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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5밀리 롱 톰
         제1차 세계대전 시기 [[프랑스]]에서 디자인 된 M1917, M1917A1, M1918 GPF (Grande Puissance, Filloux)의 후속작으로 [[미국]]에서 도입했다. GPF를 기반으로 하여 개량하면서 M1 155mm 야포가 개발되었다. 1940년에 디자인이 개선되어 M2 155mm 야포가 만들어졌으며, 이 야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이 사용하여 유럽 전선과 [[태평양 전쟁]]에서 사용하였다. M2를 개량한 모델이 M59 155mm 견인포가 된다.
  • COCOM
         1949년 11월, [[자본주의]] 국가들 측에서 공산권 진영에 대한 수출 통제기구로서 출범한 위원회이다. [[미국]]의 주장에 따라서 설립되었으며, 공산권에 대한 전략 물자와 기술 수출의 방지를 목적으로 하였다. [[파리]]에 본부를 뒀다.
         1948년 [[미국]]은 공산권 봉쇄를 위하여 금수품 목록을 발표하는 등 수출 통제 정책을 시작했으며, 이를 북대서양 조약기구 전체로 확대하려 했다. 북대서양 조약기구 회원국들과 논의를 거쳐서 1949년 11월에 출범하게 된다. 1957년에는 대 중국 수출 위원회를 흡수했다.
  • DC's Legends of Tomorrow
         [[미국]]의 [[드라마]].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
          수장은 영국. 이외에 주요 회원국으로는 프랑스가 있다. 초기에는 영국과 프랑스, 그리고 두 국가의 따까리들로 구성되어있다. 하지만 게임이 진행되며 미국의 참전, 영국의 중남미 국가 포섭 등으로 상당히 많은 회원국을 확보하게 된다.
         인력이 엄청 느리게 늘어서 없는 것으로 치는게 낫다. 이 단계에서 생산이 완료된 모든 유닛들은 숙련도 80을 달고 나온다. 1936년 미국이 이 상태로 시작한다. 일반적으로는 Prolong Terms of Service(복무 기간 연장)디시전을 통해 징병제를 시행할 수 있다.
         동원령 3단계. 일부만 랜덤으로 징집(선발제 복무)하거나 일정한 기간만을 복무(시간제 복무)하는 단계. 선발제복무의 예시로는 제비뽑기로 징병을 하는 현대의 [[태국]]이, 시간제 복무의 예시는 한 달에 한 번 주말에 훈련을 받는 현대 [[미국]]의 [[주방위군]]이 있다.
         미국의 경우 징병제를 시행하려면 이벤트를 통해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국회에서 높은 확률로 퇴짜를 놓는다.
         ==== USA(미국) ====
         실제 역사를 따라가려고 할 경우 일본의 "마르코 폴로 다리 사건" 디시전 발동→"난징 대학살", "파나이 사건" 이벤트→미국의 "대일본 최후통첩" 디시전 발동→일본의 "진주만 공습" 디시전 발동과 같은 절차를 걸쳐 전쟁에 뛰어들게 된다. 보통 이렇게 되면 똑같이 일본에게 선전포고 당한 연합군 세력이 동맹에 초대한다.
         프랑스가 독일에게 발리고 강화조약을 맺으면 인도차이나 연방의 소유권을 넘겨 받을 수 있는 디시전이 발동한다. 이러면 미국의 "대일본 최후통첩" 디시전이 해금되는데, 미국은 중일전쟁과 그에 딸린 각종 이벤트 때문에 일본을 싫어할게 뻔하므로 이 디시전을 발동한다. 최후통첩을 받아들이면 미국의 애완견[* 민주화, 중국 지역을 중화민국에게 반환, 모든 괴뢰국 해방, 한반도가 대한민국으로 독립, 영미와 군사 통행권&불가침 조약 체결, 불만도 +20%, 미국의 괴뢰국화.]으로 전락한다. 인공지능이 잡을 경우 100% 미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에게 엠바고 처먹기를 선택하고, 이후 "진주만 공습" 디시전을 갈긴다.
          독일이 베저위붕 작전을 시행한 후 영토 안으로 조금만 진군하면 이벤트로 항복해 독일에게 합병된다. 이후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토르스하운같은 해외 영토는 영국과 미국이 디시전을 통해 가져간다.
          미국의 괴뢰국.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 마닐라가 함락되는 즉시 일본에게 점령 및 합병당한다. 이후 일본이 괴뢰국으로 다시 뱉어낸다.
  • E-4B 나이트워치
         [[미국]]에서 운용하는 항공기. 별명은 심판의 날 비행기(Doomsday Plane). 보잉 747-200B 모델을 모체로 하여, [[핵전쟁]]이 발발 했을 때, 대통령이나 국방장관, 합참의장이 탑승하는 '공중지휘본부'로 쓸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 House of the Rising Sun
         [[미국]]의 [[민요]].
  • LORAN
         [[미국]]에서 개발된 [[전파항법]] 시스템이다. [[MIT]]에서 개발하였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미 해군]]이 사용하였다.
         LORAN 이외에도 [[소련]] 계열의 알파 항법 시스템, [[미국]]의 오메가 항법 시스템, [[영국]] 계통의 데카 항법 시스템 같은 다양한 지상파 전파 항법 시스템이 GPS의 민간 개방으로 상업성을 잃고 '''궤멸'''(…)하였다.
  • Oui Oui Marie
         Oui Oui Marie. [[미국]]의 가곡. "위 위 마리"라고 읽으면 된다.
         [[프랑스]]로 파병간 미국 군인 "조니"가 프랑스 여성인 "마리"에게 반해 청혼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https://www.loc.gov/item/2013563233/|미국 의회 도서관에서 보관중인 Oui Oui Marie의 악보(영문)]]
  • That 70's show
         [[미국]]의 [[시트콤]]. 1998년에서 2006년 까지 방송했다. 미국 FOX 채널에서 방송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요절복통 70쇼 등으로 케이블 TV 등에서 방송됐다. 1970년대, [[위스콘신]] 주의 포인트 플레이스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시즌 1 에피소드 1은 1976년 5월 17일로 되어 있다. 1시즌에서 [[제럴드 포드]]가 재선을 위해서 공화당원들을 모아서 선거 운동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로 보아서 1시즌은 미국 대통령 선거가 있었던 1976년으로 보인다. 1시즌 후반부에는 [[스타워즈]](1977년작)가 개봉되어 보러 가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리고 최종회는 1970년대의 마지막 밤을 지나서, 1980년대가 밝아오면서 끝난다.
  • 강윤성 (영화 감독)
         제대 후 1996년 '프리미어'라는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가지고 16mm 필름으로 제작한 첫 단편영화 〈찰리 브라운〉을 만들었다. 이 영화는 대학 단편영화제에 초청되어 상영되었다. 그리고 영화 제작 때 경험을 살려 책 《컴퓨터 영상작업》을 썼다. 이 시기의 경력을 [[포트폴리오]] 삼아 대학 졸업 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을 떠났다.<ref name="씨네리"></ref><ref name="브런치"></ref>
         미국 예술아카데미대학교에서, 여자를 스토킹하는 남자를 그린 단편 스릴러 〈네거티브 이미지〉를 연출했다. 이 영화는 인디포럼과 한국 [[부산국제영화제|부산국제단편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다음으로 첫 장편 시나리오 〈푸코의 단편영화〉를 준비했으나 투자를 받지 못해 실패했다. 다음으로 한국에 돌아와 장편 〈뫼비우스〉를 준비했으나, 투자사가 도산하는 바람에 또 다시 실패했다. 이 시기의 실패로 잠시 영화를 내려 놓고 개인 프로덕션을 차려 [[뮤직비디오]] 등 영상물을 제작했다.<ref name="씨네리"></ref><ref name="브런치"></ref>
  • 강풀
         [[2004년]] 11월부터 [[2005년]] 4월까지 연재했다. 바보이지만 순수한 마음을 가진 승룡이와 승룡이를 미워하는 승룡이의 동생인 지인, 그리고 [[미국]]에서 [[피아노]]를 전공한 지호가 주인공이다.
         *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만화를 그렸다.
  • 건즈 고어 앤 카놀리
         Guns, Gore & Cannoli. 1920년대 [[금주법]] 시기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좀비 아포칼립스]] 런앤건 게임. [[벨기에]] 게임 제작팀인 [[http://crazymonkeystudios.com/press/index.php|크레이지 몽키 스튜디오]]가 제작했다. PC, 매킨토시, [[엑스박스 원]], [[플레이스테이션 4]]로 발매되었다. PS4 버전은 국내 유통은 [[인트라게임즈]]에서 담당했는데, 한글화도 되어있다!
  • 경골목구조
         1830년대 [[미국]]에서 등장한 [[건축법]]. [[나무|목재]]로 골조를 만든 후, 그곳에 [[기계]]로 만든 목재를 기계로 만든 못으로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 건축법이 발명되기 전까지의 나무 집은 바람이 잘 들어오는 [[통나무집]]이나 비싼 공법으로 만든 나무 집이었다나.
  • 경비원
         [[미국]] 같은데서는 경비원도 기본적으로 [[권총]] 같은걸 장비하고 다니지만 한국에서는 그런거 없다.
         경비원에게 제압당할 정도면 영웅이나 수사관이 등장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만, 도입부나 중간 전개에서 위기감을 강조하려고 애꿏은 경비원이 죽어나가는 장면이 매우 많다. 경비원이 등장하면 '''일단 죽는다'''고 보면 될 정도. 미국 수사물에서는 대개 경비원을 쓰러드리고 [[경찰]], [[SWAT]], [[FBI]] 순서로 테크가 올라간다.
  • 고건
         [[1980년]] [[9월]]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후 고건은 교통부 장관과 이듬해 농수산부 장관을 지내고, [[미국]]으로 유학, 1983년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으로 있다가 이듬해 [[1984년]] 미국 M.I.T. 국제문제연구소 객원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귀국한다. [[1985년]] [[민주정의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으며, 민정당 지방자치제특별위원회 위원장, [[1987년]] [[민주정의당]] 전북도 지부장,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고건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게 되자 외신, 특히 미국계 외신은 특별한 기대와 관심을 보여왔다. [[미국]] AP통신은 12일(현지시간) 고 총리가 과거 군사정권과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도 활동했던 인물이라면서 보수와 진보 성향의 정권 모두로부터 신뢰를 받아왔다고 보도했다.<ref name="ed11">[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18&aid=0000138074 (탄핵)"고건 대행, 안정적 리더쉽 발휘할것"-외신들] 이데일리 2004-03-13일자</ref> 통신은 한국에서 국무총리는 통상 의전적인 역할만을 맡아왔지만 고총리가 정치적 격변기를 맞아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큰 고비에 직면했다면서 탄핵안을 주도한 야당조차도 "고총리가 있기 때문에 국정 운영이 안정적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ref name="ed11"/>
         요지는 세 번의 장관, 두 번의 서울 시장에 이어 국무총리도 두 번째로 역임하는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정국을 안정시키고 원활히 돌아가도록 하는 역할을 잘 해 온 인물이었다는 것. [[BBC]] 역시 고 총리를 "미스터 안정(Mr.stability)" "행정의 달인(Master Administrator)"으로 지칭했다.<ref name="ed11"/> BBC는 고 총리가 핵심 요직에 있을 때마다 나라를 뒤흔들 만한 대형 사건이 많았다면서 그가 특히 보수파들에게 어필하면서 노대통령을 잘 보좌해 왔다고 평가했다. BBC는 대미관계에 있어 비굴한 아부는 하지 않겠다며 대선 당시부터 마찰을 빚어왔던 노대통령과 달리 고 총리는 미국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있어 신중한 태도를 보여 왔다는 점을 강조했다.<ref name="ed11"/> 미국 언론의 관심 이후 외신들의 특별한 관심 속에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했다.
  • 고민환
         * 1991년 [[미국]] [[예일 대학교]] 의과대학 방문교수(1993년 퇴임)
  • 고영선
          | 학력 =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
  • 고영선 (1962년)
          | 학력 =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
  • 고지용
         '''고지용'''(高志溶, [[1980년]] [[7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전 [[가수]]이자 사업가이다.<ref>[http://music.daum.net/artist/main?artist_id=25877 고지용,다음]</ref> [[젝스키스]]의 해체 후 몇차례 [[드라마]]와 [[영화]] 등의 복귀설이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또한 잡지 [[에스콰이어]]의 화보모델 촬영도 했으나 그 이후 연예계에서 완전히 은퇴했고 [[미국]] 유학 이후 광고대행사 애디티브의 사내이사로 활동했다. 2017년 1월 1일부터 ~ 2019년 6월 2일까지 [[KBS 2TV|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출연했다.
  • 고황경
         </ref> 이었으며, 비교적 여유 있는 환경이었다.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일본]]의 [[도시샤 여자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했다.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로 근무하면서 소녀 범죄에 대한 논문으로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 곽승준
         1960년 [[경상북도]] [[달성군]](현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서울[[한성고등학교]], [[고려대학교]] 경제학과,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구상 (시인)
         그 뒤로는 현실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언론과 문학활동에만 몰두하였다. [[1960년]] [[4·19 혁명]] 이후 그의 반독재 경력을 높이 산 민주당 정권과 [[1961년]] [[5·16 군사 정변|5·16 군사정변]] 이후 종군기자 시절부터 친분을 쌓은 [[박정희]]가 정계입문을 권하기도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미국]] [[하와이 대학교]]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화가 [[이중섭]], 걸레스님 [[중광 (승려)|중광]], 장애인 화가 [[김기창 (화가)|김기창]], 시인 [[고은]] 등 다양한 방면의 예술가와 교류하였다. [[2004년]] [[5월 11일]]에 지병인 [[폐질환]]과 교통사고 후유증이 악화되어 향년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경기도 [[안성시]] 천주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nowiki>[week&커버스토리] 추모여행, 세상에서 가장 경건한 ‘소풍’</nowiki>|url=http://life.joins.com/travel/news/article.asp?total_id=3634126|출판사=[[중앙일보사]]|저자=권혁재 기자|날짜=2009-06-04|확인날짜=2009-06-1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715104330/http://life.joins.com/travel/news/article.asp?total_id=3634126|보존날짜=2015-07-15|깨진링크=예}}</ref>
  • 구성재
         1960년 [[경상북도]] 달성군 다사면 세천리(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세천리)에서 태어났다. [[경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미국]] [[시카고 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 국제복싱기구
         [[미국]] [[플로리다]]에 본부를 두고 있는 프로복싱 단체. 약칭 IBO.
         역사가 짧아 프로복싱 주요 4개 단체(WBA·WBO·WBC·IBF)에는 크게 밀리는 마이너 단체이다. 하지만 본부가 있는 미국이 프로복싱이 활발하여, 프로복서로서 경력 닦기의 일환으로서 IBO 타이틀에 도전하는 선수가 많다. 패전이나 반납으로 타이틀을 잃은 선수가 IBO 타이틀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다보니 의외로 유명한 선수가 이 단체를 거쳐갔다. [[플로이드 메이웨더 주니어]]나 [[매니 파퀴아오]]도 한때 이 단체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이러다보니 타이틀이 공석이 되어 있는 때도 많은 편.
  • 권귀옥
         한창 인기 절정이던 1980년 7월, 결혼을 위해 모든 활동을 접고 [[미국]]행을 택했다.<ref>{{뉴스 인용
  • 권길상
         '''권길상'''(權吉相, [[1927년]] [[8월 4일]]~[[2015년]] [[3월 13일]])<ref name="kw_about">[http://www.kwongilsang.com/aboutus.asp About 권길상] {{웨이백|url=http://www.kwongilsang.com/aboutus.asp# |date=20150215181412 }}, Kwon Gil Sang</ref><ref name="미주한국">[http://www.koreatimes.com/article/907001 ‘꽃밭에서’작곡가 권길상 박사 별세], 《미주한국일보》, 2015.3.14</ref>은 [[대한민국]]의 아동음악가다. 《[[스승의 은혜]]》, 《과꽃》, 《어린이 왈츠》, 《푸르다》, 《꽃밭에서》, 《둥근달》 등 약 150곡의 [[동요]]를 [[작곡]]하였다. 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작곡 활동을 하였으며, 35세 때인 [[196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글]]을 가르치는 [[한국학교]]를 처음으로 시작하는 등 동요 보급에 힘썼다.<ref name="미주중앙">[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1365066 "한국 동요 가르치다 아예 말을 가르치게 됐지"], 《미주중앙일보》, 2012.2.27</ref>
  • 권영준 (1952년)
         * [[미국]] [[앨라배마 대학교]] 조교수
  • 권오중(1971)
         이목구비가 뚜렷한 서구적인 마스크 때문인지, 닮은꼴 외국스타들이 많다. [[인도]] 영화계 슈퍼스타인 [[https://www.google.co.kr/search?q=shahrukh+khan&newwindow=1&safe=off&source=lnms&tbm=isch&sa=X&ei=bDrcU6mwEsq68gX56IKoCw&ved=0CAYQ_AUoAQ&biw=1070&bih=951|샤룩 칸]]과 닮기도 했으며 [[스페인]]의 영화배우인 [[하비에르 바르뎀]]과도 많이 닮았다. 대만 배우 [[진백림]]과도 닮았다. 영화 [[조지 오브 정글]]과 [[미이라 시리즈|미이라]] 시리즈로 유명한 [[브랜든 프레이저]]와도 많이 닮았다. [[브랜든 프레이저]]의 경우는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서 [[미국]]의 권오중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록 음악 팬들에게는 [[드림 시어터]]의 [[존 페트루치]]와의 닮은 꼴로도 유명하다. --물론 곰트루치가 되기 이전 시절이다.-- 미국 미식축구 선수인 [[애런 로저스]]와도 살짝 닮았다.
  • 권정달
         그러나 권정달은 12·12 쿠데타가 성공한 뒤 영입된 비[[하나회]] 출신 장교였기에 권력에서 소외되었고, 하나회 출신의 핵심 인물들의 의지를 실행에 옮기는 실무역에 불과했다. 급기야 [[장영자]] 부부 어음 사기사건의 정치적 책임을 지고 당 사무총장에서도 물러났다. 1983년 [[대한항공 007편 격추사건]]으로 딸(당시 19세. 중앙대 1학년)을 잃었다. [[노태우 정부]] 출범 이후에는 [[대한민국 13대 총선|13대 총선]]에서 공천 탈락되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가 [[1993년]] 정치인 도영심을 만나 재혼했다.
         이후 [[미국]] 연수를 거쳐 정치권 주변부에 머물다가 전두환의 쿠데타 과정에 대해 상세히 진술하는 등 [[김영삼]] 정부의 역사 바로세우기에 협조하였고, [[대한민국 15대 총선|15대 총선]]에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신한국당]]에 입당하였다. 이때 자신 역시 언론통폐합을 주도한 혐의로 고소고발당했으나 5공 핵심 인사들 중 유일하게 무혐의 처분되어 기소되지 않았다. 이때 권정달이 역사 바로세우기에 협조한 대가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는 비난을 받았으나, 권정달은 자신은 [[허문도]]가 짠 계획을 전달하기만 했다고 해명하면서 5·18 특별법은 위헌적인 소급입법이라고 주장하였다.
  • 금난새
         금난새는 음악가인 아버지를 보며 막연히 음악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TV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라는 작곡가가 [[미국]] [[카네기 홀]]에서 《청소년을 위한 음악회》를 하는 것을 보고 지휘자의 꿈을 키웠다.<ref name="무릎팍"/> 1960년대 초였던 대한민국에는 지휘자가 아예 없던 시절이었는데 누구에게도 지휘를 배울 방법이 없어 혼자서 독학을 했다. 그러다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작곡과 지휘를 배우던 중 직접 지휘를 하겠다고 도전했다. 대학교 2학년 시절 금난새는 친구들 스무명 가량을 모아 《서울 영 앙상블》을 만들어 연습실을 찾다가 세종로에 있던 [[미국 공보원]]의 강당이 비어있다는 것을 확인했다.<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5200008431001 무릎팍도사’ 금난새 “대학교 2~3학년때 첫 오케스트라 결성”] 뉴스엔 2010년 7월</ref> 서쪽에서 연주하면 [[한양대학교]] 학생들이 안오고, 동쪽에서 연주하면 [[연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안올 것이 우려됐는데 미국 공보원은 중간즈음에 위치하여 최적이었다. 그리하여 미국인이었던 원장에게 면담을 요청해 2층 강당을 연습실로 쓰고 싶다고 말했다. 원장은 시큰둥한 반응이었으나 금난새가 2달에 한 번쯤은 미국 작품도 연주하겠다고 하자 원장은 흔쾌히 승낙해 그 곳에서 연습할 수 있게 되었다.<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5200008431001 무릎팍도사’ 금난새 “대학교 2~3학년때 첫 오케스트라 결성”] 뉴스엔 2010년 7월</ref> 학교를 졸업하고 음악교사 생활을 하다가 1년 만에 그만뒀다.
         *1970년 : 미국 공보원 어워드 오브 메리트상
  • 금민
         금민은 자신을 '진보대안후보'이자 '진짜 야당'이라고 주장했다. 이명박 정부를 극복하려면 단순한 반대에만 머물러선 안 되고 투기 불로소득에 중과세하는 조세 재정 혁명, 탄소세 도입으로 재원 마련, 보편하는 복지와 본소득 지급 등 구체성을 띤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다.<ref>"보편적 복지, 진보대안만이 할 수 있습니다" <사회당 예비후보자홍보물></ref> 또한 금민은 민주노동당을 향해, 2002년 총리 서리 시절 부동산 투기, 장남의 [[미국|아메리카합중국]] 국적 문제, 김활란상 제정 문제 등이 불거져 낙마했던 후보 장상과의 단일화는 진보의 가치를 저버린 것이라고 비판했다.<ref>{{뉴스 인용
  • 김경원 (1936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재학 중 1955년 미국으로 건너가 [[윌리엄스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했다. 1963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해 캐나다 [[요크 대학교 (캐나다)|요크 대학교]] 조교수가 되었다. 미국 [[뉴욕 대학교]] 교수를 거쳐, 1971년 귀국하여 [[고려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75년 대통령 국제정치담당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1980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같은 해 9월 [[전두환]]이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1982년]] 주[[유엔]] 대사, [[1985년]] 주[[미국]] 대사를 역임하였다. 1985년 10월 14일, 정부는 김경원을 주미 대사로 임명하였다. 같은 날, 주일 대사도 [[최경록]]에서 [[이규호 (1926년)|이규호]]로 교체하였는데, 핵심외교관들이 동시에 바뀌었다는 점 외에도 새로 기용된 인물들이 학계등 민간인 출신이라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이들은 제5공화국 출범기인 1980년 이후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내며 통수권자를 보좌해온 측근인물들이라는 점에서 기능과 역할이 주목되었다. 이날 교체된 최경록 주일대사와 류병현 주미대사가 각각 원로 군출신이었던 반면 신임 대사들은 모두 학계 및 직업 외교관 출신이라는 점이 인사의 특징을 두드러지게 대변해 주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10140032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5-10-14&officeId=00032&pageNo=1&printNo=12323&publishType=00020| 제목 = 駐日대사에 李奎浩씨 | 번역제목=주일대사에 이규호씨 | 날짜 = 1985-10-14| 저자=u.a. | 출판사 =경향신문 |인용=駐美(주미) 金瓊元(김경원) }}</ref>
         |직책 =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 미국 대사]]
         [[분류:1936년 태어남]][[분류:2012년 죽음]][[분류:광산 김씨]][[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고려대학교 교수]]
  • 김경준 (1966년)
         '''김경준'''(크리스토퍼 김, 金景俊, {{출생일|1966|6|6}}<ref>[http://people.empas.com/people/info/ki/mk/kimkongjoon_bbk/ '김경준'] 엠파스 인물검색(조인스닷컴 원본)</ref> ~ )은 [[미국]] 교포 출신의 [[대한민국]] 기업인이다. 미국식 이름은 크리스토퍼 김(Christopher Kim)이다. 17대 대통령 [[이명박]]의 후보자 시절 다스 등의 회사를 대리운영하였다는 의혹을 받았다.
         [[대한민국]] 출신으로 [[미국]]에 건너가 활동하는 미국계 [[기업인]]이다. {{출생일|1966|6|6}}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6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고, [[코넬 대학교]]를 졸업했다. 그후 [[시카고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후 [[모건 스탠리]]에 근무한 것을 시작으로 투자 전문가로 일했다.
         한때 이명박과 동업하여 [[1999년]]에 투자자문회사 '[[BBK]]'를, [[2000년]]에는 [[이명박]]과 공동으로 각자의 이름에서 머릿글자를 딴 '[[LKe뱅크]]'를 설립하였다. BBK는 [[2001년]] [[금융감독원]] 조사 결과 불법 사실이 드러나 투자자문업 등록이 취소되었다. BBK 등록 취소 직전에는 '[[옵셔널벤처스코리아]]'를 설립하여 대표로 취임하였고, 김경준은 이 회사의 주가가 급등한 뒤 회사 공금을 빼돌려 미국으로 도피했다는 의혹을 받았고, 한때 이와 관련해 옵셔널벤처스 소액주주들이 미국 연방법원에서 김경준과 그의 가족들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내 663억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받았기도 했으나,<ref>{{뉴스 인용
         [[2003년]] 공금횡령, 자금세탁, 공·사문서 위조 등 세 가지 경제 범죄 혐의로 [[미국 연방 수사국]]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한미 범죄인인도협정에 따라 [[2007년]] [[11월 15일]](현지 시간) 한국으로 송환되어 사흘 후 경제 범죄 혐의로 구속되었다.
         |제목=BBK 대표 김경준은 누구?…380억 빼돌려 미국 도피
         [[분류:196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코넬 대학교 동문]][[분류:시카고 대학교 동문]][[분류: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분류:이명박]][[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화이트칼라 범죄자]]
  • 김광석(1964년 1월)
         ||<:><#996633>'''{{{#white 가족관계}}}'''||<(><#ffffff> 아내 [[서해순]][* 본명은 서순애. 1965년 9월 14일생. With33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 김광석이 생존했던 그 해 나이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서해순과 처남이 2002년에 세웠다고. 김광석 4집 리마스터링 앨범과 김광석:다시 앨범이 여기에서 나왔다.], 딸 故 김서연[* 1991~2007. 발달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고인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미국 유학 중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2017년 9월 20일에 이미 10년 전인 2007년 12월 23일에 16세로 [[수원시]]의 한 대학병원에서 사망했던 것으로 밝혀졌다.],[br]누나 2명, 형 2명[* 큰형 故 김광동(군복무 중 사고로 숨졌다고 김광석이 생전 언급한 바 있다), 작은형 김광복(김광석의 가족을 대표해서 서해순을 고소하러 법정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다) ] ||
         11월에는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 [[뉴욕]] [[맨하탄]] 머킨 콘서트홀에서 공연을 했다.
         [[2013년]] 지산월드락페스티벌에서 미국의 유명 밴드 [[Weezer]]가 김광석이 리메이크해서 화제가 된 '먼지가 되어'를 리메이크하기도 했다. 한국 팬들에게 제대로 된 팬서비스였다는 후문이다. [[http://youtu.be/HdyBHoXlPOw|보러가기]]
          * 김광석의 외동딸인 서연씨가 10년전인 2007년 17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곁으로 갔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왜 서해순이 딸이 죽은 후에도 최근까지 주변인들에 딸이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이야기했는지는 미스터리다. ~~사망이 밝혀진 것도 최근 의문에 대해 경찰이 확인해준 것이라고 한다~~
          김광석이 부른 곡 중 많이 알려져 있지 않은 곡으로 김광석이 생전에 작사/곡까지 한 유일한 주제가다. 미국에서 방영되었던 'The Super Mario bros. Super Show'의 한국어 비디오판의 오프닝이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3와 월드의 애니판의 오프닝이다.([[http://pub.chosun.com/client/news/viw.asp?cate=C05&mcate=M1005&nNewsNumb=20160620566&nidx=20567|관련 기사]])
  • 김국진(MC)
         [[1993년]] [[2월]] 감자골은 당시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이였던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서 고별인사를 하고 [[미국]]행을 하기로 했는데, 녹화가 시작되기 직전 "[[내가 무릎을 꿇었던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프로그램을 열 개씩 하던 감자골이 갑자기 그만 둔 것은 MBC로 이적하기 위함이였다!]]" 라면서 임하룡을 제외한 '''방송 3사 코미디언들 모두'''가 MBC로 쳐들어와서 녹화를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난동을 피우는 통에 김국진은 스태프들을 따라서 개구멍으로 피신을 갔다고 한다(…). 참고로 이때 김국진을 숨겨준 사람이 [[최진실]]의 동생 최진영이라고 라디오스타에서 밝혔다. 1980년대 말 ~ 90년대 초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코미디언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면 씁쓸해지는 대목. 감자골은 ~~[[이경규]]가 선처를 호소해서 선배들에게 줄빳다만 맞고~~ 자신들이 다른 곳으로 이적하는 것이 아니라 코미디언으로서 은퇴하고 이민가는 것이다. ~~니들 밥줄 끊을 염려 없으니 놔줘라~~ 라고 설득해서 겨우 시청자들에게 고별 방송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감자골은 '''방송 3사 코미디언 협회에서 제명당한다.''' 이들의 KBS 선배 개그맨 [[이봉원]]은 후일 방송에서 감자골 사태에 대한 질문을 받자, '당시 나는 SBS로 이적한 상태라 아무 관련이 없다'는 파렴치한 변명을 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는 이상한 사건.
         그런데 미국행 직전에 박수홍은 입대 영장이 나왔고, 김수용은 미국 비자가 나오질 않아서(…)[* 2016년 10월 26일 라스에서 박수홍이 밝힌 바로는 귀차니즘으로 인해 비자 발급 인터뷰 문항을 제대로 읽지 않고 마약 경험과 총기소지 상황에 '예'를 체크하는 바람에 실제로 미국에 몇년간 입국 금지처분을 받았다고(...). 김국진과 김용만은 처음엔 김수용이 미국에 오기 싫어 거짓말 하는 걸로 생각했다고 한다.][* 이후 김수용은 캐나다를 통해 밀입국(!)을 할 생각으로 [[밴쿠버]]로 건너갔다고 한다. 골프장을 가로질러서 국경을 건널 생각이었으나 절벽이라 못 넘었고, 멕시코 마약 밀매단에 섞여서 건너오는 방법(...)과 국경 근처에서 헤엄쳐서 건너는 방법 등을 알아보기만 하고 돌아왔다고...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에 본인이 출연해서 직접 언급.] 결국 감자골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이후 김국진은 김용만과 함께 미국에서 1년동안 지내면서 이것저것 한 모양. [[이현도]]의 증언에 따르면 나이트 클럽까지 인수했었다고 한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큰 규모는 아니고 쌀국수집 옆 지하의 작은 규모였다고.
         [[1995년]], 미국에서 1년만에 귀국해 MBC에 자리잡은[* 귀국 후 처음에는 KBS에서 '오키도키쇼', '토요일 7시가 좋다' 등의 프로그램을 김용만과 진행하다가 1995년 중반 MBC의 '도전 추리특급'과 '[[테마게임]]'을 진행하면서 활동영역을 MBC로 옮기게 된다. [[청춘행진곡]] 폐지와 함께 개그계에서 은퇴한 [[박세민]] [[이원승]], '청춘행진곡'이 폐지되어 SBS로 이적했던 [[김창준]] [[김은태]] [[이웅호]] 등의 대안으로 김국진과 김용만을 영입한 것으로 추측된다.] 김국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바로 '''대한민국 연예인 역사상 최고의 인기'''였다.
         [[김구라]]같이 영문과 출신인데도 불구, 정작 [[영어]]에는 능통하지가 않다. 전성기에는 김국진에게 영어를 잘 한다고 얘기하면 김국진이 특유의 혀짧은 소리로 어설픈 짧은 영어 몇 마디를 하는 것도 하나의 준비된 개그였다. 데뷔 시절 감자골 4인방(김국진, [[김용만]], [[박수홍]], [[김수용(코미디언)|김수용]])으로 인기를 얻은 몇년 뒤 김용만과 함께 [[미국]] 어학 연수를 갔건만 영어는 늘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지진]]을 겪었을 뿐[* 그래도 [[남자의 자격]]에서 [[영어마을]]로 가는 에피소드에서 [[김성민(1973)|김성민]], [[이정진]], [[이윤석]] 등과 함께 그럭저럭 준수한 [[영어]] 실력을 보여주었다.]. 여담으로 당시에 밥과 고추장으로 생계를 이어나갈 정도로 궁핍했는데, [[1994 FIFA 월드컵 미국]] 때 [[미국]]을 찾은 [[고정운]], [[황선홍]] 등이 놀러와서 넌지시 용돈을 줬는데 그게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 김기덕(1960)
         이렇게 국제적 인지도가 높다 보니, [[2015년]]에 한국에서도 개봉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이란 영화 《택시》에서 등장인물 중 한 사람인 불법 DVD 수입 업자가 김기덕 감독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라, 상당히 오랜 기간 '''[[미국]]에서 개봉한 대한민국 영화 중 가장 흥행'''에 성공했던 감독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 밑에 작품 목록 참조.
         《[[도둑들]]》이 장기 상영하는 걸 두고 제목과 같다고 말했다. 흥행작이 극장을 독차지하는 건 어제 오늘이 아니며 [[할리우드]]에서도 흔한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미국은 대한민국과 같은 영화 산업의 수직 계열화[* 제작-배급-상영을 한 회사가 독점 소유하여 자사에서 만든 제품을 독점적으로 배급하는 행위. [[한국]]의 경우 영화 이외에 다른 분야에서는 '독점규제법'에 의해 수직계열화 자체가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학부 경제학에서 '산업조직론' 수업만 들어봐도, 이러한 수직계열화가 산업이 효율성을 저해하는 반 자본주의적 행위임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가 금지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과거에는 그 악명 높은 헐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에 의해 [[MGM]], [[파라마운트]] 등의 대형 제작사들이 영화 제작사와 극장 체인을 동시에 소유하고 운영하였고, 공장식으로 자사의 영화만을 찍어내고 배급하여 헐리우드가 암흑기를 맞이한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미국의 반독점국은 1958년 독점금지법의 개정[* '파라마운트 심결례/케이스'라고 불린다.]으로 영화산업의 계열화가 금지하고 파라마운트를 비롯한 독점 기업에 극장 체인을 판매할 것을 강제하였다. 즉 한국의 영화 산업은 반 세기전 미국의 영화 산업 구조의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셈인 것이다.
          미국 개봉 한국 영화에서 오랫동안 가장 흥행에 성공한 영화(238만 달러)였다가 [[명량]]이 258만 달러를 넘기면서 기록이 깨졌다. [[IMDB]] Top 250에도 이름을 올렸으며 로튼토마토에서도 95%의 신선도를 유지하고 있다. BBC 선정 21세기 위대한 영화 100선에도 66번에 등재되었다. 또한 [[로저 이버트]]는 2012년 이 영화를 [[http://www.rogerebert.com/reviews/spring-summer-fall-winter_and-spring-2003|위대한 영화목록]]에 등록했다. [[청룡영화상]]과 [[대종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그리고 배급사도 다른 한국영화들과 다르게 소니 픽처스 클래식이 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소니 픽처스 클래식은 소니 픽처스가 해외의 독립 예술 영화를 제작, 배급하기 위해 세운 회사로서, 이 영화의 작품성을 인정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배경인 호수에 떠 있는 암자는 청송 주산지에서 촬영하여 주산지는 출사의 명소가 됐다. 암자는 바지선 위에 만든 세트로, 환경 오염 우려로 철거했으나 주산지 자체 풍경만으로도 신비롭고 멋지다. 그러나 점차 유명해지는 만큼, 주변이 급격히 관광지처럼 변해서 그 정취가 훼손되고 있다.
  • 김기식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사무국장, 정책실장, 사무처장, 정책위원장을 역임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했다.
         * 2015년 5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지원(3077만원)으로 9박 10일 [[미국]]ㆍ[[벨기에]]ㆍ[[이탈리아]]ㆍ[[스위스]] 출장 등이다.
         김기식은 KIEP 돈으로 떠난 미국·유럽 출장에 로비 성격이 있다는 의혹에 대해 "(유럽) 현장 점검 이후 KIEP가 추진했던 유럽 사무소 신설에 대해 준비 부족이라고 판단해 관련 예산 전액을 삭감했다"고 변명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실패한 로비"라고 했다.
         2014년 10월 8일 국감에서 김기식 의원은 안세영 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에게 "열흘에 4개국을 갔는데 공적으로 연수를 위해서 기관에서 소요한 시간이 딱 9시간입니다.…매년 1억씩 들여 가지고 해외연수라고 하면서 사실상 그냥 해외 관광 여행을 40명씩 보내고 있어요.…왜 이렇게 연구기관 분들은 스위스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코스가 거의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만 가고 있습니다."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7개월 후인 2015년 5월 김기식은 열흘에 4개국 유명한 관광지로 떠났다. 그의 표현대로면 '그냥 해외 관광 여행'이다. KIEP가 지원한 9박 10일간의 미국ㆍ유럽 출장이었다.<ref name="김기식 발언">{{뉴스 인용|제목="기업돈으로 출장, 정당합니까" 4년 전 김기식 발언이었다|url=http://news.joins.com/article/22526696|날짜=2018-04-11|출판사=중앙일보}}</ref>
         2014년 5월 27일 김기식 의원은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에서 이성보 국민권익위원장에게 "기자들이 연수 가잖아요? 회삿돈 아니고 언론재단이나 등등 연수를 가는 경우에 (부정청탁에) 해당이 됩니까, 안 됩니까?"라고 비판하며 법안 심의 과정에서 외부 기관을 통한 연수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김기식이 참여연대 사무총장이던 2007년 미국에 2년간 연수를 다녀온 게 대기업의 지원으로 간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이 의혹에 대해 2015년 국회에서 "외부 프로젝트를 통한 연수였다"고 해명했지만, 외부가 어디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밝히지 않고 있다.<ref>{{뉴스 인용|제목="김기식, 참여연대 시절 美 2년 연수"…무슨 돈으로?|url=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0/2018041090134.html|날짜=2018-04-10|뉴스=TV조선}}</ref>
  • 김기식 (국회의원)
         [[서울대학교]] 인류학과를 졸업했다. 1994년 [[참여연대]]를 창립하고 사무국장, 정책실장, 사무처장, 정책위원장을 역임했다. 2008년부터 2009년까지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객원연구원을 지냈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 선거대책위원회 전략기획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했다.
         * 2015년 5월,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지원(3077만원)으로 9박 10일 [[미국]]ㆍ[[벨기에]]ㆍ[[이탈리아]]ㆍ[[스위스]] 출장 등이다.
         김기식은 KIEP 돈으로 떠난 미국·유럽 출장에 로비 성격이 있다는 의혹에 대해 "(유럽) 현장 점검 이후 KIEP가 추진했던 유럽 사무소 신설에 대해 준비 부족이라고 판단해 관련 예산 전액을 삭감했다"고 변명했다. 청와대 관계자도 "실패한 로비"라고 했다.
         2014년 10월 8일 국감에서 김기식 의원은 안세영 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 이사장에게 "열흘에 4개국을 갔는데 공적으로 연수를 위해서 기관에서 소요한 시간이 딱 9시간입니다.…매년 1억씩 들여 가지고 해외연수라고 하면서 사실상 그냥 해외 관광 여행을 40명씩 보내고 있어요.…왜 이렇게 연구기관 분들은 스위스와 프랑스와 이탈리아를 좋아하는지 모르지만 코스가 거의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의 가장 유명한 관광지만 가고 있습니다."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7개월 후인 2015년 5월 김기식은 열흘에 4개국 유명한 관광지로 떠났다. 그의 표현대로면 '그냥 해외 관광 여행'이다. KIEP가 지원한 9박 10일간의 미국ㆍ유럽 출장이었다.<ref name="김기식 발언">{{뉴스 인용|제목="기업돈으로 출장, 정당합니까" 4년 전 김기식 발언이었다|url=http://news.joins.com/article/22526696|날짜=2018-04-11|출판사=중앙일보}}</ref>
         2014년 5월 27일 김기식 의원은 정무위원회 법안심사소위원회 회의에서 이성보 국민권익위원장에게 "기자들이 연수 가잖아요? 회삿돈 아니고 언론재단이나 등등 연수를 가는 경우에 (부정청탁에) 해당이 됩니까, 안 됩니까?"라고 비판하며 법안 심의 과정에서 외부 기관을 통한 연수를 문제 삼았다. 하지만 김기식이 참여연대 사무총장이던 2007년 미국에 2년간 연수를 다녀온 게 대기업의 지원으로 간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는 이 의혹에 대해 2015년 국회에서 "외부 프로젝트를 통한 연수였다"고 해명했지만, 외부가 어디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밝히지 않고 있다.<ref>{{뉴스 인용|제목="김기식, 참여연대 시절 美 2년 연수"…무슨 돈으로?|url=http://news.tv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4/10/2018041090134.html|날짜=2018-04-10|뉴스=TV조선}}</ref>
  • 김대중
         [[전라남도]] [[신안군]] 에서 태어났고, 제6·7·8·13·14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군부 정권의 위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김영삼]]과 함께 오랫동안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군사 정권에 항거하였다.<ref>「지식충전, 우리 현대사 노트」본문 中 2. 민주주의를 향한 움직임</ref> 김대중은 군부 정권으로부터 [[김대중 납치 사건|납치]]와 가택연금, 투옥 등의 여러 탄압을 받았다. [[1987년]] [[6월 민주 항쟁]] 이후에는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으로 활동하며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구성해 이른바 민주 진영을 구축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2822119 독일 신문 "DJ는 동아시아 민주화 상징"] 연합뉴스 2009년 8월 20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2824635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 서거-NYT] 뉴시스 2009년 9월 18일</ref><ref>고지희 기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112&aid=0002028923 (DJ서거) 만델라 재단 "'아시아의 만델라' DJ서거에 깊은 애도"] 헤럴드 경제 2009년 8월 18일 작성</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41657 호주 언론 김대통령 방문 보도] 연합뉴스 1999-09-16</ref> 인권 향상과 남북 관계의 진전에 기여한 공로로 [[2000년]] 임기 중에 한국인 역사상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2823669 김전대통령 빈소 국회 마련..조문객 발길] 연합뉴스 2009.08.20</ref> 2000년 노르웨이 라프토(Rafto) 인권상, 1998년 무궁화 대훈장, 1998년 국제인권연맹 인권상, 1999년 미국 [[필라델피아 자유의 메달]] <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29557 두산백과</ref>, 북미주 한국인권연합 인권상, 미국 조지 미니(George Meany) 인권상, 브루노 크라이스키(Bruno Kreisky) 인권상을 수상하였다.<ref>http://15cwd.pa.go.kr/korean/president/bio/bio4.php</ref> 연설에 능하였으며,<ref>[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13343 DJ "서생적 문제인식+상인적 현실감각"] 브레이크뉴스 2009.11.01</ref><ref>[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pol&arcid=0921390861&code=41111111&cp=nv1 그는 타고난 정치인이었다] 국민일보 2009.08.18</ref><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1236500 수행비서가 4년간 지켜본 DJ…"그는 위대한 지도자"] 노컷뉴스 2009.08.19</ref>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가장 오래 연설한 기록으로 [[기네스 세계 기록|기네스북]] 증서를 받았다.<ref name="기네스 증서">[http://www.kdjlibrary.org/common/museum/main.html 기네스 증서 1964 - 김대중 도서관 전시물 (민주화를 향한 김대중-야당의 정책이론가로서의 활동)]</ref><ref>이 기록은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과정에서 [[김광진 (정치인)|김광진]] 의원에 의해 갱신되었다.</ref>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風霜)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덩굴|인동초]](忍冬草)로 비유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 [[1992년]] [[미국 가톨릭 대학교]] 명예법학 박사
         하지만 김대중은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하였다. 4학년이 되면서 독서로 인해 넓어진 견문 탓에 반일 사상이 생겨나 일본인 학생들과 갈등을 빚으면서 전 과목에 걸쳐 성적이 떨어지기도 했으며, 반일 작문이 문제가 됐다.<ref name="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http://breaknews.com/sub_read.html?uid=108854§ion=sc1 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 브레이크뉴스 2009.08.25일자</ref> 일본의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미국 해군]]의 해상 봉쇄 정책으로 인해 여행 허가가 어려웠고 이에 학비가 무료인 [[만주국]]의 [[건국대학 (만주국)|건국대학]]에 진학하는 것도 고려해 봤지만 진학해봐야 일본군에 징집이 될 것이 뻔하다는 2가지 이유에서였다.<ref name="벌써 그립다 민족의 영웅 김대중 전 대통령"/><ref name="1999년 김대중 자서전">{{서적 인용|제목=김대중 자서전 - 역사와 함께 시대와 함께|저자=일본NHK취재반|출판사=인동|연도=1999|isbn=9788995019405}}</ref> 15세가 되던 [[1938년]]에 '''도요타 다이쥬'''({{llang|ja|豊田大中}})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대통령이 된 뒤에도 일본에 올 때마다 상업학교 시절 은사에게 이 이름을 사용했다고 [[아사히 신문]]은 보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077661 말뿐인 '정쟁 중단' 與 '친일 시비' 잇단 공격]</ref>
         안기부 문건의 기록에 의하면 [[1950년]] 6월 27일 한국 전쟁 발발 직전 보도연맹에 체포되어 미국 [[육군특무대|육군특무대(CIC)]]에 의해 아군 후퇴시 사살 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목포상고 선배인 김진하의 호명 착오로 구명되었다고 한다. [[목포인민위원회]] 창설 활동, 부채 및 체불된 노임 횡령 혐의로 목포 교도소에 수감되었으며 9.28 수복시 탈옥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f name="안기부 문건"/> 하지만 6월 27일엔 한반도에 군사고문단 이외 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 6월 30일 한.미해군은 북위 37도 이북의 해상은 유엔해군이, 그 이남은 한국 해군이 담당키로 합의했으므로 미해군은 당시 서남해상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전쟁 발발 3일만에 미군이 함정에서 좌익이라는 혐의만으로 타국민을 사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으며 주한미대사관은 이를 공식부인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186731 국민회의 金총재 사상시비 반박자료] 연합뉴스 1997년 8월 22일</ref>
         또한 [[워싱턴 포스트]]의 기자였으며 한국 문제 전문가인 돈 오버도퍼는 그의 저서 《두 개의 한국》에서 1980년대 [[미국 중앙 정보국|CIA]] 공작원이었던 제임스 릴리 전 주한 미 대사의 말을 인용하여 "과거 행적을 면밀히 조사한 결과 공산주의 전력은 근거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어 안기부 문건의 신빙성에 의문점을 던지고 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200204 "대통령 되면 수류탄 들겠다"... 군은 왜 DJ를 미워했나]</ref>
         ==== 1차 미국 망명과 한민통 조직 ====
         진산 파동이 수습되고 1971년 [[5월 25일]] [[대한민국 8대 총선|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소속 전국구로 당선된 김대중은 교통사고 후유증 치료차 일본을 자주 왕래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72년]] 10월 11일 일본 정계 순방을 위해 도쿄에 체류하던 김대중은 [[10월 유신]]이 선포되자 측근인 [[송원영]]의 설득으로 [[미국]] 망명을 결심한다. 유신 선포 직후 김대중은 [[고노 겐소]]를 비롯한 일본의 여러 정치인들과 회견을 갖고 일본 언론을 통해 [[비상계엄령]]과 유신 체제를 비판했으며 그해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국민투표 무효선언을 주장하는 연설과 기자회견을 하는 등 정력적인 반 유신 투쟁을 벌인다. 1973년 [[하와이 섬|하와이]]를 경유하여 1월 3일 일본 도쿄에 도착한 김대중은 [[조윤형]], [[김상현 (1935년)|김상현]]의 구속 소식을 접하게 된다.<ref name="손세일"/> 3월 25일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교포 사회에서 강연 및 반정부 시위 활동을 벌인다. 초대 서울시장 [[김상돈]], [[미주민주국민회의]] 의장 [[임창영]], 전 [[한국신학대학교|한국신학대학장]] [[김재준]], 예비역 해군제독 [[이용운]] 등 교포 사회에서 활동중인 여러 지식인, 예비역 장성들과 뜻을 모은 김대중은 7월 6일 워싱턴에서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하여 초대의장에 추대된다. 7월 10일엔 한민통 일본지부 결성을 위해 일본에 입국, 비록 8월 8일에 납치되긴 했으나 15일 결성된 한민통 일본지부를 통해 미국과 일본의 교포를 규합하며 유신 반대 민주화 운동을 벌이게 된다.<ref>《전후일본외교사》, 이리에 미치마사, 1983년</ref><ref>[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96686 [81회] 한민통 발족위해 동분서주] 후광 김대중 평전</ref>
         이 사건은 한국 공권력의 일본국의 주권침해라는 한·일 양국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되었다. 김 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 체류 중 활동면책,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의 사과 방일 등을 약속 받고 물러섰다. 그러나 미국의 조정 및 한일 간의 막후절충으로 김동운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국무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이 합의됨으로써 양국 관계가 정상화되었다. 도쿄에서 납치된 후 동교동 자택에 귀환하면서 귀국하자마자 가택연금과 동시에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지당하였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이 미국 의회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중앙정보부의 범행"이라고 발언하면서 사건이 다시 불거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3&aid=0000005733 [특집] 박정희에게 한방 먹이다] 위클리경향 2005.02.18</ref> 이어 [[1977년]] [[7월 1일]]에 일본 교토통신과의 회견에서 증언을 두고 신빙성이 의심스럽다고 발언한 [[후쿠다 다케오]] 일본 총리를 비난하면서 "한·일 두 정부가 반성하지 않고 계속해서 나의 명예와 신뢰성에 상처를 입혀 김대중 납치 사건의 진상에 대한 양국 국민의 눈을 가리려 한다면, 더욱 상세한 사실을 밝혀 양국 정부의 죄상을 고발하겠다"라고 밝혔다.
         === 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2차 미국 망명 ===
         1980년, 12·12 군사 반란으로 실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를 주요내용으로 한 포고령10호를 발표함과 함께 김대중을 포함한 재야인사 20여명을 사회혼란 및 학생, 노조 배후조종 혐의로 전격 연행하였다. 김대중은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김대중은 "이 땅의 민주주의가 회복되면 먼저 죽어간 나를 위해서 정치보복이 다시는 행해지지 않도록 해달라"라고 한 법정 최후 진술이 국제사회에 알려지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대사를 비롯한 [[로널드 레이건|레이건]] 행정부, 세계 각국 지도자와 인권단체들이 구명운동에 나서게 된다. 레이건 정권의 리처드 앨런 안보보좌관은 유병현 합찹의장과 만나 김대중을 사형될 경우 양국관계는 회복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게 될 것이라면서 압박을 하게 된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10900209110001&edtNo=50&printCount=1&publishDate=1994-01-09&officeId=00020&pageNo=10&printNo=22394&publishType=00010 「金大中(김대중) 카드」로 푼 韓美(한미)정상회담] 동아일보 1994.01.09</ref>
         전두환은 김대중의 형을 감형해주는 대신 자신을 레이건의 취임식에 초청해달라는 제안을 하고 이를 미국이 받아들여<ref>[http://imbbs.imbc.com/view.mbc?list_id=3669954&pre_list_id=3670935&next_list_id=3669928&page=1&bid=focus03 [발췌] DJ 구명운동과 신군부 대미관계 비화] MBC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2009.08.20</ref> [[1981년]] [[1월 23일]] 국무회의 의결을 통해 김대중 및 그와 연루된 11인에 대한 감형을 실시하게 된다. 정부대변인인 [[이광표]] 문공부장관은 "김대중 등 피고인들이 관련된 이 사건은 구시대정치의 슬픈 유산으로 이제 과거의 악몽을 갖고 제5공화국의 서장을 얼룩지게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방 및 국내외 인사들로부터 인도젹 견지에 입각해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하는 의견이 있었다"라고 감형 배경을 설명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4010900209110001&edtNo=50&printCount=1&publishDate=1994-01-09&officeId=00020&pageNo=10&printNo=22394&publishType=00010]</ref>정권 차원에서 기회있을 때마다 국민화합을 역설하며 민족적 대단결로 정의로운 복지사회의 건설을 이끌어온 사실을 강조한 전두환의 국민화합과 화해의 80년대를 창출하기 위한 '관용적인 일대영단'으로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김대중을 다시 20년형으로 감형하고 신병치료를 위해 입원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형집행정지 처분을 해주고 해외여행을 허용키로 한 결과 김대중은 구속된지 2년 7개월 만인 1982년 12월에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kdjhall.org/ 김대중 사이버 기념관 연보]</ref><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12300200101003&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1-01-23&officeId=00020&pageNo=1&printNo=s1&publishType=00030 金大中 無期로減刑 閣議의결] 동아일보 1981.01.23</ref>
         {{인용문|김대중이 전두환에게 보낸 탄원서<br>1차 편지전문<br>대통령각하<br>본인은 광주사태 배후조종혐의 및 국가보안법, 반공법, 내란예비음모, 계엄포고 위반사건 등으로 1, 2심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현재 상고중에 있습니다.<br>본인은 그간 본인의 행동으로 국내외에 물의를 일으켰고 이로 인하여 국가 안보에 누를 끼친 데 대하여, 책임을 통감하며 진심으로 국민앞에 미안하게 생각해 마지않습니다.<br>본인은 앞으로 자중자숙하면서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아니할 것이며 오직 새시대의 조국의 민주 발전과 국가 발전을 위하여 적극협력 할것을 다짐합니다.<br>본인은 본인과 특히 본인사건에 연루되어 수감중에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전두환 대통령 각하의 특별한 아량과 너그러운 선처가 있으시기를 바라마지않습니다.<br>1981년 1월 18일 金大中<br>김대중 옥중서신 전문<br>全斗煥 大統領 閣下<br>國事에 軫念하신 가운데 閣下의尊體 더욱 健勝하심을 仰祝하나이다.<br>閣下께서도 아시다싶이 本人은 矯導所生活이 二年半에 이르렀아온데 本來의 持病인 股關節變型症과 耳鳴등으로 苦楚를 겪고 있으며 專門醫에 依한 充分한 治療를 받고자 渴望하고 있읍니다.<br>本人은 閣下께서 出國許可만 해주신다면 美國에서 二 三年間 滯留하면서 完全한 治療를 받고자 희망하온데 許可하여 주시면 感謝千萬이겠읍니다.<br>아울러 말씀 드릴 것은 本人은 앞으로 國內外를 莫論하고 一切 政治活動을 하지 않겠으며 一方 國家의 安保와 政治의 安定을 害하는 行爲를 하지 않겠음을 約束드리면서 閣下의 善處를 仰望하옵니다.<br>1982年 12月 13日 金大中<br>(옥중서신) 편지 전문<br>전두환 대통령 각하<br>국사에 전념하신 가운데 각하의 존체 더욱 건승하심을 앙축하나이다.<br>각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본인은 교도소 재소 생활이 2년반에 이르렀사온데 본래의 지병인 고관절변형, 이명 등으로 고초를 겪고 있으며 전문의에 의한 치료를 받고자 갈망하고 있습니다.<br>본인은 각하께서 출국허가만 해 주신다면 미국에서 2~3년간 체류하면서 완전한 치료를 받고자 희망 하온데 허가하여 주시면 감사천만이겠습니다.<br>아울러 말씀드릴 것은 본인은 앞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일절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으며 일방 국가의 안보와 정치의 안정을 해하는 행위를 하지 않겠음을 약속드리면서 각하의 선처를 앙망하옵니다.<br>1982년 12월 13일 金大中<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101230032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1-01-23&officeId=00032&pageNo=1&printNo=10866&publishType=00020 김대중 탄원전문] 경향신문 1981.01.23</ref>}}
         김대중의 도미 직후, 전두환은 김대중이 정치에 손 떼고 건강에 유의하며 살겠다며 각서를 쓰고 미화 7~8만 달러까지 받아가서 미국으로 갔는데, 1년도 안 돼 기자 인터뷰를 통해 정치 활동을 했다며, 국회의원 될 자격도 없는 머리 나쁜 선동가라고 비난하였다.<ref>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 의원은 71년 당시 신민당 대선후보로 미국을 방문한 김대중에 대해 "당신은 한국의 [[존 F. 케네디]]"라며 지지를 표명했다. 그는 1980년 김대중이 신군부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자 구명운동에 앞장섰고 미국 망명 생활과 귀국 때도 큰 도움을 줬다. 케네디 의원은 [[1984년]] 4월 26일 김대중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과 나는 민주와 평화를 지지하는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한국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지지한다"라고 썼다. 85년 2·12 총선 전에 귀국을 결심한 김대중은 1984년 6월 "84년 말까지 귀국하기로 결정했다"라는 뜻을 서신에 담아 전했다. 케네디 의원은 86년 5월 한국에서 민주화를 위한 김대중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ref>[http://news.nate.com/view/20090828n00030 에드워드 "DJ, 당신은 한국의 JFK"] 경향신문 2009.08.28</ref>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와인버거 미 국방부 장관과 그레그 전 대사를 한국에 급파했고, 이들은 [[전두환]] 신군부를 상대로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셨다. 이들의 노력 때문이었는지 김대중은 신군부에 의해 가까스로 사면을 받아 미국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김대중 구하기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그레그 CIA 지부장이 1989년에 주한 대사로 부임하게 되자 김대중은 감사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 서한에서 김대중은 "나는 개인적으로 귀하가 대사로 오게 돼 기쁘다. 왜냐하면 귀하는 1973년,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나의 목숨을 살려줘 내가 깊이 신세를 졌기 때문이다"라며 은인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나타내기도 했다.<ref>[http://photo.media.daum.net/photogallery/politics/pol_others/view.html?photoid=3317&newsid=20090811153912438&cp=nocut '김대중 지킴이' 그레그와 DJ의 관포지교] 노컷뉴스 2009.08.11</ref>
         [[독일 사민당]]의 1980년 9월 17일자 보도자료에 따르면 [[빌리 브란트]] 당시 사민당 총재는 "김대중씨에 대한 사형 선고는 우리 모두에게 큰 도전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조국의 사회적 발전과 인권수호를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노력이 이런 판결로 귀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라고 밝혔다. 그는 또 "이번 판결이 집행된다면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막대한 손상을 입으므로 대통령이 판결이 수정되도록 조치할 것을 긴급히 요청한다"며 "김대중씨 구명에 모든 힘을 발휘해 줄 것을 미국 정부에도 긴급히 요청한다"라고 말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Politics/Article.asp?aid=20090520004101&subctg1=&subctg2= "브란트 前 獨 총리 DJ 구명운동했다"] 세계일보 2009.05.20</ref> 1984년부터 1994년까지 10년간 독일 대통령을 지낸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폰 바이츠제커]]는 1969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대표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방문해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과 처음 인연을 맺은 후 지난 40년 동안 깊은 우정을 나눴다. 그는 특히 독일 연방하원 부의장으로 있던 1980년 김대중이 신군부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자 하원에서 '김대중 구명 결의안'이 채택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는 등 국제적 구명운동에 앞장섰다.<ref name=autogenerated2>[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90819102859 클린턴, 고르비, 만델라도 "DJ 그리울 것"] 프레시안 2009.08.19</ref>
         김대중의 사형 집행을 막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편지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191754145&code=100203 죽음 앞둔 DJ 구한 '교황의 자비'] 경향신문 2009.05.19</ref> 1980년 [[12월 11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서울 주재 로마 교황청 대사관을 통해 전두환 대통령에게 1차 편지를 발송해 김대중의 선처를 당부했다. 김대중의 형량이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직후인 이듬해 [[2월 14일]] 2차 편지를 보내 전 대통령에게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 [[1983년]]에는 [[1월 31일]]에는 [[뉴스위크]]와의 회견에서 한국 민주화와 인권 상황에 대한 입장 표명을 했고, 미국에서 [[유니언신학대]] 구제위원회 고문, [[국제고문희생자구원위원회]] 고문과 [[하버드 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활동하고,<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80415010327233180010 DJ부부 訪美… 박지원 前실장 동행] 문화일보 2008.04.15</ref> 재미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창설해 미주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에 관심을 기울이다가 [[1985년]] [[2월 8일]]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불과 1년 6개월 전인 1983년 8월, 필리핀의 야당 인사 [[베니그노 아키노]]가 미국 망명길에서 돌아오다가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기에 당시 김대중의 귀국 결정에 대해 주변 인물들은 물론이고 미국 정부까지도 만류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대중은 조국의 상황을 외면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귀국을 강행하였다. 당시 전두환 정부는 김대중이 귀국할 경우 남아있는 형을 집행하기 위해 교도소에 재수감하겠다고 경고하였고, 이에 미국 정부는 전두환 정부가 김대중의 무사 귀국을 보장하지 않으면 당시 논의중이던 전두환의 방미를 백지화시키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케네디 의원과 당시 테네시주 상원의원이던 [[앨 고어]] 전 부통령 등은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을 보장하라며 전두환 대통령에게 편지 등을 보냈다.
         이에 전두환 정부는 한발 물러서서 김대중에 대해 가택연금 외에는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으며, 그래도 전두환 정부의 김대중 암살을 우려한 미국 하원 의원 토머스 폴리에타와 에드워드 페이언을 비롯한 여러 저명인사들이 김대중을 에워싸고 김포공항 입국장까지 동행한 덕분에 별다른 불상사는 없었다. 하지만 김대중은 김포공항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과 경찰들에게 강제 연행되어 동교동 자택에 연금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8&aid=0001967320& [길을찾아서] ‘반독재’ 거센 바람…다시 강단으로] 한겨레 2008.09.22</ref> 1985년에는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에 취임했다. 이듬해 [[1986년]]에는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됐으나 당국에 의해서 취임이 저지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 김동선 (승마 선수)
         미국 태프트 스쿨을 졸업하였고, [[다트머스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 2012년 미국 웨스트 팜 비치에서 열린 ‘WC 선샤인챌린지 국제마장마술 그랑프리’ 스페셜 종목에서 65.022% 획득, 3위 마크함. 서정균 갤러리아 승마단 감독이 1988년 CDI 아켄대회에서 세운 기록을 24년 만에 뛰어넘으며 한국선수 역대 최고 성적 기록<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382&aid=0000029476 스포츠동아 김동선 국제마장마술 3위…한국선수 역대 최고 성적 2012-01-31]</ref>
         *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학사|A.B.]] [[졸업]]
  • 김동선 (승마선수)
         미국 태프트 스쿨을 졸업하였고, [[다트머스 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 2012년 미국 웨스트 팜 비치에서 열린 ‘WC 선샤인챌린지 국제마장마술 그랑프리’ 스페셜 종목에서 65.022% 획득, 3위 마크함. 서정균 갤러리아 승마단 감독이 1988년 CDI 아켄대회에서 세운 기록을 24년 만에 뛰어넘으며 한국선수 역대 최고 성적 기록<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382&aid=0000029476 스포츠동아 김동선 국제마장마술 3위…한국선수 역대 최고 성적 2012-01-31]</ref>
         *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학사|A.B.]] [[졸업]]
  • 김동진 (1938년)
         * [[1970년]]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문학]][[석사]]
         * [[1973년]]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졸업]]
         [[분류:193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광산 김씨]][[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기계화학교 동문]][[분류:조지타운 대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분류:대한민국 육군 대장]][[분류: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 직무대리]][[분류: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한경대학교 교수]][[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하나회]][[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
  • 김리나 (1942년)
         * [[미국]] [[하버드 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인문학|인문과학]] [[석사]], 인문과학 [[박사]])
  • 김만제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미국]]으로 유학가서 덴버 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를 졸업하고 [[미주리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를 졸업하였다.
  • 김미화(코미디언)
         2002년 [[미군 여중생 압사 사건|두 여중생이 미군 장갑차에 치여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앞장서서 촛불시위를 이끌기도 했다. 여중생 압사사건 무죄 판결이 난 직후 이에 항의하는 방송 예술 연예인들이 항의 기자회견을 열었고, 김미화는 모두 발언을 통해 부시 미국 대통령의 사과, 소파 개정 등을 촉구했다.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967|#]]
         자녀들이 [[일진|학생들의 돈을 뺏는 것]]을 보자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는데, 자식들이 미국 헐리우드 배우가 되어 돈 좀 땡겨오기를 바랬다고 한다.
         === "카페 호미" 미국산 소고기 사용, [[내로남불]] 논란 ===
         카페 호미는 김미화가 운영하는 카페/레스토랑인데, 2008년 7월 8일 서울 MBC본사 광장에서 열린 제62차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와 방송장악 저지를 위한 촛불문화제>에 참여한 과거가 있으면서 자신이 운영하는 가게에서는 '''미국산 소고기'''를 사용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http://news.joins.com/article/21796942|논란이 되었다.]]
         논란 후에도 여전히 ''''고급 미국산''''[* 메뉴판 문구에 이렇게 적혀있었다고 한다.] 소고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http://monthly.chosun.com/client/mdaily/daily_view.asp?idx=1555&Newsnumb=2017091555|참고]]
         미국 수입산 쇠고기를 청산가리에 비유한 것으로 유명한 김규리와 비슷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김규리(1979년 10월)|김규리]]는 '(30개월 이상 된) 미국소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넣겠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문제는 2008년에 라스베가스에서 미국산 소고기를 사용하는 인앤아웃 햄버거를 먹고 있는 장면이 [[Mnet]]에 나왔고, 캡쳐가 발굴되면서 큰 비판을 [[http://news.donga.com/List/3/0900/20080703/8597725/1|받았다.]]
         사실 관계 따위는 안중에 없고, 정치적 문제를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 도구로 사용하다 쓸모가 없어지면 토사구팽하는 일부 연예인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녀는 열성적으로 [[광우병]] 선전을 하던 사람중 한 명이었다. 그래놓고 시간이 지나자 자신이 광우병 있다고 주장한 미국산 소고기를 사용하는 모습은 중도, 보수측에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행위다.
         참고로, '''그녀의 두 딸 모두 미국 명문대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딸들을 미국산 소고기 천국인 [[미국]]으로 유학 보낸 것.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608182016105810|참고]]
         거기에다 중계 중 [[아프리카]]권 선수를 향해 '[[눈(날씨)|눈]] 구경을 못했을 것'이라는 '''[[인종차별]]적, 비하적 발언'''을 해서 논란이 일었다. 아프리카나 중동에도 눈이 내리고, 모로코나 남아공 등에는 스키 관광지도 있다[* 심지어 [[레바논]]도 눈은 온다.]. 세계적인 대회인 올림픽은 마음대로 출전할 수 있는 대회도 아니며 출전하는 선수들은 빙상이건 설상이건 열심히 연습하고 준비해 나오는 대회다. 자국의 여건이 좋지 못하면 동계 스포츠 여건이 갖춰진 타국에서라도 훈련했을 것이므로, 눈이나 얼음 구경 한번도 못 했을리 만무하다. 사실상 실언 수준을 넘어 '''[[망언]]''' 수준이다. 마찬가지로 평창 올림픽 중계 중 여러 망언들로 구설수에 오른 [[NBC(미국 방송)|NBC]]와 다르지 않다.
  • 김민서(배우)
         2018년 5월 17일에 결혼했다. 남편이 일하는 [[미국]]에서 당분간 있을 거라고 한다.
  • 김민전
         *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 박사
  • 김민찬 (1958년)
         [[2014년]] 9월부터 2017년 2월까지 [[원광디지털대학교]] 자연건강학과 이학 석사, 2014년 10월부터 2016년 1월까지 [[미국]] [[템플턴 대학교]](Templeton University)가 무허가 대학인줄 모르고 상담심리대학원 상담심리학 석사 과정에 재학했으며 [[2016년]] 1월부터 현재까지 미국 템플턴 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 박사 과정에 재학 했으나 해당 대학은 무허가 대학으로 밝혀졌다. [[2017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여 기호 15번을 부여받았다. 대통령 선거 토론에서 남침땅굴이 있다고 주장하기도했다.
         *미국 템플턴 대학교 상담심리대학원 심리치료코스교육과정 수료
         [[분류:195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진대학교 교수]][[분류:서경대학교 교수]][[분류:호원대학교 교수]][[분류:국민대학교 교수]][[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호서대학교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학력 위조 의혹 피해자]][[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문]][[분류:원광디지털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후보]]
  • 김민희(1982)
         현재 [[홍상수]]와 함께 [[미국]]에서 지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같이 있어?~~ 두 사람이 [[중혼]]이 합법인 [[유타 주]]에서 비밀 결혼을 올릴 예정이라는 기사가 나온 적이 있으나 이것은 오보로, 당연히 [[미국]] 내 50개주 모두 중혼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동거]]라면 모를까 결혼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후술하겠지만, [[미국]]에서 크게 논란이 되었던 <Sister Wives>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모 [[몰몬교]] 일가의 [[일부다처제]] 허용 신청에 대해, 판사가 "법을 위반한 게 아니다"라는 말로 사실상 중혼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것 때문에 오해를 불러 일으킨 것. 애초에 이 판결은 이후 뒤집혔다. 어차피 재판 자체가 기각되었어야 할 사안이었고, 해당 사건 담당판사 역시 논란이 많은 인물인지라, 판사는 거의 전방위로 비판을 받았다. [[여담]]으로 [[유타 주]] 내의 중혼 금지 관련 규정이 더욱 강화될 예정이라 한다. 애초에 2013년 [[유타 주]] 연방지법의 [[중혼]]관련 판결은 중혼을 허용한 것이 아니라, 그간 [[유타 주]]에서 금지되어 있던 부부+[[사실혼]] 관계 여성의 동거를 금지한 유타주 법조항이 위헌이라고 판결을 내린 것이다. [[홍상수]]와 김민희가 유타 주에 간들 결혼을 못하는 것은 당연할 뿐더러, 애초에 그들은 해당사항이 아니다. 또한 이 판결이 2016년 항소법원에서 무효판결이 나온 것의 근거는 유타주가 애초에 이런 종류의 동거집단이 범죄행위와 연류되지 않을 경우 기소를 하지 않는다는 유타주 검찰청의 정책으로 인해서 사실상 원고들이 피해를 볼 일이 없다는 근거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유타의 중혼관련 법이 강해지기는 힘들 것이다. 애초에 이런 법 자체가 [[몰몬교]]에 시달려온 유타주의 독특한 사례이기도 하고.]
  • 김범룡
         | 배우자 = 크리스 강([[미국]] 교포 출신)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82년 데뷔]][[분류:과천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경기대학교 동문]][[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
  • 김병세
          | 학력 =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롱비치 교|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산업공학과]] [[학사]]
         1962년 [[경상북도|경북]] [[예천군]] 출신이다. 졸업한 후 으로 이주하여 [[:en:California State University|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를 졸업한 뒤 [[1986년]] [[미국]]에서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1987년]] [[뮤지컬 배우]] 데뷔 이후 [[1990년]]까지 [[미국]]에서 [[연극배우]] 겸 [[뮤지컬배우]] 활동하였고 [[1990년]]부터 [[대한민국]]에서 [[연극배우]] 활동하다가 [[1993년]]에 장길수 감독의 영화 《웨스턴 애비뉴》의 조연으로 [[영화배우]] 데뷔하였다.
         *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롱비치]] 산업공학과 학사
         [[분류:미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김해 김씨]][[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롱비치 동문]][[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김서형(배우)
         그 외에도 예능 프로그램에도 진출한 적이 있었다. 대표적으로는 [[런닝맨]]이며, 이후 [[skyTravel]]의 여행 예능 프로그램인 '''나 혼자 간다, 여행'''의 여배우 특집 편으로 [[이탈리아]]의 [[로마]]를 주로 다녀 온 사실도 있었으며, 로마와의 관계는 보통 [[로마의 휴일]]이라는 이 영화와도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다른 배우는 [[전소민]]이 [[프랑스]]를, [[윤진서]]는 [[미국]]의 [[시애틀]]을 각각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 김석원 (기업인)
         [[쌍용그룹]]을 창업한 [[김성곤 (1913년)|성곡 김성곤]]과 김미희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를 졸업하고 [[미국]] [[:en:Franklin Pierce University|플랭클린 피어스 대학교]]를 졸업하였다.[[1975년]] [[2월 25일]] 아버지 김성곤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만 29세의 나이로 [[쌍용그룹]] 회장이 되었다. 1986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여 [[쌍용자동차]]가 되었다. [[1996년]] [[제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후보로 당선되었으나 이듬해인 1997년 IMF 외환위기로 [[쌍용그룹]]이 해체되자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였다.
  • 김선길(국회의원)
         1934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 에서 태어났다. 음성중학교, [[경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3학년 재학 중 [[미국]]으로 [[유학]]가서 스태슨 대학교 정치학과,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김선아
         * [[1993년]]에 홀로 [[미국]] [[인디애나주]]에 위치한 [[볼 주립 대학교|볼 주립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경험이 있어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다.
         * [[1996년]] 여름, 미국에서 잠깐 한국으로 놀러왔다가 모델로 픽업되어 연예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김성수 (1891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결을 목적으로 설립된 [[파리강화회담]]에서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약소국 국민들의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한 사실이 한반도에도 알려지면서 이를 접하고 독립운동을 준비했다.<ref name="동아일보"/> 민족자결주의에 감화된 김성수는 [[독립운동]]에 투신을 결심, 어릴때부터 오랜 친구였던 고하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를 학교 학감직에 임명한 뒤 [[1919년]]초 그에게 [[학교장]]직을 넘기고, 이때부터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이어 송진우의 도움을 받아 함께 일본 [[도쿄]]에 연락 동경 조선 유학생들과 기맥을 통하여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1918년]]부터 중앙학교 숙직실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다가 송진우 등의 가담으로 중앙학교 교장직을 맡긴 후 주로 중앙학교 숙직실에 모여 비밀리에 추진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autogenerated3 />
         [[1918년]] 12월의 어느 날 미국으로부터 [[이승만]]이 보낸 밀사가 송진우와 김성수를 찾아왔다.<ref name="in123">최시중(편저), 《인촌 김성수 : 인촌 김성수의 사상과 일화》(동아일보사, 1985), 123쪽</ref> 이승만의 밀사는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론의 원칙이 정식으로 제출될 이번 강화회의를 이용하여 한민족의 노예 생활을 호소하고 자주권을 회복시켜야 한다. 미국에 있는 동지들도 이 구국운동을 추진시키고 있으니 국내에서도 이에 호응해주기 바란다.<ref name="in123"/>"는 내용의 밀서를 전해주었다.<ref name="in123"/> [[이승만]]은 밀서를 통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선언을 계기로 해외에 알릴만한 거사를 하라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송진우는 이승만 밀서를 되돌려보냈다.
         [[1919년]] 10월에는 중앙상공주식회사와는 별도로 근대 [[자본주의]]적 회사인 [[경성방직]]을 창설하여 운영하였다.<ref name="동아일보"/><ref name="기념">《인촌기념회》[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_think1.html 사상과 일화 - 기업운동] {{웨이백|url=http://www.inchonmemorial.co.kr/incho_think1.html# |date=20070812233739 }}</ref> [[일본]]의 방직회사들과의 경쟁을 위해 대량 생산과 소량의 고품질 생산 등의 기법을 구사하였다. 그는 당시 조선의 기술로는 [[일본]]의 신식 기술과 경합하기 어렵다 판단하고 [[일본]] 방직기계와 [[미국]]의 방직 기계를 도입하였다. 도입한 기계의 성능을 그는 직접 일일이 시험한 뒤 공장으로 보냈다.
         [[미국]]과 [[일본]]의 기계를 도입함으로써 옷감의 생산량은 증가하였다. 이는 그가 동시에 경영하는 의류회사 중앙상공의 의류 생산과 다른 의류업체에 납품하는 물량 역시 증가하였고, 3년만에 소수에 불과하던 국내 옷감, 의류시장의 50% 이상을 점유했다.
         [[1930년]] 미국, 유럽으로 여행, [[1931년]] 세계일주를 마치고 귀국했다. 이 때부터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등과 함께 농촌 계몽운동인 [[브나로드 운동]](v narod movement)을 주도했는데 브나로드 운동이란, 러시아 어로 '민중 속으로'라는 뜻이다. [[1931년]] 7월 [[동아일보]]는 "배우자, 가르치자, 다 함께"라는 기치를 내걸고 브나로드 운동이라 불리는 농촌 계몽 운동을 주도했다.
         {{출처|날짜=2013-09-06|한편 그는 [[1941년]]부터 [[이승만]]이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에 출연하자, [[송진우 (정치인)|송진우]], [[여운형]], [[안재홍]], [[장택상]], [[윤치영]] 등과 함께 미국의 소리 단파방송을 비밀리에 청취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권고가 있었으나 그는 창씨를 거절했다. [[1942년]] 이후 그는 요시찰인물 2급으로 분류되어 감시와 내사를 당했다.}}
         [[1946년]] 10월 [[미군정]]의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47년]] 1월에 반탁독립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1947년]] [[3월 12일]] [[미국]]의 [[해리 S. 트루먼|트루먼]] 대통령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자, [[한민당]] 위원장이었던 그는 [[트루먼]]에게 찬사를 표하는 무선 전보를 보냈다. 이후 김성수는 [[한민당]]과 미군정청의 제휴에 노력을 기울였다.
         {{인용문|나는 그가 도착한 날 밤에 교민단(僑民團)의 환영회를 열고 그를 교포들에게 소개했다. 그리고 그날 밤, 그의 뜻대로 값싼 호텔을 잡아 함께 밤을 보내며 서로의 생각과 뜻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귀중한 기회를 가졌다.<ref name="heo192"/> [[허정]]이 미국을 떠나 귀국했을 때 그는 허정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그 동안의 노고를 위로하며 국내 인사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ref name="heo192"/>}}
  • 김성재 (가수)
         [[듀스]] 해체 이후, 김성재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1995년11월 19일 첫 솔로앨범 '[[말하자면]]'을 발표, [[SBS]] 《'생방송 TV가요 20'》에 출연하였다. 공연을 끝내고 당시 숙소였던 [[서울특별시|서울]] [[서대문구]] 의 스위스 그랜드 호텔(현 그랜드 힐튼 호텔 서울)로 돌아왔고, 다음 날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ref>{{뉴스 인용
         김성재 첫 솔로 활동을 위해 미국 흑인 백댄서들과 함께 미국에서 귀국.
         김성재 미국 흑인 백댄서들과 함께 [[SBS]] 《'생방송 TV가요 20'》에서 첫 솔로곡 "[[말하자면]]"을 발표. 공연을 끝낸 후, 백댄서들과 함께 [[서울특별시|서울]] [[서대문구]] 의 스위스 그랜드 호텔(현 그랜드 힐튼 호텔 서울)로 돌아옴. 당시 김성재의 숙소에는 매니저와 백댄서, 흑인백댄서 2명과 여자친구 등 총 9명이 묵었음.
         당시 김성재의 오른팔에는 육안으로 확인 가능한 주사자국이 4개가 있었는데, 이후 검시의에 의해 11개가 더 발견되었고, 부검의에 의해 13개의 자국이 더 발견되면서 총 28개의 주삿바늘 자국이 확인되었다. 또한 김성재의 시신에서는 동물마취제 졸레틸(미국명 테라졸)이 검출되었다.
  • 김성환 (1953년)
         * [[2001년]] 외교통상부 북미국 국장
         * [[2000년]] 외교통상부 북미국 심의관
         * [[1997년]] 주[[미국]]대사관 참사관
         * 주미 1등 서기관, 북미국 심의관, 북미국장을 섭렵한 대표적 북미 라인이다.
         * 1985년부터 2년간 [[영국]] [[런던대]]에서 러시아어와 러시아 정치학을 공부하고 주러시아 1등 서기관과 동구과장을 역임해 미국과 러시아에 모두 정통한 외교관으로 평가받고 있다.<ref>[http://news.mk.co.kr/v3/view.php?year=2010&no=530627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 내정자는 누구?(국민일보,2010.10.1]</ref>
  • 김세의
         [[2007년]] [[2월 20일]] 김세의 기자는 [[노무현]] [[대통령]] 임기말 1700억원의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예산을 들여 도입된 [[대통령]] 전용헬기 사업에 큰 문제가 있다는 고발 보도를 했다.<ref>{{뉴스 인용|url=http://imnews.imbc.com//replay/2007/nwdesk/article/1501884_18813.html|제목=<단독> 반쪽짜리 대통령 전용 헬기|성=|이름=|날짜=2007년 2월 20일|뉴스=|출판사=MBC 사회|확인날짜=|확인날짜=2008년 4월 25일}}</ref> 이 사업은 기존의 [[대통령]] 전용헬기인 VH-60 [[블랙호크]]를 대체하는 S-92 [[슈퍼호크]] 3대를 [[미국]]의 [[시코르스키]]사로부터 들여오는 것인데, [[적외선]] 야간 감지 장비인 플리어(FLIR)가 장착되어 있지 않아 날씨가 흐린 상태이거나 해가 진 이후에는 안전상의 이유로 헬기가 뜰 수 없기 때문에 예산 낭비라는 것이다.<ref>{{뉴스 인용|url=http://imnews.imbc.com//replay/2007/nwtoday/article/1502456_18819.html|제목=방위사업청, 대통령 전용 헬기 밤에 뜰 일 없다?|성=|이름=|날짜=2007년 2월 22일|뉴스=|출판사=MBC 사회|확인날짜=|확인날짜=2007년 2월 22일}}</ref> 김세의 기자는 [[적외선]] 야간 감지 장비인 플리어를 결정하면서 [[방위사업청]]과 [[삼성]] [[탈레스]] [[항공사]] 사이의 계약 과정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자세히 지적했고 적지 않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ref>{{뉴스 인용 | 제목 = '책임 가려내라' 황당한 반쪽짜리 대통령 전용헬기 | url = http://www.dcinside.com/webdc/dcnews/news/news_list.php?code=ahh&id=192562&curPage=&s_title=&s_body=&s_name=&s_que=&page=1 | 출판사 = 디시뉴스 사회 | 날짜 = 2007년 2월 21일 | 확인날짜 = 2007년 2월 21일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70307035310/http://www.dcinside.com/webdc/dcnews/news/news_list.php?code=ahh&id=192562&curPage=&s_title=&s_body=&s_name=&s_que=&page=1# | 보존날짜 = 2007-03-07 | 깨진링크 = 예 }}</ref><ref>{{뉴스 인용| 제목 =<한나라당> 한나라당 논평, 국민혈세 1700억원이 낭비된 멍텅구리 대통령 전용헬기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23&oid=156&aid=0000001598 | 출판사 = 연합뉴스 보도자료 정치 | 날짜 = 2007년 2월 21일 | 확인날짜 = 2007년 2월 21일}}</ref><ref>{{뉴스 인용| 제목 = "대통령 새 전용헬기, 밤.흐린날 이용 못해" - MBC 보도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3&aid=0000321007 | 출판사 = 뉴시스 사회 | 날짜 = 2007년 2월 21일 | 확인날짜 = 2007년 2월 21일}}</ref>
         *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 연구원 과정 수료
  • 김소희 (쇼트트랙 선수)
         [[정화여자고등학교]] 1학년 때, [[1992년]] [[미국]] [[덴버]]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종합 우승을 차지하였다. [[정화여자고등학교]] 3학년 때 참가한 [[1994년 동계 올림픽|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 올림픽]]에서 [[전이경]] 등과 함께 여자 3,000m 계주에 출전하여 [[금메달]]을 획득하였으며 1,000m 개인전에서는 [[동메달]]을 땄다. [[1994년]] [[영국]] [[길퍼드]]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서는 종합 2위에 올랐다.
         이후, 고질적인 허리 부상으로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1997년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쇼트트랙]] 여자 1,000m에서 금메달을 딴 뒤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153531 쇼트트랙 김소희 은퇴] - 연합뉴스</ref> [[계명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웨스턴일리노이대학(Western Illinois University)에서 스포츠마케팅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서울대학교]]에서 [[2012년]]에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위원회 홍보위원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현재는 [[서울대학교]] 스포츠산업연구소 주임 연구원 및 [[대한체육회]] 국제위원회 위원, [[아시아올림픽평의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를 위한 현장 실사에도 나섰다.
  • 김수진 (1977년)
         * [[1998년]] 《[[피트 몬드리안]]과 [[마르셀 뒤샹]]의 [[미국]] [[미술]] 개혁》
  • 김수철 (범죄인)
         </ref>. 이 사건을 계기로 [[조선일보]]는 들의 학교 보안이 어떠한가를 보도하였다. [[미국]], [[프랑스]], [[호주]]의 경우에는 학부모조차도 쉽게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같은 지역에 사는 학생들끼리 집단으로 하교(下校)하고, 단체 하교에서 빠지더라도 부모나 미리 정해진 보호자 없이 혼자 보내지 않는다고 한다<ref>{{뉴스 인용
  • 김수환(추기경)
         이후 장면은 김수환이 [[일본]] [[조치 대학]][* [[가톨릭]] [[수도회]]인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 예수회는 한국에서 [[서강대학교]]도 운영하고 있다.]으로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김수환 추기경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김 추기경은 "장면 총리의 시복시성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존경심을 표했다.
         군사정권 시절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인천교구]]장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나길모]]([[미국인]]) 주교, [[안동교구]]장 [[두봉]]([[프랑스인]])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주교)|김재덕]]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활동하였다. 또한 다른 성직자보다 높은 권위가 있는 추기경으로서 많은 방면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다. 1971년 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성탄절 [[미사]]에서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발언을 마침 듣고있던 박정희가 매우 격노했으나, 날이 밝자 [[대연각호텔 화재|세계구급 화재]]가 발생하면서 묻혔다.]
         애초에 김수환 추기경은 강제징집이었던만큼 자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는 근본적인 원인부터 다르긴 했다. 비록 사관후보생으로 강제징집되기는 했지만 훈련과정에 들어있던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해서 낙오하는 형식으로 [[장교]]로 임관을 하지도 못했으며,[* 강제징집 당시 훈련소의 고위간부와 면담형식으로 사상검증을 하였는데, [[일본]]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하여 통과하지 못했다고 한다. 당연히 이런 위험한 발언을 한 김수환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임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입장이었지만, [[일본군]] 측에선 당장 죽이기보다는 최전방 보초역으로 배치하고 그냥 내버려두면 [[미군]] 폭격에 휘말려 알아서 죽을 것으로 생각해 [[차도살인]]처럼 크게 손을 안 댔던 걸로 보인다. 실제로 이 발언 이후 일본군 장교들에게 좀 맞았다고 한다.] 다시 밑바닥 계급인 [[병사]]로 재징집되면서 일본 남단의 섬에서 미국의 군함이나 폭격기가 오는지 감시하는 보초임무만 맡았다. 당시의 일본군은 대학에 다니는 학생들을 고급인력으로 분류하고 조선인/일본인의 구분없이 모두 다 사관후보생으로 강제로 밀어 넣었는데, 대학을 다니는 엘리트들을 공들여 키워서 일본 본토에서 장교로 활동하게 만드려는 못된 의도가 있었다.
  • 김슬기 (1991년 10월)
         | '''[[2013년]] [[11월 4일]] ~ [[2013년]] [[11월 18일]]''' || '''[[SBS]]''' || '''월드 챌린지 우리가 간다''' || 5,6,7회 || [[미국]] 아내 업고 달리기 대회 || 출전선수([[전현무]]의 파트너)<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311182124519610 전현무 체력방전 불구 김슬기 업고달리기 완주 감동(우리가간다)]</ref>
  • 김연경(배구선수)
         [[2012 런던 올림픽]]에서도 역시 맹활약했다. 조별리그-8강전 6경기 동안 평균 27.5점을 거두며 세계 최고의 공격력을 보였다. 게다가 김연경이 막힐 때마다 [[한송이(배구)|한송이]], [[김희진(배구선수)|김희진]], [[양효진]] 등이 10점 중후반 대의 점수를 올려주면서 ''''김연경과 아이들'''' 이나 다름없는 여자배구 국대팀을 밸런스를 갖춘 단단한 팀으로 만들어갔다. 결국 2012년 8월 7일(현지시각) [[이탈리아]] 전에서 3-1로 이기며 [[1976 몬트리올 올림픽]] 이후 36년 만에 여자배구 국대팀을 4강에 진출시켰다. 하지만 4강전에서 [[미국]]에게 지고 3, 4위전에서 과거 '김연경과 아이들' 시절의 경기력으로 회귀해 버리는 바람에[* [[양효진]]과 [[한송이(배구)|한송이]]는 체력이 떨어져서, [[김희진(배구선수)|김희진]]은 경험이 부족해서 고전했다.] 올림픽 4위로 마감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리고 '''2위와 40점차'''로 [[http://www.london2012.com/volleyball/event/women/statistics/type=player-scorers/index.html|득점 1위]].
         ||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 패배 후[* 이틀 전 미국과의 경기에서 패한 후 인터뷰에서 “눈물이 날 뻔 했는데 참았다. 메달을 따면 울겠다”라고 말했던 김연경이었다. 코트 위에서 울지는 않았지만 끝나고 라커룸에 들어간 후 지인들이 보내준 메세지를 읽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 김영균 (1966년)
          | 학력 =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일리노이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 [[미국]] [[일리노이 대학교|일리노이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분류:196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김해 김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사진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경희사이버대학교 교수]][[분류:세종사이버대학교 교수]][[분류:마포중학교 동문]][[분류:경성고등학교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일리노이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육군 군인]][[분류:삼성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국민의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김영나
         '''김영나'''(金英那, [[1951년]] [[4월 7일]] ~ )는 [[대한민국]]의 [[미술사학|미술사학자]]이다. 본관은 [[전주 김씨|전주]](全州)이다. 고고학자 [[김재원 (고고학자)|김재원]](金載元)의 셋째딸이며 [[고고학|고고]][[미술]][[역사학|사학자]] [[김리나 (1942년)|김리나]](金理那)는 큰언니이다. [[미국]] [[뮬렌버그 대학교]]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현대미술|현대미술사]]를 전공하였다.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회장, 한국미술사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에서 201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역임하였다.
         * [[미국]] [[뮬렌버그 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 [[미국]]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인문학|인문과학]] [[석사]], 인문과학 [[박사]])
         * 2001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
  • 김영나 (1951년)
         '''김영나'''(金英那, [[1951년]] [[4월 7일]] ~ )는 [[대한민국]]의 [[미술사학|미술사학자]]이다. 본관은 [[전주 김씨|전주]](全州)이다. 고고학자의 셋째딸이며 [[고고학|고고]][[미술]][[역사학|사학자]] [[김리나 (1942년)|김리나]](金理那)는 큰언니이다. [[미국]] [[뮬렌버그 대학교]]와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현대미술|현대미술사]]를 전공하였다.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회장, 한국미술사교육학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2011년에서 2016년까지 [[국립중앙박물관]] 관장을 역임하였다.
         * [[미국]] [[뮬렌버그 대학교]] 미술학과 졸업
         * [[미국]]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오하이오 주립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인문학|인문과학]] [[석사]], 인문과학 [[박사]])
         * 2001 미국 하버드대학교 객원연구원
  • 김영옥 (배우)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미국 로스앤젤레스 <br/> (現 [[대한민국]] [[부산광역시]] [[중구 (부산광역시)|중구]] 동광동5가 (중구로148번길))
         2004년 [[KBS 2TV]] 《[[올드미스 다이어리]]》에서 욕쟁이 [[할머니]]로 욕 대결을 하는 장면에서 '할미넴([[미국]]의 [[래퍼]] [[에미넴]]과 할머니의 합성어)'이라는 별명을 얻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1&aid=0000433898 '헬머니' 김수미 "할미넴 김영옥과는 절친"] 엑스포츠뉴스. 2015년 01월 29일</ref> 2015년 영화《[[헬머니]]》에 무당할매로 등장해 [[김수미]]와 욕배틀을 벌여 눈길을 사로잡았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058487 '할미넴' 김영옥, 네티즌 UCC 영상 화제] 마이데일리. 2010년 01월 29일</ref>
  • 김영환 (1921년)
         이후 전쟁을 수행하면서 수많은 전공을 거둬 [[1951년]] [[충무무공훈장]]을 비롯해 [[1952년]] [[미국]] [[비행 훈장]], 공비토벌기장, 한국 전쟁 종군기장을 수여받았고, [[1953년]]에는 대통령수장과 [[을지무공훈장]]을, 그리고 [[1954년]]에는 대통령수장과 유엔종군기장, [[미국]] [[공로 훈장]]을 각각 수여받았다.
