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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창희 (1894년)
         [[한성부]]에서 [[대한제국]] 무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운수주식회사 전무취체역을 거쳐 조선운송주식회사의 취체역을 맡는 등 운수업 부문에서 종사했다. [[조선총독부]] 운수국 운수위원과 [[조선철도협회]] 평의원 등을 지냈다.
  • 경순왕
         그 후 원본은 사라졌지만 조선시대에 이모한 작품 5점이 전하고 있다. 5점은 [[1677년]](숙종 2년) 강원 원주의 고자암에서 제작한 것, [[1749년]] 경북 영천 은해사 상용암에서 그린 것, [[1794년]] 초상화가 이명기가 은해사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 [[1904년]](광무 8년) [[승려]] 출신 [[대한제국]]의 화가 이진춘이 이명기 본을 보고 다시 그린 것과, 이진춘 본의 초본 등이다.
         [[대한제국]] 시절 그려져 [[경상남도]] [[하동군]] 청암면 평촌리 산 107-1 경천묘에 봉안중인 '경순왕 어진'은 [[2008년]]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ref>[http://www.gn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829 경천묘 ‘경순왕 어진’- 경남도유형문화재 지정] 경남매일 2008년 12월 08일</ref>
  • 고 (시호)
         * [[대한제국]] [[이성계|고제]] 이성계 (추숭)
  • 고영희 (1849년)
         |국적= {{국기나라|대한제국}} <br /> {{국기나라|일제 강점기 조선}}
         '''고영희'''(高永喜, [[1849년]] [[12월 16일]]([[음력 11월 2일]]<ref>{{서적 인용 |편집자= [[국사편찬위원회]] |제목=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연도= 1971년 |출판사= 도서출판 탐구당 |페이지=584, 752쪽 }}</ref>) ~ [[1916년]] [[1월 24일]])는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이다. 정미칠적과 경술국적에 포함되었다. [[자 (이름)|자]]는 자중(子中), 본관은 [[제주 고씨|제주]](濟州), 본적은 경성 북부(北部) 옥동(玉洞) 15통 9호(1914년 당시 주소)이며 고진풍(高鎭豊)의 아들이다.
         |페이지=86}}</ref> [[1896년]] [[농상공부]] 협판, 외부 협판이 되었으며, [[독립협회]]의 발기인으로 참가하였다. [[1899년]] [[9월 12일]] - [[9월 17일]], [[역대 한성판윤|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ref>{{웹 인용 |url=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5.html# |제목=서울육백년사 |확인날짜=2006-02-04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070928061938/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sidaesa/txt/65.html# |보존날짜=2007-09-28 |깨진링크=예 }}</ref> [[1903년]] 주일 특명전권공사, [[탁지부]] 협판,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찬의 등을 거쳐 [[1904년]] 황해도관찰사, [[1905년]] 제실회계심사국장(帝室會計審查局長)·경리원경(經理院卿)을 거쳤다.
         [[1907년]] [[이완용]] 내각에 탁지부대신으로 중용되어,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헤이그 특사 사건을 구실로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양위를 강요할 때 적극적인 반대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그 뒤 법부대신, [[1909년]] 내부대신 임시서리·탁지부대신이 되었다. [[한일신협약]]과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협조하여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포함되었다.
         * {{서적 인용 |편집자= [[국사편찬위원회]] |제목=대한제국관원이력서(大韓帝國官員履歷書) |연도= 1971년 |출판사= 도서출판 탐구당}}
         [[분류:1849년 태어남]][[분류:1916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자작]][[분류:유교 신자]][[분류:급진개화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제주 고씨]][[분류:독립협회]][[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친일파]]
  • 고종(조선)
         [[대한제국]]의 황제들
         고종은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다. 아명은 이명복[* 가끔씩 고종을 까는 사람들이 시호 대신 이 이름으로 고종을 부르는 경우가 있다(...).].
  • 고희동
         '''고희동'''(高羲東, [[1886년]] [[3월 11일]] ~ [[1965년]] [[10월 22일]])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동양화를 공부한 동양화가이자 한국인 최초의 서양화가이다. 호는 춘곡(春谷)이다.
         [[분류:1886년 태어남]][[분류:1965년 죽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대한민국예술원 회원]][[분류:대한제국 관립한성외국어학교 동문]][[분류:도쿄 예술대학 동문]][[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홍익대학교 교수]][[분류:서라벌예술대학교 교수]][[분류:중앙대학교 교수]][[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한국화가]][[분류:20세기 화가]]
  • 권람
         사후 [[조선 세조|세조]] 말기부터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파]]들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부터 재평가 여론이 조성되었다. [[1970년]]대에 다시 재평가 여론이 등장하였고, 그의 저서 응제시주 등에서 [[단군]] 중심의 역사관을 서술한 점이 다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 권태술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김낙헌
         [[경상북도]] [[안동시|안동]] 출신이다. [[1895년]] [[대한제국]]의 법부 주사가 되면서 사법 분야에서 일하기 시작해 검사시보, 검사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1901년]]에는 [[평리원]] 검사, 이듬해에는 평리원 판사에 임명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일본은 의병 항쟁 탄압을 위해 사법권 장악을 시도했는데, 김낙헌(김락헌이 과정에서 충실히 협조했다. 1905년에는 법관양성소장을 맡았고 [[1909년]]에는 경성공소원 검사를 지내며 의병 재판에 검사로 참여했다.
         김낙헌이 검사 및 판사로 근무한 기간은 [[을미사변]], [[단발령]], 을사조약, [[대한제국 군대 해산]], 한일 병합 등으로 의병 활동이 활발할 때였다. 그가 검사 또는 판사로서 재판에 참여한 의병 봉기 및 독립운동 사건은 총 12건으로, 그 내역은 다음과 같다. 김낙헌은 이 가운데 1910년의 의병장 김춘삼 재판까지는 검사로, 이후에는 판사로 재판에 참가했다.
         [[분류:1874년 태어남]][[분류:1919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법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안동시 출신]]
  • 김마리아 (1903년)
          |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한성부]] [[성동구|성동방]]
         [[1903년]] [[9월 5일]], [[대한제국]] [[한성부]] [[성동구|성동방]]에서 [[성리학|초야 성리학]] [[유교|유생]](<small>훗날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 이주.</small>)이었던 국연 김동수(菊淵 金東守, <small>아명(兒名)은 김동길(金東桔)이며 [[러시아 제국|러시아]] 귀화 이름은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킴(Sergei Mikhailovich Kim).</small>)의 슬하 2남 3녀 중 막내 여식으로 출생하였고 2세 때였던 1906년 6월에 일가족과 함께 [[평안남도]] [[평양직할시|평양]]에 이주하였으며 5세 때였던 1908년에는 일가족과 함께 [[러시아 제국]] [[프리모르스키 지방]] [[프리모르스키 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재이주하였다.
  • 김성수 (1891년)
         '''김성수'''(金性洙, [[1891년]] [[10월 11일]] ~ [[1955년]] [[2월 18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인 겸 언론인·기업인·[[근대주의]] 운동가였으며, [[대한민국]] 초기 [[정치인]], 언론인, 교육인, 서예가였다. [[전라북도]] [[고창군|고창]]출신이며에서 자랐다. 본관은 [[울산 김씨|울산]]이며 조선조 [[성리학자]]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13대손이다. 자(字)는 판석(判錫), [[호 (이름)|아호]]는 인촌(仁村)이다.<ref name="in680">인촌기념회, 인촌김성수전(인촌기념회, 1976) 680페이지</ref>
         이어 4월 김성수는 역시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와 함께 [[일본]] [[도쿄|동경]]의 [[와세다 대학교]](早稻田大學敎)에 입학하였다.<ref name="건국영웅"/> 이후 [[와세다 대학교]] 예과(豫科)에서 수학하던 중, [[8월 29일]] [[대한제국]]이 강제로 [[한일 병합 조약|병합]]되자 충격을 받은 [[송진우 (정치인)|송진우]]는 귀국하였고, 김성수는 홀로 [[일본]]에 남아 공부를 계속했다.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를 마치고, [[와세다 대학교]] 본과에 입학, [[정치경제학|정경학부]]에서 공부했다. 김성수는 집안에서 부치는 학비 등으로 어렵지 않은 생활을 하였다. [[와세다 대학]]에서 사귄 친구들은 [[설산 장덕수]], [[해공 신익희]], [[민세 안재홍]], [[가인 김병로]], [[낭산 김준연]] 등이었다.
         [[1926년]] [[6월 10일]]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국장 (장례)|국장]] 인산일에 중앙중학교 체육교사 [[조철호]](趙喆鎬)가 학생들을 이끌고 단성사 근처로 집결, 가두시위를 벌였다. 순종의 [[영여]]가 창덕궁을 출발, 종로를 통과할 때 한 학생이 군중으로부터 빠져나와 격무늘 뿌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주위에 정렬한 상복입은 군중들이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사건으로 구속된 학생 중 100여명이 중앙중학교 학생이었다.
         [[1926년]] [[6월 11일]]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인산일을 계기로 벌어진 [[6·10 만세 운동]]의 배후의 한사람으로 지목되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에 소환 조사를 받았으나 혐의점이 없어서 바로 풀려났다. 6월말 [[6.10 만세운동]] 당시 [[중앙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주도하거나 만세시위에 연루되어 학교가 폐교될 위기에 처하자, 김성수는 '학교 걱정말고 가서 싸우라'고 학생들을 독려하였다. 이후 많은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의로운 지도자로 존경받았다. [[1929년]] 3월 [[경성방직주식회사]] 고문이 되었다. 11월 3일 통학열차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다가 한인 남학생들이 가해 남학생을 구타, 한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간의 싸움이 발생하여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발생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보도정지령을 내렸으며, 그는 여학생 성추행 사건을 기회로 사태 확산을 획책한 것으로 의심받고 총독부에 소환되었다.
         * 할아버지 : [[김요협 (1833년)|김요협]] (金堯莢, 호는 낙재, [[1833년]] ~ [[1909년]],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선공감 감역 역임<ref>할아버지 김요협은 증조부 김명환의 셋째 아들이었다.</ref>)
  • 김완섭
         이후 사건은 확대되어 그가 2002년에 펴낸 책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인터넷 컬럼 등에서 일본의 식민통치를 왜곡 저술해 명예를 훼손당했다”며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손자 [[이석 (가수)|이석]], [[일본군]] 종군위안부 박두리(82)외 6명, 징용자 유족 5명, 의병대장 민종식의 손자, [[명성황후]]의 종증손뻘 되는 민병호, 충정공 [[민영환]]의 손자 민병덕 등에게 피소되었다.<ref name="ch22">[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5090270051 ‘일제 미화‘작가 김완섭씨, 고종황제 손자 등에 배상 판결] 조선일보 2005년 9월 2일</ref><ref name="han22">[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509/h2005090206021522000.htm 일제 식민통치 미화 親日작가 김완섭씨 고종황제 손자 등에 배상 판결] {{웨이백|url=http://news.hankooki.com/lpage/society/200509/h2005090206021522000.htm# |date=20111123165806 }} 한국일보 2005년 9월 2일</ref> 그러나 저서 《친일파를 위한 변명》과 관련된 소송에는 피소 후, 한번도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다.
         또한 '독립의병은 양반들이 돈으로 모집한 깡패와 도둑' 이라는 발언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ref name="ghan1"/> 그에 의하면 [[대한제국|구한 말]]의 의병과 [[일제 강점기]]의 독립군이 독립군 자금을 모금한다는 이유로 부자는 물론 일반 민간인의 가옥까지 침입, 재물을 약탈한 것을 비판한 것이었다.
  • 김윤정 (1869년)
         </ref>, [[1869년]] [[6월 25일]] ~ [[1949년]] [[10월 23일]])은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이자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다. 경무관 재직 시절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土田讓亮)를 살해한 혐의로 끌려온 [[김구|김창수]](독립운동가 백범 김구의 본명)를 심문하기도 했고, 외교관으로 있을 때는 미국 국무부에 고종의 밀서를 전달해 달라던 [[이승만]]의 청을 거절하였다.
         구한말에 관료생활을 하던 중 대한제국의 [[학부 (대한제국)|학부]]가 선발한 유학생으로 뽑혀 [[1897년]]부터 [[미국]]에 유학했다.
         미국 [[콜로라도 대학교]]를 [[1903년]] 졸업한 뒤 주미공사관에 서기생으로 채용, 이후 주미한국공사관 3등 참서관, 1등 참서관, 대리공사 등을 지내며 외교관으로 근무했다. 1904년 고종은 1882년 미국과 맺은 조약을 근거로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의 밀서를 이승만을 통해 보냈다. 1905년 8월 4일 뉴욕시 동부 로즈벨트 대통령 별장에서 이승만과 만난 루즈벨트 대통령은 밀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귀국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건 할 용의가 있다"라고 답변했다. 다만 외교적인 일이므로 밀서가 아닌 위싱턴의 한국공사관을 통해 제출하라고 권유했다. 이때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밀서를 들고 온 [[이승만]](李承晩)이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외면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그의 어린아들을 설득하여 그의 마음을 되돌리려 하였으나 그는 거절했다.<ref>이호, 《하나님의 기적 대한민국 건국》 I, 하리출판, 2012, 96</ref>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긴 뒤 [[영국]] 유학을 갔다가 그해 귀국했다.
         실업계에서도 활동하여 조선상사주식회사의 사장으로 활동했다.<ref name="네이트1"/> 딸 [[윤고려]]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교육자이기도 했다.
         [[분류:1869년 태어남]][[분류:1949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외교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도 김씨]][[분류:암살 미수 생존자]]
  • 김정렬 (1917년)
         그의 큰아버지 [[김기원 (1878년)|김기원]]도 대한제국 군인이었다 그의 아버지 [[김준원 (1888년)|김준원]]도 광복 후 [[대한민국 육군|육군]] 창군에 참여하여 [[한국 전쟁]] 당시 육군 대령으로 참전하였고, [[6.25 전쟁]] 당시 [[해인사]] [[팔만대장경]]을 폭격의 위기로부터 구한 [[김영환 (1921년)|김영환]]은 그의 동생이었다.
         [[1917년]] [[9월 29일]] [[경성부]] 종로에서 김준원과 변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김영환 (1921년)|김영환]]은 그의 동생이었다. 김정렬은 [[경성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큰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대한제국]] 군인이었던 무관 집안이었다.<ref>{{뉴스 인용
         }}</ref> 그의 집안은 대대로 [[조선]]에서 무관을 지낸 집안으로, 큰아버지 김기원과 아버지 김준원은 구한말 군관학교를 졸업한 대한제국 군인으로 일제 강점기 무렵에 각각 다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여 15기와 26기 졸업생으로 일본군에 편입되어 일제 강점기에도 군인으로 활동했다. 특히 아버지 김준원은 해방 후 육군 창군에 참여, [[한국 전쟁]]에는 육군 대령으로 경남병사구사령관으로 활동하였고 예비역 [[1성 장군|준장]]으로 예편하기도 했다.
  • 김주로
         '''김주로'''(金宙魯, 1895년 4월 8일 ~ 1963년 3월 31일)는 [[대한제국]] [[한국의 독립 운동|독립운동가]]이다.
         일찍이 [[강일순|강증산]], [[이상호 (1888년)|이상호]] 등의 영향을 받았으며 1914년를 나온 그는 1919년 경상북도 안동군 에서 3·1 대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하였고 1920년 음력 7월 경상북도 안동군에서 차경석(車京錫)을 교주로 하는에 가입하여, 물론 겉으로는 종교 활동을 표방하며 대한제국 국권 회복 운동에 진력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경상북도 일대에서의 신도를 모집하여 교세를 신장하였다.
