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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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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명회 . . . . 11회 일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ref name="park115">박영규,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115페이지</ref>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조선 세조|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조선 세조|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1467년]], [[1469년]] 두 번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으며 [[1457년]] 상당군(上黨君)에 봉군되고 [[1461년]] 진봉하여 상당부원군이 되었다. 만년에는 권신이자 외척으로서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삭탈당하였다. 그러나 후일 [[종묘]] 세조실에 배향됨으로써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세자 책봉을 성사시키고 [[1458년]] 봄에 귀국, [[병조판서]]가 되었다. 그해 여름 충청도와 경상도, 전라도의 3도에 흉년이 들어, 그를 특별히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의 3도 순찰사(巡察使)에 특별히 임명되어 구호물자를 싣고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를 순시하며 백성들을 구휼하고 돌아왔다.
         또한 [[병조]][[판서]] 재직 중 [[평안도]]와 [[함경도]]에 병력을 이끌고 출정하여 변방을 출몰하는 [[여진족]]과 야인 부락을 토벌하고, 북변을 수습한 뒤, 북방에 축성하여 방어를 확실히 하고 되돌아왔다. 그 뒤 황해·평안·함길·강원도 도체찰사 등을 역임했다. 그해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고, [[1458년]](세조 3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진했다.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예보다는 병법과 병권에 재능을 보였다.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의 야인들을 토벌한 뒤에는 경계를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또다른 신임을 얻게 되어 1461년 특명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다시 [[보국숭록대부]]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임명되고 [[판병조사]](判兵曹事)와 [[병조판서]], [[판의금부사]]를 겸임했다가 [[1462년]](세조 7년) 여름 [[대광 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우의정]]이 되었으며,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 체찰사를 겸하였다. [[1463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불편한 관계였던 [[조선 예종|예종]]이 갑자기 죽자 새 왕의 즉위시까지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 (관직)|원상]](院相)이 되어 서정(庶政)을 결재하였다. 이때도 병권에는 관심이 높아 [[병조판서]]를 겸하였고, 인사권까지 장악하였다.
         이때 그는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사위인 [[조선 성종|자을산군 혈]]을 적극 지지하여 차기 왕으로 즉위시킨다. [[1469년]] [[조선 성종|성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판이조사]]와 [[병조판서|판병조사]]를 겸했고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洪弘佐理功臣) 1등의 공신호를 받았다. 이어 그해 [[춘추관]]영사로서 [[최항 (1409년)|최항]](崔恒),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성종의 만류로 치사를 못하다가 [[1476년]](성종 7년) [[좌의정]]직과 [[병조판서]]에서 해임되었다.
         [[좌의정]]과 [[병조판서]] 직에서 해임되었으나 그는 여전히 국가의 원로로 조정에 참여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였다.그러나 이후에도 [[부원군]] 자격으로 정사에 참여하였으나 계속 [[유자광]]의 공격을 받았다.
         [[병조판서]]와 도체찰사 재직 중 직접 병력을 이끌고 [[평안북도]]와 [[함경북도]]의 두만강, 압록강변을 월경하는 야인들을 체포하여 처결하고, 변방에 축성과 요충지를 건설하였으며, 야인의 소굴에 직접 들어가 야인의 토벌에 앞장섰다.
  • 한확 . . . . 8회 일치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올라 [[명나라]]의 [[영락제]]의 후궁으로 간택된 누이 여비를 호송하였다. [[1417년]](태종 17년) [[명나라]]의 초청을 받고 진헌부사(進獻副使)로 [[명나라]]에 건너가서 광록시 소경의 벼슬을 지냈으며, 귀국후 판한성부사, 판병조사, 판이조사를 거쳐 [[의정부]][[좌의정]]에 이르렀다. [[계유정난]]을 도운 공로로 정난공신 1등과 [[세조 찬위]]를 도운 공로로 좌익공신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성부원군에 봉작되었다가 서원부원군으로 개봉되었다.
         간이재 한확은 [[1400년]](정종 2년) 녹사를 지내고 [[증직|증]] [[병조판서]]에 추증된 [[한녕]](韓寧)의 손자이며,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를 지내고 [[증직|증]] [[의정부]][[영의정]] 서성부원군에 추증된 [[한영정]](韓永矴)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증 정경부인 의성 김씨는 의성군 양소공 [[김영렬]](金英烈)의 딸이다.