         * [[미국 공군참모대학교]] [[졸업]]
         [[분류:1921년 태어남]][[분류:1954년 죽음]][[분류:항공 사고로 죽은 사람]][[분류:추락사한 사람]][[분류:대한민국 공군 준장]][[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군사영어학교 동문]][[분류: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조선경비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연희전문학교 동문]][[분류:간사이 대학 동문]][[분류:육군참모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미국 공군참모대학교 동문]][[분류:충무무공훈장]][[분류:을지무공훈장]][[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경주 김씨]]
  • 김영희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
         |[[미국]] [[레이크플래시드]]
  • 김완섭
         그는 한국 사회의 애국주의, [[쇼비니즘]]을 꾸준히 비판해왔고, 인터넷에서는 그의 주장에 동조하는 층과 비난하는 층으로 나뉘게 되어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화제 인물로 등장한 이후에는 [[일본]], [[미국]] 등 외국 언론의 방문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국민일보]]와의 2006년 인터뷰에서는 [[안중근]] 의사를 민족의 원수라고 하는 이유에 대해, 조선을 개혁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은 즉 의사가 아닌 폭도이며, 이토는 평화주의자인데다 조선의 병합을 바라지 않았는데 이토가 죽어서 일본 정부에 군부 득세를 가져왔고 이는 결국 조선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졌으니 안중근은 민족의 원수라는 주장을 하였다. 또한 자신은 한국인들이 잘못 알고 있는 진실을 알려주고 싶을 뿐인데 한국인들은 수준이 낮아 내 주장이 담긴 책도 읽지 않고 욕부터 한다고도 답변하였다.<ref name="서울대1"/> 이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 측에서는 [[명예훼손]]은 직계후손만 가능하여 미국에 있는 안웅호의 연로 등 한국에 귀국할 수 없는 상황이라 고소는 불가능 상황이라고 한다.<ref>[http://www.patriot.or.kr/05.community/submenu5701.php?ptype=view&idx=6012&page=1&code=free&searchopt=subcon&searchkey=%B1%E8%BF%CF%BC%B7 안중근 열사를 욕하는 내용이 있으면 법적 처벌 불가능?]{{깨진 링크|url=http://www.patriot.or.kr/05.community/submenu5701.php?ptype=view&idx=6012&page=1&code=free&searchopt=subcon&searchkey=%B1%E8%BF%CF%BC%B7 }} 안중근의사 기념관 질응답 2006년 8월 16일</ref>
  • 김용국 (군인)
         |서훈 내역=대한민국 충무무공훈장 <br /> 미국 동성훈장
         [[1962년]]부터 [[1969년]]까지 해병대 기획참모부장(1962년), 해병 포항기지 사령관 겸 진해기지 사령관(1964년), [[대한민국 국방부]] 기획국장(1965년), 해병대 부사령관(1969년)을 차례로 역임했으며 [[1970년]] [[9월 25일]] 해병대 소장으로 예편되었다. 예편 이후에 동신화학공업(東信化學工業)주식회사 부사장을 역임했고 [[1972년]] 12월 [[통일주체국민회의]] 초대 대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충무무공훈장]]과 [[미국]] 동성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 김용국 (야구인)
         그는 은퇴하면서 [[현대그룹]]의 [[대한민국의 실업 야구|실업 야구단]] [[현대 피닉스]]에서 [[1996년]]부터 바로 수비 코치를 맡았다. 1년 뒤엔 프로 구단 [[현대 유니콘스]]로 발령나기를 기다렸으나 도리어 재계약 불가 통보를 받았고, 실망감을 안은 채 어린 두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무작정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ref name="imaeil" />
         [[1997년]] 그는 무보수 방문 코치로서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의 루키 리그 야구단 [[헬레나 브루어스]] ([[:en:Helena Brewers|Helena Brewers]])에서 코치로 있다가 그해 9월 마이너 리그 내의 교육 리그, [[애리조나 폴 리그]] ([[:en:Arizona Fall League|Arizona Fall League]])에 속해 있던 야구단 [[메사 솔라 삭스|선 시티즈 솔라 삭스]] (Sun Cities Solar Sox; 現 메사 솔라 삭스 [[:en:Mesa Solar Sox|Mesa Solar Sox]])에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255979 <프로야구>김용국, 애리조나 폴리그 코치 영광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한 달간 경험을 쌓은 뒤 다시 밀워키 브루어스 산하의 싱글A 야구단 [[스탁턴 포츠]] ([[:en:Stockton Ports|Stockton Ports]])에서 수비 및 주로 코치로 일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294321 <프로야구> 김용국, 미국 프로야구 지도자로 데뷔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1998년 말, 1년간 그를 지켜본 [[스탁턴 포츠]]는 그에게 연봉 3만 달러를 제안함과 동시에 1999 시즌부터 정규 시즌 코치로 일할 것을 제안하였다. 1999 시즌이 끝난 뒤엔 연봉이 3만 5천 달러로 오르면서 트리플A 야구단 [[인디애나 인디언스]] ([[:en:Indianapolis Indians|Indianapolis Indians]])의 코치로 승격되었다. 2000 시즌 도중에는 [[스카우트]] 자격으로 한국에 2주 동안 출장을 오기도 했는데, 그때 한국의 4개 프로 구단으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았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코치에 도전해 볼 생각도 있었으나 [[LG 트윈스]]의 강력한 러브콜로 인해 국내 복귀를 택했다.<ref name="imaeil" />
  • 김용만(코미디언)
         <한바탕 웃음으로> 등 KBS 개그 프로그램에서 모습을 보였으나, 희극인실 선배들과의 마찰로 [[김국진]], [[김수용(코미디언)|김수용]], [[박수홍]] 등과 함께 자진 방출의 길을 택했다.(일명 '''감자골 4인방''') 이후 김국진과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마치고 [[문화방송|MBC]]로 복귀.
  • 김우중
         [[1960년]] 25세에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6년]]까지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가, [[1967년]] 32세에 [[서울특별시|서울]] [[충무로]]에서 [[대우실업]]을 설립했다. 자본금은 500만원이었지만, [[동남아시아]],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여 [[1970년대]] 초반부터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하며 [[1974년]]에 1억불의 수출탑을 달성하는데 성공하며 신흥 재벌이 되었다. [[1981년]]에 스스로 회장의 자리에 올랐다. [[1982년]] [[1월]]에는 (주)[[대우]]를 출범시키며 재계 4위에 올랐다.
  • 김운용
         김운용은 연희전문대(현재의 [[연세대학교]]) 학생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고, 미국 보병학교로 세 차례 군사유학을 다녀오며 익힌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1군사령관 [[송요찬]]의 부관으로 일했다. [[4·19 혁명]] 당시 계엄사령관인 송요찬의 부관으로 근무하였으며, 경찰의 실탄 요청을 송요찬이 거부하였다고 증언하였다.<ref>이문영,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73473.html “4·19때 경찰이 계엄사령관에 총탄 10만발 빌려달라 요청”], 한겨레신문</ref>
         * 1952년 미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 1960년 미국 텍사스 웨스턴 대학교(텍사스 대학교 엘패소, University of Texas at El Paso) 학사
         * 1976년 미국 메리빌 대학교(Maryville College) 법학박사 학위 과정 수료
         * 1963년 ~ 1968년 :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 [[유엔]] 주재 대한민국 대표부 참사관, [[영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참사관을 역임함.
         [[분류:1931년 태어남]][[분류:201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 육군 소령]][[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분류:텍사스 대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메리빌 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잉글랜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수감자]][[분류:IOC 위원]][[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동덕여자대학교 교수]][[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분류:한성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이화여자대학교 교수]][[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한국체육대학교 교수]][[분류:서일대학교 교수]][[분류:숙명여자대학교 교수]][[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분류:경기대학교 교수]][[분류:세종대학교 교수]][[분류:국민대학교 교수]][[분류:태권도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스포츠영웅 명예의 전당 헌액자]]
  • 김원진 (펜싱 선수)
         '''김원진'''(金垣晉<ref>{{웹 인용|url= http://www.sports.or.kr/download/nat_game/2010_gz_ag_pr.pdf|제목= 2010년 아시아 서울대회 대한민국 선수단 편람|출판사=[[대한체육회]]|확인날짜=2018-10-09}}</ref>, [[1984년]] [[8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은퇴한 [[펜싱]] 선수로, 현역 시절 주 종목은 [[에페]]이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를 연고로 한 LAIFC의 감독이다. 김원진은 메이저 대회 8강에 올랐으며, [[아시안 게임]]과 아시아 선수권을 두 차례씩 우승하기도 하였다.<ref name=Infostrada>{{웹 인용|url=http://fie.html.infostradasports.com/cache/2/TheASP.asp@pageid%3D8937&personid%3D611827&sportid%3D208&Cache%3D2.html?159511 |제목=Kim Won Jin |웹사이트=Infostrada Sports Group |확인날짜=2012년 11월 3일}}</ref><ref>{{웹 인용|url=http://english.yonhapnews.co.kr/asian/2010/11/18/17/6501000000AEN20101118010900315F.HTML |제목=S. Korean Kim Won-jin wins epee gold in fencing |날짜=2010년 11월 18일 |확인날짜=2012년 11월 3일 |출판사=Yonhap}}</ref> 그는 인터뷰에서 현 여자 에페 국가대표팀 감독인 심재성으로부터 서울 방식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였다.
  • 김윤정 (1869년)
         </ref>, [[1869년]] [[6월 25일]] ~ [[1949년]]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이자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경무관 재직 시절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혐의로 끌려온 [[김구|김창수]](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본명)를 심문하기도 했고, 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미국 국무부에 고종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던 [[이승만]]의 청을 거절하였다.
         인천부 경무관으로 있다가 정부유학생으로 [[미국]], [[영국]]을 유학하였으며 주미조선공사관의 3등 서기관과 1등 서기관, 주미공사 직무대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광무 8년) [[을사 보호 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당하자 귀국하여 [[태인군]] 군수, [[1906년]] [[인천부]] 부윤 겸 감리사를 역임했다.
         구한말에 관료생활을 하던 중 대한제국의 [[학부 (대한제국)|학부]]가 선발한 유학생으로 뽑혀 [[1897년]]부터 [[미국]]에 유학했다.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를 [[1903년]] 졸업한 뒤 주미공사관에 서기생으로 채용, 이후 주미한국공사관 3등 참서관, 1등 참서관, 대리공사 등을 지내며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904년 고종은 1882년 미국과 맺은 조약을 근거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밀서를 이승만을 통해 보냈다. 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로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때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밀서를 들고 온 [[이승만]](李承晩)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외면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그의 어린아들을 설득하여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했다.<ref>이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I, 하리출판, 2012, 96</ref>
         [[1945년]] 광복 이후 [[11월]] 환국한 [[김구]]를 찾아 자신이 경무관으로 김구를 심문하던 옛 인연을 대화하기도 했다. [[돈암장]]의 [[이승만]]도 찾아갔으나 [[이승만]]은 [[미국]]에 밀사 파견당시 외면한 일을 기억하여 꼴도 보기 싫다며 냉대한 후 내쫓았다.
         그는 [[서광범]], [[이범진 (1852년)|이범진]], [[이승만]], [[김규식]](金奎植), [[서재필]], [[하란사]](河蘭史) 등과 함께 초기 조선인 [[미국]]유학생의 한 사람이었다.
  • 김윤호
         | 서훈 내역 = 대한민국 금성을지무공훈장 <br/> 대한민국 을지무공훈장 <br/> 대한민국 은성충무무공훈장 <br /> 미국 공로훈장
         * [[1987년]] [[뉴욕 공과대학교|미국 뉴욕 NYIT 인문과학대학원 신문학과]] [[언론|언론학]] [[석사]]
         * [[1966년]] [[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관]] 공사.
  • 김윤환
         [[전두환]] 정권 후반기인 1985년 2월 [[노신영]] 국무총리 내각이 출범할 때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으로 입각하였다. 문화공보부 차관으로 있던 1986년 여름, [[미국]]에서 열린 국제 공보관 회의에 참석하려 갔다가 외신 기자들로부터 "[[대한민국]]의 차기 대통령은 누가 유력하냐"라는 말에 사견임을 전제로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표가 유력하다"는 발언을 한 게 문제가 되어 귀국길에 [[국가안전기획부]]에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는데[* 말 그대로 조사만 받았다. 고문을 했다거나 강압적인 수사를 한 게 아니라, 왜 그런 발언을 하게 된 것인지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김윤환 본인은 기자들이 하도 귀찮게 물어서 그냥 대충 둘러댄 거라는 식의 답을 했고 당시 특별히 수상한 뒷일 같은 것도 없었던지라 금방 풀려났다.] 1년 뒤의 일을 예언한 셈이니 훗날 붙게 될 '킹메이커'라는 별명이 진짜인 셈.
         이후 신장암 치료를 위해 [[국립암센터]]에 입원했고 미국까지 가서 투병했지만, 결국 회생불가 판정을 받고 귀국한 뒤 [[2003년]] [[12월 15일]]에 사망했다. 향년 71세.
  • 김응수(배우)
         그 증거로 둘째 딸[* 현재 동계스포츠로 재능이 개화하였다고 라디오 스타에서 밝혔다.][* 두 딸 모두 같이 나올 때도 있었다.]과 함께 [[스타주니어쇼 붕어빵]]에 출연했었는데, 마지막 코너인 스피드 퀴즈에서 완전히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었으나 --탕갈비!-- 2012년 8월부턴 개선 중. 그리고 은근히 [[팔불출]]끼가 있는 모양. 그리고 [[딸]]이 억울한 일이 있을 때는 특유의(!?) [[외계인]]어로 딸을 약올리는 장난꾸러기 아버지라고... [[2017년]] [[가을]]에 [[이만갑]]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둘째딸이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991818|기사]].
  • 김인영 (목회자)
         [[경기도]] 출신으로 [[서울특별시|서울]]의 한영서원을 거쳐 [[피어선기념성경학원]](현 [[서울대학교]])를 졸업했다.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에서 활동하고 《신학세계》 주필을 맡았다가, [[미국]]에 유학하여 [[조지아주]] [[에모리 대학교]]에서 구약학을 전공했다.
  • 김재규
         >저의 10월 26일 혁명의 목적을 말씀드리자면 '''5가지'''입니다. '''첫 번째'''가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이 나라 국민들의 보다 많은 희생을 막는 것입니다. 또 '''세 번째'''는 우리 나라를 적화로부터 방지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는 혈맹의 우방인 미국과의 관계가 건국 이래 가장 나쁜 상태이므로, 이 관계를 완전히 회복해서 돈독한 관계를 가지고 국방을 위시해서 외교, 경제까지 보다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 국익을 도모하자는 데 있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로, 국제적으로 우리가 독재국가로서 나쁜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이것을 씻고 이 나라 국민과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명예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 5가지가 저의 혁명의 목적이었습니다.''' [[https://youtu.be/BSqOsrVdY3Y?t=12m31s|당시 실제 육성]]
         또한 당시 [[한국]]과 [[미국]]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박정희]]가 미국의 만류를 뿌리치고 강경진압을 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337787|서울에도 계엄을 내리고 군을 투입할 계획이 있었음]]을 고려하면 유혈사태로 번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김재규 역시 박정희 사망 이후 비상계엄령을 추진하려는 의도가 있었지만, 5개월 한정이라는 전재를 달았으며 부마민주항쟁 때도 유혈 진압을 비판했던 입장이기 때문에 강경한 방식으로 막가파 운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군부의 시각을 돌리기 위해 그럴싸한 핑계를 대려고 했다가 뽀록이 났다는 견해다.
         2015년 박권흠 전 의원이 김영삼과 김재규가 단 둘이 나눈 대화 내용을 한 언론매체에 공개하였는데, 당시 현직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가 야당 총재였던 김영삼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큰 인상을 남기고 있다. 1979년 김영삼은 <뉴욕타임스>와의 기자회견에서 "한국정부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과 공화당은 김영삼의 발언을 '사대주의적 망언'으로 규정하고 국회의원직 제명을 시도한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양 측을 중재하고자 김영삼에게 만남을 요청하여 실제로 만남이 이루어지는데, 박권흠 전 의원이 공개한 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http://m.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876|#]]
         가정이긴 하지만, 박정희가 살아있었다면 3저 호황을 통한 경제발전, [[핵무기]] 개발 등을 통해 [[리콴유]] 처럼 박씨 일가의 세습독재 체제를 세웠을 가능성이 높다는 주장이 있다. 육사를 나와 장교가 된 박지만은 군부를 장악하여 [[리셴룽]]처럼 젊은 나이에 장성을 지내고 나서 정계로 들어와 후계자가 되었을 것이고 박근혜는 최씨 일가의 도움으로 문화, 여성, 종교계를 장악했을 것이다. 반면, 박정희의 무리한 국가주도식 경제정책과 국민들에 대한 과도한 통제, 오랜 독재정치로 인한 선진국들과의 외교갈등 등의 요소들을 고려해보면 과연 박정희가 80년대의 격변기를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또한 당시 한국은 이스라엘처럼 미국정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국가도 아니었으며 영국, 프랑스 같은 강대국도 아니었기에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하였다고 하여 미국 등의 강대국들이 한국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해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박정희의 오랜 독재체제를 못마땅해하던 카터 대통령의 입장을 고려해봤을때 무리하게 핵무기를 개발했을 경우 국제적인 경제제재가 가해져 외교뿐만아니라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군사정권 전체적인 부분에서 보면, 박정희라는 머리가 따이면서 군사정권의 내실이 붕괴되었다. 박정희는 대통령 직선제에서 3선이나 한 인물이었다. 이후 10월 유신을 하면서 완전히 타락한 바람에 잊혀지곤 하지만, 3선을 한 자체로 어떻게든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확보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가 제거당하고 전두환이 직선제는 경험도 못한 체육관 대통령이 되면서, 군사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따라서 군사정권의 공고함이 확실히 헐렁해졌으며, 독단적으로 전방병력과 특전사를 움직이고, 정치적 정당성도 없던 결과 전두환 정권은 미국에게 극도로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미국을 너무 믿었던가
  • 김재엽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84년 하계 올림픽]]에 참가하여 결승전까지 올랐으나 [[일본]]의 호소가와 신지에게 누르기 한판패를 당하면서 은메달에 머물렀다. 하지만 1986년에 열린 [[1986년 아시안 게임|서울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다시 두각을 나타냈다. 이듬해 [[서독]] [[에센]]에서 열린 세계 유도 선수권대회에서는 1984년 올림픽에서 패배를 안겨준 호소가와 신지와 또다시 결승전에서 맞붙어 통쾌한 허벅다리걸기로 한판승을 거두면서 패배를 설욕하였다.
         1988년 [[1988년 하계 올림픽|서울 올림픽]]에서는 전경기에서 상대 선수에게 한 점도 허용하지 않으며 여유있게 금메달을 획득하였다. 경기를 앞두고 많은 전문가들은 '1987년 세계 선수권자 김재엽과 1984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호소가와 신지가 결승전에서 맞붙을 것'이라고 예상을 하였으나 호소가와가 준결승에서 미국의 무명 선수 케빈 아사노에게 불의의 일격을 당하면서 금메달의 주인공이 손쉽게 판가름났다.
  • 김재현 (1975년)
         [[2010년]] [[8월 29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경기에서 상대 [[투수]] [[김수완 (야구 선수)|김수완]]으로부터 200홈런(105m 솔로 아치)을 쳐내며 프로야구 사상 15번째 200홈런을 달성했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290133 "김재현, 역대 15번째 200홈런 달성."] 《OSEN》 2010년 8월 29일 18:12 작성, 2009년 8월 29일 18:12 확인</ref> 그리고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SK 와이번스]]의 우승으로 자신의 [[한국시리즈]] 4번째 우승을 이뤄 내면서 프로 무대 데뷔 년도 우승/은퇴 년도 우승이라는 사상 첫 기록을 세웠다. 이후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싱글 A]] 팀인 그레이트 레이크스 룬즈에서 코치연수 생활을 시작했다. [[2011년]] [[6월 25일]], [[문학야구장]]에서 열린 [[LG 트윈스|LG]] 대 [[SK 와이번스]]의 경기에서 공식 은퇴식을 하려고 했으나, 장마와 태풍으로 무산되어 [[2011년]] [[10월 1일]] [[SK 와이번스]]의 2011 시즌 마지막 홈 경기인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에서 공식 은퇴식을 치렀다.
  • 김재호 (1964년)
         * [[미국]] [[보스턴대학교]] 경영학 학사
         * [[미국]] [[테네시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 김정렬 (1917년)
          | 서훈 내역 =1951년 2월 및 1956년 12월 미국 수공훈장<br />1951년 10월 [[태극무공훈장]]<br />1954년 10월 [[을지무공훈장]]<br />1956년 4월 [[충무무공훈장]]<br />1963년 12월 수교훈장 흥인지<br />1987년 7월 수교훈장 광화대장<br />1992년 9월 1일 국민훈장 무궁화장
         [[1959년]] 어느 날 미 [[CIA]] 주요 간부 한 사람 이 당시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인 김정렬에게 [[미국]] 기관과는 별도<ref>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 3권》 (평민사, 1990) 21페이지</ref> 의 조직을 구성해야 한다며 당시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김정렬]]에게 제의해왔다.
         그는 [[미국]] 기관과 는 별도의 조직으로 운영될 [[CIA]] 지부 를 [[대한민국]]에 설치하고 싶다고 제의해왔다. 그는 [[CIA]] 지부가 설치 되면 그 요원 들에게 [[외교관]]과 똑같은 [[치외법권]]이 보장 되어 져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ref name="kimkyo22">김교식, 《다큐멘터리 박정희 3권》 (평민사, 1990) 22페이지</ref> 그러나 [[김정렬 (1917년)|김정렬]]은 쉽게 응하지 않았다. [[미국 중앙정보부]], 즉 CIA 간부라고 자신을 소개한 넬슨은 [[CIA]] 서울지부를 창설하러 왔다고 말하 는 것이었다. 어리둥절해 하는 김 장관에게 넬슨은 전임 장관인 [[김용우 (1912년)|김용우]]와 [[CIA]]부장 앨런 덜레스가 함께 서명한 협약서를 제시했다.
         김정렬은 이 제안에 대해 [[CIA]] 한국 지부가 독자적인 기관으로서 설치되는 것은 곤란하나, [[주한 미국 대사관]] 안에 적당한 자리를 마련하여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ref name="kimkyo22"/> 한미 두 나라의 정보협력에 대해서 규정한 문서였는데 김정렬은 이런 것이 있는 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넬슨은 이 협약에 따라 [[CIA]]지부를 개설하고 이 기구와 상대할 한국측 정보기관도 만들어줄 것을 요청했다.
         김정렬은 [[이후락]]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였지만 미국 [[CIA]]에서 계속 부탁하자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이승만]]은 아에 [[CIA]]를 믿지 말라면서 쉽게 허락해주지 않았다. 결국 정보기관은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의 예하에 두는 것으로 낙착된다. 김 장관이 이 문제를 [[이승만]] 대통령과 상의했더니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CIA]]지부의 창설을 허가하면서도 주의를 주는 것이었다. [[1958년]]부터 [[미국]]은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이승만]] 대통령에게 요청하였지만 [[미국]]을 불신하던 [[이승만]]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다.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에 의해 다시 발탁되어 1963년 1월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民主共和黨) 창당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해 3월부터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초대 당 의장이 되었고, 같은 해 [[주미 대한민국 대사]]가 되어 1년간 근무하고 [[1965년]] 귀국했다. 1966년 [[반공연맹]] 이사장, 1967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공천으로 전국구(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지냈다.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자신이 [[곽영주]]의 훼방으로 소장 진급이 어려워졌을 때 김정렬이 나서서 [[박정희]]를 소장으로 진급시켜준 은혜를 잊지 못했던 [[박정희]]는 자신이 정권을 잡자 김정렬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초대 당의장을 시켜준 것부터 시작해서 국가의 요직을 두루 경험하게 해줬으며 이것이 [[전두환 정권]]인 5공화국까지 이어지게 했다. 또 [[정일권]]의 후임으로 주미 한국대사를 지냈으며, 이것은 김정렬의 대사 임명에 대한 [[미국 정부]]의 [[아그레망]]이 정식으로 요청된 것이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3041600329201011&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3-04-16&officeId=00032&pageNo=1&printNo=5375&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 大使에 金貞烈씨 任命 | 날짜 = 1963-04-16 | 출판사 = 경향신문 }}</ref>
         [[1988년]] [[2월]] [[노태우]] [[대통령]] 취임과 동시에 [[국정자문회의]] 자문위원에 위촉되어 [[1991년]]까지 재직하였다. 그는 오랜 [[군인]]생활 및 [[공직]]생활로 [[을지무공훈장]]·[[충무무공훈장]]·[[태극무공훈장]]·[[수교훈장광화장]]과 [[미국]]의 [[리전오브메리트]] 훈장 등을 수여받았다. [[1989년]] [[한일협력위원회]](韓日協力委員會) 위원장이 되었다.
         * [[미국]] 리전오브메리트 훈장
         |직책 =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 미국 대사]]
         [[분류:1917년 태어남]][[분류:1992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 직무대리]][[분류:대한민국의 공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박정희]][[분류:전두환]][[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일본 아키노 육군비행학교 동문]][[분류:일본 육군예비사관학교 동문]][[분류:일본 육군항공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국방부 헌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경주 김씨]][[분류:대한민국 공군 중장]]
  • 김정렴
         * [[미국]] [[클라크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경제학]] [[석사]]
         * [[미국]] [[클라크 대학교]] 명예 [[경제학]] [[박사]]
  • 김정식 (1959년)
         이후 [[1998년]] [[영화]] 관련 공부를 위해 [[미국]]에 유학하며, 연예계 활동을 은퇴하였다. 그 후 장애인 인터넷 방송 '사랑의 소리'의 방송 본부장을 맡았으며, [[대불대학교]] 실용음악과 강사로 재직하고 현재는 사회복지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신학]]연구과정(M. Div)을 공부하여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2007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1 /><ref>http://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98337{{깨진 링크|url=http://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at_code=298337 }} '밥풀떼기' 김정식, 장애인방송 진행자 되다 - 오마이뉴스, 윤태 기자</ref>
         [[분류:서울기독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기독사랑실천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목회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성결대학교 교수]][[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분류:총신대학교 교수]][[분류: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
  • 김정재
         ||<bgcolor=pink> '''{{{#0C0C0C 학력}}}''' ||<(><bgcolor=#F6EDF8> [[포항여자고등학교]][br][[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br][[이화여자대학교]] 정치외교학 석사[br][[미국]] 프랭클린피어스대학교 법학 박사 ||
  • 김종국(가수)
         2년 후 2008년에 소집 해제되어 복귀 후 미국과 한국을 오고 가면서 앨범을 작업, 그 해 가을 복귀 앨범인 'Here I Am'을 발표한다. 이미 대한민국 대중음악계는 대변되는 아이돌 위주로 바뀌어 있었지만, 남자 솔로 발라드 가수로서 [[비(연예인)|비]]나 [[원더걸스]]와 함께 활동했음에도 공중파에서 2주간 1위를 차지했다.
         20년 만에 [[김정남(터보)|김정남]], [[마이키]]와 함께 터보를 재결성할 정도로, 주변인들을 잘 챙기는 의리남이다.[* 특히 [[김정남(터보)|김정남]]은 인생이 망가지기 일보 직전 상태까지 몰렸는데 김종국 덕분에 다시 가수가 되어 망가진 인생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김정남(터보)|김정남]]의 입장에서 김종국은 '''그야말로 [[구세주]]인 셈.'''] 이와 관련해 유명한 일화는 [[스티브 유|유승준]]의 [[결혼식]] 때인데, 김종국이 한 남자로 첫 1위에 올랐을 당시 뜻깊은 첫 1위인데도 [[미국]]에서 결혼하는 [[스티브 유|유승준]]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비행기에 올랐다. 그 당시 여론과 기자들이 모두 김종국에게 공격적이었고, 주위에서는 가지 말라며 모두 말렸었다. 다른 연예인들은 김종국에게 축의금을 모두 맡겼고, 김종국은 그렇게 모은 축의금을 들고 홀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 다녀온 후 매섭게 몰아붙이는 기자들과 네티즌들에게 김종국은 딱 한 마디 했다. '''"약속했습니다. 친구 결혼식에도 못 갑니까?"''' [* 당시 [[스티브 유|유승준]]은 김종국이 결혼식에 오면 자기 때문에 욕 먹을까봐 결혼식 장소를 안 가르쳐 줬었다는데, 김종국이 "그런 게 어딨냐" 며 결국은 혼자서 갔다고 한다. [[스티브 유|유승준]]의 처지에 대해 공감한다는 행위로 보기보다, 단순하게 친구 결혼를 축하하러 간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 어쨌든 결혼식을 간 그 자체가 죄는 아니므로 논란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이전에는 해외라 하면 이벤트성의 미국콘서트나 일본에서 팬미팅, 콘서트를 가끔씩 하는 정도였는데 2013년을 기점으로 해외 활동이 많아졌다. 런닝맨 멤버들 중 김종국이 처음으로 해외 팬미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점차 확대되어 한국에 있는 날보다 외국에 있는 날이 더 많아지는 달도 있었다(...)... --한국팬은 웁니다-- 주말에 중국에 갔다가 런닝맨 또는 다른 예능 촬영으로 귀국하는 경우가 많았다.
  • 김종석 (1955년)
         '''김종석'''(金鍾奭, [[1955년]] [[8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제20대 국회의원이다. 제8·9·10대 국회의원 [[김세배]]의 아들이다. 정계 입문 이전에는 미국 다트머스대학교 교수, 한국경제연구원장, 홍익대학교 교수, 경영대학장, 규제개혁위원회 위원,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바른사회시민회의 공동대표 등을 역임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raythep.mk.co.kr/newsView.php?no=10243|제목=[국회의원 집중분석] 김종석...30년 경제내공 새누리 용병|뉴스=raythep.mk.co.kr}}</ref> 김경환 [[서강대학교]] 교수와 함께 <[[맨큐의 경제학]]>의 번역자로도 알려져 있으며, 자유한국당의 경제통 의원들 중 한 명으로 꼽힌다.
         * 1984년 9월 ~ 1987년 12월 : [[미국]] [[다트머스대학교]] 교수
         * 2010년 1월 ~ 2013년 1월 :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한국동문회 회장
  • 김종태(1949)
         참고로 [[미국]]에서는 촛불집회를 지지한다고 밝혔다. 것도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미 [[국무부]] 대변인을 통해서 밝힌 공식 입장이다.'''
  • 김종현 (사격 선수)
         '''김종현'''(金鐘鉉, [[1985년]] [[7월 21일]] ~ )은 [[KT]] 소속의 소총 사격선수이다. [[2010년 아시안 게임|2010년 광저우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 동메달 1개, [[2014년 아시안 게임|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단체전에서 은메달 1개를 획득하였다. 주종목인 소총 3자세에서 [[한진섭]]에 밀려 크게 빛을 보지 못하였으나 [[2012년 하계 올림픽|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당당히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런던 올림픽 소총 3자세 결선에서 마지막 발을 남겨두고 [[미국]]의 [[매튜 에몬스]]에 밀려 동메달이 거의 확정적이었으나 마지막 한 발에서 김종현이 뛰어난 집중력으로 10.3점의 높은 점수를 쏜 반면 [[매튜 에몬스]]는 7점으로 크게 실수하는 바람에 은메달을 획득할 수 있었다.
  • 김주리 (교수)
         '''김주리'''는 [[경상북도]] 출신이다.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수학과 교원이다. [[KAIST]]를 졸업한 후, 미국 [[예일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KAIST 첫 여성 수석 졸업자로 [[2007년]] 38세에 미국 MIT 종신[[교수]]가 됐다.
         MIT는 미국 [[일리노이주]]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인 김주리를 영입해서 수학과 종신교수로 임명했다. MIT는 "김 교수가 세계 수학계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 하나로 꼽히는 "[[힐베르트의 문제들]]" 중 9번째인 "P-adic군(群)"을 해결하는 단초를 제공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고 임용 이유를 설명했다.
         김주리는 지난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호 대칭적 이론"을 발표해서 세계 수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MIT를 비롯해 미국 학회에서는 김주리의 이번 임용이 "파격"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김주리는 KAIST 학부를 수석 졸업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예일 대학교 대학원 수학과에 진학, [[1997년]] 28세의 나이로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듬해인 [[1998년]]부터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 후 과정(포스트닥)을 밟은 후, [[1999년]]에 미국 [[미시간 대학교]]에서 조교수로 교수 생활을 시작했고, [[2005년]]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 위치한 일리노이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 김주한(야구선수)
         [[1월 15일]]부터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 시행되는 1차 [[스프링캠프]]에 승선했다. 즉시전력감으로 지명된 김주한에 대한 기대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
  • 김준수(JYJ)
         그 이후로 활동 하나가 끝날 때 마다, 혹은 헤어가 질릴 때 마다 심심찮게 [[염색]]을 하고 있다. 2012년 솔로 1집 월드 투어때는 노란색([[한국]]), 파란색([[인도네시아]], [[태국]]), 빨간색([[중국]]), 갈색([[미국]], [[멕시코]]) 등 나라를 넘나들 때마다 염색을 해 팬들이 그의 모발에 대해 걱정을 하기도 했다. 그 당시에는 머리카락이 뚝뚝 끊겨서 굳이 자를 필요도 없었다고 한다. 월드 투어 이후에도 [[무지개|빨주노초파남보]] 모든 색깔을 섭렵하며 30번 가까이 머리 색깔을 바꾸었다.[* [[https://1.soompi.io/wp-content/uploads/2012/12/20121227_xia_junsu_01.jpg|노란색]] - [[https://1.soompi.io/wp-content/uploads/2013/07/Screen-Shot-2013-07-15-at-9.13.21-PM.png|검은색]] - [[http://cfile23.uf.tistory.com/image/2114A64252E9276520222E|갈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6.uf.tistory.com%2Fimage%2F212A05485339739D1413E8|노란색(주황빛)]] - [[http://m.imgur.com/TlGqtwF?r|핑크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10.uf.tistory.com%2Fimage%2F217ABA4453A63C860FD7B5|노란색]] - [[http://cfile3.uf.tistory.com/image/254355475409601522A7F3|빨간색]] - [[http://cfile6.uf.tistory.com/image/22796A4C541544FE1E3561|검은색]] - [[http://cfile9.uf.tistory.com/image/263BA9495423B8FA3584DC|어두운 보라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10.uf.tistory.com%2Fimage%2F255DC04E545DE283020879|애쉬 그레이]]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4.uf.tistory.com%2Fimage%2F235F95365471DE3624F80F|애쉬 브라운]]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5.uf.tistory.com%2Fimage%2F2731B03A54A5D1162A877E|빨간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5.uf.tistory.com%2Fimage%2F262A4C4154B3755D324510|핑크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4.uf.tistory.com%2Fimage%2F2161874E54CC95FE39CDBA|노란색(금빛)]]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8.uf.tistory.com%2Fimage%2F257EAB4E54F5AA76301F9E|노란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5.uf.tistory.com%2Fimage%2F2422854754D371D8344823|검은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4.uf.tistory.com%2Fimage%2F223F703C54F5A92A08F3D6|검은색+청록브릿지]]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9.uf.tistory.com%2Fimage%2F2501883554FD21231C10BF|청록색]]~[[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8.uf.tistory.com%2Fimage%2F244185415533E7780E8E87|민트색]][[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9.uf.tistory.com%2Fimage%2F240C0A4754FFFA2902F3C7|(노란빛)]](3집 활동 기간동안 여러차례 다시 염색을 해서 일주일 단위로도 색이 다르다)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1.uf.tistory.com%2Fimage%2F21257C3C5546F92B36B304|파란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5.uf.tistory.com%2Fimage%2F2503954055506B8F2CB40D|청록색]] - [[http://img1.daumcdn.net/thumb/R720x0.q80/?scode=mtistory&fname=http%3A%2F%2Fcfile26.uf.tistory.com%2Fimage%2F22214D4B555A1ECF2B3253|민트색]] - 애쉬 카키 - [[http://cfile22.uf.tistory.com/image/2516154D55D2C4552EFBA6|애쉬 브라운]] - 주황색 - 연주황색 - 로즈골드 - 갈색(보랏빛) - 민트색 - 노란색(금빛) - [[http://cfile24.uf.tistory.com/image/2469604A56AE40850293E8|빨간색]] - 갈색(붉은빛) - 갈색 - 검은색 - 노란색(은빛) - 석류색 - 검은색 - 레몬색(체코) - 노란색(금빛에 가까운) - 은백색 - 핑크색 - 노란색 - 검은색 - 갈색 - 검은색(입대)[[추가바람]] ] 이를 자신도 의식하고 있는지, 2015년 [[JYJ]] [[https://youtu.be/V5yhri6x2FQ|멤버쉽 위크]]에서는 '나는 사진 보면 머리 색깔로 이게 언제 때 사진인지 알 수 있어!'라고 자신있게 말하기도 했다.
         ||<|6> XIA 1st World Tour || 2012.08.31 || 미국, 뉴욕 || ||
         || 2012.09.03 || 미국, L.A || 2,000 ||
          * 잘 때는 속옷만 입고 잔다고 한다. 쓰리보이스3[* 2012년 여름 [[미국]]에서 찍은 [[JYJ]]의 곡 작업 및 일상 등을 담은 DVD.]에서 [[박유천|한 멤버]]가 아침에 그를 깨우러 갔을 때도 ~~휴지를 코에 꽂아 넣은 상태로~~[* 영상의 소리를 잘 들어보면 코피가 나서 그랬다는 듯 하다. 새벽 세시에 잤더고 웅얼거린 것으로 추측하자면 피곤해서일 가능성이 있다.] 속옷만 입고 이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 김준영(1951)
         [[경상북도]] [[상주시|상주]] 출신으로 [[경동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1979년과 1984년에는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박사학위를 각각 받았다. 1973년 행정고등고시(제14회)에 합격, 1989년에는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임용됐고 1996년 ~ 1998년 성균관대학교 경제학부장, 2003년 ~ 2004년 성균관대학교 교무처장, 2004년 ~ 2006년 성균관대학교 기획조정처장, 2007년 2월 ~ 2011년 1월까지 성균관대학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부총장 등을 역임했다. 2011년 1월에는 [[서정돈]] 총장의 후임으로 차기 총장으로 취임, 2014년 12월까지 맡았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명예교수, 학교법인 성균관대학 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 1992년 8월 ~ 1993년 8월 : 미국 [[하버드 대학교]] 객원교수
  • 김중수
         * [[1974년]] ~ [[1979년]] :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 [[1979년]] ~ [[1983년]] :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수석연구원(Senior Research Associate)
  • 김지원 (소설가)
         | 사망지 = [[미국]] [[뉴욕주]] [[뉴욕]]
  • 김진 (1949년)
         * [[1968년]] [[:zh:台北美國學校|중화민국 타이완 타이베이 미국인고등학교]] [[졸업]]
         * [[1976년]]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경영학과 [[학사]]
         * [[1978년]]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행정학]] [[석사]]
         [[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스페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김구 가]][[분류:안동 김씨 (구)]][[분류:김대중 정부]][[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옛 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바른정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교수]][[분류:송원대학교 교수]][[분류:개신교도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김진명 (작가)
         [[미국]]에서 활동한 물리학자를 소재로 삼아, 이휘소가 박정희 정권 말기 핵무기 개발에 관련했다는 가설을 주 내용으로 하는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써서 일약 유명해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시론>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url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1&aid=0000009240 |출판사 =문화일보 |저자 = |날짜 =2002-11-15 |확인날짜 =2014-05-12 }}</ref>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소설)|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에서 김진명은 이휘소가 핵 개발에 관여했다고 서술했던 점에서 이휘소의 유족이 이휘소는 생전에 핵 개발과 무관했다는 점에서 김진명을 명예훼손죄로써 고소했으나 법원은 이것을 기각했다. 그 후에도 김진명이 쓴 많은 소설은 인기 상품이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핵 문제를 둘러싼 [[미국]]과의 문제,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가 대두할 때마다 출판됐으며, 김진명이 쓴 소설을 역사 그 자체라고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김진명을 극우 민족주의자라고 비판하거나 상품을 사고 파는 행위로써 이익을 얻고자 민족주의를 이용한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어서 지금도 논란 중이다.
  • 김집 (1926년)
         * [[미국]] [[피츠버그 대학교|피츠버그 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석사]]
         * [[에모리 대학교|미국 에모리 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석사]]
  • 김태완 (1984년)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으로 [[서울양목초등학교]]와 [[신월중학교 (서울)|신월중학교]]를 졸업하고 에 입학했다. 시절 수비 위치는 주로 [[3루수]]였으나 부쩍 커 버린 키 때문에 [[1루수]]로 이동했다. 시절 [[2002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2002년]] [[한화 이글스]]의 2차 8순위(전체 60순위) 지명을 받았지만 [[성균관대학교]]에 입학했다.<ref>[http://www.sports2.co.kr/people/people_view.asp?LCT=0&AID=184401&PG=3/ 이제 시작일 뿐이다 한화 Big4 (4) 6번 타자 김태완]{{깨진 링크|url=http://www.sports2.co.kr/people/people_view.asp?LCT=0&AID=184401&PG=3%2F }} 《스포츠 2.0》, 2008년 5월 26일</ref> 성균관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2004년]] 처음으로 국가대표팀에 선발되어 [[중화민국|대만]]에서 벌어진 제2회 세계 대학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 [[대한민국]]이 [[미국]]과 [[일본]]에 이어 3위 입상을 하는 데 공헌했다.
  • 김태우(god)
         2012년 11월에 출연한 고쇼에서 서울대학교 생명공학부에 재직 중인 연구원인 아내를 "서울대 박사"라고 지칭한 부분을 두고, 몇몇 네티즌들의 학력위조 드립이 있었으나 별다른 문제 없이 언론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미국]]에서 대학 졸업, 이대 대학원 생명공학부에 재학하면서 서울대 연구원으로 재직 중이었는데, 서울대 박사 학위가 아님에도 '서울대 박사'라고 칭한 것을 문제시한 것. 하지만 [[청춘불패]]의 흑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 김태우 자체가 상식이 뚜렷한 편이 아니서 생긴 불찰. 일반적인 [[학력위조]]와 달리 학력을 사칭하여 이득을 꾀한 것도 아니다보니, 딱히 큰 논란은 없었다.
         그러다가 2014년 말부터 소속 가수인 메건 리와 계약 해지를 둘러싼 마찰이 일어났다. 메건 리는 미국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모색하면서 소울샵측과 계약 해지를 주장했고, 길건은 메니징 소홀을 이유로 계약 해지를 주장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문제는 김태우 처가 쪽 인물들의 경영 간섭. 오히려 이들은 김태우 [[본인]]에 대해서는 불만 없다는 식으로 밝힌 것으로 봐서는 본인의 [[인성]]은 원만한 모양.
  • 김택권 (기업인)
         *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캠퍼스]] 교수
  • 김한중
         *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교]] 보건대학원 보건정책과정 수료
  • 김향정
         1974년 [[서울대학교]] 수학과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1년 동안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결혼한 뒤 [[미국]]으로 건너갔고 [[뉴욕 대학교]]에서 수학 석사 학위를,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지낸 뒤 1985년 귀국했고 1986년부터 [[서강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 김현식
         1976년에 이장희의 주선으로 음반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1978년]]에 녹음 작업이 끝나고 음반이 나오기 기다리던 중 이장희가 [[미국]]으로 여행을 갔다가 그곳에 매료되어 장기 체류를 하고 김현식이 [[대마초]] 사건까지 연루되어 정식 데뷔를 하지 못게 되었다. 그러다가 2년 후인 [[1980년]]에 서라벌 레코드사에서 '봄여름가을겨울'을 타이틀곡으로 한 1집 앨범을 발표하였는데, 그 때는 그의 음악적 노선이 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 앨범에서 그는 맑은 미성을 바탕으로 소울 록 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들을 선보였다.
  • 김현준 (농구인)
         은퇴 이후 [[미국]] 유학을 거쳐 [[1996년]]부터 [[서울 삼성 썬더스|수원 삼성 썬더스]]에서 코치로 선임된 뒤 감독 대행을 맡는 등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1999년]] [[10월 2일]] 택시를 타고 출근하던 도중 지하철 [[정자역]] 부근 도시고속화도로에서 중앙선을 넘어온 승용차와 정면 충돌하는 [[교통사고]]를 당한 뒤 인근의 한 병원으로 이송된 직후 사망했다.<ref>{{뉴스 인용|제목=삼성농구단 김현준 코치, 교통사고로 숨져|url=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481406|출판사=연합뉴스|저자=문관현|날짜=1999-10-02}}</ref>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1999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슈팅 가드]][[분류:서울 삼성 썬더스 선수]][[분류: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농구 참가 선수]][[분류:1988년 하계 올림픽 농구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동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농구 메달리스트]][[분류:1986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1990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농구 참가 선수]][[분류:1986년 아시안 게임 농구 참가 선수]][[분류:1990년 아시안 게임 농구 참가 선수]][[분류:한국프로농구 영구 결번]][[분류:체육훈장 기린장 수훈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금성초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육과학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
  • 김현철 (1901년)
          | 학력 = [[미국]] [[아메리칸 대학교|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김현철'''(金顯哲, [[1901년]] [[11월 13일]] - [[1989년]] [[1월 27일]]<ref>《한국일보》 (1989.1.28) [http://www.kinds.or.kr/imgdata8/1989/01/28/19890128HKM15.pdf 前 내각수반 金顯哲씨 他界] {{웨이백|url=http://www.kinds.or.kr/imgdata8/1989/01/28/19890128HKM15.pdf |date=20160409123517 }}</ref>)은 대한민국의 정치가, 독립운동가, 관료이다. [[서울대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를 나온 그는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린치버그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와 [[아메리칸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현대그룹]] 고문을 맡기도 하였다.
         [[대한제국]] [[한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기도|대한제국 경기도 양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2년]] [[서울대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를 나온 그는 이후 도미 유학, [[1927년]] [[미국]] [[린치버그 대학교]] [[경제학|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학사 과정을 마치고 [[1932년]]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33년]]에는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직책 = [[주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 미국 대사]]
         [[분류:1901년 태어남]][[분류:1989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의 농림부 차관]][[분류:대한민국의 재무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부흥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경제기획원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신민당]][[분류: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컬럼비아 대학교 동문]][[분류:아메리칸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국민대학교 교수]][[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김현철 (1959년)
         1984년 26세에 대학을 나온 후 [[미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에 취직하여 근무하였으나 아버지 [[김영삼]]의 대선을 돕기 위해 1987년에 퇴사하고 정계에 투신하였다.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3대 대선]]에서는 외곽에서 선거를 도왔고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제14대 대선]]에서 아버지 [[김영삼]]의 당선에 기여하였다. 1996년에 실시된 [[대한민국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제15대 총선]]에서는 여론 조사와 선거 전략을 담당하였다.
         * 2000년 5월 ~ 2001년 5월 : 미국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 초빙교수
         [[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국민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러시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동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김녕 김씨]][[분류:친문]][[분류:김영삼]][[분류:통일민주당 당원]][[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옛 새누리당의 정치인]][[분류:옛 더불어민주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김훈이
         | 국적 = {{국기나라|대한민국}} → {{국기나라|영국}} → {{국기나라|미국}}
         '''김훈이''' 또는 [[영어]]식 이름인 '''후니 킴'''({{llang|en|Hooni Kim}})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요리사]]이다.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나서 3세에 [[영국]]으로 이민을 갔고, 10세에 다시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미국]]에서 생활할 때,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생물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고 같은 대학의 [[의학전문대학원]]으로 진학하여 의사가 되려 하였으나, 진로를 바꾸어 요리사가 되었다. 이런 독특한 이력으로 인해, 그가 [[대한민국]]에서 활동할 때, 상당한 주목을 끌었다.<ref>[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261702 아리랑TV `디 이너뷰`, 요리사 후니 김 편 2012.08.06 경북매일]</ref>
         [[미국]]의 [[뉴욕]] [[맨해튼]]에 있는 한식당 [[DANJI]]와 [[HANJAN]]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들 두 식당은 [[한국 요리]]를 전담하는 식당으로서는 최초로 미슐랭 가이드 스타 1개를 받았다. 이들 식당들은 [[2013년]]에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2013년 뉴욕 10대 레스토랑'에 선정되기도 하였다.<ref>[http://www.yonhapnews.co.kr/international/2013/12/26/0601090100AKR20131226005200072.HTML `뉴욕 10대 레스토랑'에 한국음식점 `한잔' 선정 연합뉴스 2013/12/26]</ref>
         [[분류:생년 미상]][[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요리사]][[분류:한국계 영국인]][[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영국의 작가]][[분류:미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영국의 기업인]][[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
         깨끗한 독일국방군 신화가 나타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바로 [[냉전]]이다. [[미국]]과 [[영국]]은 [[소련]], 그리고 소련의 위성국 [[동독]]에 맞서서 [[서독]]을 재건해야 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일군을 전쟁범죄로 단죄하면 독일 국민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었다. 또한 실용적 관점에서도 독일군이 해체하는 것은 공산 세력과 맞서는데 큰 어려움을 가져올 수 있었다. 독일국방군 출신의 장성들 역시 자신들이 전쟁범죄자로 받게 될 비난을 두려워하여, 모든 죄과를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스]], [[나치 친위대]]에게 몰아놓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 나경
         |거주지= {{국기나라|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나경'''({{llang|en|Kyung I. Lah}}, [[1971년]] [[8월 27일]] ~ )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CNN]]에서 프리랜서 소속 특파원을 지내고 있다.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자라났다. [[198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3년]]에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에서 방송 언론쪽으로 학사학위를 취득하였다.<ref>[http://www.cnn.com/CNN/anchors_reporters/lah.kyung.html "CNN TV - Anchors/Reporters:Kyung Lah"]</ref> 대학 재학 시절에 학교 언론인 [[데일리 일리니]]([[:en:Daily Illini]])에서 글을 쓰기도 하였다.
         2012년 일본을 떠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근무하고 있다.
         [[분류:미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일본에 거주한 미국인]]
  • 나웅배
         1934년 [[경성부]] 출생으로<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60300329204002&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06-03&officeId=00032&pageNo=4&printNo=13442&publishType=00020 1989년 신문 기사 참조]</ref>, [[1957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를,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각각 취득하였다.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소년 점프]] 주간 연재작. 작가는 [[호리코시 코헤이]]. 일본에선 "히로아카"란 약칭으로 통하며 국내에선 "나히아"로 약칭. [[마블 코믹스]]나 [[DC 코믹스]] 같은, [[미국]] [[슈퍼히어로]] 장르와 비슷한 배경 세계를 가지고 있다.
  • 나향욱
         >신분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는 거다. 미국을 보면 흑인이나 히스패닉, 이런 애들은 정치니 뭐니 이런 높은 데 올라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상·하원… 위에 있는 사람들이 걔들까지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면 된다.
         [[대한민국 교육부]] 정책기획관 자리에 있었던 2016년 7월 7일, 신문기자들과의 식사자리[* [[오마이뉴스]]에 기고된 한국인 미국 교수의 글은 참고해 볼 만 하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226297|공무원-언론인 '회식', 나향욱 사건의 본질적 문제]] 이른바 공무원과 언론인의 향응과 유착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글이다. 이를 바탕으로 경향신문 기자들도 현재로서는 법적인 문제가 없지만, 앞으로 제정될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 등을 고려했을 때 도덕적인 문제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즉석 질의응답이 보편화되고 자연스러운 [[미국]]과 달리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정부, 고위 공무원 인터뷰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74987|사전에 질문 문항을 통해 정해진 질문만을 받고 틀에 박힌 답변을 답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러한 정부관계자/고위공무원과의 회식자리는 사전에 짜고 치는 질문 답변에서 벗어난 새로운 정보를 얻거나 화제가 되는 이슈에 대한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곳이다. 게다가 보수 정권인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경향신문]]이 왜 굳이 정부의 고위관료들과 회식을 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조성하려고 했을까? 정부의 정책 등에 대한 정보자료를 쥐고 있는 고위공무원, 정치인들과 협조적인 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 당장 들어오는 정보자료의 질과 등급이 달라진다. 그러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강남순 교수의 글은 경향신문 기자들의 개인에 대한 문제점 지적이라기 보다는 한국사회 공무원과 언론에 내려박힌 문화 그 자체에 대한 비판에 가깝다. 언론이 정부의 고급정보를 얻기 위해서 향응을 제공하거나, 좋은 기사를 써주기 위해서 공무원으로부터 향응을 받는 것이 건강한 사회라고 볼 수 있을까.]에서 [[신분제]]를 옹호하고 99% 계층을 개ㆍ돼지로 비하하는 내용의 발언을 하였으며,[* 발언 직후 해명의 기회를 수차례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말에 대한 정정은 없이, 수위만 낮춰 다시 발언한 것으로 알려져 더욱 충격을 주고 있다. [[경향신문]] 부장의 말마따나, '취중실언'은 절대 아니라는 것. [[http://i.huffpost.com/gen/4500466/original.jpg|참고 (경향신문 사설, 허핑턴포스트 기사 내 이미지 인용)]]] 이로 인해 국민들의 공분을 샀다.
         1993년 임용되어 2005년에 4급으로 승진했고, 2008년까지 3년 동안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 파견되어 '''국비'''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전공은 고등교육이었다. 대학교의 입시정책, 연구지원정책, 장학정책, 입시행정, 학사행정, 연구행정, 교과목 개발 등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프로그램으로서, 향후 대한민국의 대학교육정책 전체를 좌지우지할 핵심인물의 양성 코스를 밟았다고 할 수 있다.
         이후 지방교육자치과장을 하다가, 2012년 5월부터 미국 [[워싱턴 D.C.]]에 소재한 [[세계은행|월드뱅크(World Bank)]]에 파견되어 사회협력분야 업무를 맡았다. 거기서 약 3년간 억대 연봉(월급 $12,000)을 받았다.
         여담으로 대선주자였던 [[밋 롬니]]도 유사한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었으며, 제시된 본 기사에서도 롬니의 발언을 언급했다. 여기도 비공개 석상에서 벌어진 망언이었다. 미국 네티즌 사이에서 "나향욱은 대권에 도전 중인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부통령|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아주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 교육부의 정책기획관에서 미국 부통령으로-- --이쯤 되면 [[새옹지마]]의 아이콘--
         게다가 "신분이 정해져 있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추가로 [[미국]]을 언급하다가 더 큰 걸 터뜨렸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이런 애들은 정치니 뭐니 이런 높은 데 올라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대신 상·하원… 위에 있는 사람들이 걔들까지 먹고 살 수 있게 해주면 된다.”[* [[미국 공화당]]과 [[미국 민주당]]이 엘리트 의식으로 흑인과 히스패닉을 먹고 살게 해주지는 않는다. [[조지 워커 부시]]가 이긴 것이 히스패닉 덕분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또 민주당은 히스패닉이나 흑인계층이 선거 때 덜 나오느냐 많이 나오느냐 정도를 가지고 선출직 당선이 정해질 정도이다. 히스패닉과 흑인들은 사실상 선거의 캐스팅 보트다. 결국 윗분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이들을 끌어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경제 안정이 가장 좋다. 절대로 자신들의 넓은 아량을 베풀지 않고 권력 유지를 위해 끌어들이는 것이다. 물론 그게 민주주의가 강한 자를 다루는 묘책이지만.]라고 하면서 '''[[인종차별]]''' 발언까지 했다.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부터 흑인이 아닌가.[* [[미국/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저 말을 들으면 헛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게 오바마와 대적했던 [[마르코 루비오]], [[테드 크루즈]] 모두 히스패닉 출신이다.] 게다가 본인의 착각과는 달리 백인들이라도 [[레드넥]]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금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은 이상 삶이 본인이 생각하는 흑인, 히스패닉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냥 사실 자체도 틀렸다.[* 정작 나향욱 자신은 99%에서 1%로 올라가도 된다는 모순된 말을 했다. 기자가 나향욱에게 "당신은 1%와 99% 어떤 쪽에 속하는가??"라고 묻자 "스스로 1%가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나향욱은 99%인 개돼지의 위치인데 그의 말대로 신분제가 필요하다면 왜 개돼지인 자신이 1%로 올라가야 하는가. 이는 나향욱 자신은 이미 1%로 갈 수 있는 소수의 선택 받은 사람이라는 [[선민의식]]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5022350005|2016년 5월 2일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모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들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미국]]은 집안 좋은 애들이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걸 당연히 여기는데''' 한국에서만 이상한 소리들을 한다.” “앞으로도 '''서포트 없는 애들은 들어오기 힘들게''' 해야 한다.[* 사실 이미 그러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이게 심화되는 중이고... 옆 나라 일본에서는 이미 저게 완전히 정착돼 버린 상황이다. 거기다가 한국에서 2010년대 이후에 태어난 아이들의 경우는 사실상 계층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그대신 그 애들은 먹고살만한 직장을 구하는 것은 쉬울 것이다. 저출산으로 인구절벽이 심하거든.~~] 그러면 결국 우리 학교는 '''명문가 자제들만 들어올 수 있는 명문 로스쿨'''이 될 것.”[* 서울대학교가 이래서 비판받은 적 있다. 가장 머리좋은 인재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지, 서울대학교가 가장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기술을 가진 데가 아니라고. 즉, 자기가 뛰어나서 잘사는 게 아니라 [[신데렐라 컴플렉스]], [[골드 디거]]처럼 부유한 배우자를 만나 신분상승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란 뜻이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서울대가 지원하는 것은 타이틀과 동문회 명부에 불과하다.] 물론 신분제나 개돼지 등의 자극적인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러한 발언 역시 나향욱의 발언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대선 후보였던 [[밋 롬니]]도 비공개 석상에서 '[[버락 오바마]]를 찍는 47%의 국민은 세금도 내지 않고[* 소득세 얘긴데, 그런데 그렇다 해서 세금을 내지 않는 게 아니다. 다양한 간접세 등 경제생활을 하면서 세금을 내지 않고 살 수는 없으니까. 또 다른 얘기로, 이것은 우리로 치면 면세점을 말하고 우리 나라도 비슷하다. 그래서 면세점을 내리고 복지도 더 주자는 말이 있다. 이것이 하나 뺏고 하나 주는 것처럼 여겨저서 서민층에서도 싫어하는 사람이 있지만, 실제로는 고소득자도 더 과세하기 때문에 유럽식으로 가는 거라 부유층도 싫어한다. 양쪽이 다 싫어하니 지지부진. 오히려 미국에선 세금이란 세금은 단 한푼이라도 안낼 시 작살난다. [[국세청(미국)]]을 클릭해보면 그 실태를 알 수 있다.] 복지를 누리고 있으며 난 이들에게 지지를 얻을 생각이 없다.'라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낙선했다.
  • 남궁염
         '''남궁염'''(南宮炎, [[1888년]] [[3월 17일]] [[경기도|경기]] [[서울특별시|서울]] ~ [[1961년]] [[11월 29일]], 미국명 데이비드 남궁(David Y. Namkoong))은 한국의 독립운동가 겸 외교관이다. [[대한인동지회]] 뉴욕시 지부의 지부장이었으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부터 [[1960년]] [[6월]]까지 제1대 뉴욕 한국 총영사관 총영사를 역임하였다.
         남궁염은 [[1888년]] [[3월 17일]] [[한성부]] 정동에서 [[남궁억]]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어려서 [[배재학당]] 에서 영어를 배우고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개화파 인사 [[박영효]]의 주선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으로 [[버지니아주]] [[랜돌프 매건 대학]]을 다녔다. [[랜돌프 매건 대학]]에 재학 중 우연히 [[이승만]]을 만나 독립운동에 몸을 던졌다.
         [[미국]] 유학 중 남궁염은 [[1921년]] [[북미한인학생회]](北美韓人學生會) 대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청원서를 제출하였으며 같은 해 미국 뉴욕에서 이승만(李承晩), 이용직(李容稷) 등과 함께 조국광복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조직을 결성하였다. 또한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동지회]]의 뉴욕 지부의 결성에도 참여하였다. [[1922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歐美委員部) 위원으로 피선되었고, [[1924년]] 구미위원부의 임시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재미한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였다.
         [[1928년]]에는 [[허정]], [[이기붕]] 등과 함께 삼일신보사(三一申報社)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1933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뉴욕지부 대표후보로 활동하였다. [[1938년]] 일시 귀국하여 [[충청북도]] [[제천시|제천군]] 의 삼화성광산(三火星鑛山)을 운영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출국하였다. [[1941년]] 다시 구미위원부 위원에 재선임되고 [[1942년]] 이후 북미동지회(北美同志會) 총부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 경제위원을 역임하면서 재미 한인사회의 단결을 위해 노력하였다.
         남궁염은 이승만의 독립운동 뒷바라지와 함께 뉴욕동지회를 꾸려나가기도 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고 그해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동지회 뉴욕지부를 지도하였으며,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남들처럼 귀국하지 않고 뉴욕 한인회를 지도하였다. 정부 수립 직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특별히 뉴욕총영사가 되어 활동했다.<ref>"정부인사발령", 동아일보 1949년 02월 23일자 1면, 정치면</ref> 한편 그의 부인 우복자는 [[하와이]] 호놀룰루의 한인 동지회의 지부장이 되었다. 정부 수립 이후에도 매년 하순 혹은 가을에 개최되는 미국내 한인대회에 반드시 참석하였다.
  • 남궁원(배우)
         당대의 여러 배우들과 달리 [[밤무대]] 출입을 안 하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아들 [[홍정욱]]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후 학비 문제로 밤무대 출연을 자주 했다고 한다. 게다가 두 딸도 미국/독일로 각각 유학을 간데다 부인이 암투병 끝에 살아나기도 했으니 여러가지로 돈이 많이 들었을 듯(...) 홍정욱이 지금도 안타까워한다는 일화. 밤무대도 밤무대지만 역시 아들 유학비 문제로 온갖 에로영화는 물론이고 [[우뢰매|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나 [[흑역사]]급 퀄러티를 자랑하는 로봇 태권브이 90에도 출연한 바 있다.
  • 남유진
         1953년 [[경상북도]] 선산군 선산면(현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서 태어났다. 선산초등학교, [[대구중학교]],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를, 동 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공공정책대학원, [[금오공과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과정을 졸업, 수료하였다.
  • 남진(가수)
         엘비스는 [[1950년대]] 후반 [[로큰롤]] 음악이 기성 사회로부터 집중 공격을 받고 몰락 위기에 빠지자,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당시에는 이미 미국에서 [[징병제]]가 중단된 상황이었지만 [[한국 전쟁]]이 끝난지 몇년 안 된 시점이었고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0년 정도 되는 시점이어서 군대에 가는 것이 이상한 것도 아니었고, 오히려 애국심도 있고 책임감 있는 젊은이들은 군대에 자원해서 가는 경우가 꽤 있었다.) 이미지 쇄신을 노린 바 있다. 그 이후 G.I. Blues라는 곡과 동명의 영화를 발표하면서 "성실한 미국인 젊은이"의 이미지로 거듭났다. 남진 역시 엘비스의 G.I. Blues를 한국어로 [[번안]]하여 불렀다. 그리고 [[1973년]] [[하와이]] 공연때 엘비스가 입었던 [[점프수트]]를 매니저가 '''직접 미국까지 가서''' [[엘비스 프레슬리]]의 매니저를 직접 만나서 구해온 것도 유명하다
         [[1976년]]에 [[윤복희]]와 결혼하여 화제를 끌었지만 [[1979년]] 법적 [[이혼]]을 하고[* 윤복희가 이 이혼에 대해서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사정을 털어놨는데 이게 전부 사실이라면 남진은 --[[정우성]]을 능가하는-- 엄청난 --[[호구]]-- [[대인배]]인 셈이다.[[http://m.entertain.naver.com/read?oid=011&aid=0002965726|#]]] [[1980년대]] 신군부의 등장으로 조직적으로 탄압받으며 [[미국]]으로 가게 된다. [[조용필]] 등 후진들이 치고 올라온 탓도 있다... 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거는 한참 나중 일이고, [[김대중]]과 친분이 있는 집안 자손이라는 이유로 아예 방송 출연을 금지시킨 탓이 훨씬 크다. 김대중이 학생 때 남진 아버지가 운영하던 목포일보에서 사장상을 받았고, 그 외에도 남진 아버지 덕[* 대표적으로 국회의원 지역구를 물려받았다.]을 많이 봤다고 한다. 목포에 내려가면 항상 남진 아버지 집에 묵었다고. [[1990년대]]에 국내로 다시 복귀했다.
  • 낸시 (가수)
         낸시는 아버지가 [[미국인]]이고, 어머니가 [[한국인]]이기에 [[미국 시민권]] [[법률]]과 [[대한민국]] [[속지주의]] 법률 관련에 따라 선천적인 [[대한민국]]과 [[미국]] 복수 [[국적]]자이다. 참고로 여담이지만 2010년 5월에 선천적인 복수국적자 여성은 만 22세 전까지 '외국 국적 불행사 서약' 하면 [[복수 국적]]을 허용하도록 [[대한민국]] [[국적법]]이 개정되었다. 한국 이름은 이승리였으나 2019년 4월 22일 셀럽티비에서 직접 이그루가 새로 생긴 한글 이름이라고 언급하였다.
         [[분류:2000년 태어남]][[분류:경기도 출신]][[분류:미국의 장로교도]][[분류:대한민국에 거주한 미국인]][[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분류:성신여자대학교 동문]][[분류:미국의 어린이 가수]][[분류:2011년 데뷔]][[분류:미국의 여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아이돌]][[분류:미국의 여자 가수]][[분류:미국계 한국인]][[분류:미국의 방송인]][[분류:미국의 댄스 음악가]][[분류:미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모모랜드의 일원]]
  • 노 오디너리 패밀리
         [[미국]]의 [[드라마]]. [[ABC]]에서 방송했다. 총 20화이며 방송 시기는 2010년에서 2011년. 오디너리 패밀리(Ordinary Family)는 '평범한 가족'이라는 의미로서, No를 붙여서 '평범하지 않은 가족'이라는 의미가 된다.
  • 노라 노
         방송인 [[노창성]]과 이옥경 부부의 차녀로 [[경기도]] [[경성부]] [[가회동|계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났다를 졸업하고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프랭크 왜곤 테크니컬 컬리지'를 졸업하였다. [[한국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서울특별시|서울]] [[명동]]에 '노라 노의 집'을 열었다. 이후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로 건너가 '아카데미 줄리앙 아트 스쿨'에서 수학하였다. [[1956년]] [[서울특별시|서울]] 반도호텔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이 '최초의 패션쇼'는 '100% [[대한민국]] 기술 사용'과 '처음으로 [[대한민국]] 내에서 생산된 모직 원단 사용' 등으로도 의미가 컸다. [[195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의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의상상 (Best Dress Award) 수상, [[1965년]] 하와이에서 최초로 해외 패션쇼를 개최하며 브랜드 수출을 시작했다. [[1966년]] [[대한민국]] 최초의 '기성복 패션쇼'를 열었고, [[1970년]]부터 [[1973년]]까지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프레타포르테 패션쇼'에 참가했으며, [[1974년]] 미국 뉴욕 플라자호텔에서 패션쇼를 열었다. [[1977년]] 예림양행을 설립했고, [[1978년]] 뉴욕 법인을 설립했으며, [[1990년]] [[홍콩]], [[일본]] 등에도 법인을 설립했다.<ref name="김패"/><ref>[http://www.ytn.co.kr/_ln/0106_201205221045464951 '대한민국 패션의 전설'...디자이너 노라 노]. YTN. 2012년 5월 22일.</ref><ref>양승은.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067567_5780.html '대한민국 패션의 뿌리' 노라 노] {{웨이백|url=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3067567_5780.html# |date=20131103112116 }}. 문화방송. 2012년 5월 26일.</ref><ref>김윤덕.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5/25/2012052501366.html 대한민국 1호 패션디자이너… '노라 노' 노명자]. 조선일보. 2012년 5월 26일.</ref>
  • 노무현
         정계 입문 초기에 직설적인 화법으로 청문회 스타 자리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는 대중적 인지도를 크게 끌어올려 대통령 당선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임기 중에는 "대통령 못 해먹겠다", "미국 엉덩이 뒤에 숨어서" 등 그의 화법이 논란이 되며 보수 언론으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 합법화, [[국가보안법]] 폐지 검토, [[2007년]] [[10월 4일]] [[2007년 남북정상회담|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과의 회담에서 NLL에 관한 발언이 오해를 불러 일으켜 보수 언론의 공격을 받았다.<ref>떠나는 윤상현 “노무현, NLL 포기 발언 안 해” 종전 입장 180도 뒤집어 주목, 경향신문 2014-05-08</ref><ref>신뢰와 존경을 받는 언론, 박석흥, 이담북스, 2009년 08월 21일 출간</ref> 보수 언론들은 노무현을 반미주의자이며 좌파로 규정하고 공격을 가했으나, 실제 임기 중에 펼친 정책은 그러한 노선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한미 FTA]] 추진과 [[2003년 이라크 침공|이라크 파병]] 등 노무현 정부의 정책이 [[신자유주의]] 우파에 가깝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진보 언론으로부터는 신자유주의자라고, 보수 언론에게는 반미주의자라며 양측 진영에서 모두 비판받은 대통령으로 평가받는다.<ref>노무현에게 '좌파 신자유주의' 딱지도 과분한 이유, 프레시안 2012년 10월 9일</ref> [[2004년 대한민국 행정수도 이전 계획|행정수도 이전]]과 [[혁신도시]] 등 지방 균형 발전을 추진하였으나 [[세종특별자치시]]의 수도 이전은 헌법재판소에서 관습헌법이라는 이유로 위헌 결정을 내려 행정도시로 선회하였다.
         [[1982년]]에는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 부산 공해문제 연구소 이사를 거쳐서,<ref name="브리태" />[[1985년]]에는 부산 민주시민 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 상담소를 열기도 했다.<ref name="브리태" />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부산 본부 상임 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항쟁|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변호사)|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삼자 개입, 장식(葬式) 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ref name="브리태" /> 이어 1987년 11월에는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안기부에 들어와 8년 동안 미국 자료를 수집하는 내근 업무를 하던 이화춘은 85년 5월 안기부 부산지부로 파견돼 법조를 담당하게 됐다. 전임자는 "'문제 변호사'가 네 명 있는데 이들의 동향을 파악하는 것이 당신의 주요 임무"라고 말했다. 이들 네 명은 노무현, [[김광일 (1939년)|김광일]], [[문재인]], [[이흥록]]이었다.<ref name="nmtt">[http://news.mt.co.kr/mtview.php?no=2004022007172864486&type=1 85년 盧 담당 안기부 직원,국정원장 정책특보로] 머니투데이 2004.08.20</ref> 인사차 찾아간 이화춘과 점심을 같이하던 노무현은 4시간 동안 노동.학생운동 사태 등 시국을 논했다. 8년간 미국 자료만 들여다봤던 이화춘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이에 노무현은 "당신같이 무지한 정보 요원은 처음 봤다. 당신 큰일났다"고 걱정했다. 이씨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라고 묻자 노변호사는 "교육을 받아야겠다"며 밤에 집으로 오라고 했다.<ref name="nmtt"/>
         정몽준은 대선 투표 전날인 [[12월 18일]] 저녁 10시 민주당과의 선거 공조를 파기했다. 지지 철회 발표문에 따르면, 노무현 후보가 '미국과 북한과 싸우면 우리가 말린다'라는 표현을 했는데, 국민통합21은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는 우방이고, 미국이 북한과 싸울 이유가 없다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서 이 발언을 문제 삼았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newsid=20021219022146865 | 제목 = 통합21 지지철회 발표문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2-12-19 | 저자 = | 쪽 = | 확인날짜 = 2010-04-22 }}</ref>
         2006년 베트남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직후 한·미·일 정상 간의 기자 회견 모습. 왼쪽부터 한국의 노무현, 미국의 부시 대통령, 일본의 아베 신조 총리
         그는 대선 전부터 반미주의자로 여겨졌는데, [[2002년]]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이는 약점보다는 강점으로 작용했다.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은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 사건]], 불평등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협정]] 등 때문에 미국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았다. 노무현은 "미국에 할 말은 한다"며 대미 관계에 있어 독자노선을 갈 것처럼 보였다.
         당시 미국은 [[조지 W. 부시]]를 위시한 [[네오콘]]이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참여정부와 미국 정부와의 정책적 충돌이 자주 일어났다. 취임 후 부시 행정부와 대북 정책의 입장 차이가 발생하자 미국의 공화당 보수파는 그를 의심스럽게 쳐다보았고, 당시 야당인 [[한나라당]]은 이에 가세하여 그를 [[좌파]]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러나 실제로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대해 대북 정책 이외엔 독자노선을 걸었던 흔적은 드러나지 않고, 반대로 부시 행정부의 요청에 따른 [[2003년 이라크 침공|이라크 전쟁]] 파병, [[주한미군]] 용산 기지 이전 문제, [[한미 FTA]]의 추진 등에서 오히려 부시 행정부의 요구를 받아들이면서도 실리는 챙기지 못했다.
         2003년 10월에 노무현과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가 함께한 모습.
         [[2007년]] 9월 호주에서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담이 열렸을 때, 당시 노무현은 부시에게 "평화조약에 대해 더 분명히 말해 달라"고 여러 차례 외교적 결례에 해당하는 요구를 하자, 부시가 짜증내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워싱턴 정가의 소식을 전하는 [[넬슨리포트]]는 "노 대통령의 의전상 결례에 대해 부시 대통령뿐 아니라 현장의 (미국) 기자들도 놀란 것 같았다"라고 전했다. 양국의 외교관들이 서둘러 진화에 나섰지만 두 정상 간의 껄끄러운 궁합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9608 | 제목 = 대통령 따라 출렁거린 한·미 관계 30년 | 출판사 = 중앙일보 | 날짜 = 2008-11-07 | 저자 = 최지영 | 쪽 = |확인날짜=2012-07-07 | 보존url = https://archive.is/20120707061406/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369608 | 보존날짜 = 2012-07-07 | 깨진링크 = 예 }}</ref>
         [[2008년]] 2월 마이클 그린 전 미 NSC 선임보좌관은 인터뷰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한미동맹에 대한 그의 기여는 전두환·노태우 이상이다. 그가 퇴임하는 2008년 2월 현재 한미 동맹은 훨씬 강하고 좋아졌다. 노 대통령은 미국·영국 다음 가는 대규모 이라크 파병에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체결,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 등 정책적으로 한미 동맹에 크나큰 기여를 했다"라고 평가하였다.<ref>중앙일보 2008년 2월 15일자 인터뷰</ref>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와 함께 한 노무현
         미국의 [[UPI 통신]]은 '한국, 동해를 놓고 제안을 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명칭)에 대한 타협안으로 노무현 대통령이 '평화의 바다'로 바꿔 부를 것을 제안했다"라고 보도했다.<ref>[http://www.segye.com/Articles/News/Society/Article.asp?aid=20070109000622&ctg1=01&ctg2=00&subctg1=01&subctg2=00&cid=0101080100000&dataid=200701092159000488 외신들 "평화의 바다 제안 사실"]</ref> 이 같은 제의는 외교ㆍ안보 라인과 사전 협의도 거치지 않은 돌출 발언이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전문가들은 국제무대에서 국가 수장의 돌출 발언은 국익에 적잖은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일관성 없는 대일 영유권 시각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ref>[http://biz.heraldm.com/common/Detail.jsp?newsMLId=20070108000103 盧대통령 "동해를 '평화의 바다'로 부르자" 논란] 헤럴드경제</ref>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은 국민의 자존심과 역사의식에 상처를 입혔다"며 "반역사적 발언에 대해 깊이 반성하라"고 지적했다. 네티즌들도 "한 국가의 최고 통치권자로서 적절치 못한 역사관 표명이었다"며 노 전 대통령을 비난했었다.<ref>[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6787 독도 분쟁으로 盧 ‘다케시마’ 발언 재조명]</ref> 2007년 10월 발행한 '2007 방위백서'의 한글 번역본에는 독도를 다케시마로 표기하고 있다.<ref>[http://www.freezonenews.com/news/article.html?no=28051 盧정권 국방부, ‘다케시마’ 표기 물의] 프리존뉴스</ref>
         2003년 5월 14일, 미국 방문 당시 백악관에서 노무현과 부시 미국 대통령이 정상회담 직후 기자 회견하는 모습
         취임식 당일인 [[2003년]] [[2월 25일]]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와의 정상회담, [[5월 15일]]에 미국을 방문하여 [[조지 W. 부시|부시]] 대통령과 [[백악관]]에서 정상회담을 하였다.<ref name="chosun2003-1">{{뉴스 인용 | 출판사 = 조선일보 | 저자 = 권경복 기자 | 날짜 = 2003-05-16 | 확인날짜 = 2008-05-27 | 제목 = [韓·美 공동성명] 한국 '군사조치'로 해석될까 반대 | url =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51670317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90603234208/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51670317# | 보존날짜 = 2009-06-03 | 깨진링크 = 예 }}</ref><ref name="chosun2003-2">{{뉴스 인용 | 출판사 = 조선일보 | 저자 = 신정록 기자 | 날짜 = 2003-02-25 | 확인날짜 = 2010-04-23 | 제목 = [韓·日정상회담] 고이즈미 "북한과 대화하겠다" | url = 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22570287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090603234203/http://www.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3022570287# | 보존날짜 = 2009-06-03 | 깨진링크 = 예 }}</ref>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한국을 비롯한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하자 그는 "국익을 위해 파병해야 한다"라며 이라크 파병이 '전략적 선택'이라고 표현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했다.
         2004년 2월 25일 민주당은 참여정부 출범 1주년을 맞아 실패한 1년, 잃어버린 1년이라는 제목의 국정평가 보고서를 배포했다. 보고서에는 참여정부의 7대 비리의혹<ref group="주">1. 한나라당의 1/5에 달하는 불법대선자금, 2. [[민경찬]] 펀드 의혹, 3. [[안희정]] 향토장학금, 4. 양길승 청주 향응사건, 5. 최도술 검찰소환 대책회의, 6. 청와대 계좌를 이용한 자금 세탁, 7. 최도술 편법출국</ref>을 꼽았으며,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11가지 자질부족 사례<ref group="주">1. "대통령 못해먹겠다" 발언, 2. 6.15 기념일 골프, 3. 태풍 와중 오페라 관람, 4. '호남인 이회창 싫어서 나 찍은 것' 발언, 5. 미국 방문 중 청와대 비서진 전화불통 사건, 6. 청와대 사진사 국가기밀 누출 등</ref>를 꼽았다.
         2006년 11월 18일, 권양숙과 노무현(왼쪽에서 각각 첫 번째와 두 번째)이 APEC 정상 회의 직후 오찬장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가운데), 부시 미국 대통령과 함께 있는 모습.
         * 2006년 [[6월 3일]], 미국에서 4월에 귀국한 딸 노정연이 딸을 출산했다. 이로써 노무현은 친손녀 1명, 외손녀 2명 등 손녀 3명의 할아버지가 됐다. 청와대 관계자는 "원정출산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곱지 않은 점을 감안해 노정연 씨가 곽 변호사와 상의해서 한국에서 출산키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920210611 | 뉴스 = | 형식 = | 제목 = 노대통령, 둘째 외손녀 얻어…정연씨 미국 체류 중 귀국해 출산 | 출판사 = 국민일보 [쿠키 정치] | 날짜 = 2006-06-04 | 저자 = 김현재 | 쪽 = | 확인날짜 = 2010-04-24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11104121412/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arcid=0920210611 | 보존날짜 = 2011-11-04 | 깨진링크 = 예 }}</ref>
         * 2006년 [[12월 8일]], 기자 회견에서 북한이 "미국이 한국 내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고 거듭 주장하고 있는 것과 관련, "북한은 미국이 한국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핵개발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언론 보도에 대한 의견을 말해 달라"는 질문에 "한국에 미국의 핵무기는 없다"며 "미국의 핵우산이라는 것은 한반도에 핵무기를 두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공지의 사실"이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 |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oid=130&aid=0000013787 | 뉴스 = | 형식 = | 제목 = 노 대통령 "한국에 미국 핵무기 없다" | 출판사 = 연합뉴스 | 날짜 = 2006-12-08 | 저자1 = 성기홍 | 저자2 = 김재현 | 쪽 = | 확인날짜 = 2010-04-24 }}</ref>
         2007년 12월 [[이명박]]은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 당선 직후, [[문재인]] 당시 [[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을 만들겠다고 피력하여 전임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 가능성을 배제하였고, 복수의 정관계 관계자들은 이 시기 전임자와 후임자의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0353098&plink=OLDURL 이 당선자 "전임자가 존중받는 전통 만들겠다"] SBS 뉴스, 2007.12.21.</ref><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1152 [MB권력 5년 막후] #8. '대군'들의 밀약, 촛불에 한 줌 재로 사라져] 시사저널, 2013.9.5.</ref><ref>{{웹 인용 |title=[MB권력 5년 막후] #3. 읍참마속(泣斬馬謖) 후 노무현 세력 척결 나서다 |url=http://www.sisapress.com/journal/article/137835 |work=시사저널 |date=2013-08-07 |accessdate=2018-02-19}}</ref> 그러나 2008년 5월부터 [[2008년 대한민국의 촛불 시위|미국산 쇠고기 협상 반대 시위와 광우병 괴담 파동]]으로 [[이명박 정부]] 출범 초기 국정에 큰 차질을 빚게 되자 상황은 바뀌게 된다. 청와대 관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명박 정부]]는 정황상 이 사태의 배후의 중심에 친노세력이 있다고 판단하였고, 2008년 7월 [[한상률]] [[국세청장]]으로 하여금 [[박연차]]를 비롯한 노무현 주변의 측근들에 대한 강도 높은 세무조사를 진행하도록 하여, 전임자에 대한 방침을 급선회하였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29242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 '왜'에 답하다] 오마이뉴스, 2015.7.21.</ref><ref>[http://news.donga.com/3/all/20150211/69585660/1 대통령 클럽의 회고록 전쟁] 동아일보, 2015.2.11.</ref><ref>[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60996 [MB권력 5년 막후] #4. 봉하마을 향하는 칼끝 최종 타깃은 노무현] 시사저널, 2013.8.8.</ref>
  • 노아 사이러스
         | 국적 = [[미국]]
         '''노아 사이러스'''(Noah Cyrus, [[2000년]] [[1월 8일]] ~ )는 [[미국]]의 [[배우]], [[가수]]이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여동생이다. 노르웨이의 유명 DJ Alan Walker의 노래 'All Falls Down'을 부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토막글|미국 배우|가수}}
         [[분류:200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여자 어린이 배우]][[분류:미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여자 성우]][[분류:미국의 여자 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노진환 (1928년)
         '''노진환'''(魯璡煥, [[1928년]] [[6월 30일]],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 ~ [[2000년]] [[3월 6일]])은 [[미국]] 기업인 출신의 [[대한민국]] 정치인이다. 본관은 [[함평 노씨|함평]]이다.
         *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국제정치학 전공)
         * 미국 워싱턴 홀리데이인 경영회사 총지배인
         [[분류:1928년 태어남]][[분류:2000년 죽음]][[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민주공화당 (대한민국) 당원]][[분류: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동문]][[분류: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분류:민주정의당]][[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통일국민당 (대한민국)]][[분류:신정치개혁당]][[분류:신민당 (1994년)]][[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함평 노씨]]
  • 니키 양
         '''니키 양'''({{lang|en|Niki Yang}})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국인]] [[애니메이터]]이다. 본명은 '''양현정'''<ref>{{웹 인용|url=http://www.ani.seoul.kr/potal/html/notice/notice_view.do?potalNoticeDto.notice_seq=151|title=경기 성남 애니센터 시네마떼끄 11월 프로그램|author=|publisher=[[경기 성남 애니메이션 센터]]|date=2003-11-15|work=|accessdate=2011-06-17|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10904022206/http://www.ani.seoul.kr/potal/html/notice/notice_view.do?potalNoticeDto.notice_seq=151|보존날짜=2011-09-04|깨진링크=예}}</ref> 이다. [[홍익대학교]]와 [[캘리포니아 인스티튜트 오브 디 아츠]](CalArts)를 졸업한 후<ref>{{웹 인용|url=http://www.nikiyang.com/resume.htm|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041009091743/http://www.nikiyang.com/resume.htm|archivedate=2004-10-09|title=Resume|accessdate=2011-06-17|깨진링크=예}}</ref> [[프레드레이터 스튜디오]]에서 《[[패밀리 가이]]》의 스토리보드 작가를 맡았다<ref name="Random Thoughts">{{웹 인용|url=http://www.awn.com/articles/people/random-thoughts-frederator-cartoonists/page/3,1|title=Random Thoughts from Frederator Cartoonists|author=Farago, Andrew|date=2009-01-29|work=[[애니메이션 월드 네트워크]]|accessdate=2011-07-29|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626040621/http://www.awn.com/articles/people/random-thoughts-frederator-cartoonists/page/3%2C1|보존날짜=2012-06-26|깨진링크=예}}</ref>. 현재 《[[어드벤처 타임]]》에서 BMO와 레이디 레이니콘(Lady Rainicorn)의 목소리를 담당하고 있다.
  • 닌자 거북이
         [[미국]]의 [[만화]].
  • 대부(소설)
         [[미국]]의 소설가 [[마리오 푸조]]가 쓴 범죄 소설. 영화 [[대부 시리즈]]의 원작이기도 하다.
  • 데드 스페이스
         '''Dead Space'''. [[미국]]의 [[EA 레드우드 쇼어즈]]에서 제작하고 [[일렉트로닉 아츠|EA]]에서 유통한 [[SF]] [[TPS]]. 정체불명의 상황으로 생지옥이 된 우주선 [[USG 이시무라]]를 배경으로 애인을 구하기 위해 구조대에 자원한 엔지니어 [[아이작 클라크]]의 분투를 다루고 있다.
  • 듀폰
         Dupont. [[미국]]의 기업.
         2015년 12월,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211_0010473179&cID=10101&pID=10100|미국의 화학회사인 다우케미칼과 합병했다.]]
  • 드라이브 스루
         [[미국]]에서는 1930년대 부터 시작하여, 1950년대에 크게 발전하였다. 한국에서는 1992년에 맥도널드가 처음으로 드라이브 스루 매장을 개설했으며, 2010년대부터는 널리 퍼지고 있다.[[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9/09/2013090901478.html?Dep0=twitter (참조)]]
  • 디지털 마스타
         서울에서 태어난 디지털 마스타는 199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고, 1991년 [[너티 바이 네이쳐]]를 접하게 되면서 힙합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고등학교에서, 예전부터 친구였던 진원(지금의 [[마스타 우]])과 후에 [[원타임]] 멤버가 된 [[테디]]를 만나게 된다. 이들은 SDT, 즉 South Dream Team이라는 팀을 결성하여 활동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조PD]]의 눈에 띄어 [[스타덤]]의 멤버가 되었고, 2000년 첫 앨범을 냈다. 이 앨범에는 물론 SDT가 참여하였다.
         DNS로 활동할 당시 홍보가 부족해서 뜨지 못했다는 디지털 마스타의 주장과는 달리, 조PD는 그가 게을러서 충분히 활동을 활발히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맞섰다. 퓨처 플로우가 와해되고, [[주석 (가수)|주석]]의 2집에 둘은 동시에 〈The Answer〉라는 곡에 참여했는데, 이 곡의 조PD 가사는 이전 디지털 마스타와의 갈등 상황과 묘하게 맞아떨어져 혹시 조PD가 DM을 디스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커졌었다. 이 논란은 아직도 확실히 풀리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이외에도 2005년 발표한 조PD 5집의 비밀일기라는 곡의 가사인‘나 얼마 지나 마련한 미국 개 한마리, 집 나가더니 어느날 뒤돌아 보니 주인인 나를 무네.’도 DM을 향한 비난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 라종일 (1940년)
         * [[1972년]]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정치문제연구소(Institute of Political Studies) 객원교수
  • 러시안 라이프
         Russian Life. [[미국]]에서 발행되는 [[러시아]] 관련 [[잡지]]. 러시아의 [[문화]], [[역사]], [[과학]], [[인물]]에 대해 다룬다.
         소비에트 라이프처럼 러시아 내 미국 관련 잡지인 "아메리카"(Amerika)가 있었다.
  • 레스터 길리스
         대공황 시기 활동했던 [[미국]]의 범죄자. 조지 넬슨(George Nelson)이나 베이비 페이스 넬슨(Baby Face Nelson)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있다.
         [[분류:미국 인물]]
  • 레이첼 (가수)
         초등학생 시절부터 7년간 [[발레]]를 전공했으며,<ref>{{뉴스 인용|제목=[bnt화보] 에이프릴 레이첼 “유니버설발레아카데미 출신, 가수 되고파 발레리나 꿈 포기”|url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8&c1=08&c2=08&c3=00&nkey|출판사=bnt뉴스|날짜=2017-08-14 |저자=황연도 }}</ref>2013년도에 가족과 함께 [[미국]]에 갔으며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오리건주)|포틀랜드]]에서 4년간 거주했다.
         [[분류:200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유용근밴드리즈의 일원]][[분류:DSP 미디어 소속]][[분류:2017년 데뷔]][[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아이돌]][[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분류:서울공연예술고등학교 동문]]
  • 로손
         1974년 소매업계 대기업 [[다이에]](ダイエー)가 [[미국]] 식품회서 콘솔리데테드 푸즈(コンソリデーテッド・フーズ)와 컨설팅 계약을 맺고, 이 회사 산하에 있던 로손 밀크 프랜차일즈 시스템을 도입하였다.
  • 로코 (래퍼)
         '''로드니 라몬 힐 주니어'''<ref name=MTV>{{웹 인용|url=http://www.mtv.com/music/artist/rocko/artist.jhtml#biographyEnd|title=Rocko - Music Videos, Songs, News, Photos and Lyrics|accessdate=December 19, 2011|publisher=MTV.com}}</ref>(Rodney Ramone Hill, Jr., [[1979년]] [[12월 28일]] ~ )는 흔히 '''로코 (Rocko)'''로 잘 알려진 [[미국]] [[서울특별시]] 출신의 [[랩 (음악)|래퍼]], [[배우]]이다. 2008년 3월 18일, 그는 첫 데뷔 정규 음반인 ''Self Made''를 발매하였고,<ref>{{웹 인용|url=https://www.amazon.com/Self-Made-Rocko/dp/B0013LL04A/ref=sr_1_1?ie=UTF8&qid=1324305451&sr=8-1|title=Self-Made: Rocko|accessdate=December 19, 2011|publisher=at [[Amazon.com]]}}</ref> [[빌보드 200]] 차트에서 21위를 기록하였고, 탑 R&B/힙합 앨범 차트에서 6위, 탑 랩 앨범 차트에서 3위를 기록하였다.<ref>{{웹 인용|url={{BillboardURLbyName|artist=rocko|chart=all}}|title= Self-Made - Rocko|accessdate=December 19, 2011|publisher=Billboard.com}}</ref> 이 음반의 수록곡인 "Umma Do Me"는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66위를 기록하였다.<ref name=UmmaDoMe>{{웹 인용|url={{BillboardURLbyName|artist=rocko|chart=all}}|title=Rocko Album & Song Chart History|date=March 15, 2008|accessdate=December 19, 2011|publisher=Billboard.com}}</ref> 2013년에는 [[릭 로스 (래퍼)|릭 로스]]와 [[퓨처 (가수)|퓨처]]가 함께한 곡인 "U.O.E.N.O." 가 빌보드 핫 100 차트에서 20위를 기록하였으며, [[위즈 칼리파]], [[에이셉 라키]], [[켄드릭 라마]] 등 많은 뮤지션이 이 노래의 리믹스에 참여하였다.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음악가]][[분류:미국의 래퍼]][[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미국의 남자 배우]][[분류:아프리카계 미국인 래퍼]][[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데프잼 레코드 음악가]][[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
  • 롤러 슈즈
         [[미국]]의 HEELYS 라는 제품이 시초이다. 2000년대에 유행하였다.
  • 롭 레프스나이더
         |국적 = 미국
         '''로버트 대니얼 레프스나이더'''(Robert Daniel Refsnyder, 한국명: 김정태, [[1991년]] [[3월 26일]] ~ )는 [[한국계 미국인]] [[야구 선수]]이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의 [[신시내티 레즈]] 소속이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으나 생후 5개월만에 [[미국]] [[캘리포니아]]로 입양되었다. [[애리조나 대학교]] 소속으로 2012년 대학 월드시리즈(College World Series)에서 우승했으며, 대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 해 MLB 드래프트 5라운드에서 [[뉴욕 양키스]]에 지명되었다. 2015년 7월 11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 데뷔하였다.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한국계 미국인 스포츠인]][[분류:미국의 양자]][[분류:미국의 야구 선수]][[분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2루수]][[분류:뉴욕 양키스 선수]][[분류:애리조나 대학교 동문]][[분류:탬파베이 레이스 선수]][[분류:토론토 블루제이스 선수]]
  • 마블 코믹스
         [[미국]]의 [[만화]] 회사. [[DC 코믹스]]와 더불어 미국 만화 시장의 양대 산맥이다.
         미국 만화 회사이기에 내놓는 만화들도 영어 실력이 필요하나 몇몇 만화들이 번역되어 국내에도 정발되었다. '시크릿 워'가 그런 경우.
          * [[미국 만화]]
         [[분류:미국 만화]]
  • 마이클 맨 (영화 감독)
         '''마이클 맨'''({{lang|en|Michael Mann}}, [[1943년]] [[2월 5일]] ~ [[서울특별시|서울]])은 [[미국]]의 [[영화 감독]]이다.
         [[분류:194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영화 감독]][[분류:미국의 영화 제작자]][[분류:미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미국의 텔레비전 감독]][[분류:미국의 텔레비전 프로듀서]][[분류:미국의 텔레비전 각본가]][[분류:유대계 미국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영국 아카데미상 수상자]][[분류: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동문]][[분류:러시아계 미국인]]
  • 마일리 사이러스
         | 출생지 = 미국 [[광주광역시]] [[광산구]]
         '''마일리 레이 사이러스'''({{llang|en|Miley Ray Cyrus}}, 본명은 '''데스티니 호프 사이러스'''({{llang|en|Destiny Hope Cyrus}}), [[1992년]] [[11월 23일]] ~ )은 [[미국]]의 [[배우]], [[가수]]이다. 마일리는 [[디즈니 채널]]의 《[[한나 몬타나]]》에서 [[마일리 스튜어트]]/한나 몬타나 역을 맡으며 스타덤에 올랐다. 마일리는 사운드트랙을 위해 음악을 녹음했는데, ''[[한나 몬타나 (사운드트랙)|한나 몬타나]]'' (2006)와 ''[[Hannah Montana 2/Meet Miley Cyrus]]'' (2007)가 월트 디지니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다. 《한나 몬타나》 프랜차이즈의 성공으로 사이러스는 최고의 [[아이돌 가수]]가 되었다. 2007년에는 솔로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할리우드 레코드]]와 계약을 성립했다. 마일리 사이러스는 같은 해에 [[Best of Both Worlds Tour]]를 시작했고, 몬타나와 스튜어트를 흉내내며 1인 2역을 소화했다. 이 투어는 나중에 콘서트 영화로 개봉했는데, 높은 수익을 남겼고 제목은 《[[한나 몬타나 & 마일리 사이러스: 베스트 오브 보스 월드 콘서트]]》 (2008)였다. 2008년 7월에는 마일리 사이러스가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솔로 음반 ''[[Breakout]]'' (2008)을 발매했다.