         이들은 1924년 "갑자년(甲子年)에가 표하는 힘에 의해 대한제국 조선 황조가 독립될 것"이라 선전하면서 자금 모집 및 교도 포섭에 힘을 쏟다가 일경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결국 그는 이 일로 인하여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 김준원 (1888년)
         출신지는 [[한성부]]이다. 형인 [[김기원 (1878년)|김기원]]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15기로 졸업한 [[대한제국]]의 무관이었다. 김준원도 [[일본]]에 유학하여 [[1914년]]에 일본육사를 제26기로 졸업<ref>{{서적 인용
  • 김창숙(독립운동가)
         ||<#ffd700> 국적 ||[[조선]] -> [[대한제국]] -> [[대한민국 임시정부]] -> [[대한민국]] ||
  • 김한규 (1877년)
         출신지는 [[한성부]]이다. [[농상공부]] 참서관을 지낸 관리의 아들로 태어났고, 한문을 수학하다가 [[1995년]]에 [[관립한성일어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1898년]]부터 [[일본어]] 교사로 일하면서 [[1907년]]에는 [[학부 (대한제국)|학부]] 서기관을 지내는 등 [[대한제국]] 관료로 근무했다.
         [[분류:1877년 태어남]][[분류:1950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김해 김씨]]
  • 김현철 (1901년)
         [[대한제국]] [[한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대한민국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기도|대한제국 경기도 양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1922년]] [[서울대학교|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학과]]를 나온 그는 이후 도미 유학, [[1927년]] [[미국]] [[린치버그 대학교]] [[경제학|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학사 과정을 마치고 [[1932년]] [[컬럼비아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1933년]]에는 [[아메리칸 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 대한제국 순종
          | 문장설명 = [[대한제국의 국장|이화문(오얏꽃 문장)]]
          | 작위 = [[대한제국의 황제|대한제국 황제]]
          | 전임자 = [[대한제국 고종]]
          | 총리 = {{접이식 목록|제목=[[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내각총리대신]]|
          | 아버지 = [[대한제국 고종]]
         '''순종'''(純宗,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 [[1926년]] [[4월 25일]])은 [[대한제국]] 제2대이자 마지막 [[황제]]이다. 대한제국은 출범 당시 [[대한국 국제]]에 따라 [[조선|조선 왕조]]의 법통을 이었음을 분명히 하였으며 사실상 [[대한제국의 황실|한국 황실]]의 혈통도 마찬가지로 조선 왕조에서 유래하였으므로, 역사학계에서는 조선의 제27대 군주로 취급하기도 한다.<ref>[[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1947 순종(純宗)]》
         [[이름|휘]]는 '''척'''(坧),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자 (이름)|자]]는 '''군방'''(君邦), [[호 (이름)|호]]는 '''정헌'''<ref>{{웹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oid=001&aid=0003575273&sid1=001|제목=고종 황제가 순종에게 내려준 호, '正軒'|성=|이름=|날짜=2010년 7월 22일|웹사이트=|출판사=[[연합뉴스]]|언어=ko|확인날짜=2019-07-30}}</ref>(正軒), 정식 시호는 '''순종문온무령돈인성경효황제'''(純宗文溫武寧敦仁誠敬孝皇帝)이다.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아들이며, 고종의 장성한 자녀 중 유일한 적자이다. 대한제국이 병합된 이후에는 [[일본 제국|일본]] [[일본 천황|천황]]의 신하로서 [[왕공족]] 중 [[이왕가]]의 수장인 '''이왕'''(李王)으로 불렸다. 순종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유일한 적자(嫡子)로 [[명성황후|명성황후 여흥 민씨]] 소생이며, 어려서부터 병약하였으며 후사는 없었다.
         대훈위 국화장경식을 단 대한제국 순종 융희제
         순종은 [[1874년]] [[3월 25일]]([[음력 2월 8일]]), 조선 한성부 에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명성황후]]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명성황후는 순종 이외에도 몇수 명의 자식을 더 얻었지만 장성한 것은 순종이 유일하다.
         순종 이척은 2세 때였던 [[1875년]] [[3월 8일]]을 기하여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1895년]] [[10월 8일]], 모후 [[명성황후]]가 [[건청궁]]에서 시해되는 소식을 접하였다. 이때 그는 부왕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함께 일본 낭인과 한국인 협력자들에 의해 [[건청궁 (경복궁)]] 장안당에 갇혀 있었다. 이 와중에 그는 자신의 왕세자 작위를 이복 서제 [[의친왕|의화군 이강]]에게 선양하겠다며 왕세자 작위를 사양(을미년 왕세자 작위 선양 파동 사건)하려 하였지만 부왕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만류로써 왕세자 작위를 유지하는 것을 일단락성 사건으로 겪으며 같은 해(1895년) [[홍범 14조]] 반포와 동시에 [[왕태자]]로 올랐고, [[1897년]] [[10월 12일]]을 기하여 [[대한제국]]이 수립되면서 [[황태자]]로 격상되었다.
         [[1907년]] [[1월 21일]] 부황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대리청정]] 위임을 받았고 이어 같은 해 [[1907년]]에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1859년)|이준]], [[이상설]] 등을 비밀리에 밀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헤이그 밀사]] 사건 실패 이후, [[일본 제국|일본]]과 [[친일파]]의 압력으로 고종은 퇴위 요구를 받았다.
         [[1907년]] [[7월 19일]]을 기하여 고종이 강제로 제위에서 물러나자 대리청정이었던 [[순종 이척|황태자 이척]]이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고([[고종 양위 사건]]), 보위 등극과 동시에 [[대한제국 육군]] [[3성 장군|대장]] 예편과 아울러 원수에서 대원수로 승급하였으며 연호를 '''융희'''(隆熙)라 하였다. 그러나 그를 정식 군주로 인정하지 않던 일부 세력은 그를 황제 혹은 주상이라 부르지 않고 전각의 이름을 따서 '''창덕궁 전하'''라고 불렀다.
         순종은 건강이 좋지 않아 자식이 없었던 관계로 자신의 이복 남동생들 중에서 후계자를 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복 동생 중 그 당시 나이가 가장 어렸던 [[영친왕]]을 황위계승자([[황태자]])로 봉하였다.<ref>영친왕을 황태자로 봉한 배경에는, 의친왕을 견제하려던 엄귀비의 입김도 작용했다{{출처|날짜=2008-9-16}}.</ref> 그러나 이복동생 중에는 [[의친왕]]도 있었고, 의친왕의 아들을 양자로 입양시켜서 황태자로 임명할 수도 있었는데 어떤 연유로 영친왕을 태자로 봉했는가의 배경은 아직까지도 대한제국 역사의 미지수이다.
         좌우간 1907년 8월 7일을 기하여 황위계승자 1순위급 후보였던이 [[대리청정]] 직위에서 물러나고 10일 후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후사가 없는 순종의 황위계승자(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ref>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ref><ref>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ref>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과<ref name="ohsy333">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ref> [[의친왕|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ref name="ohsy334">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ref>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 (1870년)|이준용]]과은 졸지에 [[순종 이척|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ref name="ohsy334"/>
         === 재위 절정기와 대한제국 황제 통치권 피탈 ===
         이 무렵 [[일본 제국|일본]]이 [[러일 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다른 식민지 열강 세력을 몰아내고 [[대한제국]]의 이른바 후견국을 자처하면서 [[한일 합방]]의 발판을 공고히 하였다. 여기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토는 [[1909년]] [[안중근]]에 의하여 [[하얼빈 시|청나라 만저우 지방 헤이룽장 성 하얼빈]]에서 사살되었다.
         한편 같은 해인 [[1909년]] [[기유각서]] 사건으로 인하여 황제 순종의 실권은 제2대 대한제국 통감 [[소네 아라스케]]에게 박탈되고 순종은 이듬해인 [[1910년]]까지 허수아비 군주의 신세가 되었다. 뒤이어서 제3대 대한제국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대한제국의 실권을 쥐고 급기야 한국 부통감 [[야마가타 이사부로]]가 실권을 하며 [[1910년]] [[한일합방|경술한일합방늑약]]으로 인하여 사실상 일제가 한반도에 무혈입성하기에 이르렀고, 이와 함께 대한제국의 멸망을 지켜보게 되었다.
         [[1910년]] [[일본 제국]]은 순종에게 [[한일 병합 조약]]에 공식적으로 서명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러나 순종은 조약에 끝까지 동의하지 않았으며, [[8월 22일]] 결국 당시 총리대신인 [[이완용]]이 이에 대신 서명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본 제국에 합병되면서 멸망하였으며, 아울러 역사상 왕조는 끝맺음하게 되었다. 이후 순종은 모든 권한을 잃고 '''이왕'''이라 불리며 [[창덕궁]]에 거처하였다.
         순종에게는 아래에 언급된 형제/자매 외에도 여러 친형제와 서형제가 있었으나, 이들은 모두 요절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제국 고종#가족 관계]]를 참고하기 바람.
         ** 아버지 :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1852년~1919년, 재위:1863년~1907년)
  • 민영환
         |국적= 조선, 대한제국
         |상훈=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br />대한제국 [[대훈위 이화대수장]]<br>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척신이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지만 실제로는 13촌지간이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귀국후에 그는 [[의정부시|의정부]]찬정(贊政), [[군부 (대한제국)|군부]] 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다. 다만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등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한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선포 후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제국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 (1827년)|조병세]]와 같이 을사늑약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 헌병들의 강제진압에 의해 실패하게되고,〈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유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br />
         사망 후에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고종]]이 사망한 뒤에는 고종 황제의 능원에 배향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민영환선생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친필로 쓴 묘비가 있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분류:1861년 태어남]][[분류:190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자살한 사람]][[분류:종묘배향공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태극장 수훈자]][[분류:여흥 민씨]]
  • 민영환 (1861년)
         |국적= 조선, 대한제국
         |상훈=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br />대한제국 [[대훈위 이화대수장]]<br>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민영환'''(閔泳煥, [[1861년]] [[8월 7일]] ([[음력 7월 2일]]) ~ [[1905년]] [[11월 30일]])은 [[조선]]과 [[대한제국]]의 대신(大臣)이자 척신이다. [[종묘배향공신]]이 되었다. [[본관]]은 [[여흥 민씨|여흥]]이며, [[민치구]]의 손자이자 [[민겸호]]의 친아들이며, 고종에게는 외사촌 동생이다. [[명성황후]] 민씨의 친정 조카로 알려지지만 실제로는 13촌지간이 되는 먼 친척에 불과하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귀국후에 그는 [[의정부]]찬정(贊政), [[군부 (대한제국)|군부]] 대신을 지낸 다음, [[1897년]](광무 1년) 또다시 영국·독일·프랑스·러시아·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 6개국에 대한 특명전권공사로 발령을 받고 외유하였다. 잦은 해외여행으로 서양 문물에 일찍 눈을 뜨게된 민영환은 개화 사상을 실천하고자 유럽 열강 세력의 제도를 모방하여 정치제도를 개혁하고, 민권 신장(民權伸張)을 꾀할 것을 고종에 상소를 올린다. 다만 이는 전제왕권을 추구하던 고종의 성향과 반대되는 것이었고 그의 상소는 군사제도 개편만이 채택되어, 고종은 원수부(元帥府)를 설치, 육군을 통할하게 하였다.
         [[1897년]] 유럽 6개국 특명전권대사, [[탁지부]] 대신, 장례원경, 표훈원 총재등 역임하면서 주요 관료로 겸임한다. 또한 대한제국 반포하기 이전의 여러 공적을 인정받아, 대한제국 선포 후 태극장(太極章)을 수여받았다.
         민영환은 친일적인 대신,관료들과 수차례 대립하였고, 일본제국의 내정간섭을 성토하다가 주요요직에서 밀려나게 된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의 체결을 크게 개탄하며, [[조병세 (1827년)|조병세]]와 같이 을사늑약 반대상소를 수차례 올렸으나 일제 헌병들의 강제진압에 의해 실패하게되고,〈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유서를 국민들에게 남기고 [[11월 30일]] 자결하였다. 유서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인용문|〈마지막으로 우리 대한제국 이천만 동포에게 고함〉<br />
         사망 후에 의정대신(議政大臣)으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고종]]이 사망한 뒤에는 고종 황제의 능원에 배향되었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민영환선생묘]]》는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544-4에 있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친필로 쓴 묘비가 있다. 1973년 7월 10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8호로 지정되었다.
         [[분류:1861년 태어남]][[분류:1905년 죽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자살한 정치인]][[분류:자살한 사람]][[분류:종묘배향공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과거 급제자]][[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한일 병합 조약 관련자]][[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수훈자]][[분류:금척대훈장 수훈자]][[분류:이화대훈장 수훈자]][[분류:태극장 수훈자]][[분류:여흥 민씨]]
  • 박규수
         |군주 = [[대한제국 고종|고종 이형]]
         안동 김씨 [[세도 정치]]가 계속됐던 데다가 [[효명세자]], 어머니 유씨, 아버지 [[박종채]]의 연이은 죽음으로 상심한 그는 20년 칩거에 들어간다.<ref name="hyomms"/> 그는 할아버지 [[박지원 (1737년)|박지원]]의 저작들<ref>연암 박지원의 방대한 저작들을 하나로 묶어 간행한 연암집은 대한제국 때인 20세기 초에 정식 간행됐다. 연암집을 간행하려는 노력은 그 전에 한두 차례 있었으나 이뤄지지 않았다. 따라서 연암집이란 이름의 저작은 당시 존재하지 않았다.</ref>을 거듭 읽어 [[북학]] 사상을 정교화하고, 할아버지의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청했다. 윤종의(尹宗儀), 남병철(南秉哲), 김영작(金永爵) 등 당대 기라성같은 유학자들과도 깊은 교분을 나눠, 후일 [[홍문관]] [[대제학]]에 오를 정도의 주자학적 깊이까지 더하게 된다.
         1863년(고종 즉위년) 12월 [[승정원]] [[도승지]]에 임명돼 [[대한제국 고종|고종]]을 측근에서 모시게 됐다. 막 즉위한 고종은 [[효명세자|익종(翼宗)]]의 양자로 입승대통<ref>입승대통:대통을 잇는 입양이란 뜻의 왕실용어</ref>돼 보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효명세자]](익종)의 정비이자 고종의 양어머니가 된 [[조대비]](趙大妃)가 남편의 생전 절친했던 박규수를 [[흥선대원군]]에게 천거했다. '박규수는 벼슬길에 오르지 않았을 때도 [[익종]]께서 크게 쓰려던 인물이다. 그가 벼슬한 뒤 이제까지 그의 재주를 마음껏 발휘할 자리에 앉아본 적이 없는데, 한 번 써보는 것이 좋겠다'며 간곡히 부탁했다고 한다.
         1866년([[대한제국 고종|고종]] 3년)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터졌다. 선교사 토마스<small>(한국식 이름 [[최난헌]])</small> 등을 태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The General Sherman)가 조선 정부의 분명한 통상요구 거절에도 허가없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오자 박규수가 공격 명령을 내렸다.<ref> 문일평, 《호암전집》 제3권, 서울: 조광사, 1939년, 267~268쪽. </ref>
         1877년(고종 14년) 2월 9일<ref>(음력 1876년 [[12월 27일]])</ref>에 임지인 [[수원부]] 청사에서 71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슬퍼하며 '도량과 식견이 고명하고, 문학이 박식해서 내가 의지하고 온 조야(朝野)가 기대하던 사람이다. 근래에 우의정의 벼슬을 벗은 것과 관련하여 특별히 거기에 머물러 살게 한 것은 바로 평시에 정력이 강직하여 잠시 휴식하게 해주면 다시 등용할 날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는데, 어찌 까닭모를 병으로 갑자기 영영 가버릴 줄이야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내 슬픔과 한탄이야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라며 [[승지]]를 보내 치제하게 하고, 3년치 녹봉(祿俸)을 부의로 지급했다.
         1910년 [[대한제국]] 멸망 후 그의 개화 사상과 삶을 소개한 문집이 처음 간행됐다. [[연암집]] 역시 처음으로 정식 간행됐다.
         1921년 3월 31일 [[일제 강점기]]였지만 [[이왕직]](李王職) 등으로 명맥은 유지하던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명으로 [[신응조]](申應朝), [[이돈우]](李敦宇), [[민영환]](閔泳煥) 등과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묘정에 배향됐다.