         [[1438년]](세종 21년) 중추원사가 되었다가 통행금지 시간을 어겼는데 [[수문장]]에게 압력을 가하여 문을 열고 들어왔다가 탄핵을 받고 파면당했다.<ref>세종실록 83권, 세종 20년(1438 무오 / 명 정통(正統) 3년) 10월 19일(경오) 1번째기사 "성문 출입에 문제가 있던 한확·연경·이연기·남계영을 벌주다"</ref> 그해 복직하여 정헌대부 중추원사를 거쳐, 1439년 판한성부사, 경기도관찰사, 판병조사,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판한성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해 경기도감사로 나갔다가 복귀, 1440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병조 판서, 판병조사를 거쳐 함길도도관찰사로 나갔다. 이때 그는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함길도]]로 부임해갔다. [[1442년]](세종 25년) 동지중추원사와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1443년]] 동지중추원사가 되었다. 그해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義禁府提調)를 겸하였고, 그해 다시 [[판병조사]] 겸 지중추원사를 거쳐 다시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가 되었다. [[1444년]] [[경상도]], [[전라도]]의 진상품을 받을 것을 청하였으나 [[세종]]이 이를 듣지 않았다. 그 해 [[판이조사]]가 되었는데, 이때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5년]] 중추원지사 겸 [[판병조사]](병조판서)를 겸하다가, 다시 판이조사(이조판서)가 되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로 승진되었다가 [[1447년]] 이조 판서가 되고, 행[[평안도]] 관찰사로 나아갔다. 그해 행[[평안도]][[관찰사]]로 평양판윤과 [[평안도]] 병마도절제사까지 겸임하였다. [[1448년]] [[평안도]]병마절도사 겸하였다. [[1450년]](세종 32년) 판중추원사가 되었다. 그 후 판이조사·[[좌찬성]] 등을 거쳐 [[조선 세조|세조]] 때 서성 부원군에 봉해졌다.
  • 흥친왕 . . . . 5회 일치
         [[1863년]] 음서로 사용이 되었으며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집권기간 중 도승지, 참의, 직제학 등을 지내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퇴출당하고 고종의 친정 이후에도 이조와 형조,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한때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동생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대안으로 검토되기도 했다. 관직은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궁내부 대신, 육군 부장에 이르렀다.
         1866년 도승지, [[1867년]]에는 직제학이 됐다가 그해 3월 가선대부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승진하였고, 바로 [[이조]][[참판]]이 되었다. 이후 동지경연사, 종정경에 제수되었고, 의정부 당상을 역임하였다. 그 뒤 [[병조]][[판서]], 금위대장,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1873년]] 종정경(宗正卿)이 되었으나 [[1874년]] [[11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명성황후]]에 의해 섭정직에서 강제 축출당한 뒤에도 그는 유유하고 고분고분한 성격 덕에 계속 관직에 남아 있을수 있었다. 동생이 국왕이었고 아버지는 섭정인데도 자신에게는 낮은 직위가 부여되었던 것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 이때문에 그는 한때 [[명성황후]] 측에 가담하기도 했다. 외가인 민씨 척족에게 아부한 것 역시 관직을 계속 유지하는 비결이었다.
         [[1878년]](고종 16년) 자헌대부로 승진하여 지[[경연]]사(知經筵事)가 되었고, 종정부, 춘추관, 의금부사를 겸임하였으며, [[1879년]] [[형조]][[판서]](刑曹判書), 시강원 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 시강원 좌빈객, 별입직(別入直)을 거쳐 종1품으로 특서되었다. 그해 숭정대부에 승진하여 행 병조판서가 되었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1880년]] [[병조]]판서, 1881년 [[1월]] 금위대장,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등을 지냈다. 이어 1월 말 판돈녕부사로 통리기무아문당상, 사대교린당상(事大交隣堂上)에 올라 이조판서, [[예조]]판서를 지냈다. 그해 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883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다.
  • 윤휘 . . . . 4회 일치
         [[1589년]](선조 2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94년]](선조 27)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다. 이후 [[1595년]] [[춘추관]][[기사관]], [[1596년]] [[병조]][[좌랑]]을 거쳐 이듬해 다시 병조좌랑이 되었다.