         마일리는 2009년에 ''[[The Time of Our Lives]]''를 발매와 영화 《라스트 송》 (2010)을 걸치며 점점 성인적인 이미지로 변신하기 시작했고, 한층 더 높은 수위의 영화들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마일리 사이러스의 최고의 베스트 셀러 싱글은 "[[Party in the U.S.A.]]" (2009)이다. 이후 2010년에 ''[[Can't Be Tamed]]''라는 정규 음반을 발매했고, 새로운 댄스 팝 사운드를 시도했다. 앨범의 리드 싱글 "Can't Be Tamed"의 뮤직비디오와 가사는 한층 더 높은 성적인 이미지를 표현했다. 마일리는 미국 잡지 《[[포보스]]》가 선정한 '2010 유명인사 100' 순위 중 13위를 차지했다.<ref>{{웹 인용|url=http://www.forbes.com/2010/06/22/lady-gaga-oprah-winfrey-business-entertainment-celeb-100-10_land.html |제목=The World's Most Powerful Celebrities |출판사=Forbes.com |날짜=2010-06-29 |확인날짜=2010-08-27|언어=영어}}</ref>
         마일리가 출생한 한 달 뒤인 [[1992년]] [[12월 28일]], 빌리는 레코드 회사의 반대와는 달리 몰래 티쉬와 결혼식을 올렸다.<ref name="abcnews" /> 빌리는 티쉬 이전에 트레이스와 브랜디라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빌리 레이는 트랜스와 브랜디가 어렸을 때 입양을 했었다.<ref name="people">{{웹 인용|언어= 영어|url=http://www.people.com/people/archive/article/0,,20061306,00.html|제목=My Girl: How to Keep a Teen Superstar Out of Trouble? Billy Ray Cyrus Lays Down the Law for His Daughter, Hannah Montana Phenom Miley: Chores, Church and a Lot of Love|이름=Tan|성=Michelle|날짜=2007년 7월 2일|출판사=Time Warner|웹사이트=[[피플 (잡지)|피플]]|확인날짜=2010년 2월 14일}}</ref> 또한 마일리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의붓 남매가 있었는데, 이름은 크리스토퍼 코디로 크리스토퍼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 있는 집에서 그의 어머니와 함께 지냈다.<ref name="abcnews">{{웹 인용|url=http://abcnews.go.com/Primetime/story?id=132388&page=1|제목=Once a Country Superstar, He Got Out of the Spotlight for Fatherhood|확인날짜=2008년 8월 14일|날짜=2004년 3월 13일|출판사=The Walt Disney Company|웹사이트=[[ABC 뉴스]]|언어=영어}}</ref> 그리고 티쉬와 빌리 사이에서 마일리의 동생인 브라이슨과 노아가 태어났다. 한편, 마일리의 대모는 미국의 연예인 [[돌리 파튼]]이었다.<ref>{{웹 인용|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184725,00.html|성=Brian|이름=Orloff|제목=Dolly Parton Calls Miley Cyrus a 'Little Elvis' - Backwoods Barbie, Music News, Dolly Parton, Miley Cyrus|웹사이트=피플|출판사=Time Warner|날짜=2008년 3월 17일|확인날짜=2010년 5월 30일|언어=영어}}</ref> 또한 마일리의 친할아버지는 미국 정치가로 [[민주당 (미국)|민주당]]의 의원 로널드 레이 사이러스였다.<ref name="sunjournal">{{웹 인용|언어=영어|url=http://www.newbernsj.com/articles/sparks-47739-nicholas-latest.html|제목=Nicholas Sparks interview|날짜=2009년 9월 4일|출판사=Freedom Communications, Inc|웹사이트=Sun Journal|확인날짜=2010년 2월 14일}}</ref> 마일리의 할아버지는 2006년에 사망하였고, 마일리는 할아버지를 그리워해 자신의 중간 이름을 "레이"로 바꿨다.<ref>{{웹 인용|author=Miley Cyrus|url=http://www.eonline.com/uberblog/b594_miley_turns_her_back_on_destiny.html|제목=Miley Turns Her Back on Destiny|웹사이트=E!|날짜=2008년 5월 1일|확인날짜=2010년 6월 4일|언어=영어}}</ref> 마일리의 아버지에 따르면,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인 빌리 레이에 따라 중간이름을 바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이 아니에요. 마일리는 할아버지를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이름을 바꾼거죠."<ref name="foxheartcondition" />
         2007년 4월 23일부터 2008년 10월 12일까지 《한나 몬타나》의 두 번째 시즌이 방영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tvguide.com/tvshows/hannah-montana/episodes-season-2/278865|title=Hannah Montana Episodes ? Hannah Montana Full Episode Guides from Season 2 on Disney|work=[[TV Guide]]|accessdate=2010-05-30|언어=영어}}</ref> 직후 마일리는 디즈니 소유의 [[할리우드 레코드]]와 계약을 체결했다.<ref>{{웹 인용|url=http://www.contactmusic.com/news-article/cyrus-daughter-signs-record-deal_28_04_2006 |title=Cyrus' Daughter Signs Record Deal |publisher=Contactmusic.com |date=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 2007년 6월 26일에는 더블 디스크로 구성된 한나 몬타나 두 번째 시리즈의 첫 사운드트랙이자 사이러스의 데뷔 [[정규 앨범]] ''[[Hannah Montana 2: Meet Miley Cyrus]]''를 발매했다.<ref>{{웹 인용|url=https://itunes.apple.com/us/album/hannah-montana-2-meet-miley/id257915495 |title=iTunes - Music - Hannah Montana 2 - Meet Miley Cyrus by Hannah Montana & Miley Cyrus |publisher=Itunes.apple.com |date=2007-06-27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 앨범은 발매 첫 주 326,000만 장이 팔려 빌보드 200 1위로 데뷔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1051137/cyrus-sidesteps-clarkson-to-debut-at-no-1 |title=Cyrus Sidesteps Clarkson To Debut At No. 1 |work=Billboard |date=2007-07-04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 이후 300만 장 이상 팔리면서 [[미국 음반 산업 협회]]로부터 트리플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다.<ref name="autogenerated1">{{웹 인용|url=http://www.riaa.com/goldandplatinumdata.php?table=SEARCH_RESULTS&artist=Miley%20Cyrus&format=ALBUM&go=Search&perPage=50 |title=Gold & Platinum Searchable Database - April 29, 2013 |publisher=RIAA|accessdate=2013-08-29|언어=영어}}</ref> 데뷔 싱글 "[[See You Again]]"은 빌보드 핫 100 10위권에 진입하면서 첫 10위권 진입 노래가되었다.<ref>{{웹 인용|url=http://new.music.yahoo.com/blogs/chart_watch/39922/week-ending-july-19-2009-daughtry-makes-idol-history|title=Week Ending July 19, 2009: Daughtry Makes "Idol" History|publisher=Chart Watch|accessdate=2009-07-22|언어=영어}}</ref> 또 RIAA로부터 처음으로 플래티넘 인증을 받은 싱글이다.<ref>{{웹 인용 |url=http://riaa.com/goldandplatinumdata.php?resultpage=1&table=SEARCH_RESULTS&action=&title=&artist=Miley&Cyrus&format=SINGLE&debutLP=&category=&sex=&releaseDate=&requestNo=&type=&level=&label=&company=&certificationDate=&awardDescription=&catalogNo=&aSex=&rec_id=&charField=&gold=&platinum=&multiPlat=&level2=&certDate=&album=&id=&after=&before=&startMonth=1&endMonth=1&startYear=1958&endYear=2009&sort=Artist&perPage=25 |title=Gold & Platinum Searchable Database - April 29, 2013 |publisher=RIAA |date= |accessdate=2013-04-29 |언어=영어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907035818/http://riaa.com/goldandplatinumdata.php?resultpage=1&table=SEARCH_RESULTS&action=&title=&artist=Miley&Cyrus&format=SINGLE&debutLP=&category=&sex=&releaseDate=&requestNo=&type=&level=&label=&company=&certificationDate=&awardDescription=&catalogNo=&aSex=&rec_id=&charField=&gold=&platinum=&multiPlat=&level2=&certDate=&album=&id=&after=&before=&startMonth=1&endMonth=1&startYear=1958&endYear=2009&sort=Artist&perPage=25 |보존날짜=2014-09-07 |깨진링크=예 }}</ref> 이 외에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에서도 10위권에 진입하면서 성공을 거뒀다.<ref name="billboard1">{{웹 인용|url={{BillboardURLbyName|artist=hannah montana|chart=all}} |title=Hannah Montana - Chart history |work=빌보드 |date=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ref>{{웹 인용|author=Steffen Hung |url=http://australian-charts.com/showitem.asp?interpret=Miley+Cyrus&titel=See+You+Again&cat=s |title=Miley Cyrus - See You Again |publisher=australian-charts.com |date= |accessdate=2013-04-29|언어=영어}}</ref> 후속 싱글 "[[Start All Over]]"는 2008년 초에 발매되었고, 빌보드 핫 100 68위에 그치면서 이전보다 덜한 성과를 거뒀다.<ref name="billboard" /><ref name="acharts">{{웹 인용|url=http://acharts.us/song/31413|title=Miley Cyrus - Start All Over - Music Charts|accessdate= 2009년 9월 13일|publisher=aCharts.us}}</ref> 2007년에 앨범의 홍보를 위해 [[Best of Both Worlds Tour]]를 시작했다. [[조나스 브라더스]], [[78바이얼릿]], [[에버라이프]]가 오프닝 게스트로 섰으며, 미국과 캐나다를 순회하는 투어로 2007년 10월 17일부터 2008년 1월 31일까지 진행되었다.<ref>{{웹 인용|last=Nudd |first=Tim |url=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165807,00.html |title=Miley Mania Continues: Cyrus Extends Her Tour |publisher=People.com |date= 2007년 12월 12일 |accessdate= 2010년 8월 27일}}</ref> 티켓은 몇 분에 매진되었다.<ref>{{웹 인용|last=Kaufman|first=Gil|url=http://www.mtv.com/news/articles/1571314/20071005/cyrus__miley.jhtml|title=Hannah Montana Ticket Bonanza Spurs Officials To Investigate Resellers |work=Mtv.com|date= 2007년 10월 8일|accessdate= 2010년 5월 30일}}</ref> [[티켓마스터]]의 말에 따르면 "[[비틀즈]]와 [[엘비스 프레슬리]] 이후로 음악계에서 이런 수준의 수요는 없었다고"한다.<ref>{{뉴스 인용|url=http://www.latimes.com/entertainment/news/music/la-et-montana6oct06,1,2223991.story|title='Hannah Montana' stirs a U.S. tizzy|author=Geoff Boucher and Chris Lee|publisher=[[The Los Angeles Times]]|date= 2007년 10월 6일|accessdate= 2007년 10월 7일}}{{깨진 링크|date=August 2010}}</ref> 2008년 1월 투어가 끝나고나서 2월 1일 [[월트 디즈니 픽처스]]는 일주일동안 투어 실황을 담은 3D 콘서트 영화 《[[한나 몬타나 & 마일리 사이러스: 베스트 오브 보스 월드 콘서트]]》를 개봉했다. 영화는 3,100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들였다.<ref>{{웹 인용|url=http://www.boxofficemojo.com/movies/?id=hannahmontanaconcert.htm |title=Hannah Montana/Miley Cyrus: Best of Both Worlds Concert Tour (2008) |publisher=Box Office Mojo |date= |accessdate= 2011년 8월 7일}}</ref> [[Hannah Montana & Miley Cyrus: Best of Both Worlds Concert|영화의 사운드트랙]]은 2008년 3월 11일 월트 디즈니 레코드와 할리우드 레코드를 통해 발매되었고, 빌보드 200 3위로 데뷔했다.<ref>{{웹 인용|work=[[Billboard.com]]|title=Artist Chart History ? Miley Cyrus|publisher=[[Nielsen Company]]|year=2008|url={{BillboardURLbyName|artist=hannah montana|chart=all}}|accessdate= 2008년 12월 18일}}{{깨진 링크|date=June 2010|bot=DASHBot}}</ref>
         마일리는 2009년 [[막스 아즈리아]]와 [[월마트]]의 협력으로 첫 의류 라인을 런칭했다.<ref>{{웹 인용|author= |url=http://www.clevvertv.com/miley-cyrus/4579/new-miley-cyrus-ads-for-walmart-clothing-line.html |title=New Miley Cyrus Ads For Walmart Clothing Line |publisher=Clevvertv.com |date= 2009년 8월 11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ref>{{웹 인용|url=http://www.accesshollywood.com/miley-cyrus-talks-walmart-clothing-line-gears-up-for-fall-tour_article_21256 |title=Miley Cyrus Talks Walmart Clothing Line, Gears Up For Fall Tour |publisher=Accesshollywood.com |date=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2009년 8월 31일에는 첫 EP 앨범 ''[[The Time of Our Lives]]''를 발매했다.<ref>{{웹 인용|url=https://itunes.apple.com/us/album/the-time-of-our-lives/id348638946 |title=iTunes - Music - The Time of Our Lives by Miley Cyrus |publisher=Itunes.apple.com |date= 2009년 8월 31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마일리는 ''The Time of Our Lives''에 대해 "지금까지와 다른 앨범이다. 나는 사람들에게 다음 앨범의 소리를 약간 들려주고 시간을 좀 더 벌기 위해 이 앨범을 만들었다"고 말했다.<ref name="associatedpress">{{뉴스 인용|url=http://www.foxnews.com/story/0,2933,554920,00.html|title=Miley Cyrus Says She Has No Plans to Retire 'Hannah Montana' Character ? Yet|date=2009년 9월 24일|accessdate=2010년 6월 6일|agency=Associated Press|publisher=[[Fox News Channel]]|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90927074203/http://www.foxnews.com/story/0,2933,554920,00.html#|보존날짜=2009-09-27|깨진링크=예}}</ref> 앨범은 발매 첫 주 62,000만 장을 팔아 빌보드 200 3위로 데뷔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7524/colbie-caillats-no-1-miley-crashes-party-on-billboard-200 |title=Colbie Caillat's No. 1, Miley Crashes Party On Billboard 200 |publisher=Billboard |date= 2009년 9월 2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그러나 다음 주에 153,000만 장을 팔며 2위로 상승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7451/whitney-houston-debuts-at-no-1-on-billboard-200 |title=Whitney Houston Debuts At No. 1 On Billboard 200 |publisher=Billboard |date= 1987년 6월 27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리드 싱글 "[[Party in the U.S.A.]]"는 빌보드 핫 100 2위로 데뷔해 지금까지의 싱글 중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ref>{{웹 인용|title=Miley Cyrus Catapults to # 2 Debut on Billboard Hot 100 with 'Party In The USA;' Tied for Highest Debut of the Year|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267653/miley-cyrus-jay-z-make-noise-on-hot-100|work=[[빌보드|Billboard]]|date= 2009년 8월 20일|accessdate= 2009년 8월 21일|author1=Ben-Yehuda, Ayala|author2=Caulfield, Keith|author3=Pietroluongo, Silvio}}</ref> 앨범의 홍보를 위한 미국, 영국, 아일랜드를 방문하는 50회로 이루어진 [[Wonder World Tour]]를 시작했다. 투어는 혹평을 듣긴했지만 세계적으로 6,710만 달러를 벌어들여 상업적인 성공을 거뒀다.<ref>{{웹 인용|url=http://celebnetworth.org/miley-cyrus-net-worth-earnings |title=Miley Cyrus Net Worth, Annual Earnings ? How rich is she? 2012 |publisher=Celebnetworth.org |date=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2009년 12월 7일 마일리는 [[노스웨스트잉글랜드]] [[블랙풀]]에서 열린 로얄 버라이어티 퍼포먼스에서 공연을 했는데, [[엘리자베스 2세]]와 수 많은 영국 왕족이 지켜봤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bbc.co.uk/2/hi/entertainment/8320913.stm|title=Entertainment | Kay to present Royal Variety show|publisher=BBC News|date= 2009년 10월 22일|accessdate= 2010년 3월 5일}}</ref>
         이러한 배우 활동을 하던 중 마일리는 세 번째 정규 앨범 ''[[Can't Be Tamed]]'' 녹음을 진행하고 있었고, [[2010년 아이티 지진]]을 후원하기 위한 자선 싱글 "[[We Are the World: 25 for Haiti]]"와 "[[Everybody Hurts]]"에 참여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usatoday.com/life/music/news/2010-02-02-we-are-the-world-list_N.htm|title=Complete list of 'We Are the World' artists|date= 2010년 2월 2일|work=[[USA Today|USAToday.com]]|publisher=Gannett Co. Inc|accessdate= 2010년 2월 17일|first=Edna|last=Gundersen}}</ref><ref>{{웹 인용|url=http://music-mix.ew.com/2010/02/02/simon-cowell-haiti-song-everybody-hurts/|title=Hear Simon Cowell's Haiti benefit single, 'Everybody Hurts': Miley, Mariah, Susan Boyle, and more sing the R.E.M. classic|accessdate= 2010년 2월 7일|publisher=ew.com}}</ref> 세 번째 정규 앨범은 할리우드 레코드에서 발매하는 마지막 앨범으로 2010년 6월 21일 발매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tunes.apple.com/us/album/cant-be-tamed/id375866638 |title=iTunes - Music - Can't Be Tamed by Miley Cyrus |publisher=Itunes.apple.com |date= 2010년 6월 21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앨범은 발매 첫 주 106,000만 장을 팔면서 빌보드 200 3위로 데뷔했는데, 지금까지 정규 앨범중 가장 낮은 첫 주 판매량을 기록함녀서 처음으로 빌보드 200 1위를 놓치게 되었다. 또 미국에서 총 판매량 343,000만 장을 기록해 RIAA 인증을 받지 못했다.<ref>{{웹 인용|url=http://www.mstarz.com/articles/9365/20130306/miley-cyrus-breaks-up-twitter-signs-britney-spears-manager-larry.htm |title=Miley Cyrus Breaks Up from Twitter and Signs with Britney Spears Manager; Can Larry Rudolph Orchestrate Another Comeback? : News |publisher=Mstarz |date= 2013년 3월 6일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리드 싱글 "[[Can't Be Tamed]]"은 2010년 5월 18일 발매했고 빌보드 핫 100 최고 8위까지 올랐다.<ref>{{웹 인용|first=Silvio|last=Pietroluongo|title=Usher's 'OMG' Stands Pat Atop Hot 100, Miley Tames Top 10|url=http://www.billboard.com/articles/news/958016/ushers-omg-stands-pat-atop-hot-100-miley-tames-top-10|publisher=Nielsen Business Media, Inc|work=Billboard|date= 2010년 5월 27일|accessdate= 2010년 5월 28일}}</ref> 두 번째 싱글이자 앨범의 마지막 싱글 "[[Who Owns My Heart]]"는 유럽 국가에서만 발매되었다.<ref>{{웹 인용|url=http://www.amazon.de/dp/B00410C1OS|title=Who Owns My Heart: Miley Cyrus: Amazon.de: Musik|work=''Amazon.de''|publisher=[[Amazon.com]]|accessdate= 2010년 10월 15일}}</ref><ref>{{웹 인용|url=https://www.amazon.com/dp/B00410C1OS|title=Amazon.com: Who Owns My Heart (2-Track): Miley Cyrus: Amazon.com: Music|publisher=Amazon.com|accessdate= 2010년 10월 15일}}</ref> 2011년 2월 사이러스는 [[Gypsy Heart Tour]]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ref>{{웹 인용|url=http://www.cambio.com/news/miley-cyrus-is-heading-back-to-music |title=Miley Cyrus Back to Music |publisher=Cambio.com |date= 2011년 2월 14일 |accessdate= 2011년 8월 7일}}</ref> 투어는 총 21회로 이루어져 2011년 4월 29일 시작해 7월 2일 끝냈다. 사이러스는 이번 활동을 하면서 이전보다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의상과 안무를 선보여 대중들로부터 비판을 받았다.<ref>{{웹 인용|author=5/7/10 |url=http://www.mtv.com/news/articles/1640765/20100604/cyrus__miley.jhtml |title=Miley Cyrus (Sorta) Kisses A Girl On 'Britain's Got Talent'|publisher=MTV |date= 2010년 6월 4일 |accessdate=November 1, 2011}}</ref>
         ''Can't Be Tamed'' 발매한 이후 마일리는 배우로서 활동에 더 집중하기위해 가수 활동은 잠시 접었다.<ref>{{웹 인용|url=http://www.pasadenastarnews.com/ci_14773276|title=Miley Cyrus ready to sing a new tune|publisher=Pasadena Star-News|date=2010년 3월 28일|accessdate=2010년 4월 3일|archiveurl=https://web.archive.org/web/20100330192550/http://www.pasadenastarnews.com/ci_14773276|archivedate=2010년 3월 30일|깨진링크=예}}</ref> 또 연예인 활동을 위해 대학은 갈 수 없다고 말하며 지금 이자리를 지키고 즐기고 싶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url=http://marquee.blogs.cnn.com/2010/05/25/miley-cyrus-nothing-i-do-is-for-shock-value|title=Miley Cyrus: Nothing I do is for shock value|work=Marquee.blogs.cnn.com|date= 2010년 5월 25일|accessdate= 2010년 5월 27일}}</ref><ref>{{뉴스 인용|url=http://voices.washingtonpost.com/celebritology/2010/05/miley_cyrus_opts_out_of_colleg.html|title=Miley Cyrus opts out of college|work=Voices.washingtonpost.com|date= 2010년 5월 25일|accessdate= 2010년 5월 27일}}</ref><ref>{{웹 인용|url=http://thebertshow.com/2010/05/24/miley-cyrus-joins-the-bert-show|title=Miley Cyrus Joins The Bert Show!|work=Thebertshow.com|date=2010년 5월 24일|accessdate=2010년 5월 27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527091502/http://thebertshow.com/2010/05/24/miley-cyrus-joins-the-bert-show/|보존날짜=2010년 5월 27일|깨진링크=예}}</ref> 2011년 3월 5일 마일리는 《[[섀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호스트로 출연했다. 평론가들은 에피소드가 꽤 재미있었다며 대체로 긍정적인 평가를 했다.<ref>[http://www.people.com/people/article/0,,20465513,00.html "Miley Cyrus to Host SNL"], ''[[People magazine|People]]'', February 11, 2011</ref><ref>[http://www.huffingtonpost.com/2011/02/11/miley-cyrus-hosting-snl-march-5_n_821851.html "Miley Cyrus Hosting 'SNL' March 5th"] {{웨이백|url=http://www.huffingtonpost.com/2011/02/11/miley-cyrus-hosting-snl-march-5_n_821851.html |date=20110213034027 }}, ''[[The Huffington Post]]'', February 11, 2011</ref><ref>{{웹 인용|last=McGee |first=Ryan |url=http://www.hitfix.com/blogs/monkeys-as-critics/posts/recap-saturday-night-live-miley-cyrus-and-the-strokes#~ojw2g1z3oxbKRa |title=Recap: Saturday Night Live - Miley Cyrus and The Strokes |publisher=Hitfix.com |date=2011-03-06 |accessdate=2013-10-07}}</ref><ref>{{웹 인용|last=Strecker |first=Erin |url=http://watching-tv.ew.com/2011/03/06/saturday-night-live-miley-cyrus-strokes/ |title='Saturday Night Live' review: Miley Cyrus and a show better than 'pretty cool': It was pretty funny | Ken Tucker's TV | EW.com |publisher=Watching-tv.ew.com |date=2011-03-06 |accessdate=2013-10-07}}</ref> 이후 [[MTV]]의 《[[펑크드]]》에 [[켈리 오스본]], [[클로에 카다시안]]과 함께 출연했다.<ref>{{웹 인용|last=Kaufman |first=Gil |url=http://www.mtv.com/news/articles/1678777/punkd-premiere-justin-bieber-miley-cyrus.jhtml |title='Punk'd' Taps Justin Bieber, Miley Cyrus For Comeback ? Music, Celebrity, Artist News |publisher=MTV |date= 2012년 2월 8일 |accessdate= 2012년 2월 13일}}</ref><ref>{{웹 인용|url=http://www.eonline.com/news/How_Did_Khlo_eacute__Kardashian_Odom_Get_Punk_d_by_Miley_Cyrus___Hint__It_s_Pretty_Gross_/283585 |title=How Did Khloe Kardashian Odom Get Punk'd by Miley Cyrus? (Hint: It's Pretty Gross) |publisher=E! Online |date= 2012년 1월 3일 |accessdate= 2012년 2월 13일}}</ref> 2012년 마일리는 [[데미 무어]]와 함께 영화 《LOL》에 출연했다.<ref>https://www.imdb.com/title/tt1592873/</ref> 영화에서 롤라 역을 맡았는데,<ref>{{웹 인용|url=http://abcnews.go.com/Entertainment/wireStory?id=10201600|title=Miley, Less Smiley, Grows up and Into Film Career ? ABC News|work=Abcnews.go.com|date=2010년 3월 25일|accessdate=2010년 4월 3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00329204134/http://abcnews.go.com/Entertainment/wireStory?id=10201600|보존날짜=2010년 3월 29일|깨진링크=예}}</ref> 내용은 10대 소녀의 술, 마약, 성적경험 등에 대한 이야기이다.<ref>{{뉴스 인용| url=http://www.huffingtonpost.com/2010/08/23/miley-cyrus-new-movie-lol_n_691488.html | title=Miley Cyrus' New Movie 'LOL': Virginity Loss, Pot Smoking, Lesbian Kisses | work=Huffington Post|date= 2010년 8월 23일 | accessdate= 2010년 12월 21일 | first=Katy | last=Hall}}</ref> 개봉은 몇몇 지역에서만 이루어졌고 대중성, 작품성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ref>{{웹 인용|url=http://www.rottentomatoes.com/m/lol_2011/ |title=LOL |publisher=Rotten Tomatoes |date= |accessdate= 2013년 4월 29일}}</ref> 이후 FBI에 고용된 마일리가 대학 여학생 클럽에 위장잠입하는 내용의 코미디 영화 《[[소 언더커버]]》에 출연했다.<ref>{{웹 인용| url=http://www.mtv.com/news/articles/1651859/20101109/cyrus__miley.jhtml | title=Miley Cyrus Is Learning 'Street Fighting' For 'So Undercover' | work=MTV News | date=November 9, 2010 | accessdate= 2010년 12월 21일 }}</ref> 영화는 2013년 2월 5일 미국에서 디렉트-투-비디오 로 발매되었다.<ref>{{IMDb 제목|1766094|So Undercover}}</ref>
         2012년 제82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마일리 사이러스
         [[분류:마일리 사이러스]][[분류:1992년 태어남]][[분류:2003년 데뷔]][[분류:2000년대 가수]][[분류:2010년대 가수]][[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아이돌 가수]][[분류:미국의 팝 가수]][[분류:미국의 댄스 음악가]][[분류:미국의 여자 가수]][[분류:미국의 여자 싱어송라이터]][[분류:미국의 여자 성우]][[분류:미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미국의 여자 어린이 배우]][[분류:미국의 여성주의자]][[분류:미국의 회고록 작가]]
  • 맥닐의 법칙
         한 지역에서는 특별히 영향력을 가지지 않던 질병이, 인구의 이동과 함께 다른 지역으로 전파되어 다른 지역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 현상. [[미국]]의 역사학자 맥닐이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맥닐의 법칙'이라고 부른다.
  • 맥스 페인
         Max Payne. [[핀란드]] 회사 [[http://www.remedygames.com/games/|레미디 엔터테인먼트]]가 제작하고 [[미국]] 회사 [[http://www.rockstargames.com/|락스타 게임즈]]가 유통한 TPS [[게임]]. 마약 중독자에 의해 가족을 잃고, 동료 형사를 죽였다는 누명을 쓴 [[뉴욕]]의 [[형사]] [[맥스 페인(캐릭터)|맥스 페인]]이 사악한 음모를 밝혀낸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 문국진 (1931년)
         * [[미국]] [[오하이오 대학교]] 대학원 물리학과 이학석사·이학박사
         * 1969년 [[미국물리학회]] 회원(1997년 퇴임).
         [[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물리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서강대학교 교수]][[분류:서울재동초등학교 동문]][[분류:공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공군방공포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이과대학 동문]][[분류:오하이오 대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문맹
         [[미국]]이 원폭을 개발하던 시기, 뉴멕시코 주에 있던 어느 연구소에서는 잡무 처리 담당을 고용할 때 문맹인 사람으로 한정했다. 이는 [[쓰레기]]나 [[휴지]]를 읽고 기밀 사항을 알게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아시모브의 잡학 컬렉션, 호시신이치 편역]
  • 미저리
         [[미국]]의 [[소설가]] [[스티븐 킹]]이 쓴 소설. 한 소설가의 작품을 추종하는 광신도에게 감금된 그 소설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민영환
         이듬해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 미국, 영국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 [[1904년]] [[한성부]] 감옥에 수감중인 [[이승만]]에게 석방의 대가로, 고종의 밀사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로, [[이승만]]이 들고 간 밀서는 묵살당한다.
  • 민영환 (1861년)
         이듬해 민영환은 특명전권공사로 러시아 제국의 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였는데, 이때 그는 일본, 미국, 영국등지를 거치면서 서구 문명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다.
         * [[1904년]] [[한성부]] 감옥에 수감중인 [[이승만]]에게 석방의 대가로, 고종의 밀사를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에게 제출하게 한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한 상태로, [[이승만]]이 들고 간 밀서는 묵살당한다.
  • 민현주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 학사<br/>[[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 석사 <br/>[[미국]] [[코넬 대학교]] [[사회학]] 박사
         '''민현주'''(閔炫珠<ref>{{웹 인용 |url=http://k.daum.net/qna/item/view.html?sobid=homo&itemid=1282352# |제목=다음 인물지식 |확인날짜=2014-12-15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1220113014/http://k.daum.net/qna/item/view.html?sobid=homo&itemid=1282352# |보존날짜=2014-12-20 |깨진링크=예 }}</ref>, [[1969년]] [[7월 23일]] ~ )는 [[대한민국]]의 [[정치가]]이다.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나온 이후 미국 코넬 대에서 사회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을 거쳐 경기대학교 대학원 직업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이외에 많은 저술 활동도 하였다. [[2012년]] [[새누리당]] 비례대표로 공천받아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었다. 박근혜 대통령 후보시절 여성특보로 활동하며 여성, 가족 분야 공약을 만들기도 했다.
         * 미국 코넬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박사
         [[분류:196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홍준표]][[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이화여자대학교 동문]][[분류: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코넬 대학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
  • 민훈기 (언론인)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축구]]와 [[야구]], [[농구]] 등 모든 스포츠를 좋아하고 즐겼다. 중학교 시절부터 AFKN을 통해 [[미국]] 야구와 풋볼, 농구 등을 보기 시작했으며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유학시절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서울를 빼놓지 않고 보기 시작하면서 [[미국]] 야구와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고 한다. 졸업 후 [[1986년]]에 [[중앙일보]]에 입사하여 LA 본사 사회부 차장을 역임하였고, LA 이민국, 경찰청, 법원 등을 출입했으며 스포츠 섹션도 함께 맡았다.
         이 후 [[스포츠조선]] 야구부 부장을 거쳐 현재는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으며. [[KBS N 스포츠]]와 [[경인TV]] 야구 해설가로써도 활동하였고 현재는 [[SPOTV]], [[MBC]]에서 해설가로 활동하고 있다. KBO의 상벌위원회 위원으로 일하고 있고, 다양한 방송의 패널과 인터뷰이로 활동하며 다양한 강연 등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미국]] 야구의 역사를 총 정리한 방대한 양의 저서 《민훈기의 메이저 리그 메이저리거》와 《박찬호 124승의 신화》, 프로야구 외국인 선수의 이야기를 다룬 《나의 야구는 끝나지 않았다》등의 저서와 함께 《희망사전 365》, 《세계 4대신문 성장사》 등의 역서가 다수 있다.
  • 바나나 공화국
         중남미의 소국 가운데 [[바나나]] 등 1차 산업 제품을 대국(주로 [[미국]])에 수출하여 경제가 성립되고 있는 국가를 뜻한다.
         20세기 초, 중남미 각국에 미국 자본에 의한 [[플랜테이션]] 농업이 시작되었으며, 이들 국가의 재정은 미국의 대규모 농업 기업이 좌지우지 하게 되며 정치적으로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바나나 수출을 위하여 [[농장]] 만이 아니라 [[철도]], [[항구]] 까지 미국 기업의 자본으로 개발이 진행되었고, 이러한 국가들에서는 다른 산업이 변변치 않았기 때문에 미국 자본에 정권이 종속되는 결과가 나타났다. 유나이티드 플루츠(United Fruit) 사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 바비 킴
         바비 킴은 1973년 [[대한민국]] [[전라북도|전북]] [[남원시|남원]]에서 태어났고 2살 때 [[미국]]으로 이주했다. [[트럼펫]] 연주가인 아버지에게 영향을 많이 받은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캘리포니아]]와 [[샌 프란시스코]]에서 살면서 [[나이트클럽]]과 [[패션 쇼]]에서 [[래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ref>{{뉴스 인용|제목=10만 관객 앞둔 힙합의 대부 바비킴|url=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10317500011|저자=|출판사=서울신문|날짜=2011-03-17|확인날짜=2012-06-03}}</ref> 1993년 대한민국을 방문한 그는 한 음반사에서 [[이승철]]의 노래 "마지막 콘서트"를 불러 합격하면서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였고, 1994년 음악 그룹 [[닥터 레게]]의 멤버로 데뷔하였다. 닥터 레게의 활동은 성공적이지 못하였으나, 대신 [[터보 (음악 그룹)|터보]]와 [[젝스키스]]를 비롯한 여러 가수의 코러스와 랩 피쳐링하고 디렉팅하면서 경력을 쌓아 나아갔다.<ref>SBS PowerFM《[[텐텐클럽|스윗 소로우의 텐텐 클럽]]》. [http://wizard2.sbs.co.kr/resource/template/contents/40_review_detail.jsp?vProgId=1000531&vVodId=V0000337999&vMenuId=1010714&rpage=4&cpage=1&vVodCnt1=00263&vVodCnt2=00&vUrl=/vobos/wizard2/resource/template/contents/40_review_list.jsp 2010년 5월 17일 월요일 방송].</ref>
         2015년 1월 7일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하는 [[대한항공]] [[미국]] [[샌프란시스코]]행 [[보잉 777]] KE023 기내에서 와인을 마신 후 술에 취해 난동을 피웠다. 원인은 바비 킴은 마일리지 포인트를 사용해 비즈니스석으로 업그레이드 했는데 항공사 실수로 이코노미석으로 바뀌었다. 출발 5시간이 지난 후, 일반석에서 술에 취해 약 1시간 정도 난동을 피웠다.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이후 [[FBI]]의 조사를 받았다.<ref name="mbn"/>
         2015년 1월 7일에 샌프란시스코로 가던 [[대한항공]] 기내에서 승무원을 희롱하고 난동을 부렸다. 이 사건으로 [[미국 연방수사국|FBI]]의 수사를 받았다.<ref>{{뉴스 인용 |제목 = 바비킴, 기내 만취난동…승무원에 "호텔 어디냐"며 희롱(종합3보) |url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1/09/0200000000AKR20150109046353003.HTML?input=1195m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김윤구 |날짜 = 2015년 1월 9일 |확인날짜 = 2015년 1월 9일}}</ref> 바비킴 측은 "비즈니스석으로 승급되지 않아 감정이 상해 술을 마셨고, 그 이후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며 "모든걸 떠나 진심으로 사과한다"라고 입장을 밝혔다.<ref>{{뉴스 인용 |제목 = 바비킴 측 '바비킴 기내 난동, 모든걸 떠나 진심으로 사과' |url = http://isplus.joins.com/article/104/16893104.html?cloc= |출판사 = 일간스포츠 |저자 = 김민철 |날짜 = 2015년 1월 9일 |확인날짜 = 2015년 1월 9일}}</ref>
         [[분류:무브먼트]][[분류:대한민국의 가수]][[분류:1994년 데뷔]][[분류:남원시 출신]][[분류:197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분류:한국대중음악상 수상 음악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바비 킴 (배우)
         {{다른 뜻|[[바비 킴|대한민국의 무술영화배우|대한민국의 미국인 레게 소울 힙합 가수]]}}
         '''바비 킴'''(Bobby Kim, {{본명|김웅경}}(金雄經), [[1941년]] [[4월 25일]] ~ )은 [[미국]]에서 [[무예|무술]][[영화 배우|영화배우]]로 활약을 하였고 '[[대한민국|한국]]의 [[찰스 브론슨]]'이라 일컬어진 [[대한민국]]의 [[영화배우]]이다.
         [[서울특별시|서울]] [[마포구]]에서 출생하였고 [[김포시|경기도 김포]]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61년]] [[태권도]] 사범으로 첫 입문하였으며 [[1968년]] [[미국]]에 건너가 이듬해 [[1969년]]부터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활동하다가 1년 후 [[1970년]]에 귀국하여 같은 해 [[1970년]]부터 [[1973년]]까지 [[대한민국 공군]] [[사병]]으로 복무하였고 [[1973년]] 다시 [[미국]]에 건너가 [[태권도|태권도 사범]] 활약을 재개하다가 이듬해 [[1974년]] 다시 귀국하여 1년 후 [[1975년]] 영화 《죽엄의 승부》로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하였으며 [[1988년]] [[수필|수필가]]로도 등단하였고 이후 [[1997년]]까지 액션 무술영화배우 활동으로 많은 인기를 누린 그는 현재 [[미국]]에서 [[태권도]] [[무예]] 지도를 다시 하고 있다.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무술가]][[분류:196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태권도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서울우석국민학교 동문]][[분류:동도중학교 (서울) 동문]][[분류:동도공업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디자인고등학교 동문]][[분류:우석대학교 (서울) 동문]][[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한국체육대학교 교수]]
  • 바이올라 데이비스
         | 사진설명 = 2015년 [[미국 배우 조합|SAG상]] 시상식에서
         | 국적 = [[미국]]
         '''바이올라 데이비스'''(Viola Davis, [[1965년]] [[8월 11일]] ~ )는 [[미국]]의 [[배우]]이다.
         {{미국 배우 조합상 여우주연}}
         {{미국 배우 조합상 여우조연}}
         {{미국 배우 조합상 앙상블 캐스트 - 영화 부문}}
         {{미국 배우 조합상 여우주연 - TV드라마 부문}}
         {{토막글|미국 배우}}
         [[분류:196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줄리아드 학교 동문]][[분류:울산광역시 출신]][[분류: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분류:토니상 수상자]][[분류:에미상 수상자]][[분류:골든 글로브상 여우조연상(영화) 수상자]][[분류:영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자]][[분류:미국 배우 조합상 여우주연상 수상자]][[분류:미국 배우 조합상 여우조연상 수상자]][[분류:미국 배우 조합상 드라마 시리즈 여우주연상 수상자]][[분류:미국 배우 조합상 앙상블 캐스트상(영화) 수상자]]
  • 박규수
         2번에 걸친 양요(洋擾) 때 [[청나라]]로 보낸 자문(咨文) 및 [[미국]]에 대한 힐문장(詰問)과 통상 요구에 대한 거절 문건을 대부분 그가 만들었고, [[강화도 조약]] 때도 조정 중론을 모으는 것을 넘어, [[일본]]을 상대로 한 외교문서 다수의 자문과 감수, 교열에 참여했다.
         1866년([[대한제국 고종|고종]] 3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터졌다. 선교사 토마스<small>(한국식 이름 [[최난헌]])</small> 등을 태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The General Sherman)가 조선 정부의 분명한 통상요구 거절에도 허가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박규수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ref> 문일평, 《호암전집》 제3권, 서울: 조광사, 1939년, 267~268쪽. </ref>
         셔먼호는 상선이었으나 무장을 적재한 상태였고 밀물을 타고 강을 거슬러 올라왔지만 곧 조수가 밀려나가면서 모래톱에 좌초됐다.<ref name="lee34"/> 박규수는 체포조를 구성하는데 상금을 걸었다. 이 때 한 교졸<ref>교졸: 조선시대 서울의 궁중·관청·군영 및 지방관서에서 근무하던 군교(軍校)와 나졸(羅卒)의 총칭. 지방아전의 하나로 중요 인사들의 경호, 관할 구역 방범순찰, 범법자의 체포 구금을 담당했다.</ref>이 곧 자원해 어촌에서 징발한 괴피선<ref>괴피선: 나룻배. 작은 배의 총칭</ref> 여러 척에 기름먹인 섶을 가득 실어 셔먼호 옆에 붙였다. 그리고 궁수들로 일제히 불화살을 당기게 해 화공했다.<ref name="lee34"/> 화공이 시작되자 셔먼 호 내부의 인화물질에 옮겨 붙으면서 셔먼 호가 항행 불능에 빠졌다. 미국인들이 다급히 배에서 뛰어내려 도망쳤으나 대개가 사살되고 선장과 선교사 토마스는 평양 부민들에게 맞아죽었다.
         1884년(고종 21년) 10월 그의 제자들인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등이 [[갑신정변]]에 실패해 대거 [[일본]]과 [[미국]]으로 망명갔다. 문하생들이 역도들이 되자 이미 사망한 그 역시 관작을 모두 삭탈당했으며, 집은 헐려 공터가 됐다가 1906년 [[보성중학교 (서울)|보성중학교]] 부지가 됐다.
         [[제네럴셔먼호 사건|제너럴 셔먼 호]]를 불태우던 1866년 박규수는 강경한 척화파처럼 보인다. 이어 셰난도어호 내항 때에도 그가 미국·중국 등에 직접 지어 보낸 각종 문서는 어디까지나 정부 측의 강경한 입장 내지 힐문장들이었다.<ref name="kyunggi"/> 1871년 [[신미양요]] 때에도 미국과의 교전을 주장하고 이를 관철했다.
  • 박근혜
         2007년 4월 미국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면담을 가진 박근혜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 시위가 있었던 2008년 6월 박근혜는 "근본 대책이 나와야 한다"는 원론적인 얘기만 한 차례 한 뒤 줄곧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촛불집회가 본격적인 거리 투쟁으로 비화된 5월에도 그는 당을 떠난 친박 측근들의 복당 문제 얘기를 주로 했다. 이후 계속되는 복당 요구에 네티즌들의 의해 '복당녀'라는 별명이 생기며 비판받기도 하였다.
         국회의원 재직 중 대선 경선을 맞이하게 된 박근혜는 대선 경선 캠프 선대위원장으로 [[대한민국 헌법 제119조]] 2항 '경제 민주화'의 입안자인 전 [[민주정의당]] 헌법개정위원 [[김종인]]을 임명하는 등 [[사회양극화]] 문제 해소에 적극적 의지를 보였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newsview?newsid=20120628031405843] 김봉기 기자, '경제 민주화' 원조 김종인… 내달 출범 박근혜 캠프 맡는다, 조선일보, 2012.6.28.</ref> 박근혜는 재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재벌의 [[지배구조]] 개선보다는 경제력 남용을 바로잡는 데 방점을 뒀다. 재벌이 우리 경제에서 차지하는 긍정적 역할은 인정하자는 쪽이었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20820160408085] 이제훈, 재벌이 싫어하는 헌법 조항, 한겨레21,2012.8.20.</ref> [[사회양극화]] 해소가 목적인 경제민주화를 위해서는 세수확보가 중요한데 박근혜 의원은 2012년 7월 16일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초청 토론회에서 "법인세는 가능한 한 낮춰야 한다"고 주장해 논란을 야기했다. 우리나라 법인세 최고세율은 22%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인 25.6%(지방세 포함)보다 낮은 편이다. 일본과 미국의 법인세 최고세율은 각각 39.5%, 39.2%에 이른다.<ref name="hani.co.kr">[http://www.hani.co.kr/arti/economy/economy_general/542826.html] 류이근, 성연철 기자, 박근혜 "법인세 인하"…친박서도 "경제민주화와 모순", 한겨레신문, 2012.7.17.</ref> 현재 법인세는 내국세 총액 가운데 부가가치세(33.0%) 다음으로 높은 비중(28.6%)을 차지한다.<ref name="hani.co.kr"/> 강병구 인하대 교수(경제학)는 “법인세를 낮추겠다면 소득세나 부가가치세 등에서 ‘박근혜식 복지’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마련하겠다는 것인지 대안을 내놔야 하는데 그게 안 보인다”고 지적했다.<ref name="hani.co.kr"/> '법인세 인하와 경제민주화 간의 모순성' 및 '법인세 감소분에 따른 대체 세수 확보' 등의 논란은 대통령 선거일까지 지속될 것으로 보였다.
         ==== 미국 ====
         미국을 방문한 박근혜 (2013년)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함께 한 박근혜(2013년)
         취임 후 박근혜는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기도 했다. 한편 보스턴 마라톤 현장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자 애도의 뜻을 표하기도 했다.
         한편 박근혜는 2013년 5월 미국을 방문하였다. 이후 박근혜는 북한 문제 등에 관한 내용에 대해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회담을 하였고, 한미 동맹을 글로벌 동맹으로 발전시키는 '한미동맹 60주년 선언'등에 대하여 합의하였다.
         박근혜는 2013년 4월 24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침략을 부인하는 등 우경화 노선을 취하려 하자, "역사 인식이 바르게 가는 것이 전제되지 않고 과거 상처가 덧나게 되면 미래지향적 관계로 가기 어렵다"고 말했다.<ref name="news.hankooki.com">{{웹 인용|url = 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304/h2013042503401121000.htm|제목 = 박근혜 대통령 "일본 바른 역사인식 없이 미래지향 관계 어렵다"|저자 = 이동훈|날짜 = 2013-04-25|확인날짜 = 2013-04-27|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30425095012/http://news.hankooki.com/lpage/politics/201304/h2013042503401121000.htm|보존날짜 = 2013-04-25|깨진링크 = 예}}</ref> 이후 한국일보를 비롯한 중앙 언론사 편집국장 및 보도국장단과의 오찬간담회에서 "일본이 우경화로 가면 동북아와 아시아 여러 국가들 간 관계가 어려워질 것이고, 일본에도 바람직한 방향이 아닌 만큼 깊이 신중하게 생각해 주기 바란다"고 말했으며, "우리 세대의 아픔과 걸림돌이 후세에 이어지지 않도록 정리하고 끊어야 한다"며 "정부는 항상 일관되게 원칙을 가지고 한일관계를 풀어나가겠다"고 덧붙였다.<ref name="news.hankooki.com"/> 이어 "미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기후변화와 테러방지, 원전 문제 등과 같은 비정치적 분야부터 신뢰를 구축하고 이를 토대로 다자간에 더 큰 신뢰를 구축하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즉 '서울 프로세스'를 내달 미국 방문 때 논의할 계획"이라고 말했으며, "북한도 얼마든지 이에 참여할 수 있으며, 참여하지 않더라도 신뢰 쌓기 노력을 해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ref name="news.hankooki.com"/>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회담하고 있는 박근혜
         2013년 5월 7일 밤(미국 기준시) 홍보수석비서관실의 [[윤창중]] 대변인이 박근혜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인 미국 방문 중 술을 마시고, 주 미국 한국대사관에서 지원한 인턴 여성의 둔부 근처에 손을 댄 행동과 다음 날 새벽 호텔에서 과도하게 노출된 상태로 해당 여성을 마주했다는 의혹이 발생, [[윤창중]]은 바로 성추행으로 미국 경찰에 신고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이 윗선에 보고되어 경질되었다는 내용이 언론에 유포되었다.<ref>[http://www.yonhapnews.co.kr/politics/2013/05/12/0501000000AKR20130512057900001.HTML "윤창중, 靑진술서 '엉덩이 터치·본인 노팬티' 시인"]《연합뉴스》2013년 5월 12일 신지홍 기자</ref><ref>[http://www.sisainlive.com/news/articleView.html?idxno=16433 윤창중의 출국 누가 도와줬나?]《시사인》2013년 5월 11일 김영미 국제문제전문 편집위원</ref> 이 사건으로 직속 상급자인 [[이남기]] 홍보수석비서관(차관급)이 사과발표를 하였으며, 사의를 표명하였다. [[이남기]]의 사직서는 5월 중순 수리되었다.<ref>[http://news1.kr/articles/1129691 靑 "윤창중 사건, 美측에 조속한 수사 진행 요청"]《뉴스1》2013년 5월 12일 장용석 기자</ref><ref>[http://www.hani.co.kr/arti/politics/bluehouse/586998.html 이남기 홍보수석 사의…허태열 "책임 피하지 않을 것"]《한겨레》2013년 5월 12일</ref> 또한, 이남기 홍보수석비서관과 윤창중 전 수석대변인 간의 진술 차이, 대통령에 대한 사과 표현 등이 문제시되어 [[허태열]] 대통령비서실장(장관급)이 공식사과를 발표하였다.<ref>[http://imnews.imbc.com/replay/newsflash/3281506_7612.html 靑 허태열 공식 사과…이남기 홍보수석 사의]《MBC》2013년 5월 12일</ref>
         2014년 10월 말 한민구 국방장관과 척 헤이글 미국 국방부 장관은 2015년 12월 한미연합사령관에서 한국 합참의장으로 전환되도록 되어 있는 전시작전통제권의 전환을 3대 전환 조건이 충족될 때까지 연기하고, 주한미군을 한강 이북에 계속 주둔하게 하며, 용산 미군기지에 한미연합사를 계속 두기로 합의하였다. 이에 따라 한미연합사의 해체 및 전시작전통제권의 전환을 사실상 무기한 연기하였다. 또한, 양국 국방장관은 한미동맹을 전략동맹으로 더욱 발전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전작권 전환의 무기 연기로 인하여 한미동맹, 한미 연합 방위 체계가 보다 굳건해지고, 북한의 위협에 대하여 지휘권의 단일화 등을 통해 효과적으로 한국을 방위할 수 있게 되었고, 북핵 위협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 공약이 더욱 확실하게 보장되었다. 또한 주한미군의 한강 이북 주둔에 대하여 합의함에 따라서 인계철선도 유지되게 되었다.
         |미국 방문,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의혹
         |카드 정보유출 파문, 기초 공천제 폐지 논란, 설날 특별사면, 미국 버지니아주(州) ”동해(East sea)” 병기 소식
         |중동 4개국 순방, 주한 미국대사 피습 사건
         |박 대통령의 중동순방 귀국 직후 미국대사 병문안, ‘종북 논쟁’ 과열, ‘사드’의 한반도 배치 문제
         |메르스 사태 본격화, 미국 순방 연기 결정,
         2008년 대선 이후 박근혜는 [[미국소 수입 협상]]에 대한 반발이 일던 가운데 이명박에 대한 비판을 제기하거나, [[미디어법]] 상정시 "반대표를 던질것"이라고 말하거나, 이명박이 내놓은 [[세종특별자치시|세종시]] 에 대해 반대 입장을 밝히거나, [[대한민국의 동남권 신공항 논란|동남권 신공항]] 백지화 당시 이명박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차기 정권에서 계속 추진 할 것을 약속하는 등 중요한 사안에서 짧은 말을 던지는 일명 '한마디 정치'를 해왔다. 2010년까지 차기 대선후보 지지율 1위를 지켜온 박근혜의 이런 의견들은 당정에 큰 영향력을 끼쳤으며 친이계는 정부에 협조하지도,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는 박근혜의 모호한 행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다. 그동안 한나라당과 이명박 정부는 박근혜를 당대표나, 국무총리로 추대하는 방안을 고려해왔지만 박근혜는 이를 모두 거부하였으며 친박계 의원이 당대표를 맡는 것조차 반대하는 등 소극적인 행보를 보여왔다. 하지만 지지율 1위를 지키기 위해 너무 몸사리기만 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으며 이명박과 화해를 하거나, 아예 다른 노선을 선택하여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ref>(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00628010330371750020 박근혜, ‘친박계 해체’ 결단해야) 문화일보 2010년 6월 28일</ref> 이러한 비판들 속에서 이명박 정권 취임 초기에 실시했던 자기 대선 후보들 지지율 조사에서 50%에 육박하던 박근혜의 지지율은 2010년 이후로 30%까지 하락했다.<ref>(http://www.vop.co.kr/A00000301840.html 한나라당 지지율 '급하락'..지방선거 '여파' 여전) 민중의 소리 2010년 6월 15일</ref>
         박근혜 정부의 외교정책은 임기 초반에는 많은 기대를 받았으나<ref>'진행형' 세월호참사 속 박근혜정부 1년6개월 맞아, 연합뉴스 2014.10.19</ref> 임기 중반으로 가면서도 일본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아 한미일과의 군사적 동맹에서 한국이 소외된다는 비판과 함께 외교정책이 중국에 치우쳐 있다는 비판도 받아 왔다.<ref>美·中 갈등 심화… 박근혜 정부 '3대 외교 정책(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동북아 평화 협력 구상·유라시아 이니셔티브)' 모두 꼬일 수도, 조선일보 2013.12.02</ref><ref>박 대통령 ‘친중 반일’ 이면엔 미·중 사이 줄타기, 경향신문 2013-10-09</ref> 여기에 중국 또한 일본과의 관계회복을 도모하는 쪽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하여, 박근혜 정부 들어 동북아에서 한국만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우려도 있다.<ref>[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2945437 유연해지는 중국의 대일 외교, 우리는, SBS뉴스 2015.04.24]</ref><ref>[http://www.hankookilbo.com/v/374aee9c3ef94bacbe98e033f3245f76 말 한마디 못한 채… 한국 외교 속수무책, 한국일보 2015.04.27]</ref> 박근혜 정부의 대일 외교정책은 과거사 문제 해결 없이는 한일관계를 개선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으나, 일본의 아베 정권과 미국의 오바마 정부가 철저한 전략적 외교로 실속을 챙기는 가운데 한국만이 외교에서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평가를 받는다.<ref>[http://news.jtbc.joins.com/html/407/NB10872407.html 고도의 외교술로 실속 챙긴 아베…한국외교는 수렁에, JTBC, 2015-04-30]</ref><ref>[http://kr.wsj.com/posts/2015/04/30/%EC%95%84%EB%B2%A0-%EC%B4%9D%EB%A6%AC%EC%9D%98-%EB%8A%A5%EC%88%98%EB%8A%A5%EB%9E%80%ED%95%9C-%EC%99%B8%EA%B5%90%EC%88%A0-%EB%B0%95%EA%B7%BC%ED%98%9C-%EB%8C%80%ED%86%B5%EB%A0%B9-%EC%95%95%EB%B0%95/ 아베 총리의 능수능란한 외교술, 박근혜 대통령 압박, 월스트리트저널, 30. April 2015]</ref><ref>[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5051959901 박근혜 정부, 미-중 사이 갈팡질팡…아베의 '친미 외교'에 완패] 한국경제 2015-05-19 </ref>
  • 박남옥
         |사망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박남옥'''(朴南玉, [[1923년]] ~ [[2017년]] [[4월 8일]])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이다. 1923년 [[경상북도]] [[경산시|하양]]에서 태어났으며,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전]]을 중퇴하였다. 1944년 대구에서 잠시 신문 기자를 지내다가 사직 후 서울로 다시 상경하였다. 1955년에 영화 《[[미망인 (1955년 영화)|미망인]]》을 발표하여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영화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ref>{{뉴스 인용|url=http://m.khan.co.kr/ent_sp_view.html?artid=201704101646001&code=960401&med_id|제목=한국 최초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씨 별세|성=|이름=|날짜=2000-01-01|뉴스=경향신문|출판사=|언어=ko|확인날짜=2017-04-11}}{{깨진 링크|url=http://m.khan.co.kr/ent_sp_view.html?artid=201704101646001&code=960401&med_id }}</ref>
         박남옥은 영화의 실패와 이혼이 겹쳐 한동안 몸져 누웠다. 1957년 부모가 대구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 온 뒤 함께 살았으며 언니가 운영하던 《동아출판사》에 근무하였다. 1959년 박남옥은 영화잡지 《씨네마팬》을 제작하며 다시 영화를 만들 뜻을 보였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ref name="대문" /> 1992년 미국으로 이주하였으며 2017년 4월 8일 별세하였다.<ref name="미주중앙일보" />
  • 박대성 (1978년)
         ** [[7월 14일]]: 박대성, 하반기 물가가 오르니 생필품 6개월치를 미리 사두라며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대한민국]]에도 영향을 줄 것이라는 글 게시.
         [[노무현 정부]]의 ‘금융허브론’을 계승하여 [[이명박 정부]]는 ‘금융중심지론’을 내세웠다.<ref name=autogenerated1>[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39373 <조선일보>의 '월가 사냥' 부채질], 뷰스앤뉴스, 2008-08-27</ref> 리먼 브러더스 서울 지점장이었던 민유성이 산업은행장에 임명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민유성]] 행장은 [[한국산업은행|산업은행]]을 민영화하고 세계적인 [[투자은행]](IB)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아 2008년 6월 임명됐다.<ref>[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4&artid=18406 민유성 산업은행장은 리먼 브러더스 ‘구세주’였나], 위클리경향, 2008-09-30</ref> 한편, 리먼 브러더스는 경영 악화 상태에 있었다. 리먼의 위험 자산의 총 규모가 총 500억 달러(50조 원)에 이른다는 분석도 있었고, 2008년 들어 주가가 80%가 폭락한 것이다.<ref name="view20080823">[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39449 한국의 '월가 사냥', 그 위험한 도박], 뷰스앤뉴스, 2008-08-23</ref> [[2008년]] [[8월 21일]] 산업은행이 리먼에 장부가치보다 50% 정도 높여 인수 가격을 제시했지만, 리먼은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해 협상이 결렬됐다.<ref>[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08082115470714661&outlink=1 산은 민영화에 'IB인수' 새 변수], 머니투데이, 2008-08-21.</ref> 이러던 와중에 칼자루를 쥐고 있던 전광우 금융위원장은 9월 8일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반대했고,<ref>[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08090812032655869&outlink=1 <문답>금융위장, 산은 리먼인수 '사실상 반대'], 머니투데이, 2008-09-08</ref> 이튿날 산업은행도 협상을 공식 중단하겠다고 밝혔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09101759035&code=920301 産銀 “리먼 인수협상 중단” 공식발표], 경향신문, 2008-09-10</ref> 이런 소식이 미국에 전해지자 리먼 브러더스의 주가가 44.2% 폭락했다.<ref>[http://www.e-today.co.kr/200707/news/newsview.php?TM=news&SM=0905&idxno=183749 <기자수첩> 한국發 '역나비 효과'에 출렁인 美 증시], 이투데이, 2008-09-11</ref>
         [[9월 15일]] [[리먼 브러더스]]는 파산했다. 이후, 여당과 야당은 일제히 민유성 산업은행장을 질책했다. [[고승덕]] [[한나라당]] 의원은 리먼 브러더스 서울지점 대표를 지낸 민 행장이 나중에 리먼 브러더스 주식을 받기로 한 것을 문제로 삼았다.<ref>[http://www.ytn.co.kr/_ln/0101_200809190520424283 여야, 민유성 은행장 한 목소리로 성토], YTN, 2008-09-19</ref> 9월 17일 [[강만수 (1945년)|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국발 금융불안이 장기적으로는 시장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긍정적인 측면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가 여야 의원들의 비판을 받았다.<ref>[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080917143904845&p=imbc 강만수 "미국발 금융불안, 긍정 측면도 존재"], MBC, 2008-09-17</ref> [[장하준]]은 강만수의 발언에 대해 “불이 나서 동네 집들이 다 타고 있을 때 그걸 보고 있던 거지가 아들에게 ‘우리는 집이 없으니 불나도 걱정 없지 않느냐, 다 이게 애비 덕인 줄 알아라.’고 하는 식의 ‘아전인수’격 해석”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ref>[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89650&gb=da 장하준 “온 동네 불났는데 호재라고? ‘아전인수’식 해석”], 데일리서프라이즈, 2008-09-19</ref> 한편, 박병원 [[청와대]] 경제수석은 인수 시도 자체는 나쁘게 볼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ref>[http://www.asiae.co.kr/uhtml/read.jsp?idxno=402416§ion=S1N53§ion2=S2N213 박병원 "산은 리먼인수 시도, 나쁜 것 아니다"(종합)], 아시아경제, 2008-09-19</ref> 리먼 인수를 주장했던 조선일보는 [[경향신문]], [[중앙일보]] 등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ref>[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89518&gb=da ‘리먼 사태’로 속타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너마저...”], 데일리서프라이즈, 2008-09-17</ref> 이외에 리먼 브러더스는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장관의 이름을 합성시킨 단어 리만 브러더스(Lee Man Brothers)로 패러디 되기도 했다.<ref>[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08102714393118305&outlink=1 로이터 "韓 '리·만'브러더스 뼈있는농담" 보도], 머니투데이, 2008-10-27</ref>
         {{인용문|<nowiki>(상략) 리먼 브러더스에 대한 산업 은행의 내부 방침은 사실상 구매쪽으로 기운지 오래다.. (중략) 현재 산업 은행이 국책이라는걸 생각하면 (미국의 대주주 적격 심사를) 통과하는데 문제 없다는 계산이다.. (중략) (리먼 브러더스의) 현재 부실 규모: 장부가 추정액= 500억 달러( 약 50조 원).. (중략) 산업 은행이 민영화 대상이지만 아직은 국책은행이기 때문에 산업 은행 손실 보존= 세금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이게 자금 흐름의 키 포인트다.. 환율 방어로 뿌리는 돈이 흘러 들어 가는 루트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이른바 합법적인 자본 이동이지. (하략)</nowiki>| 2008년 금융 전쟁의 서곡: 한국판 지옥의 묵시록 1 (2008-08-25)}}
         {{인용문|(상략) 한 마디로 이게 결론에 FT 애들은 지금 장부가 50%를 더 주고 사는거라면서 (리먼의 가격을) 더 깎을 수 있다고 대 놓고 떠들어 대고 있으니..(중략) 한 마디로 미국 애들도 왜 사는지 이해 못하는걸 국제 메가 뱅크로 만들겠다고 집어 삼키면서 다 초토화 계획을 세우다니... (하략)| wsj 한국.. 리먼 왜 사는지 이해 불가..(2008-09-04)}}
         기획경제부는 시사360에서 IMF와의 스와프를 부인했다. 이처럼 이명박 정부는 [[국제 통화 기금|IMF]] 스와프 자금을 요청하거나 신청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수차례 확인한 바 있다. 실제로 익명의 정부 관계자는 IMF에 스와프를 신청한 적이 없으며 신청할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후 정부 발표에서 이를 스와프 총액에 넣는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월 2일 국정연설에서 300억 달러의 한미 통화 스와프를 성사시켰고 한일 간 300억 달러, 한중 간 30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도 체결했다며 우리가 추가로 확보한 외화 유동성이 1천100억 달러를 넘어섰다고 밝혔다. IMF 스와프를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1천100억 달러를 넘어섰다.’라는 총액은 IMF 자금 220억 달러를 포함한 1천120억 달러를 염두에 둔 수치로 받아들여진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도 2008년 12월 16일 경제운용방향 발표문에서 미국·중국·일본 등과 총 1천120억 달러의 통화스와프를 체결해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유동성 부족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교두보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IMF 얘긴 빠졌지만 미·일·중 3국과 각각 체결한 300억 달러의 스와프에 IMF 스와프를 더한 금액을 ‘체결’로 적시한 것이다.<ref>[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view.html?cateid=1041&newsid=20090103112706760&p=yonhap IMF돈 안쓴다더니..스와프총액엔 포함], 연합뉴스, 2009.1.3.</ref>
         미국의 잡지 [[와이어드]]는 한국의 재정경제부의 대변인이 말한 바 "대중적으로 잘 알려진 기관에서 그런 이론이 만들어졌더라면 우리는 대응을 했을 것입니다마는 인터넷상의 네티즌이 한 예측에 대해서 정부가 입장을 밝히는 것은 적절한 것이 아닙니다"와 같이 미네르바는 이름없는 존재로 다루어질 수 있었다고 평했다.<ref>Mattathias Schwartz, [http://www.wired.com/magazine/2009/10/mf_minerva/all/1 The Troubles of Korea’s Influential Economic Pundit], 2009년 10월 19일, [[와이어드]]</ref>
  • 박동은
         [[1959년]] [[동아일보]]에 [[기자 (직업)|기자]]로 입사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 위해 [[1968년]] 퇴사하였다. 유학에서 돌아와 [[1972년]]에 [[성균관대학교]]에 출강하였고 [[1975년]]에 [[숙명여자대학교]]에서 시사 영어를 강의하였다. [[1976년]]부터 [[1988년]]까지 대한가족계획협회 홍보부장으로 재임하였다. [[1988년]] [[유니세프]] 대외담당관이 되었고 [[1993년]] 유니세프 한국위원회 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 박명환 (1977년)
         [[2007년]] 이적 첫 해에는 10승 6패를 기록하여 자리잡는 듯했으나, [[2008년]]부터 내리막길을 급격히 걷기 시작했다. [[2008년]] [[4월 24일]] [[한화 이글스|한화]]전에 선발 투수로 등판하여 4.1이닝 동안 7피안타 5실점을 기록하면서 패전 [[투수]]가 되었다. 그 서울 후 어깨 통증을 호소하였고 2군에 내려가게 되었다.<ref>[http://www.cbs.co.kr/Nocut/Show.asp?IDX=811447 LG 에이스 박명환, 결국 1군 제외] 《노컷뉴스》, 2008년 4월 25일 작성</ref> [[2008년]] [[6월 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조브 클리닉에서 관절경 검사와 어깨 수술을 받았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1958916 LG 박명환, 미국에서 어깨 수술…올 시즌 아웃] 《마이데일리》, 2008년 6월 11일 작성</ref>
  • 박문영
         1992년부터 1998년까지 [[SBS (대한민국의 방송사)|SBS]] 라디오 프로듀서로 근무했고 2000년부터 2006년까지 가족들과 함께 [[미국]] [[댈러스]]에 거주했다. 2010년에는 한국콘서바토리(현재의 [[한국국제예술원]]) 연예비즈니스학부 교수로 활동했고 2017년에는 [[2018년 동계 올림픽|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 성공 기원 동요 앨범 《평창송》을 제작했다.
         [[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서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박빛나
         '''박빛나'''(朴빛나, [[1985년]] [[6월 16일]] ~ )는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2001년]], [[2002년]]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한국선수권]] 우승자이고 [[2003년]], [[2004년]] 한국선수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개최된 [[2002년 동계 올림픽]]에 대한민국 선수로는 최초로 여자 싱글 종목에 참가해 26위를 기록했다. 현재 피겨 스케이팅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94729 |제목=피겨 코치 박빛나, "제자들을 올림픽에 출전시키는 것이 꿈" |출판사=엑스포츠 뉴스 |날짜=2009-02-24 |확인날짜=2010-08-1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319031441/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94729# |보존날짜=2014-03-19 |깨진링크=예 }}</ref>
  • 박빛나 (스케이트코치)
         '''박빛나'''(朴빛나, [[1985년]] [[6월 16일]] ~ )는 [[대한민국]]의 [[피겨 스케이팅]] 선수이다. [[2001년]], [[2002년]]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한국선수권]] 우승자이고 [[2003년]], [[2004년]] 한국선수권에서 은메달을 획득했다.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개최된 [[2002년 동계 올림픽]]에 대한민국 선수로는 최초로 여자 싱글 종목에 참가해 26위를 기록했다. 현재 피겨 스케이팅 코치로 활동하고 있다.<ref>{{뉴스 인용 |url=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94729 |제목=피겨 코치 박빛나, "제자들을 올림픽에 출전시키는 것이 꿈" |출판사=엑스포츠 뉴스 |날짜=2009-02-24 |확인날짜=2010-08-12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319031441/http://xportsnews.hankyung.com/?ac=article_view&entry_id=94729# |보존날짜=2014-03-19 |깨진링크=예 }}</ref>
  • 박성용
         |사망지 =[[미국]]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창업자인 [[박인천]] 전 회장의 맏아들로 호는 문호(雯湖),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군]] (現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났다.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68년에 귀국해 2년간 [[청와대]] 경제비서관 등 공직 생활을 했다.
         1984년에 그룹의 총수가 되어 1996년에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나고 이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1997년 [[예술의전당]] 이사장직을 맡았고 2003년 [[한국메세나협의회]] 제4대 회장을 맡았다. 2005년 5월 23일 미국의 한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 박수진(1985년 11월)
         2013년 6월 [[로이킴]]과의 열애설이 불거졌으나, 본인들은 부인하였다. 사귀었다 하더라도 [[로이킴]]이 표절시비 때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면서 결혼한 현재는 결별한 것이 당연하다.
         '[[워킹 데드(드라마)|워킹 데드]]'에서 [[베스 그린]]을 연기 했던 미국의 배우 에밀리 키니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두 사람 모두 서른이 넘은 나이에 비해 상당한 동안이고, 가수 활동과 배우 활동을 모두 해본 공통점이 있다. [* 다만 에밀리는 연기자로 먼저 데뷔를 한 후에 가수 활동을 했지만, 반대로 박수진은 가수로 먼저 데뷔한 뒤 연기를 시작했다.] 재미있는 점은 둘 다 1985년생으로 동년배이고, 심지어는 프로필 상의 키마저 똑같다!
  • 박영규(배우)
         2004년 [[미국]]에 [[유학]] 중이던 아들이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죽었다. 이에 큰 충격을 받고 연예계를 떠났다.
  • 박유환
         '''박유환'''(朴有煥<ref>{{웹 인용|제목=씨제스 엔터테인먼트|url=http://www.c-jes.com/zh/artist/about.asp?artist=3|확인날짜=2015년 7월 8일|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50709110315/http://www.c-jes.com/zh/artist/about.asp?artist=3|보존날짜=2015년 7월 9일|깨진링크=예}}</ref>, [[1991년]] [[3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어렸을때 [[미국]][[버지니아주]]에 이민을 감
         [[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배우]][[분류:199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1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배우]][[분류:청송군 출신]][[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박재란
         [[본관]]은 [[공주 이씨|공주]](公州)이며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한 그녀는 아직 일제 강점기 시절이던 [[1941년]](4세 시절) 일가족과 함께에 이주하면서 이후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10세 시절이던 [[1947년]]에 부친상(父親喪)을 치렀으며 [[1953년]] '''이영숙'''(李英淑) 본명으로 [[제8군 (미국)|주한 미8군 무대]]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가수]] 첫 [[데뷔]]를 하였다. 이후 [[오르간|오르가니스트]] 겸 [[작곡가]] [[박태준 (음악가)|박태준]](朴泰俊)에게 발탁되어 [[박태준 (음악가)|박태준]]을 사부(師父)로 모시고 [[바이올린|바이올리니스트]] 겸 [[작곡가]] [[김광수 (음악가)|김광수]]를 사숙(師叔)으로 모시며 [[박태준 (음악가)|박태준]]의 문하에서 [[서양 고전 음악|음악]] 수련을 하며 [[박태준 (음악가)|박태준]]에게서 '''박재란'''(朴載蘭)이라는 [[예명]]을 얻었다. [[1957년]] 정식 [[가수]] 데뷔하였고 이후 《뜰 아래 귀뚜라미》, 《러키 모닝》, 《코스모스 사랑》, 《밀짚모자 목장 아가씨》 등을 비롯한 노래들이 히트하였다. 1년 후 [[1958년]]에는 [[파인 김동환]]의 [[시 (문학)|시]]에 [[기타 연주자|기타리스트]] 겸 [[작곡가]] [[김동현 (1924년)|김동현]]이 [[작곡]]한 《산 너머 남촌에는》을 불러 연이은 히트 기록하였고, 이듬해 [[1959년]] [[대한민국 영화|영화]] 《비 오는 날의 오후 3시》의 단역 출연을 통하여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하였다. 같은 해 [[1959년]]에는 당시 [[미국]] [[가수]] 겸 [[기타 연주자|기타리스트]] 및 [[작사가]] 겸 [[영화 배우|영화배우]] [[벌 아이브스]](Burl Ives)가 [[미국]] [[시 (문학)|시인]] 겸 [[라디오]] [[사회자|MC]]였던 [[:en:Webley Edwards|웨블리 에드워즈]](Webley Edwards)와 공동으로 [[영어]] [[노랫말|가사]]로 [[작사]]하고 [[작곡]] 한 《Pearly shells》라는 노래 작품을 [[작사가]] [[전우 (시인)|전우]]가 [[한국어]] [[노랫말|가사]]로써 번안 작사하고 [[박춘석]]이 편곡한 《진주 조개잡이》라는 노래를 받아 불렀다. 이 노래 작품은 국내에서 [[1960년대]]와 [[1970년대]] 여름 애창 노래 가운데 인기 애창 번안곡에 손꼽히는 노래가 되었다.
         [[분류:193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재즈 가수]][[분류:공주 이씨]][[분류:1953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박재범(1987년 4월)
         ||<:><#000>{{{#fff '''출생'''}}} ||<(> [[1987년]] [[4월 25일]] ([age(1987-04-25)]세), [[경상북도]] [[영천시]] [* 간혹 칠곡군 출신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시애틀에서 나고 자란 한국계 미국인이다. 실제로 seattle 2 seoul 같은 노래에서 본인의 고향은 시애틀이라고 언급한다.] ||
         ||<:><#000>{{{#fff '''국적'''}}} ||<(> [[파일:미국 국기.png|width=28]] [[미국]] ||
         [[한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3세 출신의 [[가수]]이자 [[래퍼]], [[비보이]], [[프로듀서]], [[CEO]]. 아이돌 그룹 [[2PM]]의 전 리더, 리드보컬, 래퍼, 메인댄서를 맡고 있었다. [[시애틀]]에서 나고 자랐다. [[비보이]] 출신으로 어머니의 권유로 참여한 2004년 [[JYP]] 시애틀 오디션에서 합격하여 한국에서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 당시 박재범의 집안이 어려웠던 탓에 뭔가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서 한국 행을 결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9년]] [[9월 5일]], 당시 4년 전이었던 2005년에 [[마이스페이스]]에 연습생 시절 쓴 글이 디씨인사이드 코갤러에 의해 악의적으로 오역되어 논란이 되었다. 이는 기사화되고 결국 문제가 터진지 사흘만인 9월 8일 [[2PM]]을 탈퇴하고 당일날 출국하여 고향인 [[미국]] 시애틀로 돌아갔다. 이후 <PD수첩>과 여러 방송매체에 다뤄진바 있듯 엄연한 오역이었음이 밝혀졌다.
         2013년 10월, 레이블 [[AOMG]]의 수장이 되었다. 2018년 공동대표'''였던''' [[사이먼 도미닉]][* 2018년 7월 25일날 대표직 사임.그렇다고 aomg소속이 아닌것은 아니며 지금 현재는 aomg 소속 '''아티스트''']과 다른 소속 아티스트로 [[Cha Cha Malone]], [[GRAY|그레이]], [[로꼬]], [[Elo]], [[어글리덕]], [[Hoody]], DJ Pumkin, [[DJ Wegun]], [[우원재]], [[정찬성]], [[코드쿤스트]], 헵, 뮤직비디오 감독 지누야 등이 있다. 소속아티스트들에게 사비를 털어 미국 유명 힙합 쥬얼리 아티스트 [[벤볼러]]에게서 주문제작한 금목걸이를 해줬다. 박재범은 [[AOMG]]를 제작사보다는 크루 개념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2017년 7월 20일(한국시간)에 '''[[JAY Z|]]가 수장으로 있는''' 레이블 락네이션[* [[리아나]], [[빅 션]], [[DJ Khaled]], [[릴 웨인]], [[캘빈 해리스]], [[제이콜]] 등이 소속되어 있는 거대 레이블이다.]에 영입되었다는 오피셜이 떴다.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사람중 최초로 영입됐다. 앞으로 미국활동도 적극적으로 펼칠것으로 보인다.
         2018년 7월 20일(한국시간)에 락네이션 계약 후 첫 EP인 '''ASK BOUT ME'''가 발매되었다. GASHI, [[Rich The Kid]], [[2 Chainz]] 그리고 Roc Nation 소속 아티스트인 Vic Mensa가 피쳐링으로 참여했으며 수록된 모든 곡들을 [[그루비룸]], [[차차말론]], [[Woogie|WOOGIE]], Slom 등 국내 레이블 소속 프로듀서들이 프로듀싱하였다.[* [[https://youtu.be/YDanE97RMKg|인터뷰]]에서 밝히길, [[한국]]이 [[미국]]을 따라한다는 선입견을 깨고 싶었고, 우리끼리 해도 꿀리지 않을 만큼 퀄리티가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국내 레이블 소속 프로듀서들과 작업했다고 한다.]
         2PM 시절에는 시애틀 출신 리더, 춤을 잘 추는 정도의 포지션이었다. 그러나 [[박재범/2PM 영구탈퇴 사건|모종의 사건]]으로 탈퇴한 후로 미국으로 돌아가서 본인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기 시작한다. Nothing On You 커버는 그 중 가장 유명해서 실제 음원으로도 출시되었다.
         그의 솔로로서 음악적 행보에서는 [[Dok2|도끼]]가 빠질 수 없다. Nothing On You 전에도 [[덤파운데드]]와 협업한 적이 있지만 미국에서 낸 작품이라 별로 피드백이 없었고, 이후에 본인의 이름을 내세운 첫 EP를 냈으나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당시 그에게 싸늘했던 여론 탓이기도 했는데, 이때 도끼가 [[블랙아이드필승|라도]][* 프로듀싱 팀 [[블랙아이드필승]]의 그 사람 맞다.]와 함께 작업한 음반에 'Doin' Good" 리믹스 버전에 피쳐링으로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블랙 뮤직 장르에 발을 딛었다. 그가 가능성을 보였던 보컬 대신 랩 피쳐링으로 참여한 것이 특징인데, 지금 랩 실력과 비교해보면 굉장히 부족한 실력이었지만 그래도 첫 곡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었다.
         2016년에 발매한 EVERYTHING YOU WANTED에서는 다시 R&B 아티스트의 면모를 보여주며 블랙뮤직 필드에서 그의 독보적 입지를 굳혔다. All I Wanna Do라는 공전의 히트곡을 만든 것은 덤. 아무리 보컬과 랩에 동시에 재능이 있더라도 연속되는 음반을 아예 다른 장르로 꾸리고 또 그 음악성을 인정받은 사례는 거의 흔치 않다.[* 적어도 한국 힙합 내에서는 그런 경우가 없다시피 하다. R&B와 힙합을 넘나드는 한국 아티스트는 대표적으로 [[윤미래]]가 있는데, 그는 사실 한 곡에 이 둘을 잘 녹여내는데는 능하지만 음반 자체를 이렇게 이질적으로 구성하지 않는다. 가장 중요한건 미국 출신이라는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윤미래의 한국어 랩 작사 실력은 안습이라는 것. 더구나 그녀의 랩 실력 자체는 인정 받을지언정, 커리어가 너무 부족하다는게 흠이다. [[개코(다이나믹 듀오)|개코]]의 경우 보컬도 수준급이긴 하나 메인으로 활동하는 부분은 아니다. 본인 노래에 넣거나 가끔 피쳐링 하는 정도이지 보컬로 제대로 활동한 적은 없다. 그 외에도 [[바비 킴]]의 경우 원래 랩을 했으나 후에는 보컬로만 활동했다. [[길(리쌍)|길]]도 마찬가지.] 물론 박재범의 한국어 랩, 영어 랩, 보컬의 부분들이 국내 최상급이라고 할 수는 없고 그의 실력을 평가 절하하는 리스너도 많으나, 평단의 호평이나 수상 경력들을 참고해 보았을 때 분명히 모두 수준급이며, 이를 잘 녹여낸 수작들을 많이 만들어 내면서 다작까지 하는 좋은 아티스트임은 분명하다.
          * [[페이스북]]을 통해 미국 [[민주당(미국)|민주당]] 대선 후보 [[버니 샌더스]]에 대한 호감을 표시했다. [[https://www.facebook.com/jaypaom/posts/1089580077751258 |#]] [* 박재범은 미국 시민권자이다.]
          * 당연하겠지만, 미국의 팝 가수 [[마이클 잭슨]]의 광팬이다.[* 여담이지만, 2011년에 발표된 미니앨범 <TAKE A DEEPER LOOK>의 수록곡 'Touch The Sky'([[더 콰이엇]] 피쳐링)에서 밝히길: 4살때부터 마이클 잭슨 보고 춤을 따라했다고.] 2014년 9월에 발표한 정규 2집 <EVOLUTION> 제작발표회에서 타이틀곡 'So Good'을 소개할 당시에 그 곡이 [[마이클 잭슨]]을 오마주한 곡이라고 했다. 덧붙여서, 前 그룹 [[2PM]] 활동 당시 마이클 잭슨의 대표 히트곡인 '[[Billie Jean]]'을 단독 무대에서 보여주기도 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Ww5OtZFrZk|보러 가기]]
         [[분류:2PM]][[분류:한국 남가수]][[분류:힙합 댄서]][[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재한 미국인]][[분류:1987년 출생]][[분류:영천시 출신 인물]][[분류:아이돌 리더]][[분류:아이돌 댄서]][[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역대 출연자]][[분류:라디오 스타의 역대 게스트]]
  • 박재완(대학교수)
         1955년 [[경상남도]] [[창원시|마산합포구]](현 [[창원시|마산합포구]])에서 태어났다. 마산성호초등학교, 마산중학교, [[부산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경제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교]] 정책학 [[석사]], 동 대학교 [[대학원]] 정책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박재홍 (1978년)
         [[서울특별시]] 출생으로 [[명지대학교]]를 졸업하였다. 큰 키와 듬직한 체구에서 나오는 파워가 좋아 [[미국]] 유명 영화의 주인공인 '람보(Rambo)'라는 별명을 얻었다.
  • 박정양
         '''박정양'''(朴定陽, [[1842년]] [[2월 4일]]([[1841년]] [[음력 12월 24일]]) ~ [[1905년]] [[12월 15일]]([[음력 11월 19일]]))은<ref>[http://yoksa.aks.ac.kr/dataFiles/img/book2/8/JE_A_80560/JE_A_80560_001_000011.gif 박정양시장 [朴定陽諡狀]]</ref>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대한제국]]의 정치가 겸 외교관이다. 구한말의 온건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다. [[조선]] 시대 첫 주미국 대사이기도 했다.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 참판 등을 지내고, [[1881년]] [[조사 시찰단]]을 조직하여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관제 개정을 추진했다. 87년 미국특파 전권대사로 부임하여 외교활동을 하다가 [[청나라]]의 압력으로 귀국해야 했다. [[1894년]] 1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이 되고, 이듬해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자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과도내각을 조직했다. 그뒤 [[갑오개혁]] 때 군국기무처의 회의원이 되고 제2차 김홍집 내각의 학부대신을 지냈다.
         [[1887년]](고종 24년) 다시 [[협판]][[내무부|내무부사]](協辦內務府事)가 되었다가 그해 [[미국]] 특파 전권대사로 임명되었으나 조선주재 [[청나라]]군 최고사령관 [[위안스카이|원세개]](袁世凯)의 압력으로 출발하지 못하고 [[한성]]에 머무르며 출발을 연기하였으나 그해 연말에 [[청나라]]의 방해 공작을 무릅쓰고 [[제물포 항]]에 정박된 상선을 타고 비밀리에 건너갔다. [[미국]] [[워싱턴 D.C.]]에 부임하여 [[미국 대통령]]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S. G. Cleveland)에게 신임장을 제정받는 등 외교활동을 하였으며, 그의 미국행은 조선인 최초의 외교관 파견이었다. 이때 그는 백악관 대통령 관저에서 수행원들과 함께 미국 대통령에게 큰 절을 하자 [[그로버 클리블랜드|클리블랜드]]가 매우 당황해하여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는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에서 [[조선]]을 자주 독립국으로 승인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조선을 청나라의 속국이 아닌 동등한 외교국가로 인정하였다. 그 뒤 청나라의 압력으로 사직하고 [[1889년]] 귀국하였다.
         === 미국 전권대신 활동 ===
         고종이 박정양을 미국 전권대신으로 임명한 것은 1887년 7월 8일로 임명 후 한달 남짓 부임준비를 한다음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미국으로 출발하려고 했다.그러나 출발 직전 청국(淸國)의 항의로 출발을 늦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청국은 외교사절을 서양에 파견하려면 왜 미리 상의 하지 않았느냐고 따지고 국가 재정이 어려운데 외교사절을 미국에 상주 시킨다는 것은 무리라는 것이었고 또한 외교 사절의 호칭문제를 문제 삼았다.
         그러나 박정양은 미국에 도착해서 부터 영약삼단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외교활동을 했다.워싱턴에 도착하고 그 다음날 [[1월 10일]] [[미국]] 국무성으로 베이어드 국무장관을 예방하여 한문으로 쓴 국서의 부 본과 영문독본을 제출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국서를 봉정하는 날자를 잡았다.이러한 사실을 안 워싱턴 주재 청국공사는 박정양에게 사람을 보내어 영약삼단을 이행 하라고 따졌다. 그러나 박정양은 본국을 떠나 올 때 너무 급하게 서둘다가 정부의 지시를 자세히 받지못하고 왔으며 영약삼단을 따를 수 없다고 영약삼단을 지키지 않았다. 박정양은 계속 [[영약삼단]]을 지키지않고 청국공사와의 불화 등이 문제가 되어 부임한지 11개월만에 귀국하게 되었다.
         박정양은 미국에서 전권대신으로 활동한 경험을 [[1888년]] 미속습유'(美俗拾遺)에 썼다. 박정양은 미속습유에서 "이 나라는 여러 사람이 마음을 합해 만든 나라로 권리가 주인인 백성에게 있다. 그러므로 비록 보잘것없는 평민이라 할지라도 나랏일을 자기 일처럼 돌보아 마음과 몸을 다하여 극진히 하지 않음이 없다."라면서 미국의 [[민주주의]]를 기억했다.<ref>{{뉴스 인용|url=http://v.media.daum.net/v/20180507115217611?d=y|제목=130년전 조선 외교관 눈에 비친 미국은 어땠을까|날짜=2018-05-07|뉴스=연합뉴스|확인날짜=2018-05-07}}</ref>
  • 박종준
         1964년 [[충청남도]] [[공주시|공주군]] (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에서 태어났다. 공주중동초등학교, 공주봉황중학교, [[공주대학교사범대학부설고등학교]], [[경찰대학]] 행정학과, [[미국]] [[시라큐스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학사]]과정을 졸업하였다.
  • 박준형 (가수)
         | 출생지 = [[미국]] [[부산광역시]]
         [[분류:196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남자 래퍼]][[분류:미국의 래퍼]][[분류:미국의 힙합댄서]][[분류:미국의 배우]][[분류:미국의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캘리포니아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미국의 방송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한국계 미국인 음악가]][[분류:미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미국의 유튜버]][[분류:1999년 데뷔]][[분류:God의 일원]][[분류:부산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에 거주한 미국인]]
  • 박진섭 (가수)
          | 학력 = 미국 메릴랜드 주립대학교 대학원
         *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메릴랜드 주립대학교 대학원 사회체육학과]] [[체육|체육학]] [[석사]]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밀양 박씨]][[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197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포크 록 가수]][[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명지전문대학 교수]][[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서울예술대학 연극과 동문]][[분류:홍익대학교 동문]][[분류:메릴랜드 대학교 동문]]
  • 박진오
          | 학력 = [[미국]] [[뉴욕 대학교|뉴욕 사립 대학교 대학원]] [[예술|예술학]] [[석사]]
         * 2002년 [[대한민국]]·[[미국]] 합작 [[모노드라마]] [[영화]] 《요청》으로 영화감독 및 영화 시나리오 작가 데뷔.
         * [[미국]] [[시러큐스 대학교]] 영화학과 [[학사]]
         * [[미국]] [[뉴욕 대학교]] 대학원 영화학과 [[예술|예술학]] [[석사]]
  • 박찬환
         [[1980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81년]] [[국립중앙극장|국립극장연수원]] 1기생으로 [[현대무용]]과 발레를 배웠으며 1년 후 [[1982년]] [[문화방송|MBC]] 15기 공채 탤런트로 정식 데뷔하였다. 텔레비전 드라마와 영화, 연극 배우로 활동했고 [[1992년]] 한때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1992년]] [[미국]] 유학을 다녀왔다. [[1994년]] 귀국 후 다시 [[배우|연기자]]와 [[영화 배우|영화배우]], [[연극]][[배우]]로 활동 중이다.
  • 박태호 (1952년)
         |학력=[[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교]] 경제학 석사
         *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박사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서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통상교섭본부장]][[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펜실베이니아 주립 대학교 동문]][[분류: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동문]] [[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박태환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주)|어바인]]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주)|어바인]]
         | [[미국]] [[산타클라라]]
  • 박태환 (수영선수)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주)|어바인]]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주)|어바인]]
         | [[미국]] [[산타클라라]]
  • 박화요비
         || '''출생''' ||<(> [[1982년]] [[2월 11일]] [[전라북도]] [[군산시]][* 아버지가 [[대한민국 군무원]]이라서 3살 때 [[경상북도]] [[포항시]]로 이사 가고 어린 시절은 포항에서 보냈다. 고등학교도 포항에서 다니다가 전학하여 졸업했다.][* 데뷔 초에는 창법이나 음색만 보고 [[윤미래]]처럼 [[미국]] 본토 교포 출신이라는 오해(?)를 받았으며 평상시 말하는 스타일도 우물쭈물 어리바리 컨셉으로 웅얼거리는 게 많아서 아직까지도 교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
  • 박흥식(야구)
         한때는 이승엽의 스승이라는 타이틀에 비해 다소 침체기에 빠져 있었으나, 미국 연수 이후 출루와 장타를 중시하는 메이저리그식 공격 스타일을 공 맞추기에 급급하던 한국프로야구에 전파하며 타격코치로서의 부활에 성공하였다.~~그러나 김시진 사단에서 투코 정민태와 세트메뉴로 끌려다니며 팀 순위가 안 나오는 것이 함정이다.~~
         코치 1기에 비해 미국 연수 및 넥센 타격코치 경력 이후에는 타격폼 수정보다 웨이트 트레이닝과 멘탈관리, 각자의 개성 존중 등으로 방향을 잡아서인지 코칭 효과가 나타나는데 오래 걸리는 경향이 있다.롯데와 기아 2기 모두 1년차에는 죽일놈 취급을 받다가 2년차에는 주전급 선수들의 복귀도 크지만 본인이 신인이나 준주전급 선수들의 타격을 크게 향상시키며 평가가 급변했다.
         그러나 1989년 시즌 타율 .222의 초라한 성적을 남긴 박흥식은 홀연히 유니폼을 벗고 가족이 있는 [[미국]]으로 건너가 새 삶을 찾으려 했지만 이듬해인 1990년 봄 [[LG 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한 [[백인천]]의 부름을 받고 LG 선수로 현역에 복귀하여 그 해 LG가 [[1990년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를 제패하는 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은퇴 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현지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먼저 미국에 이민을 가 있던 형님이 운영하던 세탁소에서 기술을 배워 독립했다고 한다.] 당시 세탁소의 주 고객이었던 루 피넬라[* 1990년(박흥식이 LG 소속으로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그해) 신시네티 레즈를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이끈 감독이다.] [[시애틀 매리너스]] 감독이 그의 세탁소에 걸려 있던 선수 시절 사진을 보고 야구선수 출신인걸 알게 되자 시애틀 산하 마이너리그 팀이었던 타코마에서 코치 연수를 받게 되고[* 여담으로 이 당시 타코마에서 유명했던 선수가 [[알렉스 로드리게스]]이다.] 이후 [[백인천]]의 권유로[* 박흥식과 백인천은 LG 시절 선수와 감독으로 한솥밥을 먹은 바 있다. 또한 박흥식이 코치 연수를 받던 시절 삼성 선수단과 애리조나 윈터리그에서 만나게 된 것도 있다.] 1996년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 코치로 부임하였다. 이후 1997년 [[백인천]] 감독과 함께 삼성 타선의 세대교체를 이루면서 2000년대 중반까지 [[이마양|삼성의 공포의 핵타선]]을 만든 명 코치.
         이후 선진 야구 체험도 하고 겸사겸사 공부도 하기 위해 [[미국]]에 1년간 연수를 다녀온 뒤 다시 [[넥센 히어로즈]]로 옮겨서 2011년 2군 감독을 거쳤고, 2012년 1군 타격코치로 활동하였다.
         연수를 다녀온 효과가 있었는지, 넥센 히어로즈는 2012년 막강한 타선을 구축하며 팀 홈런 102개를 기록하며 108개를 기록한 SK에 이어 팀 홈런 2위에 올랐다. 특히 [[이승엽]] 때처럼 [[박병호]]를 본격적인 거포로 성장시킨 건 명실상부한 박흥식의 공. 물론 좋은 재목이었던 [[강정호]]의 거포 본능을 더 살려 주기도. 또한 [[육성선수|신고선수]]로 입단한 [[서건창]]을 2군 감독 시절에 추천하여 발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서건창]]은 신인왕 타이틀과 2루수 골든글러브 획득. 확실히 몇년 간 야인으로 지내면서 [[미국]] 야구를 체득하면서 공부했던 게 타격코치로서의 재도약에 큰 도움이 된 듯하다.
         기아 안티로 의심된다는 [[장강훈]] 기자가 박흥식의 잔류를 암시하는 기사를 올렸다. 대다수 기아 팬들의 반응은 매우 좋지 않다. 우려했던 몸야구형 타자인 [[신종길]]을 제외하면 박흥식이 확실하게 망쳐놓은 타자는 없다는 것[* 타격이 답이 없는 건 군대로 안치홍과 김선빈이 이탈한 탓이 크다. 주축 타자 중 자기관리 실패로 완전히 망해버린 나지완을 제외하면 적어도 2014 시즌보다 못하는 타자는 없다. 라고 하면 2013 롯데의 상황과 꽤 비슷해지긴 한다만 박흥식 코치의 취향에 맞는 타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넥센, 롯데와 달리 기아에서는 1년 더 해도 나아질 가능성이 높아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박흥식 코치에 호의적이었던 타팀 팬들도 기아 팬들에게 유임 권유를 하지는 못하고 있다.]과, 넥센에서나 롯데에서나 미국 연수 이후의 박흥식은 2년차에 타선 성적을 많이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1년 더 두고 보자는 기아 팬들도 아주 소수 있지만 일단 대다수의 기아 팬들은 눈에 보이는 팀 타격지표가 답이 없는 수준인데 고액연봉 타격코치가 닥치고 책임을 지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게다가 FA 시장에서 [[박석민]]조차 못 잡고[* 정우람이나 손승락은 오버페이라는 인식이 강했지만 박석민은 야수였고 게다가 WAR 측면에서 봐도 특급이었다.~~그런데 2018년 현재는 박석민이 먹튀짓으로 폭망해버렸고 정우람과 손승락이 제대로 돈값을 해주고 있다~~][* 다만 김기태 감독은 박석민보다는 뒷문 강화를 위해 손승락을 FA로 잡아주길 구단에 요청했다고 한다. 박석민이야 뭐 이범호가 건재했으니까.] 별 성과 없이 철수하면서 타격코치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기 때문에 박흥식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 대구중학교 시절 야구에 제법 소질을 보이던 박흥식이었지만, 그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가족이 모두 [[미국]]에 [[이민]] 가기로 결정하면서 박흥식은 마음 한 켠으로 '미국에서도 야구를 할 수 있을까' 라는 걱정 속에 이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일고등학교 야구부|신일고]]의 [[한동화]] 감독이 박흥식의 아버지를 찾아와 "아들을 저에게 맡겨 주시면 훌륭한 선수로 키워 보겠다"[* 물론 한감독의 집에서 숙식 일체제공 이라는 조건도 붙어 있었다.] 라며 그를 신일고로 전학시켜 달라고 간청했다. 아버지는 처음에 반대했지만 한국에 혼자 남더라도 야구선수로 열심히 뛰겠다는 박흥식의 결심에 어쩔 수 없이 아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게 박흥식의 가족은 미국으로 건너갔고, 한국에 홀로 남은 박흥식은 한동화 감독의 호의로 그의 집에 기거하면서 고등학교 생활을 보냈다.
          * [[신일고등학교 야구부|신일고]] 재학 시절, 미국으로 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이 사무칠 때 마다 박흥식은 슬픈 감정을 달래려 [[크림빵]]을 먹었고, 주변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박흥식에게 '''빵식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고 한다.
          * 프로 은퇴 후 한국을 두 번 떠나 가족들이 사는 [[미국]]에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려 했지만, 그 때마다 스승 [[백인천]]의 부름으로 다시 [[KBO]]에 돌아왔다. 제시된 내용은 약간 달라도 백인천이 박흥식을 부른 말은 둘 다 거의 같았다고 한다.
