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문동환"에 대한 역링크 찾기

문동환의 역링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서정각
         [[서울지방검찰청]] 검사장으로 있으면서 1976년 [[서울특별시|서울시]] [[명동성당]]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미사에서 "우리는 국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철폐하고 민주주의를 요구하다가 투옥된 민주 인사들과 학생들을 석방하라고 요구한다."는 내용이 발표된 3·1 민주구국선언문이 낭독되자 "정부 전복 사건"이라고 밝히면서 다음날 [[문익환]] 목사,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 [[문동환]], [[이문영]], [[정일형]] 등 11명을 구속하고, [[이태영]] 변호사 등 9명을 불구속 입건하였다. 당시 [[문정현]] 신부는 "검찰에서 닷새 동안 잠을 안 재우고 거짓 자백을 하게 했다."고 밝혔다.<ref>[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7523]</ref>
  • 전준호(1969)
         1996년에 다소 부진한 모습을 보였고,[* 전준호의 기록을 보면 타격과 도루가 급격하게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 것을 볼 수있다.] 1997년 개막전을 불과 4일 앞둔 시점에서 [[현대 유니콘스]]로 5억에 현금 트레이드되는 바람에 롯데에서의 선수생활을 허무하게 마감했다.[* [[문동환]]과의 맞트레이드로 잘못 알려져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고 전준호와 5억을 맞바꾼 현금 트레이드가 맞다. 원래 프로에서의 문동환의 지명권은 롯데가 가지고 있었고 트레이드라는 건 프로팀끼리 하는 거다. 아무리 현대 피닉스가 같은 현대 계열이고 프로의 흉내를 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아마추어(실업)이고, 문동환의 입단은 롯데가 지명에 의해 보유하게 된 아마추어 선수에 대한 영구교섭권에 의한 신인으로서의 입단이지 트레이드가 아니다. 단지, 문동환이 현대 피닉스와의 계약을 해지해야만 롯데로 입단이 가능했는데, 그 조건이 현대 피닉스와 계약 당시 받은 계약금 및 연봉에 위약금까지 토해내는 것. 롯데는 전준호를 현대로 넘긴 댓가로 5억을 받아와 이를 문동환의 계약금으로 지급했고, 문동환은 이 계약금으로 현대피닉스에 위약금을 물어 롯데 입단이 성사된 것이다. 이후 쌍방울 사태부터 촉발되었던 선수 팔아먹기의 시초격. 이정도면 현대가 대가리 굴리는 것은 삼성 이상 넘쳤다... (여기에 당시 전준호는 기복이 심해서 롯데 구단측에서는 '계륵'같은 존재로 여기기도 했다. 게다가 롯데는 당시 대졸 신인이던 [[김대익]]을 전준호를 대체할 차세대 톱타자로 키울려 했었고...) 문동환은 2년 정도 밥값하다 드러누운 반면 전준호는 현대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꾸준히 활약해주며 현대의 전성기를 이끌었고 롯데에서 전준호의 후계자로 키우려고 했던 김대익은 무언가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다가 삼성으로 가버렸고, [[김주찬]]의 포텐이 터지기 전까지 리드오프의 부재를 해결하지 못했으니 결과적으로 롯데의 입장에서 땅을 치고 후회할 정도로 '''엄청나게 손해'''를 본 트레이드. 2003년 말, 롯데가 리드오프의 공백을 메워보겠다며 전준호를 내준 대가로 왔던 '''문동환까지 보상선수로 팔아버리며''' [[정수근|해담선생]]을 거액에 데리고 왔는데 그 결과는...그리고 2013년 김주찬마저 KIA로 가버리고 전준우까지 군 입대를 하게 되자 롯데는 고정 테이블 세터가 없어서 고생을 하고 있다. 어쨌든 전준우가 돌아온 17시즌과 18시즌에 [[민병헌]]을 데려옴으로써 길고 길었던 리드오프 문제는 비로소 해결이 되었다.] 그리고 전준호가 떠난 후 롯데는 8년간 6번 8위 현대는 8년간 4번 우승에 6회 포스트시즌 진출을 기록한다. 야구에 만약이란 말은 없지만 행여나 전준호가 롯데에 계속 남았더라면, 그래서 지금까지도 완벽하게 해결하지못한 리드오프의 부재를 스스로 만들지 않았다면 롯데의 성적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며 많은 롯데 골수팬들이 아쉬워한다.
11830의 페이지중에 2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