         1597년 병조정랑으로 승진되고 이어 다시 병조정랑이 되었다가 [[세자시강원]]사서(司書), [[사헌부]]장령(掌令), [[세자시강원]]필선을 거쳐 다시 [[사헌부]]장령, 시강원 필선을 역임하는 등 삼사의 요직을 거쳐 [[1600년]] [[장악원|장악원정]](掌樂院正), [[사간원]][[사간]]이 되었다. 그해 [[사헌부]]장령 조응문(趙應文)을 탄핵하고 북방 경비를 탄탄히 할 것을 건의하였다.
  • 박승임 . . . . 3회 일치
         1565년(명종 20)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가 죽고, 윤원형, [[이량]] 등이 제거되자 다시 조정에 나아간 박승임은 이후 병조 참지와 승정원 동부승지를 거쳐 진주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을의 부로(父老)들을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고 향약을 실시하며 백성들의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1568년(선조 1) 병으로 사직, 벼슬에서 물러나 낙향했으나 1568년 특명으로 중국 명나라에 파견되는 사절단의 동지부사(冬至副使)에 임명되어 연경에 다녀왔다.
         박승임은 1570년(선조 3) 승정원 좌승지에 오른 뒤 을사사화의 거짓 공훈을 없앨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며 명종 연간의 권신들과 척신들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간하였다. 이후 권신, 척신들의 비난 여론에 직면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병조 참의와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1571년(선조 4) 황해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홍문관 부제학과 도승지를 지냈다.
         이후 박승임은 춘천 부사와 병조 참의·공조 참의 등의 요직을 거쳐 1583년(선조 16) 사간원 대사간에 올랐다.
  • 희빈 장씨 . . . . 3회 일치
         [[조선 숙종|숙종]]의 복위 명령에 병조판서 [[서문중]]은 이조참판 [[박태상]] 등과 함께 사람을 모아 ‘9년·6년과, 아들이 있고 아들이 없는 것은 어느 것이 중하고 어느 것이 경한가?’라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인현왕후]]가 비록 희빈 장씨보다 더 오래 왕비로 있었으나 왕세자의 생모인 희빈 장씨가 더 귀하다는 뜻이다. 정원(政院)은 조정백관과 신중히 공론을 한 후에 결정지어질 때까지 명을 받들 수 없다는 거부의사를 표명했다.<ref>《조선왕조실록》숙종 26권, 20년(1694 갑술 / 청 강희(康熙) 33년) 4월 13일(경진) 2번째기사</ref> [[인현왕후]]의 복위가 당연하다고 주장하는 [[노론]]과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소론]]의 격렬한 언쟁이 오가던 가운데<ref>《숙종실록》에는 누락된 내용으로 《승정원일기》 4월 12일 ~ 4월 16일까지의 기사에 수록되어 있다.</ref> 4월 16일에 이르러 우의정 [[윤지완]], 공조판서 [[신익상]], 한성부우윤 [[임상원]], 병조참의 [[이유]] 등의 [[소론]]의 대표 인물들이 단체로 사직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는데<ref>《승정원일기》 숙종 20년 4월 16일 (계미) 원본356책/탈초본18책</ref> [[조선 숙종|숙종]]이 갑술환국을 일으키며 중앙을 [[소론]] 중심으로 채웠던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이 사건은 엿새 후인 4월 17일, 영의정이자 소론 영수였던 [[남구만]]이 '이미 복위하라는 왕명은 내려졌고, 자식이 어미(國母: [[인현왕후]])의 죄를 논하며 도로 쫓아내라 마라 의논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고 [[소론]]을 중재하여 결국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ref>『숙종 20년 4월 17일 1번째 기사』</ref> 이 사건을 계기로 [[소론]]은 희빈 장씨를, [[노론]]은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세력이 되었는데 [[소론]] 영수인 [[남구만]]은 중립을 지켰다.
