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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근욱 . . . . 32회 일치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으로 진학했다. 해방 후에도 계속 가족과 함께 [[경성]]에서 체류하다가 [[1948년]] [[4월]] [[이화여대]] 영문학과 재학 중 [[남로당]] 당수이자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 [[허헌]], 이복 언니 [[허정숙]] 등을 따라 월북하였으며 [[평양러시아어대학]]에서 수학했다. 그뒤 아버지 [[허헌]]은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의장이었고, 언니 [[허정숙]]은 북한 문화선전상, 보건성부상, 사법상, 최고재판소장,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을 지냈다.
=== 작품, 문학 활동 ===
그러나 북한 생활을 숨막혀했던 그는 [[1950년]] 남편 박노문 등과 함께 자신이 추구하는 문학과 자유를 찾아 다시 월남한다. 그 해 [[6월]] [[한국 전쟁]] 중에 이복 언니 [[허정숙]] 등을 만났지만 이내 그는 남편과 아들을 데리고 [[1·4 후퇴]] 때 남으로 내려갔다. 이후 호적 없이 가명으로 살기도 했다.<ref>한겨레신문 1991년 6월 27일자 10면, 생활문화면</ref> 한때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중 남편 박노문 등과 함께 북한의 간첩 혐의를 받고 체포, 수감되기도 하였다. 그의 아버지 [[허헌]]과 이복 언니 [[허정숙]]이 북한의 고위층이라는 이유로 혐의가 없었는데도 여러 번 의심을 받기도 했다.
[[1984년]] KBS 방송국 집필담당 전문위원이 되었으며, 그밖에도 한국소설가 협회 회원, 국제 펜클럽 협회 한국본부 회원, [[한국문인협회]]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89년]] KBS 방송국에서 정년퇴임한 뒤에는 [[1992년]] [[4월]] [[남북문학교류위원회]] 위원<ref name="nambb">동아일보 1992년 4월 20일자 13면, 생활문화면</ref> [[1993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이사,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위원, [[이화여자대학교]] 동창문인회 임원,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등을 역임했다. [[1993년]] [[서정범]] 등과 함께 펜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운명의 숲:선비소설문학선 1》 (도서출판 선비, 1988)
* 《공백지대》, 문학춘추사, 《문학춘추 1965년 6월호》 (문학춘추사, 1965)
* 《싸늘한 달빛의 눈덮인 고원》, 월간문학사, 《월간문학 2003년 7월호》 (월간문학사, 2003)
* 《싸늘한 달빛의 눈덮인 고원》, 한국비평문학회, 《2003년을 대표하는 문제소설》 (한국문화사, 2004)
그의 작품 중에는 자전적인 내용을 담은 소설, 문학 작품들도 존재한다. 이를 두고 자신의 출신과 관련된 남한 쪽에서의 모종의 제약 때문에 의식적으로 이데올로기나 분단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라는 평도 있다. 또한 일찍이 이념과 삶의 진정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아버지 및 가족과 결별하고 월남했던 이력이 말해주듯, 누구보다 분단과 가족공동체의 회복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있다는 작품평도 있다.
* [[이화여자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중퇴)
* [[1948년]] [[이화여자대학교]] 문과대학 영어영문학과(중퇴)
* [[1992년]] [[4월]] [[남북문학교류위원회]] 위원<ref name="nambb"/>
*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
* 한국여성문학인회 자문위원
* [[1976년]] 대한민국 문학상
* [[1976년]] [[6월 29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반공문학상 소설 부문, 문화공보부장관상
* [[1993년]] 한국 PEN문학상
* [[1997년]] 제2회 순수문학상 대상
* [[1998년]] 제2회 이화 문학상 (이 모든 시간의 끝에)
* 월간문학사 편집부, 《월간 문학 2007년 5월호》 (월간문학사, 2007)
- 이광호 . . . . 29회 일치
| 직업 = 문학평론가, 교수
| 장르 = 문학
'''이광호'''([[1963년]] ~ )는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 교수이다. [[1963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고, [[고려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계의문학]]》 편집위원(1992~1999), 《포에티카》 편집위원, 《[[문학과사회]]》 편집동인(1999~2010)을 역임했다. [[2001년]] 제13회 「[[소천비평문학상]]」,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2007년]] 제18회 「[[팔봉비평문학상]]」, [[2009년]] 제17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했다. [[1996년]]부터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 2001년 제13회 「소천비평문학상」
* 2003년 제48회 「[[현대문학상]]」
* 2007년 제18회 「[[팔봉비평문학상]]」
* 2009년 제17회 「[[대산문학상]]」
* 《위반의 시학》([[문학과지성사]], 1994)
* 《움직이는 부재》([[문학과지성사]], 2001)
* 《이토록 사소한 정치성》([[문학과지성사]], 2006)
* 《익명의 사랑》([[문학과지성사]], 2009)
* 《미적 근대성과 한국문학사》([[민음사]], 2001)
* 《오규원 깊이 읽기》([[문학과지성사]], 2002)
* 《쨍한 사랑 노래》([[문학과지성사]], 2005) : 문학과지성 시인선 300호 기념시선
* 《정거장에서의 충고》([[문학과지성사]], 2009) : 기형도 20주기 문집
* 《사랑의 미래》([[문학과지성사]], 2011)
[[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서울예술대학교 교수]][[분류:196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분류:팔봉비평문학상 수상자]][[분류:대산문학상 수상자]]
- 현진건 . . . . 26회 일치
| 직업 = 작가, [[소설|소설가]], [[수필|수필가]], [[문학 평론|문학평론가]], 독립운동가, [[언론|언론인]]
현진건의 집안인 연주 현씨는 [[역관]](譯官) 등의 [[잡과]](雜科) 출신을 많이 배출한 [[중인]](中人) 집안에 해당한다. 현진건의 6대조로 왜역(倭譯) 즉 [[일본어]] 통역관이었던 태형(泰衡)부터 한역(漢譯) 즉 [[중국어]] 통역관이었던 5대조 상복(商福), 몽역(蒙譯) 즉 [[몽골어]] 통역관이었던 시석(時錫)에 이르기까지 모두 역관으로서 활약하였으며(각자의 처가도 또한 역관 집안이었다) 증조부 경민(敬敏)도 왜역으로 [[동래]](東萊)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황현]]의 《[[매천야록]]》에는 현진건의 숙부인 현양운이 조민회의 후임으로 주왜공사(住倭公使)가 된 사실을 기록하면서, 영운의 가계를 그의 할아버지(즉 현진건의 증조할아버지)가 왜역으로 오랫동안 동래에 머무르다가 현지 기생과의 사이에서 현양운의 아버지를 얻었고, 현양운 자신도 그 아버지가 첩에게서 본 자식이었다고 적고 있다.<ref>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 양진오, 2008, p.26</ref>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ref>일본 학자 시라카와 유타카에 의해 세이조 중학교 3학년 성적대장 일람표에서 현진건의 이름이 확인되어, 그가 1917년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실제 이 학교에 재적했음을 고증할 수 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 음력 9월 10일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1922년]] 9월에 현진건은 조선일보사를 그만두고<ref>1년에 걸치는 「조선일보」 근무에 대해서 현진건은 그렇게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로는 초기 「조선일보」가 보여준 노골적인 친일신문 표방 태도, 친일 색채가 농후한 발행 주체들이나 수시로 뒤바뀌는 발행인으로 인해 현진건 자신의 소신을 펼치기 곤란했던 점이 지적되고 있는데, 당시 「조선일보」의 친일 분위기에 대해 현진건의 문우였던 박종화는 "월남 이상재 선생 사장과 신석우 부사장, 민세 안재홍 편집국장 등이 취임하기 전의 초기 「조선일보」에는 양심있는 사람으로는 오래 거접(居接)할 것이 아니었다"(박종화, 「빙허 현진건 군(君)」, 『신천지』 1954.10. p.139~140)고 하였으며, 자전적 성격을 띠고 있는 현진건의 「지새는 안개」에는 「조선일보」를 빗대어 아예 "썩은내, 더러운내, 곰팡내, 음탕한내가 감도는 분위기", "도야지(돼지) 우리"로까지 표현하고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35~13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최남선]](崔南善)이 만든 동명사(東明社)에 들어간다. 그 다소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창간 당시부터 민족적 색채가 농후했고, 역사지향적 성격을 추구하며 「조선통속역사강화」(최남선 저) · 「조선과거의 혁명운동」(문일평 저) 등 유독 국학(國學) 관련 논문이 자주 연재되었던 「동명」에서의 경험은 훗날 「고도순례 경주」, 「단군성적 순례」 등의 민족의식이 농후한 작품을 쓰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그리고 11월 13일에 그의 첫 창작집 『타락자』가 조선도서주식회사에서 발간된다.
[[1925년]] 1월, 현진건은 『개벽』에 단편 「불」을 발표하였다. 이때 그는 「시대일보」의 사회부장이 되었으나 「시대일보」가 폐간되면서 동아일보사로 전직하여야 했다. 3월 1일자 『개벽』 제57호에는 이때의 현진건의 근황에 대해 "근래에 빙허(憑虛) 군은 신문사 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므로 더 많은 독서와 연구에 노력하겠다 한다. 늘 군은 조선의 평론계가 아무 보잘 것 없는 것을 매우 분개해서 앞으로는 논문도 쓰실 작정이라고. 고마운 일이며 즐거운 일이며 마음히 든든해지는 일이다."라고 짤막하게 소개하고 있다.<ref>「文壇雜談」 1925년 3월 1일자 『개벽』제57호.</ref> 그리고 박문서관에서 그의 중편 「지새는 안개」가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또한 2월에 단편 「[[B사감과 러브레터]]」를 『조선문단』에 발표하고<ref>현진건이 『조선문단』에 작품을 싣기 시작한 것은 『개벽』이 점점 '계급주의 문학'을 외치는 [[카프]]에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부터였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4월과 5월에는 수필 「목도리의 복면」과 「설 때의 유쾌와 낳을 때의 고통」을 각각 기고하였다. 7월에는 「조선문단과 나」라는 기고에서 작가는 삼삼오오 짝을 짓고 당을 나누어 서로 갈라서서 싸우는 존재가 아니라 작가 하나하나가 독립적인 개체라는 "일인일당(一人一黨)주의'라는 용어를 써가며, 계급주의 문학을 옹호하는 카프의 주장에 맞서 내용적 가치와 계급적 가치란 별개임을 주장하였다. 또한 『조선문단』에서 만든 조선문단합평회의 정기회원으로서, 10월에는 『조선문단』 신추문예(新秋文藝)에 응모한 작품들의 심사를 맡아 처음으로 평론을 싣기도 했다.
[[1926년]] 1월에 현진건은 『개벽』에 평론 「조선혼(朝鮮魂)과 현대정신의 파악」을 기고하였다. 이 평론은 오늘날 현진건이 가진 '민족주의' 성향을 강하게 드러낸 것으로 평가받는다.<ref>현진건이 「조선혼과 현대정신의 파악」을 실을 무렵에 기자로서 재직하고 있던 「동아일보」에 현진건이 「시대일보」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최남선이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으로 있었던 점을 지적하고, 최남선이 당시 주창한 '조선주의'가 현진건의 '조선혼' 주창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거라고 보기도 한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9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2월에는 『조선문단』에 수필 「무명 영웅」을 기고하고, 11월에는 『개벽』에 단편 「사립정신병원장」을 기고하였다. 또한 이 해 3월에 단편집 『조선의 얼골』이 출판사 글벗집에서 간행되었다.
[[1927년]] 1월부터 3월까지 『조선문단』에 중편 「해 뜨는 지평선」을 기고하였다. 같은 해 1월 2일자 「동아일보」는 현진건을 "산뜻한 표현의 미를 가진 단편작가"로, "표현에 노력을 빼앗긴 반면에 그 내용적 가치가 너무도 희박하다"고 하면서도 단편집 『조선의 얼굴』에서 보여준 그의 새로운 모습을 향한 노력을 높이 사면서, "그의 자연주의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고 있으며 그의 제재 방면도 분명히 향토로, 민중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로 끝맺고 있다. [[1928년]]에는 드디어 「동아일보」 입사 3년만에 사회부장이 되었다(~1936년). 사회부장 시절의 현진건에 대해 당시 "대장을 놓고 제목을 붙이는데, 편집 칠팔명이 모여선 중에 붉은 잉크를 붓에 덤뻑 찍기만 하면 민각을 누연치 않고 진주 같은 제목명을 이곳저곳에 낙필 성장으로 비치듯 떨어져서, 선후배들로 하여금 그 귀재에 혀를 둘러 감탄케 할 지경"이라는 명성이 나돌았다고 한다.<ref>방인근도 그의 제목 붙이는 '민활하고도 묘미있게 붙이는 재주'에 대해서 칭찬하고 있다.(「빙허회고기」, 『현대문학』 1962년 11월호.) 제목을 붙이는 것뿐 아니라 휘하의 기자들이 취재한 기사를 지면에 적절히 배치하여,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고 취할 기사는 신속하게 취하는 언론계의 명인같은 존재였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4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총서24.</ref> 그러나 이 해 1월, 상하이에서 한인청년회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형 현정건이 체포되어 본국으로 이송되어 복역하였다.<ref>"원래 불면증이 있는 까닭에 어떤 때에는 무리하게 오전 삼시까지도 독서를 한다"(현진건, 「각 방면 명사의 일일생활」, 『별건곤』 17호, 1928. 12.)는 현진건 자신의 말에서 이때의 현진건의 심리적으로 불안한 생활을 찾아볼 수 있다.</ref>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일본 대표로 출전해 1등을 차지한 조선인 선수 [[손기정]](孫基禎)의 유니폼에 그려진 [[일장기]]를 지워버린 채 신문에 실은 사건으로([[일장기 말소 사건]]) 현진건은 기소되어 1년간 복역해야 했으며, 이듬해 출옥하면서 동아일보사를 사직하고 관훈동에서 서대문구 부암동 325-5번지로 이사하여<ref>당시 부암동은 서울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별로 닿지 않는 곳이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56.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그곳에서 땅을 빌려 양계 사업을 시작한 한편, [[1938년]] 7월 20일부터 다시 「동아일보」지면에 장편역사소설 「무영탑(無影塔)」을 연재한다.(~ 1939년 2월 7일) [[1939년]] [[7월]]에 「동아일보」 학예부장으로 복직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25일부터 「동아일보」에 역사소설 「흑치상지(黑齒常之)」 연재를 시작하는데, 이 와중에 문예지 「문장」과 가진 인터뷰에서<ref>「침묵의 거장 현진건 씨의 문학종횡담」, 『문장』 1939년 11월. p.116~120.</ref> 현진건은 당시의 소설들에 대해서 "(자신이 처음 글을 쓰던 때에 비해) 문장이라든가 소설 만드는 기술은 가히 괄목할 만큼 진보.... 그러나 구상의 도약이 드뭅니다"라며 "동경(東京) 문단의 말기적인 신변잡기 같은 것에 안주하려는 경향"에 대해 경계하고, 또한 현재가 여러 면에서 세계적인 문학의 빈곤시대가 아닌가 싶다며 "문은 실상 기(氣)이며 기가 없으면 아무리 진주같다 해도 곧 사회"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12월에는 같은 잡지에 또 한 번 「역사소설의 제(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여 역사소설이라는 것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원고료에 양계만으로는 생계를 해결할 수 없었던 현진건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친구의 유혹에 넘어가(방인근은 "박씨 성을 가진 친구의 꼬임에" 넘어갔다고 했다) 기미(期米) 사업을 시작하지만, [[1940년]]에 당시 명동에 있던 증권회사에 미두를 투자했다가 그것이 모두 실패하면서<ref>이재민, 「새 자료로 본 빙허의 생애」, 『문학사상』 1973년 4월. p.355.</ref> 양계장이나 다른 재산, 부암동에 있던 집도 처분하고 신설동 고려대학교 정문 앞의 조그만 초가집(지금의 [[동대문구]] [[제기동]] 137번지 61호)으로 이사해야 했다. 이 실패로 현진건은 더욱 술에 빠져 살게 되었고 결국 '혈압' 때문에 쓰러져 눕게 되었다(이 해에 현진건의 단편소설과 역사소설 「무영탑」이 박문서관에서 「현진건 단편집」과 「무영탑」으로 발간되었다). 현진건은 『동아일보』 기자였던 양재하가 만든 친일잡지인 『춘추』 4월호에 소설 「선화공주」를 연재하지만 9월호에서 중단하였다(미완).
[[2005년]] [[8월 15일]]에 [[건국훈장|건국공로훈장 독립장]](3급)이 추서되었다. [[2009년]]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현진건 문학상'이 제정되었다.
숙부 '''[[현영운|영운]](映運)'''은 아내 [[배정자|분남]](粉男)이 [[이토 히로부미]]의 양녀가 된 것을 계기로 크게 출세하여, 장관급인 대한 제국 군령부 참장, 주일특명전권공사, 원수부 검사총장, 참모부 제1국장, 농상공부 협판 등의 고위직을 거친 구한말의 전형적인 친일관료였다. 이러한 그의 벼락출세가 영운의 형제들의 관직 진출에 음으로 양으로 크게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보인다. 부친 '''경운'''은 지위가 정3품 통정대부까지 올랐고 의정부 외부의 통신원 국장과 전보사장을 거쳐 [[1895년]] 대구부 전보사의 주사로 취임하기도 했다.<ref>당시 전보사는 농상공부대신의 관리를 받으며 전보에 관한 사무를 수행하였으며, 1등사와 2등사로 구분되었다. 한성(서울)과 인천, 원산, 부산, 의주, 경성, 함흥, 회령이 1등사에 속했고 대구는 2등사였다. 통신원 국장이란 직책은 수준은 미비할 망정 국가의 전신, 전화, 전기는 물론 우편과 운송 분야와 관련한 시설과 제도를 관리하는 자리였기에 아무나 역임할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3~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숙부 '''철운'''은 안동관찰부 주사 겸 용궁군수를 지냈다. 숙부 '''양운'''은 관립영어학교 출신으로 궁내부 예식원주사에 태복시 기사 등을 지내고 [[원산]]과 [[동래]]에서 영어교사로 일했으며 [[대한체육회]] 창설 멤버로 알려져 있다. 숙부 '''붕운'''은 태복시 주사를 지냈다.
부친 경운의 첫 부인이자 현진건의 친어머니인 완산 이씨 정효(貞孝)는 진건을 비롯한 네 명의 아들을 낳은 뒤 막내 진건의 나이 열 살 때인 [[1910년]] 6월 13일에 죽고, 경운은 정선(旌善) 전씨를 후처로 맞아들여 또 한 명의 아들을 두었다. 진건의 큰형 '''홍건(鴻健)'''은 러시아 사관학교 출신으로 대한 제국의 육군 참령을 지냈다. 한때 러시아 대사관에서 통역을 맡기도 했으며, 《각사등록》과 《승정원일기》 등의 문헌에 따르면 광무 6년([[1902년]])에 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부교관(副敎官)과<ref>《각사등록》 광무 6년(1902년) 7월 28일조. 이듬해인 광무 7년(1903년) 4월 23일(양력 5월 19일)에 면관되었음이 《승정원일기》에 수록되어 있다.</ref> 칭경시(稱慶寺)의 예식사무위원(禮式事務委員)을 잠시 맡기도 했다<ref>《승정원일기》 광무 6년([[1902년]]) 6월 24일조. 그러나 광무 7년(1903년) 2월 28일(양력 3월 26일)에 해임되었다(《승정원일기》 같은 날 기록).</ref> 말년의 행적은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미소공동위원회|미(美)·소(蘇) 공동위원회]] 시절에 납북되었다는 설도 있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3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둘째 형 '''석건(奭健)'''은 일본 메이지 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대구에서 변호사로 근무했으며, 아우 정건이 독립운동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을 때 변호를 맡기도 했다. 셋째 형 '''[[현정건|정건]](鼎健)'''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유명하다.
* [[이광수]] - 박종화의 일기에 보면, [[1922년]] 현진건이 홍사용 · 박종화 등의 문인들과 함께 동인으로 참여한 문예지 《백조》 창간호에 이광수의 시 「악부(樂府)」가 실리게 되었을 때, 상해에서 《백조》를 받아보고 현진건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한국의 꽃봉오리 같은 젊은 청년들이 발표하는 깨끗한 《백조》지에, '귀순장'을 쓰고 항복해 들어간 이광수가 동인이 되었다 하니 놀랍기 그지없는 일이다. 빨리 동인에서 제거하라"며 항의했고, 결국 《백조》 동인에서 이광수는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광수는 이미 당시 춘원은 허윤숙이라는 여인과 동거하면서 일제에 이른바 '귀순장'이라는 것을 써서 독립지사들의 정보를 넘겨주고 변절한 상태였던 것이다.<ref>윤병로 「박종화의 삶과 문학」1998, 신효정「문학산책」2000, 역사문제연구소 편찬「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2003.</ref>
* 술에 관한 에피소드가 적지 않다. 술과 관련해 하루는 『조선문단』에 함께 작품을 기고하던 염상섭이나 [[김동인]]·나도향·[[양주동]] 등과 잡지사에 모였다가 저녁에 술을 마시는데, 술에 취해 저마다 "나는 조선의 [[괴테]]가 될 테니 자네는 (조선의) [[톨스토이]]가 되게", "나는 베르렌이 될테니 너는 [[안톤 체홉|체홉]]이 되라" 등의 주정을 늘어놓으면 곧잘 "그놈의 톨스토이, 괴테 좀 집어치우시오" 하고 큰소리치곤 했으며<ref>「문단이면사」(46) '방인근과 조선문단', 『경향신문』 [[1983년]] 12월 24일자 제7면 기사.</ref> 「동아일보」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시절에는 명월관에서 있었던 사원들끼리의 송년회식 자리에서 「동아일보」 사장에게 "이 놈아, 먹어, 먹으라고."하며 술을 권하다가 급기야 뺨까지 때렸다. 하지만 사장은 현진건을 내치지 않았다는 것이다<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141.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다만 이때 현진건에게 뺨을 맞았던 동아일보 사장이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였는지 [[김성수 (1891년)|김성수]]였는지는 사람마다 증언이 다르다).
* 부부생활과 관련해서는, 지인 대부분이 "아내만을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사실 그 시절에 부인 외의 다른 여자와 연애하며 따로 살림을 차리기까지 하는 일은 드문 것이 아니었으며, [[김동인]]처럼 아예 자기 아내를 버리고 평양에서 서울로 거처까지 옮겨서 기생집을 전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백기만은 "자기보다 두 살 더 먹은 아내를 일생을 두고 한결같이 사랑하였을 뿐이요, 다른 여자하고는 깊은 관계를 맺은 일은 없었다"고 했으며, 방인근은 "요릿집에서 술자리를 같이 할 때, 기생이 옆에 와서 지근덕거리면 미남에다가 신문기자라면 기생들이 홀딱 반해서 덤벼드는 시절이니 그러면 빙허는 좋아하는 체 대꾸를 하면서도 쌀쌀하게 범접치 못할 기상으로 난잡하게 굴지 않는다"고 회고하고 있다. 현진건의 아내 이순득도, 남편이 아침에 새로 입고 나간 황라 두루마기와 비단 마고자가 술 때문에 엉망이 되어 들어와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고 전한다.<ref>문인들의 이러한 '딴집 살림'은 전통적인 현모양처 교육을 받은 소위 '구여성'과의 조혼을 괴로워하고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데서 온 것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8~5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생가는 주소만 남아있을 뿐 어디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인왕산]] 밑의 부암동 자택은 종로구에서 공용주차장을 짓기 위해 2003년에 헐어버려서 지금은 터와 '현진건 집터'라는 표석만이 남아 있다. 당시 그 생가의 철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자 행정당국은 '민간인 소유자와 부지 매입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는데<ref>[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11/h2007110618342324420.htm#none 편집국에서-사라지는 문학의 고향, 한국일보 2007년 11월 6일자 기사]</ref> 2012년 10월 4일에 [[안평대군]]의 사저와 함께 법원경매에 부쳐졌다. 유언에 따라<ref name="cho"/> 화장되고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서장리에 매장됐었으나 그 후 남서울 개발관계로 묘소가 사라져 유해는 한강에 뿌려졌다.
- 편혜영 . . . . 24회 일치
[[서울특별시|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예술대학|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이슬털기〉가 당선되면서 데뷔했다. 2007년 단편소설 〈사육장 쪽으로〉로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을, 2009년 단편소설 〈토끼의 묘〉로 제10회 [[이효석문학상]]을, [[2012년]] 소설집 〈저녁의 구애〉로 제42회 [[동인문학상]]을, 2014년 단편소설 〈몬순〉으로 제3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명지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2013~)로 재직 중이다.
