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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대락
         '''김대락'''(金大洛, 1845년 ~ 1914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안동시|안동]] 출생. 본관은 [[의성 김씨|의성]](義成), 자는 중언(中彦), 호는 비서(賁西)이다. 후일 [[만주]]에 들어가 [[백두산]] 아래서 산다는 뜻에서 '''백하'''(白下)라는 별호를 사용하였다.
         [[분류:1845년 태어남]][[분류:1914년 죽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안동시 출신]][[분류:의성 김씨]][[분류:이상룡]]
  • 김수환(추기경)
          * 참 신앙인답게 다른 종교인도 [[천주교]] 신자와 동등하게 존중해주었다. [[법정(승려)|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고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다. 2000년 [[성균관]]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수상했다. 심산상은 20세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인 심산 [[김창숙]]을 기념하는 상. 관례에 따라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 자리에서 주저없이 절을 하고 음복을 하기도 했다. 추기경은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라고 말했다.[[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2000/1862968_13452.html|#]] 천주교가 조선 시절의 혹독한 박해[* 상기했듯, 김수환 추기경의 조부도 [[병인박해]] 때 [[순교]]했다.]를 받아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유교와는 역사상으로 악연임을 고려할 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의 김창숙 묘소 참배는 일종의 종교 간 화해로 해석되기도 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종교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종교라 여기고 지키면 됩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오버랩되는 일화다.]
  • 김완섭
         반(反) [[페미니즘]] 발언과 반 [[민족해방]](반 NL) 시각을 견지하여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쇼비니즘]] 등을 비판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일부 [[한국]]·[[일본]] 언론에서의 [[친일파]] 옹호 발언과 [[김구]], [[안중근]], [[유관순]], 김좌진 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비판이 갑작스레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명성황후]]를 비판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저술, 강연, 방송 출연 등을 하였으며 일본, 중국 등 외국의 학자들과 토론을 하기도 했다. 독립운동가에 대한 모독으로 사회적 지탄을 받고 법적 제재를 받기도 하였으나 일본의 우익은 그를 양심세력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2004년]] [[10월]]에는 [[박기서 (1948년)|박기서]]<ref>시내버스 운전기사 출신의 시민운동가로서 [[1996년]] [[10월 23일]] 백범 김구의 암살범인 안두희를 격살한 인물. 이후 3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가 이듬해 가석방되었고, 현재까지 백범 기념사업회 관련 활동을 하고 있다.</ref>를 우연히 만났다가 독립운동가에 대한 비판을 이유로 구타당하여, 부상당하기도 했다.
         그밖에 그의 집과 주변 인물, 가족 등에게도 수시로 익명의 협박 전화와 협박 편지가 전달되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또한 그의 독립운동가 비판과 [[친일파]]에 대한 옹호를 놓고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해지고 있고 몇몇 발언에 대해서는 실정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유죄판결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2006년]] [[2월]] 김완섭은 독립운동가 김좌진을 산적떼 두목이라고 모욕한 혐의로 [[국회의원]] [[김을동]]으로부터 명예 훼손으로 불구속 기소되었고, 아울러 김을동은 부친, 조부의 사자 명예 훼손 부분 관련해서도 추가 고소할 것을 밝혔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0015820 “임수경은 돼도 김완섭은 안돼”…검찰,독도망언 악플 고소사건 수사 착수] 국민일보 쿠키뉴스 2006년 2월 26일</ref><ref>[http://minihp.cyworld.com/40620509/212638986 김완섭 허위 사실 반론], 《[[김을동]]》[[미니홈피]] [[인용]]</ref><ref name="ghan1">[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02/e2006022816200348090.htm 서울경제 : [기고] '3·1정신' 부활시키자] {{웨이백|url=http://economy.hankooki.com/lpage/opinion/200602/e2006022816200348090.htm# |date=20111123170401 }} 서울경제신문 2006년 2월 29일</ref> 본 고소에 대해 검찰은 "사회 상규에 위배되지 않는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형법 20조 정당 행위 규정에 따라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165260] 친일 글 반발 ''악플'' 네티즌 1000여 명 검찰 "죄 안된다".</ref>
         [[2003년]] [[11월]] 그는 시민들에게 배포한 문건을 통해 "김구가 무고한 일본인을 살해했다.<ref name="무고1"/>"고 주장했다.<ref>그러나 [[김구]]가 살해한 쓰치다 조스케의 신분에 대해서는 의혹이 제기되어 왔다.</ref>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 [[김구]]를 모독했다는 네티즌들의 비판을 받았으나, [[1987년]] [[창원대학교]] 교수 [[도진순]]이 찾아낸 일본 외무성 자료를 인용해 [[김구]]가 [[치하포]]에서 타살한 쓰치다 조스케는 계림장업단 소속 상인<ref name="kyunghang01"/> 이라고 밝혀졌던 내용이었다.
