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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성수 (1891년)
         사후 [[1962년]]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된 한편,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 국회의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과 [[광복회]]가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 [[친일인명사전]]에 언론계 친일파로 수록된 이후<ref>{{뉴스 인용|url=http://news.lec.co.kr/gisaView/detailView.html?menu_code=10&gisaCode=L001002007370011&tblName=tblNews|제목=오시영의 세상의 창-김삼환 시인의 “따뜻한 손”, 참을 수 없는 역사 왜곡자들의 궤변|언어=한국어|이름=오시영 변호사, 시인|날짜=2013-06-07|출판사=법률신문|확인날짜=2013-12-2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31203053141/http://news.lec.co.kr/gisaView/detailView.html?menu_code=10&gisaCode=L001002007370011&tblName=tblNews|보존날짜=2013-12-03|깨진링크=예}}</ref>, 대법원에서 거짓서훈으로 인정, 2018년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박탈되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집안의 부의 축적과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데, 그의 아버지와 생부 형제가 벼슬길에 있을 때 관권을 이용하여 백성들의 재물을 수탈했고, 심지어는 중국·일본과 밀수를 하여 돈을 모았다고 한다.<ref name="malsso1">[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97686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 - 오마이뉴스] 2004년 07월 13일자</ref>
         영학숙 재학 중 인촌 김성수가 먼저 초립동이인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에게 허교를 제의했다.<ref name="gopyung24">김학준 《고하 송진우 평전:민족민주주의 언론인․정치가의 생애》(김학준, 동아일보사, 1990) 24페이지</ref>
         청년기에 김성수는 [[문맹]] 백성들을 보며 스스로 먼저 [[신학문]]을 배우고 그것에 기초해 선진사상과 선진기술을 동포에 전수시킴으로써 민족의 실력을 배양시켜서 조국의 [[민족 해방|자주독립]]을 이룩해야 한다는 신념 하에 [[도쿄|동경]][[유학]]을 결심<ref name="건국영웅"/> 했다. 그는 무식함과 무지함이 조선의 멸망의 원인이라 확신하고 먼저 배워서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계몽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그의 유학을 반대하였다. [[1908년]] 10월 상투를 단발하고, 상투를 자른 자신의 모습을 담은 사진과 사죄의 편지를 부모에게 남기고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비밀리에 [[일본]](日本)으로 유학길을 떠났다. 가정 사정 때문에 [[백관수]]는 중도에 포기했지만 김성수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길을 떠났는데, 집안에서는 병환을 핑계로 노비를 보내 그를 불렀으나 자신을 부르려는 계획임을 간파하고는 하인을 돌려보낸 뒤 급히 [[전라북도]] [[옥구군]] [[군산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1914년]] 가을 김성수는 교육계몽에 뜻을 품고, 사립 [[중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지고 [[서울특별시|서울]]로 떠났다. 이때 집안에서 자금을 주지 않자, 그는 3일동안 단식을 한 끝에 집안에서 자금을 마련해 갔다.<ref name="ill7">일석 이희승 전집 7(서울대학교출판부 | 2007) 321</ref> 그의 첫 시도는 [[사립학교]] 설립안이었는데, [[조선총독부]] 교육국으로부터 거절 당하면서 무산되었다.<ref name="건국영웅"/> [[1914년]]말 김성수는 [[최남선]](崔南善), [[안재홍]](安在鴻) 등 [[일본]] 유학시절 동창들과 함께 교육자료를 모아 [[1915년]] 봄 [[백산학교]](白山學敎)라는 이름의 사립학교 설립안을 만들고 학교설립을 추진하였으나, [[조선총독부]]가 허가를 해주지 않아 좌절당하였다. [[조선총독부]]의 설립인가 거절 이유로는 백산은 [[한민족]]의 영산(靈山)인 [[백두산]]을 뜻하는 것이니, [[학교]] 이름이 불온하다고 퇴짜를 놨던 것이다.<ref name="ill7"/> 그해 [[안희제]] 등이 세운 [[백산상회]](白山商會)가 독립운동 자금을 공급하는 단체임이 총독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백산상회]]와의 관련성을 취조당했다.
         ===== 기업 활동과 민족자본 육성 활동 =====
         [[식민지|식민]] 치하의 [[조선]] 백성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던 시절,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민족]][[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웠다. 김성수는 [[중앙고등보통학교|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ref name="최준1">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전진문 지음 | 황금가지 | 2007) 182쪽</ref>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조선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조선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조선인 인텔리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ref name="omykjs0612">[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77207 김성수는 민족자본가였나? - 오마이뉴스] 06.12.05일자</ref>
         {{참고|제1차 세계대전|파리강화회의|민족자결주의}}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ref name="동아일보"/>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autogenerated3 />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ref name="in123">최시중(편저), 《인촌 김성수 :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사, 1985), 123쪽</ref> 이승만의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ref name="in123"/>"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ref name="in123"/>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승만 밀서를 되돌려보냈다.
         [[3.1운동]] 준비를 기획하다가 밀정의 밀고로 3·1운동 직후 [[송진우 (정치인)|송진우]]가 투옥되고 김성수도 체포되었다. 일경의 심문때 송진우는 인촌은 투옥을 피해야만 교육사업을 비롯한 더 큰 민족사업을 계속할 수있다고 김성수를 설득하고 형문때 송진우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김성수의 관련을 적극 부인하여 결국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만 1년 7개월형을 살고 풀려났다. 파리강화회의에서 [[김규식]]이 이끄는 한국측 대표의 참여는 무산되었다. 이후 김성수는 교육과 계몽운동, 실력양성에 주력하였다.
