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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상하
         * [[민암]]
  • 윤선도
         * [[민암]]
         * [[민암]]
  • 윤휴
         [[1873년]](고종 10) 부터 [[1876년]]까지 [[최익현]]과 [[김평묵]] 등은 상소 등을 통해 "[[이현일]],[[한효순]],[[목내선]] 등의 신원을 요구한 사람들을 추율(追律, 반역죄)로 처단해야 하며, [[남인]](南人)인 윤휴(尹鑴) 이후로 우리 서인(노론)과 남인은 원수가 됐다. 만약 서양과의 조약이 성립된 후에 [[민암]], [[목내선]], [[이인좌]], [[정희량]], [[이현일]]의 후손들이 백성의 불인(不忍)한 마음을 이용하여 창을 들고 도성과 대궐을 침범한다면 올바른 선비들이 일망타진될 것이다"라고 주창하여 이들의 복권 여론을 끝까지 반대하여 무산시켰다. 그 뒤에도 [[최익현]]과 [[김평묵]]은 [[남인]]과 [[이인좌의 난]] 관련자들의 복권을 결사 반대하였다. 결국 김평묵과 최익현이 모두 죽은 뒤 [[1907년]](융희 2년)에 가서야 [[이현일]] 등과 함께 복권된다.
         * [[민암]]
  • 허목
         * [[민암]]
  • 희빈 장씨
         [[서인]]이 차지하고 있던 삼사(三事: 삼정승)와 승정원, 사간원의 중앙 최고 요직이 경신년에 조정에서 밀려나 은신 중이었던 [[남인]]으로 교체되자 조정으로 돌아온 [[이현기]](李玄紀)·[[남치훈]](南致薰)·[[윤빈]](尹彬) 등은 먼저 원자 윤의 탄생과 [[조선 숙종|숙종]]의 원자가 정해진 것에 대해 경하와 찬사를 올려 [[서인]]과는 극적으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이는 경신년에 [[남인]]에게 대역죄를 씌워 [[경신환국]]을 일으켰던 [[서인]]을 향한 정치 보복의 시작이었다. [[송시열]]에게 유배령을 내리고 [[김수항]] 및 일부 [[서인]]을 조정에서 내쳐버리긴 했지만 분노가 가시지 않았던 [[조선 숙종|숙종]]은 [[남인]]의 부추김으로 [[송시열]]을 최고 유배지인 제주로 유배할 것을 명하고 [[김수항]] 등에게도 진도 유배령을 내렸다. [[민암]]을 위시한 [[남인]]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6판서·참판·참의 등 남인 경재(卿宰) 수십인과 사헌부·사간원이 합계(合啓)하여 과거의 환국([[경신환국]])을 위해 역모를 날조하여 무고한 남인 영수 [[허적]]과 [[윤휴]] 들을 살해하였고 과격한 처벌로 죄없는 [[남인]] 인사를 학살한 [[김석주]]와 [[김익훈]]의 죄를 묻게 하였으며 이들을 옹호하였던 [[송시열]]과 [[남인]] 옥사의 위관으로서 [[남인]] 재상 [[오시수]] 등을 죽게한 [[김수항]]의 가중처벌을 맹렬히 주장하였다.
         다음날 23일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생일이었는데 [[조선 숙종|숙종]]이 [[자의대비|대왕대비]] 조씨의 국상기간 등을 이유로 탄일 하례 의식을 생략하라는 어명을 내렸지만 국모의 당연한 권한이라는 이유로 어명이 무시되고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하례가 올려졌다. 이에 [[조선 숙종|숙종]]이 분노하여 [[인현왕후|중전]] 민씨와 크게 다투고, 조정 대신들에게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교사스럽고 간특한 부인'''으로 칭하며 평소의 언동<ref group="주">시부모([[조선 현종|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계시를 빙자하여 희빈 장씨가 아들을 낳을 수 없는 팔자라고 거짓을 고한 것, 원자가 탄생하자 노여워하며 주가(主家: 공주의 시가.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를 의미)와 급격히 친밀해지고 [[홍치상]]의 무죄방면을 종용한 것, 궁인들의 당파를 나눠 핍박한 것, 폐출되는 [[귀인 김씨]]에게 동정심을 보이지 않고 가마를 타지 말고 걸어서 빨리 궁에서 나가라고 재촉한 것 등</ref> 을 비난하며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국모로서 군림할 자격이 없으니 고사를 찾아보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민씨를 폐서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것이다. 이에 [[서인]] 대신 뿐만 아니라 [[남인]]조차 당황하여 [[권대운]] [[목래선]] [[김덕원]] [[민암]] 등은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 올려진 '''탄일 문안은 신자(臣子)들의 상례'''이니 [[인현왕후|중전]] 민씨에게는 죄가 없음을 주장하며 강력히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변호하였고, [[권대운]]은 고사를 찾으라는 [[조선 숙종|숙종]]의 명에 불복하며 사직을 청하였다. 이러한 조정 안팎의 반발에 대해 [[조선 숙종|숙종]]은 [[서인]]은 처벌하고 [[남인]]은 용서하는 차별을 보임과 동시에, 24일에는 [[인현왕후|중전]] 민씨가 [[조선 숙종|숙종]]과 크게 말다툼을 하면서 그녀 자신의 입으로 '진실로 나의 죄이다. 어찌할 것인가? 폐출시키려거든 폐출시키라.'는 과격한 언사들을 입에 담았던 사실을 폭로했다.
         [[1694년]](숙종 20)에 서인의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의 복위 운동을 꾀하다가 고발되었다. 이때에 남인의 영수이자 당시 우상(右相)으로 있던 [[민암]](閔黯) 등이 이 기회에 반대당 서인을 완전히 제거하려고 김춘택 등 수십 명을 하옥하고 범위를 넓히어 일대 옥사를 일으켰다.
         이때 숙종은 갑자기 마음을 바꾸어 옥을 다스리던 민암을 파직하고 사사하였으며, [[권대운]]·[[목내선]]·[[김덕원]] 등을 유배하고 소론(少論) [[남구만]](南九萬)·[[박세채]](朴世采)·[[윤지완]](尹趾完) 등을 등용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시켰는데, 이를 불러 [[갑술환국]]이라 한다. [[민진원]]은 그의 저서인 《단암만록》에 숙빈 최씨가 봉보부인을 통해 [[김춘택]]과 전략을 나누어 거사를 이룩하는데 큰 공헌을 세웠다고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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