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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기웅
         2루수 부문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수상자 (2루수)|골든 글러브]]를 세 차례(1989, 1990, 1993) 차지했다. [[유격수]] [[류중일]] - 2루수 강기웅의 키스톤 콤비는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좋았던 콤비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거꾸로 쳐도 3할이라는 천재적 타격을 자랑했으나, 약한 체력이 단점이었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6872 5연타석 홈런의 천재 2루수 강기웅] - 오마이뉴스</ref> 통산 타율 0.292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실업야구팀 한국화장품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던 [[1988년]] [[10월 25일]]에 [[우리은행|상업은행]]과의 경기에서 세계 최초 5연타석 홈런을 기록한 적이 있다. [[1995년]] [[5월 13일]] 대전에서 [[한화 이글스]]와의 대구에서 1루수 [[이승엽]]과 충돌하여 입은 발목부상이 악화되어 내리막길을 걸었고, 부상 등의 이유로 [[백인천]] 감독과 불화를 일으켜 [[백인천]] 감독이 그를 [[1996년]] 시즌 후 외야수 이희성, 투수 최광훈을 상대로 [[현대 유니콘스]]에 트레이드했으나, 그는 삼성이 아닌 다른 팀에서는 뛸 이유가 없다고 의사를 밝혀 트레이드를 전격 거부하고 [[1997년]] 2월에 현역에서 물러났다.<ref>[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SH.php?url=baseball/201102/sp2011020917031657360.htm&cd=2101&ver=v002 명품 2루수 강기웅] - 한국일보</ref> 은퇴 후 유통업에 종사했다. 은퇴 때 그는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말을 남겼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295&aid=0000000356 천재 강기웅의 인생 유전] - 박동희 칼럼</ref> [[2011년]] [[8월 10일]]에 타격코치로 선임되어 친정 팀에 돌아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5206016 삼성, 2군 타격코치로 강기웅 씨 영입] - 연합뉴스</ref>
  • 강동우
         || [[류중일]](1987~1999) || → || '''강동우(2000~2005)''' || → || [[강봉규]](2006) ||
         피나는 노력으로 재활을 마치고 2000년 시즌 막판에 겨우 복귀해서 다시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약하지만, 신인 시절의 성적은 다시 나오지 않았고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도 [[류중일]] 코치가 선수 시절에 달던 1번을 달고 뛰며 타격에서는 나름대로 제몫을 하며 삼성의 주전 외야수로 활동했고, 2002년 [[김응용]] 감독 아래에서 타율 0.288, 9홈런으로 어느 정도 부활에 성공하였다. [[2002년 한국시리즈]] 1차전에서는 2001년 데뷔하여 삼성의 붙박이 타자가 된 왕년의 좌타 [[라이벌]] [[박한이]]와 함께 [[테이블 세터]]를 이뤄 활약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즌 타율이 2할 중후반에 머무르는 바람에 '비운의 톱타자'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후 [[선동열]] 감독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외야진 보강 차원에서 2006년 3월 [[두산 베어스]]의 [[강봉규]], [[김창희(야구)|김창희]]를 상대로 [[트레이드]]되고 말았다. 당시 삼성 팬들은 격분하여 난리를 쳤다. 이는 훗날 [[양준혁]]의 등떠밀기식 은퇴, [[이승엽 와도 자리없다]]는 발언 등과 함께 [[선동열]]의 삼성 프랜차이즈 내치기 사건 중 하나다.
         선수시절 등번호는 20-1-24-31-2-3번 순이다. [[삼성 라이온즈]]의 1번 라인인 [[황규봉]]-[[류중일]]-강동우-[[윤성환]] 중 한 명. '''불사조같은 선수시절을 보낸 선수.'''
  • 권혁
         그러나 이후부터는 페이스를 좀 되찾은 모양인지 ~~왠일로~~ 호투하면서 살아나는가 했더니, 8월 24일 청주 한화전에서 8회 3:2로 앞선 상황에서 나와 미친듯이 처맞고 1사 만루에서 강판, 바로 교체한 안지만이 그의 뒷처리를 하려다 오히려 역전을 허용하고 패전투수가 되었다. 가뜩이나 타선 침체로 인해 3연패에 빠져 있었던 팀을 오히려 4연패로 몰아넣고... 결국 이날 안일하게 경기 운영하다 경기를 내준 [[류중일]], 9회말 흔들리던 [[데니 바티스타|바티스타]]를 상대로 영웅스윙을 시전하다 폭풍삼진당한 [[채태인]]과 함께 삼성 팬들에게 개같이 까였다.[* 2011시즌 권혁의 성적은 1승 3패인데 '''3패가 모두 한화전'''이다. 그 때문이었을까 삼성은 이 시즌에 유일하게 한화에게 상대전적에서 뒤졌다. 1승은 7월 19일 SK전.] 역시 이놈은 [[답이 없다]]...라고 생각하던 차 8월 26일 [[두산 베어스]]와의 경기에서는 8회에 등판하여 또 ~~왠일로~~ 호투하면서 2연승의 밑거름을 다져놓았다. 좀 들쑥날쑥해도 두산에게만큼은 강한 점도 있었는데다가 무엇보다 이날은 구속이 어느정도 돌아와서 고무적이었다. 올시즌 내내 원래 부족한 제구에 구속까지 안나와서 고전하던 차에 나온 이날 호투는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었다.
         기본적으로 제구가 좋은 투수는 아니지만 빠른 구속과 묵직한 구위로 찍어눌러도 타자들이 맥을 못 췄기에 초기에는 그럭저럭 괜찮은(사실 뛰어나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성적을 냈다. 허나 2010년 이후부터는[* 특히 위에서 언급했던 2010년 플레이오프의 보크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었을 거라는 의견이 많다.] 혹사 누적으로 이전보다 팔스윙이 느려지고 그로 인해 공의 무브먼트나 구위도 저하되며 삼성 철벽 불펜진의 일원으로서 신뢰를 얻지 못하였다. 그나마 삼성 불펜진이 굳이 권혁이 빠지더라도 워낙 막강이라 그냥 묻어가는 모양새였다.[* 특히 2011년에 그런 모습이 확연하였다. 겉보기 성적과 실제 투구내용과의 상당한 갭이 있다.] 그리고 2013년, 불펜진에 균열이 생기면서 본격 까임의 대상으로 등극. 하지만 권혁 이외에는 쓸만한 삼성 왼손 불펜이 1, 2군 통틀어 전무한지라 삼성 불펜진의 아픈 손가락이자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았다. ~~[[차우찬]]은 원 포인트로 쓰기엔 너무 아깝고, [[백정현]], [[조현근]]은 1군으로 올리기도 영 애매하다~~[* 보충 설명을 하자면 삼성 시절 권혁은 몸이 늦게 풀리는 편이라 마운드위에서 타자를 상대로 던지면서 감을 잡는 스타일이였다. [[선동렬]] 아래에선 구위가 엄청날때는 감을 잡는 동안 구위로 버텼지만, 혹사와 보크 사건 이후인 [[류중일]] 아래에선 구위가 떨어지며 감을 잡는 동안 팩질을 하거나 두들겨 맞았다.][* 물론 몸이 완전히 풀리면 위력적이지만 그때까지 장작을 쌓을 확률이 꽤 높아서 위험부담이 있었다. 하지만 셋업에는 [[안지만]]이 있는지라 삼성벤치에서는 굳이 권혁을 올리는 위험한 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안지만도 불안하면 8회 2사에 [[오승환]]을 올리는 치트키가 있었다(...)~~]
  • 김건한(야구선수)
         묵직한 공을 가진데다 예전 이름 때문에 별명은 [[로저 클레멘스]]에서 따온 '걸레멘스'. 줄여서 '''걸레'''로 불린다. 덕분에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 '''걸레가 되듯 까인다'''(...) 만약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을 보이면 '''수건'''으로 상승(...) 하지만 2013년의 부진으로 인해 말 그대로 [[걸레]]와 '''류희걸'''[* [[류중일]] 감독의 [[양아들]]이라는 뜻. 특히 2013 시즌 [[김상수(타자)|다]][[차우찬|른]] [[채태인|양]][[최형우|아]][[배영섭|들]]들이 자립 선언을 하면서 팬들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특히 안티 [[류중일]] 성향이 강한 [[사자 사랑방]]에선 인간 취급 못 받는다.]이라는 별명만 남았고, 그럼에도 [[2013년 한국시리즈]] 엔트리에 당당히 합류, 1차전에 패전처리조로 등판해 2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는 활약을 선보이며 별명이 하나 더 늘었다. '''우승반지 도둑놈'''(...)
