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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종(조선)
         여기에 불만을 품은 [[김옥균]]과 [[박영효]] 등은 --희대의 병크-- [[갑신정변]]을 일으키게 되고 이로 인해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바람에[* 아이러니하게도 이로 인해 그 당시 조선 조정 내부에서 가장 친일적이었던 급진개화파는 세력이 엄청나게 쪼그라들어 구성원들 모두가 죽거나 망명생활을 하게 된다.] 여기에 위협을 느낀 민씨와 고종은 청과 일본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 김병기 (1814년)
         [[1883년]] 특별히 가자(加資)되어 [[통정대부]]가 되었으며 형조참의에 올랐다가, [[1884년]](고종 21년) 양자 [[김옥균]]이 [[서광범]](徐光範), [[박영효]], [[변수 (1861년)|변수]], [[윤웅렬]], [[홍영식]] 등과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도주하자, 이에 연좌되어 삭직되었다. [[1886년]] 동료인 [[허직]](許稷) 등 대각(臺閣)에서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사면을 요청하였으나 고종은 사면을 거부하였다.
         * [[박영효]]
  • 김성수 (1891년)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ref name="omykjs0612">[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7207 김성수는 민족자본가였나? - 오마이뉴스] 06.12.05일자</ref>
         한편 김성수는 [[경방|경성방직]]의 초대사장에 [[박영효]](朴泳孝)를 영입하였는데, 이는 그가 당대의 거물[[친일파]] [[박영효]]를 끌어들인 것은, [[박영효]]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조선총독부|총독부]]와 [[조선]] 내 유지세력들을 사업에 끌어들이려는 의도에서였다고 풀이할 수 있다<ref name="malsso1"/>. [[경성직뉴]]를 인수하고 경방을 창립키 위해 인촌(仁村)은 설립허가서를 [[조선총독부|총독부]]에 제출했으나 그들은 당장 허가를 내주지 않고 질질 끌었다. 그 이유는 [[조선인]]의 방직회사 건설로 그때까지 폭리를 취해 오던 [[일본]]계 [[방직]]회사가 [[조선]]내의 시장을 빼앗길 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더구나 1919년 그 해에는 [[일본]]의 <미쓰이>재벌이 부산에 조선방직회사를 설립하던 해여서 경방이 맞서게 되면 불리한 여건이었다.
         [[1922년]] 3월에는 태극성 광목을 출시하였다. 조선인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는 상표를 고민하던 그는 [[조선]]말 [[박영효]]가 창안한 [[태극기]]에서 힌트를 얻어 태극성 광목이라 이름 붙였다.
  • 김홍집 (1842년)
         [[청일 전쟁]]의 결과 일본이 득세하자 갑신정변으로 일본에 망명갔던 강력한 친일파 박영효가 입각한 제2차 김홍집, 박영효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이때 군국기무처를 없애고 1차 내각때부터 작성한 초안을 완성, 새로운 법령인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직접 수립하여 고종으로하여금 발표하게 하였다. 이어 8아문을 7부로 고치고, 지방 8도를 23부로 바꾸고 교육입국조서를 발표하여 사범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재정난과 [[박영효]](朴泳孝)·[[서광범]](徐光範) 등과의 대립, [[유길준]] 등의 소극적 협력 등으로 지원 세력이 없어 내각은 곧 와해되고, 박영효가 역모사건으로 일본 망명하고 박정양 내각이 탄생하였다.