  • 김용환 (1887년)
         | 직업 = [[독립운동가]]
         '''김용환'''(金龍煥, [[1887년]] ~ [[1946년]])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f>[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36272496317615019 '서프라이즈' 故 김용환, 노름꾼으로 위장한 독립운동가]{{깨진 링크|url=http://tvdaily.mk.co.kr/read.php3?aid=1336272496317615019 }} 티브이데일리 2012년 5월 6일</ref>
         [[분류:1887년 태어남]][[분류:1946년 죽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의성 김씨]][[분류:안동시 출신]]
  • 김창숙(독립운동가)
         ||||<#ffd700> [[파일:대한민국 국기.png|width=30]]'''[[대한민국]] 독립운동가'''[[파일:대한민국 국기.png|width=30]] ||
         ||<#ffd700> 직업 ||정치가, 독립운동가, 교육자 ||
         한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 교육인이며 [[성균관대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총장]]
         [[분류:1879년 출생]][[분류:1962년 사망]][[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성주군 출신 인물]][[분류:동명이인/ㄱ]]
  • 박상희(1906)
         [[일제강점기]]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경상북도]] [[칠곡군]] 출생.
         [[8.15 광복|해방]] 후 [[구미시|구미]]에서 그의 정치적 인기는 대단했다. 좌우를 가리지 않고 인망이 높아,[* 심지어 대구경찰서장이 "'''박상희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지고 신원을 보증한다'''"고 했으니 말 다했다.] 대구가 좌익들에 대한 호감도가 높았던 지역이라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구미지역에서 좌우익을 막론하고 지식인,독립운동가 그룹의 리더였다.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국준비위원회]] 구미 지부를 창설하고 건준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이듬해 [[1946년]]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산]]군지부 사무국장을 맡았으며, 후에는 [[조선공산당]] 선산군당 총책이 되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칠곡군 출신 인물]][[분류:1906년 출생]]
  • 박차정 (독립운동가)
         | 직업 = 작가, 교육자, [[독립운동가]], [[군인]]
         '''박차정'''(朴次貞, [[1910년]] [[5월 7일]] ∼ [[1944년]] [[5월 27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김원봉]]의 두 번째 부인이며<ref>김원봉의 본부인은 평안도 출신 최씨이고, 셋째 부인은 독립운동가 최석순의 딸 최동선이다.</ref> 독립운동가이자 북한의 초대 국가원수 겸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김두봉]]의 조카딸이었다. 근우회와 부녀복무단에서 활동했다.
