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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훈(배우) . . . . 8회 일치
||<|3>2014||'SUNG HOON JAPAN' 팬클럽 창단||도쿄||<|3>일본||도쿄 청년관||
||도쿄||RIHGA ROYAL HOTEL||
||<|2>2015 SUNGHOON CHRISTMAS SHOW||<|2>도쿄||<|2>일본||도쿄 더 프린스 파크 타워 도쿄||
||<|13>2017||2017 Sunghoon Wintershow||도쿄||일본||시부야의 SAKURA HALL||
||One Night with ソンフン じれったいロマンス上映會||도쿄||일본||スクエア莊原 ひらつかホ―ル||
- 봉준호 . . . . 7회 일치
1993년 6mm 단편 영화 《백색인》을 연출하여 영화계에 데뷔했으며, 2번째 단편《지리멸렬》은 큰 화제가 되었다. [[배두나]]가 출연하였던 첫 장편 《[[플란다스의 개 (영화)|플란다스의 개]]》가 흥행에 실패했으나 이후 [[송강호]]와 김상경이 출연한 《[[살인의 추억]]》을 개봉하였는데 크게 흥행하였고,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잡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2006년 7월에 3번째 장편 영화 《[[괴물 (2006년 영화)|괴물]]》을 개봉했다. 2008년 그는 [[미셸 공드리]], [[레오 카락스]] 감독과 함께 [[도쿄도|도쿄]]를 주제로 한 옴니버스 프로젝트 영화 《[[도쿄!]]》에 참여하였다. 3편의 영화 중 "흔들리는 도쿄"에서 [[카가와 테루유키]], [[아오이 유우]]와 호흡을 맞췄다. 이 영화를 통해 멜로적 감수성 또한 인정 받았다.
| {{small|*}} 《[[도쿄!]] - 흔들리는 도쿄》||옴니버스 영화||2008년
* [[2003년]] 제16회 [[도쿄 국제 영화제]] 아시아영화상
- 이상정 (1897년) . . . . 7회 일치
* [[일본]] [[육군유년학교 (일본)|도쿄 세이조]] [[도쿄 공업대학|중학교 육군유년학부]] 졸업
* [[도쿄 예술대학|일본 도쿄 미술전문학교]] [[전문학사]]
* [[히토쓰바시 대학|일본 도쿄 상업전문학교]] 전문학사
[[분류:1897년 태어남]][[분류:1947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시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장교]][[분류:한국의 장군]][[분류:반일 감정]][[분류:김구]][[분류:염상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육군 장군]][[분류:한국독립당]][[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자유 연애]][[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저술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조각가]][[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도쿄 공업대학 동문]][[분류:도쿄 예술대학 동문]][[분류:히토쓰바시 대학 동문]][[분류:고쿠가쿠인 대학 동문]][[분류:유교 신자]][[분류:대한민국의 정치인의 배우자]]
- 장헌식 . . . . 6회 일치
1895년 일본 관비 유학생에 선발되어 1903년까지 일본에 유학하며 [[게이오 의숙]]의 보통과와 고등과 과정, 도쿄 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에서 수학했으며, 일본 사법성과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의 사무견습, 대장성의 사무견습으로 재직했다. 귀국 후 궁내부 주사로 임용되어 학부에서 근무하다가 한성부윤을 역임했다. [[1910년]] [[10월]] [[한일 병합 조약]] 이후 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평안남도 참여관, [[1917년]]에 [[충청북도]] 장관(도지사)으로 승진한 뒤 충청북도 도장관, 조선총독부 사무관, 총독부 관방실 계원, 1924년 전라남도 지사 등을 역임했다.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하면서 그는 [[도쿄 제국대학]]에 진학, [[1898년]] [[10월]]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에서 [[행정법]]을 전공하며 행정법 전문가로 일본 대장성 총무국에서 견습 근무했다. [[1902년]] [[7월 11일]]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1902년]] [[10월 21일]] [[도쿄 제국대학]]의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1903년]] [[3월]] 중퇴하였다. [[1902년]] [[11월]] 그는 일본 도쿄에 있는 [[대장성]] 총무국 사무견습 겸 사무촉탁이 되었다, 같은 달 그는 대장성 사무견습 통신사(大藏省 事務見習通信事)로 발령되어 [[1903년]] [[3월]]까지 근무했다.
- 정칠성 . . . . 6회 일치
유년 시절에 기녀가 되어 “금죽”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였고, 후일 필명이자 아호로 사용하였다. 기생학교에서 수료한 후 한남권번의 기생으로 있다가 [[1919년]] [[3·1 만세 운동]]을 계기로 사회운동에 참여하였고, [[여성주의]] 운동에도 참여하였다. [[1924년]] [[허정숙]](許貞淑), [[정종명]](鄭鍾鳴), 오수덕(吳壽德) 등과 함께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 여성들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하였고, [[일본]] 유학 중 1925년 도쿄에서 여자유학생단체인 삼월회를 조직했다.
[[3.1 운동]]에 참여한 [[기생]]의 한사람이었으며, [[조선총독부|총독부]]의 눈을 피해 이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여자기예학교]]를 수학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사상에 동조하게 되었다.
[[1922년]] [[부산]]에서 배편으로 [[일본]]에 다시 건너가, [[동경]]의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영어를 수강하였다. 그러나 비용 마련의 실패로 [[미국]] 유학의 꿈은 좌절되었다.
이후 [[일본]]에 건너가 체류 중, [[1925년]] [[3월]] [[도쿄]]에서 무산계급 및 여성의 해방을 목적으로 [[이현경]], [[황신덕]] 등의 유학생들과 함께 [[동경]]의 조선여성단체인 [[삼월회]](三月會)를 조직, 삼월회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3월 8일]] [[대구]]부내 노동공제회에서 [[대구여자청년회]] 주최 [[세계 여성의 날|국제부인데이]] 기념행사에 연사로 초빙되어 '국제부인운동의 의의'라는 주제로 강연하였다. [[1925년]] [[3월 22일]]에는 [[대구청년회관]]에서 경북지역 인사들이 모인 사회주의 연구 사상단체 사합동맹(四合同盟)에 창립발기인으로 참여, 맹원으로 활동하였다. [[3월 31일]] 다시 유학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도쿄 여자기예학교]]에 복학하였다.
정칠성이 관여한 단체들은 한결같이 여성 해방과 무산계급 여성에 의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목표로 했다.<ref name="propp"/> 그녀는 남자에게서 그리고 사회의 억압과 인습의 굴레에서 독립하여 한 사람의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 중요하다 하였다. 정칠성은 3.1운동 뒤 화류계를 떠나 사회주의사상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2년 도일하여 일본 도쿄영어강습소에서 수학했다.<ref name="dispose"/>
- 하이큐/230화 . . . . 6회 일치
* 도쿄로 올라온 카라스노 고교. 스카이트리 등 도시문물에 눈이 돌아가게 즐거워한다.
* 드디어 시작되는 첫시합. 도쿄 체육관에서 네코마 고교가 카라스노를 마중한다.
* 히나타 쇼요는 차창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모른다. 도쿄에 올라온 카라스노는 시골출신답게 도시풍경 하나하나에 감탄한다. 특히 히나타, 니시노야 유, 타나카 류노스케 3인방은 일일히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을 취한다. 츠키시마 케이나 엔노시타 치카라 같은 차분한 멤버들은 얌전히 있다.
* 그들을 태운 버스는 으리으리한 호텔 앞을 지나친다. 이때 타케다 잇테츠 고문이 "곧 도착"한다고 말한다. 타나카는 이런 호텔이 묵는 거냐고 환호하는데, 진짜 숙소는 그 옆에 있는 허름한 보통 여관이었다. 어쨋거나 도쿄는 도쿄. 타나카는 "유령이 나올 거 같다"고 흥분하고 탐험하자고 제안한다. 히나타, 니시노야가 따라나서려는 찰나, 사와무라의 매서운 눈초리가 소리없는 경고를 날린다.. 또 조용히 대답하는 삼인조.
* 마침내 오고야 만 1월 5일. 도쿄 체육관에 당도한다. 전국 배구 고등학교 선수권 대회. 통칭 봄고대회. 배구의 갑자원이라 불린다. 히나타는 작은 거인이 싸웠던 무대라고 감개무량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다른 학교 선수들이 지나가다 히나타와 부딪히는데 사과도 없이 가버린다. 상당히 키가 큰 그룹. 츠키시마는 2m가 넘을 거라고 예상한다.
- 김형준(배우,가수) . . . . 5회 일치
* 2016년 뮤지컬 인더하이츠 베니 역으로 캐스팅 되었다. 8월 23일부터 9월 3일까지 도쿄 분카무라 오챠드홀에서 공연을 했고 요코하마 KAAT1 카나가와 극장에서 10월 22, 23일날 공연을 하고 10월 31일부터 11월 4일까지 공연을 했다.
* 2011년 2월 19일 일본 도쿄에서 일본 공식 팬클럽을 창단했다.
* 2012년 3월 29일 ~ 4월 7일까지 일본 오사카, 나고야, 도쿄 순으로 총 6회에 걸쳐 ‘KIMHYUNGJUN 2012 1st Story in Japan’이란 타이틀로 일본 단독 콘서트를 개최했다.
* 2015년 7월 4일 일본 도쿄 마이하마 엠피 시어터에서 단독 콘서트 2015 김형준 FNL in Japan을 열었다.
* 2017년 3월 18일, 20일, 22일 일본 도쿄 후추의 숲 예술극장, 나고야 카리야시 종합예술 문화센터, 오사카 난바 Zepp에서 전국투어를 개최했다.
- 윤덕홍 . . . . 5회 일치
| 학력 = [[서울대학교]] 사회교육학 학사<br />[[도쿄 대학]] 대학원 사회학 박사
* 1986년 : [[도쿄 대학|도쿄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석사
* 1992년 : [[도쿄대학교]] 대학원 사회학 박사
[[분류:1947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대한민국의 부총리]][[분류:대한민국의 교육인적자원부 장관]][[분류: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분류:노무현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구대학교]][[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대구동덕초등학교 동문]][[분류:경운중학교 (대구) 동문]][[분류: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일본의 대학서열용어 . . . . 5회 일치
도쿄 대학(東京大学)
=== 도쿄잇코(東京一工) ===
도쿄 대학(東京大学), 교토 대학(京都大学), 히토츠바시 대학(一橋大学), 도쿄 공업대학(東京工業大学)의 4개 학교를 묶어서 말하는 말이다.