* 2007년 제40회 [[한국일보문학상]]
* 2009년 제10회 [[이효석문학상]]
* 2010년 제18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학부문)
* 2012년 제42회 [[동인문학상]]
* 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 2015년 제60회 [[현대문학상]]
* 《아오이가든》([[문학과지성사]], 2005)
* 《사육장 쪽으로》([[문학동네]], 2007)
* 《저녁의 구애》([[문학과지성사]], 2011)
*《죽은 자로 하여금》(현대문학, 2018)
* 《서쪽 숲에 갔다》([[문학과지성사]], 2012)
*《선의 법칙》([[문학동네]], 2015)
*《홀》([[문학과지성사]], 2016)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197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예술대학 동문]][[분류:이상문학상 수상자]][[분류: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분류:이효석문학상 수상자]][[분류:이상문학상 수상자]][[분류:동인문학상 수상자]][[분류:절강 편씨]][[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
- 하성란 . . . . 21회 일치
*《루빈의 술잔》(문학동네,1997)
*《식사의 즐거움》(현대문학,1998)
*《곰팡이 꽃》(조선일보사,1999): 제30회 동인문학상수상작품집 1999
*《강의 백일몽》(삶과꿈,2004): 2004년 제11회 이수문학상 수상작품집
*《웨하스》(문학동네,2006)
*《사랑을 믿다》(문학사상사,2008): 2008년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알파의 시간》(현대문학,2008): 제54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식사의 즐거움》(현대문학,2010)
*《소설가로 산다는 것(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문학사상,2011)
*2013 제13회 [[황순원문학상]]
*2009 제54회 [[현대문학상]]
*2008 제16회 [[오영수문학상]]
*2004 제11회 [[이수문학상]]
*2000 제33회 [[한국일보문학상]]
*1999 제30회 [[동인문학상]]
[[분류:196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동인문학상 수상자]][[분류: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분류:오영수문학상 수상자]]
- 황인숙 . . . . 20회 일치
* 1999년 제12회 [[동서문학상]]
* 2004년 제23회 [[김수영 문학상|김수영문학상]]
* 2018년 제63회 [[현대문학상]]<ref>{{뉴스 인용|성1=백승찬 |제목=김성중 소설가·황인숙 시인 현대문학상 수상자로 선정|url=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711202144025 |날짜=2017-11-20 |확인날짜=2018-08-09 |뉴스=경향신문}}</ref>
*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 1988) {{ISBN|8932003483}}
* 《슬픔이 나를 깨운다》([[문학과지성사]], 1990)
*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문학과지성사]], 1994) {{ISBN|8932007128}}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문학과지성사]], 1998) {{ISBN|8932010080}}
* 《자명한 산책》([[문학과지성사]], 2003) {{ISBN|8932014647}}
* 《리스본行 야간열차》([[문학과지성사]], 2007) {{ISBN|8932018294}}
*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문학과지성사, 2016)
* 《나의 침울한, 소중한 이여》<br/>돌아가보자.<br/>'말의 아름답기' '말의 부드럽기' '말의 따뜻하기'<br/>-藝專 문창과「문학개론」첫 장으로. 그러면 '삶의 아름답기' '삶의 부드럽기' '삶의 따뜻하기'가 가까워질 것이다.
* 《나는 고독하다》([[문학동네]], 1997)
* 《지붕 위의 사람들》([[문학동네]], 2002)
[[김현 (문학평론가)|김현]]은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를 비평하면서 시인의 시가 "통과 제의를 두려운 마음으로, 그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아니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시"라면서 "통과 제의의 시"라고 이름 붙였다. 또, 시인이 "통과 제의가 끝나면,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자기의 꿈을 하나둘 슬그머니 드러"내는 점에서 시인의 시를 "애드벌룬의 시"라고도 평했다.<ref>{{서적 인용|제목=김현 문학전집 6|날짜=1992-12-05|출판사=문학과지성사|저자=김현|출판위치=서울|페이지=297|꺾쇠표=예}}</ref>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195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서울예술대학 동문]][[분류: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분류:20세기 시인]][[분류:21세기 시인]]
- 이장희 (시인) . . . . 19회 일치
| 장르 = [[시 (문학)|시문학]], [[번역]]
| 직업 = [[시 (문학)|시인]], [[번역|번역문학가]]
'''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 [[1929년]] [[11월 3일]])는 [[일제 강점기]]의 [[시문학|시인]], [[번역]][[작가|문학가]]이다. 본관은 [[인천 이씨|인천]](仁川)이고 호는 고월(古月)이다.
[[1900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아버지 [[이병학 (1866년)|이병학]]의 11남 8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구의 부호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이병학 (1866년)|이병학]]이며, 어머니는 박금련이다. 다섯 살때, 어머니를 잃고 이후 계모 밑에서 크며 아버지와 불화했다. 아버지 이병학은 두 번째 부인과 5남 6녀를 두었고, 이장희가 죽기 5년 전에 세 번째 결혼을 하였으며 그 외에 측실도 1명을 거느렸다. 이장희 자결 당시 형제는 모두 10남 8녀로 매우 복잡한 가계였다.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교토]]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교우관계는 [[양주동]], 유엽, 김영진, [[오상순]], 백기만, [[이상화 (시인)|이상화]], [[현진건]] 등 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부친이 중추원 참의로서 일본인들과의 교제가 빈번하여 아들 이장희 시인에게 중간 통역을 맡기려 했으나, 이장희 시인은 한 번도 복종하지 않았고, 총독부 관리로 취직하라는 지시도 거역하여 부친은 이장희 시인을 버린 자식으로 아주 단념하였다 한다. 그래서 극도로 빈궁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1929년]] [[11월 3일]] 대구 자택에서 음독 자살하였다.<ref>장백일, 〈고월 이장희시 연구〉, 《국어국문학》84권, 국어국문학회, 1980, 79~82쪽</ref>
* [[시 (문학)|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소설|소설가]], [[수필|수필가]], [[번역]][[문학가]], [[문학평론|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 [[시 (문학)|시인]]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출생 ~ [[1967년]] [[8월 7일]] 사망. 아호는 목우(牧牛). [[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1924년]] 《[[금성 (잡지)|금성]]》 3월호에 〈실바람 지나간 뒤〉, 〈새한마리〉, 〈불놀이〉, 〈무대〉,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의 시 작품과 [[레프 톨스토이|톨스토이]] 원작의 번역소설 〈장구한 귀양〉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이후 《신민》,《생장》,《여명》,《신여성》,《조선문단》등 잡지에 〈동경〉, 〈석양구〉, 〈청천의 유방〉, 〈하일소경〉,〈봄철의 바다〉등 30여 편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요절하였기에 생전에 출간된 시집은 없으며, 사후 [[1951년]] 백기만이 청구출판사에서 펴낸 《상화와 고월》에 시 11편만 실려 전해지다가 제해만 편 《이장희전집》(문장사, 1982)과 김재홍 편 《이장희전집평전》(문학세계사, 1983)등 두 권의 전집에 유작이 모두 실렸다.
|제목=한국현대문학사
정우택은 비속한 현실에 맞서 절대 자유, 절대 자아의 순전함을 추구했던 이장희의 삶은 곧 그의 시라면서 그의 미적 태도를 '미적 근대성의 자기 파괴적인 양상'으로 명명하였다. 또,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장희는 근대적 주체의 자율성을 옹호하기 위해 예술의 자율성과 미적 근대성을 절대적인 지점까지 추구했던 시인으로 기록되어야 한다고 했다.<ref>정우택, 〈고월 이장희 시 연구〉, 《민족문학사연구》21권, 민족문학사학회, 2002, 216쪽</ref>
- 백기만 . . . . 17회 일치
| 장르 = 시문학, 평론
| 직업 = [[시 (문학)|시인]], [[문학 평론|문학평론가]]
'''백기만'''(白基萬, [[1902년]] [[5월 12일]] ~ [[1966년]] [[8월 7일]])은 [[대한민국]]의 [[시 (문학)|시인]], [[문학 평론|문학평론가]]이다. 본관은 [[수원 백씨|수원(水原)]]이고 [[호 (이름)|아호(雅號)]]는 목우(牧牛), 흰곰이며 [[필명|필명(筆名)]]은 '''백웅'''(白熊)이다.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출생으로 [[1923년]] 문예지 〈[[금성 (잡지)|금성]]〉에 《꿈의 예찬》, 《내 살림》, 《기쁨》 등의 시를 발표하여 문단에 등단하였다. [[1926년]] 이후 [[문학 평론|문학평론가]]로도 병행 활동하였다.
* [[시 (문학)|시인]] [[이장희 (시인)|이장희]](李章熙, [[1900년]] [[1월 1일]] 출생 ~ [[1929년]] [[11월 3일]] 사망. 아호는 고월(古月). [[번역|번역문학가]]로도 활동하였다.)
* [[시 (문학)|시인]]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1901년]] [[5월 9일]] 출생 ~ [[1943년]] [[4월 25일]] 사망. 아호는 상화(尙火, 想華), 무량(無量), 백아(白啞). [[소설|소설가]], [[수필|수필가]], [[번역|번역문학가]], [[문학 평론|문학평론가]]로도 활동하였다.)
[[분류:1902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구초등학교 (대구)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동아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한국독립당]][[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
- 신형철 . . . . 17회 일치
| 직업 = 문학평론가
| 장르 = 문학
'''신형철'''([[1976년]] ~ )은 [[대한민국]]의 문학평론가이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8B%A0%ED%98%95%EC%B2%A0&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190347 네이버 인물] </ref>
[[1976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2007~)으로 활동하면서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2014~)로 재직 중이다.
[[2005년]] 《[[문학동네]]》 봄호에 평론 〈당신의 X, 그것은 에티카〉를 발표하면서 평단에 등장했다. [[2007년]]부터 계간 《[[문학동네]]》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면서 [[2014년]]부터 [[조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평론 〈2000년대 시의 유산과 그 상속자들〉으로 제59회 [[현대문학상]]을 수상했으나, 현대문학의 소설 거부 사태로 인해 상을 반려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022015575&code=960100 문학평론가 신형철] 경향신문, 2014-05-02</ref>
* [[2007년]] ~ 현재 : 《[[문학동네]]》 편집위원
* [[2013년]] ~ [[2014년]] : 《문학동네》 팟캐스트 '문학이야기' 진행
* 아내 : 문학평론가 신샛별 (1986~)
*《몰락의 에티카》([[문학동네]], 2008)
*《느낌의 공동체》([[문학동네]], 2011)
[[분류:1976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조선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최윤 (소설가) . . . . 17회 일치
| 장르 = [[소설]], 번역, 평론, 불문학
'''최윤'''(崔允, 1953년~ )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자 번역가, 불문학자이다.
본명은 최현무(崔賢茂)이며, 1953년 7월 3일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기여고 졸업 후 서강대학교 국문학과 학부와 석사과정을 졸업했으며, 1978년 프랑스 [[엑상프로방스]]의 프로방스대학교에서 프랑스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에 관한 연구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4년부터 서강대학교 불어불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 현대소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여 프랑스에서 출간하기도 하였다.<ref>{{웹 인용
| 제목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최윤
== 문학 세계 ==
1978년, 《문학사상》에 평론 〈소설의 의미구조분석〉을 발표했으며,<ref>{{웹 인용
}}</ref> 1988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문학과 사회》에 발표하면서 소설가로서 등단했다. 최윤의 소설은 언제나 사회와 역사, 이데올로기 등 이성적이고 관념적인 주제를 다룬다.<ref>{{두피디아|101013000712678|최윤}}</ref>
* 1990년 대한민국 문학상 번역 부문
* 1992년 〈회색 눈사람〉 - 제23회 [[동인문학상]]
* 1994년 〈하나코는 없다〉 - 제18회 [[이상문학상]], 제2회 [[대산문학상]]
[[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서강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기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서강대학교 동문]][[분류:이상문학상 수상자]][[분류:동인문학상 수상자]][[분류:대산문학상 수상자]][[분류:한국어-프랑스어 번역가]][[분류:프랑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김문집 . . . . 16회 일치
| 장르 = 문학평론
'''김문집'''(金文輯, <small>일본식 이름:</small> 大江龍之介(오에 류노스케), [[1907년]] [[7월 7일]] ~ ?)은 [[한국]]의 문학평론가이다. 아호는 화돈(花豚)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제국대학]] 문과에서 수학했다. 일본인 소설가 [[요코미쓰 리이치]]({{llang|ja|橫光利一}}) 문하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1935년]] 귀국했다.
귀국한 해에 발표한 콩트 〈동정의 낭만파〉가 등단작이나, 이후 평론가로 주로 활동했다. 김문집은 비평의 문학성과 창조성을 중시했으며, 비평의 과학성을 강조한 [[최재서]],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계열의 [[이원조 (문학평론가)|이원조]] 등과 논쟁을 벌인 일이 유명하다.
중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수학한 김문집은 일본 문학이론을 수입해 와 한국문학의 전통을 부정하는 친일적인 성향을 초기부터 보였다. [[중일 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과 간사,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촉탁을 맡는 등 친일 단체에도 가담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도 수록되어 있으며, 이 명단을 정리한 2002년까지 발견된 친일 저작물 수는 [[1939년]] 발표한 〈축하할 죽음〉 등 3편이다.<ref>{{저널 인용
|제목=친일문학 작품목록
|저널 = 실천문학
* 대산문화재단, [http://www.daesan.or.kr/news/2007/100.htm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화제 개최] (2007년 5월)
|제목=같은 시대 살았지만 문학의 길 달랐다 - 서정시에서 국문학연구 등 다양 ···1907년 문학인 7인 심포지움 열려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일본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계 일본인]]
- 현덕 . . . . 14회 일치
| 직업 = [[소설|소설가]], [[시 (문학)|시인]], [[아동 문학|아동문학가]]
| 소속 = 前 [[조선문학가동맹]] 출판부 부장
| 장르 = 소설, 시, 아동문학
'''현덕'''(玄德, [[1909년]] [[2월 15일]] ~ ?)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설|소설가]], [[시 (문학)|시인]], [[아동 문학|아동문학가]]이다. 본명은 '''현경윤'''(玄敬允)이다.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延州)이다.
[[1932년]] 《[[동아일보]]》에 동화 〈고무신〉을 발표한 뒤, [[김유정 (소설가)|김유정]], [[김기림]], [[이석훈 (1908년)|이석훈]], [[박태원 (1909년)|박태원]], [[안회남]], [[이상 (작가)|이상]] 등과 교유하는 습작 기간을 거쳐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남생이〉가 당선되면서 정식 데뷔했다. 처녀작인〈남생이〉의 화자는 ‘노마’라는 소년이며, 노마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화를 《[[소년조선일보]]》와 어린이 잡지 《[[소년 (잡지)|소년]]》에 꾸준히 발표하는 등 아동 문학에 관심이 컸다. 이후 〈경칩〉(1938년), 〈두꺼비가 먹은 돈〉(1938년), 〈골목〉(1939년), 〈잣을 까는 집〉(1939년), 〈녹성좌〉(1939년), 〈군맹〉(1940년)을 차례로 발표했으나, 건강이 좋지 못한데다 [[태평양 전쟁]] 기간 중의 어렵던 시절이라 더이상의 작품 활동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광복 후 월북을 한 이후에는 [[1961년]]까지 〈싸우는 부두〉 등의 단편소설을 자작함으로써 작품 활동을 계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품 경향은 농민과 도시 빈민의 참혹한 현실을 묘사하며 사회 구조적 모순을 인식하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데뷔 시기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 해체 이후이므로 카프에 직접 가담한 적은 없으나, 카프의 이념적 성향과 대체로 방향이 일치하는 작품을 썼다.
* 동생: [[현재덕]](玄在德, [[1912년]] ~ ?) [[아동 문학|아동문학가]], [[한국화|한국화가]], [[동양 미술|동양화가]], [[서양화]][[화가|가]], [[조각|조각가]], [[판화|판화가]]
* 김영순, [http://dongsim.net/gnu4/bbs/board.php?bo_table=hyundek&wr_id=4&page= 아동문학 선구자 현덕 - 생애와 업적] (동심넷 - 아동문학선구자기념관)
* 원종찬, 〈[http://www.childbook.org/spc/hd/hd2-16-3.htm 현덕 문학의 재조명]〉, 1996.
- 김중혁 . . . . 13회 일치
||||||||||||||<#F7EA6E><:>'''{{{#white 제2회 [[김유정문학상]] 수상 }}}'''||
||||||||||||||<#0000FF><:>'''{{{#white 제13회 [[이효석문학상]] 수상 }}}'''||
||||||||||||||<#00c000><:>'''{{{#white 제46회 [[동인문학상]] 수상 }}}'''||
[[대한민국]]의 [[작가]]. 1971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슈퍼집 아들이었다고 한다.-- [[계명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소설가]] [[김연수]]--역전 앞 뉴욕제과 아들--, [[시인(문학)|시인]] [[문태준]]과는 고향 친구이자 중학교 동창이다.
친구 [[김연수]]가 한국 문학의 기대주로 승승장구 하는 것을 보고 2000년 '문학과 사회'에 중편 소설 [[펭귄 뉴스]]를 발표하며 뒤늦게 등단했다. 이후 <엇박자 D>로 2008년 제2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다. 그 외 2010년 제1회 젊은작가상 대상, 2011년 제19회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문학부문), 2012년 <요요>로 이효석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15년 <가짜 팔로 하는 포옹>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음악, 영화, 스포츠, 그림을 아우르는 다양한 관심사 만큼이나 작가의 경력 또한 화려한데,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리는 인디밴드 쇼케이스를 진행했고, [[이동진(평론가)|이동진]] 평론가와 함께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흑임자~~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서점에서 칼럼도 쓰고, 웹툰 작가로도 활동했다니[* 그림 솜씨가 출중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고 개성있는 편이다. <펭귄 뉴스>, <뭐라도 되겠지>, <미스터 모노레일>의 표지도 직접 그렸다.] 그야말로 문학계의 [[팔방미인]](...)
* [[가짜 팔로 하는 포옹]][* 2015년 동인문학상 수상작] (2015)
- 한유주 . . . . 13회 일치
| 장르 = 소설, 문학
'''한유주'''([[1982년]] ~ )는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1982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대학원 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ref>[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D%95%9C%EC%9C%A0%EC%A3%BC&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175794 네이버 인물정보]</ref>
[[2003년]] 단편소설 〈달로〉로 제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소설부문에 당선되어 등단했다. [[홍익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대학원 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03년 제3회 문학과 사회 신인문학상을, 2009년 제42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등에서 강의했다. 텍스트 실험집단 루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 도서출판 [[울리포프레스]]를 운영하고 있다.
* 《달로》([[문학과지성사]], 2006)
* 《얼음의 책》([[문학과지성사]], 2009)
* 《나의 왼손은 왕 오른손은 왕의 필경사》([[문학과지성사]], 2011)
* 《불가능한 동화》([[문학과지성사]], 2013)
* 《불가능한 동화》([[문학과지성사]], 2013)
- 장강명 . . . . 12회 일치
1975년 무역업을 하는 아버지와 잡지사 기자이자 문학가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다. 연세대학교 재학 중이던 1994년 PC 통신 하이텔에 SF 소설을 연재하고, 군 복무 중에는 장편소설을 투고하는 등 일찍부터 문학에 관심을 보였다. 2002년부터 2013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였으나 전업 소설가가 되겠다는 일념을 갖고 퇴사하였다.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열광금지, 에바로드》로 [[수림문학상]]을, 《2세대 댓글부대》로 제주4.3평화문학상을,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으로 문학동네작가상을 받았다.<ref>{{뉴스 인용|제목=네이버 인물검색|url=http://people.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EC%9E%A5%EA%B0%95%EB%AA%85&sm=tab_etc&ie=utf8&key=PeopleService&os=214607|출판사=|작성일자=|확인날짜 =2015년 12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제목=신문기자 관두고 2년만에 소설 6권, 문학賞 휩쓸어… 글만 써 먹고살고 싶다|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3&aid=0003112580|출판사=|작성일자=|확인날짜 =2015년 12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제목=조선닷컴 인물검색|url=http://cdb.chosun.com/search/db-people/i_service/manDisAllXml.jsp?uci=G010+1-02142006092000380346|출판사=|작성일자=|확인날짜 =2015년 12월 26일}}</ref><ref>{{뉴스 인용|제목=YES24 《한국이 싫어서》 소개|url=http://www.yes24.co.kr/24/goods/17972275|출판사=|작성일자=|확인날짜 =2015년 12월 26일}}</ref>
* 제16회 한겨레문학상<ref>(표백)/2011.6</ref>
* 제2회 수림문학상<ref>(열광금지, 에바로드)/2014.10</ref>
* 제3회 제주4·3평화문학상<ref>(2세대 댓글부대)/2015/제주4·3평화문학상 운영위원회</ref>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 최영미 (시인) . . . . 12회 일치
'''최영미'''([[1961년]] [[9월 25일]] ~ )는 [[대한민국]]의 [[시인]]이며 [[소설가]]이다.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는 섬세하면서 대담한 언어, 지금 이곳에서의 삶을 직시하는 신선한 [[리얼리즘]]으로 한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문학평론가 최원식에 따르면 "최영미는 첫 시집이 너무 성공한 탓에 문학 외적인 풍문에 휩싸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불행한 시인이다”. 1992년 등단 이후 시와 소설, 에세이를 넘나들며 5권의 시집을 펴내고, 장편소설 《흉터와 무늬》, 《청동정원》을 출간하고 미술과 축구에 대한 산문을 많이 썼지만, 한국에서 그녀는 여전히 시인으로 더 알려져 있다.
최영미는 인간의 조건을 풍자적인 언어로 파헤친 시집 《돼지들에게》로 2006년 [[이수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수문학상 심사위원 유종호교수는 “최영미 시집은 한국사회의 위선과 허위, 안일의 급소를 예리하게 찌르며 다시 한번 시대의 양심으로서 시인의 존재이유를 구현한다”라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돼지들에게》의 추천사에서 [[신경림]] 시인은 "진실을 추구하는 치열한 정신 없이는 이와 같은 시는 불가능할 것이다. 자칫 관념적 교훈적으로 될 수도 있는 알레고리적 방법이 시에 활기와 재미를 더해주는 점도 주목을 끈다”라고 썼으며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진정성과 언어의 조탁이 돋보인다”라며 심사평을 전했다. 시집 《이미 뜨거운 것들》은 책읽는사회문화재단의 2013년 상반기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되었다
구겐하임상(Guggenheim fellowship) 수상자인 시인 제임스 킴브렐(James Kimbrell)과 유정열이 공동 번역한 3인 시집 《현대한국의 세 시인:이상, 함동선, 최영미》(''Three Poets of Modern Korea: Yi Sang, Hahm Dong-seon and Choi Young-mi> (2002,Sarabande books'')는 2004년 미국번역문학가협회상(ALTA Awards:American Literary Translators Association)의 최종 후보로 지명되었다.
최영미는 삶과 여행, 그리고 예술에 관한 산문집 『《시대의 우울: 최영미의 유럽일기》,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를 출간했으며, ''Francis Bacon in Conversation with Michel Archimbaud''를 한국어로 번역해 《화가의 잔인한 손: 프란시스 베이컨과의 대화》(1998,도서출판 강)이란 제목으로 출간했다. [[인하대학교]]와 [[강원대학교]]에서 시 창작을 가르쳤으며, 지학사 고등검정교과서 문학(2014년)에 최영미의 시 〈선운사에서〉가, 창비사 고등인정지도서 문학(2012년)에 〈지하철에서 2〉가, 학연사 고등검정지도서 작문에 (2012년) 산문집 《시대의 우울》, 〈쾰른〉편이 수록되었다.
* 《돼지들에게》(실천문학사, 2005) {{ISBN|8939205286}}
* 《도착하지 않은 삶》(문학동네, 2009) {{ISBN|9788954607858}}
* 《이미 뜨거운 것들》 (실천문학사, 2013)
* 산문집《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문학동네, 2009)
- 현재덕 . . . . 12회 일치
| 분야 = 아동문학, 극작, 삽화, 동양화, 서양화
| 직업 = 아동문학가 <br/> 삽화가 <br/> 동양화가 <br/> 서양화가 <br/> 아동미술가
'''현재덕'''(玄在德, [[1912년]] ~ ?)은 [[일제 강점기]]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아동 문학|아동문학가]], [[삽화|삽화가]], 아동[[미술]]가이며, 본관은 [[연주 현씨|연주(延州)]]이다.
[[경성부]] 태생으로, ‘노마’ 시리즈로 유명한 아동문학가 [[현덕]](본명 현경윤)의 친동생이다. 현덕과 함께 어린이를 위한 문학, 미술에 관심을 가져, 건강이 좋지 않은 형을 대신하여 《[[소년조선일보]]》의 동화 연재를 이어 받는 등 [[일제 강점기]]부터 활발한 활동을 했다.
광복 후 좌익 미술인 단체인 [[조선미술동맹]]의 아동미술분과와 [[동지사아동원]]에 가담했다. 동지사아동원에서는 필명이 박두루미인 [[박인범 (작가)|박인범]]과 함께 어린이들 대상의 구연 동화 활동을 했다. [[한국 전쟁]] 기간 중 현덕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월북했으며, 서울에는 부인과 딸을 남겨두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아동문학가로 일했다는 사실만 단편적으로 전해졌을 뿐, 활동상에 대해서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 형: [[현덕]](玄德, [[1909년]] [[2월 15일]] ~ ?, 본명 현경윤(玄敬允). [[아동 문학|아동문학가]], [[소설|소설가]], [[시인]].)
* 김영순, [http://dongsim.net/gnu4/bbs/board.php?bo_table=hyundek&wr_id=4&page= 아동문학 선구자 현덕 - 생애와 업적] (동심넷 - 아동문학선구자기념관)
* 원종찬, 〈[http://www.childbook.org/spc/hd/hd2-16-3.htm 현덕 문학의 재조명]〉, 1996.