         * [[박영효]]
  • 남궁억
         [[1902년]]에는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의 한국 분할설과 러일 협정을 공박하였으며,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 '황성신문 사장이던 남궁억과 신문사 총무 나수연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으나 혐의 없음으로 4개월 뒤에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 남궁염
         남궁염은 [[1888년]] [[3월 17일]] [[한성부]] 정동에서 [[남궁억]]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배재학당]] 에서 영어를 배우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개화파 인사 [[박영효]]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버지니아주]] [[랜돌프 매건 대학]]을 다녔다. [[랜돌프 매건 대학]]에 재학 중 우연히 [[이승만]]을 만나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 대한제국 순종
         * [[박영효]]
  • 민겸호
         * [[박영효]]
  • 민영환
         * [[박영효]]
  • 민영환 (1861년)
         * [[박영효]]
  • 박규수
         [[박지원 (실학자)|연암 박지원]]의 손자로 추사 [[김정희]] 등과 교류가 깊었고, [[제네럴셔먼호 사건|제네럴 셔먼 호]]를 격퇴하고 [[경복궁]] 재건의 총책임을 맡는 등 [[흥선대원군]]으로부터도 그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박지원 (실학자)|연암 박지원]]의 학문 및 사상을 계승하는 이로서 척화론(斥和論)에 반대하고,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온 후 [[양무 운동]]처럼 서양 기술의 선택적 도입과 국제 통상을 주장했다. [[김옥균]], [[홍영식]], [[박영효]], [[서재필]], [[박정양]], [[윤치호]] 등 [[개화파]] 청년들을 길러냈으며 일본과 [[병자 수호 조약|강화도 조약]]이 체결될 때는 위정척사파의 명분론을 반대하고, 막후에서 조정 대신들을 움직여 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 양무 운동 도입 좌절과 박영효 =====
         1872년(고종 9년) [[조선 철종|철종]]의 하나 남은 혈육인 [[영혜옹주]](永惠翁主)의 혼례를 정하게 됐다. 부마자리를 두고 4월 수원부유수 신석희(申錫禧)와 함께 자신의 문하생이자 같은 일족인 [[박영효]]를 부마로 추천했다. 조선 왕실은 그의 추천대로 박영효를 부마로 삼아 금릉위의 봉작을 주는 한 편, 고종의 친척 매제 뻘이 된 10살짜리 박영효에게 삼정승의 품계인 [[조선의 품계|상보국숭록대부]]도 내리고 왕실종친 반열에 올렸다. 고종의 친형인 [[이재면]]의 품계보다 높았다.
         박규수의 문하생들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순)
         1878년(고종 15년) 11월 1일 문익(文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의 사상과 학문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윤웅렬]], [[김홍집 (1842년)|김홍집]], [[윤치호]], [[홍영식]], [[서재필]] 등에게 계승됐다. 그가 죽은 후에도 [[유대치]], [[오경석]] 등이 문하생들의 훈육을 맡았다. [[양무 운동]] 모델의 동도서기를 주장했던 박규수와 달리 제자들은 [[메이지 유신]] 모델의 급진적인 개화를 향해 나아간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그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등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대거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갔다. 문하생들이 역도들이 되자 이미 사망한 그 역시 관작을 모두 삭탈당했으며, 집은 헐려 공터가 됐다가 1906년 [[보성중학교 (서울)|보성중학교]] 부지가 됐다.
         그는 척화론을 공리공담과 불필요한 체면으로 규정했다. 할아버지 박지원의 사상을 계승하여 [[최익현]], [[김평묵]] 등의 주자학적 명분론에 입각한 척화론(斥和論)을 헛된 명분론으로 규정, 반대·비판했다. 그는 적극적인 서양문물의 도입 및 외국과의 통상강화를 주장했고, 북학파의 사상을 개화파에게 전수했다. 정계에서 은퇴한 후 [[개화파]] 청년들을 지도하여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윤치호]], [[박정양]], [[이상재]]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백의정승 [[유대치]], 중인 출신 외교관 [[오경석]] 등과는 신분을 초월하여 친구로 사귀었고, 승려 [[이동인]]은 사상을 떠나 친구로 지냈다. 박규수는 사람은 신분이나 지위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됨됨이를 보고 평가해야 된다고 했다. 박규수는 자신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박정양]], [[서재필]], [[김윤식]], [[김홍집 (1842년)|김홍집]], [[유길준]], [[어윤중]], [[윤웅렬]] 등의 제자, 문인들을 길러냈다.
         * [[박영효]]
  • 박사유
         * [[박영효]]
  • 박사유 (1703년)
         * [[박영효]]
  • 박세채
         후대의 연암 [[박지원]]과 [[박명원]], [[박규수]], [[박영효]] 등도 그의 일족으로 남계의 방계 후손들이었다.
