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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중혁 . . . . 20회 일치
음악, 영화, 스포츠, 그림을 아우르는 다양한 관심사 만큼이나 작가의 경력 또한 화려한데, 홍대 상상마당에서 열리는 인디밴드 쇼케이스를 진행했고, [[이동진(평론가)|이동진]] 평론가와 함께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흑임자~~진행자로 활동하고 있다. 인터넷 서점에서 칼럼도 쓰고, 웹툰 작가로도 활동했다니[* 그림 솜씨가 출중할 정도까진 아니지만 아기자기하고 개성있는 편이다. <펭귄 뉴스>, <뭐라도 되겠지>, <미스터 모노레일>의 표지도 직접 그렸다.] 그야말로 문학계의 [[팔방미인]](...)
2016년부터 평론가 이동진과 영화소개프로그램 [[영화당]]을 진행한다.
* 질문하는 책들 (2016)[* [[이동진(평론가)|이동진]]과의 합작. 빨간책방에서 다룬 책들을 설명하는 책이다.]
강동 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에 근무중인 경위. 친구인 동진과는 [[베스트 프렌드|제일 친한 친구]]라고 한다. 동진과는 대학에 들어와 친해진 사이로 추정된다. 그러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문자를 보낸 친구와 한 달 동안 연락이 되지 않는데 걱정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무심한 성격인듯.(본인은 매일 연락을 주고 받아야 친구는 아니다는 말을 했다.) [[아싸|사실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것이 매우 서툴다]]. 하지만 먼저 다가와 인사해주는 동진에게 처음에는 침묵으로 일관했지만 그가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 이내 마음을 열게된다.
허은실은 미정의 얘기를 하는 자신에게 "그래서 동진이 얘기는 언제 나오는 겁니까?"하고 묻는 김중혁을 아예 감정이 없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 '''내 단 하나뿐인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냐고 재차 물었다. 오오....
현재 동진이 실종된 이후에 동진의 그간 행적을 추적하여 '''죽음의 법칙'''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법칙을 몸소 실천하기 시작하는데....
복선은 처음부터 많이 깔려 있었다. 지금은 아싸지만 학기초에는 과묵한 게 컨셉인 줄 알아 인기가 많았다는 과 여동기의 발언, 술김에 박미정 이야기를 하는 동진에게 도대체 뭘 알고 말하는 소리냐는 발언[* 그리고 또 이 말을 들은날에 평소와 다르게 술을 진탕 취할정도로 마시고 살기 힘들다고 술주정까지 한다.], 동진의 행선을 추적하면서 알아낸 법칙을 허은실에게 설명할 때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는 발언, 박미정을 따르는 고양이가 김중혁한테도 친근감을 느끼고 몸을 비빈다든가, 박미정에게 저 또한 주위 사람이 많이 다쳤습니다 라는 식의 말이 전부 자신도 동류의 사람임을 뜻하는 말이였다.
동진은 자신이 사라지면 중혁이 반드시 조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블로그를 개설하여 비밀글들을 숨겨두었고 예상대로 중혁은 동진의 블로그속 마녀의 법칙을 찾아낸다. [* 이때 아이디는 중혁의 주민등록번호였으며 비밀번호는 'Shine on you'였다.]동진의 조사가 유독 오래 걸린 이유가 미정을 조사함과 동시에 대학시절부터 중혁에 관해서도 눈치채고 같이 역학조사를 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중혁과 관계된 여성 리스트가 나오는데 수십명~~이런말 하면 안되지만 '''부럽다'''. 게다가 다 남녀공학이야~~가까이 중혁을 좋아하여 사고를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맨 마지막글은 이 글을 볼 중혁에게 보내는 메시지로 '''중혁아. 네가 사랑해야 돼.''' 라는 말, 즉 해결책을 써준 동진에 대한 크나큰 고마움을 느낀다.
최후에 허은실에게 고백을 받고 은실이 전철을 타고 휙 떠나버리자 어쩔줄 몰라하다가 타이밍 좋게 동진이 박미정에게 들었던 마지막 법칙을 문자로 보내온걸 읽게되는데.....
여담이지만 친구인 동진에 비해 꽤 [[노안]]이다(…).[* 작가도 이점을 인식하고 있었는지 후기에 설정이 노안 맞다고 우기겠다고 한다(...). 참고로 작중 나이는 32-33세 정도.] 현재 외모와 사람들을 피하기 전 외모를 비교해 보면 눈물난다.
- 오세창 . . . . 9회 일치
[[1895년]] [[10월]] [[을미사변]] 직후 [[권동진]], [[정난교]] 등과 함께 화를 피해 [[일본]]으로 망명했다.<ref>"生物進化論을 修正케한 世界的植物學者", 동아일보 1950년 01월 22일자 2면, 사회면</ref> 그러나 그는 직접적인 혐의점이 없어 곧 귀국했다.
[[1902년]](광무 5년) 개화당 사건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 후일 [[권동진]]은 [[삼천리]] 誌자에 당시 망명중이던 자신의 옛 동지를 소개할 때 한 사람으로 그를 소개하였다.
이후 [[대한협회]](大韓協會)의 부회장으로 추대되었으며 [[1909년]] [[대한협회]]가 창간한 일간지로서 반일 논조를 분명히 한 《[[대한민보]]》 사장도 맡았다. 천도교 내부에서는 [[권동진]]과 함께 개화에는 찬성하되 일본과의 합병에 반대하는 이른바 문명개화파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합병 청원으로 개화할 것을 주장하는 [[일진회]] 계열과는 대립하여 결국 [[이용구]]를 몰아냈다.
[[1918년]] [[11월]] [[미국]] 대통령 [[우드로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영향을 받아, [[손병희]], [[최린]](崔隣), [[권동진]](權東鎭)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우선 동지를 포섭하기로 한다. 또한 일부 [[천도교]] 연락원들이 [[기독교]] 지도자 일부와 합의하자, 범거족적인 만세 시위 개최에 동의한다.