도쿄의 5개 명문 사립대학을 묶은 용어이다. 다음 5개 대학의 머릿글자를 따온 것이다.
- 최남선 . . . . 5회 일치
1902년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국비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갈 때 국비 유학생 중 중학생반의 소년반장(少年班長)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 해 11월 [[도쿄]] 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얼마못가 12월에 중퇴하고 배편으로 귀국했다.
1943년 귀국 직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가 강연활동을 한 후 그해 중순 귀국하였다. 1943년 11월 다시 [[이광수]]와 함께 학병 독려의 목적으로 출국했다.
육당 최남선과 춘원 이광수는 1943년 11월 24일 [[일본]] [[도쿄]] [[메이지 대학]]에서 조선인 전문·대학생들에게 학병에 지원하라는 강연을 했다.<ref name="daedams">[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3/03/2007030300046.html “화랑 사상 지금 부활해도 좋을듯…”] 조선일보 2007.03.03</ref> 당시 [[도쿄]]에서 발행된 잡지 ‘조선화보’(1944년 1월호)에서 아동문학가 [[마해송]]의 사회로 진행된 육당과 춘원의 대담 내용이 기록되었다. 이 대담에서 춘원은 강연회에 대해 “일종의 극적 광경이라고나 할까. 황국을 위해 전장에 나가 죽자는 생각이 모두의 얼굴에 드러났더군요”라며 “그때의 압권은 최(남선) 선생님의 강연이 아니었을까요”라고 말했다. 육당은 “적어도 천오백 명은 모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며 “일찍이 없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지요”라고 화답했다.<ref name="daedams"/>
* [[일본]] [[도쿄]] 제1중학교 중퇴
- 함인섭 . . . . 5회 일치
|학력 = [[도쿄 농업대학|일본 도쿄 농업대학교 농업대학원]]
[[1962년]] [[3월 27일]] [[도쿄 농업대학|일본 도쿄 농업대학교 농업대학원]] [[농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중앙고등학교 동문]][[분류:함태영]][[분류:이승만]][[분류:강원대학교 교수]][[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상지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대학 총장]][[분류:중동고등학교 동문]][[분류:강원대학교]][[분류:도쿄 농업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강릉 함씨]][[분류:자유 연애]][[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장로교도]]
- 이종원 (1953년) . . . . 4회 일치
[[서울대학교]] 공대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복역. 중퇴후 [[1982년]] 도일했다.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졸업. [[도쿄대학교]] 법학정치학연구과 정치학 전공 석사 과정 수료. 법학 박사 학위 취득. 도쿄대 법학부 조교, [[도호쿠 대학]] 법학부 조교수, [[릿쿄대학교]] 법학부 교수, 2012년 4월부터 [[와세다 대학 아시아 태평양 연구과]] 교수.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객원연구원. [[아사히신문]] 아시아네트워크 객원연구원.
* 『東アジア冷戦と韓米日関係』(도쿄대 출판회, 1996년)
[[분류:일본의 정치학자]][[분류:일본의 역사가]][[분류:1953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대학 교수]][[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국제 기독교 대학 동문]][[분류:와세다 대학 교수]][[분류:도호쿠 대학 교수]][[분류:릿쿄 대학 교수]][[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정용화 . . . . 4회 일치
* [[2011년]] [[12월 4일]]을 시작으로 일본에서 겨울투어를 실시하여, [[12월 4일]] 센다이, [[12월 6일]] 나고야, [[12월 14일]] 오사카, 그리고 [[12월 16일]] 도쿄에서 일본 전국 투어를 실시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전국투어 마지막 공연 13000명 동원 ‘1분 만에 티켓 매진'|url=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112191637321&mode=sub_view|출판사 = 한국경제연예|날짜 = [[2011년]] [[12월 19일]]}}</ref>
* [[2012년]] [[2월 4일]] 일본 간사이, [[2월 5일]] 도쿄돔 씨티홀에서 두 번째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한 이벤트에 1만2000여명이 참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앨범 발매 라이브 이벤트서 현지 팬 12,000명 동원 |url=http://wstar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1&c1=01&c2=01&c3=00&nkey=201202072211591&mode=sub_view|출판사 = 더블유스타뉴스|날짜 = [[2012년]] [[2월 7일]]}}</ref>
* [[2012년]] [[2월 13일]] 일본 전국투어를 시작했다. 오사카를 시작으로 나고야, 도쿄, 요코하마 등지에서 이뤄진 이번 투어는 두 번째 메이저 음반 발매 기념으로 팬클럽 회원 한정의 전국 투어 콘서트를 개최하게 되었는데, 지난 2009년부터 일본에서 인디밴드로 활동할 당시 공연했던 클럽에서 이루어졌으며, 인디즈 활동 당시 공연했던 장소에서 다시 공연하는 것을 테마로 이뤄진 이번 공연은 9회에 걸쳐 이뤄졌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인디밴드 활동 당시 공연했던 日클럽서 라이브공연|url=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202251028531002|출판사 = 뉴스엔|날짜 = [[2012년]] [[2월 25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日 전국투어 1만명 팬 열광…티켓 전쟁 |url=http://www.asiatoday.co.kr/news/view.asp?seq=602306|출판사 = 아시아투데이|날짜 = [[2012년]] [[2월 25일]]}}</ref><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초심으로 돌아가 日 전국투어 라이브… 폭발적인 반응 |url=http://www.etoday.co.kr/news/section/newsview.php?TM=news&SM=4101&idxno=550042|출판사 = 이투데이|날짜 = [[2012년]] [[2월 25일]]}}</ref>
* [[2012년]] [[8월 28일]] 일본 도쿄 오다이바에서 열린 일본 후지TV 여름 야외공연 '메자마시 라이브'에 참가했다.<ref>{{뉴스 인용|제목= 씨엔블루, 일본 메자마시 라이브 성황…'타임 이즈 오버' 최초 공개' |url=http://www.yeongnam.com/mnews/newsview.do?mode=newsView&newskey=20120830.990011130485442|출판사 = 영남일보|날짜 = [[2012년]] [[8월 30일]]}}</ref>
- 조긍하 . . . . 4회 일치
| 학력 =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
*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를 졸업
[[대구광역시|경상북도 대구]] 출신으로 대구에서 중등교육을 마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를 졸업하였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8383&mobile&categoryId=1639 조긍하 - 네이버 지식백과]</ref>. 그 후 [[테너]] [[성악가]]와 [[피아노 연주자]]로 활동하다가 은퇴하고 [[사진가|사진]] 촬영과 [[영화]] 분야로 전향하였다. 사진작가의 관록으로 조감독 수련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감독이 되었는데, [[1952년]]에 《베일부인》을 감독한 것을 시작으로 《황진이》([[1956년]]), 《곰》, 《육체의 길》([[1959년]]), 《인간만세》, 《과부》([[1960년]])등의 영화를 감독하였고, 시나리오도 직접 집필해왔다. 또한, 1960년대 말에는 《상해임시정부》, 《인천상륙작전》 등 애국지사들의 일대기를 내용으로 한 작품들을 만들었다<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013000329212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01-30&officeId=00032&pageNo=12&printNo=11181&publishType=00020 故(고) 趙肯夏(조긍하)감독의 人間(인간)과 作品(작품)세계 고지식하면서도 유머풍부 - 1982년 1월 30일 경향신문]</ref>.
* [[일본]] [[구니타치 음악대학|도쿄 제국음악학교]] 성악학과 학사 (테너 전공)
- 진창현(음악인) . . . . 4회 일치
이 와중에 현악기 제작에 필요한 양질의 목재를 감별하는 법을 익혔고, 목재를 바이올린 공장에 팔고 공장의 제작 과정을 어깨너머로 봐가면서 바이올린 제작을 독학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사장 근처에 오두막을 짓고 막일과 바이올린 제작을 병행했고, 아내의 제안으로 [[도쿄]]에 가서 악기 매입을 시도했다. 이 때 도호학원에서 바이올린을 가르치던 바이올리니스트 시노자키 히로츠구(篠崎弘嗣)[* 스즈키 신이치와 함께 일본 현악 교육의 거물로 손꼽히는 인물로, 자신의 성을 딴 바이올린 교본도 만든 바 있다. 한국에서도 현악기 초심자들이 흔히 접하는 것이 스즈키 아니면 시노자키 교본.]가 어린이 교육용 악기로 사들이기 시작했고, 이후 도호학원을 위해 정기적으로 바이올린 제작과 납품, 수리를 시작했다.
1961년 가을에는 학원과 비교적 가까운 도쿄의 마치다 시로 이사했고, 약 1년 뒤 초후 시의 센가와로 다시 이사해 바이올린 공방을 만들어 악기 제작에 본격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후 교육용에서 성인용으로 악기 제작 영역을 넓혔고, 바이올린 외에 [[비올라]]와 [[첼로]]의 제작도 시작했다. 악기 제작으로 어느 정도 생계 유지가 가능해지자 1970년에는 25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동생의 명성을 시샘했는지 이복형이 [[북한]]의 [[공작원]]이라고 허위 신고를 하면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체포되어 [[고문(범죄)|고문]]을 받다가 [[일본 경찰]]의 신원 보증이 있은 다음에야 풀려나 도망치듯 일본으로 돌아오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1970년대에는 자작 현악기들로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해 악기상들의 관심을 모았고, 1974년에는 [[리더스 다이제스트]]에서 '진창현: 동양의 스트라디바리우스'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 [[1970년]]의 한국 방문에서 당한 일이 워낙 충격적이었는지, 자서전에도 그 경위를 상세하게 적어놓고 있다. 일본으로 떠난 이후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어머니]]와 [[여동생]]의 가난했던 삶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충 조사를 마무리지은 뒤 회식비를 자신에게 모두 떠넘겼다거나 1976년에 모친상을 치르기 위해 다시 귀국했을 때 자신이 만든 악기가 위조품으로 간주되어 반입 불가를 당한 문제까지 언급하고 있어서 당시 한국에 대한 감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한국이 [[민주화]]되고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이념적 재단 같은 편파적인 잣대가 주춤하기 시작하면서 소원했던 관계를 회복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 국민훈장을 수상하면서 공식적으로도 명예회복을 이루었다. 말년에는 한국 언론들과 자주 인터뷰나 대담 등을 가지기도 했고, 생전에 마지막으로 언론과 접촉한 것도 타계 열흘 전인 5월 3일에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이 병상을 찾았을 때였다.