         [[분류:1807년 태어남]][[분류:1877년 죽음]][[분류:종묘배향공신]][[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과거 급제자]][[분류:조선의 실학자]][[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화가]][[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군인]][[분류:조선의 화가]][[분류:사상가]][[분류:혁명가]][[분류:통역사]][[분류:통상 개화론자]][[분류:개화파]][[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서예가]][[분류:조선의 시인]][[분류:조선의 화가]][[분류:박지원 (1737년)]][[분류:유길준]][[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지도 제작자]][[분류:노예제 폐지론자]][[분류:제너럴셔먼호 사건]][[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병사한 사람]][[분류:반남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19세기 한국 사람]]
  • 박서양 (1885년)
         '''박서양'''(朴瑞陽, [[1885년]] [[9월 30일]] ~ [[1940년]] [[12월 15일]] [[서울특별시]])를 [[대한제국]]의 외과 의사, 화학자, 교육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외과 의사, 교육자, [[한국의 독립운동|독립운동가]]이다. 본명은 봉출, 봉주리이다.
         [[한국]] 초기 의사였던 그는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의 진료를 보기도 했다.<ref name="parkeun146">박은배, 《하나님의 호흡》 (새로운사람들, 2009) 146페이지</ref> 독실한 [[장로교]] 신앙인이었던 그는 교회 일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한편 그가 다니던 교회 내에서 [[백정]] 출신인 박성춘과 박서양 부자의 역할이 커지자 양반들과의 갈등으로 교회가 분열되는 어려움을 겪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f name="parkeun146"/>
         그는 대한제국기 조선 초기 외과의사와 화학교사였다.<ref name="parks126"/> 그는 졸업 후 모교에서 해부학을 가르쳤다. 또한 서울 [[승동학교]]의 화학교사로도 출강하였다. 서울 [[승동교회]]에서 설립한 [[승동학교]]에서 화학교사였다. 그는 직접 학생들을 상대로 산소와 수소를 이용한 공개 화학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ref name="jseusa1"/> 그러나 학생들은 박서양이 백정 출신이라는 점을 들어 교사인 그를 무시했다. 학생들이 그의 신분을 문제 삼아 천시한 적이 있다.<ref name="jseusa1"/> 그러자 그는 나는 백정이다 라며 내 신분보다 나의 기술을 볼 것을 호소했다. 그는 "내 속에 있는 오백년 묵은 백정의 피를 보지 말고 과학의 피를 보고 배우라"고 했다고 한다.<ref name="jseusa1"/>
         [[분류:1885년 태어남]][[분류:1940년 죽음]][[분류:외과 의사]][[분류:건국포장 수훈자]][[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조선의 의사]][[분류:간호사]][[분류:한국의 화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의사]][[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전문학교 교수]][[분류:군의관]][[분류:홍범도]][[분류:김성수 (1891년)]][[분류:백정]][[분류:제중원 동문]][[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동아일보]]
  • 박승희 (1901년)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의 고관이었던 [[박정양]]의 셋째 아들이다. 지금의 [[서울특별시|서울]] [[중구 (서울특별시)|중구]] 에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1919년]]에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 박용구 (1879년)
         '''박용구'''(朴容九, [[1879년]] [[음력 7월 12일]] ~ [[1943년]] [[4월 4일]])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다.
         본관은 [[밀양 박씨|밀양]]이며 [[한성부]] 출신이다. [[1898년]]에 [[관립한성일어학교]]를 졸업한 뒤 대한제국 말기에 [[탁지부]] 등에서 관리로 근무했다.
         [[분류:1879년 태어남]][[분류:1943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밀양 박씨]]
  • 박용철
         | 출생지 = [[대한제국]] [[광주광역시]] <br />(現 [[대한민국]] [[광주광역시]] [[광산구]])
         | 국적 = {{국기나라|대한제국}}
  • 박이양
         '''박이양'''(朴彛陽, [[1858년]] [[음력 8월 4일]] ~ [[1925년]] 양력 [[1월 14일]])은 [[대한제국]]의 관료로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본관은 [[반남 박씨|반남]]이다.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25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반남 박씨]]
  • 박정양
         | 군주 = [[대한제국 고종|조선 고종 이형]]
         '''박정양'''(朴定陽, [[1842년]] [[2월 4일]]([[1841년]] [[음력 12월 24일]]) ~ [[1905년]] [[12월 15일]]([[음력 11월 19일]]))은<ref>[http://yoksa.aks.ac.kr/dataFiles/img/book2/8/JE_A_80560/JE_A_80560_001_000011.gif 박정양시장 [朴定陽諡狀]]</ref> [[조선]] 후기의 문신, 외교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대한제국]]의 정치가 겸 외교관이다. 구한말의 온건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김홍집 내각]]에 참여하였다. [[조선]] 시대 첫 주미국 대사이기도 했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1898년]](광무 2년) [[10월]]의 [[만민공동회]]에 참석, 시정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수구당|수구파]]와 위정척사파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양력 11월 [[황국협회]]가 폭력으로 독립협회를 탄압한 사건이 일어나 내각이 경질(更迭)되자 사직서를 올렸지만, 다시 [[대한제국 고종|고종]]에 의해 [[내무부]][[대신 (조선 말기)|대신]]이 되었다.
         [[1904년]] 궁내부특진관과 홍문관 학사(弘文館學士)를 거쳐 [[9월]] 표훈원 총재(表勳院總裁)에 임명되었으며 [[대한제국]] 정부에서 주는 태극훈장(太極勳章)을 수여받았다. 초조함과 긴장이 심해져 번열증(煩熱症)을 앓았으며 과로로 병이 심해져 [[1904년]] [[11월 14일]] 표훈원 총재직을 사퇴하였고, [[1905년]] [[을사늑약]] 당시에는 반대 상소를 올렸다<ref>[http://sillok.history.go.kr/id/kza_14211027_007 고종실록 46권, 고종 42년 11월 27일 양력 7번째기사]</ref>. 그해 [[12월 15일]] (음력 11월 19일) 사망하였다.
         [[대한제국 순종|순종]] 때 문익(文翼)의 시호가 내려졌다.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80년]]대부터 재조명되기 시작하였고, [[1984년]]에는 그의 문집을 한글로 간행한 박정양 전집 5권이 간행되었다.
         대한제국 당시 불편부당한 온건 중립파로서 진보적인 개화사상을 갖고 이상재 등 개화파 인사들의 뒤를 돌보았다.
         [[분류:1841년 태어남]][[분류:1905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과거 급제자]][[분류:온건개화파]][[분류:통역사]][[분류:갑신정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유교 신자]][[분류:조선의 외교관]][[분류:조선의 철학자]][[분류:조선의 사상가]][[분류:한국의 섭정]][[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독립협회]][[분류:서재필]][[분류:윤치호]][[분류:유길준]][[분류:반남 박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박제균 (1887년)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 출신이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전인 [[1909년]]에 경상북도 [[안동군]] 주사가 되어 [[대한제국]] 말기에 관계에 들어섰다.
         [[분류:188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박지원 (1737년)
         그의 문집 《[[연암집]](燕巖集)》은 [[1900년]]에 비로소 초록 형태로 처음 서울에서 공간될 만큼 간행이 늦었다. [[1910년]]에 의정부 좌찬성에 추증되고, 문도의 시호를 받았다.<ref>{{웹 인용 |url= 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hoo/5/2.html |제목= 박지원(朴趾源) |확인날짜= 2008-04-22 |웹사이트= 서울六百年史 |출판사= 서울특별시 |보존url= https://web.archive.org/web/20070928061738/http://seoul600.visitseoul.net/seoul-history/inmul/johoo/5/2.html# |보존날짜= 2007-09-28 |깨진링크= 예 }}</ref> [[1900년]] 김만식(金晩植) 등 23인에 의하여 [[경성부]]에서 처음 그의 문집을 초록한 형태로 간행되었고,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 비로소 그의 저서와 학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사상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평가,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1911년]] [[최남선]](崔南善)이 [[열하일기]](熱河日記)를 간행하였고, [[1916년]] 김택영(金澤榮)이 중국 남통(南通)에서 [[열하일기]]를 7권 3책으로 재편하여 간행하다.
  • 박태원 (1909년)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박현동 (1886년)
          | 사망지 = [[대한제국]] [[광주광역시|전라남도 광산 河南面 長水里]]
          | 직책 = 前 [[대한제국]] [[전라남도]] [[장흥군|장흥군 예하 부군수]]<br/>(前 大韓帝國 全羅南道 長興郡 隸下 副郡守)
          | 군주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조선 고종 이형]]
          | 군복무 = 대한제국 [[최익현]] 항일 의병대
          | 계급 = 대한제국 전라북도 순창의병대 초모장
         '''박현동'''(朴玄東, [[1886년]] [[10월 1일]] ~ [[1962년]] [[1월 20일]])은 [[대한제국]] [[조선]] 황조 [[관료]] 직과 [[의병|항일 의병장]]을 지낸 [[대한민국]]의 [[한국의 독립 운동|항일 독립운동가]]이다.
         전라남도 광주군 에 거주한 이였으며 대한제국 하급 관료 직을 1년 남짓 지내다가 그만두고 충청남도 공주·전라북도 순창 등지에서 후기 의병 운동을 전개한 인물이다.
         === 대한제국 시대 ===
         [[분류:1886년 태어남]][[분류:1962년 죽음]][[분류:광주광역시 출신]][[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조선 의병장]][[분류:한말 의병장]][[분류:건국훈장 애족장 수훈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사회 운동가]][[분류:한국독립당 (1930년)]][[분류:한국독립당의 당원]][[분류:밀양 박씨]][[분류:불교 이탈자]][[분류:환속한 사람]][[분류:개신교도 이탈자]][[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도]][[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타이완에 거주한 대한민국인]]
  • 방산수
         이후 [[선원계보]]와 일부 문헌에서 그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삭제하였으나, [[대한제국]] 멸망 이후 사건이 영화, 연극, 드라마 등의 소재로 알려지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 방준경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서상돈
         [[대한제국]]의 민족 운동가.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
  • 손돌이
          | 거주지 = [[대한제국]] [[전라북도]] [[전주시]] <br/> [[대한제국]] [[경상북도]] [[안동시]] <br/> [[대한제국]] [[경상북도]] [[포항시]] <br/>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안동시]] <br/> [[일제 강점기]] [[경상북도]] [[경주시]]
  • 송병주 (1890년)
         [[한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일본]]에 유학하여 공부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직후인 [[1911년]]에 [[와세다 대학]] 법과를 졸업한 뒤 귀국했다.
  • 순헌황귀비
         |직업 = [[대한제국 고종|고종]] 임금의 [[후궁]]
         |국적 = {{국기|조선}} <br /> {{국기|대한제국}}
         |배우자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조선 고종 황제]]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 [[1854년]] [[2월 2일]]/[[음력 1월 5일]] ~ [[1911년]] [[7월 20일]])는 [[대한제국]] 황제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후궁이다. [[대한제국]] 성립 이후 황비로 책봉되었다. 8세에 입궐하여 [[을미사변]] 직후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시중을 들다 총애를 받아 [[의민태자|영친왕 은]]을 출산하고 이후 상궁에서 귀인으로, 순빈을 거쳐 순비가 되었다가 [[1903년]]에는 황귀비가 된다.
         [[윤효정]]에 의하면 엄귀비의 친정아버지 엄진삼은 종로 육전거리에서 장사를 했다고도 한다.<ref name="ipsisi">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박광희 국역, 다산초당, 2010) 337페이지</ref> 집안이 빈한하였던 그는 나이 8세 때에 궁녀가 되어 입궐하였고, [[경복궁]]의 나인으로 배치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 당시 [[명성황후]]가 실종되자 그는 고종을 지극 정성으로 보필하여 그 공으로 [[지밀상궁]]이 되었다.<ref name="ipsisi"/> 이후 [[명성황후]]의 시위상궁(侍衛尙宮)으로 있었으며, [[명성황후]] 생전인 [[1885년]] 32세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승은을 입었다가 [[명성황후]]에게 발각되면서 궁궐에서 쫓겨났다.
         [[명성황후]]에 의해 대궐에서 쫓겨날 당시 엄귀비는 [[상궁]]직을 박탈당하고 서인이 되게 하였으나 당시 대신 [[윤용선]]이 고종에게 간곡하게 말하여 서인만은 면하게 되었다.<ref name="ipsisi"/> 후에 엄귀비는 윤용선의 은혜를 늘 잊지 않고 있다가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계비를 간택할 때 윤용선의 손녀를 추천하였다.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이후 다시 입궐하여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총애를 받았다. [[아관파천]] 때는 고종을 모시고 [[러시아]] 공사관에서 같이 생활하였으며, [[1897년]] 황자 은(垠, [[의민태자]])을 낳고 이틀 후 정식으로 귀인에 봉작되었다. 이후 순빈, 순비로 차례로 진봉되었고, 나중에는 황귀비로 봉해졌다.
         [[이준용 (1870년)|이준용]]은 [[일본]] 망명 직후부터 엄상궁의 빈 책봉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어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명성황후]]의 빈자리를 대체할 인물로 엄상궁을 택하고 그녀를 황후로 격상시키려 시도한다. 그러나 이를 접한 이준용은 망명 한인들에게 이를 알리며 반대 운동을 준비한다.
         엄상궁과 그의 측근들은 [[대한제국 고종|고종]]에게 이준용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고했고, [[명성황후]]의 암살에 이준용이 개입되었다고 확신하던 고종은 이준용 제거를 결심한다.
         [[대한제국 순종|순종]]에게 아들이 없었고 그가 심하게 병약했다는 점 때문에 엄귀비는 자신의 아들 [[의민태자|황자 은]]을 [[황태자]]로 올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이를 안 [[의친왕]]이 반발하면서 [[의친왕]]과도 갈등하게 된다.
         1907년 [[8월 17일]] [[태황제]]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후사가 없는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황태자로 [[영친왕 이은]]을 결정하였다.<ref>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35</ref><ref>국사편찬위원회, 《고종시대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69) 641</ref> 이는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위협했던 [[이준용 (1870년)|이준용]]과<ref name="ohsy333">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3쪽</ref> 이강을 견제하려는 고종의 의도와 이준용파와 이강파가 득세하면 자신의 실권이 잠식될 것을 우려한 [[이완용]]의 정략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ref name="ohsy334">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4쪽</ref> 이로써 장기간 해외 망명생활 중에 끊임없이 잠재적 왕위계승자로서 대우와 주목과 견제를 받아왔던 [[이준용 (1870년)|이준용]]과 이강은 졸지에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동생이자 [[황태자]]의 숙부라는 지위로 격하되었다.<ref name="ohsy334"/>
         아들 [[의민태자|영친왕]]을 [[대한제국 순종|순종]]의 태자로 만드는 데는 성공하였으나 [[의민태자|영친왕]]은 [[이토 히로부미]]가 자신이 [[황태자]] 사부(師父)라는 명목 하에 [[일본]]으로 인질로 데려갔다. 아들 [[영친왕]]이 [[일본]]의 [[사관학교]]에서 고된 훈련을 받는 도중 점심을 주먹밥으로 먹는 장면을 촬영한 필름을 보게 되었는데, 이를 보고 애통해하다가 먹던 떡이 급체하기도 했다 한다.
         사망 후 [[대한제국 순종|순종]]에게 [[사시]]격인 '순헌'이란 시호를 받았다.
         *** 남편 : [[대한제국 고종|고종황제]]
         * [[대한제국 고종|고종]]
         [[분류:1854년 태어남]][[분류:1911년 죽음]][[분류:조선의 후궁]][[분류:대한제국의 후궁]][[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영월 엄씨]][[분류:운현궁]][[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제 강점기 사람]][[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숙명여자대학교]][[분류:서봉장 수훈자]]
  • 신석린
         '''신석린'''(申錫麟, <small>일본식 이름:</small> 平林麟四朗, [[1865년]] [[1월 9일]] ~ [[1948년]] [[2월 14일]])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1919년]] [[3·1 운동]] 때는 이를 진압, 시위대 해산을 독려하던 단체인 [[자제단]]의 대구지부 창립에 참여했다.