[[1919년]] [[2월 10일]] [[최린]], [[최남선]] 등이 협의하고, [[최남선]]이 독립선언서를 초안하여 제출하자 그는 [[손병희]], [[권동진]], [[최린]] 등과 함께 [[독립선언서]]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에 동의한다. [[2월 25일]] 오세창은 [[손병희]], 권동진과 함께 [[천도교]] 기도회 종료보고와 [[조선 고종|고종]] 국장에 참배할 목적으로 상경한 [[천도교]]도 박준승(朴準承), 홍기조(洪基兆), 홍병기(洪秉箕), 김완규(金完圭) 등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계획을 알리고 이들을 설득하여 찬동을 얻었다. 이때 오세창은 그는 [[천도교]] 월보과장 옥파 [[이종일]](李鍾一)을 설득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임정 환국 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ref>
* [[권동진]]
- 박동진 (1922년) . . . . 7회 일치
[[파일:박동진(1922년).png|섬네일|200px|박동진 (1962년경)]]
'''박동진'''(朴東鎭, [[1922년]] [[10월 11일]] ~ [[2013년]] [[11월 11일]])은 [[대한민국]]의 외교관, 국회의원이다. [[민주정의당]] 소속으로 11대와 12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대구고등보통학교]]와 일본 [[주오 대학]]을 학사 학위하였다.<ref>{{국사편찬위원회 인물|106_30065|박동진|朴東鎭}}</ref>
1951년 외무부에 들어와, 의전국장, 주 영국 참사관, 외무부차관, 주 월남 대사, 주 브라질 대사(1962년 10월~1968 2월)<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2100329201006&editNo=6&printCount=1&publishDate=1962-08-21&officeId=00032&pageNo=1&printNo=5173&publishType=00020 브라질 大使에 朴東鎭氏] 《경향신문》1962년 8월 21일, 1면. <!--“最高會議 第63次 常任委員會는 21日 越南共和國駐箚大使 朴東鎭氏를 「브라질」合衆國特命全權大使로,...”--></ref><ref>{{서적 인용 |저자 = 외교통상부 |제목 = 한국 외교 60년 |url = 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장 = 부록 |확인날짜 = 2015년 2월 21일 |보존url = https://web.archive.org/web/20160303211841/http://www.mofat.go.kr/state/publication/history60/20100201/11369_file_2009%20dip60_appendix.pdf |보존날짜 = 2016년 3월 3일 |깨진링크 = 예 }}</ref>{{Rp|496}}, 페루 겸임대사<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404290020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4-04-29&officeId=00020&pageNo=1&printNo=13079&publishType=00020 朴東鎭브라질大使 駐『페루』大使兼任]〉 《동아일보》(1964년 4월 29일) 1면 <!--“政府는 駐「브라질」大使朴東鎭씨를 駐「페루」大使도 겸임토록 28일하오 國務會議에서 議決했다.”--></ref>, 주 제네바 대사, 주 유엔 대사,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11대.12대), [[대한민국 통일부|국토통일원]] 장관을 역임했다. 외무부장관으로서, 1976년 3월 말레이시아를 방문하여, 리타우딘 말레이시아 외무부 장관과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ref>{{뉴스 인용 |url =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603190032920101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6-03-19&officeId=00032&pageNo=1&printNo=9377&publishType=00020 |제목= 貿易強化에 합의...韓․말聯 공동성명 |출판사 = 경향신문 | 날짜 = 1976-03-19 |인용문=<!--朴東鎭외무부장관과 리타우딘 말레이시아외상은 19일 공동성명을 발표, 평화․자유․번영이라는 공동목표를 추진하기 위해 아시아 제국간의 협력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양국간의 경제무역관계를 더욱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朴장관은 지난 17일부터 3일간 말레이시아를 공식 방문한 후 발표한 이 성명에서...--> }}</ref> 1988년 4월 22일 한국 정부는 박동진을 주미대사에 임명하였다.<ref>{{뉴스 인용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042200209201007&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04-22&officeId=00020&pageNo=1&printNo=20477&publishType=00020| 제목 = 駐美大使 朴東鎭씨| 날짜 = 1988-04-22| 출판사 = 동아일보}}</ref> 박동진은 당시 민정당의 전국구 국회의원이었으나, 주미대사로 부임함에 따라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민정당 전국구 예비후보 11번인 김종열이 5월 13일자로 의원직을 승계하였다.
* {{헌정회|1351|박동진}}
- 연경흠 . . . . 5회 일치
당시 한화 외야엔 [[조원우|조로켓]], [[제이 데이비스|남연이 형]], [[고동진(야구선수)|고봉사]]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김인식]]감독의 꾸준한 신뢰로 많은 타석을 부여 받았다.
[[제이 데이비스]]를 제외한 나머지 둘의 성적을 보면 [[조원우]]는 106경기 1홈런 25타점 6도루 .267 .332 .305 .637, [[고동진(야구선수)|고동진]]은 120경기 4홈런 29타점 16도루 '''.241 .299 .322 .621'''. 연경흠의 일발장타를 감안한다면 고동진 대신 기용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보이나 그것은 그의 우익수 수비를 모를 때 할 수 있는 생각이다.
[[제이콥 크루즈]]가 입단한 2007년에 들어서 그의 기회는 더 줄어들었는데 역시 [[조원우]]와 고동진에 밀려서 빛을 보지 못했다. 결국 2007시즌 대부분은 거의 2군에서 머물었고 1군 기록은 36경기 1홈런 7타점 .260 .305 .377 .682를 기록하였다.
