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남연군"을(를) 전체 찾아보기

남연군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흥인군 . . . . 10회 일치
         |아버지= [[남연군]]
         |부모= 아버지 [[남연군]](宣祖) <br /> 어머니 군부인 여흥민씨
         '''이최응'''(李最應, [[1815년]] [[2월 17일]] ~ [[1882년]] [[6월 1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 정치인으로, 자는 양백(良伯), 호는 산향(山響), 군호는 흥인군(興寅君)이다. [[남연군]] 이구와 여흥군부인 여흥 민씨의 셋째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바로 윗 형이었다. 자는 양백(良伯)이고 호는 산향(山響), 시호는 효헌(孝憲) 또는 충익(忠翼), 문충(文忠)이었다. 본관은 [[전주 이씨|전주]]이다.
         [[1815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숙종 때의 정승 [[남연군]] 이구와 [[민정중]]의 4대손 [[선공감]]가[[감역]] 민경혁의 딸 군부인 여흥민씨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품은 신도비명에 의하면 말수 적고, 좋고 싫음을 내색하지 않는 성품이라 한다. [[홍순목]]이 쓴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격은 '사람의 허물을 보면 반드시 덮어주고 또한 사랑하고 미워함을 말하지 않'는 성격이라 한다. 그는 [[흥녕군]]과 [[흥완군]]의 동생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었으나, 그는 일찍부터 바로 아랫 동생 이하응에게 번번히 무시당했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 여흥민씨와 아버지 남연군, 두 형이 일찍 사망했지만 동생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매천 [[황현]]에 의하면 그가 무식하면서 욕심이 많아서 그랬다 한다.
         [[1829년]](순조 29년) [[1월 1일]] 흥인부정(興寅副正)이 되고 [[1830년]] [[5월 6일]] [[명선대부]]로 승진한 뒤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진봉되고, 다시 군으로 진봉된 뒤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 이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형인 [[흥녕군]]보다 작위가 높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형 흥녕군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그해 [[10월 20일]] 소의대부로 승진하고, 군의 품계를 받았다. [[1834년]](순조 34년) [[11월]] [[순조]]가 죽자 그의 능침 조성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였다. 헌종 즉위 후 [[1835년]] 연주 도감(練主都監) 수릉관에 임명되었으며, 남연군의 3년 상을 마친 후 헌종 연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 즉위 후, [[1863년]] [[12월]] 판[[종정경]]부사에 임명되고, [[조선 철종|철종]]의 빈전에 종척집사(宗戚執事)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사망 1개월 뒤 일단 [[한성부]] [[용산방]]에 가매장 후 난이 진압되길 기다렸다가 [[충청남도]] [[대흥면|대흥군]](현 예산군 대흥면) 우정리 신좌원에 안치됐다. 그 후 [[예산군]] [[덕산면 (예산군)|덕산면]] 상가리의 아버지 [[남연군]] 묘소 아래로 이장됐는데 신도비문은 [[영의정]] [[홍순목]]이 짓고 글씨는 흥인군의 조카인 판종정경부사 [[이재원 (1831년)|이재원]]이 썼다. 현재는 후손들이 다른 곳으로 이장한 상태다.
         * 양조부: [[은신군]] 이진(恩信君 李禛, [[1755년]] [[음력 1월 11일]] ~ [[1771년]] [[음력 3월 29일]]) - 아버지 [[남연군]]의 양부
         **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1788년]] [[8월 22일]] ~ [[1836년]] [[3월 19일]])
         * [[남연군]]
  • 흥친왕 . . . . 1회 일치
         * 할아버지 : [[남연군]]([[1788년]] ~ [[1836년]])
12944의 페이지중에 2개가 발견되었습니다 (5000개의 페이지가 검색됨)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