         기록의 진실성은 차치하더라도 조선 시대의 신분법 상 희빈 장씨를 얼녀 출신 천민으로 계산하기에는 오차가 있다. 희빈 장씨의 생모인 윤씨는 첩이 아닌 엄연한 정실 부인인 계실이었으며, 남의 집 여종을 첩도 아닌 정처로 삼기엔 [[장형 (조선)|장형]]의 사회적 위치 및 조건이 결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ref group="주">남의 집 여종을 아내로 삼은 자를 비부(婢夫)라 하는데, 비부는 아내의 주인 집에 종속되어 그 집안의 대소사에 노동력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자식은 탄생한 즉시 주인집의 사유재산이 된다. 이러한 한계때문에 자신의 남종이 남의 집 여종과 혼인하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여 노인이 되도록 혼인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 사회적 문제가 되었으며, 지극히 가난하여 나이를 먹도록 혼인을 하지 못한 양인 남성이 생계를 유지하고 대를 이을 목적으로 비부를 자청한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실록 등에 기록된 강력 범죄 사건에 비부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비부가 법적으로는 그 가문의 종이 아니기에 사례를 조건으로 주인의 범죄를 대리시켰거나 덮어씌운 결과인데 이는 비부의 사회적 위치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ref> 첩을 처로 만들 수 없는 조선의 국법<ref group="주">[[윤원형]]이 첩 [[정난정]]을 처로 만든 전례가 있어 첩을 처로 만드는 것이 흔한 일인 양 오해되고 있지만 [[윤원형]]이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사후에 관직을 잃고 유배되었던 공식적인 이유는 국법을 어기고 첩을 처로 만들었다는 죄목때문이었다. 조선 사회에서 첩실을 정실로 격상할 수 있는건 왕과 왕세자 뿐으로, 이 또한 1701년 이후로 금지되었다.</ref> 과 윤씨 소생 아들인 [[장희재 (조선)|장희재]]가 무과(武科)로 등용<ref>옥산부원군신도비 기록</ref> 되어 [[1680년]]에 내금위에 재직<ref>숙종실록 27년(1701 신사 / 청 강희(康熙) 40년) 10월 22일(을해) 3번째기사 中 동평군 이항의 공초내용</ref> 하였고 [[1683년]]에 좌포도청 부장에 재직<ref>숙종실록 12년(1686 병인 / 청 강희(康熙) 25년) 12월 10일(경신) 4번째기사</ref> 하였던 점<ref group="주">선조16년 병조판서였던 [[이율곡|이이]]의 주청으로 납속을 낸 서얼을 허통하여 무과에 입시하는 것이 허락되었으나 숙종시대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청요직은 허락되지 않았으며 무과에 합격한 서얼은 관직은 받지 못한채 무기 발령대기 상태로 남거나 지방 군졸로 발령, 혹은 외적의 침입이 잦은 국경으로 발령되는 한계가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중인 역관의 얼자가 [[내금위]]에 재직하고 경내 좌포도청에 부장으로 재직한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희빈 장씨가 숙종의 후궁이 된 건 1686년 12월이니 누이의 후광을 입었다고 볼 수 없다.</ref>, [[1689년]] 11월 13일 윤씨를 당하관인 역관의 처로 언급한 윤덕준(尹德駿)의 상소내용<ref group="주">조선시대에는 처와 첩, 적서의 구분을 명확히 구분하여 언급하거나 기록하였다.</ref>, [[1698년]]에 사망한 윤씨가 남편 [[장형 (조선)|장형]]과 전처 제주 고씨의 옆에 나란히 매장된 것<ref group="주">첩은 가문의 묘산에 매장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며 특별히 매장되더라도 남편 부부의 무덤에서 떨어진 음지나 발치 아래에 묻어 정처와 확고한 차별을 두었다. 