- 이상백 (1904년) . . . . 5회 일치
| 친척 = 이동진(할아버지) <br /> 이일우(큰아버지) <br /> [[이상정 (1897년)|이상정]](형) <br /> 한문이(형수) <br /> [[권기옥]](형수) <br /> [[이상화 (시인)|이상화]](형) <br /> [[이상오]](아우) <br /> [[박창암]](조카사위) <br/> [[이열희 (1924년)|이열희]](5촌 조카) <br /> [[최남선]](사돈) <br /> [[박중양]](사돈)
상백 형제의 할아버지 이동진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대구]]에 신식 학교인 우현서루를 열어 학생들에게 [[한학]]을 가르쳤고, 남녀, 신분을 가리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나중에는 교사를 초빙, 수학, 역사, 국어, 영어, 일본어 등 신식 학문을 가르쳤다. 할아버지 이동진의 뒤를 이어 큰아버지 이일우가 우현학교의 일을 맡아보았다.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구의 명문가로 성장했는데, [[2000년]]대 초반 그의 큰아버지 이일우의 자손들은 대학 학장 3명, 교수 10명, 의사 30명, 장군 2명, 언론·출판분야 11명을 배출하였다.<ref name="daemyonh">[http://www.lifemaeil.com/news_view.php?print_no=1540&seq=5570 특집- 상화의 큰 집 사람들] 주간매일 2002년 11월 27일자</ref> 또한 사촌 [[이상악]]은 작가이자 그의 친구인 육당 [[최남선]]과 사돈이 되었고, 다른 자손들 중에는 '박작대기' [[박중양]] 집안과도 인척 관계를 형성하였다.<ref name="daemyonh"/> 태어난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고 큰아버지 이일우에 의해 양육되었다.
할아버지 이동진, 백부 이일우가 세운 우현서루(友絃書樓)에서 한학과 수학, 국어 등을 수학하고, [[1910년]] [[경북고등학교|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 할아버지 : 이동진
- 이열희 (1924년) . . . . 5회 일치
| 친척 = 이동진(증조할아버지) <br /> 이일우(할아버지) <br /> 이시우(작은할아버지) <br /> 이상악(큰아버지) <br /> 서법경(큰어머니) <br /> 이명득(큰어머니) <br /> [[이상정 (1897년)|이상정]](5촌 숙부)<br /> [[한문이]](5촌 숙모) <br /> [[권기옥]](5촌 숙모) <br /> [[이상화 (시인)|이상화]](5촌 숙부) <br /> [[이상백 (사학자)|이상백]](5촌 숙부) <br /> [[이상오]](5촌 숙부) <br /> 이겸희(6촌 누이동생) <br /> [[박창암]](6촌 매제) <br /> 이용희(6촌 남동생) <br /> [[박문웅 (1890년)|박문웅]](장인) <br /> [[박중양]](장조부)
그의 증조부 [[이동진]]과 할아버지 소남 [[이일우]]는 구한말~일제시대의 사업가로 [[우현서루]]를 건립하여 학생들을 가르쳤다. 고모부 윤홍열은 미군정기 때 남조선과도입법위원회 의원을 역임했으며, [[5.16 군사 정변]]에 참여한 군인 출신 사학자 [[박창암]]의 처 이겸희는 그와 6촌간이었다. 고모 이숙경의 며느리는 [[1945년]] [[8.15 광복]] 후 초대 [[대구광역시장|경북 대구시장]]을 지낸 [[허억]]의 딸이었다.
* 증조 할아버지 : 이동진(李東珍)
* [[이동진 (대한제국 사람)|이동진]]
- 이갑성 . . . . 4회 일치
이갑성은 광복 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1945년]] [[10월]] 반탁운동을 위해 결성된 [[이승만]]의 [[대한독립촉성국민회]](獨立促成國民會)에 참여하고 [[독립촉성국민회]] 회장에 선출되었으며, [[1945년]] [[10월 5일]] 조선 각지에 파벌다툼이 심한 점을 지적, 이를 개탄하며 정당통일기성회를 결성하였다. [[12월 14일]] 김여식(金麗植), [[권동진]] 등과 함께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창당하고 [[권동진]]을 당수로 추대했다.
* [[권동진]]
|후임자 = (대구시 갑)[[서동진]]<br/>(대구시 을)[[조병옥]]<br/>(대구시 병)[[이우줄]]
- 강동우 . . . . 3회 일치
이제 나이도 있고 하니 체력적으로 힘든 [[테이블 세터]]를 다른 선수가 맡아주길 바랬으나... [[고동진(야구선수)|개막전에서 시범으로 다른 선수를 1번으로 기용했다가 쫄딱]] [[망했어요]]. 그래서 이 해도 1번타자로 활약했다.(...) ~~그나마 포지션은 주로 [[우익수]]로 뛰는게 다행...인가?~~
이후 꾸준히 제몫을 해냈으나 허리 미세통증으로 인해 6월 26일자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 회복기간을 거쳐 7월 10일 1군에 복귀. 한화는 강동우가 2군에 내려가 있는 동안 [[고동진(야구선수)|고동진]], [[양성우(야구선수)|양성우]] 등을 1번 타자 자리에 기용하였으나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고, 실제로 강동우가 2군으로 내려가 있는 동안 한화는 2승 7패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마지막에는 '''[[장성호]]가 1번 타자'''로 기용될 정도였으니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한지? 1군으로 올라왔으나 별 활약을 하지 못하고 8월 2일 이후로 다시 2군행. 다행히 1번 구멍은 [[오선진]]이 각성하면서 메울 수 있게 되었다.
- 강동진 (야구선수) . . . . 3회 일치
|선수명 = 강동진 <br/> 姜東珍
'''강동진'''(姜東珍)은 [[KBO 리그]] 전 [[SK 와이번스]]의 야구 선수이다.
현재는 대구광역시 달서구 이곡동에 위치한 강동진베이스볼 (야구교실) 을 운영중에 있다.