         일본 정치인 [[하야시 곤스케]]와 친밀한 점이 문제가 되어 곤욕을 당했다. 이 때문에 하야시가 공사로 대한제국에 파견되었을 때, [[민영기 (1858년)|민영기]]의 추천으로 [[시종원]]에서 근무하며 일본공사관과 [[대한제국 고종]] 사이를 오가면서 총애를 받았다.<ref>{{서적 인용
         [[분류:1865년 태어남]][[분류:1948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개화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민권운동가]][[분류: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분류:박중양]][[분류:윤치호]][[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평산 신씨]]
  • 신응희
         '''신응희'''(申應熙, [[1858년]]/[[1859년]] [[11월 2일]] ~ [[1928년]] [[2월 12일]])는 [[조선]] 후기·[[대한제국]]의 무신, [[일제 강점기]]의 관료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갑신정변]] 당시 행동대원으로 참여하였다. 본관은 [[평산 신씨|평산]]이다. 다른 이름은 응희(應凞)이다.
         [[1858년]](철종 9년) [[11월 2일]]에 [[신식]](申式)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일설에는 [[11월 5일]]에 태어났다는 설, [[9월]]생 설도 있다. 출생년대에 대해서도 다른 설이 있어 [[1859년]]생 설이 있다. [[대한제국]]의 관원 이력서와 [[조선총독부]] 관원 이력서에는 1858년생 설과 1859년생 설이 모두 수록되어 있다. [[한성부]] 서서(西署) 동영동(東嶺洞) 42통 7호 출신으로, 이후 [[경성부]] 북부(北部) 송현방(松峴防)에서 거주하였다. 어려서 집안의 서당인 가숙에서 [[성리학]]을 배웠다. 소년 시절에 첫 결혼을 하였지만, 첫 부인과 이별한 사연은 알려져있지 않다.
         [[1894년]](고종 30년) [[7월]] 비밀리에 환국, 그해 [[11월]] [[통위영]] [[정령관]](統衛營副領官)에 임명되었다. [[1895년]] [[1월]] [[대한제국]] 육군 [[정위 (관직)|정위]](正尉)가 되어 [[훈련대]](訓練隊)에 배치되었고, [[2월]] [[훈련대]] 제1대대장이 되고 [[육군]][[참령]](陸軍參領)으로 승진하였다. 그해 그는 [[박영효]], [[이규완]], [[정난교]], [[유혁로]] 등과 함께 [[명성황후]] 암살을 기도했으나, [[유길준]]의 밀고로 [[명성황후 암살 미수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다. [[1895년]] [[12월]] [[박영효]], [[오세창]], [[이규완]], [[권동진]], [[우범선]], [[이두황]], [[정난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5년 12월 말 다시 입국했으나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실패로 돌아가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98년]](광무 1년) [[9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의관직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하고, 귀국하지 않았다.
         [[1907년]](광무 10년) [[6월]] [[대한제국]]으로 환국, 바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가, [[대한제국 순종|순종]] 즉위 후 [[육군]][[부령]]에 임명되었다. [[9월 19일]] [[육군]][[부령]]에서 면직되고, [[육군]][[정령]]에 임명되었다가 [[1907년]](융희 1년) [[10월]] 정령으로 예편하고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부찬의(中樞院副贊議)에 임명되었다. [[11월 10일]] 다시 중추원부찬의에 임명되고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서임되었다. 그러나 그해 [[12월 20일]] 의원면직하였다.
         [[분류:1858년 태어남]][[분류:1928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호흡기 질환으로 죽은 사람‎]][[분류:육군 군인]][[분류:급진개화파]][[분류:혁명가]][[분류:한국의 혁명가]][[분류:한국의 장군]][[분류:조선의 무신]][[분류:조선의 군인]][[분류:갑신정변]][[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
  • 신팔균
         | 학력 =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이런 집안에서 자랐기에 신팔균도 자연스럽게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성장하였고,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교, 제2기로 졸업한 뒤 [[1902년]] [[육군]] 참위로 임관했다. [[1904년]] 부위, [[1907년]]에 정위로 진급, 강계진위대(江界鎭衛隊)에 근무하였다.
         [[1907년]] 8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신팔균은 군 복무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향리인 진천군 [[이월면]](梨月面) 노원리(老院里)에서, 이월청년학교(梨月靑年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안희제]], [[서상일]]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 [[대동청년당 (1909년)|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담하면서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경남 동래에서 결성되어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된 대동청년당에는 [[윤세복]], [[김동삼]], [[이원식]](李元植), [[김사용]](金思容), [[윤병호]](尹炳浩) 등 80여 명이 참가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활동을 하였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자 [[만주]]로 망명했고, [[연해주]] 등 여러 곳을 살펴보다가 국내에서 [[신민회]] 회원들이 다수 망명해온 [[서간도]]에서 활동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등 서간도의 핵심 독립 운동 기지에 참여하였고, 대한제국 장교 출신의 경험을 살려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을 양성했다.<ref> 서중석,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역사비평사, 2001) 중 제4장 독립운동의 불꽃, 만주벌판에 타오르다. </ref>
         [[분류:1882년 태어남]][[분류:1824년 죽음]][[분류:작전 중 사망자]][[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건국훈장 독립장 수훈자]][[분류:서로군정서]][[분류:통의부]][[분류:육군무관학교 동문]][[분류:평산 신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
  • 심의면
         ***** 양자 : [[심이택 (1832년)|심이택]](沈履澤) - 이조판서 · 판돈녕부사 · 내무독판 - 증 영의정 심의린(沈宜麟)의 아들(삼남), [[대한제국]] [[공작 (작위)|공작]] 청녕공 [[심순택]](靑寧公 沈舜澤, 영의정 · 의정대신)의 동생
         [[분류:1808년 태어남]][[분류:1865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조선의 학자]][[분류:과거 급제자]][[분류:청송 심씨]][[분류:조선 철종]][[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옥사한 사람]]
  • 안형식 (1888년)
         [[한성부]] 출신으로 [[대한제국]] 말기인 [[1908년]]에 순사가 되면서 경찰계에 입문했다. 한성부 북부경찰서에서 근무하던 중, [[1910년]]에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면서 [[조선총독부]]로 소속을 옮겼다. [[1912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수여받았다.
  • 안회남
         | 출생지 = {{국기|대한제국}} [[한성부]]
         * 아버지: [[안국선]](安國善, [[1878년]] [[12월 5일]] ~ [[1926년]] [[7월 8일]], [[대한제국]] [[조선]] 왕조의 [[신소설]] [[작가]].)
  • 엄주명
         [[1896년]](고종 34년) [[11월 19일]](음력 [[10월 15일]]) [[경성부]] [[서소문]]에서 출생하였다. [[진명여학교]] 초대 이사장이며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대한제국]]의 고위 무관 [[엄준원]]의 아들로, [[순헌황귀비]] 엄씨에게는 조카가 된다.<ref>{{서적 인용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6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참전유공자]][[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일제 강점기의 군인]][[분류:일제 강점기의 활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민원식]][[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55년) 당원]][[분류:민주당 (대한민국, 1963년) 당원]][[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서울대학교 교수]][[분류:대한민국 육군 준장]][[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제2차 세계 대전 관련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참전 군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영월 엄씨]][[분류:병사한 사람]]
  • 엄주익 (1872년)
         '''엄주익'''(嚴柱益, [[1872년]] [[6월 26일]] ~ [[1931년]] [[4월 16일]])은 [[대한제국]]의 교육인, 군인 겸 관료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인으로 호는 춘정(春庭), 본관은 [[영월군|영월]]이다. [[조선 고종|고종]]의 귀비인 [[순헌황귀비]], [[엄준원]]의 7촌 조카가 된다.
         [[대한제국]] 때에 관료생활을 하다가 [[1910년]] [[한일 합방 조약]] 이후로 관직을 사퇴하고 교육 활동에 전념하였다. [[1905년]] [[2월 11일]] [[양정의숙]]과 [[양정여자고등보통학교]]([[양정고등학교 (서울)|양정고]]와 [[양정중학교]]의 전신)을 설립하여 초대 교장이 되고, [[1907년]] [[엄귀비]]로부터 경선궁과 영친왕궁에서 전라남도 무안, 광양과 경기도 이천, 풍덕 각 군(郡)소재 토지(주로 논)총계 약 200만평을 하사받아 교육활동에 투자하였다. [[1913년]] [[2월]]에는 재단법인의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00년]] [[농상공부]](農商工部) 통신사 통신원 전화과(通信司 通信院 電話課)를 역임했으며 [[1901년]] [[내장원]](內藏院) 종목과장(種牧課長), [[1902년]] [[군부 (대한제국)|군부]](軍部) 포공국장(砲工局長), [[한성부판윤]], [[1903년]] [[군부]] [[협판]](協辦), 그해 [[4월]]에 [[보병]][[참령]]이 되었다.
         [[1904년]] [[5월]] [[육군]][[참령]]이 되고 [[일본]]을 방문, 군사제도 관련 시찰을 하고 귀국했다. 그해에 [[법부]](法部) 협판, [[대한제국 육군]] 참장(參將), 군부 협판, 군부대신서리 등을 역임했다. [[1905년]] [[2월]] 서리 교츅총감이 되었다.
         [[분류:1872년 태어남]][[분류:1931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한국의 장군]][[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민원식]][[분류:영월 엄씨]][[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
  • 염창섭 (1890년)
         아버지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초기에 지방 군수를 지낸 [[염규환]]이다.<ref>{{서적 인용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갔다가 이 학교가 폐교되면서 국비 유학생으로 뽑혀 [[1909년]]에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 함께 도일한 동기생으로 [[홍사익]], [[이응준 (군인)|이응준]], [[이청천]], [[신태영 (1891년)|신태영]] 등이 있다.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장교로 임관했다. 일본육사를 졸업하고 [[교토 시|교토]] 16사단 38연대에서 현역으로 복무할 때 동생인 염상섭이 교토에서 중등 교육을 받고 [[게이오 의숙]]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ref>{{서적 인용
         [[분류:1890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일제 강점기의 장교]][[분류:육군 장교]][[분류:염상섭]][[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외교관]][[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만주국 관련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불교 신자]][[분류: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동문]][[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교토 대학 동문]][[분류:파주 염씨]]
  • 오두환 (1883년)
         '''오두환'''(吳斗煥, [[1883년]] [[7월 6일]]([[음력 6월 3일]]) ~ [[1954년]] [[12월 6일]])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관료로 본적은 [[경성부]] 예지동이다.
         [[1902년]] 경기도 공립고등소학교, [[1907년]]에 [[관립한성일어학교]]를 졸업했다. [[1908년]] [[농상공부]] 산림국 임무과 주사로 근무하면서 대한제국 말기에 관리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인 [[1910년]] [[10월 1일]] [[조선총독부]] 고원(雇員, 임시직원)으로 채용되었고 [[1912년]] [[1월 31일]]에는 총독부 경기도 서기로 승진하였다. 1920년 [[인천부]] 서무계 서기, 1921년 인천부 부속(府屬)으로 근무했고 [[1921년]] [[7월 21일]] [[경기도]] 군수(고등관 8등)로 임명되었다.
         [[분류:1883년 태어남]][[분류:1954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해주 오씨]]
  • 오세창
         '''오세창'''(吳世昌, [[1864년]] [[8월 6일]] ~ [[1953년]] [[4월 16일]])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자 계몽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한국]]의 언론인, 독립운동가, 서화가, [[대한민국]]의 정치인, 서화가이다. [[조선]] 말기에는 개화파 정치인이었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는 [[3.1 만세 운동]]에 참여하였으며, 서화와 고미술품 감정 등의 활동도 하였다. [[한국]]의 역대 왕조의 서화가 인명사전인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1928년)의 저자이다. [[1918년]] 설립된 [[조선]]인 미술가, 서예가, 조각가 단체인 [[서화협회]] 창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 대한제국기 활동 ====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일본]] 조정에 계속 사람을 보내 망명객들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일본]]에서는 이를 거절했다.
         [[1902년]]부터 일본에 망명해 있던 중, 천도교 교주 [[손병희]]를 만나 [[손병희]], [[양한묵]](梁漢默) 등의 거듭된 권고로 [[천도교]]에 입교했다. [[1906년]] 천도교 기관지를 겸한 일간지 《[[만세보]] (萬歲報)》 사장으로 계몽 운동을 펼치면서 [[국채보상운동]]을 벌였고, [[1907년]] [[3월]]에는 [[의친왕]]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갔다가 천장절 행사에 참석하지 못하고 그해 [[7월 10일]]에 귀환하였다. [[11월]]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부찬의(中樞院副贊議) [[주임관]]2등(奏任官二等)에 임명되었다.
         [[분류:1864년 태어남]][[분류:1953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역관]][[분류:급진개화파]][[분류:한국의 기자]] <!-- 조선의 기자-->[[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작가]][[분류:대한제국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천도교 교역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서예가]]
  • 완친왕
         '''완친왕'''(完親王, [[1868년]] [[5월 31일]] ~ [[1880년]] [[1월 12일]])은 [[조선]]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자이며 추존 친왕이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서장자로, [[귀인 이씨 (영보당)|영보당 귀인 이씨]] 소생이다. 완화군(完和君)에 봉해졌다. 한때 [[흥선대원군]]은 그를 총애하였으나 일찍 요절하였다.
         [[귀인 이씨 (영보당)|귀인 이씨]]와 [[대한제국 고종|고종]]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서자로, 완화군(完和君)으로 봉해졌다. 어머니 영보당 이씨는 부왕 고종이 즉위하여 입궁한 직후, 궁녀 중 처음으로 연애를 하였던 여성이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가례를 올린 뒤 입궐하면서 경쟁관계가 형성된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아직 [[명성황후]]와 혼인하기 이전에 궁녀 출신이었던 이씨를 총애하고 [[1868년]]에는 영보당 이씨에게서 아들이 태어나자 이를 사이에 두고 두 여인 간에 보이지 않는 치열한 다툼이 전개되었다고 한다.<ref name=dd /> [[흥선대원군]]은 첫 손자인 완화군을 총애하였다. 또한 명성황후가 낳은 아들 둘이 연이어 요절한데다, 두 번째 아기는 항문이 없는 기형아로 [[흥선대원군]]이 준 인삼을 달여 먹였다가 아이가 신열을 일으키다 갑자기 사망하면서, 둘의 관계는 묘하게 흐르게 된다.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완친왕으로 추존되었고, 효헌의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일찍 죽자 대원군은 그의 장남 [[흥친왕]]의 장남 [[이준용 (1870년)|이준용]]에게 기대를 걸게 되었다.
         [[분류:1868년 태어남]][[분류:1880년 죽음]][[분류:조선의 왕자]][[분류:조선의 왕족]][[분류:대한제국의 황자]][[분류:병사한 사람]][[분류:운현궁]][[분류:의문사한 사람]][[분류:유교 신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한제국 고종]][[분류:전주 이씨]]
  • 원용덕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유각경
         유각경은 [[대한제국]] 시절 개화파의 거두였던 [[유길준]]의 조카로, [[유만겸]], [[유억겸]]에게는 사촌 누이가 된다. [[한성부]]에서 일찍 개화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유길준의 동생인 아버지 [[유성준 (1860년)|유성준]]을 따라 기독교에 입문했다. 유성준은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옥중에서 [[성서]]를 읽고 독실한 [[기독교인]]이 된 인물이며, 일제 강점기에 도 참여관과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를 지내 친일파로 분류된다.
  • 유옥겸
         '''유옥겸'''(兪鈺兼, [[1883년]] ~ [[1922년]])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교육자이자 저술가, 역사학자이다. [[보성학교]], [[중앙학교]], [[대성학교]], [[한영서원]] 등의 역사학, 법률 담당 교사로 활동했고 교과서 교재의 부족함을 문제점으로 느끼고 직접 교과서 편집에도 참여했다.
         [[분류:1883년 태어남]][[분류:1922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역사가]][[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역사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교육학자]][[분류:수사학자]][[분류:유길준]][[분류:저술가]][[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병사한 사람]][[분류:사상가]]
  • 유완종
         '''유완종'''(劉玩鍾, [[1877년]] [[음력 11월 21일]] ~ ?)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초기의 관료이다. 본관은 [[청주 유씨|청주]]이다.