희빈 장씨는 1694년에 강봉되었으며 오빠 장희재가 [[노론]]의 공격으로 목숨이 위태로웠던데다가 왕세자인 아들 [[조선 경종|경종]]은 [[인현왕후]]에게 입적되어 [[노론]]이 이미 모자의 연이 끊겼다고 주장했던 만큼 만약 윤씨가 첩으로서 처와 동등하게 매장되었다면 당시 탄핵이 되지 않았을 리 없으며 희빈 장씨의 사후나 경종의 사후에도 반드시 탄핵이 있었어야 정상이다.</ref> 은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 원자가 되어서나 그녀가 왕비가 되어 [[조선 숙종|숙종]]이 특별히 장씨의 생모를 첩에서 처로 승격해주었을 가능성조차 극히 희박함을 증명한다. 이는 윤씨가 설사 여종 출신이었더라도 이미 면천한 후에 [[장형 (조선)|장형]]의 계실이 되어 장씨 남매를 낳았음을 뜻하는데, 그렇다면 장씨 남매에게는 노비 종모법이 적용되지 않아 이들의 신분은 아비를 따라 중인이 된다. 물론 윤씨가 애초에 종 출신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ref group="주">종(奴婢)의 정의에는 '남에게 얽매이어 그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도 있다. 조사석의 처인 권씨는 권문세가의 딸이고 윤씨는 역관의 딸이었던 만큼 두 사람이 교류하였던 것을 신분의 위계 상 윤씨를 종으로 비유했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이런 식의 말장난은 [[민진원]]의 특기이기도 했다는 점이 유의사항이다.</ref>
  • 이진주 (1678년) . . . . 2회 일치
         유학(幼學)으로 [[1710년]](숙종 36년) 경인(庚寅) 증광사마시(增廣司馬試) [[진사]]에 3등(三等)으로 입격, 진사가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14년]] [[성균관]]학유<ref>안명하, 松窩先生文集卷之九, 遠遊錄 西征記行</ref>, [[1719년]] [[1월 12일]] 전강에서 숙종이 친히 출제한 과제에 우승하여 직부전시의 명을 받았다. [[1721년]](경종 1년) [[과거 제도|식년 문과]](式年文科)에 을과(乙科) 4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兵曹佐郞), 겸 [[춘추관][[기주관]], [[1723년]](경종 3) [[3월]] [[성균관]]학유, [[5월]] 학록, 8월 학정이 되고 [[1724년]](경종 4) [[2월]] 양현고직장(養賢庫直長)이 되었다. 그해 [[5월 17일]] 다시 학정, 이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 등을 지내다.
         [[1726년]](영조 2) [[12월 28일]] [[성균관]]박사, 1727년 3월 양현고직장, 8월 7일 전적,1728년(영조 4) [[2월 3일]] [[양현고]]주부, [[6월]] 직강, [[1729년]] [[11월 25일]]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겸춘추(兼春秋)직을 겸하여 입직하였다. [[1730년]] [[2월 10일]] 성균관직강, 3월 25일 사예 등을 역임했다. [[1730년]] [[3월]] 진보현감(眞寶縣監)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조선 영조|영조]] 조정에서 입시한 신하가 아뢰기를, '이진주는 조용히 자신을 지켜 성균관에서 공부한 10여 년 동안 재신(宰臣)과 명사(名士)가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영조가 수령을 선발할 때는 마땅히 조용히 자신을 지키는 자를 취해야 한다 하고, 곧이어 다시 진보현감에 재임명되었으나 얼마 뒤에 사망하였다. 1737년
  • 전병조 . . . . 2회 일치
         '''전병조'''(田炳祚, [[1964년]] ~ , [[대구광역시]])는 [[KB투자증권]]의 대표이사 사장인 [[대한민국]]의 기업인, 금융인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1&oid=003&aid=0006279619 KB투자증권 신임 사장에 전병조 부사장 내정] 뉴시스 2014년 12월 30일</ref>
  • 정만조 . . . . 2회 일치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해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동생 [[정병조]]도 세 명단에 들어 있다.
