디자인학과 ||
2011년 3월 31일에 개봉한 영화 [[위험한 상견례]]에서 주연을 맡았다. 영화는 흥행에 성공해 여배우로서도 상승세를 탔다.
||<rowbgcolor=#c0c0c0>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비고'''}}} ||
- 이연희(배우) . . . . 3회 일치
2008년에 개봉한 영화 [[강풀의 순정만화|순정만화]]에서 여주인공을 맡았다. 독특한 성격의 여고생 역할이었는데, 어눌한 발음이 앳된 학생의 이미지에 녹아들어서 평이 괜찮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였다.
2015년 설 연휴에 개봉한 [[조선명탐정: 사라진 놉의 딸]]에서도 연기력은 지적받지 않았고 300만 이상의 관객을 기록하며 흥행에 성공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명민과 오달수의 연기를 보기 위해 조선명탐정을 보러 갔기 때문에 이연희 덕분에 영화가 흥행한 것은 아니다. 다만 2013년 작인 [[결혼전야]]에 경우 주연 롤을 맡은 배우들이 단체로 나오는 옴니버스식 영화였던 것에 비해 조선명탐정 같은 경우 김명민, 오달수와 함께 메인 주역이였으므로 300만 이상의 흥행은 상당히 고무적이다.
||<tablebordercolor=#b88568><rowbgcolor=#b88568> '''개봉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 이영 (1492년) . . . . 3회 일치
그의 초기 행적은 미상이다. 후에 유일의 후손으로 조정에서 그를 불렀지만 사양하고 두문불출하였으며, [[영천]]][[도촌]](후에 봉화로 편입되었다.)에서 [[예안]] [[녹전]] [[녹전면|녹래리]]로 들어가 외부와 단절하고 은거하였다.
* 부인 : 봉화금씨, 부장 금진청(琴振淸)의 딸
** 아들 : 이봉령(李鳳齡)
- 이장경 . . . . 3회 일치
'''이장경'''(李長庚, ? ~ ?)은 [[고려]]시대 중기의 호족으로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 [[이조년]] 5형제의 아버지이자 [[이인기]], [[이승경]]의 할아버지였다. [[이인임]]의 증조부, [[이숭인]]의 고조부였다. 아들 5형제의 출세로 거듭 증직되고 광산부원군(廣山府院君)에 추봉되었다가 손자 [[이승경]]의 출세로 [[원나라]]로부터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되었다. 본관은 [[성주 이씨|성주]]이며 [[성주 이씨]]의 중시조로 본다. [[경상북도]] 출신.
생전에 상호장(上戶長)과 안일호장을 지냈고 사후 아들 [[이백년]](李百年), [[이천년]](李千年), [[이만년]](李萬年), [[이억년]](李億年), [[이조년]](李兆年)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이백년은 밀직사사(密直司事), 이천년은 참지정사, 이만년은 문하시중, 이조년은 대제학을 지냈으므로 아들들의 출세로 고려조로부터는 삼중대광 문하좌시중(三重大匡 門下左侍中) 흥안부원군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도첨의정승 지전리사사 상호군(都僉議政丞 知典理司事 上濩軍)에 추증된 뒤 원나라 황제로부터는 농서군공에 추봉되었다.
- 이재율 (1993년) . . . . 3회 일치
|연봉 = 3,200만원 (2018년)
==연봉==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이지우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연봉 =
==연봉==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이진주 (1678년) . . . . 3회 일치
[[순흥향교]] 활동으로는 1703년 8월 4일 [[순흥향교]] 서무찬인(西廡賛引), 봉작(奉爵), 1705년 2월 3일 봉작(奉爵), 제물유사(祭物有司), 1706년 2월 8일 서종사찬인(西從祀賛引), 8월 2일 봉로(奉爐), 1710년 8월 대축, 1711년 2월 서무헌관(西廡獻官), 8월 찬자(贊者), 1712년 2월 축(祝), 1716년 2월 6일 대축, 1717년 2월 2일 대축 등을 맡았다.<ref>執事案 地:癸未二月春享時, 丁酉八月告由時</ref>
- 일곱개의 대죄/187화 . . . . 3회 일치
* 분명 십계는 "영원한 어둠의 관"에 봉인되었는데 누가 봉인을 풀었냐고 경악해한다.
* 여신족이 흑막이고 최종보스라는 설이 강하게 대두되는데 네로바스타가 졸렬한 짓만 한데다 전반적인 묘사가 썩 좋지 않다. 사실 이전에도 멜리오다스를 죽이겠다고 반에게 엘레인의 목숨을 담보로 암살을 사주하거나 구대전에서 마신족의 통수를 치고 나머지 세 종족을 규합, 마신족을 봉인해 버리는 등 비겁해 보이는 일을 마구 해댔던게 이미지가 좋지 않다.
- 일곱개의 대죄/215화 . . . . 3회 일치
* 그리고 다음 순간, 디안느는 방어할 틈도 없이 젤드리스의 일격을 허용한다. 젤드리스는 화살처럼 날아와서 드롤의 가슴을 과녘처럼 파고든다. 디안느는 쓰러지면서도 지금 일어난 일이 믿기지 않는다. [[일곱개의 대죄/201화|십계의 공격에도 끄떡 없던]] 드롤의 몸이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이렇게 치명상을 입을 수 있는 걸까? 하지만 우선은 방어다. 쓰러진 채로 "가이아폼"을 사용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몸에서 마력이 발동하지 않는다. 젤드리스가 그를 쓰러뜨리면서 마력까지 봉해서 아무런 기술도 쓸 수 없는 것이다. 디안느는 그가 다른 십계와도 다른, 믿기지 않는 강자라는 걸 실감한다.
* 젤드리스는 봉한 마력은 곧 돌려주겠다며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이름 "젤드리스"를 밝히고 또 자신이 "마신왕의 마력을 빌려서 행사하는 자", 즉 "마신왕의 대리"라고 말한다. 마신왕의 마력, 그 대행자, 모두 디안느에겐 생소한 소리다. 그러나 그 의미를 제대로 헤아리기도 전에, 젤드리스는 무서운 제안을 던진다.
도저히 드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발상. 마력까지 봉인된 몸으로 어떻게 했는진 모르지만, 아무튼 그녀가 드롤의 선택을 초월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녀가 살아난 거야 말로 그 증거다.
- 일곱개의 대죄/221화 . . . . 3회 일치
* 이 기가막힌 소식은 [[멜리오다스]]의 귀에도 들어갔다. [[엘리자베스 리오네스]]의 부탁으로 단 둘이 대화할 곳을 찾던 그들은 리오네스 성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산 봉우리에 도착했다. 멜리오다스는 마가렛의 소식을 전하며 "그 얌전한 마가렛이 이럴 줄은 몰랐다"고 말한다. 엘리자베스는 10년이나 구속된 끝에 겨우 해방됐는데 눈 앞에서 연인을 납치 당했으니 무리도 아니라고 말한다. 멜리오다스는 "그 둘"이 같이 가게 돼서 안심했다고 하는데.
3천 년 전 봉인 당한 마신족이 그저 닮은 사람을 착각할 리가 없다.
* 봉우리 뒤편의 언덕에서 불청객이 기어나왔다. [[반(일곱 개의 대죄)|반]]과 할리퀸이 슬금슬금 일어나더니 "무슨 짓을 저질렀냐"고 은근히 힐난했다. 분명 엿듣고 있던게 분명하다. 둘은 사랑싸움이냐느니, 왕녀가 울고 있던거 같다느니 쓸데없이 참견해온다. 멜리오다스가 여긴 왠 일이냐고 묻자 반이 "킹이 요정 주제에 프로포즈하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다"고 대꾸했다. 혹시 전부 들었냐고 묻자 둘은 전혀 아니라고 답했지만 반이 곧바로 "사랑 싸움의 원인은 뭐냐"고 짖궂은 얼굴로 물었다. 요즘 연애를 시작했다고 너무 기가 산 할리퀸 쪽도 "여자 마음을 좀 더 공부해야 한다"고 거들먹거린다. 부하들의 따뜻한 관심에 감격한 단장.
- 장민호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연봉 = 2,700만 원 (2015년)
==연봉==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장평도정 . . . . 3회 일치
아버지는 [[조선 태종|태종 이방원]]의 아들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禔)이고, 어머니는 이름 미상의 첩이다. 그의 출생년도와 생일에 대한 기록은 실전되어 전하지 않는다. 선원보략에는 그가 1438년생으로 나타나나 [[세종실록]]에는 1437년 정윤에 봉해진 기록이 나타난다.
그의 초기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1437년]](세종 19년) [[2월 21일]] 정윤(正尹)에 제수되고<ref>세종실록 76권, 1437년(세종 19년, 명 정통 2년) 2월 21일 신사 2번째기사, "권전·윤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ref> 나중에 작위 개정으로 장평부정(長平副正)에 봉해졌다. [[1454년]](단종 2) 승작하여 장평정(長平正)에 봉해졌다가<ref>단종실록 11권, 1454년(단종 2년, 명 경태 5년) 5월 21일 신미 1번째기사, "세조가 경회루에서 풍정을 올리다"</ref> 뒤에 도정으로 승진했고, 품계는 [[명선대부]]에 이르렀다.
- 장혁진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연봉 = 2,700만 원(2015년)
==연봉==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정성민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연봉 = 2,700만 원 (2016년)
==연봉==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정인선(탤런트) . . . . 3회 일치
||<#B0C4DE> {{{#ffffff '''학력'''}}} ||<(> 봉서초등학교→봉서초등학교[br]완주중학교[br]완주고등학교[br][[세종대학교]] 영화예술학 ||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B0C4DE><#B0C4DE> '''{{{#FFFFFF 개봉 연도}}}''' ||<#B0C4DE> '''{{{#FFFFFF 제목}}}''' ||<#B0C4DE> '''{{{#FFFFFF 배역}}}''' ||<#B0C4DE> '''{{{#FFFFFF 비고}}}''' ||
- 조재윤 . . . . 3회 일치
* 2012년 [[KBS2]] 《[[KBS 드라마 스페셜]] - 칼잡이 이발사》 - 봉식 역
* 2013년 [[MBC]] 《[[구가의 서]]》 - 마봉출 역
* 2010년 《[[그대를 사랑합니다 (영화)|그대를 사랑합니다]]》 ... 군봉 차남 역
- 차금봉 . . . . 3회 일치
'''차금봉'''(車今奉, [[1898년]] [[12월 8일]] ~ [[1929년]] [[3월 10일]])은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노동운동가이다. 서울 출신.<ref name="역대">{{웹 인용|성1=김|이름1=혜영|제목=차금봉(車今奉)|url=http://people.aks.ac.kr/front/tabCon/ppl/pplView.aks?pplId=PPL_7HIL_A1898_1_0025739|웹사이트=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출판사=한국학중앙연구원|확인날짜=2015-12-15}}</ref>
*[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10270&page=1&search_1=&search_2=차금봉&search_3=&search_4=&search_5=출생지&search_6=내용&orderByName=&orderBy= 국가보훈처]
- 차희식 . . . . 3회 일치
|별칭 = 봉습(鳳習, 奉習)
이러한 상황으로 지역 주민들의 분노가 점점 높아가는 때에 서울의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접한 지역의 지도자들은 구장회의에서 만세시위를 계획하고 구체화했다. 차희식은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인근 주민들에 알리고 참여를 독려하는 한편, 우정면 주곡리와 석포리 주민들의 선봉에 서서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4월 3일 군중은 점차 늘어나 1천여 명에 이르렀고 시위 행렬은 인근의 쌍봉산으로 이동하여 계속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어서 시위 군중이 2천여 명으로 늘어나자 선생은 차병혁, 차인범과 함께 군중들을 인솔하여 우정면사무소, 화수주재소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계속하였다. 시위 과정에서 일본 순사가 쏜 총에 주민이 피살되자 차희식을 비롯한 군중들은 격분하여 도망가는 일본 순사 가와바다를 추격하여 처단했으며 면사무소를 파괴하였다.
- 채기영 . . . . 3회 일치
|연봉 =
* [[서울봉천초등학교]]
[[분류:199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외야수]][[분류:KBO 리그 우익수]][[분류:KBO 리그 중견수]][[분류:고양 원더스 선수]][[분류:한화 이글스 선수]][[분류:서울봉천초등학교 동문]][[분류:선린중학교 동문]][[분류:선린인터넷고등학교 동문]]
- 최계훈 . . . . 3회 일치
|연봉 =
[[1985년]] [[3월 31일]] 롯데의 신인 [[투수]] 박동수에게 완봉패를 당한 것을 시작으로 [[삼미 슈퍼스타즈]]가 당한 18연패를 [[4월 30일]] [[MBC 청룡|MBC]]전에서 [[최계훈]]이 완봉승을 거두어 벗어났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382&article_id=0000077896 금광옥 “월급은 현찰, 연패 때도 술판…삼미, 화끈했어”] - 스포츠동아</ref>
- 최동수 (야구인) . . . . 3회 일치
|연봉 =
* [[서울봉천초등학교]]
[[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KBO 리그 투수]][[분류:KBO 리그 포수]][[분류:KBO 리그 내야수]][[분류:KBO 리그 1루수]][[분류:KBO 리그 지명 타자]][[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SK 와이번스 선수]][[분류:서울봉천초등학교 동문]][[분류:강남중학교 (서울) 동문]][[분류:광영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
- 최승민 (1996년) . . . . 3회 일치
|연봉 = 2,700만 원 (2016년)
== 연봉 ==
!연도||연봉||인상률(%)
- 최지우(영화배우) . . . . 3회 일치
본격적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7년으로, 한창 인기 있던 드라마 <[[첫사랑(KBS)|첫사랑]]>과 영화 <[[올가미(영화)|올가미]]>에 출연하게 된다. 그 외에도 CF와 뮤직비디오 등으로 점차 얼굴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국어책을 읽는 듯한 [[발연기]] 때문에, 데뷔작인 [[박봉곤 가출사건]](1996년)에 출연했을 때에는 아예 '벙어리 정육점 여주인' 역할을 맡기도 했다.
[[올가미(영화)|올가미]]가 그녀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1996년에 개봉하여 똥폼만 잡고 끝난 '귀천도'에 여주인공으로 출연하기로 하였으나, 건강문제로 인하여 도중 하차한다. ] 흥행은 못했지만 나름 호연과 더불어 백상예술대상에서 신인상까지 수상했다. 문제는 1997년 <올가미> 출연 이후 영화에도 꾸준히 출연하였으나, '''흥행작이 없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도 출연했지만, 일단 이 영화는 [[안성기]]와 [[박중훈]]의 비중이 워낙 큰 데다 [[장동건]]이 조연으로 출연했기 때문에 아무도 최지우가 나온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 1996년 《[[박봉곤 가출사건]]》- 은선 역
- 최충연 . . . . 3회 일치
|연봉 = 4,500만원 (2018년)
* 제 43회 봉황대기 전국 고교 야구 대회 최우수 선수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추미애 . . . . 3회 일치
* [[2009년]] 백봉신사상 수상 <백봉 나용균 선생 기념사업회>
* 2016년 9월 22일, 추 의원에 대해 허위 기사를 쓴 지역 매체 기자에게 징역 4월, 집행유예 2년, 40시간의 사회봉사 명령이 내려졌다. 법원은 "기자로서 최소한의 사실 확인 의무조차 이행하지 않고 허위 기사를 작성해 피해자의 명예를 훼손하고도 피해자의 고소가 언론 탄압이라고 주장해 범행 이후의 정황도 좋지 않아 징역형의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http://www.newsis.com/view/?id=NISX20160919_0014394041|#]]
- 킹덤/505화 . . . . 3회 일치
* [[몽념]]과 낙봉대는 이 사기가 열미의 최대 무기라고 여기며 이것을 [[비신대]]와 [[양단화]]군만으로 공략한다는 [[왕전(킹덤)|왕전]]의 전략을 의문시한다.
* 열미군의 드높은 사기는 성벽 너머 진군 진영까지 전해질 정도였다. 그들이 수시로 내지르는 함성 소리가 성벽을 뒤흔들고 [[몽념]]의 낙봉대가 있는 지역까지 들렸다. 진군의 숫자가 오히려 그들을 격동하게 하는 듯했다. 낙봉대 내부에서는 [[왕전(킹덤)|왕전]]이 정말로 [[양단화]]군과 [[비신대]]만 가지고 열미를 따낼 생각인지 의심하고 있다. 비신대야 어떻든 양단화의 산민족은 공성전에 대한 이해가 없어 보인다. 지금도 이들이 하는 준비라곤 사다리를 만드는 것 정도인데 별다른 긴장도 열의도 느껴지지 않는다.
- 킹덤/516화 . . . . 3회 일치
* 마침내 난민 행렬에도 끝이 보였다. 업성의 서쪽 대망루에서도 행렬의 최후미가 육안으로 확인됐다. 진리간도 한숨 돌릴까 하던 차, 행렬을 뒤쫓 듯 봉화가 피어오른다. 총 세 개의 봉화. 세 갈래로 나뉘었던 진군이 전부 업성으로 몰려온다는 신호였다. 부하들이 적습을 알리는 종을 치는 동안 진리간은 진군이 드디어 이만큼이나 깊숙이 들어왔다고 이를 간다.
왕전은 어느 새 업성을 봉쇄한 환의군 진영에 도착했다. 그는 환의의 감탄에도 아랑곳없이 업성의 상황을 면밀히 살피더니 업은 환의에게 맡기겠다고 말한다.
- 토리코/362화 . . . . 3회 일치
* 그 밑은 토리코 일행이 풀코스를 먹고 있던 현장. 금관두(통조림)에 봉인돼 있던 식재를 개봉하는 순간이다.
* 지지는 '''"오래 전 어떤 악마를 황금색 캔에 봉인했다"'''는 말을 하며 그가 우려했던 것도 그 얘기 때문이었다. 지금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다행이라고 넘어가지만...
- 토탈워: 쇼군 2/가문 . . . . 3회 일치
현대의 아이치 현 부근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어려움. 본거지는 미카와. 이마가와 가문의 봉신이다. 종주인 이마가와 가문과 무역 관계이며 오다 가문과 전쟁 중.
현대의 니가타 현 부근에 위치한 가문. 난이도 어려움. 본거지는 에치고. 봉신인 야마노우치 가문과 무역 관계이며 진보 가문과 전쟁 중. 자신이 다이묘 자리를 이어받지 못한 것에 반발한 나가오 하루카게의 반란군이 있다.
혼슈의 코즈케를 차지하고 있는 가문. 우에스기 가문의 봉신이다. 원래 이름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로 원조 우에스기 가문 중 하나다. 게임 시작시 다이묘는 야마노우치 노리마사.
- 트로피코 4/건물 . . . . 3회 일치
||병원은 모든 트로피코인의 의료적 만족감을 충족시켜줍니다. 시민들은 각하를 위해 더 오래 봉사하게 될 것이며, 미국인들은 섬의 환상적인 의료 시설을 보여 감탄해 마지 않을 것입니다.||
||정부의 심장부로서, 장관들이 아무 짓도 안 하는 주제에 엄청난 연봉을 챙기는 장소입니다.
||하늘에서 트로피코의 절경을 감상할 기회를 마다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 어디에 있겠습니까? 티켓을 끊고 곤돌라에 탑승하여 발전소의 매연으로 여과된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제 3세계의 구리구리한 도시 전경에 감탄할 수 있겠죠. 아니면 그냥 각하의 출렁이는 뱃살을 보고 경악하는 것도 괜찮겠군요. 구토용 봉투도 제공된답니다.||
- 페어리 테일/485화 . . . . 3회 일치
* 마봉석은 잘도 브랜디쉬를 신용한다며 마봉석까지 벗겨줄 필요가 있었냐고 묻는다.
* 피오레 북방 영봉 조니아에서는 가질 일행과 해방된 연합군이 합세해서 싸우고 있다.
- 페어리 테일/539화 . . . . 3회 일치
* [[이치야 반다레이 코토부키]]와 [[안나 하트필리아]]의 희생으로 마룡 [[아크놀로기아]]를 시간의 틈새에 봉인하고 모든 것이 끝난 것 처럼 보였다.
* [[이치야 반다레이 코토부키]]와 [[안나 하트필리아]]의 희생으로 [[아크놀로기아]]를 시간의 틈새에 봉하고 크리스티나호의 생존자들은 바다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바위섬에 상륙해 상태를 추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시간의 틈새가 닫힌 있을 수 없는 균열이 발생한다. [[웬디 마벨]]이 이것을 발견. 웬디가 하늘의 균열이 있다고 말하자 일행이 술렁인다. 저것은 아무리 봐도...
* 시간의 틈새가 다시 열리고 있다. [[제니 리아라이트]]는 두 사람이 목숨을 걸고 마룡을 봉인했다고 믿기지 않아 한다. 그러나 균열은 눈에 띄게 커졌다. 그 사이로 뚫고 나오는 검은 손. 아크놀로기아의 오른팔이었다. 경악과 공포로 일그러지는 얼굴들.
- 페어리 테일/541화 . . . . 3회 일치
* 루시는 멸룡마도사 공통의 약점인 멀미를 이용해 허를 찌르고 그때 절대방어마법 "페어리 스피어"를 사용해 봉인하는 작전을 세운다.
엘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싸울 수밖에 없다고 강변한다. [[그레이 풀버스터]]가 자신의 멸악마법으로 봉인하는 방법을 제안한다. [[쥬비아 록서]]도 아예 얼려버린다면 제아무리 마룡이라도 어쩌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엘자는 어떤 마법이든 마법 그 자체가 통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미라젠 스트라우스]]는 검 같은 물리적인 공격은 어떻겠냐고 하는데 이 또한 기대하기 어렵다. 웬디가 있어 검에 멸룡마법을 걸 수 있다면 모를까.
페어리 스피어가 방어마법이므로 그 자체로 타격을 주진 못하겠지만 그 안에 아크놀로기아를 봉하는건 어떨까? 그게 가능할지 어떨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한다. 그러나 루시는 이제 할 수 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어차피 다른 기회는 없으니까.
- 하리수 . . . . 3회 일치
한편 2004년에 제작한 그의 영화 도색은 2013년 9월에 [[대한민국]]에서 상영되었다. 영화 이듬해인 2005년 제 5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에 초청된 작품이다. 무려 9년만에 대한민국 내 극장 개봉 기회를 얻은 것이다.<ref>[http://isplus.live.joins.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2267160&cloc= 하리수 출연작 ‘도색’, 9년 만에 국내 개봉 확정] 일간스포츠 2013.08.06</ref>
* [[2011년]] 《[[고봉실 아줌마 구하기]]》 TV조선 ... 여사장 리수 역
- 하이큐/260화 . . . . 3회 일치
* 시마다는 가려진 비상구 대신 시마다 마트 봉투를 들고 옆에 서있는데 야마구치가 그걸 보고 항상 연습하던 공터를 연상하고 "리셋"을 시작한다.
* 그때 야마구치의 시야에 무언가 들어온다. 3층 비상등. 시마다였다. 카라스노 고교 응원석에서 완전 반대편인 [[이나리자키 고교]] 응원석까지 한 걸음에 달려갔다. 그는 가뿐 숨을 몰아쉬면서 무언가를 흔들고 있다. 야마구치는 그걸 보기 위해 자연스럽게 집중했다. 그건 시마다 마트의 비닐 봉투. 마스코트인 돼지 캐릭터가 선명하게 보였다. 시마다가 처음 리셋포인트를 전수할 때 표지로 삼았던 그 봉투였다. 이나리자키 응원단이 그 묘한 꼴을 보고 수근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마다의 의도는 명백했다.
- 한용덕 . . . . 3회 일치
|연봉 = 3억원 (2018년)
!년도 !!팀 !!평균자책 !!경기수 !!승 !!패 !!세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비고
|1991 ||2.23 ||31 ||17 ||6 ||2 ||0 ||12 ||'''4''' ||201 2/3 ||164 ||10 ||56 ||122 ||59 ||50 ||align="left"|완봉 1위
- 해양군 . . . . 3회 일치
[[1625년]] 당시 6세의 나이로 '''명선도정'''(明善都正)에 책봉되었다가 [[1633년]] '''수덕군'''(綏德君)으로 개봉되고, 2년 후 [[1635년]] '''해양군'''(海陽君)에 재개봉되었다. [[1668년]] [[흥안군 (1598년)|흥안군 이제]]의 양자로 출계하였으며, [[1682년]]에 향년 63세로 별세하였다.
- 허준 (1981년) . . . . 3회 일치
|연봉 =
==연봉==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허화평 . . . . 3회 일치
대한민국의 전 군인, 관료, 정치인이다. 자는 봉우(鳳宇), 호는 우민(佑民)이다. [[종교]]는 [[가톨릭]]으로 [[세례명]]은 필립보.
'''그렇다면 왜 최태민을 잡아넣거나 재산을 몰수하지 않았느냐'''는 사회자의 반문에, 허화평은 [[박정희]] 대통령과 [[10월 유신]]의 결과물인 산업화를 지키기 위해서였다고 발언했다. 제5공화국의 첫 번째 과업이 박근혜와 최태민을 청산하는 일이었다는 말이다.[[http://news.naver.com/main/hotissue/read.nhn?mid=hot&sid1=100&cid=1051768&iid=1140067&oid=449&aid=0000114843&ptype=052|#]] 파장이 커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박근혜]]와 [[최태민]]의 부적절한 관계를 제대로 수사해서 청산하지 않고 놔둔 것이다. 이것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단초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와 비리의 온상이 [[새마음봉사단]]이라고 보았으며, 그 결과 최태민과 박근혜의 관계를 제대로 드러내서 수습하지 못하고,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개인적인 관계를 끊어 달라는 수준에서 처리하고 묻어버린 것.
작중에서 허화평이 [[금융실명제]]에 반대하자, [[이학봉]]이 [[김재익]]에게 "우습네요. 그렇게 개혁 개혁 노래 부르더니."라며 뒷담화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한다.
- 현진건 . . . . 3회 일치
현진건의 할아버지 학표(學杓)는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내장원경(內藏院卿)직을 지냈고, 다시 경운(炅運)·철운(轍運)·영운(映運)·양운(暘運)·붕운(鵬運)의 다섯 아들을 두었다. 그 중 경운이 바로 현진건의 아버지이며, 봉호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까지 올라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화국|전보사장]]을 지냈다. 그의 집안은 계몽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으나 후에 [[친일파]]로 변절하게 되는 [[윤치호]],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으로 내무장관, [[서울특별시장|서울시장]]을 지낸 [[윤치영]], 4대 대통령 [[윤보선]] 집안과 이중으로 혼반관계를 형성하였다.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고종 33년인 [[건양]](建陽) 원년([[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광무 3년([[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광무 4년([[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광무 7년(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광무 8년(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병조|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 [[이광수]] - 박종화의 일기에 보면, [[1922년]] 현진건이 홍사용 · 박종화 등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한 문예지 《백조》 창간호에 이광수의 시 「악부(樂府)」가 실리게 되었을 때, 상해에서 《백조》를 받아보고 현진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한국의 꽃봉오리 같은 젊은 청년들이 발표하는 깨끗한 《백조》지에, '귀순장'을 쓰고 항복해 들어간 이광수가 동인이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빨리 동인에서 제거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백조》 동인에서 이광수는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광수는 이미 당시 춘원은 허윤숙이라는 여인과 동거하면서 일제에 이른바 '귀순장'이라는 것을 써서 독립지사들의 정보를 넘겨주고 변절한 상태였던 것이다.<ref>윤병로 「박종화의 삶과 문학」1998, 신효정「문학산책」2000, 역사문제연구소 편찬「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2003.</ref>
- 홍지운 . . . . 3회 일치
|연봉 =
==연봉==
! style="color:white;background-color:#408080;" |'''연봉'''
- 황옥 (1885년) . . . . 3회 일치
1923년 [[김상옥 (1890년)|김상옥]]이 일으킨 [[종로경찰서 투폭사건]] 이후에 사건 관련자를 색출한다는 구실로 중국으로 출장을 가서 [[톈진]]에서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만났고, 폭탄 36개와 권총 5정을 수령, 김시현, 김재진, [[권동산]] 등과 함께 물건을 [[단둥]], [[신의주]]를 거쳐 [[경성]]까지 밀수했다.
의열단은 황옥, 김시현 등이 밀반입시킨 무기류를 통해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 등을 동시에 테러하는 제2차 국내 거사를 준비했지만 김재진이 밀고하여 실패했다. 김재진은 재판 이후 흔적이 증발하는데, [[유석현 (1900년)|유석현]]은 1983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김재진은 가명이고 [[권태일]]이 본명이라고 주장했다. 이 과정에서 김원봉, [[김지섭]] 등 소수만 탈출했고 황옥, 김시현, [[김진기]], [[조동근]], [[홍종우]], [[홍종무]], 유석현 등은 1923년 3월 15일에 체포당한다.
경기도 경찰부장 [[시로가미 유키치]]는 황옥이 자신의 재가를 받은 작전에 따라 활동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하지만 김원봉과 김시현은 황옥이 의열단원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상호 증언이 엇갈리고 있기에 황옥이 의열단원이었는지, 일본 경찰의 프락치였는지, 또는 양자에 모두 발을 걸친 [[이중간첩]]이었는지 여부는 아직까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83년 [[서울대학교]] 도서관 건물에서 추락사한 민주화운동가 [[황정하]]가 황옥의 손자이다.
- 황정민(남자배우) . . . . 3회 일치
1999년 개봉했던 영화 [[쉬리]] 에서는 후반부에 한석규를 추궁하는 정부 요원으로 잠깐 등장하는데, 미리 섭외된 것이 아닌, 그야말로 촬영 직전에 아는 선배의 전화 호출로 일감 생겼다고 달려가서 찍을 정도의 안습 시절을 겪었다.
2018년 개봉한 영화 [[공작(영화)|공작]]으로 '''누적 관객수 1억 명을 돌파했다.''' 이는 역대 여섯 번 째 돌파 기록이며, 주연작만 계산할 경우 [[송강호]], [[하정우]]에 이어 역대 세 번 째 주연작 누적 관객수 1억 돌파 기록이다.
2015년 12월 16일 개봉작 [[히말라야(영화)|히말라야]] 포스터로 인증샷을 찍는 '황정민 놀이'가 있다. 포스터의 적절한 사이즈에 헤어스타일, 성별 상관없이 미칠듯한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정유미(1983년)|정유미]](왼쪽 위)를 시작으로 시작된 열풍은 사람들에게 급속도로 퍼져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 3월의 라이온/124화 . . . . 2회 일치
* 국수를 얼마나 삶을지 고민고민하다가 결국 한 봉다리[* 분량으로는 거의 6인분]를 다 삶는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 히나는 너무 많지 않겠냐고 하지만 아카리는 모모가 나중에 먹으려 할 거라는 둥 이런저런 핑계로 한 봉다리를 다 삶는 걸 밀어붙인다.
- 3월의 라이온/126화 . . . . 2회 일치
* 산가츠 마을 봉오도리 개시. 카와모토가는 노점을 준비하는데 츠구미를 비롯해 학교 지인들이 와서 도와준다.
* 산가츠 마을 봉오도리 개최.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유닛 . . . . 2회 일치
* Naval Interdiction(해양 봉쇄): 목표 지역에서 초계 활동을 벌이며 조우한 적 함대를 공격한다.
* Naval Combat Patrol(해양 초계): 목표 광역에서 초계 활동을 벌이며 조우한 적 함대를 공격한다. DHR에서는 해양 봉쇄도 광역을 커버칠 수 있는데 이게 왜 남아있을까.
- Europa Universalis 4/공략/유럽 . . . . 2회 일치
시작지점에서 폴란드와 역사적 라이벌이고, 리보니아 기사단과 역사적 친구관계이다. 이에 따라 폴란드는 거의 무조건 라이벌을 띄우고, 리보니아 기사단은 무조건 동맹을 해온다. 그런데 폴란드가 동군연합을 할경우에 튜튼이랑 리보니아 연합군이 뭔짓을 하든 이것들의 물량을 따라올 수가 없다(...)~~고증 제대로네~~ 그러므로 폴-리투연합을 견제해줄 국가가 필요한데, 추천되는 국가는 헝가리,보헤미아,모스크바,오스트리아정도이다. 그리고 중요한건, 신롬 가입을 위해 오스트리아랑은 무조건 친해져서 신롬가입을 하자. 안그러면 북독일지방 확장이 봉인된다(....)
폴란드-튜튼 전쟁에 참여할때 주의해야 할 점은 땅 점령을 폴란드가 아닌 브란덴부르크가 하는 방향으로 가야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안하면 폴란드가 프로이센 지방을 전부 먹어버려서 오히려 프로이센 성립도 못하고 프로이센지방을 다먹어버린 폴란드가 러시아와 보헤미아를 패면서 우주승천해버릴 수 있기 때문(...) 이후에는 오스트리아와 동맹해서 황제국의 땅내놔 시전을 봉인시킨뒤에, 포메른(포메라니아)를 쳐서 힌터포메른 일대를 빼앗은 뒤 메클렌부르크를 먹고 뤄벡에 공세를 취하자. '마레 노스트럼'DLC이후로 뤄벡이 근처 자유도시와 OPM[* one province major, 프로빈스 하나짜리 국가]국가들과 방어연합을 취하는 경우가 많아서 공격을 나가기전에 폴란드가 참전하는지는 꼭 확인하도록 하고, 싸우도록 하자. 1대1로는 어지간해선 못이기니(...)
- This is the Police . . . . 2회 일치
5일에 한번씩 경찰 설비나 봉급에 대한 요청을 보낼 수 있다. 시청과의 관계가 좋을수록 이 요청을 잘 받아준다.
* Raise: 보이드의 봉급을 늘린다.
- 경제제재 . . . . 2회 일치
[[나폴레옹 1세]]는 [[영국]]에 대해서 대륙봉쇄령을 내려서 경제제재를 가했다. 이로서 대륙국가들과 영국 간의 무역을 봉쇄했다. 하지만 대영국 수출이 중요했던 [[러시아]]가 이를 어긴 탓에 나폴레옹은 러시아를 침공했다가 '''망했다.'''
- 고현정(미스코리아) . . . . 2회 일치
영화 필모그래피가 약해 영화에서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많이 찾기 힘들다. 그러나 두 편의 홍상수 영화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출연한 고현정이 감독의 영화세계 뿐 아니라 영화를 찍는 방법론에까지 영향을 미쳤을거라는 평[* 프로-아나 시대의 카운터 디바 <여우야 뭐하니> (Dramatique 7호) -변영주 감독]과 더불어 영화평론가 [[이동진(평론가)|이동진]]으로부터 고현정은 홍상수스러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넘어서 자기스러움을 연기하는, 대한민국 여배우 중 가장 머리가 좋은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푸른밤 성시경 '필름 속을 걷다'에서] 고현정이 고현정을 연기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여배우들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에 있어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판단은 자기 몫.[* 짜고 치는 상황극인 고현정 vs 최지우 씬에 관한 유튜브 댓글에서는 실제 배우가 까이고 있다. 이걸 보면 연기를 잘하긴 잘한 듯...?] 2012년 개봉한 고현정의 첫 상업영화 미쓰GO는 유해진, 성동일, 박신양 등 걸출한 배우들과 함께 했지만 모두 영화가 구리다는 평으로 덮혔다.
||<#FF8200> '''{{{#white 개봉 연도}}}''' ||<#FF9100> '''{{{#white 제목}}}''' ||<#FFA500> '''{{{#white 활동}}}''' ||<#FFA500> '''{{{#white 배역명}}}''' ||
- 골든 위크 . . . . 2회 일치
골든 위크라는 이름은 이 시기에 "자유학교"라는 영화를 개봉하고 흥행이 정월, 오봉 연휴 이상으로 대성공한 것을 기념하여, 다수의 관객 동원을 목적으로 영화사 다이에이(大映)가 1952년 무렵에 만든 선전 용어였다. 이 용어가 각계에 퍼지게 되었다. 일부 언론사에서는 선전 용어라는 이유로 골든 위크라는 표현은 쓰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 광해군 . . . . 2회 일치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그리 순탄치는 못했는데[* 정확히는 임란 이전에도 그리 순탄한 입지는 아니었다. 선조는 임란 이전에는 다른 후궁 소생인 신성군 등을 총애했다.], 우선 명은 시시각각 광해군에 세자 책봉에 딴죽을 걸었으며[* 당시 명은 황제와 관료가 후계 문제로 한참 입씨름을 했던 시기였다. 당시 만력제도 선조와 비슷하게 나이 어린 아들을 황태자로 세우려 하여 대신들이 반대하고 있었는데, 만약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허용할 경우 만력제가 이걸 빌미로 이용할 수 있어서 반대할 수 밖에 없었다. (광해군 또한 형인 임해군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 선조는 이 틈을 노려 광해군보다 거의 10살 연하인(...) 인목왕후를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새어머니가 아들보다 10살 어리다는 거다. (선조 상도둑놈 인증...)~~ 거기다가 [[김희정 (1992년)|인목왕후]]왕후가 아들인 [[영창대군]]까지 낳자, 광해군의 입지는 더더욱 줄어들기까지 했으며, [[유영경]]등의 소북들(후대에 탁소북)은 대놓고 영창대군 편을 들기도... 그래도 ~~노년에 무리한~~ 선조가 영창대군이 3살일 때 죽어 결국 왕이 되는데 성공했으며 유영경과 그의 무리들은 사사된다.
- 구미시/인물 . . . . 2회 일치
* [[김봉환(1921)|김봉환]] - 변호사, 전 국회의원
- 권해효 . . . . 2회 일치
* 2010 [[마음이 2]] : 봉구 역
* 2017 [[그 후]] : 봉완 역
- 규성 진씨 . . . . 2회 일치
규성 전씨는 순(舜) 임금을 조상으로 삼는다. 순 임금의 성씨는 요씨(姚氏)였으나, 순 임금의 후손이 규예(嬀汭)로 이주하면서 규(嬀)를 성으로 삼았다. 상나라 말기에 순의 후예 알보가 주나라에 의탁하였고, 주나라 무왕은 알보의 아들 규만을 완구(宛丘)에 봉하였으며 이 나라는 진(陳)으로 불리게 된다. 규만은 사후 호공(胡公)이라는 시호를 받는다. '호공 규만' 이들의 조상이 된다.
[[맹상군]]이 설 땅에 봉해지고 그 후손들 일부가 설(薛)을 성씨로 삼았다.
- 길용우 . . . . 2회 일치
[[반짝반짝 빛나는]]의 황남봉 역처럼 망가지는 역보다는 주로 점잖은 중년 신사 역으로 훨씬 더 많이 출연하였다.