         이후 7월에는 7월 3일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2이닝 3실점, 7월 9일 [[SK 와이번스]]전에서 0⅔이닝 2실점, 7월 25일 [[NC 다이노스]]전에서 1이닝 1실점 등 7월에 등판한 5경기 중 3경기에서 실점했다. 그리고 그 사이 [[이동걸]]이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결국 이동걸에게 밀려 8월 3일 1군 엔트리에서 말소되었다. [[김기태(1987)|김기태]]가 1군에서 영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면서 8월 13일 김기태를 대신해 10일만에 1군에 올라왔다. 이미 1군에서 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내려간 선수들 때문에 2군 투수 중에서 올릴만한 투수가 없었기에 김희걸이 올라온 것. 같은 날 9회초에 등판해 2실점을 하면서 클래스를 보여줬다. 사실상 성적이 좋아서 1군에 올라가기보다는 이우선과 심창민의 부상과 김현우, 백정현의 부진 등에 따라 엔트리가 비면 땜빵하러 가는 수준.~~그리고 [[류중일]] 감독의 양아들이니까~~
         그러나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 1차전에 팀이 스코어 7:1로 뒤진 8회초에 등판해 2이닝 18투구수 1볼넷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그래도 패전조로써 이닝은 먹어줬다. 삼성 팬들은 불펜 누수를 최소화했다는 안도와 함깨 ~~김희걸의 양아버지~~[[류중일]] 감독이 이날 투구를 보고 김희걸을 박빙 상황에 올리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하지만 7차전까지 가면서 그렇게 큰 점수차가 난 경기가 나오지 않으면서 김희걸은 더 이상 경기에 출장하지 못했고, 팀이 극적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3년 연속 페넌트레이스&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자 반지 하나를 ~~날로~~ 추가했다. ~~하지만 [[조현근|꼴랑 ⅓이닝동안 장작만 거하게 쌓아놓고 반지 먹은 투수]]가 있는데…~~
         4월 한 달 동안 등판 횟수가 많았다. [[류중일]] 감독이 상대적으로 중간계투를 덜 혹사시키는 편이라 심한 혹사는 아니지만 [[삼성 라이온즈 갤러리]]에서는 임창용의 1999년과 비교하여 '''애니걸'''이라는 별명도 붙여 주었다. [[대구방송]] 라디오 인터뷰에서 올 시즌 잘 던지는 이유는, [[류중일]] 감독이 2013년 시즌이 끝난 후에 "올해처럼 하면 짤린다"고 말해서 [[김태한]] 코치랑 엄청 열심히 훈련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8월 27일 [[심창민]]을 대신해 1군에 올라왔다. 그런데 전날 경기에서 [[류중일]] 감독은 심창민을 내리고 [[박근홍(야구선수)|박근홍]]을 올린다고 했음에도 박근홍이 아닌 김건한을 올리면서 삼성팬들은 의아했다. 박근홍이 2군에서 1점대의 평균자책점을 찍고 있던 반면, 김건한의 평균자책점은 9점대였다. 아니나 다를까 롯데전에서 아웃카운트를 1개도 못 잡고 5실점하면서 하루만에 2군으로 내려갔다. 이날 부진했던 게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17&article_id=0002502919|골반 부상 때문이었는데]], 아시안 게임 휴식기간이 지난 10월에도 1군에 복귀하지 못했다.
  • 김광수 (1959년)
         [[2008년 하계 올림픽]] 코칭스텝으로 선출되어 금메달을 이끌었다. [[류중일]]처럼 데뷔 때부터 단 한 팀에서만 활동한 야구인 중 한 명이며, [[2011년]] 6월 [[김경문]] 감독이 성적 부진으로 사임하자 1군 감독 대행을 맡아 시즌을 마무리한 후 [[김진욱]] 투수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났다. 시즌 직후 대한민국 최초의 독립리그 야구단 [[고양 원더스]]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전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프리미어12 3루/주루코치를 맡았다. 김광수 수석코치는 지난 2012년 독립야구단 고양 원더스 때부터 2015년 한화로 넘어와 지금까지 6년간 김 감독을 수석코치로 지근거리에서 보좌했다.
  • 김시진(야구감독)
         인터뷰에서 밝힌 바로 [[꼴뚜기]]는 친구 별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친구가 야구를 그만두면서 얼떨결에 꼴뚜기란 별명이 김시진에게 넘어온 것. 본인은 [[류중일|야통]]이나 [[한대화|야왕]]같은 별명을 부러워하는 것 같지만 현실은 꼴뚜기…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레알 '''꼴'''뚜기가 되었다.
          * 지도자가 된 이후 [[삼성 라이온즈|삼성]]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3&article_id=0002013520|선동열 감독의 임기완료까지 2군 감독으로 있다가 1군 감독으로 승격되는 조건]]이었고 계약조건도 좋았지만, 자신이 [[삼성 라이온즈|삼성]]으로 갈 경우 김시진 사단으로 불리는 코치들의 일자리가 보장되지 않기에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선동열]] 이후 실제 1군 감독 자리를 받은건 대구중-경북고 출신으로 삼성을 한결같이 지켜온 프랜차이즈 스타 [[류중일]] 수비코치였다. 현재의 삼팬들에게는 김시진 영입이 현실화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보는 중.] 또한 기아 타이거즈에서도 투수 코치로 영입 제안을 했으나 이루어지진 않았다.
  • 김용국 (야구인)
         [[한양대학교]] 졸업 후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한 [[1985년 한국프로야구]]부터 주전 [[3루수]]로 뛰었지만 [[1987년 한국프로야구]]에는 [[류중일]]의 입단으로 설 자리를 잃어 [[유격수]]에서 전향했던 [[오대석]]과 병용으로 출전했다.
