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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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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 정보
| 이름 = 박제빈
| 사진 =
| 출생일 = 1858년
| 출생지 = 서울특별시
| 사망일 = 1921년
| 사망지 =
| 국적 =
| 별칭 =
| 학력 =
| 경력 =
| 직업 =
| 작위 = 남작
후임자 = [[박서양 (1875년)
박서양]]
| 종교 =
| 배우자 =
| 상훈 =
| 웹사이트 =
}}
박제빈(朴齊斌, 1858년 ~ 1921년)은 조선의 관료이며 일제 강점기조선귀족 작위를 받았다. 본관은 반남이다.

생애

한성부 출신으로 1874년 과거에 급제하여 승정원홍문관, 사헌부 등에서 주로 언관 벼슬을 맡아 보았다. 1891년에는 사간원의 수장인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1907년 승녕부의 부총관에 임명되었고 친일 활동에 적극 나섰다. 1909년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었을 때 민병석, 김윤식 등과 함께 장례식에 참가하여 조문한 것이 한 예이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찬의로도 임명되었다. 1911년에는 경학원 부제학에 임명되었으며, 친일 단체인 대정실업친목회에도 가담했다.


박제빈의 작위는 박서양에게 습작되었는데, 박서양의 양자인 박승방이 습작을 거부하고 독립 운동에 나서 광복 당시에는 습작 받은 후손이 없었다.<ref>
{{서적 인용
|저자=허종
|제목=반민특위의 조직과 활동
|날짜=2003-06-25
|출판사=도서출판선인
|출판위치=서울
id={{ISBN
8989205514}}
|쪽=243쪽}}</ref>

가족 관계

* 증조부 : 박남원(朴南源)
** 조부 : 박종준(朴宗準)
*** 부 : 박화수(朴禾壽)
*** 아들 : 박서양(朴敍陽)

참고자료

* {{서적 인용
|저자=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제목=2007년도 조사보고서 II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이유서
연도=2007
|발행월=12
|id=발간등록번호 11-1560010-0000002-10
|출판위치=서울
|쪽=216~234쪽
|장=박제빈
|장url=http://www.pcic.go.kr:8088/pcic/UserFiles/File/2007JOSA/SUJAKSUBSAK/14-PJB.pdf
}}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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