- 고현정(미스코리아) . . . . 3회 일치
김수현 드라마 주연 출신이어서, 정확하고 약간 빠른 발음을 구사한다. 연기력은 엄마의 바다나 두려움없는 사랑이 인기였던 모래시계 이전에도 주연을 맡을 만하다는 평이었는데,(우는 장면에서 근성의 노메이크업으로 펑펑 울거나) 모래시계 때 레전설 소리를 들었다.~~그리고 총알은퇴. 관광지 [[정동진역]]을 남기고.~~ [* 김종학 감독은 연기력이 아까워 결혼을 말렸다고 이후에 인터뷰한 바 있다.] 김종학 감독은 20대 초반의 고현정을 두고 한 줄의 대사로도 파급력을 갖는 배우라고 이야기했으며 복귀 후의 고현정은 봄날의 실어증 여주인공, 여우야 뭐하니의 음란 잡지 기자, 히트의 강력반 형사 등 다양한 캐릭터를 오가며 연기를 펼쳤다. 트레이드마크인 얼굴 근육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디테일한 연기[* '무언가 배우고 싶을 정도로 수많은 미덕(단순히 매력이 아닌)을 지니고서도 나쁜 정치인일 수밖에 없는 미실을 얼굴의 오른쪽과 왼쪽, 입과 눈과 눈썹이 다 따로따로 움직이며 복잡한 심리를 보여주는 섬세한 연기로 강렬하게 소화해낸 고현정은 이 작품이 성공한 이유이자 일등공신이다.' -이영미(문화 평론가). 시사IN 기사 중] 는 선덕여왕 때 처음 화제가 되었다. 비결에 대해, '사극이라 몸이 안움직이니 얼굴이라도 움직여야 시청자들을 잡겠다 싶어서...'라고 코멘트. 같이 촬영했던 [[이순재]]도 인상적이었다고 코멘트를 남겼다.[* [[이순재]]는 헐리우드로 지금 당장 진출할 수 있을 정도의 연기력을 갖춘 배우로 [[김명민]], [[김희애]], 고현정을 꼽았다.] 선덕여왕에서 고현정은 주인공에 비해 많지 않았던 분량임에도[* 어느 팬의 편집 결과에 의하면 62부작 선덕여왕에서 미실이 나온 시간은 13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고...] 주요 시상식을 휩쓸고 그해 실시된 한국갤럽 설문조사에서 38%라는 역대 최고의 득표율로 올해를 빛낸 탤런트 1위를 차지하는 등 대중과 평단 모두의 극찬을 받았다. [[http://entertain.naver.com/read?oid=117&aid=0002051965|#]] 차기작으로 선택한 드라마 대물은 방영 내내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지만 작가, 감독이 바뀌는 등 내부 문제가 연이어 발생하고 드라마 내용은 산으로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현정의 연기는 호연이었다는 반응과 함께 2년 연속 올해를 빛낸 탤런트 1위를 차지하였다.[* 이 때 2위와의 격차가 무려 23%였다.] [[http://m.entertain.naver.com/read?oid=112&aid=0002156691|#]] 여왕의 교실은 시청률 면에서는 고현정 필모그래피에서 최하를 기록했지만 무표정에서 종종 보여지는 미세한 표정 연기(일명 나노 연기)는 미실을 능가했다는 반응도 얻어 원작과 다른 마여진을 만들어냈다며 호평을 받았다.
영화 필모그래피가 약해 영화에서의 연기에 대한 평가는 많이 찾기 힘들다. 그러나 두 편의 홍상수 영화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 출연한 고현정이 감독의 영화세계 뿐 아니라 영화를 찍는 방법론에까지 영향을 미쳤을거라는 평[* 프로-아나 시대의 카운터 디바 <여우야 뭐하니> (Dramatique 7호) -변영주 감독]과 더불어 영화평론가 [[이동진(평론가)|이동진]]으로부터 고현정은 홍상수스러움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넘어서 자기스러움을 연기하는, 대한민국 여배우 중 가장 머리가 좋은 배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푸른밤 성시경 '필름 속을 걷다'에서] 고현정이 고현정을 연기한 이재용 감독의 영화 여배우들은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의 경계에 있어 어디까지가 연기이고 어디까지가 실제인지 판단은 자기 몫.[* 짜고 치는 상황극인 고현정 vs 최지우 씬에 관한 유튜브 댓글에서는 실제 배우가 까이고 있다. 이걸 보면 연기를 잘하긴 잘한 듯...?] 2012년 개봉한 고현정의 첫 상업영화 미쓰GO는 유해진, 성동일, 박신양 등 걸출한 배우들과 함께 했지만 모두 영화가 구리다는 평으로 덮혔다.
- 조긍하 . . . . 3회 일치
| 자녀 = 슬하 5남 3녀 <br /> 장남 조동완(1945년 출생) <br /> 차남 [[조동진]]([[싱어송라이터]]) <br /> 4남 [[조동익]]([[베이스 기타|베이시스트]] 겸 [[작곡가]]) <br> 3녀 [[조동희 (가수)|조동희]]([[싱어송라이터]])
* 아들인 [[조동진]]과 [[조동익]], 그리고 딸인 [[조동희 (가수)|조동희]]는 음악활동을 하고 있다<ref>[http://news.maxmovie.com/movie_info/sha_news_view.asp?newsType=&page=&contain=&keyword=&mi_id=MI0095816228 <슈퍼스타> 조동희 음악감독, 포크음악 대부 조동진 친동생 - 2012년 5월 29일 맥스뉴스]</ref>.
- Europa Universalis 4/공략/유럽 . . . . 2회 일치
마더 러시아. 국가 전통에 맨파워 증가가 달려있고, 두번째 이념엔 육군 한계증가가 달려있으며, 자체 특성상 미친듯이 동진하며 개발하게 되있으므로 상당한 물량을 볼 수 있다. '''다만,''' 물량만 강력하지 국가 이념에 규율이나 군사기, 병종의 전투력 증가등은 전혀 없어서 질이나 공격적을 안찍으면 폴란드나 스웨덴한테 군대가 아이스크림 마냥 살살 녹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꼭 이념중에 질이나 공격적은 찍자.그나마 다행인건 리투아니아 개발도 너프가 상당히 뼈아파서, 헝가리정도만 끌여들여도 폴란드를 박살낼 수 있다는것.