         그러나, [[류중일]]이 다음 해인 [[1988년 한국프로야구]] 때 팔꿈치 수술로 출장 입지가 줄어들어 [[오대석]]이 [[류중일]]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서 [[1988년 한국프로야구]]부터 [[1993년 한국프로야구]]까지 줄곧 팀의 주전 [[3루수]]로 활약했다. 또한 1991~1992년, 2년간 팀의 주장을 맡으면서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였다.<ref name="imaeil" /> [[1루수]] [[김성래]], [[2루수]] [[강기웅]], [[유격수]] [[류중일]], [[3루수]] 그로 이어지는 내야 수비진은 리그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그는 뛰어난 수비 실력에 비해 타격 능력이 떨어진다는 점 때문에 아쉽게도 매번 [[해태 타이거즈]] [[3루수]] [[한대화]]에게 밀려 [[한국 프로 야구 골든 글러브 수상자 (3루수)|3루수 골든 글러브]]는 단 한 차례도 수상하지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연봉 5천만원에 [[LG 트윈스]]의 코치로 활동하기 시작한<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4551908 <프로야구소식> LG, 김대진, 김용국코치 영입]</ref> 그는 추후 자리를 옮겨 [[2006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6 시즌]]부터 [[2009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09 시즌]]까지 친정 구단 [[삼성 라이온즈]]에서 수비 코치로 활동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20171 삼성, 김용국·강성우 코치 영입]</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60865 [사진]김용국 코치,'아픈 데는 괜찮나?'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109&aid=0000060876 [사진]김용국,'글러브 가볍고 괜찮네!' :: 네이버 뉴스<!-- 봇이 따온 제목 -->]</ref> [[2009년]] 친정 팀의 코치 재계약에 실패한 후 [[2010년 대한민국 프로 야구|2010 시즌]]엔 [[넥센 히어로즈]]에 자리를 옮겨 2군 수비·작전·주루 코치로 활동하다가<ref>''OSEN'' - 2009년 11월 기사 [http://www.osen.co.kr/news/Sports_View.asp?gisano=G0911190106 "히어로즈, 김용국 전 삼성 코치 영입"]</ref> [[류중일]]이 감독으로 부임한 후 부름을 받아 친정 팀의 코치로 복귀했다.
         2016 시즌 후 [[류중일]]이 [[삼성 라이온즈]] 감독에서 물러난 후에 [[삼성 라이온즈]]과 재계약이 불발된 후 [[김진욱]]이 감독으로 부임한 후 부름을 받고 [[kt 위즈]]로 팀을 옮겼다.
  • 김인식 (1947년)
         |전임자 = [[김응용]]<br />[[김경문]]<br>[[류중일]]
  • 김인태(야구선수)
         어릴 적 [[삼성 라이온즈]] 리틀야구단에 소속되어 뛰던 선수였기 때문에 [[류중일]] 감독이 애정을 갖고 지켜본 선수였다고 하여 삼성팬들은 아쉬움을 표하고 있다. NC 스카우터, 두산 스카우터, 선수 보는 능력이 뛰어난 류중일 감독이 모두 입을 모아 칭찬할 만큼 고교 때의 모습은 공수주 모두 나무랄 데가 없는 팔방미인.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1라운드 외야수는 10년 동안 10명이 채 안 되는 것을 볼 때 두산의 기대치를 약간이나마 엿볼 수 있다. 2012년도 드래프트 당시 형편없는 공격력과 계속되는 외야진의 삽질을 지켜본 두산팬들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 김정혁
         다만 팬들의 의견과는 달리, 현장에서 김정혁의 1군 중용에 대해선 부정적인 상황이다. 우선 [[류중일]] 감독은 수비가 되는 선수를 1군으로 올리는 경향이 있고, 거기다 삼성의 주전 3루수 [[박석민]]은 김정혁과 동갑이다. 거기다 지명타자로 가자니 삼성의 [[지명타자]] 포지션에 오를 선수들은 '''[[이승엽]]'''. '''[[최형우]]''', [[채태인]]이다.
         그동안 주전 1루수를 맡았던 [[구자욱]]의 타격 페이스가 떨어진지라 1군에 올라오자마자 7번타자 1루수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1군에서는 기회를 잘 못 받았지만, 팀 내에서는 소문난 노력파라서 그런지 [[류중일]] 감독이나 [[최형우]]나 김정혁의 활약을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396&article_id=0000307495|기대하는 말을 했다]].
          * [[사자사랑방|모 카페]]에서는 [[장성우|아이돌]] [[갈매기 마당|취급을 받고 있다]]. ~~사사돌~~ 이 카페의 운영자는 단지 김정혁을 1군에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류중일]] 감독을 상대로 입에 차마 담기 힘든 수위의 욕설을 수 차례 올렸을 정도. 자세한 건 항목 참고. 이후 2016년과 2017년에 출장 기회를 받아 활약할 때만 난리치고 이후 좋지 않은 선구안으로 붕붕거리며 부진하면 입을 닫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 김정혁(1985)
         다만 팬들의 의견과는 달리, 현장에서 김정혁의 1군 중용에 대해선 부정적인 상황이다. 우선 [[류중일]] 감독은 수비가 되는 선수를 1군으로 올리는 경향이 있고, 거기다 삼성의 주전 3루수 [[박석민]]은 김정혁과 동갑이다. 거기다 지명타자로 가자니 삼성의 [[지명타자]] 포지션에 오를 선수들은 '''[[이승엽]]'''. '''[[최형우]]''', [[채태인]]이다.
         그동안 주전 1루수를 맡았던 [[구자욱]]의 타격 페이스가 떨어진지라 1군에 올라오자마자 7번타자 1루수로 선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다. 1군에서는 기회를 잘 못 받았지만, 팀 내에서는 소문난 노력파라서 그런지 [[류중일]] 감독이나 [[최형우]]나 김정혁의 활약을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396&article_id=0000307495|기대하는 말을 했다]].
          * [[사자사랑방|모 카페]]에서는 [[장성우|아이돌]] [[갈매기 마당|취급을 받고 있다]]. ~~사사돌~~ 이 카페의 운영자는 단지 김정혁을 1군에 올리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류중일]] 감독을 상대로 입에 차마 담기 힘든 수위의 욕설을 수 차례 올렸을 정도. 자세한 건 항목 참고. 이후 2016년과 2017년에 출장 기회를 받아 활약할 때만 난리치고 이후 좋지 않은 선구안으로 붕붕거리며 부진하면 입을 닫는 행태를 보이고 있다.
  • 김진욱(스포츠해설가)
         한 예로, '김진욱의 양아들'이 누가 있는지 떠올려보라. 그 [[류중일]]마저도 욕 배부르게 먹어가며 [[김상수(타자)|김상수]]나 [[채태인]]을 양아들로 꾸준히 출장시켰지만, 김진욱은 몇 달 써 보다가 못하면 그냥 라인업에서 내려 버렸다. 당장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김진욱의 양아들이라고 불리는 선수로 [[오재일]], [[최준석]], [[정수빈]], [[이원석(1986)|이원석]], [[이혜천]] 등이 나오는데, 저 선수들 중에 2013년 풀 타임 선발을 뛴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더군다나 [[이혜천]]은 그렇다 쳐도 [* 심지어 [[이혜천]]은 2013 시즌에 단 9.1이닝만 출전했다.] 나머지 선수들은 양아들로 기용해도 별 문제가 없는 선수들이다.[* 정수빈은 14시즌부터 주전이 되고 15 한국시리즈 MVP가 되었다. 오재일도 15시즌 중후반부터 외인들을 밀어내고 1루를 차지하더니 미칠듯한 홈런을 생산해 내는 중이며, 최준석은 FA로 롯데로 이적 이후 풀타임 소화를 해내며 좋은 성적을 내고 있다.] 2013년 포스트시즌에서 돌풍을 일으킨 이유도 컨디션이 좋은 선수들 위주의 기용이 먹혀들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상대팀이 자멸하듯 무너졌다는 점 때문에 '''운장'''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사실 유력한 4강권 경쟁팀이었던 기아와 SK가 추락하고, 막판까지 넥센과 3 4위 순위 결정을 놓고 치열하게 다툰 등 2013년 두산 전력은 2000년대 후반 들어서 역대 포스트시즌 진출 팀 중 최약체로 평가받고 있었다. 심지어 2012년 두산보다도. 오죽했으면 한국시리즈 전에 [[류중일]]의 경험과 김진욱의 천운이라는 식의 [[http://mlbpark.donga.com/mbs/articleV.php?mbsC=kbotown&mbsIdx=1361315|기사도 떴다.]]
