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프로축구선수권대회 ¶
리그컵의 전신은 1986년에 열린 프로축구선수권대회로 본다. 이 당시는 수퍼리그가 발족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점으로, K리그 구단의 수가 충분치 않았기 때문에 유럽과 같은 10개월 일정을 소화할 수가 없어 추가로 신설된 대회였다.[2]
또한 축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저조했던 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프로축구선수권대회를 시즌중에 따로 개최하여 팬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리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또한 축구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저조했던 것도 문제가 되었는데, 프로축구선수권대회를 시즌중에 따로 개최하여 팬들을 끌어 모으겠다는 계산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리그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흥행은 엄청난 대참패라서 2016년에 리뉴얼한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연혁에서도 이 대회는 전혀 이야기가 없다.[3] 연맹에서 K리그의 역사를 논할 때 프로-세미프로로 합동 운영했던 수퍼리그를 K리그의 일부로 보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다.[4]
2.2. 첫 리그컵 ¶
프로축구선구권대회가 흥행참패를 겪고나서 1992년에 와서야 리그컵이 열리게 된다. 당시 후원사가 아디다스를 한국에 판매하고 있던 제우교역이었기 때문에 통칭 아디다스컵으로 불린다.[5] 이 시기에도 팀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단조로운 리그의 홈 & 어웨이의 연속보다는 리그 외에 별도로 경기 수를 채울 이벤트를 기획하였고, 제우교역을 스폰서로 구해 첫 리그컵으로 볼 수 있는 "아디다스컵"이 열리게 된다.
다만, 여기에는 제법 잡음이 있었는데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엉뚱하게도 아디다스가 해외상표이기 때문에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해외업체의 이름을 단 대회를 한국에서 치뤄야 하느냐?"라는 신토불이적 마인드가 표출화 된 것.[6]
2.3. 스폰서 네임의 변천사 ¶
후원사의 의향에 따라 타이틀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리그컵의 명칭은 대략 다음과 같이 변화되었다.
회차 | 연도 | 반기구분 | 타이틀 |
1 | 1992 | 아디다스컵 | |
2 | 1993 | 아디다스컵 | |
3 | 1994 | 아디다스컵 | |
4 | 1995 | 아디다스컵 | |
5 | 1996 | 아디다스컵 | |
6 | 1997 | 전반 | 아디다스컵 |
7 | 1997 | 후반 | 프로스펙스컵 |
8 | 1998 | 전반 | 아디다스코리아컵 |
9 | 1998 | 후반 | 필립모리스코리아컵 |
10 | 1999 | 전반 | 대한화재컵 |
11 | 1999 | 후반 | 아디다스컵 |
12 | 2000 | 전반 | 대한화재컵 |
13 | 2000 | 후반 | 아디다스컵 |
14 | 2001 | 아디다스컵 | |
15 | 2002 | 아디다스컵 | |
16 | 2004[7] | 삼성 하우젠컵 | |
17 | 2005 | 삼성 하우젠컵 | |
18 | 2006 | 삼성 하우젠컵 | |
19 | 2007 | 삼성 하우젠컵 | |
20 | 2008 | 삼성 하우젠컵 | |
21 | 2009 | 피스컵 코리아 | |
22 | 2010 | 포스코컵 | |
23 | 2011 | 러시앤캐시컵 |
3. 한국 축구사에 끼친 영향 ¶
리그컵이 갖는 의의는 제법 큰데, 한국프로축구계에서 돌아가는 상업시스템과 現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공격축구를 향한 도전정신"(...)의 기반은 어느 정도 이 리그컵에 시행되었던 부분들을 다수 차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3.1.1. 타이틀 스폰서 ¶
프로축구사에서 운영을 위한 타이틀 스폰서가 붙은 건 공식적으로 리그컵이 최초다. 공식적으로 최초의 리그컵으로 볼 수 있는 92' 아디다스컵은 대회 스폰서인 제우교역의 요구에 의해 붙여진 명칭이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축구에 있어 스폰서가 붙었다는 사실은 상당한 의미를 지닐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스포츠사에서 해외업체의 이름을 대회명에 붙인 최초의 사례가 되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말이 많았다.