폴란드의 문제점은 외교다. 북쪽의 튜튼 기사단은 역사적 라이벌 보정이 있고 남쪽의 오스만도 자주 폴란드를 라이벌 지정하며 헝가리 역시 폴란드를 싫어하는 경우가 잦다. 동쪽의 모스크바 역시 폴란드의 숙명의 라이벌. 그러므로 확장방향을 잘잡아야 되는데, 우선은 보헤미아와 헝가리중 폴란드를 라이벌 지정하지 않은 국가들중 하나와 동맹하고 빠른 속도로 리투아니아와의 동군연합 이벤트를 띄운뒤 튜튼 기사단을 공격하자. 꾸물대다 튜튼 기사단이 보헤미아와 헝가리중 하나랑 만이라도 동맹하면 이기기 힘들다.[* 전에는 튜튼 기사단이 보헤미아와 헝가리 둘다 동맹해두지 않는 이상은 폴-리투 성립만 하면 무조건 이길 수 있었지만 리투아니아 개발도 너프부턴 그게 매우 힘들다.] 그 이후론 최대한 빠르게 모스크바를 패가며 동진하자. 조금이라도 꾸물대다간 국가이념으로 물량+50퍼로 미친듯한 물량을 보여주는 모스크바를 보게 될것이다(...) 모스크바를 패가며 루스문화권지방을 평정했으면 유럽에서 적수는 없을것이다. 폴란드도 우주에 갈 수 있다는걸 보여주자.
- 김영철(배우) . . . . 2회 일치
<태조 왕건>의 궁예는 원래 일찍 하차할 캐릭터였는데, 예상을 초월하여 궁예 역할이 시청자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게 되는 바람에 120부까지 출연하게 되었다. 태조 왕건은 총 200부작인데 절반 넘게 궁예가 주인공 왕건보다 더 주인공다웠고, 궁예가 죽으면서 1기가 끝나고, 견훤이 죽으면서 2기가 끝났다. [[진 주인공]] 맞다. 결국은 연기대상까지 차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연개소문(드라마)|6년 뒤]]에 [[수양제|한 번 더]] [[김갑수|재현된다.]][* 다음 해에는 주인공인 왕건 역의 [[최수종]]이 연기대상을 받았다. 한 드라마가 2년 연속 연기대상을 수상한 사례는 1987년부터 1989년에 방영한 [[토지(소설)|토지]]([[임동진]]-[[반효정]])와 태조 왕건 둘뿐이다.] 김영철은 장기간 한쪽 눈으로 연기한 탓에 시력에 이상이 와서 드라마가 끝나고 고생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시력을 회복한 상태. 덧붙여서 궁예 역을 할때 실제로 삭발을 하여 연기에 임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다른 스님들이 분장과 가발을 한 것과 달리 한눈에 봐도 진짜로 머리를 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승려시절, [[종간]]과 같이 있을 때.]. 어느 사극에서나 나오듯, 궁예 역할 역시 고증문제에 대한 지적 같은 논란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김영철의 절등한 연기력에 그런 지적들은 힘을 못 쓰고 묻혀서 영향을 주지 못했다. 드라마 1기 후반부로 갈수록 궁예가 광기를 부리거나 똘기어린 감정표현을 하거나, 주폭의 모습을 보이거나(...) 하는 등, 비정상적인 모습을 자주 보이는데, 이런 장면들에서 김영철은 특히나 신들린 연기력과 발성을 선보였기에 시청자들 뇌리에 깊이 남을 수 밖에 없던 것이었다. 가령 술취한 궁예가 사람을 쳐죽이는 장면에선 취중에 혀가 꼬이는 것에서부터, 술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움직이는 것까지 진짜 술취한 것처럼 재현하였다.
|| 1998년 || 겨울 지나고 봄 || SBS || 이동진 역 ||
- 신화용 . . . . 2회 일치
우여곡절 끝에 고향팀인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하게 됐지만 주전 자리에는 K리그의 레전드인 '''[[김병지]]'''가 버티고 있었고 포항 유스 출신으로 기대받던 송동진, 1년 전 이미 입단해서 청소년 대표에서 뛰고 있던 '''[[정성룡]]'''까지 있어서 김병지의 백업 자리를 두고 경쟁이 치열했다. 하지만 2005 시즌이 끝나고 송동진은 군 입대, 김병지가 이적하면서 신화용은 정성룡과 주전 경쟁을 하게 된다. 2006년에는 정성룡이, 2007년에는 신화용이 더 많은 기회를 받았으나 2007년 플레이오프부터 정성룡의 독무대가 또다시 펼쳐지며 정성룡에게 주목을 받게 된다.