         예전에는 '''제대로 감독 교육도 받은 적이 없는 [[무능]]한 감독이 2시즌째 앉아 있다는'''식의 서술도 위의 비판 문단에 있었는데 이것은 '''지극히 편향적인 서술'''이다. 그렇게 치면 [[2011년]] 이후의 대대적인 감독 경질 시기 이후에 데뷔한 타 팀의 [[염경엽|초보]][[김기태(1969)|감독]]들[* 삼성에서 오랫동안 코치를 한 [[류중일]]과 메이저리그와 SK에서 오랫동안 코치를 한 [[이만수]]는 해당이 안 된다. 그러나 염경엽과 김기태도 (김진욱처럼) 짧은 기간이지만 코치를 하다가 감독이 된 케이스라 초보라 하기엔 미묘한 편. ~~또한 만수는 SK팬들로부터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기 때문에 해당이 안된다~~]이 해당팀 팬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리고 고교야구 감독 경력을 최소한의 감독 교육으로 인정 안한다는 식의 서술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 5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돌[[커피]]'''라 그러며 무능하다고 까대던 감독은 '''악조건을 뚫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가는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두산은 '''[[김태형(1967)|또 다른 초보 감독]]으로 [[2015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과거 [[김성근]]의 [[LG 트윈스]] 시절과 유사한 점이 많다. 2년차에 정규시즌 4위로 시작해 [[한국시리즈]]를 [[준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인해 경질을 당함, 그 다음 해의 감독은 정규시즌 6위를 기록하고 경질을 당한것 등이 그 예다. 물론 좀 더 파고들면 다른 점이 많지만 1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감독 2년차의 [[준우승]] [[감독]]이 경질당하는 사례가 일어났다는 것은 야구판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선동열이 [[2010년]] 준우승하고 2011년 류중일이 감독으로 통합 4연패를 이뤘기 때문에 이런 효과를 기대하고 김진욱을 경질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다음 감독이 [[송일수]]이기 때문에...
          * 선수 시절의 전성기가 짧았기 때문인지 현역 감독 중 인지도가 가장 딸렸다.[* 2012년 기준 8개 구단 감독 중에 [[김시진]], [[류중일]], [[선동열]], [[이만수]], [[한대화]], 는 리그를 씹어먹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며 [[양승호]]만이 선수 시절보다 더 유명세를 탄 경우. 이쪽은 다름 아닌 '''양승호구'''. 2013년에는 한대화가 빠져나가고 김응용이 한화 감독으로 왔고 정작 한대화는 KIA로 김시진은 롯데로 [[염경엽]]은 넥센의 새 감독으로 임명됐다. 염경엽은 선수시절 당시 커리어와 인지도에서는 김진욱에게 밀리나 LG 코치 시절 [[프런트]]의 배후 흑막이라는 루머로 유명세를 타서(...) 인지도가 더 높다.] 실제 2012년 한국프로야구 미디어데이에서도 김진욱 감독은 다른 감독들에 비해 주목을 확실히 덜 받았고, 말수도 적었다. ~~사실 [[링고 스타]]와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 게다가 일본 세이부 라이온즈의 프랜차이즈 스타이자 우승감독 출신인 [[이토 쓰토무]]가 수석코치로 부임하면서 일부 팬들은 김진욱 바지감독 이토 실세 코치로 여겼다. 아래 짤은 사실이 아닌 개그다. 실제로는 이토 코치랑 의견 차이가 커서 이토는 거의 놀다가 갔다고 한다. 차라리 짤이 진짜라면 팀이 이렇게 돌아가진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의견도 있다.
  • 김한수 (야구인)
         [[1994년]] 시즌 팀의 [[1루수]] [[김성래]], [[2루수]] [[강기웅]], [[유격수]] [[류중일]], [[3루수]] [[김용국 (야구인)|김용국]]으로 이어지는 리그 최고 수준의 내야 수비진에서 그는 뛸 자리가 없었다. 하지만 [[김용국 (야구인)|김용국]]이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되면서 기회가 생겼고, 당시 감독이었던 [[우용득]]은 신인이었던 그를 과감하게 기용하였다. 프로 입단 첫 해 2할대 타율과 10홈런을 기록하며 준수한 모습을 보여 준 그는 [[병역]] 의무로 인해 다음해 방위병으로 2년간 복무를 이행하였다. 1995년 ~ 1996년 동안 그는 [[무릎]] 부상을 당하면서 방위 복무 기간 동안 힘들게 재활 훈련을 했다. 부상 회복과 동시에 [[1996년]] 5월에 제대한 그는 1군 주전 자리를 꿰차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였고, 1997 시즌 [[이승엽]]과 함께 [[삼성 라이온즈]]의 신예 스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ref name="kbsn" /><ref name="park1" /><ref>[[데일리안]] - 2009년 8월 기사 [http://www.dailian.co.kr/news/n_view.html?id=96967&sc=naver&kind=menu_code&keys=7 "‘은퇴’ 김한수… 1997년 그리고 세대 교체"]</ref> 방위 복무 기간이었던 1995 ~ 1996년을 제외하고 매년 100경기 이상 출장하였다.
         [[2009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센트럴 리그]] 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으며 2군 타격 코치로 1년 간 몸담은 후 귀국했다. [[2010년]] 시즌부터 다시 [[삼성 라이온즈]] 2군 타격 코치를 맡았고<ref>[[일간 스포츠]] - 2010년 9월 기사 [http://isplus.joins.com/article/article.html?aid=1501719 "삼성, 프랜차이즈 스타 대접 ‘톡톡’"]</ref> [[2011년]] 시즌부터 1군 타격 코치를 맡았다. [[2016년]] [[10월 15일]]에는 [[류중일]]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의 제 14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김한수는 감독으로서의 기본 자질을 보여주지 못하고 비판을 받고 있다.
         |전임자 = [[류중일]]
  • 문선엽
         전지훈련을 앞두고 [[류중일]] 감독이 [[이현동(야구선수)|이현동]]과 더불어 기대주로 지목했다. 오키나와 전지훈련에서도 코칭스태프가 뽑은 MVP 4명 중 1명[* 투수, 타자 2명씩 뽑았다. 다른 3명은 [[노진용]], [[백정현]], [[채태인]].]으로 결정되었다. 이후 시범경기에서 주전으로 출장하면서 괜찮은 타격감을 보였지만, 불안한 수비 때문인지 결국 개막전 엔트리에는 들지 못했다.
  • 문성주
         [[엠엘비파크]]의 2군 경기 목격담에 의하면 10라운드 지명임에도 불구하고 퓨처스에서 1번타자 중견수로 선발출장 중이라고 했다. 성적도 시즌 초반이지만 3할 이상의 고타율에 홈런도 3개나 쳤다. 하위라운더 지명자이지만 의외로 잠재력이 있는 듯했다. [[류중일]] 감독도 인터뷰에서 지켜보고 있다고 밝혔다.