          1989년 시즌을 마치고 은퇴한 후 [[미국]]에서 형님의 도움으로 세탁소 일을 하던 박흥식에게 백인천이 전화를 걸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남편의 말에 아내는 결사 반대했지만 박흥식은 아내 몰래 혼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고, 미국의 아내에게 전화로 미안하다고 하자 아내는 어쩔 수 없으니 열심히 잘 하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이후 선수생활을 완전히 마감한 박흥식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세탁소를 경영하던 중, 1996년 [[삼성 라이온즈]]의 [[애리조나]] [[스프링캠프]]를 방문했다가 백인천 감독과 다시 조우하였다.
  • 반지닦이
         2011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 <[[그린 랜턴 : 반지의 선택]]>(이건 한국 개봉 당시 제목이며 원제는 그냥 Green Lantern.)의 오역이 넘치는 팬자막.
  • 배순훈
         [[경기도]] [[경성부]] 출생으로와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대학원]]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과학기술원의 조교수와 부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대우전자]]의 사장과 회장, 대우엔지니어링 부사장, [[대우조선]] 부사장 등 대우그룹 계열사에서 경영진으로 근무했다.
  • 배영식
         1949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 [[성균관대학교]] 법학과, [[미국]] [[오리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과정을 졸업, 수료하였다.
  • 백낙청
         친가는 [[평안남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외가가 있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백붕제|'''백붕제''']]는 친일관료로 6.25 때 납북되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미국]]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유학을 떠나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백년설
         [[8.15 광복]] 이후에는 가수로 활동하는 것보다 사업체 운영과 [[고아원]] 운영에 몰두했다. [[한국전쟁]] 발발 이후 다시 음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전보다는 가수 활동이 부진했다. 1963년 7월에 은퇴공연을 하며 공식적으로 가수 생활을 끝냈다.[* 은퇴공연 이후 1973년에, 오아시스레코드에서 부탁해서 <백년설 독집>을 냈다.] 1967년부터 1970년까지 경향신문 일본지사장을 맡았다. 1970년 이후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었다. 1978년, 자녀들이 있는 [[미국]]으로 가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80년 12월 6일에 타계했다. 2002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 보관장이 추서되었다.
  • 백성운(국회의원)
         1949년 [[경상북도]] [[경산시|경산군]] 에서 태어났다. 경산압량초등학교, 대구중학교, [[대구상원고등학교|대구상업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미국]] [[시라큐스 대학교]] [[대학원]]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백승주(정치인)
         [[카운터파트]]가 누구인지로 국방 차관의 위상을 짐작해볼 수 있는데, [[미국]]에 방문했을 때는 국방부장관[* United States Deputy Secretary of Defense. 국방부 장관이 아니라 국방 부장관이다.]인 [[로버트 워크]]와 군수차관[* Under Secretary of Defense for Acquisition, Technology and Logistics. 언론에서는 획득차관이란 표현을 많이 쓴다.]인 [[프랭크 켄달]]을 만났다. 일본 [[방위성]]과 만날 때는 [[카운터파트]]로 사무차관[* [[의원내각제]]라 국회의원이 임명되는 방위대신, 방위부대신, 대신정무관과 달리 방위성 [[내부승진]].] [[니시 마사노리]]를 만난다.
  • 백차승
         |국적 = [[미국]]
         '''백차승'''(Cha Seung Baek, [[1980년]] [[5월 29일]] ~ )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전 [[일본]] [[퍼시픽 리그]] [[지바 롯데 마린스]]의 [[투수]]이다.
         [[송승준]], [[김사율]]과 함께 [[부산광역시|부산]] 지역 고교 야구 트로이카로 불렸으나, 대한민국에서는 불의의 사건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부산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이던 [[1998년]] 9월 제 3회 아시아 청소년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으나 2차 리그 [[중화민국|대만]]전에서 5이닝 동안 3실점한 뒤 팔꿈치가 아프다는 이유로 자진 강판을 요구했고, 급기야는 감독의 1루 수비 지시마저 무시한 채 돌연 더그아웃으로 들어가 버렸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319572 청소년 야구 부진은 사전 준비와 투지 부족 탓] - 연합뉴스</ref> 대회 후 [[1998년]] [[9월 24일]] [[대한야구협회]]는 상벌 위원회를 열어 그에게 무기한 자격 정지 중징계를 내렸다.<ref>[http://news.donga.com/List/3/05/19980925/7381292/1 야구협회, 「자진강판」백차승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 - 동아일보</ref> 그는 불과 하루 뒤인 [[1998년]] [[9월 25일]]에 미국으로 건너가 [[시애틀 매리너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314959 백차승, 25일 미국으로 출국] - 연합뉴스</ref> 이후 그의 자격 정지 조치는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차출 문제로 [[KBO 리그|KBO]]의 요청으로 완전히 해제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532809 '자격 정지' 백차승, 족쇄는 풀려 있었다] - OSEN</ref> [[부산고등학교]] 졸업 후 [[1999년]] 6월에 곧바로 팔꿈치 수술을 받았다.
         ===미국 프로야구 시절===
         2004년에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하였다. [[2004년]]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 승격되됐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7&aid=0000008103 백차승, 메이저 리그 승격] - 강원일보</ref> 그 해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 7경기에 출장해 2승 4패의 성적을 기록했다. [[2005년]] 4월에 미국 시민권을 얻어 귀화했는데, 이로 인해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엔트리 구성 때 논란이 크게 일었다.<ref>[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812030051 백차승이 대표팀에 뽑혀선 안 되는 이유] - OSEN</ref>
         ===미국 독립야구 시절===
         [[2010년]] [[5월 10일]]에 미국 독립 리그 팀 중 하나인 골든 베이스볼 리그 소속 팀 [[유마 스코피언스]]에 입단하였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1005111415202215&ext=na 백차승, 美 독립 리그 유마 스코피온스 입단 합의] - 마이데일리</ref> 전반기를 마친 후 그 해 [[7월 17일]] [[오렌지 카운티 플라이어스]]로 이적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51&aid=0000002435 여전히 독립 리그 소속인 BK의 거취] - 민기자닷컴</ref>
         [[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출신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분류:미국의 야구 선수]][[분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분류:시애틀 매리너스 선수]][[분류:샌디에고 파드리스 선수]][[분류:오릭스 버펄로스 선수]][[분류:지바 롯데 마린스 선수]][[분류:부산고등학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사람]][[분류:일본 프로 야구 외국인 선수]]
  • 뱌체슬라브 몰로토프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국가방위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영국]], [[미국]]과의 동맹 체결, [[국제연합]]을 창설한 샌프란스시코 회의(1945), [[테헤란 회담]](1943), [[얄타 회담]](1945), [[포츠담 회담]](1945) 등 연합국의 각종 굵직한 회담에 모두 이름을 내밀었다.
         1947년에는 [[미국]]의 [[마셜 플랜]]에 대항하는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 계획인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1949년 1월부터 이것이 실행되었다.
  • 벤 존슨
         [[미국]]의 육상선수.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9초 79의 경이로운 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도핑 검사에 걸려서 금메달을 박탈당했다.
         [[분류:육상선수]] [[분류:미국 인물]]
  • 변동림
         [[2004년]] [[2월 29일]], [[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의 자택에서 향년 89세로 생을 마감했다.
  • 변수 (1861년)
         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 앞줄 왼쪽부터 부사 홍영식, 정사 민영익, 종사관 서광범, 미국인 로웰, 뒷줄 왼쪽부터 무관 현흥택 최경석, 수행원 유길준, 고영철, 변수
         '''변수'''(邉燧, Byun Soo, [[1861년]] ~ [[1891년]] [[10월 22일]])는 [[조선]] 말의 개화파 관료, 정치가, 개화운동가이자 외교관이며 [[미국]]의 공무원이다. 본관은 [[원주 변씨|원주]](原州)이고, 다른 이름은 수(樹)이며, 자는 한명(漢明), 호는 소천(小泉)이다. [[박규수]], [[오경석]], [[강위]](姜瑋)의 문인이다.
         [[1882년]] [[일본]] 유학을 갔다가 [[임오군란]]으로 귀국하였으나, [[제물포 조약]] 답례 수신사로 파견되는 [[박영효]]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1883년]]에는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답례로 전권대신 [[민영익]]이 [[미국]]에 파견될 때 수행원으로 다녀왔다. 귀국 후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統理交涉通商事務衙門)의 [[주사]]로 임용되어 [[8월]] [[우정국]] [[주사]], [[군국사무아문]] [[주사]]로 발령되었다. 그해 [[갑신정변]]에 참여하여, 정변 전후로 궁궐 내부 정보를 입수, 파악하였으며 거사 당시 1개의 행동대를 지휘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1월]] [[미국]]으로 유학, [[베어리츠 언어학교]]를 마치고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1890년]]부터는 [[미국 농무성]]의 직원으로 근무하였으나 [[1891년]] 모교 입구 정거장에서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사후 [[1895년]] 복권되었다가 [[김홍집 내각]] 붕괴로 추탈, [[1908년]] 최종 복권된 뒤 [[1910년]] [[증직|증]] 종2품 [[가선대부]] [[규장각]][[부제학]]에 [[추증]]되었다.
         === 일본, 미국 견학 ===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그 결과로 1883년 5월 주[[조선]][[미국]]공사 [[존 루시우스 푸트]](John L. Foote)가 방문하자 답례사절을 선발하였다. 그는 자청하여 답례 사절단의 수행원을 지원하였다.
         [[1883년]] [[6월 11일]] 조선의 친선사절단인 [[보빙사]]가 미국에 파견될 때, [[민영익]]을 전권대신으로 [[홍영식]]·[[유길준]]·[[서광범]] 등과 함께 사절단의 한 사람으로 임명돼 [[1883년]] 7월 인천항을 출발, 같은해 [[9월 2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기차편으로 뉴욕에 도착한 후 40여 일 동안 미국에 체류하면서 미 대통령을 만나 면담하고 각 기관을 두루 시찰하고 귀국했다.<ref name="중앙">[https://archive.is/20130426215657/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54588 〈키워드로푸는역시〉 유길준 한국인 최초 미국 유학] 중앙일보 2007-08-17</ref> [[1884년]] 봄 [[일본]]을 경유하여, 귀국하였다.
         [[1884년]] [[김옥균]] 등 개화파와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1886년 미국으로 건너갔다.<ref name="매경">[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6&no=246277 美 메릴랜드大, 피오리나ㆍ매코맥ㆍ슈왑 등 美 실력자 배출] 매일경제 2006-07-03</ref> [[1884년]] [[7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의 [[주사]]로 임용되었으며, [[8월]]에는 [[우정국]] [[주사]]가 되었다가 며칠 뒤 바로 [[군국사무아문]]의 [[주사]]로 재발령되었다. 이때 그는 [[일본]]에 파견된 사관생도들이 귀국함에 따라 [[김옥균]]·[[박영효]]·[[서재필]] 등과 함께 갑신정변 거사에 가담하고, 행동대의 하나를 이끌게 되었다.
         === 미국 생활 ===
         [[1886년]] [[1월]] [[민주호]](閔周鎬)·[[윤정식]](尹定植) 등과 [[미국]]으로 건너가 [[베어리츠 언어학교]]에 입학하였다. [[1887년]] [[8월]] [[베리언츠 언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887년]] [[9월]] [[미국]]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에 입학해 농학을 전공하고 1891년 졸업하여 한국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다.<ref name="매경"/> 정확히 6월에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ref name="중앙"/> 대학 재학 시절인 [[1890년]]부터 [[미국 농무성]] 직원으로 근무했으며, [[1891년]] [[6월]] [[메릴랜드 대학교]] 농과 졸업과 동시에 이학사(理學士) 학위를 취득하였다. 1891년 9월에는 농무성통계국 월보 제89호에 '일본의 농업'이란 글을 싣기도 게재하였다. 그러나 그해 [[10월]] 모교 [[메릴랜드 대학교]]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던 길에 대학 정거장에서 열차를 기다리던 중 열차 사고로 사망하였다.<ref name="매경"/><ref name="중앙"/>
         [[분류:1861년 태어남]][[분류:1891년 죽음]][[분류:혁명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통역사]][[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급진개화파]][[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갑신정변]][[분류:미국의 공무원]][[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메릴랜드 대학교 동문]][[분류:원주 변씨]][[분류:교통 사고로 죽은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변영로
         |학력 = [[미국]] [[새너제이 주립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애초 그의 본명은 '''변영복'''(卞榮福)이었는데 나중에는 '''영로'''(榮魯)라는 이름을 주로 썼고, 회갑줄 시기였던 [[1958년]] 정식 개명 관련 소송을 내서 '''변영로'''로 전격 개명하였다. 호는 수주(樹州)이며 [[한성부]] 남서 회현방에서 출생하였고 원적지였던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 (지금의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경성 중앙학교(지금의 [[중앙고등학교|서울 중앙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중앙고등학교|중앙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이화여전]] 등에서 교편 생활을 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건너가 [[캘리포니아 주|캘리포니아]] [[새너제이 주립 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공부하였다가 끝내 중퇴하였다. 신문학 초창기에 등장한 신시의 선구자로서, 압축된 시구 속에 서정과 상징을 담은 기교를 보였다. 민족 의식을 시로 표현하고 수필에도 재능이 있었다. 광복 후 [[성균관대학교]]·[[해군사관학교 (대한민국)|해군사관학교]] 교수 등을 지냈으며,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영자 일간지를 발간하였다. [[1951년]] 제2회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고, [[1955년]] 제1대 [[국제펜클럽|한국 펜클럽]] 회장에 선출되었다.
         * [[미국]] [[새너제이 주립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 변희재
         [[2008년]] [[5월]] 탤런트이자 배우인 김민선(개명 이후의 이름은 [[김규리 (1979년 8월)|김규리]])이 자신의 미니홈피에 ‘미국산 쇠고기를 먹느니 차라리 청산가리를 입에 털어 넣겠다’는 발언을 했는데, 이후 [[2009년]] [[8월 10일]] 미국산 쇠고기 유통업체 에이미트가 [[MBC]] [[PD수첩]]의 광우병 관련 방송 프로그램과 김민선의 발언을 두고 MBC PD수첩 제작진 5명과 김민선 씨에게 3억대의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이에 대해 한나라당의 국회의원 전여옥은 연예인의 발언이 사회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며 이를 두고 연예인은 발언이 사실에 기초하는지 알아보아야 하며 발언에 사회적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전여옥의 주장에 대해 배우 [[정진영]]은 미니홈피에 올렸던 사회 현안에 관심을 가지고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정치 행위가 아닌 시민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라고 비판하였다.
         변희재는 “배우 김민선은 공인을 떠나서 인간적으로 매우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다”고 비난했다. 이어서, 김민선과 [[정진영]]을 두고 사회적으로 파장을 미칠 만한 자기 의견을 개진할 지적 수준이 안 된다고 말했으며, “김민선의 당시 글은 미국산 쇠고기가 청산가리 정도로 위험하다는 사실적 판단에 기초한 의견 개진이다. 김민선은 [[미국]]산 쇠고기가 [[청산가리]] 정도로 위험하다는 사실 관계를 입증하지 못하면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죄로 처벌받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주장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변희재 "김민선-정진영, 지적 수준도 안되는 자들이..."|url=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53527|출판사=뷰스 미디어|저자=김혜영 기자|쪽=|날짜=2009-08-14|확인날짜=}}</ref> 이에 대해 배우 [[박중훈]]이 [[트위터]]에 ‘지적 수준 평가 고시라도 만들어서 일정 시험에 통과된 국민만 말할 수 있는 법이라도 만들어야겠다’고 비꼬았으며<ref>{{뉴스 인용|제목="본인의 지적 수준은 높은가"|url=http://www.clubcity.kr/city_view.asp?cnt_id=D0819E887A504D27A9DAD94D1971A5E5&ctg_code=1100|출판사=시티신문|저자=권태욱 기자|쪽=|날짜=2009-08-17|확인날짜=}}</ref>, “얼마 전 어떤 사람이 배우 정진영씨가 사회적으로 파장을 미칠 만한 이견을 개진할 지적 수준이 안된다고 했답니다. 저는 정진영씨와 영화 황산벌을 같이 촬영한 적이 있어서 잘 아는데요, 제 눈엔 매우 공부하고 사색하며 자기성찰을 게을리 하지 않는 사람이거든요. 큰 일 났습니다. 제가 정진영씨 보다 지적 수준이 안되는데 어떡하죠? 저도 글 올리는걸 그만둬야 하나요?. 근데 그 분께 묻고 싶네요. 본인의 지적 수준은 높으신가요? 지적 수준의 기준은 뭔가요? 무쟈게 궁금하네... 아! 지적이고 싶다. 글 좀 떳떳이 쓰게...”라고 덧붙였다.<ref name="nono">[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1992 박중훈과 김민선]</ref>
         낸시 랭 본인은 자신이 [[1979년]] [[미국]] [[뉴욕 시|뉴욕]] 출생이라고 주장해 왔고 [[대한민국]]의 주요 [[포털사이트]] 프로필에도 [[1979년]] [[미국]] 출생으로 되어 있으나 가수 박상록의 누이(낸시 랭에게는 고모)는 그녀가 [[1976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하며,<ref>{{뉴스 인용 |제목 =고모의 폭로 "낸시랭, 미국 유학 간 적도 없다!" |url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51721 |출판사 =뉴데일리 |날짜 =2013-04-19 }}</ref> 변희재는 [[1976년]]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으로 되어있는 낸시 랭의 석사 논문 표지와 '박혜령'이라는 그녀의 한국 이름으로 기재된 졸업사진 및 1989년도 서울 구정초등학교 졸업 앨범 표지를 공개하면서 출생년도와 출생지를 속인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였다.<ref>{{뉴스 인용 |제목 =낸시랭, '석사논문에는 76년 서울출생, 회사 등기부등본에는 미국인으로 표기' |url =http://www.mediawatch.kr/news/article.html?no=240035 |출판사 =미디어워치 |날짜 =2013-04-23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4&aid=0002195122 변희재 '낸시랭 실제나이' 뭐가 충격?‥"나이 안속인게 뉴스"] 한국경제 2013.05.21</ref>
  • 보아
         한국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이후 일본의 레이블사 [[AVEX]]와 계약을 체결하고 2001년 일본 데뷔 싱글 "[[ID; Peace B (노래)|ID; Peace B]]"를 발매하며 일본에 진출했다. 일본 첫 정규 음반 ''[[Listen to My Heart]]''는 한국 가수로 처음으로 [[오리콘]] 앨범차트 1위에 오르며 10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밀리언 인증을 받았다. 2004년 발매한 두 번째 일본 정규 음반 ''[[Valenti]]''와 일본 베스트 음반 ''[[Best Of Soul]]''이 100만 장을 넘겼다. 한국에서도 ''[[No.1·늘..|No.1]]'' (2002), ''[[Atlantis Princess]]'' (2003), ''[[My Name]]'' (2004), ''[[Girls On Top]]'' (2005)을 발매하였다. 2009년 4월 17일에는 미국 진출을 선언하며 미국 첫 정규 음반 ''[[BoA]]''를 발매해 한국 가수로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진입했다. 2010년에는 한국에서 5년 만의 정규 음반 ''[[Hurricane Venus]]''를 발매했고, 2년 뒤인 [[2012년]] 일곱 번째 정규 음반 ''[[Only One (보아의 음반)|Only One]]''을 발매했다. 그로부터 2년여만인 [[2015년]] 5월에는 데뷔 15주년을 기념하여 보아 자신이 전곡을 작사, 작곡하고 직접 프로듀싱에 참여한 여덟 번째 정규 음반 ''[[Kiss My Lips]]''를 발매하였다. [[2018년]] 2월에는 데뷔 이래 첫 미니앨범인 ''[[ONE SHOT, TWO SHOT]]''을 발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에는 아홉 번째 정규 음반 ''[[WOMAN (보아의 음반)|WOMAN]]''을 발매하였다.
         [[2003년]] [[1월 29일]], 보아는 일본에서 2번째 정규 앨범 ''[[VALENTI (음반)|VALENTI]]''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발매 일주일 만에 60만 장이 넘는 판매량을 기록하며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ref>[http://www.oricon.co.jp/search/result.php?kbn=ja&types=rnk&year=2003&month=2&week=2&submit5.x=29&submit5.y=11 2003년 2월 둘째 주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ref> 최종적으로는 120만장을 돌파하며 보아의 첫 밀리언 셀러로 기록되었고, [[2003년]] 오리콘 연간 앨범 차트에서 5위를 마크했다.<ref>{{웹 인용 |url=http://www.musictvprogram.com/corner-ranking-2003.html# |제목=2003년 오리콘 연간 차트(J-POP MUSIC PROGRAM FAN SITE) |확인날짜=2008-06-2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20304183136/http://www.musictvprogram.com/corner-ranking-2003.html# |보존날짜=2012-03-04 |깨진링크=예 }}</ref> 《[[VALENTI (음반)|VALENTI]]》 발매 이후에는 [[오사카 시]]·[[나고야]]·[[도쿄]] 등지를 돌면서 첫 콘서트 투어 '[[보아의 콘서트#《BoA 1st LIVE TOUR 2003 VALENTI》 (2003년)|BoA 1st LIVE TOUR 2003 VALENTI]]'를 개최하였다. [[3월 27일]]부터 [[4월 6일]]까지 4개의 공연이 일정에 잡혀 있었지만 이후 2회의 추가 공연이 결정되어 총 6회의 공연을 펼쳤다. 특히, 도쿄 공연 때에는 [[모리 요시로]] 전 [[일본]] 총리가 관람한 기사가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ref name="storm">{{뉴스 인용|제목=보아 열풍…열도는 열병중 |출판사=한국일보|날짜=2009-12-03|확인날짜=2009-12-03|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77905}}</ref>[[5월 14일]]에는 9번째 싱글 〈[[Shine We Are!/Earthsong]]〉을 발매하였다. 발매 당일 일간 차트 1위를 기록했지만, 주간 차트에서는 [[모리야마 나오타로]]의 〈{{lang|ja|さくら(独唱)}}〉에 밀려 2위를 기록했다. [[2003년]]은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미국에는 한인들을 위한 음악제가 여럿 개최되었다. 보아도 [[4월 2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기념 음악제'와 [[9월 29일]] [[뉴욕]]에서 열린 '미주 이민 100주년 기념 한인 대축제'에 출연하였다. 5월에는 한인 이민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제작한 대한민국 특집 프로그램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가수로서 출연하여 진행자와 영어로 인터뷰하는 장면이 방송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미국 공영방송 특집프로 출연(종합)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0368012|출판사=연합뉴스|저자=홍제성 기자|날짜=2003-05-02}}</ref>
         [[2004년]] [[1월 15일]], 일본에서 3번째 정규 앨범 《[[LOVE & HONESTY]]》가 발매되었다.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고, 보아의 통산 3번째 1위였다. 이 앨범으로 미국의 [[빌보드 차트]], 일본의 [[오리콘 차트]], 영국의 [[UK 차트]] 등 공신력있는 음악 차트를 토대로 세계 각국 음반 판매량을 집계하여 순위를 매기는 유나이티드 월드 차트에서도 1위를 차지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오리콘 석권 이어 '유나이티드 월드 차트 1위'|출판사=뉴스엔|날짜=2007-01-27|확인날짜=2009-12-03|url=http://media.daum.net/entertain/music/view.html?cateid=1033&newsid=20070127090120497&p=newsen}}</ref>
         [[6월 11일]]에는 대한민국 4번째 정규 앨범 《[[My name]]》을 발매하고 타이틀 곡 〈My Name〉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때의 음악 스타일은 이전의 보아와는 아주 다른 파격적인 변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전까지 〈NO.1〉·〈아틀란티스 소녀〉 등의 귀여운 10대 소녀로서의 이미지를 버리고 성숙한 여성으로서의 이미지로 변신했다. 타이틀 곡 〈My Name〉은 어반 댄스 스타일의 곡으로, 골반 댄스 등 노래의 안무도 화제를 낳았다. 보아는 이 앨범의 수록곡 〈Spark〉와 〈My Prayer〉로 9월까지 활동했고, 연말에 MKMF에서 대상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9월 1일]]에는 일본에서 13번째 싱글 〈[[QUINCY/고노요노시루시|QUINCY/コノヨノシルシ]]〉를 발매했다. 이어 3개월 뒤인 [[12월 1일]]에는 14번째 싱글 〈[[메리크리|メリクリ]]〉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크리스마스 시즌에 잘 맞는 발라드 곡으로 잠시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던 보아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했다. 판매량도 싱글 〈[[Shine We Are!/Earthsong]]〉 이후 넘지 못했던 10만 장 선을 넘었고,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롱 히트했다. 미국의 유명 록밴드 [[위저]]가 리메이크한 곡이기도 하다.
         [[2005년]] [[2월 2일]], 보아는 일본에서 첫 번째 베스트 앨범 《[[BEST OF SOUL]]》을 발매했다. 《BEST OF SOUL》은 [[2001년]] 〈[[ID; Peace B (노래)|ID; Peace B]]〉로 일본에서 데뷔한 이후, 〈[[메리크리|メリクリ]]〉까지 총 14장의 싱글을 발매하는 동안 발표했던 싱글 곡들을 모은 앨범으로, 첫 주 48만장으로 주간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최종적으로는 110만 장 가까이 팔렸다. 베스트 앨범을 발매하고 2개월 뒤 일본에서의 3번째 라이브 투어 콘서트 '[[보아의 콘서트#《BoA ARENA TOUR 2005 BEST OF SOUL》 (2005년)|BoA ARENA TOUR 2005 BEST OF SOUL]]'를 열었다. 투어 기간 직전에 발매된 15번째 싱글 〈[[DO THE MOTION]]〉은 보아의 싱글들 중 최초로 오리콘 주간 싱글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는 한국인으로서도 최초의 기록이다. [[2005년]] 보아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 출판국에서 출간한 영어교재 《{{lang|en|Totally true|토틀리 트루}}》의 〈{{lang|en|Making an International star|메이킹 언 인터내셔널 스타}}〉라는 글에 국제적인 스타의 성공 사례로 실려 화제를 모았다. [[6월 24일]]부터는 [[대한민국]]에서 5번째 정규 앨범 《[[Girls On Top]]》을 발매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타이틀 곡 〈Girls On Top〉은 남성 우월주의에 빠진 남성들에게 보내는 경고 메시지를 담은 강렬한 댄스 곡으로, 이 곡에서는 곡 후반에서 남자 댄서의 등에 올라타 노래를 부르는 안무가 화제가 되었다. 이 곡으로 보아는 MBC 《음악캠프》에서 1위를 수상했고, SBS 《생방송 인기가요》에서는 [[7월 17일]]부터 [[7월 31일]]까지 3주 연속으로 1위에 해당하는 '뮤티즌 송'을 수상했다.<ref>[http://music.sbs.co.kr/livevideo/musicTV_artist_detail.jsp?str_vod_id=000000000377&str_clip_id=112&str_mainmenu=100&menu_no=1&str_artist_id=P0000000388 SBS 뮤직 보아 라이브비디오]</ref> 이어 후속곡 〈MOTO〉로 활동했다. 대한민국에서의 5집 활동이 마감되어 갈 때쯤, [[8월 31일]]에 16번째 싱글 〈[[make a secret]]〉이 발매되었다. 〈DO THE MOTION〉의 노선을 이어 나가듯 절제되고 세련된 분위기의 곡이다. [[11월 23일]]에는 빠른 댄스 곡을 앞세운 17번째 싱글 〈[[다키시메루|抱きしめる]]〉를 발매했다. 한편, 이때부터 보아는 본격적으로 미국 진출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1월 17일]]에 일본에서 5번째 정규 앨범 《[[MADE IN TWENTY (20)]]》가 발매되었다. 이어 3월부터는 일본 내 통산 5번째 콘서트 투어인 '[[보아의 콘서트#《BoA ARENA TOUR 2007 MADE IN TWENTY (20)》 (2007년)|BoA ARENA TOUR 2007 MADE IN TWENTY (20)]]'를 개최하였다. [[4월 25일]]에는 화장품 광고 음악으로 쓰인 싱글 〈[[Sweet Impact]]〉를, [[9월 26일]]에는 도시바 휴대전화의 광고 음악으로 사용된 발라드 싱글 〈[[LOVE LETTER (노래)|LOVE LETTER]]〉를 발매했다. [[12월 12일]]에는 일본의 록 밴드 DOPING PANDA의 Yutaka Furukawa와 함께한 격렬한 댄스 곡 〈[[LOSE YOUR MIND]]〉를 싱글로 내놓아 미국의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마티 프리드먼으로부터 흑인도 무색할 정도로 펑키의 느낌이 잘 살아있고 전성기 때의 [[마이클 잭슨]]이 떠오른다는 극찬을 받았다. [[2005년]] [[영국]]에 이어 보아의 입지적인 스토리가 [[일본]] 영어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성공기 일본 고교 영어교과서 수록|url=http://news.joins.com/article/2576970|출판사=중앙일보|저자=이재환 기자|날짜=2007-01-25|확인날짜=2016-07-0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807181101/http://news.joins.com/article/2576970|보존날짜=2016-08-07|깨진링크=예}}</ref> 10월 말에는 [[애니콜]]의 광고 모델이 되었고, 애니콜을 홍보하기 위해 구성된 [[애니밴드]]라는 밴드의 메인 보컬로 참여했다. 이들은 11월 말 콘서트를 가지기도 했다. [[2006년]]에 이어 한국 영화 《M》의 OST 〈[[안개 (보아의 노래)|안개]]〉에 참여했다. [[11월 26일]]에는 일본 베스트 히트가요제 골드 아티스트상을 수상하였다. 이는 홍백가합전과 함께 6년 연속 수상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보아는 [[2월 27일]]에 일본에서 6번째 정규 앨범 《[[THE FACE]]》를 발매했다. 《THE FACE》는 11만장 대의 판매량으로 오리콘 주간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보아는 데뷔 앨범부터 정규 앨범 6연속 1위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하마사키 아유미]]에 이은 역대 단독 2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ref name="이데일리"/> 이어 콘서트 투어 '[[보아의 콘서트#《BoA LIVE TOUR 2008 ~THE FACE~》 (2008년)|BoA LIVE TOUR 2008 ~THE FACE~]]'를 개최했다. [[8월 15일]]에는 [[SM 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펼치는 콘서트 "SM 타운 라이브 '08"에 출연해 9개월 만에 모국의 무대에 올랐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9개월만에 국내무대.. "원래 비를 몰고 다닌다"|url=http://www.asiaeconomy.co.kr/uhtml/read.jsp?idxno=381992§ion=S1N99§ion2=S2N600|출판사=아시아경제|저자=고재완 기자|날짜=2008-08-15}}</ref> 한편, [[구글|구글 코리아]]에서 리서치 목적으로 여러 웹페이지를 검색한 결과 [[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화인민공화국|중국]] 등 모두 31개국가 및 국민의 대표적 한국 대표 키워드 10개로 인물 분야에서는 유일하게 확인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삼성-LG-현대와 함께 '한국 대표 키워드'|출판사=아이뉴스24|날짜=2008-11-19|확인날짜=2009-12-03|url=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0100&g_serial=373642}}</ref> 연말 보아는 연말 프로인 SBS 가요대전에 엔딩으로 참가하였으며 시간을 내어 연초까지 대한민국에서의 활동을 이어갔다.
         === 2008–11: 미국 진출 및 한국에서의 컴백 ===
         보아는 2009년 3월 17일 미국 데뷔 음반 ''[[BoA (음반)|BoA]]''를 발매하며 미국 진출을 했는데, 음반에는 블러드샤이& 아방트, 션 가렛, 브라이언 케네디와 같은 프로듀서들이 참여했다.<ref>{{뉴스 인용|제목=보아, 美 진출 함께하는 초호화 스태프 누구?|url=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809101622241139&ext=na|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임이랑|날짜=2008-09-10}}</ref> ''BoA''는 발매 첫 주 8,000장을 팔아 한국 가수로는 최초로 [[빌보드 200]] 127위에 올랐다.<ref name="bbchart">{{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lbum/boa/boa/1220911|title= Artist Chart History - BoA|publisher=빌보드|accessdate=2010-02-26|언어=영어}}</ref><ref>{{뉴스 인용|url=http://www.reuters.com/article/musicNews/idUSTRE53N7FK20090424|title= Asian pop star BoA takes on the U.S|publisher=로이터|accessdate=2009-05-31 | date=2009-04-24|언어=영어}}</ref> 빌보드 200 이외에 댄스/일렉트로닉 앨범차트에서 5위까지 진입했다.<ref name="bbchart" /> 음반 발매에 앞서 2008년 10월 21일 첫 번째 싱글 "[[Eat You Up]]"을 발매해 빌보드 핫 댄스클럽 플레이차트 8위에 올랐으며,<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st/292850/boa/chart?f=359|title=Billboard.com - Artist Chart History - BoA|publisher=[[빌보드]]|accessdate=2016-07-03|언어=영어}}</ref> 2009년 6월 2일 발매한 두 번째 싱글 "[[I Did It for Love]]"는 19위까지 진입했다.<ref>{{웹 인용|url=http://www.billboard.com/artist/292850/boa/chart?f=359|title=Billboard.com - Artist Chart History - BoA|publisher=[[빌보드]]|accessdate=2016-07-03|언어=영어}}</ref> 이후 2010년 1월 발매한 세 번째 싱글 "[[Energetic]]"은 빌보드 핫 댄스클럽 송 17위까지 진입했다.<ref>
         보아는 미국 진출 당시 힙합풍의 노래 "[[Eat You Up]]"을 첫 싱글로 발매했는데, 《[[LA타임즈]]》에서 "Eat You Up"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질투할만 노래이지만, 보아가 미국에서 장기적 성공을 하기위해선 브리트니 이상의 차별화된 스타일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f>{{뉴스 인용|제목=LA타임즈 "보아, 장기적 성공 위해 차별화 필요"|url=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032116282209575&type=1&outlink=1|출판사=스타뉴스|저자=김현록|날짜=2009-03-21|확인날짜=2011-09-17}}</ref> 세계적인 뮤직비디오 감독인 조셉 칸은 보아에게 "보아는 굉장히 퍼포먼스적으로 춤과 노래가 모두 뛰어난 환상적인 가수다. 세계적인 어떤 스타들과 비교해도 보아만큼 퍼포먼스를 잘 해내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한국은 보아를 자랑스러워해야 한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제목=조셉칸 “한국은 보아를 자랑스러워하라” (인터뷰)|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0906151527371002|출판사=뉴스엔|저자=유현진|날짜=2009-06-16|확인날짜=2011-09-20}}</ref>
         ; 미국 정규 음반
         * {{언어링크|en}} [https://web.archive.org/web/20080911173635/http://www.boaamerica.com/ BoA 미국 공식 웹사이트]
  • 보통국가
         몇몇 일본 [[밀덕]]들은 보통국가화를 통하여 일본을 [[미국]], [[영국]], [[프랑스]] 등과 동등한 '세계의 경찰 국가'로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봉준호
         영화 《[[마더 (2009년 영화)|마더]]》가 한국 영화 최초로 [[미국]] 비평가 협회에서 받은 외국어 영화상만 무려 7개로 보스톤평론가협회, 남동부비평가협회, 샌프란시스코 영화비평가협회 등에서 수상했다. 뿐만 아니라, 여주인공인 [[김혜자]]는 헐리우드 톱배우들을 제치고 LA 평론가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해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은 2011년 미국 최고 독립영화제인 [[선댄스영화제]]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
         * [[2011년]] 미국 여성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온라인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캔자스시티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센트럴오하이오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남동부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1년]] 미국 보스톤영화비평가협회 최우수 외국영화상
         * [[2010년]] 미국 그린 플래닛 영화 시상식 최우수 외국영화 선정
  • 봉중근
         아버지 봉동식 씨와 어머니 김숙자 씨 사이 1남 3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1997년]] 2학년을 중퇴하고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다. 당시 18세로 한국인으로는 가장 어린 나이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다. [[미국]] 메이저 리그에서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고 있으며,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통해 확실한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 미국 프로야구 시절 ===
         [[2007년]]에는 24서울에 등판하여 111.2이닝 동안 6승 7패, 5점대 평균 자책점을 기록하면서 부진했다. [[2007년]] [[5월 4일]]에는 [[두산 베어스]] [[내야수]] [[안경현]]과 빈볼 시비가 있기도 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video_player&type=best_player&date=&id=860&search_value=%BA%F3%BA%BC&page 네이버 스포츠 VOD - 2007년 5월 4일 두산 대 LG 경기]</ref> 이 난투극으로 두 선수 모두 벌금형을 받았다. 2007 시즌 후 [[미국]]식 훈련에서 탈피하여 훈련량과 훈련 강도를 높여 2008 시즌을 대비했다.<ref>[http://www.sports2.co.kr/people/people_view.asp?LCT=0&AID=185919&PG=1 왼손 타자들, 기술이 늘었다 LG 왼손 에이스 봉중근]{{깨진 링크|url=http://www.sports2.co.kr/people/people_view.asp?LCT=0&AID=185919&PG=1 }} 《스포츠 2.0》, 2008년 7월 22일</ref>
         [[미국]]에 건너가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을 때 그는 신분 유지를 위하여 [[미국]]에서 고등학교 과정을 완전히 마쳤고, 귀국 후 모교인 에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했다.<ref>[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ut=1&name=/news/sports/200909/20090911/99k74129.htm '봉열사' LG 봉중근 공부 한 풀러 대학 간다] - 스포츠조선</ref> 따라서 그는 신인 드래프트에 참가할 수 있었다. 프로골퍼 [[안시현]] 등과 함께 [[성균관대학교]] 스포츠과학부에 지원하여 합격하였다.<ref>[https://archive.is/20120707001449/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3871703 탈북 복서 최현미, 유재석 앞에서 `맞짱`] - 중앙일보</ref>
         * [[1998년]]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입단
         * [[2004년]]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신시내티 레즈]] 트레이드
         [[미국 야구 국가대표팀|미국]]전에 선발로 등판하였다. 그 때 [[미국]] 팀 선발 투수는 [[브랜든 나이트]]였다.
         * '봉미미' : 미국 [[트리플A]] 에서 활약했던 [[삼성 라이온즈]]의 새로운 용병 브라이언 메존의 인터뷰 중에서 "오늘 선발이었던 [[LG 트윈스]] 그에 대해서는 알고있나?" 라는 질문에 "전혀 알지 못했다. 미국에서 뛰는 '''미미'''한 모든 선수들에 대해서까지 알 수는 없다. 오늘 처음 미국에서 활동했었다는 이야기는 전해들었다." 라고 해서 붙여진 별명.
         [[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야구 선수]][[분류: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분류:KBO 리그 투수]][[분류:신시내티 레즈 선수]][[분류:애틀랜타 브레이브스 선수]][[분류:LG 트윈스 선수]][[분류: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분류:올림픽 야구 메달리스트]][[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2008년 하계 올림픽 야구 참가 선수]][[분류: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분류: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참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야구 메달리스트]][[분류:2010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2014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분류:2010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분류:2014년 아시안 게임 야구 참가 선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하음 봉씨]][[분류:서울수유초등학교 동문]][[분류:신일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성균관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미국]] [[영화]] [[블로거]][* 연예 기사에서는 영화 사이트로 소개되는데 전문 사이트가 아니라 엄연히 말해서 [[http://sbscnbc.sbs.co.kr/read.jsp?pmArticleId=10000710727|포커 선수가]] [[http://www.newsinside.kr/news/articleView.html?idxno=373555|운영하는]] 개인 [[블로그]]다. 하루 평균 방문자 수가 100명도 안 되고 올라오는 글도 연말에 올해 외모 순위하고 분기별로 올라오는 현재 영화 순위가 거의 전부다. 애초에 [[북미]]나 [[유럽]] 시장에서 외모 순위 같은 건 영화지가 아니라 패션지나 남성잡지에서 많이 나오는 소재이며, 여자 순위는 [[맥심]]이나 FHM, [[에스콰이어]] 등에서 남자 순위는 코스모폴리탄이나 [[글래머]] 등의 잡지매체를 자주 인용한다.] .TC캔들러(TC Candler)에서 2017 세계에서 가장 잘생긴 얼굴 100인(The 100 Most Handsome Faces of 2017)'[* 사실 이 표현만 봐도 현지인 대상의 일반적인 외모 순위와 달리 [[대한민국|한국]]이나 [[아시아]] 쪽에 맞춰진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는데 보통 외국에서는 미남미녀 순위를 선정할 때 handsome이라는 표현보다는 sexiest라는 표현을 쓴다. 참고로 여자 1위는 [[필리핀]] 여배우 'Liza Soberano'.]에 1위로 뷔를 선정하기도 했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994215|#]]
          * [[미국]] [[배우]] [[안셀 엘고트]]와 [[빌보드]]에서 [[인연]]을 맺은 듯하다. [[빌보드]] 만남 이후 지속적으로 [[안셀 엘고트]]가 자신의 [[트위터]]에 [[방탄소년단]] 관련 트윗을 올렸고, 특히 [[2018년]] [[1월]] 자신이 만든 곡을 [[RM]]과 뷔에게 들려줬다며 그들의 [[리액션]]을 담은 [[영상]]을 올렸다. 이때 뷔를 Tae[* 뷔의 [[본명]] 김태형의 [[영어]]식 표기 TaeHyung을 줄인 [[애칭]].]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친분을 과시했다. --전[[세계]]에 퍼져나가는 [[태태]]의 친화력--
          * [[미술관]]을 좋아한다. [[엘르]] [[미국]]판 [[인터뷰]]에서 [[미국]] 투어 기간에 [[뉴욕현대미술관]]과 시카고미술관에 갔던 일을 인상적인 순간으로 꼽았다. [[http://www.elle.com/culture/music/interviews/a45489/bts-billboard-music-awards-interview/?src=socialflowTW|링크]] [[https://twitter.com/mondomizel1/status/867746768389156865|번역]]
          * [[화가]] 중에서는 [[고흐]]를 특히 좋아한다. [[뉴욕현대미술관]], 시카고 미술관에서 [[고흐]] 전시회를 했을 때는 3일 연속으로 갔을 정도. 그래서 [[트위터]] [[사진]]에 나온 [[옷]]이 다 다르다. [[https://twitter.com/BTS_twt/status/851035367650217984|링크]] 어느 [[미국]] [[방송]]사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정국(방탄소년단)|정국]]이로부터 빼앗아오고 싶은 것은 [[정국(방탄소년단)|정국]]의 [[그림]] [[실력]]이고, 그 [[이유]]는 자신이 [[고흐]]의 작품 중 하나를 따라 그려보았는데 더 잘 그리고 싶기 때문이라고 한다.
          * [[정국(방탄소년단)|정국]]과 함께 제일 [[겁]]이 없는 멤버이다. [[미국]]의 James Corden Show의 Flinch [[게임]]에서 [[제이홉|겁쟁이1]], [[지민(방탄소년단)|겁쟁이2]], [[진(방탄소년단)|겁쟁이3]]이 날아와 터지는 [[과일]]들에 [[겁]]에 질리고 심지어 [[정국(방탄소년단)|근육이]]까지 [[안구|눈]]을 깜빡했지만, [[슬로 모션]]으로 돌려봐도 [[눈]] [[근육]] 하나 움찔하지 않는 굳건함을 보여줬다.
  • 브라우닝 시토리
         Browning Citori. [[미국]]의 총기회사 [[브라우닝]]에서 판매하는 [[더블 배럴 샷건]]. [[총열]]이 상하로 배열된 형태다. 사용 구경은 모델마다 다름.
         2012년 공개된 [[버락 오바마]] 당시 [[미국]] [[대통령]]의 [[http://news.zum.com/articles/5453662|클레이 사격 사진]]에서 사용된 총기. 이 사진은 [[http://knowyourmeme.com/memes/obama-skeet-shooting-photo|합성요소로 활용되었다.]]
  • 블랙 블록
         [[미국]]의 [[아나키즘]] 단체 혹은 운동전략.
         아나키스트 웹사이트 A-Infos에 따르면, 1980년대 유럽에서 아나키스트 활동으로서 확산되었다. 미국에서는 1999년 시애틀에서 있었던 WTO(세계무역기구)에 대한 항의 폭력 시위 이후로 2001년 무렵 부터 이 전술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경찰의 공격을 피하고 체포당하여 탄압받는 것을 피하기 위한 전술이다.
  • 비(연예인)
         몇몇 사람들은 이 시기에 가수로서의 이미지는 희박해 [[일요일 일요일 밤에]]의 [[게릴라 콘서트]]에 도전했다가 참패하기도 했다고 알고 있으나 상두야 학교 가자는 2003년 10월 방송을 시작했고, 게릴라 콘서트는 2003년 1월에 방영되었으니 아직 배우 활동을 시작하기 전이므로 듣보 연예인이었을 수는 있어도 가수로서의 이미지가 배우의 이미지보다 약하던 시기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풀하우스(드라마)|풀하우스]] 이후 나온 3집 [[https://youtu.be/9VqpPtb7RJg|It's raining]]으로 한국은 물론, 중국과 일본에서도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3집으로 2004년 가요대상[* [[MKMF]] 최고 인기 뮤직비디오상, [[KBS 가요대상]] 대상]을 석권함과 동시에 아시아 밀리언셀러로 등극했다. 그리고 비는 한류열풍과 '풀 하우스' 의 인기를 등에 업고 해외로 진출, Rain이라는 이름으로 아시아권 투어를 비롯 [[미국]]에서도 활동하였기에 한국이 배출한 제1세대 월드스타라고 언론에 의해 포장되지만 자기 홍보를 크게 한 언론플레이에 불과하다는 평이 많았다. 이런 평은 초창기엔 극히 호감형이었던 비의 이미지를 깎아먹는 족쇄로 작용하는 결과로 후일 이어진다.
         영화 출연으로 한국을 홍보했다는 마케팅을 하고 싶었다면, 제작진의 합의로 토코 칸 가家의 정확한 국적은 언급되지 않게 된 김에 테마도 한국풍으로 해달라는 식의 협상이 필요했던 부분. 뭐 이런 것 자체가 비가 월드스타 이미지로 재미를 보던 시절에나 먹혔을 철 지난 국수주의적 마케팅이긴 하지만 말이다. 참고로 토고 칸은 동양계 미국인, 즉 [[미국]] 국적을 가진 미국인이다.
         스피드 레이서는 감독인 워쇼스키 자매의 명성과 헐리웃 메이저 영화라는 사실 때문에 미국과 국내에서 대규모의 홍보가 이루어졌으나 예상과는 달리 해외와 국내 모두 흥행에 실패하였다. 단, 제작진이 비의 아시아권에서의 인기를 이용하려고 나쁘지 않은 대접을 해주었던 것은 사실이며 결과적으로 제작 당시 좋은 인상을 워쇼스키에게 남겨 차기작 [[닌자 어새신]] 출연으로까지 이어졌으니[* 스피드 레이서 촬영이 진행되던 중간에 함께 식사하던 워쇼스키가 대놓고 비에게 "다음에 만들 영화도 준비 중인데 우리가 생각하는 주인공은 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는 너무 신이 났다고 한다.] 정지훈 개인에겐 완전히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스피드 레이서 출연으로 비는 언론으로부터 월드스타라는 타이틀을 본격적으로 받기 시작했으나 실질적으로 미국에서의 인지도는 한국에서 부여한 타이틀에 미치지 못했다.
         스피드 레이서의 참패 이후 촬영한 [[닌자 어새신]]이 미국내에선 유명한 [[와패니즈]] B급 영화의 대명사인 [[아메리칸 닌자]]의 후속작으로 받아들여지며 드디어 의미 있는 인지도를 확보하게 된다. 고어물, 액션물 매니아를 중심으로 호평 받고 있어 중박쯤은 노려볼 만하지 않겠느냐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해외에선 개봉 3위로 시작해서 다음주에 6위로 하락하고 그 다음주엔 순위권 밖으로 밀려났으며 국내에서는 [[2012]]에 밀렸다.
         애초 워쇼스키 남매는 닌자 어새신의 흥행여부를 보아 닌자 어새신 2를 제작하려는 계획이 있었다고 하나 미국 내 흥행이 그에 미치지 못하면서 이루어지지 못했다.제작비에 비해 흥행이 기대치에 못 미친 근본적인 이유는 닌자 어새신 영화 자체의 품질이 싸구려 킬링 타임 영화 급이었기 때문. 워쇼스키 남매 자체가 매트릭스 이후 감독이나 제작자로서의 역량이나 커리어가 시원찮았다. 닌자 어새신의 영화 평점도 로튼토마토 26%, 메타크리틱 34점으로 범작 ~ 졸작 수준의 스코어이며 장르물 매니아 관객의 호응은 어느 정도 있었지만 평론가에게는 혹평받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닌자 어새신은 비가 미국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의 단독 주연을 맡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작품이며 비의 월드스타 타이틀의 가장 큰 근거이기도 하다. 종래 헐리웃 영화계가 동양인 배우에게 부여하던 전형적인 캐릭터인 "동양적인 무술을 하는 액션 위주의 캐릭터" 라는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긴 힘들겠지만 그걸 뛰어넘은 다른 동양 배우가 누구냐고 물으면 딱히 손꼽기도 힘들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대단하긴 한 일. 이연걸이나 주윤발 같은 중화권 탑배우도 헐리우드에선 원패턴 동양인 무술 달인 캐릭터로 소모적으로 활용되는 마당이니 말이다. 그나마 몇년 전 부터는 아시아 배우나 아시안계 미국인 배우들도 '전형적인 아시안 배역'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장르의 배역들을 맡고 주연자리를 차지하는 추세에 있다.
         닌자 어새신은 종영 후 미국과 북미, 그리고 기타 40개국에서 DVD 판매량이 증가하면서 최종집계 금액으로는 제작비를 넘겨 두 배 이상의 수익을 영화사에 남겼다. [[http://www.the-numbers.com/movies/2009/NINJA-DVD.php|북미 판매량]], [[http://www.boxofficemojo.com/movies/?page=intl&id=ninjaassassin.htm|40개국 판매량]]
         || 2008년 || [[스피드 레이서(영화)|스피드 레이서]] || 태조 ||<|2> 미국영화 ||
          * 2010년 미국 타임지 선정 '세계에서 영향력 있는 100인' 후보 선정16
          * 04.21 2011 Time 100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 2회 선정 / 이후 26일 미국 뉴욕에서 열리는 '타임100' 공식 파티에 참석
  • 빌리 레이 사이러스
         | 국적 = [[미국]]
         '''빌리 레이 사이러스'''(Billy Ray Cyrus, 1961년 8월 25일 ~ )는 [[미국]]의 컨트리 [[가수]], [[배우]]이다. [[마일리 사이러스]], [[노아 사이러스]], [[트레이스 사이러스]]의 아버지이며, [[론 사이러스]]의 아들이다.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남자 가수]][[분류:미국의 컨트리 가수]][[분류:미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부산광역시 출신]]
  • 빌리 블랭크스
         [[미국]]의 무술가, 트레이너, 연예인.
         1955년 미국 펜실베니아에서 출생.
         [[분류:미국 인물]][[분류:연예인]][[분류:무술가]]
  • 서도호
         현재 [[미국]] [[뉴욕]]에서 거주하며 뉴욕을 중심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동중이다. 대표작으로 [[잉글랜드]] [[리버풀]]의 두 건물 사이에 한옥을 아슬하게 배치해 놓은 'Bridging Home'이 유명하다<ref>김태성 기자. [http://news1.kr/articles/669441 세계적인 한국 작가 서도호, 광주비엔날레 참여] 2012년5월15일 작성</ref>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예술가]][[분류: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예일 대학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조각가]]
  • 서동주
         '''서동주'''([[1983년]] [[3월 30일]] ~ )은 [[대한민국]] [[작가]]이자 미국 변호사이다. [[희극 배우|코미디언]] [[서세원]]과 [[모델]] [[신정아(큐레이터)|신정아]]의 딸이다. 저서로는 《동주이야기》가 있다. 현재는 [[미국]][[샌프란시스코]]에 거주중 이다.
         1983년, 서세원과 서정희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서를 재학중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페이스쿨(Fay school)과 [[세인트 폴스 스쿨 (뉴햄프셔주)|세인트폴스스쿨]]을 졸업하고 [[웰즐리 대학교]]에 미술학과 전공으로 입학했다가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순수[[수학]]과 전공 1학년 2학기에 편입하여 학사 학위한 이후, [[펜실베니아 대학교|펜실베니아대학교]] [[와튼스쿨|경영대학원]] 경영학과 박사과정에 입학하였지만 코스웍 과정중 휴학하였다 [[경영학]]. 2010년 1월 23일 [[스탠퍼드 대학교|스탠퍼드대학교]] 내 [[교회]]에서 남편과 결혼 했다. 2018년 5월 21일 본인 인스타그램에서 4년 전(2014년) 이혼했고 샌프란시스코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석사 학위한 사실을 직접 밝혔다.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법률학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추계예술대학교 교수]][[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분류:서울가톨릭대학교 교수]][[분류:광운대학교 교수]][[분류:단국대학교 교수]][[분류:성공회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미국의 변호사]]
  • 서민정(영화배우)
         [[2000년대]]에 주로 활동했으며 결혼과 동시에 미국으로 떠나면서 사실상 연예계를 은퇴했다가 [[2017년]] 복귀했다.
         하지만 최고의 인지도를 얻었던 하이킥 종영 시점에 아쉬워할 틈도 없이 2007년 8월에 깜짝 [[결혼]]하며 [[미국]] [[뉴욕 시|뉴욕]]으로 떠났다. 하이킥 이후 시즌들은 물론이고 그 이후로 10여년간 방송 활동은 사실상 그만두었다. 이후 인터뷰에 따르면 하이킥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현재의 남편을 만난 상태였고, 큰 인기를 얻기 전부터 결혼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마침 하이킥이 대박났다. 그런데 갑자기 인기가 생겼다고 '일 좀 더 할게요'. '결혼은 나중에 할게요'[* 사실 하이킥을 시작하기 전의 서민정은 그리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고, 본인도 극중에 비중있게 다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하이킥이 끝나고 결혼하려고 비밀리에 결혼식장까지 잡아놨다고 한다. 그런데 본인이 하이킥에서 비중있는 배역으로 바뀌어버리고, 그러한 인기에 힘입어 하이킥이 방송을 3개월 연장까지 해버리자 어쩔 수 없이 결혼도 3개월 연장할 수밖에 없었고, 한번 연장한 마당에 또 나중에 한다고 하다간 끝도 없을 것 같아서 과감히 결혼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는 게 인간적으로 나쁜 것 같았고 남편이 미국에서 혼자 사는 얘기를 들었는데 되게 안쓰럽고 빨리 가서 따뜻한 밥을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둘러 떠난 것이라고 한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213&aid=0000974970|#]] [* 방송 복귀 후에 라디오 스타에 나왔는데 그때 하이킥이 끝나고 극장판도 계획했었는데 서민정이 미국으로 이민가는 바람에 무산되었다고.]
         결혼 상대가 [[교포|한국계 캐나다 교포 1.5세]] 이면서 동시에 [[미국]]에 살고 있기 때문에 원정출산 의혹을 상당히 받았다. 하지만 [[원정출산]]이 절대로 아니며, 남편이 [[미국]] [[시민권자]]인데 원정 출산 의혹이 나온다는 거 자체가 많은 사람들이 [[원정출산]]의 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속지주의 국가지만 일부분 [[속인주의]]도 인정한다. 따라서 서민정의 자식은 [[한국]]에서 [[출생]]했어도 [[미국]] [[국적]]이다. ~~남편이 한국인인데도 [[미국]]에서 출산하면 의심을 하는 게 맞다. 사실 이 때 여론이 전성기를 보내다 갑자기 결혼 후 은퇴한 [[노현정]]의 사례에 대해 굉장히 안 좋은 쪽으로 고양된 상황이어서 서민정도 이에 대해서 의심을 샀던 것~~ 하지만 남편이 [[뉴욕|뉴욕 시]]에 살고있는 치과 개업의이며, ~~레인보우 식스 1위 기록 보유자라고 하더라.~~ '''서민정 본인부터가 결혼 직후부터 쭉 [[미국]]에 살고 있으며 시부모님도 [[캐나다]] [[토론토]]에 살고 계신다.''' 그리고 출산한 아이가 '''[[딸]]'''이라는 것이 밝혀지자 그냥 묻혔다.
         이후 MBC '[[오빠생각]]'에 출연해, 미국이라 왔다 갔다 하기 힘들지 않겠냐는 MC의 물음에 "왔다 갔다 하겠다"며 일시적인 출연이 아니라고 방송 의지를 보였다.
          * 힘든 미국 생활을 버티는 원동력이 [[하이라이트(아이돌)|하이라이트]] [[윤두준]]이라고 고백했다. [[http://m.entertain.naver.com/ranking/read?oid=382&aid=0000589867&rankingType=default&rankingDate=|#]] [* 윤두준의 문서에도 적혀있듯이, 윤두준도 서민정의 팬이어서 그녀의 팬카페에서 활동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는 [[딸]]에게 [[한국말]]을 열심히 가르치고 있으며 한글 학습지를 구독하여 [[한글]] [[공부]]를 시키고 있다고 하였다.
  • 서부개척시대
         [[미국]]의 서부개척시대는 미국-멕시코 전쟁 등을 전후하여 미국인들이 아메리카 대륙 서부로 이주하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 멕시코인 등과 충돌하며 미국의 영토로 확정해 나갔던 시기를 뜻한다. 현재의 초강대국 미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며 미국인들에게는 꿈과 희망의 시대지만, 원주민에게는 백인들의 대침략이 벌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분류:미국사]]
  • 서석준
         1938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성주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검정고시]]를 거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외교학과에 입학해 1960년에 졸업하였다. 1964년부터 2년간 AID장학금을 받아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공부하였다.
  • 서세원
         }}</ref>로 수사가 진행되자 홍콩으로 출국했고 이후 [[미국]]으로 도피하였다. 여권이 무효화되고 인터폴 수배자 명단에 오르게 되자 2003년 4월 30일 귀국했다. 2003년 10월 구속됐으며, 이후 재판에서 징역 10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1, 2심 결과에 불복하고 2006년 4월 9일 [[대법원]]에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2006년 11월 23일 원심을 확정하였다.
  • 서세원(1956)
         또한 인기 연예인을 초빙해서 개그를 하는 <서세원의 스타데이트>를 진행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훗날 대한민국 [[토크쇼]]의 교두보를 마련하기도 했다.[* 대한민국 TV 토크쇼는 초기에는 진지한 대담에 가까웠는데 1979년에 방영된 '화요일에 만납시다', 1982년부터 1992년까지 방영된 장수 프로그램 '11시에 만납시다' 가 대표적이다. 이것이 코미디언이 진행하는 농담 섞인 형태로 변한 것으로 대표되는 것은 1989년 3월부터 방송된 [[한국계 미국인]] 코미디언 '쟈니 윤 쇼' 였는데 시기적으로 서세원의 스타데이트와 유사하다.] 이후 서세원은 서세원의 스타 데이트를 진행한 경험을 밑바탕으로 [[1990년대]] 중후반부터 토크쇼 진행자로 변신, [[2000년대]] 초반까지 [[KBS 2TV]]의 간판 프로그램인 '[[서세원쇼]]' 로 흥행하게 된다. 주 코너는 '토크박스' 로 출연 연예인들이 서로 센 이야기들을 해서 서세원이 등수를 매기는 방식. 다만, 이 프로그램의 컨셉[* 주사위 던져서 토크 주제를 정하는 것]은 한국 방송의 고질적인 병폐인 [[일본 방송]] 베끼기다. 일본의 장수 인기 토크 프로그램 [[http://ja.wikipedia.org/wiki/%E3%83%A9%E3%82%A4%E3%82%AA%E3%83%B3%E3%81%AE%E3%81%94%E3%81%8D%E3%81%92%E3%82%93%E3%82%88%E3%81%86|고키겡요(ライオンのごきげんよう)(1991년부터 방송)]]의 코너 '[[http://www.youtube.com/watch?v=6cwPZFAmAnE|주사위 토크]]'를 그대로 따라했다. [[http://jamja.tistory.com/686|#]]
         이렇게 몰락한 서세원은 결국 2003년 [[홍콩]]을 거쳐서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수배까지 되었다. 결국 궁지에 몰려 2004년 귀국[* 명목은 [[허리디스크]] 악화로 인한 [[수술]]의 필요성이었지만, 사실은 [[여권]]이 만료되고 [[국제형사경찰기구|인터폴]]에 수배 중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판결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 이 소송은 [[대법원]]까지 가서 [[2006년]]에 확정되었다. 참고로 [[이수만]]도 이때 서세원과 같이 걸려 비슷하게 집행유예를 받았다.
         서세원이 목사가 되는 과정과 해당 교단이 어디인지도 관심사였는데, 서세원 본인은 [[미국]]에서 공부했다고 했으나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2756|"목사 안수는 개인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발언을 하기가 힘들다"며, 끝내 어느 신학교에서 교육받았는지는 밝히지 못 했다.]] 안수를 받았다는 [[장로회]] 군소 교단도 [[한기총]]이나 한국교회연합에 [[http://www.dailywrn.com/sub_read.html?uid=4723|가입되지 않은 교단으로 밝혀졌다]]. '''쉽게 말해서 자칭 목사 수준'''이었다는 것. 해당 교단은 교세 확장이나 금전적 동기로 서세원이 유명인인 데다가 보수층에서 서세원을 정치적으로 키워주니, 외국 미인가 신학교(또는 무자격)을 근거로 목사 직위를 매매한 걸로 보인다.[* 처음 목사가 되길 권유한 것은 놀랍게도 전 부인 [[서정희]]였는데, 권유한 이유가 목사가 되면 인성적인 문제가 해결될 것 같다는 생각 때문. 하지만 오히려 역효과만 났다.]
         게다가 이 자리에서 하던 말을 들어보면 '나를 욕하는 사람들은 [[종북]]이자 쓰레기' 라든가 자신을 두려워한 나머지 영화계가 자신을 매장했다느니 극장들이 외면했다느니, 칸 영화제에서 [[전도연]]이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밀양]]과 [[변호인(영화)|변호인]]에서 주연을 맡은 [[송강호]]는 마귀라는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126432|되도 않는 망언들을 이어간 것은 물론]][* 우연의 일치인지 훗날 폭로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창동]] 감독과 배우 [[송강호]]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미국 영화]]는 60%가 [[예수]] 영화라면서 [[http://m.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196145|한국 영화는 예수 영화로 돌아가야 한다, 이승만 영화로 예수 한국을 세우자는 식의 종교 편향적인 말까지 늘어놓으면서,]] 그야말로 [[심형래]]가 하던 [[과대망상]]과 허세를 능가하고 있다. --[[예수]]에 대한 모독--
  • 서승환
          | 학력 =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 교환교수
         *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경제학 [[박사]]
         [[분류:195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달성 서씨|달성 고씨]]][[분류: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프린스턴 대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건축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교통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바른정당 당원|살인당원]][[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살인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장관]][[분류:박근혜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살인경제학자]][[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서승환 (1956년)
          | 학력 =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대학교 교환교수
         *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경제학 [[박사]]
         [[분류:대한민국의 국토교통부 장관]][[분류:박근혜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경제학자]][[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서영택
         * [[미국]] [[하버드 로스쿨]] 법률과학 박사(S.J.D.)
  • 서우(배우)
         2014년 이후 자가면역질환에 따른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공백기를 가졌다. 어머니도 자가면역질환을 앓고 있다고 한다. 안티도 구설수도 많았고, 그것을 버틸 힘이 없어서 잠시 어머니가 계시는 [[미국]]에 머물렀다고 한다.
  • 서장훈
         * 1996년 [[새너제이 주립 대학교|미국 산 호세 주립 대학교 레크리에이션학과 단기속성연수과정]] 수료
         * 1994-95 [[농구대잔치]]에서 [[서울 삼성 썬더스|삼성전자]]의 [[박상관]]과 리바운드 다툼을 하다가 목 부상을 당한 이후 대한민국 농구에 환멸을 느껴 1년간 [[미국]] 유학을 떠났다가 1996년에 복학하였다. 이 1년 간의 공백 때문에 1년 후배 [[현주엽]]과는 프로 농구 입단 동기가 되었다.
         [[분류:197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농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센터 (농구)]][[분류: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선수]][[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금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은메달리스트]][[분류:아시안 게임 농구 메달리스트]][[분류:1994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1998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메달리스트]][[분류:대한민국의 아시안 게임 농구 참가 선수]][[분류:1994년 아시안 게임 농구 참가 선수]][[분류:1998년 아시안 게임 농구 참가 선수]][[분류:2002년 아시안 게임 농구 참가 선수]][[분류:2006년 아시안 게임 농구 참가 선수]][[분류:경상북도 출신]][[분류:서울학동초등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생활과학대학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비디오 자키]][[분류:학력 위조 의혹 피해자]][[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1998년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 선수]]
  • 서재응
         == 미국 프로야구 시절 ==
         이후 [[로스앤젤레스 다저스|LA 다저스]]를 거쳐 [[탬파베이 레이스]]에서 활동하며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통산 118광주에 등판해 28승 40패, 4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1998년 아시안 게임|방콕 아시안 게임]] 이후 [[미국]] 경험을 바탕으로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에도 참가했고,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를 거친 [[대한민국]] 출신 [[투수]]들 중 [[박찬호]]와 [[김병현]] 다음으로 메이저 광주에 많이 출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37&aid=0000004252 ‘달콤 씁쓸’한 메이저 리거들의 귀환] - 주간동아</ref>
         [[미국]] 생활에 한계를 느껴 [[일본 프로 야구]] 진출도 고려했으나 고향 팀으로 돌아오기로 결정<ref>[http://www.donga.com/fbin/output?n=200712120068 KIA맨 서재응“살아 있음을 보여 주겠다”] - 동아일보</ref>하여, 귀국한 후 [[2007년]] [[12월 17일]] 계약금 8억원, 연봉 5억원, 옵션 2억원 등 총 15억원의 조건에 그를 지명하였던 [[KIA 타이거즈]]와 계약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3&aid=0000690129 서재응, "KIA, V10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뉴시스</ref>
  • 서지원
         '''서지원'''(<small>본명:</small> '''박병철''', [[1976년]] [[2월 19일]] ~ [[1996년]] [[1월 1일]])은 [[대한민국]]의 [[발라드 (대중음악)|발라드]] [[가수]]이다. 5학년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살다가, 1994년 10월 가수의 꿈을 안고 대한민국에 돌아와 데뷔하게 된다. 1집 앨범 'Seo Ji Won'을 발표하자마자 수많은 소녀팬들을 확보하고 단숨에 인기 스타로 떠올랐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1가 (백범로)에서 2남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 후 [[서울특별시|서울]]의를 다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로 건너가 코헹가 초등학교(Cahuenga Elementary School), 존버로즈 중학교(John Burroughs Middle School), 다우니 고등학교(Downey High School)를 졸업하였고 19세에 [[대한민국]]으로 귀국해 1집 앨범 'Seo Ji Won'으로 정식 데뷔했다.
         :내가 지금 이 모든 일을 한글로 적는 것은 아무래도 유서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 누군가 이 글을 봤을 때 나를 이해하길 바래서이다. 내가 오랫동안 각오해 왔던 바이지만 드디어 용기를 내어 실행에 옮기게 되었다.<br><br>나는 그 동안 약을 복용해왔다. 그 이유는 안정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 세상은 내가 존재하기에 너무도 험한 곳이고 더 이상은 견디기 힘들 것 같다. 2집 활동을 앞둔 나는 더 이상 자신도 없고, 활동 중 군대도 가야하고 내 가족들을 또 사무실 가족들을 책임지기엔 너무도 벅차다. 새해를 맞이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다.<br><br>난 이제껏 진실하지 못했다. 하지만 몇 사람들에겐 정말 죄송하다. 하나님, 부모님, 전무님, 실장님, 정현, 승만, 세진(이 셋은 동등하다.) 태석이 등등 너무 미안하다. 그들은 남은 인생을 나처럼 살지 않길 바란다. 내가 못 이룬 꿈을 내 동생들이 이루었으면 좋겠다. 난 항상 생각해 왔다. 무엇이 날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지, 그 무엇보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못 이긴 것 같다. 연예인으로서, 또 한 사람으로서, 난 더 이상 힘이 없다. 차라리 미국에서 평범하게 공부나 했었으면 하는 생각도 든다.<br><br>세상에게 할 말은 뚜렷이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냥 진실한 세상이었으면 한다. 내 마음을 모두 표현 못 하겠지만 나를 정말 지켜오고 나를 아는 사람은 날 이해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아픔도 알 것이다. 나로 인해 피해를 보는 사람은 정말 없길 바란다. 전무님은 내가 죽은 뒤에라도 PR을 잘해 2집이 많이 성공적이길 빈다.<br><br>내가 이런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건 아무도 모르겠지. 난 항상 밝게 살아왔으니까... 죄송하다... 정말 죄송하다... 정말, 사랑하고 싶었는데... 그러고 싶었는데... 전무님께 정말 죄송하구요, 실장님께도 죄송하구요, 다른 바램은 아무것도 없구요.... 우리 어머니 좀 잘 돌봐주세요.<br>그리고 정현이 승만이 세진이는 정말 끝까지 책임져 주세요. 그리고 저 용서해주세요. 그게 저의 마지막 바램이에요.}}
  • 서태지
         작곡, 편곡 및 작사의 완성도와 음향 퀄리티, 공연장 사운드와 콘서트 무대 구성 등 음악적인 면에서 전방위적으로 깐깐한 완벽주의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단 음악쪽을 보면 [[서태지와 아이들 2집|녹음을 마친 음반]]의 마무리 믹싱을 위해 6개월 동안 바깥세상과 단절한 채로 쌩고생을 하는가 하면 [[태지|이미 발매한 음반]]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앨범 활동이 끝나자마자 새로 녹음해 버리지를 않나, 또 아토모스 싱글 땐 자연의 소리를 잡겠다고 장비를 바리바리 싣고 산골 [[흉가]]를 찾아가 녹음 작업을 하질 않나, 또 그게 믹싱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정규음반 발매의 기회를 노리고 [[미국]] 스튜디오로 날아가 버리기도 하는 등 음악의 완성도에 대해서는 국내 아티스트 중에 손에 꼽힌다.
         은퇴 기자회견을 마친 [[서태지와 아이들]]은 미리 마련된 헬기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해 출국 절차를 밟았다. 경유지인 괌에서 세 멤버는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후 서태지는 미국으로 갔다는 이야기만 나돌 뿐 문자 그대로 세상에서 '''증발'''해버렸다. 그렇게 아무런 소식도 전하지 않은 지 2년이 흐른 1998년 7월 7일 갑작스레 [[Seo Tai Ji|5집]]을 발표 하였다. 당시 세계적 추세인 얼터너티브 록을 기반으로 한 원맨밴드 앨범.
         1996년 11월 20일, 일간지 <[[스포츠서울]]>은 '은퇴한 서태지가 [[미국]]에서 주유소를 운영하면서 1996년 12월 24일 재미동포 여대생 김모 양[* 이지아의 본명은 김상은이다.]과 결혼할 예정'이라는 특종기사를 냈으나 서태지 측이 적극 부인하고 명예훼손 소송 등 강경 대응 방침을 밝히면서 세간의 흔한 오보인 것처럼 흐지부지되었다.
         >(전략)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서태지 씨는 1993년 미국에서 지인의 소개로 상대방과 첫 만남을 가지게 된 후 한국과 미국에서 서로 편지와 전화 등으로 연락을 하며 서로에게 점점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96년 서태지 씨의 은퇴 이후 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둘은 자연스럽게 연인으로서 함께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97. 10. 12. 미국에서 둘만의 혼인신고를 마치고 [[부부]]로서의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의 성격과 미래상이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약 2년 7개월 만인 2000. 06 경 양측은 별거를 시작했으며 결국 헤어지는 수순을 밟고 다시 각자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물론 별거 초반에 서로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한 바 있으나 이를 극복하지 못했고 서로 완전히 헤어지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략)
         심지어 과거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넬]]도 서태지와의 관계를 "친하기는 한데 얼굴보기는 하늘의 별따기보다도 힘들 정도의 관계"(...)라고 표현했다. 그래도 양현석과 이주노의 말을 들어보면 아이들 시절 당시 레코딩 작업에 들어갈 때도 지금이랑 별 다를 바 없이 잠수하면 대책이 없었다고 하니 서태지의 타고난 성격인 듯. 실제 양현석이 앨범 녹음을 마치고 서태지만 마무리 작업을 위해 미국에 남아있고, 자기는 한국에 왔는데 몇 달이 지나고 서태지 사망설이 나오자 실제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그때에도 특히 연락이 안 되어서(...). 로밍이 안 됐던듯 하다.[* 해피투게더에서 출연했던 절친 [[김종서(가수)|김종서]]의 증언에 따르면, 바깥에 5분 다녀올 거리를 다녀오는 데에도 1시간 정도의 준비 시간이 소요됐다고 한다.]
          * 9집 활동 종료 후 가족과 함께 떠난 미국 여행에서 찍은 사진들을 이용한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224065150962423&id=456789204356692|다이어리를 출시해 생존신고를 했다!]] 가격은 25,000원.
          * 고종 [[사촌]]동생 강현구는 [[강개토]]라는 예명을 가진 싱어송라이터로 활동 중이다. 서태지의 영향인지 강개토 역시 본인 음악의 작사, 작곡, 편곡, 연주, 엔지니어링 등 모든 작업을 혼자서 소화한다. 본래는 서태지가 6집 발매 직전 강현구도 미국으로 건너와 있었던 상태라 서태지가 귀국하면 베이시스트를 맡기로 했으나, 귀국 날짜가 달라진 탓에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 당시 서태지에게서 베이스를 선물 받았다고 한다.[* 서태지가 이전부터 사용해오던 빨강색의 베이스 기타라고 언급했다. 아마도 잭슨인 듯.] 개토네이션이라는 밴드를 결성해 디지털 싱글을 중심으로 7장의 앨범을 발매하며 활동하는 중이다. 초창기에는 얼굴이 공개되면 괜히 서태지와 엮여 오해를 살까봐 가면을 쓰고 활동했으나[* 다른 개토네이션의 멤버들도 얼굴에 페인팅을 하였다.] 현재는 가면을 벗은 상태. 결혼식 때는 서태지가 그에게 축하화환을 보내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발매 하는 음악 대부분은 음원 순위 10위권에 랭크 되었으며, m.net 및 곰 tv 뮤직비디오 실시간순위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삼성, 웅진, 두산, 신한, 우리 등 다수의 기업체 음악작업을 진행했으며, '광고음악의 장르가 신세대들의 소비심리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현재는 여러 음악 콘텐츠 제작자로서의 활동은 물론 대학교 실용음악과 학과장으로 재직 중이다.
          * 서태지가 출연한 광고 중에 서태지 본인의 목소리로 녹음되지 않은 광고가 있다. 당시 은퇴 후에 미국으로 떠난 뒤여서 미처 녹음을 할 수 없어 대역이 대신 녹음했다고 한다. 당시 대역을 맡은 사람은 KBS 프로그램 스펀지의 권재영 PD로 스펀지에서 에피소드가 방송되었다.
          * [[소셜테이너]]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소소하게나마 사회 현안에 대해 메시지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2003년에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문화연대]]를 비롯한 30여 개 시민 단체에서 반대 운동을 벌였는데, 당시 7집 앨범을 구상 중이던 서태지도 동참한 것. 서태지는 공식 홈페이지에는 '''덕수궁터 내 미대사관 신축 반대''' 배너를 띄워 서명 운동에 협조했다. 또한 그해 12월 13일 광화문 사거리에 열린 공연에는 당시 서태지컴퍼니 소속이었던 밴드 [[Pia|피아]]가 노개런티로 출연했는데, 여기에 서태지 컴퍼니는 회사 차원에서 거리 공연에 필요한 장비 등을 지원했다고 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39870|링크]] 결국 덕수궁 터에 미국 대사관을 짓는다는 계획은 없던 일이 되었다.
         >어떠한 명분도 수없이 많은 민간인들과 어린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전쟁을 정당화 할 수 없으며 그 누구도 미국 행정부에게 죄 없는 이라크의 많은 생명을 빼앗을 권리를 주지 않았 습니다.
         >부시 미국 행정부는 즉시 이라크에 대한 군사행동을 중단하여 이라크 국민들이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전 세계 60억 인구에게 정의에 대한 믿음과 세계평화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는 부시 미국 행정부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하며 반전평화를 염원하는 전 세계인들의 행렬에 동참하고자 합니다.
         >저는 대다수 국민이 반대하는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지지 및 이라크 전쟁파병 계획을 즉시 철회하기를 촉구합니다.
          * 이러한 행적 때문에 반미 가수로 인식되어, 2004년에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것을 그런 의도로 해석하는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2&aid=0000008549|기사]]까지도 나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영주권을 갱신하지 않은 것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 머물고 있어서 굳이 미국 영주권을 갱신할 필요를 못 느꼈다는 것.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49899|기사]]
          * [[타블로]] : 에픽하이 멤버들이 모두 골고루 좋아하는 편이긴 하지만 타블로는 확실한 서빠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라디오에서도 서태지의 노래를 선곡하기도 했고, 미국 생활 당시 하여가를 듣고 다녔으며, 박명수의 라디오에 출연했을 때는 "사전 심의제도가 아직도 있었다면 에픽하이는 앨범을 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너무 감사한 분이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한 본인 라디오에서 서태지의 팬이 보낸 ETPFEST 섭외축하 꽃다발을 자랑하기도 했다.
  • 서태화
         | 학력 =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맨해튼 음악대학원]] 음악학 석사
         *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맨해튼 음악대학]] 대학원 성악학과 음악학 석사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김포시 출신]][[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맨해튼 음악학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198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
  • 서태후
         서태후는 광서제 대신 단친왕(端親王) 재의의 아들 [[부준]](溥儁)을 즉위시키려 했으나 서양 열강은 광서제의 폐위를 반대하였다.<ref>지앙성난, p.307</ref> 각국 공사들은 광서제를 진찰하게 해 줄 것을 요구하였고, 광서제를 진찰한 프랑스 의사는 "황제의 맥박이 정상이며, 병에 걸리지 않았다"고 발표하여 서태후를 분노하게 만들었다.<ref name="왕315"/> 열강의 공사들은 부준의 대아가(大阿哥; 황태자) 책봉에도 축하하러 오지 않았다.<ref name="왕315"/> 서태후와 단친왕은 본래 반청 단체였던 [[의화단]]을 구슬려 열강 8국([[러시아 제국|러시아]], [[일본 제국|일본]], [[대영제국|영국]],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 [[미국]], [[독일 제국|독일]],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과 대항하도록 하였다. 의화단에 의해 각국 공사관이 습격당하자 8개국 연합군은 [[베이징|북경]]을 함락시켰고, [[원명원]]은 불에 탔으며, 서태후는 광서제와 함께 [[시안 시|서안]]으로 피난을 떠나야 했다. 그 과정에서 서태후는 진비를 우물에 빠뜨려 살해했다.<ref>지앙성난, p.308</ref><ref>진비에게 스스로 우물에 빠져 죽도록 자결을 종용했다고도 한다.</ref> 서태후와 광서제는 평복 차림으로 피난을 갔고 먹을 것과 물을 찾지 못해 이틀이나 굶기도 했다.<ref>탕렌저, 《중국을 말한다 15》, 김동휘 역, 신원문화사, 2008, p.239~p.240, {{ISBN|978-89-359-1454-8}}</ref> 피난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서태후는 북경에 남아있던 경친왕 혁광 등에게 자신의 안전만 보장되면 열강의 어떠한 요구도 받아들이라고 지시했고 이로 인해 [[1901년]] [[불평등 조약]]인 [[신축조약]]이 체결되었다.<ref>지앙성난, p.309</ref> 북경으로 돌아온 서태후는 오만하고 보수적이었던 태도를 버리고, 연회를 열고 공사 부인들을 초대하여 대접하는 한편 그때까지 했던 것 이상으로 사치를 일삼았다.<ref>지앙성난, p.310~p.311</ref>
  • 선거인단
         [[간접선거]] 제도에서 최종 선거를 실행하는 집단. [[미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제도가 유명하다.
         미국 [[대통령 선거]]의 선거인단은 각 주의 [[투표]]로 선출된다. 각 주에 할당되어 있는 선거인의 숫자는 각 주의 인구에 비례하여 차이가 난다. 현재 미국에서 다수의 주는 주 선거에서 승리한 후보가 선거인을 독식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선거인단 제도는 과거 미국의 영토가 매우 넓고, 인구가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직접 투표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고안된 제도이다. 대통령은 각 주가 아닌 '연방'의 대표라는 측면도 반영하고 있다.
  • 선우대영
         [[서울고등학교]] 시절 [[봉황기 대회]]와 [[화랑기 대회]]에서 우수 투수상을 수상하며 유망주로 떠올랐다.<ref>《SPORTS 2.0》"그들은 지금 - 프로 야구 원년 선수 142명", 2007,6,4</ref> 이후 원년 멤버로 입단하여 활동했지만, 어깨 부상으로 조기 은퇴하고 [[미국]]으로 이민하여 개인사업 중이다.
  • 선우중호
         | 학력 =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콜로라도 주립대학교]] 대학원 [[공학]][[박사]]
         *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콜로라도 주립대학교]] 대학원 수문학공학과 공학[[박사]] 졸업
         *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콜로라도 주립대학교]] 명예 [[자연과학|이학]]박사
  • 설미현
         | 학력 = [[미국]]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임학]] [[박사]]
         '''설미현'''(薛美顯, [[1975년]] [[9월 4일]] ~ )은 [[대한민국]]의 [[수필|수필가]]이자 [[환경 공학|환경학자]]이다. [[서울특별시|서울]] 출생이다. 아버지 직장을 따라 5세 때 [[경기도]] [[용인시|용인]], 6세 때 [[대구광역시|대구]], 7세 때 [[부산광역시|부산]]으로 옮겼다가 11세가 되던 1986년에 서울로 돌아와서 2003년 [[미국]]으로 건너가기 전까지 살았다. 2004년 이후부터 2011년 6월까지 미국 [[시애틀]]에 거주하였다가 7월에 귀국하여 현재까지 국립산림과학원에서 근무 중이다.
         * [[미국]]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산림자원경제마케팅학과 졸업 ([[임학]] [[박사]])
         [[서울대학교]] 산림자원학과를 졸업했으며, 동 대학원 산림자원학과 경제/정책 분야에서 석사를 취득하였다. 이후 2003년 미국의 보스턴으로 건너갔고, 2004년 9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시애틀]]에 거주하며 [[워싱턴 대학교|워싱턴 주립대학교]] 산림자원대학 마케팅전공 박사과정에서 수학하는 한편, 동 대학 교내 연구소인 CINTRAFOR (국제 임산물 무역 연구소) 소속 연구원으로도 활동하였다. 2011년 6월 10일 산림자원 마케팅 박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7월 1일 이후 현재까지 국립산림과학원 국제임업 분야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2008년 6월, 국제환경 NGO인 레인포레스트 연맹(Rainforest Alliance)에 발탁되어 인도네시아 발리에 위치한 아시아-태평양 지부에 1년 동안 근무하기도 했다. 당시 주된 임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산림 커뮤니티와 목재 회사들을 FSC(Forest Stewardship Council) 인증을 통해 환경친화적임을 인증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FSC 인증 감사관(FSC Certification Auditor)으로 근무하는 한편, 2008년 8월 동 기관에 의해 한국 대표(Representative of Korea)로 위촉되기도 하였다. <ref>[http://www.rainforest-alliance.org/forestry.cfm?id=bio_seol 레인포레스트 연맹, 공식홈페이지]</ref>{{언어링크|en}} 2009년 6월에 미국으로 다시 옮긴 이후에도 계속하여 감사관 임무를 수행하였다.
         인도네시아에서 일하는 중간에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2009년 4월 박사후보가 되었고, 2009년 6월 [[산림청]]에서 주관한 논문대회 "녹색성장과 산림"에서 제1저자로 제출한 논문 《우리나라 산촌의 커뮤니티 생산자로서의 가능성과 이를 활성화하기 위한 산림청과 비정부기관 (NGOs)의 역할: 산림인증제를 도입한 수익증진 협력모델을 바탕으로》(2인 공저)가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ref>[http://blog.naver.com/forest_news/30051657273 산림청, 공식블로그]</ref> 이 시기를 전후로 서울대학교, 가톨릭대학교, 국립산림과학원 등에서 세계시장에서 활성화되고 있는 산림인증제의 국내적용방안과 NGO들의 활동상황을 알리기 위한 강연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는 한편, 주간무역에 《발리에서 보내는 설미현의 우드리포트》를 객원기자 자격으로 2009년 2월부터 6월까지 격주로 연재하기도 하였다.<ref>[http://www.weeklytrade.co.kr/search.html?search_type=all&submit=submit&search_and=1&search_exec=n_t&search_section=all&news_order=1&search_exec=town&search=%BC%B3%B9%CC%C7%F6 주간무역, 칼럼 목록]</ref>
  • 성금연
         [[1968년]]에 중요 [[무형문화재]] 제23호 가야금 산조 예능보유자가 되었으나, [[1974년]]에 [[시나위]] 예능보유자인 [[남편]] [[지영희]]와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며 보유자 인정이 해제되었다.{{Efn-ua|name=sanjo|1=1968년 12월 23일 지정되었으며,<!--
         이후 [[죽음|사망]]할 때까지 [[하와이 주|하와이]]에서 [[가야금]] 전수에 힘썼다. 그녀는 13현 가야금, 15현 가야금, [[철]] 가야금과 같은 개량 가야금을 만들었고 가야금 독주곡으로 춘몽 꽃의향기 흥 살푸리 새가락별곡 눈물의진주를 [[작곡]]하였다. 가야금 산조는 짧게 7분에서 20분. 40분.으로 이어져 1시간 20분까지 작곡하였다. 특히 가야금산조 휘모리부분을 만들었으며 그 중 뒤에 이어지는 휘모리는 1960년 당시 트위스트가 티비에서 나오는것을 보시고 흥미를 느끼시고 그 박자에 맞춰서 만드신것이다. 그 곡을 들으면 트위스트가 연상되는 곡이다. 그리고 눈물의진주는 자식들에게 남길것이 없어 눈물이 진주가 된다면 많은 눈물을 남기겠지만 그것을 남길수가 없으니 이곡을 너희들에게 남긴다. 하며 만드신 곡이 눈물의 진주입니다.(테입으로 유언을 남기신 말씀입니다).그리고 두분은 (지영희.성금연)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게 아니였다. 잠시 다니러 가신다고 작은가방 2개를 가지고 가셨는데 그때 당시에는 3개월만 있으면 자녀들이 영주권을 받을수 있어 자녀중 한 사람이 미국을 가길 원했는데 그사람 때문에 가게 된일이다. 이민을 가는사람이 모든 재산을 한국에 두고 나가는 사람이 있겠는가? 시기질투하는 사람의 행동으로 싸움을 할줄 모르는 성금연은 미국으로 되돌아가라는 사람들(그당시 많은 사람들이)에게 당하고 미국으로 들어가셨다. 국악을 더많이 보급을 시켰을 두분을 그렇게 떠밀어 나가시게 한것이다. 그리고 성금연은 박상근에게 가야금을 배운게 아니다. 박상근은 남편 지영희의 친구로 당시에 북으로 넘어간 사람의 이름을 대면 빨갱이로 몰리기 때문에 북으로간 안기옥선생님이름을 못되고 그사람 박상근의 이름을 댄것이다. 내가(지윤자) 직접 성금연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이다. 성금연 살아생전에 박상근이라고 쓴책은 이름을 다 없애게 하였다. 그 산 증인으로 이재숙씨가 있다. 그분 책에 보면 박상근이라는 이름이 없어졌음을 알것이다. 성금연선생에게 이재숙씨가 배우러 왔을때 박상근의 이름을 넣고는 한가락도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셔서 다 고친것으로 안다. 아직도 박상근에게 배워서 성금연가락이 화려하게 변했다고 하는 것은 없어야 하겠다. 아울러 박상근은 성금연과 하등 관계가 없음을 밝히고 성금연류를 배우는 사람들은 성금연자신이 손가락이 피가 터지도록 거야금을 뜯어 가락을 만든것임을 알기를 바란다.<ref name="gwe" />
  • 성시경
         성시경은 [[1979년]] [[4월 17일]]에 [[대한민국]]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1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홍콩]]에서 산 적도 있었고, [[미국]]의 유명한 [[연예인]]인 [[머라이어 캐리]]의 [[음악]]을 듣기 위해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영어를 별 어려움 없이 구사한다.
  • 성역 도시
         성역 도시는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들에게 차별 없이 사회 서비스를 제공하고, 연방 이민국의 단속으로부터 보호해주겠다고 선언한 지자체이다.
         본래 미국의 교회에서 1980년대 내전을 피하여 미국으로 피난 왔던 중남미 불법체류자들을 추방 위기에서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2016년 11월, 불법 체류자 추방을 공약으로 내세운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미국의 여러 대도시들이 성역 도시 선언을 시작했다. 14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뉴욕]](New York), [[시애틀]](Seattle),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가 성역 도시임을 발표했으며, 14일에는 [[시카고]](Chicago)가 참가했다.
         2017년 1월 25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성역 도시들에 대해서 재정지원을 중단하겠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전국의 39개 도시와 364개 카운티 정부가 이에 대항하여 성역도시를 유지할 것을 선언했다.
         시애틀의 에드 머리 [[시장]]은, “오늘은 일본계 미국인들의 강제수용 이후 미국 이민역사상 가장 어두운 날”이라면서, 트럼프의 반헌법적 행정명령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시애틀시의 가치를 지킬 것이라고 주장, 킹 카운티의 다우 콘스탄틴 수석행정관은 “킹 카운티는 어린이들과 가족들을 음지로 몰아넣지 않고 그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지 않을 것”, “다른 여러 지자체들과 함께 불법체류자들을 보호할 수 있는 튼튼한 대응장치를 구축할 것”이라고 했다.[[http://ny.koreatimes.com/article/20170126/1036862 (참조)]]
         [[분류:도시]][[분류:미국]]
  • 성연
         | 국적 = {{국기나라|미국}}, {{국기나라|대한민국}}
         [[한국|대한민국]] [[인천광역시]] [[남동구]] [[출생]]이며 약 7~8세 때부터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민가서 9년 동안 살았으며 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한국으로 왔다. 한국에서를 졸업했으며 [[한국]]과 [[미국]]의 [[이중국적]]<ref>{{웹 인용|url=https://twitter.com/envision_you/statuses/869198766615572480|제목=170518 여권 두개들고 해외 출장가는 성연|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ref>{{웹 인용|url=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aulspring&logNo=221009295530|제목=부모가 해외 시민권 취득하면 미성년 자녀들 후천적 복수국적도 가능|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이다.
         [[분류:199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아이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플레디스 소속]][[분류:2017년 데뷔]][[분류:프리스틴의 일원]][[분류:인천광역시 출신]]
  • 세븐 (가수)
         '''세븐'''({{본명|최동욱 (崔東旭)}}, [[1984년]] [[11월 9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2003년]] 1집 《[[Just Listen (음반)|Just Listen]]》으로 데뷔, 타이틀곡 〈와줘〉로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2004년]] 2집 《[[Must Listen]]》으로 다시 한번 대중에게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2006년]] 3월 3집 《[[24/7]]》으로 컴백하였으며, [[2006년]] 11월에는 4집 《[[se7olution]]》을 발표, 타이틀곡 〈라라라〉로 활동하였다. 2007년 1월에는 드라마 '[[궁S]]'로 연기에 도전한 바 있다. 그 후 미국시장 진출을 위해 2년간의 준비를 거쳐 2009년 3월 싱글 'Girls'를 발표하였다. 이후 [[2010년]] [[7월 21일]]에는 미니앨범 《Digital Bounce》를 발표하고 한국에서 활동하였다. 팝스타 에이머리(Amerie)의 3집앨범 타이틀곡 'take control'의 피쳐링을 맡은 경력이 있다. 2012년 2월에는 미니 앨범 '내가 노래를 못해도'를 발표하여 지속적인 인기를 이어갔으며, 다음 해 군입대를 했다. 2013년 연예 사병으로 군 복무 중, 군인복무 규율 위반과 무단이탈 등의 징계사유가 있어 10일의 영창 처분을 받았다. 전역 후 세븐은 뮤지컬 '엘리자벳'으로 컴백해 많은 관객의 호평을 받으며 뮤지컬 배우로서 활동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 [[미국]] ===
  • 소냐(가수)
         [[대한민국]]의 여성 [[가수]]이자 뮤지컬 배우. [[주한미군]] [[아프리카계 미국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김천시|김천]]에서 태어났으나 태어난 지 일주일 만에 아버지가 [[미국]]으로 떠나고 어머니를 8세 때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후 [[김천시|김천]]에 있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공장에서 일하며 고학을 했고, 1998년 5월 <박상원의 아름다운 TV-얼굴>을 통해 사연이 소개된 뒤 1999년 5월에 가수로 데뷔했다.
  • 손민한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에서 MVP가 나온 사례는 [[1982년]] [[KBO 리그]]가 출범한 이래 그가 유일했으며 2012 시즌 [[넥센 히어로즈]]의 [[박병호 (1986년)|박병호]]가 두 번째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팀에서 MVP가 나왔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어 [[미국]]전에서 선발 [[투수]]로 호투해 승리 투수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WBC]] 때부터 안 좋은 어깨 때문에 [[2009년]] [[10월 2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LA 다저스]] 지정병원인 조브 클리닉에서 감바델라 박사의 집도로 오른쪽 어깨 관절경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미국]]에서 1차 재활을 마친 뒤 귀국해 2010 시즌까지 계속 재활 훈련을 했다. 그러나 재활 훈련 도중 통증이 재발되어 복귀가 무산됐고 [[2011년]]에도 시범 경기에 등했으나 또 다시 악순환을 거듭하여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시즌 후 방출됐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271770 손민한, 롯데 떠난다…자유계약 공시 신청] - OSEN</ref>
  • 손성훈
         '''손성훈'''(孫誠勳, [[미국]] 유학 시절 [[영어]] 이름은 '''Sydde Son'''(시드 선), [[1970년]] [[10월 21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 겸 [[작사가]]이며 [[작곡가]]이다.
         초등학교 시절 [[오스트레일리아]]와 [[미국]] 유학을 하기도 한 그는 [[1989년]]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솔로 록 음악 가수 첫 데뷔하였고 [[1992년]] 《너에게 묻고 싶어》라는 곡으로 정식 솔로 [[가수]] 데뷔하였다. 2년 후 [[1994년]]에는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노래 작품을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한국방송공사|KBS 한국방송공사]] [[텔레비전 드라마]] 《[[폴리스 (드라마)|폴리스]]》의 [[사운드트랙|OST]]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로부터 2년 후 1995년 헤비 메틀 록 밴드 〈시나위〉에 잠시 보컬리스트로 가담하여 《[[시나위 (밴드)|시나위]] 5집》 앨범을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해 시나위의 기타리스트였던 [[신대철]]의 협조를 받아 솔로 싱글 앨범도 발표하였다. 이어 같은 해 1995년 11월에는 랩 록 음악 장르를 표방한 프로젝트 솔로 앨범 《엑스 1집》을 발표하여 록 음악 장르의 다양성을 표방하였다. 이듬해 1996년 《손성훈 3집》을 발표, 《고백》과 《천년의 사랑》이라는 노래 작품이 히트하였다.