3.1.2. 상금 ¶
스폰서가 붙었기 때문에 한국프로축구 역사상 최초로 상금이 걸린 대회가 될 수 있었으며, 이 때문에 리그컵은 충분히 각 팀에게 동기를 부여할 수 있는 요건이 되었다. 당시 아디다스 제품을 수입/판매하던 제우교역이 10만달러를 스폰함으로써 최초로 상금을 줄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된 셈.[8]
또한 상금이 생겼기 때문에 팀에 대한 시상뿐만 아니라 우수선수에 대한 시상도 이루어졌다. 이 당시에 시상하던 기준이 2016년 시점에서 바라본 K리그에 통용될 정도로 한국프로축구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또한 상금이 생겼기 때문에 팀에 대한 시상뿐만 아니라 우수선수에 대한 시상도 이루어졌다. 이 당시에 시상하던 기준이 2016년 시점에서 바라본 K리그에 통용될 정도로 한국프로축구사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
3.1.3. FA컵, R리그의 대체재 ¶
K리그외에도 별도로 운영되는 대회가 태어났기 때문에 팀에서는 이를 위한 별도의 스쿼드를 꾸릴 필요가 생기게 되었으며, 이는 각 구단들이 선수층을 보다 두껍게 만드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한 협회 입장에선 FA컵을 대체하는 대회로 여길 수 있었으며, 좋게 표현하면 구단들은 프로무대에 아직 적응하지 못한 신인들을 테스트해 볼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되어주기도 했다.
3.2.1. 이해할 수 없는 일정 ¶
첫 대회부터 10만 달러라는 거액을 유치한 것 까지는 좋은데, 일정을 제대로 조정하지 못하여 리그가 진행되고 있던 6월부터 수요일에만 경기가 열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중경기는 주말경기보다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 이 때문에 흥행을 위해 진행한다는 취지는 처음부터 안드로메다로 향하고 있었던데다가 상금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주중경기 편성이라는 점 하나 때문에 거의 모든 팀이 이 대회를 처음에 엄청 싫어했다. 그리고 첫 단추를 잘못 끼운 댓가로 리그컵에 대한 위상이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구단들의 반감을 사는 요소만 한가득 얻었다.
두번째 대회에 좀 나아졌냐면 또 그것도 아니라서... 리그가 끝난 10월에 시작했기 때문에 시간상으론 제법 널널했을텐데도 각 팀은 1주일에 2번씩 경기를 치루는 하드코어한 일정을 보낸다. 이쯤되면 운영방식에 대해 의문이 들 수 밖에 없을 지경이라 시간이 흐를수록 K리그의 상금과 위상이 리그컵을 명백히 넘고나서부턴 각 구단이 2군리그와 비슷하게 취급하게 된다.
3.2.2. 지나친 실험정신 ¶
게다가 첫 아디다스컵 이후에도 흥행이라는 이름 하나로 대회 운영방식을 바꾸는데, 하나같이 팀이나 팬이나 지치게 만드는 요인밖에 안 되어 결국은 흥행은 흥행대로 날려 종국에는 "리그컵은 종이컵"이라는 조롱을 받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공격축구를 하겠다고 무승부시에 승부차기를 한다거나 서든데스제도를 도입하는 등, 골 수를 늘려보겠다고 별별 짓거리를 다 했지만, 1회차 대회부터 수비축구를 한 일화가 우승을 함으로써 지나친 실험정신은 변화를 꾀하지 않으니만 못하다는 진리를 증명하고 말았다.[9] 이런 촌극 끝에 결국에는 승점체계가 국제경기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승3무1 방식으로 감으로써 당시 욕이란 욕은 다 먹었다. 흥행이라는 미명하에 한 행동이 모두가 뻘짓이 된 것.