  • 박석민
         [[최형우]]가 시즌 초반 극도의 부진에 빠진 상황에서 4월 한달동안 0.344의 타율과 5개의 홈런을 날리며 [[이승엽]]과 함께 삼성의 중심타선을 지탱했다. 1번 [[배영섭]]과 4번 [[최형우]]가 슬럼프에 빠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류중일]] 감독은 9번 김상수를 1번으로, 5번에서 좋은 타격감을 유지하던 박석민을 2번으로 전진배치한다. 박석민은 2번 타순에서도 맹타를 휘둘렀지만 박한이가 부상에서 회복될 때까지의 임시직이라고 한다. 박석민 본인도 5번을 선호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최형우의 슬럼프가 길어지자 최형우가 5번으로 내려가고 박석민이 4번을 치게 되었다. 결국 최형우가 2군으로 내려가고 나서는 이승엽이 4번으로 가고 박석민은 3번을 치게 되었다. 최형우가 1군으로 복귀한 이후는 최형우를 이승엽 뒤에 세우지 않겠다는 류중일 감독의 뜻에 따라 박석민 - 이승엽 - [[강봉규]] - 최형우 또는 최형우 - 이승엽 - 박석민의 타순을 따라 3번 또는 5번 타자로 나서다가... 최종적으로는 4번으로 고정되면서 삼성의 중심 타선은 '''3번 이승엽 - 4번 박석민 - 5번 최형우'''가 되었다.
         8월 21일 [[롯데 자이언츠]]와의 대구 홈경기를 결장할 예정이었다. 이유는 [[나고야]]에 있는 어느 병원에 주사 맞으러 간다는 이유로(...)...[* 그러고는 19시경에 대구구장에 도착했다.] 그 날 [[홍성흔]]에게 홈런 2개와 5실점을 내준 상태에서 9회말 '''3-5'''까지 따라잡은 이후, [[류중일]] 감독은 2아웃 2루에서 박석민을 '''대타'''로 내서 그냥은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헛스윙 삼진으로 끝나고 말았다.
  • 박세웅(1995)
          * [[류중일|모 감독]]의 선수 보는 눈에 대해 평가할 때 [[김하성]]에 이어 자주 언급되는 선수이기도 하다.
  • 박영태(야구코치)
         [[양상문]]과 더불어 [[롯데 자이언츠]] 팬들에게 악의 축 취급을 받고 있는 코치로 1993년부터 코치로 있으면서 [[롯데 자이언츠]]가 [[8888577]]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여러번 코치진이 교체되는 중에도 뛰어난 코칭스킬 없이 굳건히 자리를 지킨 진정한 [[철밥통]]의 귀감이다. --오오 꼴무원--심지어 2010 시즌 들어서 죽어라 까이다 못해 분해되는 [[양상문]]도 중간에 두 번 나갔다가 왔지만[* 양상문은 2001~2002 시즌은 김성근 감독의 부름으로 LG 1군 투수코치를 맡았었다. 2004~2005 시즌은 롯데 감독을 맡았으며, 2006시즌은 MBC ESPN 해설, 2007~2008 시즌은 LG 1군 투수코치를 다시 맡았었다. 그러다가 LG가 꼴찌를 하자 LG에서 잘려서 롯데로 돌아왔다.] 박영태의 경우 1983년에 입단해서 코치로 전업한 1993년 이후 2010년까지 코치를 맡았다. --1982년에 입단했으면 [[KBO 리그]] 시작부터 롯데랑 함께한 건데 OTL--[* 어떤 의미로 보자면 현역시절부터 롯데를 지켰던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삼성 라이온즈]]의 외야수 [[장태수(1957)|장태수]]와 유격수 [[류중일]]을 생각하면 이해할 듯 싶다. 하지만 [[장태수(1957)|장태수]]와 [[류중일]]은 박영태에 비해 코치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으며, 그 시기에 팀을 우승시켰지만 박영태는...]
  • 박해민
         입단 이후 줄곧 1군에서 대주자, 대수비로만 투입돼 [[2014년]] 시즌 스프링캠프 당시에도 전력 외로 분류됐다. 그러나 [[2013년]] 시즌 후 입대한 중견수 [[배영섭]]의 대체 후보 [[정형식]]과 [[이영욱 (1985년)|이영욱]]이 동반 부진에 빠진 틈을 타 대타로서 빠른 발을 통한 기습 번트 안타를 연이어 쳐 내며 주목받았다. [[5월 9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첫 선발 출장해 4타수 2안타로 가능성을 보였으며, [[6월 7일]] [[한화 이글스|한화]]전에서 기습 번트 안타에 이은 2루 진루, [[6월 14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5타수 5안타 등 빼어난 기량을 연이어 펼쳐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에 의해 선발 중견수로 낙점받았다. [[7월 6일]] [[두산 베어스|두산]]전에서 [[노경은]]을 상대로 데뷔 첫 홈런을 쳐 내는 등 시즌 내내 발군의 활약을 이어가 팀의 정규 시즌 우승에 기여했다. 시즌 후 [[박민우 (야구 선수)|박민우]], [[조상우 (1994년)|조상우]]와 함께 신인왕 후보에 올랐으나 수상에는 실패했다.
  • 배영수
          * 삼성팬들은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의 팔꿈치를 희생해가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배영수에게 [[까방권]]을 부여해 주었으며, 이 후 토미존 수술 후유증으로 극도의 부진으로 빠졌을때도 비난의 목소리 하나없이 묵묵히 배영수를 지지해주었다. 2012년 배영수의 부활은 3년동안 영구까방권을 사용해준 팬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삼성팬이라면 배영수를 절대 까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 그럼에도 배영수를 깐다면 '올림픽 금메달 이후에 야구 보기 시작한 뉴비' 취급을 당했었다. 하지만 2014년 FA 협상에서 보인 모습 때문에 상황이 달라져 신규 팬이든 올드 팬이든 배영수를 더 우선시하는 팬과 삼성을 더 우선시하는 팬들로 갈려 까방권도 퇴색되고 있으며 갈수록 배영수를 금지어 취급 하는 경우가 많은 편. 커뮤니티별로 살펴보면 [[삼갤]]에서는 그 존재 자체로 금지어 혹은 조롱거리 취급을 당하며 사자후는 04년 한국시리즈를 지켜본 일부 팬들이 배영수를 동정적인 시선으로 보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경북고 진골이 삼성을 배신하고 갔다는 점 때문에 냉랭한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우호적인 곳은 [[사사방]]과 [[엠팍]]. 사사방은 기본적으로 선수보다는 구단 프론트(+[[류중일]])와 [[김성근]]을 더 싫어 하기 때문에 배영수보다는 삼성 프론트(+류중일)이나 김성근을 조롱하는 용도로 배영수를 언급하면 몰라도 배영수 자체를 욕하는 경우는 그 휴지통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든 편. 엠팍은 쓸데없는 키배거리를 만들기 싫어서인지 일부 삼성팬이나 한화팬이 삼성시절 배영수를 언급하거나 혹은 삼성팬이 한화로 간 이 후의 배영수를 조롱하는 글을 남겨도 서로 그러려니 하고 무시한다.
  • 백정현
         2010년 마무리 훈련부터 2011년 스프링캠프까지 기량이 많이 성장해 [[오치아이 에이지|오치아이]] 코치가 극찬했고 [[류중일]] 감독도 선발로 키우고 싶다고 얘기했지만 2011 시즌 개막 며칠 후 [[토미 존 서저리]]를 받았다. 당연히 2011년에 뛰지 못하고 2012년에 복귀했다.