* [[반짝반짝 빛나는(드라마)|반짝반짝 빛나는]] - 황남봉 역
- 김동호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연봉 = 6,0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김명신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연봉 = 5,2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김민기(가수) . . . . 2회 일치
정치적 메시지를 담은 노래나 음악극 외에도 순수한 서정미가 돋보이는 노래들도 많이 작곡해 운동권이 아닌 일반 애호가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어필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사회적 소외자에 대한 시각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람에 대한 연민을 그린 곡인 [[아름다운 사람]]외에 친구와 마음 터놓고 이야기하듯 털털한 어조로 부르는 '봉우리', 순수한 동경과 열정을 담담하게 표현한 '날개만 있다면'등의 노래도 유명하다.
조영남과 쎄시봉 멤버들이 김민기의 환갑잔치를 해주었다고 하며, 이와 관련해 조영남이 무릎팍도사에 출연했을때 전화연결로 출연한 적이 있다[[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10224073513324?f=m|관련기사]] [[http://v.entertain.media.daum.net/v/20110224072710697?f=m|관련기사]]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103310011335&code=910000|관련기사]]
- 김민수 (1992년) . . . . 2회 일치
|연봉 = 3,2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김민희(1982) . . . . 2회 일치
||<table bgcolor=#ffffff><table bordercolor=#0f0f3e><#0f0f3e> '''{{{#white 개봉 연도}}}''' ||<#0f0f3e> '''{{{#white 제목}}}''' ||<#0f0f3e> '''{{{#white 활동}}}''' ||<#0f0f3e> '''{{{#white 배역}}}''' ||
과거 김민희는 한 인터뷰에서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016&aid=0001072347|'''“자기들이 부자와 결혼하면 사랑해서 한 거고, 연예인이 그러면 이상한 관계로 말하는 건 이해가 안 간다. 평민들도 그런 것처럼, 통장에 든 적금보다 지갑 속의 돈이 더 좋다.”''']]라고 말해 구설수에 올랐다. 이후 질문자가 “‘평민’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봉건 사회가 아닌데.”라며 제지하자, 김민희는 “나쁜 의도로 한 말은 아니고,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발언으로 인해 김민희는 한동안 이미지가 굉장히 안 좋았으며, 이를 비꼬아서 ‘'''평민'''희’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 김병옥(배우) . . . . 2회 일치
||<rowbgcolor=#c0c0c0>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비고'''}}} ||
|| [[가면(드라마)|가면]] || 심봉설 사장 || ||
- 김부식 . . . . 2회 일치
[[1140년]](인종 18년) 이후 그의 세력이 약화되고 윤언이가 정계에 복귀하자 위기를 느낀 김부식은 [[1142년]](인종 20년)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김부식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인 [[1145년]](인종 23년)에 《삼국사기》 50권의 편찬이 완료되었다. 의종이 즉위하자 낙랑국 개국후(樂浪國開國候)로 봉했고, 그 뒤 김부식은 《인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서적 인용|저자=서긍|제목=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연도=[[1123년]]}}}}
- 김상엽 (야구인) . . . . 2회 일치
|연봉 =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비고
- 김상조 . . . . 2회 일치
김상조 아내도 부정 취업 의혹을 받고 있다. 아내 조 씨는 서울의 한 공업고등학교의 계약직 영어회화 전문 강사로 취직하여 5년 정도를 재직하였다.[* 참고로 영어회화 전문 강사는 임용고시를 통하여 채용되는 것이 아니라 계약직으로, 연봉은 현재 시점으로 약 2500만 원 수준이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artid=201311261849211&code=115|#]]] 자유한국당 측의 주장으로는 현재 취직 조건이 토익 901점인데 아내의 점수는 토익 900점이었으며, 채용 응시자는 조 씨 1명뿐이었고, 조 씨가 합격이 확정된 이후에야 지원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동시에 재임용 과정에서도 이를 문제 삼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5/30/2017053090046.html|관련기사]]
현재 김상조 후보자 측에서는 지원자가 1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채용되었다고 해명하였다. [[http://www.m-economynews.com/news/article.html?no=19766|#]] 이코노미 뉴스에서는 당시 조 씨의 이력서를 공개하였는데, 주장대로 토익 점수가 1점 미달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외 능력에서는 TESOL과 TEFL 자격증을 모두 취득하였으며, 해외 거주 기간이 2년이 넘는다. 때문에 옹호하는 네티즌 측에서는 당연히 다른 후보가 있으면 모르되, 이 정도 자격증 및 경험 보유자는 학원을 가도 3천 이상의 연봉을 받는 수준이며, 사실상 취업 비리가 아니라 하향 지원 내지는 재능 기부에 더 가깝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학교 입장에서도 학기 시작 전에 강사를 구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아내는 자기 입으로 자기 재벌 저격수의 별명을 가진 남편 이름을 남들에게 제대로 말하고 다니지 못한다면서 특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 김석형 (역사학자) . . . . 2회 일치
*《조선봉건시대 농민의 계급구성》(1958)
*《봉건지배계급을 반대한 조선농민들의 투쟁(전4권)》(1960)
- 김성겸(탤런트) . . . . 2회 일치
사실은 김성겸도 [[MBC 성우극회]] 출신[* [[황일청]], [[최낙천]], [[변희봉]] 등과 같은 MBC 성우극회 2기로 데뷔. 지금은 [[배우]]로 활동이 많아져서 극회 목록에는 지워져 있다.]으로, 명예 [[성우]]이기도 하다. 성우로서는 80년대 초까지 [[존 웨인]]의 전담성우로 자주 활약했다.[* 존 웨인과도 닮았다.]
* [[달자의 봄(KBS 2TV)]] - 강태봉의 할아버지
- 김성곤 . . . . 2회 일치
||<#796E65> {{{#white 가족}}} ||부친 김광도[br] 모친 김봉옥[br] [[배우자]] [[류원정|성곡 류원정]][br] 슬하 4남 2녀||
박정희의 친위대를 자처하면서 3선개헌에 회의적이던 김종필계와 대다수 공화당 인사들을 강하게 압박해서 [[3선 개헌]]을 성사시켰다.[* 3선개헌이 처음 불거졌을때 김종필을 선두로 해서 대다수 공화당 정치인들은 이를 반대했다. 장기집권한 이승만의 최후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9년부터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화당 국회의원들을 회유, 협박해서 결국 모두 찬성으로 돌려놨다. 당내에 막강한 독자계보를 가지고 있던 김종필을 압박하는데 선봉에 선게 김성곤,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 4인방][* 한때 60명이 넘던 공화당내 개헌반대파 국회의원은 결국 3명 [[정구영]], [[예춘호]], [[이만섭]]만이 남았고, 결국 정구영-강제 정계은퇴, 예춘호-제명, 이만섭-낙선으로 모두 숙청되었다. 예춘호는 야당으로 넘어가서 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고, 이만섭은 야인으로 지내다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그리고 [[전두환]]의 집권 이후 [[한국국민당(1981년)|한국국민당]] 총재로 재기했다.] 이 과정에서 [[김진만(정치인)|김진만]], [[백남억]], [[길재호]]와 함께 소위 4인체제로 박정희를 대리해서 공화당을 관리하였다. 특히 [[재벌]]에게 해외차관과 정부발주공사의 10%를 무조건 자신을 통해서 상납하게 하면서 ~~[[뇌물]]의 제도화~~ 정권의 정치자금 창구를 단일화하고 이를 바탕으로 정치권과 재벌, 언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는 그가 [[쌍용그룹]] 회장(재벌총수), 동양통신 사장(언론인)이면서 공화당 재정위원장(정치인)이자 박정희의 최측근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 김성민 (1994년) . . . . 2회 일치
|연봉 = 5,5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김윤동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연봉 = 1억 5,0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김준영 (프로게이머) . . . . 2회 일치
시드보유자로 참여한 [[바투 스타리그]]에서는 1승 2패로 16강 탈락, 차기 대회 36강 시드를 부여받았으며, 다음 대회인 [[박카스 스타리그 2009]]에서는 36강 2차전에서 과거 팀동료였던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당시 [[CJ 엔투스]], 현 [[SK 텔레콤 T1]])에게 2:0으로 패배하였다. 이것은 그의 마지막 스타리그 참여가 되었고 이후 김준영은 은퇴를 선언하며 차기 예선에 참가하지 않았다.
- 김지석(배우) . . . . 2회 일치
[[KBS2]] [[해피투게더(KBS 2TV)|해피투게더]]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당시 만주와 중국에서 독립의용군 활동을 한 김성일 선생이라고 한다. [[김구]],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들과도 연이 있는 분이셨다고...
||<tablebordercolor=#009e25><rowbgcolor=#595959>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김태한 . . . . 2회 일치
|연봉 = 9,200만 원 (2014년)
!연도!!소속!!평균자책점!!경기!!완투!!완봉!!승!!패!!세!!홀!!승률!!자!!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삼진!!실점!!자책점
- 김하은(1984) . . . . 2회 일치
* [[2015년]] [[KBS]] 《[[Miss 맘마미아]]》: 강봉숙 역
* [[2004년]] [[KBS2]] 《[[오!필승 봉순영]]》
- 김형기 (법조인) . . . . 2회 일치
* 서울형사지방법원 합의7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72년 9월 27일에 필화사건으로 기소된 동아일보 의정부 주재기자 장봉진에게 공갈죄를 적용해 징역9월 집행유예1년을 선고하면서 [[반공법]]위반에 대해서는 "송고 시간이 급박했고 오보된 기사의 정정을 위해 노력한 점으로 보아 이적 목적을 인정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9월 27일자</ref> 10월 4일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과 [[도로교통법]]위반으로 기소된 영화배우 [[박노식]]에 대해 "실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연예계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나 반공극에 공헌한 점을 참작했다"며 징역10월 집행유예2년을 선고했다.<ref>동아일보 1972년 10월 4일자</ref> 12월 21일에 북한에서 의약업자를 하다가 귀순하여 국가보건원 직원들에게 국가시험 정답지를 20만원~100만원을 주고 빼낸 피고인 20명 중에서 1명만 무죄를 선고하고 징역1년~벌금5만원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2년 12월 21일자</ref> 1973년 5월 16일에 [[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 선거구 공화당 후보에게 사전 투표를 하여 구속된 피고인에게 징역1년6월~10월을 각각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5월 16일자</ref> 7월 24일에 일본에서 지내던 중에 북한 공작원에게 포섭되어 2차례 평양에서 밀봉교육을 받고 합작투자로 위장하여 국내 경제계, 군부 등에 침투하려 했던 재일교포 사와모도 산지(한국명 한삼차)에게 "사형을 선고해야 마땅하나 피고인이 일본에 귀화했고 인생의 황혼기에서 범죄사실을 모두 자백한 점 등을 참작했다"며 [[국가보안법]], [[반공법]], 간첩죄를 적용해 무기징역을 선고했다.<ref>경향신문 1973년 7월 24일자</ref><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072400209207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07-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5941&publishType=00020 동아일보 1973년 7월 24일자]</ref>
- 김형종(배우) . . . . 2회 일치
* 《[[7급 공무원 (영화)|7급 공무원]]》 (2009년) - 상봉 역
* 《[[MBC 베스트극장]] - 가리봉 오션스 일레븐》 (MBC, 2005년)
- 김혜은(탤런트) . . . . 2회 일치
|| MBC || [[아이두 아이두]] || 봉준희 || ||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405366><rowbgcolor=#405366>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비고'''}}} ||
- 김효진 (배우) . . . . 2회 일치
</ref> 2003년 개봉 된 사극 영화 《[[천년호]]》에서 '자운비' 역으로 스크린 데뷔했다. 이후 김효진은 이지적인 외모와 독특한 분위기로 다양한 캐릭터를 소화하며 차근차근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다. 2012년에는 [[임상수]] 감독의 영화 《[[돈의 맛]]》에서 주체적인 여성 윤나미 역을 통해 재조명받았고, 세계적인 권위를 지닌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을 받아 처음으로 칸레드카펫을 밟았다.
* [[2006년]] 《[[맨발의 기봉이]]》 ... 정원 역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32화 . . . . 2회 일치
* 시라가키는 [[오버홀]]이 [[Mr. 컴프레스]]의 개성을 봉한 방법도 파악하고 있다.
멀고 먼 관서에서 일어난 총격전, 거기서 사용된 총알은 지금 시라가키가 들고 있는 것과 정확히 같은 물건이다. 시라가키는 이 물건을 맞은 직후 Mr.컴프레스가 일시적으로 개성을 사용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이것은 개성을 봉인하는 마취총알인 셈이다. 시라가키는 이걸로 뭘 할 거냐고 묻는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1화 . . . . 2회 일치
* 타베의 개성 "식"은 뭐든 무한정 먹을 수 있는 능력. 타마키의 문어다리를 씹어먹으며 봉쇄를 푼다. 자유로워지자 호죠가 "결정"으로 역공.
>설마 커다란 문어다리를 휘두르면 "완봉"이라고 생각했나?!
- 남보라(배우) . . . . 2회 일치
2018년 6월 현재 연예인 자선 바자 참여, 음식 만들기 등등 여러 가지 봉사 활동에 열심히 참가하는 모습을 자기 인스타그램에 많이 올리고 있다. 그리고 6월 초 머리를 싹둑 잘라 [[단발머리]]가 되었는데, 매우 잘 어울려서 미모 폭발하는 중.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7F00FF><rowbgcolor=#7F00FF>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 남봉진 . . . . 2회 일치
'''남봉진'''(南鳳振, [[1921년]] ~ 2008년<ref>{{뉴스 인용|제목=[부음] 남봉진씨(전 경기도지사) 별세|url=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8&no=173109|날짜=2008-03-27|뉴스=매일경제}}</ref>)은 [[대한민국]]의 제12대 [[경기도지사]]이다. 본관은 [[영양 남씨|영양]].
- 노영하 . . . . 2회 일치
* [[2014년]] 2014 시니어 왕위전 준우승(통산 4회 준우승 대 서봉수 0-1)
* 《한국기원의 바둑입문》 (조훈현,서봉수 공저) - 한국기원
- 독비도 . . . . 2회 일치
[[중국]]의 무협 영화. 한국에서는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로 개봉했다. 일본에서 개봉된 제목은 편완필살검(片腕必殺剣). [[김용]]의 [[무협 소설]] 《[[신조협려]]》를 원안으로 하여 제작되었다.
- 뜨거운 것이 좋아 . . . . 2회 일치
Some Like It Hot. 1959년 개봉된 미국 영화.
1959년 개봉된 영화임에도 흑백 영화이다. 이는 등장인물들의 여장이 자연스럽게 보이기 위함이다.
- 류명선(야구선수) . . . . 2회 일치
프로 첫해인 1989년 4월 12일에는 첫 완투승을, 5월 24일에는 첫 완봉승을 거두는 등 14승 8패 1세이브의 성적을 기록하며 당시 [[김시진]]의 이적으로 자칫 약화될 수도 있었던 삼성 투수진을 [[김성길]]과 함께 같이 지켰다. 타격 2위를 차지한 강기웅과 함께 그해 삼성의 대표적인 유력 신인이었지만, 신인왕은 19승을 거두며 맹활약한 [[태평양 돌핀스]]의 [[박정현(야구선수)|박정현]]이 차지했다. 이듬해 [[이태일]]이 입단하며, 김성길 등과 함께 1990년대 초 삼성 선발진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물론 이 시기에는 [[김상엽]]도 있었지만 1990년을 제외하면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입단 동기였던 [[정윤수]]가 1990년 선발과 중무리를 오가며 혹사 당한 끝에 1991년 이후에는 위력이 크게 저하된 것을, 생각하면 내구성도 좋았던 편.
1992년부터 점점 성적이 하락해 갔는데, 때마침 1993년에 등장한 [[박충식]] - [[김태한]] - [[김상엽]] - [[성준(야구선수)|성준]]으로 이어지는 삼성 선발진이 모두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그의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구원투수로 나와서 혼자 2패를 당해 당시 삼성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류명선에게는 불행 중 다행히도, 이들 2패는 광주와 잠실의 원정 경기에서 당한 것이었다. 만약 홈인 대구에서 패한 것이었다면, 더욱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특히 잠실에서 벌어진 6차전에서는 해태 김성한에게 역전 홈런을 맞았고, 이후 시리즈 전체의 판도가 해태에 기울어지면서 더욱 뼈아픈 장면이 되었다.
- 마기/343화 . . . . 2회 일치
* 알리바바가 "일 일리가 봉인된 차원에 갔었었다"고 말하자 정색하며 혹시 일 일라가 자신에 대해 한 말이 없더냐고 매달린다.
>일 일리가 봉인된 차원에
- 마니교 . . . . 2회 일치
마니는 옥중에서도 포교를 멈추지 않았는데, 중앙아시아에서 찾아온 제자 마르 앙모에게 봉서를 맡기고 떠나도록 했다. 그리고 감금된 지 26일째의 277년 2월, 사망하게 된다. 옥중에서 사망했다고도 하고, 처형당했다고도 한다. 사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데, 참수되어 성문에 노출되었다거나, 야수에게 먹이로 줬다거나, 두동강이로 잘려서 두 개의 문에 못박혔다거나 --고어-- 가죽을 벗겨서 지을 채운 뒤 책형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웃즈라는 제자가 남긴 중세 페르시아어 단편 자료에서는, 주 마니는 육체라는 옷을 벗고 빛의 세계로 귀환했다고 한다.
마니의 처형에는 여러가지 배경이 있는데, 일단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조로아스터교를 국교로 하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크다. 본래 사산 가문 부터가 조로아스터교의 신관 출신이며, 사산 왕조의 황제는 조로아스터교의 신관으로 일하고 즉위 후에도 신관을 겸임하고 있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신관들 역시 사산 왕조에서 관료로 봉직하였다. 사산 왕조가 곧 조로아스터교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 같은 이념에서는 사푸르 1세 같은 관용 정책이 오히려 특수한 사례였던 것이다. 사산 왕조는 조로아스터교 이외의 종교를 탄압한 사례가 상당히 많았다.
- 문희옥 . . . . 2회 일치
1969년 7월 27일, [[강원도]] [[태백시]]에서 2남 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후 학업을 위해 상경하였고, [[강원도]] [[태백시]]에서 위치한 [[태백기계공업고등학교]]에 재학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교 2학년인 1986년 당시 학교 장기자랑에서 가수 [[주현미]]의 "비 내리는 영동교"를 불렀는데 이 때 친구들의 반응이 좋자 문희옥은 가수의 꿈을 가지게 된다. 꿈을 가지게 된 이후 둘째 언니의 주선으로 작곡가 안치행 씨를 만나게 된다.[* 안치행 씨는 [[최헌]]의 <오동잎>, 주현미의 <눈물의 부르스>를 작곡한 유명 작곡가이다.] 그 뒤 안 씨의 소속사 안타 프로덕션에서 1년 간 보컬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 되던 1987년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사투리를 소재로 창작곡을 모은 <8도 사투리 메들리>를 발표해 가수로 데뷔하게 된다. 참고로, 이 메들리 음반은 발표되자 마자 360만 장이 팔리게 된다 ~~지금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데뷔와 동시에 엄청난 인기를 모으자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주최로 학교 강당에서 처음 리사이틀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기대했던 것 만큼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하이틴 스타가 트로트를 부른다는 것이 좀 매치가 안된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10대 청소년들이 지금도 그렇지만 별로 트로트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또한 문제는 당시 시대상으로 사투리는 공중파 무대에서 활동하는 것이 금기시되어 1987년 그 해에 <빈손>이라는 노래를 발표하였다. ~~그런데 빈 손 가사도 왠지 그 노래를 부른 10대 여학생과는 맞지 않았다~~ 1988년 문희옥은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과]]에 입학하였고, 꾸준히 더 많이 음반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슬로우 템포의 <가는 님 가는 정>을 발표하고 1989년 원래 가수 정재은이 1984년 발표한 <사랑의 거리>를 2집 타이틀곡으로 리메이크하여 가수로서 상위권에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 오사카 교민 위문 공연을 시작으로 일본에도 진출하였다. 1990년 <강남 멋쟁이>가 히트하여 문희옥이 최상의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KBS 가요대상을 수상한 가수 현철과 <잘했군 잘했어 메들리>를 발표하였다. "잘했군 잘했어는 아는 사람은 아시는 바와 같이 원래 하춘화 - 고봉산의 노래다. 그리고 여러 메들리를 발표하면서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는 [[이미자]], [[김연자]], [[주현미]], [[문희옥]]의 정통 트로트 4대 천왕으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화병이 한 때 심각했었다고 한다. 너무 어릴 때 사회생활을 시작해 모든 잘못을 자신의 탓으로 돌리며 살고, 심지어 큰언니의 암투병과 남동생의 군복무 중 사망으로 더 화병이 심각해졌다고 한다. 이것이 심각해지자 노래 부르는 것도 기술과 요령으로 간신히 버텼고 당시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었다고 한다. 2011년 오페라스타 출연 제의를 받으면서 화병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또 무언가에 집중하면서 차츰 화병을 개선해 나가기 시작했고, 종교 활동과 해외봉사 활동을 통해 화병을 더 치유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화병이 많이 나아졌다고 한다.
- 민생위원 . . . . 2회 일치
민생위원법에 따라서 지역사회의 복지 증진을 위하여 봉사하는 민간 봉사자로서 법률적으로는 무급 비상근 특별직 공무원.
- 바키도/126화 . . . . 2회 일치
* 무사시는 모토베가 태우던 담배를 넘겨받아 피우며 그 연기를 2차전의 봉화로 삼자고 제안한다.
* 그는 이 연기를 2차전 시작의 봉화로 삼자고 한다.
- 박기혁 . . . . 2회 일치
|연봉 = 1억 5,000만원 (2018년)
[[2014년]] [[11월 28일]] [[kt 위즈]]와 4년(3+1년) 총액 11억 4,000만원(계약금 4억 5,000만원, 연봉 1억 5,000만원, 옵션 3년간 연 3,000만원)의 계약을 맺고 이적하였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10019386 박기혁, "더 많은 기회 얻기 위해 kt 선택"] -OSEN</ref>
- 박남현 . . . . 2회 일치
* 《[[파랑새는 있다 (1997년 드라마)|파랑새는 있다]]》 (1997년, KBS2) - 절봉 역
* 《[[영주 (드라마)|영주]]》 (2016년, SBS) - 오봉 역
- 박수영(연극배우) . . . . 2회 일치
* 《[[Miss 맘마미아]]》 (KBS 드라마, 2015년) - 심석봉 역
* 《[[피노키오 (드라마)|피노키오]]》 (SBS, 2014년) - 정기봉 역
- 박승호 (야구인) . . . . 2회 일치
|연봉 = 1억 3,000만 원 (2016년)
프로 야구계를 떠나 [[2008년]] 그는 [[공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으로 부임하여 지도자 생활을 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9&aid=0000137047 공주고 야구 감독 경질 논란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한국일보]] - 2008년 8월 기사 [http://news.hankooki.com/lpage/sports/200808/h2008080802505591830.htm "북일 · 대전, 어깨가 든든"]</ref><ref>[[엑스포츠 뉴스]] - 2009년 8월 기사 [http://www.xportsnews.com/tabid/92/EntryID/103120/language/ko-KR/Default.aspx "봉황대기 고교 야구 - 안승민의 공주고, 8강행 확정"]</ref>
- 박은수 (1956년) . . . . 2회 일치
1991년 대구 볼런티어센터 소장으로 취임<ref>[http://www.dgvolter.org/ 대구볼런티어넷 센터 소개]</ref> 하면서 장애인 전용버스 운행, 장애인 카풀 운동을 펼치는 등 장애인을 위한 본격적인 사회봉사활동을 시작하였다. 1993년 노인도 장애인도 탈 수 있는 지하철을 만들자는 대구시민단체협의회(노장지협) 사무총장이 되었다. 대구 종합자원봉사센터 소장, 달구벌종합스포츠센터 관장, 대구시 휠체어농구단 단장등을 역임하였다. {{출처|날짜=2010-4-15|2004년 한국장애인고용촉공단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장애인들에게 대기업 직원, 공무원 등 일자리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 박종윤 (1993년) . . . . 2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7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박지훈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연봉 = 4,2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박홍 (신부) . . . . 2회 일치
[[1997년]] [[5월]] 박홍이 제소되자 언론인 [[이도형 (1933년)|이도형]]은 [[노재봉]], 변호사 [[오제도]] 등 보수인사 70여명이 후원회를 꾸렸는데 이때 당시 후원인단 대표를 맡았던 그는 '대표적인 반좌익인사인 박 전 총장에 대한 탄압을 물리치기 위해 후원회를 만들었다'고 설명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 [[노재봉]]
- 반지닦이 . . . . 2회 일치
2011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그린 랜턴 : 반지의 선택]]>(이건 한국 개봉 당시 제목이며 원제는 그냥 Green Lantern.)의 오역이 넘치는 팬자막.
- 배소연 . . . . 2회 일치
* [[2010년]] 제32회 세계한민족평화통일단체총연합 사회봉사상 수상
* [[2010년]] 제17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연예예술인 사회봉사상 수상
- 백이소 . . . . 2회 일치
고려 때 [[박경순]](朴慶純) 일당의 난을 진압한 [[청도]] 호장 [[백계영]](白桂英)의 후손인 선략장군(宣略將軍) [[백희]](白熹)의 둘째 아들로 [[경주부]] 서면 부산촌(富山村) 출신이다. 풍채가 크고 힘이 출중하였는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1592년]](선조25) 6월 [[경주]]지역 의병장으로 경주부윤 [[윤인함]], 판관 [[박의장]]과 함께 [[문천회맹]](蚊川會盟)에 참여하였다. 노모와 아내를 산 속에 피신시킨 후 산에서 내려와 가복들을 이끌고 의병장이 되어 왜적을 무찔렀다. [[1594년]]([[선조]] 27)에는 갑오별시 병과에 급제하고 훈련원 봉사에 특제되었다.<ref>《[[부암실기]]》</ref>
[[1597년]](선조 30)에 왜적이 재차 침입해오자 적을 공격하던 중 탄환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그러나 부상당한 몸으로 고통을 무릅쓰고 다시 출전하자 경주 판관이 만류했으나 '신하된 도리로 죽을 뿐'이라 말하며 [[영천]] [[창암]] 전투에서 분전하다가 의병장 [[최봉천]](崔奉天) 등과 함께 순절하였다.<ref name="dg">《[[동경잡기]]》</ref>
- 보에몽 1세 . . . . 2회 일치
안티오크 공작으로서 보에몽은 명목상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이 되었으나, 실제로는 독자성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대립 관계였다. 주변 이슬람 세력을 정복하여 영토를 늘려나갔는데, 이렇게 이슬람 세력과 대립하다가 결국 이슬람 셀주크계 다니슈메드 왕조(Dânişmendliler)에 포로로 잡히고, 당시 그와 대립하던 알렉시오스 1세에게 이송될뻔했기도 했으나, 군사적 협약을 미끼로 풀려나 다시 공작위를 되찾는다.
알렉시오스 1세의 딸 안나 콤네나가 그의 아버지를 소재로 한 연대기에 '그는 그의 아버지만큼이나 교활하고 위험한 인물이다.'라고 적었듯이, 그의 군사적 능력은 출중한게 확실하다. 한편으로는, 그의 아버지를 닮아 알렉시오스 1세가 십자군의 봉신서약을 요청했을때 이를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이를 뒤통수쳐서 안티오크 공국을 독자적으로 형성한 교활함까지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매우 안타깝게도 그의 목표이자 야망이었던 비잔티움 제국과 그곳의 지도자인 알렉시오스 1세는 그의 생각보다 훨씬 대단한 사람이었고, 결국 그가 그의 야망을 충족시킬만한 상황이 되지못했다.
- 붐(연예인) . . . . 2회 일치
고정 패널로 활약하고 있었던 '스타의 친구를 소개합니다(줄여서 스친소)' 에서 [[이윤열]]을 험하게 다룬 것으로 다시금 화를 자초했다. [[이혁재]]의 친구로 나온 이윤열에게 ''''16강에서 탈락한다''''는 [[농담]]을 던진 것. 이혁재가 이윤열이 16만 명 넘는 팬클럽도 지닐 정도라고 하자 바로 '8강 진출 축하드린다' 고 즉시 말을 바꾸었다. 어느 쪽이건 개그성 발언이었으나 다음주 벌어진 [[로스트사가 MSL 2009]] 8강전 이윤열은 [[허영무]]에게 접전 끝에 석패했다. 이 외에도 "연봉이 4억인데 [[PC방]]비만 3억", "30년 전에 유행하던 춤을 추고 있어요!" [* 이 말 같은 경우는 오히려 이윤열이 민망해 하고 분위기도 흐려질까봐 던진 멘트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같은 [[막말]]까지 했다.
* 《신동엽 신봉선의 샴페인》(KBS)
- 블랙 클로버/129화 . . . . 2회 일치
* 잭스의 본명은 "조라 이데아레"였다. 어린 시절의 조라는 내성적일 뿐 평범한 하층민 아이였다. 그의 아버지 "자라 이데아레"는 아들에게 장난치는걸 좋아하는 밝고 명랑한 사람이었다. 정의감이 투철하고 봉사정신이 있어서 남을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마법기사를 지향했다. 하지만 그 시절엔 하층민이 마법기사가 된 사례가 없었고 입단 시험에서 몇 번이나 탈락하는 고배를 마신다. 아버지는 포기를 모르는 도전 끝에 "하층민 최초의 마법기사"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소속은 자줏빛 범고래단. 아버지의 그러한 정신은 어린 조라의 자랑이었으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한다.
어린시절 모습이 공개됐다. 당시 12세. 진짜 이름은 "조라 이데아레". 다만 자신은 그 정체성을 버린 듯 하다. 지금 모습은 아버지가 어릴 적 만들어준 히어로 인형 "슈퍼 마도사 조라"에게서 따왔다. "입은 거칠지만 한 말은 반드시 지키고 나라를 지키는 영웅"이란 설정이다. 조라가 내성적이고 친구도 없는걸 걱정한 아버지가 "꼭 이렇게 될 필욘 없지만 다른 사람과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해봐라"는 격려의 의미에서 만들어줬다. 실패가 많지만 항상 노력하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전장에서 허무하게 죽으면서 크게 낙담한다. 그런 상태에서 아버지의 동료라고 믿었던 마법기사들이 실은 아버지를 매도하고 아니꼬와하고 있었으며 전장에서 봉사하던 아버지를 팀킬했다는 사실을 떠벌리고 다니자 정신줄을 놔버린다. 이후 슈퍼 마도사 조라의 모습을 하고 악행을 저지르는 마법기사들을 응징하고 다녔다. 지금 이름인 잭스 류그너도 실제론 인간말종이었기 때문에 가볍게 박살내고 그 이름을 빼앗았다. 로열 나이츠 시험에 난입한 것도 마법기사들을 박살내려주려는 의도였던 듯. 아버지가 동경하고 있었던 마법기사의 이미지를 아직도 가슴 한 켠에 품고 있으며 마법기사들을 싫어하는 것도 그런 아버지의 이상에 맞지 않는 족속들이라고 생각해서다.
- 블랙 클로버/53화 . . . . 2회 일치
* 절망의 베토는 아스타의 반마법 공격으로 "리히트에게 걸린 봉인"이 풀려 버렸다고 한다
* 단장들 조차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삼마안이 일제히 달려들어 봉인마법을 사용해 리히트를 막는다
- 블랙 클로버/75화 . . . . 2회 일치
* 그리고 선봉인 팔휘장 프록스.
* 유노가 금색의 여명 선봉으로 도착, 프록스의 멧돼지를 분쇄한다.
- 블리치/696화 . . . . 2회 일치
* 그때 우류가 가져온 은화살이 명중. 이 은화살은 유하바하의 올마이티를 일시적으로 봉쇄한다.
* 이 물질은 아우스발렌을 발동한 당사자의 피와 접촉하면 "그 자의 능력을 잠깐 동안 봉쇄한다"
- 산킨고타이 . . . . 2회 일치
이는 중세 봉건제도의 관습에 근거하여, 하급자인 사무라이가 상급자인 대귀족[* 후대에는 실권을 사무라이가 쥐게 되었지만, 당초 사무라이는 대귀족을 따르는 호위무사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이나, 사무라이를 통솔하는 막부의 쇼군에게 '참배'하여 그들을 호위함으로서 '병역'을 봉공으로 바치고, 그 댓가로서 영지를 보유할 권리(은상)을 얻는다는 개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 서거정 . . . . 2회 일치
[[1456년]](세조 2)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에 장원했다. 후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함)이 되었으며 [[1466년]] 발영시에 또 장원, 이후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 등을 두루 거쳐서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郡)에 봉해졌다.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고, 시문을 비롯한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시화(詩話)의 백미인《[[동문선]](同文選)》과 설화집인 《[[필원잡기]](同文選)》 등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 초에 이르는 시문과 산문 문학을 집성했다.
- 성시경 . . . . 2회 일치
|[[이정봉]]
|<그녀를 위해(Feat. 성시경)><ref>{{뉴스 인용|url=http://www.ob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50978|제목=성시경, 이정봉 결혼식 축가 "늦은 만큼 집약적 사랑 하시길"|출판사=OBS|날짜=2013-11-10}}</ref>
- 손담비 . . . . 2회 일치
5달 후인 2008년 9월 17일 두 번째 미니 앨범 ''[[Mini Album Vol.2]]''의 타이틀곡 〈미쳤어〉의 티저 영상을 온오프라인을 통해 공개하였는데, 티저 영상은 공개후 각종 동영상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하는 등 관심을 받으며 컴백을 알렸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미쳤어' 티저 영상에 팬들의 반응 뜨겁네~ |url=http://www.consumernews.co.kr/news/view.html?gid=main&bid=news&pid=111539|출판사=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 연예|저자=스포츠연예팀|날짜=2008-09-19|확인날짜=}}</ref> 이어 18일에는 음반을 발매하였다. 타이틀곡인 〈미쳤어〉 열풍이 한국에 불었는데, 특히 처음 후렴구부분의 의자춤이 인기를 끌었다. 각종 연예인들은 의자춤 패러디를 했는데, 재일 먼저 배우 [[허이재]]가 패러디를 했고,<ref>{{뉴스 인용|제목= 허이재, 손담비 ‘미쳤어’ 의자춤 깜짝공개 눈길 확~|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810191843251001 |출판사= 뉴스엔 연예|저자=이현우|날짜=2008-10-20|확인날짜=}}</ref> 계속해서 김효진, 신봉선, 양정아, 현영, 노홍철 등이 예능에서 따라했으며, 《[[내 사랑 금지옥엽]]》의 유인영, 《[[수상한 삼형제]]》의 오지은 등 드라마에서도 패러디를 했다. 또한 일반인들도 UCC를 통해 많은 패러디 동영상을 올렸다. 너도나도 다 따라한탓에 급기야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미쳤어〉 금지령까지 내려졌다.<ref>{{뉴스 인용|제목= 방송가, 손담비 '미쳤어' 이제 그만! |url=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80986|출판사= 조이뉴스24 연예|저자=박재덕 기자|날짜=2008년 12월 22일}}</ref> 2008년 11월 17일에는 [[마이티 마우스 (음악 그룹)|마이티 마우스]]의 싱글 〈[[Family (Special Edition)|패밀리]]〉에 피처링으로 참여했다.<ref>{{뉴스 인용|제목=마이티마우스, 이번에는 손담비‥'패밀리'|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3&aid=0002372273|출판사=네이버|저자=유상우|날짜=2008-11-11|확인날짜=2012-05-20}}</ref> 가수 활동 이외에 MBC 예능 《[[우리 결혼했어요|우리결혼했어요]]》에 [[마르코 (배우)|마르코]]와 함께 가상 부부로 나와 [[MBC 방송연예대상]] 특별상/베스트커플상 수상했다.<ref name="2008MBC"/> 또한 각종 CF에서도 러브콜이 쇄도했는데, 1년만에 몸값이 3배가 올라 화제가 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손담비 몸값, 1년만에 3배 이상 높아져 '미쳤어' |url= http://www.maxmovie.com/movie_info/ent_news_view.asp?mi_id=MI0080966034|출판사= 조이뉴스24 연예|저자=|날짜=2008-11-12|확인날짜=}}</ref>
손담비는 가수와 배우로 활동하면서 많은 상을 받았다. [[서울가요대상]]에서는 2009년,<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서울가요대상 본상 수상 ‘미쳤어’ 열풍 과시|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2121717531002|출판사=뉴스엔|저자=지형준|날짜=2009-02-12|확인날짜=2014-05-15}}</ref> 2010년,<ref>{{뉴스 인용|제목=아이돌, 그들을 위한 잔치! 서울가요대상 이변은 없었다(종합)|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2032026191002|출판사=뉴스엔|저자=이언혁|날짜=2010-02-03|확인날짜=2014-05-15}}</ref> 2011년에 이은 3년 연속으로 본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3년 연속 본상 수상… “내겐 너무 특별한 상”|url=http://sstv.hankyung.com/?c=news&m=v&nid=98214|출판사=뉴스엔|저자=양나래|날짜=2011-01-20|확인날짜=2014-05-1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517130014/http://sstv.hankyung.com/?c=news&m=v&nid=98214#|보존날짜=2014-05-17|깨진링크=예}}</ref> 2009년에는 제24회 [[골든디스크상]]에서 디지털음원부문 본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골든디스크 본상’ 손담비 “이렇게 큰 무대에서 큰 상을 받다니…”|url=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0912102051543&mode=sub_view|출판사=한경닷컴 bnt뉴스|저자=박영주|날짜=2009-12-10|확인날짜=2014-05-15}}</ref> 2009 [[SBS 연기대상]]에서는 《[[드림 (드라마)|드림]]》으로 뉴스타상을 받았으며,<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김범-이민정 등 12명, SBS 연기대상 뉴스타상|url=http://osen.mt.co.kr/article/G0912310257|출판사=OSEN|저자=봉준영|날짜=2009-12-31|확인날짜=2014-05-15}}</ref> 2012년에는 《빛과 그림자》로 [[MBC 연기대상]] 특별기획 우수상,<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MBC 연기대상 ‘우수상’ 수상, “숟가락 얹은 것 뿐”|url=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36379|출판사=뉴데일리|저자=신성아|날짜=2012-12-31|확인날짜=2014-05-15}}</ref> [[대한민국 문화연예대상]] 신인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손담비, 대한민국문화연예대상 신인상 수상...인증샷 공개|url=http://osen.mt.co.kr/article/G1109511163|출판사=OSEN|저자=정유진|날짜=2012-12-06|확인날짜=2014-05-15}}</ref> 배우, 가수 이외에도 예능 프로그램 《[[우리 결혼했어요]]》를 통해 2008 [[MBC 방송연예대상]]에서 특별상 베스트 브랜드상을 받았다.<ref name="2008MBC">{{웹 인용|url=http://www.imbc.com/broad/tv/ent/event/2008entertain/awards/|제목=2008 MBC 방송연예대상 수상자 목록|출판사=[[MBC]]|웹사이트=[[MBC 방송연예대상]]|확인날짜=2011-02-16}}</ref>
- 손지창 . . . . 2회 일치
* 1998년 MBC 《[[사랑밖엔 난 몰라]]》 ... 백봉구 역
* 1992년 [[해태음료]] 매실맛사이다 쎄시봉 써니텐
- 손치은 . . . . 2회 일치
|제목=[전봉관의 옛날 잡지를 보러가다⑫] 안동 가와카미(川上) 순사 살해사건
|저자=전봉관
- 송재호(배우) . . . . 2회 일치
* [[상도(드라마)|상도]] - 임봉핵[* 임상옥([[이재룡]])의 아버지. 역관(통역사)이 되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아들을 위해 장사에 뛰어들었으나, 송상 대방 박주명([[이순재]] 분)의 음모에 휘말려 참수당한다.]
