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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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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창현(음악인) . . . . 20회 일치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김천시|김천]]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나무를 깎아 고무동력기를 만드는 등 손재주를 발휘했고, 이후 고향에서 약장수가 켜는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서 현악기의 매력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소학교]] 4학년 때 [[중일전쟁]]의 징병을 피하기 위해 조선으로 건너와 교사로 부임한 아이카와 키쿠에(相川喜久衛)가 집에서 하숙을 하면서 기초적인 바이올린 연주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하지만 대학 재학 중에 [[제로센]] 설계자였던 이토카와 히데오가 대학에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의 소리에 대해 음향학적으로 고찰하는 강연회에 참석한 뒤, 현악기 제작자로 장래 희망을 바꾸었다. 하지만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아 찾아간 일본 현악기 장인들은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제자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나가노]]의 기소후쿠시마 쵸에 있던 스즈키 바이올린 공장에서도 입사를 거절당해 근처 공사장에서 채석과 벌목 같은 거친 노동을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 와중에 현악기 제작에 필요한 양질의 목재를 감별하는 법을 익혔고, 목재를 바이올린 공장에 팔고 공장의 제작 과정을 어깨너머로 봐가면서 바이올린 제작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사장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막일과 바이올린 제작을 병행했고, 아내의 제안으로 [[도쿄]]에 가서 악기 매입을 시도했다. 이 때 도호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바이올리니스트 시노자키 히로츠구(篠崎弘嗣)[* 스즈키 신이치와 함께 일본 현악 교육의 거물로 손꼽히는 인물로, 자신의 성을 딴 바이올린 교본도 만든 바 있다. 한국에서도 현악기 초심자들이 흔히 접하는 것이 스즈키 아니면 시노자키 교본.]가 어린이 교육용 악기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후 도호학원을 위해 정기적으로 바이올린 제작과 납품, 수리를 시작했다.
         1961년 가을에는 학원과 비교적 가까운 도쿄의 마치다 시로 이사했고, 약 1년 뒤 초후 시의 센가와로 다시 이사해 바이올린 공방을 만들어 악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교육용에서 성인용으로 악기 제작 영역을 넓혔고, 바이올린 외에 [[비올라]]와 [[첼로]]의 제작도 시작했다. 악기 제작으로 어느 정도 생계 유지가 가능해지자 1970년에는 2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동생의 명성을 시샘했는지 이복형이 [[북한]]의 [[공작원]]이라고 허위 신고를 하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고문(범죄)|고문]]을 받다가 [[일본 경찰]]의 신원 보증이 있은 다음에야 풀려나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1976년 12월에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The Violin Society of America) 주최의 제2회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 참가해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 세공 부문, 비올라 세공/음향 부문, 첼로 세공/음향 부문에서 [[http://www.vsaweb.org/Previous-Conventions|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세계구급 제작자로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Chang Heyern Jin이라고 표기된 수상자가 바로 진창현이다.] 1984년에는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에서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Hors Concours)[* 다른 악기 제작자나 감정가의 감사 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악기를 제작/판매할 수 있는 장인이라는 뜻.]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 초후의 센가와 공방에서 현악기 제작을 계속 했고, 2000년에는 미국 [[신시내티]]에서 열린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의 제작 참고 악기로 선정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2001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 바이올린 '광주호'를 시작으로 이듬해 바이올린 '대구호', 비올라 '한라호', 첼로 '백두호'까지 네 점의 악기를 무상 기증하면서 [[대인배]] 인증을 하기도 했다.
         2004년에는 [[후지 테레비]]에서 구술 회고록을 바탕으로 각색한 [[드라마]] '해협을 건너는 바이올린(海峡を渡るバイオリン)'이 방영되었고, 여기서 진창현 역을 [[쿠사나기 츠요시]]가 맡아 화제가 되었다.[* 나머지 배역들의 캐스팅도 꽤 주목할 만한데, 진창현의 아내인 나미코 역을 [[칸노 미호]]가, 진창현의 어릴 적 [[멘토]]였던 아이카와 선생 역을 [[오다기리 죠]]가 맡았다.그리고 아버지는 [[정동환]]이 맡았다.] 이외에도 2003~06년에는 야마모토 오사무가 일대기를 '천상의 현(天上の弦)'이라는 제목의 [[만화]]로 만들어 [[쇼가쿠칸]]에서 연재하기도 했다.