리그컵이 태생부터 이러다보니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포항 감독이었던 파리아스는 격에 맞지 않는 지나친 경기일정을 꼬집으며 제법 강도높은 비판을 했을 정도. 리그컵의 규정변천을 살펴보면 과유불급이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3.2.3. KFA의 문제 ¶
KFA가 구단들과의 의견조율이 실패하여 리그컵과 관련한 협조를 구하지 못했던 것도 리그컵에 크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구단들은 10만 달러를 전액 상금화를 생각하였는데, KFA는 이걸 일부만 상금으로 쓰고 나머지는 KFA에서 아마추어를 지원할 자금으로 돌릴 생각을 갖고 있어서 1회 아디다스컵은 "상금은 있는데 금액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되었다. 당초에 이는 아디다스컵이 열리게 된 이유가 구단들과 제우교역측과의 논의에서 "스폰금액은 전액 상금으로 쓸 것"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갔는데 KFA가 이를 계약서를 찍을때 "협회에 일임함"으로 이야기를 바꿔버려서 협회와 구단사이에 골이 생기게 만들어버렸다. 해당 기사를 보면 알겠지만 아디다스컵의 창설을 주도한 건 협회가 아니라 구단이며, 이는 구단의 수익을 위한 상금배분을 협회가 개입함으로써 제대로 수틀린 것. 제우교역측은 명백히 "프로구단을 위해 사용하길 바람"인데 KFA는 프로리그를 위한 돈을 멋대로 아마추어 사업에 쓰겠다고 나섰으니 구단들이 이 대회를 심정적으로나마 보이콧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4.1. 상금과 위상 ¶
아디다스컵이 처음 열렸던 시점만 하더라도 K리그와 사실상 동등한 수준의 대우를 받았던 이유 중 하나는 많은 상금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와서 과거 한국프로축구와 관련된 기사를 살펴봐도 리그컵이 처음 열렸을 당시에는 정규리그보다는 아디다스컵 관련기사를 찾기가 더 쉬울 정도다. 10만달러 규모의 상금은 당시 국가대표 대회로 간주할 수 있었던 대통령배 대회를 빼면 축구계 최고액이었으니 당연히 화제를 몰고 올 수 밖에 없었고 일반인들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었던 상황. 물론 이건 총 상금규모고 실제로 우승팀은 3000만원, 준우승팀은 1500만원을 받았지만 이것만으로도 이런 사실은 명백히 K리그와 차별할 수 있는 위상을 심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K리그도 상금제도를 대폭 개선하면서 이 위상이 바뀌게 되었다.
K리그가 스폰을 받기 시작한 94시즌에는 1년동안 정규리그를 마치고 우승팀에게 3000만원을 주었다. 이때는 우승상금만 보면 아디다스컵과 같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정규리그와 리그컵간에는 동등한 수준의 대우를 하고 있었다고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직후인 95년도에는 최대 획득가능한 우승상금이 1억 5천만원으로 책정되며 리그컵과 차이가 좁혀지기 어려울 정도로 벌어지게 되었다.[10] 전기나 후기 중 하나만 우승해도 리그컵보다 더 큰 업적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생기면서 리그컵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게 된다.
4.2. 리그컵의 존재 이유 상실 ¶
AFC 챔피언스 리그의 개편과 함께 FA컵의 위상이 리그컵을 명백히 넘어서게 됨은 물론이고, 이 두 대회의 흥행과 함께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리그컵을 구태여 운영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최초에 리그컵을 기획하게 된 이유가 한국프로축구의 발족과 함께 늘 대두되었던 부족한 경기수를 채우고 흥행을 도모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리그컵이 탄생하고 10여년이 지나니 팀 수가 3배가량 늘어나 경기 수가 부족하지도 않고, 상금은 그다지 오르지도 않아 팀이 리그컵에 참가할 때마다 주전선수를 대폭 기용하지도 않아 흥행을 기대하기도 어려워졌다. 오히려 비주전 선수들은 R리그에서 뛰면 되기 때문에 리그컵이 초창기에 갖고 있던 이점들을 하나 둘씩 잃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리그컵은 K리그 팬들 사이에서도 외면받고 있었던 것도 사라지게 된 이유가 되었다.