         *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주|뉴 사우스 웨일스 주]] [[:en:Arden Anglican School|시드니 아덴 앵글리칸 스쿨]](前) → [[오스트레일리아]] [[캔버라 위탠제라 초등학교]](前) → [[미국]] [[워싱턴주|워싱턴 주]] [[시애틀 컨트리 데이 스쿨]] 초등부 졸업(1983년)
         [[분류:197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울산광역시 출신]][[분류:1989년 데뷔]][[분류:밀양 손씨]][[분류:대한민국의 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헤비 메탈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하드 록 음악가]][[분류: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랩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사이키델릭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
  • 손태진(태권도선수)
         [[2008년 하계 올림픽 태권도]] 남자 68kg급에서 [[2005년]] [[태권도]] 세계선수권 1위인 [[미국]]의 마크 로페즈를 3라운드 종료 직전 오른발 돌려차기로 꺾고 금메달을 차지하였다. 더욱이 '한국 [[태권도]]의 천적'이며 [[미국]] [[태권도]]에서 명성이 있는 로페스 가문을 무너 뜨려 화제를 모았다. 이로써 [[대한민국]]에게 10번째 [[금메달]]을 안겼다. 손태진은 [[2008년 하계 올림픽]]에 출전하는 [[태권도]] 선수들 중 최연소였다.
  • 송대관
         《[[해뜰날 (노래)|해뜰날]]》의 대히트로 일약 스타가 되었던 송대관은 이 때부터 꾸준히 음반을 발매하며 가수 활동에 전념하였고 1976년 영화에도 출연하여 스크린에도 데뷔하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송대관은 결국 1980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돈을 벌기 위해 다양한 일들을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다. 송대관은 약 10년 간 미국 생활을 하다가 1988년에 [[대한민국]]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혼자랍니다》(신대성 작사/ 신대성 작곡)를 부르며 인지도를 얻다가 1989년 《정 때문에》(장경수 작사/ 정주희 작곡)를 발표하고 나서 20만장의 레코드판매량을 기록하고 라디오 차트 분야에서 3개월간 1위를 하며 다시금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후 1990년 대에 곡 제목처럼 실제로 차표를 들고 노래를 부르며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차표 한장》(조동산 작사/ 원희명 작곡), 《인생은 생방송》(김동찬 작사/ 박현진 작곡), 《고향이 남쪽이랬지》(조동산 작사/ 조동산 작곡) 등 수많은 곡을 히트시켰는데 그 중 1998년 《네 박자》(김동찬 작사/ 박현진 작곡)은 여러 세대를 포섭하며 남녀노소 누구나 부르는 국민애창곡이 되었고 [[KBS]] 가요대상 본상, [[KBS]] 가요대상 올해의 가수상 외에 여러 상을 받게 해준 곡이 되었다.
         1975년에 발표한 곡인《[[해뜰날 (노래)|해뜰날]]》 을 1981년에 제이 가일즈 밴드가《Centerfold》라는 곡으로 표절하였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에 저작권 관련 조약이 전혀 없었고 [[대한민국]]에서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전무한 상황이라서 송대관은 웃고 넘겼다고 회고하였다. 《Centerfold》는 당시 빌보드 메인 차트에서 6주 동안 1위를 했다. 이후 27년이 지난 1998년에 발표한《네 박자》를 같은 해 [[미국]]의 가수 엥쥬가《Sorry, sorry, I am sorry》라는 곡으로 표절했다. 이 무렵에는 [[대한민국]]과 [[미국]] 사이의 저작권 관련 조약이 체결되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확립되어 송대관은 이의를 제기하여 이 곡에 대하여 표절을 판명받았다.
  • 송민호(가수)
         한 번 꽃힌 것에 대해서는 쉽게 놓치 않는다. 한 번 무엇인가에 꽃히면 끝을 보는 성격. 지금까지 송민호가 꽃혔던 것으로는 먼저 'Really Really' 활동기동안 빠짐없이 원샷이 잡힐 때마다 볼 수 있었던 '그 춤'이 있다.[* 송민호가 위너 뮤직비디오 촬영차 방문한 미국에서 배워온 춤으로, 팬들 사이에서는 '그 춤'으로 불린다.] 자매품으로는 'Love Me Love Me' 음방을 통해 볼 수 있었던 빙글빙글 하트 춤이 있다. 요즘 꽃힌 것으로는 '파란 장미'가 있는데, '파란 장미'의 꽃말이 불가능에서 기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고 한다. 가슴에 타투로 새길 만큼 파란 장미에 대한 애정이 넘쳐난다. 파란 장미가 들어간 장신구나 옷, 모자 등을 착용하는 모습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해서 [[로스앤젤레스|LA]]에 갔을 때 흑인들이 힙합 CD를 주자 힙합의 관심이 많아서 아무 의심없이 그 CD를 가지고 갈려고 하다가 돈을 내놓으라는 [[흑인]]들에게 붙잡혔다.[* 사실 이건 [[미국]]에서 자주 쓰이는 사기 수법이다. 보통 "내가 랩을 녹음해서 믹스테잎을 만들었는데 들어볼래?"하며 CD를 건네준 다음 돈을 뜯는다.] 다행히도 [[이승훈(WINNER)|이승훈]]이 구해줘서 탈출에 성공했지만, 강승윤을 깜빡하고 두고 오는 바람에 다시 돌아가니 강승윤이 돈을 빼앗기고 있었다고. 이 모습이 재밌어서 사진을 찍고 구해줬다고 한다.
  • 송상현 (1941년)
         |학력 = [[미국]] [[코넬대학교|코넬 대학교 로스쿨]] S.J.D.
         |경력 =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대위]] 출신 <br/>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br /> [[유니세프]] 대한민국위원회 위원장 <br /> [[유니세프]] 대한민국위원회 회장 <br /> 대한민국 사법연수원 운영위원장 <br /> 국가인권위원회 정책자문위원장 <br /> 미국 뉴욕 대학교 법대 석좌교수 <br/> 前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br> 前 서울대학교 BK 21세기 세계 속의 대한민국 법률 발전 교육연구단 단장 <br> 前 [[대한민국 대법원]] 송무제도개선위원 <br> 前 [[대한민국 법무부]] 정책자문위원 <br> 前 [[대한민국 법제처]] 자문위원 <br /> 前 [[한국법제연구원]] 이사장 <br> 前 사법제도개혁추진협회 대통령위원회 위원 <br> 前 [[대한상사중재원]] 중재위원 <br> 前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 중재위원 <br /> 前 [[세계지식재산권기구]] 조정위원 <br /> 前 [[대한민국 특허청]] 자문위원장 <br> 前 [[대한민국 산업자원부]] 무역위원장 <br> 前 [[유네스코]] 대한민국위원회 사회과학위원 <br> 前 Law and Society Group of Korea 대표위원장 <br> 前 민사판례연구회 회장 <br> 前 사단법인 한국 지적소유권학회 회장 <br> 前 국제거래법학회 회장 <br> 前 한국디지털재산법학회 회장 <br> 前 [[대한민국]] 건국 50주년기념 제1회 한국법학자대회 조직위원장 겸 대회발기위원장 <br> 前 [[한국법학교수회]] 회장 <br> 前 재단법인 한국백혈병어린이재단 이사장 <br> 前 법률구조법인 대한가정법률복지상담원 이사장 <br> 前 한국대학골프연맹 총재 <br> 前 [[대한골프협회]] 이사장 <br> 前 [[국제자연보전연맹]] 한국위원회 이사장 <br> 前 [[아주대학교]] 재단 이사장 <br> 前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br> 前 [[한빛문화재단]] 이사장 <br> 前 한국의학교육평가원 이사장 <br> 前 [[플로리다 대학교]] 법대 교수 <br> 前 멜버른대학교 법대 교수 <br> 前 [[하버드대학교]] 법대 교수 <br> 前 웰링턴 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br> 前 컬럼비아 대학교 법대 교수<br> 前 [[워싱턴 대학교]] 법대 교수 <br/> 前 [[하와이 대학교]] 법대 교수 <br/> 前 [[코넬 대학교]] 평의회 의원
         1959년를 졸업하고<ref name="한경1"/>.<ref name="동아1"/>, 1963년 2월 [[서울대학교|서울대 법과대학]]을 학사 학위했다.<ref name="동아1"/><ref name="조선1"/><ref name="한경1"/> 재학중인 [[1962년]] 제14회 고등고시 행정과와<ref name="한경1"/>.<ref name="동아1"/> [[1963년]] 제16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ref name="로이슈1">[http://www.lawissue.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23 로이슈<!-- 봇이 붙인 제목 -->]</ref> 하여 법조인이 되었다.<ref name="동아1"/><ref name="조선1"/><ref name="한경1"/> 그 뒤 공직에 투신하여 1964년 3월 총무처 직위분류과 제5계장이 되었으나 그해 군에 입대하여 1964년 12월 [[대한민국 육군|육군]][[법무]]장교 중위로 임관하여 법무관을 역임했다. 1966년 8월 서울대학교 사법대학원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그 뒤 해외에 유학, [[미국]] [[툴레인 대학교]]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을 거쳐 [[1970년]] 미국 [[코넬 대학교|코넬 대학교 로스쿨]]에서 법학박사 (S.J.D.) 학위를 받았다.<ref name="동아1"/>
         귀국 전에 미국의 뉴욕법률사무소에서 [[외국변호사]]로서 일한바 있고, [[1972년]] [[9월 5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로 부임한 후 35년간 계속 모교인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서 교수로 활동,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ref name="한경1"/> 1974년 7월부터 독일 함부르크 대학 방문 연구원을 1년간, 그리고 [[1978년]] [[8월]]부터 [[미국]] 하버드대학교 법과대학 방문 연구원을 1년간 역임하고 귀국했다. 서울대학교내의 보직 중에서는 1996년 법과대학장으로 선임되어 2년간, 그리고 2000년부터 3년간 서울대학교 BK 21세기 세계속의 한국법의 발전교육연구단장으로 봉직한 바 있다.<ref name="로이슈1"/>
         [[1989년]] [[9월]] 미국 [[플로리다대학교]] 법대교수에, 그리고 [[1990년]] [[7월]] 호주 [[멜보른대학교]] 법대교수에 임명되었다. [[1991년]] [[1월]] 미국 [[하버드대학교]] 법대 방문교수에 임명되어 2003년까지 매 3년마다 한 학기씩 한국법 강의를 했고 [[1994년]] [[뉴질랜드]] [[웰링턴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활동했다. [[1994년]] [[2월 12일]]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법학자 25인중의 1인으로 선정되면서 미국 뉴욕대학교 법대 석좌교수 (Inge Rennert Distinguished Professor of Law)에 임명되는 영예를 안았으며, [[1996년]] [[1월]]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법대 교수를 지냈다. 또한 1995년부터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학이 간행하는 Pacific Rim Law and Policy Journal, 호주 멜보른대학교에서 간행하는 Australian Journal of Asian Law 의 국제자문위원 및 카타르대학이 진행하는 International Review of Law의 편집인으로 그 편집과 간행에 도움을 주었다. 2002년 1월 호주 멜보른대학교로부터 Professorial Fellow with Title of Professor로 임명되었다. 그 외에 2003년부터 4년간 미국의 코넬대학교 평의회의원을 역임했다.
         * [[미국]] [[툴레인 대학교]] 법학대학원 석사 학위 (LL.M.)
         * [[미국]] [[코넬대학교 법학대학원|코넬 대학교 로스쿨]] 법률과학박사 학위(S.J.D.)
  • 송언석
         1963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대구[[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학과, [[서울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 시스템|뉴욕 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송영선(1953)
         1953년 [[경상북도]] [[경산시|경산군(현 경산시)]]에서 태어났다. [[경북여자고등학교]],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과 학사, 동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 석사, [[미국]]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신문방송학 [[석사]], 동 [[대학원]] 국제정치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한국국방연구원 재직 시절인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하자, 반전 여론 속에서 국군의 비전투 부대[* 서희-제마 부대로 명명되었다.]의 파병에 대한 비판이 정계, 시민사회 단체를 중심으로 강도 높게 제기된 상황에서, TV 토론 등에서 적극적으로 파병 찬성을 주장하면서 처음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그 해 가을에 미국이 다시 추가 파병을 요청한 후에도,[* 이듬해 3,000여명의 재건지원 부대인 '자이툰 부대' 파병으로 이어졌다.] 역시 앞장서서 파병 찬성론을 내세웠다. 여기서 나온 "미국을 감동시켜야 한다"(...)는 발언은 두고두고 화제를 일으켰다.
         당연히 진보 진영으로부터는 전쟁을 두둔한다며 비판받았고, 보수 진영에게는 맹렬 안보 여전사로 칭송받았다.[* 이 시기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미국 정부에 대한 반감, 2002년 신효순-심미선 장갑차 사고, 수평적 한미관계를 표방하는 노무현 정부의 집권 시절 등의 정치사회적 상황이 맞물려 한미관계가 정치 진영간 논쟁의 핫 이슈가 되었던 때였다.] 이러한 유명세를 바탕으로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의 [[비례대표제]]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에 공천, 당선되었다.
  • 송종익
         [[1905년]] 일본으로 유학을 갔으며 [[1906년]] 4월 [[미국]]으로 건너가 [[재미 한국인]]의 애국 계몽 운동 단체인 [[공립협회]]에 가입했다. [[1908년]] [[전명운]]과 [[장인환]]이 미국 외교관 [[더럼 스티븐스|D. W. 스티븐스]]를 암살한 사건이 일어난 이후부터 재판후원회 재무로 활동하였다. [[1913년]] [[흥사단]] 창단 때 경상도 대표를 지냈으며 [[1919년]]에는 흥사단 이사장과 [[대한인국민회]] 재무를 지냈다.
         [[1936년]] 북미 대한인국민회 총회관 건축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41년]] [[하와이 주|하와이]]에서 열린 해외한족대회 때 북미 대한인국민회 대표로 참석하여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했고 집행부 위원 겸 재무를 맡았다. 1941년 12월에 열린 대한인국민회 총회에서 [[로스앤젤레스]] 대표로 참가하여 대한인국민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고 [[1944년]]에는 주미외무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다. [[1945년]] 11월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대표단의 일원으로 귀국했지만 몇 달 뒤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간다. [[1956년]] [[1월 7일]] 사망했으며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 송준근
         해송생복집 제일스카이직영점 졸업했으며, 2007년 [[한국방송공사|KBS]] 22기 공채 개그맨으로 입사하였다. 소속사는 지앤미디어로, [[개그콘서트]]에서 느끼한 캐릭터로 자주 나왔었다. [[유상무]]와 동창이고 [[김성원 (희극인)|김성원]]과 더불어 외국인 역할 전문 개그맨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미국]]에 1년간 거주한 적이 있다고 한다.<ref>[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9120007540910]</ref>
         [[분류:개그콘서트]][[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희극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은진 송씨]]
  • 송채환
         [[1989년]] [[연극배우]]로 첫 데뷔하였고 [[1991년]] [[대한민국 영화|영화]] 《[[장군의 아들 2]]》의 주연 [[영화 배우|배우]]로 데뷔하였으며 [[1993년]] [[문화방송|MBC 문화방송]] 드라마에 첫 출연하였고 [[2002년]] [[대한민국]]·[[미국]] 합작 [[모노드라마]] [[영화]] 《요청》의 [[영화 프로듀서|제작자]]로 데뷔하였다.
  • 슈퍼히어로
         주로 [[미국]]에서 발달한 장르로서, [[미국]]의 [[DC 코믹스]], [[마블 코믹스]]가 이 슈퍼히어로 장르로 유명하다. 특히 DC의 [[슈퍼맨]]은 대표적인 슈퍼히어로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특촬 시리즈인 [[가면 라이더 시리즈]]와 [[슈퍼전대 시리즈]], [[울트라맨 시리즈]], 슈퍼전대의 미국판 리메이크인 [[파워레인저]]도 슈퍼히어로 장르로 분류할수 있다.
         ==== 미국 ====
  • 스트레인지리얼
         가상 세계이니만큼 [[미국]], [[러시아]], [[독일]], [[스페인]] 같은 실존 국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오시아, 유크토바니아, 벨카, 사핀 같은 이에 대응되는 국가가 존재한다.
  • 스티븐 연
         | 국적 = [[미국]]
         '''스티븐 연'''({{llang|en|Steven Yeun}}, 한국 이름: 연상엽, [[1983년]] [[12월 21일]] ~ )은 [[한국계 미국인]](외국배우) [[배우]]이다. 그는 TV 시리즈 《[[워킹 데드 (드라마)|워킹 데드]]》에서 글렌 리 역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연은 [[단편 영화]]와 [[장편 영화]]에서 여럿 출연한 바 있으며, 비디오 게임과 애니메이션의 성우를 맡기도 했다.
         스티븐 연(한국 이름: 연상엽)은 1983년 12월 21일,<ref>{{웹 인용|url=http://movie.naver.com/movie/magazine/magazine.nhn?nid=1367|제목=2012년 미국드라마 통신 제 6호|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네이버 영화|확인날짜=}}</ref> [[대한민국]] [[부산광역시|부산]]에서 태어나 한국인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ref name="interviewmagazine">{{웹 인용|url=http://www.interviewmagazine.com/culture/steven-yeun-walking-dead#page2 |title=ON THE ROAD WITH STEVEN YEUN |publisher=''Interview Magazine'' |date= |accessdate=September 29, 2014}}</ref> 아버지는 이민가기 전 한국에서 건축가로 일했다.<ref>{{웹 인용|url=http://herocomplex.latimes.com/tv/walking-dead-steven-yeuns-glenn-is-beating-heart-of-amc-series/#/0|title=‘Walking Dead': Steven Yeun’s Glenn is beating heart of AMC series|publisher=''Los Angeles Times''|date=February 8, 2013|accessdate=October 8, 2014}}</ref> 연은 5살 때 캐나다 [[서스캐처원 주]] [[리자이나]]로 이민을 갔다. 이후 [[미시간 주]] [[트로이 (미시간 주)|트로이]]로 이주하였고,<ref>{{인터뷰 인용|url=https://www.youtube.com/watch?v=LCqiCid71Ao&list=UUp0hYYBW6IMayGgR-WeoCvQ|title=Steven Yeun on his Parents|publisher=YouTube|interviewer=Ellen DeGeneres|first=Steven|last=Yeun|date=October 6, 2014|accessdate=October 8, 2014}}</ref>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ref name="latimes">{{뉴스 인용|first=Luis|last=Arroyve|title=Steven Yeun makes jump from Second City to AMC's 'Walking Dead'|url=http://leisureblogs.chicagotribune.com/about-last-night/2010/11/steven-yeun-makes-jump-from-second-city-to-amcs-walking-dead.html|work=[[로스앤젤레스 타임즈]]|publisher=|date=November 21, 2010|accessdate=February 27, 2011}}</ref><ref name="kg" /><ref>{{웹 인용|url=http://www.nytimes.com/2012/10/28/opinion/sunday/catching-up-with-steven-yeun.html?_r=0|title=Steven Yeun|publisher=''The New York Times''|date=October 27, 2012|first=Kate|last=Murphy|accessdate=October 8, 2014}}</ref> 이민 후, 그의 부모는 [[디트로이트]]에서 두 개의 미용용품 가게를 소유했다.<ref name="kg" /> 연은 2005년에<ref name="kg">{{뉴스 인용|first=John|last=Liberty|title=College grad vs. zombies: Michigan native stars in new AMC series 'The Walking Dead'|url=http://www.mlive.com/news/kalamazoo/index.ssf/2010/10/k-college_grad_vs_zombies_mich.html|work=Kalamazoo Gazette |publisher=|date=October 30, 2010 |accessdate=February 27, 2011}}</ref> 캘러머주 대학에서 신경과학 전공으로 심리학 학사 학위를 받았다.<ref name="interviewmagazine" /> 연은 부모님이 원하는 의사나 변호사 대신 배우가 되길 원했다. 그의 부모는 재능을 펼칠 2년의 시간을 주기로 결정했다. 연은 [[캘러머주|캘러머]]에서 클리퍼의 여자 형제를 통해 조던 클리퍼를 만났고, 이후 그를 따라 시카고에 가서 더 세컨드 시티(The Second City)에 들어갔다.<ref name="interviewmagazine"/>
         연이 연기와 [[즉흥극]]에 흥미를 가진 것은 대학 1학년 때, 대학의 즉흥극 그룹인 'Monkapult'를 본 이후였다. 그는 'Monkapult'에 가입하기 위해 오디션을 보았지만 탈락했고 2학년이 되어서야 가입할 수 있었다.<ref name="kg" /> 연은 부모님에게 법대나 의대에 진학하는 대신 [[시카고]]에 가서 즉흥극 경력을 쌓고 싶다는 말을 했다. 그의 부모님은 이를 탐탁스레 여기지 않았으나, 이후 2년간의 시간을 주며 그를 지원해 주었다.<ref name="kg" /> 그는 남동생과 2005년에 시카고 링컨 스퀘어로 이사했다.<ref name="latimes" /> 대학 졸업 직후, 그는 '스티어 프라이데이 나이트(Stir Friday Night)'란 아시아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스케치 코미디 그룹에 들어갔다.<ref name="kg" />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한국계 미국인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성우]][[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스파이더맨
         [[마블 코믹스]]의 캐릭터. [[미국]]의 [[슈퍼 히어로]]들 중에서도 [[슈퍼맨]]과 더불어 큰 인지도를 지니고 있다.
  • 신은미
         '''신은미'''(申恩美, [[1961년]] ~ )는 [[대한민국]] 태생의 [[미국]]의 언론인이다.
         [[대한민국]]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대한민국 국회의원을 역임한 [[박순석]]이다. 초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리틀엔젤스예술단]]에서 활동하기도 했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성악과를 졸업했다. [[1986년]]에 [[미국]]으로 이주했고 현재는 [[캘리포니아주]]에 거주하고 있다. 미국 미네소타 주립대학교에서 음악학과 석사, 음악학과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대학교에서 성악과 교수로 근무했다.
         [[2017년]] 미국 정부가 [[오토 웜비어]] 사망 사건을 계기로 미국 국민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여행을 금지하면서 이제는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갈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분류:196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언론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이화여자대학교 동문]]
  • 신응희
         무관으로 재직하며 [[박영효]]의 심복이 되었으며, [[1883년]](고종 20년) [[5월]] [[김옥균]], [[박영효]] 등의 추천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도야마 하사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1884년]] [[8월]] 귀국하였다. 이후 남행부장 겸 사과, 후영군사마 등을 역임하여 [[갑신정변]] 거사에 참여하였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조선 고종|고종]]과 명성황후를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그러나 [[청나라]]의 개입으로 정변이 3일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왔으며, [[1886년]] [[5월]]에는 [[박영효]], [[김옥균]]을 암살하려고 [[조선]] 조정이 파견한 [[지운영]](池運永)을 [[김옥균]]의 유인책으로 [[유혁로]], [[정난교]], [[이규완]] 등과 함께 유인하였다.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한참 안심시킨 뒤 [[지운영]]을 유인하여 암살 계획을 폭로하였다.
         1884년(고종 21년) 12월 4일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행동대의 1개 부대를 이끌고 [[서재필]], [[정난교]], [[서재창]], [[윤경순]], [[유혁로]], [[이규완]] 등과 함께 생도들, 장사패들을 이끌고 궐내에 잠입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부대, [[이규완]]이 인솔하는 부대와 함께 사관생도들을 이끌고 국왕과 비빈들을 [[경우궁]](景祐宮)으로 옮겼다. 그러나 [[12월 7일]] [[청나라]]군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이규완]] 등 10인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1886년]](고종 23) [[박영효]], [[서광범]], [[이규완]],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이듬해 그는 [[박영효]] 등과 함께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으며, [[1896년]] 다시 조선으로 귀국하였다.
         망명생활 중 그는 [[도쿄사범학교]](東京師範學校)를 다녔다. 그는 일본에 체류하며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박영효]], [[김옥균]]의 경호를 담당하였으나 어느정도 거리를 두었다. [[1886년]] [[5월]] [[이규완]]이 [[지운영]](池運永)이 조선 조정에서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김옥균]]의 지시로 [[유혁로]], [[정난교]] 등과 함께 김옥균, 박영효에게 불만이 있는 척 가장하여 김옥균 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온 지운영을 유인, 그를 안심시킨 뒤 [[조선 고종|고종]]의 밀서와 비수, 칼 등을 압수하였다. [[1888년]](고종 23) 다시 배편으로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894년]] 초 귀국하였다.
         [[함경남도|함경남도 장관]] 재직 시 [[일본]]과 [[미국]]의 어업 도구와 그물 등을 들이고 양식업을 독려하여, 함경남도 일대의 어업 생산량을 늘렸다. 특히 [[조선총독부]]의 평에 의하면 "[[전라북도]] 서호진(西湖津) 이북의 어업이 舊來의 면모를 일신하여 융성해지고 관내의 저금 액수가 장관의 독려로 이상 증대를 초래한 치적이 있다고 평가됨"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측의 인사자료에 의하면 한 도의 장관으로서 백성들에게 털끝만한 위엄이라도 실추하지 않는 것만을 염려하며, 부하가 직무를 행할 때 큰 일 작은 일을 불문하고 일일이 간섭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며 부정적으로 보기도 했다. 한편 그의 일본인 부인 신매자(申梅子)가 [[3.1 운동]] 전후하여 한때 [[대한애국부인회]]에 관여하여 부인회 함흥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1918년]] [[9월]] 황해도 도장관으로 전임되었으며. 그해 [[11월]] 훈4등과 금배 한 잔을 선물로 받았다. [[1919년]] [[4월]] [[3.1 운동]]을 진정시키기 위해 도장관 명의로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경고문에서 그는 [[미국]]의 민족자결은 조선의 독립과 하등 관계가 없는 망발이며, 앞으로 시위에 참가하는 자는 가차없이 탄압할 것이라고 언명하였다. 이후 [[자제단]]에 가입, [[황해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각 군에 [[자제단]]을 조직했다.
         [[조선총독부]]의 인사 기록에 의하면 그의 인물됨을 원래 준민 교혜(寯敏巧慧)하며 부하를 대하는데 아주 엄하지만 윗사람을 맞이할 때는 아첨을 하고 허리를 굽실거리기에 정신이 없다. 천성이 교묘하고 영리하기 때문에 중후함이 결여되었고, 움직이기만 하면 이익을 쫓는 버릇이 있다며 부정적으로 평하였다. 그밖에도 [[조선총독부]]는 그의 인물됨을 평가하기를, 경박한 미국의 공기에 접한 그는 협소한 인물에 더하여 일종의 뻔뻔스러움이 숨어 있으며 툭하면 건방진 태도를 보인다. 지식이 저급하고 천하의 형세에 어둡다고 하였다. 다만 됨됨이는 도량이 아주 협소하지만 축재(蓄財) 문제에는 깨끗하여, 억지로 재산을 모으는 일에 급급한 것 같지는 않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 신정균 (영화 감독)
         '''신정균'''(申正均, [[미국]] 유학 시절 [[영어]] [[이름]]은 '''프란시스코 신'''(Francisco Shin), [[1963년]] [[5월 12일]] ~ )은 [[대한민국]]의 [[영화 감독|영화감독]]이다.
         [[분류:196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제작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980년 데뷔]][[분류:평산 신씨]][[분류:연극 감독]][[분류:미술 감독]][[분류:뮤지컬 감독]][[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양자]][[분류:불교 이탈자]][[분류:개신교도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신정아(큐레이터)
         신정아는 2016년에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 이사로 임명되어 2018년에 미국에서 교육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이 포착되었다고 중앙일보가 보도하였다.[[https://news.joins.com/article/23153835|#]] --[[무슨 마약|도대체 무슨 마약 먹고 사기꾼을 임명했어요?]]--
         [[경상북도]] [[청송군]]에서 아버지 신희태와 어머니 이원옥 슬하 2남 1녀 중 셋째로 출생했다. 고향에서 국민학교를 마친 후, [[서울]]로 진학했다. 1991년, 서울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까지는 확실하다. 이후 [[미국]] [[유학]]을 떠나 [[캔자스 대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영어]] 실력이 나빠서 바로 학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랭귀지 스쿨(파운데이션 과정)을 2년 다녔다고 한다. 캔자스 대학교 측이 확인한 바에 의하면, 1992년 봄부터 1996년 가을까지 '''5년간 다녔으나 3학년 과정에서 중퇴'''했다고 한다. '''즉, 캔자스 대학교의 학부 과정에 입학했던 것은 확실하게 사실로 보이나, [[졸업]]을 못 했다.''' 이유는 [[영어]] 실력 미달.
         [[미국]]에서 학위를 따지 못한 신정아는 실제로는 최종 학력이 [[고졸]]이었으나, 한국으로 귀국하면서 신화적인 사기극을 벌인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끝은 창대하리라|그녀의 거짓말의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은 나쁜 의미로 창대했다.]]
         1997년, 신정아는 금호미술관에 자신이 미국 [[캔자스 대학교]]에서 서양화와 판화를 전공하고 동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고 했다. 금호미술관 측에서는 일단 이력서를 받아두었다가 전시장 [[영어]] 안내 아르바이트생으로 채용했다. 그러나 신정아의 영어실력은 별 볼일 없었다고 한다. 일단 영어실력 미달로 캔자스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으니.[* 이후 2000년대 미술계 거장이 내한했을 때 기자회견에서 신정아가 영어로 질문하는 것을 들은 한 학자는, 자칭 '[[예일 대학교|예일대]] 박사'의 영어 실력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놀랐다고 한다.]
         신정아의 학력에 대한 의혹은 이미 [[동국대학교]] 조교수 임용 당시부터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술사]] 및 [[미술]] 관련 [[미학]] 분야는 한두 다리만 건너면 서로 모두 선·후배이거나, 아는 사람이라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바닥이 좁고[* 지금은 그 경향이 약해졌으나 미술학계는 [[서울대]]를 필두로 소수의 대학들이 주름잡고 있었다.], 특히 [[미술사]](art history)에서는 [[예일대]]가 [[미국]] 최고 명문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박사 프로그램이 좋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갑자기 미술계에 등장하였던 신정아라는 사람이 예일대에서 미술사를 전공했다는 것은 매우 의심스러운 주장이었다.
         물론 [[예일대]] 박사학위는 말짱 [[거짓말]]이며, [[미국]] 캔자스 대학교를 다니다가, 영어 실력 미달로 중퇴 후 귀국했기 때문에 실제 최종 학력은 [[고등학교]] 졸업이다. [[서울대]] [[미대]] 동양화과를 다니다가 미국으로 [[유학]] 가기 위해 중퇴했다는 말도, 한국에서 활동할 당시 미술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이 지어낸 새빨간 거짓말이다.
         자신은 수업료를 납부하고[* 그러나 수업료를 납부한 송금기록이나 증거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금호미술관에서 퇴출당할 때도 펄쩍 뛰며, "[[예일대]]에 보낸 학비 송금 통장을 보여주면 되냐"고 되물었다고 한다.] '리포트'를 제출하고[* [[미국]] 대학에서 제출하는 과제는 보통 에세이(essay)나 페이퍼(paper), 노트(note) 등이며, [[리포트]](report)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신정아의 경우 애초에 미국에서 제대로 대학을 다닌 적이 없기에, 1990년대 한국 대학에서 사용하던 '리포트'라는 용어를 사용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정말 미국에서 대학을 다닌 사람이라면, 에세이 혹은 페이퍼를 제출했다고 말했을 것이다.] 논문을 쓰고 디펜스의 과정을 다 마쳤으며[* 해당 학과의 박사 디펜스 과정은 2011년에야 도입되었으니, 이 또한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 과정에서 자기를 도와준 린다 트레이시라는 미국 여성이 자기를 속인 것일 뿐이라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자신은 브로커가 [[멘토]]인 줄 알았다고 한다.
         [[동국대]]는 1차 재판에서 승소했다. 한편, [[예일대]]는 손해배상소송을 각하해 달라는 요청을 자기 나라에서 했으나 그 요청 [[망했어요]]. [[http://news.kbs.co.kr/world/2012/02/14/2435049.html|#]] 2012년 6월 손해배상 여부가 가려질 예정. 6월 12일 미국 법원은 "예일대가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면서 원고 패소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224010|판결했다]].
         >변양균 진술: 신정아와 나는 그동안 몇 번 만나던 중에 제가 일출을 보러 가자는 제의를 하여, 2003년 11월 9일에 신정아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동해안으로 갔습니다. (중략) 장시간 실랑이 끝에 결국 [[성관계]]를 갖게 되었습니다. 관계 후에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신정아는 그것이 [[첫경험]]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이도 30살이 넘었고 [[미국]] 생활도 오래 했기 때문에 당연히 남자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니 영어도 못 하시는 분이 어떻게 남자를 꼬셔-- 계속 출혈이 있어서 제가 [[생리대]]를 사다주어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134쪽) --으악 눈이 썩는다--
         2012년 6월 [[미국]] [[코네티컷]] 주 지방법원은 예일대의 약식 재판[* [[미국]]은 민사도 배심원 재판을 하지만, 대부분의 재판이 사법 거래와 약식 재판으로 대충 끝난다. 미드 [[슈트]]를 봐도 "심리까지 가게 되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다"며 모든 재판을 사법 거래로 간단하게 처리한다. 미국에서 약식 재판은 원고와 피고가 주장하는 팩트에 분쟁이 없을 때, 분쟁이 없는 사실에 어떤 법을 적용할지 판사에게 결정해 달라고 청원하는 것이다. 미국 민사 소송에서 거의 모든 피고가 “원고의 주장이 근거가 없으니 굳이 배심원 재판까지 가지 말고, 판사가 직접 판단해 기각시켜 달라”며 약식 재판을 요청한다.] 요청을 받아들여 배심원 재판을 생략하고, 판사 터커 멜란컨이 "예일대 측이 고의로 신씨의 학위를 잘못 확인해줬다고 볼 만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동국대가 제기한 [[명예훼손]] 및 부주의 주장에 대해 소송 기각하였다. 즉, 학위 확인 잘못은 단순 실수이기 때문에 재판 대상이 안 된다고 본 것이다.
         이에 예일대는 같은 달 위 판결을 근거로 한국 법원에 “미국 법원 판결에 따른 소송비용을 지급하라”며 집행판결 소송을 걸었다. 청구 금액은 29만 7,000달러. 변호사 비용 제외. 변호사 비용만 100만 달러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미국 드라마]]에서 언론사들, 심지어 지나가던 파파라치가 수시로 외치는 말이 수정헌법1조다. 미국은 헌법 1조에 표현과 언론의 자유를 천명해 놓았고, 이를 근거로 공인의 명예훼손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소송의 핵심 쟁점인 동국대의 명예 훼손은 미국에서 성립하기 어려운 개념이다.
         즉, 한국식 법감정으로 세계 최고의 법률가를 배출하는 예일대를 상대로, 예일대의 소재지인 코네티컷에서[* 미국은 해당 지역 사람만 해당지역 [[판사]]가 될 수 있다. 다른 지역과 인사이동도 없고, 일 잘한다고 고등법원으로 승진하는 것도 없다. 즉 코네티컷 사람만 코네티컷 법원에서 근무할 수 있는데, 코네티컷에 있는 세계 최고의 [[법대]]가 어디게?] 소송을 걸었으니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한가? 여기에 더하여 예일대가 1심 소송이 걸린 후 재판 화의조정에서 화의하기 위해 노력한 것도 예일대 측이 오류를 발견한 즉시 사과하였고, 진실을 알면서 회피했다는 “악의”가 없었다는 근거가 되었다.
         즉 첫 번째 쟁점인 명예훼손과 사실상 같은 문제이며, 예일대 관계자가 잘못된 조사의 결과를 “동국대에 말했기 때문에” 피해가 발생한 것이며, 이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는 것이니 미국수정헌법1조에 의해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이라는 것이다.
         결국 첫 번째 쟁점인 공인의 “명예훼손”은 미국에서 성립하기 어려운 죄명이니 기각, 2번째 쟁점인 “과실”은 발생하기는 하였으나 사실상 “명예훼손” 문제의 우회상장에 지나지 않으니 기각해주세요. 라는 것이다.
         이미 법원에서 “과실”부분은 배심원에게 넘기도록 결정이 났으나, 예일대의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이를 뒤집는, 미국 법원에서도 매우 이례정인 결정이 이루어져 결국 “과실” 부분마저 소송 기각되었다.
         항소심에서도 원심의 판단을 그대로 따랐다. 다만 동국대의 모든 손실은 예일대의 언론 인터뷰로 발생한것이지, 다른 부분은 동국대의 손실과 관련이 없었다는 논리로 해당 사건을 분석 했다. 그런데 미국은 언론 인터뷰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보장한 국가라서...
         화의조정때 예일대에서 사과도 하고 돈도 배상해준다고 했지만, 동국대가 원하는 것은 돈이 아니라 명예 회복이였다. 그런데 미국은 명예훼손이 인정되기 힘든 법구조이며 그것도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으니 처음부터 지는 게임이였다. 차라리 “과실” 부분에만 더 초점을 맞추거나 미국에서 흔히 쓰는 방식인 재판전 화의조정 단계에서 서로 적당히 타협하는게 어떤지 아쉬움이 있다.
         2018년 11월 16-17일 양일간 미국 애틀랜타 한국학교와 애틀랜타 한국 교육원을 찾아 자신을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 총괄본부장'이라고 소개하며 동포를 만났다고 한다. [[http://m.sf.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6753307]]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은 교육부의 예산을 지원받아 해외에 있는 한글학교를 위한 교과서를 공급하고 한글학교 교사들을 위한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단체다. 신정아는 2016년에 재외동포교육진흥재단 이사로 임명되었다고 한다.
         명백한 사기행위를 예로 들어 학벌사회의 허위성 운운하는 것은 [[알카에다]]의 테러행위로 미국 중심의 세계에 통렬한 일침을 가했다는 주장과 다를 것이 없다. 이는 신정아 옹호는 아닐지언정 명백한 병폐가 맞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422193|기사링크]]
  • 신철식
         [[경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 신해철
         영국으로 유학을 떠난 신해철은 넥스트 4집에서 프로듀서를 맡은 기타리스트 [[:en:Chris Tsangarides|크리스 샹그리디]] (Chris Tsangarides)와 손잡고, [[1998년]] 테크노음악에 기반한 솔로앨범 《[[Crom's Techno Works]]》를 발표했다.<ref group="주">당시 발매한 앨범의 대표적인 곡으로는 〈[[일상으로의 초대]]〉가 있다.</ref> [[1999년 4월]]에는 크리스 샹그리디와 [[MONOCROM]]이라는 프로젝트 그룹을 결성해 동명의 타이틀로 앨범을 발표했다. 같은 해 5월에는 미국으로 다시 유학을 떠나 라이브 앨범 3장 발표와 영화 [[세기말]]의 [[세기말 (OST)|OST]] 프로듀싱을 담당하기도 했다.
         * 신해철은 아내에 대한 각별한 사랑으로 많이 알려져있다. 그의 9살 연하인 아내 윤원희는 [[재일 한국인]] 출신으로 [[미국]]의 명문 여대인 [[스미스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또한 [[골드만삭스]] (※[[일본]]지사)에서도 잠시 근무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미스코리아]] 대회에도 출전했던 적이 있었다. (미스코리아 뉴욕 진 출신) 신해철과 윤원희가 교제중, 윤원희가 암 투병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윤원희를 그저 단순한 연인사이의 친구가 아닌, 부부관계에 있어 부인의 한 남편으로서 그녀를 돌봐야 한다며 [[2002년]] [[9월 29일]] 일본의 모 성당에서 비밀리에 결혼을 올렸다. 그의 아내 윤원희가 암을 완치한 이후, [[2006년]] [[9월 14일]] 결혼 4년 만에 첫 아이인 딸 신지유를, [[2008년 7월]] [[7월 15일|15일]]엔 둘째 아이인 아들 신동원을 얻었다. 고스트스테이션 방송에서 자신의 아내를 '영숙이', 딸을 '동동이', 아들을 '동생이'로 부른다고 나온다. 넥스트의 여섯 번째 앨범 《[[666 Trilogy Part I]]》의 자켓에도 위의 명칭을 사용한 바 있다.<ref>[http://www.iworld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686]</ref><ref>[http://www.iworldtoday.com/news/articleView.html?idxno=177566]</ref><ref>[http://star.mt.co.kr/view/stview.php?type=1&no=2008111911111190930&outlink=1]</ref>
         [[2008년 1월]] [[1월 30일|30일]] 본인이 진행하는 인터넷방송에서 [[이명박]] 당선자와 인수위가 추진하는 영어 공교육 정책에 대해 “그런 식으로 할 거면 스스로 [[미국]]의 51번째 주가 되든지, [[영국]]의 [[영연방]]에 들어가 스스로 식민지가 되든지 …… 이게 무슨 엿같은 소리냐?”라고 강도높은 비판을 했다.<ref><del>{{뉴스 인용|제목=신해철 "영어 공교육? 차라리 美 51번째 주가 돼라"|url=http://star.moneytoday.co.kr/view/star_view.php?type=1&gisano=2008020417131562789|출판사=머니투데이|저자=김지연|날짜=2008-02-04 }}</del>{{깨진 링크}}</ref><ref><del>{{뉴스 인용|제목=신해철 "차라리 美의 51번째 주가 되라", 논란 뜨거워|url=http://sports.chosun.com/news/ntype2.htm?ut=1&name=/news/entertainment/200802/20080206/82f77105.htm|출판사=스포츠조선|저자=최세나|날짜=2008-02-05 }}</del></ref><ref>[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F0CBDCD2F32DEC075EF48A5631C7C8463EB7&outKey=V1268166e0c86d271d504fc00f15df45674a3e7e47d42c5d778affc00f15df45674a3&width=500&height=408 방송 클립 일부분 다시 듣기 (1/2)]</ref><ref>[http://serviceapi.nmv.naver.com/flash/convertIframeTag.nhn?vid=11E7C77A52A23532905043A3B8D82C4C0D5D&outKey=V127e212ec04234545c0d04379f030931e4b31740cbd8426d0edc04379f030931e4b3&width=500&height=408 방송 클립 일부분 다시 듣기 (2/2)]</ref>
         [[분류:1968년 태어남]][[분류:2014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하드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헤비 메탈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전자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음악 작곡가]][[분류:게임 음악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랩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팝 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뮤직 비디오 감독]][[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제작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넥스트의 일원]][[분류:1988년 데뷔]][[분류:199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2010년대 가수]][[분류:테크노 음악가]][[분류:한국어 가수]][[분류:영어 가수]][[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골든디스크 인기상 수상 음악가]][[분류: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수상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분류:대한민국의 반전 운동가]][[분류:반파시스트]][[분류:이라크 전쟁 반전 운동가]][[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평산 신씨]][[분류:친노]][[분류:영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의료 사고로 죽은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심상우
         * [[미국]] [[몬타나 주립 대학교]] 공과대학 산업공학과 학사<ref name=autogenerated4 /><ref>동아일보 1981년 3월 26일 기사 참조</ref>
  • 심윤조
         '''심윤조'''(沈允肇, [[1954년]] [[7월 26일]] ~ )는 [[외교관]] 출신의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청와대]] 외교통상비서관, 외교통상부 북미국장, 주 [[포르투갈]] 대사, [[대한민국의 외교부 차관보|외교통상부 차관보]]를 역임한 뒤, 주 [[오스트리아]] 대사를 역임했다. [[2012년 4월]] 제19대 총선에서 서울 강남구 갑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 1998년 12월 : 주 [[미국]] 대사관 참사관
         * 2002년 07월 : 외교통상부 북미국
         * 북미국장을 역임한 대표적 워싱턴 스쿨 인사로 평가된다.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212958 '인간포석 人事의 세계'관료사회-외교통상부] 《동아일보》 2003년 11월 4일</ref>
  • 심은경(배우)
         [include(틀:다른 뜻1, other1=前주한미국대사 캐슬린 스티븐스의 한국식 이름이기도 하다. 그녀, rd1=캐슬린 스티븐스)]
         || 2009년 || [[불신지옥(영화)|불신지옥]][* [[미국]] 유학 중 담임선생님께만 보여 주려고 했는데 선생님이 학생들을 다 불러서 같이 보는 바람에 신들린 아이역으로 나오는 심은경의 연기를 보고 모두가 [[충공깽]]...] || 소진 || 주연 || 251,314 || 실패 ||
         || [[tvN]] || [[SNL 코리아]] || 사생여고 정회원 학생 || 단역[* 미국에서 유학중이던 시절 잠깐 한국에 들렸을 때, 장진 감독과의 친분으로 카메오 출연했다고 한다.[[https://youtu.be/OkEkzeMj47w]]] ||
  • 심학봉
         1961년 [[경상북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구미전자공업고등학교]], [[경북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심현섭(코미디언)
         [[2009년]]에 [[버락 후세인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광화문에 방한했을 때 환영행사의 사회를 본 적이 있다. 이 자리에서 심현섭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지난 40년 동안 이 순간만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라고 말했다.[[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111912124399784&type=1&outlink=1|#]]
  • 심훈 (1941년)
         |학력 = [[서울대학교]] 경제학과 학사 <br/>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
         * [[미국]] [[예일 대학교]] 경제학 석사
         [[분류:194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부산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동문]][[분류:예일 대학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금융인]][[분류:청송 심씨]]
  • 씽(마블 코믹스)
          * 판타스틱 포 멤버들 중 가장 고생을 하면서도, 팀의 궂은 [[마당쇠]] 역할까지도 맡아주는 등 좋은 이미지 덕에, 국내의 [[제시카 알바]] 하악하악(…)인 형편과 달리 [[미국]]에선 팬들도 상당히 많은 편. [[판타스틱 포]] 멤버들 중 단독 주연극인 [[스핀오프]]들도 가장 많이 제작되고, 그 인기 덕에 아예 애니메이션으로 《프레드와 바니, 싱을 만나다》에서 주역 코너도 별도로 만들어질 정도이며, 특히 여기선 자기 의지로 [[인간]]으로도, 싱으로도 변할 수 있는 등 다 좋은데, 문제는 여기선 더 씽이 [[인간]]일 때는 빈약 고딩으로 나오는 게 안습.(…)
  • 아이언맨
         [[미국]] [[만화]] 회사 '[[마블 코믹스]]'의 작품 중 하나에 나오는 [[슈퍼히어로]]. ~~빨리 발음하면 '아연맨'으로 들린다.~~
  • 안내상
         [[연세대학교]] 신학과에 입학하였으며, "소외계층 없는 평등한 사회를 만들겠다고 사회 혁명"을 꿈꾸며 사회운동에 나서 학생운동을 주도했다. 1988년 2월 26일 광주직할시 (현재 전라북도 고창군) [[미국]] 문화원 내 도서관 진열장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한 혐의가 드러나 총포 도검 화약류 단속법 위반,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됐다. 8개월 동안 수감된 후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 안다빈
         그의 [[본관]]은 [[순흥 안씨|순흥]](順興)이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장은 182cm이고 체중은 79kg인 그는 영화배우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 [[서승환]]와 조각가 겸 대학 교수 [[신재은]] 사이에서 슬하 2남 중 장남(長男)으로 출생하였으며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던 [[1998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였고 이후 [[2006년]] [[서양화|서양]][[화가]]로 [[미국]]에서 화단에 첫 등단하였으며 [[2009년]] [[미국]]에서 [[설치미술|설치미술가]]로 등단하였다.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순흥 안씨]][[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2006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설치미술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프랫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안다빈 (미술인)
         그의 [[본관]]은 [[순흥 안씨|순흥]](順興)이고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신장은 182cm이고 체중은 79kg인 그는 영화배우 및 예비역 대한민국 육군 중위 [[안성기]]와 조각가 겸 대학 교수 사이에서 슬하 2남 중 장남(長男)으로 출생하였으며 그는 초등학교 5학년 시절이던 [[1998년]]부터 [[미국]] 유학을 하였고 이후 [[2006년]] [[서양화|서양]][[화가]]로 [[미국]]에서 화단에 첫 등단하였으며 [[2009년]] [[미국]]에서 [[설치미술|설치미술가]]로 등단하였다.
         2020년 12월 마지막날에 아나운서[[김보민|미술인]]씨와약혼식을올렸다 신혼여행은 미국으로갔다왔다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순흥 안씨]][[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2006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설치미술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프랫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안재욱
         [[2013년 2월]], 안재욱은 작품을 끝내고 휴식 차 소속사 대표의 자택이 있는 [[미국]] [[라스베이거스]]를 방문했고, 저녁 식사 도중 갑자기 심한 통증을 느껴 곧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CT와 MRI를 찍은 결과 큰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을 옮긴 후 지주막하출혈이라는 진단을 받아 5시간의 대수술을 받았다는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ref>{{뉴스 인용
         |제목= 안재욱 "미국서 귀국, 재활 우선" 공식입장 |url= 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303051347051&mode=sub_view |출판사= 한국경제 |날짜= 2013-03-05 }}</ref><ref>{{뉴스 인용
         * 1999년 [[한국방송|KBS2]] 《[[체험 삶의 현장]] - 미국 알래스카 넙치잡이 편》 - 게스트
         * 2006년 미국 포드사 "포드 에지" (자동차)
  • 안창남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 [[노백린]]이 [[미국]]에서 길러낸 [[한국인]] 비행사들이 안창남보다 1년가량 먼저 비행사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최초는 아니라고 밝혀졌다.<ref>한국정보포탈시스템, [http://www.airportal.co.kr/life/history/unh/LfUnhUr001.html 정부수립 이전의 항공 - 항공의 태동] {{웨이백|url=http://www.airportal.co.kr/life/history/unh/LfUnhUr001.html |date=20070811180344 }}.</ref> 그러나 여전히 한국 상공에서 비행한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 (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신문]]》 [[1919년]] [[4월 17일]]자 기사에서 당시 대한임시정부의 군무장관(국방장관) 노백린이 “앞으로의 승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자에게 있다.”라는 연설을 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1920년 2월 20일에 캘리포니아주의 월로우드에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했다고 쓰고 있다.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는 데 크게 공헌한 사람으로는 [[김종림]], 곽임대 등이 있으며, 그밖에도 많은 해외 동포가 물심양면 지원하였는데, 특히 농장주 김종림은 ‘비행사 양성소’ 설립 자금으로 현금 3만 달러, 비행장 건축, 항공기 연로 등 모든 기구와 시설에 대해서 지원하였다. 그가 내놓은 돈으로 비행기 2대와 미국인 기술자 1명, 한국인 교수진 6명의 지도 인력을 갖추었고, 학생은 19명이었으나, 월로우드 비행사 양성소가 그 뒤 문을 닫게 되어 졸업생은 없다.
  • 애로우
         [[미국]]의 [[드라마]]. [[DC 코믹스]]의 히어로인 [[그린 애로우]]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이며 현재 시즌 7이 방송 중이다.
         [[분류:미국 드라마]]
  • 애프터스쿨
         애프터스쿨은 데뷔 당시 5인조의 걸 그룹으로 2년 동안 극비리에 준비해왔던 그룹이라고 소속사 측이 말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애프터스쿨’, 데뷔전 뜨거운 관심…15일 음원 공개|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43&aid=0001974544|출판사 = 쿠키뉴스|날짜 = 2009-01-15 |확인날짜 = }}</ref> 애프터스쿨의 멤버들은 이전 경력도 화려한 편인데, [[이주연 (1987년)|주연]]은 데뷔 전부터 인터넷 얼짱 출신으로 이미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고 데뷔 전 CF에 출연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1기 얼짱' 이주연, 애프터스쿨로 가수 데뷔|url = 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0812310087|출판사 = OSEN 연예|저자 = 이정아 기자|쪽 =|날짜 = 2008-12-31 |확인날짜 = }}</ref> [[가희]]는 수준급 댄스 실력으로 [[DJ DOC]], [[보아]], [[김현정 (가수)|김현정]] 등의 백댄서를 하였고 [[메이다니]]의 춤 선생님 등으로 활동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애프터스쿨 가희, 은지원 뮤비 섹시댄스 뒤늦게 밝혀져|url =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3141043301001|출판사 = 뉴스엔|날짜 = 2010-03-14}}</ref><ref>{{뉴스 인용|제목 = 가희, 카리스마 댄스 작렬에 안방 '흔들'|url = http://www.tvreport.co.kr/main.php?cmd=news/news_view&idx=36741|출판사 = TV리포트|날짜 = 2010-02-03|확인날짜 = 2019-09-01|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3016/http://www.tvreport.co.kr/main.php?cmd=news%2Fnews_view&idx=36741|보존날짜 = 2016-03-05|깨진링크 = 예}}</ref> 또한 가희는 미국에서 [[손담비]]와 같이 그룹 에스블러쉬로 활동하면서 빌보드 Hot Dance Club 2위까지 올라가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애프터스쿨 가희, 은지원 뮤비 섹시댄스 뒤늦게 밝혀져|url =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3141043301001|출판사 = 뉴스엔|날짜 = 2010-03-14}}</ref> [[정아]]는 데뷔 전 '키스파이브'라는 그룹으로 활동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가희, 카리스마 댄스 작렬에 안방 '흔들'|url = http://www.sisaseoul.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23|출판사 = 시사서울|날짜 = 2010-01-17}}{{깨진 링크|url=http://www.sisaseoul.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23 }}</ref> 또한 [[유소영|소영]]은 2005년 '[[TV유치원 하나둘셋]]'의 22대 '하나언니'로 당시 본명 주소영으로 활동했었고, 같은 해 5월에는 제75회 춘향제-춘향선발대회에서 '선'에 당선되기도 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 유소영하나언니,미스춘향 출신 뒤늦게 화제.. 풋풋한 이미지 귀엽네~|url =http://www.consumernews.co.kr/news/view.html?gid=main&bid=news&pid=149131|출판사 =소비자가 만드는 신문|저자= 스포츠연예|날짜 =2009-05-12 }}</ref>
         * 출생지: [[미국]]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시]]
  • 양파 (1979년 가수)
         * [[1999년]] 유학 전, 2집 발표 후 1년 5개월여만인 6월 3집 <A`ddio>를 발표하였다. 3집의 노래들은 이전 양파의 작품들과는 달리 성숙미를 강조하였다. 신재홍과 코프로듀서로 함께 수록된 12곡을 프로듀스했으며 [[이승환 (가수)|이승환]], [[김현철 (가수)|김현철]], [[조규찬]], [[조규만]] 등이 곡을 만들어 주거나 듀엣으로 참여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070170394| 제목 = 신곡 `아디오'로 컴백, 여인으로 돌아와| 출판사 = [[조선일보]]| 날짜 = 1999-07-01| 확인날짜 = 2010-08-22}}</ref> 1999년 3집은 68만 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1999120970369| 제목 = 99년 대중음악 결산, 움츠렸던 음반시장 여가수 덕에 떴다| 출판사 = 조선일보| 날짜 = 1999-12-09| 확인날짜 = 2010-08-22}}</ref> 1999년 9월 미국 매사추세츠주 보스턴市 [[버클리 음악 대학]] 퍼포먼스 음악에 입학하였다.
         * 2000년 8월 2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다저스타디움]]에서 [[박찬호]] 선발 등판 전 미국 및 캐나다 국가를 부른 바 있다.<ref>{{뉴스 인용|제목=가수 양파 다저스타디움서 미국가 불러|날짜=2000-08-25|출판사=[[경향신문]]|확인날짜=2010-08-22}}</ref>
         [[분류:197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골든디스크 신인상 수상 음악가]][[분류:하이원 서울가요대상 신인상 수상 음악가]][[분류:Mnet 엠카운트다운 1위 수상자]][[분류: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분류: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분류:1996년 데뷔]][[분류:201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1990년대 가수]][[분류:아이돌 가수]][[분류:한국어 가수]][[분류:영어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R&B 가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버클리 음악 대학 동문]][[분류:대구대청초등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양현석
         }}</ref> 양현석은 솔로 1집을 내고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양현석은 이름을 "양군"으로 바꾸고 회사를 [[YG 엔터테인먼트]]로 개명하였으며, 흑인 음악 전문 레이블로 탈바꿈한다. 그리고 1997년 [[양현석]] 자신의 두 번째이자 [[YG 엔터테인먼트]]의 첫 결과물로 [[지누션]]을 데뷔시켰다. [[양현석]]이 직접 작곡한 《가솔린》이 각종 가요 차트에 상위권에 올리며 이름을 알렸지만, 실질적으로 히트를 친 것은 듀스 출신의 [[이현도]]가 작사/작곡하고 [[엄정화]]가 피쳐링한 《말해줘》가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부터였다. [[지누션]]을 시작으로 [[원타임 (음악 그룹)|원타임]] 등 오버그라운드 랩퍼들을 데뷔시키고, [[세븐 (가수)|세븐]], [[렉시 (가수)|렉시]], [[빅뱅 (음악 그룹)|빅뱅]], [[2NE1]] 을 데뷔시켰다. [[양현석]]은 2000년 [[서태지]]가 [[미국]]에서의 긴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컴백한 때부터 [[서태지]]의 6집 앨범 프로모션과 매니지먼트까지 직접 돕기도 했다<!--<ref>
         또한 매니아적인 힙합을 추구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운 [[YG 언더그라운드]]에는 [[마스타 우|Masta Wu]], [[스토니 스컹크]], [[45RPM]] 등이 소속되어 있다. [[양현석]]은 2007년 스토니스컹크의 멤버인 스컬을 [[미국]]으로 진출시켜 [[한국]] 최초로 [[미국]] [[빌보드]] 'Hot R&B/Hip-Hop Singles Sales'차트에 진입시키는 쾌거를 이룩했다.
         양현석은 [[:en:The Neptunes|넵튠스 (The Neptunes)]] , [[저메인 듀프리|Jermaine Dupri]], [[:en:Timbaland|팀버랜드 (Timbaland)]], [[:en:Teddy Riley (producer)|테디 라일리 (Teddy Riley)]], [[퍼프 대디|퍼프 대디 (Puff Daddy)]] 등과 같은 [[힙합]] / [[알앤비]] 프로듀서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YG 엔터테인먼트]] 설립 이후부터 미국 유명 프로듀서들의 스타일을 [[YG 엔터테인먼트]]의 작업 방식이나 기획사 운영 시스템에 지속적으로 적용하고 있는데, '''[[YG]] 패밀리'''라는 이름 하에 소속사 내 뮤지션/프로듀서들과 끈끈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여 크루(Crew)의 개념을 오버그라운드 음악계에 끌어들인 점, 또한 [[YG]] 내 음반 작업시 반주(악기 연주 + 비트)를 만드는 작업과 랩/보컬 멜로디를 만드는 작업을 구분해서 공동작업한다는 점 등이 이에 기인한다<ref group="주">이 때문에 [[빅뱅]]의 표절시비가 잠시 불거지기도 했다.</ref>. 또한 [[미국]] 음악 산업의 중심에 있는 프로듀서들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다양한 정보는 물론 인맥을 쌓는 데에 있어서 국내 제작자들 중 가장 적극적이다. 2008년 하반기 [[세븐 (가수)|세븐]]의 미국 데뷔앨범 제작에 [[Usher]], [[TLC (밴드)|TLC]] 등과의 작업으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제작자 마크 시멜 (Mark Shimmel)을 비롯, [[:en:Rich Harrison|리치 해리슨 (Rich Harrison)]], [[:en:Darkchild|닥차일드 (Darkchild)]] 등 [[그래미상]] 수상경력의 대형 힙합 프로듀서들을 대거 끌어들이는 데 성공한 것도 바로 이러한 미국 '본토' 프로듀서들에 대한 공격적 인맥전략에서 얻어진 성과로 보곤 한다<!--<ref>아시아는 좁다 '큰물'서 놀자! 미국행 러시 [한국일보] [[2008년]] [[9월 9일]]</ref>-->.
         그는 대한민국 음악계도 미국처럼 넵튠스같은 유명 프로듀서가 음반의 성패를 좌우하는, 가수보다 프로듀서 중심 체계로 재편될 것이라는 신념 아래<!--<ref>[[YG]] 10년 맞아 로드맵 밝힌 양현석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6년]] [[2월 13일]]</ref>--> 가수 이외에 프로듀서들의 발굴, 양성에도 계속 힘써 현재 [[YG 엔터테인먼트]]는 최신 트렌드를 만드는 데 능한 젊은 프로듀서들을 상당수 갖추고 있다. [[YG]]의 초창기부터 함께 한 페리를 비롯해 [[1TYM]]의 테디와 스토니스컹크의 쿠시 그리고 [[빅뱅 (음악 그룹)|빅뱅]]의 [[지드래곤]] 등이 [[양현석]]의 프로듀서 조련 시스템에서 탄생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 엉클 샘
         [[미국]]을 상징하는 캐릭터. 포스터에서 보는 이를 향해 삿대질을 하는 백발에 흰 수염이 있고,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와 같은 컬러링의 의복을 입은 노인을 봤다면 그 캐릭터가 엉클 샘이다.
         기원은 미극 민담에 등장하는 브라더 조너선(Brother Jonathan)과 양키 두들을 합친 것이라 한다. 뉴욕의 샘(새뮤얼) 그라고 윌슨이라는 고기납품업자가 [[쇠고기]] [[통조림]]에 United States 라는 뜻으로 U.S. 라는 도장을 찍기 시작했던 것을 납품고기를 검사하던 부대 감독관이 U.S → Uncle Sam으로 알아서 엉클 샘이라는 캐릭터가 되었다고 한다. 한편 이와 반대로 납품업자가 자기 별명인 엉클 샘의 이니셜인 U.S.를 찍어 보낸 것을 감독관이 United States인 줄 알았다는 설도 있다.[* 이 엉클 샘에 대한 것은 [[먼나라 이웃나라]] 미국편에도 실린 이야기다.]
         이러한 엉클 샘과 비슷한 캐릭터는 미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영국]]도 '존 불(John Bull)'이라는 캐릭터가 엉클 샘보다 먼저 등장했다.[* 첫 등장 시점에서는 사람이 아니라 황소였으며 이후에 지금의 사람 모습이 되었다.] 또한 키치너 원수가 등장하는 모병 포스터의 경우에는 엉클 샘의 모병 포스터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 에이미 앤더슨
         '''에이미 앤더슨'''(Amy Anderson, [[1972년]] [[9월 1일]] ~ )은 [[미국]]의 [[코메디언]], [[배우]], [[작가]]이다.
         1972년 9월 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다. [[스웨덴]]인 부모에게 입양되어 [[미국]] [[미네소타주]]에서 성장했다.<ref>{{뉴스 인용| last = Shah | first = Allie | date = July 10, 2006 | title = Korean adoptee breaks new ground in stand-up comedy | work = Star Tribune | location = Minneapolis, Minnesota | url = http://www.highbeam.com/doc/1G1-148063462.html}} {{subscription required|via=HighBeam Research}}.</ref><ref name="biography">{{웹 인용 | title = Everything you wanted to know and more! | work = It's Amy Anderson. Cool | url = http://www.amyanderson.net/site/Bio.html | accessdate = June 27, 2011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10823072406/http://www.amyanderson.net/site/Bio.html | 보존날짜 = 2011년 8월 23일 | 깨진링크 = 예 }}</ref><ref name="AuburnReporter">{{뉴스 인용 | title = Amy Anderson heads lineup at Auburn's Comedy at the Ave | work = Auburn Reporter | url = http://www.pnwlocalnews.com/south_king/aub/entertainment/96615404.html | accessdate = June 27, 2011 |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00625020051/http://www.pnwlocalnews.com/south_king/aub/entertainment/96615404.html# | 보존날짜 = 2010-06-25 | 깨진링크 = 예 }}</ref><ref>{{서적 인용| last1 = Kim | first1 = Eleana | title = Adopted Territory: Transnational Korean Adoptees and the Politics of Belonging | publisher = Duke University Press | year = 2010 | pages = 88–89 | accessdate = 2014-02-24 | isbn = 978-0822346951}} [http://books.google.com/books?id=_j6ds5A8ZfAC&pg=PA88&lpg=PA88&dq=%22Amy+anderson%22+korea+minnesota&source=bl&ots=2XyIGKBr9J&sig=GA_0ZbtQDA2iFBIGRbO9xzYke28&hl=en&sa=X&ei=gGQLU5PqKoaIygGJ8IGQDQ&ved=0CGAQ6AEwCDgK#v=onepage&q=Anderson&f=false Excerpts available] at Google Books.</ref>
         [[분류:197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여자 희극인]][[분류:미국의 블로거]][[분류:미국의 작가]][[분류:미국의 여자 배우]][[분류:미국의 기타 연주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한국계 미국인]]
  • 여인국 (정치인)
         서울 출신. [[서울매동초등학교]]와 [[청운중학교 (서울)|청운중학교]]를 졸업하였다.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학과와 미국 미시간대학원 도시계획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 24회로 공직에 입문해 환경청·교통부 행정사무관, 경기도지방공무원교육원장 및 환경국장, 민선 과천시장 3·4·5기 등을 역임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대교문화재단 이사장에 여인국 한국외대 교수|url =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JC61&newsid=02551846606250624&DCD=A00306&OutLnkChk=Y|출판사 = 이데일리|저자 = 이지현 |날짜 = 2014-10-07}}</ref>
         * [[미국]] [[미시간 대학교]] 도시계획대학원 공학석사
  • 연하장
         15세기 독일에서 그리스도 탄생을 기념하며, 신년을 축복하는 글을 담은 카드를 동판에 인쇄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오스트리아]], [[프랑스]], [[영국]], [[미국]] 등으로 연하장 풍속이 확대되었다.
  • 염재호
         [[서울특별시|서울]] 출신으로와 [[고려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했고 1980년 동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1989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부터 고려대학교 행정학과 조교수와 부교수를 거쳐 현재 교수로 재직 중이고 정부학연구소 소장(2002년 ~ 2004년), 고려대학교 기획실장과 기획예산처장(2003년 ~ 2005년), 국제교육원장(2003년 ~ 2006년), 행정대외부총장(2012년 ~ 2014년) 등을 역임했다. 2015년 3월에는 [[김병철 (1949년)|김병철]] 총장의 후임으로 제19대 고려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 오경석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실각한 뒤에도 그는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사역원]]의 [[한어]] 당상역관으로 계속 근무하였다. [[청나라]]에서 [[미국]], [[유럽]] 열강의 신 문물을 접한 오경석은 개화의 시급함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개항론을 주창한 이후 [[흥선대원군]]의 미움, 박해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민씨 정권에서 고위직을 역임한 동생 오경연과는 달리 민씨 일파에 붙지 않았으므로, 그의 강직함은 대원군도 높이 샀다 한다.
  • 오경태
         * [[미국]] [[일리노이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경제학]] [[석사]])
  • 오명
         * 1970년 [[미국]] [[뉴욕 주|New York]] 주립대 [[스토니브룩 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과 공학 석사
         * 1972년 [[미국]] [[뉴욕 주|New York]] 주립대 [[스토니브룩 대학교]] 대학원 전자공학과 공학 박사
         * 1997년 [[미국]] [[뉴욕 주|New York]] 주립대 [[스토니브룩 대학교]] 명예 공학 박사
  • 오명 (1946년 영화)
         | 국가 = [[미국]]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나치 독일]]의 스파이의 딸인 엘리시아 휴버먼([[잉그리드 버그먼]])이 아버지의 일을 잊기 위해 파티에 온 데블린([[캐리 그랜트]])는 그녀에게 자신이 [[미국]]의 첩보원이며 [[브라질]]이 [[리우]]로 가게 한다. 리우로 가는 비행기에서 데블린은 엘리시아의 아버지가 자살하였다는 이야기를 한다. 본부에서의 지시가 내려지기 전에 데블린과 엘리시아는 사랑에 빠지지만 본부는 다음 목표는 알렉스 세바스찬([[클로드 레인즈]])이며 그녀가 이 일에 작업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세바스찬은 둘의 관계를 의심해보다가 그녀가 미국의 첩보원임을 알게 된다. 이사이 가루는 [[우라늄]]으로 밝혀진다. 세바스찬의 어머니([[레오폴딘 콘스탄틴]])은 그녀에게 약이 든 커피를 마시게 해 그녀를 방에 가두고 나치 관계자들에게 말하지 않는다. 데블린은 5일 동안 약속 장소에 오지 않은 엘리시아를 의심해 세바스찬의 집에 온다. 세바스찬은 그 때 나치 관계자들과 회의를 나누고 있었는데 회의하는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정보가 유출된 것 같다고 이야기한다. 그 때 집안에 데블린이 엘리시아의 방에 온다. 데블린은 엘리시아에게 다시는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나치 관계자들과 세바스찬이 보는 가운데 병원으로 데려간다. 세바스찬과 어머니는 의심을 받게 된다. 세바스찬은 지난번 잘못된 일로 나치에게 죽임을 당한 과학자를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떤다.
         [[분류:1946년 영화]][[분류:미국의 영화 작품]][[분류:영어 영화 작품]][[분류:앨프리드 히치콕 감독 영화]][[분류:RKO 픽처스 영화]][[분류:미국의 첩보 영화]][[분류:미국 국립영화등기부 등재 영화]]
  • 오성식
          | 학력 = [[대신고등학교 (서울)|서울 대신고]] [[졸업]] <br /> [[한국외국어대학교|한국외대 포르투갈어과]] [[학사]] <br /> [[미시간 대학교|미국 미시건 주립대학원]] [[문학]][[석사]]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이며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학과를 [[학사]] 학위 취득하였으며, 1987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미시간 주립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서 TESOL 전공으로 1년간 수학 후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8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1989년]]에는 [[한양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고, [[1990년]]에서 1994년까지는 [[한국교육방송공사]]에서 중학교 영어를 진행하였으며, 1990년 10월부터 2000년 6월 까지는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프로그램인 [[굿모닝 팝스]]를 10년 가까이 진행하였다. 2002년 9월부터 2004년 9월까지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초빙연구원을 역임했으며, 2006년 3월 6일부터 [[원음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오성식 쇼의 진행자로 발탁되어 2009년 2월 27일까지 진행하였다.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포르투갈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오성식 (학원인, MC)
          | 학력 = [[대신고등학교 (서울)|서울 대신고]] [[졸업]] <br /> [[한국외국어대학교|한국외대 포르투갈어과]] [[학사]] <br /> [[미시간 대학교|미국 미시건 주립대학원]] [[문학]][[석사]]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이며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1985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포르투갈어학과를 [[학사]] 졸업하였으며, 1987년 [[미국]] [[미시간 대학교|미시간 주립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에서 TESOL 전공으로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88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1989년]]에는 [[한양대학교]]에서 강의를 하였고, [[1990년]]에서 1994년까지는 [[한국교육방송공사]]에서 중학교 영어를 진행하였으며, 1990년 10월부터 2000년 6월 까지는 [[한국방송공사]] 라디오 프로그램인 [[굿모닝 팝스]]를 10년 가까이 진행하였다. 2002년 9월부터 2004년 9월까지는 미국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초빙연구원을 역임했으며, 2006년 3월 6일부터 [[원음방송]] 라디오 프로그램 오성식 쇼의 진행자로 발탁되어 2009년 2월 27일까지 진행하였다.
         [[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포르투갈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학원 강사]][[분류:영어 교육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미시간 대학교 동문]][[분류: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신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해주 오씨]]
  • 오세득
         |학력 = [[미국]] ICE 요리학교
         * [[미국]] [[뉴욕]] ICE 요리학교 졸업 (한국인 졸업생)
  • 오세득 (요리사)
         |학력 = [[미국]] ICE 요리학교
         * [[미국]] [[뉴욕]] ICE 요리학교 졸업 (한국인 졸업생)
  • 오세창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 [[최린]](崔隣), [[권동진]](權東鎭)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한다. 또한 일부 [[천도교]] 연락원들이 [[기독교]] 지도자 일부와 합의하자, 범거족적인 만세 시위 개최에 동의한다.
  • 오세훈
         1996년 부터 1997년까지 경원대학교에서 민사소송법 강사로 재직하였고, [[1997년 9월]]부터 [[1998년 2월]]까지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에서 민사소송법의 겸임 교수로 일했다. [[1998년]] [[미국]]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 Law School에서 Visiting Scholar로 재직 후 [[199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민사소송법으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9년 이장호, 김기수와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1999년]] [[3월]] 다시 [[숙명여자대학교]] 법학과 민사소송법 겸임교수로 위촉되었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매맞는 여성의 쉼터)에서 공익변호사로서 무료법률상담을 하기도 했으며, 2000년부터 다시 환경운동연합 법률위원장 겸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당선되고 얼마 후 미 국무부 초청(International Visitor)으로 원희룡, 이종걸 의원등과 함께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정관계 인사들과의 회담과 함께 미국 공화당, 민주당 전당대회 견학 등을 마치고 돌아왔다.<ref>{{웹 인용|url=http://news.joins.com/article/5101924|제목=2000년 미국에서 초청한 인사들은? - 오세훈 의원 등|성=중앙일보|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미국발 금융위기가 전세계를 강타했다. 이에 대한민국도 예외일 순 없었는데, 이에 서울특별시장 오세훈은 2009년 1월 '경제살리기 및 일자리 창출을 위한 서울시장 특별훈령' 을 발표했다. 이는 16개 지방자치단체 중 최초로 시행되었고, 중소기업 지원 확대, 일자리 창출 확대, 공공사업 조기집행 등을 골자로 총 14개의 정책을 연말까지 시행하였다.<ref>{{웹 인용|url=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1173152&code=11131411&sid1=all|제목=오세훈 서울시장 특별훈령 발표|성=|이름=|날짜=|웹사이트=|출판사=|확인날짜=}}</ref>
         *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석사과정 졸업, 법학석사 (학위논문명 - 소수주주에 대한 억압과 구제책 : 미국 폐쇄회사의 법리를 중심으로)
         *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과 박사과정 졸업, 법학박사 (학위논문명 - 미국 변론전절차에 관한 연구 : 고비용·저효율의 개선을 중심으로)
         * 1998년 1월 ~ 1998년 12월 : 미국 예일(Yale)대학교 Law school 교환교수(Visiting scholar)
         * 미국 민사재판의 허와 실, (서울 : 박영사, 2000), {{ISBN|978-89-10-50707-9}}
  • 오승근 (1908년)
         }}</ref> 이때 오승근은 일본의 사주를 받고 [[미국]]과 조선 사이를 이간질하여 친일 정권을 세우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간첩 사건을 담당했다가 전임 처리되었으며, 김용무가 간첩 혐의자를 비호하고 있다는 의혹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
  • 오위영
         금융계에서 활동하던 중 광복 직후 1945년 9월 [[미군정]]이 주둔하면서 금융계 경력이 인정되어 1947년 신탁은행의 이사로 선임되었다. 미군정 기간 중 신탁은행 이사로 있으면서 기반을 쌓아 이를 바탕으로 부산일원의 자산가로 급부상하였다. [[1949년]] 신탁은행 총재가 되고, 그해 [[미국]] 시찰 중 [[주미한국대사]] [[장면]]을 만났으며, 그의 청렴성에 감명받아 귀국후 [[대통령]] 이승만에게 이를 알리고, 후에 그를 총리로 천거하게 된다.
         {{인용문|제 생각으로는 장면 박사가 제일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미국에서도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6‧25 당시의 성공적인 외교 활동을 통해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지금의 시끄러운 사태를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입니다.<ref>장면,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가톨릭출판사, 1998 증보판) 373페이지</ref>}}
  • 오현경(1970)
         이후 [[미국]]에 체류하다 [[2002년]] [[강제규]] 감독의 권유로 [[영화]] '블루', '야다' 등의 출연을 조심스럽게 고려했으나 시기상조라는 판단으로 연예계 복귀를 미룬 바 있다. 그렇지만 밑의 연기 내역을 보면 조금씩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117&aid=0000094966|오현경 '데뷔'에서 10년만의 '컴백'까지]] - 마이데일리 [[2007년]], [[SBS]] [[주말 드라마]] 《[[조강지처 클럽(SBS)|조강지처 클럽]]》에 출연하면서 10년 만에 연예계 활동을 재기하였다.
  • 왕당파
         [[미국]]의 경우, [[미국 독립전쟁]]에서 영국 왕실을 지지하느냐, 영국 왕실의 권위를 부정하느냐에 따라서, 왕당파와 독립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독립전쟁이 미국의 승리와 독립으로 끝나자, 미국 지역의 왕당파들은 [[캐나다]]로 도망치게 되었다.
  • 왕리훙
         | 국적 = {{국기나라|미국}}
         '''왕리훙'''({{zh|c=王力宏|p=Wáng Lìhóng|hanja=왕력굉}}, {{llang|en|Alexander Wang|알렉산더 왕}} [[1976년]] [[5월 17일]] ~ )은 [[미국]]에서 태어난 [[타이완]]의 가수 겸 배우이다.
         유명한 음악 프로듀서, 싱어송 라이터, 작곡가, 편곡가, 영화 감독, 배우이다. 중국계 미국인이고 1976년에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다. 미국 윌리엄스대학교에서 졸업했다. 학교에서 생물학을 전공하다가 일년 후에 전공을 음악학으로 바꾸었고 부전공은 아시아 군사였다. 최근 몇 년간에 공익 활동과 연극 공연에 많이 참가하고 있으며 왼손잡이다.
         미국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을 때 그는 동창들로부터의 인종 차별과 집단 따돌림을 당한 경험이 있어서 중국인 출신을 많이 강조한다. 그의 음악 중에 중국 전통 희극의 요소들이 많이 있다.
         2016년에 장예모 영화의 삽입곡인 <출새 At the border>와 영화 엔딩곡인 <인연의 다리a bridge of fate>를 창작했고 미국 윌리엄스대학교와 버클리음악대학교의 명예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분류:197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타이완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타이완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타이완의 남자 가수]][[분류:타이완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가수]][[분류:미국의 편곡가]][[분류:미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미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인천광역시 출신]][[분류:타이완계 미국인]][[분류:중국계 미국인]][[분류:버클리 음악 대학 동문]][[분류:윌리엄스 칼리지 동문]][[분류:Mnet 아시안 뮤직 어워드 수상 음악가]][[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미국인]][[분류:미국의 록 가수]]
  • 울릉군
         비행기 타고 해외여행을 가고자 한다면 대부분 [[포항시]]로 향하는 여객선을 이용, 포항에서 대구, 부산으로 향하는 리무진 버스, 전세버스 등을 대절하여 대구국제공항,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일본]], [[중국]], [[몽골]], [[동남아시아]], 극동러시아([[블라디보스토크]] 등) 등지로 향하게 된다. [[미국]]이나 [[중동]], [[유럽]], [[호주]],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인도 공화국|인도]], [[카자흐스탄]], [[아프리카]] 등지로 나갈 경우 [[포항공항]]에서 [[김포국제공항]]까지 [[대한항공]] 또는 [[에어포항]]의 국내선을 이용, 김포공항까지 내려온 다음 다시 김포공항에서 인천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버스, 공항철도를 이용하면 바로 인천공항에 닿는다.
  • 울진군
         그러나 울진은 항공교통의 요충지 중 하나로 [[인천국제공항]]을 출발하여 [[일본]]이나 [[미국]]으로 가는 비행기 및 [[유럽]]/[[중국]]에서 우리나라 영공을 관통하여 [[일본]]으로 가는 대부분의 비행기들은 울진 상공을 거쳐서 대한민국을 떠난다. 일부 예외가 있는데 이 경우는 강릉 상공을 통해 대한민국을 떠난다.
  • 원경수
         '''원경수'''(元京洙, [[1928년]] [[12월 4일]]~ )는 [[대한민국]]의 지휘자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서 [[바이올린]]과 작곡을 전공했다. 졸업 후 [[미국]]으로 유학해 신시내티 음악원과 인디아나 대학교에서 바이올린과 지휘를 배웠고,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음악원에서도 지휘 연수를 받았다.
         미국 유학 시절 뉴올리언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부지휘자로 일했고, 1967년과 1968년에는 각각 스탁턴 교향악단과 머데스토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70년에는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지만, 행정 당국과의 마찰 등으로 1년 뒤 사임했다. 1986년에는 [[홍연택]] 이후 오랫동안 공석이었던 [[KBS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가 되었고, 1988년까지 재임했다.
  • 원빈(배우)
          * [[아저씨(영화)|아저씨]]의 대성공 이후 [[미국]] 진출을 하려고 했다가 실패하고[* 영화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배두나]]가 맡았던 역할이 원래에는 원빈을 염두에 둔 역할이었다고 한다. 왜 성사가 안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2012년에는 [[더킹 투하츠]]에서 [[이승기]]가 맡았던 역할을 제안받기도 했으나 거절하였고[* 다만 이 경우에는 원빈이 이재규 PD와 함께 작업하고 싶어서 시나리오를 긍정적으로 검토하다가 캐스팅이 완료될 때까지 외부에 알리지 않는다는 약속이 깨지고 언론에 원빈의 [[더킹 투하츠]] 출연설이 나돌면서 하차하게 된 것이다.] 2013년에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도 거부하면서 차기작 선정은 2018년까지 미정이다.
  • 원희영
         [[2005년]] [[뇌종양]]으로 투병, 병원에 입원하였다가 퇴원하였다. [[2005년]] [[6월 9일]]부터 [[7월 24일]]까지 [[동성애자인권연대]]와 [[성소수자인권상담센터]]의 '성소수자 상담원 양성 교육'의 강사의 한 사람이었다.<ref>[http://www.lsangdam.org/kiri/660 2005 성소수자 상담원 양성 교육 자료집 발간!]</ref> [[2005년]] [[1월 11일]]부터 [[2월 3일]]까지 한국인권행동 주관 제2회 인권학교의 연사로 참여, "성 소수자와 인권"이라는 주제로 강의하였다.<ref>[http://go.jinbo.net/mybbs/view.php?board=kcwu-30-3&id=88&page=30&SESSIONID=bf89444a8489a27b8b686033d1a9c68c <nowiki>[</nowiki>대구<nowiki>]</nowiki> 인권학교 수강생 모집]</ref> 그밖에 민주노동당 성소수자위원회 위원을 겸하였다. [[2006년]] [[3월 19일]] [[서울특별시|서울]] [[용산구]] [[서울역]] 광장에서 개최된 3.19 국제공동반전행동 및 [[미국]]의 [[이라크]] 침략 규탄 집회에 참여하였다.
  • 월드 인 컨플릭트
         World in Conflict. [[미국]]과 [[소련]] 사이의 제3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실시간전술게임.
         이로부터 몇개월 후, 상선으로 위장한 소련군 수송선단이 워싱턴 주 시애틀에 소련군을 상륙시킨다. 유럽전선에 전력을 집중하고 있던 미국은 주방위군을 동원해 소련의 침공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 미국 ===
         일단 이 게임의 주인공 세력. 소련군의 시애틀 폭탄드랍 때문에 유럽과 미국 양 쪽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게임의 주인공. 미국이 침공당할 시점의 계급은 중위. 가족이 사는 시애틀로 휴가왔다가 소련군 침공에 대항하게 된다. 유능하기에 소여의 총애를 받고있다.
          파커가 유럽 전선에서 복무했을 때 함께 싸웠던 프랑스군 연락장교. 조국 프랑스를 침공하고 사람들에게 자비를 보이지 않은 소련군을 증오한다.지휘 체계로 인해 소여와 다투게 되자 그 자리에서 미국인들을 까버릴 만큼 터프하다. 기혼자지만 내연녀가 따로 있다.
          올로프스키 휘하의 중대장. 올로프스키의 조카로 소련과 사회주의에 대한 충성심이 충만한 장교이다. 미국에 반감을 가지고 있으며, (말라셴코가 보기에) 답답한 명령을 내리는 올로프스키에 대해도 반감을 가지고 있다.
  • 월드 인 컨플릭트/유닛
          [[미국]]은 M1A1 에이브람스, [[소련]]은 T-80U, [[NATO]]는 독일군 레오파르트2A4. 강력한 체력, 방어력, 공격력을 가진 유닛. 차량과 건물에는 주포를, 보병과 헬리콥터에는 기관총을 사용한다.
          * 공격능력: 백린탄(미국, NATO)/파편고폭탄(소련) - 보병에게 치명적인 포탄을 발사한다. 백린탄보다는 파편고폭탄이 다루기 더 쉽다.
          미국은 M60A3, 소련은 T-62, NATO는 영국군 치프틴 Mk.5.
          * 공격능력: 실레일러 미사일(미국)/AT-4 스피곳 미사일(소련)/HESH탄(NATO) - 차량과 전차에게 강력한 대전차 미사일이나 점착유탄을 발사한다.
          미국은 M551A1 셰리던, 소련은 PT-76, NATO는 영국군 FV101 스콜피온. 빠르지만 나약한 전차. 경전차 TA로 공수받을 수도 있다.
          * 공격능력: TOW 미사일(미국)/AT-5 스팬드럴 미사일(소련) - 차량과전차에게 강력한 유선 미사일을 발사한다.
          미국은 M2A2 브래들리, 소련은 BMP-2, NATO는 영국군 FV510 워리어. 기관포로 무장한 장갑차. 보병 분대 하나를 탑승시킬 수 있다.
          * 공격능력: MK-19 유탄발사기(미국) - Mk.19 유탄발사기로 유탄의 탄막을 뿌린다.
          미국은 AAVP7A1, 소련은 BTR-80, NATO는 독일군 룩스. 기관포로 무장한 장갑차. 보병 분대 하나를 탑승시킬 수 있으며 물 위를 이동할 수 있다. 쓸모없다.
          * 공격능력: 헬파이어 미사일(미국)/AT-6 스파이럴 미사일(소련)/HOT 미사일(NATO) - 먼 거리의 차량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는 대전차 미사일을 발사한다.
          미국은 AH-64A 아파치, 소련은 Mi-24V 하인드, NATO는 이탈리아군 A129 망구스타. 로켓과 기관총으로 무장한 공격헬기.
          * 공격능력: 사이드와인더 미사일(미국)/빔펠 R-73 미사일(소련)/미스트랄 미사일(NATO) - 적 헬리콥터에게 강력한 공대공 미사일을 발사한다. 플레어로 피할 수 있다.
          미국은 AH-1W 슈퍼 코브라, 소련은 Mi-28 하보크, NATO는 SA-341 가젤.
          미국은 OH-6A 카이유스, 소련은 Ka-25 호르몬, NATO는 BO-105 PAH-1. 로켓을 사용하는 소형 헬기.
          미국은 UH-60 블랙호크, 소련은 Mi-8 힙, NATO는 SA-330 슈퍼 퓨마. 보병 분대 하나를 탑승시킬 수 있다.
          미국은 [[HMMWV]], 소련은 UAZ-469, NATO는 영국군 D-90. 기관총으로 무장한 고기동 차량. 보병 분대 하나를 탑승시킬 수 있으며, 손상된 차량을 수리할수도 있다.
          미국은 M939, 소련은 우랄 4320, NATO는 TRM 4000. 보병 분대 하나를 탑승시킬 수 있다. 그게 끝.
          미국은 M730A2, 소련은 SA-13 고퍼, NATO는 롤랑. 대공미사일로 무장한 대공차량.
          미국은 M163 VADS, 소련은 ZSU-23-4 실카, NATO는 독일군 게파드. 기관포로 무장한 자주대공포.
          미국은 M270 MLRS, 소련은 2S7 피온, NATO는 독일군 LARS 110 SF 2. 미국과 NATO가 장기간을 쏟아붓는 다연장로켓포를 쓴다면, 소련은 한방이 강한 자주포를 사용한다.
  • 월드 인 컨플릭트/줄거리
         워싱턴 D.C.에서 잠을 자던 [[미국 대통령]][* 배경 시기를 따지자면 아버지부시.]은 모건 장군의 전화에 의해 일어난다. 소련군이 시애틀에 상륙했다는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얼굴을 감싸쥐며 할 수 있는것을 묻지만 별다른 방책은 없었다. 소여 대령이 지휘하는 몇개 부대를 시애틀로 보냈다는 보고를 들은 대통령은 내각 회의를 준비한다.
         한편, 시애틀에서 후퇴한 미군 부대는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었다. 이들을 지휘하는건 배넌 대위였지만 파커는 배넌과 가려는 방향이 같았을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미국]]이 침공당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서쪽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행렬은 이어졌고, 소련군이 미국을 침공하였다는 소식은 라디오 방송국의 방청자 제보로 전해지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소련군은 공수부대를 시애틀 외곽에 투하하고 있었다. 배넌은 고속도로 다리에 방어선을 설치했다. 방어선이 돌파당한다면 소련군은 피난민들을 따라잡고, 워싱턴 주 전체로 뻗어나갈 것이었다.
         시애틀에 상륙한 소련군 부대에 속해있던 올로프스키는 소련에 있는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는다. 편지에서 그는 미국인들은 자신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감상과 미국인들을 과격하게 다루는 말라셴코에 대한 걱정을 아내에게 전한다.
         소련의 선전 방송은 소련군이 미국 서해안 대부분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은 시애틀 외부로 빠져나가는데도 미군의 저항을 상대해야만 하는 상황. 소련 군인들이 미국 땅을 밟으며 느꼈던 환상적인 감정은 빠르게 사라졌고, 자신들이 적지에 있다는 불안감이 그 자리를 빠르게 채웠다.
         톰슨 이병은 국방부에 전화를 건다. 본래 워싱턴 주방위군이었지만 시애틀 함락 당시 정규군으로 편입된 바람에 봉급 체계가 혼선되어 봉급을 받지 못한 것. 톰슨은 시카고에 있는 전처에게 돈을 보내야 한다고 말하지만 공무원은 중대 행정병에게 451-A 서류를 받아서 제출하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이에 톰슨은 지금 미국이 침공당했는데 무슨 서류니 법정이니 무슨 상관이냐며 따지지만 미국이 침공당해봤자 바뀌는 것은 없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결국 전화는 말싸움으로 끝나버린다.
         같은 날, 레베데예프 소령은 사기 관리반에게 넘길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말라셴코 대위와 인터뷰를 한다. 미국 침공 후 몇주가 지난 시점에서의 감상을 묻는 레베디예프에게 말라셴코는 영광스러운 성과에 대해서는 매우 만족스럽지만 딱 한가지가 불만스럽다고 한다. 미국의 프롤레타리아트들이 소련군에게 협조하지 않고 오히려 매복 공격을 가해 인명피해를 낸다는 것. 그는 전쟁에서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미국인들이 더 대담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레베디예프가 생각해본 해결책은 있냐고 물어보자 그는 간단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매복을 당할 때 마다 민간인 10명을 무작위로 처형하는 것. 이에 레베디예프가 그래도 매복이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하는지 물어보자 말라셴코는 다 죽여버려야 한다고 대답한다.
         선전 방송은 미국에 상륙한 소련군이 북미의 서쪽 절반을 해방했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의 소련군은 워싱턴 주의 민병대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해 쩔쩔매고 있었다. 그럼에도 소련군은 네개 대대를 캐스케이드폴스라는 마을로 투입하였다. 그곳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는 소련군 지휘부의 판단에 의한 것이었다. 올로프스키 대령 마저도 그 무언가가 뭔지는 몰랐지만, 소련군 장병들은 그 무언가가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다른 대대들이 차가운 바람이 부는 캐스케이드폴스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 올로프스키 대대는 시골에서 민병대를 진압하는 임무를 맡았다.
         올로프스키는 로마노프에게 민병대 기지를 공격하라고 지시한다. 차량 지원과 항공 지원의 힘을 입어 기지를 점령한 로마노프 중대는 기지를 수색하는 동시에 방어전을 준비한다. 대규모의 미국 정규군이 접근하고 있다는 레베데예프의 보고를 들은 올로프스키는 로마노프가 중포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해준다. 민병대 지휘관은 미국 정규군이 반격을 시작하기 직전 부상을 입은 채로 생포된다. 이후 로마노프의 중대는 헬리콥터가 와서 민병대 지휘관을 싣고갈 때 까지 기지를 사수한다.
         배넌 대위는 미군-NATO 연합 대대 간부들이 작전 계획을 짜는 현장에 나타난다. 배넌의 자기소개를 들은 소여는 배넌이 한시간이나 늦었다고 질책한 다음 파커 소위와 프랑스군 연락장교 장 사바티에 소령을 소개한다. 사바티에는 자신의 부하들을 만나러 자리를 뜨는 배넌을 보면서 저렇게 열렬한 것을 보니 오늘 내로 죽을 것이라고 평한다. 소여는 지휘관이 전사한 NATO 부대의 지휘를 파커에게 맡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사바티에는 "미국놈들은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하려한다"고 프랑스어로 불평하지만, "이기기 위해서 필요한 일을 하겠다"고 똑같이 프랑스어로 받아치는 소여를 보고 말문이 막힌다.
  • 위안커원
         그의 슬하 4남 3녀 가운데 셋째아들은 [[중화민국]] 태생의 [[미국]] [[물리학|물리학자]]인 [[위안자류]](袁家骝)이다.
  • 유니버설 픽처스
         [[미국]]의 [[영화]] 회사.
  • 유동훈 (야구인)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94년]] 8월에 김건덕, [[손지환 (야구인)|손지환]] 등과 함께 청소년 국가대표에 선발되어 [[미국]] [[캘리포니아주]] [[롱비치 (캘리포니아주)|롱비치]]에서 열린 한·미·일 국제 고교야구 대회에 출전, [[일본]]과 공동 우승을 하는 데 기여를 했다.
         2014년 [[김상훈 (1977년)|김상훈]]과 함께 은퇴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고 돌아와 2015년 부터 [[KIA 타이거즈]]에서 3군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여 2016년 1군 트레이닝 코치 겸 불펜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가 2017년부터는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변경됐다.
  • 유로달러
         [[미국]] 연방준비제도 이사회의 관할 밖의 구역에서 거래되는 [[미국 달러]] [[화폐]]를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유럽]]에서 거래가 활발하여, 유로달러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1950년대, 브레튼우드 체제에서 미국은 막대한 달러를 무역적자의 형태로 전 세계로 '수출'했다. 그 결과 막대한 달러화가 미국 이외의 국가에 누적되었다. 1971년 [[닉슨 쇼크]]로 전 세계가 변동환율제로 이행하게 되자, 이러한 막대한 역외달러를 이용한 금융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된다. 특히 역외달러 거래가 활발했던 지역은 당시 경제가 발전한 서유럽 국가였으며, [[프랑크푸르트]], [[취리히]], [[파리]], [[암스테르담]] 등이 역외달러 금융거래의 중심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독일의 도이체방크(Deutsche Bank), 프랑스의 BNP 파리바, 네덜란드의 ABN AMRO 등이 주요한 은행으로 성장하였다.