          * 혼자서 허름한 오두막을 짓고 막노동과 바이올린 제작으로 소일하다가 [[1961년]]에 일본인 여성 나미코와 결혼해 2남 1녀를 두었고, 장남 진창호와 차남 진창룡은 각각 현악기 제작자와 현악기용 현 제작자로 활동하며 아버지의 가업을 이어받고 있다. 자서전에 의하면 바이올린 제작을 위한 연장들을 찾기 위해 골동품 가게를 전전하다가 가게를 보고 있던 나미코를 처음 만났다고 하며, 가난한 조선인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처음에는 결혼 승낙을 받기 어려웠지만 예전에 근무했던 건설 회사 사장이 장인에게 사위의 인품을 칭찬해 주면서 결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나미코 부인은 가족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할 때 자신의 이름을 [[한국어]] 식으로 이남이(李南伊)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 바이올린 도색에 필요한 염료를 구하기 위해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비롯한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기도 했고, [[오징어]] 먹물이나 [[지렁이]]까지 쓰는 등 온갖 실험을 했다. 심지어 집에서 [[알코올]]로 염료를 추출하고 [[니스]]에 혼합하는 작업을 하다가 니스가 폭발하면서 [[화상(질병)|화상]]을 입기도 했는데, 당시 일본에서는 [[전학공투회의|전공투]]와 [[적군파]]를 비롯한 극좌 세력의 무장 투쟁이 강성하던 시기여서 [[의사]]가 그 쪽 사람이 사제 폭발물을 제조하다가 사고를 친 것으로 여기고는 치료를 거부하기도 했다는 일화도 있다.
  • 문호월 . . . . 3회 일치
         |직업 = [[기타 연주자]] <br> [[바이올린 연주자]] <br> [[작곡가]]
         [[분류:1905년 태어남]][[분류:1949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분류:휘문중학교 동문]][[분류:휘문고등학교 동문]][[분류:192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바이올린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일제 강점기의 바이올린 연주자]][[분류:병사한 사람]][[분류:의문사한 사람]][[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 임현식(배우) . . . . 2회 일치
         최근 보도에 의하면 푸근한 인상의 외모와는 다르게 의외로 양갓집의 [[음대]]지망생인 [[엄친아]] 출신이었다고 한다. [[바이올린]]을 배우기도 했는데 이게 거리의 악사 연기에서 빛을 발했다고. <한 지붕 세 가족>에서도 연주를 보인 바 있다. 뭐든 잘 하지 못 한다고 슬퍼하는 아들 순돌이를 위해 “아빠도 처음에는 잘 못 했지만 연습을 하다보니 이렇게 연주를 잘 할 수 있잖니?”하며 바이올린을 멋들어지게 연주하고 마무리 짓는 장면이 일품.