4.3. K리그 승강제 도입관련 ¶
2009년 AFC의 ACL 참가기준 발표에 따라 첫 승강제가 이루어졌던 2012시즌은 정규 라운드만 치룬게 아니라 스플릿 시스템을 도입하는 과정에서 16개팀 44라운드라는 살인적인 일정이 잡혀있었다. 이 밖에도 A매치기간에 리그를 운영할 수 없는 기간, ACL, FA컵 등과 겹치는 일정을 고려하면 도무지 리그컵을 넣을 수 있는 여력이 안 되었던 것. 단순히 16개팀이 1판씩 토너먼트를 치뤄도 최대 4라운드에 해당하는 일정을 치뤄야 하는 수준이었다.
또한 AFC에서는 리그컵에 대해 "ACL 참가티켓과는 관련없는 대회"라고 못박으면서 가장 중요하지 않는 대회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다보니 K리그 팬들 사이에서도 종이컵 취급을 받던 리그컵 폐지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또한 AFC에서는 리그컵에 대해 "ACL 참가티켓과는 관련없는 대회"라고 못박으면서 가장 중요하지 않는 대회로 전락해 버렸다. 이러다보니 K리그 팬들 사이에서도 종이컵 취급을 받던 리그컵 폐지는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5. 여담 ¶
K리그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지만 어쨌거나 현재로써는 공식 기록을 찾기가 가장 어려운 대회가 되었다. 리뉴얼 이전 한국프로축구연맹 홈페이지에서도 이 대회에 대한 정보를 찾는건 상당히 어렵다. 비교적 협회보다 자료정리가 더 잘 되어 있고, 일반에 공개하는 자료양이 훨씬 많은 연맹임에도 그 자료를 찾기란 쉽지 않다.[11]
특히 관중과 관련된 부분은 믿기가 좀 곤란한게 이 대회는 단 한번도 실 관중 집계가 단 한번도 이루어 진 적이 없어서 관중 동원력도 사실 언급하기 껄끄러운 부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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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폐지라고는 했지만 2016년 기준,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는 아직 리그컵을 공식경기로 보고 있다. 이는 다시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지 재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둔 셈이다.
- [2] 85년도 기준, 당시 8개 팀이 홈 & 어웨이로 3번씩 만나는 구조였기 때문에 21경기밖에 되지 않았다.
- [3]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도 "1992년, 정규리그 이외 최초로 별도 컵대회인 아디다스 “컵” 신설"이라고 밝히고 있을 정도로 당시 대회는 그 누구도 관심갖지 않는 대회였다.
- [4] 리뉴얼 이전 자료에는 남아있다.
- [5] 잉글랜드의 칼링컵과 마찬가지로 스폰서가 원하는 타이틀을 달아주는 형식이다.
- [6] 당시 기사를 보면 시대의 흐름을 알 수 있다. 기사만 보면 재정자립을 위해 해외업체와의 협력도 꼭 필요하다는 협회의 주장이 일견 타당해 보일 수는 있으나 완산 푸마의 7구단 합류 과정에서 외국 스폰서 이름이 붙었다는 이유로 참가를 못하게 된 사례를 보면 한국축구계가 왜 이렇게 이상하게 굴러가는지 수긍된다.
- [7] 2003년은 후원사를 구하지 못해 중단
- [8] 92년도 여름을 기준으로 당시 환율이 1달러당 800원 정도였으므로 총상금 규모는 대략 8000만원선으로 볼 수 있다.
- [9] 첫 대회때 우승한 일화는 3승 4무 2패에 골득11 골실10로 공격축구와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오히려 일화보다 더욱 공격적인 축구를 했던 LG가 4승 1무 3패 골득15, 골실11로 2위가 되는 웃긴 상황이 연출되었다.
- [10] 1억5천만원을 셋으로 나눠 전기리그 우승팀, 후기리그 우승팀, 종합우승팀(통합챔피언 우승)에게 주었다. 한 팀이 전기리그 우승과 후기리그 우승을 둘 다 차지하면 1억5천을 그 팀 혼자서 갖고, 전기 우승팀과 후기 우승팀이 다른 팀이라면 5천만원은 준우승자에게 주는 상금이 되는 셈.
- [11] 협회쪽은 FA컵의 위상이 상당함에도 경기 관중 수나 카드 이력등을 별도로 공개하고 있지 않다. 협회가 비판받는 대표적인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