         1986년, [[영국]]은 금융빅뱅(Big Bang)이라 불리는 대규모 금융개방정책을 실시했으며 달러 시장의 중심지가 된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이나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자산동결을 우려하여 서유럽에 달러 자산을 보관하였다. 이를 '유로뱅크'라고 한다. 이렇게 유로달러의 기세가 강해지자 미국은 자본시장의 주도권을 찾기 위하여 뉴욕의 국제금융시장을 강화하였다.
  • 유빈
         유빈은 1988년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현 부산광역시)에서 1남 1녀 중 첫째로 태어났고, [[미국]]에서 약 2년간 거주하기도 했다를 졸업했으며, [[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과에 휴학 중이다. 명지대학교 홍보대사로 위촉받기도 했다.
  • 유승민(정치인)
         반면 [[대한민국 공군|공군]]력 건설, 특히 [[KFX]]나 [[L-SAM]]을 비롯한 국산 무기개발 사업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숨기지 않았다.[* 2015년 국정감사에서 [[미국]]의 KFX 관련 주요 기술의 이전 문제가 논란이 된 상황에서도 정부가 자체 개발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방사청과 청와대 참모진이 대통령을 속이고 있다"며 여권 소속 의원으로는 이례적으로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 KFX F-35 도입으로 전환, THAAD, [[미국]] 주도 MD 참여 등에 호의적인 견해도 나타냈다. 때문에 국산 개발을 통한 자주국방력 강화를 선호하는 이상주의적 [[밀덕]] 사이에서는 비판을 받았지만, 국산 무기의 여러 결함 때문에 검증된 미국산 무기를 선호하는 현실주의적 [[밀덕]]들에게는 오히려 호평을 받고 있다.[* KFX의 경우, 실패하면 그대로 [[대한민국 공군]] 미래전력을 다 말아먹는 결과가 된다. 때문에 차라리 개발이 본궤도에 오르기 전에 접고 검증된 미국제 전투기 도입을 찬성하는 주장이 [[밀덕]]들 사이에서도 의외로 많다.]
         '이미 돈을 미국이 대기로 합의를 하고 끝난 사안이라서, 우겨도 돈을 줄 이유가 없다. 트럼프는 사업(비지니스)을 한 사람이라, 속칭 '지르는' 데 굉장히 능한 사람이다. '''즉,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인데, 방위비 분담 쪽으로 얘기가 올 듯하다.''' 내가 대통령 되면 이거 협상해서 잘 해결할 거다." 라는 것. 실제로 이후 한미정상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공정한 분담이 이루어져야 한다' 며 방위비분담금 재협상을 시사하였다. 실제로 한미 FTA 개정협상과 각종 통상압박에 맞물려 방위비분담금 협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동업자끼리 불공평한 관계를 만들지 말아야 하는것''' 이라는 주장으로 압박에 나서고 있다.
         보수 진영 일각에서는 좌파적인 발언을 했다고 하여 논란이 있다. 그런데 유승민 전 원내대표는 과거에는 자유주의 성향의 경제학자의 모습이 강했는데 재벌정책에 대해서는 입장의 변화가 없고 다른 나머지 경제, 복지, 노동에 대한 생각은 지역구 국회의원을 하면서 많은 지역구 주민들과 만나고 그들의 삶을 접하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도 있다고 밝혔다. 또한 성장 동력이 점점 쇠진해가고 외환위기와 미국발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점점 [[양극화]]가 심화되어가는 현상을 보면서 전통적인 보수의 방법과 노선에서 변화를 꾀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중부담-중복지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민부담과 복지지출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평균 정도 수준을 장기적 목표로 정하자는 의미입니다. 이는 [[스웨덴]], [[프랑스]], [[독일]], [[영국]], [[이탈리아]] 같은 [[유럽]] 국가들보다는 낮은 수준이지만, 현재의 [[미국]], [[일본]]보다는 다소 높은 수준을 지향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결코 낮은 목표라 할 수 없습니다. 최근 여야 간에 중부담-중복지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는 만큼, 우리는 국민의 동의를 전제로 이 목표에 합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 1987 Dissertation Travel Fellowship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 1986 Distinguished Teaching Assistant Award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 유아인
         2012년 SBS 월화드라마 《[[패션왕 (드라마)|패션왕]]》에서 출연했으며, 미국의 [[뉴욕]], [[라스베이거스]], 애리조나 사막 등에서 촬영했다.<ref>{{뉴스 인용|제목=유아인 “동료 없이 혼자 외롭게 촬영했다”…왜?|url=http://star.mk.co.kr/new/view.php?mc=ST&no=166234&year=2012|출판사=매일경제 스타투데이|저자=진현철|날짜=2012-03-14|확인날짜=2016-03-13}}</ref> 패션계에 몸담은 젊은 남녀의 욕망과 사랑을 그린 드라마 《[[패션왕 (드라마)|패션왕]]》은 청춘들의 불안한 심리를 잘 보여줬다는 평가도 있었지만,<ref>{{뉴스 인용|제목=부유하는 청춘…드라마‘패션왕’그 뻔뻔함(?)에 대하여|url=http://news.heraldcorp.com/view.php?ud=20120417000369|출판사=헤럴드경제|저자=서병기|날짜=2012-04-07|확인날짜=2016-03-13}}</ref> 초반의 기대감과 배우들의 호연에 비해 공감할 수 없는 인물들과 스토리가 이어진다는 평가를 얻었다.<ref>{{뉴스 인용|제목=유아인-신세경의 '패션왕', 왜 고전할까|url=http://osen.mt.co.kr/article/G1109394517|출판사=OSEN|저자=김경민|날짜=2012-05-06|확인날짜=2016-03-13}}</ref><ref>{{뉴스 인용|제목=종영 '패션왕', 그래도 실패작은 아니다|url=http://osen.mt.co.kr/article/G1109404657|출판사=OSEN|저자=장창환|날짜=2012-05-23|확인날짜=2016-03-13}}</ref> 유아인이 연기한 ‘강영걸’은 성공의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로 자신의 목표를 위해 부정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오히려 유아인은 멋있지 않기 때문에 “신선하고 재미있다”고 밝혔다.<ref>{{뉴스 인용|제목=유아인 "강영걸 캐릭터? 멋있는 척 안해서 좋다"|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newsid=01213606599498088|출판사=이데일리 스타인|저자=김영환|날짜=2012-04-20|확인날짜=2016-03-13}}</ref> 또한 보통의 시청자가 기대하는 판타지에서 벗어난 현실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세속적인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냈기 때문에 캐릭터에 애정이 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제목=유아인 "돈에 돈, 돈~! 영걸이가 난 너무 좋았다"|url=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738929|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이현진|날짜=2012-06-01|확인날짜=2016-03-13}}</ref>
         화보 촬영을 위해 [[미국]]에 있을 때, [[김희애]]의 연락을 통해 JTBC 드라마 《[[밀회 (드라마)|밀회]]》의 캐스팅을 제안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김희애 “‘밀회’ 유아인 섭외 연락, 내가 직접했다”(인터뷰)|url=http://star.mbn.co.kr/view.php?no=373882&year=2014|출판사=MBN스타|저자=손진아|날짜=2014-03-10|확인날짜=2016-03-13}}</ref> 당시 영화 《[[베테랑 (영화)|베테랑]]》에 이미 캐스팅된 상태였으나, 유아인은 [[류승완]] 감독과 제작사의 양해를 얻어 《[[밀회 (드라마)|밀회]]》에 출연한다.<ref name="강혜정 인터뷰">{{뉴스 인용|제목=제작자 강혜정이 말하는 ‘유아인’ ['베테랑' 천만 인터뷰②]|url=http://pop.heraldcorp.com/view.php?ud=201508260944047991873_1|출판사=헤럴드POP|저자=최현호|날짜=2015-08-29|확인날짜=2016-03-17}}</ref> 천재 피아니스트 ‘이선재’ 역할을 위해 피아니스트들의 영상을 보고 곡의 스피드와 건반 위치 등을 외워 실제 타건을 하며 촬영했다. 피아노 울림판을 수건으로 막고 타건을 하면,<ref>{{뉴스 인용|제목=아인씨는 언제부터 그렇게 피아노를 잘쳤나?|url=http://osen.mt.co.kr/article/G1109810412|출판사=OSEN|저자=윤가이|날짜=2014-03-20|확인날짜=2016-03-14}}</ref> 그 후 대역 피아니스트의 소리를 덧입히는 방식이었다.<ref>{{뉴스 인용|제목='밀회' 윤복인, "감동적인 유아인 피아노 연주, 사실은..."|url=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00284611698726002|출판사=티브이데일리|저자=조해진|날짜=2014-05-17|확인날짜=2016-03-13}}</ref> 《[[밀회 (드라마)|밀회]]》는 작품성을 인정받고<ref>{{뉴스 인용|제목=[TV별점토크]‘밀회’는 단지 불륜 조장 드라마일까?|url=http://osen.mt.co.kr/article/G1109810412|출판사=스타뉴스|저자=이수연|날짜=2014-04-18|확인날짜=2016-03-14}}</ref><ref>{{뉴스 인용|제목=[마지막 밀포트]그래서 '밀회'는, 어떤 작품으로 기억될까요|url=http://starin.edaily.co.kr/news/NewsRead.edy?SCD=EA31&newsid=01095526606088920|출판사=이데일리|저자=강민정|날짜=2014-05-14|확인날짜=2016-03-13}}</ref> 숱한 화제를 낳으며<ref>{{뉴스 인용|제목=“아직도 몰라?” 점점 뜨거워지는 ‘밀회’ 앓이|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489986|출판사=TV리포트|저자=박귀임|날짜=2014-04-12|확인날짜=2016-03-13}}</ref> 당시 종편으로서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ref>{{뉴스 인용|제목='밀회' 마지막회 시청률 6.6% 자체 최고…분당 8.8% 유종의 미|url=http://www.tvreport.co.kr/?c=news&m=newsview&idx=500736|출판사=TV리포트|저자=황소영|날짜=2014-05-14|확인날짜=2016-03-13}}</ref> 유아인은 섬세한 연기력을 선보여 순수함으로 시청자들을 매료시켰다는 호평을 얻었고,<ref>{{뉴스 인용|제목=미화하고 싶은 '밀회'의 불륜, 유아인 때문이다|url=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1975388|출판사=오마이뉴스|저자=음대성|날짜=2014-04-01|확인날짜=2016-03-13}}</ref><ref>{{뉴스 인용|제목=밀당 없는 밀애(密愛) ‘밀회(密會)’ 유아인|url=http://www.mydaily.co.kr/new_yk/html/read.php?newsid=201404091021461116|출판사=마이데일리|저자=김민성|날짜=2014-04-09|확인날짜=2016-03-13}}</ref><ref>{{뉴스 인용|제목='밀회' 유아인 그는 불륜마저 순수로 만들어버린다|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236732|출판사=텐아시아|저자=배선영|날짜=2014-04-13|확인날짜=2016-03-13}}</ref> 특히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 클래식 종사자들에게 인정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밀회' 속 실제 피아니스트 박종훈, 유아인에 '특급칭찬'|url=http://tenasia.hankyung.com/archives/233101|출판사=텐아시아|저자=배선영|날짜=2014-03-26|확인날짜=2016-03-13}}</ref><ref>{{뉴스 인용|제목='밀회' 유아인, 연주자 입모양마저 흉내내는 디테일 연기|url=http://www.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3705|출판사=스포츠Q|저자=용원중|날짜=2014-03-20|확인날짜=2016-03-13}}</ref><ref>{{뉴스 인용|제목=재능 타고났어도 천재 되는 길은 험난|url=http://sunday.joins.com/archives/31573|출판사=중앙Sunday|저자=손열음|날짜=2014-04-13|확인날짜=2016-03-13}}</ref> 연출을 맡은 [[안판석]] 감독은 유아인에 대해 “느낌으로만 연기를 하는 게 아니고 감성을 지적으로 통제해 가면서 연기한다. 그 나이에”라며 “타고난 배우”라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제목=<밀회> 안판석 PD “단 한 개의 음표, 단 하나의 손동작도 틀리지 않았다.” |url=http://news.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newsType=&page=&contain=&keyword=&mi_id=MI0100424522|출판사=맥스무비|저자=조민준, 유선주|날짜=2014-05-20|확인날짜=2016-03-13}}</ref> 유아인은 《[[밀회 (드라마)|밀회]]》를 통해 예술적인 면모를 구체화할 수 있어서 만족감을 느꼈다고 밝혔으며,<ref>{{뉴스 인용|제목='밀회' 유아인 "예민한 감성, 연기로 풀어내고 싶었다"|url=http://www.nocutnews.co.kr/news/1210174|출판사=노컷뉴스|저자=장창환|날짜=2014-03-24|확인날짜=2016-03-13}}</ref> 종영 후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https://www.facebook.com/hongsik.uhm.14/posts/1493686907511349 긴 소감글]을 남겼다. 특히 ‘이선재’ 캐릭터를 배우 유아인이 가진 소년성의 엑기스로 생각하며,<ref name="씨네21(2)">{{뉴스 인용|제목=[유아인] 소년에서 소년으로|url=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1256|출판사=씨네21|저자=정지혜|날짜=2015-09-14|확인날짜=2016-03-18}}</ref> 2015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 오픈토크에서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로 꼽았다.<ref name="오픈토크">{{인용|제목=제20회 부산국제영화제 – 한국영화기자협회와 함께하는 오픈토크|url=https://www.youtube.com/watch?v=trYe78Pc0h8|날짜=2015-10-03 방영}}</ref>
  • 유진 (연예인)
         초등학생 때 [[미국]] [[괌]]으로 이민을 가서 [[영어]]에 능통하다. 두 장의 솔로앨범을 발매했으며 2004년에 솔로 2집 활동 이후로는 주로 드라마, 영화, MC 분야에서 활동을 펼치고 있다.
  • 윤고려
         일찍이 친정아버지 [[김윤정 (1869년)|김윤정]]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 [[미국]] 서울 워싱턴의 여학교에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그 뒤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도쿄)에서 여자학원에 입학하고 도쿄여자학원을 졸업한 뒤 귀국<ref name="국민보1">국민보 제41호, 1914년 01월 07일자 기사</ref>, 교육사업에 전념하였다.
         김고라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덕에 일본ㆍ미국에서 여학교를 마친 보기 드문 여성이었다.<ref name="근녀1"/>'는 평가도 있다. 국민보는 그녀의 서거 기사를 취재할 때, 여성교육을 위한 활동에 열심이였고 경성 있는 양심·양원 두 여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 불행히 요절하였다.<ref name="국민보1"/>며 아쉬워했다.
  • 윤기선
         | 사망지 = {{국기|미국}} [[부산광역시]] [[영도구]]
         '''윤기선'''(尹琦善, 영문명 '''Kee-Suhn Yoon''', 혹은 '''Kenny Yoon''', [[1921년]] [[10월 22일]] ~ [[2013년]] [[7월 27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음악가]]이자 [[피아노 연주자|피아니스트]]이며 대한민국, [[미국]]의 음악가 겸 [[대학 교수]]이다.
         1945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재직하다가 그해 [[5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6월]] 하와이 연주에 갔다가 바로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줄리어드 음악대학원]]에 입학하면서 눌러앉게 된다. [[1949년]] [[12월]]에는 뉴욕에서 성공적인 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줄리어드 음악대학원]]을 졸업한 뒤 한동안 미국에서 살았다. 그 뒤 잠시 귀국하여 [[서울예술고등학교]]의 교수, [[연세대학교]] 음대 교수, [[서울대학교]] 음대 교수 등으로 재직했으나 [[1980년]]대에 다시 도미,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하였다. 한국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솔로 곡과 협주곡을 많이 소개 연주했으며 '서울 트리오'를 결성하여 실내악활동을 하기도 했다.
         === 미국에서의 말년 ===
         [[2013년]] [[7월 2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사망했다.<ref>[http://news.donga.com/3/all/20130729/56716809/1 <nowiki> [</nowiki>부고<nowiki>]</nowiki> 한국 1세대 피아니스트 윤기선씨] 동아일보 2013.07.29</ref>
         *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줄리어드 음악대학원]] [[음악학]] [[석사]]
         * [[미국]] [[예일 대학교]] 대학원 음악과 지휘수업 2년 [[음악학]] [[석사]]
         * [[1948년]] 미국 줄리어드음대 대학원 음악학 석사
         * [[미국]] [[하트포트 대학교]] 교수
         * [[미국]] [[하트음악대학]] 교수
         * [[1977년]] [[미국]]으로 도미, 이후 L.A 거주
         * [[미국]] 불버그 장학상
         * [[미국]] 모리스 로예브 장학상
         ** 형: [[윤장선]](尹璋善, 다른 이름은 워싱턴<ref name="dd636">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636페이지</ref>, [[1920년]] - [[2005년]] [[3월 25일]]) 전(前) 미국 샌프란스시코 총영사관
         ** 형수: 기세선(<ref name="dd635">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635페이지</ref>, [[1922년]] - [[2007년]] [[9월 28일]]<ref>미국 캘리포니아 LA 에서 사망</ref>)
         ** 동생: [[윤정선]](尹挺善, 요셉<ref name="dd636"/> [[1928년]] - [[2008년]] [[3월 4일]]) [[미국]]에서 사망
         ** 누나: 윤명희(尹明姬, [[1918년]] [[2월 8일]] - [[2013년]] [[10월 30일]])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사망 (장지: Fairfax Memorial Park)
         ** 여동생: 윤영희- 미국 거주.
         ** 매부: 미국
  • 윤동환 (배우)
         * [[1996년]] : [[미국]] [[뉴욕]]의 [[뉴스쿨]] 16밀리 영화 워크샵 수료
         * [[1997년]] : [[미국]] [[뉴욕]] [[HB 스튜디오]] 연기 수업 참가과정 수료
         * [[1999년]] : [[미국]] [[로스앤젤레스]] [[리 스트라버그 연기학교]] 단기코스 수료
         * [[2006년]] : [[미국]] [[스타게이트 아카데미]] 연기 수업연구반 단편영화제작참여과정 수료
  • 윤보라
         2010년 8월 28일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나눔콘서트 도중 보라가 야외공연 무대 위에 남아 있던 빗물에 미끄러져 앞으로 넘어지면서 부상을 당했는데, 그 사고를 담은 영상이 [[독일]]과 [[미국]]에서 해외 토픽으로 소개되어 화제가 됐다. ~~월드스타!~~ 이 사건 이후 보라는 한동안 손가락에 캐스트를 하고 음악방송과 예능에 출연했다. 심지어 그 손을 하고 몸을 쓰는 예능도 했다.
  • 윤삼륙
         * 그의 넷째 여동생 윤태희(Yoon Bush)는 [[미국인|미국]] [[남자|남성]] Larry Bush와 결혼하여 [[미국]] [[미국 시민권|시민권]]을 취득하였다.
  • 윤상구 (1949년)
         |국적= {{국기나라|대한민국}} [[국적]] <br> {{국기나라|미국}} [[영주권|영구거주권]](前)
         |학력= [[미국]] [[시러큐스 대학원]] 졸업
         * [[미국]]에서 고등학교 졸업
         * [[미국]] [[시러큐스대학]] [[건축학]]과 학사·석사
         * 미국에서 의류업에 종사하다가 귀국
         * [[2008년]] [[미국]] [[뉴욕 시]]의 뉴욕한국문화원과 공동으로 '한옥 알리기' 홍보 행사를 주관하였다.<ref>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10/h2008100903151384800.htm{{깨진 링크|url=http://news.hankooki.com/lpage/people/200810/h2008100903151384800.htm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2303175</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2303174</ref>
         * [[미국]] [[시라큐스대학]] [[건축]][[공학]]학사·석사
         ** 동생 : [[윤동구]](尹同求, 1952년 7월 12일 - , 미국 프레비던스대학 졸, 설치미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교수)
         *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5&Total_ID=3327921 미국에 한옥 알리기 나선 윤상구 씨]{{깨진 링크|url=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5&Total_ID=3327921 }}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윤치영]][[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시러큐스 대학교 동문]][[분류:서강대학교 동문]]
  • 윤수일(가수)
         윤수일은 1955년 2월 6일, [[미군]] [[공군]] 비행조종사였던 칼 브라울 어게스트 [[대위]]와 어머니 지복희 사이에 [[무녀독남]]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윤수일이 아직 태어나기 전 그의 친부는 임신중인 윤수일의 어머니에게 [[미국]]으로 데려갈 것을 약속하고 귀국을 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비행 도중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가 진짜 윤수일의 어머니를 미국으로 데려갈 의도가 있었을지는 불명이다. 오래 지나지 않아 [[사망]]하기도 했지만, 어게스트 대위는 이미 본국에 미국인 아내와 아이까지 둔 상태였기 때문인데, 파병군인들이 현지 여성과 아이를 만들어두고 나중에 데려가겠다는 기약없는 약속만하고 이들을 버려두는 케이스는 상당히 흔했기때문이다. 한국에서는 80년대까지만해도 미군들에의해 그런 일이 매우 흔하게 벌어졌고, 유사한 현상은 베트남전시기 한국인들에의해서 발생한 바 있다.]
  • 윤영구 (1928년)
         '''윤영구'''(尹鑅求, Alice Yun, [[1928년]] [[7월 10일]] - [[2011년]] [[5월 9일]])는 [[대한민국]]의 음악가, 인류학자이자 [[미국]]의 인류학자, 여성학자이다. 하와이대 여성학과 (Department of Womens Studies) 교수이다. [[하와이 대학교]]에 [[여성학]]과 창립을 주도하였다. [[경성부]](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출신.
         [[1942년]] 에 입학하여 [[1945년]] 졸업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학과에 입학, [[1950년]] [[2월]] [[서울대학교]] 음대를 졸업하였다.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 항공사에 취직했다가 [[1950년]] [[6월]] [[6.25 전쟁]]이 발생하고 미군이 한국에 파견되자 그는 미국 공군 군종장교 군목의 통역관으로 [[한국]]으로 들어와 [[1950년]]부터 [[1952년]] 휴전까지 활동했으며, 미공군 군목의 한국 전쟁 고아 구호사업을 지원하였다.
         그는 당시 [[한국]]에 [[감리교회]] 선교사로 와 있던 [[윌리엄 쇼]](William Show) 박사의 추천을 받아 휴전 후, [[1952년]] [[1월]] [[미국]]으로 유학,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대학교]]에 입학하여 사회학을 전공하고, [[1953년]] 같은 웨슬리언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였다. 웨슬리언 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 [[1955년]] 서대문 출신이자 성결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던 [[최희창]]을 만나 [[서울]]에서 결혼하였고<ref>최희창의 아버지는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ref>, [[1957년]] 웨슬리언대학교에서 인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남편 [[최희창]]이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할 때 같이 귀국하여 [[이화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의 인류학 강사로 채용되어 [[1963년]]까지 이대, 서울대에서 강의하였다. 그후 다시 도미, 같은 웨슬리언 대학에서 사회학 박사과정을 전공하여 [[1962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이름은 앨리스 윤으로,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 앨리스 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귀국 직후 결혼제도 변천사에 관련된 자료 수집을 하였으며 [[이화여자대학교]] 인류학과 교수로 있다가, [[1963년]]에 [[하와이]]로 이주, 하와이 마노아에 정착하였다. [[하와이대학교]] 여성학 강사로 임명된 그는 하와이대 동서 문화 센터(East West Center)와 여성학 프로그램을 맡아보았다. [[1975년]] [[미국]] [[하와이대학교]] 여성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하와이대학교]] 재직 중, 결혼제도의 변천사를 연구하는 한편 [[하와이대학교]]에 처음으로 여성학과 신설을 추진하여 성사시켰다. 그는 강의 활동 외에도 아시아계 미국 이주 여성을 연구하였으며 미국 내에 한국인 위안부 문제를 공론화시켰고, [[미국]]으로 결혼이주여성으로 오는 한국 여성의 인권, 처우 개선 문제 해결운동에 참여하였다. 또한 [[불법체류]]로 낙인찍히는 미국내 아시아계 결혼이주여성의 권익 보호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그밖에 [[하와이 결혼이주여성옹호회]] 자문역으로도 위촉되었다. 그밖에 활동으로는 하와이 그리스도연합교회의 권사로 활동하였다.
         ** 동생: [[윤석구]](尹錫求, [[1929년]] [[9월 6일]] - , 물리학자, [[미국]] [[사지노 대학]] [[물리학]]과 교수)
         [[분류:1928년 태어남]][[분류:2011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인류학자]][[분류:미국의 인류학자]][[분류:여성학]][[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미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여성주의자]][[분류:해평 윤씨]][[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영선 (1896년)
         '''윤영선'''(尹永善, [[1896년]] [[12월 25일]] ~ [[1988년]] [[2월 6일]])은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자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일제 강점기]] 미국 유학 후 귀국하여 농업과 양잠업을 하였고 해방 후 제3대 [[농림부|농림부장관]]과 무임소 장관을 지냈다. [[1925년]]부터 [[1945년]]까지는 [[동아일보사]] 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의 [[친일지식인]]인 [[윤치호]]와 중국인 [[마애방]]의 아들이다.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 [[윤보선]], 경기도지사 [[윤원선]] 등과는 재종간이며, [[조선일보]] 사주를 역임한 [[방상훈]]의 처조부가 된다. 본관은 해평으로 호는 오당(梧堂), 초명은 용성(龍成), 자는 용성(龍成)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 전쟁]] 직전까지 [[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의 낙농, 목축업을 경영하였으며, 장연전기 등의 기업 설립에 참여하고, 재단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한국 전쟁]] 무렵에는 농림부장관과 무임소장관을 지내고, 휴전 이후에는 교육사업과 4H클럽 활동, [[로터리 클럽]] 활동 등 사회활동에 전념하였으며의 재단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인 [[윤치호일기]] 보존을 위해 일부 내용을 [[미국]]에 있는 동생들에게 택배로 우송하였다. 이로써 윤치호 일기 중 일부는 [[한국전쟁]]의 화를 모면하고 보존될 수 있었다.
         오당 윤영선은 [[1896년]] [[12월 25일]] [[조선]] [[경성부]] (현재의 종로구)에서 태어난 그는 [[윤치호]]와 중국 여인 [[마애방]]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는 [[기독교]] 신자였다. 어머니 [[마애방]]은 중국 여인으로 아버지 [[윤치호]]가 [[갑신정변]]의 실패로 [[청나라]] [[상하이]]로 망명했을 때 만나 결혼했다. 위로 누나 윤봉희가 있었고, 바로 아래로 일찍 요절한 동생 봉선과 광선이 있었다. 동생 [[윤광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비서일을 보았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미군정청]] 통역관으로 근무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그리고 바로 태어난 친여동생 [[윤용희]]는 [[미국]] 유학후 [[일제 강점기]] 당시 잠시 국내에 입국했으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거주하였다.
         아버지 [[윤치호]]는 국력의 양성을 위해서는 실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생각하고 낙농업, 목축, 양잠업, 경리회계 등의 교육을 한영서원에 도입했다. 그는 아버지 [[윤치호]]의 뜻에 따라 한영서원(송도중, 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였으며, 농과를 지원하여 농업과 낙농, 목축을 배웠다. 한영서원을 졸업한 뒤에는 1년간의 영어 과정을 추가로 수료하며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14년]] [[한영서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헐문 중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마운트 헐문 중학교]]를 졸업하고 [[밴더빌트]] 대학 농업과에 입학했다. 그 해 다시 [[오하이오 주|오하이오]] 주립 [[콜럼버스 오하이오 대학교]] 농축산과에 입학했다. [[1922년]]부터는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의 농림연구소의 연구보조원으로 근무했다.
         [[1922년]]에 [[6월]] [[오하이오 주|오하이오]] 주립 [[콜럼버스 오하이오 대학교]] 축산과를 졸업하였다. 미국 체류 중 그는 [[유일한]] 등과 연락하였다. [[유일한]]이 있던 [[미시간주]]와 그가 있던 [[오하이오 주|오하이오]]는 붙어 있었으므로 [[한국]] 유학생 모임에서나 [[대한인국민회]]일로 종종 만나 교류할<ref name="유일한1">조성기, 《유일한 평전》 (작은씨앗, 2005) 221페이지</ref> 수 있었다. 귀국 이후 목장을 경영하였고, 경성 YMCA 청년회에 참여하여 YMCA 청년회 이사와 총무, 고려의약품주식회사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5년]] [[9월]] 실업장의 주임대리직을 임시로 맡기도 했다.<ref>매일신보 1925년 9월 17일자, 3면</ref> [[4월 17일]] 에 [[동아일보사]] 개설되자 윤영선은 동아일보 임명되었다.<ref>"社告", 동아일보 1925년 04월 17일자 03면 09단</ref> 이후 그는 [[1945년]] [[9월]] 군정이 주둔할 때까지 [[동아일보]]일도 맡아보았다. [[1926년]] 세계 기독교 대회에 참석차 한국인 기독교 신자 대표로 [[미국]]에 다녀왔다. [[1927년]] 다시의 훈도가 되었다가 [[1929년]]까지 재직하고 그만두었다. [[1927년]] [[6월 18일]]에는 과일 종자, 묘목 및 인삼 종자 묘목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의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1932년]] 재단이사에 취임하고, [[1933년]] 의 교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자금 지원이 줄어들어 운영난에 처한 의 재정문제를 구제하였다. 바로 [[김정호 (1885년)|김정호]], [[마종유]]와 함께 송도고보 재정유지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공성학]]과 함께 각각 1백원의 기금을 기부하였다. [[1934년]] [[4월]]에는 [[인천광역시|인천]]에서 개최된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계시부원과 기록부원을 겸하였다. [[5월 11일]] [[송도학원]] 재단설립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태평양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던 중 [[윤치영]]으로부터 [[일본]]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소식을 접하였으나, 아버지 [[윤치호]]로부터 일본이 패망할 수 있지만 일본이 승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1941년]] [[윤치영]] 등으로부터 [[이승만]]이 출연한 미국 방송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입수하여 시청하였다.
         또한 농림부 장관 재직 당시 정부 비축 양곡의 수를 늘려, 곡가 조절과 식량 수급의 원활을 기하고 전시와 흉년기의 빈민들을 구제하고, 농수산물 가격을 안정시켰다. 또한 농수산물 증산과 품종 개량 정책 및 미국 잉여농수산물의 국내 유치를 추진하였다. [[1950년]] [[6월 6일]]에는 정부미 쌀 방출 수익금 70억환을 비료차액으로 농민에 반환하였다.<ref>농수산부, 《한국양정사》 (농수산부, 1978) 643쪽</ref> [[1950년]] [[3월 24일]] [[농지개혁]]을 목적으로 구성된 농지개혁위원회 위원장에 위촉되었다.<ref>"農改 위원 명부", 자유신문 1950년 03월 24일자 02면 05단</ref>
         [[한국 전쟁|6.25 전쟁]]이 터지자 전황이 불리하다는 소식을 듣고 가솔들을 이끌고 바로 남하하였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인 [[윤치호일기]] 보존을 위해 일부 내용을 [[미국]]에 있는 동생들에게 택배로 우송하였다. 이로써 윤치호 일기 중 일부는 [[한국전쟁]]의 화를 모면하고 보존될 수 있었다. [[한국 전쟁|6.25 전쟁]] 중 동생 [[윤광선]](尹光善)의 납북 소식을 접하였다.
         [[1956년]]부터는 [[흥사단]]에서 주최하는 [[금요강좌]]의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해 [[4월 20일]]에는 대성빌딩에서 "미국의 농촌청소년 지도"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57년]] [[농업은행]]([[농협]]의 전신) 중앙회의 운영위원에 선임되어 농촌 영농자금 공급의 불합리성을 시정하였다. [[1957년]] [[4월]] 농업은행 설립위원회 운영위원에 임명되었다.
         ** 이복 동생: [[윤장선]](尹璋善, 다른 이름은 워싱턴<ref name="dd636">윤치호, 《윤치호 일기:1916-1943》 (윤치호 지음, 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 636페이지</ref>, [[1920년]] - [[2005년]] [[3월 25일]]) 전(前) 미국 샌프란스시코 총영사관
         ** 이복 제수: 기세선(<ref name="dd635"/>, [[1922년]] - [[2007년]] [[9월 28일]]<ref>미국 캘리포니아 LA 에서 사망</ref>)
         ** 이복 여동생: 윤명희(尹明姬, [[1918년]] [[2월 8일]] - [[2013년]] [[10월 30일]])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사망 (장지: Fairfax Memorial Park, Section 6, Garden of Serenity)
         *** 조카사위 : 노춘규(미국 거주, 의사)
         ** 이복 여동생: 윤영희(尹瑛姬, [[1926년]] [[3월 5일]] - , 미국 거주)
         ** 이복 여동생: 휘스넌트(Whisnant, 미국인)
         ** 이복 동생: [[윤정선]](尹挺善, 요셉<ref name="dd636"/> [[1928년]] - [[2008년]] [[3월 4일]]) [[미국]]에서 사망
         *** 손녀 : 윤서명(尹瑞明, 미국거주)
  • 윤영선 (1922년)
         6.25 전쟁이 끝나자 충무무공훈장을 수훈하였으며, 육군 중령으로 퇴역한 뒤 [[미국]]으로 유학하였다. 그는 [[미국]] [[존스 홉킨스 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가족계획학과를 나왔고 [[1965년]] [[8월 5일]] 귀국, 공항검역소 2층에 산부인과 겸 상담소인 가족계획클리닉을 개설하였다.<ref>가족계획의 클리닉 설치-결혼생활도 상담, 동아일보 1965년 08월 12일자 6면 사회면</ref> 같은 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에 입학하였다. [[1966년]] [[2월 22일]]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ref>박사학위승인자, 경향신문 1966.02.22일자 3면 사회면</ref> 이후 천안 충청남도도립병원장, 가족계획연구원 학술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분류:192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민국 육군 중령]][[분류:대한민국의 군의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베트남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대한민국의 외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산부인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정신과 의사]][[분류:대한민국의 의학자]][[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존스 홉킨스 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해평 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종선
         '''윤종선'''(尹淙善, [[1935년]]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시]] - [[2002년]] [[3월 17일]])은 [[한국]]출신 [[미국]]의 생화학자, 치과의사, 교육자이다. 뉴욕치과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주영공사, 주터키대사를 지낸 [[윤치창]]의 아들이고, 독립운동가 [[손정도]]와 [[손원일]]은 그의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이다. 좌옹 [[윤치호]]의 이복 조카이기도 하다.
         {{토막글|미국}}
         [[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미국의 생화학자]][[분류:미국의 치과 의사]][[분류:윤치호]][[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미국의 의학자]][[분류:미국의 교육자]][[분류:미국의 대학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종찬
         * [[미국]] [[시라큐스대학교]] 대학원 영화과
  • 윤종호 (1949년)
         * [[1982년]]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문학]][[석사]]
         * [[1983년]] [[미국]] [[플로리다 공과대학교]] 경영대학원 [[경영학 석사]]
         * [[1988년]] [[라이스 대학교|미국 라이스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과]] [[행정학]] [[박사]]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육군 소장]][[분류:파평 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분류:육군기갑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 국방부 특별보좌관]][[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야전포병학교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중앙대학교 동문]][[분류:단국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홍익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플로리다 공과대학교 동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 동문]][[분류:국방대학원 동문]][[분류:라이스 대학교 동문]][[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국방대학교 교수]][[분류:국민대학교 교수]][[분류:동국대학교 교수]][[분류:건양대학교 교수]][[분류:백석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윤증현
         1946년 [[경상남도]] [[창원시|마산합포구]] (현 [[창원시|마산합포구]]) 에서 태어났다.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 대학교 행정[[대학원]] [[석사]] 과정,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 매디슨 공공정책 및 행정학 [[석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윤천주
         1921년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래고등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가나자와]]의 [[구제고등학교|제4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했으나 815해방으로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과정을 졸업, 수료하였다.
  • 윤치영
         [[미국]] 유학을 다녀왔고 [[이승만]]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승만]]의 비서이자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그에게 [[무솔리니]], [[케말 파샤]] 등에 비견하며 집정관 겸 천황 겸 대통령의 지위와 권력을 갖춘 지도자가 될 것을 역설하였다.{{출처}}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활동, 삼일신보 제작 등에 참여하고, 이승만을 보좌하는 등의 [[독립운동]]을 하다 [[흥업구락부]] 사건 당시 체포되어 9개월간 옥살이를 하였다.
         YMCA 청년회 학당 시절 그에게 영어, 철학과목을 가르친 이승만. 1920년 미국에서 재회한 이후 그는 40년간 이승만의 가신이며 정치적 최측근으로 그를 보좌하였다.
         일찍부터 [[영어]](英語)를 배운 그는 영어를 잘 구사하였는데, 유년시절에 배운 [[영어]] 실력은 훗날 [[미국]] 유학에 크게 기여하였다. 윤치영은 [[중앙중학교 (서울)|중앙중학교]] 7회 졸업생이었다. 애교심이 워낙 강한 그는 아들 차남 [[윤인선]](尹仁善, [[국회사무처]] 해외자료과장 역임)과 손주 윤황구가 진학할 때 [[중앙고등학교]]를 선택하도록 했을 정도이다. 그러나 윤황구는 중앙중학교만 졸업하고 고등학교는 경복을 나왔다. 윤치영은 무시험세대인 손자가 [[중학교]]에 진학할 당시 주소를 옮기기까지 하며 중앙을 권했다고 한다. 차남 윤인선은 [[중앙고등학교]] 57회 동문이다.<ref>이건우 주간부기자. 교육화제, 주간조선. 1993.</ref> 그는 한글 외에도 [[영어]], [[한자]],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 5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1918년]] [[일본]]을 방문한 [[여운홍]] 등을 만나 [[미국]] 교포들의 현황과 독립자금 모금 현황 등의 정보를 입수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와세다 대학에]] 유학 중 [[동경]]에서 유학생들의 [[조선]] [[2·8독립 선언]]에 참여하였으며, 같은해 [[11월 23일]]에는 [[여운형]]의 일본 입국을 환영하는 유학생 환영회를 개최하고 한국 독립의 당위론을 강연하는데 물심양면으로 지원하였다. 또한 그는 [[YMCA 청년회]]에도 활약, 재동경 한인 YMCA 청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2년]] 귀국하여 윤치호·[[이상재]] 등이 지도하던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관]]에 들어가 일하였다. 또한 모교의 야구부 코치이자 조선기독교중앙청년회(YMCA)의 야구부 감독, 축구부 감독을 겸하였다. 기독교청년회에서 일하던 중 그는 [[이승만]]의 권고로 [[미국]] 유학을 결심, 미국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에서 그는 [[1921년]] 7월에 조직된 [[동지회]](同志會)에 가입하여 이승만을 총재로 추대하고 그는 민찬호·김영기 등과 [[대한인동지회]] 중앙부 이사원에 임명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옹호와 대동단결을 목적으로 활약하였다. 또한 21년 태평양잡지(뒤에 태평양주보로 개칭)의 주필로서 민족계몽운동에 전념하였다. 동시에 [[동아일보]]의 연락으로 [[동아일보]]와 제휴, 동아일보 북미합중국 특파통신원을 겸하였다.
         이듬해 [[1924년]] [[6월]] 중앙YMCA야구단은 이들을 답방했다. 중앙YMCA야구단의 주장은 윤치영이었다. 당시 그는의 야구 코치도 맡고 있었는데, [[윤치호]]가 그에게 하와이로 가서 시합도 하고 [[이승만]]을 만나보라고 했다. 6월 초 윤치영은 중앙YMCA야구단을 이끌고 출국, [[미국]] [[하와이]]에 도착했다. 윤치영이 이끈 팀은 [[하와이]] 한국인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 [[하와이]]의 [[일본인]] 팀과 서울를 했다. 그러나 결과는 4대 0 패배였다.<ref name="끝나지 않는 신드롬"/>
         윤치영의 하와이행에는 [[야구]]보다 중요한 비밀 임무가 있었다. 이는 [[미국]]에서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윤치호]], [[이상재]](李商在), [[김성수 (1891년)|김성수]](金性洙) 등이 보내는 약 5만 달러의 자금을 [[이승만]]에게 전하는 사명이었다. 떠나기 직전 [[이상재]]는 윤치영의 귀에다 대고 "이놈아 잘 가져가. 가서 우남장 뵙거든 우리 모두 씩씩하게 일 잘한다고 전해라<ref name="경향19720408"/>"하고 안부 전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자신의 아랫배 속옷에 돈을 감추어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 출국할 수 있었다. 그가 일행들을 데리고 [[부산]]에서 탄 배는 [[시모노세키]]-[[도쿄]]-[[요코하마]]를 거쳐 [[하와이]]에 도착했다. [[하와이]] 도착 직후 [[워싱턴 D.C.]]에서 달려온 [[이승만]]에게 그는 안부편지를 전하며 숨겨온 약 5만 달러를 전달했다
         [[1923년]]부터 그는 [[미국]] [[하와이대학교]] 국제법학과에 입학하여 수학했다. [[1924년]] 다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7월 10일]] [[이승만]]이 그를 만나 자신의 독립운동을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승만의 설득으로 윤치영은 [[대한인동지회]]에서 활동하며 [[대한인동지회|동지회]] 기관지인 월간 태평양 잡지의 집필과 인쇄 과정을 맡아 봤고,발간, 발송, 광고, 수금 등의 일도 직접 맡아 보았다. [[1924년]] [[7월]]부터 [[1937년]]까지 [[대한인동지회]] 총본부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미국]] 본토행을 단념한 그는 [[이승만]]의 요청대로 [[하와이]]에 눌러앉아 이승만이 교포 2세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기독학원에서 강사로 교편을 잡으면서 [[태평양]] 잡지의 편집을 맡았다.<ref name="경향19720408"/> 이 잡지는 [[이승만]]이 발행하던 것으로서 [[한국사]](韓國史)와 한국 문화를 [[영어]]영문으로 소개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운전을 할 줄 몰랐던 [[미국]]생활 초기에는 [[이승만]]이 직접 운전하는 자동차를 타고 함께 배달하러 다녔다. 후일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침은 15센트 짜리 빵 한 개, 4~5센트 하는 커피 한 잔으로 때우고, 점심에도 빵 한 개와 야채 스프가 고작이었다'고 회상했다. 그의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그 시절 대부분의 [[한국]]인 교민들은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장에서 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갔고, 윤치영과 [[이승만]]도 때로는 일당 1달러 50센트를 받고 농장에서 교민들과 함께 일한 적이 있었다.
         ===== 이승만 보좌와 미국 본토행 =====
         하와이에서 미국본토로 출발하는 선상에서 (1925년 8월)
         생활할 곳이 없던 [[1923년]] [[미국]] 입국 초기에 그는 [[하와이]] [[한인 기숙학원]] 기숙사, [[미국]] 한국인 교민총회 하와이지부 본부의 숙사 3층 등을 오가며 숙식을 해결하였다. [[1925년]] 이후에야 국내에서 약간의 여비가 보내져서 생활형편이 나아졌다.
         ===== 미국 생활과 대학 재학 =====
         [[1925년]] 미국 본토로 건너가 학업을 계속하였으며, 동시에 각지에 동지회 지부를 설치하고, 순회 강연을 하는 등 활동을 계속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2>{{웹 인용 |url=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109 |제목=나라사랑 광장<!-- 봇이 따온 제목 --> |확인날짜=2010-01-03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5013959/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view.asp?idx=5109 |보존날짜=2016-03-05 |깨진링크=예 }}</ref> 이후 그는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 [[조지워싱턴 대학교]], [[아메리칸 대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1928년]] [[6월]]에는 뉴욕에서 [[삼일신보]](三一申報) 창간에 참여하여 사장인 허 정을 중심으로 [[김도연 (1894년)|김도연]]·김양수 등과 편집을 맡아 일하였다. 그리고 [[1929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 위원에 임명되어 구미위원부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윤치영은 [[미국]]내 한인 유학생들을 포섭, 독립운동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58명의 청년 자원봉사자들을 규합하여 청년조직으로 활용하면서 [[대한인동지회|동지회]]를 알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존재를 [[미국]] 한인 교포사회에 홍보하였다.
         [[미국]]내 각지에서 열리는 각종 모임에 참석해서는 기회마다 [[일제]]의 죄악을 폭로하는 강연을 하는 한편, 중남미 지역에 산재해있는 [[한국인]] 교포들과의 연락관계 업무를 맡았다. 당시 [[멕시코]]에 1천 명, [[쿠바]]에 5백 명 가량의 한국 교포들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ref name="경향19720408"/>
         윤치영으로부터 고무적인 간찰들을 접수한 [[이승만]]은 직접 친필로 네 차례의 답신을 통해 [[하와이]]의 동지촌과 [[동지식산회사]]의 실황을 알려주고 또 윤치영이 제기한 네 가지 의문점에 대해 대답을 하였다.<ref name="이승만 동문 서한집 (상)"/> 윤치영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한 이상촌 건설 주장에 고무되었다. 그는 한국인 유학생및 한인동포 청년들을 모으고, 청년 비서들을 채용하여 미국 및 한국 국내외, 일본 등의 정세와 언론의 동향을 파악, 정보를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였다. 체육활동, 청년들과의 대화를 좋아하던 윤치영은 청년들을 통해 정보를 입수하여 [[이승만]]에게 전달하였고 [[이승만]]은 그를 각별히 신뢰하였다.
         귀국 직전 미국에서 (1935년 무렵)
         [[1929년]] [[이승만]]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 외교위원부 의원]]에 재선임되었다. 그해 윤치영은 [[미국]] [[엘리자베스시티주립대학교]] [[외교학|외교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결석이 잦아 1학년 재학 중 중퇴하고 만다. [[1930년]] [[태평양잡지]]가 [[태평양주보]]로 개명하면서 윤치영은 [[태평양주보]]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이후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 재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구미외교위원부|구미위원부 위원]]의 직함과 동시에 [[태평양주보]]에 칼럼 기고 활동하였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그는 고국에서 친지들이 보내주는 생활비와 강연료, 재미동포들의 후원금으로 가난한 생활을 연명하였다.
  • 윤탁구
         ** 숙부 : [[윤왕선]](尹旺善, [[1902년]] [[1월]] ~ [[1926년]] [[8월 20일]], [[미국]]에서 사망)
         ** 형 : [[윤석구]](尹錫求, 1929년 - , 물리학자, 미국 사지노 대학 물리학과 교수)
  • 윤한
         윤한은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에서으로 태어났다.<ref name="b">[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6/28/2013062800880.html 꿈 없던 모범생이 망가져 무섭게 변한 이유는...], 《주간조선》, 2013년 6월 28일</ref><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312&aid=0000013854 윤한 │ 피아노 치는 돌연변이], 《텐아시아》, 2012년 5월 23일</ref> 아버지가 대기업 임원이었기에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학창 시절 전교 3등 밖으로 넘어간 적이 없는 우등생이었으며, 반장, 부반장을 역임했다.<ref name="b"/><ref name="c">[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309061909293&mode=sub_view [인터뷰] 윤한, 엄친아 이상의 슈퍼유전자 "6개월 만에 버클리 합격은…"①], 《bnt뉴스》, 2013년 9월 15일</ref> 이렇게 본래 이과생으로 보수적인 집안 환경에서 부모의 기대에 따라 학업에만 열중하던 모범생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중에 TV에서 가수 [[김동률]]을 보고 감명받아 그처럼 버클리 음악 대학에 입학해 음악을 전공하기로 결심한다.<ref name="b"/> 꿈이 생긴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6개월 동안 피아노, 화성학, 토플 공부에 진력한 끝에 3학년 1학기에 버클리 음대 합격 통보를 받았다.<ref name="c"/><ref name="d">[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417&aid=0000014337 [윤한 인터뷰①] 백조의 발 같은 미워할 수 없는 ‘엄친아’], 《머니위크》, 2013년 9월 16일를 졸업하였으며, 고교 으로 [[클릭비]] 멤버 [[유호석]], [[노민혁]], 배우 [[김재욱 (배우)|김재욱]]이 있다.<ref>[https://univ20.com/18403 클릭비 오빠들이 돌아왔다], 《대학내일》, 2015년 10월 16일</ref> 졸업과 함께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스스로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여겼으나 전 세계의 수재들이 모이는 버클리 음대였기에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본인의 위치를 실감하게 되었다.<ref name="e">김유림. 2014. [http://woman.donga.com/docs/magazine/woman/2014/02/17/201402170500041/201402170500041_1.html “피아노 치는 남자 윤한이 궁금하다.”] 『여성동아』 2014년 2월호.</ref> 버클리 음대는 입학할 때 실력에 따라 1~8까지 학생의 등급을 나누는데 그는 가장 낮은 1등급을 받고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승부를 걸 수 있는 곳은 성실함이라고 판단, 대학 4년 동안 하루에 12~13시간씩 새벽 2시까지 피아노를 연습한 끝에 1에서 시작한 등급을 7등급까지 올리며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는 장학생이 되었다.<ref>김민희. 2011. [http://topclass.chosun.com/board/view.asp?tnu=201111100004&catecode=J “작사・작곡에 노래와 피아노 연주까지, 욕심이 너무 많나요?”] 『topclass』 2011년 11월호.</ref><ref name="f">[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004944 '버클리 턱걸이' 윤한,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오마이뉴스》, 2014년 6월 20일</ref> 이 시절 대학에서 덩치 큰 외국인 친구들에게 체격적으로 밀리지 않기 위해 단백질 보충제를 먹으며 운동을 한 결과 체중이 90kg까지 나가 별명이 ‘버클리 체대’이기도 했다.<ref name="e"/><ref>[http://www.jobnjoy.com/portal/joystory/star_news_view.jsp?nidx=4402&depth1=2&depth2=2&depth3=3 [스타 인터뷰] HERE COMES PRINCE CHARMING], 《캠퍼스잡앤조이》, 2013년 11월 11일</ref> 2006년 버클리 음악 대학 영화음악작곡학과를 차석으로 졸업 후 한국으로 귀국해 병역을 마쳤다.<ref>지희진. 2014. [http://mnbmagazine.joins.com/magazine/Narticle.asp?magazine=204&articleId=EZ3OUFNG5PDTWH “피아니스트 윤한의 반전.”] 『여성중앙』 2014년 3월호.</ref>
         [[분류:1983년 태어남]][[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010년 데뷔]][[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담양 전씨]][[분류:청양군 출신]][[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단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문]][[분류:버클리 음악 대학 동문]][[분류:상명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팝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재즈 피아노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재즈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경희대학교 교수]]
  • 음성직
         [[연세대학교]] 응용통계학 석사와 [[미국]] 노스웨스턴대 대학원의 도시 및 교통계획 박사과정을 나왔다. 이후 국토개발연구원의 교통연구실 선임연구위원을 거쳐 [[1994년]]부터 [[중앙일보]]의 수석전문위원 겸 논설위원으로 활동해왔다.<ref>[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509/e2005090220465948200.htm "버스-지하철 연계 시스템 만들겠다"] {{웨이백|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509/e2005090220465948200.htm |date=20151007065346 }}, 《서울경제》 [[2005년]] [[9월 2일]]</ref>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연세대학교 상경대학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노스웨스턴 대학교 동문]][[분류:인하대학교 교수]][[분류:광운대학교 교수]][[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한양대학교 교수]][[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서울시립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교통 평론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죽산 음씨]]
  • 의친왕
         | 학력 =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 학력 = 일본 [[게이오기주쿠 대학|게이오 기주쿠]] <br/> 미국 [[로노크 대학교]] <br/>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된 그는 1894년에 대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이듬해 6개국 특파 대사로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1897년]] [[대한제국]]이 창건되면서 의왕에 책봉되었으며, [[1899년]] [[미국]]에 유학하고, 이듬해 의친왕에 봉해졌다. 1905년 귀국하여 육군 부장, 적십자사 총재, 순종 황제 대리청정 등을 지냈다. [[한국 강제 병합|한국 병탄]] 이후 [[일본 제국|일제]]에 비타협하고 독립운동가들과 가까이하며, [[1919년]] [[대동단]]의 최익환 등과 연락, [[대한민국 임시 정부]]로 탈출하기 위하여 상복(喪服) 차림으로 변장하고 [[만주|만저우]] [[단둥 시|안둥 현]]에까지 갔으나, [[일본군]]에 발각되어 강제 송환되었다. 1919년 11월 상하이 망명을 도모하면서 임시정부에 밀서를 보냈다는 내용이 《독립신문》에 기록으로 남아있다.
         === 미국 유학 ===
         [[1891년]] [[12월 28일]] 의화공(義和公)에 책봉되었으며, 불과 한 달 후 [[1892년]] [[1월 28일]] 의화군(義和君)에 개봉되었고, [[1893년]] [[12월 6일]] [[김사준]]의 딸 [[덕인당 김씨|김수덕]](金修德, [[아명]](兒名)은 김숙(金淑), [[1881년]] [[12월 22일]] ~ [[1964년]] [[1월 14일]])을 아내로 맞았다. [[1894년]] [[7월]] [[내의원]]제조 겸 [[사옹원]]제조에 임명됐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보빙대사가 되어 [[일본 제국|일본]]을 방문하였다. 이듬해 6개국 특파대사(特派大使)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 등을 차례로 방문하려다가 취소하고 중도에 되돌아왔다. 그 뒤 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에 연루되었다가 일단락된 이후 일본 유학을 하여 일본의 [[게이오기주쿠 대학교|게이오 의숙]]을 거쳐 [[1899년]](광무 3년) [[미국]]으로 건너가 [[1900년]] [[미국]] 내 각지를 순행하였다.
         [[1905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대한제국 육군]] [[2성 장군|부장]]이 되었다. [[1906년]] 7월 12일 의친왕 이강은 [[대한적십자사]] 총재에 취임하였으며, 대한제국 최고의 훈장인 금척대훈장(金尺大勳章)을 수여받았다. 이후 고종의 후궁으로 귀인이 된 [[순헌황귀비]]의 견제를 받았다. 황자 서열로는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다음 서열이었으나 순헌황귀비의 견제와 [[일본]]의 영향 등으로 황태자 자리에 오르지 못하였다.
         * 미국 [[로노크 대학교]] 학사
         * 미국 [[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학사
         [[분류:의친왕]][[분류:1877년 태어남]][[분류:195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왕자]][[분류:대한제국의 황자]][[분류:대한제국의 장군|이강]][[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소장|이강]][[분류:일본의 왕공족]][[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이강]][[분류:전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이강]][[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분류:로노크 대학교 동문]][[분류:오하이오 웨슬리언 대학교 동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이강]][[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이강]][[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성락원]]
  • 이국철
         2011년 9월, [[신재민]] 전 [[대한민국의 문화체육관광부 차관|문화체육관광부 차관]]에게 그동안 수십억 원을 건넸다고 폭로했다.<ref>《시사저널》(2011.09.21),[http://www.sisapress.com/news/articleView.html?idxno=56092 <단독> “신재민 전 문화부 차관에게 수십억 원대 금품 줬다” ]</ref> 민주당 국회의원 [[박지원]]은 회장 이국철에게서 전 차관 [[신재민]]이 대선 전후 [[미국|아메리카합중국]] 출장 시 현지 법인카드를 사용한 내역을 가지고 있고 다른 여권 실세에게 돈을 주었다는 주장을 들었다고 밝혔다.<ref>《손석희의 시선집중》(2011.09.27), [http://www.imbc.com/broad/radio/fm/look/notice/?list_id=5667955 " 이국철 게이트 터지나" 박지원 민주당 전 원내대표 터뷰]</ref>
  • 이동현 (1983년 1월)
         [[2001년 한국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2001년]] 1차 지명을 받아 [[LG 트윈스]]에 입단했으나 어깨 부상과 마운드에서의 혹사 등으로 별다른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02년]] 마무리 신윤호의 부진으로 마무리로 보직이 변경되었지만 시즌 중 [[미국]]에서 복귀하여 다시 중간계투로 보직이 변경되었다. [[2004년]] 진필중의 부진으로 마무리 보직을 다시 맡아 [[LG 트윈스]]에서 마무리로 맹활약을 했으나 그 해 병역 비리에 연루되었고 행정 소송을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몇 차례의 수술로 인해 재활한 후, [[2005년]]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했으나 예전에 부상이 있었던 팔꿈치 부상이 악화되어 [[2006년]] [[6월 1일]]에 의병 소집 해제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73&aid=0000029122 두산, 6월 '보훈의 달' 행사 개최 외] - 스포츠서울</ref> 조기 소집 해제 이후 [[2007년]] 말에는 토미 존 수술까지 받았다.<ref>[http://www.mydaily.co.kr/news/read.html?newsid=200711171237492221&ext=na '4년의 공백' 이동현과 LG의 하염없는 기다림] - 마이데일리</ref> 무려 3번의 팔꿈치 수술 끝에 [[2009년]] 6월, 5년 만에 다시 1군 무대에 서게 되었고 중간계투진으로 출전하여 1승 1홀드를 기록했다. [[2010년]] 7승 3패 4세이브 15홀드로 제 자리를 다시 찾아 [[LG 트윈스]]의 핵심 셋업맨으로 활약했다. [[2013년]] 6승 3패 1세이브 25홀드를 기록하며 자신의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2015년]]에는 FA가 되었고 [[2015년]] [[11월 28일]] 3년 총액 30억원(계약금 12억원, 연봉 6억원)에 FA계약을 하여 잔류하였다.<ref>[http://sports.chosun.com/news/ntype.htm?id=201511280100318620021820&servicedate=20151128 LG 이동현 FA 30억 계약] - 스포츠조선</ref>
  • 이민호 (1987년)
         이후 2010년에는, [[MBC]] 《[[개인의 취향]]》의 가짜 게이 전진호 역으로 출연했다.<ref name="기분좋은날"/><ref name="기분좋은날"/><ref>{{뉴스 인용|출판사 =뉴스엔|제목 =‘개인의 취향’ 이민호 완벽변신 “구준표가 안보인다” |url =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003312346361001|저자=박선지|날짜 = 2010-04-01|확인날짜=2011-01-27}}</ref> 이 작품을 통해 더이상 고교생 이미지가 아닌 성숙되고 새로운 이미지로 거듭나며 [[MBC 연기대상]]에서 남자 우수상을 수상했다.<ref name="MBC">http://www.imbc.com/broad/tv/ent/event/2010mbc/winner/index.html [[MBC 연기대상]]</ref> 《개인의 취향》은 방영이 되기도 전에 아시아 각지에서 판권문의가 들어와 [[홍콩]], [[태국]] 등에 선판매 되었고, 아시아를 비롯해 [[미국]] 및 [[유럽]], [[이스라엘]], [[예멘]] 등 총 80개국에 수출되었다.<ref>{{뉴스 인용|출판사 =재경일보|제목 =개인의취향, 홍콩-태국 등 동남아서 선판매 완료.. ‘한류드라마’ 입성|url =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401/5238229.htm|날짜 =2010-04-01|확인날짜 =2011-02-25|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131113163742/http://news.jkn.co.kr/article/news20100401/5238229.htm|보존날짜 =2013-11-13|깨진링크 =예}}</ref> 또한 이민호가 드라마상에서 입었던 의상들도 완판되며, 이로써 차세대 한류 스타로 각광받기 시작했다.<ref name="ddd">{{뉴스 인용|출판사 =아츠뉴스|제목 =이민호, 해외에서도 인기 대박 행진 |url =http://www.artsnews.co.kr/news/127537|저자=김송이|날짜 = 2011-01-14|확인날짜=2011-02-25}}</ref> [[2011년]] 5월, [[SBS]] 《[[시티헌터]]》의 주연 이윤성 역을 맡았다.<ref>{{뉴스 인용|출판사 =프런티어타임스|제목 ='시티헌터', 시청률 나홀로↑…압도적 인기|url =http://www.frontiertimes.co.kr/news/news/2011/07/14/71681.html|저자=이수아|날짜 = 2011-07-14|확인날짜=2011-11-16}}</ref> 《시티헌터》는 [[중국]], [[러시아]] 등 아시아 각지에서 인기를 얻었다. 특히, [[중국]]에서 좋은반응을 얻어, 이민호는 중국의 인기 예능프로그램인 '쾌락대본영' 에 출연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출판사 =아시아투데이|제목 =이민호, 아시아 넘어 러시아에서도 인기 ″전 세계 한류의 최고봉″|url =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543831|저자=우남희|날짜 = 2011-10-20|확인날짜=2011-11-16}}</ref> 2011년 이민호는 《시티헌터》를 통해 [[코리아드라마페스티벌]] 남자 최우수상, 한류스타 특별상, [[SBS 연기대상]] 드라마스페셜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네티즌 최고 인기상, 10대 스타상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SBS]]의 퓨전사극 드라마 《[[신의 (드라마)|신의]]》에 [[김희선]]과 함께 주연으로 캐스팅되었고, 8월부터 방영되어 같은 해 10월 30일 종영했다.<ref>{{웹 인용|출판사 = [[씨네21]]|제목 = (캐스팅) 이민호·김희선 外|url = 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9543&page=1&menu=&keyword=&sdate=&edate=&reporter=|날짜 = 2012-04-09|확인날짜 = 2012-06-04}}{{깨진 링크|url=http://www.cine21.com/do/article/article/typeDispatcher?mag_id=69543&page=1&menu=&keyword=&sdate=&edate=&reporter= }}</ref> 2012년 이민호는 《[[신의]]》를 통해 [[SBS 연기대상]]에서 미니시리즈부문 남자 최우수 연기상, 10대 스타상을 수상했다. 다음해인 2013년에는 중국 싱샹대전에서 아시아 최고 인기상을 수상했다. 싱샹대전은 중국 상하이 방송이 매년 개최하는 패션어워드로 음악, 영화, 스포츠, 패션 등 각종 분야를 총망라해 인기있는 인물을 선정하는 중국의 권위있는 시상식이다.
  • 이민호(1987)
         특히 [[필리핀]]에서 이민호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어마어마한 스타라고 한다. [[필리핀]]에서는 팬미팅할 때 [[비욘세]]나 [[머라이어 캐리]]보다 더 많은 인원이 몰려든다고 할 정도.[* [[필리핀]]에서 디바형 [[미국]] 가수의 인기는 어마어마하다. 유튜브만 검색 해 봐도 남녀노소 디바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영상이 수두룩하다. 즉 이민호의 인기가 정말로 어마어마하다는 소리.]
  • 이박사(가수)
         메들리 스타로 인기를 모으던 그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음반시장을 가진 일본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굴지의 레이블인 일본 소니 관계자가 한국 남대문시장을 관광하다 우연히 그의 음악을 들었던 것. 그는 이박사의 노래에서 ‘대박’을 예감했던 모양이다.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창법에 미니멀한 연주에 동양적인 멜로디를 지닌 이 독특한 아이덴티티가 인기를 끌게 되었고, '''뭔가 싸구려같지만 새로운'''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비유를 하자면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개러지]] 록이 [[펑크]] 록으로 발전하여 [[미국]]으로 역수입된 격이랄까? 좀 더 쉽게 얘기하면, 80년대 후반에 테크노 등의 전자음악들이 치고 나오자 이탈로 디스코가 유럽에서 끝물을 뽑고 [[일본]]에서 유로비트로 발전됐다고 볼 수도 있다.
  • 이병석(정치인)
         1952년 [[경상북도]] [[포항시|영일군]]에서 태어났다. 포항 동지상업고등학교(현 [[동지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정치외교학과, 동 대학교 [[대학원]] 석사 및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이후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및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대학]] [[강사]],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 객원[[교수]] 등을 역임하였다.
  • 이상백 (1904년)
         [[1924년]] 일본의 [[일본 대학농구연맹]]을 결성하고 [[와세다 대학]] 농구팀 대표로 [[일본 대학농구연맹]]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대학농구연맹 농구부 주장으로 [[미국]]에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여러 번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밖에 축구, 야구에도 주전 선수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27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모교인 [[와세다 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그후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위원과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여 대회 유치와 준비에 협조를 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체육계의 공로자로 칭송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나 도쿄 올림픽 유치와 추진의 공로로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 이상화 (시인)
         [[1919년]] 대구에서 [[3·1 운동]] 거사를 모의하다가 모의가 발각되어 피신하였으며, [[1921년]] 잡지 [[백조]]의 동인이 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이후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다가 [[관동 대지진]]으로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 시와 소설 등 작품 활동과 평론 활동, 《개벽》, 《문예운동》, 《여명》, 《신여성》, 《[[삼천리]]》, 《[[별건곤]]》, 《조선문단》, 《[[조선지광]]》 등에 동인 활동을 하였다. 아마추어 [[권투 선수]]로서 [[대륜고등학교|교남학교]] 교사로 재직 중 [[1938년]]에는 교남학교 권투부를 창설, 지도하였다.
         ** 셋째 아들 : 이태희, [[미국]]으로 이민
  • 이서진(배우)
         중학교 시절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후, [[현역병]] 입대하여 국방부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산하 기무부대에서 군 복무를 했다고 한다. 사회 지도층의 자제들이 병역의 의무를 기피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는 것에 비하면 이서진은 의무를 성실히 실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이서진이 태어난 해는 베이비 붐 세대였기에 입영 대상이 넘쳐서, 조금이라도 몸이 안 좋거나 [[평발]]인 사람도 면제되는 등, 징병 기준도 널널하던 시기였다.
  • 이석채
         1945년 [[경상북도]] [[성주군]]에서 태어났다. [[경북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영학과, [[미국]] [[보스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경제학 [[석사]] 및 경제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이선희
         2006년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포기하고 2009년에 귀국해 14집 《사랑아...》를 발매하며 여러 방송과 행사에 출연했다. 특히 KBS의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불후의 명곡]]》에 출연하였다.
          |제목 = 이선희 한국가수 3번째 카네기홀 공연, 이서진-이승기 미국행 지원사격
         2016년에는 [[SBS]] "판타스틱 듀오"의 첫방송에 출연하여 5주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의 아이돌 가수들과 경쟁하는 모습에 "역시 이선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2016년 9월부터 2017년 3월까지 "The Great Concert LEESUNHEE" 전국 13개도시 23회 공연을 전회 매진으로 진행하였고 2017년 5월 미국 LA와 9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해외투어 공연을 열었다.
         * [[2월 3일]] 미국 뉴욕 [[카네기 홀]] 단독공연 (국내가수로는 네번째)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분류:1980년대 가수]][[분류:199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2010년대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싱어송라이터]][[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댄스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1984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정치인]][[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새한국당]][[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 당원]][[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분류:계명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계명문화대학교 교수]][[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분류:한산 이씨]][[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동문]][[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홍콩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이선희 (1964년)
         2006년 돌연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2009년에 귀국해 14집 《사랑아...》를 발매하며 여러 방송과 행사에 출연했다. 특히 KBS의 《[[불후의 명곡 - 전설을 노래하다|불후의 명곡]]》에 출연하였다.
          |제목 = 이선희 한국가수 3번째 카네기홀 공연, 이서진-이승기 미국행 지원사격
         2016년에는 sbs"판타스틱듀오"의 첫방송에 출연하여 5주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의 아이돌 가수들과 경쟁하는 모습에 "역시 이선희"라는 찬사가 쏟아졌다. 2016년 9월부터 2017년 3월까지 "The Great Concert LEESUNHEE" 전국 13개도시 23회 공연을 전회 매진으로 진행하였고 2017년 5월 미국 LA와 9월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해외투어 공연을 열었다.
         * [[2월 3일]] 미국 뉴욕 [[카네기 홀]] 단독공연 (국내가수로는 네번째)
         [[분류:계명문화대학교 교수]][[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정일권]][[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정치인]][[분류:유수호]][[분류:새한국당]][[분류:조순]][[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1년) 당원]][[분류:제정구]][[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95년) 당원]][[분류:김대중]][[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연출가]][[분류:중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일본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홍콩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여성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84년 데뷔]][[분류:201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1990년대 가수]][[분류:1980년대 가수]][[분류:스타 오디션 위대한 탄생]][[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싱어송라이터]]
  • 이수영
         이수영이 [[팬텀 엔터테인먼트 그룹|팬텀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이 만료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 언론들은 그녀의 행보에 주목했다. 이수영은 ‘톡톡콘서트’가 있다는 사실을 공연 3일 전에 알게 되었다. 그 전까지 이수영은 [[미국]]으로 떠나 친구 [[박경림]]과 생활하던 중이어서 준비 한번 된 적 없는 공연이 제대로 되었을 리 없었다. 반주는 모두 MR을 사용했고 노래 또한 5곡만 불렀으며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공연 마지막에 이수영은 이 공연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하면서 이 공연이 [[팬텀 엔터테인먼트 그룹|팬텀엔터테인먼트]]와의 마지막 일이라고 밝혔다. [[팬텀 엔터테인먼트 그룹|팬텀엔터테인먼트]]는 이수영이 미국에 있을 때 그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스페셜 앨범 《[[As Time Goes By (이수영의 음반)|As Time Goes By]]》를 발매했다. 첫 번째 싱글은 〈꽃들은 지고〉였으며, 계약이 끝난 상황에서도 이수영이란 이름과 음원들에 대한 소유권을 가진 소속사 측에서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였다. [[2005년]] 4월까지 휴식을 취한 이수영은 [[4월 22일]] [[리쿠드엔터테인먼트]]와 3년간 정규 앨범 3장, 비정규 앨범 2장 발매의 조건으로 계약을 체결한다. 이수영의 새 소속사 후보로는 [[신나라레코드]]와 [[리쿠드엔터테인먼트]]가 물망에 떠올랐는데 이수영은 신생기획사인 [[리쿠드엔터테인먼트]]를 택했다. 그곳은 직원 전원이 개신교 신자로서 그 점이 그 곳을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후에 밝혔다. 계약 체결 후 미국으로 떠났는데 그곳에서 한인 축제 행사 등에 참여한 뒤 이수영은 보컬 트레이닝에 임했다. 미국 보컬 트레이너는 이수영에게 "당신은 흑인이 아니라서 절대 흑인의 목소리를 낼 수 없다"며 창법이나 음색을 바꾸려 하지 말고 더욱 발전 시킬 것을 조언했다. 한 달여 간의 트레이닝을 마친 이수영은 국내로 귀국하여 팬들과 만남을 계획하여 [[2005년]] [[7월 30일]], [[경기도]] [[안성시]]에서 이수영은 데뷔 후 처음으로 팬들과 팬미팅 겸 [[야영|캠프]] 행사를 가졌다. 이 날 이수영은 팬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토해내며 마지막으로 [[팬텀엔터테인먼트]]에서 추가로 발매할 3장의 앨범에 대해 언급하며 그것은 자신의 앨범이 아니며 꼭 7집만을 사랑해 달라며 부탁했다. 10월에 발매 예정이어었던 7집이 이듬 해로 연기되면서 이수영은 또 다시 약 6개월간의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다.
  • 이순재(1935년 10월)
         그리고 [[대한민국]] 괴수물 <[[용가리#s-1|대괴수 용가리]]>([[심형래]] 괴작이 아니라 판문점에서 솟아난 원조)에서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1967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국내는 물론이고, 해외의 괴수물 매니아들에게도 컬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높게 평가받고 있는 작품이다.[* 해외에서 인기를 끌면서 여러 나라에 각 나라의 더빙판이 수출되기도 했다. 아이러니한것은 [[대한민국]]에는 손상된 판본뿐이고, 오히려 [[미국]] 더빙판이 더 온전하다는 것. 2013년 7월 21일 EBS에서 HD 리마스터링된 [[미국]] 더빙판을 방영했다.]
         [[꽃보다 할배]]에선 유럽을 누비는 와중에 남다른 시사상식을 뽐냈고 [[라디오 스타]]에서 [[조지 워싱턴]] 대통령부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까지의 [[역대 미국 대통령]]들을 막힘없이 술술 말하는 장면은 여러모로 진행자와 게스트들 할것 없이 모두를 놀라게 했다.[* 여담이지만 이순재의 출생 당시 미국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이다.]
  • 이승학 (야구감독)
         [[1998년]] 연고 팀 [[롯데 자이언츠]]의 고졸 우선 지명을 받았으나 [[단국대학교]] 재학 중 [[2001년]]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팀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다. [[미국]] 무대에서는 싱글A, 더블A, 트리플A를 오갔지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는 오르지 못했다. [[2006년]]까지 [[미국]]에서 활동한 후, [[2007년]] 4월 [[해외진출선수 특별지명회의|해외파 특별 지명]]에서 [[두산 베어스]]의 지명을 받아 입단하였다. [[2007년]] [[6월 9일]] [[삼성 라이온즈|삼성]]전에서 구원 등판하여, 9회 초 [[양준혁]]을 상대로 [[양준혁]]의 통산 2000번째 안타를 맞는 주인공이 되었다. 고질적인 허리 질환을 앓고 있어서 병역이 면제<ref>[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8290027 '허리 수술' 이승학, 몸 만들기 돌입…치료 병행]{{깨진 링크|url=http://osen.freechal.com/news/view.asp?code=G0908290027 }} - OSEN</ref> 되었으며 국내 U턴 이후 중간계투진에서 준수한 성적을 보여 주었으나, 결국 허리가 발목을 잡으면서 [[2009년]]에는 허리 수술까지 했지만 단 1경기에 나서지 못한 채 [[두산 베어스]]에서 방출당했다.<ref>[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44&article_id=0000102762 이승학, 두산에서 방출] - 스포츠칸</ref>
  • 이승환 (가수)
         개인 레이블을 운영하고 있는 뮤지션으로, [[2010년|2015년]] 기준으로 정규 음반을 11집까지 발표하였다. 1000회가 넘는 단독 공연 횟수에서 드러나듯, TV보다는 공연에 비중을 두고 있다.<ref>[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298277 이승환, "''팬들을 위한 선물과 같은 앨범이죠''". (인터뷰)] 아시아투데이. 2009년 11월 9일 확인.</ref> 더불어 대한민국 최초로 앨범과 콘서트에 개별 타이틀을 작성했다. 또한 이승환은 2007년 4월 6~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패서디나 시빅 오디토리움(Pasadena Civic Auditorium)에서 단독 콘서트를 열었다.<ref>[http://www.esportsi.com/bbs/view.php?id=song01&page=2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55&PHPSESSID=95aa04971c0d6a65fe4cc0ff784dffdc ''라이브의 황제 이승환, 미국 LA에서 최고의 단독 공연 선보여...'']</ref>
  • 이아현
         '''이아현'''(李雅賢, [[1972년]] [[4월 13일]] ~ )은 [[대한민국]]의 [[배우]]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1학년에서 대학교 2학년 시절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냈다.
         [[분류:197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인천광역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1993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연세대학교 음악대학 동문]][[분류:세종대학교 공연예술대학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이열희 (1924년)
         [[미국]] 제25육군병원에서 [[하버드 대학]] 출신인 [[치과]]전문의 [[마틴 D. 해치]](Martin D. Hatch) 박사의 지도 하에 악안면 [[성형외과]]를 수학하였다. 이후 그는 육군 제1병원에 근무하였으며, 제1병원 재직 중 악안면성형 및 구강외과를 창설했다. 당시엔 전쟁 당시 발생한 부상이나 상처 등으로 턱, 안면 등에 변형이 생긴 환자들이 있었다. 그의 성실성을 높이 평가한 [[마틴 D. 해치]]는 [[한국]]을 떠나기 전 그에게 수술할 때 사용했던 소수술기구와 성형외과학서적 5권을 그에게 특별히 선물해주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53년]] [[경북대학교]] 의과 대학 치의학과를 졸업하였다.
         [[1954년]] 군의관으로 재직 중 최영보 중령(국군제1병원 외과부장겸 수련부장), 오상근 대위(국군제1병원 정형외과 과장), 허경발 대위(주한미군의무관실 연락장교) 등의 주선과 도움으로 [[미국]]으로 유학, [[한국]]의 치과 군의관 신분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의 [[성형외과]] 수련 과정을 이수하고 귀국하였다.
  • 이영숙 (가수)
         동생인 이영일([[미국]] 거주)과 '추억의 푸른 언덕', '파란마음 하얀마음' 등을 부르며 '남매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이후 기독교에 귀의했고 사단법인 '한국 은빛 소망회'를 설립, 운영하면서 봉사활동에 매진하던 중 자신이 다니던 교회 목사의 소개로 '범서방파' 두목 김태촌을 만나 2년 간 편지를 주고 받다가 [[1998년]] 청송교도소에서 그와 결혼했다. [[2000년]]경 [[자궁경부암]]이 생겨 암 투병생활을 하기 시작했고 [[2013년]] 1월에는 남편 김태촌과 사별했다. [[2016년]] 2년 전에 재발한 암으로 인해 건강이 악화되었고 [[2016년]] [[11월 17일]] 오후 11시 45분 향년 68세(만 67세)로 사망했다.
  • 이용 (가수)
         * [[1989년]] [[미국]] [[내슈빌]] 국제가요제
         *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대표곡 《[[미스테리 걸]]》 금상
         * [[1985년]] [[미국 LA 가요제]] 금상
         [[분류:195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전라북도 출신]][[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1980년대 가수]][[분류:199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2010년대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검정고시 통과자]][[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자서전 작가]][[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네덜란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이장희 (1947년)
         [[경기도]] [[오산시]] 부산동 (동부대로) (지금의 [[오산시]] 부산동 (동부대로))에서 태어났다를 졸업하고 생물학과에 입학했으나 중퇴한 후 [[1971년]]에 DJ [[이종환 (방송인)|이종환]]의 권유로 가수로 데뷔했다. 대표곡은 《겨울 이야기》,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자정이 훨씬 넘었네》, 《슬픔이여 안녕》 등이 있다. [[1976년]]에 [[대마초]] 혐의로 구속된 후 잠시 음악 활동을 중단하다가 [[1978년]] [[반도패션]]이라는 옷가게를 경영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사랑과 평화]], [[김태화]] 등의 가수들을 프로듀싱하기도 했으며, [[1982년]]에는 [[미국]]에서 음반을 발표하기도 했다. [[1988년]]에는 [[미국]]에서 귀국해 콘서트를 열기도 했으며, 정규 음반을 발표했고 [[1989년]]에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방송국인 [[라디오코리아]]를 설립하여 [[2003년]] 12월까지 사장직을 맡았다.
         * 前 [[미국]] [[로스앤젤레스|LA]] [[라디오코리아|라디오 코리아]] 사장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오산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포크 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타 연주자]][[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
  • 이지모
         ==미국 프로야구 시절==
         이후 현재 이름으로 개명하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LA 다저스]] 산하 마이너 리그 팀에서 잠시 활동했지만,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싱글 A]]에 머무르고 귀국했다.
  • 이지아(배우)
         || '''본명''' ||<(> 김지아,[* 여러 번의 개명을 거친 이름이라고 한다.] 개명 전 이름 김상은[* 조부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김순흥이다.][* 미국에서 Shea Lee(시아 리, 셰이 리,[* 외래어 발음규칙에 따른 정확한 발음] 세아 리)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 ||
         신문에서 나온 이야기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93년 미국 공연에서 이지아의 언니 소개로 인해 두 사람은 처음 서로를 알게 되었고, 그 후 편지를 주고 받다가 96년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후 미국으로 건너 간 서태지는 이지아와 재회하고 97년 결혼. 당시 혼인신고에서는 서태지의 본명인 정현철과, 이지아의 본명이었던 김상은으로 나와 있었다. [[서태지]]와 부부로 산지가 2년 7개월, 이후 별거에 들어갔다. 2000년에 서태지 복귀 후 2006년에 이지아 측에서 홀로 이혼소장을 캘리포니아 법원에 냈다.. 그러므로 2011년에 낸 소송은 이혼소송이 아니라 위자료 청구소송.
         2011년에 했던 소송은 이혼소송이 아닌 위자료 및 재산 분할소송으로 이지아는 국내법에 따라 2009년 이혼 성립을 주장, 서태지는 미국법에 따라 2006년 이혼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지아측 발표에 따르면, 이지아가 만 15세 때(1993년) 팬과 스타의 만남으로 서태지와 만난 인연을 가지고 있었으며 서태지가 은퇴 후 미국으로 건너갔을 때 미국에서 서태지를 만나 친언니의 증인참석으로 결혼에 골인한다. 어쨌든 그녀와 연관성이 짙은 남자만 해도 [[서태지|한국 굴지의 대중 뮤지션]], [[배용준|전설적인 한류 탤런트이자 사업가]], [[정우성|연예계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미남 배우]]이다.
         [[미국]]에서 시나리오 작가로 [[http://m.news.naver.com/read.nhn?sid1=106&oid=108&aid=0002318291|데뷔할 예정이었으나]] 최근에 미국 현지 사정으로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241&aid=0002698061|무산되었다고 한다.]]
  • 이진훈(기초단체장)
         1956년 [[경상북도]] [[상주시|상주군]] 에서 태어났다. 팔음초등학교, 상주화동중학교, [[동성고등학교|서울동성고등학교]], [[충남대학교]] 행정학과,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미국]] [[마이애미 대학교]] 경영대학원 행정학 석사, [[계명대학교]] 일반대학원 이학(환경) [[박사]] 과정을 졸업, 수료하였다.
  • 이채연 (1861년)
         ===생애 초기 및 미국에서의 생활===
         이채연은 1861년 [[경상북도]] [[칠곡군|칠곡]]에서 통사랑(通仕郞) 선공감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 이이봉(李以鳳)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7년 번역관의 직책을 가지고 미국에 첫발을 내딧고 이듬해에 서기관이 되었다. 초대주미공사관의 관원은 전권공사 박정양, 참찬관 이완용, 번역관 이채연, 서기관 이하영, 이상재, 수행원 2명,무관 1명, 하인 2명 등 모두 10명이었고, 여기에 미국의 의사 알렌이 외국인 참찬관 자격으로 동행했으며, 박정양 일행보다 두 달 일찍 출발했다. 막상 이들 가운데 영어를 조금 할 수 있는 사람은 이완용, 이하영, 이채연 3명뿐이었다.<ref> 박성래 <韓國近代의 西洋語通譯史(2)1883년부터 1886년까지> 《국제지역연구》제7권 제1호, 2003, 353쪽. </ref> [[이완용]]에 이어 대리공사로 재직하던 중, [[미국]], [[워싱턴 D.C.]]에서 미국에서 태어난 첫 번째 한국인인 아들을 낳았다.<ref> The New York Times, October 13 1890. </ref> 워싱턴에서 태어난 그들의 첫 아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아들의 이름을 Ye Washon으로 지었지만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아들을 잃었다.<ref> The Baltimore Sun, December 25 1890. </ref>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Chicago World's Columbian Exposition에서 한국관을 개설하고 총책임을 맡았다.<ref> Chicago Daily Tribune, May 2 1893. </ref> 이후 미국에서의 공식적인 모든 일정을 마치고 1893년 조선으로 귀국하여 고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미국에서의 모든 임무를 끝마쳤다.<ref> The Washington Post, September 16 1893. </ref>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황실의 단독 출자를 바탕으로 친미개화파 관료가 중심이 되어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도입해 설립한 최초의 전력 기업이다. 1893년 주미 대리공사 이채연이 미국 국무장관 Walter Q. Gresham과 만나 전기철도 부설에 대한 논의가 시발점으로, 1896년에 들어서 미국인 기업가 Henry Collbran과 서울에 전차 부설에 대해서도 협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와 친러파 진영의 방해로 회사 설립이 지연되었지만, 이채연의 대리인인 이근배와 김두승의 한성전기회사 설립 청원으로 결국 1898년 1월 26일 한성전기회사 설립이 허가되었다. 한성전기의 설립은 이 시기 광무정권의 산업진흥정책과 깊은 관련이 있다. 특히 광무황제는 1880년대부터 전력산업에 지속적으로 깊은 관심을 가져 왔고,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에는 청량리에 소재한 홍릉까지 가는 편리한 교통수단을 갖기를 희망해왔었다. 전차 부설 구상은 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f> Allen to the Secretary of State, “Proposed electric trolley street railway in Seoul", 1898.2.15,Despatch No.73, Diplomatic. </ref> 서울에 전차, 전등, 전화 부설에 대해서 각각 10만원씩 합계 10만원으로 시작하였으며, 이 해 2월 이채연이 한성전기회사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전차 노선으로는 서대문-종로-동대문-청량리(본선), 종로-남대문-용산(용산선), 서대문-남대문(의주선)에 대하여 1898년 9월 15일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5월 4일 본선이 개통되었고 이해 12월 20일 용산선이 개통되었다. 마지막으로는 1890년 7월 6일 의주선이 개통되었다. 하지만 개통후 공사를 관장한 콜브란측에 공사대금 지불 못해 한성전기회사의 설립과 경영과정에 깊게 관여한 콜브란 회사가 경영권을 장악하게 되었다.<ref name="한성전기회사">오진석 <1898~1904년 한성전기회사의 설립과 경영변동> 《동방학지》139집, 2007, 175~239쪽. </ref> 이후 이들은 사업 확장을 진행해 나갔다. 이러한 사업 확장을 지원한 자로는 이채연을 포함하여 미국공사 알렌과 서기관 출신으로 궁내부고문에 임명된 샌즈(William F. Sands)의 열렬한 지원, 그리고 이윤용, 민영환, 민상호, 강석호 등 한국내 친미파 관료의 적극적인 후원이 자리하고 있었다.<ref> 김현숙, <대한제국기 미국관료지식인의 한국 인식-궁내부 고문관 샌즈(W. F.Sands)를 중심으로>, 《역사와 현실》 2005, 58쪽. </ref> 1904년 7월 한미합작회사가 되었으며, 1909년 콜브란이 일본 회사에 매도함으로써 회사는 완전히 소멸되었다.<ref>[http://100.naver.com/100.nhn?docid=702098{{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702098 }}]{{깨진 링크|url=http://100.naver.com/100.nhn?docid=702098%7B%7B%EA%B9%A8%EC%A7%84 }}, <<네이버 백과사전 한성전기회사>></ref>
         이채연은 미국에서도 매우 신사적으로 행동했다고 알려져 있다.<ref> Chicago Daily Tribune, April 25 1888. </ref> 또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에 의하면 한성판윤으로 재직하던 중에는 권위적이고 똑똑한 우두머리였다고 알려져 있다.<ref>Isabella Bird Bishop, KOREA and Her Neighbors, 1897. </ref> 외국인들을 대할 때도 예를 갖추어서 대했다. 1896년 말, 철도 회사와 광산 회사의 사람들을 대접할 때, 서양의 접대 절차에 따라서 격식있게 예를 갖추어 대하였다.<ref> 독립신문, 1896. 12. 26. </ref>
         미국에서 대리공사로 재직하던 중, 조선의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피로연을 [[워싱턴 D.C.]]에서 열게 되었다. 이 때, 미국의 상원 의원 Frye, Davis와 차관보 Mr.Quiney, Walker 제독 및 멕시코, 영국, 일본, 독일, [[니카라과]]의 공사들이 참여하는 등 국외에서도 많은 인맥을 소유하였다.<ref> The New York Times, March 26, 1893. </ref>
  • 이현우 (가수)
         '''이현우'''(李鉉雨, [[1966년]] [[3월 6일]] ~ )는 [[미국]]의 [[가수]]이자, [[작사가]], [[작곡가]]이며, [[사회자|방송인]], [[영화배우]], [[연기자]], [[뮤지컬 배우]]이다. [[미국]] 국적 소유자이므로 군에 입대하지 않았다.
         그는 중학교 시절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그 후 1988년 [[미국]] [[뉴욕주]] [[뉴욕 시티]]의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록 음악]] [[가수]]로 첫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1989년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대한민국]]에 잠깐 놀러 왔다가 당시 [[가수]] [[강수지]]의 소속사 매니저의 소개를 받고 1990년 10월에 실험적인 [[테크노 팝|테크노]] [[댄스 팝]] [[대중음악|음악]] 장르 곡인 데뷔곡 《꿈》이 수록된 《12 Inch Dance Version》이라는 싱글 [[음반]]으로 첫 데뷔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91년 1집 [[음반]] 《Black Rainbow》로 정식 데뷔하였다.
         * [[미국]] [[워싱턴 D.C.]] 위트 고등학교 졸업
         * [[미국]] [[로스앤젤레스]] [[:en:Otis College of Art and Design|오티스 미술디자인대학교]] 중퇴
         * [[미국]] [[뉴욕]] [[파슨스 디자인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 학사
         1993년 1월 13일 자신이 알던 한 팬과 대마초를 흡연한 혐의로 검찰에 구속됐다. 이후 2월 1일 보석으로 석방됐으나, 그 해 3월 [[MBC]], [[서울방송|SBS]], [[KBS]]로부터 방송 출연 정지 조치를 받고 [[미국]]에 건너갔다가 11월에 방송 복귀했다.
         [[분류:196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1988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라디오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20세기 미국 사람]][[분류:21세기 미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미술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모델]][[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분류:미국의 개신교도]][[분류:파슨스 디자인 스쿨 동문]][[분류:경원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한국계 미국인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마약범]][[분류: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이라크 전쟁 반전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범죄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 이현재(1988)
         그룹 [[메이트]]의 드러머로 데뷔하여 지금은 [[중국]]에서 완전히 [[배우]]로서 활동하는 중. 친할아버지가 [[미국]] 출신의 [[백인]]이기 때문에 1/4 [[쿼터]] [[혼혈]]이다. [[라디오 스타]]에서 본인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미국]]에는 한번도 가본 적이 없고, [[영어]]도 할줄 모른다고 말하였다. [[경기도]] [[이천]] 출신이다. 메이트 시절 드러머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각각 작곡, 편곡과 보컬까지 맡았던 [[정준일]], [[임헌일]]에 비하면 곡을 쓰거나 편곡에 참여하는 등의 활동은 하지 않았다.~~얼굴마담?~~
         [[분류:198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드럼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2009년 데뷔]][[분류:이천시 출신 인물]][[분류:백제예술대학교 동문]][[분류:미국계 한국인]]
  • 이황
         [[1592년]](선조 25년)부터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경상북도|경상도]] 지역의 서적과 도공 등이 상당수 약탈당했는데, 이때 이황의 저서가 상당수 약탈당하였다. [[경상북도]]의 해안가를 통해 유출된 이황의 서적, 서한들은 후일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18세기 [[미국]]에 의해 서구 문물이 강제로 유입되기 전까지 [[일본]]에는 [[조선]]에서 전래된 이황 계열의 성리학이 [[막부]] 세력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유행하였다.
  • 이후락(전 국회의원)
         1924년 2월 [[경상남도]] 울산군(지금의 [[울산광역시]]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1943년 울산농업고등학교 졸업 후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육군]]에 입대, [[육군]] [[하사관]]까지 이르렀다가 해방 이후 귀국, 1945년 12월 [[군사영어학교]] 1기생으로 입교하여 이듬해 3월 [[국방경비대]]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9년 [[남로당]] 사건으로 파면당한 [[박정희]]의 후임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이 되었다.[* 이 시기에 [[박정희]]의 어머니 [[백남의]]가 사망했다.][* [[박정희]]는 이 때 이후락의 밑에서 문관으로 있었고 그 시절에 훗날 자신의 조카사위가 되는 [[김종필]]과 처음으로 만나게 된다.] 1952년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수료, 1957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였다. 1958년 [[대한민국 국방부|국방부]]에서 만들어진 79 부대라는 정보기관의 수장이 되어[* 당시 이후락 자신의 군번이 79번이여서 이름을 79 부대라고 지은 것이다.] [[라오스]]에 잠입하여 밀파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 나라의 공산화를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961년 [[육군]] [[소장(계급)|소장]]으로 예편하여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장면]] 총리에 의해, [[장면]] 내각이 만들어준 [[정보기관]]인 총리실 산하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연구실장으로 임명되었다.
         [[5.16 군사정변]] 직후 [[박정희]]의 [[남로당]] 입당 전력을 미국대사관에 밀고(?)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뛰어난 영어 실력과 중앙정보연구위 연구실장 경력 덕분에 곧 석방되어 민간인 신분으로 쿠데타 세력에 가담하였다. [[제갈량|제갈공명]]과 [[조조]]를 합친 "'''제갈조조'''"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박정희]]의 책사가 되었다. [[국가재건최고회의]] 공보실장을 거쳐 1963년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되자 [[대통령비서실장]]이 되었다. 허나 이후락을 좋게 보지 않는 쪽에선 제갈조조는 커녕 [[조조]]만도 못하다고 깐다. 사실 이후락은 독재 권력을 유지하는 방면으로 영민했던 사람이다. 이 시기 글자 그대로 브레인이라면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오원철]] 경제 제2수석비서관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이후락의 기대와는 달리 [[박정희]]의 정적인 [[김대중]]을 납치한 [[김대중 납치사건]]이 [[대한민국]] [[중앙정보부]]가 주도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국내 여론은 물론 사건 발생 장소인 [[일본]]을 비롯한 국제 관계까지 험악해지자 그해 12월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되었다. 1998년 미국 국가안보기록보관소는 '1973년 비밀 외교문서'라는 자료를 통해 이후락이 [[김대중 납치사건]]을 주도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일본 대사인 권철현이 [[김대중]]을 납치한 후에 각하의 재가를 받은 것이 확실하냐고 물었을 때 침묵으로 일관하며 자신이 독단적으로 주도했음을 암시했다. 근데 후에 이후락은 회고에서 자신이 주도했다고 주장했다가 다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는 등 모순되는 증언을 많이 하여 역사학자들을 골때리게 만들었다. 한편 1980년 친구 [[최영근(1922)|최영근]] 전 신민당 의원에게 "1973년 [[박정희]]가 [[김대중]]을 죽이라고 지시했으나 자신은 곤혹스러워 계속 미뤘었고 [[김종필]]과도 이야기가 다 되었다며 [[박정희]]가 재촉하자 실행했다"라고 말하였다.
  • 임수정(탤런트)
         2007년 잠시 활동을 접겠다고 선언했다.[* 이걸 한 기자가 과대해석하여 '임수정 연예계 은퇴선언'으로 기사를 올렸다.] 2007년 12월경부터 [[미국]] [[뉴욕]]에서 목격되기 시작했다. [[2008년]] 1월 중순에서야 뉴욕대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게 보도가 되었다. 유학생들의 목격담으로는 스타의식을 티내지 않고 ~~옷을 불쌍하게 입었다는 말도 있었다.(...)~~ 평범하게 [[도서관]] 같은 곳에서 돌아다녔다고. 심지어 중국인 유학생의 목격담도 있었다. 그런데 찍힌 [[사진]]이 없다.
         묘하게도 공유와 같이 2010년 김종욱찾기를 같이 촬영했다. 연예가중계에서 영화의 제작보고회에서 공유와 같이 인터뷰를 했는데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자 시간에 맡긴다고 말했다. 2011년 10월, 뜬금없이 미국에서 두 사람이 결혼을 했다는 루머가 [[SNS]]를 통해 퍼져나갔다. 당연히 아니라는 보도자료가 나왔다. 애초에 이게 말이 안 되는게, 그 결혼했다는 날짜에 임수정이 콘서트 구경하러 간 걸 봤다는 얘기가 SNS에서 나왔기 때문.(...)