  • 박정양
         * [[박영효]]
  • 박지원 (1737년)
         * [[박영효]]
  • 변수 (1861년)
         [[1882년]] [[일본]] 유학을 갔다가 [[임오군란]]으로 귀국하였으나, [[제물포 조약]] 답례 수신사로 파견되는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83년]]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답례로 전권대신 [[민영익]]이 [[미국]]에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귀국 후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용되어 [[8월]] [[우정국]] [[주사]], [[군국사무아문]] [[주사]]로 발령되었다. 그해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정변 전후로 궁궐 내부 정보를 입수, 파악하였으며 거사 당시 1개의 행동대를 지휘하였다.
         그러나 [[임오군란]]이 진압되고 [[일본]]과의 [[제물포 조약]]이 체결되자, 그해 [[8월]] 조선 조정에서 [[일본]]측에 답례로 수신사를 파견할 때 수신사로 임명된 [[박영효]]의 수행원이 되어 서장관 [[서광범]]·[[김옥균]]·[[민영익]]·[[유혁로]] 등과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김옥균]] 등이 차관교섭을 벌여 국채위임장에 대한 보장을 받는 동안 다시 양잠술과 화학 공부를 마치고, [[1883년]] [[3월]] 귀국하였다.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와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ref name="매경">[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6&no=246277 美 메릴랜드大, 피오리나ㆍ매코맥ㆍ슈왑 등 美 실력자 배출] 매일경제 2006-07-03</ref>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용되었으며, [[8월]]에는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가 며칠 뒤 바로 [[군국사무아문]]의 [[주사]]로 재발령되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파견된 사관생도들이 귀국함에 따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 거사에 가담하고, 행동대의 하나를 이끌게 되었다.
         [[12월 12일]], 다케조에 공사가 이들의 피신을 주선하였다. [[김옥균]]·[[박영효]]·[[이규완]]·[[정란교]]·[[서광범]]·변수 등 일행 9명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옷을 변복하고 인천주재 주[[조선]]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하였다. 그러나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의 배려로 일본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쓰지 가쓰사부로({{lang|ja|辻勝三郞}})의 일본 상선 '센자이마루'({{lang|ja|千歳丸}})에 승선했다.
         [[12월 13일]] [[인천광역시|인천]]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 상선 센자이마루에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과 함께 숨어있던 중 [[묄렌도르프]]가 병사들을 이끌고 추격, 외무독판 조병호(趙秉鎬)와 인천감리 홍순학(洪淳學)을 대동하고 다케조에에게 '국적(國敵) 김옥균 일행을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다. 배안에서 이를 지켜보던 일행은 수중에 든 비상으로 자살까지 결심하였다. 우물쭈물대던 다케조에는 배로 올라와 일행에게 내렸으면 좋겠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러나 [[제물포항]]에 있던 [[일본인]] 교민들은 자국 공사의 비열함에 혀를 차며 질타했고, 선박의 선장 쓰지 가쓰사부로 역시 다케조에의 무책임함을 지적, 공사를 신뢰해서 이들을 태웠는데 이제와서 내리라 하면 이들을 죽이는 것밖에 더 되느냐며 다케조에의 신뢰 없음을 질타하였다.
         쓰지는 [[묄렌도르프]]에게 그런 사람은 없으며, [[일본]]의 선박을 함부로 수색할수는 없다, 임의로 수색했다가는 본국에 통보하여 외교 문제로 삼겠다며 [[묄렌도르프]] 일행을 되돌려보냈다. 쓰지의 배려로 박영효와 일행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의 망명 사건은 [[1942년]] [[7월]] [[조용만]]의 단편 소설 [[배 안에서]]의 소재가 되었다.
         * [[박영효]]
  • 신응희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의 심복이 되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8월]] 귀국하였다. 이후 남행부장 겸 사과, 후영군사마 등을 역임하여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으며, [[1886년]] [[5월]]에는 [[박영효]],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조선]] 조정이 파견한 [[지운영]](池運永)을 [[김옥균]]의 유인책으로 [[유혁로]], [[정난교]], [[이규완]] 등과 함께 유인하였다.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한참 안심시킨 뒤 [[지운영]]을 유인하여 암살 계획을 폭로하였다.