  • 정명훈 (지휘자) . . . . 2회 일치
         [[서울]]<ref>{{뉴스 인용|제목 = 운명처럼 다가왔던 베토벤 '운명' 들고 태어난 부산방문 설레|url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30509.22023204805 |출판사 = 국제신문 |날짜 = 2013-05-08 |확인날짜 = 2013-05-09}}</ref>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으며, [[서울덕수초등학교]]를 [[입학]]했다. 일찍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여 [[피아노]]를 배운 지 3년만인 일곱 살 때인 [[1960년]]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해 화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피플Q 정명훈의삶&음악] 정명훈은 누구?|url=http://news.donga.com/3//20100120/25520037/1|출판사=동아일보|날짜=2010-01-20}}</ref> [[1961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 [[워싱턴주]] [[킹 군 (워싱턴주)|킹 군]] [[시애틀]]로 이주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명동]]에서 한식당을 운영했던 그의 [[부모]]는 [[미국]] 워싱턴 대학가에서도 한식당을 경영했다.<ref>{{뉴스 인용|제목=마에스트로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url=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663110|출판사=mk뉴스|날짜=2009-12-25}}</ref> 정명훈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부모님의 식당에서 부엌 일을 도왔고 새벽 신문 배달과 잔디 깎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신문을 돌리고서 나중에 구독료를 받으러 다니는 '수금'이 특히 힘들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제목="北 악단장도 스트라디바리우스(바이올린 최고 명기) 쓴대요"|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13/2012041300179.html|출판사=조선일보|날짜=2012-04-13}}</ref> 14세에 첫 개인 리사이틀을 가진 정명훈은 연주 도중 곡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반복해서 연주한 끝에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ref>유동철, 《아들아 너는 세계를 무대로 살아라》, 북로그컴퍼니, 2009, p.94, {{ISBN|978-89-962617-3-5}}</ref> 그의 선생이었던 제이콥슨은 정명훈에게 "네가 완벽한 연주를 하는 것보다 실수를 하더라도 감동적인 연주를 하기 바란다."고 격려했다.</ref>
         4. [[정경화]] (대관령 국제 음악제 예술감독,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 교수) 1948.03.26. 서울특별시 출생 (바이올린)
  • 김광석 . . . . 1회 일치
         1964년 1월 22일, [[서울특별시|경기도 서울시]] 남창동 (서울) (남대문시장4길) 서울남대문시장 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입학 전에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현재는 [[연제구]] 관할)으로 이주하여를 나왔다. 중학교 시절 현악부 활동을 하며 선배들로부터 바이올린을 다루고 악보를 보는 법을 배웠으며, 시절 합창부로 활동을 하면서 음악적 감성을 키웠다.
  • 지훈(TRCNG) . . . . 1회 일치
         ||<#262626> {{{#FFFFFF '''특기'''}}} ||<#ffffff><(> [[바이올린]] ||
  • 채동선 . . . . 1회 일치
         채동선은 생애 순수 가곡 및 민족음악 제작에 몰두하였다. 대표적으로 그의 작품인 〈고향〉 외에 〈향수〉, 〈망향〉[* 1980년에 출판된 《채동선작곡집》에 수록된 〈망향〉이 가장 애창된다.], 〈모란이 피기까지〉, 〈바다〉 등이 있고, 합창곡 〈또 다른 하늘〉, 교향곡 〈조국〉, 〈한강〉, 〈현악 4중주곡 제1번〉, 〈현악 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이 있다.
  • 하수빈 . . . . 1회 일치
         | 악기 = 피아노, 바이올린
  • 현이와 덕이 . . . . 1회 일치
         장덕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첼리스트]]였던 [[아버지]] 장규상씨와 [[서양 화가]]였던 [[어머니]] 이숙희씨 사이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충무로]]4가에서 1961년 4월 21일 태어났다.<ref>{{웹 인용|url = 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idxno=704533|제목 = ‘불후의 명곡’ 고 장덕 추모 특집…요절한 가수 장덕은 누구?|저자 = 이투데이|날짜 = 2013년 3월 16일|확인날짜 = 2013년 4월 14일}}</ref> [[클래식]] [[음악]] 애호가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맏이 [[장현]]은 [[바이올린]]을, 둘째인 장덕은 [[피아노]]를 배우며 어린시절부터 자라났다.
  • 홍경인 . . . . 1회 일치
         2016년 12월 11,18일에 방송된 [[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복면가왕]]에 참가해 모처럼 시청자들을 찾았다. [[동네방네 스피커]]라는 이름으로 나서서 [[내 안에 첫눈 있다 스노우볼]]을 꺾고 2라운드에 진출했으며 [[조율하고 가실게요! 바이올린맨]]에게 밀렸다. 참고로 그를 가수라고 생각했던 [[김구라]]는 데꿀멍...... 뭐 정식 앨범을 낸 경력이 있긴 하지만. 오랫동안 연기를 하다가 매너리즘이 와 사업을 하고 있으면서 연기활동은 계속 하고 있었다고 밝혔으며 얼마 전에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는데 팔로우 숫자 뒤에 K가 안 붙는다며 이번을 계기로 K가 붙었으면 좋겠다는 언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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