         학교 졸업 후 [[1899년]]에 [[양지아문]] 견습생으로 들어가면서 대한제국 시기 동안 관리로 일했다. [[1901년]]에는 모교의 부교관으로 임명되었고, [[1905년]]에 판임관 6등의 [[농상공부]] 기수가 되었다.
         [[분류:187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유진찬
         '''유진찬'''(兪鎭贊, [[1866년]] [[8월 14일]] ~ [[1947년]] [[3월 6일]])은 [[조선]]과 [[대한제국]], [[일제 강점기]]의 유학자이다.
         [[1904년]] [[대한제국]] 외부교섭국장(칙임관 4등)으로 임명되었고 [[1905년]]부터 [[1907년]]까지 [[경상북도]] 상주군수(1905년 10월 10일 ~ 1905년 10월 18일)와 선산군수(1905년 10월 18일 ~ 1906년 4월 10일), [[전라남도]] 영광군수(1906년 8월 2일 ~ 1907년 4월 25일)를 지냈다.
         [[분류:1866년 태어남]][[분류:1947년 죽음]][[분류:조선의 유학자]][[분류:대한제국의 유학자]][[분류:일제 강점기의 유학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기계 유씨]]
  • 윤고려
         '''윤고려'''(尹高麗<ref>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111700099205014&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11-17&officeId=00009&pageNo=5&printNo=5448&publishType=00020</ref>, [[1891년]] [[4월 14일]] ~ [[1913년]] [[12월 28일]])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 사회운동가로 본명은 김고려, 김고라였다. 그는 [[윤치오]]의 [[한국]] 최초의 공개구혼 광고에 응모하여 결혼하였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문신 [[김윤정 (1869년)|김윤정]](金潤晶)의 딸<ref>{{웹 인용 |url=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제목=이경찬의 국사교실 |확인날짜=2010년 10월 22일 |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414022939/http://leekcp.new21.org/zb41/zboard.php?id=rmswjs&no=267 |보존날짜=2016년 4월 14일 |깨진링크=예 }}</ref>로, 윤고려는 본래 성이 김씨였으나 남편을 따라 성을 바꾸었다.<ref>다른 이름으로 윤고라(尹高羅), 김고라(金高羅)라는 이름도 있다.</ref><ref>《뉴스플러스》 (1999.4.1)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s_plus/news177/np177gg030.html 20세기 한국의 풍물 풍속사⑫ 옷 - '미니스커트 단속' 그 때를 아시나요]</ref> 결혼 후 김고라는 남편을 따라 성을 바꿔 ‘윤고라’로 불렸고, 여성교육운동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지만, 20대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ref name="근녀1">[http://newwoman.culturecontent.com/cp0423e/cp0423e0101.asp?pageNum=2&sub=2&depth=2&spageNum=1&ssub=1 근대여성<!-- 봇이 따온 제목 -->]{{깨진 링크|url=http://newwoman.culturecontent.com/cp0423e/cp0423e0101.asp?pageNum=2&sub=2&depth=2&spageNum=1&ssub=1 }}</ref> 독립운동가 겸 정치인 [[윤치호]]의 사촌이며 대한민국 4대 대통령 [[윤보선]]의 큰아버지인 [[윤치오]]의 둘째 부인이다. 의학자 [[윤일선]]의 계모이다. 본관은 [[청도 김씨|청도]]이다.
         [[분류:1891년 태어남]][[분류:1913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육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교사]][[분류:윤치호]][[분류:윤보선]][[분류:청도 김씨]][[분류:병사한 사람]][[분류:서울특별시 출신]]
  • 윤기정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한성부]] 출신으로 보인학교에서 수학했다. 이 학교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해산된 군인들이 집결한 [[보인학회]]가 [[1908년]]에 설립한 애국계몽 계열의 사립 학교이다. 보인학교에 재학하면서 계몽운동에 뜻을 두게 되고, [[임화]]와도 교유하였다.
  • 윤선도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학계에서 그의 문학 작품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이후 그의 작품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이 나타났고, [[1970년]]대에 한글로 번역, 교과서와 각종 문학 작품에 인용, 연구되기 시작했다.
  • 윤영선 (1922년)
         '''윤영선'''(尹暎善, [[1922년]] [[11월 11일]] ~ [[경기도]] [[서울특별시|서울]])은 [[대한민국]]의 의사이자 군인, 참전유공자이다. [[6.25 전쟁]] 당시 육군 군의관으로 전쟁에 참전하였고 제2이동외과병원장을 역임했다. 그는 [[외과]]의사 겸 [[산부인과]]의사였지만 이후 정신과 전문의로도 활동하였다. [[대한제국]] 때 학무국장과 자헌대부를 역임한 [[윤치오]]와 그의 셋째 부인이었던 [[현송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 윤씨|해평]](海平)이다.
         [[대한제국]] 때 학무국장과 자헌대부를 역임한 [[윤치오]]와 그의 셋째 부인이었던 [[현송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 윤오영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국적 = {{국기나라|대한제국}}<br />{{국기나라|일제 강점기}}<br />{{국기나라|대한민국}}
  • 윤치영
         |출생지= 대한제국 [[한성부]] [[종로구]]
         [[윤득실]]은 사후 [[증직]]으로 [[증직|증]] [[이조]][[참의]]와 [[증직|증]] [[의정부시|의정부]][[참찬]]에 거듭 [[추증]]되었다. [[윤득실]]의 셋째아들이자 그의 할아버지였던 [[윤취동]]의 대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관직에 올랐다. 큰아버지 [[윤웅렬]]이 [[무과]]에 급제하고 아버지 [[윤영렬]]이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사촌 형 [[윤치호]]가 다시 [[외무부]], [[학부 (대한제국)|학부]] [[협판]]과 [[한성부판윤]]으로 출세하여 가세를 다시 일으켜 세웠다.
         고 흥분했다.<ref name="안녕 헌법"/> [[유진오]]는 불쾌감을 드러내며 항의했고 윤치영은 틀린말 하지 않았다며 맞받아쳤다. [[대한민국 국회|국회]]는 논쟁이 벌어졌고, 윤치영은 인민이라는 단어를 고집하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국회의원]]들을 공격했다. 그러나 [[인민]]이라는 용어는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되던 용어였다.<ref name="안녕 헌법"/>
  • 윤탁구
         '''윤탁구'''(尹鐸求, [[1932년]] [[6월 15일]] - [[서울특별시]])는 [[대한민국]]의 의사이다. [[대한제국]] [[학부 (대한제국)|학부]] 학무국장과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의관을 지낸 [[윤치오]](尹致旿)의 손자이자 원자력병원장, [[서울대학교]] 총장을 지낸 [[윤일선]](尹日善)의 둘째 아들이다.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당조카이다. 본관은 [[해평]].
  • 윤휴
         그의 저술들은 문집간행을 위하여 하제(夏濟)·경제(景濟) 두 아들이 이미 정리하였으나, 18세기 이후 정치적 적대세력인 서인과 노론계열이 계속 집권함에 따라 햇빛을 보지 못했고, [[갑술환국]] 이후에는 그의 사상과 저서는 모두 금서화되었다. [[대한제국 고종|고종]] 때 윤휴에 대한 복권 건의가 있었으나 [[노론]]의 강력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대한제국 순종|순종]] 때 가서 복권되었지만 [[1910년]](융희 4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언급이 금기시되고 기피되었다. [[1873년]](고종 10)에 가서 [[남인]]에 의해 [[이현일]], 윤휴, [[한효순]], [[목내선]], [[정인홍]], [[정도전]]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신원 상소가 올려졌다. 이에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중암 [[김평묵]](金平黙)은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정도전]], [[이현일]], 윤휴 등을 복권해야 된다는 상소가 계속되자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김평묵]]은 이를 막기 위해 줄기차게 노력하였다.
         [[1910년]](융희 3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그에 대한 연구와 재조명 노력이 이어졌다. [[1927년]] [[경상남도]] [[진주]]의 용강서당(龍江書堂)에서 김대림(金大林)과 윤휴의 8대손 윤신환(尹臣煥)에 의해 처음으로 《백호문집 白湖文集》을 석판본으로 간행하였다. [[1934년]] 8대손 윤신환이 다시 [[백호독서기]](白湖讀書記)를 정리해서 간행하였다. 1974년에 직계 후손 [[윤용진]](尹容鎭)등에 의하여 비밀리에 비전(祕傳)되던 다른 원고들을 모두 망라한 《백호전서(白湖全書)》가 출간되었다.
  • 의친왕
         | 군주 = [[대한제국 고종|고종]]
         | 섭정2 = [[김홍집 (1842년)|김홍집]](1894.06.25.~1894.07.19.)<br />[[이준용 (1870년)|영선군 이준]](1894.07.19.~1894.07.27.)<br/>[[대한제국 순종|왕세자 이척]](1894.08.28.~1894.09.08.)<br/>[[박정양]](1895.06.01.~1895.07.01.)<br/> [[김홍집 (1842년)|김홍집]](1895.12.17.~1896.02.11.) <br/> [[대한제국 순종|왕태자 이척]](1896.07.25.~1896.12.12.)
         | 군주2 = [[대한제국 고종|고종]]
         | 군주3 = [[대한제국 고종|고종]]<br />[[대한제국 순종|순종]]
         | 섭정3 = [[윤용선]](1901.12.19.~1902.01.23.) <br/> [[이근명 (1840년)|이근명]](1904.12.28.~1905.01.15.)<br/>[[대한제국 순종|황태자 이척]](1906.01.01.~1906.01.07.)<br/>[[대한제국 순종|황태자 이척]](1906.02.08.~1906.03.25.)<br/> [[대한제국 순종|황태자 이척]](1906.10.12.~1906.10.20.)<br/>[[대한제국 순종|황태자 이척]](1907.01.21.~1907.07.19.)
         | 작위4 = [[대한제국 순종|순종 황제]] [[대리청정]](純宗 皇帝 代理聽政)
         | 전임자4 = [[대한제국 순종|황태자 이척]] (前 고종 황제 대리청정)
         | 군주4 = [[대한제국 순종|순종]]
         | 군주5 = [[대한제국 고종|대한제국 조선 황조 이태왕 이형]]<br />[[대한제국 순종|대한제국 조선 황조 이왕 이척]]
         | 자녀 = 슬하 12남 9녀<br/><small>(서장남 [[이건 (대한제국 황족)|이건]], 서차남 [[이우]] 외 19인)</small>
         | 왕가 = [[대한제국의 황실|대한제국 황실]]
         | 왕조 = [[대한제국]]
         | 아버지 = [[대한제국 고종|고종]]
         | 친인척 = [[김사준]](장인)<br/>[[대한제국 순종|순종 이척]](이복 형) <br/> [[의민태자|의민태제 영친왕 이은]](이복 남동생) <br/> [[덕혜옹주|덕혜옹주 이덕혜]](이복 누이동생)
         | 웹사이트 = [http://www.icfk.or.kr 사단법인 황실문화재단] <br /> [http://cafe.daum.net/epna 황실 보존 국민 연합회] <br />[http://www.rfo.co.kr/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br/> [http://cafe.daum.net/daehan815/ 대한제국 의친왕 숭모회] <br /> [http://www.sihk.org/ 우리 황실 사랑회 - 001] <br/> [http://srkr.net/ 우리 황실 사랑회 - 002(만료)]
         | 부모 = [[대한제국 고종|고종 이형]](부) <br/> [[귀인 장씨|귀인 덕수 장씨]](생모) <br/> [[명성황후|명성태황후 여흥 민씨]](적모) <br/> [[순헌황귀비|순헌황귀비 영월 엄씨]](서모)
         | 군복무 = [[대한제국 육군]]
         | 계급 = [[대한제국 육군]] [[2성 장군|부장]]
         | 근무= [[대한제국 육군]]
         | 지휘= [[대한제국 육군]] [[2성 장군|장군]]
  • 이건 (대한제국 황족)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이건'''(李鍵, [[1909년]] [[10월 28일]] ~ [[1990년]] [[12월 21일]])는 [[일본]]의 [[일본 제국 육군|육군]] [[군인]]이다.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의친왕|이강]]의 장남으로 [[이왕가]]의 일원이자 [[대한제국 황실]]의 후예이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 첫 이름은 '''용길'''. 의친왕이 1930년에 강제 은거를 당하자 [[왕공족|공위]]를 세습 받아 ‘이건공 전하’로 불렸다.
         대한제국 [[한성부]]에서 태어나 [[1930년]] [[육군사관학교 (일본)|일본 육군사관학교]] 42기생, [[1938년]] [[육군대학교 (일본)|육군대학교]] 51기생으로 졸업하였고, 일본 제국 육군에 입대하여 [[중좌]] 계급에 이르렀다. [[1931년]] [[일본 제국 해군|해군]] [[대좌]] [[마쓰다이라 유타카]](옛 [[다카마쓰 번]]주 [[마쓰다이라 요리토시 (1834년)|마쓰다이라 요리토시]] [[백작]]의 10남)의 장녀이자 [[히로하시 다다미쓰]] 백작의 양녀 [[마쓰다이라 요시코]]([[영친왕]]비 [[이방자]]의 외사촌)와 결혼하였으며, [[1947년]] '''모모야마 겐이치'''({{llang|ja|桃山虔一}})로 개명하고 [[1955년]] 일본에 귀화하였다.
