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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산군 (왕족)
         조선전기의 왕족으로 본관은 전주이씨(全州李氏), 휘는 혜(譿)이다. 태종의 손자이며, 세종, [[효령대군 이보]], [[성녕대군 이종]]의 친 조카이다. 아버지는 [[양녕대군]] 이제(讓寧大君 李褆)이고, 어머니는 광산 김씨(光山金氏)로 [[증직|증]] 좌의정 광산군 [[김한로]](光山君 金漢老)의 딸로 [[수성부부인]](隨城府夫人 金氏)이다. 부인은 안산김씨(安山金氏) 안산군 [[김개]](安山君 金漑)의 딸로 양천군부인 김씨(陽川郡夫人 金氏)이다.
         * 외할아버지 [[김한로]](金漢老, 광산군(光山君), [[1358년]] - ?년)
         * [[김한로]]
  • 양녕대군
         |친인척 = [[효령대군]](동복 아우) <br /> [[조선 세종|세종대왕]](동복 아우) <br /> [[조선 태조|태조 이단]](할아버지) <br /> [[완풍대군|완풍대군 이원계]](큰할아버지) <br />[[진안대군|진안대군 이방우]](큰아버지) <br /> [[조선 정종|정종 이경]](큰아버지) <br /> [[김한로]](장인)
         평소 시를 잘 짓고, 그림을 잘 그렸으나 작품들은 대부분 인멸되거나 실전되었다. 일설에는 [[왕세자]] 자리를 양보한 것은 그의 본심이었다는 설과 본심이 아니었다는 설이 양립하고 있다. [[증직|증]](贈) [[의정부시|의정부]][[좌의정]]에 증직된 광산 김씨 [[김한로]](金漢老)의 딸이자 본처인 수성군부인 김씨 사이에서 3남 5녀를 두었으며, 첩에게서 7남 12녀를 낳았다.
         [[1407년]](태종 7년) 14세에 [[광산 김씨]] [[김한로]]의 딸과 혼인하였다. [[김한로]]는 권세에는 관심이 없었으나 사위인 그가 폐위된 것을 전후하여 한때 유배당하기도 했다. [[1407년]]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사망하고 [[조선 태종|태종]]은 외척 제거 목적으로 [[민무구 형제의 옥사]]를 계획한다. 양녕은 이들 두 외삼촌이 억울한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도 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을까 겁을 먹고 외숙인 민무구 형제가 태종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도 외면하였다. [[1409년]]부터 부왕 태종이 정사를 보지 않을 때 정치에 참여했고, 명나라 사신 접대와 강무시솔행(講武時率行) 등 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 정부인 : [[수성부부인]] 광산김씨(隨城府夫人 光山金氏) - 광산군(光山君) 김한로(金漢老)의 딸
         * [[김한로]]
  • 장평도정
         * [[김한로]]
  • 조선 세종
         [[1418년]]에 [[조선 태종|태종]]이 신하들과의 회의<ref>[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State=2&mTree=0&clsName=&searchType=a&query_ime=%ED%9B%88%EB%AF%BC%EC%A0%95%EC%9D%8C&keyword=%ED%9B%88%EB%AF%BC%EC%A0%95%EC%9D%8C "훈민정음" 검색 결과,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ref> 에서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라고 하며 김한로와 연관되는 등의 심각한 비행으로 인해<ref>한쪽에서는 이제가 일부러 비행을 해서 세종에게 왕위가 가게 했다고 주장하나, 다른 한쪽에서는 세종대왕이 즉위한 뒤에도 여전히 비행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이덕일외 공저/김영사.</ref> 왕세자에서 폐위되고 충녕대군의 학문과 자질이 높이 평가되어 [[황희]] 등 일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이 해 6월 22살의 그를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하고, 이제를 [[양녕대군]](讓寧大君)으로 강봉(降封)하였다.<ref name="aks" /> 부왕이 왕세자를 폐위할 것을 예감한 [[효령대군]]은 세자 자리를 기대하였으나, 이제는 충녕대군에게 세자 자리가 갈 것이니 포기하라고 하였다.
         한편 그가 즉위한 직후부터 삼촌 [[회안대군]] 처형과 사촌형 [[의령군 (조선)|의령군]] 이맹종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계속 올라왔다. [[1422년]]에는 의령군 이맹종을 [[홍주]]에서 [[여주]]로 옮겼다가 이맹종 집안의 재산을 회안대군의 딸들에게 나눠주었고, 1422년 4월 [[사헌부]][[대사헌]] [[성엄]] 등은 [[이숙번]], [[양녕대군]], [[김한로]], 의령군 이맹종 등의 처벌을 상소하였다. 이후 계속 의령군을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올려져 결국 [[1423년]](세종 5) 세종은 의령군에게 [[자진]]을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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