         [[1894년]](고종 30년) [[7월]] 사면을 받고 귀국,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했으며 [[1895년]] [[박영효]], [[유혁로]] 등과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다가 [[유길준]]의 밀고로 폭로되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을사 보호 조약]] 이후 사면받고 귀국, [[중추원]]부찬의, [[1908년]](융희 2년) [[전라남도]][[관찰사]], 겸임 [[전라남도]][[재판소]] [[판사]]를 지냈으며, [[1910년]] [[10월]] [[한일 합방]] 조약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전라북도]][[도지사|도장관]], [[1919년]] [[전라북도|전북]][[도지사]]를 역임했다.
         [[1875년]](고종 12년) [[부사과]]가 되었다. 무관으로 있으면서 일찍이 [[박영효]](朴泳孝)의 심복이 되었다.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주선으로 [[서재필]], [[정란교]], [[이규완]] 등 13명과 함께 사관생도의 신분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처음에는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의숙]]에서 [[일본어]]를 배웠고, [[1883년]] [[10월 3일]] [[일본 육군]]의 [[부사관]] 양성기관인 [[육군 도야마 하사관학교]]에 입학, [[1884년]] 5월에 졸업하였다.<ref name="hang1">1883년 5월~행동대원으로 활동했다.: {{서적 인용
         [[1884년]] [[7월]] 여비가 떨어져 수료후 귀국하였다. 귀국 직후 [[병조]] 조련국(操鍊局)에서 교관의 한 사람으로 근무하며 사관생도들의 훈련을 맡았고, [[김옥균]], [[박영효]] 및 미리 귀국해 있던 [[서재필]], [[이규완]] 등과 갑신정변 준비에 가담하였으며 [[1884년]] [[8월]] 남행부장 겸 사과(南行部將兼司果), [[8월 28일]] 부장(部將), [[9월]] 후영군사마(後營軍司馬)를 거쳐 [[10월]] 남행군직(南行軍職)에 임명되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고 [[서재필]], [[정난교]], [[서재창]], [[윤경순]], [[유혁로]], [[이규완]] 등과 함께 생도들, 장사패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부대, [[이규완]]이 인솔하는 부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등 10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박영효]], [[서광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중 그는 [[도쿄사범학교]](東京師範學校)를 다녔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며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박영효]], [[김옥균]]의 경호를 담당하였으나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 [[1886년]] [[5월]] [[이규완]]이 [[지운영]](池運永)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김옥균]]의 지시로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김옥균 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온 지운영을 유인, 그를 안심시킨 뒤 [[조선 고종|고종]]의 밀서와 비수, 칼 등을 압수하였다. [[1888년]](고종 23) 다시 배편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초 귀국하였다.
         [[1894년]] [[일본]]으로 잠입한 [[홍종우]]가 [[김옥균]]을 만나려 할 때, 주선하여 [[홍종우]]를 [[김옥균]]과 만나게 했다. 그러나 [[이규완]], [[유혁로]] 등의 극력 만류에도 김옥균은 그해 [[3월]] [[홍종우]]를 신뢰하여 함께 [[상하이]]로 떠나게 된다. 김옥균이 떠난 뒤에는 도쿄사범학교의 공부와 [[박영효]]의 경호에 전념하였다. [[일본]]에 체류하며 일본 여인 신매자(申梅子)와 결혼, 1남 7녀를 두었다.