         이건은 [[1909년]]([[융희]] 3년) [[10월 28일]]에 [[한성부]] 중부 관인방 [[사동궁]](寺洞宮)에서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義親王 李堈)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의친왕의 측실 수관당 정씨이다. 초명은 용길(勇吉)이었으나 1924년 3월 17일에 건(鍵)으로 개명하였다.<ref name="족보">{{웹 인용|url=http://221.150.168.65/DLIWEB20/components/searchir/viewer/frame.aspx?type=FILE&cid=102400&rid=26|제목=《이강공계제2세이건공족보》(李堈公系第貳世李鍵公族譜)|저자=이왕직|날짜=1939|확인날짜=2012-06-15|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40313134240/http://221.150.168.65/DLIWEB20/components/searchir/viewer/frame.aspx?type=FILE&cid=102400&rid=26|보존날짜=2014-03-13|깨진링크=예}}</ref>
         1910년 [[한일병합]] 당시 공포된 [[메이지 천황]]의 조서에 따라 고종, [[대한제국 순종|순종]], [[순정효황후]], [[영친왕]], 의친왕, 의친왕비, [[흥친왕]], 흥친왕비 등 총 8명만 [[왕공족]]이라는 새로운 신분을 부여받았고, 나머지 왕실 구성원들은 공식적으로 이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이건의 이복동생 [[이우]](李鍝)가 1917년에 [[이준용 (1870년)|이준용]]의 양자로 들어가 공위를 계승받으면서 동생은 왕공족인데 형은 왕공족이 아닌 상황이 발생하였다.<ref>{{서적 인용|저자=김기훈|제목=일제하 재일 왕공족의 형성배경과 관리체제|연도=2009|출판사=부경대 대학원 학위논문(석사)|쪽=36 ~ 37}}</ref> 이건은 일본 유학 이후 임의적으로 ‘공자’(公子)라는 칭호를 받았고, 1926년에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이 공포되고 난 이후에야 왕공족으로 정식 인정받게 되면서 그때까지 한정된 범위의 왕공족에게만 사용되던 ‘전하’(殿下)의 경칭을 받게되었다.<ref>김기훈, 위의 책, 72쪽.</ref><ref>{{뉴스 인용|제목=왕공궤범 제정과 덕혜옹주, 이건공자에게 전하의 경칭을 사용|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60822u00_01.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26-08-22|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6141545/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260822u00_01.pdf|보존날짜=2016-03-06|깨진링크=예}}</ref>
         1916년 6월에 경성유치원을 졸업하고, 1917년 4월 6일에 일출소학교에 입학하였다.<ref>{{뉴스 인용|제목=총애를 일신에 종하고, 이강공 장자 용길아지기, 지금은 일출학교에 통학 통명하고 활발한 그 천성|url=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170408u00_03.pdf|출판사=매일신보|날짜=1917-04-08|확인날짜=2012-06-16|보존url=https://web.archive.org/web/20160307151338/http://gonews.kinds.or.kr/OLD_NEWS_IMG3/MIN/MIN19170408u00_03.pdf|보존날짜=2016-03-07|깨진링크=예}}</ref> 1921년에 유학 명분으로 일본으로 보내져 [[학교법인 가쿠슈인|학습원]] 초등과에 입학하였고, 1923년 3월에 초등과를 졸업하였다.<ref name="인사여신록">{{서적 인용|언어 =ja|저자=人事興信所|제목=人事興信録 第13版|연도=1941|출판사=人事興信所|url=http://dl.ndl.go.jp/info:ndljp/pid/1070509/53}}</ref> 같은 해 4월에 [[육군유년학교 (일본)|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한일병합 이후 대한제국 황실을 규율하기 위하여 1926년 12월 1일에 일본 황실령 제17호로 제정·공포되었던 《왕공가궤범》(王公家軌範) 제59조에 따르면 왕·왕세자·왕세손·공은 만18세에 달한 후 육군이나 해군 무관으로 임관하여야 하는 의무가 강제되었다.<ref name="왕공">{{웹 인용|url=http://law.go.kr/lsInfoP.do?lsiSeq=67698&chrClsCd=010202#0000|제목=왕공가궤범|저자=조선총독부황실령 제12호|출판사=국가법령정보센터|날짜=1941-07-10}}</ref> 1926년 4월에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2기생으로 예과에 입교하였다. 1926년 4월 26일에 [[대한제국 순종|순종]]이 사망하자 장례식을 집행하는 종척집사(宗戚執事)로 임명되었고,<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904026_008&grp=&aid=&sid=890654&pos=4|제목=후작 윤택영을 총호원으로 임명하고 이해창, 이해승, 이윤용 등을 종척집사에 임명하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6-04-26}}</ref> 5월 10일에 순종의 능을 천릉할 때에도 종척집사로 임명되었다.<ref>{{웹 인용|url=http://sillok.history.go.kr/viewer/viewtype1.jsp?id=kzc_11905010_002&grp=&aid=&sid=0&pos=5|제목=천릉할 때의 수빈원과 종척집사를 임명하다|저자=순종실록부록|출판사=국사편찬위원회|날짜=1926-05-10}}</ref>
         |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7&aid=0000008952|저자=정진석|출판사=주간동아|날짜=2009-11-27|확인날짜=2012-07-22}}</ref>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발간한 [[민족문제연구소]]는 “[[왕공족]]을 포함시킬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는 편찬위원회에서도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논의 끝에 왕공족의 책임이 결코 가볍지 않지만 친일보다는 망국에 대한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묻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다만 기준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친일 행위가 있는 경우에는 수록대상자로 선정하기로 정리되었다”고 해명하였다.<ref>[http://www.minjok.or.kr/userdata/pdf/dicdip.pdf 〈《친일인명사전 편찬》의 쟁점과 의의〉], 조세열, 《역사비평》 91호, 2010년 여름호, 284쪽.</ref> 이와 더불어 “왕공족은 대한제국 황실을 예우하기 위해 일본 정부가 고안한 일본 황족과 일본 [[화족]], [[조선귀족]] 사이의 특수한 지위로 협력에 대한 대가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면서 “공족 중 이재면과 이준용, [[이재곤 (1859년)|이재곤]], [[이해승]], [[이재극]] 등 구체적인 매국행위를 일삼은 인사들은 친일 행적으로 사전에 수록되었으나 영친왕 이은과 이우는 사실상 볼모의 처지였음을 감안하여 제외하였다”고 밝혔다.<ref>조세열, 위의 책, 296쪽.</ref> 이건은 영친왕 이은, 이복동생 이우와 마찬가지로 《친일인명사전》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광복 이후에 모모야마 겐이치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으로 귀화하였다는 점에 대하여 비판 받고 있다.<ref>{{뉴스 인용|제목=〈역사 속의 인물〉 나라 뺏은 적국 신민이 된 조선의 왕족 이건|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316493|출판사=매일신문|저자=정인열|날짜=2013-10-28|확인날짜=2013-11-19}}</ref>
         [[분류:1909년 태어남]][[분류:1990년 죽음]][[분류:사동궁]][[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일본의 왕공족]][[분류:일본 육군사관학교 동문]][[분류:일제 강점기의 장교]][[분류:자동차 수집가]][[분류:전주 이씨]][[분류: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분류:한국계 일본인]][[분류:서울특별시 출신]][[분류:대훈위 국화대수장 수훈자]][[분류:의친왕]][[분류: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수훈자]]
  • 이경희 (1880년)
         '''이경희'''(李慶熙, [[1880년]] [[6월 11일]] ~ [[1949년]] [[12월 4일]])는 [[대한제국]]의 교육자이자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정치인으로, 구한 말 [[신민회]]의 회원이자, [[일제 강점기]] 당시 [[의열단]]과 [[신간회]]의 주요 멤버의 한 사람이다. 해방 후 초대 [[경상북도]] 부지사와 초대 [[대구광역시장|대구부윤]]을 역임했다.
         [[분류:1880년 태어남]][[분류:1949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 <!-- 교육자 -->[[분류:대한제국의 계몽운동가]][[분류:신민회]]
  • 이관용 (황족)
         '''이관용'''(李⿰土灌鎔, 생몰년 미상)은 [[조선]]시대의 왕족이자 [[대한제국]]의 황족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손이자 [[완은군]] [[이재선]]의 양자로, [[인평대군]]파보에 의하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이명응(李明應)의 손자이며 군수(郡守)를 지낸 이재택(李載宅)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군부인 신씨에 의해 입양되었다. 그러나 그는 [[대한제국]]이 멸망하는 시점까지는 왕족으로서의 작위도, 예우도 받지 못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全州)이다.
         양아버지 [[이재선]]은 왕족이었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서자로 계성월의 소생이었다. 이재선은 흥선대원군의 서장자로 [[대한제국 고종|고종]]과 [[흥친왕]]의 서형이었으나 [[1881년]] 대원군이 그의 측근 안기영, 권정호 등을 사주하여 일으킨 [[이재선의 난]]이 실패하면서 처형당했다. 이후 그는 양어머니 군부인 신씨에게 입양되어 양육되었지만, 왕족에게 부여되는 작위도 받지 못하고 어렵게 생활하였다.
         [[1907년]]에는 양아버지 [[이재선]]은 복권되고 완은군에 추증된다. 조선의 왕족들이 왕궁에 출입할때 함께 출입, 문안하는 등의 예우는 지속되었다. 1912년 양궁에 [[이재면|이희]], [[의친왕|이강]], [[이준용]] 등과 출입하였으며, [[1921년]]말에 부상을 당하여, 그해 [[12월 8일]]에는 부상 치료차 [[대한제국 순종|순종]]으로부터 60원을 하사받는다.
         *** 사촌 : [[대한제국 순종|순종]](純宗, [[1874년]] - [[1926년]])
         * [[대한제국 고종|고종]]
         * [[대한제국 순종|순종]]
  • 이광국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북도]] [[안동시]]
  • 이근택(1865)
         [[조선]]과 [[대한제국]] 후기의 군인이자 [[정치가]]. 그리고 [[을사오적]], [[민족 반역자]], [[매국노]]이다.
         본관이 [[전주 이씨]]다. [[성종(조선)|성종]]의 아들인 경명군의 아주 먼 후손으로, 1865년 [[충청북도]] [[충주시|충주]] 출신이며 초명은 근용(根湧)이다. 무신 집안이었지만 출사의 계기는 [[임오군란]] 때 충주로 피신한 [[명성황후 민씨]]에게 싱싱한 [[생선]]을 진상함으로써 눈에 들어 발탁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성 황후가 환궁하면서 벼슬길에 들어섰다. [[1884년]] [[무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입문하였고 병조 참판 등을 역임 한 뒤 [[1897년]] [[대한제국]] 수립 당시 친위 연대 제3대대장으로 정부 전복을 꾀하려다가 발각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분류: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충주시 출신 인물]][[분류:을사오적]] [[분류:1865년 출생]][[분류:1919년 사망]] [[분류:조선의 반란자]]
  • 이병화
         | 출생지 = [[대한제국]] [[경상북도]] [[안동시]]
  • 이인
         이인은 [[1896년]] [[10월 26일]]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부]] 사일동(射一洞)에서 아버지 이종영(李宗榮)과 어머니 연일 정씨 정복희(鄭福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할아버지 이관준은 영남의 명망가이자 [[성리학]]자였고, 삼촌 [[이시영 (1882년)|이시영]]은 독립운동가로 순국하였다. 아버지 이종영은 [[대한제국]] 당시 애국 계몽운동단체인 [[자강회]](自彊會)와 [[대한협회]]의 회원으로 활동하던 계몽운동가였다.
         [[분류:1896년 태어남]][[분류:1979년 죽음]][[분류:대한민국의 반일 감정]][[분류:대한민국의 반공주의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유학자]][[분류:유교 신자]][[분류:일제 강점기의 대학 교수]][[분류:일제 강점기의 법조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조선어학회 사건]][[분류:한국의 군정기]][[분류:대한민국의 한국 전쟁 관련자]][[분류:대한민국의 저술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국민당 (1948년) 당원]][[분류:한국독립당]][[분류:신민당]][[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대한민국의 법무부 장관]][[분류:이승만 정부의 국무위원]][[분류:대한민국 제1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2공화국]][[분류:대한민국 제3공화국]][[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민국 제4공화국]][[분류:이승만| ]][[분류:메이지 대학 동문]][[분류:니혼 대학 동문]][[분류:경주 이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이호성 (대한제국)
         '''이호성'''(李鎬性, [[1842년]]/[[1843년]] - ?)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의 문신, 정치인이다. [[1864년]] [[진사시]]에 합격한 후 [[음서 제도|음서제]]로 출사하여 태자[[시강원]]첨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우봉 이씨|우봉]]이며, 자는 사명(士明)이다. 독립운동가 [[서재필]], [[갑신정변]]에 참여한 [[서재창]]과는 사돈간으로 그의 손녀딸이 [[서재필]], [[서재창]]의 형 [[서재춘]]의 손자며느리였다.
         * [[김재순 (대한제국 문신)|김재순]]
         [[분류:1807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정치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분류:음서]][[분류:과거 급제자]][[분류:서재필]][[분류:우봉 이씨]][[분류:충청북도 출신 인물]]
  • 임방울
          | 출생지 = [[대한제국]] [[광주광역시]]
          | 가족 = 임경학(아버지) <br/> 김씨 부인(어머니)<ref name="ReferenceA">[[판소리]] 명창 [[김창환 (국악인)|김창환]]의 이복 누이동생.</ref> <br /> [[김창환 (국악인)|김창환]](이복 외숙부)<ref name="ReferenceB">국악인이자 명창이며 임방울의 어머니 김씨 부인의 이복 오빠인데 임방울의 친외할머니는 [[김창환 (국악인)|김창환]]의 계모.</ref> <br /> [[이날치]](외가친척 아저씨)<ref name="ReferenceC">이복 외숙부 [[김창환 (국악인)|김창환]]의 이종사촌 형으로 [[이날치]]의 친어머니와 [[박기홍 (명창)|박기홍]]의 친어머니와 [[김창환 (국악인)|김창환]]의 친어머니는 모두 서로 이복 자매.</ref> <br/>[[박기홍 (명창)|박기홍]](외가친척 아저씨)<ref name="ReferenceC">이복 외숙부 [[김창환 (국악인)|김창환]]의 이종사촌 형으로 [[이날치]]의 친어머니와 [[박기홍 (명창)|박기홍]]의 친어머니와 [[김창환 (국악인)|김창환]]의 친어머니는 모두 서로 이복 자매.</ref> <br /> [[한영숙 (1920년)|한영숙]](사돈)<ref>임방울의 사위들 가운데 1명이 [[한국 무용|한국무용가]] [[한영숙 (1920년)|한영숙]]의 친정 7촌 조카.</ref> <br /> 황병렬(사돈)<ref>[[아코디언]] 연주가로 [[한국 무용|한국무용가]] [[한영숙 (1920년)|한영숙]]의 부군.</ref> <br /> [[한성준]](사돈)<ref>[[대한제국|구한말]]의 [[고수 (판소리)|판소리 고수]]이자 [[한국 무용|민속무용가]]로 [[한국 무용|한국무용가]] [[한영숙 (1920년)|한영숙]]의 친정 할아버지.</ref> <br /> [[김완선]](친척 조카손녀)<ref>임방울의 사위들 가운데 1명이 [[가수]] [[김완선]]의 외숙부이자 [[한국 무용|한국무용가]] [[한영숙 (1920년)|한영숙]]의 친정 7촌 조카.</ref>
         * 사돈: [[한성준]](韓成俊)<ref>[[대한제국|구한말]]의 [[고수 (판소리)|판소리 고수]]이자 [[한국 무용|민속무용가]]로 [[한국 무용|한국무용가]] [[한영숙 (1920년)|한영숙]]의 친정 할아버지.</ref>
  • 임창모
          | 사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전라남도]] [[보성군]]
          | 복무 = [[의병|대한제국 의병]]
          | 자녀 = [[임학규 (대한제국)|임학규]](장남)
          | 최종 계급 = 대한제국 조선 전라남도 보성 의병 독립 부대 부대장 대장군
          | 근무 = 대한제국 조선 전라남도 보성 의병대
          | 지휘 = 대한제국 전라남도 보성 의병 독립 부대 부대장
         '''임창모'''(林昌模, ? ~ [[1909년]] [[10월 12일]])는 [[대한제국]] 시기의 의병장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
         [[1909년]] 10월에 호남 지역에서 군과 경찰이 투입되는 대대적인 토벌 작전이 펼쳐졌다. 임창모는 전남 [[해남군]]과 [[강진군]], [[영암군]]에 걸쳐 있는 [[흑석산]]에서 첫째아들 [[임학규 (대한제국)|임학규]]와 함께 있다가 정체가 발각되었고, 병부대는 기습을 받아 전멸하고 임창모도 전사하였다.
         [[분류:생년 미상]][[분류:1909년 죽음]][[분류:나주 임씨]][[분류:대한제국의 군인]][[분류:유교 신자]][[분류:19세기 한국 사람]][[분류:20세기 한국 사람]][[분류:육군 장군]][[분류:한말 의병장]][[분류:화기에 죽은 사람]][[분류:작전 중 사망자]][[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광주광역시 출신]]
  • 장도 (1876년)
         '''장도'''(張燾, 음력 [[1876년]] [[음력 5월 7일|윤 5월 7일]]/양력 1876년 [[6월 28일]] ~ ?)는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법조인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본관은 [[덕수 장씨|덕수]]이다.
         외부 번역관, [[평리원]] 검사, 법부 법률기초위원, [[한성부재판소]] 판사, 법부 참서관, 법관양성소 교관을 지내는 등 대한제국의 관료로도 일했다. [[1906년]] [[법관양성소]] 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저술한 《형법론총칙》은 한국 최초의 형법 교과서이다.
         1908년 문관전고소(文官銓考所) 위원<ref> {{웹 인용 |url= http://db.history.go.kr/url.jsp?ID=jw_1908 |제목= 대한제국 직원록 1908년 (02. 내각 > 문관전고소) |확인날짜=2008-11-18 |형식= |웹사이트=한국사데이터베이스 }} </ref>을 역임하였고, 같은 해 [[변호사]]로 등록했다. 이미 이전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의 분쟁에서 소송을 대리한 일이 있어, 실질적인 의미에서 한국 최초의 변호사로 볼 수 있다. [[조선변호사협회]] 호장을 지냈다.