- 이인 . . . . 2회 일치
* [[1945년]] [[12월 1일]] 임시정부 봉영식에 참석하였다. 서울그라운드에서 윤보선의 사회로 임시정부 봉영식이 시작되었다. 이어 [[오세창]]의 개회사, 이인의 봉영문 낭독, [[권동진]]의 만세삼창으로 이어졌다. 봉영문은 [[권동진]], [[김성수 (1891년)|김성수]], 이인을 통해 [[김구]]에게 전달되었다.<ref>아 비운의 역사현장 경교장(백범사상실천운동연합, 1993), 145페이지</ref>
- 전라북도/인물 . . . . 2회 일치
순창군 - [[김동진(프로게이머)|김동진]] [[고경표]] [[고소영]] [[성시경]] [[박경림]] [[임현식]]
- 전인범 . . . . 2회 일치
2016년 7월 28일 특수전사령부 연병장에서 35년간의 군 생활을 마치는 전역식을 가졌고 같은 달 31일 전역하였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8572276 전인범 전 특수전사령관 이천 특전사서 전역], 《연합뉴스》, 2016년 7월 28일</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3&aid=0003199207 [카드뉴스] "국회의원이 오든지 말든지, 병사들 고생시키지 말라"], 《조선일보》, 2016년 8월 5일</ref> 이날 전역식에는 한미연합사령관 [[:en:Vincent K. Brooks|빈센트 브룩스]] 대장, 미 8군사령관 토마스 밴달 중장, 미 2사단장 테드 마틴 소장 등 [[주한미군]] 수뇌부와 이기백, [[정호용]], [[김동진 (1938년)|김동진]], [[김태영 (1949년)|김태영]] 전 [[대한민국의 국방부 장관|국방부 장관]] 등 한미 양국 군 관계자들이 참석해 전 중장의 전역을 축하했다.<ref>[http://www.huffingtonpost.kr/heebum-hong/story_b_11295018.html 어느 ‘특별한 별’ 이야기 │ 전인범 중장 전역식], 《허핑턴포스트》, 2016년 8월 2일</ref><ref name="c"/> 그는 이 자리에서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한 공로로 한국 정부의 [[대한민국의_훈장#보국훈장|보국훈장 국선장]]과 한미동맹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정부의 공로훈장을 각각 받았으며, 특히 보국훈장 국선장은 그가 중위 시절 합참의장으로 모셨던 이기백 전 국방장관이 걸어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55&aid=0000435078 33년 전 목숨 건 구출… 다시 만난 장군과 중위], 《SBS》, 2016년 7월 28일</ref> 전 중장은 전역사에서 선배 장군들과 미군 장성들, 동기, 후배들을 거론하면서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던 자신에게 아낌없는 지원과 후원을 보내준 것에 고마움을 표했다.<ref>[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60728010013908 전인범 중장 전역식 "부하 잘 보살피면 부하들이 알아서 윗사람 보살핀다"], 《아시아투데이》, 2016년 7월 28일</ref> 그는 “군인들이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하는데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약속을 지켰다. 감사하다”고 말했으며, 마지막으로 “안 되면 되게 하라 검은 베레 영원하라”는 특전 정신을 외치며 전역사를 마쳤다.<ref>[https://www.youtube.com/watch?v=po9JyXV5Hyo 전인범 장군 전역사 영상(discharge speech of LTG. INBUM CHUN)], 《YouTube》, 2016년 7월 28일</ref>
- 하정우(영화감독) . . . . 2회 일치
연기력 부분에서는 믿고 보는 배우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중견배우의 아들이면서 배우로서 하정우만큼 아버지를 뛰어넘어 크게 성공한 다른 연기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이제는 김용건의 아들 하정우가 아니라, 하정우의 아버지 김용건으로 그 인지도가 바뀐지도 오래다. [[영화는 수다다]] 의뢰인편에서 [[이동진(평론가)|이동진]] 평론가가 "하정우 씨는 동세대 최강인 것같다"라고 칭찬했을 정도.
- K리그 챌린지 플레이오프/2015시즌 . . . . 1회 일치
대구는 [[K리그 챌린지]]에서 후반기 부진으로 [[K리그 클래식]] 자동진출권을 놓쳤기 때문에 사기가 상당히 저하된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2015시즌 대구는 수원을 상대로 1승 1무 2패로 상성마저 최악이었는데다가 대구가 챌린지에 합류했던 2014년부터 수원 FC와의 홈경기는 '''단 1승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전을 믿을 수 있는건 무승부로 시합을 종료하여 승강 플레이오프로 가는 방법밖에 없었다고 봐도 무방했으나...
- 김상중(배우) . . . . 1회 일치
* [[거짓말(드라마)|거짓말]](KBS2, 1998) - 이동진
- 김준 (배우) . . . . 1회 일치
| 신동진
- 김지훈(배우) . . . . 1회 일치
|| [[2016년]] || [[우리 집에 사는 남자(드라마)|우리 집에 사는 남자]] || 조동진 || ||
- 대한민국 FA컵/2016시즌 . . . . 1회 일치
[[K리그 클래식]]에 속한 팀들은 본선 자동진출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K리그의 12개 팀과 예선을 통과한 20개팀이 합류하여 32강 대진으로 토너먼트가 이루어진다. 4라운드(32강)~6라운드(8강)까지는 예선전과 마찬가지로 추첨을 통해 대진과 홈팀을 결정하며, 7라운드 대진은 추첨제와 원스타 시스템을 통해 홈팀과 결승 1차전 경기장을 정하게 된다.
- 무라하치부 . . . . 1회 일치
* 신동진 한국 아나운서 협회장이 [[팔푼이]]라는 말이 무라하치부가 어원이 된게 아닌가 추측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http://www.announcer.or.kr/?p=8870&ckattempt=1 (참조)]]
- 문무왕 . . . . 1회 일치