* [[그대를 사랑합니다(영화)|그대를 사랑합니다]] - 장군봉
- 수애 . . . . 2회 일치
| 제2회 대한민국 나눔봉사대상
| 소외계층봉사부문
- 슈퍼걸(드라마)/1시즌 5화 . . . . 2회 일치
DEO에서는 라이브와이어를 봉인할 장비를 준비해주며, 그랜트는 도발스러운 방송으로 라이브와이어를 유인하고, 카라는 라이브와이어와 대결을 벌이게 된다.
카라는 대결중에 위기에 몰렸다가 봉인 장비를 사용하려고 하지만 라이브와이어가 눈치채서 실패한다. 라이브와이어는 카라를 죽이려고 격렬한 전격을 퍼붓는데, 그랜트가 나타나서 레슬리를 설득한다. 그 떄를 노려서 카라는 지하에 있던 수도관을 완력으로 뜯어서 라이브와이어에게 뿌리고, 라이브와이어는 물에 닿자 전력이 방전당하여 쓰러지고 만다.
- 식극의 소마/223화 . . . . 2회 일치
* 쿠가는 그 액체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걸을 받자마자 바로 녹찻잎을 개봉하는데. 이렇게 조리 중에도 서로 도울 수 있는데 "연대식극"의 진면목.
* 마치 쿠가를 대신한 것처럼 누군가 "글쎄다"라고 빈정거린다. 그건 전혀 엉뚱한 곳에서 들린 소리였다. 동시에 거기에서 검은 액체가 담긴 병이 날아온다. 쿠가가 그걸 받더니 기다렸다는 듯 녹차봉투를 끌른다.
- 신종령 . . . . 2회 일치
:〈[[봉숭아 학당]]〉간꽁치 역
*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그동안 어땠습니까?(봉숭아학당)
- 안내상 . . . . 2회 일치
* 2014년 [[문화방송|MBC]] 주말연속극 《[[왔다! 장보리]]》 ... 수봉 역
* 2014년 [[JTBC]] 월화드라마 《[[유나의 거리]]》 ... 봉달호 역
- 안숙선 . . . . 2회 일치
전북 [[남원시|남원]] 출신. 9살때 이모인 강순영의 주선으로 주광덕 문하에서 소리를 배우기 시작한 이후, 10대 때는 외당숙인 강도근에게서 판소리 다섯 바탕의 토막소리들을 두루 배웠다. 이후 20대에는 상경하여 만정 [[김소희 (국악인)|김소희]](춘향가, 심청가, 흥보가)를 사사하였으며, 31세에 국립창극단에 입단하여 양암 정광수(수궁가), 춘전 성우향(심청가), 박봉술(적벽가), 운초 [[오정숙]](흥보가) 등에게 사사하였다.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스승격인 인당 박동진, 운초 오정숙 명창의 뒤를 이어 판소리 다섯마당을 모두 완창하였으며 이후 [[1988년]] 유럽 8개국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미국 [[카네기 홀]] 공연, [[링컨 센터]] 여름축제 공연,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한국인 최초 초청 공연,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한국인 최초 초청 공연,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초청 공연, 제1회 윤이상 범민족 통일 음악회 평양 모란봉극장 공연 등 프랑스, 미국, 캐나다, 독일,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 중국, 일본, 몽골, 터키, 폴란드, 러시아, 홍콩, 브라질 등 세계 40여개국의 초청 공연을 통해 우리의 소리를 알리는 동시에 세계적인 명창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 야설록 . . . . 2회 일치
| 원어이름 = 최재봉
'''야설록'''(1960년 2월 25일 ~ )은 [[대한민국]]의 [[무협 소설]] [[작가]]다. 야설록은 [[필명]]으로 본명은 최재봉이다.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했고 [[대구고등학교 (대구)|우신고등학교]] -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과를 중퇴했다.
- 양일환 . . . . 2회 일치
|연봉 =
!년도 !!팀 !!평균자책 !!경기수 !!승 !!패 !!세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영창대군 . . . . 2회 일치
광해군 3년(1611 신해 / 명 만력(萬曆) 39년) 12월 26일(신묘)에 영창대군(永昌大君)으로 책봉되었다. 실록에는 이 때의 나이가 6세라고 주석이 달려 있다.
결국 광해군 5년(1613 계축 / 명 만력(萬曆) 41년) 5월 4일(신유)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파직, 6월 1일(무자)에 사사되었다. 영창대군 역시 5월 21일(무인)에 봉작이 박탈되었고, 7월 27일에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오영실 . . . . 2회 일치
|| '''출생''' ||<(> [[1965년]] [[1월 30일]]([age(1965-01-30)]살)[* 프로필 상으로는 [[1월 1일]]로 되어있다.][br][[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봉두길) ||
* 공주가 돌아왔다 - 나봉선 역
- 원피스/861화 . . . . 2회 일치
모건즈는 그녀가 "해저의 대비보"를 손에 넣었다고 들었다며 반가운 소릴 해준다. 빅맘은 기다렸다는 듯 어인섬의 비보 "타마테바코"를 꺼낸다. 게스트들은 호들갑을 떨며 장단을 맞춘다. 빅맘은 [[샬롯 푸딩]]의 결혼식이 끝나면 이 옥갑도 다른 선물들과 함께 개봉할 작정이다.
* 대문이 열리며 요리사들이 밖으로 나온다. 이들도 위장한 벳지의 부하다. 이들은 다과회장으로 통하는 통로를 전부 봉쇄하고 "뿔 전보벌레"를 사용해 전보벌레를 이용한 통신도 차단했다. 벳지는 만족해하며 이들에게 원래 옷으로 갈아입게 지시한다. 그리고 자신의 몸 속에 숨겨둔 [[시저 크라운]]을 불러낸다. 시저는 계획대로 거대한 거울을 들고 대기 중이다. 시저는 벳지가 자신을 본명으로 부르는 것에도 짜증을 내고 회장 안에 있는 게스트들도 "세계의 쓰레기들"이라며 멸시한다. 벳지는 "너도 쓰레기"라고 대꾸해준 뒤 거울을 근처에 숨겨두라고 지시한다.
- 원피스/874화 . . . . 2회 일치
* 빅맘 해적단은 [[샬롯 브륄레]]에게 미러 월드에 1만 병력을 대기시켜 어디든 급습할 수 있게 하고 각 섬에서 차출된 해상병력으로 남서쪽 해안도 봉쇄한다.
밀집모자 추격을 맡은 [[샬롯 브륄레]]는 미러 월드로 1만의 병력을 이동시켰다. 이제 거울이 설치된 곳이라면 어디든 기습할 수 있다. 거울 밖의 몬도르에게 그런 내용을 전하자 적당한 때를 알려주겠다고 대답한다. 이어서 몬도르는 해방병력도 점검한다. 토트랜드의 초콜릿섬, 치즈섬, 너트섬에서 출동한 군함들로 남서쪽 해안을 봉쇄했다. 써니호의 출항을 허용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들은 포위망의 제 1관문일 뿐. 그 뒤에는 플레버섬과 리큐르 섬에서 출동한 "타르트 쉽"이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항구에서 대기하면서 정찰용인 "영역 해우"를 풀어서 감시망을 조였다.
- 원피스/886화 . . . . 2회 일치
* 마차도 마침 항구 근처에 있어서 벳지의 배가 항구로 들어오는게 보였다. 벳지가 해안으로 들어오자 빅맘의 선단이 해안을 봉쇄해 벳지는 독 안에 든 쥐신세. 벳지는 그렇게 순순히 잡히는가 싶었지만, 배 위에서 마차의 오븐을 저격해 버리고 아들과 아내 앞에서 "이게 내가 살아가는 법"이라며 당당한 태도를 보인다. 이 저격 덕에 오븐이 마차에서 굴러 떨어지면서 시폰은 놓여나지만, 결국 항구는 봉쇄되고 일행이 달아날 구멍이 보이지 않는데.
- 위의공 . . . . 2회 일치
위(衛)는 [[삼감의 난]] 이후 구 상나라 영토를 반분하여, 송(宋)과 함께 은의 유민을 나눠서 지배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나라이다. 본래 상나라의 수도였던 조가(朝歌)를 수도로 하였으며, 주 무왕의 동생 당숙(康叔)이 백(伯)으로 봉해져 유력 희성 제후국[* 주 왕실의 인물이 분봉된 국가. 주왕실의 성이 희(姬)였기 때문에 희성(姬性)의 제후국이라 한다.]으로 출발하였다.
- 유다인 . . . . 2회 일치
모르는 이들에게 2008년에 찍은 [[레쓰비]] 광고의 그 유명한 '''선배. 나 열나는 것 같아'''의 바로 그 주인공. 이 CF로 유다인은 대중에게 이름을 알린다. ~~같은 해에 맨데이트가 개봉했다는 건 잊자.~~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3D414D><#3D414D> '''{{{#white 개봉 연도}}}''' ||<#3D414D> '''{{{#white 제목}}}''' ||<#3D414D> '''{{{#white 배역}}}''' ||<#3D414D> '''{{{#white 비고}}}''' ||
- 유인촌 . . . . 2회 일치
* 일출봉 - [[업산]]
극장 개봉 당시에는 [[김병관(성우)|김병관]]이 맡았다. 극장판의 부관이 너무 간사해서 악역이라기보다는 잡졸로 느껴졌던 것에 비해 유인촌의 부관은 좀 더 악당으로서의 존재감이 강조되었다.
- 윤균상(1987) . . . . 2회 일치
||<#c0c0c0> {{{#ffffff '''개봉 연도'''}}} ||<#c0c0c0> {{{#ffffff '''제목'''}}} ||<#c0c0c0> {{{#ffffff '''활동'''}}} ||<#c0c0c0> {{{#ffffff '''배역''' }}} ||<#c0c0c0> {{{#ffffff '''관객수'''}}} ||<#c0c0c0> {{{#ffffff '''흥행'''}}} ||
||<|2> [[2013년]] || 금지된 장난 || 조연 || 현준 || 미개봉 || 독립영화 ||
- 윤보라 . . . . 2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B26724><#B26724> '''{{{#white 개봉 연도}}}''' ||<#B26724> '''{{{#white 제목}}}''' ||<#B26724> '''{{{#white 배역}}}''' ||<#B26724> '''{{{#white 비고}}}''' ||
||<|2> [[2015년]] || [[네이버TV]] || 아부쟁이 얍! || '''봉희''' ||<|3> 주연 • 웹드라마 ||
- 은지원 . . . . 2회 일치
다만 이러한 뛰어난 미션 수행 능력과는 반대 급부로 복불복 운은 정말 지지리도 없는 편. 대표적으로 전남 벌교 편에서 5000원쓰고도 20만원을 쓴 이수근의 꼬막 2000개를 같이 캤던 것에서부터 비롯된 일명 '꼬막의 저주'라 불리우는 08년도~09년도의 겨울 내내 야외취침과, [[1박 2일/낙오일람|낙오된 횟수]]도 4회로 가장 많은 편.[* 2번째로 많았던 경우는 [[이승기]]의 3회인데 전북 장수편에서는 이수근과 함께 낙오했으며, 녹도에서는 다른 멤버들이 가위바위보를 짰기 때문에 복불복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반면에 은지원은 3회는 복불복으로, 1회는 날씨운 때문에 낙오한 것이며, 4회의 낙오를 모두 '''혼자서 겪어야 했다'''.] 낙오된 것도 굵직 굵직한 것들만 걸렸는데 첫번째 낙오는 '''무인도인''' 사승봉도, 국토대장정 특집에서 대중교통 이용해서 혼자 베이스캠프까지 찾아오기, 복불복 특집에서는 악천후에 목적지도 정해지지 않았는데[* 복불복에서 단순히 '서해 어촌마을' 정도만 정해졌고 정확한 위치는 가면서 정한 것이었다.] 우스꽝스러운 차림을(바보 분장에 등에는 [[지게]]를 멨다.) 하고 혼자 찾아오기, 5대섬 특집에서는 가장 가까운 호도에 걸려서 운이 좋은 듯 싶었으나 '''풍랑주의보로 인한 결항'''으로 혼자서 다큐 3일을 찍기도 하였다.
의외로 연기 활동도 좀 했다. ~~[[흑역사]]지만~~ [[영화]] [[세븐틴]]과 [[여고생 시집가기]]를 통해 영화 2편 주연을 한 영화 배우이며[* 그러나 여고생 시집가기를 함께 찍은 배우 임은경은 이 영화 이후로 더 이상 스크린에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여고생 시집가기가 입봉작이었던 감독도 그 이후로 모습을 볼 수 없다고, QTV 20세기 미소년을 통해 은지원 본인이 직접 밝혔다.], MBC 추석특집 '옥탑방 구렁이'에서도 [[윤은혜]]와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그 외에도 MBC [[뉴하트]]에 레지던트 카메오 역으로, 최근에는 tvN [[응답하라 1997]]을 통해 30대 중반에 고등학생 역할을 또(...)했다. 응답하라 1997의 [[이우정]] 작가는 '은초딩' 캐릭터를 만들어 낸 KBS 예능 '1박 2일'의 작가로 응답하라 1997의 모티브가 은지원과 (1997년에 데뷔한) 젝키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응답하라 1997'에서 가장 먼저 캐스팅 된 것은 은지원이었다고 한다. ~~극 중에서 깨알같이 본인 디스도 했다~~
- 은혼/619화 . . . . 2회 일치
큐베의 말과 함께 가구라와 신파치가 과감히 뛰어내리며 각자 왼팔과 오른다리를 친다. 왼다리가 통나무더미에 깔려 있기 때문에 그는 순식간에 사지가 봉쇄된다. 짐승처럼 포효하는 오우가이.
* 츠쿠요와 백화는 상공에서 장마비처럼 수리검을 퍼붓는다. 이들의 공격은 오우가이 휘하 병력들의 발을 묶고 막 일어서려던 오우가이를 고립시킨다. 츠쿠요가 직접 오우가이를 노리고 낙하하며 수리검을 난무하는데 오우가이는 또 한 번 괴력을 발휘해 봉쇄 당한 사지를 풀고 수리검을 막아낸다. 수리검에 벌집 같은 모습이 되지만 치명상은 하나도 없다. 머리에 날아온 수리검도 또 뿔에 걸린다.
- 은혼/625화 . . . . 2회 일치
대로로 돌아오자 참담한 풍경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 전장을 고향으로 삼고 있던 다키니의 용병부대가 얕보던 한낱 지구인들에게 쫓겨 대열도 없이 도망치고 있었다. [[야규 빈보쿠사이]]와 [[토죠 아유무]]가 선봉에 서고 있다.
* 긴토키는 선봉에서 적진을 누비며 더 기세 좋게, 더 난폭하게 날뛰라고 동료들을 부추긴다. 어차피 지면 멸망 밖에 당하지 않으니 뒷일은 생각하지 말고 질러버리라며 마구잡이로 적들을 도륙한다. 그러자 도박이 먹혀들어간다. 3대 용병부족 조차 적이 되지 못했다면 자기들이 어떻게 상대하겠냐며, 해방군 병사들이 등을 보인 채 도망친다. 그렇게 하나둘 무너지기 시작하자 전체의 붕괴는 빠르게 시작되었다. 신파치는 이대로 전부 무너져 버리기를 비는데.
- 은혼/634화 . . . . 2회 일치
그러나 귀병대가 히노카구츠치를 멈추더라도 문제는 끝나지 않는다. 지구가 엔죠 황자의 협박에 넘어가 봉쇄를 푼다면 모든 일이 허사다. 이 병기를 멈추고 해방군 본진을 칠 때까지 지구가 버텨줄 수 있을까?
* 이제 지구의 봉쇄도 끝이다, 노사는 그렇게 말했다. 겐가이가 제공한 실린더에는 나노머신 "벌"을 멈출 물건이 들어있다. 이것은 "벌"을 파괴하는 나노머신. 겐가이의 말대로 "부서지지 않는 방패를 부수는 유일한 창"이다. 이 녀석을 뿌리면 에도를 장악한 나노머신이 멈추지만, 이걸 뿌릴 기계를 사용할 수 없는 모순된 상황. 그래서 필요한 것이 대량의 폭약이다. 폭발을 이용해 이 안티나노머신을 연쇄적으로 확산시켜서 기계를 사용할 수 있는 영역을 확보, 거기를 기반으로 에도에서 벌을 지워버린다. 시간이 들더라도 이 방법이 최선이다.
- 이광수(배우) . . . . 2회 일치
|| 2011~12년 || [[채널A]] || [[총각네 야채가게(드라마)|총각네 야채가게]] || 남유봉 || 조연 ||
||<rowbgcolor=#93DAFF>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활동'''}}} || {{{#white '''배역'''}}} ||
- 이덕건 . . . . 2회 일치
|봉급 =
처음 <[[유머 일번지]]>, <[[전국노래자랑]]>의 조연출을 시작으로, 드라마 <[[애정의 조건 (1987년 드라마)|애정의 조건]]>, <[[토지 (1987년 드라마)|토지]]>, <[[달빛가족]]>, <[[서울 뚝배기]]> 등에서 현장 경험을 쌓았다. 1993년 [[KBS 드라마게임|드라마 게임]] <쌀>로 입봉하여 이후 <[[아름다운 유혹]]>, <[[별난여자 별난남자]]>, <[[미우나 고우나]]>, <[[바람 불어 좋은 날 (드라마)|바람 불어 좋은 날]]>, <[[사랑은 노래를 타고]]> 등 일일극 연출을 맡아 성공시키며 KBS 일일극의 상징인 감독으로 각인됐다.
- 이병규 (1983년) . . . . 2회 일치
|연봉 = 9,000만원 (2018년)
[[2016년]]에는 작년의 성적 부진을 이유로 연봉이 1억 5,600만원으로 감소했지만 2016년에도 당시 감독이었던 [[양상문]]의 믿음으로 [[LG 트윈스]]의 4번 타자 자리를 맡았다.<ref>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09&aid=0003291199 ‘이병규 끝내기타’ LG, 한화에 재역전승...개막 2연승 질주 ] - OSEN</ref>
- 이상민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연봉 = 4,2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이승경 (1290년) . . . . 2회 일치
'''이승경'''(李承慶, [[1290년]] ∼ [[1360년]])은 고려시대 후기의 문신으로 자는 중선(仲善)이다. 원나라로 유학하여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태자첨사가 되었고, 요양성 참지성사로 승진하였으며 원나라 조정에서 및 그의 부 [[이천년]]과 조부 [[이장경]]에게 특별히 농서군공에 추봉하였다. 공민왕 때, 문하시량평장사가 되었고, 1359년 홍건적이 침입하자 도원수가 되어 적을 물리치고, 서경을 회복하여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이 되었다. [[이조년]]은 그의 숙부였고, [[이인임]], [[이인복]], [[이인민]], [[이인립]]의 5촌 당숙이다.
원나라에 들어가 올과(乙科)에 급제하여 태자첨사(太子詹事)가 되었고, 어사(御使)를 제수받아 결단성 있게 일을 처리해 요양성 참지정사(遼陽省參知政事)로 승진, 많은 공적을 쌓았으므로 원나라 조정(朝廷)에서 그의 아버지 천년(千年)과 조부(祖父) 장경(長庚)에게 농서군공(隴西郡公)에 추봉(追封)하였다. 공민왕 6년(1357년) 모친상을 당해 귀국, 이듬해 원(元)나라에서 요양성사(遼陽省事) 탑해첩목귀(塔海帖木鬼)를 보내어 불렀으나 가지 않았다. 이에 공민왕은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로 임명하였으며, 1359년 홍건적(紅巾賊)이 침범하자 도원수(都元帥)로 나가 서경(西京)을 회복하였으나 부하 장수들이 홍건적을 힘껏 쳐부수지 않았음을 분하게 여겨 음식을 폐한 끝에 병을 얻고 집에 돌아와서는 만사를 돌보지 않았다. 공민왕은 여러 재상들과 더불어 그의 노고를 칭찬하여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에 책록하였다. 사후 경상북도 성주(星州)의 안산서원(安山書院), 옥천의 보덕사(報德祠)에 제향되었다.
- 이시형 (1934년) . . . . 2회 일치
| 서훈 내역 = [[1995년]] 대한신경정신학회 벽봉학술상
* 1995 대한신경정신학회 벽봉학술상
- 이열희 (1924년) . . . . 2회 일치
[[1961년]] [[6월 6일]] 전임강사에서 조교수로 승진하여 [[경북대학교]]로 정식 발령<ref>"정부인사", 경향신문 1961년 06월 06일자 1면 정치면</ref>, 경북대 치의학과 조교수에 임명되었다. [[1962년]] [[11월]] 오재인(吳在仁), 정순경(鄭淳慶), [[국군통합병원]] 의무과장 최형곤 [[대령]] 등과 함께 [[대한악안면성형재건외과학회]]의 창립에 참여하였고, [[1972년]]부터 [[1976년]] [[11월]]까지는 대한악안면성형외과학회 제3대 회장을 역임했다. 동시에 그는 무의촌대책위원회 치과분과 회장을 맡으며, 병원, 의료시설이 없는 무의촌의 치과 진료 봉사에도 참여하였다.
**** 조카사위 : 박영철, 대봉정형외과 원장
- 이영아(배우) . . . . 2회 일치
||<#c0c0c0> {{{#ffffff '''개봉 연도'''}}} ||<#c0c0c0> {{{#ffffff '''제목'''}}} ||<#c0c0c0> {{{#ffffff '''배역 이름'''}}} ||<#c0c0c0> {{{#ffffff '''비고'''}}} ||
|| 2008년 || SBS || [[일지매(2008년 드라마)|일지매]] || 봉순 || ||
- 이영욱 (1980년) . . . . 2회 일치
|연봉 =
!년도 !!팀 !!평균자책 !!경기수 !!승 !!패 !!세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이유리(배우) . . . . 2회 일치
2005년 MBC 드라마 《영재의 전성시대》에서 '영재([[김규리]])'의 여동생이자 성공한 억대 연봉의 애널리스트 '주은재'로 분했다. 극 중 성공한 당당한 커리어우먼 역이라 매회 화려한 의상과 메이크업으로 미모를 뽐냈다.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353535><#353535> '''{{{#white 개봉 연도}}}''' ||<#353535> '''{{{#white 제목}}}''' ||<#353535> '''{{{#white 배역}}}''' ||<#353535> '''{{{#white 비고}}}''' ||
- 이인영(정치인) . . . . 2회 일치
- 지역문화진흥법 일부개정법률안[* 최근 각 종교단체는 전국적으로 산재되어 있는 종교시설을 활용하여 문화복지의 증대를 도모하는 봉사적 차원의 문화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신도들과 일반시민들의 문화 향유권을 부분적으로 충족시키고 있음. 특히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접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현실을 감안할 때, 종교시설은 부족한 문화기반시설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산임. 그러나, 현행법에 따른 생할문화시설의 범위에는 종교시설이 누락되어 있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행정상·재정상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으로, 종교시설은 유휴공간으로 머무는 경우가 많음. 이에 생활문화시설의 범위에 종교시설을 포함하고 공공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함으로써 지역주민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하려는 것임(안 제2조제5호)]
· 2007 제9회 백봉신사상
- 이전환 . . . . 2회 일치
|후임자 = [[김봉래 (공무원)|김봉래]]
- 이정호 (1982년) . . . . 2회 일치
|연봉 =
!연도!!팀명!!평균자책점!!경기!!완투!!완봉!!승!!패!!세!!홀!!승률!!타자!!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
- 이정훈 (1963년) . . . . 2회 일치
|연봉 =
[[2009년]] 제 63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준우승을, [[2009년]] 제39회 [[봉황대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 [[북일고등학교]]를 우승으로 이끌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587634 <고교야구> 이정훈 북일고 감독 "이제 시작이다"] 《연합뉴스》, 2009년 4월 2일 작성</ref>
- 이종혁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연봉 = 3,2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이준(배우) . . . . 2회 일치
2016년 10월 3일 개봉한 영화 [[럭키]]에서 [[유해진]]과 함께 주연을 맡아 다른 삶을 체험하게된 단역배우를 연기하였다.
||<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이현우(배우) . . . . 2회 일치
2014년~2015년 사이 작품들에선 평균 이상의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어 아역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거의 넘긴 것으로 보인다. 2015년 2월 방송된 SBS 설특집 2부작 드라마 '내일을 향해 뛰어라'의 주연 강문재 역에 발탁되었다. 연기력은 나아진 듯 하다.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고. 2015년 6월 개봉한 [[연평해전(영화)|연평해전]]에서 故 [[박동혁]] 병장 역을 맡았다. 극을 처음부터 이끌어나가야 하는 중요한 역할로서 잘 소화해냈다는 평이 대부분. 2015년 7월 방송되는 MBC [[밤을 걷는 선비(드라마)|밤을 걷는 선비]]에 정현세자 역으로 1회에 특별출연. 대체적으로 괜찮다는 평이 많다.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6495ED><#6495ED> '''{{{#ffffff 개봉 연도}}}''' ||<#6495ED> '''{{{#ffffff 제목}}}''' ||<#6495ED> '''{{{#ffffff 배역}}}''' ||<#6495ED> '''{{{#ffffff 비고}}}''' ||
- 인천광역시/인물 . . . . 2회 일치
* [[박대봉]] - 계양구
* [[조봉암]] - 강화군
- 일본어 단어를 찾아보기 좋은 사이트 . . . . 2회 일치
* 야후 지혜봉투 http://chiebukuro.yahoo.co.jp/
일본인들도 모르는 일본어 단어가 있다. 이런 경우 지혜봉투에서 검색해보면 질문과 답변이 나올 수 있다.
- 임현준 . . . . 2회 일치
|연봉 = 3,5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장순왕후 . . . . 2회 일치
1460년 세자빈(世子嬪)으로 간택되어 당시 세자였던 [[조선 예종|예종]]과 가례를 올리고 부부가 되었으니 이때 나이가 16살이었다. 정숙한 성품에 아름다운 용모로 시아버지 [[조선 세조|세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책봉 이듬해인 [[1461년]] [[음력 11월 30일]], 왕실의 적통인 원손(예종의 장남인 인성대군)을 낳았으나 같은 해 [[음력 12월 5일]] 녹사(錄事) 안기(安耆)의 집에서 산후병으로 향년 17세로 요절했다.
능은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파주삼릉]] 내에 위치한 [[공릉 (장순왕후)|공릉]](恭陵)이다. 장순왕후로 추숭되면서 왕후의 예에 걸맞은 제사를 지냈다고 하나, 애초에 세자빈의 묘로 지어졌기 때문에 다른 왕후들의 묘소보다 초라한 행색을 갖추었다.
- 장유환 . . . . 2회 일치
** 〈카리스마 유봉쌤〉 (2009)
** 〈사건의 전말〉봉구 역
- 장진용 . . . . 2회 일치
|연봉 =
!연도!!팀명!!평균자책점!!경기!!완투!!완봉!!승!!패!!세!!홀!!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
- 장항준 . . . . 2회 일치
* 《[[박봉곤 가출 사건]]》 - 각본
* 2002년 《[[라이터를 켜라]]》 - 봉구의 친구 희창 역
- 장현수 (영화감독) . . . . 2회 일치
! 한국어 개봉명
! 영어 개봉명
- 전인범 . . . . 2회 일치
2016년 7월 28일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을 가졌고 같은 달 31일 전역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227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이천 특전사서 전역], 《연합뉴스》, 2016년 7월 28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199207 [카드뉴스] "국회의원이 오든지 말든지,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라"], 《조선일보》, 2016년 8월 5일</ref> 이날 전역식에는 한미연합사령관 [[:en:Vincent K. Brooks|빈센트 브룩스]] 대장, 미 8군사령관 토마스 밴달 중장, 미 2사단장 테드 마틴 소장 등 [[주한미군]] 수뇌부와 이기백, [[정호용]], [[김동진 (1938년)|김동진]], [[김태영 (1949년)|김태영]] 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등 한미 양국 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 중장의 전역을 축하했다.<ref>[http://www.huffingtonpost.kr/heebum-hong/story_b_11295018.html 어느 ‘특별한 별’ 이야기 │ 전인범 중장 전역식], 《허핑턴포스트》, 2016년 8월 2일</ref><ref name="c"/> 그는 이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의_훈장#보국훈장|보국훈장 국선장]]과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을 각각 받았으며, 특히 보국훈장 국선장은 그가 중위 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걸어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435078 33년 전 목숨 건 구출… 다시 만난 장군과 중위], 《SBS》, 2016년 7월 28일</ref> 전 중장은 전역사에서 선배 장군들과 미군 장성들, 동기, 후배들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728010013908 전인범 중장 전역식 "부하 잘 보살피면 부하들이 알아서 윗사람 보살핀다"], 《아시아투데이》, 2016년 7월 28일</ref> 그는 “군인들이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약속을 지켰다.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검은 베레 영원하라”는 특전 정신을 외치며 전역사를 마쳤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o9JyXV5Hyo 전인범 장군 전역사 영상(discharge speech of LTG. INBUM CHUN)], 《YouTube》, 2016년 7월 28일</ref>
2016년 10월부터 [[:en:Brookings Institution|브루킹스 연구소]] 동아시아정책연구센터 방문연구원, [[:en:Paul H. Nitze School of Advanced International Studies|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객원연구원으로 1년 동안 활동했다. 미국 연구기관의 연수는 연수자가 주제를 선정해 그 분야를 연구하며 자신의 전문 분야를 다른 연구자들과 공유하는 활동을 하는데, 그는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한국의 핵무장, 한미 군사동맹 강화 방안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111010007259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미국, 북핵 심각하게 평가... 미 공격 초래 상황 가고 있어”], 《아시아투데이》, 2017년 1월 12일</ref> 연수 3개월 동안 프린스턴 대학교 등 학교에서 특강,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 참여, 워싱턴 내의 많은 연구소와 기관 발표, 세미나, 회의에 참석해 미국의 생각을 이해하고 한국의 입장을 미국 전문가들에게 적극 설명하였다고 말했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59&bbs_id=BBSMSTR_000000000138&ntt_writ_date=20170117 ‘한국 안정·동북아 평화=美 국익’ 각인시켜야], 《국방일보》, 2017년 1월 16일</ref> 2017년 1월에는 특전사 예비역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2만 6천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사단법인 봉사단체인 특전동지회의 제2대 총재로 취임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33180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제2대 특전동지회 총재 취임], 《뉴데일리》, 2017년 1월 16일</ref> 전 총재는 취임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대한민국 친목단체의 새로운 章을 열겠다”고 다짐하며, “현역 후배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고, 회원을 편애하지 않는 모두의 특전동지회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역설했다. 같은 달 [[북한]]의 [[김정은]] [[조선로동당|노동당]] 위원장에게 [[대륙간탄도유도탄|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등의 재고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A4 용지 4장 분량의 영문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ref>[https://www.nknews.org/2017/01/dear-kim-jong-un-an-open-letter-from-a-former-s-korean-lieutenant-general Dear Kim Jong Un: An open letter from a former S. Korean lieutenant general], 《NK NEWS》, 2017년 1월 23일</ref> ‘김정은 위원장님께: 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의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이 편지에서 그는 “평화를 추구할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라면서 “가장 필수적인 첫 단계는 공공연한 위협의 회피, 핵과 미사일 실험의 중단, 핵무기 개발부터 인권에 이르기까지 신뢰를 증진시킬 협상에 참여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라고 평화 프로세스를 제안했다.<ref>[https://kr.nknews.org/%EA%B9%80%EC%A0%95%EC%9D%80-%EC%9C%84%EC%9B%90%EC%9E%A5%EB%8B%98%EA%BB%98-%EC%A0%84-%EB%8C%80%ED%95%9C%EB%AF%BC%EA%B5%AD-%EC%9C%A1%EA%B5%B0-%EC%A4%91%EC%9E%A5%EC%9D%98-%EA%B3%B5%EA%B0%9C-%ED%8E%B8/ 김정은 위원장님께: 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의 공개 편지], 《NK NEWS》, 2017년 1월 25일</ref>
- 전인환 . . . . 2회 일치
|연봉 =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절대가련 칠드런/460화 . . . . 2회 일치
* 전쟁이 끝난 직후 후지코는 이 집에 숨어 살았다. 예전 은사님이 내준 집이었는데 전쟁의 영향으로 능력이 봉인되고 황국 경찰과 코메리카 군부에게 쫓기던 후지코는 여기에 숨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과거의 후지코가 구현된 것도 이곳이 자신의 추억이 깃든 곳이기 때문. 다른 곳에서는 이정도로 구현화할 수 없다.
하지만 은둔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고 황국경찰에게 추적 당한다. 능력까지 봉인된 상태라 속수무책으로 당할 위기에 처하는데.
- 절대가련 칠드런/468화 . . . . 2회 일치
* 바깥에는 이미 블랙 팬텀의 새로운 병력이 몰려오고 있는데 ECCM에 봉쇄되고 부상자가 속출한 상황에서는 저항이 어렵다.
* 그런데 [[마츠카제 코우이치]]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한다. 감시 영상에는 특수부대가 ECCM까지 준비해서 접근하고 있다. 이미 복도는 봉쇄. 더이상 지체되면 탈출의 가능성이 희박하다.
- 절대가련 칠드런/473화 . . . . 2회 일치
* [[야도리기 아키라]]는 [[히노 카가리]]의 신체를 빼앗아 파이로키네시스와 [[파티 크루]]의 입자화 능력을 동시에 봉한다.
헌데 애초에 아키라가 노린건 전력의 우열이 아니다. 그가 카가리의 파이로키네시스에 서툰건 사실이지만 적어도 "라플레이스"에는 스페셜리스트. 그가 판단했을 때 일행 중 가장 성가시며 전략적으로 중요한게 카가리였다. 카가리를 제압함으로 성가신 파이로키네시스를 봉인, 게다가 파티의 입자화 능력도 분진폭발의 위험으로 억제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
- 절연금 . . . . 2회 일치
* 드라마 같은 데서 [[시어머니]]가 아들의 앞길을 막는 도둑 고양이 같은 년(…)에게 먹고 떨어지라면서 던지는 돈봉투나, 불륜남이 불륜녀에게 연을 끊자면서 주는 돈봉투 같은 것이 여기에 해당한다.
- 정경호(1972) . . . . 2회 일치
* [[2012년]] [[R2B: 리턴 투 베이스]]... 조태봉 대위 역
* [[2005년]] [[문화방송|MBC]] [[이별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 ... 한필봉의 운전기사 역(우정출연)
- 정규수(배우) . . . . 2회 일치
* [[2011년]] [[SBS]] 드라마스페셜 《[[보스를 지켜라]]》 ... 노봉만 역
* [[2013년]] 《[[톱스타]]》 ... 김봉수 역
- 정난정 . . . . 2회 일치
그녀는 [[보우 (조선)|보우]]를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적극 추천하여 그를 총애받게 한다.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ref name="park207">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07페이지</ref>
* 선조시대에 판중추부사로 지냈던 [[정종영]]은 정윤겸의 손자이자 정난정에게는 서조카였다. 원형이 상변(上變)하여 옥사를 일으킬 적에 논의에 참여하도록 넌지시 일깨워주었으나 종영은 거짓 모르는 체하고 응하지 않았다. 난정이 참람하게 정실(正室)이 되어 부인(夫人)에 봉해져서 외명부(外命婦)의 우두머리에 있게 되자 사람들이 감히 항변하지 못하였으나 종영은 오히려 얼척(孼戚)으로 대우하였다. 이 때문에 원형이 크게 유감을 품어 매양 죄를 얽어 해치려 하였다. 난정의 어머니가 난정을 경계하기를 "너는 종손을 해치지 말라. 내가 맹세코 죽음으로써 당하겠다”하였으므로 화를 면하게 되고 예전처럼 현달(顯達)한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 정다흰 . . . . 2회 일치
|연봉 =
2011년 신인지명회의에서 3라운드 전체 18번째로 LG트윈스에 지명되어, 계약금 8천만원, 연봉 2400만원에 계약하였으나, 1군 무대를 밟아보기 전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하여, 2014년에 소집 해제 되었다. 2014년에 신고선수로 전환되었다.
- 정동현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연봉 = 3,000만원 (2017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정몽헌 . . . . 2회 일치
|봉급 =
* 할아버지 : 정봉식
- 정선 (화가) . . . . 2회 일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입암도]](立巖圖)>, <[[혼혼해색도]](混混海色圖)>, [[덕수궁 미술관]] 소장의 <[[선인도해도]](仙人渡海圖)>, <[[산창유죽도]](山窓幽竹圖)>, <[[의송관란도]](倚松觀瀾圖:扇面)>, <[[노산폭포도]](盧山瀑布圖)>, <[[사직노송도]](社稷老松圖)>, <[[청풍계도]](淸風溪圖)〉 그리고 개인 소장의 <[[금강산 정양사도]](金剛山正陽寺圖)>, <[[해금강도]](海金剛圖)>, <[[노산초당도]](盧山草堂圖)>, <[[통천 문암도]](通川門巖圖)>, <[[봉래산 불정대도]](蓬萊山 佛頂臺圖)>, <[[석굴암도]](石窟庵圖)>,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정선 필 금강전도|금강전도]](金剛全圖)> 외에 다수가 있다.