         [[동래]] [[동래여자고등학교|일신여학교]]에 입학하여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근우회]] 중앙집행위원, 중앙상무위원으로 활동하였다.<ref name="new22">[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146639 5월의 독립운동가:박차정 전시회 개최]</ref> 1930년 근우회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하다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30년]] [[중국]]으로 망명한 후 [[의열단]]에 가입,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의열단]]장 [[김원봉]]과 결혼하였으며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여자교관, [[조선민족혁명당|민족혁명당]] 부녀부 주임,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장 등으로 활동하였다.<ref name="new22"/> 1939년 2월 장시성 쿤륜산 전투 중에 부상을 입고 그 후유증<ref name="new22"/>과 성병<ref>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도서출판 민음사, 2005) 244</ref> 등으로 1944년 5월 27일 충칭에서 병사하였다. 독립 운동 중 사용한 가명은 임철애(林哲愛), 임철산(林哲山)이다. <ref>[http://www.suwon.com/news/articleView.html?idxno=70943 부산이 낳은 대륙의 들꽃 '박차정'] 수원일보( 2011.12.14) 기사 참조</ref>
         박차정은 [[1910년]] [[5월 7일]] 당시 [[경상남도]] [[동래구]]이던 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출생했다. 부친은 일제에 항거하여 자결했고, 숙부 [[박일형]]과 외가의 친척들, 오빠들이 항일 운동에 뛰어든 집안에서 자랐다. 일제의 침탈에 항거하여 자결·순국한 아버지와 독립운동가 김두전(金枓全), [[김두봉]](金枓鳳)과 친척인 어머니,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숙부 박일형(朴日馨) 등의 영향을 받았다.<ref name="new22"/> 박차정은 김두봉의 조카딸이었고, 독립운동가 김두봉은 해방 후 북한의 초대 국가원수 겸 초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된 인물이었다.
         해방 후 독립운동가이자 남편 김원봉에 의해 밀양에 안장된 박차정의 유해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했고 남편 김원봉도 월북, 북한에서 장관급 각료를 역임했기 때문에 평가받지 못하였다. 공적에 비해서는 뒤늦게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부산시 동래구현, 동래고등학교 맞은편에 생가가 복원되고<ref>《뉴스앤뉴스》 (2005.07.13) [http://newsandnews.com/article/zboard.php?id=pusan_youngna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desc&no=18 여성 항일독립운동가 박차정 생가 복원] {{웨이백|url=http://newsandnews.com/article/zboard.php?id=pusan_youngnam&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name&desc=desc&no=18# |date=20070930000028 }}</ref> [[부산 금정구]]에 동상이 마련되어 있다.<ref>사이버인권관, [http://www.cyberhumanrights.com/Kor/Information/1st/MOVEMENTVIEW.html?code1=MOV05&lang=KOR&lpage=5&no=241 독립운동가 박차정]</ref>
         * 외당숙 : [[김두봉]](金枓奉, [[1889년]] - [[1961년]]?, 독립운동가 겸 한글학자)
         * 외재종숙 : [[김약수]](金若水, 본명은 김두전(金枓全), 독립운동가)
         * 숙부 : 박일형(朴日馨, 독립운동가, [[사회주의]]자)
         * [http://www.newswire.co.kr/newsRead.php?no=146639 5월의 독립운동가 박차정 선정 및 전시회]
         {{2006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 박희광
         일제 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다. 무장독립운동단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통의부)와 임시정부와 연계를 맺고 조직되어 압록강 연안지역을 관할하던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여 만철연선 친일파 제거등에 참가하였으며, 이후 김광추(金光秋), 김병현과 함께 3인조 암살단을 조직, 활동하였다.
         박희광은 만주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로 통의부, 참의부에서 활동하였으며,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일본 영사관 습격, 친일파 정갑주와 가족 암살, 독립운동가 체포를 위해 활동한 스파이 배정자(裵貞子, 일본식 이름: 다야마 사다코) , 이용구, 최정규 암살임무 등 항일 독립운동단체와 임시정부에 무기와 군자금을 조달 했었다.
         이 사건은 당시 뤼순(여순)지역 언론에 보도된 대표적인 항일 독립운동사건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독립운동을 펼치는데
         뤼순형무소 수감 독립운동가로써는 최장기 복역중 일본천황 즉위와 황태자 출생 등 두 차례 감형되어 출옥하였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 [[분류:구미시 출신 인물]][[분류:1901년 출생]][[분류:1970년 사망]]
  • 서상일
         '''서상일'''(徐相日, [[1886년]] [[7월 9일]] - [[1962년]] [[4월 18일]], [[대구]] 출생)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정치가이다.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기간 중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했다. 호 동암(東菴). 본관은 [[달성 서씨|대구]].
