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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륵
         당색으로는 [[동인 (정치)|동인]]이고 학맥으로는 [[이황]]학파로, 퇴계 [[이황]]의 제자인 [[소고 박승임]], 금계 [[황준량]]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이황을 직접 찾아가 직제자가 되기도 했다. [[경상북도]] [[영천시]] (현재의 [[경상북도]] [[영주시]]) 출신.
         이후 소고 [[박승임]], 금계 [[황준량]](黃俊良, 1517~1563)에게서 수학하다가 뒤에 퇴계 [[이황]]을 직접 찾아가 사물을 논한 후, 이황의 문인으로 수학하였으며, [[1564년]](명종 19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 [[박승임]]
  • 김효원
         * [[박승임]]
  • 류경심
         이 사건은 정미사화로 이어져 윤원형이 반대파 대임세력의 남은 사람들을 제거, 숙청하였다. 중종의 서6남 [[봉성군|봉성군 이완]], [[송인수]], [[이약수]] 등이 사사당하고 [[이언적]], [[정자]], [[노수신]], [[류희춘]], [[백인걸]] 등 20여명의 선비들이 유배형을 당했다. 윤원형의 전횡을 반대했던 류경심도 이에 연루되어 예조정랑 [[박승임]]과 함께 파직되었다. 1551년 6월 왕명으로 다시 기용되어 외직인 회인현감이 되었다. 그 후 1553년 10월에는 유신현감으로 선정을 베풀었다하여 왕으로부터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받았다. 그 후 광주목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등 외직을 계속 역임하였다.
  • 이황
         그 문하생으로는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ref>황윤길과 함께 일본 정세를 정탐하러 파견되었다.</ref>, 소고 [[박승임]], 성암 [[김효원]], 황재 [[심의겸]] 등이 있다. 월천 조목(趙穆), 송암 권호문(權好文), 두곡 고응척이 그의 문인이었으며, 특히 권호문에게 글 쓰는 법을 설명한 필법을 선물하였다. 권호문은 이를 퇴도선생필법-퇴도선생유첩(退陶先生筆法─退陶先生遺帖)이라는 이름의 책으로 만들어 소장하고 후대에 전하였다. [[김효원]]은 [[동인]]의 영수가 되었고, [[심의겸]]은 [[서인]]의 영수가 되었다. [[심의겸]]은 [[이황]]의 문인임에도 [[이이]], [[성혼]]과 어울린 탓에 자연스럽게 [[서인]]이 되었다. [[박승임]]은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으나 그 제자 가운데 일부는 [[북인]], 일부는 [[남인]]으로 출사한다. [[류성룡]]과 그의 주변 인물, 제자는 모두 [[남인]]으로 이어진다. 368인 문인 가운데 정유일(鄭惟一), 매암 이숙량, 약포 정탁(鄭琢), 김취려(金就礪)도 그의 문인이었고, 한강 [[정구]]는 [[조식]]의 문하에서도 수학했지만 그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 [[박승임]]
  • 이효린
         [[이수형]](李秀亨)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혜민서 참봉 은이고 어머니는 공주이씨 이성의 딸이다.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의 문하생으로 수학하였다. 순흥 재향지에 의하면 음사로 관직에 나갔다 한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사촌형 [[이흥문]] 등과 함께 의병을 이끌고, [[김개국]] 의병장 휘하에서 왜적에 대항하였다. 그 공로로 [[내자감]] 주부(內資監主簿)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고, 80세에 수계(壽階)로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 [[박승임]]
  • 허목
         [[1620년]](광해군 13년) 스승 [[한강 정구]]가 타계하자 상복을 입고 애사(哀詞)를 지어 바쳤다. 수 많은 [[정구 (1543년)|정구]]의 문도 가운데 허목은 가장 연소하였으나 뒷날 퇴계 이황, 남명 조식, 한강 정구의 학통을 근기지방으로 가져와 근기학파(近畿學派)를 형성시킴으로써 [[이황]]의 다른 제자들인 서애(西厓) [[유성룡]], 소고 [[박승임]]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의 문인과 후계자들이 영남학파를, [[조식]]의 다른 제자들인 [[김우옹]] 등이 경상좌도 학파를 이룬데 비해, [[경기도]] 지역에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전수하여 근기학파를 형성했다. 근기학파에서 남인계[[실학]]이 분파되었으며,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모두 계승하였기에 다소 [[이황]]의 이기이원론이나 [[조식]]의 실용사상이 혼재되어 있었다. 이후 그는 관직에 욕심부리지 않고, 50여 세가 되도록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학 교육 등에 진력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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