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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확 . . . . 10회 일치
'''한확'''(韓確, [[1400년]]<ref>1403년생 설도 있다.</ref> ~ [[1456년]] [[음력 9월 11일]])은 [[조선]]전기의 문신이자 외척, 외교관이며 [[명나라]]의 문신이다.<ref>{{브리태니커|b24h3077a|한확}}</ref>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본관은 [[청주 한씨|청주]](淸州)이며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자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모후인 [[인수대비]]와 [[조선 세종|세종]]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의 부인인 [[정선군부인]]의 친정아버지이다.
[[명나라]] [[영락제]]의 후궁 [[여비 한씨]], [[선덕제|선종]]의 후궁 공신부인은 그의 넷째, 다섯째 누이이다. 검소하고 청렴하였으며 [[한명회]], [[신숙주]] 등과 함께 [[조선 세조|세조]]의 즉위를 도왔고, [[1418년]]의 [[세종]]의 책봉 고명과 [[1455년]] [[조선 세조|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왔다. 그는 누이들이 황제의 후궁인 점을 활용하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그의 둘째 딸은 [[조선 세종|세종]]의 서자 [[계양군 (왕족)|계양군 증]]에게 출가하였고, 여섯째 딸은 [[조선 세조|세조]]의 장남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비 [[인수대비]]로서 [[조선 세종|세종]], [[조선 세조|세조]] 2대에 걸쳐 사돈이 되었다. [[한명회]]의 일족이다.
[[1435년]](세종 17년)에 자헌대부 행중추원부사,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1437년]] 그의 딸 한씨가 계양군(桂陽君) 이증과 혼인하고 정선군 부인(旌善郡夫人)에 봉작되었다. 그의 또다른 딸은 [[수양대군]]의 아들 [[조선 덕종|도원군 숭]]과 결혼하는데 이 딸이 바로 후일의 [[소혜왕후|인수대비]]가 된다.
귀국길에 올라 세조의 책봉 고명을 받아 돌아오던 중, 칠가령(七家嶺)에 이르러 병을 얻어, 귀환하는 도중에 [[음력 9월 11일]] 사하포(沙河浦)에서 갑작스럽게 객사하였다. 당시 향년 56세였다.<ref>1400년생 설을 따를 경우</ref> 사망 당시 가사에 대한 말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둘째 딸은 [[세종]]의 서자 [[계양군]] 증에게 출가했고, 여섯째 딸은 [[소혜왕후|인수대비]]로 [[조선 덕종|덕종]]의 비이며 [[월산대군]]· [[조선 성종|성종]]의 어머니였다.
한확은 세조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충신이었다. 그는 그의 누나가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이 되면서 명나라 황실의 벼슬을 받고 외교채널이 된다.<ref name="ky">[http://www.kyeongin.com/news/articleView.html?idxno=496702 <nowiki>[</nowiki>王을 만나다·16<nowiki>]</nowiki>서오릉-경릉 ( 추존 덕종·소혜왕후) : 남존여비 '女訓'과 상반된 '여성상위능'] 경인일보 2010.01.14</ref> 그리고 누이동생 또한 명나라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택돼 더욱 외교적 입지를 다지게 된다. 사실 한확의 두 누이이자 인수대비의 고모들은 명나라에 공녀로 바쳐진 가슴 아픈 사연을 지녔다. 한확은 계유정난 때 세조를 도와 정난공신 1등에도 올랐는데 세조의 왕위 찬탈을 승인하지 않던 명나라에 들어가 단종이 왕위를 물려준 양위라고 설득한다. 그러나 한확은 골치 아픈 외교 문제를 해결하였다.<ref name="ky"/>
*** 사위 : [[조선 덕종|의경세자]](덕종)
* [[조선 덕종|의경세자]]