- 하이큐!! . . . . 4회 일치
작중 배경은 작가의 전작 [[궤변학파 요츠야 선배의 괴담]]처럼 [[미야기]]현이다. 미야기는 우리나라로 치면 [[강원도]] 정도 되는 곳인데, 그 중에서도 [[카라스노 고교]]가 있는 곳은 시골이다. ~~괜히 얘네들이 패스트푸드점 대신 [[만두]]를 사먹으러 가는 게 아니다~~ 카라스노 학생들이 촌사람이라는 걸 반영한 연출인지, 도쿄에 간 [[카라스노 고교]] 부원들이 눈에 보이는 철탑 마다 [[도쿄 타워]]냐고 묻거나, [[타나카 류노스케]]는 [[관동]]의 학교들을 가리켜 '시티보이 연합'(...)이라 부르거나 한다.
무대화가 결정되었다.2015년 11월 중순부터 12월 초까지 도쿄,오사카,미야기에서 공연예정.
* 작가인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이 불분명하다. 심지어는 후루다테 작가가 졸업한 도쿄 디자인 전문학교에 졸업 후 찾아왔었다는 포스팅이 어떤 블로그에 올라왔는데, 댓글에서 어떤 팬이 후루다테 하루이치의 성별을 묻자 '작가님이 직접 공개하지 않으신 사생활은 공개할 수 없습니다' 라고 철통방어(...)를 하기도 했다. 종합 1000만 부 이상 팔린 만화책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으로도, 온라인으로도, 심지어는 인터뷰조차도 그의 활동은 적어 필명이 본명인지, 나이가 얼마인지, 성별이 무엇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작품들이 [이와테]현 및 [미야기]현을 작중 배경으로 하고 있고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그렇게 밝혔으므로 출신지가 그 쪽인 것은 분명하다. 작가가 여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팀메이트 간의 감정 묘사, 이름 및 생일의 의미와 관련성까지도 계산한 ~~설정덕후의~~ 섬세함, 특유의 동글동글한 그림체를 근거로 내세워 여자 작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반면 작가가 남자라고 주장하는 측에서는 '[wiki:"니시노야 유" 니시노야]와 [wiki:"타나카 류노스케" 타나카]의 [wiki:"시미즈 키요코" 시미즈] 빠질을 저렇게 완벽하게(...)그려내는 것은 남자밖에 하지 못한다.', '[쿠로코의 농구]도 남자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섬세한 감정선을 잘 그려내고 있다' 등을 근거로 남자일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점치고 있다.
- 이상백 (1904년) . . . . 3회 일치
그후 제11회 도쿄 올림픽 대회 유치위원과 준비위원으로 미국, 영국, 독일, 스위스, 프랑스, 스웨덴, 핀란드, 폴란드 등을 방문하여 대회 유치와 준비에 협조를 구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체육계의 공로자로 칭송받았다. [[1939년]]부터 [[1941년]]에는 모교인 [[와세다 대학]] 재외특별연구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동양학을 연구했으며, [[1940년]]에는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였으나 도쿄 올림픽 유치와 추진의 공로로 [[조선총독부]]에서 그를 함부로 다루지 못했다. [[1944년]]에는 [[여운형]]이 결성한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건국동맹]]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64년]]에 [[대한 올림픽 위원회]] 위원장과 [[국제 올림픽 위원회]] 종신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63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문화훈장]] 대통령장을 수여받았다. [[1964년]] 도쿄 올림픽대회 선수단장으로 파견되었다.
- 이승엽 . . . . 3회 일치
[[2006년]] 시즌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 진출하려고 했던 그는 그 계획을 팀의 우승 후로 연기했다. 계약 내용은 외부에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4년 계약이라는 큰 틀 안에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다시 계약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팀이 계약 기간 중 우승할 경우 메이저 리그 진출을 보장받는 옵션이 계약 내용에 들어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07년]] 시즌 연봉은 6억 5,000만엔(약 한화 70억원) 정도였다. 이는 이전 팀의 1루수 [[로베르토 페타지니|페타지니]]의 7억엔의 뒤를 잇는 높은 거액의 조건이었다([[로베르토 페타지니|페타지니]]는 이전 소속 구단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에서 7억 2천만엔을 받고 있었다).
* [[도쿄 돔]] MVP 1회 (2006년)
* 한·일 통산 400호 홈런 달성 : [[2006년]] [[8월 1일]], 대 [[한신 타이거스]] 11차전([[도쿄 돔]], 만 29세 11개월 13일, 상대 투수 1회 [[이가와 게이]])
- 이효상 . . . . 3회 일치
일본에 유학, 1930년 일본 [[도쿄제국대학]] 독문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936년]] 《가톨릭청년》지에 <기적>이라는 시를 발표하여 등단한 후 많은 작품, 특히 문학과 관련된 연구논문 등을 발표하였다.
* [[도쿄 대학|동경제대]] 문학부 독문학과 졸업
[[분류:1906년 태어남]][[분류:1989년 죽음]][[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분류:경북고등학교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경북대학교]][[분류:대한민국의 시인]][[분류:영남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국회의장]][[분류:유교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성산 이씨]]
- 장도 (1876년) . . . . 3회 일치
[[한성부]]에서 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다가 [[1895년]]에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일본]]으로 유학할 수 있었다. [[1896년]] [[도쿄]]의 [[게이오의숙]] 보통과를 졸업하고, [[주오 대학]]의 전신인 도쿄법학원에서 3년 동안 법학을 공부했다.
[[1899년]] 도쿄법학원을 졸업하고, 일본의 법원을 순회하면서 견습까지 마친 뒤 귀국했다. [[1900년]]부터 사립 광흥학교 교사로 법학과 일본어 등을 가르쳤고, 이후 [[한성법학교]] 강사와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일하면서 [[형법]] 전문가로 활동했다.
- 절대가련 칠드런/459화 . . . . 3회 일치
* 아직도 세뇌가 덜 풀린데다 이용 당하고 있다는걸 알게 된 사카키는 큰 충격을 받은 채 미나모토, 우메가에 나오미와 함께 도쿄로 이동한다.
* 상황이 정리된 이후 나오미는 미나모토와 사카키를 데리고 도쿄로 향한다. 떠나기 전 타니자키를 때려눕히고 남아있는 더 하운드에게 "주기적으로 두들겨패서 혼수상태로 만들어라"는 지시를 남긴다.
* 도쿄로 돌아온 미나모토. 그러나 이들이 마련한 반격의 전초기지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연립주택. 너무 초라한 아지트에 조금 실망한다.
- 정명훈 (지휘자) . . . . 3회 일치
줄리어드 재학 중이던 [[1976년]]에 뉴욕 청소년 교향악단을 [[지휘]]해 [[지휘자]]로 공식 데뷔했고,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의 부지휘자로 프로 관현악단 지휘의 [[경험]]을 쌓았다. [[1980년]]에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부지휘자가 되어 상임 지휘자인 줄리니를 보좌하는 역할을 했고, [[1983년]] 가족들과 함께 [[유럽]]으로 거처를 옮겼다. [[1984년]]에는 자르브뤼켄 방송 교향악단의 음악 감독 겸 상임 지휘자로 발탁되었고, 재임 기간 동안 [[윤이상]]의 교향곡 제3번 세계 초연과 음반 녹음 등의 [[활동]]으로 주목을 받았다. [[1986년]]에는 [[파리 국립 오페라]]에서 [[프로코피에프]]의 '불의 천사' 를 [[지휘]]했고, 같은 해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 를 [[지휘]]해 오페라 지휘자로도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토스카나주]] [[피렌체]]에서 [[무소륵스키]]와 [[베르디]], [[모차르트]]의 [[오페라]]를 [[지휘]]해 절찬을 받았고, [[1988년]]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상을 [[상 (표창)|수상]]했다. [[1989년]]에는 [[프랑스]] [[파리 (프랑스)|파리]]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새로 건립한 [[오페라극장]]의 전속 오페라단인 파리 바스티유 오페라(현.[[파리 국립 오페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신축된 [[오페라극장]]의 개관 공연에서 [[베를리오즈]]의 대작 오페라 '트로이인' 을 상연해 호평을 받았다. [[1990년 10월]]에는 [[도이치 그라모폰]]과 전속 계약을 맺고 음반 제작도 시작했으며, [[조르주 비제|비제]]의 관현악 작품들을 시작으로 [[생상]], [[메시앙]], [[베를리오즈]], [[앙리 뒤티외|뒤티외]] 등의 작품들과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생상의 '삼손과 데릴라(EMI)', 베르디의 '오텔로' 등 오페라 전곡을 [[녹음]]했다. 특히 [[메시앙]]과는 생전에 각별한 친교를 맺고 있었고, 녹음들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94년]]에 새로 부임한 프랑스 문화부 장관과 정치적 갈등을 겪으면서 음악 감독직에서 해임되었고, 이는 [[프랑스]]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기도 했다. [[1995년]] 유네스코 서울 협회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으며 같은 해에 [[대한민국의 훈장|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997년]]에는 [[이탈리아]]의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고, [[도이체 그라모폰]]의 전속 계약을 유지하면서 녹음 활동도 병행했다. [[1998년]]에는 [[한국]]에서 첫 직책으로 [[KBS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를 맡기도 했지만, 악단원들과 [[갈등]]을 빚어 불과 수 개월 후 사임하기도 했다. [[2000년]]에는 [[프랑스]] [[라디오 프랑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에 취임했고, 이듬해에는 신성 일본 교향악단을 흡수해 재구성된 [[일본]]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특별 예술 고문으로 초청되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 [[서울 시립 교향악단]]의 상임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2012년]]부터는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의 역사상 첫 번째 수석 객원지휘자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이외에도 [[독일]]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네덜란드]] [[콘세르트헤바우 관현악단|로열 콘세르트허바우 오케스트라]](RCO)나 [[영국]]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미국]]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오스트리아]]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독일]] [[드레스덴 국립 관현악단]],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등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세계 각국의 주요 [[오케스트라]]와 오페라 극장들을 객원 [[지휘]]하고 있으며, 다수의 영상물과 음반들을 남기고 있다. [[아시아인]] 혹은 아시아계 연주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비상설 관현악단인 [[아시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도 맡고 있으며, [[대한민국]] [[인천]]과 [[서울]]에서 매년 정기적으로 공연하고 있다.