{{인용문2|정(鄭)은 그가 평소에 익숙한 필법을 가지고 마음대로 휘둘렀기 때문에, 돌 모양이나 봉우리 형태를 일률적으로 '열마준법(裂麻皴法)'으로 함부로 그려서 그가 진경을 그렸다고 하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ref name="강세황평"/>}}
- 정성곤 . . . . 2회 일치
|연봉 = 4,7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 정수아 . . . . 2회 일치
* [[2012년]] [[한국]]을 빛낸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사회봉사발전 공로상 수상
* [[2013년]] [[한국]]을 빛낸 사람들 대상 가요발전봉사 공로상 수상
- 정승화(육군) . . . . 2회 일치
[[경상북도]] 김천군(현 [[김천시]]) [[봉산면]] 출생이다. 상관을 잘못 만나서 고생을 많이 했었다. [[육군사관학교]] 5기 출신으로 [[임관]]한 뒤 자대배치를 받았는데 하필 강태무/표무원 [[소령]]이 [[월북]]해 버리는 사건이 터져 버렸다. 그리고 [[6.25 전쟁]] 당시 3사단 백골부대 예하 [[대대장]]으로 보임되어서 참전하였는데 [[군단장]]이 [[유재흥]] 장군이었고 그 전투는 [[현리 전투]]였다. 이 때 중공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한 일도 있었다. 탈출할 때 한 화전민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후 보답으로 여러 편의를 봐주었다고 한다.
결국 정승화는 노태우가 당선되자 조용히 정치에서 손을 떼었다. 그러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에 이어 전두환 정부에서 강등 조치된 장교들의 계급 환원 처리에서 이등병으로 강등된 예비역 장군들의 계급 복권 대상에 포함되어 [[이규광]], [[강문봉]] 등과 함께 정승화도 '''예비역 육군대장의 자격'''을 되찾았고 몰수된 돈과 군인연금 수급권도 돌려 받았다. 1988년 시작된 5공 청문회에서는 12.12사태 당시의 피해자로 증인으로 청문회에 출석하여 사태의 전말을 직접증언 했다. 1993년에는 [[장태완]](수도경비사령관), [[김진기]](육본 헌병감), 하소곤(육본 작전참모부장) 등 12.12 사태 당시 육본 진압군 측 장군들과 함께 전두환, 노태우 등 당시 신군부(하나회) 출신 인사들을 검찰에 군사반란 혐의로 고발 했으나 당시 검찰은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좆논리|모종의 이유를 들어]] 고발된 인사들을 [[기소유예]] 처리했다. 이것으로 기세등등해진 신군부 출신 인사들은 자신들을 검찰에 고발한 정승화를 포함한 육군본부 측 장군들을 외려 군사반란, [[무고]] 혐의 등으로 역고소하는 추태를 보이기도 하였으나, 이 무고 혐의 역시 기각됐다.
- 정찬성 . . . . 2회 일치
같은 해 5월에는 역시 일본의 신성인 카네하라 마사노리를 상대로 8강전을 치르지만 아깝게 분패하고 말았다. 카네하라가 상위를 차지하고 정찬성이 하위에서 서브미션을 시도하는 형태로 흘러갔다. 카네하라는 정찬성의 타격을 봉쇄하며 초반을 뚜렷한 우세를 보였다. 스탠딩에서는 정찬성의 우세였고 중반 이후에는 전체적으로 호각인 양상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카네하라의 만장일치 판정승이 선언되었다.
레오나르도 가르시아와는 WEC 데뷔전과 UFC 데뷔전에서 만나며 매번 명승부를 펼친 사이다. 판정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적도 있지만 정작 두 선수는 꽤 친하다고 알려져 있다. Fight of The Night 보너스만 수 만 달러를 받았으니 그럴 수밖에. 본봉에 Submission of The Night까지 포함하여 가르시아전에서 짭짤한 수익을 올렸으며 보너스는 세금조차 없다.
- 조안(배우) . . . . 2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996699><#996699> '''{{{#white 개봉 연도}}}''' ||<#996699> '''{{{#white 제목}}}''' ||<#996699> '''{{{#white 배역}}}''' ||<#996699> '''{{{#white 비고}}}''' ||
|| [[2012년]] [[3월 2일]] || [[MBC every1]] || 러브 포 에브리원 더 플랜 || 봉사자 || ||
- 지증왕 . . . . 2회 일치
'''지증왕'''(智證王, [[437년]]~[[514년]], <small>재위:</small> [[500년]]~[[514년]])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내물왕]]의 증손이며 [[복호 갈문왕]]의 손자이자 [[습보 갈문왕]](習寶)의 아들이다. 전임 [[소지 마립간]]과는 6촌 형제간이었다. [[법흥왕]]의 아버지로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라고도 한다. [[502년]] [[순장법]]을 금하고 [[농사]]를 장려하였으며, [[소]]를 길러 땅을 갈게 하였다. 이듬해 국호를 [[신라]]로 정하고, [[마립간]] 대신 [[중국]]식 군주의 칭호인 [[왕]]의 칭호를 사용하였다.<ref>그러나 마립간 또는 매금이라는 칭호는 지증왕의 장남 법흥왕의 때까지도 비공식적으로나마 잔존하여 사용되었다. 이는 울진 봉평신라비와 울산천전리각석에 기록되어 있다.</ref>
제도와 체제를 개편, 정비하여 [[504년]] 상복법을 제정하였으며, [[505년]] 주, 군, 현을 정하고 각 주에 군주를 두었다. [[509년]] 서울에 동시(東市)를 두었고, 512년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였다. 또한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부터 전해지던 [[순장]] 풍습을 최초로 폐지한 군주이기도 하다. 시호는 지증인데, 신라 최초의 [[시호]]이기도 하다. 이름은 지대로(智大路, 智度路)이다.<ref>{{서적 인용 |제목= [[삼국사기]] | 저자= [[김부식]] |연도= 1145 |장= [[:s:삼국사기/권04/지증 마립간|본기 권4 지증 마립간]] |인용문= 智證麻立干立 姓金氏 諱智大路 或云智度路 又云智哲老 (지증 마립간(智證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 성(姓)은 김씨이고 이름은 지대로(智大路)이다. <지도로(智度路) 혹은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하였다.)}}</ref> 그는 6촌 형제간인 [[소지 마립간]]과 사돈이었고 즉위 전 [[갈문왕]]에 봉해진 것이 [[영일냉수리신라비]]를 통해 확인되었다.
- 차동엽 . . . . 2회 일치
'''차동엽'''(車東燁, [[1958년]] [[5월 31일]] ~ )은 [[대한민국]]의 [[가톨릭]] [[신부|사제]]이며, 세례명은 '''노르베르토'''이다. 그는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 77학번으로, [[1981년]]에 학사 학위하였다. [[대한민국해군 사관후보생|해군학사장교]] 72기 출신이며, 현재는 [[인천가톨릭대학교]] 교수, 미래사목연구소 소장으로 봉직하고 있다.
* 《교황의 10가지 (따봉, 프란치스코!)》
- 창작:좀비탈출/5-1-1-1-1-1 . . . . 2회 일치
냉기는 없었다. 식재료를 담은 봉지가 녹아서 흐물흐물해졌다. 문이 열리면서 몇 가지는 바닥으로 떨어졌는데 철퍽하는 소리가 듣기에도 부패의 느낌이 났다. 다만 아줌마의 상태는 상체만 남은 걸 빼면 양호했다. 그야 부패의 기미를 완전히 숨길 수는 없지만 매일 햇볕에 노출되었던 토트넘에 비하면야. 잘 됐군요 아줌마. 처음으로 아저씨보다 동안이란 말을 듣게 됐어요. 냉동실에서 들은 거긴 하지만.
아줌마가 '''튀어 나왔다.''' 팔 밖에 없는 주제에! 내가 미처 대응하기도 전에 누런 이빨이 '''목젖을 물어 뜯었다.''' 나는 뒤로 벌렁 넘어지면서 마치 아줌마와 얼싸안은 것처럼 돼버렸다. 씨발! 무슨 감격적인 이웃상봉인가!
- 창작:티겔 왕국 . . . . 2회 일치
동부대룩의 중남부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국가. 호랑이족 맹수인들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남쪽엔 황소족 거수인들도 거주하고 있다. 그외에 무릉과 인접한 곳엔 맹호족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일부지만 라이거일족들도 살고있다. 북쪽으론 메말사막을 기점으로 서쪽부터 해서 라이겐프름 공국, 상인연합, 츄프 왕국과 접하며, [* 다만 앞에 두국가들은 일단은 티겔의 봉신이다. 사실상 독자적인 외교권과 주화를 가지고 있으므로 독립국 취급이지만.] 동쪽으론 아래드 산맥을 기점으로 무릉과 접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낭마 연합과 접하고 있다. 제국을 칭하던 시기도 있었으나, '유일황제' 샤를 7세가 이끄는 레이먼 제국군한테 박살나고 잠깐 레이먼 제국의 봉신이 되었을때 왕국으로 격하되었다. 그뒤로는 레이먼 제국한테 괜히 트집잡히기 싫어서 일부러 왕국으로 유지중.
- 최덕희 . . . . 2회 일치
* [[KBS 무대 - 울 아빠는 아이돌]] (KBS) - 봉봉일 2015.12.05
- 최동환 . . . . 2회 일치
|연봉 = 6,000만원 (2017년)
!연도!!팀명!!평균자책점!!경기!!완투!!완봉!!승!!패!!세!!홀!!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사구!!탈삼진!!실점!!자책점
- 최원제 . . . . 2회 일치
|연봉 =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최원태 . . . . 2회 일치
|연봉 = 1억 5,0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최윤정 (패션 디자이너) . . . . 2회 일치
|봉급 =
'''최윤정'''(1974년~)은 [[미누파탈]]의 설립자이자 수석 [[디자이너]]이다. [[1974년]] [[대한민국]]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1997년]] [[MBC]] 26기 공채 [[탤런트]]로 입사하여 [[드라마]] [[그대 그리고 나]], 사랑과 성공, 진실, 마지막 전쟁, 가을에 만난 남자, 베스트 극장, 인어아가씨, 앞집여자 등에 출연하였다. 또한 [[영화]] [[선생 김봉두]]에도 출연하였고, LG텔레콤, [[P&G]], PCCW, 여성가족부 등의 [[CF]] 모델로도 활동하였다. [[2013년]] [[최정아]]와 함께 20~30대 여성을 타겟으로 하는 디자이너 브랜드 [[미누파탈]]을 설립하였다.
- 최은희 . . . . 2회 일치
||<:> [* 1962년에 첫 시상식 개최] ||<:> {{{+1 → }}} ||<:> '''최은희[br](상록수)''' ||<:> {{{+1 → }}} ||<:> 도금봉[br](새댁) ||
그 후 5, 60년대 영화계를 [[김지미]], [[엄앵란]]과 함께 나눌 정도로 스타가 되었다. 특히 1960년대에는 후배 [[김지미]]와 경쟁했는데, 흥미롭게도 '춘향전'을 비슷한 시기에 김지미(홍성기 감독)와 최은희(신상옥 감독)가 각자 버전으로 찍고 동시 개봉하면서 라이벌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과는 신상옥 최은희 페어의 승리로 끝났다.) 이 시절 그녀는 정말 다양한 연기를 선보였는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처럼 전통적 여인상에서 <지옥화>처럼 서구적인 글래머상까지 소화하면서 그녀는 초창기 한국영화에 엄청난 업적을 남겼다.
- 최준석 . . . . 2회 일치
2018년 1월 24일 최준석이 야구만 할 수있다면 '''연봉 5,000만 원'''이라도 받겠다고 몸값을 스스로 낮췄다. [[http://v.sports.media.daum.net/v/20180124053014405|해당기사]] 하다 못해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109&aid=0003706356|독립리그에서 재기를 노리는 게 어떻겠냐]]라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결국 2018년 2월 11일, 이전에 했던 말을 번복하고 조건없는 사인 앤 트레이드로 NC행이 결정되었다. 연봉은 본인이 말했던 5천만에 근접한 5,500만 원.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311&aid=0000821910&redirect=false|김경문 감독의 요청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2014년 두산의 FA [[최준석|3]][[이종욱(야구선수)|인]][[손시헌|방]]이 모두 NC에서 김경문 감독과 재회하게 되었다. 허나 NC 팬덤은, [[리빌딩]]을 천명하면서 이종욱, 손시헌과 저렴한 금액에 재계약하고 [[조영훈]], [[김종호(야구선수)|김종호]]를 내쳐놓고는 최준석 영입이 말이 되느냐는 반응.
- 최채흥 . . . . 2회 일치
||<:> '''연봉''' || 4000만원 (48.1%↑, 2019년) ||
[[KBO 리그/2018년/신인드래프트|2018 신인드래프트]]에서 [[삼성 라이온즈]]에 계약금 3억 5천만원[* 역대 삼성 신인선수 중 2001년 [[이정호]](5억 3000만원)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계약금이다. 원래는 박한이가 2위였으나 밀어냈다.], 연봉 2700만원의 조건으로 1차 지명을 받았고 2018 시즌부터는 삼성에서 뛰게 된다.
- 최학봉 . . . . 2회 일치
'''최학봉'''(崔鶴鳳, [[1856년]] ~ ?)은 [[조선 고종]] 때의 [[대금]]의 명인이다. 일명 '''성호'''(聖浩)라고도 하며,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이다.
서울 출생으로, 1871년 [[장악원]] 악공에 임명되고, 1913년 이왕직아악부 아악수에 임명되었다. [[함제홍]], [[정약대]], 함재영과 더불어 조선 말기의 손꼽히는 대금의 명인이고, 특히 대금 연주자 김계선(金桂善)을 길러낸 스승이다.<ref name="글로벌_1">한국음악/한국음악/한국음악가/정악의 명인/최학봉, 《글로벌 세계 대백과》</ref>
- 최항석 . . . . 2회 일치
* 《[[울밑에 선 봉선화|울 밑에 선 봉선화]]》
- 추자현 . . . . 2회 일치
* [[2004년]] [[KBS2]] 월화드라마 《[[오!필승 봉순영]]》 ... 허송자 역
* [[1996년]] 《[[박봉곤 가출 사건]]》 ... 혜수 역
- 킹덤/503화 . . . . 2회 일치
* 태행산맥의 조군 봉화대에서 산맥을 넘는 전서구의 무리가 관찰된다. 봉화를 관리하던 병사는 무슨 일이 있길래 이 높은 산맥을 넘어, 저 정도 숫자의 전서구가 날아가는 건지 불길해한다. 그 전서구는 진군이 업을 노리고 있다는 급보를 담은 [[이목(킹덤)|이목]]의 전서구다.
- 킹덤/515화 . . . . 2회 일치
* 지금껏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지시만 내렸던 왕전이지만, 이번엔 그가 그리는 전략을 편린이나마 보여준다. 여전히 어떤 목적 때문에 소도시들을 공략하는지 밝히진 않았으나 [[이목(킹덤)|이목]]의 움직임에 유의하고 있다는 점, 그가 왕도권으로 돌아와 통제력을 갖추기 전까지 어떤 "준비"를 목표로 하고 있다는 점을 내비쳤다. 왕전이 보기에 이목이 함단까지 돌아오는데 하루, 그가 왕도권 군단의 통제권을 인수하는데 하루, 최종적으로 준비를 마치고 업에 도착하기까지를 하루로 잡아서 총 3일의 시간이 있는 걸로 계산했다. 왕전은 이제부터 군을 셋으로 나누기로 한다. 왕전 자신의 본대와 [[환의(킹덤)|환의]]군, [[비신대]]와 [[낙화대]], [[옥봉대]]를 합친 연합군의 세 갈래로 나눠 업 주위에 남은 일곱 성을 한 꺼번에 공략한다는 것이다. 작전 내용은 같다. 점령지의 식량을 빼앗고 백성들을 바깥으로 내몬다. 그들이 갈 곳은 "동쪽"이다.
* 왕전이 구상한 진군로는 크게 세 개. 현재 "정성"에서 군은 세 갈래로 나눠 출발해 왕전의 본대는 적성, 평성을 함락시키며 동쪽으로 진군. 환의군은 그 아래 신성, 석성, 허성을 거쳐 역시 동쪽으로 진군. 비신대, 옥봉대, 낙화대의 연합군은 크게 몰아 최남단의 두 성을 함락시키고 동쪽으로 진군.
- 타오파이파이 . . . . 2회 일치
잔인하고 비겁한 성격으로, 자신을 거슬리면 별다른 죄도 없는 일반인도 서슴치 않고 살해한다. 자신의 옷을 만들어준 재봉사가 옷 값을 요구하자, 기분에 거슬렸는지 대신 누구든 바라는 사람을 죽여주겠다고 말하고 재봉사가 거부하자 그대로 손가락으로 머리를 꿰뚫어서 살해했다.
- 태미 . . . . 2회 일치
[[초등학교]] 6학년 때 [[태권도]]를 시작하였고 '''세계태권도품새선수권대회''' 1위를 거머쥔 실력자로서, [[청와대]]에서 [[태권도]] 공연 이후 청와대 [[경호원]] 제안을 받았지만 행복하기 위해 배우를 택했다. 2007년 [[SBS]] 《[[스타킹 (2015년 텔레비전 프로그램)|스타킹]]》에 출연한 이후 ‘[[얼짱]] 태권소녀’로 주목을 받았다. 강인한 이미지가 강해서 탈피하고자 2016년 영화 《'''여자 전쟁: 봉천동 혈투'''》에 도전하여 출연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9&aid=0003783206 태미 “청와대 경호원 제안 받았지만 배우 택했다”] 매일경제. 2016년 08월 11일</ref>
|2016||여자 전쟁: 봉천동 혈투||해당화||
- 태영호 . . . . 2회 일치
2000년 12월에 [[영국]]과 북한이 수교를 맺고, 2003년 4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이 정식 개설되자, 1등 서기관 신분으로 런던에 파견되었다. 현학봉 영국 주재 북한 대사의 뒤를 잇는 2인자 자리에 올랐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가디언 지 보도에 따르면 태영호는 공식적으로 북한 체제를 찬양했으나, 사석에서는 빈궁한 생활에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고 한다. 북한의 친지들은 런던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지 못하며, 자신이 [[풀장]]과 [[사우나]]가 딸린 궁전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으나, 실제로는 방 2개, 좁은 부엌이 딸린 평범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고 한다. 봉급 한달 1200파운드(약 174만원) 정도로 물가가 비싼 런던이라 생활고를 겪었으며, 태영호는 "대사관에서 차를 몰고 나올 때 혼잡통행료 걱정을 하기도 한다."고 발언했던 적도 있다고 한다.
- 토리코/368화 . . . . 2회 일치
* 죠아는 처음부터 미도라를 이길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아주 짧은 틈을 타서 그를 금관두에 봉인해 버린다.
* 비록 승리한 죠아지만, 미도라가 봉인된 직후 다리가 풀릴 정도로 지친 상태.
- 토리코/381화 . . . . 2회 일치
* 사왕 마더 스네이크가 네오를 한 입에 삼키고 네오를 중심으로 몸을 감아 봉인한다.
* 미도라의 부활. 사실 삼제자 중 유일하게 죽지 않았고 단지 봉인만 됐기 때문에 풀려난다는 설이 많았다. 하지만 자력으로 금관두를 박살낸데다 구르메 식운까지 훔쳐올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는 듯
- 토리코/383화 . . . . 2회 일치
* 하지만 아카시아는 비웃으며 네오의 봉인 따윈 기대하지도 말라고 조롱한다.
* 하지만 네오를 봉인하는 목적에 협조시키려는 의도였던 걸로 보이며, 아카시아에게 다른 길은 없다고 설득했던 걸로 보인다.
- 토탈워: 쇼군 2 . . . . 2회 일치
이 경우 군대를 적 영토 안으로 보낼 수 있다. 적의 시설을 습격해 수리할 때 까지 못 쓰게 만들 수 있고, 적의 군대를 공격해 야전을 벌이거나 적의 성을 공략할 수도 있다. 해군 역시 마찬가지로, 적 항구나 무역로를 봉쇄해 무역 수입을 끊어주거나 건널 수 있는 해협 한가운데 함대를 박아서 적 지상군이 못 건너가게 막을 수 있다.
성을 성공적으로 점령한다면 평화롭게 점령할 것인지, 약탈할 것인지를 선택할 수 있다. 약탈할 경우 그냥 점령하는 것보다 많은 돈을 벌 수 있지만 해당 지방의 모든 건물이 파괴되고 민심이 악화되며 다이묘의 명예가 추락한다. 본래 그 지방을 본거지로 했던 가문이 멸망한 상태라면 다시 재건시켜 봉신으로 삼을 수도 있다.
- 토탈워: 쇼군 2 - 사무라이의 몰락/번 . . . . 2회 일치
노베오카 번과 전쟁 중, 봉신인 다네가시마와 동맹.
* 다네가시마 - 큐슈 밑의 다네가시마를 지배하는 번. 사츠마 번의 봉신이다. 다이묘는 다네가시마 나리야스.
- 페어리 테일/484화 . . . . 2회 일치
* 디마리아는 포로로 잡혀있는데다 마력이 봉인된 상태.
* 피오레 북방의 영봉 조니아에서는 "최강의 여자" 아이린이 설원을 거닐고 있다.
- 페어리 테일/502화 . . . . 2회 일치
* 가질은 드디어 아군과 합류. 레비와 눈물겨운 상봉을 한다.
* 그리고 레비와도 감동의 상봉... 인데 일단 얻어맞고 시작한다.
- 페어리 테일/509화 . . . . 2회 일치
* 크림 소르시엘과 제랄 페르난데스를 제압한 오거스트는 제랄이 과거 제레프를 신봉했던 것도 알는데 어째서 배신했냐고 묻는다.
* 오거스트는 제랄이 한 때 제레프 드래그닐을 신봉했던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를 져버리고 다른 길을 걷는지 묻는데 제랄은 "내 마음을 비추는 빛을 손에 넣었다"고 말하며 엘자 스칼렛을 떠올린다. 그런데 대답을 들은 오거스트는 빛은 정의고 어둠은 악이라는 사고방식은 어리석다고 일축한다. 그러면서 제레프 드래그닐에겐 "아들"이 한 명 있다고 말을 꺼낸다. 제랄에겐 놀랄 틈도 없이 오거스트의 설명이 이어진다. 그 아이는 강대한 빛의 힘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누구에게도 사랑 받지 못하고 빛과 어둠 사이에서 방황했으며 어느 쪽도 아닌 무의 경지에 도달했다. 오거스트는 빛과 어둠에 선악은 무관하다며, 굳이 정의가 있다면 그건 "사랑" 뿐이라 말하며 돌아선다. 그러는 사이 제랄은 엘자를 지키기 위해서라고 다짐하며 몇 번이나 다시 일어서라고 시도하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 페어리 테일/525화 . . . . 2회 일치
* 잠시 과거가 나오는데, [[마스터 하데스|프레히트 게이볼그]]는 봉인된 메이비스의 몸 안에 "생명"이 깃들어 있는걸 발견한다. 그것이 [[라케이드 드래그닐]].
* 과거, 아직 메이비스가 봉인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페어리 테일의 2대 마스터 [[마스터 하데스|프레히트 게이볼그]]는 연구 도중 메이비스의 체내에서 말도 안 되는 반응이 나타난걸 발견한다. 그는 어처구니없어하지만 데이터 상으론 그녀의 몸 속엔 "생명"이 자라고 있다. 프레히트는 곧 고민에 빠진다. 이대로 그 생명을 내버려 둬야하나? 죽여야 하나, 혹은 살려야 하나? 자문을 거듭하던 그는 겨우 결론을 내린다.
- 페어리 테일/529화 . . . . 2회 일치
* 안나는 그동안 연구를 통해 "시간의 틈새"를 발견하고 거기에 아크놀로기아를 봉인, 무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아크놀로기아를 봉인하고... 무로 돌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
- 페어리 테일/531화 . . . . 2회 일치
* [[제레프 드래그닐]]은 자신의 네오 이클립스를 완성하기 위해 시간의 틈새 안의 "시간의 마력"을 독점하려 했고 그래서 시간의 틈새를 봉인해버렸던 것.
>그 "시간의 마력"은 내거다. 그러니 내가 봉인했다.
- 하이큐!! . . . . 2회 일치
단행본으로는 2015년 3월을 기준 [[일본]]에서 15권까지 발매했으며, [[한국]]에서는 [[대원씨아이]]에서 정식으로 수입하여 13권까지 정발됐다. 일본에서는 9권 발매시 [[애니메이션화]] 기념으로 [[드라마 CD]]가 동봉된 한정판도 함께 발매했으며 15권 발매시 [[점프]] 스페셜 애니메이션 페스타에서 방영된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이 동봉된 한정판을 함께 발매했다.
- 하이큐/255화 . . . . 2회 일치
* [[카라스노 고교]]의 간판이자 필살기라 할 만한 괴짜 속공. [[이나리자키 고교]]의 [[미야 아츠무]]는 즉흥적으로 그 기술을 카피해서 [[미야 오사무]]와 성공시킨다. 거기에 반격하러 온 [[히나타 쇼요]]와 [[카게야마 토비오]]의 원조. 이또한 아츠무의 천부적인 센스로 철통같이 리드 블록, 철저하게 봉쇄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스코어는 13 대 10으로 이나리자키의 3점 리드.
* [[야치 히토카]]도 히나타의 상태를 걱정한다. 지금껏 그는 자기보다 큰 상대와 싸웠지만 필살기 괴짜 속공을 앞세워 자신감있게 플레이해왔다. 그런데 그걸 상대가 똑같이 따라하는데다 자신들 쪽은 봉쇄, 멘탈이 흔들리지 않을까?
- 하춘화 . . . . 2회 일치
하춘화의 재능을 알아본 하춘화의 아버지는 그녀를 서울 동아예술학원에 다니게 했고 거기서 8개월 동안 노래를 배우게 한 뒤 가수로 데뷔시켰다. 이후 [[1966년]] '아빠는 마도로스'라는 노래를 발표해 크게 성공하면서 하춘화의 인지도가 생기기 시작했다. 음반은 [[1971년]]에 처음으로 냈는데 이 음반의 노래인 '물새 한마리'가 히트하면서 꽤 많이 팔렸고 [[1971년]] 고봉산과 '잘했군 잘했어'를 듀엣으로 불러서 이걸로 TBC에서 4년 연속 여자가수상을 수상해서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배 가수였던 [[이미자]], [[패티김]], [[김상희]], 문주란과 함께 대한민국 대표 정상급 여가수로 성장했다.
* 잘했군 잘했어 (Duet. 고봉산) (1972)
- 한동욱 . . . . 2회 일치
2009년 5월 1일, [[스타리그#박카스 스타리그 2009|박카스 스타리그 2009]] 오프라인 예선에 참가한 한동욱은 박재영([[KT 롤스터]]), 공민창([[MBC게임 히어로]]) 등을 꺾고 36강에 진출, [[EVER 스타리그 2008]] 이후 3시즌만에 스타리그 본선에 복귀 하였지만, [[한상봉 (프로게이머)|한상봉]]에게 2:0으로 져서 16강 진출은 결국 좌절되고 말았다.
- 한상훈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연봉 =
2010 시즌 후 소집 해제로 팀에 복귀하였고, [[2011년]] 131경기에 나와 398타수 107안타 타율 2할6푼9리 3홈런 39타점 49득점 16도루로 공격력이 향상되었다. [[안치홍]]에게 밀려 수상에는 실패했지만 골든 글러브 [[2루수]] 후보에도 올랐다. 시즌 후 [[신경현]]을 이어 주장이 되었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329265 첫 골든 글러브 후보 된 한상훈의 남다른 각오] 《OSEN》</ref> 2013 시즌 후 FA를 선언하여 4년 총액 13억 원(계약금 3억 원, 연봉 2억 원, 옵션 2억 원)의 조건으로 [[한화 이글스]]에 잔류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659141 한화, 내부 FA 3인방 전원 재계약 '이대수 4년 20억'] - OSEN</ref> 시즌 후 [[강동우 (1974년)|강동우]]가 현역 은퇴를 선언하자, 입대하기 전 자신이 썼던 등번호 3번을 되찾았다.2015년 보류선수명단에서 제외되면서 한화에서 방출되었다.
- 한승혁 (1993년) . . . . 2회 일치
|연봉 = 6,500만원 (2018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함인섭 . . . . 2회 일치
|친인척 = [[함태영]](친조부) <br/> [[함병춘]](이복 숙부) <br/> [[함재봉]](사촌 남동생) <br/> [[함재학]](사촌 남동생)
**** 사촌 : 함재봉,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 겸 원장
- 허위 . . . . 2회 일치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고종(조선)|고종]]이 내밀봉서(內密封書)로 의병 해산 명령을 내리자 해산하였다.
1907년 [[고종(조선)|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정미 7조약]]으로 대한 제국 군대가 해산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13도 창의군]]의 군사장으로 선봉대를 이끌고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였으나[* 허위가 이끌던 13도 창의군이 최종적으로 머물었던 길을 그의 호를 따 명명하게 됐는데, 그게 현재의 [[왕산로]]이다.] 준비하고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격퇴당하고, 총대장인 [[이인영]]이 부친상을 이유로 자리에서 물러나자, 후임 총대장이 되어 2차 진격을 계획하였으나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이듬해 [[일본군]] 헌병에게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 허준호(배우) . . . . 2회 일치
[[실미도(영화)|실미도]]를 촬영할 때 북파 공작원으로 캐스팅을 받았는데 '''명령에 충실했을 뿐인 북파 공작원 교관들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이유로 공작원이 아닌 교관역을 자청하여 매섭고 냉정하지만 사실 속정은 깊은 조돈일 중사 역할을 맡았다. 그리고 초반에는 정말 악질 교관의 모습을 보이며 구타를 일삼았지만 후반에 북파 공작원들이 버스를 탈취했을 때 이를 진압하는 진압군 앞에서 공작원들을 변호하며 어떻게든 자신이 훈련시킨 공작원들을 살려보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폭한 공작원들의 이름을 쉰 목소리로 외치며 오열하는 호연으로 관객들을 눈물짓게 만들었다. ~~특히 사탕봉지를 떨어뜨리는 장면의 애잔함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쟤들 무장공비 아닙니다!~~
* 2005년 《강력3반》... 문봉수 역
- 현아 . . . . 2회 일치
탈퇴한 후 2008년 5월 [[현아]]는 비보이 페스티벌인 싸이언 비보이 챔피언십 2008 광고 홍보 모델로 등장해 컴백설이 떠돌기도 했지만, [[JYP]] 측은 사실 무근이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제목=JYP, 김[[현아]] [[원더걸스]] 복귀와 타이틀곡 '봉봉' 사실무근|url=http://cnbnews.com/category/read.html?bcode=39378|출판사=씨앤비뉴스|저자=김성호 기자|날짜=2008-05-21|확인날짜=2010-11-25}}</ref> 2008년 3월, 현아는 [[한국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같은 해 12월 [[큐브 엔터테인먼트]]로 소속사를 옮겨 컴백 준비와 함께 병원 치료를 진행하고 있다고 발표했다.<ref>{{뉴스 인용|저자=길혜성 기자|제목=김현아솔로데뷔, "병원치료하며 컴백위해 맹연습중" |url=http://www.artsnews.co.kr/news/9632|출판사=아츠뉴스|날짜=2008-12-02|확인날짜=2010-11-25}}</ref> 2009년 2월에는 의류브랜드 [[TBJ]] 화보를 통해 원더걸스 활동 이후 처음으로 연예계에 모습을 드러냈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前멤버 김현아, 화보 통해 '깜짝 컴백'|url=http://autotimes.hankyung.com/article_view.php?id=42452|출판사=오토 타임즈|저자=연예취재팀|날짜=2009-02-13|확인날짜=2010-11-25}}</ref> 2009년 3월 30일에는 [[이기광|AJ]]의 데뷔 앨범 《[[FIRST EPISODE A NEW HERO]]》의 선공개곡 〈2009〉에 피처링으로 참여했고, 타이틀곡 〈댄싱슈즈〉 뮤직비디오에도 출연했다.<ref>{{뉴스 인용|제목=원걸 前 멤버 현아, AJ 신곡에서 ‘원더걸스’ 외친 이유 뭘까?|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3310906191002|출판사=뉴스엔|저자=김형우|날짜=2009-03-31|확인날짜=2014-06-29}}</ref><ref>{{뉴스 인용|저자=이수인 기자|제목=원더걸스 전 멤버 '김현아', AJ 뮤직비디오 출연으로 활동재개|url=http://mhj21.com/sub_read.html?uid=11141§ion=section3|출판사=문화저널21|날짜=2009-03-25|확인날짜=2010-11-25}}</ref> 한편, 2008년 12월부터 걸 그룹으로 컴백한다고 밝혔으나, 멤버 수와 그룹명 등 정확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전 멤버 현아 화려한 컴백 … 2009년 새롭게 변신|url=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121867597|출판사=한국경제|날짜=2008-12-19|확인날짜=2014-06-29}}</ref> 나중에 정확한 정보가 알려질때까지 현아 그룹이라고 불렸다.<ref>{{뉴스 인용|제목=퍼신인 여자 빅뱅-현아 그룹 맞대결 기대만발|url=http://www.newshankuk.com/news/content.asp?news_idx=2009032518550855843|출판사=뉴스 한국|날짜=2009-03-25|확인날짜=2014-06-29}}</ref> 이후 2009년 5월 14일 5인조 걸 그룹 [[포미닛]]으로 컴백한다고 발표했다.<ref>{{뉴스 인용|제목=‘원더걸스’ 前 멤버 김현아, ‘포미닛’으로 컴백 초읽기|url=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ent&arcid=0921288145&cp=nv|출판사=쿠키뉴스|날짜=2009-05-14|확인날짜=2010-11-25}}</ref> 2009년 6월 15일 포미닛의 데뷔 싱글 〈[[Hot Issue]]〉가 발매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그룹 ‘포미닛’, 15일 데뷔곡 ‘핫이슈’ 선공개|저자=온라인 뉴스팀|url=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03665§ion=sc4|출판사=브레이크 뉴스|날짜=2009-06-09|확인날짜=2010-11-25}}</ref> 포미닛은 2009년 6월 《[[엠 카운트다운]]》을 통해 데뷔 무대를 치뤄 큰 호응을 얻었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18일 성공적 데뷔 무대...김현아 공연 후 눈물|저자=박미애 기자|url=http://spn.edaily.co.kr/entertain/newsRead.asp?sub_cd=EA24&newsid=01508806589723032&DirCode=0010204|출판사=이데일리 SPN|날짜=2009-06-18|확인날짜=2010-11-25}}</ref> 포미닛은 날마다 말그대로 핫이슈였는데, 〈Hot Issue〉는 공개당일 각종 실시간 음원차트 1위를 휩쓸었으며,<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핫이슈’ 데뷔 당일 음원차트 1위 기염 ‘핫이슈됐다'|저자=김형우 기자|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6160952181002|출판사=뉴스엔|날짜=2009-06-16|확인날짜=2010-11-25}}</ref> 데뷔 일주일만에 광고 2건을 체결하는 파워를 보였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데뷔 1주 만에 의류-통신 광고모델|저자=박재덕 기자|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424598|출판사=조이뉴스24|날짜=2009-06-25|확인날짜=2010-11-25}}</ref> 또한 현아의 무대 의상이였던 일명 '구멍난 스타킹'은 큰 화제가 되기도 했었고, 방송에서 원더걸스의 "Tell Me"를 재연해 주목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지금은 레깅스 전성시대"…타이즈가 창조한 섹시열풍|저자=송은주 기자|url=http://www.sportsseoul.com/news2/life/style/2009/0624/20090624101051100000000_7135486611.html|출판사=스포츠서울닷컴|날짜=2009-06-24|확인날짜=2010-11-25}}</ref><ref>{{뉴스 인용|제목=김현아, 2년만에 '텔미' 완벽 재연 '팬들 열광' |저자=박정민 기자|url=http://sstv.freechal.com/index.html?page=news/flypage&od=1&cid=1&nid=55619|출판사=SSTV|날짜=2009-07-03|확인날짜=2010-11-26}}</ref> 이후 포미닛의 첫 EP 앨범 《[[For Muzik]]》을 발매해 타이틀 곡 〈[[Muzik]]〉은 공개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뮤직뱅크' 시작으로 'Muzik' 활동 본격 시동 |저자=박미라 기자|url=http://web.reviewstar.net/news/articleView.html?idxno=194889|출판사=리뷰스타|날짜=2009-09-04|확인날짜=2010-11-26}}</ref> 그리고 곧 인기에 힘입어 여러 쟁쟁한 선배 가수들을 제치고 지상파 《[[인기가요]]》에서 첫 1위를 했다.<ref>{{뉴스 인용|제목=포미닛 '인기가요' 첫 뮤티즌 송 수상…끝내 눈물 |저자=박건욱 기자|url=http://www.asiae.co.kr/news/view.htm?idxno=2009092716115557586|출판사=아시아경제|날짜=2009-09-27|확인날짜=2010-11-26}}</ref>
- 현정건 . . . . 2회 일치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1922년]] 동생 현진건이 [[홍사용]] · [[박종화]] 등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한 문예지 《[[백조 (잡지)|백조]]》 창간호에 [[이광수]]의 악부(樂府)가 실려 있는 것을 보고, 현진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한국의 꽃봉오리 같은 젊은 청년들이 발표하는 깨끗한 《백조》지에, '귀순장'을 쓰고 항복해 들어간 이광수가 동인이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빨리 동인에서 제거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백조》 동인에서 이광수는 빠지게 되었다.
- 홍영현 . . . . 2회 일치
|연봉 = 3,100만원 (2017년)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실점 !!자책점
- 환희(플라이 투 더 스카이) . . . . 2회 일치
||<rowbgcolor=#90EE90> [[김명훈]] || → || '''환희''' || → || [[봉구(가수)|봉구]] ||
- 황덕균 . . . . 2회 일치
|연봉 =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황두성 . . . . 2회 일치
|연봉 = 1억 5,000만 원(2010년)
!년도 !!팀 !!평균자책 !!경기수 !!승리 !!패전 !!세이브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탈삼진 !!실점 !!자책점 !!비고
- 황수범 . . . . 2회 일치
|연봉 =
!연도 !!팀명 !!평균자책점 !!경기 !!완투 !!완봉 !!승 !!패 !!세 !!홀 !!승률 !!타자 !!이닝 !!피안타 !!피홈런 !!볼넷 !!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황재규 . . . . 2회 일치
|연봉 =
!년도 !!팀 !!평균자책 !!경기수 !!승 !!패 !!세 !!홀드 !!완투 !!완봉 !!이닝 !!피안타 !!피홈런 !!4사구 !!탈삼진 !!실점 !!자책점
- 황효진(기업인) . . . . 2회 일치
[[박지호]]는 소닉이 오프라인 스타리그를 주최할 때 지방에서 올라오는 선수들 출연료는 커녕 기본적인 차비조차 주지 않자 개인방송에서 대놓고 소닉을 디스한 적이 있는데 이후에 소닉한테 그런 말은 방송에서 하지 말아 달라고 전화가 왔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후 소닉이 다른 선수들이나 방송 스태프들이 있는 그 중간에 대놓고 자신에게 차비 금액을 세며(...) 주는 걸 보고 경악했다고 한다. 차비를 계좌로 입금해도 되고 나중에 따로 봉투에 넣어서 주면 되는데 자신을 나쁜 놈으로 몰아가려는 듯한 너무 대놓고 보여주기식 생색이라...