- 장혁주 . . . . 11회 일치
| 직업 = 작가, 문학평론가
| 장르 = 소설, 문학평론
'''장혁주'''(張赫宙, <small>일본식 이름:</small> 野口稔('''노구치 미노루'''), 野口赫宙('''노구치 가쿠추'''), [[1905년]] [[10월 13일]] ~ [[1998년]] 2월)는 [[한국]]의 소설가, 문학평론가로, 본명은 '''장은중'''(張恩重)이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1926년]] [[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고 [[아나키즘]] 단체인 진우연맹(眞友聯盟) 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29년]] 이후부터 대구 희도(喜道)소학교 훈도로 근무했고 [[1932년]] 소설 〈아귀도(餓鬼道)〉를 발표하여 [[일본]] 문단에 등단했다. [[일본어]]로 쓰인 소설이지만, 식민지의 참혹한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시 계급문학에서 유행하던 농민소설에 못지않은 현실 비판 의식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일본인 장수 [[가토 기요마사]]를 다룬 〈가등청정〉(1939)을 시작으로 전시 체제에 협력하는 친일 작품을 집필했다. [[2002년]]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수록되었고,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문학 부문에 선정되었다.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제목=친일문학 작품목록
|저널 = 실천문학
|url=http://www.artnstudy.com/zineasf/Nowart/penitence/lecture/03.htm}}</ref>, 이 시기에 [[황도조선연구회]], [[대륙개척문학위원회]] 등의 친일단체에 가담한 바 있다.
|제목=한국현대문학대사전
[[분류:1905년 태어남]][[분류:1998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일제 강점기의 문학 평론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재일 한국인]]
- 채호기 . . . . 11회 일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ref name="네이트"/> [[1988년]] 《[[창작과비평]]》 여름호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2000년]]에 《[[문학과지성사]]》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현재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교수이다.<ref>{{뉴스 인용
* ~ 1985년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 《지독한 사랑》([[문학과지성사]], 1992)
* 《슬픈 게이》([[문학과지성사]], 1994)
* 《밤의 공중전화》([[문학과지성사]], 1997) : 그가 줄곧 시의 화두로 삼아온 ‘육체’와 ‘소멸’의 세계를 다룬다.<ref>{{뉴스 인용
* 《수련》([[문학과지성사]], 2002)
* 《손가락이 뜨겁다》([[문학과지성사]], 2009)
* 2002년, 제21회 [[김수영 문학상]] 시집 《수련》
* [http://www.moonji.com/writer/author_detail.php?author_id=0003200302&sub_mm=author&a_kind=F 문학과지성사 누리집에 있는 채호기 소개]
[[분류:195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김수영 문학상 수상자]][[분류:현대시작품상 수상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예술대학교 동문]][[분류:대전대학교 동문]][[분류:인천 채씨]][[분류:20세기 시인]][[분류:21세기 시인]]
- 신경림(대학교수) . . . . 10회 일치
[[대한민국]]의 [[시인(문학)|시인]]이자 문학인.
1973년 만해문학상, 1981년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하였다.
초, 중, 고등학교 [[국어(교과)|국어]]나 문학 [[교과서]]에도 이 시인이 지은 몇몇 시들이 수록되었는데, '농무'와 '가난한 사랑 노래', '목계장터' 등이 교과서를 읽은 학생들에게 잘 알려져 있다.
한국 문학계의 원로인지라 과거 한국 문단에서 활동했던 여러 유명한 시인과 작가들과는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그 중에서는 [[천상병]]이나 [[김관식]], [[조태일]], [[민병산]], [[황석영]] 등이 있다. 특히 천상병이나 김관식 등은 서로 ~~육두문자~~구수한 말을 주고 받을 정도로 친했으며 세 사람이 하나같이 알아주는 주당들이라 밤새도록 술을 마시며 여러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하였다.
이전에 [[일제강점기]] 시기에 겪었던 어린 시절의 일화나 문단에서 사귀었던 여러 문학가들 사이에 있었던 에피소드와 오늘날의 시점으로 봐도 심히 기이한 각종 [[기행]](...) 등을 재미난 입담으로 다룬 수필집을 내어 호평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수필집과 회고록을 종합하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 자신의 시 중 하나인 <파장>의 한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다.]라는 책으로 엮어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신경림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재미있게 볼 수 있다. 특히 기행에 있어서는 당대 문단의 1,2위를 다투던 천상병이나 김관식의 일화는 배꼽을 잡게 할정도로 웃기고도 기이하다(...). 한편 일제 강점기와 해방 직후의 학창시절을 다룬 파트에서는 당시의 어수선한 사회상은 물론이고, 자신이 저질렀던 비행이나 창피스러운 일도 담담하고 솔직하게 소개하고 있어 이 역시 재미있다. 중학생때는 [[백석]]의 시를 좋아했다고 한다.
시인 [[고은]]과 절친한 사이다. 고은이 만든 진보 문학 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고은을 보좌하며 행동대장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다. 1989년에는 고은과 함께 방북을 추진하여 판문점으로 가다가 경찰에게 저지당하여 미수에 그치기도 했다. 또 '고은 문학의 세계' 등의 저서를 통해 고은의 업적을 미화하고 찬양하는 작업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빼도박도 못 하는 신경림의 흑역사.
- 이상백 (1904년) . . . . 10회 일치
| 학력 = [[서울대학교]] 대학원 [[문학]][[박사]]
그는 [[1915년]]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으며, [[1919년]] [[3·1 만세 운동]]의 여파로 대구에서 벌어진 만세 운동에 참여하려다가 실패하고 잠시 은신하였다. 그 뒤 [[부산항]]에서 배편으로 [[일본]]으로 유학, 일본 와세다제일고등학원(早稻田第一高等學院)을 거쳐, [[1923년]] 와세다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에 입학했다.
[[1924년]] 일본의 [[일본 대학농구연맹]]을 결성하고 [[와세다 대학]] 농구팀 대표로 [[일본 대학농구연맹]]에 참여하였으며, 일본 대학농구연맹 농구부 주장으로 [[미국]]에 원정 경기에 출전하여 여러 번 우승을 거두기도 했다. 그밖에 축구, 야구에도 주전 선수로 실력을 보여주었다. [[1927년]]에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회철학과를 졸업했다. 그 뒤 모교인 [[와세다 대학]] 동양사상연구소 연구원을 지냈다.
[[1946년]]에 [[서울대학교|경성대학]](京城大學, [[서울대학교]]의 전신) 문리과대학 교수가 되었다. [[1947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를 창설, 이후 사회학과 주임교수에 임명되어 사망 직전까지 재임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부속 박물관장과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소장을 겸임하였다. [[1955년]] 서울대학교로부터 문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는 작가이자 수필가로도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 [[내무부]]의 고등고시 출제위원으로 국사, 문학 분야의 출제를 담당하였고, [[중앙공무원훈련원]] 고문 교수를 역임했다. 또한 [[대한민국 학술원]]이 출범하자 학술원 회원으로도 초빙되었다. 사회단체 활동으로는 연경학회(燕京學會) 회원, 동방문화 연구소 위원 등으로도 위촉되었다.
장례식은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한국사회학회, 진단학회, 대한체육회, 대한올림픽위원회 등 5개 단체가 주관한 연합장으로 주관되어 [[경상북도]] [[달성군]] 화원면(현 [[대구광역시]] 남구 화원동) 가족 묘역에 안장되었다. 묘비는 사후 1년 뒤인 [[1967년]] 그의 1주기에 세워졌는데, 묘비문은 국문학자 [[이희승]](李熙昇)이 짓고, 글씨는 이기우(李基雨)가 썼다.
* [[일본]] [[와세다 대학교|와세다]] 제1고등학원 [[전문학사]]
*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문학]][[박사]]
[[분류:1904년 태어남]][[분류:1966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농구 선수]][[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수필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건국동맹]][[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인]][[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역사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학자]][[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
- 이안 (시인) . . . . 10회 일치
| 장르 = 시, 문학
| 학력 = [[건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1999년 『실천문학』 시 부문 신인상에 「우주적 비관주의자의 몽상」 외 4편의 시가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8년 동시집 『고양이와 통한 날』, 2014년 평론집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를 내면서 시와 동시, 평론을 함께 쓰고 있다.
1967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태어나 건국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2010년 5월 격월간 동시 전문지 『동시마중』을 창간하여 현재까지 편집위원으로 있으며, 동시 전문 팟캐스트, 이안의 동시 이야기,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ref>http://www.podbbang.com/ch/8204</ref>를 진행하고 있다.
2002년 『목마른 우물의 날들』<ref>http://blog.daum.net/silcheon/7701324</ref>(실천문학사)
2007년 『치워라, 꽃!』<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8&aid=0002131645</ref>(실천문학사)
2008년 『고양이와 통한 날』(문학동네)12판인쇄
2012년 『고양이의 탄생』(문학동네)
2015년 『글자동물원』(문학동네)10판인쇄
2014년 『다 같이 돌자 동시 한 바퀴』(문학동네)
- 최남선 . . . . 10회 일치
|장르= [[시 (문학)|시]], [[역사학]]
|직업= [[독립 운동|독립운동가]], [[시 (문학)|시인]], [[작가]], [[친일파]]
'''최남선'''(崔南善, 1890년 4월 26일 ~ 1957년 10월 10일)은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문학가이자 [[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문화운동가]]이다. 본관은 [[동주 최씨|동주]](東州)이다.
1906년에 다시 일본 유학을 떠나 4월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학부 지리역사과에 입학하지만, 역시 3개월간 다니다 동맹 휴학으로 제적당하다가 복학하였다. 이어 [[이광수]] 등 유학생과 사귀면서 러시아 문학 작품을 탐독하였다. 1906년 7월 유학생 회보인 《[[대한 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편찬회를 맡아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대한 흥학회보]] (大韓興學會報)》의 편집 활동을 하면서 그는 회보에다 새로운 형식의 시([[신체시]])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 제18호에 [[일연]]의 《[[삼국유사]]》 전체를 게재하게 하였다.<ref>《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스토리텔링 삼국유사 1) (현암사, 2009) 24~25쪽. {{ISBN|978-89-323-1536-2}} “1927년, 계명구락부의 기관지 『계명』에다 일연(一然)의『삼국유사(三國遺事)』 를 실은 것이었다.” </ref> 같은 해 총독부가 집과 연구 비용을 지원한다고 회유하자 그해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조선사편수회 위원이 되었다.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총독부의 조선사 편수회에 가담한 일로 [[이광수]]와 절교하고, [[한용운]]과 [[홍명희]] 등도 연이어 그와 결별 선언을 했다. [[한용운]]은 그의 나무 위패를 새기고 장례식을 거행하여 그를 조롱하려고 시도했다.
1920년대에 문화 운동 활동한 동시에 같은 해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내에 [[식민사관]] 유포를 위해서 만든 어용단체인 ‘[[조선사 편수위원회]]’를 창립했을 때 편수 위원직을 맡았다. 1930년 8월 [[경성제국대학교]] 법문학부 교수와 조선총독부·조선사편수회 간부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과 [[만주]]를 중심으로 한 '극동문화연구'를 표방하며 조직한 [[청구학회]]의 평의원으로 활동했으며 1937년 중추원 참의를 맡아 1938년 3월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문화의 당면과제'를 연재해 조선문화의 일본화야말로 당면한 문제 가운데 제일 중요한 것이라며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사설을 기고했다. 이어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총독부 어용기관지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각종 친일논설을 게재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ref name="daedam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3/03/2007030300046.html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조선일보 2007.03.03</ref>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ref name="daedams"/>
== 문학 ==
[[분류:1890년 태어남]][[분류:1957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출판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공작원]][[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만주국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출판인]][[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한문학자]][[분류:민족대표 48인]][[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
- 한무숙 . . . . 10회 일치
| 웹사이트 = [http://www.hahnmoosook.com/ 한무숙문학관]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과 [[한국여류문학인회]] 중앙위원 등을 맡았다. [[1958년]]에 단편 〈감정이 있는 심연〉으로 [[자유문학상]]을 수상했고, 신사임당상(1973)과 [[3·1문화상]](1989) , 예술원상(1991) 등을 차례로 수상했다.
사후에 남편 김진흥(金振興)이 [[종로구|서울 종로구]] 명륜동의 고택을 개조하여 한무숙문학관으로 개관했다.<ref>{{뉴스 인용
|제목=“책 읽어라” 등떠밀지 말고 문학관서 작품 체험시켜요 - 엄마랑 아이랑 책나들이 (1) 한무숙 문학관
}}</ref> 한무숙을 기념한 한무숙문학상도 제정되었다.
* [[한무숙문학관]]
|제목=한무숙 문학세계
* [http://www.hahnmoosook.com/ 한무숙문학관 홈페이지]
- 황병승 . . . . 10회 일치
'''황병승'''([[1970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나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와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명지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2010년 제11회 「[[박인환문학상]]」, 2013년 제13회「[[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2003년]] 《파라21》 신인문학상 시 부문에 〈주치의h〉 외 5편이 당선되어 등단했고, [[2010년]] 제11회 「[[박인환문학상]]」, 2013년 제13회「[[미당문학상]]」을 수상했다.
*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개정판 [[문학과지성사]], 2012)
* 《트랙과 들판의 별》([[문학과지성사]], 2007)
* 《육체쇼와 전집》([[문학과지성사]], 2013)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197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서울예술대학 동문]][[분류:추계예술대학교 동문]][[분류:박인환문학상 수상자]][[분류:미당문학상 수상자]][[분류:21세기 시인]]
- 박진성(시인) . . . . 9회 일치
[[대한민국]]의 [[시인(문학)|시인]]. [[1978년]] [[3월 7일]] [[충청남도]] 연기군 [* 現 [[세종특별자치시]].] 출생.[* 자신이 [[웃긴대학]]에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wait&number=5251606|올린]] [[http://web.humoruniv.com/board/humor/read.html?table=pdswait&number=5208768|올린 글들]]에 따르면 현재 거주지는 [[대전광역시]]로 추정된다.]
* 《식물의 밤》 (문학과지성사, 2014)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61021500163|<서울신문> ‘#문단_내_성폭력’ 박진성 시인 문학지망생 상습 성추행 의혹]]
2017년 11월에 시인의 아버지가 쓴 글에 따르면, 성폭행 혐의로 보도가 난 이후 집 앞에서 피켓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고, 지인들의 연락이 모두 끊겼으며, 출판사는 책을 내주지 않는 등 결론이 나기도 전에 보도만으로 이미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것과 같은 피해를 입었다고 한다. 어떤 지인은 '한국일보 같은 신문사에서 성폭행을 했다고 기사를 썼으니 사실 아니겠냐'며 면전에서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한다. 또한 박진성 시인의 출판을 담당했던 출판사는 사건이 나자, 무죄여부 확인 과정없이 일주일 만에 출판 계약 해지에, 출판된 시집은 출고 정지 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관련된 소송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명분으로 출고 정지 처분을 풀지 않고 있는데, 계약 해지에 대해 물었더니 "아직 시인으로부터 계약 해지를 요구받은 적이 없다. 언제든지 연락을 주신다면 논의하겠다”고 답했다. [[http://www.newspost.kr/news/articleView.html?idxno=59082|해당 기사 출처]][* 이 기사에선 출판사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박 시인 아버지의 글에선 [[문학과지성사]]라고 나온다.] 2018년 3월 21일에 [[https://blog.naver.com/poetone/221233628914|문제의 출판사와는 결국 계약을 해지]]했으나, 무슨 문제가 있는지 7월에 박 시인이 밝히기를, 문제의 시집은 아직도 출고정지 상태라고 한다.[* 이 사실을 처음 밝힐 때 박 시인이 여러 시집의 계약을 이행하라는 언급도 한 것과 2016년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산문집의 글은 2018년 3월 계약해지를 알린 후에 산문집 '이후의 삶'에 포함되어 출간된 걸 보면, 기존의 시집과 당시 출간 예정이었던 시집과 관련된 계약을 해지하는데 문제가 있는 듯하다.] 이에 대해 민사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5&aid=0001115546|#]]
그러나 허위로 밝혀졌음에도 여전히 정신 못차리는 인간들이 오프라인과 온라인 가리지 않고 많다. [[아몰랑|조리돌림해놓고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건]] 양반이고, 아직도 허위사실을 유포하고 있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34804441760350208|#1]][[https://archive.is/LXMJh|@1]][* 첫번째 예시에 나온 사람은 트위터와 인스타그램에서 리을과 시옷이라는 닉네임을 쓴 적 있고 김여선 또는 이선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으며, 주점 레스토랑 Cooper Room(카퍼룸)([[https://twitter.com/Copper_Room_|#트위터 계정]][[https://store.naver.com/restaurants/detail?id=37996846|#네이버 플레이스 정보]])에서 일하는 요리사이자 시인 지망생[[https://twitter.com/satoy_0045/status/928626634474663936|#]][[https://archive.is/Nhple|@]]인데, 이 사건에서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6453624502284288|박 시인에게 무고죄로 고소당한 2명 중 한 명]]([[https://archive.is/yofTZ|@]])이다. 무고죄로 기소유예를 받은 뒤에 트위터 계정을 완전히 삭제했다가 파란이 사그라들자 다시 계정을 복구하였다. 여러 문학 작품들만 인용하는 식으로 한동안 이 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가 [[탁수정]]과 박 시인 간의 설전에서 자극을 받았는지 2월에 갑자기 박진성 시인을 공격했었는데, 김여선의 전과를 아는 사람들이 있어서인지 반응은 대체로 싸늘한 편이었는데다 도리어 대중들이 자신의 죄를 역으로 캐묻기 시작하자 수세에 몰린 것을 직감했는지 다시 트윗들을 삭제했고, 사태가 다시 잠잠해지자 자신을 비판했던 이들을 고소할 것을 선언했다. 3월에 또 박 시인을 공격했지만 예전에 비해 호응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며칠 후부터는 다른 일에만 전념하고 있는 듯했는데, 4월 16일에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85887446482042883|'이후의 삶' 펀딩을 망치기 위해 다른 사람인 척해서 거금을 후원하겠다고 했다가 취소하려는 수작이 들켰다]]고 한다.][[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3667324225306624|#2]][[http://web.archive.org/web/20171127054338/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23667324225306624|@2]][* 유진목이라는 1인 영상 제작사 목년사를 운영하고 있는 작가다. [[http://www.yes24.com/24/AuthorFile/Author/171395|#]]] 심지어 이 중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934776705218068482|송승언]]([[https://archive.is/HxWyl|@]])이라는 사람은 [[http://moonji.com/bookauth/9173/|월간 문예지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인데 2017년 5월 17일 이후로 주로 트위터에서 박진성 시인을 성폭력 가해자로만 단정짓고 이야기했으며, 무혐의 처분 후에도 사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https://twitter.com/search?f=tweets&vertical=default&q=blanknoose%20박진성&src=typd|#]][[https://archive.is/286Iy|@]] 이후 박진성 시인의 무고가 확실해지면서 자신에게도 비난의 목소리가 이어지자 한동안 [[https://twitter.com/blanknoose|트위터 계정]]을 비공개로 전환하였다가 사태가 잠잠해지면 다시 공개로 전환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웃긴 것은 2017년 5월 24일부터 자신의 전 연인이자 후배 문학도에게 '문단창녀'라 성희롱한 사실을 숨기기 위해 박진성을 이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송승언은 이에 대응하지 않고 자신에게 비판하거나 박진성 편을 드는 자들은 무시당해도 싸다는 정신승리로 침묵하고 있으며 박진성 시인을 모욕했다는 증거를 삭제하고 있다(증거 자체는 예전부터 삭제하고 있었다고 한다.). [[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867579611017658372|#1]][[https://archive.is/z5QTN|@1]][[https://twitter.com/blanknoose/status/936928452875186180|#2]][[https://archive.is/IMg8R|@2]][[https://twitter.com/poetone78/status/899014088801386496|#3]][[https://archive.is/IdmMq|@3]]]
>2008년 4월의 일입니다. C 대학교에서 주최하는 고En 시인 초청 강연회에 갔었습니다. 200명 넘는 방청객들 사이에서 고En 시인은 정말 빛나는 별이었습니다. 자신의 문학적 여정을 회고하고 나아가 한국문학의 위상에 대해서 말하는 고En 시인은 저의 앞으로의 ‘미래’였습니다. 뒷자리에 앉았던 저는 한 마디라도 놓칠까 싶어 고개를 최대한 앞으로 숙여 시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대학생, 대학원생들, 여러 학과의 교수들, 그리고 인근 주민들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 행사는 ‘공개 개방 강좌’였습니다. 시인이라는 존재가 골방에만 쳐박혀 있는 것이 아니라 저렇게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구나,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하지만 그 감동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 오정희 (소설가) . . . . 9회 일치
[[1979년]]에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문학상]], [[1982년]]에 《동경》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ref name="gwe">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n.d.). [[: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현대 문학/현대 후기 문학/70년대의 문학#오정희|“오정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 2017년 11월 2일 확인함. </ref>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동인문학상 수상자]][[분류:이상문학상 수상자]][[분류:이화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서라벌예술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오영수문학상 수상자]]
- 이설주 . . . . 9회 일치
대구수창국민학교(현재의 [[대구수창초등학교]])와 대구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으로 유학하면서 [[니혼 대학]] 경제학과에 재학했지만 사상범으로 체포되고 만다. [[1932년]] 대학을 중퇴하고 일본의 문학 잡지 《신일본민요(新日本民謠)》에 시 〈고소(古巢)〉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그 뒤 [[만주]]와 [[중국]] 등지를 방랑했고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광복 이후인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대구여자상업학교(현재의 [[대구제일중학교]]), [[경북여자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근무했으며 문고판형 전집 《설주문학(雪舟文學)》을 비롯한 여러 시집을 출간했다. [[2011년]] [[3월 24일]] [[한국문인협회]]는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고 한국 현대 시문학과 시조문학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설주문학상을 제정했다.
* 문고판형 전집 《설주문학(雪舟文學)》 (1957년)
* [[1959년]] 경북문학상
* [[1989년]] 한국문학상
- 김연수(작가) . . . . 8회 일치
||||||||||||||<bgcolor=#00c000><:> '''{{{#white 제34회 [[동인문학상]] 수상 }}}''' ||
||||||||||||||<bgcolor=#ff8080><:> '''{{{#white 제33회 [[이상문학상]] 수상 }}}''' ||
||||||||||||||<#FF5E00><:>'''{{{#white 제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 }}}'''||
[[대한민국]]의 [[작가]]. 1970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성균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3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시 <강화에 대하여> 외 4편이 당선되면서 등단했으며, 1994년 장편[[소설]]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로 제3회 작가세계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초기 작품에서는 젊은 날의 상실감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혹은 <꾿빠이, 이상>,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밤은 노래한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역사적 사실에 소설적 장치를 첨가하기도 한다. 굉장히 유려한 문장이 특징이며, 읽는 사람에 따라서는 어렵다며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이는 반대로 독자들의 허영심을 채워주는 역할로도 작용한다. 사람의 심리를 잘 파고드는 문장을 구사하며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다. 외국어로 번역하기 편한 글을 구사한다고 하며, 동시에 번역투라는 비판도 받고 있다. 사실 내용도 소설을 가볍게 읽는 사람들이 읽기엔 지나치게 현학적인 데가 있다. 김연수는 문학적 허세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리며, 작가가 오히려 풍부한 독서를 바탕으로 문학 측면에서 어렵게 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많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2013년]] 7월 기준, 최근작은 장편소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이다.[* 다만 해당 책이 출간된 출판사에서 자사의 여러 책들을 사재기하여 베스트셀러 순위를 조작하는 사태가 일어나면서, 이와 관련하여 김연수 작가는 해당 책의 관련 여부와 관계없이 발매된 지 9개월 만에 본 책을 절판시켜 버렸다. 그리고 [[2015년]], 자신의 단편집 <스무살> 재판과 함께 [[문학동네]]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다.]
- 백낙청 . . . . 8회 일치
| 직업 = 문학평론가, 영문학자
'''백낙청'''(白樂晴, [[1938년]] [[1월 10일]] ~ )은 [[한국]]의 대학교수, 영문학자, 문학평론가, 사회운동가이다. 친일관료 백붕제의 아들로 [[대구]] 출신이다.
친가는 [[평안남도]] [[정주군]]에 있었지만, 외가가 있는 [[대구]]에서 태어나서 성장하였다. 변호사였던 아버지 [[백붕제|'''백붕제''']]는 친일관료로 6.25 때 납북되었다. 1955년 [[경기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미국]] 유학을 떠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시 귀국하여 군복무를 마친 후, 다시 유학을 떠나 1972년 [[하버드 대학교]]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http://www.yes24.com/24/goods/5043455?scode=032&OzSrank=5 관악 초청 강연 백낙청 : 주체적 인문학을 위하여]》,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년
*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33509&cid=41708&categoryId=41737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백낙청] , 권영민 저, 서울대학교출판부, {{ISBN|9788952104618}}
[[분류:193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브라운 대학교 동문]][[분류:하버드 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신민당]][[분류:평화민주당 (1987년)]][[분류:새천년민주당 당원]][[분류:수원 백씨]]
- 이현보 . . . . 8회 일치
그는 특히 문장에 뛰어나 자연을 노래한 시조가 많이 있는데, 10장으로 전하던 <어부가>를 그가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에 실려 있다. <효빈가(效嚬歌)> <농악가> <농암가(聾巖歌)> 등이 그의 저서인 <농암(聾巖)문집>에 수록되어 있다. <ref name="이현보">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전기 문학/시조 문학#이현보|이현보]]〉</ref>
중종 때 이현보는 연시조인 어부단가(漁父短歌)를 지었는데, 이는 고려 때부터 전해 오던 어부 단가 10수를 고쳐 지은 것이다. 모두 5장으로 내용은 어부의 생활을 읊은 것이며 본래의 어부 단가 10수는 전하지 않는다. 그 가사가<청구영언><해동가요>에 전해 온다. <ref name="어부사"> 《[[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s:글로벌 세계 대백과사전/언어I·한국문학·논술/고려-조선의 문학/조선 전기 문학/시조 문학#어부사(漁父詞)|어부사(漁父詞)]]〉</ref>
- 임수정(탤런트) . . . . 8회 일치
* 학력위조? : 처음에 그녀는 수원대 연극영화과 출신으로 인터넷에 알려졌으나, 이는 학교4에 나온 다른 출연진의 프로필이 섞여생긴 해프닝이다. 2007년 학력위조 파문으로 연예인들의 학력위조 사례도 알려졌는데 한 언론매체는 그녀가 호서전문대를 다니다가 중퇴했는데 프로필상 고졸로 한것은 학력위조라고 주장했다. 종종 그녀가 호서전문대에 다녔다는 주장이 나오긴 했었다. 2000년 기사엔 호서[[전산원]](당시 이름) 1학년 휴학 중으로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직업전문학교는 교육기관일뿐 대학교와 달리 취급한다.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1998년 학점은행제 시범운영 기관지정이 되었다. 현재는 직업전문학교를 졸업할때 80학점 이상 이수하면 전문학사 학위가 주어져서 전문대 졸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지만 졸업했을때의 경우다. 재학 중에는 어떤 학력도 인정이 되자 않는다. 또한 졸업을 한게 아니기 때문에 학력에 기재할 필요가 없었고, 직업전문학교는 '중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예를 들면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치원이 아닌 미술학원을 다녀도 유치원을 다닌것과 같이 취급 받았다. 유치원과 같은 교육 어쩌면 미술에 대해선 더 자세히 교육을 받았다. 또한 똑같이 졸업식도 하고 유치원과 다를바 없다. 하지만 유치원은 졸업이라고 말하고 기재할수 있지만 미술학원 졸업이라고 쓰지 않는, 그와 다를바 없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이 학교는 대학이 아닌 교육기관이고 만약 그녀가 전문대 중퇴라고 했으면 그것이야말로 학력위조다.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2년제 전문대학 과정을 중심으로 4년제 학사과정까지 개설했으며 일정 학점 이상 이수하면 학위를 인정해준다. 호서전산원에 대한 언급이 처음부터 속이고 없었던 것도 아니며 처음엔 호서전산원 1학년 휴학 중이라고 밝혔으나 학력에 표기하기엔 당시 위와 같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어 고졸로 표기된게 아닌가 싶다. 물론 현재 서울호서직업전문학교는 졸업했을시 학점은행제를 통해 학사 학위가 주어져서 전문대 졸업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 결국 학력위조인지 아닌지는 판단에 맡긴다.
