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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명선(야구선수)

생년월일 1965년 9월 3일
출신지 경상북도 포항시
학력 포철공고-계명대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프로입단 1988년 삼성 라이온즈 1차 지명
소속팀 삼성 라이온즈(1989~1995) br 쌍방울 레이더스(1995~1996)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33번(1989~1995)
김순철(1985) 류명선(1989~1995) 최익성(1996~1998)

목차

소개

전 야구선수. 삼성 라이온즈와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활동했다. 선발과 마무리를 오가며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삼성 투수진을 지켰던 투수.

버들 류(柳)자를 쓰다보니, 현역 시절에는 유명선으로 등록됐고 마찬가지로 KBO에서 유명선으로 검색야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류씨 성을 제대로 표기하기 시작한 게 2007년부터고, 류명선이 은퇴한 건 그보다 한참 이전이기 때문이다. 유명선으로도 이 항목에 들어올 수 있다.

삼성 라이온즈 최초로 데뷔전 선발승을 기록한 선수이다.

선수 경력

계명대 재학 중인 1988 신인지명 때 삼성에 1차 지명을 받지만 1988년 서울 올림픽 참가 때문에 대학 졸업 후 실업팀인 세일통상 야구단에 입단 1989년에 삼성에 입단했다.

프로 첫인 1989년 4월 12일에는 첫 완투승을, 5월 24일에는 첫 완봉승을 거두는 등 14승 8패 1세이브의 성적을 기록하며 당시 김시진의 이적으로 자칫 약화될 수도 있었던 삼성 투수진을 김성길과 함께 같이 지켰다. 타격 2위를 차지한 강기웅과 함께 그 삼성의 대표적인 유력 신인이었지만, 신인왕은 19승을 거두며 맹활약한 태평양 돌핀스박정현이 차지했다. 이듬 이태일이 입단하며, 김성길 등과 함께 1990년대 초 삼성 선발진의 주역으로 활약했다.[1] 입단 동기였던 정윤수가 1990년 선발과 중무리를 오가며 혹사 당한 끝에 1991년 이후에는 위력이 크게 저하된 것을, 생각하면 내구성도 좋았던 편.

1992년부터 점점 성적이 하락 갔는데, 때마침 1993년에 등장한 박충식 - 김태한 - 김상엽 - 성준으로 이어지는 삼성 선발진이 모두 10승 이상을 기록하며 그의 빈자리를 채워 나갔다. 1993년 한국시리즈에서는 구원투수로 나와서 혼자 2패를 당 당시 삼성 팬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2] 특히 잠실에서 벌어진 6차전에서는 태 김성한에게 역전 홈런을 맞았고, 이후 시리즈 전체의 판도가 태에 기울어지면서 더욱 뼈아픈 장면이 되었다.

이후 부진을 면치 못하다 결국 1995년 5월 김현욱과 같이 쌍방울로 트레이드되었다.(류명선+김현욱↔최한림+윤혁) 쌍방울에서도 재기에 실패 1996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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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 2004년 말 모교인 계명대 코치로 부임, 2011년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참고로 류명선은 계명대 야구부 1기 출신.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투수)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89 삼성 라이온즈 34 170⅔ br (10위) 14 br (7위) 8 1 3.85 152 93 102 br (7위)
1990 25 147 9 8 1 4.53 137 93 78
1991 27 127⅓ 11 4 4 3.18 97 77 84
1992 16 92⅓ 8 3 0 4.29 81 65 58
1993 22 103⅔ 6 5 2 3.56 90 50 68
1994 13 38 2 5 4 4.26 42 12 19
연도 소속팀 경기수 이닝 ERA 피안타 사사구 탈삼진
1995 삼성 / 쌍방울 25 58 1 4 0 6.36 71 37 34
1996 쌍방울 레이더스 3 6⅔ 1 1 0 8.10 6 4 4
통산 165 743⅔ 52 38 12 4.14 676 431 447

역대 기록(타자)
연도 소속팀 경기수 타수 타율 안타 2루타 3루타 홈런 타점 득점 도루
1993 삼성 라이온즈 1 2 .000 0 0 0 0 0 0 0
통산 1 2 .000 0 0 0 0 0 0 0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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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물론 이 시기에는 김상엽도 있었지만 1990년을 제외하면 기대 이하의 성적이었다.
  • [2] 류명선에게는 불행 중 다행히도, 이들 2패는 광주와 잠실의 원정 경기에서 당한 것이었다. 만약 홈인 대구에서 패한 것이었다면, 더욱 큰 봉변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