15년([[675년]]) 봄 정월에 구리로 각 관청 및 주·군의 인장(印章)을 만들어 지급했다.<ref name="삼국사기-675">《삼국사기》 권제7 신라본기 제7 문무왕 15년(675)</ref> 2월에 당의 장수 유인궤가 칠중성(七重城)에서 우리 군사를 깨뜨린 뒤 돌아가고,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임명되었다. 문무왕은 다시 당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며 유감을 표명했고, 당은 이에 대한 화답으로 앞서 깎아 없앴던 문무왕의 관작을 회복시켰다.<ref name="삼국사기-675"/> 이때에는 대부분의 백제령이 신라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고구려 남쪽 경계에 이르기까지 신라의 주와 군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에 문무왕은 당이 쳐들어올 것에 대비해 아홉 부대의 병사를 내보내 막게 하였다.<ref name="삼국사기-675"/> 과연 가을 9월, 당은 설인귀를 대장으로 하는 군사를 신라에 보내 천성(泉城)을 치게 했는데, 이때 당에 숙위하고 있던 풍훈(風訓)<ref group="주">앞서 문무왕에 의해 처형당한 김진주(金眞珠)의 아들이다.</ref>이 향도(鄕導)로서 당을 도왔다.<ref name="삼국사기-675"/> 그러나 신라의 장군 문훈(文訓) 등의 선전으로 당병 1,400명을 죽이고 그 병선 40척을 빼앗았으며,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도망치면서 내버리고 간 전마 1천 필까지 신라의 손에 들어왔다.<ref name="삼국사기-675"/> [[9월 29일]]에는 이근행이 20만 군사를 이끌고 매초성(買肖城)에 진을 쳤다. 신라군이 이를 공격하자 당군은 말 30,380필과 무수한 병기를 남겨 놓고 도망갔다.<ref name="삼국사기-675"/>{{refn|group=주|다만 이러한 전쟁 와중에도 신라는 당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치고 있었다.<ref name="삼국사기-675"/>}} 나아가 안북하(安北河)를 따라 관(關)과 성을 설치하고 또 철관성(鐵關城)을 쌓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이 해에 신라와 당이 벌인 크고 작은 싸움이 18번인데, 모두 신라가 이겨서 당병 6,047명을 죽이고 말 200필을 얻었다고 한다.<ref group="주">하지만 아달성(阿達城)이나 적목성(赤木城)에서는 성을 침공한 말갈병에 의해 성이 함락되고 약탈당했으며, 아달성주 소나(素那)나 적목현령 탈기(脫起)가 이때의 싸움에서 전사했다. 석현성(石峴城)이 당병에게 함락되었을 때는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전사했고, 칠중성은 당과 거란·말갈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했을 때 간신히 함락은 면했지만 소수(小守)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신라측 피해도 적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당은 다시 도림성(道臨城)을 함락시켰다.</ref>
- 바실레이오스 1세 . . . . 1회 일치
이후 루트비히가 브레시아에서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어 해당문제는 끝이 났으며, 이후 제국은 서진과 동진을 꾸준히 시도해서 아나톨리아에 진출한 바울파를 쳐부수고 그들의 지도자인 크리소케이루스를 살해했으며, 유프라테스 연안을 거의다 수복하고 달마티아를 수복했으며, 남이탈리아를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비록 크레타 수복은 실패하고 시라쿠사가 함락되면서 시칠리아섬을 완전히 사라센에게 내주었지만, 이로써 서방과 교황이 제국의 우월을 거의 완전히 인정하게 만드는데 성공한다.
- 박명수(MC) . . . . 1회 일치
* MBC 표준FM 《생방송 일요일이 좋다》 (2001~2002, 가수 김창남과 공동진행)
- 박진옥 . . . . 1회 일치
* 2013년 [[대전 시티즌]]으로 이적하기전까지 [[제주 유나이티드]]의 전신인 [[제주 유나이티드|부천 SK]]에 입단한 몇 안되는 '''[[원 클럽 플레이어|원클럽맨]]'''[* 다른 선수 중에는 [[한동진]]이 있다.]이었다고 한다.
- 서상일 . . . . 1회 일치
|같은 지역구 의원 = 대구시 갑: [[서동진]]<br />대구시 병: [[임문석]]<br />대구시 정: [[조재천]]<br />대구시 무: [[조일환 (1916년)|조일환]]<br />대구시 기: [[장영모]]
- 손석우(작곡가) . . . . 1회 일치
| 이전명 = 제7회 (2010년)<br />[[조동진]]
- 안내상 . . . . 1회 일치
* 2011년 [[문화방송|MBC]] 미니시리즈 《[[로열 패밀리 (드라마)|로열 패밀리]]》 ... 조동진 역
- 안숙선 . . . . 1회 일치
[[1986년]]부터 [[1995년]]까지 스승격인 인당 박동진, 운초 오정숙 명창의 뒤를 이어 판소리 다섯마당을 모두 완창하였으며 이후 [[1988년]] 유럽 8개국 순회공연을 시작으로 미국 [[카네기 홀]] 공연, [[링컨 센터]] 여름축제 공연, 프랑스 [[아비뇽 페스티벌]] 한국인 최초 초청 공연, 영국 [[에든버러 페스티벌]] 한국인 최초 초청 공연, 호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초청 공연, 제1회 윤이상 범민족 통일 음악회 평양 모란봉극장 공연 등 프랑스, 미국, 캐나다, 독일, 스페인, 영국, 이탈리아, 벨기에, 네덜란드, 체코, 중국, 일본, 몽골, 터키, 폴란드, 러시아, 홍콩, 브라질 등 세계 40여개국의 초청 공연을 통해 우리의 소리를 알리는 동시에 세계적인 명창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었다.
- 오늘만 산다 . . . . 1회 일치
* [[중국]] 동진 시기에 역술가가 반란을 일으킨 대장군 [[왕돈]]에게 불려가서, 점을 치게 되었는데 당당하게 '실패한다'는 점괘를 내놓고, 왕돈이 "너는 그럼 얼마나 살겠냐?"고 위협하자 "오늘까지입니다."라고 대답했다는 고사가 있다. 물론 역술가는 왕돈에게 살해당했다. 오늘만 사는 사람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윤덕주 (농구인) . . . . 1회 일치
* 외증조부 : 이동진
- 이민우(배우) . . . . 1회 일치
||<|2> 2000년 ||<|2> KBS2 ||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 || 이동진 || ||
- 이상오 . . . . 1회 일치
| 친척 = 이동진(조부) <br/> [[박창암]](사위) <br/> 이일우(백부) <br/> [[이상정 (1897년)|이상정]](형) <br/> 한문이(형수) <br/> [[권기옥]](형수) <br/> [[이상화 (시인)|이상화]](형) <br /> 이용희(조카) <br/> [[이상백 (1904년)|이상백]](형) <br/> [[이열희 (1924년)|이열희]](5촌 조카)
- 이상정 (1897년) . . . . 1회 일치
| 친척 = 이동진(조부) <br/> 이일우(백부) <br/> 백자화(백모) <br/> 한정원(장인) <br/> 박학남(장모) <br/> 권문각(장인) <br/> 장문명(장모) <br/> [[이상화 (시인)|이상화]](아우) <br /> 서온순(제수) <br/> 이용희(조카) <br /> [[이상백 (사학자)|이상백]](아우) <br/> 이학희(조카) <br/> [[이상오]](아우) <br/> 이겸희(조카딸) <br/> [[박창암]](조카사위) <br/> 이준희(조카) <br/> 이상악(사촌 형) <br/> 이상무(사촌 남동생) <br/> [[이열희 (1924년)|이열희]](5촌 종조카) <br /> [[박부남 (1932년)|박부남]](5촌 종질부)
- 이주승(영화배우) . . . . 1회 일치
* 제17회 정동진영화제 등에서 사회를 맡은 경험을 살려 2016년 1월 12일 중국 상해에서 열리는 '패션 크라우드 챌린지 페스티벌'에 MC를 맡게 되었다!