새미 살라망카라는 콜롬비아 출신의 팬이 그녀를 기리는 [[시(문학)|시]]를 짓기도 했다.
- 최동 . . . . 8회 일치
귀국 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에 졸업했다. 모교의 [[해부학]]교실 조교로 일하다가 [[중국]] [[북경협화의과 대학]]과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1929년]]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1931년]]부터 3년 동안은 학교 재단이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강의 과목은 [[기생충학]]과 [[병리학]]이었으며, 다시 일본 [[도호쿠 제국대학]] [[법의학]]교실에서 [[1936년]]에 [[법의학]]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38년]]에 [[조선기독교연합회]] 평의원을 지냈고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을 맡았다. 1941년에 [[동양지광]]이 주최한 '[[미영타도좌담회]]'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자격으로 참석해 [[황인종]]의 시각에서 [[미국]]과 [[영국]]을 비난하는 내용의 강연을 한 일도 있다. [[1945년]] 광복 직후 제4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에 취임하였으며,1947년 12월 4일 Severance 의과대학으로 승격시켜 6년제를 만들었고, [[1955년]]까지 교수로 재직했다.
[[황인종]]의 우수성을 논하고 [[한민족]]의 시원을 먼 곳에서 찾는 최동의 논리는 《[[조선]]문제를 통하여 본 만몽(滿蒙) 문제》(1932)에서와 같이 일제의 [[만주]] 침략이나 [[대동아공영권]] 주장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오랜 집필 작업 끝에 은퇴 후인 [[1966년]]에 《[[조선상고민족사]]》를 탈고했고, 이 업적으로 [[1968년]] [[연세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직책 = [[연세대학교 의료원|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연세대학교 의료원|세브란스 의과대학]] 학장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3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역사가]][[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함인섭 . . . . 8회 일치
'''함인섭'''(咸仁燮, [[1907년]] [[5월 3일]] ~ [[1986년]] [[9월 15일]])은 [[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이며, 초대 강원대학교 학장, 제6대 농림부 장관을 지낸 [[대한민국]]의 [[정치가]]이자 [[대학 교수]]이다. 본관은 강릉(江陵), 호(號)는 산남(山南)이다. 그는 [[춘천농업대학]]([[강원대학교]]의 전신)의 설립에 참여, 개교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춘천농업대학]] 초대 학장과 2대, 4~5대 학장, 강원대학교 농과대학원장, 강원대학 학장 등을 역임했다. 제3대 부통령 송암 [[함태영]]의 손자이며, 26년 연하인 [[함병춘]]은 그의 배다른 이복 삼촌이었다.
[[일본]] 유학 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촉탁직원이 되었다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 [[황주군|황주]][[춘광원예학교]]와 [[자동농업학교]] [[교사]]로 활동했다. [[1946년]] [[춘천공립농업중학교]]의 [[교장]]이 되었다가 이후 주로 [[강원도]]에서 교편을 잡았다. [[강원대학교]]의 전신인 [[춘천농업대학]]의 설립에 주로 참여하였다. [[1952년]]에는 농림부 장관으로 잠시 재직하면서 8.25 직후와 건국 직후의 토지보상 문제와 토지 관련 분쟁을 모두 해결하였다.
귀국 후 [[연희전문학교]] 촉탁직원이 되었다가 [[연희전문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그는 동시에 7년간 직접 농장을 운영하였다.
* [[연희전문학교]] 촉탁직원
* [[연희전문학교]] 교수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86년 죽음]][[분류:폐렴으로 죽은 사람]][[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자유당]][[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농림부 장관]]
- 허만하 . . . . 8회 일치
'''허만하'''(1932년 3월 29일~ )는 [[대한민국]]의 [[시 (문학)|시인]]이자 [[의사]]이다.
1957년 문학예술에서 등단했다.
* 2009년 제2회 [[동리·목월문학상|목월문학상]]
* 2006년 제3회 육사시문학상
* 2004년 제5회 [[청마문학상]]
* 1999년 제1회 [[박용래 문학상]]
[[분류:193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대한민국의 의사]][[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경북대학교 동문]][[분류:1957년 데뷔]][[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박용래 문학상 수상자]]
- 전숙희 . . . . 7회 일치
'''전숙희'''(田淑禧, [[1919년]] [[3월 15일]] ~ [[2010년]] [[8월 1일]])는 일제 강점기와 군정기, [[대한민국]]의 작가, 수필가이다. 본관은 [[담양 전씨|담양]], 호는 벽강(璧江), 목사 [[전주부 (목회자)|전주부]]의 딸이며 기업인 [[전락원]]의 누나이다. 종교는 [[개신교]]이다. [[함경남도]] 협곡에서 출생하고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했다.
1983-1991년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장을 지낸 고인은 한국문학을 해외에 알리고자 노력해왔으며, 1988년에는 동서 진영의 작가들을 초청해 서울에서 국제펜대회를 개최했다.
이후 동생인 고(故) [[전락원]] 전 파라다이스그룹 회장과 함께 1993년 [[계원예술고등학교]], [[계원디자인예술대학]] 등 계원학원을 설립했다. 1997년에는 한국 문학 유산의 보존을 목적으로 한국 최초의 현대문학 자료관인 동서문학관(현 한국현대문학관)을 개관했다. 2010년 8월 1일 오전 8시 경기도 성남시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향년 91세로 별세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3&oid=001&aid=0004585279 원로 수필가 전숙희씨 별세 (연합뉴스 2010년8월1일자)]</ref>
**** 자녀 : 강영국(재미 사업가), 영진(한국현대문학관 관장)씨, 딸 은엽(미술가), 은영(미술가)
- 최두선 . . . . 7회 일치
[[1922년]]부터 [[독일]]로 건너가 독일 마부르크 대학교, 예나 대학교, 베를린 대학교 등에서 수학했다. [[1932년]] [[고려대학교|보성전문학교]] 이사회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 [[게이오기주쿠 대학|일본 게이오 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문학]][[석사]] 졸업
* [[마르부르크 대학교|독일 마르부르크 대학교 대학원 독어독문학과]] [[문학]][[석사]] 졸업
[[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국무총리]][[분류:대한민국의 영문학자]][[분류:대한민국의 별정직공무원]][[분류:대한민국의 한문학자]][[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김성수 (1891년)]][[분류:윤보선]][[분류:박정희]][[분류:게이오기주쿠 대학 동문]][[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유교 신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동주 최씨]][[분류:마르부르크 대학교 동문]][[분류:예나 대학교 동문]][[분류: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동문]][[분류:대한적십자사 대표]][[분류:인촌기념회]]
- 하수빈 . . . . 7회 일치
그동안은 음악 프로듀서, 조형미술, 해외건축 디자인, 패션 컬렉션, 문학 등 다채로운 예술 장르에서 그 역량을 표현하고 있었으나, 천부적으로 섬세한 감성은 그녀를 다시 음악으로 선회하게 만들었고, 다시 음악적 창작의 세계로 그녀를 이끌었다. 무에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하는 음악가에게도 가장 순수한 세계어는 바로 음악이라는 사실이다. 어느덧 그녀는 음악, 문학, 건축, 디자인, 사진 등 종합예술의 세계로 좀 더 대중과 가까이 호흡하고있다.
•'''하수빈'''의 아티스트로의 성장과 변모로 이끈 '''《The Persistence Of Memory - 추억의 영속》...'''그녀의 감성 판타지, 그 영혼의 음악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그간의 삶의 여정, 사랑, 평화 그리고 오랜 그리움의 정서를 영상미학적 음향(Cinematic Sound), 섬세한 문학적 언어와 감성적 음악으로 조각함이 무척 인상적이다.
== 문학 ==
그녀의 감성적 문학 세계... 풍경화 같은 영상 속 자연이 주는 감동과 그녀의 오랜 여정을 담고 있는
그녀의 내면적 감성은 매우 회화적이다. 마치 노르웨이 숲, 그 끝없는 광활함이나 눈이 시리도록 맑고 깨끗한 캐나다의 호수, 신비로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나 듯... 생명력을 품고 있는 자연의 신비스러움에서 많은 시적 영감을 얻었다. 영상미학적 Cinematic 한 내면적 성찰을 섬세한 문학적 언어로 조각함이 무척 인상적이다.
가끔 꿈을 잃은 상실감, 그 정서적 충만의 부재가 올 때, 다시 신비감에 대한 향수를 달래주는 아름다운 천사의 시... 이제 음악, 건축 조형, 디자인, 문학... 에 이르기까지...
- 이갑성 . . . . 6회 일치
[[1910년]] [[경신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진학, 약학을 전공했다. [[1913년]] 세브란스의전 약학과를 마치고 다시 배우다가 [[1915년]] [[세브란스의학전문]]을 졸업하였다. [[세브란스 연합의학교]] 부속병원에서 사무원으로 근무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을 실행함에 있어 학생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하여, [[경성부]]의 학생들이 시국관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학교에서 영향력이 있던 학생들과 자주 만나 [[손병희]] 등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운동을 주도한다며 독립운동 계획을 알려 동참을 호소하는 한편, 비밀리에 [[경성부]]내 각 고등학교, 전문학교 학생들의 동정을 주시하였다. 이에 [[고종 황제]]가 갑자기 죽자 그해 [[2월]]을 만세 거사 기일로 정하였다.
[[2월 28일]]에는 목사 [[김창준 (1890년)|김창준]]에게 [[함태영]]이 인쇄한 독립선언서 900매 중 약 600매를 받은 뒤 이를 다시 인쇄하고, 그날 5매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설(李容卨)에게 교부하여 인쇄하게 한 뒤 학생들에게 돌리게 하였다. [[3월 1일]] 아침 일찍 이갑성은 독립선언서를 수천 장 인쇄하여 400여매를 병원 사무실에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인 [[이용상]](李容祥)에게 주어, 그중 200매는 대구의 목사 [[이만집]](李萬集)에게 보내고 나머지 200매를 [[마산]]의 독립운동 동조자 임학찬(任學瓚)에게 보내도록 한다. 또한 학생 [[김병수]](金屏沫)에게는 [[전라북도]] [[옥구군]]에 있는 [[박연세]](朴淵世) 등에게 보내기 위해 200매를 주었으며, [[충청남도]] [[천안]]에서 올라온 [[임영신]]에게도 일부 배포하고, [[경성부]] 강기덕(姜基德)에게 천500매를 주어 배포케 한다. [[2월 28일]] 밤 [[경성부]]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의 집에 모인 손병희 등의 민족대표들은, 당초에 독립선언 장소로 결정했던 [[파고다 공원]]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때문에 큰 혼란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그 장소를 [[인사동]](仁寺洞)의 [[태화관]](泰華館)으로 정하였다.
석방 후 [[대한기독교청년회연맹]](YMCA)에 가입하여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2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재단 이사, 세브란스의약(醫藥) 지배인이 되었다. [[1925년]] [[2월]] 이창제(李昶齊), 현신덕(玄信德), 조철호(趙喆鎬), 배집(裵執), 변성옥(邊成玉) 외 5인과 함께 [[공산주의]] 계열의 [[반기독교 운동]]에 저항하기 위해 [[시사구락부]](時事俱樂部)를 조직하여 사회주의자들의 반기독교 주장에 저항하였다.<ref>김준엽, 김창순 공저, 《한국공산주의운동사 2》(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ref>
*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사(1915년)
- 최제훈 . . . . 6회 일치
| 장르 = 소설, 문학
[[2007년]] 제7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단편소설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와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 《퀴르발 남작의 성》([[문학과지성사]], 2010)
* 《나비잠》([[문학과지성사]], 2013)
- 문근영 . . . . 5회 일치
||<#f08080><:> {{{#ffffff '''학력'''}}} ||<(><#ffe4e1> 남원초등학교[br] 남원중학교[br] 남원고등학교[br][[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
[[2006년]] [[성균관대학교]] 인문학부에 특별전형 지원으로 합격했다. 입학 전 [[수능]] 성적으로 [[대학]] 가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고 수능 당일날 교실 하나를 혼자 쓰면서 요란하게 수능까지 봤다. 그런데 막상 원서 쓸 때가 되니까 특별전형, 그것도 연예인들이 으레 가는 '''[[연극영화과]]가 아닌 [[국어국문학과]]에 응시했고''' 간단히(?) 합격해 버려서 당시 [[고3]]들에게 엄청난 [[어그로]]를 끌어버렸다. 아무래도 본인 수능성적이 예상 이하였던 모양이다.[* 문근영이 고3이던 당시, 모교인 [[국제고등학교(광주)|국제고등학교]](일반계 고등학교)를 방문한 졸업생의 증언에 따르면 이러하다. 영화 [[댄서의 순정]] 이후 학업에 열중하겠다는 언플이 있었으나, 영화 개봉과 무대인사가 모두 끝난 5월 말까지도 등교가 아닌 외부활동(교사의 말에 따르면 [[칸 영화제]]를 '구경'갔다고 한다.)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미 특별전형을 고려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연예계 활동 때문에 학교 생활을 등한시하기 일쑤인 다른 연예인들과 달리, 학창시절부터 성실하게 수업을 듣는 편이었다. 수업마다 편차가 좀 크긴 했지만 대체로 수업에서 적극적으로 발언하려 하는 등, 일반 학생들에 비해 참여도가 크게 뒤지는 편은 아니었다. 특히 2012년 1학기(문근영의 졸업 학기)에는 여러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떠드는 문근영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2008년]]까지는 학업에 전념했으나, 이후 연기 활동으로 인해 휴학하고 09년에 복학,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면서 최종적으로는 2012년에 현대소설론을 마지막으로 수료했다.[* 모든 대학들이 그렇듯, 수업만 전부 다 듣는다고 해서 [[졸업]]이 되는 것이 아니다.(가장 일반적인 것으로는 졸업 [[논문]] 미통과.) 수업을 다 들어도 졸업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졸업이 되지 않고 수료만 된 것으로 처리된다. [[성균관대학교]]는 학점 이수 외에도 영어 공인 점수, [[자격증]] 등의 3품을 따야 졸업 요건이 충족된다. 문근영은 학점도 이수하고 졸업 논문도 제출했으나 3품을 따지 못해 졸업은 하지 못했고, 국어국문학 학부를 수료만 한 상태이다. 그래도 3품 제출 기한이 무기한이기 때문에 문근영의 경우 대학에서 요구하는 영어 점수와 자격증을 취득하는 순간 바로 당해 학기에 졸업 처리가 된다.] 수료상태를 끝내고 2015학년도 전기학위수여식(2016년 2월)에 학사학위를 수여받았다.
- 박성원 (소설가) . . . . 5회 일치
|수상 = 2010년 현대문학상
1994년 [[문학과 사회]]에 단편 "유서"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영남대학교]] 행정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계명대학교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2010년 제55회 [[현대문학상]] - 《얼룩》
* 2012년 제17회 현대불교문학상
[[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196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
- 이상정 (1897년) . . . . 5회 일치
그는 [[서예]]와 [[전각]]에도 능하였고 [[1923년]]에는 [[시 (문학)|시인]]으로 문단 등단하기도 하였다.
* [[도쿄 예술대학|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 [[전문학사]]
* [[히토쓰바시 대학|일본 도쿄 상업전문학교]] 전문학사
- 이효상 . . . . 5회 일치
| 장르 = 시문학
일본에 유학, 1930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36년]] 《가톨릭청년》지에 <기적>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등단한 후 많은 작품, 특히 문학과 관련된 연구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 [[도쿄 대학|동경제대]] 문학부 독문학과 졸업
* [[벨기에]] [[루뱅대학교]] 수학, 명예문학 박사
- 천운영 . . . . 5회 일치
문학평론가 류보선은 〈잘 가라, 서커스〉에 대해 “대단히 밀도가 높을 뿐만 아니라 이전의 천운영 소설이 행했던 역할과는 또다른 방식으로 한국소설사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했다.<ref>{{웹 인용|url= http://for-munhak.or.kr/_renewal/_index.php?ForMunhak=board.php&dbbase=book3&field=cGFydF9ib29rc195ZXNfYmI%3D&words=2005-4&parts=2005-4&numerals=1561&page=1|제목=잘 가라, 서커스|출판사=문학나눔|저자=|날짜=|확인날짜=2010-10-18}}</ref>
* [[2004년]] 《명랑》(문학과지성사)
{{신동엽문학상 수상자(2000년 – 2009년)}}
[[분류:1971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한양대학교 동문]][[분류:서울예술대학 동문]][[분류:영양 천씨]][[분류:신동엽문학상 수상자]]
- 한용덕 (시인) . . . . 5회 일치
[[2005년]] 《계간 문학세상》에서 열린 신인문학상 공모에서 <빈집>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당시 고등학교 3학년 (19세) 의 나이로 등단했다. 월간 문예사조 문인협회 동인이다.
* [[2005년]] - 계간 문학세상 신인문학상
* [[2005년]] - 격월간 신문예 신인문학상
- 김미숙(1959) . . . . 4회 일치
|| '''학력''' ||<(> 순창고등학교 (졸업)[br][[한국방송통신대학교]] 유아교육과 (전문학사)[br][[경운대학교]] 경영학과 (학사)[br][[동신대학교|동신대학교 사회개발대학원]] 문화산업학과 (석사) ||
* [[1981년]] [[KBS 2TV]] 《[[TV문학관]] - 무진기행》
* [[1985년]] [[KBS 2TV]] 《[[TV문학관]] -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
* [[1985년]] [[KBS 2TV]] 《[[TV문학관]] - 열하일기》
- 김재권 (철학자) . . . . 4회 일치
김재권은 1934년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여 [[서울특별시|서울]]에서 성장,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2년 수료 후,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에 편입하여 불문학 전공 및 철학 [[수학]]을 연계전공하여 학부를 마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석박사과정) 학위를 취득하였다.
* [[서울대학교]] 불문학과 [[학사]] 2년 수료
*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학사 (불어불문학 전공, 철학, 수학 연계전공)
- 오세정 (교수) . . . . 4회 일치
| 경력 =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기초과학연구원]] 원장<br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과학기술기반분과 위원<br />[[한국연구재단]] 이사장<br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 학장<br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과 교수<br />[[국민의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
'''오세정'''(吳世正, [[1953년]] [[2월 17일]] ~ )은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를 지낸 [[대한민국]]의 물리학자이자 바른미래당 출신 제20대 전 국회의원이다.<ref>{{헌정회|2918}}</ref>
1984년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이후 국제이론물리학센터 연구원과 미국 미시간대 객원 연구원, 일본 도쿄대 초빙교수 등을 두루 역임하며, 1995년에는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 기획연구실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로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장,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이사, 국무총리실 정부업무평가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ref>{{뉴스 인용|제목=국민의당 비례대표 2번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url=http://www.focus.kr/view.php?key=2016032300144739514|날짜=2016-03-23|뉴스=포커스뉴스|확인날짜=2016-03-2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712184756/http://www.focus.kr/view.php?key=2016032300144739514|보존날짜=2016-07-12|깨진링크=예}}</ref> 서울대학교 총장 선거에 나가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 윤종신 . . . . 4회 일치
||<bgcolor=#201e1f> {{{#FFFFFF '''최종 학력'''}}} ||<(>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국어국문학]] [[학사]] ||
[[1969년]] [[10월 15일]] [[전라남도]] [[장흥군|장흥]]에서 2남 중 [[광주]]으로 태어났다. 아주 어릴 때 잠깐 살다가 5살 무렵 [[대구광역시|대구]] [[중구(대구)|중구]]로 상경, 그 뒤 [[대원 외국어학교]][* 2회 졸업생으로, '대원 외국어학교' 시절이다. 일반 고등학교를 못 가는 사람들이 가던 그 시절 맞다. 대원외고 동창으로 현재 [[메르세데스-벤츠|벤츠]]의 딜러인 한성자동차의 세일즈맨으로 알려진 가수 [[김민우]], 작곡가 [[MGR(음악가)]]이 있다.] [[스페인어]]과 졸업 후 [[연세대학교 원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 88학번으로 입학 후[* 본래 가족들이 독실한 신앙인이 워낙 많아서 어릴 적부터 연세대 신학과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는 것이 원래 꿈이었지만 성적으로 인해 원주캠퍼스 국어국문학과로 입학하게 되었고, 때문에 적응을 못해서 1, 2학년 동안 방황을 많이 했다고 한다.] 소리를 창조하는 사람들이라는 음악 동아리에 가입하며 음악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다.
* 국어국문학 전공자답게 예능에서 국어 문법과 관련한 개그를 종종 하는 편이다.
- 이창동 . . . . 4회 일치
* 《소지》 (문학과지성사, 1987년)
* 《녹천에는 똥이 많다》 (문학과지성사, 1992년)
* 1987년 [[이상문학상]] 추천우수상 《운명에 관하여》
* 1992년 [[한국일보문학상]] 《녹천에는 똥이 많다》
- 정병오 . . . . 4회 일치
'''정병오'''(鄭炳五, [[1950년]] ~ )은 [[대한민국]]의 시인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한국방송통신대학 경제학과 졸업, 한국순수문학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2002년]] 《월간순수문학》에 신인상 수상으로 〈순례하는 바람〉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했다.
*《제11회 영랑문학상 수상(2006년)》
[[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195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필(筆)동인]][[분류:영랑문학상 수상자]]
- 정인숙 (1945년) . . . . 4회 일치
대학을 중퇴한 후 일정한 직업이 없던 그는 '나 정도의 얼굴이면 영화배우가 될 수 있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했고,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전전하였다. 또한 문학공부를 하고자 했던 정인숙은 자신에게 문학을 가르쳐줄 마땅한 사람을 찾아다녔다. [[1963년]] 정인숙은 시나리오 작가인 장사공을 만나 1년 정도 교제를 했다.<ref name="hp103"/> 이 때 정인숙과 장사공은 동거를 했다는 의혹<ref>여영무, '추적 정인숙 미스터리', 《신동아 1983년 9월호》 (동아일보사, 1983) 168쪽</ref> 이 제기되기도 했다. 당시 장사공은 [[KBS]] 방송국에 《태양은 늙지 않는다》란 연속극을 집필하고 있었고, 정인숙은 곧잘 친구들에게“우리 애인은 유명한 작가”라며 자랑했다. 또한 “장씨와 약혼한 사이며 곧 영화에도 출연하게 될 것”이라고 비치기도 했다. 실제로 정인숙은 장사공의 소개로 S영화사와 접촉이 되어 2,3편의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다.<ref name="ilsa01">[http://www.ilyosisa.co.kr/bbs/zboard.php?id=society&page=32&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238 <nowiki>[</nowiki>제584호<nowiki>]</nowiki> 다시 떠오른 ‘정인숙의 추억’의문의 피살 미스터리 전모] 일요시사 2007년 03월 20일자</ref> 그러나 신촌과 수유리 등을 전전하며 하숙생활을 하던 정인숙과 장사공의 동거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결국 그녀의 타고난 기질과 장사공의 사업실패가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았다. 장사공은 정인숙을 구타했고, 정인숙은 [[대구]]의 집으로 도망오기도 했다. 장사공을 사위로 여기던 정도환 내외와 두 오빠는 그때마다 아이가 철이 없으니 인내하고 데리고 살라고 거듭 부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제적으로도 무능력했던 장사공은 바람을 피우고 있었고, 결혼까지 생각했던 두 사람의 사이는 1년 만에 파탄으로 끝났다.