         [[1894년]](고종 30년) [[7월]] 비밀리에 환국, 그해 [[11월]] [[통위영]] [[정령관]](統衛營副領官)에 임명되었다. [[1895년]] [[1월]] [[대한제국]] 육군 [[정위 (관직)|정위]](正尉)가 되어 [[훈련대]](訓練隊)에 배치되었고, [[2월]]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고 [[육군]][[참령]](陸軍參領)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그는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12월]] [[박영효]], [[오세창]], [[이규완]], [[권동진]], [[우범선]], [[이두황]],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904년]] [[4월]] 중순 [[조선 고종|고종]]은 주한일본국공사관에 조선인 출신 정치적 [[난민]] 신청자 중 [[박영효]], [[유길준]], [[장박]], [[조희연]], [[이두황]], [[이진호]], [[권동진]], [[구연수]], [[정란교]], [[이규완]], 이범래, 신응희 등 14명을 [[일본]]에서 추방하고, 나머지 다른 망명객은 송환할 것을 요청하였다. 주한일본공사는 [[4월 14일]]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고했는데 일본 정부에서는 이들의 송환을 거절하였다.
         * [[박영효]]
  • 오경석
         훗날 아들 [[오세창]]의 증언에 의하면, [[유대치]]가 오경석에게 어떻게 해야 [[조선]]사회의 개혁을 성취할 수 있느냐고 묻자, 오경석은 [[김옥균]] 등의 개혁적 성향의 북촌 양반들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그는“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구하여 혁신의 기운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오경석이 [[베이징]]에서 구입해 온 세계 각국의 지리와 역사, 과학과 정치 서적들은 [[이동인]]이 구해온 박물, 서양어 서적, 태엽기계, 거울, 망원경, 돋보기 등과 함께 [[유대치]], [[강위]], [[박규수]] 등에게도 전달되었고, 이들을 통해 [[김윤식]], [[김홍집]], [[유길준]],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등 북촌 청년들에게 전해지며 개화파라는 정치 세력이 형성되었다.
         오경석이 가지고 온 신서는 그의 친구인 [[유대치]]에게 영향을 끼쳤다. 유대치는 오경석과 동갑으로 불심이 깊고, 다방면에 유능한 한의사였으며, 유대치를 따르는 이들로는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이었다. 결국 오경석의 영향을 받아 초기 개화사상이 일어난 셈이다. 이런 까닭에 한국 최초의 개화사상가 또는 한국 개화사상의 비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 [[박영효]]
  • 오세창
         [[박규수]]의 문인이자 아버지 [[오경석]]의 문하에도 출입하던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김옥균]], [[유길준]], [[윤치호]] 등과 교류하며 가깝게 지냈다.
         {{인용문2|청년시대의 제우(諸友)<br><br>먼저 청년시대의 나의 동무들을 말하면... 그때 동경에 망명하였든 인물들은 [[박영효]], [[조희연]](군부대신 다니든 분), [[장박]](대신 지난이), [[유길준]](수상 지낸 이), [[권영진]](나의 중씨로 [[경무사]]), 유세남(내무차관 다니든 이), [[김옥균]], 그러고 우리 동렬로는 [[조희문]], [[이범래]], [[우범선]], [[이두황]], 유혁로, 신응희, 정난교, [[윤효정]], 오세창 또 우리보담 조금 늦어 들어온 소장파에 이신(李申), [[유동렬]], [[권석하]], [[이동휘]] 등 제인물이 있었다. 이 가운데는 1,2차 대면에 끈친 이도 있었지만은 대개는 여러 번 만났고 일도 도모하여 본 분들로 비교적 사람됨을 알 수 있었다.<ref>서정민, 《이동휘와 기독교》 (연세대학교출판부, 2007) 161페이지</ref>}}
  • 유일선
         [[1921년]] 일본조합교회의 후신인 조선회중기독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1924년]]부터는 [[이재극]], [[박영효]], [[이완용]], [[박승직]] 등의 유력 인사들이 항일 운동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한 친일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하여 [[1933년]] 이사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1936년]] 조선총독부 [[경기도]] 내무부의 지방과에서 촉탁으로 발령받은 것을 마지막으로, 이듬해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 유홍기 (1831년)
         유홍기는 [[중인]] 출신으로 개항 이전에 이미 개화에 대한 확고한 사상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여러 서양의 서적을 탐독하고 [[개화 사상]]에 눈을 떴다. [[김옥균]], [[박영효]] 등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들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정계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해 문호 개방과 정치 혁신을 주장했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뒤 행방불명되었다. 추사 [[김정희]] 문인이다.