         * [[정병조]]
  • 한호문 . . . . 2회 일치
         할아버지는 [[배천군|배천]][[군수]](白川郡守)를 지냈고 [[증직|증]]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과 서림군(西林君)에 증직된 한창서(韓昌緖)이고, 아버지는 어모장군 [[충의위]](禦侮將軍 忠義衛)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형판(刑判)을 지내고 사후 [[증직|증]]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贈正憲大夫 議政府左參贊)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과 서원군(西原君)에 추증된 한강(韓綱)이고, 어머니는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지중추부사 이전(李晉+戈)의 딸이다. 형제로는 한선문, 한의문, 한사문 등과 칠계군 헌민공 [[윤탁연]]의 아들 윤길원에게 출가한 누이가 1명 있다. 그의 형제들은 그의 아버지 한강보다 앞서 사망하였다.<ref>경기도, 《경기금석대관 2》, (경기도 편역, 1987) 한양위 묘갈편</ref>
         [[1623년]](인조 1년) [[9월 19일]] 밀양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하였다가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었을 때는 부모의 나이가 70세임을 들어 상소하여 사직하더니, 본직에 제수되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히 부임하였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9월 19일(병오)자 4번째기사, "사천 현감 이장형을 사판에서 삭제할 것 등을 청하는 사간원의 계"</ref> 그러나 그해 [[9월 20일]] 죄인 명단에서 특별히 정계되었다.<ref>승정원일기 인조 1년 계해(1623) 9월 20일(정미)자 6번째기사, "사간원이 아뢴 한호문 등의 일은 정계하였다"</ref> 명단에서 정계된 사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26년]] [[4월 13일]] 겸[[내금위]]장(兼內禁衛將)<ref>승정원일기 인조 4년 병인(1626) 4월 13일(을유)자 29번째기사, "병조가 남이웅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ref> [[1627년]] [[1월]] [[정묘호란]] 당시 [[소현세자]]를 배종하였다.<ref>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1월 24일(임진)자 7번째기사, "세자 배종인의 명단"</ref> 그해 [[4월 5일]]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사급(賜給)받았다.<ref>승정원일기 인조 5년 정묘(1627) 4월 5일(신축)자 2번째기사, "영부사 이원익 등에게 시상하라는 전교"</ref>
  • 홍승목 . . . . 2회 일치
         [[한성부]] 출신으로 [[1875년]] [[조선의 과거 제도|과거]]에 합격하여 [[승정원]]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홍문관]]과 [[사헌부]] 등에서 근무하다가 [[1879년]] 형조와 병조의 참의 자리에 올랐으며, [[1881년]]과 [[1883년]]에는 각각 [[사간원]]의 대사간과 [[성균관]]의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890년]] 형조참판과 병조참판을 지냈고, [[1900년]] [[궁내부]] 특진관에 올랐다.
  • 홍인한 . . . . 2회 일치
         과거 급제 후 청요직을 거쳐 1757년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했으며 전라도관찰사 재직 중 [[기생]]들의 춤과 노래실력을 트집잡아 [[곤장]]을 남발하고 즐겼다고 한다. 이는 중앙에는 알려지지 않았다가 [[성대중]]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승지, 사간, 대사헌, 호조와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이후 이조, 병조판서, 공조판서 등을 두루 거쳐 1774년 의정부우의정, 1775년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그 후 승지, 한성부우윤, 대사헌 등을 지내고, 1762년 호남안집사(湖南安集使)로 순무하고 돌아왔다. 호조참판, 예조참판, 도승지 등을 거쳐 [[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고, 자헌대부로 승진, 공조판서와 이조판서, 병조판서 등 6조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1774년]] [[의정부]][[우의정]]으로 특진하였다.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 김륵 . . . . 1회 일치
         [[1580년]]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나갔다가 병조 좌랑·사간원 정언·사헌부 지평·홍문관 수찬·이조 좌랑을 지냈다.
  • 김정난 . . . . 1회 일치
          * [[1991년]] 12월 11일 첫 회가 나간 뒤 시간대가 자주 변경되어 오다가 [[1995년]] 2월 7일부터 화요일 오후 7시 5분으로 고정된 [[SBS]] [[코미디 전망대]]를 같은 달 28일부터 개그맨 [[김병조]] [[이봉원]], 아나운서 [[김성경]]과 공동 MC를 맡았으나 그 해 봄 개편으로 김성경 아나운서와 함께 두 달 만에 하차했다. 사족으로, 코미디 전망대는 김정난 뿐 아니라 다른 방송사에서 활동해 오던 여자 진행자들이 정통 드라마 출연 경력을 가졌다.[* MBC 공채 MC 출신 [[이매리]], KBS - [[MBC]]에서 활동해 온 개그우먼 [[조혜련]]]
  • 김효원 . . . . 1회 일치
         그 뒤 병조좌랑·[[정언]]·지평을 지냈으며 사헌부 지평으로 재직 중 김효원은 [[문정왕후 윤씨]]가 죽고 [[척신계]]가 정계에서 몰락하면서 새로이 정계에 진출한 신진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로 부상하게 되었다. [[1574년]](선조 7년) 이조전랑으로 있던 오건(吳健)이 자리를 옮기면서 이조전랑으로 [[오건]]이 그를 추천하였으나<ref>1575년 이전까지 조선에서는 이조 전랑의 임명은 전임자의 후임자 천거로 임명되었다.</ref> 과거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문객이었다는 이유로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강하게 반대하여 실패하였다. 그러나 그는 외척도 아니고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므로 [[심의겸]]의 반대를 견뎌내고 [[이조]][[전랑]]이 되었다. 또한 그는 [[심의겸]]이 외척으로 그의 집안이 [[윤원형]]의 집안과 인척이고 가까이 왕래한 것과, [[심통원]]의 부패, 비리를 지적하며 공격하였다.