직책=[[도쿄 필하모니 교향악단|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특별 예술 고문|
- 줄리아나 도쿄 . . . . 3회 일치
[[도쿄]]에 있었던 [[버블 시대]]의 '''전설적'''인 [[디스코]] 홀. 1991년 5월에서 1994년 8월까지 도쿄 시바우라에서 영업했다. 영국의 레코드 회사 줄리아나와 합작하여 만들어졌다.
쥴리아나 도쿄에서는 받침대가 명물로 여겨졌다. 높이 1.2m, 폭 1.6m, 길이 9m의 철골 받침대로서, 받침대에 올라간 여성들은 노출이 심한 [[보디콘]] 복장을 입고 [[부채]]를 흔들면서 춤을 춘 것으로 유명하다. 주간지에 따르면 받침대 위층에는 여성용 VIP룸이 있으며, 거기에 들어가는 것이 일종의 스테이터스로 여겨졌다. 유명인 밖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 하이큐!!/등장인물 . . . . 3회 일치
= 도쿄 도 =
도쿄 단체 합숙에 참여한 학교.
타나카의 대학생 누나이자 카라스노 고교 졸업생.호탕하고 유쾌한 성격의 멋진 여성으로 팀을 결성해 축제 북을 치는 연습을 하고 있다. 타나카와 눈매가 비슷하게 생겼다. 보충으로 인해 합숙에 늦은 카게야마와 히나타를 도쿄까지 데려다 주었다.
- 한규복 (1881년) . . . . 3회 일치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 한복 (1914년) . . . . 3회 일치
[[1932년]] 4월 입학할 때부터 1935년 3월 졸업할 때까지 [[일본]] 다케구라(武藏) 고등학교 고등과에 재학했으며 [[1935년]] 4월 입학할 때부터 1938년 3월 졸업할 때까지 [[도쿄 대학|도쿄 제국대학]]에서 법학부 법률학과를 전공했다. [[1937년]] 11월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했고 [[1938년]] [[3월 30일]] 부산지방법원 및 부산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로 임명되었다.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청주 한씨]][[분류:유교 신자]][[분류:도쿄 대학 동문]]
- 현진건 . . . . 3회 일치
| 학력 = [[대륜고등학교|경상북도 대구노동학교 보통부]] 졸업 <br/> 경성 보성고등보통학교 전퇴 <br/>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중퇴 <br/> [[후장 대학|중국 상하이 후장 대학교]] 독일어전문부 중퇴
국권 피탈 뒤인 [[1915년]], 16세의 나이로 당시 경주 향리의 부호인 [[진사]] 이길우(李吉宇)의 딸 순득(順得)과 혼인하여 [[대구부]] 수정(竪町) 255번지(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 인교동)에 있던 처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그 해 [[11월]]에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2학년 재학 중인 이듬해 [[7월]]에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正則英語學敎)에 입학하였다.
[[1917년]] 다시 귀국하였는데, 이때 대구에서 [[백기만]](白基萬) · [[이상화 (시인)|이상화]](李相和) 등과 습작 동인지 『거화(炬火)』를 발간하였다. 이것이 그가 처음으로 시작한 '문학'이었다(다만 본격적인 동인지는 아니고 작문지 정도의 수준이었다고<ref>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4.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4월에 현진건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5년제 세이조 중학교(成城中學校)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1918년]] 3월에 다시 귀국하였는데<ref>일본 학자 시라카와 유타카에 의해 세이조 중학교 3학년 성적대장 일람표에서 현진건의 이름이 확인되어, 그가 1917년 4월부터 1918년 3월까지 실제 이 학교에 재적했음을 고증할 수 있었다. 양진오, 「조선혼의 발견과 민족의 상상 - 현진건의 학술적 평전과 문학 연구」(도서출판 역락, 2008), p.43. 대구대학교 인문과학연구총서24.</ref>, 얼마간 대구에 머물다가 집안 몰래 형 정건이 있던 [[중화민국|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 가서 [[후장 대학]](扈江大學) 독일어 전문부에 입학한다. 조선에서 일어난 [[3.1 운동]]의 여파가 상하이에까지 커져 상하이에서도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수립되던 해인 [[1919년]] 다시 귀국하여, 당시 육군 공병 영관을 지낸 당숙 현보운(玄普運)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 지금의 종로구 관훈동 52번지에서 살았는데, 현보운은 1919년 음력 9월 10일에 사망하고 그가 호주가 되었다. 12월에 첫딸 경숙(慶淑)이 태어났으나 이듬해에 죽고 만다.
- Darkest Hour: A Hearts of Iron Game/연구진 . . . . 2회 일치
* Tokyo Imperial University(도쿄제국대학)
* Tokyo Gas and Electric Industry(도쿄가스전기공업)
- 건어물 여동생 우마루짱/165화 . . . . 2회 일치
* 우마루(UMR모드)는 실핀과 레트로한 도쿄 거리를 보다가 직전 현장으로 와버린다.
* 도마 우마루(UMR모드)는 타치바나 실핀포드와 레트로한 도쿄 거리를 산책하는 Tv프로를 보고 있었다.
- 김연경(배구선수) . . . . 2회 일치
2018년 현재 2020년 도쿄 올림픽을 [[http://sports.news.naver.com/volleyball/news/read.nhn?oid=109&aid=0003737236|목표로 하고 있다고 밝혔으며]] 아마 김연경의 선수 인생 중 마지막 올림픽 출전이 될 듯 하다.[* 2020년 기준으로 김연경 나이는 만 32살이다. 그 나이면 배구 선수 기준으로 노장 베테랑이다.]
문제는, 부록에 적힌 대로 도쿄 올림픽이 열릴 때의 김연경의 나이는 32세인데, 이 정도 나이이면 슬슬 선수 생활의 황혼기이자 은퇴를 준비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이다. 물론 자기관리에 철저한 [[호날두]]나 [[이동국]]이나 불혹의 나이에도 국가대표 주전세터를 하는 [[이효희]]의 경우도 있지만, 김연경 본인의 실력도 나이의 노쇠화로 인해 조금씩 쇠퇴해 갈 무렵인데,[* 최근 열린 VNL 한일전에서 이 문제가 터졌다. 한국은 김연경이 나오고도 일본에게 시종일관 제압당하며 [[삼연벙|0대3으로 완패했다. 이후 김연경은 다시는 한일전에서 지지 않겠다며 굳은 결심을 밝혔다.]]] 올림픽은 그렇다 쳐도 김연경이 은퇴한 이후의 여자배구가 어떻게 될거냐는 우려도 충분히 나온다. 농담이 아니고 지금 현재에도 김연경이 잠시 쉬었다 들어가면 그 사이에 우리나라 경기가 헬게이트가 열리는데, 김연경 의존도가 너무 큰 우리나라가 국제대회에서도 먹혀들지는 의문이고[* '''배구도 엄연한 팀플레이 게임이다.''' 한명에 너무 의존하다보면 그만큼 상대팀에게 철저하게 파악되어서 나중에는 부담감 때문에 그 한명도 부진하거나 실수를 하게 될 가능성이 ~~'''엄청'''~~ 커진다. 당장 출전인원이 좀 더 많은 축구의 경우에도 한 명의 슈퍼스타로 모든 것을 풀어갈 수 없는 법인데 배구라고 예외는 없다.] 은퇴한 이후에 조직력 다지기며 대체자를 누구로 뽑느냐 등등 우려가 매우 큰 상황이다. 냉정히 말해서 김연경 없는 한국 대표팀은 독일[* 김연경이 나오고도 VNL 대회 이전 맞대결에서는 독일에게 2세트까지 내주며 끌려가다가 3세트에서 내리 연속으로 역전승했고, VNL에서는 1세트를 내줬지만 2세트에서 내리 이겨서 3대1로 승리했다.]과 태국[* 2018 아시안게임에선 김연경 있을때도 이겼다. 사실상 아시아 내에서 중국 다음의 강호로 떠오를 정도로 성장했다.] 그 이하의 수준이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 김용준 (1904년) . . . . 2회 일치
[[경상북도|경북]] [[구미시|선산]]에서 태어나 [[경성부]]의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화가 [[이종우 (1899년)|이종우]]에게 수학한 뒤 [[1924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건설이냐? 파괴냐?〉로 입선하면서 화단에 데뷔했다. [[1926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해 서양화를 공부했다. 이때 같은 도쿄 유학생이던 동갑의 [[이태준]]을 만나 평생 동안 교유했다.