         [[분류:1876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대한민국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교육인]][[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법조인]] <!-- 1908년 변호사 -->[[분류:대한제국의 학자]] <!-- 형법학자 : 1906년 《형법론총칙》 -->[[분류:대한제국의 저술가]] <!-- 형법학자 : 1906년 《형법론총칙》 -->
  • 장발 (화가)
          | 출생지 = [[대한제국]] [[한성부]]
  • 장헌식
         '''장헌식'''(張憲植, [[1869년]] [[음력 9월 21일]] ~ [[1950년]] 양력 [[8월 20일]])은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제 강점기]] 동안 관료를 지냈다. [[경기도]] [[용인시|용인]] 출신.<ref name="실록친일파">{{서적 인용
         8년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1903년]] [[3월]] 학부의 훈령으로 귀국한 뒤로는 대한제국의 [[궁내부]]에서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4년]] [[8월]] 궁내부 어홍원 주사(宮內府御供院主事), [[10월]] [[궁내부]] 제실제도정리국 비서관(帝室制度整釐局祕書官)을 거쳐 [[1905년]] [[7월 13일]] [[일본]] 시찰 수행원의 한사람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1907년]] [[7월]] [[역대 한성판윤|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부임했다. [[1907년]](광무 10년) [[7월]]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강제로 퇴위하였을 때는 [[훈3등]] [[팔괘장]]을 받았고, 1907년 10월 한성부민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한성부윤]]으로 근무할 때인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살해하자 이토 추도회를 여러 차례 여는 등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전부터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했다.
         [[분류:1869년 태어남]][[분류:1950년 죽음]][[분류:조선 사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군정기]][[분류:대한민국 사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인동 장씨]]
  • 전명운
         |국적= {{국기|조선|1882}}→{{국기나라|대한제국}}→{{국기나라|미국}}
         이곳에서 [[안창호]] 등이 조직한 [[공립협회]] 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1908년]] [[친일파]] [[미국인]]으로 [[대한제국]]의 외부 고문을 맡고 있던 [[더럼 스티븐스|더럼 화이트 스티븐스]]가 귀국하여 [[일본]]의 보호가 한국에게 유익하며 [[한국인]]들도 환영하고 있다는 망언을 늘어놓자, 이 사실에 매우 격분하였다. 스티븐스의 망언은 [[샌프란시스코]] 지역 언론에 보도되었고, 공립협회는 [[대동보국회]]와 공동으로 항의를 위한 4인 대표단을 구성했으나, 스티븐스는 대표들의 항의에도 극언을 계속하다가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있었다.
  • 정재학 (1856년)
         [[1897년]] [[탁지부]] 참서관을 지내고 [[1905년]]과 [[1908년]]에는 경북 [[순흥군]]과 [[개령군]] 군수에 임명되는 등 [[대한제국]]에서 관리를 맡기도 했으나, 이후 [[대구광역시|대구]]와 [[경상북도]]를 대표하는 대자본가로서의 활동이 더욱 두드러진다.
         [[분류:1856년 태어남]][[분류:1940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정치국 (기업인)
         '''정치국'''(丁致國, [[1865년]] [[7월 7일]] ~ [[1924년]] [[10월]])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의 기업인이다.
         [[분류:1865년 태어남]][[분류:1924년 죽음]][[분류:대한제국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부산광역시 출신 인물]]
  • 정칠성
         '''정칠성'''(丁七星, [[1897년]] ~ [[1958년]]?)은 [[대한제국]]의 기녀 출신으로, [[일제 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 운동가, [[페미니스트]], 언론인이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 [[페미니스트]]이다. 별칭은 '''금죽'''(錦竹 또는 琴竹)이다.
  • 정환덕
         '''정환덕'''(鄭煥悳, [[1857년]] ~ [[1944년]])은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이자 [[대한제국]]의 문신, 작가으로 본관은 연일, 휘는 환덕(煥悳), 호는 퇴산(退山)이다. 시종원 부경으로 궁궐에서 15년 동안 재직하면서 궁 안에서 듣고 본 온갖 일들을 저술하여 "[[남가록]](南柯錄, 남가몽)"이라는 책에 남겨 놓았다.
         [[분류:1857년 태어남]][[분류:1944년 죽음]][[분류:조선의 문신]][[분류:조선의 왕족]][[분류:조선의 작가]][[분류:조선의 학자]][[분류:대한제국의 정치인]]
  • 조대연(1888)
         1888년 [[충청도]] 충주목(현 [[충청북도]] [[충주시]])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시절 장영원 전사판임관5등에 임명되었으며, 대동법률전문학교를 졸업했다.
  • 채동선
         채동선은 1901년 [[대한제국]]령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에서 출생하였다. 만석꾼 집안에서 태어난 채동선은 일제강점기 시절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유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복하고 편안하였던 그의 인생은 그가 고등학생이 된 후 변화하기 시작했다. 더 나은 교육을 위해 채동선은 서울로 올라가 현재는 [[경기고등학교]]로 이름이 바뀐 경성제1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도중, [[3.1운동]]이 발생함에 따라 채동선은 만세 운동을 매우 열렬하게 하였고, 이러한 그의 행적은 일본경찰의 감시라는 낙인을 주었다. 3.1절 이후 일본에 회의감을 느끼며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게 된다. 이후 서양 음악에 관심을 갖게 된 채동선은 베를린 음악대학교에서 음악 공부를 계속하였다.
  • 최남선
         [[한성부]] 출생이고 한때 [[철원군 (남)|강원도 철원]]과 [[창원시|경상남도 창원]]에서 잠시 유년기를 보낸 적이 있는 그는 [[대한제국]]의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을 갔으나 중퇴와 복학을 반복하다가 1907년 [[와세다대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 사건으로 퇴학당하고 귀국했다. 1907년 [[이광수]]와 함께 [[소년]]지를 창간했으나 [[한일 합방]] 후 일제의 압력으로 폐간당했고, 1912년 [[이광수]]의 도움으로 《붉은 저고리》, 1913년《아이들 보이》,《새별》등의 잡지을 발간하였으나 [[조선 총독부]]의 '신문지법' 명령으로 모두 강제 폐간되었다. 1914년에는 잡지 《[[청춘 (잡지)|청춘]]》을 발간했으나 1918년 [[일본]]의 압력으로 폐간당했다. 1919년 [[3.1 만세 운동]] 당시 [[민족대표 49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고,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 낭독하였다. [[3.1 운동]]을 사주한 혐의로 투옥되었다가 투옥, 1921년에 석방되었다.
         1902년 경성학당에서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10월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국비 유학생 신분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국비 유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갈 때 국비 유학생 중 중학생반의 소년반장(少年班長)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 해 11월 [[도쿄]] 부립제일중학교에 입학했으나 얼마못가 12월에 중퇴하고 배편으로 귀국했다.
  • 한규복 (1881년)
         '''한규복'''(韓圭復, <small>일본식 이름:</small> 井垣圭復, [[1885년|1881년]] [[7월 7일]] ~ [[1967년]] [[9월 13일]])은 [[대한제국]]의 관료, 통역관, 화가, 서예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관료, 화가, 서예가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도 지냈다. [[일제 강점기]]의 신념형 친일파의 한 사람이었다.
         [[1899년]](광무 2년) 관비장학생으로 [[일본]] 유학, [[동경전문학교]]와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서 수학하다가 [[1903년]] 귀국, 대한제국 관료로 임용되어 [[탁지부]] [[주사]], [[군부]]와 [[탁지부]]의 [[번역관]] 등을 거쳐 탁지부 [[서기관]], [[주임관]]을 역임했다.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 [[한일 합방]] 이후에는 [[조선총독부]] [[고등관]]에 임용되어 [[토지조사국]] 감사담당관, [[1913년]] [[진주군|진주]][[군수]], 이후 [[동래군|동래]][[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충청남도청]] [[참여관]], [[1924년]] [[경상북도청]] [[참여관]], [[1926년]] [[충청북도]][[도지사]], [[황해도]][[도지사]] 등을 역임했다. [[1933년]] [[조선총독부 중추원|중추원]] 참의에 임명되고 이듬해 재선된 뒤 [[중추원]] [[참의]]에 재선되었다.
         그는 어려서 한성에서 신학문인 [[일본어]]와 [[중국어|한어]](漢語), [[영어]]를 공부하다가 [[1893년]] [[3월]] [[을미의숙]](乙未義塾) [[일본어]]학과에 입학, [[1897년]] [[3월]] 을미의숙 일어학과를 마치고 [[관립영어학교]]로 진학하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6일]] 정3품으로 [[중추원 (대한제국)|중추원]] 2등 의관에 선출되었으나 중추원은 곧 해체되었다. [[1899년]](광무 2년) [[3월]]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였다.
         [[1899년]](광무 2년) 초, 그해의 정부 관비유학생으로 뽑혀 [[4월]] [[일본]] [[도쿄]]로 유학, 그해 [[9월]] [[도쿄]] 신전중학교(神田中學校)에 편입학하였다. [[1900년]] [[3월]] [[신전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동경 전문학교를 거쳐 [[1901년]] [[9월 11일]] [[와세다 대학]](早稻田大學)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1903년]](광무 6년) [[7월 15일]] 3학년 재학 중 [[와세다 대학]] 정치경제과를 수료하고 [[7월]] 정부의 명으로 귀국하여, [[대한제국]]의 관리로 근무를 시작했다.
         ==== 대한제국 관료 생활 ====
         [[1903년]] [[대한제국]]의 [[탁지부]] 주사가 되었다. [[1904년]](광무 7년) [[9월 27일]] [[대한제국 국군]] [[참모부]] [[번역관]]보(參謀部飜譯官補)가 되고 [[판임관]] 6등(判任官六等)에 임용되었다. [[1905년]](광무 8년) [[3월 21일]] [[군부]] [[번역관]](飜譯官)으로 승진, [[주임관]] 6등(奏任官六等)이 되었다. 이후 [[군부 (대한제국)|군부]], [[탁지부]] 등 여러 부처에서 번역관 벼슬 등을 지내고 [[탁지부]] 서기관과 주임관을 역임하였다. [[1905년]] [[11월 5일]] [[경기전]]을 건축하는데 참여한 공로로 6품으로 승진하였다. [[1906년]] 탁지부 번역관으로 옮겼다. 그해 [[1월 19일]] [[순릉]]비각영건과 표석 수립에 감독관으로 참여한 공로로 다시 6품에서 정3품으로 [[가자]], 일약 승진하였다.
         {{인용문2|자수 편지<br /><br />천운(天運)이 순환하사 우리 [[대한민국]]이 탄생되니 산천(山川)과 초목이 다시 금빛이 나고 잃었던 자유가 우리 몸에 다시 오니 일반의 환희는 무엇으로 형용하리요. 하물며 일제시대에 허다의 압제를 견디면서 관리생활을 계속한 본인으로서는 더욱더욱 감개무량이외다. 본인은 대한제국시대에 관비유학생으로 일본에 유학하여 조도전 대학早에서 정치경제과를 졸업한 고로 행정관으로 출세하여 민중지도에 노력하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관계(官界)에 투신하여 도지부 서기관으로 재임한 채로 병합을 당하여 임시토지조사국 감사관에 임명되었을 때 본인은 자신처리에 대하여 재삼 고려한 결과 나의 지력과 성력의 한도대로 민중을 지도하는 것이 차라리 유리하다는 견해로 관리생활을 계속하여 [[도지사]]를 역임하고 正4位 勳3등까지 되었으니 가위 고급관리의 지위까지 점진하였다고 하겠으며 30여 년간 관리생활을 하는 중에 민중의 계발을 여하(如何)한 정도로 하였느냐 하면 구체적으로 진술할 재료는 제공치 못하나 다만 양심적으로 민중을 지도하고 또한 민중의 의지를 대표하여 항거할 점은 어디까지든지 항론도 사양치 아니 하였으며 평범한 정치로 민중에 임하고 공정렴근(公正廉謹)으로서 관계일생(官界一生)의 목표로 삼은 것은 천인(天人)이 공인(共認)하는바 옵니다. 그러하니 민중에 대하여 행복이 되고 이익이 된 점을 일일이 수거치는 못하고 다만 장구한 세월의 관리생활을 하였다는 것밖에 남지 않았으며 무엇이라고 변명하오리까. 금일에 지하여는 전일의 양심적으로 민중을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보도, 노력한 점은 무형(無形)으로 돌아가고 다만 관계생활(官界生活)을 하여 일제에 아부한 자로 추인되어 이 점이 기탄불기(慨歎不已)할 뿐더러 관리생활로 일생을 보낸 것이 참회되는 바이며 근신(勤愼)할 뿐이 옵니다. 오직 현명한 당국의 선악을 분별하사 관대한 처분만 바라옵고 감히 소회(所懷)의 일단을 진백(陳白)하나이다.<br><Br>단기 4282년 8월 12일<br />위 인 한규복<br><br>반민행위특별조사위원회 귀중|[[1949년]] [[8월 12일]] 자수 직전에 [[반민특위]]에 보낸 편지}}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을 당시 한규복은 일제 치하에서 관리를 지냈을 뿐 “양심에 비추어 민족정신을 망각한 사실은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관비로 유학을 마치고 대한제국 관리로 일하다가 “한일합병과 동시에 다시 왜인에게 아부하여 조선총독정치에 헌신한 유일한 친일분자”로 평가했다.<ref name="neftkin"/> 당시 그를 심문한 이는 위원장 [[이인]] [[변호사]]였다.
         [[분류:1881년 태어남]][[분류:1967년 죽음]][[분류:조선의 화가]][[분류:대한제국의 관료]][[분류:대한제국의 통역관]][[분류:조선의 번역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일제 강점기의 화가]][[분류:일제 강점기의 기업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정치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사회 운동가]][[분류:일제 강점기의 철학자]][[분류:조선총독부 중추원 간부]][[분류:사상가]][[분류:대한민국의 기업인]][[분류:대한민국의 화가]][[분류:대한민국의 언론인]][[분류:대한민국의 철학자]][[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분류:청주 한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와세다 대학 동문]][[분류:대한민국의 번역가‎]]
  • 한명회
         [[오가작통법]]과 [[면리제]](面里制)를 창시한 인물이며, 그가 만든 행정제도인 [[면리제]]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1948년]] [[대한민국]]정부수립 이후에도 유지되었다. 한말의 [[불교]][[승려]]이자 독립운동가인 만해 [[한용운]]은 그의 친아우인 [[한명진 (1426년)|한명진]]의 후손이었다.
         묘비문은 동문이자 오랜 친구이기도 한 [[서거정]]이 찬하였다. 생전에는 활달하고 호쾌하며 솔직한 성격으로 인정되었으나 [[조선 세조|세조]] 말기부터 공신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등용한 [[김종직]]과 그의 제자인 [[사림파]]들이 [[조선 세조|세조]] 이후 정치계에 본격 진출하면서 그는 '간신'으로 격하되었으며, 그는 가장 '위대했던 간신'으로 평가되었다. [[대한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오래도록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왔다. [[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 이후 그에 대한 전기와 전설, 작품 등이 나오기 시작했으며, 그 뒤 [[1990년]]대에 와서 재평가, 재조명 여론이 나타나게 되었다.
  • 한병주
          | 거주지 = 조선 [[충청북도|충청도]] [[청원군|청원]] <br/> 조선 [[청주시|충청도 청주]] <br/> [[대한제국]] [[한성부]] <br/> 대한제국 [[시흥시|경기도 시흥]] <br/> [[일제 강점기]] [[경성부]] <br/>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신의주시|신의주]] <br/>[[중화민국]] [[장쑤 성]] [[상하이 시|상하이]] <br/>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br/> 대한민국 [[경기도]] [[시흥시|시흥]] <br/> 대한민국 [[경기도]] [[수원시|수원]]
  • 한석명
         [[한성부]] 출신이다. [[관립한성법어학교]]와 독일협회중학교를 졸업하여 신학문을 익힌 뒤 [[대한제국]] 말기에 내부 소속 통역관으로 임용되었다.
         [[분류:1890년 태어남]][[분류:몰년 미상]][[분류:20세기 죽음]][[분류:20세기 한국 사람]][[분류:대한제국의 통역관]][[분류:일제 강점기의 경찰]][[분류:일제 강점기의 관료]][[분류:친일파 708인 명단 수록자]][[분류:친일인명사전 수록자]][[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유교 신자]][[분류:청주 한씨]]
  • 함인섭
         |출생지 = {{국기나라|대한제국}} [[한성부]]
         [[1907년]](광무 10년) [[5월 3일]] [[충청남도]] [[천안군]]에서 함병석과 진주 강씨 강리백가(姜利百加)의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재인이었으나 뒤에 인섭으로 고쳤다. 함병석은 [[대한제국]]시대의 법관이자 [[일제 강점기]] 당시에는 [[장로교]] [[목사]]로 활동했던 [[함태영]]의 본처 밀양 손씨 소생 아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일찍 사망하였다. 형제로는 남동생 함의섭이 있었다.