신원조회는 당시 [[대한민국의 국가정보원장|중앙정보부장]]이던 [[김형욱]]의 비서<ref name="hp104"/> 실장인 [[문학림]]이 맡았고, 고위층만이 가질 수 있었던 회수여권은 정일권의 비서관 [[신성재]]가 주선하였다.<ref name="hp105">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5페이지</ref> 여권 발급 날짜는 [[1968년]] [[12월 30일]]이고, 이후 정인숙은 [[1969년]] [[3월]] 큰오빠를 만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10월]]에는 [[워싱턴 D.C.]] 한인회장 [[노진환]]의 안내로 미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다가 [[1970년]] 1월 21일 귀국했다.<ref name="hp105"/>
{{인용문|그렇다면 초점은 그 아이가 정일권의 아들 정성일이냐, 아니면 박정희의 아들 박성일이냐로 좁아진다. ...(이하 중략)... 자, 문제의 아이 성일군이 정일권의 아들이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아이의 정체를 알 수도 있었을 [[최대현]], [[노진환]], [[문학림]]이 정일권의 명예를 보호하기 위하여 박정희가 상당한 의혹의 대상이 되는 현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침묵을 지켰을 것인가? 당시 정일권은 과연 그만한 일을 강행할 만큼의 국정에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가? 그 후 정일권은 국회의원 자격도 없는 노진환을 공화당 전국구 의원으로 밀어<ref name="kum108"/> 넣고 일등 공신 최대현을 청와대 사정 보좌관실에서 박정희의 비서로 일하게 할 만큼 정치적으로 강력했던가?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ref name="kum109">김환표 외, 《스캔들에 갇힌 영혼들:시사인물사전 16》 (인물과사상사, 2002) 109페이지</ref> 따라서 이 의문들에 대한 나의 대답은 결단코 '아니다!'였다. 이렇게 보자면 성일군의 아버지는 누구였는지가 스스로 명백해진다. 또 하나 명백한 것은 성일군의 아버지가 성일군의 어머니인 정인숙 여인을 살해한 장본인이라는 점이다. 이걸 성일군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버지가 어머니를 죽인 골육상쟁극이었다.<ref name="kum109"/>}}
- 표양문 . . . . 4회 일치
* 전문학교입학자 검정시험 합격
* 경성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의학사
[[분류:1907년 태어남]][[분류:1962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한국독립당]][[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수필가]][[분류:이승만]][[분류:자유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동문]][[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신창 표씨]]
- 한규복 (1881년) . . . . 4회 일치
[[1899년]](광무 2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동경전문학교]]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03년]] 귀국, 대한제국 관료로 임용되어 [[탁지부]] [[주사]], [[군부]]와 [[탁지부]]의 [[번역관]] 등을 거쳐 탁지부 [[서기관]], [[주임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토지조사국]] 감사담당관, [[1913년]] [[진주군|진주]][[군수]], 이후 [[동래군|동래]][[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충청남도청]] [[참여관]], [[1924년]] [[경상북도청]] [[참여관]], [[1926년]] [[충청북도]][[도지사]], [[황해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이듬해 재선된 뒤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사회운동가이자 문학평론가인 [[김두용]](金斗鎔)은 그가 악성 반역자는 아닌 것으로 봤다. 그에 의하면 '고관 전직자, 친일파의 거두 등은 기장지무(巳張之舞<ref>이미 춘 춤</ref>)이니 이러한 기회에 일층 적극 진충보국하면 자기 개인은 물론이요, 우리 민족적으로도 장래에 유리할 것으로 생각한 자<ref>김인덕, 《일제시대 민족해방운동가 연구》 (국학자료원 펴냄, 2002) 67페이지</ref>
- 한말숙 . . . . 4회 일치
|소속 = 前 [[한국여성문학인협회]] 회장
[[분류:1931년 태어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소설가]][[분류:숙명여자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청주 한씨]][[분류:불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자]][[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
- 그루베니아 . . . . 3회 일치
그루베니아의 교육의 과정은 초급학교, 상급학교, 대학교로 구성되어있다. 초급학교의 교육기간은 6년으로 기초 학문을 가르친다. 상급학교는 인문학교, 일반학교, 실업학교로 이루어져있으며 각각 교육기간은 인문학교는 6년이고 일반학교 실업학교는 4년 이수이다. 인문학교를 졸업하면 대학에 입학 할 수있으며 ,일반학교, 실업학교의 경우도 졸업 이후 합격시험을 거치면 대학에 입학 할 수 있다.
- 김성곤 . . . . 3회 일치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 지금의 [[고려대학교]]의 전신. 김성곤은 나중에 고려대학교 교우회장을 맡기도 했다.]를 졸업하였다. 학창시절엔 [[유도(스포츠)|유도]] 선수로 활동했고 정계에 있을 때 대한유도회 회장을 역임한 체육인이기도 하다. 그의 호를 딴 '성곡컵 국제유도대회'가 있다.
1940년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1948년에는 고려화재해상보험과 자본금 1억 원의 금성방직을 설립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이 불탄 뒤,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을 인수하였다. 1956년 태평방직과 아주방직을 인수하였다. 1959년 [[국민대학교|국민대학]]을 인수[* 보성전문학교 상과 시절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가 보성전문학교 교정에서 밀짚모자를 쓰고 교정에서 풀을 뽑는 모습에 감명을 받아 이때부터 육영사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덕분에 국민대에서는 김성곤을 학교 설립자인 해공 [[신익희]]와 함께 양대 건학 공로자로 기념, 추모하고 있다.]하고, 1962년 [[쌍용양회]]를 설립하였다.
- 김윤환 . . . . 3회 일치
|| '''학력''' || [[경북고등학교]] {{{-1 ([[졸업]])}}}[br][[경북대학교]] {{{-1 (영문학 / [[학사]])}}}[br][[오하이오 주립대학교]] {{{-1 (언론학 / [[석사]])}}} ||
[[경북고등학교]]와 [[경북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지역 언론사인 [[영남일보]]와 [[대구일보]]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해 일본특파원 및 편집국장 대리를 거쳤다. 이 시절에 오랫동안 주일 특파원으로 있으면서 [[일본]]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의 금권 정치, 계파-계보 정치, 막후 정치를 보고 배운다. 중간에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북도 [[성주군]]-[[칠곡군]]-[[구미시|선산군]]-[[군위군]] 선거구에 출마([[민주공화당(1963년)|민주공화당]] [[신현확]] 후보와 [[신민당(1967년)|신민당]] [[김창환(정치인)|김창환]] 후보에 밀려 낙선)하는 등 정치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기사는 거의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1978년 [[유신정우회]]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진출하였다.
* [[시인(문학)|시인]]으로도 활동했는데, [[경북대학교]] 정문과 학생주차장 사이에 새롭게 단장한 KNU 센트럴 파크에 그의 시비가 있다.[* [[경북대학교]]에서 잠깐 교수로 재직한 적이 있는 [[김춘수]] 시인의 유명 작품인 "꽃"도 KNU 센트럴 파크에 새겨져 있다.]
- 김재규 . . . . 3회 일치
1943년 안동공립농림학교[* 해방 후 안동농림고등학교, 현 [[한국생명과학고등학교]]의 전신]를 졸업한 후, 그 해, 대구농업전문학교 중등교원양성소[* 이 당시에는 2년제 전문학교였다. 해방 후 대구농과대학을 거쳐 1951년 대구사범학교 등과 통합하여 경북대학교로 개교한다.]에 입학하여 1945년 수료하였다. [[일제강점기]] 당시 중등교원의 수가 부족한데 반해, 조선 내에는 고등사범학교가 없었다. 문과의 경우 [[경성제국대학]] 졸업자 등으로 수요를 채울 수 있었지만, 이공계 쪽의 교사가 부족하여 일제는 각종 전문학교에 2년제 '교원양성소' 과정을 도입하여 교사인력을 충원했다. 1945년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조선인이 징집 대상이 되었을 때 [[일본군 해군]]의 [[카미카제]] 양성을 위한 예과 후보생으로 차출되었으며 카미카제의 생존률이 0%라는것을 감안해보았을때 만약 일본이 빨리 몰락하지 않았다면 김재규는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다.
- 김현정 (1979년) . . . . 3회 일치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영어영문학과<ref>[https://news.knou.ac.kr/news/article.html?no=18562 "연기만큼 학업도 열심히!
대표 저서로는 《랄라의 외출》이 있으며, 이 서적은 2014년에 세종도서 문학나눔에 선정되어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ref>[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226781 배우 화가 김현정 ‘랄라의외출’ 세종도서 문학나눔 선정], 뉴데일리, 2014년 12월 9일 작성.</ref>
- 마니교 . . . . 3회 일치
마니는 저술에 능숙하여 생전에 7권의 서적을 쓰고, 이를 교리서로서 명확하게 제시했다. 문학 만이 아니라 시에도 재능이 있어 스스로 찬송가를 지었고, 회화에도 능숙하여 『아르다항』이라는 교리를 그림으로 나타낸 회화집을 만들 정도로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마니교는 포교 과정에서 역법, 천문학, 설화 문학, 음악, 제본 기술, 미술 등을 전파하여, 동서 문화 교류에 공헌했다고 여겨진다.
- 문태준(시인, PD) . . . . 3회 일치
== [[시인(문학)|시인]], [[PD(방송)|PD]] ==
1970년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분류:김천시 출신 인물]] [[분류:시인(문학)|시인]] [[분류:PD(방송)|PD]]
- 배영수 . . . . 3회 일치
그리고 4월 7일 대구에서 펼쳐진 넥센과의 홈경기에서 7이닝 무실점 완벽투구를 보이며 344일만에 승리투수가 되었다. 2009시즌의 악몽을 떨쳐내는 정말 눈물의 감격투 그 자체였다. 이 기세를 몰아서 4월 13일 잠실에서 펼쳐진 LG와의 원정경기에서도 7이닝 무실점 또 한번의 완벽투구를 보이며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 때 당시 평균자책점은 무려 '''0.47'''! 하지만 이 후 문학 SK전과 대구 두산전에서 각각 5이닝 6실점(4자책), 5이닝 3실점의 내용을 보이며 다소 아쉽게 4월을 마무리 했다.
4월 10일 문학 SK전과 4월 17일 대구 두산전, 4월 23일 목동 넥센전에서 연달아 승리함으로써 내리 3승을 거두었다. 삼성팬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팀이 시리즈 전적 2승으로 앞선 2011년 10월 28일 인천 문학 경기장에서 열린 SK와의 한국시리즈 3차전, 팀이 1:2로 뒤진 8회말에 등판하여 [[정근우]]에게 안타, [[박재상#s-2|박재상]]에게 희생번트, [[최정]]에게 유격수 땅볼 진루타를 허용, 2사 3루에서 마운드를 내려왔다. 다음 투수인 [[권혁]]이 [[임훈]]을 운 좋게도 3루수 라인드라이브로 잡아내어 이닝을 끝낸 덕분에 배영수의 실점과 자책점은 없었다.
- 신동일 (언어학자) . . . . 3회 일치
[[1990년]]에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에 [[아이오와 주립대학교]] 영어과에서 응용언어학 분야 중 하나인 구술능숙도(spoken proficiency) 평가 분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였으며, [[1999년]] 10월에 <진단목적으로의 영어 듣기 평가도구 타당도 검증: 수행능력 모형화 작업과 다차원구조 이슈 중심으로(Construct validation of a diagnostic L2 listening test: An operational model utilized and multidimensionality issues revisited)>라는 논문<ref>[http://www.slate.illinois.edu/people/graduates/#3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 제 2언어습득 및 교육학과 동문]</ref>으로 [[일리노이 대학교 어바나-샴페인]]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숙명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2000년]]-[[2005년]])를 거쳐, 2005년부터는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2008년에 신동일영어평가연구소를 창업해서 영어과 진단교육 콘텐츠를 학교 밖에서 제작하고 유통시키는 일에 참여했다. 2013년부터 2016년 까지는 [[중앙대학교]]에서 [[BK21 PLUS]] 스토리텔러 교육공동체 사업단장을 맡았다.
- 신동호 (아나운서) . . . . 3회 일치
|학력 =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신동호'''([[1965년]] [[1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아나운서이다.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92년]] [[문화방송]]에 입사하였다.
*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 이민우(배우) . . . . 3회 일치
|| 1984년 ||<|3> KBS1 || TV 문학관 - 저승새 || 동자승 || ||
|| TV 문학관 - 수몰촌 || || ||
* 1985년 제21회 [[백상예술대상]] (당시 한국 연극 영화 TV 예술상) 아역상 《TV 문학관 '저승새'》
- 전민희 . . . . 3회 일치
| 문학 경향 =
* 〈눈의 새〉 - 2010년 12월,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4418&category_type=series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문학]. 네이버캐스트 오늘의 문학에 투고된 단편 소설. [[MMORPG]] 《[[아키에이지]]》의 세계가 무대다.
- 정서임 . . . . 3회 일치
* 1986년 KBS2 tv문학관 《[[그해 여름]]》 - 주연
* 1986년 KBS2 tv문학관 《[[B사감과 러브레타]]》
* 1985년 KBS2 tv문학관 《[[노래여 마지막 노래여]]》
- 최승자 . . . . 3회 일치
1971년 [[수도여고]]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하였다.
1979년 '문학과 지성' 가을호에 시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1980년대에서부터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시인으로서 황지우, 이성복과 함께 아주 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2010년 대산문학상을 수상하였다.
- 최태영 . . . . 3회 일치
'''최태영'''(崔泰永, [[1900년]] [[3월 28일]] ~ [[2005년]] [[11월 30일]])은 [[대한민국]]의 [[법학자]]이이다. 한국인 최초로 [[1925년]]에 법학 정교수가 되어 한국 근대 법학의 초기에 [[보성전문학교]]와 [[서울대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상법·민법·헌법·국제법·행정법·법제사·법철학 등 다양한 분야를 가르치며 법학 교육에 크게 기여하였다.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여러 저서를 출간하였다.
[[서울]]에서 태어나 [[1919년]] [[메이지 대학교|메이지대학]] 예과에 입학하였고, [[1921년]]부터 [[1924년]]까지 법학부에서 수학하여 법철학 및 상법 법학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보성전문학교]]에서 교수 및 강사로 일하면서 경신학교의 교장 등을 역임하기도 했다.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200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법학자]][[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역사가]][[분류:대한민국학술원 회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메이지 대학 동문]][[분류:법철학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백세인]][[분류:상법학자]][[분류:부산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
- 홍성유 . . . . 3회 일치
이후 《[[신사조]]》 주간, 《[[신사조]]》 집필위원 겸 편찬위원, [[한국문인협회]] 이사,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이사, [[한국저작권협회]] 부회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한국소설가협회]] 회장, [[문화예술진흥위원회]] 위원,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장, [[한국가톨릭문인회]] 회장, [[한국공연예술진흥협의회]] 위원 등을 지냈다.
* 1984년 한국문학평론가협회상
[[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육군보병학교 동문]][[분류:한국독립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정일권]][[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남양 홍씨 (당홍)]]
- 홍세화 . . . . 3회 일치
* [https://www.youtube.com/watch?v=lUXPz5USnIY 홍세화 선생님 강연회]. 김영준국어논술전문학원. 2011년 2월.
[[분류:대한민국의 사상가]][[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프랑스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반파시스트]][[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창경초등학교 동문]][[분류:경기중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진보신당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경제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교육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분류:대한민국의 학자]][[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사회민주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반체제자]][[분류:홍세화|*]][[분류:아웃사이더]][[분류:노동당 (대한민국) 당원]][[분류:대한민국의 사회주의자]][[분류:한겨레]][[분류:민중민주파]][[분류:프랑스어-한국어 번역가]]
- 경관 . . . . 2회 일치
앞 뒤의 기사가 호응하여 이어진다면, "위군의 시신까지 한꺼번에 경관에 묻어버렸다."는 사실은 등애가 더욱 큰 경관을 만들어 자신의 전공을 과도하게 부풀리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열전의 문학성에 비추어보면, 등애의 자만을 보여 주는 일화로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앞 뒤의 기사가 호응하여 이어진다면, "위군의 시신까지 한꺼번에 경관에 묻어버렸다."는 사실은 등애가 더욱 큰 경관을 만들어 자신의 전공을 과도하게 부풀리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게 된다. 열전의 문학성에 비추어보면, 등애의 자만을 보여 주는 일화로서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김경식 (희극인) . . . . 2회 일치
| 학력 = [[서울예술대학교|서울예술전문대학 광고창작학과]] [[전문학사]]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출생하여 [[부산광역시|부산]]과 [[대구광역시|대구]]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서울예술대학교|서울예술전문대학 광고창작학과]]를 [[전문학사]] 졸업하였으며, [[1989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으며, [[1991년]] 뮤지컬배우 데뷔한 그는 이듬해 [[1992년 3월]] [[서울방송|SBS]] 개그 콘테스트를 통해 정식 데뷔를 하였으며, [[틴틴파이브]] 멤버로 가수 활동을 하기도 했다. 가수 故 [[유채영]]과 함께 [[MBC 표준FM]] 《[[좋은 주말]]》을 진행한 적이 있으며, [[서현진 (방송인)|서현진]] 前 MBC 아나운서 와 함께 《[[생방송 원더풀 금요일]]》을 진행한 적이 있다.
- 김남조 . . . . 2회 일치
| 장르 = 시문학
그는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 일본 규슈 후쿠오카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1944년 돌아와 경성여자전문학교(이화전문)에 입학하였다. 1951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였다. 이후 마산고등학교와 여화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였다. 성균관대학교 강사를 거쳐 1954년부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ref>이은영,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21049 예술가 위한 공간 ‘예술의 기쁨’ 개관하는 원로시인 김남조], 서울문화투데이</ref>
- 김민기(가수) . . . . 2회 일치
2016년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국의 노벨문학상 후보로 잠시 언론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같이 언급된 것은 일본의 [[하루키]] 작가이며, 어떤 기사는 한국의 밥 딜런으로 [[한대수]]를 언급하기도 했다. [[http://kns.tv/news/articleView.html?idxno=251534&daum_check=|관련 기사]]
- 김민아 (아나운서) . . . . 2회 일치
|학력 =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과 학사
* [[연세대학교]] 불어불문학 학사 (2002학번)
- 김성곤 (1913년) . . . . 2회 일치
*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 졸업
[[1937년]] [[보성전문학교]] 상과를 졸업하고 [[1939년]]에 비누공장인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하였다. 그 뒤 대두유 비축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되어 이후 [[1948년]] 금성방직을 인수한다. 그러나 [[1950년]] [[6.25전쟁]]으로 금성방직 안양공장에 화재가 난다. 그 뒤 [[1952년]]에 [[동양통신]]을 창간하였으며, [[1953년]]에는 연합신문을 인수, [[1956년]]에는 태평방직, 아주방직을 인수하는 등 기업가로서 성공을 이어갔다.
- 김성민 (1994년)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4월 2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kt 위즈|kt]]전 구원
- 김영철(배우) . . . . 2회 일치
[[1973년]] 극단에 입단해 연극배우 생활을 하던 중, [[1977년]] [[동양방송]] 공채 18기 탤런트로 브라운관에 데뷔하여 조연으로 주요 드라마에 출연하다가, [[언론통폐합]] 이후 KBS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80년대 TV 문학관에서 거의 주인공을 전담하다시피 했다.[* [[선우휘]] 원작의 단독 강화에서는 대사 없는 시체로 나온 적도 있다.] 가장 인상적인 연기는 이병주 원작의 변명에서 독립운동가의 역할과 [[프랑스]] 지식인[* 원작에서 주인공이 고민하는 것이 프랑스 레지스탕스였던 블로크 교수의 총살 에피소드이다. 김영철은 여기서 1인 2역으로 한국인 독립운동가 탁인수와 프랑스 교수 블로크를 모두 맡았다], [[심훈]] 원작의 [[상록수(소설)|상록수]] 주인공, [[벙어리 삼룡이]]의 주인공 등이다. 체육인 출신이었던 덕에 젊은 시절에는 몸도 좋았던지라 KBS 특집극에서 [[손기정]]을 맡은 적도 있다.[* KBS 1TV에서 82년 1월에 5부작으로 방영했던 '맨발의 영광'이란 미니시리즈이다. 2013년에 작고한 [[강태기]] 씨가 이 드라마에서 손기정의 빛에 가려진 또 한 명의 [[마라톤]] 영웅인 남승룡 선수 역을 했다.] 대하드라마 [[토지(소설)|토지]]에서 김환 역을 하기도 했다.
앞서 서술한 배역들과는 다르게 몇 몇 작품에서는 약간 모자란 역할을 연기하기도 했는데 조민수와 호흡을 맞춘 MBC 특집극 [[미끼와 고삐]][* 조선작의 원작이지만 윤미라가 나온 TV 문학관판과 다르게 완전히 코믹 시트콤화 되었다. 장모님을 조민수인줄 알고 '''까꿍'''하는 장면은 2011년이라면 플짤로 돌만한 개그.]도 그렇고 심지어 영화 [[그놈 목소리]]에서는 어리숙한 서민적인 형사로 등장해 '''나체'''를 선보였다.
- 김창규 (작가) . . . . 2회 일치
작가로서는 [[1984년]]《분단시대》동인지로 등단하고 1985년《창작과 비평》16인신작시집에《그대가 밟고 가는 모든 길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한국작가회의|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충북작가회의를 만들었고 충북민예총을 건설하였으며 회장과 부지회장을 지냈다.
그밖에 문화운동연합 사무국장을 지냈고 민족문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NCC총무를 지냈고 인권위원회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 박정민(배우) . . . . 2회 일치
||<#4682b4> {{{#white '''학력'''}}} ||<(> 중탑초등학교[br][[하탑중학교]][br][[공주]] [[한일고등학교]][br][[고려대학교]] 인문학부(중퇴)[* 부모님께서 연기하는 꿈을 반대하셨지만 본인은 연기를 너무나도 하고 싶어했었다, 그리고 2005년도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했지만 자퇴 후 반수 끝으로 다음해(2006년)에 [[한예종]]에 입학하였다. 본인은 꿈을 위해서 들어간게 맞다고 보면 된다.][* 물론 [[고려대]]는 좋은 대학이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본인이 있을 곳까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하였다.][* 물론 한예종,고려대 외에도 한국외대, 서울대, 중앙대도 원서작성했으나, 한예종과 서울대는 광탈하고, 나머지는 예비가 나왔다, 하지만 고려대만 [[추가합격]]해서 꼴등으로 입학하고, 자퇴했다][* 대학 자체를 아예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br][[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 ->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 학사[* 전과했다.] ||
당초 인문학부로 입학했었고 평소에 책을 좋아해서 그런지 <탑클래스>라는 매거진에서 <언희>라는 필명을 쓰고 '박정민의 언희'라는 칼럼을 무려 4년여 동안 연재했다.[[http://topclass.chosun.com/client/search/DB_Search.asp?sid=-1&page=1&KeyWord=%BE%F0%C8%F1&B1.x=0&B1.y=0|링크]] 그 후 이 때 쓴 글을 묶어 책으로 출판을 했으며, 제목은 <쓸 만한 인간>. 그 후 저자 사인회도 했다고 했으며 출간 20일 만에 3쇄를 했다고 한다.[* 2014년에 [[예비군 훈련|예비군]] 끝난 군필 배우라는 이야기도 나온다.[[http://topclass.chosun.com/mobile/board/view.asp?tnu=201412100015&catecode=J&cpage=1|링크]]]
- 백남억 . . . . 2회 일치
1914년 11월 11일 [[경상북도]] [[김천시|김천군]]에서 태어났다.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고려대학교/학부/법과대학|법과]]를 1936년에 졸업하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1939년 [[큐슈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다.
- 백일섭 . . . . 2회 일치
| 학력 =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 [[명지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 서거정 . . . . 2회 일치
여섯 왕을 섬겨 45년간 조정에 봉사하였고, 시문을 비롯한 문장과 글씨에도 능했으며, 시화(詩話)의 백미인《[[동문선]](同文選)》과 설화집인 《[[필원잡기]](同文選)》 등을 남겨 [[신라]] 이래 조선 초에 이르는 시문과 산문 문학을 집성했다.
문학 이외에도 여러 방면에 통달하여 세조 때 《[[경국대전]]》, 성종 때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책]]의 편찬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또한 왕명으로 《[[향약집성방]]》을 한글로 번역했다.
- 서도영 . . . . 2회 일치
|2008||KBS1||[[KBS TV 문학관|KBS HDTV 문학관]] - 봄, 봄봄||경호||
- 서명선 . . . . 2회 일치
| 직업 = [[문신 (관료)|문관]], [[정치가]], [[시 (문학)|시인]]
[[영의정]]과 중추부영사를 지낸 그는 [[조선 영조|영조]] 임금 때와 [[조선 정조|정조]] 임금 때의 원로대신 가운데 한 사람이며 [[시 (문학)|시인]]으로도 활약하였다.
- 손지민 . . . . 2회 일치
| 학력 =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심양홍 . . . . 2회 일치
||학력||[[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서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군사관학교]]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따라서 [[이순재]], [[신영균(배우)|신영균]] 등과 같이 고학력 [[배우]]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이순재[* 이순재는 심양홍의 서울고 선배며 서울고 출신 탤런트로는 [[박용식]]이 있다.], 신영균, 심양홍 등은 서울대학교 연극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었다.
- 오태영 (1948년) . . . . 2회 일치
[[1974년]] [[서울예술대학]] 연극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보행연습》이라는 작품이 중앙일보 문예희곡부문에 당선된다. [[1979년]] 한국 희곡 작가 협회상을 수상하고, [[1980년대]]는 극단 76에서 활동하였다. 1987년 희곡집 《바람앞에 등을 들고》, 《전쟁》을 출판하였다. 《전쟁》은 제 32회 현대 문학 희곡 부문상을 받았다.