         [[윤치호]], [[서재필]], [[김옥균]], [[박영효]] 등의 편지와 서신을 보면 대치장(大致丈)이라는 칭호로 많이 쓰인탓에 그것이 그의 이름보다 널리 알려졌던 것이다. 한의사였던 그는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와 조선을 오가며 가져다 준 신 문물을 일찍이 접하였다. 그는 역관 집안에서 태어 났으므로 신분상 중인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무관이었으므로, 그는 한의업에 종사한 양반 출신 유의였다.
         추사 [[김정희]]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그로부터 [[금석문]] 해독하는 것도 배웠다. 이후 친구인 [[역관]] [[오경석]]이 [[청나라]]에서 가져온 서학 서적을 탐독, 개화에 눈을 떴으며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윤치호]] 등 청년들이 그의 무하에 출입하며 [[오경석]], [[박규수]] 등과 문인들을 길러냈다. 그뒤 유홍기는 개화당 인사들의 막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유교]] 사상이 인간의 자유로운 사상을 억압한다고 본 그는 [[불교]]를 깊이 신앙하였으며 사학에 조예가 깊어 [[조선]] 고금의 역사 지식도 해박하였다. 신체가 장대하고 변설이 유창하였다고 한다.
         1877년 초기개화파 형성에 참여했던 [[박규수]]가 병으로 죽자, [[오경석]]을 통하여 박규수의 영향 아래 있던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洪英植), [[서재필]], [[서광범]](徐光範), 백춘배(白春培), [[유길준]], [[오세창]], [[윤치호]], 정병하(鄭秉夏), 이종원(李淙遠), 이정환(李鼎煥), 박제경(朴齊絅), 이동인(李東仁), 탁정식(卓挺植) 등의 청년들을 소개받아 함께 지도하게 되었다. [[1879년]] [[오경석]]이 병으로 죽게 된 뒤로는 혼자서 이들을 지도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연고로 세간에서는 그를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음력10월17일)]]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갑신정변]]의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다가,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유홍기는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吳世昌)의 가족과 함께 [[경기도]] [[파주시|파주]]로 피신하였다가 [[12월 8일(음력10월21일)]] 집을 나가 행방불명이 되었다. 혹시 [[갑신정변]]의 사후 처리로 수구파가 급진 개화파에게 대대적인 보복을 행할 때 암살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 [[박영효]]
  • 윤경순 (1855년)
         '''윤경순'''(尹景純, [[1855년]] ~ [[1885년]] [[12월 23일]])은 [[조선]] 말기의 상인, 무신, 혁명가이다. [[1884년]]의 [[갑신정변]]에 행동대장의 한사람이자 [[서재필]]의 휘하에서 1개 분견대를 지휘하였다. [[박영효]], [[서재필]] 등을 만나 감화되어 그들의 사상적 동지가 되었다.
         처음에는 동대문 밖에서 장작 장사를 하면서 박영효의 집에 드나들며 이인종, 이규완 등과 어울리다가 갑신정변에 가담하였다.<ref>민태원, 《불우지사 김옥균 선생 실기》 (이선아 역, 한국국학진흥원, 2006) 57페이지</ref> 정변 실패 후 [[전라남도]] [[곡성군]]으로 숨어들어 은신하였으며 [[1885년]] [[경기도]] [[부천시|부천]]에 사는 누이에게 가던 중 체포되어에서 사형당했다. [[갑신정변]] 당시 전영 소대장인 [[윤경완]]의 형이다. 다른 이름은 경순(景舜)이다.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처음에는 [[한성부]] [[동대문]] 밖에서 장작 장사를 했고, 그의 동생 [[윤경완]]은 무청(菁根) 장사를 하였다. 그는 장작장사를 하면서 [[박영효]]와 [[서재필]]을 만나 그의 사상에 감화되어 동지가 되었다. 이후 [[박영효]], [[서재필]] 등의 집에 드나들면서 [[서재필]], 이인종(李寅鍾), [[이규완]](李圭完), 황용택(黃龍澤), 최은동(崔恩同), [[서재창]], [[신중모]](申重模) 등을 만나 알게 되었으며, [[압구정]]에서 회합하고 [[1884년]]의 [[갑신정변]]에 참가하였다.