         함인섭이 태어날 당시 할아버지 [[함태영]]은 [[대한제국]]의 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함태영이 본처 밀양손씨와의 사이에서 장남 함병석을 1889년에 얻었고, 함병석은 다시 1년 연하인 강성흠(姜星欽)의 딸 진주강씨와 결혼하여 그를 얻었다. 친할아버지인 [[함태영]]과는 나이 차이가 34살 밖에 나지 않았기에 비슷한 시대인 [[제1공화국]]에 사회활동을 하였다.
  • 허위
         ||<#ffd700> 사망지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역사관|경성 감옥]] ||
         ||<#ffd700> 국적 ||[[조선]] (1854년 ~ 1897년) [br] [[대한제국]] (1897년 ~ 1908년)||
  • 헌경왕후
         '''헌경왕후 홍씨'''(獻敬王后 洪氏, [[1735년]] [[8월 6일]]([[음력 6월 18일]]) ~ [[1816년]] [[1월 13일]]([[1815년]] [[음력 12월 15일]]))는 [[조선]]시대 후기의 왕세자빈, [[추존]]왕비로, [[대한제국]]의 추존황후이기도 하다. [[조선 영조|영조]]의 차남 [[조선 장조|장조]](莊祖, 사도세자)의 비이자, [[조선 정조|정조]]의 어머니이다. 원래 시호는 헌경혜빈(獻敬惠賓)이었으나,<ref>순조실록 19권, 순조 16년(1816 병자년 / 청 가경 21년) 1월 19일(기해) 1번째기사, "혜경궁 시책문"</ref> [[대한제국 고종|고종]]때 왕후로, 다시 황후로 추존되었다. [[시호]]는 '''효강자희정선휘목유정인철계성헌경왕후'''(孝康慈禧貞宣徽穆裕靖仁哲啓聖獻敬王后)로, 정조가 내린 궁호인 '''혜경궁'''(惠慶宮) 또는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로도 알려져 있다.
         [[1854년]](철종 5년) 유정(裕靖)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99년]](광무 3년) [[8월 3일]]에 경연특진관 서상조(徐相祖)의 상소로 장헌세자를 왕으로 추존할 것을 청하여 [[조선 고종|고종]]이 승인하여 장헌세자가 장종대왕으로 [[추존]]되자, 함께 헌경왕후로 [[추존]]되었고,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903년]](광무 7년) 장조가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격상되자 그녀 역시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로 격상되었다.
         {{조선의 왕후와 대한제국의 황후}}
  • 현정건
          | 군주 = [[대한제국 순종|순종 이척]] (前 [[대한제국]] 군주)
          | 섭정 = [[의친왕|의친왕 이강]] (前 대한제국 대리청정)
         조선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24년([[1887년]])에 [[대구광역시|대구(大邱)]]에서 현경운(玄炅運)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1910년]]에 중국으로 유학, [[상하이 시|상하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의 [[임시의정원|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에서 이규홍(李奎洪) 등과 함께 1919년 9월 17일 경상도 의원으로 보선되었다. [[1920년]]에 상하이 주재 [[고려공산당|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입당하였고 [[1922년]] 10월 20일에 열린 베르프네우딘스크(Verkhneudinsk) 회의<ref group="설명">이동휘의 상하이 고려공산당과 김철훈ㆍ안병찬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의 경쟁을 완화하고 두 세력을 합치기 위해 코민테른에서 그들에게 베르프네우딘스크에서 연합대회를 갖도록 하였다. 여기에는 한인 공산주의 운동 계열의 주요 지도자들이 모두 참석하였는데, 국내에서는 정재달, [[조봉암]] 등도 여기에 참석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대회는 대표의 자격 문제가 제기되면서 파탄나고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은 철수, 코민테른 당국이 각파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조정하려 했으나 이마저 실패하자 결국 코민테른은 양파 모두 해산하고 단일당을 조선 안에 세울 것을 지시함으로써 상하이파도 이르쿠츠크파도 없어지게 된다. 김학준 저 「혁명가들의 항일 회상」 2005, 민음사.</ref>에 윤자영(尹滋英)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상하이파의 일원으로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하이에서 소집된 [[국민대표회의|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는 윤해(尹海)ㆍ신숙(申肅) 등과 더불어 창조파(創造派)에 속하여 왕삼덕(王三德) 등과 참여하였고 2월 5일에 [[여운형|여운형(呂運亨)]]과 더불어 외교분과위원으로 지명되었으나, 창조파가 임시정부를 부정하며 조선공화국(朝鮮共和國) 건국을 결정하고 임시헌법과 국호 등을 제정하자 뜻을 바꾸어 "임시정부는 3ㆍ1운동의 결정인데 출석원(員)의 2/3나 되는 개조안을 무시하고 사신 5인이 퇴석 통고를 하고 불착한 대로 국호를 조선공화국로 정하여 새 국가를 만든 것을 성토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ref>「創造派의 회의 종료」 『동아일보(東亞日報)』 1923년 6월 25일자.</ref> 7월에는 여운형이 조직한 한국독립촉진회에도 가담하는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계파간의 이견 조정에 힘쓰는 등 민족 우선의 독립운동을 위해 활동하였다. 8월에 조선의 관서([[평안도]]) 지방에서 일어난 대홍수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는 상하이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의 상하이교민단(上海僑民團)이 내지동포수재구제회(內地同胞水災求濟會)를 조직해 9월 26일에 수재의연금 110원을 동아일보사에 전달하기도 했는데 <ref>「同胞의 ㅁ愛! 해외각디동포의열렬한동정 가련한수재당한형뎨들에게」 『동아일보』1923년 10월 4일자 기사.</ref> 여기에 현정건의 이름이 실려 있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고려공산당]][[분류:윤치호]][[분류:한국독립당]][[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대한제국 순종]][[분류:이승만]][[분류:김구]][[분류:의친왕]][[분류:윤치영]][[분류:윤보선]][[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현진건
         | 출생지 = {{국기|대한제국}}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군]]<br />(現 {{국기|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중구 (대구광역시)|중구]])
         | 국적 = {{국기나라|대한제국}}
         '''현진건'''(玄鎭健, [[1900년]] [[8월 9일]] ~ [[1943년]] [[4월 25일]])<ref>{{웹 인용|url=http://preview.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25h0979b|제목=현진건|출판사=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확인날짜=2007-11-25}}</ref> 은 [[대한제국]]과 [[일제 강점기]] 조선(朝鮮)의 작가, [[소설|소설가]] 겸 [[언론|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분류:1900년 태어남]][[분류:1943년 죽음]][[분류:병사한 사람]][[분류:대한제국의 사회 운동가]][[분류:이범석 (1900년)]][[분류:박헌영]][[분류:일제 강점기의 소설가]][[분류:대륜고등학교 동문]][[분류:일제 강점기의 언론인]][[분류:일제 강점기의 작가]][[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분류:연주 현씨]][[분류:대구광역시 출신 인물]]
  • 홍성하
         |출생지= [[대한제국]] [[광주광역시]]
  • 효순왕후
         첫 시호는 효순현빈(孝純賢嬪)이었다가 세손 산이 남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되면서 승통세자빈이 되었다. 정조 즉위 후 왕후로 추존되어 정식시호는 '''휘정현숙효순왕후'''(徽貞賢淑孝純王后)이고 [[대한제국]] 수립 이후 황후로 추존되어 '''효순소황후'''이다. 생전의 칭호는 현빈(賢嬪)이었다.
         [[1908년]] [[대한제국]] [[대한제국 순종|순종]] 때 황후로 추존되어 '''효순소황후'''(孝純昭皇后)가 되었다.<ref>《조선왕조실록》 순종 2권, 1년(1908 무신 / 대한 융희(隆熙) 2년) 5월 11일(양력) 1번째기사
         {{조선의 왕후와 대한제국의 황후}}
  • 흥친왕
         |친척 = [[대한제국 고종|고종]] (동생), [[이재선]](이복 형제), [[흥인군]](백부)
         |국적 = [[조선]], [[대한제국]], [[일본 제국]]
         |복무= [[대한제국 육군]]
         |지휘= [[대한제국 육군]]
         |서훈=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br />[[대한제국]] [[대훈위 서성대수장]]<br />[[대한제국]] [[대훈위 이화대수장]]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완흥군(完興君), [[1845년]] [[8월 22일]]([[음력 7월 20일]]) ~ [[1912년]] [[9월 9일]])은 조선 말기의 왕족·군인·정치인이자 [[대한제국]]의 황족·군인으로, [[흥선대원군]]의 적장자(嫡長子)이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친형이며 [[영선군 이준]]의 아버지이다. 대한제국 성립 후 완흥군(完興君)에 책봉되었다가 [[1910년]] 흥친왕(興親王)으로 진봉되었다.
         [[1863년]] 음서로 사용이 되었으며 이듬해 과거에 급제하여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집권기간 중 도승지, 참의, 직제학 등을 지내고,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이 퇴출당하고 고종의 친정 이후에도 이조와 형조,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한때 [[흥선대원군]]으로부터 동생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대안으로 검토되기도 했다. 관직은 [[상보국숭록대부]](上輔國崇祿大夫) 궁내부 대신, 육군 부장에 이르렀다.
         이는 [[조선 철종|철종]] 사망 당시 12세의 미성년자였던 [[대한제국 고종|이명복]]([[흥선대원군]]의 차남)이 성인인 흥친왕보다 조종하기 쉬울 것이라는 [[흥선대원군]]의 계략과 [[신정왕후 조씨|조대비]]의 묵인이 작용한 결과였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의 일부를 포섭할 때, [[김병학]](金炳鶴)의 딸, 혹은 [[김병문 (조선후기)|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인 [[대한제국 고종|명복]]의 배필로 맞이하기로 약속한 바 있다. 이것 역시 재면 보다는 명복을 선택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한때 그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에 의해 큰아버지 [[흥완군]] 이정응의 양자로 보내지는 것이 고려되기도 했다. 그의 흥완군 양자 지정 논란은 [[1864년]] 고종에 의해 취소되어 최종 종결되었다.
         철종 치세기간 중 [[흥선대원군]]은 일부러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김병기 (1818년)|김병기]]에게 아들 이재면의 관직을 청탁하기도 했다. [[윤효정]]은 [[흥선군]]이 [[김병기 (1818년)|김병기]]에게 그의 과거 합격 청탁을 했다 한다. [[흥선군]]은 일부러 김병기를 찾아가 아들 [[이재면]]의 [[문과]] 합격을 청탁했는데, [[김병기 (1818년)|김병기]]는 마음 속으로는 몰지각함과 비열함을 비웃으며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다.<ref name="riss167">윤효정,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167페이지</ref> 흥선군은 똑같이 김병기의 외조카 남병철에게도 똑같이 아들의 등과 합격을 청탁하니, 남병철은 몹시 분개했다. 왕실의 금지옥엽인데, 이렇게 초라해진 형편으로 아들의 등과를 청탁하니 이렇게 어리석을 데가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었다.<ref name="riss167"/> 그런데 [[박제형]]의 [[근세조선정감]]에는 흥선군을 대놓고 멸시하던 인물의 한 사람으로 남병철을 지목했다.
         [[1863년]] [[12월]] 동생 [[대한제국 고종|재황]]이 후사없이 죽은 [[조선 철종|철종]]의 뒤를 이어 [[조선]] 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바로 승후관부사용(承候官付司勇)에 제수되었다. [[1864년]](고종 1년) [[5월]] [[문과]]에 급제하여 그날로 규장각 대교(待敎)에 임명되었고, 여러 고위 관직을 거쳤다. 그해 [[8월]]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다시 그를 아들 없이 죽은 형 [[흥완군]]의 양자로 보냈다. 그러나 대왕대비 조씨의 특명으로 다른 종친의 자제를 [[흥완군]]의 양자로 하도록 하고, 이재면의 양자 입양은 취소되었다.
         ==== 대한제국 수립 이후 ====
         [[1902년]] [[일본]]에 망명중인 장남 [[이준용]]으로부터 생활비 지원요청을 받자 그는 임정규를 통해 충분하지 못한 액수의 생활비를 지원하였다.<ref>오영섭 《한국 근현대사를 수놓은 인물들(1)》(오영섭 저, 한영희 발행, 2007.4, 경인문화사) 331p</ref> [[1907년]]까지 이재면은 별다른 관직도 직업도 없이 생계가 곤란하였다. 하지만 이준용은 망명지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자신을 보호하지 못한 아버지 이재면을 내심 원망하고 있었다. [[일본]]은 이재면에게 생활비를 지급하여 왕족으로 예우함과 동시에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1907년 그는 동생 고종으로부터 대훈이화장(大勳李花章), 서성장(瑞星章)을 받았고, [[1907년]] [[11월 27일]] [[대한제국]] [[육군]] 부장(副將)에 임명됐다. 이어 일본에 보내는 특별보빙사절단에 임명되고, 아들 [[이준용]]은 육군 참장에 임명되어 수행원이 되었다. 그해 11월 보빙사절단 과 수행원 [[이준용]], [[이달용]] 등을 대동하고 [[일본]] [[도쿄]]에 다녀왔다.
         운현궁의 이로당에서 거주하다가 [[1912년]] [[9월]] 병세가 위독해졌고 순종은 전의(典醫)를 그의 집에 보내 왕진(往診)을 시켰다. 덕수궁(德壽宮)에서도 이태왕 고종은 자신의 어의(御醫)를 보내 흥친왕을 진료하게 했다. 그러나 병세는 심해져 [[1912년]] 양력 [[9월 9일]]에 67세를 일기로 [[운현궁]] 정침에서 병으로 병사하였다. 어느 병환으로 사망했는가 여부는 알려져있지 않다. 그가 죽으면서 그의 [[공작 (작위)|공작]]의 지위는 아들 [[이준용]]이 상속하였다. 소생으로 영선군 [[이준용]], [[이문용 (왕족)|이문용]]과 딸 1명을 두었다. 흥친왕이 죽자 [[대한제국 고종|고종]]은 친히 그의 빈소에 가서 상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
         [[2006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조사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1910년 8월 22일 한일 합병 조약 체결에 관한 회의에서 대한제국 황족 대표로 참석해 조약 체결에 동의하는 데 가담<ref name="nata1">http://news.nate.com/view/20091005n08047</ref><ref name="dd1">http://news.nate.com/view/20091005n08088</ref><ref name="gadam1">http://www.ytn.co.kr/_ln/0103_200910051412251653</ref> 했다는 것이 그가 친일파로 지목된 이유였다. 그러나 흥친왕의 친일 행적이나 은사금 수령이 일제에 의한 회유책이지 흥친왕의 자발적인 행적은 아니라는 이견이 제기되어 왔다.
         * [[1907년]] [[대한제국]] [[대훈위 이화대수장]](大勳位李花大綬章)
         * [[1907년]] [[대한제국]] [[대훈위 서성대수장]](大勳位瑞星大綬章)
         * [[1909년]] [[대한제국]] [[대훈위 금척대수장]](大勳位金尺大綬章)
         * 동생 : [[대한제국 고종|고종]](高宗, [[1852년]] ~ [[1919년]])
         한때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그를 추대하고 섭정이 될 계획을 세웠지만, 그의 우유부단한 성격과 호인적인 성격만큼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뒤에 아들 [[이준용|영선군 준]]이 동생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대안자로 지목되면서 [[이준용]]과 [[대한제국 고종|고종]]의 사이에서 방관자로 남았다.
         * [[대한제국 고종|고종]]
  • 희빈 장씨
         [[1701년]] 이후 [[노론]]에 의해 질투의 화신, 투기의 화신 또는 악의 화신으로 평가되어 왔으나, [[1910년]](융희 3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 [[인현왕후]]와의 애증관계의 희생양으로 현대에 와서는 사료의 다양성과 새로운 시각의 해석으로 [[남인]]과 [[서인]]의 권력다툼의 희생양 또는 [[남인]]이 미는 비빈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조선의 후비와 대한제국의 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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