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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성수 (1891년)
[[1946년]] 1월, 김성수는 [[김원봉]]을 찾아가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에 협력해줄 것을 설득하였으나, [[김원봉]]에게 이는 '좌우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라며 정중히 거절<ref>약산 김원봉, 실천문학사, 이원규 지음.</ref> 당하고 되돌아왔다. [[1946년]]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 산업경제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ref name="해공주1"/><ref>이연복 《대한민국 임시정부 30년사》(국학자료원, 2006) 91페이지</ref> 46년 2월 [[민주의원]]이 창립되자 그는 자발적으로 기금을 냈다.
- 오세창
[[1945년]] 광복 이후에도 [[독립촉성중앙회]], [[민주의원]] 등에 참여하였다. [[서예]]가로도 전서, 예서, 초서에 능하고 조각도 하였으며, 둥그스름한 형태의 독특한 서체를 창안하여 위창체, 오세창체라 부른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 자는 중명(仲銘), 아호는 위창(葦滄), [[천도교]] 도호는 한암(閒菴)이다.
[[민주의원]] 회의에 참석 중([[1946년]] [[2월]]), 왼쪽에 앉은 이가 오세창, 가운데는 부의장 [[김규식]], 오른쪽은 의장 [[이승만]]
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을 지냈다. [[1946년]] [[6월 15일]] 오후 5시 40분 [[서울역]]에 마중나가 [[서울역]]에 도착한 삼의사 유골을 영접하였다. 이어 태고사(太古寺)에 마련된 빈소에 참석하였다. 이후 남북협상과 단정수립론이 갈렸을 때는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에 참석하였다.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하지 않은 독립운동의 원로였기에, 광복후 고령에도 불구하고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위원,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일명 민주의원) 의원, [[서울신문]] 명예사장 등에 위촉되었다.
- 윤치영
[[1945년]] 해방 이후, 이승만의 비서, [[민주의원]] 사무총장,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는 [[대한민국 내무부|내무부장관]], 국회 부의장 등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 초기 집권세력의 실세로 통했다.<ref name="윤치호 일기 p.617">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김상태 편 번역, 역사비평사, 2001) 617-640페이지</ref> 이후 이승만의 외교특사로 활동하다 [[1948년]] 친이승만 성향인 [[대한국민당 (1948년)|대한국민당]]을 창당하여 최고위원을 역임했다. [[1956년]]과 [[1960년]] [[대한민국의 부통령|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하다 [[5·16 군사 정변]] 이후 군정에 참여, [[1963년]]에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희의]] 의장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지명, 민정에 참여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공화국|제3공화국]] 출범 이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당의장, [[서울특별시]]장,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당의장서리 등을 지냈다. [[1968년]] 이후 경제발전을 위해서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함을 역설하여 박정희의 3선개헌을 적극 지지하였다. 종교는 [[개신교]]로 교회의 장로를 지냈다.<ref>{{웹 인용 |url=http://ducksoo.net/wp/greeting/history/ |제목=덕수교회 약력 |확인날짜=2016-09-1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17154055/http://ducksoo.net/wp/greeting/history/ |보존날짜=2016-09-17 |깨진링크=예 }}</ref> [[1980년]] 정계에서 은퇴, 사회 원로로 활동하였다.
<ref>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역사비평사, 2005) 518페이지</ref> [[1946년]] [[2월]]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이 설치되자 민주의원 비서국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민주의원]] 사무총장에 피선되었다.<ref name="한민1"/> 그해 임정에서 조직한 국제법급외교연구회 이사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이승만]]을 대신하여 [[신태평양]]지 주필 겸 이사에 선출되었고, [[1947년]] [[서울시 경기연맹]]에 참여하였다. [[이승만]]이 경제보국회에서 3백만원을 얻어 쓰게 되었다. 이때 윤치영이 중간에서 얻어 쓰게 되었다. 미군정에서 감사를 해 보니까 이 돈은 이승만에게 갔고, 미군정에서 찾아오라고 하자 윤치영은 중간에서 일부를 소비하고 나머지를 이승만에게 갖다 주었으므로 윤치영의 입장은 곤란하게 되었다.<ref>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저,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33페이지</ref>
이후 그는 46년 [[2월]]과 [[5월]]에 열리는 미소공위를 놓고 [[이승만]]과 [[김구]]가 미소공위를 결사 반대하자, 그 역시 [[미소공동위원회]] 개최에 반대하는 칼럼과 강연, 홍보활동에 나섰다. 외국이 우리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역설했고, 여러 청년들이 그의 주장에 호응했다. 46년 [[2월]] [[임영신]] 등과 함께 [[민주의원]] 대표 자격으로 UN에 파견, UN대표들에게 한국 정부의 조속한 수립에 협조해 줄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48년 [[1월]] [[인도]] 대표 [[크리슈나 메논]]을 단장으로 한 유엔한위 조사단의 파견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윤치영은 공로를 [[임영신]]에게 모두 돌렸다.
* 1946년 2월 민주의원 비서국 국장
* 1946년 9월 31일 민주의원이인정전에서 아놀드 군정장관 송별연에 참석하였다.
* [[민주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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