[[분류:1948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민국의 작가]][[분류:서울예술대학 동문]][[분류:현대문학상 수상자]]
- 오현근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08년 한국프로야구|2008년]] [[9월 30일]] <br /> [[문학야구장|문학]] 대 [[롯데 자이언츠|롯데]] 전
- 유인촌 . . . . 2회 일치
* 유인촌 장관에 대한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글[[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5311.html|#]]
* [[문학구장]]에서 개막전 시구를 두 차례 한 적이 있다.(2008, 2009) 2008년에는 날씨 때문에 관중이 적긴 했지만 반응이 나쁘지 않았던 것에 비해 2009년에는 만원 관중들에게 엄청난 야유를 받았다. 왜냐면 아래의 찍지마 X발 때문에...
- 윤태동 . . . . 2회 일치
[[1900년]] 5월 13일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25년]] [[일본]]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고등농림학교]], [[보성전문학교]],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등에서 강사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수로 근무하였다. [[1934년]] 7월에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임명되어 그해 11월까지 근무하였다. 조선인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된 것은 윤태동이 3번째이며, 전 기간을 통틀어 4명에 불과하다.
- 이계순 (1927년) . . . . 2회 일치
'''이계순'''(李季順, [[1927년]] [[3월 3일]] - )은 [[대한민국]]의 영문학자, 교육자, 대학교수, 정치인이다. [[1953년]] [[경남중학교]] 영어교사를 시작으로 서울대학교 교수와 명예교수, 정무제2장관을 역임했다. [[1990년]] 정무제2장관 재직 중 ‘국·공립 연수기관에 여성관련 교과목’을 개설하였다.
[[분류:192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영문학자]][[분류:대한민국의 여성주의자]][[분류:여자 정치인]][[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의 정무제2장관]][[분류:교토 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득을 준 배신자를 처단하기 . . . . 2회 일치
실제 역사에서 유사한 사례가 있어왔던, 문학작품, 역사의 [[클리셰]].
=== 문학 ===
- 이상훈 (1987년)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0년]] [[7월 13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대타
- 이영욱 (1980년) . . . . 2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3년]] [[9월 28일]]<br />[[문학야구장|문학]] 대 [[KIA 타이거즈|KIA]]전 구원
- 이장훈(배우) . . . . 2회 일치
1972년 경상북도 김천시 교동 부거리길에서 태어난 이장훈은 연극, 뮤지컬,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 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관객을 압도하는 카멜레온 같은 배우이다. 가족 뮤지컬《피노키오》부터 미스터리 영화《물고기》, 그리고 코믹적인 요소가 가득 담긴 드라마《푸른거탑》까지, 탁월한 집중력과 진짜인지 연기인지 모를만큼 훌륭한 연기력으로 어떤 배역이든 맛있게 소화해 낸다는 평을 받고 있다. 현재는 서울호서예술전문학교 연기예술학부의 교수직을 맡고 있으며, 기절 전문 대대장 이장훈 역할로 [[tvN]] 《[[푸른거탑]]》에서도 맹활약하였다.
* 호서예술전문학교 출강
- 이정명 . . . . 2회 일치
| 학력 = [[경복중학교]]<br />[[영신고등학교 (대구)|영신고등학교]]<br />[[경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이정명'''은 대한민국의 소설가이다. [[경북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잡지사와 신문사 기자로 여러 해 일하다 1997년 첫 소설 '천년 후에'를 완성, 1999년 발표했다. 이후 [[뿌리깊은 나무 (2011년 드라마)|뿌리깊은 나무]], [[바람의 화원 (드라마)|바람의 화원]] 등이 드라마화되며 인기를 끌었다.<ref>[http://ch.yes24.com/Article/View/14419 역사소설은 위대하고 재미있는 오답이다 - '바람의 화원'의 이정명] YES24, 2008년 10월 10일</ref><ref>[http://webzine.knu.ac.kr/wz3/mobile/pages/02.htm?VOL=159&mode=view 소설가 이정명 동문] 경북대웹진, 159호</ref>
- 이종혁 (야구선수)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8월 12일]] <br /> [[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 이헌일 . . . . 2회 일치
* 1940년 2월, [[연세대학교|경성 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사]].
[[분류:1917년 태어남]][[분류:1979년 죽음]][[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연희전문학교 동문]][[분류:연세대학교 문과대학 동문]][[분류:육군 장교]][[분류:국방대학교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주 이씨]][[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김구]][[분류:이범석 (1900년)]][[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분류:광복군]][[분류: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분류:한국독립당]][[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장덕균 . . . . 2회 일치
* [[명지대학교]] 국문학과 국문학 학사
- 장우석 . . . . 2회 일치
*경북산업정보전문학교 웹멀티미디어과정 수료 (3기)
[[197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나(음력 [[1976년]] 11월 20일) [[영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후 경북산업정보전문학교 웹멀티미디어과정 3기를 수료했다.
- 장윤진 . . . . 2회 일치
|학력 =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 학력: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Evanston Township High school
- 장윤희 (미스코리아) . . . . 2회 일치
|학력=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학력: [[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전인환 . . . . 2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8년]] [[9월 25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 전태일 . . . . 2회 일치
[[1972년]] 기독청년 전태일 1주기 추도식으로 시작된 이래 1980년대에 와서 노동운동가 전태일 추도식으로 제목이 바뀌었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유언에 따라 사망직전까지 청계천 노조 지원과 노동 운동 지원에 헌신하여 노동자들의 어머니 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다. [[1984년]] [[서울]]에서 노동운동가들 중심으로 전태일기념사업회가 조직되었고, [[1985년]] 전태일기념관이 개관하였다. 이후 전태일재단이 조직되어 '전태일문학상'과 '전태일노동상'을 제정하여 수여하기 시작하였다. [[1987년]] [[6.10 항쟁]] 이후 노동단체들이 모여 그해 [[7월]]부터 [[8월]]까지 노동자 대회를 열었으며 7월 15일에는 그의 어록, 초안 등을 참고하여 '87 노동자계급 해방선언'이 개최되었다. [[1988년]] [[11월]] 전태일의 분신 자살을 기념하기 위한 '전태일 정신 계승 전국 노동자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어 매년 [[11월]] 전국 노동자대회가 열리고 있다. [[2002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에서 전태일을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승인하였다. [[1996년]] 9월 19일에는 서울 중구 을지로6가에서 '전태일 거리'를 선포하였고, 이를 기념하여 민예총 회원들이 전태일 열사가 분신하고 있는 모습을담은 걸개그림 앞에서 추모공연을 하였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92000289120003&edtNo=6&printCount=1&publishDate=1996-09-20&officeId=00028&pageNo=20&printNo=2680&publishType=00010 한겨레 1996,09.20]</ref> 이 '전태일 거리'에서는 전태일을 추모하기 위한 '전태일 거리문화제'가 진행되고 있다. 1999년부터는 민주열사를 비롯해 의롭게 숨진 시민의 기념표석을 세우는 서울시'유적지 사업'에 포함되어 평화시장 분신장소에 기념표석이 세워졌다. 하지만 2003년 청계천 복원공사로 철거되기도 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0043117 전태일 동판 철거 ‘물의’ 경향신문, 2003.12.01]</ref>
* 김종찬, 《불의 기록, 피의 기록, 죽음의 기록》 (실천문학사, 1988)
- 주장환 . . . . 2회 일치
'''주장환'''(1957년 1월 1일 ~ )은 대한민국의 신문기자, [[소설가]]이다. 서울신문(스포츠서울) 세계일보 기자를 거쳐 파이낸셜뉴스 논설위원을 역임했다. 중소기업사랑 청소년글짓기 공모전 심사위원장, 대한민국장애인예술대상 문학부문 심사위원, 충효예실천운동 본부 상임위원,부총재 [[731부대]] 한국인 희생자 진상규명위원회 대변인을 거쳐 [[극동대학교]] 겸임교수를 지냈다. 하버드대학 Literati China 과정 수료. 월간조선 객원기자
소설 '사바카' '그 바닷가 헛간은 따스했다' '겨울새 물살털기' '퇴계 이황' 등이 있으며 시집 '내마음 속에 사랑의 집 한 채' 교양서 '논어와의 대화' '참사랑의 길' '레오나르도다빈치와 함께 하는 논술,NIE' '로즈여사에게 배우는 특별한 자녀양육법 26' '노벨문학상 소프트' 등과 '배짱으로 살아라' '사랑을 주는데에도 용기가 필요합니다'등 다수의 번역서가 있다.
- 진구 . . . . 2회 일치
| [[KBS TV 문학관|KBS HDTV 문학관]]
- 진헌식 . . . . 2회 일치
1902년 [[충청남도]] 연기군 (현 [[세종특별자치시]])에서 태어났다. [[양정고등학교(서울)|양정고등보통학교]], [[일본]] [[주오 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및 모교인 양정고등보통학교에서 [[강사]]로 근무하였다.
- 채윤아 . . . . 2회 일치
|학력 = [[경희대학교]] 인문학부
* [[2002년]] ~ [[2006년]] : [[경희대학교]] 인문학부 학사(2002학번)
- 책표지 . . . . 2회 일치
* 미 워싱턴 대의 천문학 박사학위 지원생 제임스 데이븐포트(James R.A.. Davenport)는 지난 2000년에서 2012년 까지 베스트셀러들을 모아 시각화 하는 작업을 하였다. 이 결과 데이터를 응용하여 평균적인 베스트셀러의 색을 만들어내고, 색에 이름도 붙였는데 ‘베스트셀러 브라운’(Bestseller Brown). RGB 값은 127, 112, 101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1304.html 기사]
* 색상을 도출하는 방법은 2002년, 미 존슨홉킨스 대 천문학팀이 '우주의 색'을 정하는데 사용한 방식을 본떴다. 이 연구팀은 20만개 이상의 은하에 대한 자료를 토대로, 별들이 내는 빛의 색을 평균으로 만들었다. 이 색상의 이름은 ‘코스믹 라떼’(Cosmic Latte)이며, RGB값은 255, 248, 231이다.[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61304.html 기사]
- 청송군 . . . . 2회 일치
'''[[주왕산]] [[국립공원]]''', 주산지, 송소고택, 청송문화관광재단의 청송백자 전시관과 심수관 도예전시관이 있으며, 청송문화관광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민예촌에서 한옥숙박체험도 가능하다. 또한 인근의 청송 달기약수탕 부근에 장난끼공화국 달빛예술학교에서 각종 체험 및 플리마켓등을 체험 할 수 있다.또한 지역의 전통문화유물인 청송백자,소설가 김주영선생의 소설 객주를 모티브로 한 객주문학관, 야송이원좌선생이 운영하고 있는 군림청송야송미술관과 위장병과 관절에 좋은 약수가 나오고 있는 달기약수, 신촌약수터 등이 있다.
* [[이오덕]](1925~2003) : 아동문학가, 소설가
- 최덕희 . . . . 2회 일치
* [[EBS 라디오 문학관 - 사랑 손님과 어머니]] (EBS) - 옥희
* [[EBS 라디오 문학관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EBS) - 영희
- 최동수 (야구인) . . . . 2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3년]] [[3월 31일]] <br /> [[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 최성관 (1925년) . . . . 2회 일치
| 학력 = [[국학대학]] 국문학과 졸업
[[1925년]] [[9월 5일]]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국학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7년]] 《선화 공주》를 감독하였다. 감독활동은 1959년 《남의 속도 모르고》, 1962년 <태양(太陽)을 등진 사람들>로 이어졌다. 김근자, 박귀희 주연의 <선화공주>는 흑백영화로 일관되다시피한 당시에 16미리이기는 했으나 모처럼 천연색 필름으로 촬영하여 큰 관심을 끌었다. 이는 홍성기 감독이 <여성의 일기>(1949)로 색채 화면을 선보인 이후 두 번째의 시도였다. 그는 배우로도 활동했다. [[1999년]] [[7월 19일]] 별세하였다.
- 최원제 . . . . 2회 일치
|마지막 경기 = [[KBO (야구)|KBO]] / [[2018년]] [[10월 9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대타
- 최정호 (성우) . . . . 2회 일치
* [http://www.kbs.co.kr/radio/scr/library/aod/aod/index.html 라디오 문학관] - '''[[라디오 문학관]] ([[KBS 한민족 방송]])'''
- 카타르시스 . . . . 2회 일치
카타르시스는 그리스어 katharsis에서 나온 단어이다. 이 단어는 그리스어에서 정화(淨化)를 뜻한다. 영어권에서는 문학과 정신분석학에서 주로 사용된다.
== 문학 ==
- 페어리 테일/545화 . . . . 2회 일치
* 모든 것을 끝낸 전쟁 뒤 1년이 지난 X793년. [[루시 하트필리아]]가 문학상을 수상하는 경사가 생긴다.
* 전쟁으로부터 1년이 지난 X793년의 어느 밤. 많은 일들이 있던 끝에 [[루시 하트필리아]]가 꿈꾸던 일이 이루어졌다. 언젠가는 좋은 작가가 되고 싶다던 꿈. 오늘은 그녀가 "이리스의 모험"이란 소설로 캠 자레온 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는 날이었다. 루시는 신인상 트로피를 안은 채 많은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 표민수 . . . . 2회 일치
|학력 =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학사
[[본관]]은 [[신창 표씨|신창(新昌)]]이며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학사]] 졸업하였고,<ref>[http://people.nate.com/people/info/py/om/pyominsoo 네이트 인물검색]</ref> [[1991년]] 공채를 통해 [[KBS]] 드라마 제작국 PD로 입사하였다.<ref>[http://movie.daum.net/movieperson/Biography.do?personId=117442&t__nil_main_introduce=more 다음 영화 인물 정보]</ref> 1991년부터 2001년까지 KBS 드라마 제작국 프로듀서로 근무하였고, 퇴사 이후 프리랜서 PD로 활동하고 있다.
- 하현우 . . . . 2회 일치
그러나 무작정 약 빤 느낌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도구라고 치부하기는 어려운 것이, 표현의 문학성이 상당한 데다가 팬들 사이에서 가사 해석의 시도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그렇게 나온 다면적인 해석들이 또 설득력을 띠는 경우가 많기 때문. 국카스텐의 모든 곡, 특히 2집 앨범 수록곡들의 가사에 대한 하현우의 설명(해석이 아님)을 보고 나면 소재를 따온 방식, 담고 있는 의미, 뛰어난 비유에 감탄하게 된다. 주로 불완전하고 위태로운 사물의 이미지나 신체 기관에 자아를 투영하거나(1집), 자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나 상황을 성찰하는 것(2집)이 큰 테마를 이루는데, 어휘 선택과 연출에서 한때 시인을 꿈꿨던 사람답다는 생각이 들 정도. 실제로 여러 장에 걸쳐서 메모한 노트를 줄이고 줄인 결과가 한 곡의 가사라고 하니까, 무의미한 단어의 연결이 아니라 의미가 압축되어 있다고 보는 게 맞는 것 같다. 모르겠는데 알 것 같은 이 의미의 모호함이 팬들 사이에서 수많은 2차 창작물(캘리그라피, 일러스트, 문학 등)을 양산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2집부터는 가사 난이도가 하향 조정되고 전체적인 색깔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는 평도 있다.
- 한비야 . . . . 2회 일치
| 학력 = [[숭의여자고등학교]]<br />[[홍익대학교]] 영문학과<br />[[유타대학교]] 대학원 국제홍보학과<br />[[터프츠대학교]] 플레처스쿨 인도적 지원학 석사
한비야는 1986년 홍익대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1989년 미국 유타 주에 있는 유타대학 대학원에서 국제홍보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국제구호활동을 시작한 이후에는 2008년 현직 구호활동가들을 재교육하는 IDHA 과정을 수료했고, 2010년에는 미국 터프츠대학(Tufts University) 플레처스쿨(Fletcher School)에서 인도적 지원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아아
- 한선교 . . . . 2회 일치
| 학력 =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문학 석사
* 2012년 :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문학 석사
- 함화진 . . . . 2회 일치
한편 [[1912년]]부터 조선정악전습소의 가야금 교사로 재직했고, [[1931년]]부터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국악이론과 거문고, 가야금, 양금 등 실기를 가르쳤다. [[1930년대]]에는 [[편경]]과 [[편종]]을 제작하고 [[처용무]]를 재현하는 등 국악 전통의 복구와 보존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
[[분류:1884년 태어남]][[분류:1948년 죽음]][[분류:양근 함씨]][[분류:일제 강점기의 국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국악인]]
- 현제명 . . . . 2회 일치
대구 대남국민학교와 [[계성고등학교|계성학교]]를 다녔고, 대구에 있는 제일교회에 들어가 교회 성가대에 입대하여 음악단원이 되었다. 이후 숭실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음악 교육을 받았고 1923년에 졸업한 후 [[전라북도]] [[전주시|전주]]에서 신흥학교의 음악 교사로 활동했다.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 있는 기독계 무디성경학교에서 음악 교육을 이수하고, 귀국한 뒤에는 조선음악가협회를 창설하고 연희전문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그 후 [[조선총독부]] 학무국이 주관한 조선문예회 정회원으로 가입하다가, 독립 계몽단체인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친일 성향 단체인 대동민우회의 정회원으로 가입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총독부의 내선일체 정책의 일환으로 조선음악가협회를 해체하고 이후에도 시국대응전선보국연맹, 조선음악협회, 경성후생실내악단 등에도 가입하면서 친일 행위를 하였던 전적이 드러나게 되었으며, 특히 친일 찬양적인 성향의 '''[[후지산]]을 바라보며'''에 작곡자로 개입하면서 친일 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 홍명희 . . . . 2회 일치
[[한국]]의 [[소설가]],독립운동가, 민족운동가, 월북 [[북한]] 정치인. 호는 벽초(碧初)[* 뜻은 "[[에스페란토|푸른빛(碧)의 말]]을 처음으로(初) 배운 [[한국인]]". 에스페란토을 상징하는 색이 초록색이라 그렇다.]이다. 춘원 [[이광수(소설가)|이광수]], 육당 [[최남선]]과 더불어 '''일제강점기 [[조선]] 3대 [[천재]]'''로 알려진[* 참고로 말하는데, 이 3대 천재라는 것은 대개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홍명회, 이광수, 최남선은 같은 시기에 동경유학을 하였고, 양건식과 신형철들이 이들을 동경삼재라고 불렀다. 동경에서 유학하고 있는 유학생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이란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잡지 소년에 함께 글을 기고하면서 동경삼재라는 이름은 (일제시대하) 조선삼재로 변했다. 이들은 모두 문인으로, 문학계에서 칭찬 삼아서 붙여준 별명이었던 것 같다. 다만 명칭이 이런 식이라서 그럼 왜 세종대왕이나 정약용 대신에 이런 인물들이 있느냐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다.][* [[여담]]으로 이 3대천재 드립은 전부 다 홍명희 관련으로 나왔다. 현대에 이 언급을 한 것도 홍명희 평전이었고, 조선삼재 이야기도 홍명희와 [[현상윤]]이 나눈 1940년대 인터뷰에서 나왔다.] 인물로 실제로 이 셋은 죽마고우였으나 앞의 둘은 반민족행위자로 변절한 데 비해서 홍명희는 변절하지 않지만 월북하여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언급하기를 꺼려했다. 이광수의 친일 행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와 친교를 유지했고, 훗날 [[한국전쟁]] 당시 춘원이 납북되자 그의 신변을 보호했으며 그가 폐결핵으로 사경을 헤매자 병원으로 이송까지 할 정도로 막역했다고 한다. 다만 이렇게 친한 만큼 매섭게 이광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야사에서는 이광수가 친일파로 변절하자 홍명희는 이광수의 집 대문 앞에 음식상을 차리곤 곡을 하기 시작했다. 놀란 이광수가 나와서 연유를 묻자 홍명희는 "내 친구 춘원(이광수의 호)이 그만 죽고 말아서 이렇게 곡을 하며 슬퍼하고 있소."라고 대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 비슷한 이야기가 꽤 많다. [[최남선]]과 [[정인보]], 최남선과 정인보의 스승인 승려 석전 박한영 간에도 있다. 최남선이 변절한 뒤 정인보(또는 스승 박한영)를 만나자 "나에게 최남선은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이오."하고 헤어졌다는 야사.]
해방 뒤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을 역임하다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조직했고 여운형 암살 후 지도자가 되기도 했으나 환경과 리더십의 부족으로 실패했다. 결국 이후 월북했다. 월북 계기는 1948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한 제정당ㆍ사회단체 연석회의’에 [[김구]] 등과 함께 참석했다가 북한에 남았다. 그의 월북 동기에는 '친일파들과 결탁하여 단독정부 수립운동을 강행추진하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실망감'이 컸다는 견해가 있다. ~~근데 [[김일성]] 정권도 핵심 실무인력에서는 친일 청산 안했잖아?~~
- 황경태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7월 19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 황덕균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3년]] [[9월 8일]] <br /> [[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 황수범 . . . . 2회 일치
|첫 출장 = [[KBO (야구)|KBO]] / [[2017년]] [[5월 18일]]<br>[[문학야구장|문학]] 대 [[SK 와이번스|SK]]전 구원
- 황종률 (정치인) . . . . 2회 일치
[[한성부]] 출신이다. [[일본]]에 유학하여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하였고, [[만주국]] [[대동학원]]을 거친 뒤 뒤 만주국에서 관리로 근무했다.<ref>{{서적 인용
* 1935년 : 규슈 제국대학 법문학부 졸업
- 황치열 . . . . 2회 일치
| 학력 = [[한국폴리텍6대학]] 구미캠퍼스 기계공학과 전문학사
* [[한국폴리텍6대학]] 구미캠퍼스 기계공학과 전문학사
- 감정없는 존재 . . . . 1회 일치
어찌보면 [[장르문학]]에 있어선 [[오즈의 마법사]]처럼 이성과 감성이 일부 결핍되어 있는 캐릭터들이 등장하고, 이런 등장인물들이 보여주는 모습이 확장되어가며 정립된 캐릭터성으로 볼 수도 있다.
- 강재형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1982년]] ~ [[1986년]] :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 강중인 . . . . 1회 일치
[[경상북도]] 출신으로 [[1935년]]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1938년]]에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검사국 사법관시보가 된 것을 시작으로 법조계에서 근무를 시작했다.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67화 . . . . 1회 일치
* 에비나 나나는 전문학교에 진학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 고성국 . . . . 1회 일치
* 《한국정치의 구조와 진로》(공저), 실천문학사, 1990<ref>http://books.google.com/books/about/%ED%95%9C%EA%B5%AD%EC%A0%95%EC%B9%98%EC%9D%98%EA%B5%AC%EC%A1%B0%EC%99%80%EC%A7%84%EB%A1%9C.html?id=NRQhHAAACAAJ</ref>
- 고현정(미스코리아) . . . . 1회 일치
||<#9A7CA7> {{{#FFFFFF '''학력'''}}} ||<(> [[동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학사)[br][[고려대학교|고려대학교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석사과정 중퇴) ||
- 곽성문 . . . . 1회 일치
[[분류:1952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기자]][[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문화방송의 직원]][[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중학교 동문]][[분류:대구교육대학교 대구부설초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선진통일당의 정치인]][[분류:자유한국당의 정치인]][[분류:현풍 곽씨]][[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
- 광언 . . . . 1회 일치
* 광언기어(狂言綺語) : [[불교]] 계에서 흥미위주로 과장하는 문학을 이치에 맞지 않다고 비난하는 표현.
- 구광본 . . . . 1회 일치
[[1986년]]《소설문학》신인상에 단편소설 〈검은 길〉이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고, [[1987년]]에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며 시집 《[[강 (시집)|강]]》을 펴냈다.
- 구승빈 . . . . 1회 일치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롤갤러이다. 롤챔스 스프링 2013 4강 승자 인터뷰에서 [[리그 오브 레전드 갤러리|롤갤]]을 언급하며 환상의 동물 드립을 쳤고 롤갤에서 고정닉으로 활동을 했었다. ~~하도 갤질을 한 모양인지 교장선생님이 롤갤을 막았다며 불평했다~~ SKT LTE LOL 마스터즈 2014 결승전 [[http://youtu.be/84BctoXktQY|캐치마인드 영상]]에선 상어드립을 치기도.. ~~야! 캐치마인드에는 이런 코미디가 필요하다고~~ 그리고 삼성과의 계약이 끝난 11월 1일 새벽 [[http://gall.dcinside.com/list.php?id=leagueoflegends1&no=7280594|롤갤에 글을 올렸다.]] ~~그리고 삼성으로 롤갤문학을 써달라고 했다~~ 롤갤에 대한 애정이 있는듯 만약 2015 롤드컵에서 잘 됐으면 롤갤 얘기를 했을거라고 이야기했다.
- 구자춘 . . . . 1회 일치
1963년 [[대령]]으로 예편하여 경찰로 근무하여, 치안국(현 경찰청) 정보과장, 서울시경(현 서울지방경찰청) 국장, 경찰전문학교 교장 등을 지냈다. 뒤이어서 제주도지사, 수산청장, 경상북도지사를 차례로 맡았다.
- 권혁 . . . . 1회 일치
좌완 중계로서 권혁의 역할은 삼성내에서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146015=|선감독 왈 '유일무이']]라고 불리운 그는, 10월 16일 [[문학 야구장]]에서 열린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 시리즈 2차전, 팀이 스코어 1:3으로 지던 8회초에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첫 타자이자 7번타자인 [[박정권]]을 7구까지 가는 승부 끝에 삼진으로 잡아냈지만, 다음 타자 [[박경완]]을 상대로 홈런을 맞았다. 이 피홈런 때문에 또 다시 멘탈이 붕괴했는지, 다음 타자인 [[나주환]]에게 스트레이트 볼넷을 허용하고 [[정인욱]]으로 교체되었다. 권혁의 한계라고 보기엔 2010시즌 자체의 그의 성적은 그렇지 않았기에 삼성 선수단과 삼성팬들로서는 이해가 안 될 뿐이었다. 이날 권혁은 ⅓이닝 16투구수 1피안타 1피홈런 1볼넷 1실점(1자책)을 기록했고, 팀은 스코어 1:4로 패했다.