         이후 [[류중일]] 감독의 지시로 [[김현우(야구선수)|김현우]]와 함께 BB아크행. 하지만 한화 2군과의 연습경기에서도 부진했다. 퓨처스리그 일정이 끝난 후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다가 9월 29일 1군에 올라왔다. 30일 한화전에서 1이닝 3실점을 했고, 10월 2일 [[알프레도 피가로]]가 복귀하면서 대신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 서정환
         [[1989년]]에 은퇴하여 [[해태 타이거즈]]에서 코치 생활을 하다가 [[1995년]]에 도일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 [[1996년]] 고향 팀 [[삼성 라이온즈]]로 복귀하여 수비코치로 일했다. [[1997년]] [[10월 30일]] [[삼성 라이온즈]]는 라이벌 팀 [[해태 타이거즈]]를 벤치마킹하려는 경영진의 결정으로 [[해태 타이거즈|해태]]에서 오랜 선수 생활을 했던 그를 [[백인천]]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 최초의 감독에 임명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201661 삼성,제 9대 감독으로 서정환 코치 전격 발탁] - 연합뉴스</ref><ref>서정환 다음으로 [[삼성 라이온즈|삼성]] 선수 출신으로 감독이 된 경우는 [[류중일]]이며, 서정환과 달리 [[류중일]]은 원 클럽맨 출신으로 삼성의 감독이 된 첫 번째 경우이다.</ref> [[1998년]]에 정규 시즌 2위, [[1999년]](이 해에 잠깐 양대 리그제로 바뀌었다.) 드림리그 1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지만, [[롯데 자이언츠]]에 패해 [[1999년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고 그 해 [[11월 1일]]에 사임하였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563593 프로야구 삼성, 서정환 감독 사의] - 연합뉴스</ref> [[2001년]] [[해태 타이거즈|해태]]로 돌아와 2군 감독을 맡았고 시즌 중 수비코치로 보직 변경되었다. 이후 구단주가 바뀐 [[KIA 타이거즈]]에서 [[김성한 (1958년)|김성한]], [[유남호]] 감독을 보좌하여 코치 생활을 하였다. [[2005년]] [[유남호]] 감독이 시즌 최하위의 책임을 지고 시즌 중 사임하자 [[KIA 타이거즈]]의 감독 대행을 맡았고 [[2006년]] 정식 감독에 취임하였다.
  • 선동열
         [[2003년]] 시즌 후 [[김인식 (1947년)|김인식]]의 후임으로 [[두산 베어스]]가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했으나, 조건에 이견을 보여 협상이 결렬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476668 프로야구 두산, 선동열 영입 포기] - 연합뉴스</ref> 협상이 결렬된 [[두산 베어스]]는 당시 배터리코치였던 [[김경문]]을 후임 감독으로 내정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476991 두산, 김경문 신임 감독과 계약] - 연합뉴스</ref>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김응용]]의 부름을 받아 라이벌 팀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KBO 리그]]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478631 선동열, 삼성 투수코치 계약] - 연합뉴스</ref> [[2004년 한국시리즈]] 이후 선수단 인사에서 [[김응용]]이 구단 사장으로 보직이 바뀌자 [[11월 9일]]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부임하자마자 [[박진만]], [[심정수]]를 FA로 영입하여 호화 멤버진을 구축했으며, 이 때 [[삼성 라이온즈]]는 "레알 [[삼성 라이온즈|삼성]]"으로 불렸다.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인 [[2005년]] 정규 리그 1위(74승 48패 4무)를 차지했고 정규 리그 2위 [[두산 베어스]]를 4연승으로 스윕하여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정규 리그 3위였던 [[한화 이글스]]를 4승 1무 1패로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09년]]에는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나 재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별다른 전술 대처없이 무기력하게 4전 전패로 스윕당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때마침 [[삼성그룹]]의 조직 개편이 겹치면서 구단 사장과 단장이 전부 바뀌자 그 해 말 당시 작전코치였던 [[류중일]]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나 구단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277799 '좋은 성적 내고도 경질된 프로야구 감독' 역대 베스트 5] - 스포츠조선</ref>
         {{s-aft | after = [[류중일]]}}
  • 송구홍
         [[2017년]] [[10월 3일]] [[류중일]]이 신인 감독으로 선임되고, [[양상문]]이 단장으로 선임됨에 따라 퓨처스 감독에 선임됐다.
  • 신명철(야구선수)
         2011년 7월 19일 [[SK 와이번스]]와의 경기에서 [[게리 글로버]]에게 사사구를 얻어맞자 화난 표정을 지으며 욕설을 3번 외쳐주시고[* 맞았을때, 1루로 진루할때, '''"머리맞았잖아!"''' 하고 헬멧을 가리키며 항의하고 난뒤 미사여구.] 배트를 그라운드에 투척하고 글로버에게 달려갔다. 그리하여 몇 분동안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다. [[정상호]]와 심판이 이것을 목격하고 즉시 말렸기에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핵전쟁]]수준의 난투가 벌어졌을지도...그런데 진작 욕 얻어먹은 [[게리 글로버]]는 신명철에게 다가가 상황을 설명하고 1루로 가라고 한 뒤 머리를 가볍게 숙여 사과했다. ~~~글로버의 좋은 인성이 더욱 부각된 계기~~~ 이것 때문에 '''삼빠 아재들'''한테 '''야 류중일 저 색휘 안빼고 뭐하노?''' 하면서 대차게 까였다. 당시 해설과 캐스터도 글로버의 투구가 고의는 아니였던 걸로 보여진다라고 말하면서 신명철의 이미지는 더욱 떨어졌다. 거기다 나중에 글로버가 또 [[조영훈]]에게도 [[헤드샷]] 사사구를 날렸는데[* 글로버가 물론 그때도 다가가 사과했다.], [[조영훈]]은 신명철과는 달리 '''아 머리 안 맞아서 다행'''하며 항의 없이 그냥 넘어갔기 때문에 더 까였다. '''신멍청이'''라는 별명과 삼빠 아재들의 까임권을 보유하게 된 건 당연지사.
         [[2016년]] [[7월 24일]] 은퇴식을 치뤘다. 마침 [[kt wiz]]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라서 은퇴식을 준비했던 것 같다. 삼성 시절에 전성기를 보냈고, 자신이 직접 2013년 11월 구단측에 방출을 요청했고 구단은 신명철이 1군 무대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이를 수용했으며, 신명철은 kt와 계약했다. 은퇴식에서 [[박한이]], [[류중일]] 그리고 현 kt 주장인 [[박경수]] 와 포옹을 나눴다. 그리고 신명철이 kt에서 달았던 등번호 35번 유니폼이 응원석 쪽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그 등번호는 [[이진영|누군가]] 이미 달고 있었다.~~ 그리고 베이스를 돌면서 자신의 지인, 그리고 양팀의 선수들과 악수를 나눴다. 이 날 시구자는 신명철, 시포자는 [[박경수]].[* 은퇴식이 끝난 후 "은퇴식은 생각하지도 못했는데"라고 밝혔다.]