         [[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호헌동지회]][[분류:윤보선]][[분류:윤치호]][[분류:조봉암]][[분류:장택상]][[분류:민주당 (대한민국)]][[분류:진보당 (대한민국) 정치인]][[분류:고려대학교 동문]][[분류:대구 서씨]][[분류:간 질환으로 죽은 사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서태지
          * 외가가 독립운동가 집안이라고 한다. [[MBC]] 인간시대에서 다룬 서태지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서태지의 외증조부가 구한말 고종 황제를 보필했던 육군 대장이었다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뒤로는 독립 운동을 했다는데, 전처였던 [[이지아]]가 [[친일파]]의 후손이었던 탓에 어떤 언론에서는 두 사람의 결별을 '[[독립운동가|독립 투사]]의 후예와 [[친일파]] 후예의 이별'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다뤘다고도 한다.[[http://blog.naver.com/gagarock/220222374989|#]]
  • 신팔균
         | 직업 = [[독립운동가]]
         {{1994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분류:1882년 태어남]][[분류:1824년 죽음]][[분류:작전 중 사망자]][[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서로군정서]][[분류:통의부]][[분류:육군무관학교 동문]][[분류:평산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
  • 영양군
          * [[김도현]] - [[독립운동가]]. 도해순국.
          * [[남자현]] - 독립운동가. 남자현 지사 생가 복원중.
          * [[이현규]] - 독립운동가
  • 윤선도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위당 [[정인보]](鄭寅普)는 '정송강(鄭松江)과 국문학(國文學)'이란 글에서 "고산은 대개 담아의 일경으로 나아가 저 강호연파에 배합되는데 좋다. 고산의 '어부사시사'에 "우는 것이 뻐꾸긴가 푸른 것이 버들숲가" 같은 것은 물외한인(物外閑人)의 우유(優遊)하는 심경을 흔적없이 나타냈고, "하마 밤들거냐 자규소래 맑게 난다" 같은 것은 호남 산수간의 야경(夜景)을 귀신같이 그려 놓았다."라고 말하였다.
  • 이갑상
         | 직업 = [[독립운동가]]
         '''이갑상'''(李甲相, [[1924년]] [[3월 16일]] ~ [[2017년]] [[1월 29일]])은 [[한국의 독립운동가]]이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122242 "젊은이들, 나라사랑 되새겨 주오" 생존 애국지사 이갑상옹] 매일신문 2009-03-02</ref>
         [[분류:1924년 태어남]][[분류:2017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 이광국
         | 직업 = [[독립운동가]] <br />
         '''이광국'''(李光國 [[1903년]] ~ ?)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남만청년총동맹에서 활동했다.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 이광민
         | 직업 = [[독립운동가]] <br />
         '''이광민'''(李光民 [[1895년]] ~ [[1945년]] [[10월 18일]])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재무담당 및 대표로 만주 무장항일조직의 중심인물.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백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이며 부친은 독립운동가인 [[이봉희]](李鳳羲)이다. 이명은 '''이문형'''(李文衡), '''이영형'''(李永衡), '''이영'''(李暎(英))이다. 자는 사익(士翼), 호는 자화(子華).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1926년 1월 [[정의부]](正義府) 중앙총부의 결정에 따라 김세준(金世俊), 김홍식(金鴻植) 등과 함께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에서 군인과 군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1926년 11월 제3회 [[정의부]](正義府) 중앙의회에서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직의 살림을 총괄했다.<ref>[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371&ipp=12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ref> 같은 해 가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남만총국 조직부 간부에 선출됐다. 1927년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좌우합작]] 추진을 위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릴 때, [[정의부]] 중앙위원으로서 [[김동삼]](金東三), [[오동진 (1889년)|오동진]](吳東振), 김원식(金元植) 등과 함께 참석했다. 같은 해 5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이자 조선공산당 남만도 간부로서 기관지『농보(農報)』를 복간했다.<ref name="기념관" />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으며 [[2010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2&sBookNmbr=A003&sMok_Nmbr=575 유교넷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2010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분류:1895년 태어남]][[분류:1945년 죽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장교]][[분류:이상룡]][[분류:고성 이씨]][[분류:안동시 출신]]