- 그레이터 데몬 양식 . . . . 1회 일치
[[위저드리 1]]의 비법. 마법이 봉쇄된 그레이터 데몬이 동료를 부를 경우, 불려온 그레이터 데몬 역시 마법이 봉쇄된 상태라는 것을 이용하는 비법이다. 그레이터 데몬은 전체공격 마법을 사용하는 무서운 적이지만, 마법이 봉쇄된 상태에서는 크게 무섭지 않기 때문. 의도적으로 그레이터 데몬의 마법을 봉쇄한 다음 계속 동료를 부르게 하고 계속 죽여나가면 비교적 안정적으로 천문학적인 경험치를 얻을 수 있다.
- 김국진(MC) . . . . 1회 일치
|| '''학력''' ||<(> 강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
- 김규철(배우) . . . . 1회 일치
* 2009년 KBS 연기대상 특집 문학관 남자 단막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 김기섭 (1939년) . . . . 1회 일치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김녕 김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호텔 경영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김영삼]][[분류:김영삼 정부]][[분류:대한민국의 국가안전기획부 차장]][[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
- 김동석 . . . . 1회 일치
1903년 [[경상북도]] [[선산]][[군(행정구역)|군]] 선산면 동부리(현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안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협성학교에 재학하다 중퇴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 외국어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 김동한 (1919년) . . . . 1회 일치
| 기타 이력 = 1940년 [[대구가톨릭대학교|경상북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전문학사 출신 <br /> 1956년 [[국방대학교|대한민국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1기 출신 <br/> [[성직자]], [[천주교]] [[사제]], [[수필|수필가]], [[군인]] <br/> [[신민당 (1967년)|신민당]] 국가보건행정특보위원(1975년) <br /> [[한국가톨릭결핵시설연합회]] 회장
- 김륵 . . . . 1회 일치
[[1540년]] [[경상북도]] [[영천시]] 에서 태어났다. [[조선 세종|세종]] 때의 천문학자 [[문절공 김담]]의 4대손으로, 증조부 김만칭(金萬秤), 조부 김우(金佑)에 이르기까지 별다른 관직에 오르지 못했고, 김우는 사후 [[증직|증]] [[승정원]][[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생부 김사명(金士明)은 생원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유생으로 수학한 성균관 생원(成均館生員)이었다.
- 김병기(배우) . . . . 1회 일치
* [[2006년]] [[KBS1]] 단막극 《[[HD TV문학관]] - 등신불》 ... 청지기 역
- 김병윤 . . . . 1회 일치
1922년 [[경상북도]] 영일군(현 [[포항시]])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전문학교(현 [[긴키]]대학교) 법과를 중퇴하고 포항수산대학(현 [[포항대학교]]) 증식학과를 졸업하였다.
- 김부식 . . . . 1회 일치
{{인용문|《삼국사기》는 합리적인 유교사관에 입각하여 씌어진 사서로 이전의 신이적(神異的)인 고대 사학에서 한 단계 발전한 사서|{{서적 인용|저자=[[이기백]]|장=문학과 지성 (文學과 知性)|제목=《[[삼국사기론]](三國事記論)》|연도=[[1978년]]}}}}
- 김선재 (아나운서) . . . . 1회 일치
* [[서울대학교]] 자유전공학부 학사 (외교학·서어서문학)
- 김성겸(탤런트) . . . . 1회 일치
|| '''학력'''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 김인철 . . . . 1회 일치
2005 시즌은 대타요원으로 시즌을 시작하였는데 1호포를 대타홈런으로 때려낸 것을 시작으로 개막 후 4월 한달동안 6홈런을 때리며 잠깐 홈런 1위를 한 적도 있을 정도. 이 활약으로 톱타자로 선발출장하기도 했는데 이후 페이스가 떨어져서 두 자리수 홈런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이땐 철밥통 소리 들을 정도로 썼던 것도 아니고 대타요원으로 시작했다가 자기가 잘해서 주전을 꿰찼던 거라 그리 욕 먹지도 않았는데 이 때 이후로 성적이 하락하여 2006년~2007년에는 신인 외야수들의 앞길을 막는 존재로 인식되어 이도형 등과 함께 한화팬들에게 김인식의 양아들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었다. 그 와중에 문학서 끝내기패의 원흉이 되기도 했는데 연장전에 들어가고 SK의 공격때 주자 1루에서 히트앤드런이 걸렸고 1사 1,3루의 위기가 될 상황이었는데 좌익수이던 김인철이 포구후 바로 송구를 하지 않고 머뭇거리던 틈을 타 3루주자인 정근우가 홈을 파고 어이없게 끝내기 패배(즉 1사 1루에서 힛앤런이 걸렸는데 단타로 1루주자가 홈까지 접전상황도 만들지 않고 홈으로 들어와 경기가 끝나버린 상황이다)를 당해버렸었다. 그거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2007 시즌이 끝난 후 방출되었다.
- 김준영 (프로게이머) . . . . 1회 일치
* 김준영은 학창 시절 문학 과목에서 전교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학업 성적도 우수한 모범생이었으나,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고, 당장 돈을 벌 수 있었던 [[프로게이머]]의 길을 선택했다.
- 김현성(가수) . . . . 1회 일치
제물포고등학교40회 졸업생이다.[* [[김광진(가수)]]은 27회, [[지상렬]], [[김구라]], [[염경환]]은 33회다.] [[인하대학교]] 불어불문학 2학년 재학 중이던 1997년 제18회 [[강변가요제]]에서 '스톱'을 불러 금상을 받으면서 데뷔했다. 그후 [[김형석]]에게 스카우트 되면서 소원, 이해할께, heaven 등의 히트곡을 남겼으나 [[성대결절]]로 인해 한동안 음악활동을 하지 못했다. 블로그의 글이나 언론 인터뷰 등에서 이야기한 것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 연예계를 은퇴했으며 이후 여행 및 저술 활동등을 하며 지냈다고 한다. 참고로 [[2015년]] 기준 미혼이라고...
- 김형기 (법조인) . . . . 1회 일치
1927년 [[대구광역시]]에서 태어난 김형기는 [[경복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고 1955년 제7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해 1960년 대구지방법원 판사에 임용되었다. 문학과 고서화에 높은 안목을 가지고 있던 김형기는 서울형사지방법원, 서울민사지방법원,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부장판사를 하다가 1981년에 임명된 서울형사지방법원장에 임명되었다. 법원장으로 재직하다가 [[김중서]]의 정년 퇴임으로 공적이 된 대법원 판사에 1984년 7월 20일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었다.<ref>매일경제 1984년 7월 17일자 동아일보 1984년 7월 18일자</ref>
- 김혜옥 . . . . 1회 일치
* [[서울예술대학교|서울예술전문대학]] 연극학과 전문학사
- 김홍미 . . . . 1회 일치
탈상 후 [[1595년]] [[9월]]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가,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교리 겸 [[시강원]]문학(校理兼侍講院文學)을 거쳐 그 다음해 [[경연관]]에 임명되었으며, [[경연관]]으로 《[[주역]]》의 [[경연]]을 맡아보았다. 그때 마침 [[조선 선조|선조]]가 《주역 (周易)》을 강론하기 앞서 경학(經學)에 정통한 선비를 선발하여 경연의 강관(講官)을 충원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 그가 경연에서의 강론에 고전의 의리를 인용하여 정밀하게 분석하였으며, 가끔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예로 들어 10여 줄을 연달아 외웠으므로, 임금이 싫증내지 않고 경청하면서 그가 박식하다고 거듭 칭찬하였다.
- 남명렬 . . . . 1회 일치
* [[2009년]] [[KBS 2TV|KBS2]] TV문학관 《언니의 폐경》 - 순길 역
- 남유진 . . . . 1회 일치
정작 당연히 기본으로 공공장소에 깔려야 하는 [[휴지]], 고작 한 롤에 '''500원'''이면 충분히 매입 가능한 이런 단순한 것들도 '''예산이 없다면서''' 제대로 지급 자체를 못하는 진풍경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박정희]] 기념 사업, [[새마을운동]] 관련 사업 같은, 후순위로 미뤄도 되는 일에는 [[구미시]] 한 해 예산(1조 1,000억 원 내외)의 25%에 가까운 2,600여억 원이라는 천문학적 비용을 3년 동안 써댔으면서 말이다.
- 단기대학 . . . . 1회 일치
미국의 주니어 컬리지, 혹은 커뮤니티 컬리지에 해당하며, 한국에서는 전문대에 해당. 물론 나라마다 특징이 있으므로 세세하게는 차이점이 있다. 비슷하게 전문대학과 비교되는 ‘전문학교’와 ‘단기대학’은 또 다른 것이므로…. 혼란스럽다.
- 단기선교 . . . . 1회 일치
* 잉여의 시선으로 본 공공성의 인문학 한신대 평화와공공성센터 총서 1,위기의 지구화 시대 청(소)년이 사는 법
- 도균 . . . . 1회 일치
* 2006년 월간 문학21 희곡부문 신인상
- 라이트노벨 . . . . 1회 일치
문학의 한 장르로, 말 그대로 가볍게 읽고 즐기는 것이 목적인 소비지향적인 [[소설]]을 뜻한다. 일본에서 만들어졌으며 최초의 라이트노벨은 몰라도 최근에는 주로 오타쿠들이 소비하는 소설로 여겨지고 있다. 장르의 특성상 러브코메디나 또는 전쟁물 등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내용들이 자주 보인다. 2000년대 중반~2010년대에는 국산 라이트노벨도 만들어졌으나 인기 저하 및 웹소설의 부흥으로 사실상 멸망했다고 보고 있으며, 여전히 시장에선 일본산 라이트노벨의 영향력이 크다. 또한, 작품들 중 인기있는 라이트노벨의 경우 코믹스나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 류종원 . . . . 1회 일치
* [[1999년]] [[KBS1]] 단막극 《[[TV문학관]] - 새》 ... 우일 역
- 문문 . . . . 1회 일치
비행운의 가사 중 '나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부분이 김애란의 소설집 '비행운'의 '너는 자라 겨우 내가 되겠지'라는 부분과 비슷하다며 표절 시비가 붙었었다. 제목도 똑같은 데다, 노래의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아 반박의 여지가 적다는 의견이 많다. 다만 가사 전체나 노래 자체가 표절된 것은 아니고 한 소절을 변형한지라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고 [[오마주]]나 [[패러디]]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소설이나 인문학계에서는 존경하는 이의 글에서 이름을 따온 뒤 구절이나 가장 마음에 들었던 부분의 단어 위치를 재배열하거나 변경함으로 존경을 표하기도 한다. 이 경우는 문장 구성은 같지만 주로 [[주어]]를 바꾼다. 하지만 존경의 의미로 인용했다면 허락을 구하는 건 당연한 자세다. 진정으로 존경해서 인용한 건지 의문.] [[http://entertain.naver.com/read?oid=001&aid=0009774327|인터뷰]]에서 위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음원 발매 사전에 김애란 작가에게 허락을 받지 않은 상황이였고 문제가 된 후 김애란 작가에게 허락을 구했다고 답했다. 논란이 터지기 전엔 인스타로 악플러의 덧글을 캡쳐해서 저격했다가 논란이 되고나서야 삭제하고 사과문을 올렸다.
- 문호근 . . . . 1회 일치
[[분류:심장질환으로 죽은 사람]][[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남평 문씨]][[분류:경기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음악대학 동문]][[분류:평화민주당 (1987년)]][[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21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독일에 거주한 대한민국인]][[분류:뮌헨 대학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영화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문익환]][[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
- 민도 . . . . 1회 일치
기원은 '이거다'라고 볼 만큼 확실하게 사용된 시점을 가늠하기 어렵다. 친일문학가인 김동인의 글에서도 민도라는 용례를 찾아볼 수 있을 만큼, 의외로 잘 안쓰는 단어지만 확실하게 과거에는 쓴 적도 있다. 박경리의 토지에서도 이 민도 언급이 있을 정도로 일제강점기와 해방을 전후한 시기에는 제국주의적 의미의 "계몽"과 상통되는 의미로 쓰였다. 이후의 자료에서는 '생활수준'이나 '경제력', '문명수준'을 뜻하는 말로 나오지만, 최근의 인터넷 자료에서는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의식에 대한 말로 쓰이는 것으로 나오는 사례가 많다. 21세기에서 보면 제국주의 시대의 의미로 돌아온 느낌으로 봐도 아주 틀리지는 않다.
- 바르나바 복음서 . . . . 1회 일치
일설에는 저자는 이슬람교도 출신으로, 스페인의 종교재판 전성기에 기독교로 강제로 개종하게 되었던 인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바르나바 복음서는 기독교의 이슬람교 박해에서, 일종의 종교적 '저항문학'으로서 저술되었다는 것이다.
- 박경석(1933) . . . . 1회 일치
[[대한민국]]의 [[군인]], [[시인(문학)|시인]], [[소설가]]이다. [[육군사관학교]] 생도2기 출신이다. [[대한민국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 박근혜 . . . . 1회 일치
* [[1987년]] [[중국 문화 대학]] 명예 문학 박사
- 박녹주 . . . . 1회 일치
[[송만갑]]과 그 제자 김정문에게서 소리를 배웠고, 그녀가 주장한 예술적인 기반 자체가 동편제였기 때문에 계보상으로 동편제 명창에 속하며, 20세기에 들어서 송만갑제 판소리의 전승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1964년]]에 처음 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될 때 남긴 녹음자료에도 송만갑제의 더늠[* 일종의 '마스터피스'와 같은 의미로 명창들이 새로 짜거나 과거의 것을 이어받아 방창한 대목을 말한다.]을 중심으로 하는 대목을 맡아서 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서는 송미경, 「판소리 춘향가의 중요무형문화재 지정 배경 및 지정자료 <춘향가>(1964)의 성격」, 『구비문학연구』 41, 2015 참조.] 그러나 실제로는 송만갑이나 김정문 이외에도 서편제의 김창환, 정정렬에게서도 소리를 배우는 등 사승 자체는 동편제나 서편제를 가리지 않고 배웠으며, 동편제 흥보가를 부르면서도 제비노정기 만큼은 서편제인 김창환의 소릿제로 부르고 있는 등, 동시대 여러 명창들과 마찬가지로 여러 유파를 겸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듯 하다. 다만 [[송만갑]]이나 정정렬 이외에도 동편제 명창인 박기홍, 유성준에게서도 배웠던 만큼 동편제의 소리 지향에 가까운 소릿제를 부르긴 하였다.
- 박상규(정치인) . . . . 1회 일치
1936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군]]에서 태어났다. 충주교현초등학교, 충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경기도에서 7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였다. 이후 다시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 재학하다가 대한민국 육군 병으로 병역의무를 이수하였다. 동국대학교 졸업 후 공무원 전환 시험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공무원으로서 정보 업무를 담당하였다. 1970년대부터는 한국비철금속 사장을 거쳐 한보금속공업을 경영하였다. 1992년부터 1995년까지 [[중소기업협동조합]] 중앙회장을 겸임하였다.
- 박상면(배우) . . . . 1회 일치
|| '''학력''' ||<(> 봉서초등학교(전학)→봉서초등학교 (졸업)[br]완주중학교(전북)(졸업)[br]완주고등학교(전북)(졸업)[br][[서울예술대학]] 연극과 (전문학사)[br][[단국대학교]] 연극영화과 ||
- 박준규(1925) . . . . 1회 일치
[[1925년]] 9월 12일 [[경상북도]] 달성군 하빈면 묘동(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하빈면 묘리)에서 출생하였다[* 일명 '묘골마을' 이라하는 순천박씨 집성촌. 현재 묘골에 있는 [[박팽년]] 등 [[사육신]]을 모신 육신사 앞에 그의 생가터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경북고등학교|경북중학교]] 및 구제 마쓰야마[[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구마모토 [[의과대학]] 재학 중에 [[8.15 광복]]을 맞아 [[경성제국대학]] 의학부로 편입하였으나, 동 대학 법문학부 정치학과로 전과하였고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였다.
- 박지일(배우) . . . . 1회 일치
* [[2007년]] [[KBS]] 단막극 《[[KBS HDTV 문학관]] -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 [[김만중]] 역
- 박칠용 . . . . 1회 일치
* [[1985년]] [[연성대학교|안양공업전문대학]] 연극영화학과 전문학사
- 박태준 (작곡가) . . . . 1회 일치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며 호(號)는 귀봉(龜峯)· 산남(山南)· 계산(桂山)이고, 종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개신교(예장통합)]]이다.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나 [[계성고등학교 (대구)|대구 계성고등보통학교]]를 나온 이후 미국 [[터스컬럼 대학교]]와 [[웨스트민스터 대학교]] 음대 및 대학원을 나왔다.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를 거쳐 [[연세대학교]] 종교 음악과를 창설하였으며, 많은 작곡을 하여 한국 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예술원 음악공로상과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64년 연세대학교 음대 학장을 지냈다. 작품으로 〈오빠생각〉 〈집 생각〉 〈사우(思友)〉 등 150여 곡이 있고, 동요곡집으로 〈중 중 때때중〉, 가곡집으로 〈박태준 가곡집〉 등이 있다.
- 박휘순 . . . . 1회 일치
[[경기도]] [[수원시|수원]] [[영통구|영통]] 에서 태어나 [[동남보건대학]] 컴퓨터응용학과 전문학사 졸업 이후 [[인하대학교]] 연극영화학과에 편입학하여 학사 졸업하였고 [[2001년]] [[연극배우]] 첫 데뷔하였으며 이듬해 [[2002년]] [[뮤지컬 배우]] 데뷔하였고 이어 같은 해 [[2002년]] [[코미디TV]]에서 방송된 [[김용만 (1967년)|김용만]]이 진행한 '공포의 타이틀 매치'라는 프로그램에 질러맨으로 방송에 데뷔 이후, [[2005년]] [[KBS]] 20기 공채 [[개그맨]]이 되었다.
- 보증 . . . . 1회 일치
보증에 관련된 문학 가운데 하나로 [[다자이 오사무]]의 [[달려라 메로스]]가 있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와 또한 다자이 오사무가 친구에게 술값을 보증서게 해놓고 술집에 친구를 맡겨놓은 다음 자신이 나중에 술값을 가져왔다는 훈훈한 일화에서 따왔다.
- 브이원 . . . . 1회 일치
1996년 뮤지컬배우 첫 데뷔한 그는 [[대구광역시|대구]] 태생으로 [[대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아방송예술대학|동아방송대]] 방송연예학과 전문학사와 [[단국대학교]] 연극영화학과 학사 학위를 거쳐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대중예술학전공으로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브이원'이라는 예명으로 발라드 가수로 데뷔, 팬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강현수는 임채홍과 함께 [[2010년]] [[3월 27일]]부터 서울 서초구 반포동에 입시 전문 방송아카데미 '배우&배움'을 열기도 했다. 평소 절친한 관계를 유지해 오던 두 사람은 오랜 준비 끝에 개업식을 갖게 되었다.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주인공으로 출연하거나, [[2003년]] 방영된 시트콤 ‘달려라 울엄마’에서 복학생 역을 맡는 등 배우로서도 활동했다.<ref>{{뉴스 인용|url=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003/h20100325062909111780.htm|제목=강현수·임채홍 방송아카데미 오픈|성=|이름=스포츠한국 안진용기자|날짜=2010-03-25|출판사=한국일보|확인날짜=2010-04-17}}</ref>
- 서상일 . . . . 1회 일치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사실상 집단지도체제하의 정당의 최고위원이라 할 수있는 8총무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 서정윤 . . . . 1회 일치
[[대구]]에서 출생하였고,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하였다. [[1984년]] 《현대문학》에 시 〈서녘바다〉,〈성(城)〉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주로 만남·기다림·사랑·아픔 등의 서정성을 바탕으로 절실한 삶의 문제들을 그려내고 있다. 시집 《홀로서기》,《점등인의 별에서》 등과 수필집 《내가 만난 어린왕자》 등이 있다. 2012년, 대구[[영신중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활동 중이었으나, [[2013년]] [[11월 12일]], 제자를 성추행하여 징계 절차에 들어갔다.<ref>{{뉴스 인용| 제목 = 50대 유명시인 겸 교사, 학교서 여제자 성추행 '충격'(종합)| url = http://media.daum.net/society/newsview?newsid=20131112192806356| 출판사 = 연합뉴스| 날짜 = [[2013년]] [[11월 12일]]}}</ref>
- 소명(가수) . . . . 1회 일치
* [[1990년]] [[우송정보대학]] 행정학과 전문학사
- 신혜성 . . . . 1회 일치
* [[백석대학교]] 영문학과 (학사)
- 아이린(레드벨벳) . . . . 1회 일치
[[문학소녀]]. 학창시절 수업과목 중 [[세계지리]]를 가장 좋아했고, [[물리]]를 가장 싫어했다고 한다. 취미도 [[독서]]. 그래서 [[문법]]이나 [[맞춤법]], [[띄어쓰기]] 등에 예민해 항상 바르게 쓰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또한 멤버들이 문자를 보낼 때 맞춤법을 틀리면 고쳐준다고 얘기한 적이 있다. --전형적인 문과생--
- 안석환 . . . . 1회 일치
* 2006년 [[KBS1]] 단막극 《[[TV문학관]] - 나쁜 소설》
- 안숙선 . . . . 1회 일치
* [[1996년]] [[한국문인협회]] 선정 '가장 문학적인 국악인상' 수상
- 야마우바 . . . . 1회 일치
일본에서는 옛날 이야기나 노오, 가부키 같은 민속 문학에 자주 등장했다. 하지만 현대에는 무서운 할머니라는 외모 때문인지 별로 등장하는 매체가 없다.
- 야설록 . . . . 1회 일치
| 문학 활동 =
- 양윤재 . . . . 1회 일치
* 1997 ~ : 용문학원 이사
- 에스컬레이터 식 학교 . . . . 1회 일치
그러나 동일한 학교 법인, 혹은 비슷한 계열이나 제휴 관계가 있는 학교 사이에서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혹은 고등 전문학교, 고등학교에서 대학, 단기대학(전문대학) 등에 입학할 때 입학 시험없이 진학할 수 있는 별도의 선발 제도가 있다. 이를 한 번 타면 자동으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에스컬레이터에 비유하여 에스컬레이터 식 학교라고 부른다.
- 연규진 . . . . 1회 일치
* 1987년 KBS 2[[TV 문학관]] - 눈보라
- 영주시 . . . . 1회 일치
* 석용원 : 전 아동문학가.
- 오원 (조선) . . . . 1회 일치
'''오원'''(吳瑗, 1700년 ~ 1740년)은 [[조선]]의 문신이다.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海州). 자는 백옥(伯玉), 호는 월곡(月谷)이다. 할아버지는 [[형조]][[판서]] [[오두인]](吳斗寅)이고, 아버지는 오진주(吳晋周)이며, 어머니는 [[예조]][[판서]] [[김창협]](金昌協)의 딸이다. 백부인 [[오태주]](吳泰周)와 조선 제18대 왕 [[조선 현종|현종]]의 딸인 [[명안공주]](明安公主)의 양자가 되었다. 1728년(영조 4)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났고 벼슬은 [[대제학]]에 이르렀다.<ref name="대제학">[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ua_11610010_001 《영조실록》 52권, 16년(1740 경신 / 청 건륭(乾隆) 5년) 10월 10일(정미) 1번째기사]</ref>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월곡집]]》이 있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ref>[http://sillok.history.go.kr/url.jsp?id=kva_11712017_002 《정조실록》 38권, 17년(1793 계축 / 청 건륭(乾隆) 58년) 12월 17일(병자) 2번째기사]</ref>
- 오준 . . . . 1회 일치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 학사
- 오철환 . . . . 1회 일치
* 2009 대구문학상 수상
- 오픈 캠퍼스 . . . . 1회 일치
대학, 전문학교 등에서 학교를 외부인에게 개방하여, 진학을 앞둔 고등학생 등을 학교에 방문하게 해주는 행사이다.
- 우라센케 . . . . 1회 일치
[[일본]]의 [[다도]] 유파의 하나. 우라센케 다도전문학원 등이 있다. 일본의 다도를 정립한 명인 [[센노 리큐]](千利休)의 후손으로서, 센노 리큐의 후손들이 세운 산센케(三千家)의 하나이다. 딱히 삼천개의 가문이 있는게 아니라 세 개의 센케(千家,센 가문)라는 뜻이다.--세다고 센가가 아니다.--
- 우츠미 사토루 . . . . 1회 일치
츠쿠바대학 의학전문학군 졸업(筑波大学医学専門学群卒業)
- 유승민(배우) . . . . 1회 일치
[[HD TV 문학관]] 2005 ~ 2009
- 유지연(탤런트) . . . . 1회 일치
* [[1996년]] [[KBS1]] TV문학관 《[[슈퍼마켓에서 길을 잃다]]》 - 백화점 직원 역
- 유지인(1956) . . . . 1회 일치
* [[1982년]] [[KBS1]] 단막극 《[[TV 문학관]] - 묵시의 바다》 ... 박경화 역
- 윤다훈 . . . . 1회 일치
* 1999년 KBS 신 TV문학관 - 아우와의 만남
- 윤식 . . . . 1회 일치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파평 윤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서울대학교 대학원 동문]][[분류:대한민국의 개신교도]][[분류:하와이 대학교 동문]][[분류:베일러 대학교 동문]][[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
- 윤흔 . . . . 1회 일치
이후 형조좌랑, 예조좌랑, 호조좌랑 등 다시 3조의 좌랑을 거쳐 [[평안도]][[도사]]로 나갔다. 복귀하여 [[형조]][[정랑]](刑曹正郞), [[예조]][[정랑]], [[호조]][[정랑]]을 거쳐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 그 뒤 내직으로 복귀하여 [[형조]][[정랑]]을 세 번 역임한 뒤 [[세자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광해군]]을 보도하였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지제교(知製敎)에 임명되고,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올랐다가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옮겼다. 그 뒤 옥당(玉堂)에 선발되어 [[홍문관]]수찬(修撰)이 되고, 교리(校理)를 거쳐 부응교(副應敎)에 올랐다. [[1601년]]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3년상을 치뤘다. [[1603년]](선조 36년)에 3년상을 마치고 복직, [[통례원]]상례(通禮院相禮), [[군자감|군자감정]](軍資監正),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이후 내외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승정원]][[우승지]]가 되었다.