  • 심창민(야구선수)
         8월 26일 사직 롯데전에서도 10:5로 여유있는 상황에서 등판했음에도 [[강민호]]에게 홈런을 ~~쳐~~맞고(...) 이후 1사 1루 상황에서 [[황재균]]의 평범한 투수 땅볼 타구를 잡고 2루로 송구했는데 이게 악송구가 되어(...) 2루를 벗어난 악송구가 되었고, 결국 병살로 끝날 수 있었던 상황을 1사 1, 3루라는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고 강판되고 말았다. 결국 [[안지만]]의 희생 플라이 허용으로 인한 분식으로 자책점은 한 점 더 늘었다. 삼성팬들은 "배팅볼을 던지는 것도 모자라 이제는 송구도 제대로 못하냐"라고 엄청나게 깠다. 진작에 2군 내려갈 상황에서도 끝까지 1군에 머물게 한 [[류중일]] 감독도 어이없는 실책에 제대로 빡쳤는지 얼굴이 급격하게 굳은 모습이 나왔다.[* [[류중일]] 감독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류 감독은 현역 시절 [[유격수]]로 뛴 경험이 있기에 수비를 가장 중요시 하는 감독이다. 삼성 특유의 수비 시스템을 구축한 것도 류 감독의 수비코치 시절의 일. 그렇기에 아무리 2군 타격 성적이 좋아도 수비가 안되면 1군 콜업을 잘 시키지 않는다.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모상기]].] 결국 경기 후 류중일 감독은 인터뷰에서 조동찬과 심창민의 실책을 지적하고, 심창민을 2군에 내리는 대신에 [[박근홍(야구선수)|박근홍]]을 1군에 올릴 것이라고 답하였다[* 실제로는 박근홍이 아니라 [[김건한]]이 올라왔다.]. 이에 삼성팬들 반응의 대부분은 ~~'''[[부왘]]~~[[풍악을 울려라|풍악, 풍악을 울려라!!!]]'''(...) 그래도 아끼는 몇몇 팬들은 차라리 2군에서 [[카도쿠라 켄|카턱 형님]]의 조련을 받고 다시 올라오길 바란다는 반응도 있었다. ~~사실 너무 늦게 2군에 간 느낌도 없잖아 있지만~~
         팔꿈치 통증 때문에 개막전 엔트리에서 제외됐다. 이후 미세한 햄스트링 때문에 계속 재활을 했다. 4월 5일부터 2군 경기에 등판하기 시작해, 빠르면 18~19일에 1군 콜업이 가능할거라고 류중일 감독은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21일에 1군에 올라왔다. 1군에 올라온 뒤 김현우와 함께 필승조에 가담해 불펜의 부담을 줄여주면 삼성은 적어도 정규시즌 1위는 거의 확정으로 보인다.
         류중일 감독이 이번 시리즈는 등판 시키지 않겠다고 당부했지만, 9회 위기 상황이 오자 김성근 감독의 혹사 운영을 따라하는 것인지 심창민을 또 마운드에 올렸다.[* 사실 백정현이 마운드에 있었을때 위기 상황이 오자, 팬들도 심창민을 연호했다.-- 그만큼 쓸 투수가 없다는 방증 --] 대타 이종환을 초구 만에 땅볼 아웃 시키면서 위기를 벗어났다. '''그런데 10회에도 올라왔다!''' 팔에 힘이 안들어가 자꾸 공이 빠지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김태균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으면서 2실점을 하게 되었고, ~~적시타를 맞았는데도 끝까지 교체를 안했다.~~ 로사리오를 잡으며 이닝을 끝냈지만,10회말 삼성이 역전하지 못하며 패전투수가 되었다.
         4월 11일 한화전에 등판했으나 8회 2사 7대 8 상황에서 정근우에게 김승현의 주자 장민석을 불러들이는 적시타를 맞아 장원삼의 5이닝 4실점 승리를 날려버렸고, 연장 10회 2사까지 잘 잡고 뜬금없이 헛스윙을 연발하는 테이블세터들에게 볼질을 남발해 주자 둘을 내보내곤 또다시 정근우에게 1타점 적시타를 맞고 강판당했다. 이어 이승현이 김태균에게 2타점 적시타를 맞아 2이닝 2탈삼진 2볼넷 2피안타 3실점으로 패전투수가 되었다. 덕분에 공이 나쁘지 않던 김승현을 내리고 세이브상황이 아님에도 2이닝 43구 투구를 시킨 코칭스태프들은 팬 사이트에서 가루가 되도록 까였다.[* 당장 작년 6월 초 한화와의 3연전도 연장때 로사리오에 실책성 플레이가 섞인 결승타를 허용해 3이닝 61구 투구로 패전투수가 된 뒤 3차전에 또다시 연장때 김태균에 적시타를 맞아 패전투수가 된 아픈 기억이 있다. 당시 감독인 류중일답지않던 이 어이없는 필승조 운용으로 라이온즈 파크 첫 스윕을 당시 투수진의 붕괴로 망가질대로 망가져 4할 승률을 바라보던 (...) 한화에 내주고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였으니 까이는 건 당연지시다.]
  • 영덕군
          * [[류중일]] : 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전 야구선수. 강구면 출신.
  • 오대석
         1982년 삼성의 원년 멤버로 프로에 입문했다. 당시 대학을 갓 졸업했음에도 [[김재박]] 다음 가는 유격수 2인자 [[함학수]], 상업은행의 주전 유격수 [[장태수(1957)|장태수]], 포철의 주전 유격수 [[서정환]] 등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주전 유격수를 차지하며[* [[함학수]]는 타격을 살리기 위해 1루수로 기용되었고, 장태수는 빠른 발을 살려 외야수로 전향해 주전 중견수로 기용되었고, [[서정환]]은 경쟁에 밀려 백업 내야수로 출전했다. 그리고 1년 뒤 해태로 트레이드되며 한국 프로야구 트레이드史의 첫 페이지를 장식한다. ~~준 국가대표 수준이던 삼성의 위엄~~], [[류중일]]이 입단하기 전까지 삼성의 대표 유격수로 활약했다. 1982년 6월 12일에는 구덕 삼미전에서 최초로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고, 그 해 유격수 부분 [[KBO 골든글러브]] 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류중일]]이 입단하기 전까지 몇 년간 유격수를 거의 혼자서 도맡다시피 해서 였는지 성적에 기복이 있었다. ~~[[서정환|아무래도 괜히 보낸 거 아닌가 싶다.]]~~
         [[김영덕]] 감독의 삼성 이적으로 촉발된 [[OB 베어스]]와 삼성간의 신경전이 한창이던 1984년 전기리그 때 OB와의 경기 도중, 병살타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OB의 1루주자 이홍범이 과격한 [[슬라이딩]]으로 유격수 오대석의 허벅지를 걷어찼고, 이때 큰 부상을 당한 오대석은 이후 기량이 하락세로 돌아섰다. 1987년 [[류중일]]이 입단한 후엔 1985년부터 주전 3루수였던 [[김용국]]과 3루 자리를 번갈아 맡았다.
         하지만, [[류중일]]이 1988년 팔꿈치 부상으로 출전 기회가 줄어들자 유격수로 돌아왔으나 1989년 시즌 종료 뒤 롯데로 트레이드 되어 이듬해인 1991년 시즌을 끝으로 유니폼을 벗었는데 1990년 부상으로 출전 기회가 줄었으며 1991년 3루수로 돌아왔다.
  • 이수민(야구선수)
         6월 20일 [[NC 다이노스]]전에서 3:3으로 맞선 6회말 2사 2루에서 [[김건한]]의 뒤를 이어 등판하여 [[박민우(야구선수)|박민우]]에게 볼넷을 주었으나 후속 타자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을 플라이로 처리하였고 7회말 타선이 대폭발하며 상대 구원 [[이민호(야구선수)|이민호]]를 박살내버리며 승리투수 요건을 갖추었다. 여유 있는 점수차에서 기회를 주기 위함인지 [[류중일]] 감독은 이수민이 9회까지 경기를 책임지게 하였고 이수민은 9회 1실점하긴 했으나 감독의 믿음에 부응하며 경기를 마무리짓고 승리투수가 되었다. 이날 기록은 3.1이닝 1피안타 6볼넷 1사구 1탈삼진 1실점. 볼넷이 많긴 했으나 그 유명한 [[김풍기]] 주심의 괴악한 스트라이크존에 의한 것이라는 의견이 다수. 어지간한 베테랑 투수도 멘탈이 붕괴될 만한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공을 던지며 실점을 최소화한 점은 칭찬할 만하다.