         [[12월 2일]] 박영효의 집에 모여서 거사를 계획하였다. [[서재필]]이 [[12월 2일]] 새벽 2시 박영효의 집으로 갔다. 그 곳에는 이미 이인종, [[홍영식]], [[서광범]], 김옥균의 동지들과 함께 모이기로 한 여러 장사들, 이규정(李圭貞), 황용택, [[이규완]], [[신중모]], 임은명, 김봉균, 이은종(李殷種), 윤경순 등이 다 모여 있었다. 그들은 함께 의논한 결과 [[12월 4일]]에 거사키로 하고만일 그 날 비가 오면 다음날인 [[12월 5일]]로 연기하기로 최종 확정하였다.<ref name="songkun58">송건호, 《송건호 전집 13:서재필과 이승만》 (한길사, 2002) 58페이지</ref>
         * [[박영효]]
  • 윤경완
         '''윤경완'''(尹景完, [[1860년]] ~ [[1885년]] [[12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상인, 무신으로 [[갑신정변]]의 행동대원이었다. [[한성부]] 출신으로 소년 시절부터 무청 장사를 하다가 [[박영효]], [[서재필]] 등에 의해 발탁되어 [[1883년]] 국비장학생으로 선발, [[일본]]에 유학하게 되었다.
         * [[박영효]]
  • 윤치영
         여기에서 그는 30년 연상의 맏형 [[윤치오]]와 [[윤치소]], 사촌 [[윤치호]]의 집에 드나들던 [[노백린]], [[박영효]], [[유길준]], [[양기탁]], [[이승훈 (1864년)|이승훈]], [[이승만]], [[김광서]] 등의 청년지사들을 보게 된다. 그는 다른 형제나 조카들과 달리 그들의 대화를 유심히 들었다고 한다.
         [[1940년]]대 윤치영은 [[여운형]]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 [[종로구]] 관철동의 양식집 백합원에 갔다가 관상가를 만났다. 윤치영에 의하면 그 관상가는 학맥으로는 박영효 계열의 사람이라 한다.<ref name="동산회고록:윤치영의 20세기 p.123"/>
  • 이민우 (1976년)
         |1996||KBS1||[[찬란한 여명]]||[[박영효]]||
  • 이민우(배우)
         2014년 6월 25일 KBS 2TV에서 방영되는 퓨전사극 [[조선총잡이]]에서 [[고종(대한제국)|고종]]역을 맡아 오랜만에 사극으로 컴백한다. 한 가지 배우개그를 말하자면, 이민우는 KBS대하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박영효]]로 나온 적이 있었다.
         || 1995년~1996년 || KBS1 || [[찬란한 여명]] || [[박영효]] || [* 한명회에서의 연산군이 아역에서 성인으로의 전환점이었다면 박영효 역할은 본격적인 성인 연기 도전의 시작이었으나, 드라마 시청률이 낮았던 탓인지 크게 기억되진 않은 듯 이 부분도 2013년 3월에야 추가되었다.] ||
  • 정광조 (1883년)
         }}</ref> 이용구와 [[김옥균]], [[박영효]], [[이완용]], [[송병준]]을 비롯해 [[이토 히로부미]]와 [[데라우치 마사타케]] 등을 추도하는 이 행사는 이석규가 [[흑룡회]]와 공동 개최했다.
  • 최동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관직을 내놓고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나러 도일했다. 최동은 [[가톨릭]] 계열인 [[도쿄]]의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서 수학했다. 이때 아버지는 이미 [[미국]]으로 떠나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던 시기라 고학을 하며 공부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최동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교분이 있던 [[개화파]]의 [[박영효]], [[서재필]], 계몽운동 계열의 [[안창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성장해서는 [[최남선]], [[정인보]], [[이광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특히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관에 크게 영향 받아 본업인 의학 연구 외에 역사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 흥친왕
         *** 양손부 : [[박찬주]], [[박영효]]의 손녀
         * [[박영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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