- 김정행 . . . . 2회 일치
||<#C0C0C0> 은메달 ||<:> [[1967 도쿄 하게 유니버시아드|1967 도쿄]] ||<:> +93kg ||
- 김희정 (펜싱선수) . . . . 2회 일치
{{금메달|[[1993년 아시아 펜싱 선수권 대회|1993 도쿄]]|에페 단체전}}
{{은메달|[[1993년 아시아 펜싱 선수권 대회|1993 도쿄]]|에페 개인전}}
- 마법병 . . . . 2회 일치
이 이름을 명명한 것은 도쿄제국대학 교수로서, 동물학자이자 어류학자였던 이이지마 하지메(飯島 魁)로 알려져 있다. 다만 명명 과정에서 약간의 착각(!)이 있었는데, 1907년 10월 22일자 도쿄 아사히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이지마 하지메는 "[[이솝 우화]]에 나오는, 뭐든지 바라는 대로 나오는 마법의 병(매직 보틀)"에서 따와서 이름을 붙였다고 하는데 그런 이야기가 이솝 우화에는 없다(…). 아마 다른 동화를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착각'한 동화는 아마도 [[로버트 스티븐슨]]의 '[[병 속의 악마]](The Bottle Imp)'로 추측된다..
- 무라하치부 . . . . 2회 일치
도쿄에서 모현에 이주한 T씨(34세) : 이주자는 1주일에 1번 마을 부흥의 선두 주자인 노부부의 집에 모여서 회식을 한다. 나와 아내는 이주 전까지 했던 디자인업을 계속하면서 자급자족용으로만 농업을 하겠다고 말하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농업을 하지 않을 거라면 도쿄에 돌아가."라고 주민들이 둘러싸고 협박하였다.
- 스틸오션/사령관 . . . . 2회 일치
* 도쿄급행(Tokyo Express) - 구축함이나 경순양함에 배치시 발동. 가속 10% 증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육군 비행사. [[B-25 미첼]] 폭격기를 항공모함에서 이륙시켜 [[도쿄]]를 공격한 "둘리틀 공습"을 이끌었다.
- 오세창 . . . . 2회 일치
[[1896년]](건양 1년) [[일본 문부성]]의 외국어학교 교사 초빙 당시 초빙되어, [[도쿄외국어학교]] [[조선어]] 교사로 부임하였다. [[1897년]]에는 정식으로 [[토쿄외국어학교]]에 조선어과 교사로 파견되어 [[일본]]에서 1년 가량 교사 생활을 하면서 근대 문물을 직접 접했다.
[[1902년]]부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손병희]], [[양한묵]](梁漢默) 등의 거듭된 권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천도교 기관지를 겸한 일간지 《[[만세보]] (萬歲報)》 사장으로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1907년]] [[3월]]에는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0일]]에 귀환하였다. [[11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 오승희 . . . . 2회 일치
| 출생지 = [[일본]] [[도쿄도]]
[[분류:1990년 태어남]][[분류:도쿄도 출신]][[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일본의 여자 가수]][[분류:일본의 가수]][[분류:일본의 아이돌]][[분류:1997년 데뷔]][[분류: 충쿠 소속]][[분류:모닝구 무스메의 일원]]
- 우츠미 사토루 . . . . 2회 일치
도쿄여자의과대학 부속 동양의학 연구소(東京女子医科大附属東洋医学研究所) 연구원
도쿄경찰병원(東京警察病院) 소화기내과 근무
- 유니버설 스튜디오 재팬 . . . . 2회 일치
* 도쿄 디즈니랜드와는 달리 오사카의 이름을 쓰지 않지만, 사실 치바에 있는 도쿄 디즈니랜드와는 달리
- 윤천주 . . . . 2회 일치
1921년 [[경상북도]] 선산군(현 [[구미시]])에서 태어났다. 부산 [[동래고등학교|동래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일본 [[가나자와]]의 [[구제고등학교|제4고등학교]]를 거쳐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에 진학했으나 815해방으로 중퇴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 [[미국]] [[하버드 대학교]],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법학 [[박사]] 과정을 졸업, 수료하였다.
- 이동춘 . . . . 2회 일치
|사망지 = {{국기나라|일본}} [[도쿄도]]
통산 전적은 57전 45승(26KO) 2무 10패이며, [[1995년]] [[9월 5일]] [[도쿄도]] [[고라쿠엔 경기장]]에서 벌어진 [[세가와 세쓰오]]와의 경기에서 판정패한 뒤 급성 [[경막하혈종]]으로 쓰러져 4일 후인 [[9월 9일]] 사망했다.<ref>{{뉴스 인용|제목=韓國프로복싱선수,日링서 쓰러져 사망서|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25974|출판사=연합뉴스|저자=|날짜=1995-09-10}}</ref>
- 장발 (화가) . . . . 2회 일치
우석 장발은 [[1901년]] [[4월 3일]] [[한성부]] [[종로구|종로]] 친척 집에서 인천세관의 관리 [[장기빈]]과 그의 부인이었던 황루시아의 아들로 태어났고 이후 [[인천광역시|인천]]에서 성장하였는데 그의 형은 후일 [[대한민국의 부통령]]을 역임하는 [[장면]](張勉)이다. [[인천광역시|인천]]의 개화한 집안에서 출생하였고, 초명은 지완(志完)이라 했다가 뒤에 발(勃)로 개명하였다. [[1920년]] [[일본]] [[도쿄 미술학교]]에서 유학한 뒤, [[1922년]]부터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수학했다.
* [[일본]] [[도쿄 미술학교]] 전문학사
- 장후영 . . . . 2회 일치
[[한성부]]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에 [[경성제국대학]] 법과와 [[일본]]의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대학원을 졸업했다. [[교토 제국대학]] 대학원에서도 수학한 바 있다.
[[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성제국대학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고등문관시험 합격자]]
- 정인숙 (1945년) . . . . 2회 일치
{{인용문|정인숙이 아이를 낳은 뒤 자꾸만 고위층(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인 것처럼 행세했다. 정 여인은 어쩌면 박통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자꾸만 청와대를 귀찮게 하자 경호실장 [[박종규]]가 골치가 아파졌다. 여권을 만들어 미국으로 내보냈으나 자꾸만 귀국하겠다고 해서 일본에도 머물게 했다. 그때 [[일본]]에서 박종규 실장과 가장 친한 사람이 정건영 씨였다. 마치이로 통하는 이 교포 사업가는 도쿄에서 손꼽히는 '암흑가의 신사'이기도 했다. 바로 이 정건영 씨에게 정인숙 모자를 돌보아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건영은 그 대가로 거액의 사업자금을 [[도쿄]]의 [[외환은행]]에서 빌려 쓸 수 있도록 실력자인 박종규 실장에게 부탁했다.<ref name="hp104"/><ref>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1 (동아일보사, 1992) 216쪽</ref>}}
- 진구 . . . . 2회 일치
| [[도쿄 여우비]]
| [[도쿄 여우비]]
- 차금봉 . . . . 2회 일치
[[1927년]] 비타협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결성한 [[신간회]] 단체가 결성되자, [[1928년]]에는 신간회(新幹會) 경서(京西)지회 설립을 주도하여 간사를 맡았으며, 한편으로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 책임비서 등으로 활동했다. 그는 3·1운동 기념투쟁을 전개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 지시하여 선전전단 20만장을 도쿄의 동성사에서 인쇄했는데, 우송 도중 서울우편국에서 발각되고 말았다. 1928년 7월 제4차 조선공산당이 발각되는 상황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피신했으나 도쿄에서 체포되었다. 국내로 압송당한 뒤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하다가 1929년 3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옥사했다.
- 최서일 . . . . 2회 일치
1906년 서울에서 출생하였다.<ref>통천최씨 족보에는 전라남도 완도군 약산면 관산리에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ref> [[도쿄 대학|동경제국대]] 수산대를 졸업하였다. 대학 졸업 이후 [[조선총독부]] 산업기사를 지냈다. 해방 이후 (주)조선수산개발 사장으로 사업을 펼치다 공직에 들어섰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민국 상공부|상공부]] 수산국장과 초대 해무국장을 지냈다. [[1960년]] 해무청 청장에 임명되었다. 1963년 [[민주공화당 (대한민국)|민주공화당]] 소속으로 [[완도군]]에 국회의원으로 출마하여 제 6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을 지냈다. 1970년에 사망하였고, 묘는 양주군 모란공원에 위치하고 있다.
[[분류:대한민국의 제6대 국회의원]][[분류:1906년 태어남]][[분류:1970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공무원]][[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통천 최씨]]
- 최홍만 . . . . 2회 일치
서울 그랑프리 우승자로써 월드 그랑프리 개막전 참가 자격을 가진 최홍만은 9월의 오사카 월드 그랑프리 16강에서는 희대의 괴수 [[밥 샙]]과 난타전 끝에 빰 클린치 니킥으로 다운을 뺏으며 2-0 판정승을 거뒀다.[* 밥 샙이 리치가 긴 최홍만에게 거리를 두지 않기 위해 초반부터 안쪽으로 파고들며 무식하게 펀치를 날렸는데, 최홍만이 전혀 밀리지 않고 난타로 되받아치는 게 인상 깊은 경기였다. 기술적으로 부족하기로 유명한 두 선수는 심지어 난타전 중 가드도 하지 않으며 펀치를 주고받았는데, 체력 조절을 생각치 않고 펀치를 퍼부은지라 후반에는 둘 다 체력이 완전 고갈되어서 거의 그로기 상태였다. 초반과 후반의 경기력 차이가 극명했던 경기. 그 와중에 최홍만은 긴다리와 팔로 거리를 두며 유효타를 은근히 계속 먹이는데 성공해 대미지를 줬으나, 샙은 특유의 정면돌파 후 난타를 벌이는 스타일도 자신만큼 힘이 센 최홍만에게 먹히지 않고 체력 고갈 이후 파고드는 것도 못하면서 거의 무력화되었다.] 육중한 신체능력으로 괴수 이미지를 지닌 밥샙이 더 큰 괴수에게 밀리는 점이 이색적이던 경기. 그 후로는 일본에서도 꽤나 괜찮은 흥행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11월 [[도쿄]]에서 열린 8강전에서는 [[레미 본야스키]]의 철저한 아웃파이팅에 말려들어 로우킥만 40대 정도 허용한 끝에 판정패한다. 이때 판정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고 승자인 본야스키와의 악수도 거부하면서 비매너 논란이 있었다.