  • 이승엽
         [[2013년]]에는 타격 부진에 시달리며 2할대 타율, 13홈런을 기록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079&article_id=0002527668 이승엽의 무서운 다짐 "내 이름, 꼭 되찾겠다"] - 노컷뉴스</ref> 이는 9홈런에 그친 [[1996년]] 이후 가장 적은 홈런이었다. 정규 시즌 막판에는 허리 부상으로 1군에서 말소됐다. [[두산 베어스]]와의 [[2013년 한국시리즈]]에서도 타격 부진이 계속돼 7대구에서 타율 1할4푼8리(27타수 4안타)에 그쳤다. [[2013년]] [[11월 1일]] 7차전까지 단 1타점도 기록하지 못하다가 7차전에서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동점 적시타를 기록하며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의 믿음에 보답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396&article_id=0000136917 이승엽, 홈런이 전부가 아니다… 부진 털어낸 동점 적시타 ‘우승 발판’] - 스포츠월드</ref> 하지만 주춤한 성적으로 인해 그 해 골든 글러브(지명타자)를 타격왕을 차지한 [[이병규 (1974년)|이병규]]에게 내 줬다.
  • 이정훈 (1963년)
         [[1987년 한국 프로 야구 신인선수 지명 회의|1987년 신인 지명]]에서 [[삼성 라이온즈]]가 [[내야수]] [[강기웅]]과 [[류중일]]을 1차 지명해, 연고 팀의 지명을 받지 못하고 [[한화 이글스|빙그레 이글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했다. 신인 첫 해 가장 많은 안타를 때려냈고, 신인상을 받았다. [[1991년]]과 [[1992년]] 2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다.
  • 임창용
         복귀 후 [[2014년]] [[4월 13일]] [[SK 와이번스]]와의 광주에서 구원 등판해 2408일만에 구원 승을 달성했으며,<ref>{{뉴스 인용|url=http://www.sportsq.co.kr/news/articleView.html?idxno=5627| 제목=임창용 1.2이닝 퍼펙트, 2408일만에 구원승|날짜=2014-04-13|출판사=스포츠Q}}</ref> 5월 4일 [[NC 다이노스]]와의 광주에서 한일 통산 300세이브를 기록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yonhapnews.co.kr/sports/2014/05/04/1001000000AKR20140504039351007.HTML|제목=-프로야구- 삼성, NC에 역전승…임창용 한·일 통산 300세이브(종합)|날짜=2014-05-04|출판사=연합뉴스}}</ref> 이후 받은 격려금 2,000만원을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에게 기부했다.<ref>{{뉴스 인용|url=http://www.sportsseoul.com/?c=v&m=n&i=69090|제목=임창용, 300세이브 격려금 전액 세월호 희생자에게|날짜=2014-05-06|출판사=스포츠서울}}</ref> 그러나 시즌이 갈수록 체력적인 문제와 함께 구위가 저하됐고 예전과 다르게 블론 세이브도 많아졌다.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당시 감독이었던 [[류중일]]은 그를 마무리로 계속 기용했고 2015년에 감독의 믿음에 보답하듯 마무리로 활약해 역대 최고령 구원왕에 등극했다. [[2015년]] [[3월 31일]] [[kt 위즈]]와의 광주에서 통산 세 자릿수 승리 및 200세이브를 달성했으며 이 기록은 [[김용수 (야구인)|김용수]] 이후 역대 2번째, 세이브 부문에선 역대 4번째였다. [[2015년]] [[8월 16일]] [[한화 이글스]]와의 광주에서 한일 통산 350세이브를 달성했다.
  • 장원삼(야구선수)
          * 2015년 4월 25일 사직에서 1 2/3 이닝 7실점으로 부진하자, 다음날 [[류중일]] 감독이 '[[돈 내놔라 먹튀야]]'라는 발언을 하였다.
  • 정인욱
         시범경기에서 현저하게 떨어진 구속으로 [[류중일]] 감독의 걱정을 샀다. 시범경기 성적은 3경기 등판 1승 2패 ERA 8.18.
         5월 14일 대구 롯데전에서 5이닝 4실점(3자책) 4K 7피안타로 나름의 선방을 하여 240일 만의 승리를 따냈다. 시즌 초 130~140 초반에 그쳤던 구속도 최고 147km을 찍으면서 자신감을 찾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 류중일 감독도 정인욱의 구속이 올라온 것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 [[류중일]] 감독이 크게 기대하는 선수라, 정인욱의 성숙하지 못한 모습에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109&article_id=0002255451|질책하기도 했다.]]
          * [[선동열]], [[류중일]] 감독과 더불어 [[오치아이 에이지]] 투수코치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던 선수였는데, 비록 오치아이 코치가 삼성을 떠났지만 SNS를 통해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듯하다.
  • 최재원(야구선수)
         2015년 시즌 후 [[NC 다이노스]]로 이적한 [[박석민]]의 FA 보상 선수로 지명되어 [[삼성 라이온즈]]로 이적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최재원은 NC의 창단 이후 최초로 보상 선수로 지명되어 팀을 떠난 선수이다. 박석민 이전의 FA 영입 선수들인 [[이호준]], [[이현곤]], [[손시헌]], [[이종욱(야구선수)|이종욱]]은 신생팀 배려 규정에 의거해 보상 선수 대신 보상금만 수령이 가능했기 때문.] [[박찬도]]의 경찰청 입대로 인한 ~~2년짜리~~ 전문 대주자감 수혈인 듯. ~~[[김상수(타자)|노예상수]] 구원 좀...~~ ~~[[김평호|???]] : 이제 다음은 저에게 맡겨주시죠~~ 그러나 대졸 미필 선수라는 점으로 인해 일각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류중일]] 감독은 [[스프링캠프]]에서 최재원을 내야로 쓸 건지 외야로 쓸 건지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적지않은 나이에 병역 해결이 급했던 상황이라 시즌 후 [[경찰 야구단]]에 지원했고 최종 합격했다. 팬들은 경찰 야구단에서 몸을 잘 추스리길 바라고 있다. 그리고 최재원이 입대한 뒤 LG 감독으로 삼성에서 1년간 함께했던 [[류중일]] 감독이 부임했고, LG의 2루수 자리가 [[정주현]], [[양원혁]], [[백승현]], [[박지규]], [[윤진호]] 등 확고한 주전 없이 여러 선수들로 돌려막기를 하면서 버티는 중인지라 많은 팬들이 최재원의 전역을 기다리고 있다.
          * [[별명]]은 위에 나와있는 대로 [[NC 다이노스 갤러리]]에서는 [[김경문|달]][[양아들|재]]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가 [[삼성 라이온즈]] 이적 후에는 --감독 이름만 바꿔서-- [[류중일|살]][[양아들|재]]. --이젠 엘지로 이적했으니 [[양상문|양]][[양아들|재]]-- --[[양재역|응?]]-- --류중일이 엘지에 부임하면서 다시 살재가 됐다-- 다만 학교 다닐 때부터 실제 불렸던 별명은 자기 이름에+발이 빠르다고 '''재빠'''였다고 한다. [[http://sports.new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00&aid=0000000053|데뷔 직전 인터뷰]]
  • 최한경
         || || → || '''최한경(1993~1995)''' || → || [[류중일]](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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