[[2017년]]에 일어난 스베누 사건은 유명해서 작년에는 한때 인터넷에서 [[태조왕건]]의 [[궁예]]가 추궁하는 패러디 영상이 돌기도 했다. 확실한건 그에게는 정말로 궁예의 법봉이 필요하다는것이다.
- COCOM . . . . 1회 일치
1948년 [[미국]]은 공산권 봉쇄를 위하여 금수품 목록을 발표하는 등 수출 통제 정책을 시작했으며, 이를 북대서양 조약기구 전체로 확대하려 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들과 논의를 거쳐서 1949년 11월에 출범하게 된다. 1957년에는 대 중국 수출 위원회를 흡수했다.
- Crusader Kings 2/DLC . . . . 1회 일치
* 성지순례도 할 수 있고 사원의 봉신들과 친목친목을 할 수 있는 신학(Theology)
- Crusader Kings 2/궁정 . . . . 1회 일치
궁정은 플레이어의 수족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들은 플레이어의 봉신과 가신들 중에서 임명할 수 있다.
- Crusader Kings 2/종교 . . . . 1회 일치
* 세금이 증가해도 봉신들이 신경쓰지 않음
- DQN . . . . 1회 일치
* [[수호전]] 같은 시대에는 흔히 '호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다. 봉건사회에서 호걸은 나름대로 쓸모가 있었으나 현대에는 사회의 짐 밖에 되지 않아서 DQN으로 타락했다.
- K리그 관중 실 집계 정책 . . . . 1회 일치
실 관중 집계가 구단의 [http://news.tf.co.kr/read/soccer/1467594.htm|투자를 저하시켰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실 관중 공개와는 사실 별 관계가 없는게, 실 관중 수 집계와는 달리 구단은 명백하게 각 경기마다 들어오는 관중 수입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입장이라서 설득력이 없다. 되려 각 선수들의 연봉공개가 이적시장을 달궜으면 더 설득력이 있을 정도.
- SORN . . . . 1회 일치
마엘스트롬을 지키는 대마법사 게이트키퍼의 제자로서, 게이트 키퍼를 봉인해버려서 세계를 멸망의 위험에 빠뜨린 대마녀. 마법의 방패 주문을 가지고 있어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대미지를 줄 수 없으며, 오직 게이트키퍼만이 이 마법의 방패를 돌파할 주문을 알고 있는데 정작 게이트키퍼를 만나려면 SORN을 돌파해야 한다는 복잡한 난관을 보유하고 있다. 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는 것 같다.
- That 70's show . . . . 1회 일치
시즌 1 에피소드 1은 1976년 5월 17일로 되어 있다. 1시즌에서 [[제럴드 포드]]가 재선을 위해서 공화당원들을 모아서 선거 운동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로 보아서 1시즌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76년으로 보인다. 1시즌 후반부에는 [[스타워즈]](1977년작)가 개봉되어 보러 가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최종회는 1970년대의 마지막 밤을 지나서, 1980년대가 밝아오면서 끝난다.
- Victoria II/기술 및 발명 목록/육군 . . . . 1회 일치
* '''Human Wave vs Spearhead(인해전술 vs 선봉돌격)'''
- Victoria II/디시전 . . . . 1회 일치
>오랜 기간 극동 및 인도와의 무역을 할 때는 아프리카의 희망봉을 돌아서가야 했다. 근대 공학의 경이로운 힘으로 수에즈를 관통하는 운하를 건설하면 우리는 아시아로 항해하는 기간을 줄일 수 있다.
- 강기웅 . . . . 1회 일치
|연봉 =
- 강동진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강정길 . . . . 1회 일치
|연봉 =
- 강지섭 . . . . 1회 일치
| 출생지 = [[대한민국]] [[경기도]] [[부천시]] 오정동 (부천시) (봉오대로)
- 강타 . . . . 1회 일치
* 2014년 '[[KBS2]]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 작곡가 故 [[이봉조]] 특집 177회 우승 (그룹 S)
- 강흠덕 . . . . 1회 일치
|연봉 =
- 건즈 고어 앤 카놀리 . . . . 1회 일치
카놀리는 보니노 마피아들이 경영하던 스트립클럽으로 가 그곳에 있던 모두를 족치고 프랭키를 구한다. 이제 둘은 떠그타운에서 탈출할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한다. 프랭키는 강 건너편 벨루치오 마피아 빌딩에 비행선이 있으니 그걸 타고 떠그타운에서 탈출하자는 의견을 낸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조종사로 복무했다는 이야기는 덤. 하지만 비행선에 가려면 군대의 봉쇄를 뚫어야 했다. 카놀리는 프랭키와 함께 군대의 방어선을 돌파해 군대가 폭파시키려던 도개교에 도착한다.
- 경상북도 . . . . 1회 일치
[[봉화군]]''' || 奉化郡 || 1,201 || 34,183 || 15,874
- 경주시 . . . . 1회 일치
|align="center"|[[손일봉]]
- 고도현 . . . . 1회 일치
|연봉 =
- 고산케 . . . . 1회 일치
고산케의 조상은 모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이며, [[쇼군]]의 지위를 계승한 본가와는 별도로 세개의 번에 따로따로 봉해져서 각자 [[다이묘]](대영주)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고산케는 도쿠가와 본가의 혈통이 단절되면 본가에 양자로 들어가서 혈통을 지속시키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실제로 8대에서 14대 까지는 키슈 도쿠가와 가문에서 배출되었다.
- 고소영 . . . . 1회 일치
1993년 [[엄마의 바다]]에서 톡톡튀는 매력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1997년 '''영화 [[비트(한국 영화)|비트]]에서 여자주인공 '로미'역을 맡아 당대 남성들의 이상형이 되었으며''' 이 영화는 개봉 후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후인 현재까지도 고소영의 거의 유일한 대표작이다. 이런 과정 등을 거쳐 199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군림했으나 2000년대 들어 광고 모델로만 활약하고 그 외의 연기활동이 거의 없어 지명도가 떨어지던 중 2010년 5월 2일 [[장동건]]과 결혼, 인생의 승리자가 되었다.[* 장동건-고소영 결혼설이 뜨자 장동건은 알고 고소영은 몰랐던 장동건의 10대 팬들에게 [[듣보잡]] 취급 당하기도 했는데 이에 앞서 [[임창정]]과의 열애설이 있었으며 결국 1998년 MBC [[추억]]을 끝으로 드라마 출연이 한동안 뜸했었다.][* 오히려 중년층 이상에서 장동건에게 잘 어울리는 상대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90년대에는 정말로 지금의 장동건에 전혀 꿀리지 않는, 인기의 정점에 있었기 때문. 어쩐지 결혼 후에 남편과 인기, 인지도가 역전 되어버린 [[쿠도 시즈카]]나 [[빅토리아 베컴]]이 연상되는 면도 있다.] 이 때문에 여자 [[연정훈]]이 되는가 싶었지만 고소영 역시 내로라하는 최고의 미녀스타였기 때문에 여자들의 주적 취급은 받지 않았다.
- 고원희 . . . . 1회 일치
* 2015년 [[KBS2]] TV소설 《[[별이 되어 빛나리]]》 ... 조봉희 역
- 고인범 . . . . 1회 일치
* 2013년 SBS 월화드라마 [[야왕(드라마)|야왕]] - 차심봉
- 공명(배우) . . . . 1회 일치
||<rowbgcolor=#f9ffff><table bordercolor=#6482b9> {{{#6482b9 '''개봉 연도'''}}} || {{{#6482b9 '''제목'''}}} || {{{#6482b9 '''활동'''}}} || {{{#6482b9 '''배역'''}}} ||
- 공후백자남 . . . . 1회 일치
본래 '공(公)'은 일종의 특례로서, 비상하게 공적이 큰 제후에게 하사되는 지위였으며, 당초에는 [[주공단]]의 후손이 봉해진 [[노나라]]에 주어진 작위로 오직 노나라만이 '공국'이었다.
- 구명환 . . . . 1회 일치
|연봉 = 2,000만 원
- 구본욱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3년)
- 구천서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1억 1,600만 원 (2016년)
- 권민중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87CEFA><rowbgcolor=#87CEFA>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권영진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권오현(배우) . . . . 1회 일치
* 《[[사랑아 사랑아]]》 (KBS2, 2012년) - 김춘봉 역
- 권재진 . . . . 1회 일치
아들이 서울대 공익요원으로 배정을 받기위해 어머니와 봉천동으로 위장전입까지 한 상황에서 돌연 친구가 운영하는 포천의 회사로 근무지를 옮긴 것에 대해서도 의혹이 일었다. <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view.html?cateid=1018&newsid=20110808163942816&p=nocut&RIGHT_COMM=R11 권재진, 아들 감싸려 제출한 계좌가 되레 '화근']《노컷뉴스》2011년 8월 8일</ref>
- 권희동 . . . . 1회 일치
|| '''연봉''' || 1억 4000만원 (4.9%↑, 2019년) ||
- 그랜드 테프트 오토: 산 안드레아스/무기 . . . . 1회 일치
* 진압봉
- 긴나라 . . . . 1회 일치
[[자타카]]에서 나오는 인간과 긴나라 공주의 사랑 이야기. 하스티나푸라 왕국의 왕자 수다나(Sudhana)와 카일라사 산봉우리에 사는 긴나라의 공주 마노하라(Manoharā)의 이야기이다. 긴나라왕의 일곱 딸 가운데 가장 어리고 아름다운 마노하라가 언니들과 함께 숲 속 호수에 목욕을 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 왔을 때, 하스티나푸라의 이웃나라에서는 희생제사를 지내려고 사냥꾼을 시켜서 히말라야의 동물들을 잡으려고 했다. 그런데 긴나라와 긴나리를 잡지 못하자, 마술을 쓸 수 있는 한 사냥꾼이 히말라야에 들어가서 목욕을 하던 마노하라를 포획한다.
- 김가은(1989년 5월)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c0c0c0><#c0c0c0> {{{#black '''개봉 연도'''}}} ||<#c0c0c0> {{{#black '''제목'''}}} ||<#c0c0c0> {{{#black '''배역'''}}} ||
- 김건우 (1990년)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3년)
- 김근석 . . . . 1회 일치
|연봉 =
- 김기수(코미디언) . . . . 1회 일치
2001년 [[개그 콘서트]]를 통해 코미디언으로 데뷔했다. 개그맨이 되려고 무려 5수를 했고 실제로 이 사연으로 [[진실게임]]에 출연한 적이 있다. [[봉숭아 학당]]에서 '댄서 킴'이라는 캐릭터를 맡으면서 오랜 무명생활 끝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쭉쭉, 쭉쭉!~~
- 김다솜(배우)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22741C><rowbgcolor=#22741C>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비고'''}}} ||
- 김대진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1억원 (2010년)
- 김동재 . . . . 1회 일치
|연봉 =
- 김민수 (1991년) . . . . 1회 일치
|연봉 = 3,300만원 (2018년)
- 김병기(배우) . . . . 1회 일치
* [[2009년]] [[KBS2]] 미니시리즈 《[[결혼 못하는 남자 (KBS)|결혼 못하는 남자]]》 ... 장봉수 역
- 김보름 . . . . 1회 일치
2015년 12월 22일 서울 태릉국제스케이팅장에서 열린 제70회 전국남녀 종합선수권대회 3000m에서 4분17초39의 기록으로 정상에 올랐던 김보름은 23일 첫 종목으로 나선 1500m에서 2분3초27을 기록하며 노선영(강원도청, 2분5초17)과 박지우(의정부여고, 2분5초83)에 앞서 1위에 올랐다. 또 5000m 종목에서도 김보름은 7분41초07을 기록하며 박지우(7분47초77), 장수지(유봉여고, 8분9초47)를 크게 앞질렀다. 22일 열렸던 500m 종목에서 41초39로 3위에 올랐던 김보름은 종합점수 171.485점을 받으며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7656|제목='매스 스타트 희망' 김보름, 전국선수권 여자부 종합 우승|날짜=2015-12-23|언어=ko|확인날짜=2017-03-25}}</ref>
- 김봉근(배우) . . . . 1회 일치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김봉근, version=29)]
- 김상훈 (1990년)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8년)
- 김새해 . . . . 1회 일치
* [[짱구는 못말려]] - 봉미자, 공회전
- 김석훈(탤런트) . . . . 1회 일치
||<#c0c0c0> '''개봉 연도''' ||<#c0c0c0> '''제목''' ||<#c0c0c0> '''배역''' ||
- 김선영(1976) . . . . 1회 일치
* [[드라마 페스티벌]] - 가봉 (2014, MBC) - 영애
- 김성윤 (1991년)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8년)
- 김성훈(배우) . . . . 1회 일치
* 《[[시카고 타자기 (드라마)|시카고 타자기]]》 (2017년, tvN) - 이정봉 역
- 김소혜(1992) . . . . 1회 일치
김소혜는 수연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감정연기를 풍부하게 표현하였다. 은빈과의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은빈을 지긋이 바라보는 부분, 은빈이 아파서 보건실에서 쉬고 있을 때 같이 있으면서 머리를 쓰담쓰담하는 부분에서 설렘의 감정을 표현하였다. 아웃팅으로 수연과 은빈은 이별의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은빈은 남들의 시선이 걱정이 되어 이별을 고하고, 수연은 우리 두 사람만 있으면 남들의 시선이 두렵지 않다며 싸우게 된다. 수연은 은빈이 떠나갈까 두려운 마음에 눈물이 담긴 키스를 함으로써 수연의 슬픈 감정을 표현하였다. 은빈만큼만 지켜주기 위해 수연은 학교를 떠나게 되는데, 슬프지만 애써 담담한 감정을 담아내었다.
- 김숭실 . . . . 1회 일치
[[1981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난 김숭실은 일곱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할머니 밑에서 컸다. 대구봉덕초등학교 3학년 때 우연히 탁구부에 들어가 탁구를 시작했다. [[2000년]] 실업 무대에 데뷔한 이래 6년만인 [[2002년]] 12월 [[SBS 챔피언전]] 여자 단식에서 생애 처음으로 전국 규모 대회에서 우승했다.<ref>[http://www.hani.co.kr/arti/sports/sports_general/182724.html 김창금, <만나봅시다 여자 탁구 샛별 김숭실>, 《[[한겨레신문]]》2007.1.8]</ref>
- 김영환(1955) . . . . 1회 일치
현재 이것이 네거티브 선거전이냐 사회고발이냐에 대해 아직까지 판단이 보류되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증거 제시도 없이 흐지부지 되면 빼도박도 못하는 네거티브 선거이지만 확실한 증거들이 공개되고 당사자들의 증언이 사실로 판명날 경우 논란이 많다 하더라도 이것이 사회 고발이 될 수 있기 때문. 김영환 본인도 주진우, 김어준, 정봉주가 증언하면 된다고 하며 관련자들의 진술이 필요하다고 언급하면서 정작 의혹을 제기한 김영환 본인에게는 원래부터 관련 증거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그나마 사진을 제시하긴 했는데 이 사진은 증거로 볼 수도 없는 [[http://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38161|사진]]이였기 때문에 사진을 거론하며 이재명을 비난하는 사람은 소수이다. 보통 정치인들은 상대 후보에 대해 후폭풍이 엄청난 스캔들을 무기로 선거에서 공세를 할 때 당연히 관련 증거들과 당사자의 증언을 미리 확보하고 이것이 확실한지 확인을 하고 나서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례적이고 독특한 케이스이다.
- 김유미(1979) . . . . 1회 일치
||<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 김일엽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9,300 만 원 (2014년)
- 김정수 (1991년)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 김정혁 . . . . 1회 일치
6월 14일 대구 SK전에서 솔로 홈런을 쳤다. 시즌 2호 홈런. 그러나 팀 타선이 '''살인적인 식물 타선'''을 보여 준 끝에 4:1로 패했다. 그나마 김정혁이 홈런을 쳐서 영봉패를 면한 것.
- 김제남 . . . . 1회 일치
[[김희정 (1992년)|김희정 (1602년)]]왕후의 아버지, 선조의 장인,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딸을 선조에게 보내고 영창대군이 태어난 다음 연흥 부원군(延興府院君)에 봉해졌다.
- 김종덕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8년)
- 김종훈 (1952년) . . . . 1회 일치
새누리당은 28일 논평을 통해 "4.11 총선거를 앞두고 홍사덕, 김종훈 후보 등 새누리당 후보들의 트위터 계정에 대한 공격이 잇따르고 있다"며 트위터 계정폭파를 신종 사이버 공격으로 규정하고, "검찰은 트위터 계정폭파 범죄에 대해 즉각 수사에 나서 선거를 방해하려는 집단의 배후를 밝혀내라"고 촉구했다.<ref>[http://news1.kr/articles/608133 새누리 "김종훈 트위터 폭파는 조직적 테러"] 《뉴스1》 2012년 3월 28일 차윤주 기자</ref> 그러나 "트위터 계정폭파란 존재하지 않으며,<ref>[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745518&ctg=1200 트위터 본사 "계정폭파?...이용규정 위반으로 정지는 된다"] 《중앙일보》 2012년 3월 30일</ref> 오히려 사용자가 반복된 글을 일방적으로 보내는 등 이용규정 위반할 경우 정지된다"는 트위터 본사 측 반박<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330800080 트위터 측 “새누리당, 반복 글 보내 정지된 것” 반박] 《서울신문》 2012년 3월 30일</ref> 으로 새누리당 측의 이러한 주장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밝혀졌다.<ref>[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10120329031607 김종훈 '트위터 계정폭파'? "새누리당, 새 됐네"] 《프레시안》 2012년 3월 29일 이명선 기자</ref><ref>[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84981 보수지 신봉하던 새누리, '국제적 대망신' 자초] 《뷰스앤뉴스》 2012년 3월 29일</ref><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525874.html 김종훈 트위터 계정폭파 당했다더니…“국제적 망신살”] 《한겨레》 2012년 3월 29일</ref>
- 김준현(코미디언) . . . . 1회 일치
* [[복면가왕]] 80차 경연에서 [[오빠 몸이 완전 돌덩이야 모아이]]로 나와 2라운드에 오르면서 선전했으며 제작진의 배려로 3라운드 준비곡인 장미여관의 '봉숙이'를 부르면서 정체를 밝혔다.
- 김준희 (1960년) . . . . 1회 일치
|연봉 =
- 김지수(배우) . . . . 1회 일치
||<tablebordercolor=#363232><rowbgcolor=#363232>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비고'''}}} ||
- 김지훈 (영화감독) . . . . 1회 일치
1998년 단편영화 《온실》로 제2회 [[세계 필름 페스티벌]]에 초청되었으며, 제46회 [[독립영화제]]에서 우수작품상을 수상했다. 이후 《[[목포는 항구다]]》, 《[[화려한 휴가]]》를 제작하였다. [[5.18]]을 다룬 《[[화려한 휴가]]》는 [[전라도]] 사투리 연구에 많은 공을 들였고 상업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2&aid=0000227432 김지훈 감독 "대구출신이라 3년 간 전라도 사투리 연구"] 세계일보. 2007년 05월 17일</ref> [[2011년]] [[8월]] 개봉한 한국 최초 3D 블록버스터인 《[[7광구]]》를 제작하였다. <ref>{{뉴스 인용|제목 = 김지훈: 영화정보-씨네21|url =http://www.cine21.com/Movies/Mov_Person/person_info.php?id=6724|출판사 = 씨네21|확인날짜=2011-05-19}}</ref>
- 김지훈(배우)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rowbgcolor=#c0c0c0>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 김천시 . . . . 1회 일치
봉산면 (김천시)''' || 鳳山面 || 1,603 || 3,500 || 56.45
- 김충섭 . . . . 1회 일치
1954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김천봉곡초등학교, 김천중학교, [[김천고등학교]], [[영진전문대학]] 행정과를 졸업[* 여기에는 사연이 있는데 김 시장은 고등학교 재학시절 큰 병이 걸려 3번이나 큰 수술을 하였고 이로인해 1년 늦게 졸업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천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으나 집안이 가난하여 대학을 다닐 형편이 되지 않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일찍이 공직에 진출하였다. 대학은 이후 공직에 있으며 [[영진전문대학]]을 졸업하였다.]하였으며. [[청도군]] 부군수, [[김천시]] 부시장, [[구미시]]의 부시장, 경북도청 문화관광체육국장과 경북청소년수련원 원장직을 역임했었다.
- 김태우(god) . . . . 1회 일치
한편, 이때의 인연 때문인지 [[진짜 사나이(일밤)|진짜 사나이]]가 [[제27보병사단|이기자부대]] [[대한민국 육군/수색대|수색대]]에서 촬영할 당시 예비 군복을 입고 위문공연을 왔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씨스타]]'''에게 장병들의 관심이 완전히 넘어가면서 공연은 대실패(?). 김태우 본인도 "군대에 남자 가수 따위가 누가 온다고 한들 좋아하겠어요?"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인정했다. 그리고 진짜 사나이 맴버들을 비롯한 후배 수색대원들에게[* 사실상 진사 전용 생활관 멤버들.] [[PX]]에서 한턱 쐈는데 마음껏 사랬더니 말 그대로 미친 듯이 닥닥 긁어서 무려 19만원(!!!!)이 나오는 참사(?)가 발생 했다. 이걸 일반적인 편의점의 판매 가격으로 변환하면 대략 30만원 정도 나온 셈이다.[* PX는 [[부가가치세]], 주류세 등의 세금이 안 붙어서 저렴하다. 무엇을 사먹느냐에 다르지만 보통 둘이서 만원만 써도 배가 터지게 먹고도 남는다. 아니, 3봉지에 5000원하는 고향만두를 사면 3명이 먹어도 배부르다. 거기다가 이천원짜리 음료수로 나눠먹으면 7000원으로 3명이 만두와 음료수를 배불리 먹는 [[예수]]에 버금가는 [[기적]]을 보여준다. 그런 PX에서 19만원이면...] 자막으로 "PX를 샀냐..."라고 나올 정도다. PX 근무병 왈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당시 이병이던 김형근 군에게 군대에 대한 조언도 해준다.
- 김태훈 (1987년) . . . . 1회 일치
|연봉 =
- 김현민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2년)
- 김현정 (1979년) . . . . 1회 일치
2009년 위안부 문제를 다룬 연극 '나비'를 마지막으로 배우로서 활동을 마치고 '가톨릭상담봉사자과정'에서 1년 넘게 심리상담 교육을 받은 후 화가가 되었다. 이를 통해 2014년 6월에는 첫 개인전인 <묘사와 연기>가 열렸으며<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6965311 화폭으로 옮긴 심리 치유…배우겸 화가 김현정 개인전], 연합뉴스, 2014년 6월 17일 작성.</ref>, 2014년 11월 9일 부터 11월 19일까지 [[백남준]], [[이왈종]]과 함께 중국 베이징에서 <하나에서 셋으로:한국 예술가 3인전>에 작품전을 열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18578 ‘동양화로 그린 장서희는?’ 화가 김현정, 中진르미술관 초청], 뉴데일리, 2014년 10월 7일 작성.</ref>
- 김홍미 . . . . 1회 일치
묘비명은 장유(張維)가 썼다. 상주 봉산서원(鳳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김희애 . . . . 1회 일치
* [[쎄시봉]](2015)/민자영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42화 . . . . 1회 일치
* 선이터 [[아마지키 타마키]]는 "혼자서 셋을 완봉하겠다"는 맹세를 달성한다. 철포옥 핫사이슈 세츠노, 호죠, 타베를 포박, 문어의 신경독으로 잠재우고 마스크를 뺏는다. 그는 곧 먼저 간 일행을 따라가려고 했으나 몇 걸음 가지 못하고 힘이 다해 넘어진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87화 . . . . 1회 일치
* [[에데버]]는 밖에서 [[츠카우치 나오마사|츠카우치]] 등의 경찰과 함께 일대를 봉쇄 중
- 날갯죽지 조르기 . . . . 1회 일치
체포술의 하나이며, 상대를 체포하거나 싸움을 말리는데 사용한다. 반대로 범죄자가 피해자의 움직임을 봉쇄하는데 사용하기도 한다.
- 네드 켈리 . . . . 1회 일치
2003년 개봉된 영화 "네드 켈리"(Ned Kelly)는 네드 켈리를 주인공으로 삼고있다. 네드 켈리 역은 [[히스 레저]]. 그전에 나왔던 1970년작도 있다. 1906년에 나온 켈리 갱 이야기"(The Story of the Kelly Gang)이라는 영화도 있다!
- 노형욱(배우) . . . . 1회 일치
| 기주봉 어린시절
- 농가 . . . . 1회 일치
[[시골]]에 있는 오래된 농가(農家)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전시대적・봉건적・인권을 무시하는 사고 양식・행동 양식을 당연하다는 듯이 타인에게도 강제하는 인간, 또는 그 가정이나, 마을 등의 공동체. 농업 종사자로서의 「농가(農家)」, 또는 현대적으로 상식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는 「농가(農家)」와는 구별하기 위해서 태어난 말이다. 고름 농(膿)을 사용한다.
- 닌자 거북이 . . . . 1회 일치
팀의 두뇌. 기계 장비 등 머리 쓸 일을 맡는다. 보라색 안대 착용. 보라색 안대 착용. 봉을 쓴다.
- 닥터 시바나 . . . . 1회 일치
블랙 아담이 사라진 후에는 아담이 락 오브 이터니티의 문을 연 곳으로 향하는데 안에 들어가려 해도 보이지 않는 장멱 탓에 그러지를 못했다. 과학은 자기 가족을 구하는데 실패했으니 이젠 마법이라며 들여보내달라 하고, 그런 그에게 방 안에 봉인되어있던 미스터 마인드가 말을 걸어온다.
- 단기선교 . . . . 1회 일치
단기선교는 현실적으로 현지인에 대한 봉사 보다는 참가자를 위한 체험 활동을 중시하기 때문에, 이러한 단기선교는 현지에 대한 구체적인 배려 없이 마치 관광여행처럼 프로그램 되어 있어 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참가자들의 자질이나 현지 활동은 현실적으로 관광객과 크게 다를 바가 없지만, '관광'이 아닌 '선교'를 목적으로 하며, 관광사업에는 아마추어인 교회 조직이 선교를 추진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가 두드러지게 되었다.
- 도지한 . . . . 1회 일치
|2009||KBS2||[[공주가 돌아왔다]]||어린 나봉희||
- 동왕부 . . . . 1회 일치
[[서왕모]]와 대응하는 신으로서, 서쪽의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에 대응하여 동쪽의 봉래산에 사는 남신이다. 남자 신선들의 우두머리로서, 서왕모와 부부로 여겨진다. 동방의 수호신이다.
- 라늬 . . . . 1회 일치
2022년 우개고 영화개봉예정작 출연 라늬역
- 레오(워저드) . . . . 1회 일치
크로노스 러시와 아킬레스 러시가 좀 이상하게 바뀌었다. 일단 공통된 커맨드로 몸통박치기를 발동한 뒤 이후 추가 입력에 따라 크로노스나 아킬레스로 갈리는 방식. 추가 입력을 넣지 않으면 맞추고도 상대보다 늦게 경직이 풀리는데다가, 둘 다 몸통박치기에서 연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한 술 더 떠 사이에 살짝 딜레이가 있기 때문에 상대가 몸통박치기를 맞은 직후 승룡권처럼 발동이 빠른 기술을 썼다면 아무짓도 안 했건, 크로노스를 썼건, 아킬레스를 썼건 무조건 처맞는다. 두말할 나위 없는 No.1 봉인기.
- 로어셰크 . . . . 1회 일치
미쳐 날뛰던 [[코미디언(왓치맨)|코미디언]]에 대해 우호적으로 보고 있던 인물. 저스페직이 코미디언이 자신의 어머니를 [[강간]]하려 한 일을 언급하자 이를 "근거 없는 주장", "자신의 나라에 봉사하며 살다간 자의 '일시적 타락'" 등등으로 부르며 쉴드쳤다. 왓치맨의 도입부도 로어셰크가 코미디언을 죽인 범인을 찾기위해 뉴욕 이곳저곳을 뛰어다니는 걸로 시작한다.
- 류영수 . . . . 1회 일치
|연봉 = 6,000만 원 (2014년)
- 류한수 . . . . 1회 일치
| 코치 = [[안한봉]], 박지호
- 류현경 . . . . 1회 일치
* 《[[첫사랑 열전]]》(2010) - 유봉주 역
- 마기/299화 . . . . 1회 일치
* 네르바가 봉기한 것도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 마기/300화 . . . . 1회 일치
* 알리바바도 격한 감동을 느끼며 상봉을 만끽하려는 찰나... 오르바는 이미 토토와 결혼해서 아들까지 둘이나 낳았다.
- 마기/320화 . . . . 1회 일치
* 쟈파르는 미래에도 자신들처럼 봉기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전쟁이 일어날테지만, 그건 신드바드의 분신도 자식도 아니다.
- 마기/325화 . . . . 1회 일치
* 우고와 아르바가 있는 성궁은 이변이 일어난다. 우고가 해파리처럼 만들어 수조에 봉해버린 다윗과 일 일라가 묘한 힘을 부리더니 루프로 환원됐던 어떤 이를 되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우고 조차도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데.
- 막부 . . . . 1회 일치
[[에도 막부]]는 1800년대 후기에 미국을 위시한 서양의 포함 외교에 굴복하게 된다. 이 때문에 반 막부 감정을 가졌던 번벌들의 반발에 직면한다. 결국 내전 끝에 '대정봉환'이라 하여 막부의 권한을 조정에 반납하면서 에도 막부는 사라지게 된다.
- 맥스 페인 2: 맥스페인의 몰락/줄거리 . . . . 1회 일치
[[알프레드 우든]]은 휠체어를 움직여 [[블라디미르 렘]]에게 다가간다. 죽이는게 도를 넘었다는 우든의 말에 블라드는 천국에서 봉사하는 것 보다 지옥을 다스리는게 낫다며 이는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우든은 휠체어에서 일어나 블라드의 목을 조르지만 블라드의 데저트이글에 죽는다.
- 먼슬리 맨션 . . . . 1회 일치
*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전자렌지, 청소기 등의 가전제품과 세제, 비누, 쓰레기 봉투 등의 생활 비품도 갖추어져 있는 물건이 많다.
- 모리오리 족 . . . . 1회 일치
1835년 12월, 수백년간 평화롭게 살던 모리오리 족은 갑자기 뉴질랜드에서 나타난 [[마오리 족]]의 공격을 받고 '''[[멸망]]했다'''. 11월 19일, [[총기]]와 [[곤봉]], [[도끼]]로 무장한 500명의 마오리 족이 채텀 제도에 나타났으며, 12월 5일에는 400명이 추가로 나타났다. 채텀 제도를 공격한 약 900명의 마오리 족은 수적으로는 당시 모리오리 족(2000명으로 추정)의 절반 정도에 불과했으나,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모리오리 족은 단합된 정치 조직이 없었으며, [[무기]]를 비롯한 전쟁 기술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마오리 족은 장기간의 전쟁으로 조직화된 전쟁 문화, 정밀하게 만들어진 원주민 무기를 가지고 있었고 심지어 서양인들과의 교류로 [[총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 무라하치부 . . . . 1회 일치
2004년 봄, 여름에 이 마을에서 있는 곤돌매기 잡기대회해 대해서 준비와 정리 때문에 오봉을 느긋하게 보낼 수 없다는 이유로 일부 주민이 불참하였다.
- 미나모토노 요시이에 . . . . 1회 일치
그런데 사실 이 사람이 일본 전국 무사들의 동경을 받아 명성을 얻게 된 이유는 '''봉급을 확실하게 쳐줬기 때문'''이다(…). 전투에 나섰지만, 조정에서 공적인 전쟁이 아닌 '사투'[* 사적인 싸움.]로 처리하여 무사들이 은상을 받지 못하게 된 적이 있었는데, 하치만 타로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서 종군한 무사들에게 개인적으로 은상을 지급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이 일화가 하치만 타로가 후세에도 명성을 얻게 된 원인이며, 겐지 씨족이 무사의 동량으로 여겨지게 된 기원이다.
- 미래소년 코난 . . . . 1회 일치
* 1979년에 애니를 편집한 극장판이 개봉했으나 미야자키 하야오가 참여하지 않았다. 게다가 달라진 엔딩, 달라진 의도 탓에 평은… 이후 1984년에 미야자키는 극장판 '거대 기간트의 부활'을 직접 내놓았다.
- 미이라(2017년 영화) . . . . 1회 일치
개봉일은 2017년 6월 9일이며 한국에서는 2017년 6월 6일.
- 미즈우치 타카시 살인사건 . . . . 1회 일치
범행 직후, 미즈우치 타카시는 아베노 경찰서로 돌아가서 오전 9시부터 오전 11시 까지 도장에서 검도 연습으로 땀을 흘리고, 흉기인 벨트를 도장 구석에 있던 쓰레기 봉투에 버리고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하러 나갔다. 이 벨트는 나중에 미즈우치가 체포되고 조사를 시작한 경찰이 쓰레기장에서 발견하였다.
- 바키도/129화 . . . . 1회 일치
* 모토베는 품에서 삼단봉을 꺼내는데 끝에 칼날을 달아 단창으로 개조한 것이다.
- 박경림(MC) . . . . 1회 일치
* 2010년대 중반들어 각종 영화 제작발표회, 쇼케이스, 시사회의 MC를 자주 맡고 있다. [[신세계(영화)]], [[명량]], [[내부자들(영화)]], [[사도(영화)]], [[검사외전]], [[곡성(영화)]], [[아가씨(영화)]], [[1987(영화)]] 등 근래 화제작들을 싹쓸이하고 있는 수준. --원래 행사진행MC라면 당연히 갖춰야만 하는 소양임에도 다들 잘안하는-- 영화에 대한 사전 정보도 많이 공부해오고[* 영화 곡성 제작발표회에선 대본에 써있지도 않았던 감독의 전작 황해의 개봉일을 정확히 언급하는 등. 사전 준비가 철저하다고 [[http://extmovie.maxmovie.com/xe/index.php?_filter=search&mid=movietalk&search_target=title_content&search_keyword=%EB%B0%95%EA%B2%BD%EB%A6%BC&document_srl=10927091|#]]] 연예계에 인맥들도 많고 진행실력도 무난한 덕분에 업계 관계자들이 꽤 선호하는 듯 하며 [[네이버]] [[V앱]] 무비토크 진행을 맡고 있다.
- 박근영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 박두을 . . . . 1회 일치
|봉급 =
- 박성환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 원(2018년)
- 박승욱 . . . . 1회 일치
|연봉 = 4,500만원 (2018년)
- 박승호(정치인) . . . . 1회 일치
용인대학교 졸업 후, 서울올림픽조직위원회 1기 공채로 입사하여 [[노태우]] 조직위원장의 비서관으로 활동하다가 1985년 [[민주정의당]] [[총재]]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노태우 정부 때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민정비서실 행정관으로 근무하다가 총무처(현 [[행정자치부]]) [[국가공무원]]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김영삼]] 정부 때 관선 [[봉화군]]수를 지냈다. 이후 내무부, 행정자치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5년 경상북도공무원교육원 [[원장]]을 지냈다.
- 박연우 . . . . 1회 일치
| 봉급 =
- 박재현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 박정수(배우) . . . . 1회 일치
* [[살맛납니다]] - 나옥봉
- 박정호 . . . . 1회 일치
|봉급 =
- 박종준 . . . . 1회 일치
1964년 [[충청남도]] [[공주시|공주군]] (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서 태어났다. 공주중동초등학교, 공주봉황중학교, [[공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경찰대학]] 행정학과, [[미국]] [[시라큐스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학사]]과정을 졸업하였다.
- 박진영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박진옥 . . . . 1회 일치
2013 시즌을 앞두고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계약이 만료되자 자유 계약(FA) 신분으로 팀 동료인 [[윤원일]], 오봉진과 함께 전격적으로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하며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111&aid=00003136080|대전 시티즌에 입단하였다.]] 대전 시티즌 입단 후 주장을 맡아 활약하였으나 팀의 [[K리그 챌린지]] 강등을 막지 못하였다.
- 박진주 . . . . 1회 일치
| 봉선
- 박칠용 . . . . 1회 일치
* [[2003년]] [[서울방송|SBS]] 《[[천년지애]]》 ... 고봉수 역
- 박태준 (작곡가) . . . . 1회 일치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며 호(號)는 귀봉(龜峯)· 산남(山南)· 계산(桂山)이고, 종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개신교(예장통합)]]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고등학교 (대구)|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이후 미국 [[터스컬럼 대학교]]와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음대 및 대학원을 나왔다.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종교 음악과를 창설하였으며, 많은 작곡을 하여 한국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술원 음악공로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64년 연세대학교 음대 학장을 지냈다. 작품으로 〈오빠생각〉 〈집 생각〉 〈사우(思友)〉 등 150여 곡이 있고, 동요곡집으로 〈중 중 때때중〉, 가곡집으로 〈박태준 가곡집〉 등이 있다.
- 박태호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 박하나(배우)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AF917B><#AF917B> '''{{{#white 개봉 연도}}}''' ||<#AF917B> '''{{{#white 제목}}}''' ||<#AF917B> '''{{{#white 배역}}}''' ||<#AF917B> '''{{{#white 비고}}}''' ||
- 박화랑 . . . . 1회 일치
|연봉 =
- 박화요비 . . . . 1회 일치
[[이정봉]] 원곡의 <어떤가요>를 리메이크한 동명의 타이틀곡으로 한 3집 <Because I Love You> 활동은 '가창력 좋은 가수, 박화요비' 이미지의 정점을 찍었고 판매량 자체도 좋았다. 후속곡인 <끝이 보일 때쯤> 뿐만 아니라 수록곡 <사랑은>도 라이브 무대를 많이 가지는 등 다른 수록곡의 인기도 좋았다.