         ===== 민족개량주의 =====
         {{참고|민족개량주의|동아일보}}
         일본계 언론의 활동과, 외신 기자들의 출입을 본 그는 국내 언론 설립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20년부터 언론사 창간 활동을 준비한다. '민족언론'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서울 시내에 지인을 통한 홍보활동으로 주주와 창간발기인을 모은 뒤 [[1920년]] [[4월 1일]] [[양기탁]]·[[유근]]·[[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고, 발기인 대표로서 창립을 주관했다. 한때 [[동아일보]]의 기자로 활약했고 [[한겨레 신문]]을 창간했던 언론인 [[송건호]]는 당시 발기인 대표였던 그가 20대의 청년이라는 사실이 놀랍다고 평가하였다.<ref>《송건호 전집 08 민주언론 민족언론 1》(송건호, 한길사, 2006) 264</ref> 전국 각지를 다니며 홍보를 하여 각지의 지역유지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1920년]] [[동아일보]] [[주필]]로 활동 했다. 일제의 민간지 발행허가 계획에 따라 창간된 [[동아일보]]는 근본적으로는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했다고는 하나 [[식민지시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기본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ref name="malsso1"/>
         실력 양성이 독립의 길이라고 생각한 그는 실력 양성을 위해서는 국민 개개인이 스스로 배우고 깨닭아야 된다고 판단했다. 그는 국산품을 애용하는 것이 곧 민족경제를 살리는 길이라며 [[조선]]에서 나는 물산을 구매해줄 것을 호소하며, 국산품 애용 운동을 펼쳐 나갔다. 그러나 국산 애용을 권고하면서도 경성방직 제품을 홍보하거나 광고하지는 않았다. 그의 국산 제품 애용 운동은 호소력을 얻어 [[조만식]],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이상재]] 등이 동참했다.
         [[1924년]] 자치운동의 일환으로 '[[연정회]](硏政會)'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이는 소위 '민족개량주의' 혹은 '실력양성론'이라는 미명하에 [[일제]] [[조선총독부]]의 '문화정치'에 발맞춰 일제와의 타협 속에 추진된 것으로, 비타협 민족세력의 반발로 중단되고 말았다.<ref name="'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8050 '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ref> 그는 항상 자원이 부족한 사회에서 산업 시설과 기술 인재를 키워서 나라의 실력을 양성하는 것이 민족의 힘을 기르고, 국가가 자주 독립할 수 있는 길이라는 의사를 피력하였다. 넘치는 혈기에 반발하던 청년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의견에 공감하게 되었다. [[1925년]] [[사회주의]]자들의 반(反) [[기독교]] 강연이 문제시되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국내 언론들은 기자들을 대량으로 해고해야 했다. 그는 해고된 기자들에게도 6개월간 생활비 등을 지원해 주었고, 해고된 기자들의 새로운 일자리 알선도 주선해 주었다. [[조선총독부|총독부]]의 압력으로 억지로 해고당하는 것이었지만 사주인 그에게 원한을 품지는 않았다.
         1929년 도쿄에서 열린 제3회 범태평양회의에 참가한 한민족 대표단. 좌로부터 백관수, 송진우, 윤치호, 유억겸, 김활란
         [[1926년]] 인촌은 '[[연정회]] 부활운동'을 다시 전개하였으나 이는 도리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단결을 촉진하는 계기가 돼 이듬해(1927년)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新幹會)가 창립되었다. 그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앞세워 [[신간회]]를 주도하고자 했으나, 사회주의 민족세력의 반발로 신간회에는 발도 들여놓지 못하였다고 한다.<ref name="'일장기 말소'에 분노한 '민족지' 창업주"/> 그가 [[신간회]]에 가입하려는 것 역시 사회주의 세력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일각에서는 그가 자신의 재력을 이용해 [[신간회]]를 자신의 영향력하에 두려 한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 김영환 (1921년)
         [[한국 전쟁]] 당시인 [[1951년]] [[가야산]]에 숨은 [[인민군]]들을 잡기 위해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민족]]의 [[문화유산]]을 없앨 순 없다며 [[명령]]을 어긴 적이 있다.<ref>〈해인사에 가자〉 김경화 저, 190쪽</ref>
  • 디아스포라
         본래 [[고대 그리스어]]로 디아스포라는 '흩어지다'라는 뜻이다. 현대에 디아스포라는 한 [[민족]]이 고향을 떠나서 세계의 다른 곳으로 널리 퍼져나가, 각지에서 [[소수민족]]으로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살아가는 현상을 뜻한다.[http://www.vocabulary.com/dictionary/diaspora 참조]
         영어에서 디아스포라는 본래 [[유대인]]과 관련이 밀접하였으며, '유대인 디아스포라'를 가리키는 의미가 강했다. 20세기에는, [[아르메니아인]]이나 [[아프리카]] 출신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처지를 나타내는 말로 디아스포라를 인용하면서 디아스포라는 다른 민족에게 대해서도 사용되는 말이 되었다.[http://blog.oup.com/2013/06/10-facts-about-diaspora/ 참조]
  • 엘디아 인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에 나오는 [[민족]].
         일단 마레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엘디아를 증오하는 이유는 엘디아 제국 시절에 수많은 민족을 탄압하는 등 악행을 저질러왔기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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