- 장순왕후 . . . . 8회 일치
야사에서는 장순왕후와 그의 동생 [[공혜왕후]], 형부 [[조선 덕종|덕종]](의경세자), 남편 [[조선 예종|예종]]과 아들 [[인성대군]] 등 [[조선 세조|세조]]의 자손들이 이른 나이에 요절한 것이 [[조선 단종|단종]]을 억울하게 죽인 [[조선 세조|세조]]에 대한 [[현덕왕후]](顯德王后)의 저주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저주의 첫 대상자로 알려진 [[조선 덕종|덕종]]의 경우 [[조선 단종|단종]]보다도 먼저 사망했으며, 따라서 [[조선 세조|세조]]가 [[조선 덕종|덕종]]의 죽음에 분노해 [[현덕왕후]]의 능묘를 파헤치고 폐서인했다는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 시아주버니 : 추존 [[조선 덕종|덕종]](德宗, 1438~1457)
- 폐비 윤씨 . . . . 3회 일치
* 시아버지 : 추존 [[조선 덕종|덕종]](德宗, 1438~1457)
[[분류:1455년 태어남]][[분류:1482년 죽음]][[분류:조선의 왕비]][[분류:폐위된 왕·황후]][[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경기도 출신]][[분류:사사된 사람]][[분류:무오사화 관련자]][[분류:함안 윤씨]][[분류:조선 성종]][[분류:조선 덕종]][[분류:15세기 한국 사람]]
- 한명회 . . . . 3회 일치
[[조선 세조|세조]]의 장자 [[조선 덕종|의경세자]]가 요절하고 그의 빈인 [[소혜왕후|수빈 한씨]]는 궁궐에 살아도 좋다는 시아버지 [[조선 세조|세조]]의 배려를 사양하고 사가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친정과는 10촌도 더 차이가 나는 먼 친척이었으나 [[소혜왕후|인수대비]]의 집에 자주 방문했는데, 그는 수빈 한씨에게 야심이 있음을 간파하였다. 한명회는 [[소혜왕후|인수대비]]에게 사돈을 맺는 조건으로, 그녀의 아들을 임금으로 만들겠다고 제의를 한다.
이때 그는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이자 자신의 넷째 사위인 [[조선 성종|자을산군 혈]]을 적극 지지하여 차기 왕으로 즉위시킨다. [[1469년]] [[조선 성종|성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판이조사]]와 [[병조판서|판병조사]]를 겸했고 성종의 즉위를 지지한 공로로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洪弘佐理功臣) 1등의 공신호를 받았다. 이어 그해 [[춘추관]]영사로서 [[최항 (1409년)|최항]](崔恒), [[신숙주]] 등과 함께 《세조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는 [[조선 세조|세조]]와 그의 장남이자 자신의 사위인 [[조선 예종|예종]]의 형인 [[조선 덕종|의경세자]]와도 이중 사돈관계를 형성하였다. [[조선 예종|예종]]의 원비 [[장순왕후]](章順王后)는 그의 셋째 딸이고, [[조선 성종|성종]]의 원비 [[공혜왕후]](恭惠王后)는 넷째 딸로, 이들은 친정 자매간이면서 시가로는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관계가 된다.
- 백성현 . . . . 1회 일치
| [[조선 덕종|의경세자]] 역, [[조선 성종|성종]] 역
- 윤흔 . . . . 1회 일치
첫 부인은 [[조선 덕종|의경세자]]의 장남인 [[월산대군]]의 손자 [[양원도정]](陽原都正) 이혜(李譓)의 딸과 결혼하였다가 일찍 상처하고, 뒤에 스승 [[이이]], [[성혼]]과 동문수학한 [[신응시]]의 딸 영산신씨(靈山申氏)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재취 부인 영산신씨 역시 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전처 전주이씨에게서 1남 1녀를 두니 아들 윤취지(尹就之)와 유시경(柳時慶)에게 출가한 딸이 있다. 또한 첩실에서 1남 1녀를 두었으니, 서자 윤태지(尹泰之)는 관상감 직장(觀象監直長)을 지냈고, 서녀는 무과(武科)에 급제한 유지만(柳之蔓)과 결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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