- 박희광 . . . . 1회 일치
박희광은 1924년6월7일 상해임시정부(김구 선생)의 지령으로 김광추, 김병현과 함께 봉천 일본총영사관에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이날 저녁 대서관(大西關)에서 군자금을 탈취하고, 금정관(金井館)에서 다시 군자금 300엔을 탈취하는 과정에서 일본, 중국 경찰과 총격전끝에 현장에서 김병현과 함께 체포되었다. 김광추는 총격전을 벌이다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 배성룡 . . . . 1회 일치
1945년 9월 이극로가 주도하는 전국정치운동자후원회에 가입해 교섭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권오익(權五翼) 등과 각당통일기성회(各黨統一期成會)를 조직해 좌우익 정당통합에 주력했다. 1946년 1월 이극로·권오익 등과 함께 통일정권촉성회를 결성해 우익의 비상국민회의와 좌익의 민주주의민족전선을 통합하고자 노력했다. 7월 도진호(都鎭浩)와 함께 좌우합작촉진회를 결성했다. 1947년 2월 〈세계일보〉 주필 겸 편집국장을 지내면서 이극로·조봉암·백남규(白南奎) 등과 함께 민족주의독립전선을 결성하고 상임위원 및 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0월에 김규식의 민족자주연맹이 결성되자 권태석(權泰錫) 등과 함께 5인 정강·정책기초위원에 선임되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을 지지하는 ' 문화인 108인 성명'에 서명하고, 권태석과 함께 김규식의 제2차 특사로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에 참여했다. 7월 김규식과 김구가 연합한 통일독립촉진회에 참여했다. 1950년 이후 〈동아일보〉와 〈사상계〉 등에 경제평론을 발표하여, 대외의존체제의 극복과 내포적(內包的) 공업화를 통한 경제자립을 주장했고 서울대학교 상과대학에서 동양경제를 강의하기도 했다.
- 배장원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3년)
- 배재준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8년)
- 배지환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백상원 . . . . 1회 일치
|연봉 = 6,000만원 (2018년)
- 백승민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8년)
- 백승주(정치인) . . . . 1회 일치
||<width=30%><:>제19대[br][[심학봉]][* 의원직 사퇴. 잔여 임기 1년 미만으로 보궐선거 미실시.]||<width=5%><:>→||<width=30%><bgcolor=#FFFFA0><:>'''제20대[br]백승주'''||<width=5%><:>→||<width=30%><:>''현직''||
- 백정현 . . . . 1회 일치
5월 25일 '''두산전에서 8이닝 5k 무실점'''[* 무려 2018시즌 크보를 지배했던 두산을 두산의 홈인 '''잠실'''에서 완벽투를 선보였다.]으로 본인 야구인생 최고의 투구를 펼치며 2승을 수확, 2015년 9월 이후 32개월 만의 팀 5연승을 이끌었다. 위력적인 공을 스트라이크존 구석구석 꽂아넣는 완벽한 투구내용을 보여줬다. 완봉도 가능했지만 100구를 넘기는 등 많이 던졌기에 관리차원에서 8이닝만 던지게한듯. 이날의 호투로 본인의 평균자책점을 3.86으로 끌어내렸다.
- 백춘희 . . . . 1회 일치
* 대전시 생활체육회 자원봉사단장
- 변요한 . . . . 1회 일치
||<table bordercolor=#FAECC5><#FAECC5> '''{{{#black 개봉 연도}}}''' ||<#FAECC5> '''{{{#black 제목}}}''' ||<#FAECC5> '''{{{#black 활동}}}''' ||<#FAECC5> '''{{{#black 배역}}}''' ||
- 보루토/1화 . . . . 1회 일치
* 과학닌자반의 신제품으로 술법을 봉인해서 발사할 수 있다.
- 보루토/2화 . . . . 1회 일치
* 마치 봉인흡인처럼 미수옥을 빨아들이는데, 반대편 왼손은 검은 색이고 거기에도 윤회안이 따로 있다.
- 보루토/7화 . . . . 1회 일치
* 이때를 놓치지 않고 쿠로츠치가 용둔 회석봉의 술로 휘감아 완전히 제압한다. 쿠로츠치는 사스케에게 모모츠키 쪽으로 가세하라고 말한다.
- 보스 트롤 . . . . 1회 일치
크고 살찐 몸에 원시인 같은 가죽옷을 입고, 곤봉을 들고 있다. 두꺼운 입술과 쭉 내민 혀가 큐트 포인트(?). 보스로 등장하기도 하며, 통한의 일격과 높은 HP, 자동회복으로 무서운 면모를 보여준다. 묘하게 인기가 좋은 몬스터.
- 분류:경상북도 출신 인물 . . . . 1회 일치
[[분류:봉화군 출신 인물]]
-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 . . 1회 일치
[[분류:도봉구 출신 인물]]
- 블랙 클로버/114화 . . . . 1회 일치
그런데 그 우위가 바뀌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B팀이 진격을 멈추고 허물어진 담벼락 뒤로 엄폐한다. 미모사가 최근에 익혔다는 공격마법. 그게 사정거리가 긴 중거리 마법이었다. "마포의 꽃". 거대한 꽃봉우리가 돋아나 A팀의 크리스탈에 포격을 가한다. 카타스가 급히 암석마법 "락 포트리스"로 벽을 세운다. 위력이 만만치 않다. 이것은 미모사가 이전에 생각했던 "아스타의 곁에서 함께 싸울 수 있는 마법". 함께 싸울 수 있을 만큼 강해지겠다는 "맹세의 꽃"이었다. 미모사는 이제 자신이 앞장서서 반격에 나서겠다고 선언한다. 아스타는 그녀가 굉장히 믿음직해졌다고 생각한다.
- 블랙 클로버/116화 . . . . 1회 일치
이윽고 시합장소를 가득 매우는 꽃잎의 홍수가 일어났다. 그의 마법은 벚꽃 마법. "마앵의 맹렬한 꽃바람" 이었다. "아름다운 나의 환상을 곁들여서"란 기묘한 부제가 달려 있었다. 이 이름도 스케일도 거창한 마법은 적의 시야를 완전히 봉쇄했다. 적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아군에게는 적의 크리스탈로 향하는 길이 열렸다.
- 블랙 클로버/122화 . . . . 1회 일치
* 드디어 시작되는 2회전 1시합. 네르슈는 초반부터 벚꽃마법을 스테이지 전체에 깔아 아스타 팀의 기동력을 봉쇄한다.
- 블랙 클로버/132화 . . . . 1회 일치
* 유노는 신입 1위에 걸맞는 공격력으로 몰아붙이나 릴은 그런 공격 조차 재미있어 하며 여유롭게 방어한다. 공격이 릴의 그림으로 번번히 봉인되고 바람의 정령 벨이 짜증을 부리는데, 유노는 공세를 멈추고 "그걸"하자고 제안한다.
- 블랙 클로버/74화 . . . . 1회 일치
* 벤전스 단장을 비롯해 유노가 선봉장으로 나선다.
- 블랙 클로버/76화 . . . . 1회 일치
* 키텐에서 교전 중인 유노는 금색의 여명 선봉다운 활약을 하며 삼휘장을 상대로 꿇리지 않는 기량을 선보인다.
- 블랙 클로버/83화 . . . . 1회 일치
* 까마귀 떼는 손과 같은 모양으로 아스타를 덮쳐 그대로 봉쇄한다.
- 블랙기업 . . . . 1회 일치
이게 일본에서 상당한 이슈를 끌었기에 [[블랙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지금 나는 한계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다. 한국에서도 개봉되었으며, 원작 소설도 "블랙회사"라는 제목으로 정식 발매되었다.
- 블리치/677화 . . . . 1회 일치
* 우라하라 키스케의 만해는 "고쳐 만드는 능력". 일정한 영역 안에서 무엇이든 고치거나 갈라진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아스킨의 몸을 순식간에 갈라버렸고 자신의 상처는 순식간에 고쳤다. 마치 실로 봉합한 듯한 모양.
- 블리치/698화 . . . . 1회 일치
* 보다 엄중하게 봉인되어 있지만 그 자신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
- 서동민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8년)
- 서영무 . . . . 1회 일치
[[경북고등학교|경북고]] 출신의 명 선수인 [[이선희 (야구인)|이선희]], [[황규봉]], [[배대웅]], [[조창수]], [[임신근]], [[강문길]] 등이 그의 제자였기 때문에 '''대구 야구의 대부'''라고 불리며, 엄격한 훈련과 함께 선수들의 책임과 품위를 철저히 강조한 감독이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99354 with 라이온즈 열정의 30년 ⑩‘대부’의 쓸쓸한 퇴장, 원년 감독 서영무] - 매일신문</ref>
- 서정환 . . . . 1회 일치
|연봉 =
- 서훈 (1942년) . . . . 1회 일치
가족으로는 처 김리례와의 사이에 2남 1녀(첫째 서정진, 둘째 서정현, 세째 서정봉)를 두었다.
- 손지현(배우)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7C43B1><table width=600><#7C43B1> '''{{{#white 개봉 연도}}}''' ||<#7C43B1> '''{{{#white 제목}}}''' ||<#7C43B1> '''{{{#white 배역}}}''' ||<#7C43B1> '''{{{#white 비고}}}''' ||
- 손형준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원(2014년)
- 솔비 . . . . 1회 일치
2018년 6월 플레이런TV '로마공주의 수상한 미술관' MC로 발탁됐다. 솔비는 방송과 SNS를 통해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밝혀왔다. 매년 봉사활동을 통해 아이들에게 미술 교육도 한 바 있다. 이처럼 솔비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들과 치유 목적으로 시작한 자신의 일부가 된 미술를 결합해 아동 미술이라는 영역에도 도전했다. 그결과 '수상한 미술관'은 현대 미술을 기반으로 보고, 듣고, 만지는 경험을 통해 창의적 표현을 배워가는 기존에 없던 미술 프로그램이자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ref>{{뉴스 인용|url=https://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653218|제목=솔비, ‘수상한 미술관’ 신개념 교육프로그램 탄생…팔색조 변신|성=조유경 기자|이름=2018년 6월 13일|날짜=|뉴스=|출판사=스포츠동아|확인날짜=2018년 7월 3일}}</ref>
- 송가인 . . . . 1회 일치
* 2016년 항구 아가씨 / 성산 일출봉
- 송금식 . . . . 1회 일치
* 1991년 《[[흑설]]》 ... 태봉 부하 1 역
- 송상진 . . . . 1회 일치
* [[1974년]] 4월 인민혁명당 재건단체사건으로 구속, 당시 양봉업.
- 송원근(배우) . . . . 1회 일치
* [[2017년]] [[힘쎈여자 도봉순]] - 연극배우 송원근 역(특별출연)
- 송주훈 . . . . 1회 일치
그리고 시즌 종료 후 [[중국 슈퍼 리그]] 소속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에서 유럽 이적을 추진하고 있는 [[김영권]]의 대체 선수로 송주훈의 영입을 추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와 이적할 가능성이 생겼으나, [[http://sports.new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108&aid=0002571906|#]] 광저우에서 [[김형일(축구)|김형일]]을 대신 영입함에 따라 광저우 이적은 무산되었고, 결국 2017년 임대가 만료되어 본래 팀인 니가타로 복귀하게 되었다. [[https://twitter.com/Jleague_Bot/status/819043605956304899|#]][* 그러나 2017년 슈퍼 리그의 외국인 쿼터가 5명 보유 3명 출전으로 규정이 변경되면서 각 구단들은 더욱 고연봉인 유럽이나 남미 출신 선수들을 중용하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김기희]], [[장현수]] 등 중국에서 뛰는 한국인 선수들이 [[벤치워머]]로 전락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중국 이적이 무산된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 되어버렸다 (...) 실제로 송주훈 대신 이적한 김형일 역시 1경기도 뛰지 못하다가 방출되었고, 반대로 송주훈은 니가타에서 주전으로 잘 뛰고 있으니 정말로 일본에 남은 것이 이득이 된 셈이다.]
- 송지효 . . . . 1회 일치
| 봉민정
- 송하윤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CC9966><#CC9966> '''{{{#white 개봉 연도}}}''' ||<#CC9966> '''{{{#white 제목}}}''' ||<#CC9966> '''{{{#white 배역}}}''' ||<#CC9966> '''{{{#white 비고}}}''' ||
- 슈퍼걸(드라마)/1시즌 7화 . . . . 1회 일치
카라와 제임스는 길을 걷고 있을 때,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난다. 제임스는 차에 치일 뻔한 카라를 구해주지만 카라는 땅에 부딪쳐서 팔이 부러지고 만다. 아픔을 느낀 카라는 굉장히 괴로워한다. DEO 기지는 젬이 탈출하여 봉쇄된다. 행크는 정신파 차단기를 가지고 젬을 막으려 하지만, 알렉스는 행크의 조치에 의구심을 느낀다.
- 스위스 방공호 . . . . 1회 일치
벙커에는 5개의 보안실이 갖추어져 있으며, 센터에 입장하려면 보안실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경비원은 페퍼 스프레이와 경비봉을 사용하는데, 총기는 서버에 충격을 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 승리(빅뱅) . . . . 1회 일치
* 양현석 성대모사를 매우 잘한다. YG 아티스트들은 전부 양현석 성대모사를 조금씩은 하지만, 그 중 승리가 가장 최고봉이라고. 어느 예능을 나와도 꼭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승리의 양현석 성대모사다. 2016년 2월 가온 시상식에서는 프로듀서 상을 수상한 양현석 대신 성대모사를 하며 대리 수상을 하기도 했다. [[https://youtu.be/15MoFYOluW0|영상]] 2분 40초 부터. 마지막의 '''지용아 한마디 해라''' 가 압권.
- 시계태엽 오렌지(영화) . . . . 1회 일치
A Clockwork Orange.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1971년 개봉되었다.
- 식극의 소마/239화 . . . . 1회 일치
* 사과 도라야끼는 평범한 외견과 달리 매우 섬세하고 산뜻한 맛을 냈다. 와삼봉 설탕에 벌꿀과 두부를 넣고 만든 빵반죽에 부드러운 백앙금의 풍미와 톡톡 튀는 사과의 산미가 더해져 있다. 안은 이것이 "뇌수까지 퍼지는 초노급 촉촉함"이라 표현한다. 이스트와르가 한 가지를 더 발견한다. 그것은 빵 안 쪽에 바른 "사과버터". 간 사과에 레몬즙과 설탕, 버터를 넣고 가열해 녹여서 만드는데 보통 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재료다. 그게 가능했던건 시노미야에게 사사한 "몽테 오 뵈르", 프랑스 요리의 기법 덕이다. 시노미야는 이 기술을 가르치면서 몇 번이나 호통을 치고 "굼벵이"라고 다그쳤지만 결코 포기하지 않고 도전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면서 "굼벵이지만 결코 얼간이는 아니다"며 내심 타도코로를 인정한다.
- 신년선물연하장엽서 . . . . 1회 일치
연하장의 상품은 매년 조금씩 바뀌었는데, 제1회 신년선물연하장엽서의 상품은 특등상으로 [[재봉틀]], 1등으로는 순모옷감, 2등으로는 학생용 장갑, 3등으로는 학생용 우산이었다. 1966년에 특등상이 폐지되고 1등이 최고상으로 바뀌었으며, 1956년에는 전기세탁기, 1960년에는 발포 고무 매트리스, 1965년 이후로는 휴대용TV나 8밀리 촬영기, 영사기 세트, 1984년에는 전자레인지, 1986년에는 비디오테이프레코더 같이 서민들이 손에 넣기에 약간 어려운 상품들이 주류였다. [[헤이세이]] 이후로는 해외여행, 최신식 TV, PC 등 몇가지 가운데 1가지를 선택하는 형식으로 바뀌었다.
- 신동미 . . . . 1회 일치
* 2005년 [[MBC]] 주말 특별기획 《[[제5공화국 (드라마)|제5공화국]]》 ... 심수봉 역
- 신동호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봉급 =
- 신성왕후 . . . . 1회 일치
* 증조부 : 김민공(金敏恭, 문충공(文忠公)에 추봉)
- 신수항 (배우) . . . . 1회 일치
* 《[[인천상륙작전 (2016년 영화)|인천상륙작전]]》 (2016년) - 강봉포 역
- 신현준(군인) . . . . 1회 일치
부모를 따라 일찍 [[만주]]로 이주하여 [[하얼빈]]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이 [[만주]]에 세운 봉천군관학교에 [[1936년]] 4월 [[입학]]하였다. [[졸업]]한 후에는 [[만주군]] [[대위]]로 근무했으며, 이때 [[박정희]]보다 상관으로 같은 부대에 있었다. 그는 [[박정희]]를 비롯하여, [[정일권]], [[백선엽]], [[이한림]], [[김석범]], [[원용덕]], [[김창룡]] 등과 함께 국군 내의 대표적인 만주군 인맥이었다.
- 씽(마블 코믹스) . . . . 1회 일치
* 별명인 싱(Thing)은 말그대로 사람이 아닌 '물건' 같다 해서 붙은 것인데 여기에는 공포와 혐오를 주는 물체를 가리키는 의미도 있다. 보통 구분을 위해 [[더]](The)를 붙이며 동명의 영화가 국내개봉했을 때 '[[괴물]]'로 번역되었다.
- 아게만 . . . . 1회 일치
1990년에 개봉한 동명의 일본 영화가 존재한다. 여주인공인 게이샤 '나요코'를 중심으로 그녀와 관계한 남성들의 출세와 몰락을 그린 내용.
- 아마쿠사 키리시탄 진중기 . . . . 1회 일치
이 그림을 그린 야마다 우에몬사쿠는 기독교 신자였으나 당시에는 배교한 상태였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이 일으킨 봉기에 휘말려 본의 아니게 시마바라의 난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시바마라 성에서 농성하던 중에 내부에서 [[화살 편지]]를 날려 막부의 토벌군과 연락을 주고 받았다. 그러다가 들통나 체포되어 처형당할 뻔 했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 아소비닌 . . . . 1회 일치
아소비(遊び)는 논다는 뜻. 닌(人)은 사람을 뜻한다. 아소비닌은 특정한 직업이 없이 빈둥거리는 사람을 뜻하는데, [[건달]], 난봉꾼, 방탕아. 특히 [[도박사|노름꾼]]을 뜻하는 말이다.
- 안종범 . . . . 1회 일치
|봉급 =
- 안효민 . . . . 1회 일치
* [[페어리테일]] 극장판 - 봉황의 무녀
- 앙주 제국 . . . . 1회 일치
흥미롭게도 이 당시 앙주 제국의 군주들은 프랑스 영역 내에서 [[프랑스 왕]]을 압도할 정도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프랑스 왕에게는 봉신이라는 입장이었다. 이는 대체로 "영국 왕은 프랑스 왕의 신하였지만, 프랑스 왕보다 세력이 컷다."고 간단하게 정리된다.
- 애로우 . . . . 1회 일치
초기에는 영웅이라기보다는 복수자에 가까운 인물상을 보이지만, 점차 자신만의 정의감을 찾아가게 된다. 로럴, 사라, 팰리시티 등 연애전선이 매우 복잡하게 전개된다. 이전처럼 난봉꾼은 아니지만 약간 썸만 타다보면 뿅뿅씬이 나와주는(…) 매력남.
- 야규 슈메 . . . . 1회 일치
사노 슈메(佐野主馬)라는 이름으로 야규 가문의 가신으로 봉사하다가, 야규 가문의 딸([[야규 토시요시]]柳生利厳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데릴사위]]로 들어가고, 야규 성씨를 쓰는 것을 허락받아 '야규 슈메'라는 이름을 쓰게 되었다.
- 양윤재 . . . . 1회 일치
| 봉급 =
- 양진성(배우)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FFCC33><#FFCC33> '''{{{#white 개봉 연도}}}''' ||<#FFCC33> '''{{{#white 제목}}}''' ||<#FFCC33> '''{{{#white 배역}}}''' ||<#FFCC33> '''{{{#white 비고}}}''' ||
- 어쌔신 크리드 III/부가요소 . . . . 1회 일치
해당 지역에 위치한 NPC 네명에게 편지를 배달하는 서브미션. 지도에서는 편지봉투로 표시된다. 하나를 완수하면 500 파운드를 받는다.
- 어쌔신 크리드 III/아이템 . . . . 1회 일치
==== 전투곤봉 ====
- 어쌔신 크리드 III/임무일람 . . . . 1회 일치
* 이 임무 이후 제봉사 엘렌이 대번포트 농지에 정착한다.
- 영천시 . . . . 1회 일치
[[경상북도]] 남부에 위치한 [[시(행정구역)|시]]. 2017년 기준 10만명을 간신히 넘기는 인구가 거주 중이다. 인구 변동폭이 워낙 작아서 2013년 8월 '''100,999명'''으로 인구가 10만 명대로 하락한 이후 4년 가까이 10만 명선에서 정체되어있다[* 그런데 2017년부터 '''서서히 아주 조금씩 인구가 늘고 있다!!'''] 행정구역면적은 920.29㎢ 에 1개 읍(금호읍), 10개 면(청통, 신녕, 화산, 화북, 화남, 자양, 임고, 고경, 북안, 대창), 행정동 5개 동(동부, 중앙, 서부, 완산, 남부), 법정동 30개 동(망정, 야사, 도남, 도동, 조교, 녹전, 오수, 조교, 대전, 매산, 신기, 문내, 문외, 언하, 괴연, 채신, 성내, 화룡, 오미, 과전, 창구, 봉동, 완산[* [[전라북도]] [[전주시]]에 있는 [[완산구]] 완산동과는 전혀 상관없다.], 금노, 본촌, 서산, 쌍계, 범어, 작산, 교촌)이 있다. [[대구광역시]]와 접한 도시인 만큼 대구 생활권에 대체로 속하고, 다만 [[포항시]]와 접하는 고경면은 포항 생활권에 좀 더 가깝다...고 하지만 실상은 둘 다 차타고 넉넉잡아 1시간 정도의 거리라(...) 그냥 독자 생활권이라고 보면 편하다. 굳이 대도시에 볼 일이 있을 때 그쪽으로 간다는 것.
- 예천군 . . . . 1회 일치
* [[조재봉]] : 전 국민당 국회의원 (경북 예천군)
- 오병희 . . . . 1회 일치
|봉급 =
- 오석락 . . . . 1회 일치
법률과 수필 등 다수의 책을 저술했던 오석락은 광림교회에서 함께 다니던 법조인들이 모여 애중회를 만들었으며, 1984년 12월 12일에 변호사 사무소가 있던 명지빌딩의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명우회를 결성하여 봉사활동을 했다.
- 오재희 . . . . 1회 일치
1991년 2월 19일, [[노태우 정부]]에 의해 주일 대사에 임명되었다. 오재희 대사의 기용은 그의 직업외교관 경력으로 미루어 자연스런 인사로 볼 수도 있지만 그가 [[노태우]] 대통령과 [[경북고등학교]] 동기동창이고 [[노재봉]] 총리의 매형, [[이상옥]] [[대한민국의 외교통상부 장관|외무부 장관]]과는 대학 동기 사이라는 학연, 혈연에 주목하는 시각도 있었다. 성격이 꼼꼼하고 일처리가 치밀하며 빈틈없어 부하 직원들로부터 오검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외무고시]] 출신으로 첫 주일 대사이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021900329201007&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91-02-19&officeId=00032&pageNo=1&printNo=13971&publishType=00020 | 제목 =大使7명 이동 | 날짜 = 1991-02-19 | 출판사 = 경향신문}}</ref>
- 오정태 (희극배우) . . . . 1회 일치
* 《[[까시]]》 - 삼봉 역
- 오정환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8년)
- 오중기 . . . . 1회 일치
[[영남대학교]] 철학과에 86학번으로 입학한 그는 '대학가서 데모하지 마라 인생 망친다'라는 소리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지만 자발적으로 데모에 참석하곤 했다. 그러던 중 집회 현장에서 본 [[5.18 광주민주화운동]] 사진 책자를 보고 우리 사회의 모순을 치열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생회 활동, 철학과 학생회장, 문과대 학생회장을 거쳐 [[전대협]] 통일선봉대 대구경북지역대장까지 맡았다. 결국 탄압이 심하던 당시,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수배를 받고 7개월 가량 도망다녔으나 붙잡혀 구속되었다.--잡히지 않기 위해 여장까지 했다고 한다.-- 몇달 후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1993년에 특별복권되었으나 전과가 남았다.
- 오지호(배우) . . . . 1회 일치
* 2005년 수목 드라마 [[신입사원(드라마)]](MBC) - 이봉삼 役
- 오태곤 . . . . 1회 일치
|연봉 = 8,300만원 (2018년)
- 오태근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3300만원 (2009년)
- 오현근 . . . . 1회 일치
|연봉 = 3,000만 원
- 온주완 . . . . 1회 일치
||<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왝더독 . . . . 1회 일치
Wag the Dog. 1998년 개봉한 미국 영화.
- 요괴:선풍기 . . . . 1회 일치
이 요괴는 전 세계에 분포하고 있으나, 저 무서운 능력에 대해서는 주로 [[한국]]에만 알려져 있다. 한국에서는 이 요괴에게 봉인을 걸어, 일정 시간 이상 움직이면 저절로 음직임이 멈추게 하는 주박술을 걸어놓고 있기 때문에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한국에서도 여름에 선풍기에게 살해당했다는 안타까운 설화가 자주 전해진다.
- 우동균 . . . . 1회 일치
|연봉 =
- 우마이봉 . . . . 1회 일치
우마이봉은 흔히 낱개로 포장되어 있으며, 막대기 모양이다. 여러가지 다양한 맛으로 팔고 있다.
- 우의형 . . . . 1회 일치
* 서울고등법원 형사5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1997년 11월 4일에 연세대 한총련 사태로 1심에서 징역1년6월을 선고받은 전 단국대 총학생회장에게 징역1년6월 집행유예3년을 선고하면서 300시간 사회봉사 명령을 했다.<ref>한겨레 1997년 11월 5일자</ref>
- 울펜슈타인 : 뉴오더 . . . . 1회 일치
교도소의 간수들. 게르마니아의 교도소에서 근무하는 간수들로는 가학적인 성향을 가지고 공감기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선호된다. 진압봉과 돌격소총으로 무장하고 있다.
- 원피스/845화 . . . . 1회 일치
* 홀케이크 성. 빅맘 샬롯 링링은 빈스모크 일가와 만나기 위해 가는 중이다. 그런데 작은 소녀 "아나나"가 요리장이 식칼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징징댄다. 봉제인형을 찢어야 한다나. 빅맘은 옆에서 풍선을 타고 놀던 뚱뚱한 도르체, 도르제 형제에게 빌려주라고 하지만 도르체는 그러면 아나나가 자기들 풍선을 터뜨려 버릴 거라며 싫어하고 아나나를 "죽여버리고 싶다"고 위협한다. 다른 아이들도 빅맘 주위로 몰려와 도르체와 도르제가 "나쁜 말"을 쓴다고 일러바친다. 빅맘은 껄껄 웃으며 "누구에게나 죽이고 싶은 상대는 백이나 이백 정도 있다"고 하는데 어쨌든 형제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한다. 빅맘은 내일로 다가온 샬롯 푸딩의 결혼식과 사위가족과 만날 일로 들떠 있다.
- 원피스/852화 . . . . 1회 일치
보물전 앞에서 경비를 총괄하고 있는 [[샬롯 스무디]]는 이 또다른 난동을 접하고 골치 아파한다. 그녀는 징베의 모반 사실을 은폐하기로 결정한다. 기분파인 빅맘이 이 소식을 들으면 어떻게 돌변할지 모르고 내일의 "계획"도 장담할 수 없다. 스무디는 보물전이 있는 4층을 철저히 봉쇄하고 3층 이하에서 루피 일행을 몰살하는 걸로 사건을 무마하려 한다.
- 원피스/873화 . . . . 1회 일치
* 하지만 한가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빅맘 해적단의 추격대가 어느 새 다가와 있었다. 서로 육안으로 확인이 되는 거리. 나미가 "따라잡히면 그 재봉선을 다 뽑아 버리겠다"고 협박해 킹 바움을 더 달리게 한다. 페드로가 듣기에도 너무한 처사지만 비상사태니.
- 원피스/887화 . . . . 1회 일치
* 항구가 봉쇄된 상황이지만 [[카포네 벳지]]는 육지로 진격을 결정한다. 파이어탱크 해적단의 배는 수륙양용이라 육지에선 탱크로 변신, 그대로 항구의 적들을 쓸어 버린다.
- 원한해결사무소/4화 . . . . 1회 일치
마사토는 돈문치와 마약봉지를 발견했다가 들어온 야쿠자들에게 걸린다. 마사토의 가방에는 피킹 도구나 면허증이 들어 있고, 게다가 들어오기 전에 원한해결사가 야쿠자의 차에 송곳으로 낙서를 해놔서 완전히 누명을 쓰게 된 것이었다. 야쿠자는 차 수리와 손해배상으로 '3천'을 요구하고, 마사토는 차용증을 쓰고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여자가 있다고 말하며 집으로 가게 된다.
- 원한해결사무소/6화 . . . . 1회 일치
다음날 아줌마는 쓰레기를 뒤져서 우편물 도둑을 잡아내자고 한다. 아줌마는 새댁이 우편물 도둑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수수께끼의 전화'를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도둑맞은 우편물과 접착제, 그리고 부이사 아줌마의 집에서 먹었던 과자 상자가 모두 한 쓰레기 봉투에서 나타난다. 아줌마는 '개똥' 밖에 하지 않았다고 결백을 주장하지만 오히려 모든걸 자백한 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 월하노인 . . . . 1회 일치
훗날 아들 곤(鯤)을 낳았는데 안문태수(雁門太守)가 되었고, 태원군 태부인(太原郡太夫人)으로 봉해졌다. 저 세상에서 몰래 정해진 것은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송성의 관리가 이를 듣고, 그 점을 「정혼점(定婚店)」이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 유승진 (필드하키 선수) . . . . 1회 일치
|봉급 =
- 유재호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유지태 . . . . 1회 일치
|2019||MBC||[[이몽]]||김원봉||
- 유카타 . . . . 1회 일치
본래 [[가마쿠라 시대]]에 귀인이 증기욕을 할 때 입었던 삼(麻)으로 만든 유카타비라(湯帷子)라는 옷의 이름을 줄여서 '유카타'라고 한 것이 기원이다. 카타비라(かたびら)는 「겹옷의 한쪽면(袷の片ひら,아와세노 카타히라)」라는 뜻으로서, 안감을 붙이지 않은 홀옷을 뜻한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봉오도리]](盆踊り)가 성행하면서, 유카타가 민간에 퍼지게 되었다.
- 유한식 . . . . 1회 일치
[[2007년]] [[10월]]에 [[이기봉]] 전 [[군수]]가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당선이 무효되자 연기군수 재보궐 선거에 출마를 선언하였으나 같은 당의 최준섭에게 공천에서 밀려 탈락하자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3위로 [[낙선]]한다. 그런데 최준섭 군수 또한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이 무효되면서 다시 보궐에 선거에 국민중심당 공천을 받아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선진당]]에 속하였다.
- 육미당기 . . . . 1회 일치
한편 소선과 약혼했던 백소저는 남장을 하여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고 한림학사가 된다. [[토번]]이 침략해오자 소선은 초유사가 되어 적진에 갔다가 감금되고 만다. 백소저는 원수가 되어 출정하여 토번을 물리치고 소선을 구출한다. 백소저는 개선하여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당나라 황제는 백소저를 금성공주로 책봉하고 소선이 제2부인으로 삼도록 한다.--백소저에게 별로 이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건 기분탓일까.--
- 윤다훈 . . . . 1회 일치
* 2016년 MBC [[가화만사성(드라마)|가화만사성]] - 봉삼식 역
- 윤덕주 (농구인) . . . . 1회 일치
** 남동생 : 윤봉기
- 윤문영 . . . . 1회 일치
|연봉 =
- 윤용현(1969) . . . . 1회 일치
* KBS 태양인 이제마(2002) - 장봉수
- 윤주희(배우) . . . . 1회 일치
||<#FF91AF><table bordercolor=#ff91af> {{{#ffffff '''개봉 연도'''}}} ||<#FF91AF> {{{#ffffff '''제목'''}}} ||<#FF91AF> {{{#ffffff '''배역 이름'''}}} ||<#FF91AF> {{{#ffffff '''비고'''}}} ||
- 윤찬수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0년]])
- 은혼/592화 . . . . 1회 일치
* 가구라는 박봉을 핑계대며 휴가 중에 지갑이 텅 비었다고 항변하는데 뭐에 썼냐고 했더니 "호텔숙박비, 미술품 구입비, 서예를 위한 중국 옷 구입비, 전부 다 필요경비"였다고 말해 긴토키가 "어디의 도지사냐!"라고 딴죽을 날린다.
- 은혼/598화 . . . . 1회 일치
* 사무라이들의 봉기에 대해서 보고를 받는데 천도중을 제거하고 지구까지 손에 넣을 구실을 얻었다고 만족해한다.
- 은혼/603화 . . . . 1회 일치
* 단순히 해방군이 진정된 이후 민중이 봉기했다고만 알고 있으니 상황을 타개할 계책도 가지고 있지 않다.
- 은혼/606화 . . . . 1회 일치
* 아무튼 봉인을 해제한 곤도는 순식간에 건물 위로 뛰어오르고 해방군의 공격을 요리조리 나비처럼 피해 다니는 등 엄청나게 강하다.
- 은혼/607화 . . . . 1회 일치
* 이것은 화기를 봉인하는 "화무"라는 연막. 고온에 반응에 폭발하는 타입의 연막이다.
- 은혼/610화 . . . . 1회 일치
* 네오암스트롱사이클론제트암스트롱 겐카이포의 위력으로 해방군은 물론 전장 일대의 기계 장치가 봉인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다.
- 은혼/611화 . . . . 1회 일치
* 해방군이 무력화되며 활로가 뚫린다. 사카타 긴토키와 가구라, 시무라 신파치는 선봉으로 치고 나가며 해방군을 무찌른다. 진선조와 오니와반슈도 기세를 올리며 거침없이 돌격한다. 겐카이포 덕에 기계가 내장된 총기까지 전부 무력화되었으며 재정비가 되지 않은 해방군을 상대로 쾌진격이 가능했다. 진선조 대원들은 겐카이 영감이 정말로 세상의 절반을 구했다고 칭송한다. 하지만 사루토비 아야메는 타마가 희생했다는걸 알기 때문에 좋아하지만은 못하고 핫토리 젠조는 모처럼 죽을 각오를 했는데 묘한 기대를 갖게한다고 툴툴댄다.
- 은혼/615화 . . . . 1회 일치
그대로 진격하는 오우가이군을 [[오니와반슈]]가 요격한다. [[핫토리 젠조]]와 [[사루토비 아야메]]가 선봉에서 이끌고 있다. 오우가이는 발목잡기가 아니라 정말로 저지하러 온 거냐고, 기책도 아닌 우책이라고 비웃는다.
- 은혼/616화 . . . . 1회 일치
* 철통 같았던 가부키쵸의 문을 열어젖힌 [[오우가이]]. 그의 뒤를 따라 해방군이 물밀듯이 밀어닥친다. 다키니족이 선봉에 서서 전진. 순식간에 가부키쵸 측이 수세에 몰린다.
- 은혼/623화 . . . . 1회 일치
* 생각보다 거센 신라의 공세에 사방이 봉쇄돼 위기를 맞이하지만 그들 중 일부는 변장한 흙탕쥐파였고, 이들의 기지로 위기를 돌파한다.
- 은혼/624화 . . . . 1회 일치
* 예상에 없던 반격에 신라 부대는 싱겁게 쓰러지기 시작한다. [[도로미즈 지로쵸]]는 선봉을 날리며 다가오는 적들을 쓸어버린다. 그런데 연거푸 베어나가는 와중, 신라의 지휘관 [[소타츠]]는 동포의 시체를 방패막으로 삼으며 지로쵸를 노린다.
- 은혼/636화 . . . . 1회 일치
* 그러나 지나치게 방어에 의존한 금구슬의 비대화 때문에 기동성을 스스로 봉쇄하는 최악의 결과가 되었다. 가구라는 그의 절대방어를 가볍게 걷어차 건물 밖으로 날려보낸다. 자유낙하하기 시작하는 거대한 금구슬. 남매는 긴 싸움 끝에 마지막으로 의견일치를 보았다.
- 은혼/638화 . . . . 1회 일치
* 긴토키는 발 밑을 울리는 심상치 않은 진동을 느끼고 있었다. 그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고 우츠로에게 외친다. 우츠로는 다소 친절할 정도로 자세하게 대답했다. 우선 다행한 점은 [[히라가 겐가이]]의 나노머신이 터미널 지하 깊숙한 곳까진 미처 닿지 않았다는 것. 거기서 우츠로가 계획한 최후의 계획이 무사히 시작했다. 그는 손에 넣은 "열쇠"를 이용해 터미널 지하의 "문"을 열엇다. 문이란 "용혈"을 봉하고 있는 터미널의 중추 장치다. 아르타나의 흐름이 "용맥"이며 그 원천이 "용혈". 그걸 제어하기 위해 설치된 "문"을 잘만 다룬다면 단숨해 폭주시켜 나라 하나를 멸망시킬만한 대폭발을 일으킬 수도, 지금처럼 혈관 각지를 부수어 폭주를 확산시키는 것도 가능하다. 우츠로는 가부키쵸 연합군 따윈 언제든 처리할 수 있었다. 긴토키와 그들은 단지 우츠로의 손 위에서 춤을 췄을 뿐이다.
- 은혼/652화 . . . . 1회 일치
* [[우미보즈(은혼)|우미보즈]]의 복귀. 전장에서 [[가구라]], [[카무이(은혼)|카무이]]와 감동적인 가족상봉이 연출되나 했으나 카무이의 선빵으로 개판이 된다.
- 의상 (신라) . . . . 1회 일치
[[당나라]]에 체류 중 그의 설법에 참석하던 여성 중 그를 사모하는 선묘라는 이름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의상은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하던 날, 선묘의 집에 찾아갔지만, 선묘가 집을 비워서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의상의 귀국 소식을 접한 이 선묘는 자신이 죽어 그를 지켜주겠다며 황해바다에 몸을 던져 죽었다. 후에 의상이 [[영주 봉황산]]에 산사를 지을 때, 지역 주민들이 와서 집단으로 들고 일어서자 어느 날 사람 수백 명의 머리를 덮고도 남을 크기의 바위가 공중에 떠다니면서 주민들을 따라다녔다. 겁에 질린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해산하였고, 의상은 사찰을 준공하였다고 한다.