  • 백이소 . . . . 1회 일치
         [[1814년]](순조 14년)에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광산사]](光山祠)에 배향되었다.<ref> 《경주읍지》 </ref> 광산사는 훼철되었다가 [[광산정사]](光山精舍)로 복건되었다.
  • 서거정 . . . . 1회 일치
         [[1456년]](세조 2) 문과중시에 급제, 이듬해 문신정시에 장원했다. 후에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어 [[146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가서 그 곳 학자들과 문장과 시(詩)를 논하여 해동(海東)의 기재(奇才)라는 찬탄을 받았다. 귀국 후 대사헌이 되고 [[1464년]] 조선 최초로 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 :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함)이 되었으며 [[1466년]] 발영시에 또 장원, 이후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예조판서]], [[호조판서]], [[이조판서]] 등 6조(曹)의 판서를 두루 지내고 [[우참찬]], [[좌참찬]], [[우찬성]] 등을 두루 거쳐서 [[1470년]](성종 1) 좌찬성(左贊成)에 올라 이듬해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달성군(達城郡)에 봉해졌다.
  • 서명선 . . . . 1회 일치
         영조 말기 [[예조판서]], [[도총관]], [[병조판서]], 수어사, [[이조판서]]를 지내며 세손(뒷날의 정조)을 지켜서 정조의 신임을 얻는다.
  • 서영춘(코미디언) . . . . 1회 일치
         ||<width=25%><:> -[* 첫 시상식] ||<:> {{{+1 → }}} ||<width=25%><#FFFFA1><:> '''서영춘[br](1984)'''||<:> {{{+1 → }}} ||<width=25%><:> [[김병조]][br](1985) ||
  • 손병조 . . . . 1회 일치
         '''손병조'''([[1956년]] ~ , [[대구광역시|대구]])는 [[대한민국]]의 세무공무원이다.
  • 안석환 . . . . 1회 일치
         * 2017년 [[tvN]] 토일드라마 《[[명불허전 (드라마)|명불허전]]》 ... 신명훈 / [[병조판서]] 역
  • 이경영(1958) . . . . 1회 일치
          * MBC [[이산(드라마)|이산]] - 병조판서 한준호 역 (2008년)
  • 이근택(1865) . . . . 1회 일치
         본관이 [[전주 이씨]]다. [[성종(조선)|성종]]의 아들인 경명군의 아주 먼 후손으로, 1865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 출신이며 초명은 근용(根湧)이다. 무신 집안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 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 참판 등을 역임 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 이영 (1494년) . . . . 1회 일치
         [[조선 중종|중종]] 때인 1514년(중종 9년) [[무과]]에 급제하여 여러 무관직을 거쳤으며, 절도사, 참판 등을 역임했다. 벼슬에 있으면서 염근(廉謹)하기가 무반(武班)에서 가장 보기 드문 자라는 평을 들었다. 1545년 [[조선 명종|명종]]이 즉위하자 단천 군수를 지냈다. 이듬해 정평 부사에 부임하여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여 명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정평부사 재직시 사적으로도 백성을 범하지 않아 감사가 포장(褒奬)하고 통정대부로 가자(加資)되었다. 1552년 회령부사로 있으면서 훌륭한 정치를 베풀고 청백리에 뽑혔다. 또한 야인을 회유하여 변방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군비 확충과 군사훈련에 공을 세워 동지중추 부사가 되었다. 1556년 평안도 절도사가 되었다. 그 후 병조참판과 제주 목사·경상우도 병마절도사·부호군·호군 등을 지냈다.