2015년 4월 27일 국내 종합격투기 단체 [[ROAD FC]]와 계약했다.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ports_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410&article_id=0000236284|#]] 동년 7월 25일 일본 도쿄에서 개최되는 ROAD FC 24 대회에서 첫 경기가 잡혔으며, 상대선수로 레볼루션에서 원래 맞붙기로 했다가 엎어졌던 카를로스 도요타와 다시 맞붙었으나 1R 1분 11초만에 상대 강력한 오른손 훅에 실신하며 KO로 허무하게 패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UpphV3sKg|영상]]
- 칼 루이스 . . . . 2회 일치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2연속 금메달을 획득,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 1983년 헬싱키, 1987년 로마, 1991년 도쿄에서 100미터 3연패를 달성헀다. 서울 올림픽에서는 경기에서는 [[벤 존슨]]에게 밀려서 2위로 떨어졌었으나, 벤 존슨의 스테로이드 약물 복용이 드러나 [[금메달]]이 박탈되고 기록이 삭제되면서 1위로 올라섯다.
1991년 도쿄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서 100미터 9초 86으로 세계 기록을 세웠다.
- 하이큐/214화 . . . . 2회 일치
* 카라스노는 도쿄 원정이 잘 풀리지 않는다.
* 지금은 도쿄 원정 중 죠나미 고교와 연습시합.
- 하이큐/232화 . . . . 2회 일치
* 도쿄 체육관. 카라스노는 생각지도 못한 악재에 직면했다. 역에서 잠시 내려놨던 [[히나타 쇼요]]의 짐이 누군가와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유명 브랜드의 체크무늬 가방인데 흔한 디자인이라 누군가 착각해서 가져간 모양이다. 원래 이건 히나타 동생 가방이지만 크고 튼튼해서 적당하다 싶어서 고른게 화근이었다.
*한편 체육관에선 실전에 서기 위한 준비가 한창이다. 우카이 코치는 도쿄 체육관의 코트 특성에 대해 보통보다 덜 미끄러지는 재질이나 평소처럼 뛰어다니다간 큰 일이 난다고 주의준다. 그리고 최대한 땀을 빼서 그걸로 마찰을 줄이라는 요령을 전달한다.
- 하이큐/247화 . . . . 2회 일치
* 그리고 봄고 1일차가 끝난 밤. 2회전이 코 앞으로 다가왔다. 우카이 코치는 잠시 집에 연락해서 할아버지의 상태를 확인한다. 사실 그는 할아버지가 현장에서 쓰레기장 결전을 봐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건강이 나빠진 잇케 감독은 도저히 도쿄까지 올 상태가 아니었다. 우카이 코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가올 2회전 대책에 골몰한다.
스가와라는 월간 배구에서 "미야 아츠무를 무너뜨려도 쌍둥이 오사무가 보완한다"는 문구가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들은 고교 배구계 최강 트윈즈 "미야 형제". 미야 아츠무와 라이트 [[미야 오사무]]다. 아츠무는 자신만만하게 "도쿄 놈들이 거들먹거리는 건 이제 끝"이라며 벼르고 있다. 눈 앞의 카라스노는 안중에도 없는 태도.
- 홍준표 (1949년) . . . . 2회 일치
* ~ 1995 [[도쿄대학]] 대학원 박사
[[분류:1949년 태어남]][[분류:살아있는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연세대학교 공과대학 동문]][[분류:도호쿠 대학 동문]][[분류:도쿄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대학 강사]][[분류:연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의 공학자]]
- 후쿠오카 예비교생 살인사건 . . . . 2회 일치
피해자 키타카와 히카루는 구마모토 현 아사쿠사 시(熊本県天草市) 출신이다. 현지에서는 수재로 평판이 좋아, [[진학교]]로 알려진 현립 구마모토 고등학교(県立熊本高)에서 공부를 했으며, 댄스부에 소속되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검도]]를 배워서 검도 2단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검도부 단체부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2015년 봄에는 [[도쿄대학]]에 응시했으나 실패하여, 후쿠오카 시내에서 동생과 같이 살고 [[예비교]]에 다니며 공부를 했다.
안타깝게도, 3월 9일에 피해자가 제1지망으로 하고 있던 [[오사카 대학]] 법학부의 합격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살해당한 피해자는 법학부에 합격한 것이 밝혀졌다. 또 오사카 외 도쿄와 간사이의 3개 사립대학에도 합격하였다.
- 김동석 . . . . 1회 일치
1903년 [[경상북도]] [[선산]][[군(행정구역)|군]] 선산면 동부리(현 [[구미시]] 선산읍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안동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협성학교에 재학하다 중퇴하였다. 이후 [[일본]] [[도쿄]] 외국어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 김문집 . . . . 1회 일치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제국대학]] 문과에서 수학했다. 일본인 소설가 [[요코미쓰 리이치]]({{llang|ja|橫光利一}}) 문하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1935년]] 귀국했다.
- 김상희 (가수) . . . . 1회 일치
'''김상희'''(金相姬, 본명 : 최순강(崔順江), [[1943년]] [[3월 29일]] ~)는 [[대한민국]]의 가수이다.<ref>김상희는 예명이고, 본명은 최순강이다.</ref> [[고려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고, [[고려대학교]] 1학년에 재학 중이던 [[1961년]] 가수로 데뷔, [[1965년]]부터 활동하였다.<ref>처음 리사이틀 갖는 金相姬, 《경향신문》, 1970.1.17.</ref> [[1971년]] [[동양방송|TBC]] 가요대상, 1973년 제1회 대한민국방송가요대상 여자가수부문, [[1977년]] [[도쿄]] [[요요기 공원]]에서 열린 동경 국제 가요제에서 "즐거운 아리랑"을 부르며 특별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의 학장 및 [[한국교통방송]]의 DJ로 활동 중이다.
- 김새해 . . . . 1회 일치
* [[도쿄 매그니튜드 8.0]] - 이츠키
- 김준 (배우) . . . . 1회 일치
| 스마트 트래블러 인 도쿄
- 김진우(WINNER) . . . . 1회 일치
* 멤버들 공인 심각한 길치--였--다. 호텔 로비에서 출구를 찾느라 30분을 헤메다가 --결국 스태프에게 물어봤다-- 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걸리는 가게에 1시간 반만에 도착했다. 그리고 호텔에서 10분 거리인 도쿄타워를 3시간 넘게 헤메고 도착했다. 심각한 길치인 듯.[* 시즌그리팅 디비디에서 본인은 길치가 아니라고 말했다. 한번 외운 길은 잊어먹지 않는다고. (그러나 멤버들 반응은 흠)] 위너 티비 상속자들 패러디에서도 길치 속성이 그대로 김라헬 캐릭터에 반영되어 "여기 출구가 어딨어!"라는 대사를 자주 사용했다. 하지만 꽃보다 청춘 위너편에서는 조금 만회한듯하다. 지도를 보며 멤버들을 길안내 하기도 했다. 실제로 강승윤이 진우형 이제 길치 아니다!!라고 인스타(?)에서 말하기도 했다.
- 김희철(1983) . . . . 1회 일치
2017년 1월 7일 [[도쿄]] : 일본 토요스 PIT
-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100화 . . . . 1회 일치
* 체육관 감마, 통칭 "트레이닝 부엌 랜드". 줄여서 TDL이다.[* 도쿄 디즈니 랜드 패러디]
- 노재헌 . . . . 1회 일치
*1993년-1994년 일본 도쿄대 국제관계론 객원연구원
- 대구광역시/인물 . . . . 1회 일치
* [[고아성]] - [[도쿄시]]
- 도도부현 . . . . 1회 일치
일본의 지방행정구역을 총칭하여 말하는 표현. 도都는 도쿄도東京都, 도道는 홋카이도北海道, 부府는 쿄토부京都府, 오사카부大阪府 그 외는 현県이다.
- 라늬 . . . . 1회 일치
* [[2012년]] [[TV도쿄]] 일본드라마 《사랑하는 메종 ~레인보우 로즈~》
- 로손 . . . . 1회 일치
본사는 도쿄도 시나가와구 오오사키(東京都品川区大崎)
- 마더콘 . . . . 1회 일치
『계속 당신을 좋아했다(ずっとあなたが好きだった)』라는 드라마는 29세 여성 니시다 미와(西田美和, 연기자는 카쿠 치카코賀来千香子)가 도쿄 대학교 출신 엘리트 은행원 카츠라다 후유히코와 맞선 결혼을 하지만, 같은 시기에 옛 남자친구인 오오이와(大岩)와 재회하여 흔들린다는 내용이다. 여담으로 원래는 그다지 마더콘 설정이 아니었으며, 1화에서는 그리 기분 나쁘지 않고 지적이고 상냥한 좋은 사람으로 감기에 걸린 미와를 배려하여 샐러드와 죽을 만들어주는 등의 모습을 보인다고 하지만...
- 막부 . . . . 1회 일치
히데요시 사후에 권력투쟁 끝에 일본의 실력자가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지금의 도쿄 지역인 에도에 막부를 세운다. 이 [[에도 막부]]는 이전과는 달리 간토 지역을 독립적으로 장악하고, [[산킨고타이]] 제도를 비롯한 대책을 사용한 덕에 이전의 막부들에 비해 통제력이 매우 강화되었다. 하지만 이 때조차도 각 번의 다이묘들은 해당 지역의 군사와 사법, 행정을 독립적으로 통치하고 있는 등 여전히 지역분권이 강했다.
- 문근영 . . . . 1회 일치
||<#f08080><:> {{{#ffffff '''출생'''}}} ||<(><#ffe4e1> [[1987년]] [[5월 6일]]([age(1987-05-06)]세), [[일본]] [[도쿄도]] ||
- 민도 . . . . 1회 일치
한국에서 이렇게 잘 안 쓰이는 단어가 널리 알려지게 된 원인으론 2004년에 당시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의 망언 때문으로, 중국과 일본이 [[AFC 아시안 컵]]축구경기 결승전에 진출하면서 양국간 신경전이 벌어졌는데 이시하라 당시 지사는 "중국 관중이 일본에게 야유를 보내는 건 중국의 '민도'가 낮기 때문"이라는 망언을 했던게 한국 언론을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바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 민생위원 . . . . 1회 일치
민생위원제도 이전에는 1917년에 오카야마 현에 제세고문(済世顧問), 도쿄에 구제위원(救済委員), 오사카에 방면위원(方面委員)등의 제도가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지역의 상인, 공장주, 의사, 스님 등 지역의 실정을 잘 아는 사람을 명예직 위원으로 위촉하여, 생활상담, 생활지도, 호적 정리, 구제품 급부 등을 담당하게 한 것이다. 1936년에 방면위원제도로 전국에 통일되어 실시되었다.