  • 임장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1994년]] [[한국방송]]에 공채 20기 기자로 입사하여 경제부, 국제부, 탐사보도부 등을 거쳤으며 [[2003년]] [[6월 6일]]부터 [[2003년]] [[11월 2일]]까지 [[경제전망대]]를, [[2003년]] [[11월 8일]]부터 [[2009년]] [[4월 19일]]까지 주말 [[KBS 뉴스 9]]를, [[2009년]] [[4월 20일]]부터 [[2010년]] [[3월 12일]]까지 [[KBS 뉴스 12]] 를 각각 진행하였다. [[2006년]] [[독일월드컵]]때에는 [[독일]]현지에서 앵커를 진행하였으며, [[2010년]] [[7월 1일]]부터 [[2013년]] [[6월 30일]]까지 [[미국]] [[뉴욕]]특파원으로 파견되기도 하였다.
  • 임지호
         *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사찰 음식 퍼포먼스
  • 장건상(독립운동가)
         1882년 [[경상도]] [[칠곡군|칠곡 도호부]]에서 태어났다. 이후 집이 경상도 [[동래]]부로 이전하면서 [[부산광역시|동래부]]에서 자랐다. 좌천재에서 한문을, 육영재에서 신학문을 배웠다. 이후 공립 영어 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가 일제의 민족 차별에 반발하여 자퇴하였다. 이후 [[미국]] 발프레이조 예비 학교, [[인디애나 대학교|인디애나 주립 대학교]]를 졸업하였다..
  • 장민호 (1962년)
         * [[1982년]]~[[1989년]]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입학 및 졸업, 미군의 그라나다 침공 반대 시위로 투옥되었다는 설이 있음.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간첩 사건]][[분류:대한민국의 학생 운동]][[분류:반전 운동]][[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국통일상 수상자]]
  • 장발 (화가)
          | 사망지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
         우석 장발은 [[1901년]] [[4월 3일]] [[한성부]] [[종로구|종로]] 친척 집에서 인천세관의 관리 [[장기빈]]과 그의 부인이었던 황루시아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후 [[인천광역시|인천]]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형은 후일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역임하는 [[장면]](張勉)이다. [[인천광역시|인천]]의 개화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초명은 지완(志完)이라 했다가 뒤에 발(勃)로 개명하였다. [[1920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뒤, [[1922년]]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수학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에 미술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학장에 취임했으며, [[1961년]]까지 재직하면서 대한민국 미술계와 미술 교육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제2공화국]] 총리를 지낸 형 장면이 [[5·16 군사 정변]]으로 실각한 뒤에는 미국에 머무르면서 여생을 보냈다.
         [[2001년]] [[4월 8일]] 오전 4시(한국시각 오후 6시) 미국 피츠버그 자택에서 10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0064927 100세 화가 장발씨 타계(1보)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미학과 학사
         [[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예술원 회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장면]][[분류:윤보선]][[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인동 장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보스턴 대학교 교수]][[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일제 강점기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인천박문초등학교 동문]][[분류:보성고등학교 (서울) 동문]][[분류:컬럼비아 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평화민주당 (1987년)]][[분류:대한민국의 백세인]][[분류:유교 이탈자]][[분류:이탈리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미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장윤정 (미스코리아)
         1987년 18살의 나이로 [[미스코리아]] 진으로 뽑힌 후 1988년 [[미스 유니버스]] 2위에 오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1990년대 각종 방송 프로그램의 MC로 활약하다 1999년 모든 방송 활동을 접고 연예계를 떠났고, [[미국]]으로 건너가 두 딸을 키우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내다가 16년 만인 2016년 영화 《[[트릭 (2016년 영화)|트릭]]》에 출연하며 연기 활동을 재개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382&aid=0000482667 ‘87년 전설의 미스코리아’ 장윤정, 잠정 은퇴 후 16년 만에 영화 ‘트릭’으로 돌아오다] 스포츠동아. 2016년 06월 22일</ref>
         1994년 은행원과 [[결혼]]했지만 3년만에 [[이혼]]하였고, 그 후 2000년대 초반 [[미국]]에서 15살 연상의 [[재미교포]] [[사업가]] 김상훈과 [[재혼]]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22&aid=0002976972 미스코리아 장윤정 15년만 영화 '트릭' 으로복귀] 세계일보. 2015년 12월 17일</ref> 장윤정은 2016년 9월 27일 [[TV조선]]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사업으로 미국을 자주 왕래하는 남편이 미국에 가자고하여 미국에서 살게 되었고 살다보니까 10년 정도 거주를 하게 됐다"고 미국에서 오래 살았던 이유를 밝혔다. 그리고 "이 남자가 언제까지 나한테 못되게 구나 두고보자라는 생각으로 오기로 결혼을 했다”라며 무뚝뚝한 남편과 결혼한 이유에 대해 밝히기도 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1&aid=0002891291 미스코리아 장윤정 “15살 연상 남편 김상훈, 나한테 무심해 매력 느꼈다”] 서울경제. 2016년 09월 28일</ref>
  • 장익 (1933년)
         [[1956년]] 미국 메리놀신학교로 편입한 그는 그곳에서 [[인문학]]과 [[철학]] 학사를 취득하였고 [[1959년]]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3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형 : 장건 (張建, [[1932년]] [[2월 26일]] ~ , 미국 거주)
         ** 동생 : [[장순]] (張純, [[1935년]] [[10월 17일]] ~ , [[미국]] 보스턴 리지스대학교 정치학 교수, [[미국]] 거주)
         ** 누나 : 장의숙 (張義淑, 베네딕타, [[1930년]] [[2월 21일]] ~ 로마 가톨릭 수녀, [[미국]] 거주)
         ** 여동생 : 장명자 (張明子, 데레사, [[1941년]] [[10월 3일]] ~ [[198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빌라노바대학교]] 도서관학 석사)
  • 장진영 (배우)
         그러던 중 장진영은 한 성형외과 원장에게 암을 100% 완치시킬 수 있는 병원이 있다는 말을 듣고, 항암제와 약을 중단하고 2009년 6월 26일 출국해 [[미국]]을 거쳐 [[멕시코]] [[티후아나]]에 있는 병원에 가서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소식을 들은 서울대병원의 담당 의사는 잘못된 치료라고 반대하였으나, 그녀는 부작용으로 배꼽이 납작해질 정도로 배가 불러오고 심한 설사가 계속됨에도 나을 수 있다고 믿으며 2주에 걸쳐 끝까지 치료를 받았다.<ref>김영균,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225-226쪽.</ref><ref>김영균,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241-249쪽.</ref> 방사선 치료를 마친 후 장진영의 몸무게는 10kg이 빠져 있었다.<ref>김영균,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247쪽.</ref> 이후 미국에서 요양하며 7월 26일 [[라스베이거스]]에서 김영균과 결혼식을 올렸다.<ref>김영균,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252-257쪽.</ref> 장진영은 멕시코에 오기 전 이미 한국에서 김영균에게 청혼을 받은 바 있었다.<ref>김영균,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234쪽.</ref>{{#tag:ref|장진영은 자신의 생일인 2009년 6월 14일 김영균에게 청혼을 받았다. 김영균은 장진영이 사망하기 4일 전인 2009년 8월 28일 성북구청에서 혼인신고를 하였다. 그들의 결혼 사실은 장진영의 사망 직후 언론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http://sports.khan.co.kr/news/sk_index.html?cat=view&art_id=200909020300026 출처]).|group=주}} 결혼식 후 심한 허리통증으로 7월 31일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검사를 한 결과 암은 이미 척추뼈까지 전이가 진행된 상태였다. 장진영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항암치료도 받을 수 없는 상태였고, 진통제로 통증을 경감시키는 수밖에 없었다.<ref>김영균,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267-268쪽.</ref> 이후 상태는 계속 악화되어 8월 31일 [[강남성모병원]]으로 옮겨 [[호스피스]] 치료를 받다가 결국 2009년 9월 1일 오후 4시 3분에 별세했다.<ref>김영균,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285-289쪽.</ref><ref>{{뉴스 인용 |제목 = 장진영, 1일 오후 4시3분 사망..병원 공식발표(2보)|url =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9090116271055166|출판사 = 스타뉴스|저자 = 전형화|날짜 = 2009-09-01|확인날짜 = 2014-09-26}}</ref>{{#tag:ref|김영균은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 288쪽에서 장진영의 사망시각을 2009년 9월 1일 오후 4시 정각으로 쓰고 있다.|group=주}}
         한편 남편인 김영균은 2009년 12월 장진영과의 만남과 투병 생활, 결혼 등을 다룬 책 《그녀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을 출간했다.<ref>{{뉴스 인용|제목 = 장진영 남편 “진영이와의 추억 잃기 싫었다”|url = http://news.donga.com/3//20091218/24890198/1|출판사 = 동아일보|저자 = 윤여수|날짜 = 2009-12-18|확인날짜 = 2014-01-20|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40201234543/http://news.donga.com/3//20091218/24890198/1|보존날짜 = 2014-02-01|깨진링크 = 예}}</ref> 2010년 9월 3일 MBC는 《[[MBC 스페셜]]》 〈장진영의 마지막 1년〉 편을 통해 미국에서 올린 결혼식 영상 등을 최초로 공개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故 장진영 MBC 스페셜, 시청자 관심↑..시청률8.6%|url =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10090408272322608|출판사 = 스타뉴스|저자 = 김수진|날짜 = 2010-09-04|확인날짜 = 2014-}}</ref>
  • 장혜진 (가수)
         [[2004년]] [[미국]] [[버클리 음악 대학]]로 유학을 다녀와 음반 활동, 라이브 활동을 하고 있다.
         * [[미국]] [[버클리 음악 대학]]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8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학원 강사]][[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팝 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1965년 태어남]][[분류:201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1990년대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버클리 음악 대학 동문]][[분류:경희대학교 동문]][[분류:나는 가수다에 출연한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전인범
         전인범은 [[1958년]] [[9월 6일]]에 [[서울특별시]]에서 [[한의사]]인 아버지 전주화와 [[외교관]]인 어머니 [[홍숙자]]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ref name="a">이혜민. 2016.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262&aid=0000009617 “부하들 적진 보내는 날 올까 두려웠다.”] 『新東亞』 통권 684호, 154-163.</ref> 유년 시절의 대부분은 서울에 살았으며, 1965년 부모의 이혼 후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인 모친을 따라 [[미국]]으로 이주하여 4년 동안 [[뉴욕]] [[맨해튼]]에서 생활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33122 [오래전 ‘이날’] 11월 20일 양파가 눈물 흘린 98 수능], 《경향신문》, 2017년 11월 20일</ref> 1969년 귀국한 뒤에도 그의 모친은 그가 영어를 잊지 않도록 [[AFN Korea|AFKN]]을 주로 시청하게 했으며 저녁식사 때만큼은 영어로 대화하게 했다. 그 또한 『[[:en:Reader's Digest|리더스 다이제스트]]』, 『[[:en:Newsweek|뉴스위크]]』, 『[[:en:Time (magazine)|타임]]』과 같은 시사 잡지를 빼놓지 않고 읽으며 어릴 때부터 국제관계에 대한 감각을 익혀나갔다.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을 다룬 미국 TV 프로그램 《[[:en:Combat!|Combat!]]》에 나오는 군인 샌더스 중사를 동경하던 그는 12살 때 외삼촌에게 “군인이 되려면 육군사관학교에 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육사 진학을 꿈꾸게 되었다. 그 뒤 [[리라초등학교|리라국민학교]]와 [[대경중학교 (서울)|대경중학교]]를 거쳐 1977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 37기로 입교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15&aid=0000813572 [人脈] 경기고등학교 출신 군장성들‥ 문·무겸비 군실세… 뜨는 KY그룹], 《한국경제》, 2005년 6월 26일</ref> 육사 동기생 중 성적이 꼴찌에서 두 번째였으나 영어 시험은 만점을 받았던 그는 1981년 4월 3일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소위]]로 임관했다.
         2004년 12월에는 [[:en:Multi-National Force – Iraq|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공정한 선거업무의 주역으로 외국군(미국, 영국, 호주, 루마니아)을 지휘·감독,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한국이 [[이라크 전쟁|이라크전]] 때 세 번째로 많은 병력을 보냈는데 다국적군사령부 참모 중에 한국군이 그 외에는 없어 처음에는 직속 부하들이 자신을 무시했다고 느낀 그였다. 그래서 바쁘다는 외국군 장군들 대신 브리핑을 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고자 노력해 점차 조직을 장악하였다고 밝혔다.<ref name="a"/> 그는 [[:en:United States Armed Forces|미군]]과 [[:en:British Armed Forces|영국군]], [[:en:Australian Defence Force|호주군]] 장교 10여 명을 지휘해 5400개 선거구에서 치러지는 이라크 유권자 1400만 명의 투표를 지원 및 감독하였으며, 3500t에 이르는 선거 관련 물자를 각 투표소에 공급하고 치안 유지를 지원하는 일도 맡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1&aid=0000030323 이라크 총선지원 전인범 대령 “이라크 민주주의 탄생 기여에 자부심”], 《서울신문》, 2005년 1월 31일</ref> 선거가 무사히 끝난 뒤 이라크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화랑무공훈장]]을, [[대한민국 국군|한국 군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en:Bronze Star Medal|동성훈장]](Bronze Star Medal)을 받았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046950 노 대통령 전 이라크 다국적군사령부 선거지원과장], 《연합뉴스》, 2005년 7월 11일</ref><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ntt_writ_date=20050706&parent_no=7&bbs_id=BBSMSTR_000000000004 이라크 총선 성공지원 공로, 전인범 육군 대령 美 동성무공훈장 받아], 《국방일보》, 2005년 7월 6일</ref>
         2009년 11월 [[2성 장군|소장]]으로 진급해 제27보병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재임하면서 그는 전역하는 병사들을 위해 전역식을 열어주고 직접 참석해 “군 생활 하느라 고생했는데 내가 줄 건 육군 소장의 경례밖에 없다”며 전역병들에게 부동자세로 경례를 해주었고,<ref>[http://www.sisaweek.com/news/articleView.html?idxno=95508 [김준범 ‘오늘과 내일’] 박찬주 대장 사태로 돌아본 ‘병사들을 사랑한 장군들’], 《시사위크》, 2017년 8월 14일</ref> 부대를 방문한 군수사령관 앞에서 병사들에게 보급되는 슬리퍼의 열악함을 토로하며 보급에 대한 확답을 받을 때까지 사령관 앞에서 슬리퍼를 물고 있기도 하는 등 장병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81&aid=0002796411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끝없는 미담 “능력과 인품 두루 갖춘 진짜 장군”], 《서울신문》, 2017년 2월 7일</ref> 2011년 5월에는 한·미 연합작전 태세를 발전시킨 공과 한·미 우호관계 증진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이 외국군에게 주는 최고등급 훈장인 [[:en:Legion of Merit|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하였다.<ref>[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172160 전인범 육군 27사단장 '美 공로훈장' 수상], 《브레이크뉴스》, 2011년 5월 13일</ref> 그는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1월까지 합동참모본부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추진단장으로 근무 중 한미가 2007년에 합의한 전작권 전환을 구체적으로 진행하면서 150개에 달하는 전환 과제를 계발하고 진행을 감독하며 미측과의 긴밀한 협의를 추진, 복잡한 전환 과정을 관리하는 총 책임을 맡은 바 있다. 미국으로부터 이 훈장을 수훈한 외국인으로는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영국 국왕 [[조지 6세]], 소련군 총사령관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 골]] 등이 있다.
         2011년 11월 18일 [[:en:United States Department of Defense|미국 국방부]]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인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느냐는 질문에 영화 《[[:en:Spider-Man in film|스파이더맨 시리즈]]》가 시사하는 교훈을 언급하였다. 그는 “《[[:en:Spider-Man (2002 film)|스파이더맨 1]]》은 우리에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en:Uncle_Ben#.22With_great_power_comes_great_responsibility.22|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는 것을 가르쳐 주고 《[[:en:Spider-Man 2|스파이더맨 2]]》는 원하지 않아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음을 알려준다”며 안보의식 고취를 위해 미국인들은 《스파이더맨 1, 2》를 평생 동안 적어도 세 번 이상 보아야 한다고 권하기도 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VrILCHQl1M Korean General tells Americans to watch Spiderman 1 & 2], 《USAG-Humphreys》, 2011년 11월 18일</ref> 같은 달 21일 사단장 임기를 마치고 한미연합군사령부 작전참모차장으로 영전했으며, 1년 5개월 뒤인 2013년 4월에는 유엔군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겸 한미연합사 부참모장에 임명되었다.
         2013년 10월 [[3성 장군|중장]] 진급과 함께 특수전사령관에 임명되었고, 동년 11월에는 한미연합방위체계 구축과 한미동맹 강화, 상호 유대관계 증진에 이바지한 공로를 인정받아 미국 정부로부터 공로훈장을 다시 한 번 수훈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6605771 전인범 특전사령관, 美 최고 공로훈장 받아], 《연합뉴스》, 2013년 11월 19일</ref> 2013년 현재 그는 한미 양국으로부터 총 8개의 훈장을 받아 대한민국 현역 장성 중 최다 훈장 수상자로 알려져 있다.<ref>[http://www.gunsa.kr/bbs/board.php?bo_table=B01&wr_id=151 대한민국 특전사 사령관 전인범], 《군사저널》, 2013년 12월 31일</ref>
         2015년 4월 5일부터 12일까지는 [[:en: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와 [[:en:United States Army Special Operations Command|미 육군 특수전사령부]]를 직접 방문, 미 통합특전사령관 [[:en:Joseph Votel|조셉 보텔]] [[:en:General (United States)|대장]]과 미 육군 특전사령관 찰스 클리브렌드 [[:en:Lieutenant general (United States)|중장]]을 만나 한·미 연합 특수작전에 대한 실질적 협력 방안을 논의했다. 그는 저격용 소총과 미군 주력 소총인 [[:en:M4 carbine|M4]], 권총, 산탄총, 박격포, 방탄복 등을 점검하고 체험하는 등 미군 특전사의 장비와 무기를 현장 견학하고 실제 사격도 하였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413010008491 미군 주력 소총 M4 쏘는 전인범 특전사령관], 《아시아투데이》, 2015년 4월 13일</ref> 이와 함께 방미 기간 동안 [[시애틀]]에 있는 6·25 참전 기념공원을 찾아 참전용사비에 헌화하기도 했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ZIB7y0ZvFJs 한미연합 특수작전사령부 시애틀 방문 6·25 참전용사비 헌화식], 《KOAM-TV》, 2015년 4월 10일</ref>
         2016년 5월 [[:en:United States Special Operations Command#USSOCOM medal|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 훈장]](USSOCOM Medal)을 받았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4&bbs_id=BBSMSTR_000000000004&ntt_writ_date=20160615 “전인범 장군, 미 특수전 발전에 혁혁한 공로”], 《국방일보》, 2016년 6월 15일</ref> 미 특수전 발전에 공로가 있는 개인에게 수여되는 이 훈장은 1994년 제정된 이후 한국군이 받는 것은 그가 처음이다. 미 통합특수전사령부는 미 육군과 해군(해병대), 공군의 특수전사령부를 지휘하는 3군 통합사령부로, 전 중장은 2013년 10월부터 2015년 4월까지 한국 특전사령관 겸 연합특전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연합작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이 훈장을 받게 되었다. 미 통합특수전사령부는 훈장 수여 증서를 통해 “연합특전사령관으로서 미 최정예 특수부대와 [[:en:United States Navy SEALs|네이비 실]](SEAL), 특수전 항공자산 등 1000여 명 이상의 미군을 훌륭하게 지휘했으며, 뛰어난 전문지식과 공익을 위한 헌신으로 한미연합군의 전략적 목표 달성을 위한 연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밝혔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615010007077 [단독]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한국군 최초 미군 통합특전사 훈장], 《아시아투데이》, 2016년 6월 15일</ref> 더불어 전 장군의 추진력과 창의력,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결의와 함께 장기 비전이 대한민국 방어에 기여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전 장군의 남다른 노력과 뛰어난 리더십, 그리고 개인의 추진력은 대한민국과 한미연합사에 큰 기여가 됐다고 전했다.
         2016년 7월 28일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을 가졌고 같은 달 31일 전역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227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이천 특전사서 전역], 《연합뉴스》, 2016년 7월 28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199207 [카드뉴스] "국회의원이 오든지 말든지,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라"], 《조선일보》, 2016년 8월 5일</ref> 이날 전역식에는 한미연합사령관 [[:en:Vincent K. Brooks|빈센트 브룩스]] 대장, 미 8군사령관 토마스 밴달 중장, 미 2사단장 테드 마틴 소장 등 [[주한미군]] 수뇌부와 이기백, [[정호용]], [[김동진 (1938년)|김동진]], [[김태영 (1949년)|김태영]] 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등 한미 양국 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 중장의 전역을 축하했다.<ref>[http://www.huffingtonpost.kr/heebum-hong/story_b_11295018.html 어느 ‘특별한 별’ 이야기 │ 전인범 중장 전역식], 《허핑턴포스트》, 2016년 8월 2일</ref><ref name="c"/> 그는 이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의_훈장#보국훈장|보국훈장 국선장]]과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을 각각 받았으며, 특히 보국훈장 국선장은 그가 중위 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걸어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435078 33년 전 목숨 건 구출… 다시 만난 장군과 중위], 《SBS》, 2016년 7월 28일</ref> 전 중장은 전역사에서 선배 장군들과 미군 장성들, 동기, 후배들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728010013908 전인범 중장 전역식 "부하 잘 보살피면 부하들이 알아서 윗사람 보살핀다"], 《아시아투데이》, 2016년 7월 28일</ref> 그는 “군인들이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약속을 지켰다.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검은 베레 영원하라”는 특전 정신을 외치며 전역사를 마쳤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o9JyXV5Hyo 전인범 장군 전역사 영상(discharge speech of LTG. INBUM CHUN)], 《YouTube》, 2016년 7월 28일</ref>
         2016년 10월부터 [[:en:Brookings Institution|브루킹스 연구소]] 동아시아정책연구센터 방문연구원, [[:en:Paul H. Nitze School of Advanced International Studies|존스 홉킨스 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객원연구원으로 1년 동안 활동했다. 미국 연구기관의 연수는 연수자가 주제를 선정해 그 분야를 연구하며 자신의 전문 분야를 다른 연구자들과 공유하는 활동을 하는데, 그는 전시작전통제권 문제, 한국의 핵무장, 한미 군사동맹 강화 방안 등을 중심으로 연구하였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111010007259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미국, 북핵 심각하게 평가... 미 공격 초래 상황 가고 있어”], 《아시아투데이》, 2017년 1월 12일</ref> 연수 3개월 동안 프린스턴 대학교 등 학교에서 특강, 브루킹스 연구소에서 주관하는 세미나 참여, 워싱턴 내의 많은 연구소와 기관 발표, 세미나, 회의에 참석해 미국의 생각을 이해하고 한국의 입장을 미국 전문가들에게 적극 설명하였다고 말했다.<ref>[http://kookbang.dema.mil.kr/kookbangWeb/view.do?parent_no=59&bbs_id=BBSMSTR_000000000138&ntt_writ_date=20170117 ‘한국 안정·동북아 평화=美 국익’ 각인시켜야], 《국방일보》, 2017년 1월 16일</ref> 2017년 1월에는 특전사 예비역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어 전국적으로 2만 6천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비영리 사단법인 봉사단체인 특전동지회의 제2대 총재로 취임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33180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제2대 특전동지회 총재 취임], 《뉴데일리》, 2017년 1월 16일</ref> 전 총재는 취임사를 통해 “새로운 시대 변화에 부응하는 대한민국 친목단체의 새로운 章을 열겠다”고 다짐하며, “현역 후배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고, 회원을 편애하지 않는 모두의 특전동지회로 만들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역설했다. 같은 달 [[북한]]의 [[김정은]] [[조선로동당|노동당]] 위원장에게 [[대륙간탄도유도탄|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 등의 재고를 촉구하는 내용으로 A4 용지 4장 분량의 영문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ref>[https://www.nknews.org/2017/01/dear-kim-jong-un-an-open-letter-from-a-former-s-korean-lieutenant-general Dear Kim Jong Un: An open letter from a former S. Korean lieutenant general], 《NK NEWS》, 2017년 1월 23일</ref> ‘김정은 위원장님께: 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의 공개편지’라는 제목의 이 편지에서 그는 “평화를 추구할 기회는 언제나 열려 있습니다”라면서 “가장 필수적인 첫 단계는 공공연한 위협의 회피, 핵과 미사일 실험의 중단, 핵무기 개발부터 인권에 이르기까지 신뢰를 증진시킬 협상에 참여하는 것 등을 포함합니다”라고 평화 프로세스를 제안했다.<ref>[https://kr.nknews.org/%EA%B9%80%EC%A0%95%EC%9D%80-%EC%9C%84%EC%9B%90%EC%9E%A5%EB%8B%98%EA%BB%98-%EC%A0%84-%EB%8C%80%ED%95%9C%EB%AF%BC%EA%B5%AD-%EC%9C%A1%EA%B5%B0-%EC%A4%91%EC%9E%A5%EC%9D%98-%EA%B3%B5%EA%B0%9C-%ED%8E%B8/ 김정은 위원장님께: 전 대한민국 육군 중장의 공개 편지], 《NK NEWS》, 2017년 1월 25일</ref>
         그러나 그의 5·18 발언을 문제 삼은 정치권에서 부인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이 학교 공금 횡령 혐의로 1심에서 징역형을 선고 받은 것까지 싸잡아 공격하며 논란이 불거지자<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3143692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부인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 징역 1년 법정구속], 《세계일보》, 2017년 2월 8일</ref>, 그는 광주 항쟁에 대한 표현의 부족으로 심려를 끼쳐 사과드린다는 말과 함께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5&aid=0002684649 文 영입 전인범 자진사퇴 "5·18 발언 백번천번 송구… 미국 돌아가겠다"], 《중앙일보》, 2017년 2월 10일</ref> 그는 “저는 다시 미국 연수과정으로 돌아가 북핵을 바라보는 엄중함과 심각함, 오랜 동안 지속돼온 혈맹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 이를 통한 더욱 굳건한 한미 동맹관계 발전이라는 문 전 대표의 안보관을 알리는 데에 미력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멀리서나마 문 전 대표와 대한민국의 승리를 기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문재인 후보 측 관계자는 “누를 끼친 데 대한 글을 올리시고 미국에서도 돕겠다고 한 것은 ‘자숙’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하며 “안보, 군사 분야에 대한 자문은 계속 하실 것”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3&aid=0007763546 文측, 전인범 미국行에 '선긋기'… "본인 판단"], 《뉴시스》, 2017년 2월 10일</ref> 문재인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이틀 후 청와대 관계자는 “대선 과정에서 공을 들여 영입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이 문 대통령의 외교안보라인 구상의 한 축이었는데 그가 중도 하차하면서 인사가 꼬였다”고 발언함으로서 [[문재인 정부]]는 출범과 함께 그를 중용할 계획이었음을 나타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2&aid=0003172701 한반도 상황 긴박한데… 외교안보 라인 인선은 '설왕설래'], 《세계일보》, 2017년 5월 12일</ref>
         2017년 5월 23일부터 25일까지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지상군(LANPAC)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한미동맹의 중요성과 발전 방안에 대해 발표하였다. 전인범 중장은 이례적으로 [[예비역]] 한국 장군임에도 불구하고 각 국의 현직 육군 최고 수뇌부가 참석하는 이 심포지엄에 초청을 받아 예비역으로는 유일하게 발표했는데, 현직 미군 주요 지휘관들은 물론 전직 미군 수뇌부들로부터 한·미 군사동맹과 한·미 연합전력 극대화 해법에 대한 가장 신뢰할 수 있는 한국군 출신으로 평가받고 있어 이 심포지엄에도 초청되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528010015215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 “한·미 군사 혈맹, 한국군 주도적 역할 중요”], 《아시아투데이》, 2017년 5월 28일</ref> 그는 발표문에서 “한미간 긴밀한 연합작전과 지휘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는 효율적인 전술지휘통제자동화체계(C⁴I)가 기반되어야 하며 양국간 언어장벽의 문제를 보다 깊이 있게 이해하고 문화의 차이를 이해하는 등 상호 이해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고, “미국이 우리나라의 주도적 역할을 인정하고 우리나라는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346579 전인범 前 특전사령관, 美 'LANAPC'에서 한미동맹의 중요성 및 발전 방안 발표], 《뉴데일리》, 2017년 5월 26일</ref> 또한 심포지엄이 끝나고 연합뉴스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군 발표자들 대부분은 기조연설과 발표문에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rising adversary)’으로 지칭했다”면서 “미국이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질주하는 북한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9292284 "美, 아태 지상군회의서 북한을 '부상하는 적' 지칭"], 《연합뉴스》, 2017년 5월 25일</ref>
         1년 간의 미국 연수 기간 동안 그는 케네소 주립 대학교, 템플 대학교, [[:en:Foreign Policy Research Institute|외교정책연구소]] 등 미국 전역의 대학과 연구소, 로펌을 찾아 한반도 갈등이 미국 국민들의 일상에 미칠 파급력에 대해 강연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4025928 한국전쟁 미국에도 도움안돼… 참화 막을 외교적 노력 필요], 《매일경제》, 2017년 10월 8일</ref> 2017년 10월 8일 매일경제와의 인터뷰에서 강연을 하기 전에 먹고 사는 문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그는 실용적인 문제부터 언급하는 것이 평범한 미국인들에게 한반도 갈등이 미국에 어떤 경제적 영향을 미칠지를 효과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미국은 세계를 상대하는 최강대국이자 선진국이나 미국인들 또한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먹고 사는 문제가 제일 중요하다며, 이렇게 경제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을 통해 한국의 입장을 최대한 객관적이고 진솔하게 얘기하는 것이 나라를 지키고 애국하는데 조금이라도 보탬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9&aid=0004025816 "북핵 위협 우려하는 미국인들, 코리아패싱 현상도 심각"], 《매일경제》, 2017년 10월 8일</ref> 한 달 후인 11월 13일 [[2017년 판문점 조선인민군 병사 귀순 총격 사건|판문점 조선인민군 병사 귀순 총격 사건]] 당시 귀순한 오청성 하사가 국군에 의해 구출될 때까지 생존해 있을 수 있던 것은 북한 신속대응군 추격조가 오 하사를 급히 쫓느라 호흡 조절에 실패해 급소를 가격하는 소위 ‘킬 샷(kill shot)’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1&aid=0002334661 <정충신의 밀리터리 카페> “뛰어온 北추격조 숨 헐떡여 급소 못 맞혀… 천운”], 《문화일보》, 2017년 11월 24일</ref> 전 전 사령관은 “CCTV 영상을 보면 전력 질주하는 오 하사를 쫓느라 AK 소총을 든 두 북한 경비병은 300m 이상, 권총을 든 두 경비병 추격조는 200m 이상 전력 질주했다”며 “추격조는 최정예 특수부대원으로 구성되지만 오래 뛰다 보니 총을 쏠 때 호흡이 안정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오 하사가 추격조의 사격에 노출된 시간은 10초가 채 안 돼 정확한 조준 사격이 이뤄지지 않았다”며 “그 덕에 심장, 대동맥, 정동맥 등 출혈을 많이 일으키는 곳이나 신경계인 머리 척추와 같은 급소를 맞지 않아 살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는 또 “총탄은 몸에 박히면 여러 갈래로 쪼개지면서 간이나 비장, 폐 등 장기에 손상을 주도록 설계된다”며 “그런데 오 하사와 추격조 간 거리가 살상 효과가 높은 50m보다 짧아 관통한 총알이 많아서 살상 효과가 충분히 발휘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총탄이 몸을 관통할 경우 출혈을 빨리 멈추게 하고 패혈증만 막으면 살릴 확률이 높아진다”며 급소만 피하면 총알이 몸에 박히는 것보다 관통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설명했다.
         2018년 6월 예비역 신분인 그의 주도로 국회의원회관에서 특수작전 전술 및 장비 현대화를 위한 세미나 ‘제1회 특수작전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그간 국가 안보전략과 국방 관련 정책 토론회는 많았으나, 일선 전투원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전술 및 장비 관련 세미나가 공개적으로 개최된 적은 없었기에 눈길을 끌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4045225 창끝 전투원들을 위한 '제1회 특수작전 세미나' 큰 호응], 《파이낸셜뉴스》, 2018년 6월 24일</ref> 세미나에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효율적인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육군의 특전사를 비롯해 수색·특공부대, 해군 및 해병대, 공군의 지상작전 부대의 정예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해외의 사례를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한다”면서 “실전에 맞지 않는 전술 및 장비소요(구매 요청 및 구매)는 과감하게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중장은 세미나 참석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형식과 틀을 깬 어법과 행동으로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해당 세미나는 특수·지상작전연구회, 군사전문지 플래툰 등 민간이 주도한 최초의 개방형 군사 세미나로, 세미나 준비를 해온 특수·지상작전연구회 소속 정진만 아세아항공전문학교 교수는 “당초 100명 미만의 규모로 세미나를 준비했는데 150여 명 이상이 참석했고 상당수 인원이 참석을 원했는데 장소가 비좁아서 받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같은 달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에 임명, 9월에는 그를 단장으로 하는 자유총연맹 대표단이 [[:en:West Potomac Park|웨스트 포토맥 공원]] 내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들어 설 한국전쟁 미군 참전용사 추모벽 건립에 1만 달러를 기증했다.<ref>[http://dckoreannews.com/featured/%ED%95%9C%EA%B5%AD%EC%9E%90%EC%9C%A0%EC%B4%9D%EC%97%B0%EB%A7%B9-%EB%AF%B8%EA%B5%AD-%EC%9B%8C%EC%8B%B1%ED%84%B4%EC%97%90%EC%84%9C-%EB%8F%99%ED%8F%AC%EA%B0%84%EB%8B%B4%ED%9A%8C-%EA%B0%9C%EC%B5%9C/ [한국자유총연맹] 미국 워싱턴에서 동포간담회 개최], 《워싱턴코리안뉴스》, 2018년 9월 12일</ref><ref>[http://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32597 한국자유총연맹,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 건립지원금 1만 달러 기탁], 《월드코리안뉴스》, 2018년 9월 13일</ref> 그는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추모의 벽이 설치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자유총연맹 중앙회 차원에서 1만 달러를 즉석에서 마련, 기탁하게 됐다”면서 “한국자유총연맹은 특정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 중립을 지키면서 국가에 이익이 되고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국리민복을 기본 가치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ref>[http://www.koreatimes.com/article/1202198 한국전 참전 ‘추모의 벽 건립’ 1만달러 기증], 《미주한국일보》, 2018년 9월 11일</ref>
         통역이 필요없는 유창한 영어 실력과 뛰어난 업무 추진력으로 주한미군 지휘부와 깊은 신뢰관계를 유지해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불리고 있다.<ref>[http://news.donga.com/People/3/06/20110512/37149041/1 ‘전작권 전환 기여’ 전인범 소장이 받는다], 《동아일보》, 2011년 5월 12일</ref> 조선일보 군사전문기자 [[유용원]]은 그를 ‘군내에서 영어를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4/20/2013042000200.html 박지만씨 육사 37기 동기들, 청와대·국정원·軍 요직 올라], 《조선일보》, 2013년 4월 20일</ref> 주한미군사령관 [[:en:Curtis Scaparrotti|커티스 스캐퍼로티]] 대장은 그를 일컬어 ‘가장 절친’이라 칭할 정도로 미군들의 신뢰를 받으며 강력한 한·미 군사동맹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41116010009522 주한미군사령관 "한반도 평화·안정 온힘 쏟겠다"], 《아시아투데이》, 2014년 11월 16일</ref> 미 8군사령관 버나드 샴포 중장 역시 ‘한국 군인 중에서는 가장 오랜 절친이며 항상 올바른 조언을 해 주는 고문(顧問)이자 한미 군사동맹의 미래’라고 강조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50208010005247 주한 미8군사령관 "한미 군사동맹 강력하다"], 《아시아투데이》, 2015년 2월 8일</ref>
         ** 고모부 : 고광림<ref>[http://library.snu.ac.kr/theme/2014_01_sub02.htm 고광림 박사 주요 이력].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ref> (高光林, 1920년 ~ 1989년,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미한국대사관]] 특명전권공사)
         *** 내종형 : [[:en:Howard Koh|고경주]]<ref>[http://article.joins.com/news/article/olink.asp?aid=14888937&serviceday=20140721 사명, 목적 있는 삶… 나를 이끈 건 부모 가르침], 《중앙일보》, 2014년 7월 21일</ref> (高京珠, 1952년 ~ , [[:en:United States Assistant Secretary for Health|미국 보건복지부 보건담당 차관보]])
         *** 내종형 : [[:en:Harold Hongju Koh|고홍주]] (高洪珠, 1954년 ~ , [[:en:Legal Adviser of the Department of State|미국 국무부 법률고문]])
         ** 숙부 : 전주일 (미국 공무원)
         [[분류:1958년 태어남]][[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정선 전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리라초등학교 동문]][[분류:대경중학교 (서울) 동문]][[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미국 합동참모대학교 동문]][[분류:미국 육군참모대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동문]][[분류:경남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
  • 전재용
         |기타 이력 = 비엘에셋 대표 <br /> [[연세대학교]] [[정치학|정치외교학]]과 [[학사]] 중퇴 <br />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 졸업 <br /> [[게이오기주쿠 대학교]] 대학원 경영회계학 석사 졸업 <br/> [[군인]], [[기업가]]
  • 전준호(1969)
         前 [[롯데 자이언츠]]-[[현대 유니콘스]]-[[키움 히어로즈|히어로즈]] 소속의 [[외야수]]. 2010년에 [[SK 와이번스]]의 주루코치로 지내다 미국으로 건너가 연수를 받았으며, 귀국 후 2011년 10월 10일 날짜로 코치 연수를 마치고 [[NC 다이노스]]의 작전 및 주루 코치로 합류하였다. 선수 시절 등번호는 1번.
         이 소식을 접한 많은 팬들은 크게 분노했다. [[http://mlbpark.donga.com/bbs/view.php?bbs=mpark_bbs_kbo&idx=450502&cpage=3|그러나 이 방출은 전준호 본인에게 다른 팀에게 갈 마지막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해 일단 팀에서 풀어준 것이며, 팀을 못 찾았을 경우에는 미국에 코치 연수를 보내주고, 나중에라도 은퇴식을 치뤄 줄 예정이었다고 한다.]]
         은퇴 이후 히어로즈가 아닌 [[SK 와이번스]]의 1군 주루코치로 가게 되었다.[* [[김성근]]이 불렀다고한다.] 이 무렵에 '''"우완투수보다 좌완투수 상대로 도루하기가 더 쉽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 사실, 우완투수는 [[마운드]]에 올라서면 오른팔 쪽이 3루쪽에 더 가깝고, 좌완투수는 왼팔 쪽이 1루에 가까워, 좌완투수가 우완투수보다 견제가 좀더 수월하다. [[뉴욕 양키스]]의 베테랑 좌완투수 [[앤디 페티트]]라든가, 멀리 안 가더라도 LG의 [[봉중근]]을 보면 납득이 갈 것이다. 다만 본인은 이 말을 한 이유로 투수도 견제하기 수월하나 자신도 투수의 동작을 체크하기 쉬워서라고. 간단하게 투수들의 세트포지션을 생각해보면 쉽다. 좌완투수의 경우 몸이 1루쪽을 향해 있으므로 눈만 움직여도 1루주자가 보이지만, 우완투수의 경우 머리를 완전히 돌려야 1루주자를 확인할 수 있다. 견제시에도 좌완투수는 선 자세 그대로 던지면 되지만, 우완투수는 몸을 완전히 틀어 던져야 한다. 반대로 3루 도루의 경우 우완투수가 막기 용이하다. 2루보다 조금 더 나와있는 2루 주자는 우완투수가 체크하기 쉽기 때문. 1980년대의 도루왕 [[김일권]]도 하일성 해설위원에게 '좌완이 도루하기 훨씬 편하다'는 언급을 한적이 있다고 한다. 투수의 얼굴을 관찰하면서 타이밍을 잡기 편하다나... [[리키 헨더슨]] 항목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다만 이런 말을 한 선수 대부분이 우완 상대로 도루성공률이 더 높다. 아무래도 역시 느낌과 실제는 조금 다르기도 한 모양. 혹은 좌완 상대로는 도루하기 힘들다는 통설에 기죽지 않기 위한 방편일수도 있다.] 시즌이 끝난 후 [[미국]]으로 건너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마이너리그에서 순회 코치로 활동하며 여러 선수들에게 도루왕의 노하우를 전수했는데, 이 시기 그에게 배운 선수 중 [[에버스 카브레라]]는 포텐을 터뜨리며 올스타에 등극하기도 했다.[* 나중에 자신을 인터뷰한 어느 한국 기자에게 본인이 먼저 '''전준호 코치를 아는가?''' 라며 물어보고 꼭 안부를 전해달라고 두 번 세 번 부탁할 정도. 그에 의하면 [[스프링캠프]] 중 전준호에게 도루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운 모양. [[http://sports.donga.com/3/all/20130801/56780075/1|여기에서 인터뷰를 볼 수 있다.]] 전준호가 카브레라를 만들었다고 하는 건 물론 오버지만, 내셔널리그 도루왕이 짧은 기간이나마 받은 그의 코칭을 몇 년이고 잊지 않은 채 감사함을 표하는 걸 보면 도루에 한해서는 세계에서도 통할 지식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봐도 무방할 듯. 아쉬운 게 있다면 저 인터뷰 전부터 약물 관련 리포트 목록에 올라있던 카브레라는 결국 사실로 드러나 50경기 출장 정지를 먹었다.[* 2012년은 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여튼 약물은 나쁜 것이다.]]
  • 정경은(배드민턴선수)
         예선 1경기(vs [[미국]]):세트 스코어 2:0 승
  • 정근모
         * [[1995년]] : 미국 Polytechnic대학교 명예공학박사
         * [[미국]] [[미국 국무부|국무부]] 국제개발처(AID) 자문위원
         * 미국 [[과학재단]] 에너지 수석 심의관
         * 미국 [[프린스턴대학]] [[MIT]] 핵융합 연구원
         * [[미국공학한림원]] 회원
  • 정기선
         [[1982년]]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의 손자이자 [[정몽준]] [[현대중공업]] 사장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대일외고]] 졸업 후 [[연세대학교]]에서 경제학 학사학위를 받은 뒤 ROTC로 군복무를 마치고 처음에는 언론사([[동아일보]])에서 근무하다 아버지의 기업에 입사했다. 이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스탠퍼드 대학교]]대학원에서 MBA수업을 받았으며 잠시 컨설팅그룹에서 일한 뒤 다시 귀국하였다. [[2013년]] [[현대중공업]] 수석부장으로 재입사 후 [[2014년]] 상무 및 [[2016년]] 전무, [[2018년]] 부사장으로 승진하였다.
         *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스탠포드대학교 경영대학원]] MBA
         * 2009년 : 미국 유학, MBA과정
  • 정남준
         | 학력 = {{국기그림|대한민국}} [[한양대학교]] 정치외교학 학사<br />{{국기그림|대한민국}} [[서울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br />{{국기그림|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박사
         *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석사
         *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 박사
  • 정다정
         [[부산외국어고등학교|부산외고]] 재학 중 한국의 입시 풍토에 적응하지 못해 1학년을 마치고 [[미국]]으로 갔다가, 미국에서 고교 졸업 후 2011년 귀국하였다. 2011년 9월경 블로그에 올린 그림, 레시피가 [[네이버]] [[웹툰]] 관계자의 눈에 띄어, 같은 해 네이버에 웹툰 《[[역전! 야매요리]]》를 연재하며 데뷔했다.<ref>{{뉴스 인용 |제목 = 닭떡된 닭튀김? 괜찮아요 ‘야매요리’니까!|url = http://news.donga.com/3/all/20120802/48267162/1|출판사 = 동아일보|저자 = 신나리|쪽 = |날짜 = 2012-08-02|확인날짜 = 2012-10-27}}</ref> 가족관계로는 부모님과 정다정보다 5살 어린 남동생이 있다.
  • 정동진 (1946년)
         [[1990년 한국시리즈]] 우승 실패의 책임을 물어 삼성의 감독직에서 물러나고 [[미국]]으로 야구 연수를 떠났다가 [[1992년]] [[태평양 돌핀스]]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1992년]] 6위, [[1993년]] 최하위로 마감했지만, [[1994년]]에는 그동안 부상으로 신음했던 투수들이 복귀하여 정규 시즌 2위로 마감하는 선전을 하였다. 그 해 [[태평양 돌핀스]]가 [[LG 트윈스]]에게 [[1994년 한국시리즈]]에서 스윕당해 [[LG 트윈스]]가 우승했지만, 그 해 성적은 [[1998년]] [[현대 유니콘스]]가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기 전까지 [[인천광역시|인천]] 연고 야구단 최고의 성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감독으로 2번 경험한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모두 [[LG 트윈스]]를 상대로 스윕당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 정링컨
         '''정링컨'''({{본명|링컨 폴 램버트}} - <small>(Lincoln Paul Lambert)</small>, [[2007년]] [[10월 1일]] ~ )은 [[미국 시민권]]의 아버지와 [[대한민국]] [[국적]]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계와 한국계 [[혼혈|혼혈인]] 아역 [[연기자]]이다.
         [[분류:2007년 태어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11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모델]][[분류:비디오 자키]][[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미국 사람|램버트, 링컨]][[분류:21세기 터키 사람|람베르트, 파울]][[분류:미국의 남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어린이 배우]][[분류:한양초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미국의 침례교도]][[분류:미국계 터키인]][[분류:한국계 터키인]][[분류:미국계 한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캐나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터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뉴질랜드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브루나이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
  • 정명훈 (지휘자)
         [[서울]]<ref>{{뉴스 인용|제목 = 운명처럼 다가왔던 베토벤 '운명' 들고 태어난 부산방문 설레|url = http://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0500&key=20130509.22023204805 |출판사 = 국제신문 |날짜 = 2013-05-08 |확인날짜 = 2013-05-09}}</ref>에서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으며, [[서울덕수초등학교]]를 [[입학]]했다. 일찍부터 피아노 연주에 재능을 보여 [[피아노]]를 배운 지 3년만인 일곱 살 때인 [[1960년]] [[서울 시립 교향악단]]과 [[하이든]]의 [[피아노 협주곡]]을 협연해 화제가 되었다.<ref>{{뉴스 인용|제목=[피플Q 정명훈의삶&음악] 정명훈은 누구?|url=http://news.donga.com/3//20100120/25520037/1|출판사=동아일보|날짜=2010-01-20}}</ref> [[1961년]]에 가족들과 함께 [[미국]] [[워싱턴주]] [[킹 군 (워싱턴주)|킹 군]] [[시애틀]]로 이주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명동]]에서 한식당을 운영했던 그의 [[부모]]는 [[미국]] 워싱턴 대학가에서도 한식당을 경영했다.<ref>{{뉴스 인용|제목=마에스트로 정명훈 서울시립교향악단 예술감독|url=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9&no=663110|출판사=mk뉴스|날짜=2009-12-25}}</ref> 정명훈은 이 시절을 회상하며 "부모님의 식당에서 부엌 일을 도왔고 새벽 신문 배달과 잔디 깎기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신문을 돌리고서 나중에 구독료를 받으러 다니는 '수금'이 특히 힘들었다"고 말했다.<ref>{{뉴스 인용|제목="北 악단장도 스트라디바리우스(바이올린 최고 명기) 쓴대요"|url=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4/13/2012041300179.html|출판사=조선일보|날짜=2012-04-13}}</ref> 14세에 첫 개인 리사이틀을 가진 정명훈은 연주 도중 곡을 잊어버리는 실수를 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반복해서 연주한 끝에 무사히 공연을 마쳤다.<ref>유동철, 《아들아 너는 세계를 무대로 살아라》, 북로그컴퍼니, 2009, p.94, {{ISBN|978-89-962617-3-5}}</ref> 그의 선생이었던 제이콥슨은 정명훈에게 "네가 완벽한 연주를 하는 것보다 실수를 하더라도 감동적인 연주를 하기 바란다."고 격려했다.</ref>
         [[1968년]]에 [[미국]] [[뉴욕]]의 [[메네스 음악원]]에 [[입학]]해 나디아 라이젠버그와 칼 밤베르거에게 각각 [[피아노]]와 [[지휘]]를 배웠다. [[1974년]]에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 [[피아니스트]]로 참가해 2위로 입상해 화제가 되었고, [[미국]] 시민권자임에도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 퍼레이드를 벌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만찬에도 초대되었다고 한다.<ref>{{뉴스 인용|제목=김문관의 클래식 산책 스승의 노래|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39830|출판사=아시아투데이|날짜=2012-05-14}}</ref> 이 만찬에서 정명훈은 콩쿨 상금으로 [[러시아]]에서 산 [[캐비어]] 5 kg 중 일부를 [[선물 (물건)|선물]]로 들고 갔다. 당시 소련 정부는 국부 유출을 금지해서 받은 상금을 [[모스크바]]에서 모두 써야 했다.</ref> 이듬해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지휘]]를 추가로 [[공부]]한 후 [[1978년]]에 [[졸업]]했다.
         줄리어드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부지휘자로 프로 관현악단 지휘의 [[경험]]을 쌓았다.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가 되어 상임 지휘자인 줄리니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고, [[1983년]]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거처를 옮겼다. [[1984년]]에는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윤이상]]의 교향곡 제3번 세계 초연과 음반 녹음 등의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6년]]에는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불의 천사' 를 [[지휘]]했고, 같은 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 를 [[지휘]]해 오페라 지휘자로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무소륵스키]]와 [[베르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해 절찬을 받았고,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상을 [[상 (표창)|수상]]했다. [[1989년]]에는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새로 건립한 [[오페라극장]]의 전속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파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신축된 [[오페라극장]]의 개관 공연에서 [[베를리오즈]]의 대작 오페라 '트로이인' 을 상연해 호평을 받았다. [[1990년 10월]]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 제작도 시작했으며, [[조르주 비제|비제]]의 관현악 작품들을 시작으로 [[생상]], [[메시앙]], [[베를리오즈]], [[앙리 뒤티외|뒤티외]] 등의 작품들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생상의 '삼손과 데릴라(EMI)', 베르디의 '오텔로' 등 오페라 전곡을 [[녹음]]했다. 특히 [[메시앙]]과는 생전에 각별한 친교를 맺고 있었고, 녹음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4년]]에 새로 부임한 프랑스 문화부 장관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음악 감독직에서 해임되었고, 이는 [[프랑스]]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1995년]] 유네스코 서울 협회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대한민국의 훈장|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7년]]에는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도이체 그라모폰]]의 전속 계약을 유지하면서 녹음 활동도 병행했다. [[1998년]]에는 [[한국]]에서 첫 직책으로 [[KBS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지만, 악단원들과 [[갈등]]을 빚어 불과 수 개월 후 사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프랑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재구성된 [[일본]]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특별 예술 고문으로 초청되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2012년]]부터는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역사상 첫 번째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이외에도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네덜란드]] [[콘세르트헤바우 관현악단|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나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국]]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세계 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들을 객원 [[지휘]]하고 있으며, 다수의 영상물과 음반들을 남기고 있다. [[아시아인]] 혹은 아시아계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비상설 관현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도 맡고 있으며, [[대한민국]] [[인천]]과 [[서울]]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정명훈은 19세 때부터 누나 [[정명화]]의 시누이로 다섯 살 연상의 구순열을 짝사랑했고, [[가족]]에게 숨긴 채 교제를 했다.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받은 상금 3000루블로 비행기 티켓을 사서 [[카리브 해]]로 밀월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979년]]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한 채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식에는 어머니 이원숙 여사만이 참석했으나 나중에는 [[부모]]에게도 인정받았다.<ref>황호택, 《신동아》 [[2004년 2월]]호</ref> 부인과의 사이에서 세 아들 정진, 정선, 정민을 두고 있다.
         [[북한]] [[함경남도]] [[원산]] [[루씨여자고등보통학교|루시여고]], [[대한민국]] [[배화여고]], [[이화여전]] 가사과를 [[졸업]]한 후 한 때 [[동덕여고]] 교사, [[이화여대]] 가정과 강사로 일했다. [[일본]]에서 [[유학 (교육)|유학]]하다 정준채 씨를 만나 [[결혼]]. [[1962년]] [[미국]]으로 이주해 한식당을 운영. [[1968년]] [[한국]]으로 돌아와 구미물산주식회사, 주식회사 원 등을 운영. [[1986년]]엔 [[미국]] 밸리포지신학대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주]] 미들타운에 한인교회를 개척하였고 [[198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미국]]에서 목사로 활동.
         4. [[정경화]] (대관령 국제 음악제 예술감독, 미국 줄리어드 음악원 교수) 1948.03.26. 서울특별시 출생 (바이올린)
         5. 정명철 (클라리넷) 미국에서 교통사고로 사망.
         * 1992년 [[올리비에 메시앙|메시앙]]의 ‘튀랑갈릴라 교향곡’으로 디스크 그랑프리, 미국 엑설런스 2000상
  • 정영석(1951)
         1951년 [[경상북도]] [[경산시|경산군]]에서 태어났다. [[경남고등학교]], [[한국외국어대학교]] 행정학과, [[부산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미국]] [[남가주 대학교]] 행정대학원 행정학 석사, [[동의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박사]] 과정을 졸업하였다.
  • 정영일
         [[광주진흥고등학교]] 3학년 때인 [[2006년]] [[대통령배 전국고교야구대회]] 1차전와의 광주에서 13.2이닝을 던져 국내 최다인 23탈삼진을 기록해 주목받았다. 이틀에 걸친 16회 연장전 동안 광주고의 64타자를 상대로 무려 242구를 던져 12피안타, 11사사구, 6실점을 하며 끝내기 패배를 당했다.<ref>{{뉴스 인용|저자=현윤경|제목=정영일, 23K 탈삼진 신기록|url=http://m.hani.co.kr/arti/sports/baseball/116700.html#cb|뉴스=한겨레|통신사=연합뉴스|날짜=2006-04-18|확인날짜=2018-11-13|깨진링크=아니오}}</ref> 이어 열린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에서도 상대로 16이닝 동안 222구를 던진 결승전을 포함해 9일 동안 5광주에서 무려 741구의 살인적인 투구 수를 기록해 혹사 논란과 함께 [[박철우 (1964년)|박철우]] 당시 진흥고 감독을 비롯한 일선 고교 지도자들에 대해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었다.<ref>{{뉴스 인용|저자=이석희|제목=고교 야구 감독들 ‘해도 해도 너무한다’|url=https://mnews.joins.com/article/2317099#home|뉴스=중앙일보|통신사=일간스포츠|날짜=2006-06-08|확인날짜=2018-11-13|깨진링크=아니오}}</ref> 급기야 당시 [[민주노동당 (대한민국)|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던 [[노회찬]]까지 그의 사례를 근거로 고교 야구 선수들의 혹사에 대한 직권 조사와 시정을 권고하는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하기도 했다.<ref>{{뉴스 인용|저자=정민승|제목=노회찬의원 '혹사당하는 고교투수'|url=http://m.hankookilbo.com/news/read/200606182373473905|뉴스=한국일보|날짜=2006-06-18|확인날짜=2018-11-13|깨진링크=아니오}}</ref> 이러한 고교 시절 혹사는 훗날 부상으로 연결되며 [[미국]]에서 그의 발목을 잡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미국 프로야구 시절==
         진흥고 시절 혹사의 후유증으로 [[미국]]에서는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귀국했다. 부상으로 인해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LA 에인절스]] 입단 이후에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 승격되지 못했고, [[2007년]] 오른쪽 팔꿈치 부상을 당했으나 재활에 실패해 [[2008년]] 6월 토미 존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회복하지 못하고 [[2011년]] [[5월 27일]]에 방출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mlb&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112359 LAA 정영일, 부상 극복 못하고 방출] - 스포츠조선</ref>
         [[2011년]] [[12월 24일]] [[미국]] 복귀를 포기하고 독립 [[야구]] 팀 [[고양 원더스]]에 입단했으나, [[KBO 퓨처스리그|퓨처스 리그]] 출전마저 제한되자 팀을 떠났다.
  • 정인숙 (1945년)
         신원조회는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비서<ref name="hp104"/> 실장인 [[문학림]]이 맡았고, 고위층만이 가질 수 있었던 회수여권은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하였다.<ref name="hp105">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5페이지</ref> 여권 발급 날짜는 [[1968년]] [[12월 30일]]이고, 이후 정인숙은 [[1969년]] [[3월]] 큰오빠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0월]]에는 [[워싱턴 D.C.]]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로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ref name="hp105"/>
         {{인용문|정인숙이 아이를 낳은 뒤 자꾸만 고위층(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인 것처럼 행세했다. 정 여인은 어쩌면 박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청와대를 귀찮게 하자 경호실장 [[박종규]]가 골치가 아파졌다. 여권을 만들어 미국으로 내보냈으나 자꾸만 귀국하겠다고 해서 일본에도 머물게 했다. 그때 [[일본]]에서 박종규 실장과 가장 친한 사람이 정건영 씨였다. 마치이로 통하는 이 교포 사업가는 도쿄에서 손꼽히는 '암흑가의 신사'이기도 했다. 바로 이 정건영 씨에게 정인숙 모자를 돌보아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건영은 그 대가로 거액의 사업자금을 [[도쿄]]의 [[외환은행]]에서 빌려 쓸 수 있도록 실력자인 박종규 실장에게 부탁했다.<ref name="hp104"/><ref>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1992) 216쪽</ref>}}
         출국을 한 정인숙은 무료한 이국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갑갑해 한다. 미국 일본 등지를 여행하던 정인숙은 정일권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국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다시 남성편력을 시작한다. 국내로 들어온 정인숙은 홀로 호텔나이트클럽, 카바레 등지로 다니며 흥청망청 돈을 쓰고,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면 잠자리도 같이 하는 등 난잡한 생활을 한다. 이 때는 전과는 달리 주로 돈 잘 쓰는 사람들을 상대했고, 재일교포와 사업가 등 유력 인사들이 그녀를 거쳐 갔다. [[1969년]] [[10월 10일]] [[국무총리]] [[정일권]]의 주선으로 그녀는 아기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서 석 달 동안 있다가 되돌아 왔다. 다시 돌아온 그녀는 주변에게“곧 미국에 갈테니 차를 팔아야 겠다”는가 하면“돈 달라는 사람 많아 귀찮아 죽겠다”고 말했다. 한때는“이젠 미국 안 갈래”라고 하기도 했다. 사건 당일인 [[3월 17일]] 낮, 자동차 매매업소에 나타나 시보레 6기통짜리를 흥정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은 물론 평소 거느리는 주변 사람들의 여자문제에도 관대한 편이었다. 심지어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이 직원을 시켜 정적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등의 사생활을 캐서 보고서로 제출하자 화를 내며 찢어버렸다. 그러나 자신과도 술자리 또는 잠자리를 같이 한 정인숙이 정일권과 관계를 맺어 자식까지 두었다는 사실에 크게 분노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 사건 직후 “정 전 총리를 물러나게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주위의 건의에 “남자가 여자 만나는 것은 예사”라며 사건을 무마했다는 후문이다.<ref name="ilsa01">[http://www.ilyosisa.co.kr/bbs/zboard.php?id=society&page=3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8 <nowiki>[</nowiki>제584호<nowiki>]</nowiki>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추억’의문의 피살 미스터리 전모] 일요시사 2007년 03월 20일자</ref> 그러나 [[신민당]]의 정치 공세는 계속되었다. 정일권은 박정희를 찾아가 무릎까지 꿇었다고 했고, 바로 해임을 시키면 세간의 루머만 커질 것을 우려한 박정희는 정일권을 불러 자진 사퇴를 권고한 뒤, 정종욱이 구속된 이후 잠잠해질 무렵 정일권을 해임하고 바로 미국으로 내보냈다. 정인숙 문제로 박정희에게 무릎을 꿇기까지 한 정일권은 하와이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내게 된다.
         정성일은 정인숙의 사망 이후 외가에서 살다가 고등학생 때인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1990년]]에 귀국했다.<ref name="hp107">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7페이지</ref> 정인숙을 죽이고 희생양으로 오빠 정종욱을 내세워 이 사건의 수사를 졸속으로 처리하게 한 배경, 배후는 오리무중이다.
         [[1991년]] [[6월 5일]] 그의 아들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 그러나 [[1993년]] 다시 [[정일권]]을 상대로 서울가정법원에 친자확인소송을 냈으나, 소송 진행 중 정일권의 사망으로 무효화되었다.
         정성일은 '저는 당신의 아들이었습니다'라는 책에서 [[1991년]] [[11월]] [[미국]]에서 [[정일권]]과 대화를 나눈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문을 사이에 두고 한 대화에서 정일권은 정성일에게 "아가야, 나는..... 나는 지금 가슴이 떨려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없구나. 내일 아침에 전화를 하고 다시 와주련?"이란 말을 했다고 한다.<ref name="kum108">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8페이지</ref> 그러나 [[1993년]] SBS 주병진 쇼에 출연한 정성일은 "최근 정씨(정일권)가 나와의 직접 통화에서 '당신은 나의 아들이 아니며 내가 모시던 분의 아들'이라고 밝혔다."고 말해 자신이 [[박정희]]의 아들일 수 있음을 시사했다.<ref name="kum108"/>
         한편 정성일은 [[2005년]] 귀국하기 전까지 15년 이상 [[미국]] LA에 머물렀는데 당시 한인사회에서는 비교적 정 씨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인교포사회의 한 관계자는 “이곳 현지 명문대 출신으로 화술이 좋고 생김새가 번듯했던 정 씨는 자동차 세일즈를 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하는 일에 비해서 씀씀이도 컸고, 스캔들도 제법 많았다. 자신을 ‘정 전 총리의 아들’이라고 자랑삼아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항간에는 정 전 총리로부터 많은 금전적 지원을 받았다는 소문이 무성했다”고 전했다.<ref name="ilyo01"/>
         [[1991년]] [[6월 5일]] 정성일은 [[서울가정법원]]에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 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ref name="hp107"/> 정성일은 "어릴 때부터 외할머니와 외삼촌으로부터 [[정일권]] 씨가 [[1967년]] 어머니와 교제해 다음해 나를 낳았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친자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그러나 [[6월 27일]] 외삼촌 정종구의 권유로 소송을 취하하고 다음날 다시 [[미국]]으로 출국했다.<ref name="hp107"/>
         19년 만에 출소한 [[정종욱]]은 [[정일권]]을 찾아가 만나겠다고 했으나, [[정일권]]의 면담 거부로 문앞에서 나왔다. 그 뒤에도 정종욱은 여러 번 [[정일권]]을 만나자고 했으나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정일권]]의 비서로부터 3,500만원을 생활비조로 받아냈다. 이후 [[정일권]]의 비서로부터 몇번의 생활비를 얻어냈다. 그러나 정성일이 자신의 친자라는 것은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아들 정성일은 미국에서 귀국, 국내로 들어와 [[정일권]]을 만나려 했으나 정일권이 계속 만나주지 않자 친자확인소송을 벌였는데, 돌연 소송을 취하하였다. 소송 취하의 배경을 놓고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 정지원 (1968년)
         [[1995년]] [[SBS 스포츠|한국 스포츠 TV]] 개국멤버로 방송인 활동을 시작했고, [[1997년]] iTV 인천방송(현, [[경인방송|경인방송 iFM]]의 전신)이 개국하자 인천방송으로 자리를 옮겼다. [[1998년]]부터 인천방송이 [[박찬호]]의 선발등판 경기를 비롯한 [[미국]] [[메이저 리그 야구|MLB]] 중계권을 획득하면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메이저 리그 캐스터로 활동했으며, MLB 중계권이 만료된 [[2001년]]부터 경인방송이 폐업하는 [[2004년]]까지 [[KBO 리그]] 캐스터로 활동했다.
  • 정진 (1979년)
         여수여문초등학교, 여수중학교를 졸업하여 동의대학교의 창단 멤버로 입학한다. [[1999년]] [[4월 11일]] [[동의대학교]]의 창단 첫 경기인 제33회 [[대통령기 전국야구대회]]에서 [[고려대학교]]를 상대로 9이닝 4피안타 1실점의 완투승을 거두며 [[동의대학교]]의 창단 첫 승리를 이끌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76794 동의대, 창단 첫전남서 고려대 제압] - 연합뉴스</ref> [[동의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팀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에 입단하였다.
         구단 산하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싱글 A]]에서 주로 중간계투로 등판했으며 [[대한민국]] 복귀 이후에도 주로 중간계투로 등판하였다. [[2004년]] 병역 비리에 연루되어 잠시 귀국하고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쳤지만 애틀랜타 구단에서 그에게 계속 관심을 가져 주었다. 제대 후 다시 도미, 애틀랜타에 복귀하여 [[2007년]]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싱글 A]] 올해의 투수상을 받았고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더블 A]]로도 승격되었으나,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트리플 A]] 및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는 오르지 못해 [[2009년]] 구단에 방출을 요청하여 퇴단한 후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51&aid=0000002216 메이저 리그의 치명적인 유혹] - 민기자닷컴</ref>
  • 정찬성
         === 미국 진출 ===
         한국 뿐 아니라 미국에서도 말이 많았는데 시기상 [[료토 마치다]] vs [[마우리시오 쇼군]]의 UFC 104, 프랭키 에드가 vs [[BJ 펜]] 의 UFC 112 등 판정논란으로 시끌시끌한 때였기에 더욱 그랬다. UFC 해설자인 [[조 로건]]은 심판들의 자질을 혹평하며 현재의 판정체계에 개선을 요구했고 파이트 메트릭의 분석에서도 정찬성의 압도적인 승리가 선언되었다.
         2010년 10월 WEC 51에서 조지 루프와의 대결했다. 정찬성이 미국 입장에선 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전 경기가 너무나 재밌어서 단 1경기만을 치르고 이 경기부터 메인 매치에 편입되었다([[김동현]] 선수도 2전째인 UFC 88의 VS 맷 브라운 전부터 방송경기이긴 했다. 그러나 이쪽은 원래 메인 매치중 [[카로 파리시안]]의 경기가 있었으나 파리시안이 부상을 당해 해당 경기가 취소되는 바람에 다크매치였던 김동현의 경기가 메인 매치로 격상된 것). 다소 끌려다는 듯한 느낌을 주던 정찬성은 2라운드 초반 과감한 공세를 펼쳤으나 루프의 원투-하이킥 콤비네이션을 정통으로 허용하며 생애 첫 KO패를 당하고 말았다. ~~제발 가드를~~
         경기 후 정찬성이 포이리에를 상대로 수술을 요하는 어깨 회전근 부상을 안고 싸웠던 게 뒤늦게 확인되었다. 수퍼액션 중계에서 김대환 해설위원이 미트조차 칠 수 없을 정도의 상태였다고 말할 때에는 믿지 않았던 사람들도 나중에 외신의 보도 등으로 그것이 사실로 판명되자 감탄을 넘어 황당해할 정도였으며 이 소식을 전한 미국의 <어포우징 뷰스>는 정찬성을 가리켜 정말로 좀비 같은 근성을 가졌다고 놀라워했다.
         [[2016년]] 10월 19일로 소집해제되었고 복귀전으로 [[BJ 펜]]을 원한다고 했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09&aid=0000006100|#]] 하지만 2월 5일(한국시간) 미국 휴스턴 도요타 센터에서 열리는 UFN 104의 메인이벤트에서 페더급 랭킹 9위 데니스 버뮤데즈를 상대로 복귀전이 확정됐다. 비록 원하던 BJ 펜은 아니지만, 부상 치료와 군복무 등으로 인한 장기간 공백에도 불구하고 복귀전이 메인이벤트로 잡히면서 미국내 정찬성의 인기는 여전함을 볼 수 있다.
         [[2018년]] 7월 20일에 드디어 [[프랭키 에드가]] vs 정찬성이 공식적으로 확정되었다. 다만, UFC 229가 아닌 [[11월 11일]]에 열릴 UFC Fight Night 139에서 경기가 있을 것이며, 정찬성의 경기는 그 대회의 '''메인 이벤트'''로 결정됐다. 5라운드 경기로 에드가가 5라운드 판정 경기에 능숙하다는 점 때문에 불안감을 주고 있다. 게다가 이 경기의 장소는 [[미국]] [[콜로라도 주]]의 [[덴버]]인데, 이 지역은 해발 1,500m 정도의 상당히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정찬성이 이로 인해 체력이 저하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http://naver.me/GJeUjkcH|#]] 만약 정찬성이 에드가를 이긴다면 타이틀전에 많이 가까워지게 된다. 정찬성의 말에 의하면 승리할 경우 타이틀전 보장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 정철길
         *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 경영학 석사
  • 정칠성
         [[1922년]]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에 다시 건너가, [[동경]]의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영어를 수강하였다. 그러나 비용 마련의 실패로 [[미국]] 유학의 꿈은 좌절되었다.
  • 정한용
         | 학력 = [[미국]] [[럿거스 대학교|뉴저지 주립 러트거스 대학교]] 대학원
         * [[미국]] [[뉴욕 대학교]] 대학원 매스미디어학과 언론학 수학<ref>[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20213027026 서울신문: 경남영상위원장 탤런트 정한용]</ref>
         * [[미국]] [[럿거스 대학교|뉴 저지 주립 러트거스 대학교]] 어학연수
  • 정호용
         1990년 3월에는 부인 김숙환의 자해 미수 사건으로 파란을 겪기도 했고, 4월 초에 [[미국]]으로 출국했다가 귀국하였다.
         * [[미국]] 라이온훈장
  • 제이 윤
         어린 시절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며, ‘미국을 이끌어 갈 차세대 음악 영재 100인’에 선정되기도 했다. 한국으로 귀국한 후 [[홍익대학교]] 영문학을 전공했다. [[2000년]] [[문차일드]]로 데뷔하였으며, 문차일드 해체 후 [[이수 (가수)|이수]], [[전민혁]]과 함께 [[엠씨 더 맥스]]를 결성하였다.
         [[2009년]] [[9월 17일]]에 논산훈련소에 입대, [[공익근무요원]]으로 군복무하게 되었다.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당초 군 입대를 지망하였으나 2008년 콘서트에서의 부상으로 현역복무가 불가하게 된 것이다.
         [[분류:엠씨 더 맥스]][[분류:대한민국의 록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전자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베이스 기타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바이올린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첼로 연주자]][[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2000년 데뷔]][[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홍익대학교 동문]][[분류:1982년 태어남]][[분류:울림엔터테인먼트 소속]]
  • 제임스 웡
         '''제임스 웡'''(James Wong)은 [[미국]]의 영화 제작자다.
         1959년 4월 20일 [[홍콩]]에서 태어났으며 10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로 거주지를 옮겼다. 엘카존밸리고등학교(El Cajon Valley High School)에서 [[글렌 모르간]](Glen Morgan)을 처음 만났으며 이후 제임스 왕은 로욜라마리모운트 대학교(Loyola Marymount University)에 진학했으며 코미디 진흥 동아리에도 가입했다. 원래 제임스 왕은 엔지니어링을 전공하고 있었으나 [[시네라마 돔]](Cinerama Dome)에서 [[지옥의 묵시록]](Apocalypse Now)을 본 뒤부터 전공을 영화로 바꾸었다. 졸업한 뒤에는 [[샌디 하워드]](Sandy Howard)의 조수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제임스 웡은 글렌 모르간과 함께 영화 각본을 만들었다.
         제임스 왕은 글렌 모르간과 함께 [[반항]](The Boys Next Door)의 각본을 만들었으며 그 뒤 제임스 왕은 [[ABC (미국 방송사)|ABC]](American Broadcasting Company)의 범죄 드라마 Knightwatch의 스토리를 담당했다. 또 그 뒤 제임스 왕은 글렌 모르간과 함께 [[와이즈가이]](Wiseguy), [[커미쉬]](The Commish), 21 Jump Street, Booker(21 Jump Street의 스핀오프) 등 [[스테펜 J. 칸넬]](Stephen J. Cannell)의 많은 작품들에 참여하기도 했다.
         [[분류:미국의 영화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5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
  • 조PD
         조PD는 [[1976년]] [[1월 27일]],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패션 디자이너인 어머니 정영혜와 기업인인 아버지 사이에서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5세때 [[한국]]에서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파슨스디자인대학]]과 [[버클리 음악대학]](Berklee College of Music)을 다녔다. 이미 중학교 시절 친구와 락 밴드를 할 정도로 음악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친구의 영향으로 [[:en:Naughty by Nature|Naughty by Nature]]를 접하면서 힙합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ref>[http://hiphople.com/musicsalon/1113961 "Music Salon - 조PD", Bluc, HIPHOPLE Music Salon, 2013년 9월 11일]</ref> 음악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1학년이었던 [[1998년]] 10월, PC통신 [[나우누리]] 신인가수방에 친구의 권유로 올린 [[MP3]] 음악 파일이 인기를 끌면서부터이다.<ref name="profile">[http://www.hiphopplaya.com/playa/view.html?pid=25&mode=profile 힙합플레이야 조PD 프로필. 원 출처 MOVIEWEEK]</ref> 그 중〈Break Free〉라는 곡은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욕설이 들어있는 충격적인 가사로 "청소년 유해 매체물"로 선정되면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그를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그는 수많은 기획사의 섭외를 물리치고 자신의 레이블 '''Stardom'''을 설립, 제작자를 겸업하였다.
         [[DNS (음악 그룹)|DNS]]가 해체할 무렵 힙합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디지털 마스터|Digital Masta]]와 조PD 사이의 갈등이 컸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즉 팀 활동 및 실적 부진을 Digital Masta는 회사 측에 조PD는 Digital Masta에게 물었다는 것이었다. 이 소문을 근거로 대다수의 팬들은 Future Flow에서 Digital Masta가 처음 탈퇴하고, 조PD가 책임을 지고 나가면서 Future Flow가 와해된 것으로 보았다. 이후 [[주석 (가수)|주석]] 2집 ''The Answer''라는 곡에 둘이 동시에 참여했는데, 이 곡의 조PD 가사가 과거 Digital Masta와의 갈등 상황과 묘하게 맞아 떨어져 조PD가 DM을 디스한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으며, 현재까지도 풀리지 않은 의문으로 남아있다. 이 외에도 2004년 발표한 조PD 5집 〈비밀일기〉라는 곡의 가사 중 "''나 얼마 지나 마련한 미국 개 한마리, 집 나가더니 어느날 뒤돌아 보니 주인인 나를 무네''"도 DM을 향한 비난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분류:197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분류:하이원 서울가요대상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한국대중음악상 수상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래퍼]][[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래퍼]][[분류:대한민국의 힙합 음악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버클리 음악 대학 동문]][[분류:이라크 전쟁 반전 운동가|조|대한민국]][[분류:내가네트워크]]
  • 조관우
         | 학력 =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미술학과 중퇴
         *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미술학과 중퇴(1990년)
         [[가야금]]을 전공하였고, 고등학생 때인 [[1982년]]에 [[가야금]] 연주자로 첫 데뷔한 그는 이후 1989년에서 1990년까지 잠시 미국 유학을 하였고 1990년 끝내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타바버라|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미술학과를 중퇴하였는데 1년간의 이 시절에 '''케빈 조'''(Kevin Joh)라는 영어 이름을 사용하였고 그 후 '''조관우'''라는 예명으로 가수 데뷔하기 전에 본명 '''조광호'''로 1집을 낸 전력이 있다.
         [[분류:2010년대 가수]][[분류:2000년대 가수]][[분류:1990년대 가수]][[분류:196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82년 데뷔]][[분류:미스터리 음악쇼 복면가왕 참가자]][[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자유 연애]][[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작곡가]][[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침례교도]][[분류:김제 조씨]][[분류:광주광역시 출신]]
  • 조정훈(야구선수)
         8월 8일 나온 기사에 의하면 결국 수술을 받고 현재 [[미국]]에서 1차 재활 중이라고 한다.[[http://osen.mt.co.kr/news/view.html?gid=G1008080062|기사]]
  • 조지프 윤
          | 직책 = [[말레이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 대사
          | 국적 = [[미국]]
          | 경력 = [[미국 국무부]] 국제정치외교행정특보위원
         '''조지프 윤''' (Joseph Yuosang Yun, 조지프 윤, [[1954년]] ~ )은 [[대한민국]] [[전라북도|전북]] [[전주시|전주]]에서 출생한 [[미국]]의 [[외교관]]이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01/2018020102876.html 조선일보 보도 자료 리스트]</ref>
         * [[말레이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 대사
         |직책 = 미국 국무부 대북 정책 특별대표
         {{토막글|미국|정치인}}
         [[분류:195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외교관]][[분류:한국계 미국인 정치인]][[분류:20세기 미국 사람]][[분류:21세기 미국 사람]][[분류:카디프 대학교 동문]][[분류:나이지리아에 거주한 미국인]][[분류:잉글랜드에 거주한 미국인]][[분류:스코틀랜드에 거주한 미국인]][[분류:싱가포르에 거주한 미국인]][[분류:스위스에 거주한 미국인]][[분류: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동문]][[분류:전주시 출신]][[분류:미국의 침례교도]][[분류:웨일스 대학교 동문]]
  • 존 딜린저
         대공황 시기 활동했던 [[미국]]의 범죄자. 딜린저 갱이라는 이름의 범죄 조직을 이끌면서 미국 중서부에서 [[은행강도]]를 벌였다. FBI에게 "공공의 적"으로 선포된 인물이기도 하다.
         결혼까지 했음에도 딜린저는 에드 싱글턴(Ed Singleton)이라는 남자와 함께 무어스빌의 식료품에서 강도짓을 벌인다. 그리고 빠르게 체포ㅋ. 싱글턴은 법정에서 자신이 무죄라고 주장해 징역 2년을 받았지만 딜린저는 아버지의 조언대로 죄를 고백했다가 징역 2~14년+징역 10~20년[* 미국은 범죄를 여러개 저지르면 형량이 따로 붙는다.]이라는 선고를 받고 큰집에 처박히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해리 피어폰트(Harry Pierpont)와 같은 동료들을 만나게 된다.
         7월 21일, 안나 세이지(Anna Sage)라고 자칭하는 여성이 경찰에게 연락해온다. 그녀의 정체는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포주일을 하던 아나 쿰파나슈(Ana Cumpănaș)였다. 이민 귀화국에서는 이 루마니아 출신 포주를 국외추방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이에 위기감을 느낀 쿰파나슈는 보상금을 주고 미국에 남게 해준다면 존 딜린저에 대한 정보를 주겠다고 연락한 것이었다. FBI는 보상금은 약속할 수 있지만 국외추방에 관한건 노동부의 협조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쿰파나슈는 이를 받아들였다.
         [[분류:미국 인물]]
  • 존 루터 존스
         John Luther Jones. 19세기 [[미국]]의 철도 기사. 어린 시절을 [[켄터키]] 케이시(Cayce)에서 보내서 "케이시 존스"(Casey Jones)라는 별명이 있다.
         구글에 Casey Jones를 치면 미국 [[만화]] [[닌자 거북이]]의 캐릭터만 줄창 나온다.
         [[분류:미국 인물]]
  • 주주장
         '''주주장'''(Juju Chang, [[1965년]] [[9월 17일]] ~ )는 [[미국]]의 [[저널리스트]]이다.
         [[분류:196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언론인]][[분류:미국의 기자]][[분류:스탠퍼드 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에미상 수상자]][[분류:유대계 미국인]]
  • 지누 (가수)
         | 출생지 = [[미국]] [[부산광역시]] [[중구 (부산광역시)|중구]]
         '''지누'''('''Jinu''', {{본명|지누 킴, 김진우}}, [[1971년]] [[10월 23일]] ~ )는 힙합 그룹 [[지누션]]에 속한 한국계 미국인 [[래퍼]]이자 [[싱어송라이터]]이다.
         신장은 180cm이고 체중은 71kg인 그는 [[비디오]] [[예술가]] [[백남준]](白南準)의 외손자(外孫子)이기도 하고 1993년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R&B]] [[가수]] 첫 데뷔하였다가 이듬해 1994년 [[미국]]에서 《김진우 1집》을 발표와 아울러 [[힙합]] [[가수]] 정식 데뷔를 하여 자작곡 《나는 캡이었어》로 활동했으나 참담한 실패를 겪은 후<ref>{{뉴스 인용
         }}</ref>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그곳에서 [[션 (가수)|션]]을 만나고 그 뒤 [[대한민국]]으로 다시 건너와서 [[서태지와 아이들]] 해체 이후 [[연예 기획사]]를 설립한 [[양현석]]에 의해 픽업되어 [[지누션]](Jinusean)이라는 [[힙합 음악|힙합]] 듀오를 결성하여 지누는 [[보컬리스트]] 겸 [[래퍼]]를 담당, [[션 (가수)|션]]은 [[래퍼]]를 담당하여 1997년부터 2004년까지《Gasoline》, 《말해줘》, 《내가》, 《이제 더 이상》, 《태권 V》, 《A-yo!》, 《전화번호》 등의 곡을 히트시키기에 이르렀다.
         [[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남자 래퍼]][[분류:미국의 개신교도]][[분류:미국의 래퍼]][[분류:부산광역시 출신]][[분류:20세기 미국 사람]][[분류:21세기 미국 사람]][[분류:미국의 힙합 음악가]][[분류:1994년 데뷔]][[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YG 엔터테인먼트 소속]]
  • 진창현(음악인)
         1976년 12월에는 [[미국]]의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The Violin Society of America) 주최의 제2회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 참가해 여섯 개 부문 중 바이올린 세공 부문, 비올라 세공/음향 부문, 첼로 세공/음향 부문에서 [[http://www.vsaweb.org/Previous-Conventions|금메달을 수상]]하면서 세계구급 제작자로 명성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Chang Heyern Jin이라고 표기된 수상자가 바로 진창현이다.] 1984년에는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에서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Hors Concours)[* 다른 악기 제작자나 감정가의 감사 없이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악기를 제작/판매할 수 있는 장인이라는 뜻.]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Master Maker) 칭호를 받았다.
         이후에도 계속 초후의 센가와 공방에서 현악기 제작을 계속 했고, 2000년에는 미국 [[신시내티]]에서 열린 국제 현악기 제작자 경연대회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무감사 현악기 제작자의 제작 참고 악기로 선정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2001년에는 광주시립미술관에 바이올린 '광주호'를 시작으로 이듬해 바이올린 '대구호', 비올라 '한라호', 첼로 '백두호'까지 네 점의 악기를 무상 기증하면서 [[대인배]] 인증을 하기도 했다.
          * 미국 현악기 제작자 협회 무감사 제작자 자격과 마스터 메이커 칭호 (1984)
          * 인력거꾼으로 일할 때 [[영어]]를 할 줄 알았기 때문에 주로 주일[[미군]]을 고객으로 맞이했고, 덕분에 수입이 꽤 좋았다고 한다. 이 시기에 톰(Tom)이라는 이름의 [[루이지애나]] 출신 [[흑인]] 병사와 친해졌는데, 톰의 소속 부대가 [[한국전쟁]]에 투입되기 위해 일본을 떠나기 전에 같이 술집에서 술을 마시면서 미국에서 차별받던 흑인과 일본에서 차별받던 조선인의 심정을 나누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 짐 리
          | 별칭 = 어렸을 때 [[미국]]식 [[영어]] [[이름]]은 '''짐 용 리'''(Jim Yong Lee)
          | 학력 =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역사학]]과·[[심리학]]과 [[학사]]
          | 소속 = [[미국]] [[DC 코믹스|D.C. 코믹스]] 발행부 차장<br/>前 [[미국]] [[DC 코믹스|D.C. 코믹스]] 편집부 차장
         '''짐 리'''({{llang|en|Jim Lee}}, [[1964년]] [[8월 11일]] ~ )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한 [[한국계 미국인|한국계 미국]] [[만화가]]이다.
         그의 [[한국어]] [[이름]]은 '''이용철'''(李鏞哲)이며 한때 [[미국]] 이주 시절 그의 어렸을 때 [[영어]] [[이름]]은 '''짐 용 리'''({{llang|en|Jim Yong Lee}})이다.
         신장은 171cm이고 체중은 70kg이며 세련되고 역동성 있는 작화법 스타일로 유명한 아티스트라 알려져 있는 그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출생하였으며 한때 [[인천광역시|경기도 인천]]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고 5살 때였던 [[1969년]]에 [[미국]] [[미주리주|미주리 주]] [[세인트루이스|세인트 루이스]] 이민을 간 이후 그곳에서 성장하였으며 이후 1986년 6월, 미국에서 [[만화가]] 첫 등단하였다.
         그는 [[1991년 11월]], 〈[[비숍 (마블 코믹스)|비숍]]〉이라는 [[슈퍼히어로 영화|슈퍼 히어로 만화]] 캐릭터를 창안하여 [[미국]] 전역에서 인기를 얻었다.
         미국 만화가 겸 영화감독 [[프랭크 밀러]](Frank Miller)의 영향을 주로 받은 그의 대표작에는 슈퍼 히어로 [[만화]] 작품 《X-Men: Legacy》, 《WildC.A.T.s》, 《All Star Batman & Robin, the Boy Wonder》 등이 있다.<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03/2017080300092.html 조선일보 보도 자료 관련 리스트]</ref><ref>[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2/25/2019022500082.html 조선일보 보도 자료 관련 리스트]</ref>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만화가]][[분류:1986년 데뷔]][[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광주시 (경기도) 출신]][[분류:프린스턴 대학교 동문]][[분류:프랭크 밀러]][[분류:스탠 리]][[분류:미국의 기업인]][[분류:미국의 영화 각본가]][[분류:미국의 과학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0세기 미국 사람]][[분류:투자가]][[분류:21세기 미국 사람]][[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사람]][[분류:캐나다에 거주한 미국인]][[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미국인]][[분류:홍콩에 거주한 미국인]][[분류:프랑스에 거주한 미국인]][[분류:이탈리아에 거주한 미국인]][[분류:스페인에 거주한 미국인]][[분류:미국의 미술 평론가]][[분류:만화 평론가]][[분류:마블 엔터테인먼트 사람]][[분류:비디오 게임 평론가]][[분류:미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비디오 자키]][[분류:미국의 수필가]][[분류:미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미국의 블로거]][[분류:미국의 유튜버]]
  • 차학경
         '''차학경'''(車學慶, Theresa Hak Kyung Cha, [[1951년]] [[3월 4일]] [[부산광역시]] - [[1982년]] [[11월 5일]])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미술가]]이자 [[작가]]이다.
         [[부산광역시|경상남도 부산]]에서 태어나 [[1961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하와이 주|하와이]]와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캘리포니아]] 소재 [[버클리 대학]]에서 [[문학]], [[예술 이론]], [[행위 예술]], [[영화]] 등 다방면에 걸쳐 공부했으며, 예술 분야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프랑스]] [[파리 시]]에서 영화제작과 비평이론을 공부했다. 1980년 미국으로 돌아와 뉴욕에 정착하면서부터 제3 세계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동시에 어떤 한 장르에 국한되지 않는 활동을 펼쳤다. 1982년, 첫 저서인 《[[딕테]](Dictee)》의 출간을 불과 며칠 남겨둔 어느 날, [[뉴욕]]에서 한 괴한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 찰스 리 (생물학자)
         |residence = [[미국]]
  • 창원시
          * [[미국]]
  • 창작:치킨교
         본래 [[미국]]에서 [[노예]]로 착취 당하던 흑인 노동자들에게 평화와 영양을 전하시던 것이, 흑인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선지자 샌더슨의 입을 통해 증거되시어 [[KFC]]란 교단을 일으켜 한국에 전해지게 되었다.
         후라이드 치킨교도들이 흔히 "제1차 외식전쟁"에서 죽을 쑤자 나타난 종파였다. 제1차 외식전쟁은 미국의 위대한 선지자 맥도날드와 피자헛이 한반도에 선교를 하러 오고, 한국인지 일본인지 애매한 하이브리드인 롯데리아가 참전하면서 시장통을 지배하던 후라이드 치킨교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시작된 전쟁이었다. 이 전쟁 결과로 치킨교는 제법 상당한 피해를 감수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 피해로 인해 후라이드 교는 일종의 종교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내부에서도 별도의 총대주교(소스) 세력에 불과하면 양념파가 따로 떨어져 나오는 결정적인 빌미가 된 것.
          1. 소위 케이준 스타일이라 불리는 미국의 이단종파 KFC에서 유래하였을 가능성
  • 천경자
         || '''사망''' ||[[2015년]] [[8월 6일]](향년 90세), [[미국]] [[뉴욕(주)|뉴욕 주]] [[뉴욕|뉴욕 시]] ||
         1991년 일어난 [[천경자 미인도 위작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녀의 창작활동은 파탄을 맞게 된다. 그녀 자신이 그린 적이 없는 그림이라고 주장하였으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절필을 선언하고 잠시 미국으로 요양차 떠나 있었으나, 얼마 뒤 귀국해 다시 붓을 잡기 시작하였고(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절필은 일시적인 것이였다) 1995년 호암갤러리[* 과거 중앙일보사 지하에 위치해 있었다. 용인에 위치한 호암미술관(삼성미술관 리움의 전신)의 별관이였으나, 2004년 삼성미술관 리움이 개관하면서 이곳을 중앙일보사에 되돌려 줌에 따라 폐관되었다.]에서 첫번째 회고전(11.1~11.30)을 개최한다. 당시 회고전은 굉장한 화제가 되어서 전시장 매표소에서 시작된 줄이 호암갤러리 밖 서소문 거리에까지 이어졌을 정도였고, 한달 동안 8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갔으며, 마지막 주말에는 하루 5천명까지 입장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회고전을 기획했던 前 호암미술관 큐레이터인 최광진의 저서 "천경자 평전"에서 언급되는 내용이다],[* 이러한 흥행은 작가의 대중적 인기가 높았던 것도 이유이지만, 당시 천경자가 전시장에 거의 매일 직접 나와서 관람객을 맞고 사인을 해 주기도 한 것도 어느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역시 최광진이 집필한 "천경자 평전"에 언급된다.]. 그러나 1998년 9월 건강이 나빠져 결국 한국 생활을 접고 큰딸이 머물고 있는 미국 뉴욕으로 떠났고, 11월에 일시 귀국하여 그동한 가지고 있던 채색화와 드로잉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다[* 이것을 토대로 현재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는 따로 "천경자실"이 마련되어 천경자의 기증작품들이 연중 상설전 형태로 전시되고 있다].
         == 미국으로 떠난 이후 ==
         아이러니컬하게도 미국으로 떠난 뒤 그녀의 작품 가격이 치솟아서 2013년 현재도 그녀의 작품은 미술 시장에서 가격이 가장 치솟은 작가로 꼽힌다.[* 경제학적으로 보면 당연한게, 공급은 끊겼는데 수요는 이슈화되면서 올라갔으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사실 상당수 작가들이 죽어서 뜨는 경우가 많다. 재주는 예술가가 부리고 돈은 콜렉터들이 버는 경우도 많다.] 2003년에 호당 1000만원대이던 그녀의 작품은 2013년 현재는 호당 4000만원대를 호가한다는 것.[* 하지만 이는 해외예술시장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 없다. 해외에서야 천억원이 넘는 작품도 경매에서 나오니. 전반적으로 한국예술시장은 규모가 초라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해외예술시장이 그만큼 투기 열풍에 휩싸였다 봐야겠지만.] 그녀가 1998년 미국으로 떠난 뒤 공개적인 작품활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고가는 계속 될 거라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런 탓에 그녀의 작품의 다른 위작이 나오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 천풍조
         1968년에 입단하였으며, 1972년부터 [[부산일보]]에 관전기를 집필했다. 1978년부터 3년 연속으로 [[국기전]] 본선에 진출하였고 1985년 바둑왕전 본선에 올랐다. 이후 [[캐나다]]와 [[미국]] 등지에 바둑을 보급하는 데 공헌하였다. 1987년 바둑왕전 본선에 올랐고 1989년부터 3년 동안 바둑왕전에 연속 진출하였다. 1990년 제2기 동양증권배 본선에 올랐으며 1991년 제1기 비씨카드배 본선에 진출하면서 7단으로 승단했다. 1993년 제24기 [[명인전]]과 박카스배 본선에 진출하였다. 2005년 8단을 거쳐 2012년 7월에 9단으로 승단하였다.
  • 최경환 (야구인)
         '''최경환'''(崔景煥, [[1972년]] [[5월 12일]] ~ )은 전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외야수]], [[지명타자]]이자, 현재 [[KBO 리그]] [[두산 베어스]]의 2군 타격코치이다. [[대한민국]] 야구 선수 중 야수 포지션에 있는 선수 중 최초로 [[미국]]으로 진출하였다.<ref>[http://www.dailian.co.kr/news/news_view.htm?id=109423 "허슬" 최경환…포기할 수 없는 도전] - 데일리안</ref>
         ===미국 프로야구 시절===
         [[1992년]] [[경희대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팀으로 뽑혀 한·미선수권 참가차 [[미국]]으로 갔고 에인절스의 극동 담당 스카우트의 눈에 보이면서 [[미국]]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995년]]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LA 에인절스]] 산하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마이너 리그]] 팀에 입단하여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51&aid=0000001816 최경환-아버님께 유종의 미 선사할 것!] - 민기자닷컴</ref>
         곧바로 귀국하여 [[LG 트윈스]]와 계약, [[대한민국]] 리그에는 [[2000년]]부터 활동했다. 그가 [[미국]]에서 떠난 이후, [[최희섭]]이 [[대한민국]] 타자로는 처음으로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무대를 처음 밟게 되었다. LG에서는 2시즌만 뛰고 방출당했다.
         일찍이 [[미국]]으로 건너갔고 [[멕시코]] 리그도 경험하여 [[영어]]와 [[스페인어]]에 능통하다.
  • 최계훈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모교인 [[인천고등학교]]에서 야구부 감독을 역임했고, [[2011년]] [[LG 트윈스]]의 [[투수]] 코치로 돌아왔으나, 그 해 [[LG 트윈스]]가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박종훈 (1959년)|박종훈]] 감독이 사임했을 때 동반 사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야인으로 지냈다.
  • 최광수 (공무원)
         | 학력 =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 [[사회과학]] [[석사]]
         제7회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1956년]] [[2월]]을 기하여 외무부에 입부되었다. 그는 [[경기고등학교|서울 경기고등학교]]를 거쳐 [[1957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미국]] [[조지타운 대학교]] 대학원 외교학과의 [[외교학]] [[석사]] 과정을 마쳤다. 주미 3등서기관, 주일 2등서기관, 동북아주과장, 주미 참사관, 통상진흥관, 아주국장, 국방부 차관, 대통령비서실장, 제1무임소장관, 체신부장관, [[주사우디아라비아 대한민국 대사관|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 주유엔 대사, 외무부장관, [[하버드 대학]] 아시아문제연구소 초빙연구원([[1992년]]-[[1993년]])을 역임하였다.