  • 이병화
         | 직업 = [[독립운동가]]
         '''이병화'''(李炳華, [[1906년]] [[2월 26일]] ~ [[1952년]] [[6월 8일]])는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만주에서 무장항일투쟁을 했다. 본관은 [[고성 이씨|고성]](固城). [[안동]] 출신. 조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1858년)|이상룡]]이며 부친은 독립운동가인 [[이준형 (1875년)|이준형]]이다. 이대용(李大用), 이계오(李桂五), 이병화(李秉華), 이탁(李拓), 이경천(李慶天), 이춘원(李春元)과 같은 여러 이름을 썼다. 자는 경천(敬天), 호는 소파(小坡).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906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출생했다. 생가인 [[안동 임청각|임청각]](보물 제182호)은 500년 된 현존하는 가장 규모가 큰 살림집으로<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8560 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행복여행 - 안동 임청각]</ref>, 3대에 걸쳐 독립유공자 9명을 배출했다.<ref>{{웹 인용 |url=http://mpva.tistory.com/2169 |제목=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임청각’ |확인날짜=2016-08-18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19221645/http://mpva.tistory.com/2169 |보존날짜=2016-09-19 |깨진링크=예 }}</ref>
         백범일지에는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안 좋은 평가가 많이 있는데, 그 중 이상룡의 자손은 공산주의에 충실한 나머지 살부회(아비 죽이는 회)까지 조직하였다고 하나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죽이지는 않고 회원끼리 서로 아비를 바꾸어 죽이는 것이라 하니 아직도 사람의 마음이 조금 남았다라는 부분이 있다. 2015년 개봉된 영화 [[암살 (2015년 영화)|암살]]에서는 살부계에 대한 이야기도 백범일지의 살부회를 연상시키고 있으나, 이병화의 부친 [[이준형]]은 1942년 독립의 요원함에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이병화는 해방 후 이 내용을 가지고 당시 부통령이던 [[이시영 (1868년)|이시영]]을 찾아가서 송사하겠다고 했으나 이시영은 사실이 왜곡되었다고 하면서도 새나라 건설의 복잡한 시기에 그런 일로 재판을 하면 온 나라가 또 시끄러워지고 혼란스러워지니 염려하지 말라고 말했다고 한다.<ref>허은, 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정우사, 1995년</ref>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2&sBookNmbr=A003&sMok_Nmbr=575 유교넷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분류:1906년 태어남]][[분류:1952년 죽음]][[분류:한국의 사회주의자]][[분류:대한민국 임시 정부 시대 육군 장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고려공산청년회]][[분류:이상룡]][[분류:고성 이씨]][[분류:안동시 출신]]
  • 이봉희
         | 직업 = [[독립운동가]] <br />
         '''이봉희'''(李鳳羲 [[1868년]] [[10월 15일]] ~ [[1937년]] [[1월 28일]])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신흥무관학교|신흥학교]] 교장을 역임하며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했다.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의 동생이며, [[정의부]] 재무위원인 [[이광민]]의 아버지다. '''이계동'''(李啓東), '''이상훈'''(李相勳), '''이상희'''(李相熙), '''이경식'''(李京植), '''이기동'''(李基東) 등 여러 이름을 썼다. 자는 덕초(德初), 호는 척서(尺西).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3대에 걸쳐 독립유공자 9명을 배출한<ref>[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59430 경북일보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ref> [[안동시|안동]] 에서 태어났다. 1895년 [[항일의병운동|을미의병]]에 참여했고, 1905년 [[이상룡 (1858년)|이상룡]], 박경종 등과 함께 [[가야산]]에 의병기지 건설을 도모했으나 일본군의 기습으로 실패했다.<ref name="대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f>.<ref>{{서적 인용 |저자=채영국 |날짜=2007 |제목=서간도 독립군의 개척자 이상룡의 독립정신 |쪽=61}}</ref> 1908년 대한협회 안동지회 설립에 참여해 구국운동을 했다. 1911년 만주로 망명, [[경학사]]를 설립에 참여<ref name="기념관">[[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술정보</ref>하는 등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헌신했다. 1914년 [[신흥무관학교|신흥학교]] 교장을 맡아 수많은 독립운동 지도자들을 길렀다.<ref name="보훈처">[[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공훈록)</ref>
