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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철 (1841년)
         아버지인 김보현이 [[명성황후]]의 [[여흥 민씨]] 집권 아래 고위직을 역임하여 그도 요직에 임명되었다. 김보현은 [[선혜청]] 당상을 거쳐 [[경기도]] 관찰사로 근무하다가 [[1882년]] [[임오군란]] 때 분노한 구식 군인들에게 현직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함께 피살되었다.
  • 민규호
         }}</ref> 이후 규장각 제학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 [[의정부]][[우의정]] 겸 삼군부사를 지냈다. 그는 평소 [[민치록]]의 양자가 된 [[민승호]]와 [[민겸호]] 형제를 경멸하여 멀리하였다.
  • 민승호
         **** 동생 : [[민겸호]](閔謙鎬, [[1838년]] - [[1882년]])
         * [[민겸호]]
  • 민영환
         |부모= 아버지 [[민겸호]]
         '''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척신이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지만 실제로는 13촌지간이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민영환은 [[1861년]] [[8월 7일]] [[서울특별시|서울]] 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민겸호]]였으나, 뒤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세도를 구가하던 민씨 척족의 총아로서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때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자 거상을 위해 사직하였다.
         ** 백부 겸 양부(養父) : 민태호(閔泰鎬, 생부 [[민겸호]]의 맏형이다)
         ** 중부 : [[민승호]] (생부 [[민겸호]]의 둘째 형이다. [[민치록]]에게로 입적)
         ** 생부 : [[민겸호]](閔謙鎬, [[1838년]] ~ [[1882년]])
         * [[민겸호]]
  • 민영환 (1861년)
         |부모= 아버지 [[민겸호]]
         '''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척신이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지만 실제로는 13촌지간이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민영환은 [[1861년]] [[8월 7일]] [[서울특별시|서울]] 견지동에서 태어났다. 친아버지는 [[민겸호]]였으나, 뒤에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인 [[민태호]]에게 양자로 입적되었다. [[187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이후 세도를 구가하던 민씨 척족의 총아로서 [[1881년]] [[동부승지]], [[1882년]] [[성균관]] [[대사성]]에 오르는 등 쾌속 승진을 거듭하며 요직을 거쳤다. 하지만 [[임오군란]]때 생부 [[민겸호]]가 살해되자 거상을 위해 사직하였다.
         ** 백부 겸 양부(養父) : 민태호(閔泰鎬, 생부 [[민겸호]]의 맏형이다)
         ** 중부 : [[민승호]] (생부 [[민겸호]]의 둘째 형이다. [[민치록]]에게로 입적)
         ** 생부 : [[민겸호]](閔謙鎬, [[1838년]] ~ [[1882년]])
         * [[민겸호]]
  • 여흥부대부인
         [[6월 10일]] 난병들이 대궐을 침입했는데 민비는 밖으로 도망가고, [[이최응]], [[민겸호]], [[김보현]] 등은 살해되었다. 난병이 궁전으로 올라가 [[민겸호]]를 만나 그를 잡아끌자 당황하면서 흥선대원군을 쳐다보며, "대감 나를 제발 살려주시오."라고 호소하였다. 그러자 흥선대원군은 쓴웃음을 지으며 "내 어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라고 말하였다.<ref name="hwang55">황현, 《매천야록》 (정동호 역, 일문서적, 2011) 55페이지</ref> 그는 계단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대원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계단 밑에서 그를 죽이고 총칼로 시체를 난도질했다. 또 "중궁은 어디 있느냐"며 소리쳐 언사가 좋지 않았고, 처참한 광경은 계속되었다.<ref name="hwang55"/>
         ***** 남동생: [[민겸호]](閔謙鎬)
         * [[민겸호]]
  • 정호근 (1964년)
         * [[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 - [[대원군 (1990년 드라마)|대원군]]》 ... [[민겸호]] 역
  •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으나 그의 무시를 당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 좌의정, 세자부,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가 유림과 갈등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여 [[1880년]] 이후 [[미국]], [[일본]]과의 개항 정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난병에게 [[민겸호]](閔謙鎬)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신도비]]문에는 [[조선 고종|고종]]이 어의를 보내 진료했으나 차도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나, 난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동생인 흥선대원군과의 감정대립으로 민씨 정권의 측근으로 지냈는데, 민승호와 흥선대원군은 그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정세를 염탐하는데 이용하려 하였다. 별칭은 '''유유정승'''(唯唯政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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