- 바키도/115화 . . . . 1회 일치
* 모토베는 도쿄돔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나타난다.
- 바키도/116화 . . . . 1회 일치
* 도쿄돔 지하의 지하격투장. "지상최강을 볼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회원제로 은밀히 운영되고 있음에도 항상 초만원을 이룬다.
- 박상원(배우) . . . . 1회 일치
* 일본 도쿄도미술관 삭일회상(2009년)
- 보육원 떨어졌다 일본 죽어라!!! . . . . 1회 일치
[[아사히 신문]]의 기자가 이메일로 블로그 소유자와 연락한 바에 따르면, 블로그 소유자는 [[도쿄]]에 거주하는 30대 초반 여성이라고 자칭했으며, 남편과 1세가 되는 남자아이와 3인 가족이서 생활하고 있고, 사무직 정규직으로 4월에 복직할 예정이었으나 보육소에 아이를 넣을 수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고 하였다.
- 사이쿄선 . . . . 1회 일치
일본의 철도. [[사이타마]]와 [[도쿄]]를 오가는 선이다.
- 사키모리 . . . . 1회 일치
고대 일본에서 관동 지방(지금의 도쿄 인근)에서 징병되고 큐슈로 파견되어 수비와 축성 등을 담당하던 군역(軍役)의 일종이다. 당시 농민들에게는 부담이 큰 일이었다.
- 스키야키 . . . . 1회 일치
[[메이지 시대]] 이후 육식이 해금되면서, 도쿄를 중심으로 빠른 속도로 전국으로 현재와 같은 스키야키가 퍼졌다. '서민의 음식'으로서 여겨졌다.
- 스틸오션/미국 . . . . 1회 일치
>워싱턴 해군 조약의 제약 내에서 건조된 마지막 미국 항모 함급. 초기 항모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뛰어난 활용성과 내향성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다. 요크타운은 산호해 해전에서 심각한 피해를 입었지만 서둘러 수리를 받고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했다. 호넷(Hornet)은 도쿄 공습에 참가했으며, 산타크루즈 해전 당시 일본 구축함에게 격침되었다. "빅 E"라고도 알려진 엔터프라이즈(Enterprise)는 어떤 미국 항공모함보다도 오랜 시간을 복무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함명은 현대 미 해군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 스틸오션/일본 . . . . 1회 일치
>무츠키급 구축함은 일본이 워싱턴 해군조약에서 탈퇴하며 건조된 전선 구축함이었다. 이들의 수뢰전 무장은 전까지의 구축함과 달랐다. 제4함대사건 당시, 세척의 무츠키급 구축함이 큰 피해를 입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무츠키급 구축함은 호위와 화력지원을 주로 맡았다. 몇몇 함선은 "도쿄급행"이라고 불리는 고속 선박으로 개장되었다.
- 승리(빅뱅) . . . . 1회 일치
* 빅뱅의 화음 담당이다. 백코러스를 다른 멤버들보다 확연히 많이 하고 콘서트에서도 아름다운 미성이 귀에서 아른아른하면 승리가 화음을 넣고 있는 것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coIuMUSq_8|빅뱅 히트곡 매들리]] [[https://www.youtube.com/watch?v=v8vAFUcnELI|171231 고척스카이돔 LAST DANCE 라이브]] (5분 14초 즈음부터 백코러스를 부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uFtM4m_D_bY|유투브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emWr2Orx8vk|사랑먼지 메이킹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6RGVeMw7sRI|도쿄돔 승리 화음모음]] 이것들 말고도 굉장히 많다 --콘서트 영상들 대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승리의 목소리가 빠지면... (허전 그 자체)
- 시노자키 아이 . . . . 1회 일치
일본의 여성 연예인. [[도쿄도]] 출신. [[그라비아 모델]], [[아이돌]]로서 활동하였으며, 2015년 4월 본격적으로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2015년 12월에 1st 앨범을 발표헀다.
- 식극의 소마/172화 . . . . 1회 일치
* 탈락한 인원은 즉히 도쿄로 송환되며 "퇴학"처분을 받는다.
- 신지애 . . . . 1회 일치
||<#050099> {{{#FFFFFF 소속}}} ||<#ffffff> ThreeBond Co.Ltd.[* 일본 도쿄 소재지의 공업용 접착제 회사이다.] ||
- 신혜성 . . . . 1회 일치
:도쿄 돔 시티 홀
- 아데랑스 . . . . 1회 일치
2017년 2월 10일, 가발 업계의 경쟁 심화와 수익 악화에 대처하기 위하여 경영진에 의한 인수를 통하여 도쿄증권거래소에서 [[상장폐지]]하고, 비상장화와 사업기반 강화를 하게 되었다.[[http://www.nikkei.com/article/DGXLASFL09HEH_Z00C17A2000000/ (참조)]]
- 아이린(레드벨벳) . . . . 1회 일치
||<:><#FE3E5F>'''{{{#white 출생}}}''' ||<#FFFFFF>[[1991년]] [[3월 29일]] ([age(1991-03-29)]세), [[도쿄도출신]]
- 오기노 쿄우사쿠 . . . . 1회 일치
1909년, 도쿄제국대학 의과대학 졸업. 산부인과 교실에 들어간다.
- 오세정 (교수) . . . . 1회 일치
1984년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가 되었다. 이후 국제이론물리학센터 연구원과 미국 미시간대 객원 연구원, 일본 도쿄대 초빙교수 등을 두루 역임하며, 1995년에는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 기획연구실장을 맡기도 했다. 이후로도 서울대학교 자연과학대학장,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이사, 국무총리실 정부업무평가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ref>{{뉴스 인용|제목=국민의당 비례대표 2번 오세정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url=http://www.focus.kr/view.php?key=2016032300144739514|날짜=2016-03-23|뉴스=포커스뉴스|확인날짜=2016-03-23|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712184756/http://www.focus.kr/view.php?key=2016032300144739514|보존날짜=2016-07-12|깨진링크=예}}</ref> 서울대학교 총장 선거에 나가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 오이마치역 . . . . 1회 일치
JR동일본, 도쿄도 시나가와구에 있는 역.
- 와타나베 나오미 . . . . 1회 일치
1987년 10월 23일 생으로, 신장 157센티미터에 체중 95킬로그램. 혈액형은 [[A형]]으로, 출신지는 [[이바라키 현]]이다. 취미는 먹기, 흉내, 노래, 춤추기, 중국어. NSC 도쿄 학교 12기생이다.
- 요시다 세이지 . . . . 1회 일치
전시중 조선반도 동원을 연구한 토노무라 마사루 도쿄대부교수는, 요시다가 소속되었다고 주장한 노무보국회는 [[후생성]]과 [[내무성]]의 지시로 만들어진 명령으로서, 지휘계통을 생각해보면 군이 동원명령을 내리는 것도, 그 직원이 직접 조선에 가는 것도 어렵다고 주장했다.
- 유지태 . . . . 1회 일치
* [[2009년]] 9월 제22회 도쿄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심사위원
- 유하나(1986) . . . . 1회 일치
* [[도쿄택시]](2010) - 주연, 미소라멘 역
- 윤태동 . . . . 1회 일치
[[1900년]] 5월 13일 [[충청북도]] [[충주시|충주]]에서 출생하였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보]]를 거쳐 [[1925년]] [[일본]] [[도쿄대학|동경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학부/농업생명과학대학|수원고등농림학교]], [[보성전문학교]], [[중동고등학교|중동학교]] 등에서 강사로, [[경성제국대학]]에서 조수로 근무하였다. [[1934년]] 7월에는 [[경성제대]] 예과 [[교수]]로 임명되어 그해 11월까지 근무하였다. 조선인이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임명된 것은 윤태동이 3번째이며, 전 기간을 통틀어 4명에 불과하다.
- 이규환 (영화감독) . . . . 1회 일치
피신 생활 중에 영화감독이 될 것을 결심하고 [[1922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에서 영화 공부를 했다. [[1928년]] 경에는 [[상하이 시|상하이]]로 가서 1년 정도 머물렀다. 이 곳에서 [[전창근 (영화 감독)|전창근]]과 [[이경손]]을 만나 교류했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시]]의 [[신코키네마]]에서 조감독으로 일했다.
- 이근직 . . . . 1회 일치
1903년 [[경상북도]] 김산군(현 [[김천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관상가의 조언으로 이근직으로 개명하였다.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쿄고료척식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 이인 . . . . 1회 일치
* [[세이소쿠가쿠엔 고등학교|일본 도쿄 세이소쿠 중학교]] [[졸업]]
- 이창동 . . . . 1회 일치
* 제8회 [[도쿄 필멕스]] 경쟁부문 심사위원([[2007년]])
- 이토 시로 . . . . 1회 일치
일본의 코미디언, 배우. 1937년 생, 도쿄 출신.
- 장윤성 . . . . 1회 일치
러시아 유학 중이던 1993년에 프로코피에프 국제 지휘자 콩쿨에 2위로 입상했고, 입상 특전으로 1년간 [[마린스키 극장]]에서 지휘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발레리 게르기에프]]에게 배우기도 했다. 1995년 [[펜데레츠키]]의 교향곡 제 5번 '한국' 을 유럽 초연하기도 했고, 1997년에는 도쿄 국제 지휘 콩쿨에 참가해 1위 없는 2위에 입상했다.
- 장은숙 (가수) . . . . 1회 일치
장은숙 보이스의 특징은 저음의 허스키이면서도 고음도 옥타브가 높다. 10여년 전부터는 도쿄 아카사카의 브릿츠홀에서 매 해 가을마다 콘서트를 개최하고 있다.
