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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규수
         대대로 [[노론]]이었지만 일찍이 고조부 [[박필균]] 때부터 [[당쟁]]을 스스로 거부했고, 할아버지 [[박지원 (실학자)|연암 박지원]] 역시 [[노론]] 내의 외척·탕평당으로서, 당시 주류였던 [[벽파]]와는 다른 [[북학파]]라는 새로운 경향을 창시해 영수(領首)가 됐다. 박규수는 성장 후에도 이런 선대의 사상을 계승해 적극적인 서양문물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다.
         저암 유한준과 연암 박지원은 집안끼리 친분이 있었고 연배도 비슷해 젊은 시절부터 절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박지원 (1737년)|연암 박지원]]이 [[유한준]]에게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고 여러 차례 혹평했다. 그러자 저암은 연암에게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을 쓴다'라며 몰아붙였다.<ref>유한준은 문장의 모범을 사마천과 반고 등 진한(秦漢) 시대의 고문(古文)을 전범으로 삼았고,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글을 본받아 개성적인 글을 창작하는 것)을 글쓰기의 목표였다.</ref> 결정적으로 선산 이장 문제가 불거지면서 원수가 되는데, 연암이 조부 [[박필균]]과 친부 [[박사유]]의 묘를 이장코자 한 곳이 마침 [[기계 유씨]] 선산 근처였었다. 유한준은 이를 반대하다가 막을 방법이 없자, 원래 집안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며 어린 나이(15세)에 죽은 자기 손자를 박필균 묘 위에 매장해 법률로 다투게 됐다. 이에 박종채는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세의 원수'로 규정한 것이었고, 이에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도 연암을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었다라고 받아치는 등 감정의 골은 돌이킬 수 없게 됐었다.
         * [[박필균]]
  • 박사유
         '''박사유'''(朴師愈, [[1703년]] - [[1767년]] [[6월 2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포의로 생활하다 만년에 음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이비가 2차 정사에서 정환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2Fitkcdb%2Ftext%2FnodeViewIframe.jsp%3FbizName%3D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ref> 사후 손자 [[박규수]]의 출세로 여러번 [[증직]]되어 [[증직|증]]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돈령부]]지사 [[박필균]]의 아들이고 연암 [[박지원]]의 아버지이며 환재 [[박규수]]의 증조부가 된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으로, 자는 퇴지(退之)이다.
         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의 고관이었지만 그는 오래도록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포의로 생활하다가 만년에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출사하여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ref>아버지 박필균이 정2품에 이르렀다.</ref>
         ** 친아버지 : [[박필균]](朴弼均)
  • 박사유 (1703년)
         '''박사유'''(朴師愈, [[1703년]] - [[1767년]] [[6월 2일]])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포의로 생활하다 만년에 음서로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ref>[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이비가 2차 정사에서 정환익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였다]{{깨진 링크|url=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S&url=%2Fitkcdb%2Ftext%2FnodeViewIframe.jsp%3FbizName%3DMS&jwId=K01&moId=010&daId=100&gaLid=194&gaId=&yoId=&ilId=&leId=&NodeId=ms_K001&setid=278013&Pos=2&TotalCount=5&vipyunid=undefined }}</ref> 사후 손자 [[박규수]]의 출세로 여러번 [[증직]]되어 [[증직|증]] [[이조판서]]에까지 이르렀다. [[돈령부]]지사 [[박필균]]의 아들이고 연암 [[박지원]]의 아버지이며 환재 [[박규수]]의 증조부가 된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으로, 자는 퇴지(退之)이다.
         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의 고관이었지만 그는 오래도록 관직에 오르지 못하고 포의로 생활하다가 만년에 [[음서 제도|음서]]로 관직에 출사하여 [[통덕랑]](通德郞)을 지냈다.<ref>아버지 박필균이 정2품에 이르렀다.</ref>
         ** 친아버지 : [[박필균]](朴弼均)
  • 박지원 (1737년)
         |친인척 = 조부 박필균, 손자 박주수, [[박규수]], 박선수, 외조부 이창원, 장인 [[이보천]], 처숙부 [[이양천]], 처숙부 이군문, 삼종형 [[박명원]], 족질 [[박종경]], 족손 [[수빈 박씨]]
         박지원은 [[1737년]]([[조선 영조|영조]] 13) [[3월 5일]]([[음력 2월 5일]]) 축시에 [[한양]] 서부(西部) 반송반(盤松坊 : 야동(冶洞))에서 지돈녕부사를 지낸 [[노론]]중진 장간공 박필균(朴弼均)의 손자이며, 열상외사(洌上外史) [[박사유]](朴師愈)의 둘째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함평이씨(咸平李氏)로 이창원(李昌遠)의 딸이다. 그의 형제들 중에는 2남 2녀가 전하는데 위로 형 박희원과 누나 두 명이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하였다.