  • 최동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관직을 내놓고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나러 도일했다. 최동은 [[가톨릭]] 계열인 [[도쿄]]의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서 수학했다. 이때 아버지는 이미 [[미국]]으로 떠나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던 시기라 고학을 하며 공부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8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맡았다. 1941년에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해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한 일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 최성수 (가수)
         [[부산광역시|부산]] 출생이며 [[서울특별시|경기도 서울]]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녀는 [[1982년]] 언더그라운드 라이브 클럽에서 솔로 통기타 음악 가수 첫 데뷔하였고 이듬해 [[1983년]]에 《그대는 모르시더이다》로 [[솔로]] [[가수]] 정식 데뷔한 이후 《풀잎 사랑》, 《동행》, 《남남》, 《기쁜 우리 사랑은》등의 히트곡이 있다. [[1985년]]에는 [[영화]] 《창밖에 잠수교가 보인다》의 단역으로 [[영화 배우|영화배우]] 데뷔한 바 있으며 이어 같은 해 "[[꾸러기들 (음악 그룹)|꾸러기들]]"이라는 [[포크송|포크 팝]] [[보컬]] [[음악 그룹]]에서 잠시 활동하였고 그 후 [[1987년]] [[솔로]] [[가수]] 활동을 재개하였으며 [[2002년]]에는 [[뮤지컬 배우]]로 데뷔하였다. [[미국]] [[버클리 음악 대학|버클리 음악대학교]]에서 [[뮤지컬]][[학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예당아트TV]] 사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 [[미국]] [[버클리 음악 대학|버클리 음악대학교]] [[뮤지컬|뮤지컬학과]](부전공: [[작곡]]) [[학사]]
         * [[미국]] [[:en:American Musical and Dramatic Academy|아메리칸 뮤지컬 앤드 드라마틱 아카데미]] 음악대학원 음악연출학과 [[음악학]] [[석사]]
         [[분류:골든디스크 본상 수상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팝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해주 최씨]][[분류:1982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동아방송예술대학교 교수]][[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프로듀서]][[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분류:중앙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동문]][[분류:버클리 음악 대학 동문]][[분류:196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부산광역시 출신]]
  • 최순달
         * [[1969년]] [[미국]] [[스탠퍼드 대학교]] 공학박사 취득
  • 최신해
         본관은 [[경주 최씨|경주]](慶州)이고 [[호 (이름)|호]]는 삼락당(三樂堂, 三落黨), 향당(鄕黨)이다. [[부산광역시|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부산부]]에서 국어학자 [[최현배|외솔 최현배]](외솔 崔鉉培)의 셋째아들로 출생하였으며 한때 [[경주시|경상북도 경주]]와 [[해주시|황해도 해주]]에서 각각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이후 [[울산광역시|일제 강점기 경상남도 울산군 울산면]]에서 성장한 그는 [[연세대학교|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나온 이후 [[경성제국대학교]] 의과대학 의학부 [[정신과]] 교실에서 연구하다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교]] 부속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연구를 계속 하였다.
         * [[1955년]] [[미국]] [[하버드 대학교]] 부속 [[매사추세츠 주|매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연구.
  • 최영욱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光州)에서 최학신(崔學新)과 공(孔)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1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대학 졸업 이후 다시 [[캐나다]]로 건너가 [[토론토 대학]]에 입학, 수학하였다. 목사이자 전국의 나병환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던 [[최흥종]](평양신학원 졸업)은 10년 연상의 이복 형이었다.
         군정 초기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그의 도움은 유익한 것이었다. 결국 그는 군정 부지사로 임명되었다. 군정 당국은 인민 위원회를 참을성 있게 조종함으로써 활동적인 그들을 장악할 수 있었다.<ref>신복룡, 김원덕, 《한국 분단 보고서 1》 (풀빛, 1992) 138페이지</ref> 이어 형 [[최흥종]]과 처 김필례 (미국 컬럼비아 대학 석사)가 [[전라남도]] 도청 고문관과 통역관으로 임명되었다.
  • 최영희 (1921년)
         |서훈 내역=[[대한민국]] 금성충무무공훈장(1950.12)<br />은성충무무공훈장(1951.2)[[미국]]<br /> <은성무공훈장(1951.3)<br />[[대한민국]] 금성을지무공훈장(1952.5)<br />[[미국]] 동성무공훈장(1952.9) <br />동성충무무공훈장(1952.12) <br />[[미국]] 근무공로훈장(1953.5)<br />태극무공훈장(1953.6) <br />은성을지무공훈장(1953.9) <br />[[에티오피아]] 일등성장 명예훈장(1968.5)
         * 1952년 : [[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졸업
         * 1962년 2월 : 미국 [[조지 워싱턴 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 1951년 03월 미국 은성무공훈장
         * 1952년 09월 미국 동성무공훈장
         * 1953년 05월 미국 근무공로훈장
         [[분류:1921년 태어남]][[분류:200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법학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분류:박정희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육군참모총장]][[분류:대한민국의 연합참모총장 직무대리]][[분류:대한민국의 합동참모의장]][[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장]][[분류:휘문고등학교 동문]][[분류:군사영어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통위부 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센슈 대학 동문]][[분류:미국 육군지휘참모대학교 동문]][[분류:조지 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터키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수성 최씨]][[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
  • 최용민(연극배우)
         *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en:Saint Joseph's University|세인트 조지프스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문학 석사
  • 최은희
         그 후 북한에서도 영화 활동을 이어 나가면서 1985년에는 영화 <소금>으로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타기도 했다. 1986년 3월 13일, [[신상옥]]과 함께 [[오스트리아]]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던 도중,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해 10년 넘는 망명생활을 하다가 1999년에 영구 귀국했다.
  • 최은희 (1926년)
         [[1986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도중에 오스트리아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탈출하여 탈북에 성공했다.<ref>[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4300&num=38333 신상옥・최은희 부부 탈출(1986.3.13)], 《데일리NK》, 2007년 03월 13일</ref> 장남인 [[신정균 (1963년)|신정균]] 역시 [[영화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분류:1928년 태어남]][[분류:2018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어린이 배우]][[분류:일제 강점기의 여자 어린이 배우]][[분류:1942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작사가]][[분류: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분류:보성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감독]][[분류:대한민국의 여성 기업인]][[분류:20세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영화인]][[분류:광주시 (경기도) 출신]][[분류:납북자]]
  • 최준석
         최준석이 친정팀 [[롯데 자이언츠]]로 복귀하게 되면서 [[미국]] 진출을 추진하고 있는 [[윤석민(투수)|윤석민]]을 제외하고 2013 스토브 리그 FA 시장이 폐장했다.
  • 최홍만
         2010년 3월 즈음 일본의 괴물군이라는 드라마의 프랑켄 역으로 출연이 결정되었다. 분장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러워서 여기 저기서 대체 왜 저런 짓을 하냐는 악플이 달렸고 촬영을 위해 아예 일본에서 거주하다가 까이기도 했다.[* 출신이 어떻든 일단 연예인으로 나선 만큼, 기괴한 분장을 마다하지 않고 연기하고 활동을 위해 해외에서 거주하는 것이 칭찬을 할 수는 있어도 잘못된 일은 전혀 아니다. 그런 논리라면 메이저 리그 활동 야구 선수나 LPGA 활동을 위해 미국에 건너가 있는 선수들도 다 까야 한다.] 하지만 원작자는 더 없이 완벽한 싱크로라고 극찬했다.
         ~~5번 항목의 모든것이 설명된다.~~ [[미국]] 네바다 주에서 [[브록 레스너]]와의 경기를 가지기 위해 신체 검사를 받다가 [[뇌하수체 종양]]이 발견되었다는 결과가 나와서 경기가 중단되는 일이 있었다.[* 경기 일주일 전까지는 경기를 치루는데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하였지만, 3~4일을 앞두고 최홍만을 포함한 대다수 선수가 메디컬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하고 결장하여 큰 돈을 들인 다이나마이트 미국 대회가 망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일본에서 열었던 대회 때처럼 3~4일 전 대회 준비를 하려다가 미국 주 체육위원회의 대회 운영 방식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K-1의 병크다.(PRIDE도 미국 진출 당시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미국 주 체육위원회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던 국내와 일본 격투 언론들은 '''UFC의 K-1 진출을 막기 위한 음모다'''는 음모론 기사를 쏟아내었다.~~UFC만 조금 봤더라도 그런 소리는 못한다~~] 최홍만 측에서는 건강에 문제가 없다면서 검사 결과에 반발했다.
  • 최희섭
         [[광주제일고등학교|광주제일고]]를 졸업하고 연고 팀 [[해태 타이거즈]]의 1차 지명을 받았으나 [[고려대학교|고려대]] 법학과(1998학번,중퇴)에 입학했다. [[1999년]]에 [[고려대학교|고려대]] 법학과(1998학번)를 중퇴하고 [[미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팀 [[시카고 컵스]]에 입단하였다. 그로 인해 대한야구협회에서는 협회의 사전 동의 없이 대학 재학 중 계약한 [[김병현]]과 최희섭에게 무기한 자격 정지를 내려 [[대한민국]] 무대에서 뛸 수 없게 되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511360 대한야구협, 김병현·최희섭 무기한 자격 정지] - 연합뉴스</ref> 3년 동안 [[마이너 리그 베이스볼|마이너 리그]] 생활을 거친 뒤, [[2002년]] [[9월 3일]] [[시카고 컵스]] 선수로서 처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광주에 출장했다. 그 전에 [[최경환 (야구인)|최경환]]이 타자로 [[미국]]에 처음 진출했지만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는 오르지 못했기 때문에 한국인 타자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 무대에 선 것은 그가 최초였다. 메이저 리그에 승격하기 전, 25홈런 이상을 때려줄 것이라는 기대 받는 유망주였다. 그러나 2003년 6월 내야플라이를 잡으려다가 캐리 우드와 부딪혀, 뇌진탕을 겪었고 이후부터 부진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다. <br />결국 [[2003년]] 시즌 후 [[마이애미 말린스|플로리다 말린스]]로 트레이드되었다가 시즌 중인 [[2004년]] [[7월 30일]]에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로 다시 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주전 자리를 확보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한 채 [[2006년]] 스프링캠프 도중 [[보스턴 레드삭스]]로 트레이드되었고, 25인 로스터에서 제외되어 [[보스턴 레드삭스]] 산하 [[트리플 A]] 팀인 포터킷 레드삭스에서 시즌 개막을 맞았다. [[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 참가하여 병역을 해결하였지만, [[2006년]] 시즌 도중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의 40인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2007년]] 웨이버 공시로 풀린 후 그는 [[탬파베이 레이스]]와 [[스플릿 계약]]을 맺었으나, 결국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메이저 리그]]에 복귀하지 못하였다. [[2007년]] 5월, [[해외진출선수 특별지명회의]]에서 자신을 지명한 [[KIA 타이거즈]]에 입단하기 위해 그는 [[탬파베이 레이스]] 구단 측에 방출을 요구하였고 탬파베이 측에서 승인했다. 그를 다시 지명한 연고 팀 [[KIA 타이거즈]]로 이적하여 [[대한민국]]에서 프로 생활을 재개하였다.
         [[2007년]] 12월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결혼]]할 예정이었던 [[일본]]인 약혼녀 야스다 아야와 결혼을 앞두고 [[11월 26일]]에 파혼하였다. 파혼의 이유는 성격 차이와 결혼 이후 사회 활동에 대한 의견 차이로 알려졌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73&aid=0000086675& 최희섭 충격 파혼…日야스다 씨와 합의 하에 헤어져] - 스포츠서울</ref> 특히 결정적인 이유는 그가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 팀으로 오게 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대한민국]] 복귀 첫 해에 부진하였던 그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최희섭은 이후 [[2010년]] [[12월 6일]]에 [[서울특별시|서울]] 신라호텔에서 [[미스코리아]] 출신 [[김유미 (1983년)|김유미]]와 결혼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0&aid=0002189951 최희섭 장가 가던 날 ‘홈런 스윙 세리머니’] - 동아일보</ref>
         * [[2003년]] 미국 메이저 리그 내셔널리그 이 달의 신인 선정 (대한민국 선수 최초)
  • 추미애
         ||<#1870B9> '''{{{#FFFFFF 약력}}}''' ||<(> 제24회 [[사법시험]] 합격[br][[춘천지방법원]] [[판사]][br][[광주고등법원]] 판사[br][[새천년민주당]] [[최고위원]][br][[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방문교수[br][[민주통합당]] [[최고위원]][br][[더불어민주당]] 당 대표 ||
          * [[2003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미국]]/[[일본]] 특사'
          * [[2004년]] ~ [[2006년]]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방문 교수
          * [[현재]] 국회 의원외교협의회 부회장(미국), 의원외교친선협회 회장(체코), 부회장(터키)
  • 칠곡군
         왜관은 [[대한민국]]에서 [[일본]], [[미국]], [[독일]]의 영향을 모두 받은 특이한 지역이다. 지명의 유래, 미군 주둔, 그리고 독일 계열인 [[http://www.osb.or.kr/|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등의 영향을 골고루 받고 있는 국내에서도 극히 유래가 드물다. 특히 성 베네딕토회 왜관 수도원 인근은 2004년 [[권상우]], [[하지원]] 주연의 '신부수업'이라는 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또 전화번호부를 보면 긴 이름, 영어 이름이 아주 많은 특징이 있다.
         자동차 문화에서도 국제성이 확연한데 거리에서는 [[토요타]]가 정식으로 한국에 진출하기 20여년 전에도 이미 토요타가 있는 등, 미군들이 자기네들 자가용의 목적으로 들여온 미국 사양의 자동차가 상당히 많은 편이다. 미국차인 [[제너럴 모터스]]. [[포드(자동차)|포드]], [[크라이슬러]]는 물론, 토요타, [[닛산]], [[혼다]], [[스바루]], [[스즈키]].[[미츠비시]] 등의 일본차, [[메르세데스-벤츠]], [[BMW]], [[아우디]], [[폭스바겐]] 등의 독일차들도 오래된 차량부터 최신 연식의 차량까지 드물지 않다. 심지어는 알파로메오까지 있으며 트럭 한정이지만 [[볼보]]와 [[스카니아]]의 대리점이 같이 있다. 미군부대 후문의 식당들도 상당한 수준의 개성이 있는 편이다.
         그런데 2011년에 이 지역에 주한미군 전역자들이 미군이 몰래 과거에 [[고엽제]] '에이전트 오렌지'를 매립했다고 고백해 미국과 한국이 공동수사에 들어갔고 한때 주한미군 기지 주변 거주민들을 대상으로 환경영향평가를 실시하고 기지 주변의 흙을 수거해 조사를 했으나 결론은 별 다른 문제 없음이였다.실제로 해당 고백 사건 당시 기지 주변에서 오래 살았던 거주민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그동안 별 탈없이 살았는 데 뭔 일 있겠어였지만 산 지 얼마 안 된 주민들은 불안해 하는 어떻게 보면 이중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 '''석적읍'''[*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있는 동네] ||<:>{{{#1870B9 '''33.66%'''}}}||<:>{{{#696969 25.12%}}}||<:>'''19.32%'''||<:>'''12.22%'''||<:>'''9.16%'''||<:>{{{#696969 △8.54}}}||<:>{{{#696969 69.70}}}||
  • 칼 루이스
         [[미국]] 의 유상선수. 단거리와 멀리뛰기에서 주로 활약하였다.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빠른 남자의 대표자. 육상 선수로서 칼 루이스의 명성은 21세기 초의 [[우사인 볼트]]와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분류:육상선수]] [[분류:채식주의자]] [[분류:미국 인물]]
  • 칼렉시트
         [[미국]]에서 [[캘리포니아 주]]의 탈퇴와 독립 국가 캘리포니아의 건설을 요구하는 움직임이다. 칼렉시트는 캘리포니아와 exit의 합성어이다.
         캘리포니아는 미국 내에서 특별한 지역이다. GDP는 세계 6위 수준으로, [[대한민국]]이나 [[프랑스]]보다 높다. 미국 50개주 가운데서 가장 많은 인구(3900만명)와 가장 많은 선거인단(55명)을 보유하고 있다.
         이전에도 소수의 움직임이 있었으나, 2016년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후보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움직임이 폭발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민주당의 힐러리 클링턴은 61.5%의 지지를 얻었으나 대통령 선거에서는 패배하고 말았다. 도널드 트럼프는 [[인종차별]]이나, 여성에 대한 모욕 발언 으로 구설수가 많은 후보였기 때문에 캘리포니아 주민들에게 불만이 터져나오게 된 것이다. [[트위터]]에서 ‘칼렉시트’(#Calexit), ‘칼리브포니아’(#Caleavefornia) 등의 [[해시태그]]를 사용하며 급격히 퍼져나가게 되었다.
          * 셜빈 피셔버(Shervin Pishevar) - 우버의 개발자이며, 하이퍼루프 원의 공동창업자. CNBC에서 "캘렉시트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다"고 발언하며, "이것은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애국적인 일이고, 미국을 떠난 캘리포니아를 '뉴 캘리포니아'라고 부르겠다"고 주장했다.--[[뉴 캘리포니아 공화국]]?-- 셜빈 피셔버는 예스 캘리포니아 캠페인을 구상하고 있으며, 스페인 카탈루냐의 독립운동을 모델로 하여 2019년 국민투표를 제안하였다. 그는 캘리포니아가 국가가 된 뒤에 다시 연방에 들어와도 된다고 발언했다.
         과거 [[남북전쟁]]에서 미국은 무력으로 연방을 탈퇴하려는 남부 주들의 연합을 저자한 바 있다.
  • 칼리파 하프타르
         [[리비아]]의 [[군인]], 정치 지도자. [[카다피]]의 동료였다가, [[차드]]의 포로가 되었다가, [[CIA]]에 포섭되어 [[미국]]에 가고, 카다피 사후에 리비아로 돌아온 기이한 경력의 인물이다. 2014년 부터 리비아 동부 지역의 군사적 지도자로 활약하고 있다.
         === 미국으로 ===
         포로 신세가 된 하프타르에게 접근한 것은 당시 카다피와 적대하던 [[미국]]이었다. 1990년 [[미국]]의 [[CIA]]는 난민 프로그램을 통하여 수단에서 하프타르와 300명의 포로 병사들을 미국으로 입국시켰다. 하프타르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여 20년 동안 미국에서 거주하면서, 미국 정보부의 협력하여 카다피 암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 캐딜락&디노사우르스
         본디 원작은 마크 슐츠[* [[피너츠]]의 작가와 성씨가 같지만 혈연관계는 아니다. 나중에는 슈퍼맨&배트맨 vs 에일리언&프레데터 같은 작품을 쓰기도 했다.]의 제노조익 테일즈(Xenozoic Tales). [[만화]]가 히트한 후 당시 애니메이션의 주 시청자인 미국의 10대 소년, 소녀들에게 맞게 원작의 폭력적이고 선정적인 부분을 삭제하면서 내용을 변형시키고[* 그러한 부분들을 삭제하니 내용 자체가 안 이어져서 그냥 애니메이션 오리지널 스토리로 만들었다고 한다.] 제목을 바꿔서 [[애니메이션]]화한 것이 바로 캐딜락&디노사우르스이다. 이후 애니메이션을 베이스로 [[마블 코믹스]]에서 이걸 다시 만화화했으며, 또 이 만화를 [[캡콤]]이 [[벨트스크롤 액션게임]]화한 것 또한 캐딜락&디노사우르스이다. 본 항목에서는 게임 위주로 서술한다.
         서기 2513년 미국 동부,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 환경 오염 등의 문제로 지구에서 생존이 불가능해진 인류는 지하 주거시설을 만들고 600여년 동안 틀어박혀 지냈었다. 그 후 600여년의 세월 후 다시 지상으로 돌아왔을 때, 인간이 없어진 지상은 자정 능력 덕분에 예전처럼 맑고 건강해져 있었다. ~~본격 인류 해충설 인증 성공~~
         각 스테이지를 시작할 때마다 지도가 나오는데, 아무리 봐도 [[wiki:"미국"이 동네]]가 틀림없다. 덧붙여 각 지형상의 명칭들 중엔 가칭도 있으므로 주의. ~~어짜피 중요성은 없지만.~~
  • 캐리 피셔
         [[미국]] 헐리우드에서 활동한 영화 배우, 작가. [[스타워즈 시리즈]]의 [[레아 오르가나 솔로]] 역할로 유명하다.
  • 커맨드 앤 컨커: 제너럴
         [[RTS]] 게임인 [[커맨드 앤 컨커 시리즈]]의 작품. 2003년 발매되었다. 테러조직인 [[GLA]]에 대항해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고 싸우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 코스트코
         [[미국]]에 본사가 있는 회원제 도소매 체인점. 식료품에서 전자제품 등 다양한 상품을 폭넓게 취급한다.
  • 클라라 (1985년)
          | 학력 = [[미국]] [[엘 카미노 주립 커뮤니티 전문대학]] 패션디자인학과 [[전문학사]]
         2002년 미국에서 뮤지컬배우 첫 데뷔하였고 2004년 대한민국에서 CF 광고 모델 첫 데뷔하였으며 이후 2006년 대한민국 KBS 한국방송공사 TV 시리즈에서 텔레비전 연기자 데뷔하였다.
         * 1992년 [[영국]] [[런던 ACS 국제 학교]](前) → 1994년 영국 [[런던 아메리컨 스쿨]](前) → 1995년 [[캐나다]] [[온타리오주|온타리오 주]] [[오타와 엘름우드 여학교]](前) → 1996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캘리포니아 주]] [[웨스트 밸리 크리스천 스쿨]](前) → 1997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 머테이오 퍼시픽 림 인터내셔널 스쿨]](前) → 1998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라 절러 컨트리 데이 스쿨]](前) → 2000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프레즈노 크리스천 고등학교]](前) → 2001년 미국 [[캘리포니아 토런스 웨스트 고등학교]](前) → 2004년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 앤젤레스 국제 학교]] [[졸업]]
         * [[미국]] [[엘 카미노 주립 커뮤니티 전문대학]] 패션디자인학과 [[전문학사]](2008년)
         [[분류:198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영덕군 출신]][[분류:2002년 데뷔]][[분류:미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
         [[분류:엘 카미노 칼리지 동문]][[분류:영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스위스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모델]][[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스위스계 영국인]][[분류:20세기 스위스 사람]][[분류:20세기 잉글랜드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유튜버]][[분류:21세기 영국 사람]][[분류:한국계 영국인]][[분류:개신교도 이탈자]][[분류:영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영국의 여자 뮤지컬 배우]][[분류:영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영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영국의 여자 모델]][[분류:미국에 거주한 잉글랜드인]][[분류:캐나다에 거주한 잉글랜드인]][[분류:스위스에 거주한 잉글랜드인]][[분류:대한민국에 거주한 영국인]]
  • 탈북자 망명정부
         주로 [[미국]], [[유럽]] 등지의 대한민국 국외에 거주하는 탈북자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명섭 대한변호사협회 통일문제연구위원회 부위원장은 "북한이 유엔에 가입돼 있는 이상, 미국 등 다른 국가들도 망명정부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 대신 망명정부활동을 묵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제기했다.[[http://news.donga.com/MainTop/3/all/20161006/80664378/1#csidx6390859011994e7a8d6c822b9a35888 (참조)]]
  • 탕웨이
         [[2009년]] 11월, [[한국 영화]] 《[[만추 (2010년 영화)|만추]]》([[김태용 (영화 감독)|김태용]] 감독)의 리메이크판에서 수감된 지 7년 만에 특별 휴가를 나온 여자 "애나" 역으로 캐스팅 되어, 상대 배우의 [[현빈]]과 [[미국]] [[시애틀]]에서의 올 로케 촬영을 했다.<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79&aid=0002135999 | 제목='만추' 탕웨이 현빈 "시애틀 떠나기 아쉽다" 크랭크업 소감 밝혀 | 저자=황성운 | 뉴스=노컷뉴스 | 날짜=2010-03-08 | 확인날짜=2014-07-0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60725051304/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9&aid=0002135999 | 보존날짜=2016-07-25 | 깨진링크=아니오 }}</ref> 영화 개봉 이후에는, [[삼성전자]], 코오롱 스포츠 등의 한국 광고 출연과 [[2012년]] 제17회 [[부산 국제영화제]]에서 배우 [[안성기]]와 개막식 사회를 맡는 등 활발한 활동으로 한국에서 사랑 받는 대표적인 중화권 스타로 자리잡았다.<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18&aid=0002666539 | 제목=[17th BIFF]안성기, 탕웨이에 “‘만추’ 보고 현빈 부러웠다” | 저자=김영환 | 뉴스=이데일리 | 날짜=2012-10-04 | 확인날짜=2014-07-02 | 보존url=https://archive.today/20160725051515/http://entertain.naver.com/read?oid=018&aid=0002666539 | 보존날짜=2016-07-25 | 깨진링크=아니오 }}</ref>
  • 태양 (가수)
         '''태양'''({{본명|동영배}}, [[1988년]] [[5월 18일]] ~ )은<ref name="Russell2014">{{서적 인용|author=Mark Russell|title=K-Pop Now!: The Korean Music Revolution|page=34|url=http://books.google.com/books?id=etDZAwAAQBAJ|date=29 April 2014|publisher=Tuttle Publishing|isbn=978-1-4629-1411-1}}</ref> [[대한민국]]의 [[보이 그룹]] [[빅뱅 (음악 그룹)|빅뱅]]의 메인보컬, 메인댄서를 맡고 있다. [[태양]]은 만12세의 나이에 [[지누션]]의 3집 ''A-YO'' 뮤직 비디오 출연을 계기로 [[YG 엔터테인먼트]] 소속으로 6년여간 연습생 기간을 거친 후, [[빅뱅 (음악 그룹)|빅뱅]]의 멤버로 데뷔하였다. 그의 두 번째 정규 앨범 《[[Rise (태양의 음반)|Rise]]》 은 [[미국]] [[빌보드]] 200차트에서 최고 112위에 올랐으며, 이는 한국 솔로 가수 앨범으로 최고 기록이다.<ref name="Billboard_Charts">{{웹 인용| title = K-Pop Star Taeyang Hits Billboard 200 | publisher = Billboard | date = 12 June 2014 |url =http://www.billboard.com/articles/columns/k-town/6114227/taeyang-rise-billboard-200-album-k-pop-hot-100-eyes-nose-lips | accessdate = 12 June 2014}}</ref><ref name="YG_Life">{{웹 인용| title = TAEYANG IS RANKED 112TH ON BILLBOARD 200 CHART… HIGHEST-EVER RECORD FOR KOREAN MALE SINGER | publisher = YG LIFE | date = 13 June 2014 |url =http://www.yg-life.com/archives/32316?lang=en | accessdate = 13 June 2014}}</ref> 이 음반의 타이틀 곡 "눈, 코, 입"은 빌보드 K-pop Hot 100 차트에서 최고 1위를 차지하였고, 그에게는 솔로로서 첫 싱글 차트 1위이다.<ref name="Billboard_Charts"/><ref name="YG_Life"/> 일본 활동시 사용하는 예명은 '''쏠''' (SOL; {{lang|ja|ソル}})으로 [[스페인어]]로 [[태양]]을 뜻한다.
  • 태양(빅뱅)
         [[아이돌]] 그룹 [[빅뱅(아이돌)|빅뱅]]의 메인보컬. 일본 활동 시에는 SOL[* 태양의 영명인 SOLAR에서 따왔다.]이라는 예명을 사용. 흑인 보컬리스트를 연상시키는 R&B/Soul에 강한 음색과 창법을 갖고 있다. 단순히 흑인 음악 장르의 노래만 잘하는게 아니라 자신의 R&B 스타일의 보컬로 다양한 장르의 노래도 소화할 수 있는 가창력을 지녔다.[* 태양이 구사하는 R&B/Soul 스타일의 노래는 발성이나 창법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장르에 어울리기가 힘들다. 흑인 보컬리스트들이 다른 장르의 노래를 불러도 그 장르의 느낌은 잘 안나고 아예 노래 자체를 흑인 소울로 바꿔버리는 것이 그 예다. 일단 빅뱅은 그동안 다양한 장르를 많이 해왔기 때문에 메인보컬인 태양은 예전부터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이 입증되어왔다고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가창력과 댄스 실력도 팀 내에서 가장 출중하다. 온 비트(On Beat)가 확실하며 잔상이 없는 깔끔한 춤이 인상적이며, 국내에서는 미국의 비디오 댄스 트렌드를 가장 잘 소화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 점을 바탕으로 그의 첫 앨범인 'Hot'은 여러 평론가들에게 찬사를 받았고, 꾸준히 그룹과 솔로활동을 성공적으로 병행하다가 2014년 발매된 'RISE'의 '눈, 코, 입'이 대히트를 치며 그룹에서 두 번째로 솔로로 대상을 받으며 대중성도 입증을 했다. 판타스틱 듀오등에 출연해 부른 라이브 영상이 화제가 되어 남성들이 좋아하는 노래방 강자로 떠오르기도.
         디씨인사이드에서 빅뱅 멤버 중 제일 처음으로 개인갤인 동영배 갤러리가 생겼다. 태양 갤러리가 아니라 본명인 '동영배'로 만들어졌다는 것이 특이 케이스. 빅뱅의 멤버였던 태양의 음악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알리는 데 공헌했다는 순기능도 있으나, 빅뱅 팬덤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은 곳이 아니다. 아무래도 빅뱅 팬덤은 빅뱅을 아이돌로 좋아하는 팬들이고 동영배 갤러리의 팬들은 미국의 정통 흑인음악을 좋아하는 팬들이다보니. 다만 이런 두 가지 성향의 팬들을 모두 가질 수 있다는 게 태양의 위력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는 그래서 태양을 '한국의 어셔'라고 표현했다. 미국에서 어셔처럼 태양이 대중과 R&B 씬의 교두보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2011년]] 7월 [[트위터#s-1|트위터]]를 통해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 그룹인 Underdogs와의 작업을 알렸다. 이후 활동에 대해선 아직 공개된 것은 없으나 평소 좋아하던 유명 프로듀서들과의 작업을 진행할 거라는 소식만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이번에 발표된 정규2집 Rise에서 Underdogs의 참여곡은 실리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빅뱅이란 그룹 자체가 세계시장에서 인기가 높은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솔로가수 태양은 서양권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체감적인 외국 빅뱅 팬 사이의 인기는 사실 탑이 제일 높은데 탑은 솔로앨범을 낸 적이 없고 연기겸업을 하느라 그럴 욕심도 없다보니 그런 것도 있지만, 위에 서술됐듯이 태양의 팬이 전부 빅뱅 팬이라기보다는 태양 개인의 솔로활동 즉 흑인 음악활동으로 생긴 팬들이 대다수라 빅뱅 팬내에서의 인기도와는 별개라고 볼수 있다.] 미국 탑 알앤비앨범 차트 2위, 캐나다 알앤비 앨범 차트 1위 등을 동양인 가수 중 최초로 찍었다. 미국의 대표 시사 주간지인 'TIME'에도 소개된 적 있었고, 위에 언급된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 그룹인 Underdogs도 태양의 재능을 트위터에서 극찬했었고, 네덜란드에서도 꾸준히 인기를 얻고 있는 등 전반적으로 케이팝가수가 강세인 아시아쪽보다 오히려 서양권에서 인정을 받는 모양세이다.
  • 태진아
         1980년, 다시 가수 복귀를 꿈꿨지만 과거 일 때문에 방송 출연 금지를 먹어, 미국으로 가서 교포 사회의 밤무대 활동을 하며 가정을 꾸렸다. 1984년 1월, 방송 출연 금지가 해제되자 한국에서 음반을 내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고를 반복하던 중, 89년 '옥경이'가 히트를 친 다음 90년도'거울도 안보는 여자'가 가요톱텐에서 골든컵을 수상한 다음 후속곡인 91년 '미안 미안해' 역시 여러 번 1위를 할 정도로 히트하면서 [[송대관]], [[설운도]], [[현철]]과 함께 [[트로트]] '''4대 천왕'''으로 등극했다.
         베트남에 한국군 파견은 상당히 경제적 목적이 많았고, 한국이 미국에 경제지원을 받는 조건과 한국 기업이 베트남에 진출해서 각종 사업을 펼치기도 하는 상황이었다.
         70년대 이후 현대건설과 대아건설등 건설회사 사장 역시도 70~80년대 [[중동건설 붐]]등 박정희 정부의 해외건설 관련 정부의 대변인 역할이었을것으로 추측된다. 참고로 현대건설은 [[1976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 주베일 산업항 공사를 따냈는데, 참고로 사우디 산업항 공사로 벌어들인 돈은 9억 3000만 [[미국달러]]로, 당시 '''[[대한민국]] [[정부]]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고 전해진다.[[http://www.breaknews.com/sub_read.html?uid=309077§ion=sc3|#]] 이런 대규모 건설 수주는 정부와 민간기업이 서로 협조해서 이루어지기때문에, 조아무개 사장은 이런 정치적인 문제에 중심에 서고, 당시 부사장이었던 이명박은 실제로 회사경영을 하는 형태였다고 전해진다.
          * 신혼 초 [[미국]]에 살 때 [[장모]]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는데, 당시 장모의 집은 [[원룸]]이었다고 한다. 태진아는 방 한쪽에 커텐을 쳐놓고 살았는데, 이때 [[이루(가수)|이루]]가 생겼다고...
  • 테이(1983)
         2016년 라디오스타에 출현했을 때 한 때 '소테크'를 했으나, [[한미 FTA]]가 터지면서 소값이 개값이 되면서 투자 실패. ~~농민 가수로 등극~~[* 2008년 황금어장 라디오 스타 출연시에 소테크에 실패한 테이를 보고 [[김구라]]가 한 말이다.] [[라디오 스타(황금어장)|라디오 스타]]에 나와서 이야기하길 그때 손해를 보는 바람에 한미 FTA 반대 시위에 참여 한 적이 있다. 때문에 화생방 훈련 직후에 --귀무사--[[기무사]]에 불려가서 취조받았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나라의 주적에 [[미국]]을 체크하고 FTA 관련으로 시위 같은 걸 한 적 있냐는 말에 있다고 적는 바람에 꽤 혼날뻔 했지만, 잘 훈계받고 나왔다고.
  • 토니 고
         |거주지= [[미국]] [[로스앤젤레스]]<ref name="포브스 프로필">[http://www.forbes.com/profile/toni-ko/?list=self-made-women Profile], ''포브스'', 2016년 9월 23일 확인.</ref>
         |국적= [[미국]]<ref name="포브스 프로필"/>
         '''토니 고'''(Toni Ko)는 [[대한민국]] 출신 [[미국]]의 사업가로, 화장품 브랜드 닉스(NYX Cosmetics)와 선글라스 브랜드 퍼버스(Perverse)의 창립자이다. 2억 6천 만 달러 이상 순수입으로, 2016년 [[포브스]]가 선정한 '자수성가한 미국인 여성 60인' 명단에 들었다.<ref name="포브스">[http://www.forbes.com/self-made-women/#2f767e7f4177 AMERICA'S RICHEST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3살이였던 1986년, 부모님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ref name="헤럴드"/> 방과 후에는 부모님이 하시던 미용용품 사업일을 도왔다. 어릴 적부터 화장품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고급 브랜드의 화장품을 살 형편은 되지 않았고, 저렴한 화장품의 질에는 만족하지 못했다. 결국 스스로 합리적인 가격의 질 좋은 화장품을 만들자 마음 먹고, 25세 때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화장품 브랜드 "닉스"(NYX Cosmetics)를 설립했다. 인기 판매 제품인 립 펜슬은 3.5 달러 정도였다.<ref name="포브스 프로필"/>
         브랜드 출시 첫 해, 4백 만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렸다.<ref name="포브스 프로필"/> 2000년대 초반 닉스는 미국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화장품 브랜드 중 하나였다. 또 2008 금융 위기 시절, 저가 화장품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오히려 불황은 기회가 되었다.<ref name="헤럴드"/> 또 토니는 사람들이 [[미셸 판]] 등 뷰티 유튜버에 영향 받는 모습을 보며, 소셜 미디어의 중요성을 깨닫고 [[SNS]]를 마케팅에 적극 활용했다.<ref name="헤럴드"/> 이후 15년 동안 안정적으로 사업을 키워나간 후, 2014년 [[로레알]]에 닉스를 5억 달러에 매각했다.
         {{토막글|미국 사람}}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토니 안
         * 경북 청도에서 1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초등학교 때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중학교,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 [[미국]]에서 이수만의 눈에 띄어 가요계에 데뷔했다.
         * [[2001년]]에 [[미국]] [[영주권]]을 포기한 후, [[2008년]] [[11월 4일]]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육군훈련소]]에 현역으로 입대해 부산 53사단으로 자대배치를 받았으나 서울 용산 국방홍보지원대로 차출되어 [[국군방송]]에서 〈토니안의 주고 싶은 마음 듣고 싶은 얘기〉, 〈일 플러스 성공〉등 DJ와 MC로 활약하다가
         [[분류:H.O.T.의 일원]][[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아이돌 가수]][[분류:SBS 인기가요 뮤티즌송 수상자]][[분류:대한민국의 남자 가수]][[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1978년 태어남]][[분류:청도군 출신]][[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비디오 자키]][[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1996년 데뷔]][[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발라드 음악가]][[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토비 도슨
         {{메달 나라|{{국기나라|미국}}}}
         '''토비 도슨'''({{본명 : 김봉석|llang|en|Toby S. C. Dawson}}, [[1978년]] [[11월 30일]]<ref name="birth" /> ~ )은 [[한국인 입양아]] 출신의 [[미국]] [[스키]] 선수이다.
         이에 따라 김수철은 [[1982년]] [[미국]] [[콜로라도주]]의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그 곳에서 '''토비 도슨'''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그의 양부모는 [[스키]] 강사로, 토비 도슨에게도 곧 스키를 가르쳤다. 그는 스키에 바로 두각을 나타내었고, [[프리스타일 스키|프리스타일]]의 [[모굴 스키|모굴]] 선수가 되었다. [[1998년]] 미국 국가 대표로 선발되었고, [[프리스타일 스키 월드컵 대회|월드컵]]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하였다. [[2003년]] ~ [[2004년]] 시즌 월드컵 대회 종합 2위에 올랐고, [[2005년]] [[프리스타일 스키 세계 선수권 대회|세계 선수권]] 듀얼 부문에서 우승하였다. 그 사이 세계적인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로 대한민국 언론에도 몇 차례 소개되었으며, 대한민국에서 열린 경기대회에도 참가하는 등 몇 차례 대한민국을 방문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225299 모굴스키 美간판 도슨 3살때 입양된 김수철] [[동아일보]] [[2004년]] [[2월 9일]]</ref>
         그는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미국 대표로 선발되어 출전하였으며,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이에 따라 그의 사연은 미국과 대한민국 양국에서 모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언론을 통해 직접 친부모를 찾고 싶다고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217508 美입양한인 스키선수의 친부모 찾기 열망] [[연합뉴스]] [[2006년]] [[2월 12일]]</ref> 이에 따라 대한민국 각지에서 자신이 토비 도슨의 친부모일 것 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수십명 이상 나타났으나, 부산에서 버스 운전을 하는 김재수라는 남성이 토비 도슨과 흡사한 외모와 여러 가지 주변 정황상 그의 생부일 가능성이 높아 보여 다른 주장자에 비해 더욱 주목을 받았다.<ref>[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103682.html “도슨은 내 아들” 부산 김재수씨, 친아버지 주장] [[한겨레]] [[2006년]] [[2월 20일]]</ref> 그러나 토비 도슨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친부모라 주장하여 혼란을 느꼈으며, 친부모를 찾는 일에 신중을 기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곧 대한민국에서 열릴 대회에 참가하면서 친부모를 찾으려던 계획도 포기하고 대회에 불참하였다.<ref name="birth">[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1272073 한국계 입양아 도슨에 친부모 주장자 쇄도] [[연합뉴스]] [[2006년]] [[4월 15일]]</ref>
         [[2007년 5월]]에는 대한민국에서 연인 관계이던 미국인 여성과 한국식 전통 혼례 방식으로 결혼식을 올려 눈길을 끌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01&aid=0001916203& 토비 도슨, 고향 부산서 전통혼례] [[연합뉴스]] [[2007년]] [[5월 24일]]</ref>
         [[분류:197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올림픽 프리스타일 메달리스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미국의 올림픽 동메달리스트]][[분류:미국의 양자]][[분류:2006년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2006년 동계 올림픽 프리스타일 참가 선수]][[분류:미국의 올림픽 프리스타일 참가 선수]]
  • 토이 (대한민국의 음악 그룹)
         1집 발표 후 유희열은 [[대한민국 해군|해군]]에 입대하고, 윤정오는 [[미국]] 유학을 가게 되면서, 토이는 유희열의 솔로 프로젝트 체제로 운영되었다. 유희열은 제대 후 [[1996년]]에 2번째 앨범 《[[Youheeyeol]]》을 발표했다. [[1997년]] 3번째 앨범 《[[Present (토이의 음반)|Present]]》, [[1998년]] 4번째 앨범 《[[A Night In Seoul]]》, [[2001년]] 5번째 앨범 《[[Toy 5th Fermata]]》를 발표했다. 그리고, [[2007년]] 11월에 6집 《[[Thank You (토이의 음반)|Thank You]]》를 발매했다. 6집의 타이틀 곡은 객원 보컬 [[이지형 (가수)|이지형]]이 피쳐링한 〈뜨거운 안녕〉이다. 7년만에, [[2014년]] 11월에 7집 《[[Da Capo (토이의 음반)|Da Capo]]》를 발매했다. 7집의 타이틀 곡은 [[성시경]]이 피쳐링한 〈세 사람〉이다.<ref>{{뉴스 인용
  • 톰 최
         |국적 = [[미국]]
         '''톰 최'''({{llang|en|Tom Choi}})는 미국의 배우이다.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4살 때 미국 [[일리노이주]] [[디모인]]으로 이민가 그 곳에서 자랐다.<ref>{{뉴스 인용|url=http://asiansonfilm.com/tom-choi-interview/|title=Tom Choi Interview – Asians on Film|date=4 January 2016|work=Asians on Film|access-date=2017-06-28|language=en-US}}</ref>
         [[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미국의 남자 텔레비전 배우]][[분류:워싱턴 대학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 배우]][[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디모인 출신]]
  • 트럭
         트럭은 [[미국]]에서 쓰는 말로, [[영국]]에서는 로리(Lorry)라고 부른다. [[탱크로리]] 할 때 그 로리. Red lorry, yellow lorry라는 [[잰말놀이]]도 있다.
  • 트레이스 사이러스
         | 국적 = [[미국]]
         '''트레이스 사이러스'''(Trace Cyrus, [[1989년]] [[2월 24일]] ~ )는 [[미국]]의 [[음악가]]이다.
         [[분류:198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미국의 남자 가수]][[분류:미국의 록 가수]][[분류:미국의 록 기타 연주자]][[분류:미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미국의 양자]]
  • 트레키
         [[미국]] [[SF 드라마]] [[스타트렉]]의 [[팬덤]]을 뜻하는 말이다.
  • 판타스틱 포(2015년 실사영화)
         [[미국]] [[영화]]. [[마블 코믹스]]의 [[판타스틱 포]] 실사영화다. 2015년에 개봉했으며 개봉일은 8월 7일(미국기준). 국내 개봉은 8월 20일.
  • 판타스틱 포: 실버 서퍼의 위협
         수 스톰의 제시카 알바의 미모에 대한 호평은 전작과 마찬가지인데 아예 나오는 장면마다 수잔의 옷과 머리 스타일이 다르며, 카메라가 수잔을 중심으로 이동하며, 아예 모든 장면의 구도가 수잔을 중심으로 되어 있다. 이 때문에 본격 '수잔 스톰 모에 영화'라는 설이 [[미국]] 현지의 만화 포럼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다(하지만 속편에서는 수수하게 나왔으니 [[안습]]).
         가만 보면 좀 어이없는 장면이 있는데, 엄연한 [[러시아]] 영토인 [[시베리아]]에 '''미군'''기지가 있는다거나 [* 왜 그런지 이해가 잘 안 간다면 미국과 러시아가 [[냉전]] 때 어떤 관계였는지, 그리고 러시아가 동구권 내의 [[친미]]세력을 견제하는 걸 생각해 보자.] 마지막 결판을 치른 데는 [[홍콩]]인데 수잔과 리드의 결혼은 [[자포네스크|일본에서 기모노 입고]] 한다거나(...) 하는 장면들이 있다.
  • 페이데이 갱
          [[미국]]인. [[성조기]]가 그려진 가면을 사용한다. 30대 때 시카고의 두 폭력단을 싸움붙인 전적이 있다. [[FBI]]는 달라스가 페이데이 갱의 우두머리거나 부관 격 되는 인물이라고 추측하는 중.
          [[미국]]인. 청소년때부터 사고를 치고 다녀서 양부모의 집과 [[소년원]]을 오갔다. 이후 군대에 들어가 훌룡한 군인이 되었지만 군대를 나온 후 범죄자가 되었다. [[FBI]] DB에 따르면 큰 총과 많은 탄약을 가져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미국]]인. [[페이데이 2]]에서 감방에 들어가있는 혹스턴을 대신해 혹스턴으로 뛰었다. 혹스턴이 구출된 이후 가명을 휴스턴으로 바꿨다.
          [[일본]]인. 오래전에 잃어버린 아들 켄토를 찾기 위해 미국으로 온 [[야쿠자]].
          켈리 킹(Kelli King)이라는 이름의 [[오스트레일리아]]인. 어렸을 때는 [[멜버른]]에 있는 "딩고즈"(Dingos)라는 갱단 소속으로 깽판을 치고 다녔다.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페이데이 갱이 벌이던 [[은행강도]]에 난입, 돈가방을 들고 튄 적이 있다. 이 겁없는 미친 짓에 감명받은 베인이 페이데이 갱에 영입했다.
          [[미국]]인. 본명은 톰 비숍(Tom Bishop). 배우 및 성우는 [[론 펄먼]]. 베인이 [[폭주족]] 단체인 오버킬 MC에 심어놓은 내부인이다. 정식 페이데이 갱단원이 되는 대가로 오버킬 MC의 동료들을 배신했다. 작중 나이는 61세. [[환갑]]을 넘었다.
          멕시코 출신의 조직원. 페이데이 갱에 들어가기 전에는 몬테레이의 마약 카르텔 소속 암살자 겸 행동대장이었다. 이후 큰 한탕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와 페이데이 갱의 무기 공급책인 게이지의 주선으로 페이데이 갱에 입단했다.
          미국 출신. 페이데이 갱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거스트 린덴허스트(August Lindenhurst)라는 가명을 사용했다.
          미국 동부에서 활동하는 마약상.
  • 편의치적
         편의치적은 오래된 관행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라이베리아]], [[파나마]], [[소말리아]], [[온두라스]], [[레바논]], [[키프로스]], [[바하마]], [[버뮤다]], [[싱가포르]] 등의 소국이 외국 자본 회사의 설립을 쉽게 하는 회사법을 제정하고, 선박세를 저렴하게 하고 법적 규제를 완화하여 외국의 선박 회사와 선박을 유치하였다. 여기에 [[미국]]이나 [[그리스]]의 선주들이 대거 이들 나라로 옮겨가면서 편의치적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초기에는 대부분 미국의 석유 메이저 회사와 그리스 계 선주(특히 선박왕 오나시스) 였다.
         || 노르웨이, 미국, 홍콩 || 5% ||
         [[파나마 침공]] 당시에 [[파나마]]의 [[마누엘 노리에가]] 정권과 [[미국]]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파나마 선적 선박이 제제를 받을 수 있다는 걱정이 널리 퍼지자, 파나마에서 [[라이베리아]]로 선적을 옮기는 사례가 빈발했다. 하지만 [[파나마 침공]]으로 마누엘 노리에가 정권이 허망하게 무너지자 이러한 움직임은 곧 멈췄다.
  • 프레퍼
         2012년 [[미국]]에 가장 많이 존재하며, 300~4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측된다. [[정부]]나 [[매스미디어]]를 믿지 않고, 국제 자본가를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하다. 매스미디어보다는 지역 커뮤니티나 라디오, 인터넷 등의 커뮤니티를 선호한다. 극단적인 경우는 이웃도 적으로 간주하고, 고립된 생활을 한다.
  • 프릭쇼
         [[미국]]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쳐서 성행했다. 주로 카니발(순회 서커스) 등에서 흥행이 이루어졌다. 프릭쇼에서는 특이한 외모를 가진 장애인들을 있을 수 없는 '괴물'을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이들이 쇼를 하는 것을 감상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폭행]], [[학대]] 등의 [[가혹행위]]가 벌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반대로 프릭쇼에 출연해서 많은 명성과 돈을 얻은 장애인도 있다.
  • 플래시(드라마)
         [[미국]]의 [[드라마]].
  • 피서영
         피서영은 [[서울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스토니브룩 대학교]](State University of New York at Stony Brook)로 유학을 갔다. 유학 시절에 [[이휘소]] 교수의 지도를 받아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현재는 [[보스턴 대학교]](Boston University)물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분류:194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물리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미국의 저술가]][[분류:보스턴 대학교 교수]][[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동문]][[분류:뉴욕 주립 대학교 스토니브룩 동문]][[분류:홍천 피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피수영
         | 기타 이력 = [[서울대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원]] [[의학박사]] [[졸업]] <br /> [[소아과]] [[의사]] 겸 [[대학 교수|의과대학 교수]] <br /> [[소아과|소아내과의학교육 저술가]] <br /> [[미네소타 대학교|미국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대학 교수|객원교수]] <br /> [[서울아산병원|서울아산병원 예하 소아신생아병원]] 원장 <br /> [[울산대학교|울산대학교 의과대학]] [[대학 교수|명예교수]]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출신이며 [[미네소타 대학교|미국 미네소타 주립 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객원교수, [[서울아산병원]] 소아과 과장,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소아과 교수를 역임했다.
         피수영 교수는 많은 극소·저체중 출생아(일명 '미숙아, 체중 1.5kg이 되지 않은 신생아를 이르는 용어)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려낸 명의(名醫)로 불린다. 피 교수는 20여 년간 [[유타 대학교]] 부속병원 등 [[미국]] 내 여러 병원을 거치면서 의술을 쌓았다. 미국에서도 그의 의술은 명성이 높았다. 그가 살았던 미네소타에선 지금도 "피 박사(Dr. 피), 당신이 내 아이를 살렸어요"라고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다.
         피수영은 인터뷰를 통해 "미국을 떠나 10년 후에 내가 살던 동네 서점에 갔는데 어떤 남자가 오더니 ‘당신 피 박사 아니냐’고 그래서 ‘날 어떻게 아느냐’고 하니까, 12살 먹은 아이를 불러와서 ‘당신이 살려준 애다’하였다. 그때 의사 하길 잘 했다, 보람이 있다, 싶었다."라고 말했다.
         피수영은 1995년 [[미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면서 국내의 수많은 미숙아들을 살리기 위해 서울아산병원으로 향했다. 2000년엔 국내 의료진과 함께 468g 체중으로 태어난 아이를 성공적으로 살려냈다. 서울아산병원의 의료진은 미국 의사들이 "너희들은 이런 아이들까지 살리느냐"고 할 만치 위험한 상태의 미숙아를 살려내기도 했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미숙아로 태어난 아이의 치료를 거부하는 부모가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나도 백내장에 걸려 치료도 못 받는데 아기를 살려서 뭐하냐"는 아기 할아버지의 항의도 있었다고 한다. 그 땐 피 교수가 "미숙아도 생명이다"라며 자기 돈을 들여 아이를 살려냈다고 한다. 피수영 교수는 '더 이상 경제적 이유로 미숙아가 죽어서는 안된다'는 바람으로 유명 탤런트 등 몇몇 지인들과 몇백 만원씩 모아서 1억5000만원을 아산사회복지재단에 기부했다.<ref>[http://www.mt.co.kr/view/mtview.php?type=1&no=2008071222083196938 피수영 교수가 말하는 '나의 아버지, 피천득'], 《머니투데이》, 2008년 7월 25일</ref>
         * 피수영 교수는 미국에서 신생아과 전임의(醫)로 자리잡은 38살이 돼서야 결혼하고, 늦은 나이에 두 아들을 얻었다. 장남 피윤범·차남 피윤성이다. 맏아들 피윤범은 [[뉴욕대학교]]에서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영화를 공부하였고, 차남 피윤성은 [[미국]] 명문인 [[코넬 대학교]] 법대를 다녔다.
  • 핑커톤
         [[미국]]의 보안회사. 고용인 조사, 수사, 보안, 정보수집 등 여러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그쪽보다는 19세기에 벌였던 범죄자 사냥과 용역깡패 행위로 유명하다.
         1861년에는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에이브러햄 링컨]]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밝혀내기도 하였다. [[남북전쟁]] 이후 [[서부개척시대]]에는 [[제시 영거 갱]]이나 [[와일드 번치]]같은 갱단을 추적하거나 열차강도를 잡는 일을 했다. 이 과정에서 조사를 위해 [[신문]] 기사를 오려내 보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범죄자 데이터베이스의 시초가 되었다. 이 외에도 [[시카고 대화재]] 직후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고용되기도 했다.
         리즈시절(?)인 19세기가 지난 후에도 미국에서 [[이탈리아]]로 되돌아가는 [[모나리자]]를 호위한다던가, [[홍콩]]에 지점을 세운다던가 하다가 1999년 스웨덴 보안회사인 세쿠리타스 AB(Securitas AB)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살아있다.
         미국 최초의 여성 탐정인 케이트 와르네(Kate Warne)가 고용된 탐정 회사이기도 하다. 1856년 고용되었다고.
         현재 핑커톤은 미국, [[멕시코]], [[브라질]], [[영국]], [[네덜란드]], [[독일]], [[체코]], [[UAE]], [[인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홍콩]],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중화민국|대만]]에서 활동하고 있다. 많네.
  • 하인스 워드
         '''하인스 E. 워드 주니어'''(Hines E. Ward, Jr, [[1976년]] [[3월 8일]] ~ [[전라남도|전남]])는 한국계 [[미국]]인 전 [[미식축구]] 선수이다. [[피츠버그 스틸러스]]에서 뛰었으며, 주 포지션은 [[와이드 리시버]]이다. [[1998년]] [[NFL]] 드래프트에서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지명되면서 프로 무대에 데뷔했고, 지금까지 NFL 올스타전인 [[프로볼]]에 4번이나 출전한 리그 최정상급 와이드 리시버이다. 태클을 당해도 언제나 웃는 얼굴이지만 상대에게는 위협적인 선수이기 때문에 '미소짓는 암살자 (Smiling Assassin)'라는 별명을 가졌다.
         [[분류:미국의 미식축구 선수]][[분류:조지아 대학교 동문]][[분류:한국계 미국인]][[분류:전라남도 출신]][[분류:197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미식축구 선수]]
  • 하쿠다 켄
         숙부인 [[백남준]]의 도움으로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유학하여 경제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MBA) 학위를 받고 장난감 판매, [[텔레비전]] 프로덕션 등의 사업을 하던 그는 [[1990년대]] 이후 숙부 [[백남준]]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숙부의 작품 활동을 도왔다.
         [[2006년]] 백남준이 타계한 후 그는 [[미국]] [[뉴욕]]의 백남준 스튜디오와 백남준의 모든 작품의 저작권을 물려받아, 현재 뉴욕 백남준 스튜디오의 이사이자 백남준의 법적 대리인으로서 작품 관리와 기념사업 등을 책임지고 있다.
         * [[미국]] [[하버드 대학교]] 졸업 (경제학 학사)
         * [[미국]]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졸업 (경영학 석사(M.B.A.))
  • 한기춘(국회의원)
         * [[미국]] [[보스턴 대학교]] 경제학과 석사, 박사
  • 한승조
         '''한승조'''(韓昇助, [[1930년]] [[1월 13일]] ~ [[2017년]] [[7월 25일]])는 [[대한민국]]의 교육자, 정치학자, 철학자, 언론인, 보수주의 운동가이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귀국 후 [[고려대학교]] 명예교수 등을 역임했다.
         [[고려대]] 정치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정치학 박사를 딴 후, 1967년부터 1995년까지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교수를 지냈다. 재임 중 정경대학장을 지냈으며, 퇴임 후 명예교수로 있다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미화하는 글을 쓴 것이 문제가 된 후 명예교수직에서 사퇴했다. 한국유신학술원 회원, [[한국정치학회]] 회장, 국민윤리학회 회장, 보수단체인 [[자유시민연대]] 공동대표도 역임했다. <!-- 언제부터 언제까지인지 보충 필요 --> 정년 퇴임 후 [[고려대학교]] 정치학과 명예 교수에 선임되었다.
         *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정치학]] [[박사]]
  • 한인수 (동음이의)
         * '''한인수'''는 대한민국 독립 운동에 공적한 [[미국]] 前 정치가 겸 외교관 '''[[제임스 헨리 로버츠 크롬웰]]'''(James Henry Roberts Cromwell, 1896년 ~ 1990년)의 한국어 이름이다.
  • 한준희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난 한준희는 7살이던 [[1976년]] [[차범근]]이 출전한 대통령컵 말레이시아전을 본 것을 계기로 축구광이 되었다. 학창시절 [[할렐루야 축구단]]과 [[대우 로얄스]]의 팬으로서 대한민국 축구를 챙겨보았고, TV에서 가끔 방송해주었던 [[분데스리가]]와 [[인터콘티넨털컵 (축구)|인터콘티넨탈컵]]을 빠짐없이 시청하며 해외축구를 섭렵했다. [[1990년]] [[서울대학교]] 해양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교 3학년때 과학철학에 심취한 그는 철학 교수를 꿈꾸며,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딴 후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 유학 중에도 틈틈이 [[폭스 방송]]을 통해 해외 축구를 즐겨보던 그는 취미로 인터넷 축구 커뮤니티인 [[사커라인]]에 칼럼을 올린 것이 계기가 되어 [[2002년]] 귀국 후 [[MBC 스포츠+|MBC ESPN]]의 축구해설가로 입문하게 된다. [[MBC 스포츠+|MBC ESPN]]에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 경기 해설을 맡으며 화면에 비친 사람 대부분의 신상정보를 읊는 신통한 정보력과 전문적인 전술 해설, 거기에 감초같은 샤우팅 중계가 더해져 축구팬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2006년 [[2006년 FIFA 월드컵|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각 지상파 방송국에서는 축구 해설위원을 충원하였는데, [[MBC 스포츠+|MBC ESPN]]에서 해외 축구를 중계하던 3인방 중 한준희는 [[KBS]]로, [[서형욱]]은 [[MBC|MBC 지상파]]로, [[박문성]]은 [[SBS]]로 각각 스카웃되었다. [[2005년]]부터 [[한국방송공사|KBS]]에 몸담은 한준희는 [[월드컵]], [[UEFA 유럽 축구 선수권 대회]], [[K리그]]부터 유소년 축구, 대학 축구, 실업 축구, 여자 축구 등 다양한 축구경기를 중계하며 [[대한민국]] 최고의 해설위원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또한 어렸을적 [[롯데 자이언츠]]를 좋아했었다. 당시 롯데가 실업야구 때부터 좋아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고 [[K리그]] 의 [[전북 현대 모터스]]의 팬이기도 하다.
         * [[미국]] [[매사추세츠 대학교 애머스트]] 과학철학 박사과정 중퇴
  • 한채영
         |국적 = {{국기나라|미국}}
         '''한채영'''({{본명|김지영}}, [[1980년]] [[9월 13일]] ~ )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한국계 미국인 [[배우]]이다. 2000년 [[미국]] [[마텔]]사에서 진행한 '[[바비인형]]'을 닮은 여성으로 뽑혀 바비인형 홍보대사로 위촉되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108&aid=0002010497 한채영, 미소짓는 바비인형] 스타뉴스. 2009년 12월 09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004&oid=023&aid=0003196467 전유성, 한채영과 첫 만남 공개 "인사동에서 가게할 때 놀러와] 조선일보. 2016년 07월 26일</ref>
         2007년 6월 4일 미국 유학생활 때 친구들과의 모임에서 처음 알게 된 4살 연상의 [[사업가]] 최동준과 결혼하였고, 2013년 8월 30일 첫 [[아들]]을 출산했다.<ref>[http://entertain.naver.com/read?oid=079&aid=0000143864 한채영, 네살차 8년 친구와 5월 결혼] 노컷뉴스. 2007년 03월 14일</ref>
         [[분류:198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한국계 미국인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텔레비전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여자 배우]][[분류:동국대학교 동문]][[분류:2000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여자 연극 배우]][[분류:미국으로 귀화한 사람]]
  • 한현규
         * [[미국]] [[시라큐스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석사]]
         * [[미국]] [[시라큐스 대학교]] 대학원 [[행정학]][[석사]]
  • 함병춘
         미국 유학 후 귀국, 1959년부터 70년, 1979년 10월부터 1983년 6월까지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로 재직, 강의하였으며, 한국 사회의 법사회학, 한국인의 법에 대한 태도 등을 전문으로 연구하였다. [[1970년]] 대통령 [[박정희]]의 요청으로 대통령 정치담당 특보, 외무부 본부대사, 대통령 외교담당 특보를 역임했다. [[1973년]] [[12월]]부터 [[1977년]] [[6월]]까지는 [[주미한국대사]]로 부임하였다. 다시 교단에 섰다가 [[1983년]] 대통령 [[전두환]]의 부름을 받고 대통령 비서실장이 되었으며, 그 해 전두환 대통령의 동남아시아 5개국 순방길에 동행했다가 [[10월 9일]] [[버마]] [[아웅산 국립 묘지]] 방문행사 예행연습 중 피폭되어 사망했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6.25 전쟁 직후 [[대한민국 공군]]에 장교로 입대하여 [[1952년]] 공군 중위로 예편하였다. 1953년 1월 미국으로 떠나 [[노스웨스턴 대학교]]를 경제학 전공으로 졸업하였다. [[1959년]]에 [[하버드 법학대학원|하버드 로스쿨]]에서 [[법률과학]] [[박사]](S.J.D.) 학위를 받았다.
         [[1959년]]에 [[연세대학교]] 법학 교수가 되었으며, 법철학, 영미법, 한국법제사 강의를 맡으면서 새로운 연구 영역을 개척하였다. 이후 [[양승두]] 교수와 한국인의 법 의식에 대한 연구, 한국 사회의 법에 대한 태도 연구를 진행했으며, 한국어 논문 뿐만 아니라 영어 논문을 다수 발표하였다. 법학자였지만 그는 한국 사회의 전통과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대해서도 연구하였다. 교수 재직 중 [[연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소장에 임명되어 겸임하였다.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2년간 [[예일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귀국하였다.
         === 주한미국 대사 시절 ===
         [[1975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이전에 [[주한미국대사]]를 지냈으며 당시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ㆍ태평양 담당 [[차관보]]였던 [[필립 하비브]](Philip Habib)로부터 박정희 대통령이 [[프랑스]]에 [[핵무기]] 관련 계약 체결 시도를 중단할 것을 통보받고, 그를 설득하였다.
         [[1976년]] 한국인사가 미국 여야 정치인과 상원, 하원 의원을 상대로 [[대한민국]]에게 우호적인 여론을 조성하고자 만찬과 정치자금을 지원했다가 발각, [[코리아게이트 사건]]으로 비화되고, 주한미군 철수 여론이 [[미국]] 정계와 학계에 등장하자 그는 미국의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설득, 주한미군 철수 여론의 확산을 막았다.
         독립 운동가이며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함태영]]의 막내 아들이며, 장남 [[함재봉]]은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와 미국 랜드연구소 한국정책석좌를 거쳐 현재 아산정책연구원 원장으로 재직 중이며 차남 함재학은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이다.<ref>{{뉴스 인용|인용=실제로 우리 모두는 함대사의 장남인 함재봉 연세대 교수가 93년 10월 몇몇 학자들과 함께 부친 의 유고를 모아 책을 발간하자 매우 기뻐했다. 「한국의 법, 정치 그리고 문화」라는 제목이 붙은 이 책의 영문 유고는 이미 86년 연세대 출판부에서 발간했었다. 이 책은 근대 한국을 이해하고자 하는 서구인들이 반드시 읽어볼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닌 역저라고 생각한다. 둘째 아들 재학군도 부친의 위업을 따라 법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외교부 안에서도 [[영어]]로 미국인, 영국인을 설득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는 평가와 충분하지 못한 행정경험으로 다소 빛이 덜 났다는 평도 있다.
         |직책 = [[주 미국 대한민국 대사관|주 미국 대사]]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1983년 죽음]][[분류:순직자]][[분류:테러로 죽은 사람]][[분류:테러 피해자]][[분류:대한민국의 법학자]][[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장]][[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법철학자]][[분류:법제사학자]][[분류:대한민국 공군 중위]][[분류:함태영]][[분류:박정희]][[분류:전두환]][[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노스웨스턴 대학교 동문]][[분류:하버드 로스쿨 동문]][[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강릉 함씨]]
  • 함신익
         '''함신익'''(咸信益, [[1957년]] - )은 [[대한민국]]의 지휘자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경신 고등학교, [[건국대학교]] 음악교육학과를 졸업하고 1982년에 [[미국]]으로 유학해 [[라이스 대학교]] 석사 와 [[로체스터 대학교]] 이스트만 음대에서 지휘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1991년 [[폴란드]]의 피텔베르크 국제 지휘자 콩쿨에서 은상을 수상했고, 이듬해 밀브룩 관현악단 상임 지휘자와 퍼시픽 대학교 지휘 교수로 부임했다.199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예일 대학교]] 음악대학 지휘학과 교수가 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에벌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그린베이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와 예일 교향악단 음악 감독, 폴란드의 실레시아 오페라단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예일 대학교 음악대학 지휘과 교수로도 재직하고 있다. 2001년~2006년까지 [[대전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부임하였다. 2010년부터 2012년까지 [[KBS 교향악단]]의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2014년 현재, 혁신적인 재원 지원 정책 및 경영 방침을 근간으로 한 함신익의 심포니 송(Symphony S.O.N.G; Symphony Orchestra for the Next Generation) 오케스트라를 창단 후 창단연주회를 2014년 8월 23일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하였다.
         그는 예일대 지휘과 교수로 1995년 이래 재직중이고, 대전시립교향악단 (2001-2006) 과 KBS 교향악단 (2010- 2012)의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였다. 미국에서는 Abilene Philharmonic과 Tuscaloosa Symphony의 음악감독 으로 각 10여 년간 재직하였다. 또, Green Bay Symphony와 Milbrook Orchestra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미국 Seattle Times 는 "함신익은 생동감 있으면서도 감동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순수한 기쁨, 충격적인 음색으로 함신익의 오케스트라는 풍부한 음감, 따뜻한 소리로 웅장하면서도 편한 다양한 소리를 전달하였다" 라고 호평하였다.
  • 허민 (1976년)
         ==미국 독립야구 시절==
         [[2013년]] [[미국]] [[캐나디안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캔암 리그]] 팀인 락랜드 볼더스에 정식 선수로 진출하여 화제가 됐다. 배번은 23번이었다. 90km/h 초반 구속의 [[너클볼]]을 주무기로 하며, 그에 [[투심]]과 [[포심]]을 함께 구사한다.<ref>[http://osen.mt.co.kr/article/G1109671960 허민 구단주, 美 독립야구단 락랜드 볼더스 입단]</ref>
         [[서울대학교]] 최초로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이며 [[버클리 음악 대학]] 출신이기도 하다. [[2001년]]에 친구 다섯 명과 벤처회사인 [[게임]] 업체 [[네오플]]을 설립했고 [[2005년]]에 출시한 [[던전앤파이터]]의 대성공으로 성공한 기업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했다. [[2006년]]과 [[2008년]]에 온라인 게임 업체 [[네오플]]의 지분을 [[NHN]]과 [[넥슨]]에 각각 양도해 수천억원 대의 자산가가 됐다. 재벌이 된 뒤 [[미국]]으로 건너가‘원조 너클볼러’로 유명한 필 니크로에게 [[너클볼]]을 배우기도 했으며 [[2008년]]에는 [[KBO 리그|KBO]]에 [[현대 유니콘스]]를 인수하고 싶다는 뜻을 전달하기도 했으나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 허삼수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초기 [[허문도]] · [[허화평]]과 함께 3허(Three 許)로 불리면서 [[전두환]]의 핵심 측근 그룹을 형성하였으나, [[1982년]] 전두환의 신임을 잃고 물러나 [[미국]]으로 건너가 동서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했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 대학교]] 교수, [[교토 대학교]] 교수로 활동하였다. 그뒤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88년]] 귀국하였고, 같은 해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1982년]]부터 [[1987년]]까지는 [[미국]] [[스탠포드대학교]] 후버연구소 연구원으로도 위촉되었다.
         민주정의당 국책평가위원이 되었다. [[1990년]] [[1월]]의 [[김종필]], [[노태우]], [[김영삼]]의 삼당 합당에 참여하여 [[민주자유당]]내 민정당계 세력의 중진으로 활동하였다. 동시에 [[미국]] [[스탠포드 대학교]] 객원교수로도 초빙되었다.[[1990년]] [[민자당]] 부산시지구당과 민자당 부산동구지구당 조직책으로 부산시지구당과 부산동구지구당을 조직하였다.
         * 미국 하와이대 동서문화센터·일본 교토대·일본대·미국 스탠퍼드대 객원교수(1983년 ~ 1987년)
         [[분류:193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 육군 준장]][[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전두환]][[분류:노태우]][[분류:김영삼]][[분류:하나회]][[분류:중앙초등학교 (부산) 동문]][[분류:부산중학교 동문]][[분류:부산고등학교 동문]][[분류: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육군포병학교 동문]][[분류:육군공병학교 동문]][[분류:육군대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 동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민주정의당]][[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신한국당 당원]][[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김해 허씨]][[분류:대한민국의 반역죄 기결수]]
  • 허쉬
         [[미국]]의 초콜릿 회사.
  • 허용범
         | 학력 = [[미국]] [[하버드 대학교]] 행정대학원
         * 미국 하버드 대학교 행정대학원 정치행정학과 행정학 석사(2002년 8월)
         [[분류:안동중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신문 기자]][[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문화방송의 직원]][[분류:1987년 데뷔]][[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하양 허씨]][[분류:옛 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안동시 출신]][[분류:숭실대학교 교수]][[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동문]][[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
  • 허화평
         좌천된 상태에서도 저 정도의 위상이라면 실세로서 잘나가던 시절에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82년 5월 [[장영자·이철희 금융사기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전두환 대통령의 친인척에 대한 견제 기회로 인식하고 친인척의 공직 사퇴를 건의하였다. 이러한 행동이 전두환 대통령에게는 항명으로 비춰져 1982년 12월 정무제1수석비서관에서 사임하게 되었다. 이후 허삼수와 함께 청와대를 나와 [[미국]]에 체류하며 헤리티지 재단 연구원으로 일하였다.
  • 현이와 덕이
         이후 1980년 장덕은 [[안양예고]] 졸업 후 [[미국]] [[테네시 주립 대학교]]에서 작곡을 전공하였다. 1983년 미국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장덕은 솔로앨범 발표와 함께 본격적으로 솔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장현 또한 《현이와 거룩한 성》으로 음악활동 계속 하고 있었다. 그렇다가 [[1985년]] 현이와 덕이가 재결합하여 《너나 좋아해 나너 좋아해》, 《이젠 안녕, 《뒤늦은 후회》등이 수록된 정규2집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앨범이 크게 [[히트]]하였음에도<ref>{{뉴스 인용 |제목 = 남매듀엣 <현이와 덕이> 7년만에 재결합|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5090500099212016&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85-09-05&officeId=00009&pageNo=12&printNo=6003&publishType=00020|출판사 = 매일경제|날짜 = 1985년 9월 5일}}</ref> 얼마 뒤 다시 해체하였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1986년 장덕은 자신이 작곡하고 가수 [[이은하]]가 부른 《미소를 띄우며 나를 보낸 그 모습처럼》이 크게 히트가 되었고, 연이어 장덕 솔로 정규4집이 빅히트 되어 그 해 가장 성공한 여성스타로 합류하게 된다(님떠난 후- 골든컵 수상, 어른이 된 후에 사랑은 너무 어려워 - 빅히트 등). 1987년 [[장덕]]은 [[아시아 태평양 방송 연합|ABU]] 가요제에 [[한국대표]]로 나가게 되는 등 한국음악계에서 인정을 받고 있었으며, 오빠 [[장현]] 또한 코아기획을 설립하여 [[엔터테인먼트]]사 [[대표이사]]로 일하게 된다.
         1974년 서울 사범대학 부속중학교에 입학한 장덕은 사춘기를 겪으면서 '나는 왜 남들처럼 행복하게 살수 없는가?'라는 생각에 우울해 하다가 그 해 가을 메모도 남기지 않고 무작정 친구집인 대구로 내려가 10일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장덕은 이내 수면제 10알을 먹고 음독 자살을 기도한다. 이에 충격을 받은 장덕의 어머니는 장덕의 음악적 재능을 살려주고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당시 인기를 끌던 미국의 남매듀엣 [[카펜터스]]처럼 맏이 장현과 함께 남매 듀엣을 결성시켜 준다.
         1979년 1월 그녀의 어머니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된다. 어머니는 장현 · 장덕을 불러 유학을 시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떠나면서 어머니는 덕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부르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덕은 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장현은 이미 천인실과 결혼을 하였고 임신 6개월이 지나 곧 아이를 낳게 된다고 실토한다. 어머니는 장현과 천인실의 관계를 예전부터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결혼한 사실에 실망하게 된다. 어머니는 장현이 가수로서 성공하고 부양능력이 생겼을 때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고 수차 그것을 장현에게 말해 왔었기 때문이다. 6월 제2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박경희가 부른 <사랑이었네>가 가야금상을 수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3년연속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 같은 달 장덕은 지구레코드와 계약하며 솔로 데뷔음반 《첫사랑》을 발표한다. 이 음반은 타이틀곡 <첫사랑>을 비롯 <나도 그래>, <웃어봐요> 등 신곡 4곡과 현이와 덕이의 1집 수록곡들을 다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그 해 10월 장덕은 오빠 [[장현]]의 집에서 나와 월세방을 구해 혼자 살게 되는데, 이 때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동맥을 끊고 또다시 자살을 기도한다. 이 사건 이후 장덕은 오빠 · 아버지 가족과 함께 한 집에서 살게 된다. 그해 초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이 시기 장덕의 자살 소동을 모르고 있었다.
         1980년 5월 제3회 [[MBC]] [[MBC 서울국제가요제|서울국제가요제]]에서 [[최병걸 (가수)|최병걸]]의 <[[사랑은 떠나도 (노래)|사랑은 떠나도]]>가 입상하며 장덕은 작사/작곡가로서 4년 연속 입상하는 기록을 세운다(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1977년 · 1978년 · 1979년 3년 연속 입상한 사실은 맞지만 서울국제가요제 관련 정보를 찾아봐도 1980년 입상한 기록은 없다.). 6월 그녀는 타이틀곡 <순정>을 비롯 <진실한 사랑이라면>, <만날 수 없는 사람> 등 신곡 5곡과 현이와 덕이 정규 1집, 그리고 그녀의 첫 컴필레이션 음반 《[[첫사랑 (장덕의 음반)|첫사랑]]》의 수록곡들 중 몇 곡을 골라 그대로 수록한 컴필레이션 음반 《순정》을 발표한다. 10월 미군과 결혼하며 [[미국]]으로 [[이민]]가 살고 있던 그녀의 친어머니는 한국식품점에 갔다가 우연히 1년이 지난 1979년 9월 9일자 선데이서울 주간지를 통해 장덕의 자살 소송 기사를 접하게 된다. 어머니는 충격을 받고 장덕을 간곡히 불렀고 장덕은 아무 반응이 없다가 결국 어머니가 결혼해 살고 있는 테네시 주의 [[내쉬빌]]로 들어가게 된다. [[내쉬빌]]은 컨트리 뮤직의 메카로 일컬어지는 곳으로 장덕은 이 곳에서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 입학,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어머니는 오빠 장현 또한 불러서 대학 공부를 시키려 했지만 설득시키지 못했다.). 12월 내쉬빌 한인회가 주최하는 송년파티가 있었다. 장덕과 어머니도 참석했는데, 한인회 회장이 찾아와 장덕에게 밴드를 도와 달라고 한다. 한인사회에는 밴드가 딱 하나 있었는데, 형제들이 조직하여 만든 가족밴드 리 패밀리였다. 실력들이 부족했기에 장덕에게 부탁을 한 것이었다. 장덕은 처음엔 거절했지만 어머니가 금년만 해 보라고 해서 결국은 승낙을 한다. 이후 장덕은 형제들 중 한명인 이승언이라는 남자와 점점 가까워 지게 된다.
         1981년 장덕은 비싼 등록금으로 인해 벨몬트 칼리지 음악과에서 한 학기를 마친 뒤 [[테네시 주립대학교]] 실용음악과로 옮기게 되며 그 곳에서 음악의 기초 · 이론 · 감상 · 작곡 · 작곡기법 등을 전문적으로 배우게 된다. 또한 [[내쉬빌]] [[작곡가]] [[협회]]에 회원으로 가입도 하고, 한인 기독교 방송 프로그램 한국의 샘터에서 MC로도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어느 날 장덕은 리 패밀리의 일원이었던 이승언과 결혼을 하겠다고 어머니에게 허락해 달라고 한다. 당시 어머니는 결혼은 감옥 같은 것 이라며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대학 졸업 후 결혼하라고 충고했지만 10월 17일 미국에 온지 1년만에 장덕은 자신을 아껴주는 이승언과 [[내쉬빌]]에서 결혼을 한다. 그리고 리 패밀리의 일원으로서(밴드에서 장덕은 음악적 리더 역할을 하였고 퍼스트 기타와 보컬을 담당했다.) [[한인회]]의 각종 행사에 참여하게 된다. 하지만 점점 그녀는 서울에서의 화려했던 가수 생활의 추억을 점점 그리워 하게 된다.
         미국에 머물던 이 시기 장덕은 [[미국]] [[가수]]에게 <[[여인이여 안녕 (노래)|여인이여 안녕]]>이라는 작품을 주어서 취입 시키기도 하였는데, 당시 장덕의 [[미국]] 내 창작활동은 [[미국]] 일간지 및 [테네시언]지에 크게 소개되기도 하였다.
  • 현제명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기독계 무디성경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이수하고, 귀국한 뒤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한 조선문예회 정회원으로 가입하다가, 독립 계몽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친일 성향 단체인 대동민우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이후에도 시국대응전선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도 가입하면서 친일 행위를 하였던 전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친일 찬양적인 성향의 '''[[후지산]]을 바라보며'''에 작곡자로 개입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 호준석
         * [[2004년]] ~ [[2005년]] :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 객원연구원
  • 홍병선
         홍병선은 신흥우와 함께 [[1927년]] [[덴마크]]와 [[미국]]의 농촌사업을 시찰하고 돌아온 뒤, 농촌 협동조합 및 구락부를 조직하는 사업에 열중했다. 덴마크식 농촌사업을 위해 [[1931년]] 서울 [[신촌]]에 농촌지도자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인 고등농민수양소를 세우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켰다.
  • 홍수환
         * [[1975년]] [[3월 14일]] [[미국]]에서 열린 2차 방어전에서 [[알폰소 자모라]]에 4회 KO패.
         * [[1981년]] [[미국]]으로 이민, 마약 밀매 사건과 연루되어 체포되기도 함. 이후에 다시 귀국.
         [[분류:195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권투 선수]][[분류:대한민국의 남자 영화 배우]][[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자유 연애]][[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WBA 챔피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중앙중학교 (서울) 동문]][[분류:영락고등학교 동문]][[분류:인천전문대학 동문]][[분류:남양 홍씨]][[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홍영식
         [[1872년]] 칠석제 과거에 합격하고 [[18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의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1881년]] [[신사유람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시찰하고, 일본 군사시설에 대한 보고서 <일본육군 총제(總制)>, <일본육군 조전(操典)> 등을 고종에게 올렸다. 1883년에는 고종의 특사 [[민영익]]의 부사로 미국에 다녀와 국내에 농기계를 최초로 도입시켰다. [[병조]][[참판]]을 거쳐 [[1884년]] [[3월]] [[우정국]] 총판에 임명되어 [[우정국]] 설치에 전력하다가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윤치호]] 등과 함께 정변을 모의, 그해 [[10월]]의 [[갑신정변]]에 가담하였으나 3일만에 실패당하고 처형당했다.
         [[파일:1883년조선주미보빙사절단01.jpg|섬네일|180px|left|[[1883년]] [[9월]] [[미국]]에 파견된 [[조선]]의 보빙사절단원(앞줄 왼쪽 첫 번째가 홍영식, 앞줄 왼쪽 두 번째는 [[민영익]], 뒷줄 가운데는 [[유길준]]) ]]
         ==== 미국 사절단 파견 ====
         [[1883년]](고종 20년) [[6월]], 그 전해에 체결된 [[조미수호통상조약]]에 따라 [[미국]]의 사절이 [[한성부]]를 방문하고 돌아간 뒤, 그해 [[6월]] [[미국]]의 사절에 대한 답변으로 [[조선]] 정부에서 [[미국]]에 [[보빙사]](報聘使)가 파견될 때 그는 보빙부사 겸 전권부대신에 임명되어 보빙사 겸 전권대신 [[민영익]]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민영익]], [[서재필]] 등과 함께 미국에 파견되었다. [[6월 5일]] 보빙사(報聘使) 전권대신 민영익을 수행, 전권부대신으로 출국하였다.
         보빙사는 종사관으로 서광범이, 수행원으로 유길준, 고영철, 변수, 현흥택, 최경석 등이 임명되고, 그밖의 시종무관들과 수행원들 [[청나라]] 사람 오예당이 함께 출발하였다. 홍영식, [[민영익]]과 일행은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경유 [[도쿄]]를 경유할 때에 일본인 오카모토(宮岡恒次郞)를 통역관으로 참여 시키고, 안내겸 비서로 미국인 [[퍼시벌 로웰]](Percival Lowell, 한국명 노월(魯越))을 고용하였다. 태평양을 건너 9월 2일 [[샌프란시스코]]에 상륙하였다. 일행은 기차를 타고 [[시카고]]를 거쳐 [[9월 15일]] [[워싱턴 D.C]]에 도착 하였다.
         ==== 미국 방문과 농기계 도입 ====
         당시 미국 대통령 체스터 아더(Chestter A Arthur)는 [[뉴욕]]에 체류하고 있어 민영익, 홍영식과 일행은 뉴욕 애비뉴 호텔로 가서 아더 미국 대통령의 접견을 받고 국서를 봉정하게 된다. 이때 이들 사신은 대통령이 있던 방 문 앞에 돗자리를 깔고 큰 절을 올려서 체스터 아더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 관리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이는 곧 [[미국]]과 외신 기자들에 의해 대서특필되어 삽화로 실리게 되었다.
         미 국무성은 이들 시찰단에게 호위 장교를 배치했는데, 홍영식에게는 국방성 해군정보국의 테오도어 메이슨(Theoodore A. Mason) 미 육군 대위, 해군도서관의 조지 폴크(Georg C. Foulk) 중위를 배치하여 수행과 소개를 담당하게 했다. 홍영식은 미국 국방성을 시찰, 호술(護術)과 무술, 무기 등을 안내를 맡게 하였으며, 일행과 함께 도시와 공공기관을 시찰하고 [[10월 12일]] 다시 체스터 아더 미국 대통령을 만나 환담한 후 작별하고 귀국했다.
         홍영식은 고영철, 최경석, 외국인 로웰, 오에당(吳禮堂), 오카모토 등을 거느리고 [[10월 16일]] [[워싱턴]]을 출발하여 [[11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배편으로 [[일본]] [[도쿄]]를 거쳐 [[1883년]] [[11월 20일]] 귀국하고, [[11월 21일]] 고종에게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미국]]에서 열차와 버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미국]] [[워싱턴 D.C]]를 시찰하면서 기관차와 버스를 목격했고, 농작물을 수확 자르는 기계를 보고 그해 [[11월]]에 귀국하여 [[미국]]에서 신품종의 농작물과 농기계를 도입할 것을 조정에 상주하였다. 그리고 로웰의 노고를 고종에게 보고했으며 고종은 그를 국빈으로 초대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왕실의 초대에 힘입어 로웰은 12월 20일 다시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후 개화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개항 운동을 적극 주도한다.
         [[1883년]] [[1월 12일]]([[1882년]] [[음력 12월 4일]]) 창시된 교섭통상아문에 근대식 체신기관인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되자 홍영식은 우정사 담당 협판이 되었다.<ref name="노컷" /> [[1883년]] [[음력 9월]] 보빙사의 부사로 미국에 갔을 때는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 후 고종에게 우편 업무의 개설을 건의하였다.<ref name="노컷" /><ref name="뉴스메이커" /> 동시에 [[미국]] 체류 중 홍영식에게는 특별히 [[조선 고종|고종]]의 특사 자격이 임명되었다. [[1884년]] 초에는 [[함경북도]] 병마수군절도사 겸 안무사로 임명되어 부임했다가 며칠만에 협판군국사무로 전임되어 다시 되돌아왔으며, [[병조]][[참판]]에 임명되었다. [[1884년]] [[4월 22일]]([[음력 3월 27일]]) 우정총국을 창설하게 되었고, 우정국총판(郵政局總辦)에 임명되었으며, [[11월 18일]]([[음력 10월 1일]]) 서울·인천 간에 근대식 우편제도의 실시를 보았다.<ref name="노컷" />
         [[1882년]] [[음력 12월]]부터는 [[덴마크]]와 [[미국]]의 전신회사들과 교섭하여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1883년]](고종 20년) [[1월 24일]] 덴마크 대북부 전신회사에 약정을 허가하고 계약, [[조선]]에 전신 통신선 설치 공사를 시작한다.
  • 홍지호
          | 학력 = {{USA}}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치과대학 학사 <br /> {{국기나라|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치과대학원 치의학 석사·치의학 박사
         1990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치과대학을 졸업했으며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외래교수와 [[삼성의료원|삼성의료원 서울 강북삼성병원]] 치과 과장을 역임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0190605 <nowiki>[인물 포커스]</nowiki> 연예스타 꿈꾸는 치과의사 3인방] 2003년 6월 3일 동아일보</ref>
         *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학사|사]]
         *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치과대학원 [[치의학]] [[석사]]·[[치의학]] [[박사]]
         ** 아들: 홍진원 (2006년 ~ , [[미국]] 유학 중)
         [[분류:196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치과 의사]][[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경희대학교 교수]][[분류:성균관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진행자]][[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자유 연애]][[분류:남양 홍씨]][[분류:대한민국 육군 중위]][[분류: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동문]]
  • 황규봉
         은퇴 후 삼성의 투수코치로 있었고, 1989년 이후 [[미국]]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지만 야구계를 아예 떠났다. 건설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나 사업 실패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으며 야구인들과 교류를 끊는 바람에 근황이 잘 알려지지 않았고, [[http://sports.news.naver.com/kbo/news/read.nhn?oid=382&aid=0000442613|사업 실패로 인해 가족들과 헤어져 부산에서 홀로 지냈다고 한다]]. 매제를 통해 2015년 11월에 대장암 판정을 받은 사실이 알려졌고, 끝내 [[2016년]] [[1월 18일]] 사망했다. 워낙 근황을 알리지 않다 보니, 그의 부고도 중고교 동기이자 같이 삼성에서 원년멤버로 뛰었던 [[이선희(야구)|이선희]]를 통해 알려졌을 정도.
  • 황병기
         1985년부터 1986년까지 미국 하버드 대학교에 객원교수로 지냈다. 1986년에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기도 했다.
         1965년 4월 22일-5월 2일에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열린 '금세기 음악 예술제(Festival of Music and Art of This Century)에 초청되어 작곡 발표 및 가야금 연주를 했다. 최초의 독집 음반(LP) Music From Korea: The Kayagum』(East-West Center Press) 취입하기도 했으며, 6월-8월 [[워싱턴 대학교]]에서 하계 학기 강사로 한국음악을 강의했다. 샌프랜시스코, 로스앤젤리스, 시애틀에서 가야금 독주회를 열었고, 샌프랜시스코 하계음악제에서 Lou Harrison 작곡의 「Pacific Rondo」를 연주했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다.
         * [[1965년]] 미국 워싱턴주립대학교 강사
         * [[1986년]] 미국 하버드대 객원교수
  • 황연대
         [[1966년]]에는 사단법인 한국소아마비아동특수보육협회를 설립하여 상임이사로 취임했으며 [[1974년]]에는 [[미국]] [[뉴욕 대학교]] 재활의확과 연수 과정을 이수했다. [[1975년]]에는 소아마비 장애인을 위한 재활 시설인 정립회관(正立會館)을 건립하여 관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장애인의 권익 향상 활동에 참여했다. [[1987년]]부터 [[1990년]]까지 한국여의사회 홍보부장 겸 잡지 《여의사회보》 편집인을 맡았다.
  • 황장수
         [[부산광역시|부산]] 출생이며 한때 [[김천시|경상북도 김천]]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고 이후 [[사천시|경상남도 사천]]에서 성장한 그는 [[서울대학교|서울대]] 농경제학과에 입학하여 1991년 2월 학사 학위 이후, 1994년 2월 동 대학원을 석사 수료하였다. 1994년 2월에서 1994년 7월까지 농어촌발전위원회 전문위원 직위를 지낸 그는 1996년 2월 15일, 당시 새정치국민회의에서 표방한 '젊은 피 수혈'이라는 차원으로써 [[새정치국민회의]]에 영입되어(이후 정당 당속 전력: 1996년 [[새정치국민회의]] → 1999년 [[무소속]](국민회의 탈당) → 2000년 [[새천년민주당]] → 2001년 [[무소속]](민주당 탈당) → 2001년 새천년민주당(민주당 재입당) → 2002년 무소속(민주당 재탈당) → 2002년 [[국민통합21]] → 2002년 [[무소속]](국민통합21 탈당)) [[새정치국민회의|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특보위원, 새정치국민회의 상임위원 직위를 지냈으며 1999년 9월 27일을 기하여 [[새정치국민회의]] 탈당 이후 2000년 1월 30일을 기하여 [[새천년민주당]]에 입당을 하여 [[새천년민주당]] 당무위원을 지낸 그는 2000년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16대 총선]]에서 경상남도 사천시 새천년민주당 국회의원 후보 출마하였지만 낙선하였으며 이후 새천년민주당 정책위원회 부위원장 직위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국민의 정부 중후기 시절이던 [[2000년 11월]] 초순 [[김대중]] 대통령 직속 농어촌발전위원회 상임위원, 2001년 1월 6일을 기하여 새천년민주당 탈당 이후 [[2001년 6월]] 초순 [[이한동]] 국무총리 직속 의료보험통합추진위원회 상임위원, 총리 직속 자영업자소득파악위원회 전임위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이후 한국농업경영인연합회 사무총장, [[한갑수 (1934년)|한갑수]] 농림부 장관 자문위원 등을 역임을 한 그는 2001년 10월 16일을 기하여 [[새천년민주당]] 재입당을 하여 [[새천년민주당]] 전임위원을 역임하였지만 1년 후 2002년 11월 1일을 기하여 [[새천년민주당]] 재탈당 후 2002년 11월 30일을 기하여 [[국민통합21]]에 입당을 하여 차라리 머지않아 정치 분야에서 은퇴를 할 마지막 자세로써 [[국민통합21]] 대표전임위원을 역임하였으나 [[임동원]] 국정원 원장 재임 시절([[2001년 1월|2001년 연초]]) [[미국]] 스파이 의혹 사건에 연루된 사안이 뒤늦게서야 지목되고 [[국민통합21]]에 입당을 한지도 불과 한 달여 후 2002년 12월 21일을 기하여 [[국민통합21]] 탈당과 함께 6년 10개월간을 몸담았던 정치 분야에서 사실상 완전 은퇴를 선언하고 이후 재단법인 농림수산정보센터 사장에 선임되기도 했다.
         [[분류:1964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최고경영자]][[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미국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대한민국의 방송인]][[분류:새정치국민회의]][[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
  • 황정오
         [[1981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 [[동메달]]을 따고,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열린 세계 유도 선수권 대회에서도 동메달을 획득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1984년 하계 올림픽]]에서는 결승전까지 올라갔으나 [[일본]]의 [[마쓰오카 요시유키]]에게 패해 은메달에 머무르고 말았다.
         [[1985년]]에 은퇴한 황정오는 [[1987년]]에 미국의 마린 대학교로 유학을 가면서 미국 생활을 시작했고, [[1997년]]에는 테네시 대학교에서는 대학교수로 발탁되었으며 2010년에는 미국태권도고단자회 관장을 맡고 있다.
  • 휴먼 토치
         570호부터 정신적인 성장을 예고하는 장면들이 잦아지고 노력하는 모습이 많아져 팬들의 불안을 야기했으며 결국 587호에서 백스터 빌딩 안에 [[네거티브 존]]이 어나이얼레이션으로부터 강제로 열려지자 [[인간]]으로 돌아온 [[씽(마블 코믹스)|씽]]과 백스터 빌딩에 거주하는 학생들과 식객 그리고 [[프랭클린 리처즈]]와 [[발레리아 리처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네거티브 존에 남아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다. [[미국]] 만화 특성상 결국 언젠가 다시 부활하겠지만.
  •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으나 그의 무시를 당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흥선대원군]] 실각 후 좌의정, 세자부, 영의정 등을 지냈으며 통리기무아문 총리대신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했다가 유림과 갈등하였다. 그는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여 [[1880년]] 이후 [[미국]], [[일본]]과의 개항 정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1882년]](고종 19) [[6월]]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의 사주를 받은 난병에게 [[민겸호]](閔謙鎬) 등과 함께 살해되었다. [[신도비]]문에는 [[조선 고종|고종]]이 어의를 보내 진료했으나 차도를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나, 난병을 피해 도주하다가 추락사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동생인 흥선대원군과의 감정대립으로 민씨 정권의 측근으로 지냈는데, 민승호와 흥선대원군은 그를 이용해서 상대방의 정세를 염탐하는데 이용하려 하였다. 별칭은 '''유유정승'''(唯唯政丞)이다.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영의정이 총리대신으로 관직이 바뀌자 초대 총리대신에 올랐다. 이때 그는 개항 정책을 추진했으나 영남 유림(儒林)의 탄핵을 당했다. 또한 그는 [[미국]]과의 조약체결 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한편 [[1875년]](고종 12) [[11월]] 그의 집에 의문의 방화사건이 발생하였다.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다.
         그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한 [[1880년]] [[10월]]의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했다.<ref name="sisi459">강재언,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03) 459페이지</ref> 그는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ref name="sisi459"/>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聯美論)를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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