  • 이현보 . . . . 1회 일치
         이후 병조참지·동부승지·부제학 등을 거쳐 대구부윤·경주부윤·경상도관찰사·형조참판·호조참판을 지냈다.
  • 이홍렬(코미디언) . . . . 1회 일치
         대표적인 콩트로는 1980년대에는 [[김병조]]와 콤비를 이룬, 청춘만만세의 카운셀링 개그코너 '어찌 하오리까'가 있으며, 일밤대행진 마당놀이에선 주로 사회자를 봤다.
  • 정난정 . . . . 1회 일치
         그녀는 [[보우 (조선)|보우]]를 [[문정왕후 (조선)|문정왕후]]에게 적극 추천하여 그를 총애받게 한다. 정난정은 봉은사의 승려 보우를 문정왕후에게 소개시켜 병조판서직에 오르게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일시적으로 불교가 융성하기도 했다.<ref name="park207">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 실록 (도서출판 들녘, 1996) 207페이지</ref>
  • 정환덕 . . . . 1회 일치
         [[고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정종소]](鄭從昭)의 12세손이고,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자 영월 환고사에 배향된 현령 증 병조판서 강의공(剛義公) [[정세아]](鄭世雅)의 10세손이며, 대구부의 청호서원(淸湖書院)에 배향된 진주목사 [[정호인]](鄭好仁)의 8세손이다. 증 통훈대부(通訓大夫) 예식원좌장례(禮式院左掌禮) [[정하형]](鄭夏亨)의 증손이며, 증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감승(秘書監丞) [[정윤휴]](鄭胤休)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선략장군(宣略將軍) 행 선전관(宣傳官) 증 가선대부(嘉善大夫) 군부협판(軍部協辦) [[정의채]](鄭義采)이며, 어머니는 증 정부인 이씨(貞夫人 李氏)와 증 정부인 주씨(貞夫人 周氏)이다.
  • 최재환(배우) . . . . 1회 일치
         ||<|3> [[2007년]] || [[화려한 휴가]] || 병조 || ||
  • 폐비 윤씨 . . . . 1회 일치
         *** 오빠 : 병조참판 [[윤구 (조선 전기)|윤구]](兵曹參判 尹遘, 미상~1513)
  • 한명진 (1426년) . . . . 1회 일치
         1453년(단종 1) 진사시에 합격하고, 계유정난에 참여한 공으로 정난공신 3등에 녹훈되고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다. 1454년에 죽고 가정대부(嘉靖大夫)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도(襄悼)이다.
  • 현진건 . . . . 1회 일치
         이들 형제는 현진건이 5촌 당숙 '''현보운'''([[1875년]]~[[1919년]])의 양자로 [[입양]]되어 들어간 뒤 법적으로는 친형제에서 6촌 형제로 바뀌었다. 관립 일어학교 출신의 보운은 고종 33년인 [[건양]](建陽) 원년([[1896년]]) 8월 3일에 외국어학교의 교관(敎官)이 되었고, 광무 3년([[1899년]])에는 궁내부 번역관, 광무 4년([[1900년]]) 12월 24일에는 예식원 참리관으로 임명되어 봉직하다가 [[러일전쟁]]이 일어난 광무 7년(1903년) 11월 11일에 주일공사관 이등참서관이 되었고, 광무 8년(1904년) 일본 보병대 수원(隨員)으로 일본으로부터 즈이호오 4등 훈장을 받기도 했다. 광무 9년(1905년)에는 [[병조|군부]] 군무국 포병과로 옮겨 정위가 되었다.
  • 홍순언 (1530년) . . . . 1회 일치
         사신이 탄 말이 [[압록강]]에 이르렀는데 류씨 부인과 하인들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짐승도 은혜를 아는 법인데 사람이 되어 은혜를 모른다면 그것은 금수만도 못한 것이라며 비단을 받기를 거듭 부탁하며 하소연하니 비단을 받아서 되돌아왔다. 종계변무를 성사시킨 공으로 홍순언은 [[광국공신]] 2등관(光國功臣二等管)에 책록되고, 면천 허통하여 [[자헌대부]] 당성군(唐城君)에 책봉되었다.<ref>홍순언은 서자의 신분이었다.</ref> 후에 우림위장(羽林衛將)이 되었다. 이후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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