         5대조 박미(朴瀰)의 동생 박의(朴漪)의 아들은 현석 [[박세채]]로 소론의 거물이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서인]] 당원이었으나 [[조선 숙종|숙종]] 때 [[노론]]과 [[소론]]이 갈리면서 그의 가문도 노론과 소론으로 당론이 나뉘었고, [[박세채]]는 소론을 선택하였다. 당대인 [[조선 영조|영조]] 때의 거유 성리학자인 여호 [[박필주]](黎湖朴弼周)는 그의 재종조부로, 증조할아버지 박태길의 형 박태두의 아들이자 할아버지인 박필균의 사촌이었다. 할아버지 박필주는 지중추부사와 지돈녕부사를 역임한 노론 거물이었지만 당쟁에 뜻을 두지 않고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할아버지 [[박필균]]은 당쟁에 초연했고 연암 역시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당쟁에서 거리를 두었다.
         [[1739년]] 형 [[박희원]]이 장가 들었다. 형수 이씨는 16세에 시집와서 어린 시동생인 박지원을 돌보았다. 어려서 그는 옛 사람의 편침(扁枕) 온피(溫被) 같은 것을 흉내내었다 한다. [[1741년]] 4세 때 [[경기도]] [[관찰사]]로 부임하는 할아버지 [[박필균]]의 임지에 따라갔다가 되돌아왔는데, 한번 본 감영의 모양과 칸수를 모두 말하여 신동이라 칭찬을 들었다.
         그는 성장하면서 신체가 건강하고 매우 영민하여 암기에 능하였다. 그의 가문은 [[서인]]과 [[노론]]의 명문가문이었으나 아버지 [[박사유]]는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이렇다할 직업이 없는 포의(布衣)로 지냈기 때문에 할아버지 박필균에게서 양육되었다. 아버지 [[박사유]]는 포의로 살다가 늦게 [[음서 제도|음서]]로 출사하여 통덕랑(通德郎)에 오르지만 곧 사망한다.<ref>사복시정은 사후에 증직된 벼슬이다.</ref> 할아버지 박필균은 정2품에 이르렀지만 당색에는 관심이 없어서 적을 만들지 않았다.
         22세 때부터 [[원각사지|원각사]] 근처에 살 때 [[박제가]]·[[이서구 (1754년)|이서구]]·[[서상수]]·[[유득공]] 등과 이웃하여 깊은 교우를 맺었다. [[홍대용]]과도 사귀면서 지구의 자전설을 비롯한 서양의 신학문을 배웠으며(30세 때<ref name="글로벌" />), [[북학]]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방법을 토론하였다. 이후 산사나 강가, 정자를 떠돌며 김이소(金履素) 등 10여 명과 과거 공부에 힘썼다. [[1760년]] 할아버지 [[박필균]]이 죽자 생활은 더욱 곤궁하였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는 유한준을 아버지의 원수를 뛰어넘어 백세 동안 이어질 집안의 원수라고 성토하였다. 저암 유한준은 연암 박지원과 쌍벽을 이루는 문장가로 집안 끼리도 인연이 있고 연배도 비슷하여 젊은 시절 두 사람은 매우 절친하게 지냈다. 문학공부를 같이한 문우(文友)이자 친구로 지냈다. 그런데 박지원이 유한준의 글을 여러번 비평하다가 연암은 저암의 문장을 두고 '글이 너무 기교에 치우쳤다'고 혹평했다. 반면 저암은 연암의 저작에 대해 '오랑캐의 연호를 쓴 글'(虜號之稿)이라며 몰아붙였다.<ref>유한준은 문장의 모범을 사마천과 반고 등 진한(秦漢) 시대의 고문(古文)을 전범으로 삼았고, 박지원은 법고창신(法古創新, 옛글을 본받아 개성적인 글을 창작하는 것)을 글쓰기의 목표로 삼았다.</ref> 박지원이 할아버지 [[박필균]]과 아버지 [[박사유]]의 묘를 이장한 곳이 유한준 선산 근처였는데, 유한준은 박지원의 이장을 반대하다가 먹혀들지 않자, 집안의 정자가 있던 곳이라며 자신보다 먼저 요절한 15세된 손자의 묘를 박필균 묘 위에 매장했고 쟁송문제로 발전했다. 박종채는 유한준의 집안을 일컬어 '백세의 원수'로 규정했고, 유한준의 아들 유만주는 연암을 '매우 잡스러운 인간'이라고 비판하였다.
         * 할아버지 : 박필균(朴弼均, ? - [[1760년]] [[8월]], [[돈령부]]지사 역임, 시호는 장간)
         * [[박필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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