- 이효상 . . . . 1회 일치
|전임자 = (대구시 갑)[[서동진]]<br />(대구시 을)[[서상일]]<br />(대구시 병)[[임문석]]<br />(대구시 정)[[조재천]]<br />(대구시 무)[[조일환 (1916년)|조일환]]<br />(대구시 기)[[장영모]]
- 정광조 (1883년) . . . . 1회 일치
[[한성부]] 출신으로 [[손병희]]의 딸과 결혼했다. [[1919년]]에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 운동을 주도한 손병희의 측근으로서 사전 모의 과정부터 깊숙이 가담했다. [[권동진]], [[오세창]], [[최린]], [[박인호 (1854년)|박인호]] 등과 함께 실무를 맡았으며, 사후 수습을 위해 [[민족대표 33인]]에서는 빠졌다. 당시 맡고 있던 직책은 천도교 대종사장(大宗司長)이었다.<ref>{{독립유공자|3124|박인호}}</ref>
- 정기성 . . . . 1회 일치
* 《[[실미도 (영화)|실미도]]》 (2003년) - 원희 담당 기간병 동진 역
- 정성룡(야구선수) . . . . 1회 일치
[[포항제철고등학교 야구부|포철공고]] 재학 시절 김성범[* 1982년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 [[류명선]], 염창무, [[정윤수]], 최해명 등의 동기들과 팀의 첫 전국대회 진출을 이끌었지만 전국대회에서 준우승만 3번 하는 데 그쳤다. 이들 중 정성룡은 '''제2의 [[장효조]]'''라 불릴 정도로 타격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면서 당시 매서운 타격으로 정평난 포철공고 타선의 선두에 있었다. 이 때문에 고교 졸업 후 삼성에 1차 지명되어, 바로 프로에 입단했다. 이로 인해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고졸신인 3인''' 중 한 명이 되었다.[* 다른 두 명은 해태의 [[문희수]]와 롯데의 [[조용호]]. 84년 이들이 지명되기 전까지 신인드래프트에서는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선수가 지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쟁쟁한 선배들이 자리 잡은 상태였기에 결국 백업이나 2군[* 당시 [[KBO 퓨처스리그|2군 리그]]가 있기 전이었지만 삼성에서는 이미 2군을 운용하고 있었다.]을 전전해야 했다. [[장효조]]가 1989년 롯데로 이적한 후 그의 10번을 물려받을 정도로 여전히 기대받는 유망주였으나, 그동안 정성룡은 오랜 2군 생활 속에 제2의 장효조가 아닌 제2의 [[정동진]]이라 불릴 정도로 살이 쪘다.
- 정영기(배우) . . . . 1회 일치
* 2013년 KBS2 《[[KBS 드라마 스페셜]] - 내 친구는 아직 살아있다》 ...동진 역
- 정칠성 . . . . 1회 일치
[[1929년]] [[1월 21일]] 신간회 경성지회 사찰위원, [[1월 22일]] 신간회 임시대회에서 본부대회 대표회원에 선출되었다. [[2월 17일]] [[신간회]] 2주년 기념식에 [[권동진]], [[허헌]], [[김여식]], [[이종린]], [[홍명희]] 등과 함께 축사를 낭독하던 중 임석경관에 의해 소환되었다. [[2월 19일]] 근우회 중앙상무위원회에서 [[근우회]] 회보 발행책임위원에 선출되었다.
- 최성원(가수) . . . . 1회 일치
고려대학교 물리학과에 73학번으로 입학했을 때부터 이상훈, 이승희, [[김현식]][* 최성원보다 나이가 네살 정도 어렸지만 일찍부터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정광태]] 등과 몰려다니며 음주가무를 즐기고 날라리 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주로 다닌 곳은 명동의 르 시랑스, 내시빌, 오비스 캐빈이었다. 대학교 1학년때 양병집의 음반작업에 통기타 반주로 참여했고 이때부터 프로 세션맨으로 활약했다. 뚝섬스튜디오에서 [[조동진]]의 후임으로 월급 세션맨을 했고, [[이장희(가수)|이장희]]가 DJ를 맡고 있던 '0시의 다이얼'에 반년 정도 고정출연을 하기도 했다.
- 카라스노 고교 . . . . 1회 일치
|| 6 || 봄고 || 1차 예선 2회전[* 카라스노는 인터하이 시드배정교로 2차전에 자동진출했다.] || 오기미나미 고교[* 인터하이에서 1차전부터 시라토리자와를 만나 참패했던 팀.] || 승리 || 2 : 0 || 카지 고등학교 || 8월 11일 || 12권 ||
- 태학 . . . . 1회 일치
그러나 후한 말기 난세가 닥치자 태학 역시 국가의 후원과 보호를 받지 못하여 쇠퇴하여 소멸했는데, 위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 안정된 정권을 갖추면서 낙양에 다시 태학이 설치됐다. 낙양의 태학은 서진 시기까지 계속되었으나, [[팔왕의 난]]으로 중원이 초토화 되면서 태학도 깡그리 소멸한다. [[동진]] 정권은 수도 건강(지금의 난징)에 태학을 재설치했다.--건강한 태학--
- 팔푼이 . . . . 1회 일치
신동진 한국 아나운서 회장은 [[무라하치부]]가 팔푼이의 어원이 아닌가 추측하였다.[[http://www.announcer.or.kr/?p=8870&ckattempt=1 (참조)]]
- 홍국영 . . . . 1회 일치
* 《[[상노]]》(1978, [[TBC]], 배역: [[임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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