- 은지원 . . . . 1회 일치
당시엔 외국인학교를 나오면 고등학교 학력이 인정되는 걸로 알려졌고, 많은 연예인들이 외국인학교를 다녔다. [[S.E.S.]] [[유진(배우)|유진]]도 이 학교를 졸업하고 2000년 [[고려대학교]] 서양어문학부에 진학했는데 1년 후 학력이 인정되지 않아 입학이 취소되었다가 소송을 통해 승소해서 재입학했다. 즉 그 전엔 대학들도 고등학교 학력이 인정되는 것으로 알았었다. 그나마 지금은 외국인학교도 정식 학력을 인정 받을 수 있는 학교가 생겨나고 있다. 같은 학교 출신인 [[신화(아이돌)|신화]]의 [[앤디(신화)|앤디]]도 같은 이유로 중졸 4급 판정을 받았다. 그런데, 앤디의 경우에는 현역으로 가기 위해 소송을 벌였다가 패소하여 최종적으로 뒤늦게 [[검정고시]]를 치르고나서 현역으로 입대했다. ~~까방권 획득.~~ 참고로 앤디는 대학교 합격이 취소된 적이 있다.
- 이상오 . . . . 1회 일치
[[분류:일제 강점기의 스포츠 평론가]][[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김구]][[분류:한국독립당]][[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과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문학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군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정치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시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역사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스포츠 평론가]][[분류: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호세이 대학 동문]]
- 이석훈 . . . . 1회 일치
||<#0D3EA3> {{{#ffffff 학력}}} ||<(><rowbgcolor=#ffffff> [[포항명도학교]] (졸업)[br][[동아방송예술대학교]] 영상음악과 (전문학사)[br][[청운대학교]] 방송음악과 (학사)[br][[경희대학교|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석사과정) ||
- 이소선 . . . . 1회 일치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아들 [[전태일]]이 평화시장 앞 거리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엔 쉬게 하라"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분신하였다.<ref>[[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3페이지</ref><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9640 전태일 분신 순간 오갔던 긴박한 대화들],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3), 2014년 6월 12일</ref> 이소선은 구역 예배를 돌고 있다 동네 주민이 건내준 라디오에서 나오는 뉴스를 듣고 이 사실을 알았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959623 아들이 죽었는데... 버스 타고 간 이 여인], 오마이뉴스 연재 - 이소선 평전 <어머니의 길> (1), 2014년 6월 12일</ref> 전태일은 메디컬 병원에서 성모병원으로 옮겨졌고 이미 가망이 없었다. 전태일은 달려온 친구들과 어머니에게 자신이 못다한 일을 다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전태일은 이소선에게 거듭 어떤 유혹에도 굴하지 말고 자신의 부탁을 들어달라 간청하였고 큰 소리로 대답하게 하였다. 이소선은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라고 크게 대답하였다.<ref>[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905211752042&code=210100&s_code=af077#csidxf48d2d357d2bfa4844d69c179a524c7 2009 특별기획" 이소선의 80년, 살아온 이야기 (59) - 문학 보수화, 예술적 성취 다양한 분석], 경향신문, 2009년 5월 21일</ref> 그날 오후 10시 전태일은 "배가 고프다"는 말을 남기고 사망하였다.<ref>조영래, 《전태일 평전: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돌베개, 1991) 289페이지</ref>
- 이시종 . . . . 1회 일치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전의 이씨]][[분류:충주시 출신]][[분류:충주중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민주자유당 당원]][[분류:한나라당의 정치인]][[분류:열린우리당 당원]][[분류:대통합민주신당 당원]][[분류:친문]][[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08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2011년) 당원]][[분류:더불어민주당 당원]]
- 이열희 (1924년) . . . . 1회 일치
[[1946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치의학과를 졸업하고 모교인 [[서울대]] [[치과]]대학 조교가 되었으며, [[1947년]] 대구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 조교가 되었다. 그해 [[3월]] 다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국군수도병원|육군병원]]의 외과, 치과 의사로 근무하였다. 육군병원에 근무할 당시 구강외과를 설립하고 60년대초 구강외과내에 악안면 성형외과를 신설하였다.<ref name="imails">[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5733&yy=1999 지방 국립대 7곳 치대 설립 '산파역'] 대구매일신문 1999년 06월 08일자</ref> [[구강외과]]를 전공한 그는 구강성형 분야의 완전한 의술확립을 위해 다시 경북대의대에 입학, 다시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을 다녔다. 경북대 의대 재학 중에는 외과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하였다.<ref name="imails"/> 그 뒤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원에서 의학석사와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 이인민 . . . . 1회 일치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급제, 우왕 9년(1383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관장하고 문하평리 겸 대제학(門下評理兼大提學)에 올랐다. 1388년 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에 의해 형 [[이인임]](李仁任)이 숙청당하자 이에 연좌되어 유배되었다가 1388년 공양왕의 즉위 이후 석방되어 관작이 복구되었다. 그러나 공양왕 2년(1390년) 윤이(尹彛)ㆍ이초(李初)의 옥사(獄事)에 관련, 청주옥(淸州獄)에 갇혔다가 이듬해 국대비 왕씨(國大妃 王氏)의 생일에 사면령이 내려져 특사, 풀려났다. 그 뒤 경외종사관(京外從使官)이 되었다가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지냈다.
- 이인영(정치인) . . . . 1회 일치
1964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충주고등학교]],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 정보통신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이수하였다.
- 이지현(1983) . . . . 1회 일치
취미가 [[시(문학)|시]]쓰기여서인지 [[작사]]를 맡은 적도 있다. 전&현직 [[쥬얼리]] 멤버 중에서 앨범 프로듀싱 단계에 자기 이름을 올려놓은 유일한 멤버.[* 2집 수록곡 SAD. 탈퇴 후에는 [[조민아(1984)|조민아]]도 자기 곡에 작사를 한 적이 있다. [[하주연]]도 곡에 랩 작사는 본인이 하는데, 저작권자 이름에 올리지 못하고 있다...~~[[지못미]]~~] 대신 노래는 굉장히 못 했다. 시간이 갈수록 [[서인영]]과 [[조민아(1984)|조민아]]의 파트 지분이 늘고 이지현은...[[Rap|랩]]으로 쫓겨났다(...). 그것도 랩이라기엔 좀...
- 이진만 (1675년) . . . . 1회 일치
그는 [[과거 제도]]의 폐단을 비판하는 상소 외에도 [[단종]] 때의 충신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의 충절을 설명하며 [[금성대군]]의 사우(祠宇)를 나라에서 창건해 줄 것을 상소하였고, 세종 때의 천문학자인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을 모신 단계서원(丹溪書院)을 철폐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단계서원의 철폐를 막아달라는 상소문 등을 올리고 낙향하였다.<ref>김담은 그의 외선조인데, 8대조모 이수형의 처 예안김씨의 친정아버지로서 외9대조가 되며, 고조모 이여빈의 처 예안김씨를 통해서는 외10대조가 된다.</ref>
- 이현 (1983년) . . . . 1회 일치
* [[대구대학교]] 영어영문학과 학사 졸업
- 인교진 . . . . 1회 일치
* [[단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자시키로우 . . . . 1회 일치
문학, 괴담이나 무서운 이야기에서는 오래된 주택에 남아 있던 자시키로우 등이 소재가 되는 일이 흔히 있다. 성적인 풍습과 결합하여 소개하는 경우도 있는데, 테츠카 오사무의 『아야코(奇子)』가 대표적인 것이다.
- 장도 (1876년) . . . . 1회 일치
[[1899년]] 도쿄법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의 법원을 순회하면서 견습까지 마친 뒤 귀국했다. [[1900년]]부터 사립 광흥학교 교사로 법학과 일본어 등을 가르쳤고, 이후 [[한성법학교]] 강사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형법]] 전문가로 활동했다.
- 장민호 (1962년) . . . . 1회 일치
* [[1981년]] [[성균관대학교]] 국문학과 입학
- 장발 (화가) . . . . 1회 일치
* [[일본]] [[도쿄 미술학교]] 전문학사
- 장세용 . . . . 1회 일치
하지만 ‘[[박정희]] 기념사업’을 전면 재검토하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그렇지는 않다. 박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분들이 계시기에 그 자체로는 인정한다”라고 발언하고 또한 전임 시장인 [[남유진]]이 '박정희 타운'을 만드는데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붇고도 내리 3선을 그것도 모두 과반 득표에 성공해서 당선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전임 [[구미시]] 시장인 [[남유진]] 문서에는 남유진에 대해서 대부분 구미 시민들이 악평을 하는 것으로 묘사돼 있지만 엄연히 남유진은 구미에서 '''내리 3선을 과반 득표로 모두 당선'''된 인물이다.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4~6회 지선 광역비례에서 한나라당-새누리당 표가 76.5%, 48.7%, 71.5%로, 이 표가 남유진 전 시장표(75.9%, 53.1%, 52.6%)로 이어졌다.(단, 6회는 새누리당 표가 분열되었다.) 그래서 3선. 그리고, 2016년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50.4%로 하락했고, 2018년 지선에서는 자유한국당 41.3%로 더불어민주당 43.3%에 졌고, 이에따라 시장직도 자유한국당이 더불어민주당에 넘겨주게 되었다. 만약, 1:1로 대결하였더라면 기초의회 비례득표를 기준으로 계산하였을 때, 진보vs보수 구도에서는 48.2%vs51.8%로 보수측이 승, 반자유한국당vs자유한국당(+대한애국당) 구도였다면 57.5%vs47.5%로 반자유한국당측이 승리하였을 것이다. 바른미래당 지지층이 어느쪽을 선택할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진보(더불어민주당+정의당)가 48.2%로, 보수(자유한국당+대한애국당, 42.5%)보다 좀 더 유리했을 것이다.] 여전히 구미시에서 [[박정희]]의 존재감과 위치란 [[목포시]]에서의 [[김대중]] 이상의 위치이고 또한 '[[박정희]] 기념사업' 축소에 대한 보수파들의 반발도 상당할 것이기 때문에 과연 '[[박정희]] 기념사업'들을 어디까지 축소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 장우혁 . . . . 1회 일치
*[[백제예술대학교]] 전통예술과 무용전공 (전문학사)
- 장익 (1933년) . . . . 1회 일치
[[1956년]] 미국 메리놀신학교로 편입한 그는 그곳에서 [[인문학]]과 [[철학]] 학사를 취득하였고 [[1959년]] 벨기에 루뱅대학에서 철학석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1963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 장희진 (1944년) . . . . 1회 일치
*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 전관 . . . . 1회 일치
*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문학사
- 전락원 . . . . 1회 일치
*1970년 7월 월간 동서문학 발행인
- 전민제 . . . . 1회 일치
신장은 175cm이고 체중은 75kg인 그는 [[1950년]] [[8월 1일]]에 여성 영어영문학자 [[나영균]]과 결혼하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슬하 1남 3녀를 두었다.
- 전소민(배우) . . . . 1회 일치
|| TV 문학관 - 광염소나타 || 남정연 || ||
- 전인범 . . . . 1회 일치
2018년 6월 예비역 신분인 그의 주도로 국회의원회관에서 특수작전 전술 및 장비 현대화를 위한 세미나 ‘제1회 특수작전 세미나’가 개최되었다. 그간 국가 안보전략과 국방 관련 정책 토론회는 많았으나, 일선 전투원들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전술 및 장비 관련 세미나가 공개적으로 개최된 적은 없었기에 눈길을 끌었다.<ref>[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4&aid=0004045225 창끝 전투원들을 위한 '제1회 특수작전 세미나' 큰 호응], 《파이낸셜뉴스》, 2018년 6월 24일</ref> 세미나에서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효율적인 강한 군대를 만들기 위해서는 육군의 특전사를 비롯해 수색·특공부대, 해군 및 해병대, 공군의 지상작전 부대의 정예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를 위해서는 해외의 사례를 우리 상황에 맞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한다”면서 “실전에 맞지 않는 전술 및 장비소요(구매 요청 및 구매)는 과감하게 개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 중장은 세미나 참석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형식과 틀을 깬 어법과 행동으로 참석자들로부터 박수를 받기도 하였다. 해당 세미나는 특수·지상작전연구회, 군사전문지 플래툰 등 민간이 주도한 최초의 개방형 군사 세미나로, 세미나 준비를 해온 특수·지상작전연구회 소속 정진만 아세아항공전문학교 교수는 “당초 100명 미만의 규모로 세미나를 준비했는데 150여 명 이상이 참석했고 상당수 인원이 참석을 원했는데 장소가 비좁아서 받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같은 달 [[한국자유총연맹]] 부총재에 임명, 9월에는 그를 단장으로 하는 자유총연맹 대표단이 [[:en:West Potomac Park|웨스트 포토맥 공원]] 내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들어 설 한국전쟁 미군 참전용사 추모벽 건립에 1만 달러를 기증했다.<ref>[http://dckoreannews.com/featured/%ED%95%9C%EA%B5%AD%EC%9E%90%EC%9C%A0%EC%B4%9D%EC%97%B0%EB%A7%B9-%EB%AF%B8%EA%B5%AD-%EC%9B%8C%EC%8B%B1%ED%84%B4%EC%97%90%EC%84%9C-%EB%8F%99%ED%8F%AC%EA%B0%84%EB%8B%B4%ED%9A%8C-%EA%B0%9C%EC%B5%9C/ [한국자유총연맹] 미국 워싱턴에서 동포간담회 개최], 《워싱턴코리안뉴스》, 2018년 9월 12일</ref><ref>[http://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32597 한국자유총연맹, 한국전 참전용사 ‘추모의 벽’ 건립지원금 1만 달러 기탁], 《월드코리안뉴스》, 2018년 9월 13일</ref> 그는 “한국전참전기념공원에 추모의 벽이 설치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자유총연맹 중앙회 차원에서 1만 달러를 즉석에서 마련, 기탁하게 됐다”면서 “한국자유총연맹은 특정정파에 치우치지 않고 정치 중립을 지키면서 국가에 이익이 되고 국민에게 행복을 주는 국리민복을 기본 가치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ref>[http://www.koreatimes.com/article/1202198 한국전 참전 ‘추모의 벽 건립’ 1만달러 기증], 《미주한국일보》, 2018년 9월 11일</ref>
- 정규수(배우) . . . . 1회 일치
* [[2007년]] [[KBS1]] 단막극 《[[KBS HDTV 문학관]] - 카스테라》
- 정대석 . . . . 1회 일치
* [[단국대학교]] 국문학 학사
- 정몽헌 . . . . 1회 일치
*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 학사
- 정성주 . . . . 1회 일치
| 문학 경향 =
- 정세진 . . . . 1회 일치
|1992~1996||[[연세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 정영기(배우) . . . . 1회 일치
|| '''학력''' ||<(> [[대진대학교]] 국어국문학,연극영화과 학사 ||
- 정웅인 . . . . 1회 일치
| 학력 = [[서울예술대학교|서울예전 연극과]] 전문학사
- 정종철 . . . . 1회 일치
* [[동양미래대학교]] [[전문학사]] 졸업
- 정형돈 . . . . 1회 일치
* [[KBS N 라이프|KBS KOREA]] 《한반도 유머총집합 - 무성영화, 개그로 보는 단편 문학선, 무제, 처세술 시리즈, 추억의 영화 Best5》
- 조대연(1888) . . . . 1회 일치
1888년 [[충청도]] 충주목(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장영원 전사판임관5등에 임명되었으며, 대동법률전문학교를 졸업했다.
- 조성모(가수) . . . . 1회 일치
리메이크 앨범인 2.5집의 타이틀곡 '가시나무'는 빅 히트를 했지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4&oid=042&aid=0000003256|뮤직비디오에서 문학적이며 종교적인 원곡을 단순한 사랑노래로 해석하면서 '원작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원작자인 하덕규도 석연찮은 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 조소혜 . . . . 1회 일치
* [[TV문학관]] - 〈타인의 목소리〉 (1985년, KBS1) 외 다수
- 진유현 . . . . 1회 일치
* [[중앙대학교]] 중국어문학과 졸업
- 진학교 . . . . 1회 일치
학교란 학교는 모두 진학을 목표로 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존재 자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인듯. 굳이 말하자면 명문학교라고 할 수 있겠지만.
- 창작:바벨 코스트 . . . . 1회 일치
항구를 바탕으로 성장했으나 공업은 발달하지 않아 도시 성장은 더딘 편이다. 주요 산업은 관광으로, 대공황 시절에 꽃핀 다다이즘과 유사한 성향의 문학과 미술, 연극을 중심으로 관광 산업이 발달했고 이러한 문화 수준에 맞게 교육 수준도 꽤 높은 편에 속한다. 인구 분포는 주로 동유럽계 이민자들과 유색인종의 비중이 많고, 서유럽·영국계 백인들과 북미 원주민들은 그에 비해 적은 편이다.
- 채현국 . . . . 1회 일치
[[분류:1935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의 학교법인인]][[분류:대한민국의 문화운동가]][[분류:대산문학상 수상자]]
- 최연제 . . . . 1회 일치
* 요산대학교 대학원 여성건강전문학 박사
- 최재성(배우) . . . . 1회 일치
* [[1986년]] KBS 단막극 《TV문학관-젊은 느티나무》
- 최창홍 . . . . 1회 일치
[[1925년]] 4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했으며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를 졸업했다. [[1933년]] 11월 [[고등문관시험]] 사법과, [[1934년]] 10월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했고 [[1936년]] [[5월 21일]] [[경기도]] [[장단군|장단]][[군수]]로 임명되었다.
- 최호중 . . . . 1회 일치
[[분류:1930년 태어남]][[분류:2015년 죽음]][[분류:벨기에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노태우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말레이시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사우디아라비아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강릉 최씨]]
- 최휘영 . . . . 1회 일치
*[[1990년]] [[서강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 최희서 . . . . 1회 일치
*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신문방송학과, 영어영문학과
- 츤데레 . . . . 1회 일치
겉으로는 상대에게 퉁명스럽거나 또는 싫어하는 척 하면서 실제로는 호의를 보이는 태도. 서브컬쳐나 문학 작품에서 먼 옛날부터 쓰여온 설정 중 하나이다.
- 태학 . . . . 1회 일치
서진에서는 276년 공경, 대부 등 고위 관료의 자제를 교육하기 위하여 태학과는 별도로 국자학(國子學)이 설치된다. 국자학과 태학은 당날 때까지 병행하여 지속되었는데, 국자죄주(國子祭酒)가 관리했다. 당나라에서는 국자감(國子監)을 둬서, 국자학, 태학 이외에 사문학(四門學), 율학(律學), 서학(書學), 산학(算學) 등을 관리했다.
- 토리코/396화 . . . . 1회 일치
* 마침 그때 찌가 흔들린다. 낚아 올려보니 작은 사이즈의 자이언트 셸이었다. 6대륙의 그 녀석의 새끼. 토리코는 작으니까 미니멈 셸이라고 부르자고 한다. 이것은 구루메 천문학자들이 품종개량으로 우주에서도 활동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이 호수에서 양식 중이다. 토리코는 이걸 타고 곧 출발하자고 한다. 코마츠는 우주로 떠나면 어마어마한 시간이 소모될 텐데 린에게는 이야기 했냐고 하는데, 황당하게도 토리코는 "잠깐 사냥다녀 온다"고 밖에 하지 않았다.
- 하이큐!! . . . . 1회 일치
* 작가인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이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후루다테 작가가 졸업한 도쿄 디자인 전문학교에 졸업 후 찾아왔었다는 포스팅이 어떤 블로그에 올라왔는데, 댓글에서 어떤 팬이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을 묻자 '작가님이 직접 공개하지 않으신 사생활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라고 철통방어(...)를 하기도 했다. 종합 1000만 부 이상 팔린 만화책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으로도, 온라인으로도, 심지어는 인터뷰조차도 그의 활동은 적어 필명이 본명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성별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작품들이 [이와테]현 및 [미야기]현을 작중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으므로 출신지가 그 쪽인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여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팀메이트 간의 감정 묘사, 이름 및 생일의 의미와 관련성까지도 계산한 ~~설정덕후의~~ 섬세함, 특유의 동글동글한 그림체를 근거로 내세워 여자 작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반면 작가가 남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wiki:"니시노야 유" 니시노야]와 [wiki:"타나카 류노스케" 타나카]의 [wiki:"시미즈 키요코" 시미즈] 빠질을 저렇게 완벽하게(...)그려내는 것은 남자밖에 하지 못한다.', '[쿠로코의 농구]도 남자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잘 그려내고 있다' 등을 근거로 남자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점치고 있다.
- 하일권 . . . . 1회 일치
| 문학 경향 =
- 한승원 (만화가) . . . . 1회 일치
| 문학 활동 =
- 한승주 (공무원) . . . . 1회 일치
[[분류:1940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고려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외무부 장관]][[분류:김영삼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미국 주재 대한민국 대사]][[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분류:고려대학교 총장]][[분류:욱일대수장 수훈자]]
- 한용희 . . . . 1회 일치
* [[홍익대학교]] 신문학과(방송학 전공) 졸업
- 함준호 (교수) . . . . 1회 일치
*1982 ~ 1986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 학사
- 헌경왕후 . . . . 1회 일치
* 《[[붉은 왕세자빈]]》(The Red Queen, 한글판 부제 : 영혼의 ‘한중록.’마거릿 드래블, 전경자 옮김, 문학사상사, 2005, {{ISBN|89-7012-697-X}})
- 현소환 . . . . 1회 일치
[[분류:1937년 태어남]][[분류:2018년 죽음]][[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대한민국 해병 중위]][[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김종필]][[분류:신민주공화당]][[분류:자유민주연합 당원]][[분류:정주영]][[분류:백선엽]][[분류:심대평]][[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
- 현재원 . . . . 1회 일치
* 1996년 《[[구인회 (문학 단체)|구인회]]의 동상이몽》
- 현재윤 . . . . 1회 일치
* 2013년 3월 31일 문학구장 SK 전 :2013 시즌 첫 홈런(이적후 첫 홈런, 2013시즌 팀(LG트윈스) 2호 홈런, 상대투수 : [[크리스 세든]], 948일만의 홈런)
- 현정건 . . . . 1회 일치
* 「박종화의 삶과 문학」 윤병로 저, 1998년,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홍병선 . . . . 1회 일치
홍병선이 귀국한 해에 과거 경성학당 교장이었던 일본조합교회의 와다세(渡賴常吉)가 정식 선교사로 임명되어 조선에 파견되어 왔고, 홍병선은 와다세가 설립한 한양교회의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했다. 동시에 [[보성전문학교]], [[피어선기념성경학원]], [[배화여학교]]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25년]]에는 목사 안수를 받았다.
- 홍진기 . . . . 1회 일치
[[1940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하고, 그 해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였다. [[1942년]] 경성지법 사법관 시보를 시작으로 일제 때 판사<ref>{{뉴스 인용 |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308&aid=0000001146 | 제목=조·중·동이 친일인명사전 때리는 까닭 | 저자=주진우 | 뉴스=시사인 | 날짜=2009-11-20 | 확인날짜= | 보존url=http://archive.is/JKi44 | 보존날짜=2014-04-30 }}</ref> 생활을 했다.
- 황석두 . . . . 1회 일치
황석두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친척들이 그의 재산을 모두 상속받았다. [[페롱]] [[사제|신부]]는 황석두를 [[한문학]] [[교사]]이자 [[교리]] [[교사]] 및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그는 [[사제]]들의 [[복사 (기독교)|복사직]]도 수행했다. 황석두는 그 의무들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다블뤼]] [[주교]]의 복사가 되었다. 그는 [[주교]]들과 함께 여러 권의 [[서적]]을 [[번역]] 및 저술하였다.
- 황선필(1939년) . . . . 1회 일치
[[분류:193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기자]][[분류:대한민국의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김천시 출신 인물]][[분류:대한민국 제5공화국]]
- 황은진 . . . . 1회 일치
[[분류:1934년 태어남]][[분류:199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민국의 텔레비전 프로듀서]][[분류:서울고등학교 동문]][[분류: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동문]][[분류:프리랜서 아나운서]][[분류:대한민국의 불교 신자]][[분류:1957년 데뷔]][[분류:대한민국의 미술 평론가]][[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민국의 음악 평론가]][[분류:대한민국의 연극 평론가]]
- 황태연 . . . . 1회 일치
|문학 경향 =
- 흥친왕 . . . . 1회 일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청나라]] 군인과 문인들의 굴욕과 모욕을 감수하면서도 그는 비밀리에 국내에 편지 서신을 보내 자신을 구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는 [[1973년]] [[10월 4일]] [[대한민국]] 월간 문학사상 자료 조사연구실에서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ref name="문사1">경향신문 1973년 10월 4일자 기사 7면</ref>
- 희빈 장씨 . . . . 1회 일치
| [[2007년]] || align="left" | 《[[KBS HDTV 문학관]] -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 || 8대 [[이재은]] || [[KBS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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