         1927년 2월부터 [[흑룡강성]] 탕원현(湯源縣) 오동하서(梧桐河西)에서 농토개척사업에 힘썼다.<ref name="대백과" /> 1932년 [[이상룡 (1858년)|이상룡]]의 병이 깊다는 소식을 듣고 [[하얼빈]]에서 와서 환국할 것을 설득했으나 거부당했다.<ref name="허은2">{{서적 인용 |저자1=허은 |저자2=변창애 |날짜=2010 |제목=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쪽=167}}</ref> [[이상룡 (1858년)|이상룡]] 사후 [[이준형 (1875년)|이준형]] 일가가 환국할 때 중국 내 구간을 동행하는 등 직접적인 도움을 주었다.<ref name="허은3">{{서적 인용 |저자1=허은 |저자2=변창애 |날짜=2010 |제목=아직도 내 귀엔 서간도 바람소리가 |쪽=182}}</ref> 1937년 1월 28일 [[하얼빈]](哈爾濱) 취원창(聚源昶)에서 7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1990년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 이승화(李承和), [[이광민|이광민(李光民)]] 등 재만독립운동가들의 유해와 함께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대전현충원]] 안장됐다.<ref name="대백과" />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ref name="보훈처" />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2&sBookNmbr=A003&sMok_Nmbr=575 유교넷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 이상동
         | 직업 = [[독립운동가]] <br />
         '''이상동'''(李相東 [[1865년]] [[11월 4일]] ~ [[1951년]] [[11월 29일]])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안동에서 최초로 [[3.1만세운동|3.1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의 동생이다. 이명은 '''이용희'''(李龍羲)이다. 자는 건초(健初) 호는 만진(晩眞).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3대에 걸쳐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한<ref>[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959430 경북일보 고성 이씨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ref> 안동 [[안동 임청각|임청각]]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의병이 일어나자 [[신돌석]] 휘하에서 참여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후 [[대한협회]](大韓協會) 안동지회에서 국권 회복 운동을 했다.<ref name="역대인물">[[한국학중앙연구원]]_[http://people.aks.ac.kr/index.aks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ref> 1911년 기독교로 개종하고 이듬해 평양의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 들어갔다. 이후 안동으로 돌아와 교회를 세우고 장로로 재직했다.
         [[분류:1865년 태어남]][[분류:1951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안동시 출신]][[분류:고성 이씨]][[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3·1 운동 관련자]][[분류:이상룡]]
  • 이승화 (1876년)
         | 직업 = [[독립운동가]] <br />
         '''이승화'''(李承和 [[1876년]] [[8월 2일]] ~ [[1937년]])는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다.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자는 여중(汝中), 호는 담옹(淡翁)이다.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의 당숙이다.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2&sBookNmbr=A003&sMok_Nmbr=575 유교넷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 이운형
         | 직업 = [[독립운동가]] [[목사]] <br />
         '''이운형'''(李運衡 [[1891년]] [[3월 24일]] ~ [[1972년]] [[3월6일]])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개신교]] [[목사]]이다.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고 [[3.1운동]]에 참여했다. 본관은 [[고성 이씨|고성]](固城). 안동 출신. 부친은 안동에서 최초 [[3.1만세운동|만세운동]]을 했던 [[이상동]](李相東)이며, 백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인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이다. 자는 중약(重若), 호는 백광(白光).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1891년 [[안동시|안동]]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안동 임청각|임청각]](보물 제182호)이다.<ref>{{웹 인용 |url=http://mpva.tistory.com/2169 |제목=국가보훈처 공식블로그 - 9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한‘임청각’ |확인날짜=2016-08-30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919221645/http://mpva.tistory.com/2169 |보존날짜=2016-09-19 |깨진링크=예 }}</ref> 아버지는 안동에서 최초 [[3.1만세운동|만세운동]]을 주도한 [[이상동]], 큰아버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이다. 안동 최초의 근대식 학교인 협동학교를 1기로 졸업했다.<ref name="기념관">[[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술정보</ref>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2&sBookNmbr=A003&sMok_Nmbr=575 유교넷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 이준형 (1875년)