- 이관섭 (1961년) . . . . 1회 일치
|봉급 =
- 이국철 . . . . 1회 일치
* [[대봉초등학교]]
- 이규한(배우) . . . . 1회 일치
* [[내일이 오면]] - 이일봉
- 이금서 . . . . 1회 일치
[[이제현]](李齊賢)의 묘지명(墓誌銘)에 의하면 "신라왕 김부(金溥 : 敬順王)가 국토를 바치고 고려 조정에 들어와 태조(太祖)의 딸인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樂浪公主)에게 장가들어 딸<ref>신란궁부인 김씨이다. [[낙랑공주 (고려)|낙랑공주 왕씨]]는 출가 후 신란궁부인으로 불렸는데, 그 딸인 김씨가 다시 신란궁부인에 봉작되었다.</ref>을 낳았으니 금서의 아내가 되어 윤홍을 낳았으며"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 이윤홍이 '신라말' 병정(兵正)을 했다는 기록을 들어 연대상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ref>이에 대해 경주이씨 대종보 총편에 '고려 초 관제에 병부령(兵部令)을 설치할 때 병정(兵正)을 두었고 품계는 재상(宰相)과 같다.'고 설명하고 있다.</ref> 그러나 이금서가 중원태수(中原太守) 호부랑중(戶部郞中)으로 고려에서 처음 벼슬을 시작했고, 그 아들 이윤홍의 병정(兵正) 벼슬과 관련하여 고려 초 관제에 병부령(兵部令)을 설치하면서 병정(兵正)을 두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윤홍의 병정(兵正) 벼슬은 고려 초의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 이기열(배우) . . . . 1회 일치
* 2007년 [[SBS]] 《[[외과의사 봉달희]]》 - 서정환 역
- 이동훈 (1996년) . . . . 1회 일치
|연봉 = 3,300만원 (2018년)
- 이득윤 . . . . 1회 일치
'''이득윤'''(李得胤, [[1553년]] ~ [[1630년]])은 [[조선]] 중기(선조-광해군)의 정치가·학자·음악 이론가이다. 자는 극흠(克欽), 호는 서계(西溪), 본관은 [[경주 이씨|경주]]이다. 고려 말 문신 [[이제현]](李齊賢)의 후손이다. [[1588년]](선조 21년) 진사가 된 뒤, 참봉, 형조좌랑, 괴산(槐山)군수를 지냈다.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역학 (철학)|역학]](易學)에 뛰어났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1620년]](광해군 12년)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를 엮어서 세상에 내놓아 [[거문고]]의 법도(法道)를 바로 전하게 하였다.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여러 금보 및 그 저자와 [[거문고]] 대가에 대하여 다룬 것을 보면, 그가 음악에 조예가 깊고 상당히 박학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저서로 〈서계집(西溪集)〉이 남아 있다. 묘소는 [[충청북도]] [[청원군]] 미원면(米院面) 가양리(佳陽里) 인경산(引頸山) 아래에 있다. [[청주]] [[신항서원]](莘巷書院)과 [[청안군|청안]](淸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어 있다.
- 이명주 (축구선수) . . . . 1회 일치
[[2014년]] [[6월 9일]], 포항은 기자회견을 통해 이명주의 [[알아인 FC|알아인]] 이적을 발표하였다. 이적료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언론은 그의 이적료와 연봉을 합쳐 총 95억 원 정도 규모로 추정하고 있다. 등번호는 포항에서의 번호인 29번을 선택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총액 95억원' 이명주 알아인 이적, K리그 이적사 다시 썼다 |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406100100083460005726&servicedate=20140609 |출판사=스포츠조선 |date={{날짜한글화|2014-06-9}} }}</ref> 7월 '알아인 인터내셔널 친선대회'에서 두 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하였다. 또한 9월 30일 열린 [[AFC 챔피언스리그 2014|AFC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에 [[알힐랄 (리야드)|알힐랄]]과의 경기에서 전반 10분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으나, 1, 2차전 합계 2:4로 결승 진출에는 실패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ACL) ‘이명주 선제골’ 불구 알아인 결승 좌절 |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_league&ctg=news&mod=read&office_id=413&article_id=0000011083 |출판사=인터풋볼 |date={{날짜한글화|2014-10-1}} }}</ref> 한편 정규리그에서는 12월에 열린 10, 11라운드에서 두 경기 연속 어시스트를 기록하였으며, 13라운드 [[샤르자 스포츠 클럽|샤르자]]와의 경기에서는 정규리그 첫 골을 성공시켰다. [[2015년 AFC 아시안컵|아시안컵]] 이후 복귀한 14라운드 [[알샤바브 (두바이)|알샤바브]]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기록하였다. 이후 주전으로 활약하며 [[알아인 FC|알아인]]의 [[UAE 아라비안 걸프 리그]] 2014-15시즌 우승에 크게 기여하였다.
- 이민호(1969) . . . . 1회 일치
1993년 빙그레 이글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1993년에는 [[강석천]]의 백업으로 뛰다가 1994년 [[강석천]]의 부진을 기회삼아 암울했던 1994년 한화 타선에 [[박지상]]과 더불어 힘을 실어 주었다. 이 때가 커리어 하이로 0.299의 타율과 14홈런 36타점을 기록했다. 하지만 1995년 [[방위병]] 복무로 홈 경기 밖에 뛰지 못했으며, 그 이후 주춤하다가 1998년 주전 3루수가 됐으나 1998년 시즌 후 [[동봉철]]과 함께 투수 [[임창식]]을 상대로 [[쌍방울 레이더스]]로 트레이드됐다. 쌍방울이 해체되고 2000년 [[SK 와이번스]]에 이적하고 1시즌을 뛴 후 은퇴했다. 이후에는 인천에서 유소년 야구 팀을 지도하고 있다고 전해졌다.
- 이상목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이상훈 (1971년생 우완 투수) . . . . 1회 일치
|연봉 = 6000만원 (2004년)
- 이상훈 (1987년) . . . . 1회 일치
|연봉 =
- 이영 (1494년) . . . . 1회 일치
특히 [[제주도]]에서는 도민이 그의 업적을 추모하여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봉안하고 참배하였으며 그 당을 괘편당(掛鞭堂)이라 하였다. 그의 졸기에 의하면 [[대구]](大丘)의 집에 화재를 당하여 처자가 살 데가 없게 되자, 주상이 그 고절(苦節)을 가상히 여겨 특별히 집을 지어 내려주고 또 의복과 식량을 이어주게 하였다 한다. 그러나 성질이 편협하고 급하여 형벌이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는 평도 있다. 1563년 2월 호군으로 재직 중 졸하였다.
- 이영수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 이원석(1981년) . . . . 1회 일치
* 《[[불꽃 속으로]]》 (2014년, TV조선) - 연봉출 역
- 이인민 . . . . 1회 일치
[[1392년]] 7월 조선 건국 후 아들 이직(李稷)이 개국공신(開國功臣)ㆍ좌명공신이 되어 태조(太祖) 때에 성산부원군(星山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증 추충익대보조공신(推忠翊戴補助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경연판이조사 감춘추관사(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經筵判吏曹事監春秋館事)에 [[추증]]되었다.
- 이재황(배우) . . . . 1회 일치
||<rowbgcolor=#696969>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이정우 (1950년) . . . . 1회 일치
|후임자 = [[박봉흠]]
- 이종혁 (배우) . . . . 1회 일치
* [[2018년]] [[MBN]] 수요드라마 《[[연남동 539]]》 ... 상봉태 역
- 이종훈(코미디언) . . . . 1회 일치
**〈봉숭아학당〉
- 이주승(영화배우) . . . . 1회 일치
||<#6699CC> '''{{{#white 개봉 연도}}}''' ||<#6699CC> '''{{{#white 제목}}}''' ||<#6699CC> '''{{{#white 활동}}}''' ||<#6699CC> '''{{{#white 배역}}}''' ||
- 이중환(법조인) . . . . 1회 일치
||<#5c6bc0><-2> [[박근혜|{{{#white __박근혜__}}}]] {{{#white 측근 / 대리인}}} ||<-3> __[[김기춘]]__ · __[[우병우]]__ · ^^故^^[[이춘상]] · __[[정호성]]__ · [[이재만(1966)|이재만]] · [[안봉근]] · [[박지만]] · [[박근령]] · ''[[신동욱(1968)|신동욱]]'' [br]/ [[이중환(법조인)|이중환]] · [[손범규(법조인)|손범규]] · [[채명성]] · [[서성건]] · [[서석구]] · [[전병관]] · [[이상용(법조인)|이상용]] · [[황성욱]] · [[박진현]] · [[유영하]] . [[정기승]] ||
- 이지찬 . . . . 1회 일치
|연봉 = 2,800만원 (2017년)
- 이태현(씨름) . . . . 1회 일치
고교 때부터 그 연령대의 지존으로 통했으며, 1994년 절친이자 라이벌인 [[백승일]][* 백승일은 2004년 LG투자증권 씨름단 해체 사태 후 순천시청에서 잠시 뛰다가 2005년 2월 설날 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트로트]] 가수로 전향.]을 꺾고 처음으로 천하장사에 올랐다.[* 문제는 당시 5판 3선승제로 치뤄지던 결승전에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두 선수가 2:2의 상황이 되자 5차전에서 서로 섣불리 기술을 못걸고 눈치만 보는 상황이 이어지자 연맹에서는 긴급 이사회를 소집해서 경기시간이 계속 길어질경우 두 선수의 몸무게를 측정하여 더 가벼운 쪽에 우승을 준다는 계체승이라는 황당한 규칙을 신설하였고 당시 백승일을 의식하며 의도적으로 몸무게를 좀 더 가볍게 유지하던 이태현이 결국 계체승을 거두었고 이후 한동안 이태현에게는 저울장사라는 오명이 따라붙었고 제2의 이만기라 불리던 백승일이 의욕을 잃고 하락세를 타면서 프로씨름이 인기가 점차 시들해져 갔다.] 이후 백승일을 비롯 이태현의 7개 대회 연속 우승을 저지했던 '모래판의 귀공자' 황규연, '들소' 김경수, 신봉민 등과 라이벌리를 이루며 1990년대 씨름판의 인기 스타로 발돋움했다. 특히 당대 씨름선수들과는 달리 잘생긴 외모로 '''모래판의 황태자'''라는 별명으로 최고 인기 스타로 자리잡게 된다. 2000년대 들어 이태현보다 한 뼘 정도 큰 골리앗 [[김영현]], 테크노 골리앗 [[최홍만]] 등의 후배들이 등장했지만, 이들도 이태현 앞에서는 버로우였다.
- 이평 (1572년) . . . . 1회 일치
[[경상북도]] 출신으로,[[이수형 (1435년)|도촌 이수형]]의 셋째 아들 참봉 [[이준근]](李峻根)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이효린]]이고, 어머니는 영천 이씨(永川李氏)로 [[생원]] [[이여량]](李汝樑)의 딸이고 [[장악원]] 직장 찰방 이현준(李賢俊)의 손녀이다.
- 이한응 (1849년) . . . . 1회 일치
[[1870년]](고종 7년) 봄 무과(武科)에 급제, 영의정 [[김병학]](金炳學)의 건의로 특별히 가설 내승(內乘)에 임명되었다.<ref name="dager1">고종실록 7권, 1870년(고종 7년, 개국 479년) 5월 20일 을유 1번째기사, 조선 개국(開國) 479년 문희묘, 의소묘, 육상궁, 연호궁, 선희궁에 전배하다</ref> [[김병학]]은 '(故) 충장공(忠壯公) 이복남(李福男)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절개와 의리에 대해서는 열성조(列聖朝)로부터 여러 번에 걸쳐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받았습니다. 이번에 그의 봉사손(奉祀孫)이 과거에 합격하였으니, 마땅히 조정에서 뜻을 보여주는 거조(擧措)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종전에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선전관(宣傳官)과 내승(內乘) 중에 가설(加設)하여 단부(單付)한 전례(前例)가 이미 많았다'며 그에게도 선전관이나 내승을 가설하여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ref name="dager1"/>
- 이현보 . . . . 1회 일치
[[1498년]] (연산군 4)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32세에 벼슬길에 올라 예문관검열·춘추관기사관·예문관봉교 등을 거쳐, 1504년(연산군 10) 38세 때 사간원정언이 됐다.
- 이현우 (가수) . . . . 1회 일치
* [[2013년]] [[문화방송|MBC]] 주말 특별기획 드라마 《[[백년의 유산]]》 - 강봉수 역
- 이효정(남배우) . . . . 1회 일치
* 1991년 MBC 일출봉
- 이휘향 . . . . 1회 일치
* 1993년 [[남양알로에]] 알로봉
- 이희성 (1988년) . . . . 1회 일치
|연봉 = 2,500만원 (2013년)
- 일곱개의 대죄/191화 . . . . 1회 일치
* 멀린은 그것을 봉하며 "좋은 모르모트가 생겼다"고 기뻐한다.
- 일곱개의 대죄/192화 . . . . 1회 일치
* 입구를 봉쇄하고 그대로 도주에 성공.
- 일곱개의 대죄/203화 . . . . 1회 일치
* 그때 숲의 상공으로 거대하고 분노한 마력이 다가오고 있다. 수많은 십계의 군세가 그곳을 통해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선봉엔 "십계"의 [[몬스피드]], [[데리엘]], [[프라우드린]], [[갈란]], [[메라스큐라]] 등이 있다.
- 일곱개의 대죄/220화 . . . . 1회 일치
* 다시 술잔이 한 바퀴 돈다. 디안느는 문득 성전시대에서 풀지 못했던 의문을 고서에게 물었다. 대체 진짜 고서는 어떻게 성전을 종결지었냐는 것. 할리퀸도 자기도 궁금했다고 말을 보탠다. 하지만 고서는 난처한 기색이다. 그리고 성전시대 일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다른 인워들은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어지간히 지식이 있는 멀린이나 당시 참전했던 멜리오다스 조차 고서가 직접 성전을 끝냈다는 말에 대해서는 금시초문이다. 일단 에스카노르가 "여신족이 자신들의 몸을 희생해 마신족을 봉인해서 끝났다"는 전승을 읊는다. 멜리오다스는 "어둠의 관"을 혹시 고서가 만든게 아닌가 추측해 보지만 멀린이 그것만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건 거인 명공 "다프즈"란 인물이 만든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 임동규(정치인) . . . . 1회 일치
2014년 4월 12일,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최용호 전 강동구 부구청장과 [[서울특별시]] [[강동구]][[구청장|청장]] [[경선]]에 참여하여 승리했으나, 경선 과정에서 '''돈봉투를 돌려서 검찰에 압수수색을 당하는 바람에''' 최용호 후보로 변경되었다.
- 임은정(법조인) . . . . 1회 일치
2012년 12월 28일,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 위반죄로 1962년 유죄선고를 받은 [[윤길중]][* [[윤길중]]은 죽산 [[조봉암]]과 가까운 사람으로, 진보당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오랜 세월 옥살이를 한 정치인이다.] 진보당 간사장에 대한 재심 결심공판에서도 무죄를 구형했다.[* 무죄 구형은 굉장히 드문 일이다.] 물론 법원도 당일 무죄를 선고했다.
- 임혁주 . . . . 1회 일치
* 1995년 [[문화방송|MBC]] - 《[[제4공화국 (드라마)|제4공화국]]》 - [[이학봉]] 역
- 장가용 . . . . 1회 일치
| 부모 = [[장기려]](부), 김봉숙(모)
- 장남교 . . . . 1회 일치
주로 장남에게는 가문을 이어갈 것, 며느리 측에게는 친정보다 시댁을 중시할 것, 시부모를 봉양할 것, 아들을 낳을 것 등을 요구한다.
- 장서희(1972) . . . . 1회 일치
||<tablebordercolor=#9966FF><rowbgcolor=#9966FF>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비고'''}}} ||
- 장석조 (판사) . . . . 1회 일치
* 대전지방법원 제1형사부 재판장으로 재직하던 2003년 12월 5일에 1999년 1월 7일과 9일 이종기 변호사가 "판,검사 등에게 대가성 소개비를 지급했다"는 등의 허위 보도로 이종기 변호사의 명예를 훼손하고 업무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되어 1심에서 징역 4-8월 집행유예 1-2년, 사회봉사명령 120시간 등을 선고받은 [[대전MBC]] 기자들에 대한 항소심에서 "1999년 1월 9일 보도내용중 당시 판,검사들이 이종기 변호사로부터 떡값이나 전별금을 받았지만 뒷거래를 없었던 만큼 미필적이라도 허위에 해당한다"고 하면서도 "수사기관이 아닌 언론이 정확한 사실을 가려내기 힘든 점과 이종기 변호사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점으로 미뤄 비방한 것으로 볼수 없다"며 일부 무죄를 선고하면서 "당시 보도가 법조계의 전관예우라는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고 보도 이후 법조계에서 이같은 관행이 해소된 점과 국민의 알권리 등 언론의 공익적기능 등을 고려했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하고 강모씨에게 벌금 500만원과 고모씨, 석모씨에게 벌금 700만원을 각각 선고하면서 김모씨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0010361]</ref>
- 장성원 (배우) . . . . 1회 일치
| 봉우진
- 장성집 . . . . 1회 일치
포도대장은 그를 상급 [[재판소]]로 이송했다. 장성집은 관청의 아치들이 왜 자신을 아무런 [[심문]]이나 [[고문]]도 없이 내버려 두는지 알려달라고 외쳤다. 이미 그는 정신병자로 오해받고 있었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포장은 끊임없이 배교하라고 충고하였으나, 그는 포장의 충고를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는 곤봉으로 수차례 맞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결국 그는 [[1839년]] [[5월 26일]], 54세의 나이로 [[한양]]에 있는 감옥에서 [[순교]]하였다.
- 장세용 . . . . 1회 일치
* TK에서, 그것도 경상북도 구미시에서, 비록 기초자치단체장이라고 해도 '''민주당 당적으로 한 번만에 당선된 기적을 일으켰다.''' TK 지역 타파의 아이콘인 [[김부겸]] 장관도 두 번의 낙선 이후 세 번째 도전만에 대구에 민주당 당적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아주 놀랄 만할 일이다.[* 물론 상대가 경기도지사에서 도지삽니다 발언을 쏟아낸 김문수였고, 당시 새누리당이 대구를 자기들의 표밭이라고 대충신경쓴 덕분이기도 하지만.] 물론 자유한국당의 공천에 반발해서 무소속으로 뛰쳐나온 보수 성향 김봉재 후보가 9.5% 정도, 범야권인 [[바른미래당]] 유능종 후보가 또다시 7.5%를 들고 나르면서 (비록 TK긴 해도) 1여3야라는 역대급 꿀조건이 형성되었다는 것도 고려하긴 해야 한다. 참고로 '''[[김해영|본인도 당선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 장운호 . . . . 1회 일치
|연봉 =
- 장재훈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2년)
- 장종덕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원(2010년)
- 전근표 . . . . 1회 일치
|연봉 = 3,300만 원 (2010년)
- 전라북도/인물 . . . . 1회 일치
군산시 - [[강근호]] [[강봉균]] [[남능미]] [[박윤경(가수)|박윤경]] [[박화요비]] [[이정재(배우)|이정재]]
- 전상렬 . . . . 1회 일치
|연봉 =
- 전성군 (1488년) . . . . 1회 일치
사후 여섯째 아들 [[이량 (조선)|이량]]의 영귀로 [[증직|증]]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증직|증]] 자헌대부 호조판서에 추증되고 다시 [[증직|증]]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가 다른 후손들의 출세로 [[증직|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전성군(全城君)에 추봉되었다. 후일 [[대한민국]]의 초기 정치인인 [[이기붕]]은 그의 아들 [[이량]]의 직계 후손이었다.
- 전성인 . . . . 1회 일치
2012년 [[안철수]] 후보의 대선캠프에 합류하여 안후보의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일을 맡기도 했으나<ref>{{뉴스 인용 |제목= 장하성·전성인·이봉의 3인방 앞세워 安, 재벌개혁 선명성 놓고 文과 신경전 |url=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1015031206108&type=& |출판사=조선일보 |날짜= 2012-10-15 |확인날짜=2013-02-10}} </ref> 향후 진로에 관한 이견 차이로 그만두었다.<ref>{{뉴스 인용 |제목=전성인 교수도 "안철수 정책 자문 그만하겠다" |url= http://m.chosun.com/svc/article.html?sname=news&contid=2013112103960&d=2013112103960 |출판사=조선일보 |날짜= 2013-11-21 |확인날짜=2018-01-17}} </ref> 같은 진보적 경제학자인 [[김상조]]의 공정거래위원장 청문회 과정에서 김상조를 “우리보다도 더 깨끗한 사람”이라며 공개적으로 옹호한 바 있다.<ref>{{뉴스 인용 |제목= “김상조의 도덕적이고 청렴한 삶을 증언합니다” |url=http://m.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797666.html?_fr=gg |출판사=한겨레 |날짜= 2017-06-06 |확인날짜=2018-01-17}} </ref>
- 전소민(배우) . . . . 1회 일치
||<tablebordercolor=#FF92B1><rowbgcolor=#FF92B1>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전순옥 . . . . 1회 일치
* 2006.06 ~ 2012.03 : 한국패션봉제아카데미 대표이사
- 전일수 . . . . 1회 일치
|연봉 =
- 전종화 . . . . 1회 일치
|연봉 =
- 전종환 . . . . 1회 일치
|봉급 =
- 전형도 . . . . 1회 일치
|연봉 =
- 전혜빈 . . . . 1회 일치
||<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전호영 . . . . 1회 일치
|연봉 =
- 전효성 . . . . 1회 일치
여자 [[아이돌]]에겐 보기 드문 '''선홍빛 [[잇몸]]'''을 선보이는데다 각종 방송 활동에서 ~~하라는 예능은 안하고~~내숭 없이 잘 웃는 모습을 자주 노출해 현재까지 남성팬들이 꽤 많다. 그래서 [[박명수]], [[신봉선]]과 함께 [[http://www.artsnews.co.kr/news/105890|연예계 3대 잇몸으로 꼽히기도 했다.]][* 다만 [[한국방송공사|KBS]] [[백점만점(예능)|백점만점]]에서 본인이 매력 포인트라며 어필한 그 잇몸 때문에 CF 감독한테 까였고(...) 결국에는 꼴등으로 뽑히고 말았다. [[안습]]. 근데 어느 날부터 자연스레 고정멤버가 된 듯하다. 이제까지 팀내에서 예능을 담당한 선화 빼고는 시크릿 멤버 중 처음으로 예능프로 고정을 획득한 것이다. 오오.~~다만 예능감은 미달수준~~ ~~그래서 별명이 다큐효성(...)~~] 사실 이 잇몸으로 주목받는 것이 유명해지고 나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원래 어릴때부터 주변사람들에게 인지가 많이 되어 있었던 특징이었는데, 이미 [[오소녀]] 시절에도 팀 내에서 별명이 '잇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2013년 MBC 파일럿 프로그램 화수분에서 [[원더걸스]] [[유빈]]을 대신해서 출연한 [[김신영]]이 전효성에게 잇몸이라고 부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여담으로 [[http://www.tagstory.com/video/100646262|무대 직전에 확인하는 부위가 잇몸(...)이라고 한다.]][* 여가수들이 웃을때 립스틱이 앞니에 묻는 경우가 있는데 본인은 특히 그런 경우가 많아서 그렇다고 한다.]
- 절대가련 칠드런/444화 . . . . 1회 일치
* 아오이와 유리는 모포에 둘둘 말려서 객식에 격리되어 있었고 환각으로 능력이 봉인됐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 절대가련 칠드런/464화 . . . . 1회 일치
* 일행은 두 사람을 방 안으로 옮기고 [[산노미야 시호]]가 혈청이 정상적으로 레어 메탈을 정화시키는걸 확인한다. 하지만 두 사람을 여기에 방치할 수는 없다. 후지코가 오면 다시 감염될 것이기 때문. 하지만 텔레포트도 봉인된 상태라 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건 무리다. 효부는 여기서 이대로 후지코와 대결하자고 재촉한다.
- 절대가련 칠드런/471화 . . . . 1회 일치
* 카가리와 파티는 에스퍼 형무소의 특성에 대해서 설명하며 미오의 억지를 논파해 버린다. 그녀의 초능력이 통한건 "외벽에는 ECM이 영향을 주지 않게" 만들었기 때문. 내부에는 철저하게 내향성 ECM으로 봉쇄돼있고 텔로포트로 뚫으려고 사도하다간 벽에 걸린 채로 저지 당한다. 게다가 미오가 넘어가려 한 것은 그냥 외벽이고 내부에 따로 격벽이 존재한다. 그 안이 본체이며 보다 강력한 ECM이 작동하고 있다.
- 절대가련 칠드런/474화 . . . . 1회 일치
* 카오루는 미오 일행과 합류하자마자 [[팀 토이]]의 갓 로보를 박살내나 탑승자가 없는 미끼. 강력한 ECM이 펼쳐져 일시적으로 초능력이 봉해진다.
- 정광운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4년)
- 정근모 . . . . 1회 일치
* (사)서울특별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
- 정명환 . . . . 1회 일치
* 1989년 KBS 《[[울밑에 선 봉선화]]》
- 정몽규 . . . . 1회 일치
또한 정몽규 회장은 HDC현대산업개발의 아이파크 봉사단원으로 직접 활동하고, 2015년 사회공헌 재단인 [[포니정]]재단을 설립, 기부하며 나눔 경영을 강조하고 있다. [[포니정재단]]은 출연금 571억원 규모의 장학재단으로 [[포니정 혁신상]], [[학술지원]], [[장학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 정몽근 . . . . 1회 일치
* 할아버지 : 정봉식
- 정몽원 . . . . 1회 일치
*할아버지 : 정봉식(鄭捧植)
- 정미남 . . . . 1회 일치
* 2005년 《부라보 김순봉》(단편) ... 버스 안 남자 역
- 정병희 . . . . 1회 일치
|연봉 =
- 정상교 . . . . 1회 일치
|연봉 =
- 정성룡(야구선수) . . . . 1회 일치
1992년 시즌 종료 뒤 ~~왼손 유망주라면 사족을 못쓰는 [[김응용|코감독]]에 의해~~ [[해태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었는데, 그해 해태가 삼성에게 완봉을 당한 경기가 있었는데 그경기에서 연타석 홈런을 쳤기 때문인 것이 유력하다. 즉 그 시즌 홈런 3개중 2개를 코감독 앞에서 그것도 연타석으로 쳤으니 [[인생경기]]를 한 셈.[* 다음 해에 김성래와 양준혁이 괴물활약을 한 것을 보면.. 프로생활을 3년이나 연장하고 한국시리즈 우승반지도 꼈으니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1993~1995년까지 해태의 몇 안되는 좌타자로 활약하다가 은퇴했다. 원조 10번이었던 [[장효조]]에 대한 올드 삼빠들의 대한 그리움과 그 이후 10번을 단 [[양준혁]]의 인기에 의해 지금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그리고 해태에서 10번을 물려받은 선수는 당시 신인이였던 [[장성호]]였지만 1년만에 1번으로 갈아탔다. 공교롭게도 그 이후 10번을 단 선수가 [[최훈재]] 그리고 [[양준혁]].
- 정성현 (배구선수) . . . . 1회 일치
군입대전 연봉 2억원에 재계약을 하였다.
- 정소희(1969) . . . . 1회 일치
* 《울밑에 선 봉선화》 (1989년, KBS1)
- 정수성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 정승원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 정용화 . . . . 1회 일치
* [[2010년]]~[[2011년]] 화장품 - 엔프라니 홀리카 홀리카 마술봉 마스카라
- 정욱(1973) . . . . 1회 일치
* 2007년 《[[외과의사 봉달희]]》 (SBS) - 장지혁 역
- 정은표 . . . . 1회 일치
* [[라이터를 켜라]] - 봉구의 예비군 동창 역 (우정출연)
- 정인숙 (1945년) . . . . 1회 일치
[[정성일]]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정 전 총리와 만나지는 못했지만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눈물의 부자상봉을 했으며, 외삼촌 등의 만류로 친아버지의 입장을 생각해 소 취하를 스스로 했다’고 밝혔을 뿐 금전적 요구나 지원 등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이 없었다.<ref name="ilyo01"/> [[정종욱]]은 소송 취하 배경에 대해“조카 정씨가 아버지의 존재를 확인했다”며 “그를 살려야 가족이 살 수 있다는 생각으로 소송을 취하했다”고 말한 바 있다.<ref name="ilsa01"/> 소송 취하 배경에 대해 [[2007년]] [[4월]]의 교포사회 한 언론은 보도에서 “정 씨와 사귀던 한 여인이 ‘정 씨가 91년 친자확인소송 취하로 80만 달러를 생부에게 받았다는 것만 들었다’고 전화인터뷰에서 밝혔다”는 진술을 인용해 보도했다.<ref name="ilsa01"/>
- 정재학 (1856년) . . . . 1회 일치
임 대기자는 [[정재학]]에 대해 " 거리의 일개 건달에서 수만금의 재산가가 되고 군수라는 관직에 오르기도 했고 풍운아인데 [[대구은행]] 설립을 통해 일제의 대항 세력이 되어 지체를 높인 특이한 존재 "라고 지적했다. 이어 "그의 대구은행 설립은 대구를 [[봉건시대]]에서 [[자본주의]]경제로의 이행으로 이끄는 혁명이자 국권회복을 위한 의지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어 "[[정재학]]이 설립했던 [[대구은행]]은 일제에 대한 커다란 저항세력으로 한국 사람들의 저항의식을 길러주는데 큰 몫을 했다"고 강조했다.<ref>매일경제 1982년 12월 8일 9면 재계산맥 대구은행 10편</ref>
- 정정아 . . . . 1회 일치
* 2013년 미개봉 <공사중> - 진상녀 역
- 정정용 . . . . 1회 일치
|후임자 = {{국기그림|대한민국}} [[김봉길]]
- 정종원 . . . . 1회 일치
정재학의 3남 정종원이 조흥은행장으로 봉직하던 1957년 3월말 실시 된 귀속주입찰에서 민 씨 가문은 [[민덕기]](조선맥주)를 중심으로 계성(주), 휘문재단, 영보합명회사 및 민병도 당시 조흥은행 전무 등의 지분을 합쳐, 7만8000 주를 확보하며 4만6000 주에 그친 정종원, 정운용 가문을 압도했다. 그러나 민 씨 가문의 주력 기업이었던 조선맥주의 경영악화로 인해 민 씨가문은 조흥은행 주식을 팔아 긴급자금을 마련해야 했다.
- 정진(1976) . . . . 1회 일치
* 《[[인생이여 고마워요]]》 (KBS2, 2006년) - 황봉수 역
- 정홍준 . . . . 1회 일치
|연봉 =
- 정환덕 . . . . 1회 일치
군부협판 의채의 아들로 [[1857년]] 탄생하였다. 소년시절부터 태을노인(太乙老人)에게 역학을 수학 받았으며, [[경북]] [[영천]]에서 거주하였다. 어느 날 영천 황학사의 한 암자에서 역학(주역)을 공부하다가 잠깐 졸았는데 꿈에 하얀 도포를 입고 손에는 청령장을 짚은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자네가 역학을 공부한지 7년이 되었다. 그러나 너는 글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글만 줄줄 읽었다. 그러니 말짱 헛공부를 한 것이다. 이제부터는 글의 행간을 읽으라. 행간에 숨은 뜻을 찾아서 읽도록 하라. 아무리 공부해도 너에게 큰 행운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작은 행운은 있을 것이니 여기서 꾸물댈 것이 아니라 [[서울]]로 올라 가보아라.”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말을 믿고 [[1897년]] 가을, 나이 40세이 되던 해에 서울로 상경하였다. 상경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동부승지 [[윤명구]](尹鳴九)를 만나 윤명구가 역학을 할 줄 안다고 하여 고종황제의 측근 경운궁 전화과장(電話課長) 이재찬(李在纘)을 소개 해주었다. 이재찬이 [[고종황제]]에게 소개하여 특명으로 [[1901년]](광무 5) 음12월 5일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다가 그 다음날 면직되었다.
- 제주시 . . . . 1회 일치
봉개동''' || 奉蓋洞 || 3,574 || 47.34
- 조청희 . . . . 1회 일치
|연봉 =
- 조현근 . . . . 1회 일치
|연봉 =
- 조혜선(탤런트) . . . . 1회 일치
이은봉 역
- 존 딜린저 . . . . 1회 일치
존 딜린저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로 2009년 개봉한 [[퍼블릭 에너미]]가 있다.
- 주토피아 . . . . 1회 일치
동물들이 모피와 고기가 되는 장면이 너무 처참하여 몇몇 국가에서는 18금으로 개봉했다.
- 주현미 . . . . 1회 일치
||<width=30%> [[전영록]][br]하얀 밤에[br](1987) || → ||<#FFFFA1><width=30%> '''주현미[br]신사동 그 사람[br](1988)''' || → ||<width=30%> [[현철]][br]봉선화 연정[br](1989) ||
- 지수원 . . . . 1회 일치
* [[2016년]] MBC [[가화만사성(드라마)|가화만사성]] ... 봉삼숙 역
- 진격의 거인/80화 . . . . 1회 일치
* 그는 저 신병들에게 사기나 다름없는 설득을 해야하고 그 자신이 선봉에 서야 한다고 하면서 그 대가로 모두가 죽을 거라고 한다.
- 진격의 거인/92화 . . . . 1회 일치
* 지휘관 마가트와 콜트는 전선의 동향을 주시한다. 마가트는 콜트의 의견을 묻는데, 그는 적 전선을 충분히 타격했으니 전사대를 물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적의 퇴로를 봉쇄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의 시선은 곧 하늘로 향한다. 이제 상공의 비행선이 육안으로도 뚜렷하게 보인다. 마레의 최주력이자 최고전력. 작전의 성패는 그들 몫이다.
- 진격의 거인/94화 . . . . 1회 일치
* 상봉을 마친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간다. 파르코도 그 행렬에 끼어있었지만 길 가장자리에 또다른 행렬을 발견하고 발걸음을 멈춘다. 엘디아인 부상병들이었다. 코스로라는 병사가 인솔 중이었다. 이들은 전방에서 오랫동안 참호를 파온 병사들이다. 하지만 심각한 부상을 당한데다 심적외상까지 발생했다. 이들은 가족도 돌아갈 곳도 없는 부류여서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된다. 이들의 상태는 한 눈에 봐도 폐인이다. 코스로가 "콰앙!"하고 폭발음을 모사하자 곧바로 패닉상태에 빠진다. 코스로는 그걸 보고 껄껄 웃는다. 파르코는 가족들이 형을 부축해서 먼저 가도록 하고 자신은 남아서 부상병들을 부축한다. 그는 다리 잃은 부상병의 완장을 바르게 채워주면서 꼭 괜찮아질 거라고, 당신은 이제 싸우지 않아도 된다고 위로한다.
- 진격의 거인/97화 . . . . 1회 일치
잠시 뒤 파르코는 그 병사를 알아볼 수 있는 사람과 마주쳤다. 수용구 출입구로 이어지는 큰 길이었다. 라이너는 너무나 밝은 얼굴로 달려오는 파르코를 보고 당황했다. 파르코는 본부 쪽으로 가고 있었다. 라이너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두고 온 물건이 있어 본부로 간다고 했다. 그리곤 이러고 있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다시 밝아진 얼굴로 출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편지봉투가 들려있었다. 라이너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차수연 . . . . 1회 일치
||<tablebordercolor=#7D6868><rowbgcolor=#7D6868> {{{#white '''개봉 연도'''}}} || {{{#white '''작품명'''}}}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차일목 . . . . 1회 일치
|연봉 =
- 창원시 . . . . 1회 일치
남부지방이라 평야를 연상하기 쉽지만 부산처럼 의외로 산이 많다. [[창원시/통합전|구 창원]] 시가지는 정병산, 대암산, 불모산, 장복산, 팔용산, 천주산에 둘러싸인 전형적인 분지 지형이며, 마산회원구 북쪽에는 무학산도 있다.봉림동에서 흘러나오는 창원천과 성주동에서 흘러나오는 남천이 합류하여 마산만으로 흘러나간다.
- 창작:IDF . . . . 1회 일치
파견 주둔지에서 민사작전을 담당한다. 공병대와 의무대로 구성되며, 피해 복구와 재건 작업, 민간인 구호 등을 진행한다. 배급소와 진료소를 설치하고 운영하여 민간인들에 대한 식량, 의료 서비스 공급 등의 업무를 한다. 파견 지역의 치안 확보와 재건에 기여하고 반군의 성장을 막는다. 각종 국제 구호 조직과 협력하고 있다. 또한 재해지에 나타나는 볼란티어(자원봉사자)를 보호하고 이들의 활동을 통제하는 임무도 맡는다.
- 창작:맹수인 . . . . 1회 일치
각 맹수인은 서로의 생김새에 따라 호랑이족,사자족,곰족,하이에나족,늑대족으로 나뉘며, 서로간의 교배는 가능한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서로의 혼혈들은 대개 배척받으며, 혼혈들은 보통 고산지등 '순혈'들에게 핍박받기 힘든 곳에서 자기들끼리의 소규모 마을을 이루고 산다. [* 단, 사자족과 호랑이족간의 혼혈인 '라이거일족'은 상티겔의 레잉정복과 적극적인 혼합,동화정책으로 인해 상당한 규모를 이루고 있었고, 이들은 이후 상티겔을 멸망시키고 그곳의 새로운 지배자가 된 레이먼의 탄압정책과, (하)티겔 왕국의 새로운 정착지를 줄테니 대신 복속해 달라는 제유에 의해 '라이겐프름 대공국'이라는, 하티겔의 새로운 봉신국이 된다.]
- 창작:좀비탈출/4-1-1 . . . . 1회 일치
녀석의 얼굴이 올라온다. 키스라도 하러 오는 것처럼. 뼈가 드러난 얼굴엔 이미 생전의 모습 같은건 보이지 않는다. 찢어진 근섬유가 엉망진창으로 말라붙어 있고 삭아버린 비닐봉투 같은 피부. 그리고 누렇게 변색된 앞니. 제발 가까이 오지마.
- 창작:좀비탈출/4-1-2-2 . . . . 1회 일치
녀석의 얼굴이 올라온다. 키스라도 하러 오는 것처럼. 뼈가 드러난 얼굴엔 이미 생전의 모습 같은건 보이지 않는다. 찢어진 근섬유가 엉망진창으로 말라붙어 있고 삭아버린 비닐봉투 같은 피부. 그리고 누렇게 변색된 앞니. 제발 가까이 오지마.
- 창작:좀비탈출/5-1-1-1-1 . . . . 1회 일치
나는 그제서야 바닥에 흩어져 있는 것들에 주목했다. 다양한 종류의 알약이었다. 조금 더 자세히 찾다 보니 약봉지도 찾을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근처 약국에서 제조한 것이었다. 몸살약이라고 적혀 있는데 제조한 날짜가…… 세상이 이렇게 되기 얼마 전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이렇게 되고 나서 제조할 수 있을리 없으니까.
- 창작:좀비탈출/5-1-1-1-2 . . . . 1회 일치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샤워를 했다. 옷은 그대로 비닐봉지에 담아서 버리고 몸에 찌들은 토트넘의 냄새와 체액을 씻어냈다. 수돗물의 오염을 의심했던 며칠 전에 무색하게 자연스럽게 수도를 틀었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받아들였다. 승리의 기분이었다.
- 창작:좀비탈출/5-1-1-2 . . . . 1회 일치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샤워를 했다. 옷은 그대로 비닐봉지에 담아서 버리고 몸에 찌들은 토트넘의 냄새와 체액을 씻어냈다. 수돗물의 오염을 의심했던 며칠 전에 무색하게 자연스럽게 수도를 틀었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받아들였다. 승리의 기분이었다.