- 전민희 . . . . 1회 일치
2013년 도쿄 한국문화원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린 한국 소설이 전민희의 룬의 아이들이라 한다.
- 청산콜라 무차별 살인사건 . . . . 1회 일치
1977년 1월 4일에서 중순까지, 도쿄와 오사카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인 사건.
- 최동 . . . . 1회 일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아버지는 관직을 내놓고 [[일본]]에 망명 중인 [[박영효]]를 만나러 도일했다. 최동은 [[가톨릭]] 계열인 [[도쿄]]의 [[교세이학교]](曉星學校)에서 수학했다. 이때 아버지는 이미 [[미국]]으로 떠나 [[안창호]]와 함께 활동하던 시기라 고학을 하며 공부했다. 중등 과정을 마친 뒤 [[미국]]으로 가서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약 1년간 수학했다.
- 카라스노 고교 . . . . 1회 일치
도쿄에 있는 [[네코마 고교]]와는 유서 있는 [[라이벌]] 관계이다. 두 학교의 [[더비 매치]]는 아예 '''쓰레기장의 결전'''이라고 불린다. 네코마와는 여러차례 연습 시합을 가졌지만 공식 무대에서는 한 번도 붙어보지 못한 [[안습]]한 역사가 있다. [[사족]]으로 카라스노 고교는, 작은 거인이 있던 시절(=즉 가장 강했던 시절)에도 연습시합에서 네코마 고교를 이긴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 카스미가세키 . . . . 1회 일치
도쿄도 치요다구(東京都千代田区)의 사쿠라다몬(桜田門) 남부 일대를 뜻한다.
- 콘도 마코토 . . . . 1회 일치
1948년 도쿄 출생
- 하리수 . . . . 1회 일치
[[낙생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94년]] [[12월]] 연예인 비자로 [[일본]] [[히메지]]로 갔다.<ref name="heimagge"/> 그에 의하면 "수술도 하고 돈도 벌 심산이었다.<ref name="heimagge"/>" 한다. 히메지는 지진으로 유명한 고베와 약 1시간 거리로 [[1995년]] [[2월]] 그는 고베 지진을 직접 목격했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그는 [[일본]] [[히메지]]에서 한국무용을 하며 생활하였다. 이어 [[1995년]] 말부터 [[1998년]] 말까지 [[도쿄]]로 무대를 옮겼다.<ref name="heimagge"/>
- 하이큐/208화 . . . . 1회 일치
* 그리고 전일본 유스 합숙 당일 도쿄역.
- 하이큐/231화 . . . . 1회 일치
* 체육관에서 몸을 푸는 동안 어제와 같은 긴장과 압박감은 보이지 않는다. 우카이 케이신 코치는 1, 2시합이 예정보다 빠르게 진행됐다며 슬슬 도쿄 체육관으로 돌아가자고 한다.
- 하이큐/265화 . . . . 1회 일치
* 봄고 남자 2회전 C코트 경기. 도쿄 출신 네코마 고교 대 이시카와 출신 사루카와 공업 고교. 스코어는 15 대 13으로 네코마의 무난한 리드. 하지만 사루카와의 공격이 제법 매섭다. 4번의 스파이크. 코즈메와 쿠로오가 블록을 뛰었다. 하지만 4번은 꽤 절묘한 솜씨로 블록을 피해 우중간을 파고 든다.
- 헤소린 가스 . . . . 1회 일치
그 결과, 동네 아이들 전체가 헤소린 가스에 중독되어 상황이 상당히 심각해지는데, 서로 방망이로 때리면서 놀거나, 지갑을 훔쳐서 가스를 살 돈을 조달하려 하거나, 가스의 효력으로 아픔이 마비된 탓에 "신칸센 히카리 호에 치여도 괜찮아!" "도쿄 타워에서 점프해도 괜찮아!"라고 호언장담하거나, 여자아이가 가스를 주입받느라 [[팬티]]를 다 보여도 태연하게 구는 등(…) 도덕심까지 완전히 마비된 모습을 보인다.
- 현동완 . . . . 1회 일치
서울 출신. 1917년 조선중앙[[YMCA]] 학관을 졸업했고, 1918년부터 YMCA 간사가 되어 소년부와 체육부 간사, YMCA 연맹 주임간사, 영창학교(英彰․Y학관) 교장, 그리고 서울 YMCA 총무를 지내는 등 거의 전 생애를 YMCA와 더불어 산 YMCA맨이다. [[1920년]] [[3월 30일]] 현동완은 농구 선수 겸 감독원으로서 반하트와 함께 일본 도쿄 원정을 떠났다. YMCA 농구팀은 최초의 해외 원정 경기에서 2승 3패의 전적을 남겼다. 1938년 일제의 탄압으로 YMCA가 폐쇄 상태에 있었던 시기나 8.15 해방 후의 혼란기, [[한국전쟁]]으로 인한 회관 상실, 부산 피난과 환도 이후의 혼란기에 YMCA를 지키기 위해 힘썼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전쟁 고아와 부녀자를 위한 구호사업에 주력했다. [[1952년]]에는 삼동부녀회관(三同婦女會館)을 설립하여 전쟁 미망인과 윤락 여성을 구호하였고 [[1953년]]에는 100만평이 넘는 [[난지도]]를 사들여 '보이즈 타운'이라고 불린 [[삼동소년촌]](三同少年村)을 짓고 거리에서 방황하는 고아들을 데려다가 양육하였다. 소년들이 시장(市長)을 뽑고 자체 은행권을 발행하는 등 유토피아적인 소년 자치도시였다. 난지도의 소년들은 1969년 물난리로 뿔뿔이 흩어졌다. 지금도 YMCA 사업의 하나로서 계속 운영되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보건사회부 장관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YMCA 총무이자 '고아의 아버지'로서 전쟁고아 구호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1963년]] [[10월 25일]] 삼동소년촌에서 고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고요히 눈을 감으셨다.
- 홍기(영부인) . . . . 1회 일치
[[성균관]] 박사인 [[최규하]]의 할아버지인 최재민씨와 한학자인 홍기여사의 할아버지간 교류가 있었으며, 이를 계기로 할아버지의 중매로 19살 되던 1935년에 연하의 최규하와 결혼하였다. 이후 남편 최규하가 도쿄고등사범학교와 만주 [[대동학원]]에 유학하던 시절에는 함께 동행하지 않고 시가(媤家)인 [[강원도]] [[원주시]]에서 시부모님을 모시면서 생활했다.
- 홍상수 . . . . 1회 일치
* 2000년 제13회 [[도쿄국제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언급상《[[오!수정]]》
- 홍해성 . . . . 1회 일치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에서 태어났다. [[계성고등학교]] 전신인 계성중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도쿄]]에서 극예술협회를 결성하고 연극 운동에 뛰어들었다. [[마해송]], [[홍난파]], [[최승일 (1901년)|최승일]] 등이 회원이었다.
- 화장실의 하나코 씨 . . . . 1회 일치
* 도쿄도 : 3층 여자 화장실 안에서 "하나코 씨-"라고 부르면 "뭐-니?"라고 대답하며, 16시 지나서 "하나코 씨, 미안해요"라고 말하면 "괜찮아"라고 대답한다.
- 황옥 (1885년) . . . . 1회 일치
황옥은 재판정에서 자신이 일본 경찰의 지시를 받고 의열단에 [[프락치]]로 잠입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유죄를 선고받고 1924년 징역 12년형에 처해졌다([[황옥 경부 폭탄사건]]). 1924년 [[김지섭]]이 [[도쿄 어소 투폭사건]] 때 사용한 폭탄도 황옥이 총독부 물건이라는 소인을 붙여 세관을 통과시킨 것이다. 이후 [[결핵]]으로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1925년 12월 가출옥하였다가 1928년 5월 재수감, 1929년 다시 가출옥한 이후 해방될 때까지 행적은 불분명하다.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 [[반민특위]], [[조선독립운동사편찬발기인회]]에서 활동하다가 [[1950년]] [[한국 전쟁]] 때 납북되어 이후 생사를 알 수 없다.
- 후지와라 노리카 . . . . 1회 일치
1992년 미스 일본 그랑프리를 수상했다. 1993년에 도쿄 레이스에서 수영복, 기모노 캠페인 모델로 활동하였으며, 여성 패션지 『JJ』『CanCam』에서 인기 모델이 되었다. 여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 후카다 쿄코 . . . . 1회 일치
[[일본]]의 [[여배우]]. 1982년 11월 2일 생, [[도쿄도]] 출신. [[O형]]. 1997년 FIVE(니혼 테리비)로 데뷔했다. [[드라마]], [[영화]], [[버라이어티]], [[CM]]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고 있다. 애칭은 후카쿈(深キョン)
- 흥친왕 . . . . 1회 일치
[[1902년]] [[일본]]에 망명중인 장남 [[이준용]]으로부터 생활비 지원요청을 받자 그는 임정규를 통해 충분하지 못한 액수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1p</ref> [[1907년]]까지 이재면은 별다른 관직도 직업도 없이 생계가 곤란하였다. 하지만 이준용은 망명지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아버지 이재면을 내심 원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재면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여 왕족으로 예우함과 동시에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1907년 그는 동생 고종으로부터 대훈이화장(大勳李花章), 서성장(瑞星章)을 받았고, [[1907년]] [[11월 27일]] [[대한제국]] [[육군]] 부장(副將)에 임명됐다. 이어 일본에 보내는 특별보빙사절단에 임명되고, 아들 [[이준용]]은 육군 참장에 임명되어 수행원이 되었다. 그해 11월 보빙사절단 과 수행원 [[이준용]], [[이달용]] 등을 대동하고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 히나타 쇼요 . . . . 1회 일치
인터하이 이후 도쿄 합숙에서 카게야마의 좀 더 강화된 떨어지는 토스[* 직선으로 날아가다가 히나타의 타점부근에서 떨어져 멈춘것 처럼 보인다]와 우카이 전 감독의 훈련으로 볼 컨트롤이 늘은 히나타가 괴짜 속공과 보통 속공을 합친 신 속공을 만들어 내어 공격방법을 나눌 필요가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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