         | 직업 = [[독립운동가]] <br />
         '''이준형'''(李濬衡, [[1875년]] [[4월 21일]] ~ [[1942년]] [[10월 12일]])은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서간도의 [[경학사]], 부민단, [[서로군정서]]에서 활약했다. 본관은 [[고성 이씨|고성]](固城). [[안동시|안동]] 출신.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의 아들이며 독립운동가 [[이병화]](李炳華)의 아버지이다. 이명으로 이재섭(李在燮), 이중조(李中組),이동고(李東皐)를 썼다. 자는 문극(文極), 호는 동구(東邱).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대에 걸쳐 9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된 집으로 유명한 경상북도 안동 [[안동 임청각|임청각]]<ref>[http://www.hankookilbo.com/wdv/08414e0e5d9747e3a9e964bbd1209a66 한국일보. 수백년 고택마다 올곧은 항일 의지 켜켜이.광복 70돌...독립운동가들의 요람, 경북 안동]</ref>에서 출생했다.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1911년 1월 5일 부친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 [[동삼성]]으로 건너갔다. [[유하현]](柳河縣) 고산자(孤山子)에 정착해 [[경학사]](耕學社)의 설립에 참여했다.<ref name="보훈처">[http://mpva.go.kr/narasarang/gonghun_view.asp?id=6231&ipp=10000 국가보훈처 독립운동가(공훈록)]</ref> [[경학사]]가 재정곤란으로 어려움을 겪자 그는 [[이상룡 (1858년)|이상룡]]의 지시로 국내로 잠입해 예천의 이규홍(李圭洪)에게서 군자금을 얻어내는 한편<ref name="기념관" />, 종가인 [[안동 임청각|임청각]]을 매각,<ref>[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69383&yy=2015 매일신문 임청각 '비운의 80년'…문서로 드러난 '애국']</ref> 군자금을 마련해 만주로 돌아갔다.<ref name="이종서2">{{서적 인용 |저자=이종서 |날짜=2016 |제목=군자불기의 임청각, 안동 고성이씨 종가 |쪽=170}}</ref>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2&sBookNmbr=A003&sMok_Nmbr=575 유교넷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 이형국
         | 직업 = [[독립운동가]] <br />
         '''이형국'''(李衡國 [[1883년]] [[12월 12일]] ~ [[1937년]] [[3월 27일]])은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고성(固城). 안동 출신. 백부는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 [[이상룡 (1858년)|이상룡(李相龍)]]이며 부친은 안동에서 3.1운동을 했던 [[이상동]](李相東)이다. 자는 시윤(時尹), 호는 창해(滄海). 1990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 [http://www.ugyo.net/cf/frm/tuFrm.jsp?CODE1=02&CODE2=03&CLSS=2&sBookNmbr=A003&sMok_Nmbr=575 유교넷 (안동)독립운동가 700인]
  • 전형필
         [[1906년]] [[서울특별시|서울]]의 대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26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9년]]에 [[와세다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 [[1932년]] [[서울특별시|서울]] [[관훈동]]의 한남서림(고서, 고서화를 취급하던 서점)을 인수하고, 우리민족 문화재들이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문화재]]들을 구입하기 시작한다. [[문화재]]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휘문고등보통학교]] 스승이었던 춘곡 [[고희동]]과 [[독립운동가]] 위창 [[오세창]]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 차희식
         |직업 = [[독립운동|독립운동가]]
         '''차희식'''(車喜植, 1870년 ~ 1939년)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 [[이 달의 독립운동가]]
         {{2010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분류:1870년 태어남]][[분류:1939년 죽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연안 차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
  • 채기중
         |직업 = [[독립운동|독립운동가]]
         '''채기중'''(蔡基中, 1873년 ~ 1921년)은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인천 채씨|인천]](仁川), 자는 극오(極五), 호는 소몽(素夢), 일명 기중(基仲)이다.
         {{2003년-이 달의 독립운동가}}
         [[분류:1873년 태어남]][[분류:1921년 죽음]][[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인천 채씨]][[분류:상주시 출신 인물]]
  • 최두선
         '''최두선'''(崔斗善, [[1894년]] [[11월 1일]] ~ [[1974년]] [[9월 9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겸 [[정치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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