- 창작:좀비탈출/5-1-2 . . . . 1회 일치
식량을 옮긴 뒤 깨끗히 몸을 씻었다. 물리진 않았지만 잠깐이나마 녀석들과 접촉했던 것은 찜찜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라디오 정보에선 녀석들에게 물리거나 체액이 혈관에 들어가지 않는 한은 안전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어디까지 진실일까? 혼란을 막아보려는 질병관리국의 정보조작이 아니란 증거가 어디에 있을까? 그러다가 내가 씻는 그 물이 며칠 동안 찜찜해서 쓰지 않았던 "수돗물"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하지만 뭐가 어떤가? 왠지 이젠 신경쓰이지 않는다. 체약이 묻었던 옷은 비닐봉지에 담아서 버렸다. 세탁을 하기엔 물이 아깝고 시간도 아깝다.
- 채상병 . . . . 1회 일치
|연봉 =
- 채상현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7년)
- 천호진 . . . . 1회 일치
| [[고봉실 아줌마 구하기]]
- 철인 28호 . . . . 1회 일치
2005년이 되면서 실사영화가 개봉. 연기력 있는 배우들이 등장하고, 한국에서도 관심을 가졌으나 아쉽게도 평가는 좋지못했다. 이후 오시이 버전인 연극판도 비슷한 평.
- 최경훈 . . . . 1회 일치
|연봉 =
- 최고은 (영화감독) . . . . 1회 일치
'''최고은'''([[1979년]] ~ [[2011년]] [[1월 29일]])은 [[대한민국]]의 [[시나리오 작가]]이자 [[영화 감독]]이다. [[2002년]]에 개봉된 [[영화|단편 영화]] 《연애의 기초》로 데뷔했다. [[빈곤]] 속에서 [[갑상선암|갑상선 항진증]]과 [[췌장암|췌장염]]을 앓다가 2011년 [[1월]]에 사망했다 향년 33세<ref>{{뉴스 인용
- 최규하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최길성 . . . . 1회 일치
|연봉 =
- 최동익 . . . . 1회 일치
|봉급 =
- 최두선 . . . . 1회 일치
[[1971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되었다. 같은 해 적십자사 총재로서 이산가족 상봉을 건의하여 성사시켰고, 북측의 적십자사를 설득하여 [[1972년]]의 남북적십자회담을 이끌어 냈다.
- 최문식 . . . . 1회 일치
그 뒤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새로 선임된 이광종 감독의 부름을 받아 [[대한민국 U-20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로 선임되였으며<ref> [http://www.yonhapnews.co.kr/sports/2013/11/15/1003000000AKR20131115070900007.HTML/ 최문식, AG 축구대표팀 코치로 합류] </ref>, [[2013년 AFC U-22 축구 선수권 대회]]는 4위에 그쳤지만, [[2014년 아시안 게임]]에서 한국의 28년만의 금메달 획득에 큰 기여하였다. 이후 [[2016년 하계 올림픽]]까지 이광종과 코칭스테프를 맡을 예정이였으나 [[2015년 킹스컵]] 출전을 앞두고 이광종 감독이 급성 [[백혈병]]으로 사임하자 감독 대행으로 대표팀을 지휘하였다. 대행으로서 2승 1무로 대회의 우승을 이끈 뒤<ref> [http://m.sports.naver.com/kfootball/news/read.nhn?oid=382&aid=0000316559/ 9일 킹스컵 우승 ‘감독 교체-우즈벡 폭력-편파 판정, 악재 딛고 쾌거’] </ref> [[신태용]] 감독에게 지휘봉을 넘겨주고 다시 수석 코치로 신태용을 보좌하였다.
- 최민창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7년)
- 최성민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최성재(배우) . . . . 1회 일치
||<#1e90ff> {{{#white '''개봉 연도'''}}} ||<#1e90ff> {{{#white '''제목'''}}} ||<#1e90ff> {{{#white '''배역'''}}} ||<#1e90ff> {{{#white '''비고'''}}} ||
- 최승민 (1991년) . . . . 1회 일치
|연봉 =
- 최승자 . . . . 1회 일치
무한을 향해 스스로 열리는 꽃봉오리처럼.
- 최승환 . . . . 1회 일치
|연봉 =
- 최연오 . . . . 1회 일치
|연봉 =
- 최우석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최윤동 . . . . 1회 일치
* 중국 봉천성 신흥학교 교관
- 최윤철 . . . . 1회 일치
|연봉 =
- 최인영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 최재성(배우) . . . . 1회 일치
드라마 "고교생 일기"에 출연하면서 연기자로 데뷔했다. 젊은 시절 잘생기면서도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외모 덕분에 일찌감치 주목을 받았으며 충무로의 대배우로 아직까지도 유명한 [[박중훈]]이 중년 이후에도 젊은 시절 가장 라이벌 의식을 느꼈던 배우로 항상 언급할 정도로 잘나가던 청춘스타였다. 당시 마치 [[제임스 딘]]을 연상케 하는 '강한 인상의 미소년 외모를 가진 반항기 가득한 고등학생' 이미지로 크게 사랑 받았으며[* 이장호의 외인구단 개봉 당시5살 연상인 [[이보희(배우)|이보희]]와 동갑내기 커플로 나온 최재성을 보고 사람들이 내린 평가가 '최재성은 반항기 가득한 청소년같은데 이보희는 아무리 봐도 20대 중반은 되어 보여서 둘이 동갑으로 보이지 않는다'였다고 한다.]이 이미지는 80년대 초중반 그의 이미지를 대표하게 된다.
- 최재웅 (배우) . . . . 1회 일치
|rowspan="5"|이석봉 역
- 최재환(배우) . . . . 1회 일치
||<rowbgcolor=#c0c0c0> {{{#ffffff '''개봉 연도'''}}} || {{{#ffffff '''제목'''}}} || {{{#ffffff '''배역'''}}} || {{{#ffffff '''비고'''}}} ||
- 최정원(1981년 4월) . . . . 1회 일치
||<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white '''비고'''}}} ||
- 최정원(남자배우) . . . . 1회 일치
가수뿐만 아니라 [[드라마]]에서 배우로도 활동들을 했는데 MBC "아가씨와 아줌마 사이" - 둘째 아들 역 (2004), MBC "떨리는 가슴"- 정현 역 (2005), SBS "무적의 낙하산 요원"- 최선 역 (2006), KBS2 "[[선녀가 필요해]]"- 금모래 역 (2012), MBC '''[[딱 너같은 딸]]''' - [[안진봉]] 등을 했다.
- 최정호 (성우) . . . . 1회 일치
* 2010.05.02 이장욱 <변희봉> '''(만기)'''
- 최지해 . . . . 1회 일치
* 2004년 [[KBS2]] 월화드라마 《[[오!필승 봉순영]]》
- 최진희(가수) . . . . 1회 일치
[[SM엔터테인먼트]]의 사장 [[이수만]]과 같이 [[롯데칠성음료]]의 --[[이수만]]의 흑역사-- 따봉 CF에서 같이 출연해서 CM송을 불렀다. --그리고 [[이수만]]은 CF를 찍으면서 번 돈으로 SM을 만들게 되었다--
- 최태원 (야구인) . . . . 1회 일치
|연봉 =
- 최홍만 . . . . 1회 일치
이러한 여론은 2007년 12월 8일 월드 그랑프리에서 벤너에게 또 다시 패하면서 가속화된다. 그 와중에 연예계로 진출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다가 까이기도 했다. 12월 30일 야렌노카에서 [[에밀리아넨코 효도르]]를 상대로 보여준 선전[* 전직 씨름선수답게 표도르를 테이크다운시키는 데 성공하고 이후 파운딩을 엄청나게 날렸다. 정타는 없었지만. 파운딩을 열심히 날리다가 암바로 패.]으로 잠시 가라앉았으나 2008년 9월 바다 하리전과 2008년 12월 레이 세포전을 계기로 폭발하게 된다. 특히 2008 월드 그랑프리에서는 하락세가 뚜렷한 세포를 상대로 졸전을 벌인 끝에 스피드에서 농락당하며 세포의 [[굴욕기]]인 노가드[* 세포가 한창 전성기였을 무렵 사용하던 전술로, 당시에는 기량의 하락으로 거의 봉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홍만에게 다시 썼다'''.]에 관광당하는 굴욕적인 결과를 냈다.
- 최훈재 . . . . 1회 일치
|연봉 =
- 추성건 . . . . 1회 일치
|연봉 = 3,800만원
- 츠라츠라 와라지 . . . . 1회 일치
그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대립할 때 영주와 장남이 이에야스 군과 싸우다 전사하여 차남 '쿠마다 테루타카'가 가문을 이었고, 이에야스는 화친 후 쿠마다를 묶어놓기 위해 히데요시를 움직여 테루타카를 억지로 이혼시키고 도쿠가와 가문의 여식과 결혼시켰다. 이 때의 원한이 대를 이어 내려왔고, 이 때문인지 후임 영주 쿠마다 타카토시(테루타카와 전처의 소생)가 석연찮게 급사하고 그 아들 미츠타카는 2차례에 걸쳐 전봉당해 오카야마 지방에 자리잡게 되었다.
- 카리아게 . . . . 1회 일치
[[에도 시대]]에, 다이묘 제후가 재정 궁핍을 막기 위하여, [[가신]](家臣)에게 빌려 쓰는 형식으로 감봉을 행했던 것에서 유래한다.
- 카모 . . . . 1회 일치
[[일본어]]로 [[오리]]라는 뜻. [[속어]]로 [[호구]], [[봉]]을 뜻하는 말로도 쓰인다.
- 카쿠스 . . . . 1회 일치
꺠어난 헤라클레스는 소떼의 흔적을 쫓아가려 했는데, 소 몇 마리가 울기 시작하자 카쿠스가 숨긴 동굴 속의 소떼들이 대답하는 울음 소리를 내서 속임수가 폭로되었다. 헤라클레스는 당장 카쿠스를 쫓아가서 곤봉으로 때려 죽였다.
- 칼리파 하프타르 . . . . 1회 일치
2014년 2월, 하프타르는 TV를 통하여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일반 국민회의에 반대하는 봉기를 일으키라고 선언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 의회 의사당을 장갑차와 로켓포로 공격하여 의회 권한 정지를 선언했으며, 국민군은 벵가지에서 이슬람 무장단체 '안사르 알 샤리아' 등 이슬람계 세력에 공격을 퍼부었다. 이 사실상 [[쿠데타]]를 계기로 하여 리비아 국민군에는 세속주의 반군 세력이 모두 결집하게 된다. 2014년 6월 국민투표(유권자 중 18%, 약 63만 명 투표)를 거쳐 동부지역에서는 대표자 정부(the House of Representatives)가 2014년 8월 4일 창립되어 일반 국민회의를 대체했다. 하프타르는 리비아 국민군(the Libyan National Army)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 켄카양성패 . . . . 1회 일치
본래는 사무라이(무사)들의 법도이며, 양자를 모두 처벌하는 것은 사무라이가 무력을 함부로 휘두르지 못하게 하는 의미가 있다. 이런 관습이 나타난 이유는 사무라이들은 특정한 가문 아래에서 봉건적으로 조직되어 있어, 무력을 휘둘러서 서로 정당한 이유를 대고 보복전을 벌이면 결국 끝이 없고 이러다보면 다른 세력에게 먹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 크리미널 마인드 . . . . 1회 일치
* 대부분의 사건에서 [[DNA]]나 [[지문]] 같은 증거가 없어서 [[CSI]]가 활약할 여지를 봉쇄한다(…). 사건의 주제상 사건을 프로파일링--이라는 이름의 무당질--으로 해결하기 위한 것인듯.
- 크림 전쟁 . . . . 1회 일치
[[흑해]] 연안이 아닌 곳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영국과 프랑스의 함대가 [[발트해]]의 [[크론슈타트]]를 봉쇄하고 [[백해]]의 [[콜라(도시)|콜라]]를 포격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캄차카 반도]]에 위치한 [[페트로파블롭스크]]를 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들은 러시아군이 철수한 이후에야 페트로파블로프스크를 점령할 수 있었다.
- 킹덤/517화 . . . . 1회 일치
* 남은 것은 알여. 알여는 왕전 자신이 직접 대처할 것이다. 이신, 몽념, [[왕분]]대의 병력을 이끌고 말이다. 왕전군 7만에 비신대 총 8천, 낙화대 5천, 옥봉대 5천을 더한 총 8만 8천의 병력이다.
- 킹덤/519화 . . . . 1회 일치
그에 비해 진군은 극단적이라고 할 만한 배치. 총 전력 8만 8천을 중앙와 우익에 몰아넣고 좌익에는 고작 5천을 배정했다. 우선 중앙에 5만 8천 병력에 왕전 자신과 [[마광]], 그리고 비신대의 이신과 강외를 배치. 우익은 옥봉대에 병력을 추가해 총 2만 5천. 왕분과 [[아광]]이 있다. 문제는 좌익. 병력 5천으로 사실상 낙화대 단독 배치다.
- 킹덤/526화 . . . . 1회 일치
* 옥봉대의 장교들은 눈 앞의 적도 잊어버리고 왕분의 눈부신 기량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에 한 번 왕분을 사경으로 몰고갔던 위화룡 [[자백(킹덤)|자백]]. 왕분은 본래 자신의 기교와 속도에 더해 이제 파괴력은 그 자백을 연상시키게 했다. 그런 파괴력까지 습득한 지금의 왕분은 분명 자백 조차 능가했을 거라고 장교들이 입을 모은다. 함께 있던 왕분의 부장 [[반양]] 또한 의견을 같이 했다. 자백을 꺾고 더욱 성장한 왕분의 창술은 분명 중화에서 다섯 손가락에 드는 경지다.
- 킹덤/528화 . . . . 1회 일치
* 격돌. 그러나 결과는 일방적이었다. 슌멘이 적의 선두를 베었지만 뒤따르던 부하들은 죄다 목이 달아났다. 벽이 그 모습에 경악했다. 언제나 귀신같은 돌파력을 자랑하던 산민족이, 철저학 봉쇄되고 있었다. 슌멘이 낭패한 듯 혀를 차며 주위를 애워싼 적들에게 몸을 돌렸다. 하지만 늦었다. 슌멘이 적의 기마병을 베려 하자 그 적이 말과 함께 뛰어올라 슌멘의 머리 위를 뛰어넘는 신기를 펼쳤다. 진군의 장수들은 보고도 그 광경을 믿지 못했고 양단화 조차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놀라움이 가시기도 전에 적은 허공에서 슌멘의 텅 빈 어깨를 베며 땅에 내려섰다.
- 토리코/361화 . . . . 1회 일치
* 통조림의 내용물에 대해서 여러가지 설이 충돌하고 있다. GOD라는 설부터, 이전 네오의 일부를 봉인한 것, 센터 등등.
- 토리코/366화 . . . . 1회 일치
[[토리코]] 366화. '''늑대를 봉인하라'''
- 토리코/367화 . . . . 1회 일치
* 아카시아는 네오를 부활시켜 봉인한다는 계획을 모르거나, 적어도 니트로에게 듣지는 못한 것 같다.
- 토리코/370화 . . . . 1회 일치
* 미도라를 봉인한 죠아는 금관두를 땅에 묻는다.
- 토리코/379화 . . . . 1회 일치
* 그는 백채널을 겹겹히 쌓고 왜곡해서 죠아와 자신 간에 약간의 시간 격차를 만들어 그의 움직임을 봉쇄한다.
- 토리코/382화 . . . . 1회 일치
* 팔왕의 노력에도 네오는 봉쇄할 수 없었고 오히려 팔왕이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
- 토리코/387화 . . . . 1회 일치
* 미도라는 저지하려 하지만 하필 아카시아의 노킹이 걸려 움지임이 봉해졌다.
- 토리코/391화 . . . . 1회 일치
이치류가 발견한 시체들과 식재의 산은 네오가 먹어치웠던 것으로 보이는데 어디로 소멸된게 아니라 영혼세계에 봉인되어 버렸던 걸로 보인다. 플로제가 이곳에 있는 것은 의외라는 의견이 많은데, 원래 영혼세계에 플로제가 있었고 어나더를 조리할 때도 조력했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 토리코/395화 . . . . 1회 일치
* 일곱 번째는 "디저트", 단맛의 백화점 무지개 열매다. 이거야 말로 코마츠와 토리코가 처음으로 포획한 "풀코스". 여기에 깜놀사과 레벨 100짜리, 식림사의 보물 샤봉 플루츠, 냄새 폭탄 두두리안 붐. 두두리안 붐의 악취 때문에 작은 소란이 일지만 토리코는 추억의 냄새고 익숙해지면 괜찮다고 웃어넘긴다. 존게는 두두리안 붐의 냄새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그냥 맛있게 잘 먹는다.
- 트로피코 4 . . . . 1회 일치
반란군을 상대하는데 도움이 되는 칙령이 일부 있다. 섬이 발전했을 경우에는 "사면" 칙령을 내려 반란군의 수를 줄일 수 있고, 반란군의 수가 불어나기 전에 밟아놓고 싶다면 "반란군 낚기"로 지금 당장 공격을 불러올 수 있다. 또한 "통신 차단"으로 반란군의 행동을 봉쇄할 수도 있다.
- 파이널 파이트 시리즈 . . . . 1회 일치
2010년에는 리메이크 버전인 파이널 파이트 : 더블 임팩트가 [[DLC]]로 출시. 안에 덤으로 [wiki:"매직 스워드" 매직 소드]가 동봉되어 있다.
- 판타스틱 포(1994년 실사영화) . . . . 1회 일치
당시 웬만한 드라마 1회 제작비보다도 적은 예산인 100만 달러에 3주 촬영이란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존의 1분 길이의 짧은 견본이 아닌 장편 영화로 완성시켜냈다. 초저예산 영화라는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있지만 저예산 영화 제작 경험이 풍부한 코먼 사단답게 열악한 조건에서도 효율적으로 만들어져 오히려 다른 초대예산을 들인 영화들 이상의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극장 개봉은 못했다. 이후 콘스탄틴 필름은 2000년대 실사영화 2편의 제작에 관여하고 독일 내 배급권도 쥐고 있었는데, 2015년 리부트 제작사 명단에서 빠진 걸 보면... 그래도 2015년판의 독일 배급도 콘스탄틴에서 맡았다.
- 판타스틱 포(2005년 실사영화) . . . . 1회 일치
참고로 국내 개봉하면서 제목을 <판타스틱 4>라 했다. 그러다보니 몇몇 사람들은 저 4를 '4번째 작품'이란 뜻의 4로 착각하여서 이 영화가 전편이 있는 물건인 줄 알고 '''판타스틱 3, 판타스틱 2''' 등을 찾아보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벌어졌었다. 사실 원제는 아라비아 숫자가 아니라 'Fantasrtic Four'라고 표기되니 딱히 헷갈릴 일이 없는데 굳이 4라고 써놔서...
- 판타스틱 포: 실버 서퍼의 위협 . . . . 1회 일치
여담으로 이 영화도 제목의 포 부분이 4가 되어서 국내 개봉했다.
- 페어리 테일/489화 . . . . 1회 일치
* 길드 지하에서 카나는 페어리 글리터를 난사한 결과 메이비스의 봉인을 깨는데 성공한다.
- 페어리 테일/491화 . . . . 1회 일치
* 잘 싸우던 제트, 드로이 등이 갑자기 능력을 봉쇄당하고 쓰러지는데 아이린의 두 부하가 한 짓.
- 페어리 테일/493화 . . . . 1회 일치
* 자매의 눈물겨운 상봉을 보며 엘프먼은 미라젠, 리사나에게 살아있어달라고 독백한다.
- 페어리 테일/497화 . . . . 1회 일치
* 자아가 봉인된 탓에 아이린의 분리 인챈트에도 저항하지 못한다.
- 페어리 테일/504화 . . . . 1회 일치
* 엘자 스칼렛은 길을 뚫기 위해 선봉으로 나선다.
- 페어리 테일/522화 . . . . 1회 일치
그의 스승을 앗아갔던 절대봉인마법.
- 페어리 테일/523화 . . . . 1회 일치
* 제레프는 설사 자신을 봉인해도 언젠가는 얼음이 녹아 풀려날 거라 말하지만 그레이는 "적어도 그때까지는 평화"라며 페어리 테일의 승리를 선언한다.
- 페어리 테일/532화 . . . . 1회 일치
* 블루 페가수스와 아크놀로기아의 추격전은 끝에 다다랐다. 크리스티나 호가 한계에 봉착했다. 아크놀로기아를 떼어내어도 뒷날개가 파손됐고 속도도 유지할 수 없다. [[이브 티름]], [[렌 아카츠키]]가 안간힘을 쓰지만 아크놀로기아는 차츰 따라잡고 있다. [[제니 리아라이트]]가 예비 마도 부스터를 점화한다. 일시적으로 거리를 벌리지만 아크놀로기아에겐 "잔재주"에 지나지 않는다.
- 표양문 . . . . 1회 일치
|전임자 = (인천시 갑)[[이용설]]<br/>(인천시 을)[[곽상훈]]<br/>(인천시 병)[[조봉암]]
- 표창원 . . . . 1회 일치
2018년 6월 개봉된 영화 [[탐정: 리턴즈]]에 카메오로 출연해 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런데 그 사건이 고양이 찾는일이면서 보상금이 1억이다.]
- 풍운 . . . . 1회 일치
후반부 보스. 부여국의 왕. 일단 동영과 비슷하게 여러모로 왜곡되기는 했으나 한국계를 모델로 하고 있어서 국내에서 인기가 높다. 무공도 뛰어나지만 지략도 인품도 뛰어나서 카리스마가 대단한 인물. 중원정복을 위해서 조상이 봉인해둔 동방창룡의 무공을 얻으려고 했고, 이를 위해서 계략을 써서 무명을 제압하고, 풍운을 납치해온다. 하지만 동방창룡의 무공이라는게 후손을 낚기 위한 페이크(...)였고 허무하게 주화입마에 걸려서 죽고 만다.
- 하이큐/226화 . . . . 1회 일치
* 다테는 초속공을 먹더라도 동요하지 않으며 구태여 히나타를 봉쇄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 하이큐/234화 . . . . 1회 일치
그를 코치한 시마다 마코토는 한 가지 요령을 전수한다. "마음이 진정되길 기다리지 말고 마음을 진정시키는 연습을 하라"는 것. 중요한건 "리셋하는 시점"이다. 워밍업 단계에서 시선을 진정시킬 지점을 하나 정한다. 그게 표식이든 비상구든 뭐든 상관은 없다. 이 이야기를 할 때 리셋지점은 전봇대에 걸린 시마다 마트 봉지. 여기에 집중하는 걸 신호로 삼는 것이다.
- 하이큐/244화 . . . . 1회 일치
* 그 말처럼 여기서부터 후쿠로다니의 반격이 시작된다. 보쿠토는 여전히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지만 다른 동료들이 분발하면서 한 점씩 따라잡기 시작, 어느새 스코어는 15 대 14로 한 점차까지 따라온다. 중계석에선 에이스가 저조한데도 착실하게 점수를 버는 후쿠로다니를 칭찬한다. 반대로 에이와 고교는 에이스가 봉인됐는데도 선전하자 혼란스러운 양상.
- 하이큐/261화 . . . . 1회 일치
* [[타키노우에 유스케]]는 [[시마다 마코토]]가 자리를 비웠다 좋은 장면이 다 지나가고 돌아오자 대차게 깐다. 아까 [[야마구치 타다시]]가 대활약했는데, 그 선생님인 시마다가 왜 자리를 비웠냐는 이유다. 물론 그는 시마다가 경기장 반대편까지 열심히 뛰다 온 걸 모른다. 그리고 그가 자기 태블릿을 무단으로 빌려갔던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시마다는 그 짧은 순간에 "봉투 안에 타블릿을 끼워서 켜면 더 잘 보일 거다"는 계산까지 염두했던 것이다.
- 하이큐/271화 . . . . 1회 일치
* 이제 카라스노에겐 미야 아츠무에 더해 린타로의 속공을 봉해야 하는 새로운 과제가 추가됐다. 이나리자키의 긴지마 서브. 이번에도 니시노야에게. 이번엔 놓치지 않았다. 공은 츠키시마에게 이어져 스파이크. 린타로가 블록했다. 공은 이나리자키 진영 위로 뜨고 아츠무가 우측으로 빠지는 공을 달려가 살린다. 위치는 레프트. 마지로가 뛰어오른다. 그 앞으로 카게야마, 츠키시마, [[타나카 류노스케]]가 나란히 블록을 깐다. 마지로의 대포같은 스파이크도 세 장의 블록을 뚫진 못한다. 크게 떠오르는 공. 네트 위로 떨어지던 것을 카게야마가 밀어넣는다. 아카기가 네트 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공을 커버. 다시 스파이크를 준비하는 마지로. 카라스노는 다시 블록 세 장으로 막는다. 그러나 더 높게 뛰어오른 마지로가 블록을 넘긴 스파이크로 후방을 노린다. 아즈마네가 가까스로 리시브했으나 공은 튕겨나가 네트 앞으로. 놀랍게도 마지로가 세 번째 점프를 뛴다. 그리고 우겨넣는 듯한 스파이크. 카라스노의 블록도 이 세 번째 만은 대응하지 못했다. 카게야마 혼자 뛴 블록 위로 내리 꽂히는 공격. 마지로가 세 번의 스파이크 끝에 1점을 강탈해 간다.
- 하주석 . . . . 1회 일치
|연봉 = 1억 2,000만원 (2018년)
- 하준영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8년)
- 하지호 . . . . 1회 일치
|연봉 =
- 하태웅(가수) . . . . 1회 일치
영화 "맨발의 기봉이" OST "가위바위보"/
- 하현우 . . . . 1회 일치
* 무명 시절엔 라면 1봉지를 사서 멤버들끼리 셋이서(김기범이 합류하기 전) 나눠 먹었으며, 길거리 음식을 먹다 장염까지 걸렸다고 한다. 나는 가수다 출연 당시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던 역류성 식도염도 어려웠던 시절 식습관으로 인해 얻은 것.
- 한규복 (1881년) . . . . 1회 일치
[[1938년]] [[8월]] 설치된 총독부내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 97명 가운데 한규복은 [[김연수 (1896년)|김연수]](金秊洙), 박영철(朴榮喆), [[박중양]], [[박흥식 (1903년)|박흥식]], [[윤덕영]], 이기린(李基燐), [[이승우]](李升雨), [[최린]](崔麟), [[한상룡]](韓相龍), [[현준호]](玄俊鎬) 등과 함께 조선인 위원 11명 가운데 1명으로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해 [[육군특별지원병령]]이 공포, 시행되자 한규복은 윤치호, 이승우, 조병상, 조성근 등과 함께 지원병제 축하회 구성을 위한 타협발기인회를 열고 실행위원진을 구성하였다. [[7월 8일]] [[국민정신총동원연맹]]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하고 이사가 되었다. [[10월 7일]]에는 [[중일전쟁]] 등 부상병을 위문하기 위해 [[용산육군병원]]을 방문하고 [[금일봉]]을 지급하였다.<ref>"中樞院參議 傷病兵慰問", 동아일보 1938년 10월 07일자 2면, 사회면</ref>
- 한규식 . . . . 1회 일치
|연봉 =
- 한다민 . . . . 1회 일치
* [[2007년]] [[SBS]] 드라마 스페셜 《[[외과의사 봉달희]]》 ... 조민지의 엄마 역
- 한명진 (1426년) . . . . 1회 일치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 3등에 녹훈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1454년에 죽고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도(襄悼)이다.
- 한성우 . . . . 1회 일치
| 부모 = 아버지 한봉섭, 어머니 최옥화
- 한수연(배우) . . . . 1회 일치
||<rowbgcolor=#ff748c> '''개봉 연도''' || '''제목''' || '''배역''' || '''비고''' ||
- 한승택 . . . . 1회 일치
|연봉 = 7,500만원 (2018년)
- 한인수(탤런트) . . . . 1회 일치
* [[대왕의 길]] - [[홍봉한]]
- 한재석(1991) . . . . 1회 일치
||<#0080ff> {{{#ffffff '''개봉연도'''}}} ||<#0080ff> {{{#ffffff '''제목'''}}} ||<#0080ff> {{{#ffffff '''배역 이름'''}}} ||<#0080ff> {{{#ffffff '''비고'''}}} ||
- 한준희 . . . . 1회 일치
* [[KBS 2TV]] : [[따봉 월드컵]]
- 한태균 . . . . 1회 일치
|연봉 =
- 한필수 . . . . 1회 일치
이후 한국에 돌아와 봉양읍장, 제천읍장을 역임했다. 재산을 기울여 [[제천고등학교|제천초급중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기성회를 조직하고 1946년 10월 개교와 함께 초대 교장으로 취임해 [[1948년]]까지 역임했다.
- 한혁수 . . . . 1회 일치
|연봉 = 5,000만 원 (2013년)
- 한현준 . . . . 1회 일치
|봉급 =
- 한호문 . . . . 1회 일치
한호문(韓好問, ? ~ ?)은 [[조선]] 후기의 무신으로, 자(字)는 선경(善卿),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이다. 음서로 관직에 올라 정헌대부 [[중추부]][[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훈련원]][[지사]]에 이르렀다. 봉호는 서원군(西原君)이다.
- 함석원 . . . . 1회 일치
|연봉 =
- 함영준 . . . . 1회 일치
|봉급 =
- 핫라인 마이애미 . . . . 1회 일치
특정 챕터에만 나오는 적. 갱단원의 경찰 버전이다. 사용하는 근접무기가 진압봉으로 통일되어 있다는게 특징.
- 해원군 . . . . 1회 일치
[[인성군 이공]]의 3남(三男)으로 출생한 그는 일찍이 [[1619년]] '''해원정'''(海原正)에 책봉되었는데 아버지 [[인성군]]이 반정공신 이귀(李貴)의 핍박 섞인 모함으로 인하여 모반역모 혐의를 받자 [[1628년]]을 기하여 형 해평군 · 해안군, 아우 [[해양군]] 등과 아울러 역신의 후손이라 하여 [[제주도|전라도 제주]]에 유배되었다가 뒤 [[1635년]] [[제주도|전라도 제주]]에서 [[울진군|경상도 울진]]으로 이배되었고 2년 후 [[1637년]] 석방되었다.
- 허건엽 . . . . 1회 일치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시절 65회 [[청룡기]]에서 [[순천 효천고등학교 야구부|효천고등학교]]를 상대로 완봉승을 거둔 적이 있다. 또, 63회 황금사자기에서 임찬규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적도 있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한국프로야구/2012년/신인드래프트|2012년 신인드래프트]] 2차 4라운드에서 SK의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 허근욱 . . . . 1회 일치
초기 작품 [[내가 설 땅은 어디냐]]는 [[1964년]] 영화감독 [[편거영]] 등에 의해 영화화되어 그 해 [[4월 8일]] [[서울]]에서 개봉되었다. [[1987년]] [[11월]]에는 그의 작품 멩가나무 열매가 각본으로 꾸며져 [[무용]]으로 선보여지기도 했다.<ref>동아일보 1987년 11월 18일자 6면, 생활문화면</ref>
- 허범욱 . . . . 1회 일치
| 봉급 =
- 허안나 . . . . 1회 일치
:# 봉숭아학당 대성이엄마 (2008)
- 허용 . . . . 1회 일치
|연봉 = 2,000 만 원
- 허일상 . . . . 1회 일치
|연봉 =
- 헥사밀리온 . . . . 1회 일치
헥사밀리온이 마지막으로 활약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11세]](당시는 왕자)가 지금의 그리스 남부 펠로포넨소스 반도에 있던 [[비잔티움 제국]]의 봉신령 [[모레아 전제국]]을 지배하던 시기에, 모레아 반도의 방어를 위하여 헥사밀리온을 대규모로 수복하였던 것이다.
- 현재윤 . . . . 1회 일치
|연봉 =
- 홍경인 . . . . 1회 일치
||<table align=center><rowbgcolor=#c0c0c0> {{{#white '''개봉 연도'''}}} || {{{#white '''제목'''}}} || {{{#white '''배역'''}}} ||
- 홍금주 . . . . 1회 일치
홍금주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제가 입을 빨간색 옷이 한 벌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순교자]]가 되고 싶으니까요." 그녀는 [[최 필립보]]의 집에서 그의 제수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녀는 혹독한 [[형벌]]과 [[고문]]을 받으며 배교할 것과 [[천주교]]인들이 숨은 곳들을 누설하기를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신음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형리는 그녀의 주뢰를 틀고난 뒤, 그녀의 옷을 벗기고 그녀를 감방의 천장에 매달아 놓고서 그녀에게 매질을 가했지만, 그녀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사흘 후 그녀는 [[형조]]로 이송되었고 세 차례를 다리에 격심한 매질을 당했지만, 형조 [[판서]]에게도 굴복치 않았다. 그녀는 감옥에서 심한 열병을 앓아 거의 죽을 뻔 하였지만, 매우 빨리 회복되었다. 그녀는 [[사형]]이 집행 때까지 근 6개월을 형조 감옥에 수감되어 있으면서 오직 사랑과 봉사로써 다른 수감자들을 돌보았다. 감옥의 모든 사람들이 그녀를 큰누이처럼 존경했다.
- 홍명찬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3년)
- 홍승규 . . . . 1회 일치
|연봉 =
- 홍연아 . . . . 1회 일치
* (사)안산시 자원봉사협의회 이사
- 홍은희(배우) . . . . 1회 일치
||<#c0c0c0> {{{#ffffff '''개봉연도'''}}} ||<#c0c0c0> {{{#ffffff '''제목'''}}} ||<#c0c0c0> {{{#ffffff '''배역 이름'''}}} ||<#c0c0c0> {{{#ffffff '''비고'''}}} ||
- 홍정우 . . . . 1회 일치
|연봉 = 2,700만원 (2017년)
- 홍정욱 . . . . 1회 일치
|전임자 = (노원구 갑)[[정봉주]]<br/>(노원구 을)[[우원식]]<br/>(노원구 병)[[임채정]]
- 홍진기 . . . . 1회 일치
이후 [[삼성]]회장이자 훗날 사돈 관계<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47&aid=0002032237 | 제목=이건희 장인이 '홍찐구'로 조봉받은 사연 | 저자=정은균 | 뉴스=오마이뉴스 | 날짜=2013-08-20 | 확인날짜= | 보존url=http://archive.is/k9DGp | 보존날짜=2014-04-30 }}</ref>를 맺게 될 [[이병철]]과 친분이 두터웠으며, 1964년 중앙라디오방송주식회사 사장, 1968년 중앙일보사 대표이사 사장, 1971년 주식회사 동양방송 대표이사, 1974년 중앙일보·동양방송주식회사 사장, 1980년 중앙일보사 회장을 지냈다.
- 황경태 . . . . 1회 일치
|연봉 = 2,800만원 (2018년)
- 황대봉 . . . . 1회 일치
1967년 [[포항버스]][* 이후 1990년대에 성원여객으로 통합되었고, 신안여객을 거쳐 現 코리아와이드 포항이다.]를 설립하여 현재의 대아그룹을 창업하였다. 이후 해운([[대아고속해운]]), 금융(대아상호신용금고), 건설, 관광레저(대아여행사), 문화사업, 지역언론사업([[경북일보]]) 등으로 사업을 확장하였다. 1983년 포항에 [[세명고등학교]](학교법인 영암학원)를 설립하였다. [* 여담으로 세명고등학교에 행사가 있을 때 가끔씩 이사장이 오셨는데 학생들 사이에서 황대봉 이사장과 악수를 하면 수능을 대박 친다는 일종의 카더라가 있었다 그래서 항상 이사장이 등장하시면 3학년들이 악수한다고 난리였다고 한다.]해당 과정을 통하여 포항시에서는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과 함께 지역 경제계에서 큰 인물로 인식되었다.
- 황동주(배우) . . . . 1회 일치
* 2014년 SBS [[닥터 이방인]] - 금봉현 역
- 황부인전 . . . . 1회 일치
제갈량은 운명에 따라 길에서 황소저가 타고 있는 교자를 만나고, 청혼을 하여 성례하게 된다. 하지만 혼례는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제갈량은 첫날밤에 신부의 추악한 모습을 보고 도망가려 하는데, 황부인이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져서 옷이 찢어진다. 황부인이 옷을 꿰매줄 테니 꿰맨 옷을 입고 가라고 하여 옷을 꿰매게 된다. 바느질 하는 모습도 곱지 않았으나 바느질 한 옷이 [[천의무봉]]하여 감탄한다. 또 요기나 하고 가라고 해서 밥을 먹게 되는데, 밥을 만드는 모습도 곱지 않았으나 밥을 차린 것을 보니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라 감탄한다.
- 황석두 . . . . 1회 일치
비천주교인들까지도 황석두의 헌신과 충실함 그리고 훌륭한 성품에 감복하였다. [[페레올]] [[주교]]가 [[조선]]에 입국 했을 때, 황석두는 여생을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절제와 [[금욕]]을 위해 페레올 [[주교]]에게 아내와 별거할 것을 허락 받고 독신으로 살았다. 주교는 황석두를 [[사제]]로 만들기로 결심했지만, [[교황청]]에서는 [[조선]]에 황석두의 아내가 입회할 [[수녀회]]가 없다는 이유로 주교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 황석하 . . . . 1회 일치
* 《[[선지자의 밤]]》 (2015년) - 갑봉 역
- 황성관 . . . . 1회 일치
|연봉 = 3,000만원
- 황수현 (야구선수)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3년)
- 황정립 . . . . 1회 일치
|연봉 = 2,400만 원 (2012년)
- 황정혜 . . . . 1회 일치
:〈봉숭아 학당〉
- 황제성(코미디언) . . . . 1회 일치
* 복면가왕 21차 경연에서 [[질주본능 사이클맨]]이라는 가명으로 참가했으며 유상무와 신봉선을 비롯한 판정단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보컬 트레이닝도 받고 춤도 정체가 공개되기 전에는 추지 않을 정도로 정체를 완벽하게 숨겼다.
- 황종률 (정치인) . . . . 1회 일치
|전임자 = [[서봉균]]
- 황희두 . . . . 1회 일치
"청년이 청년을 돕는다"와 "청년이 세상을 바꾼다"라는 슬로건으로 다양한 사회적 문화 운동을 펼치고 있으며, 매 달 한 번씩 전체 회원이 모이는 <컬쳐쇼>를 진행한다. 2016년 1월 청년문화포럼을 설립해 21세기 新 문화운동,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 ADRF와 협력하는‘청년들과 함께하는 해외봉사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 노란 목도리 캠페인, 북트로(지하철 內 독서 장려), 동북4구 청년&청소년 문화행사 등의 다양한 사회 공익적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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