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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병철(야구인)
         1994~1998년 [[한화 이글스]] 감독을 역임했다. 5년간 포스트시즌에 두 차례 진출하였고, 1998년 올스타 브레이크 중 성적부진을 이유로 경질되었다. 이시기 전임 [[김영덕]] 감독 시절에 팽배했다고 하는 특정 학교의 파벌[* 한화는 전통적으로 [[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천안북일고]]가 지배하는 구단이다(라고 알려져 있다.). 코치진, 선수단 도처에 [[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천안북일고]] 출신들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매년 신인지명때면 실력은 무시하고 일단 [[천안 북일고등학교 야구부|천안북일고]]를 배려하는데 탓에 한화팬들은 자기네 2군보다 천안북일고를 더 중시한다며 구단을 깐다. 다만 이 북일파 VS 비북일파의 실체 자체를 의문시하는 시각도 있으니 해석은 알아서.]을 혐오하여 신인 선수들을 중용했으나, 문제는 해당 파벌을 너무 혐오한 탓에 오히려 가용 자원을 한정시켰고[* 이 시기에 한용덕과의 불화를 빚기도 했다.], 특히 투수 운용에서 [[구대성]]을 과하게 혹사시켜 구원 투수이면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독식('''18승 3패 24세이브'''!!)하는 다시 있어서는 안 될 기록을 세웠다.[* 2001년에 [[김성근]] 감독도 [[신윤호]]를 굴려서 다승왕과 구원왕을 독식한적이 있었다. 참고로 구원투수 20승(김현욱)도 김성근의 작품이다.] 거기다 통산 성적 자체도 김영덕 감독 때에 비해 영 좋지 않은 편이라[* 김영덕 감독 시절 승률 .572, 강병철 감독 시절 .447] (1992년 한국시리즈의 기억을 빼더라도)강병철을 싫어하는 한화팬들도 상당히 존재한다.[* 그래도 한화 이글스로 이름이 바뀌고 난 후 단일시즌 70승 이상을 거둔 감독은 1996년의 강병철(70승, 승률 .560)과 1999년의 [[이희수(야구인)|이희수]](72승, 승률 .554) 둘 뿐이고 승률은 팀명 변경 후 최고였다. [[구대성|물론 또 투수를 깎아 만들었지만...]]] 그나마 이전의 이글스는 해태 빼면 최강 소리를 들었고 당시 한국프로야구 자체에 투수 관리에 대한 개념이 전반적으로 덜 잡힌 시절이라 김인식 감독 시절[* 이쪽은 부임 전 이광환과 유승안을 거치면서 팀이 전반적으로 나사가 빠져있던 상태였다.]처럼 팀의 기반을 완전히 붕괴시키는 사태[* 안영명, 윤규진, 정병희 등이 이 시기에 굴려졌다.]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2006년~2007년에 또 롯데 감독을 맡았다. 전임인 양상문에 대한 롯데팬들의 여론이 썩 좋지만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후임이 강병철이 될 것이라고는 상상치도 못했기 때문에 강병철의 재부임 소식에 대해 대부분의 롯데팬들이 통수를 맞은 듯한 분위기였다. '''KBO 리그 역사상 한 팀에서 세 번이나 감독직을 맡은 것은 지금 현재까지도 강병철이 전무후무한 사례이다.''' 그러나 계약기간인 2년동안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며 결국 자신의 감독경력의 마지막을 좋지 못하게 끝내고 말았다. 이 당시 팬들이 납득할 수 없는 작전을 남발했는데 안타 치면 닥치고 번트, [[플래툰(야구)|좌완투수엔 닥치고 우타자]], 좌타자엔 닥치고 좌완, [[원 포인트 릴리프]]라는 너무나 뻔한 작전 때문에 사토라레를 패러디한 '강토라레'라 불리며 '[[이순철|강병Fe]][* 팀의 병폐(病弊)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 '강노망', '강노인' 등 수도 없이 많은 별명으로 까인다. 특별히 강병철의 플래툰 작전은 '병페툰'이라고 불리며 작전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낮은 성공률로 까인다. 불필요한 작전의 남발로 07시즌을 망쳤다고는 하지만 [[제리 로이스터|로이스터]] 감독의 08시즌에서도 가끔에야 나오는 작전마저도 선수들이 수행을 못해내는 걸 보면 비단 감독만의 탓은 아닌 걸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강병철 감독의 07시즌을 옹호하기는 힘들다. 프로는 성적이니까. 하지만 이 당시에 감독이 구단내 정치싸움에서 밀렸으며[* 부산상고 출신으로 롯데를 휘어잡고 있는 [[부산고등학교 야구부|부산고]], [[경남고등학교 야구부|경남고]], [[용마고등학교 야구부|용마고]] 학벌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언론플레이나 줄타기에 목숨건 보신주의자도 아니다.] 선수단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돌고있다. [[정수근|모 선수]] ~~한때 1년간 놀았던 그 분~~는 대놓고 감독을 욕하고 다녔을 정도라고 한다.[* 07시즌에 덕아웃에 걸린 칠판에 "강감독, 야구 대범하게 합시다"라고 [[정수근]]이 적어놓은 일이 있으며 [[손민한]]은 팬미팅에 나가서 감독 욕을 하고 돌아다녔다. 참고로 정수근은 강병철을 계속 욕하다가 은사인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에게 지적받은 적도 있다.] 전임 양상문이 재계약에 실패한 결정적인 이유가 고참 선수들을 무리하게 내치는 과정에서 팀 케미의 붕괴와 더불어 선수단 장악에 실패했다는 것이었는데, 구단에서는 이를 감안해 강병철을 후임으로 낙점했으나 이전까지 해왔던 방식이 먹히지 않아 역시나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부분은 아쉬운 부분이다.
         감독 통산 900승의 위업을 달성한 다섯 명의 감독중 하나지만[* 2014 시즌 종료 후를 기준으로 1위는 [[김응용]] 감독의 1,567승, 2위가 [[김성근]] 감독의 1,234승, 3위가 [[김인식]]감독의 980승, 4위가 [[김재박]]감독의 936승, 그리고 강병철 감독이 914승으로 5위다.] 김응용, 김성근 감독의 승률이 5할을 넘기는 반면 강병철 감독의 승률은 4할 7푼. 승률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다.[* 특히 한화 이글스의 경우 .447로 대충 봐도 영 좋지 않은데 결정적으로 이전의 승률과(.530, 참고로 창단 첫해 배성서 시절의 승률이 .290이다.) 김영덕 감독 시절 비교하면(.572) 더욱 처참해진다. 특히 저때의 이글스는 해태만 아니었으면 리그를 지배할 잠재력이 충분했었다.(1992년 이전까지 준우승 3번이 전부 해태 상대) 특히 1992년에는 압도적인 1등을 차지하는 등 드디어 우리도 우승한다는 등 분위기가 절정에 달했는데 하필 그때 김영덕 감독과 불화를 일으키고 나간 입장으로서 찬물을 끼얹은 것도 모자라 정작 후임감독으로 부임해서는 성적을 내지 못했으니 그야말로 이글스 팬들에게 불쾌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2006~7년에 소소하게 돌려받긴 했다.~~]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이승호(1981)|이승호]]와 [[페르난도 에르난데스]]가 유명하다. 이전까지의 상황은 '그 시절엔 그럴 수 밖에 없었지..'로 어떻게 쉴드를 칠 수 있다지만, SK 시절은 '''2000년대'''이다. 이미 혹사에 대한 평가가 매우 좋지 않아진 시절이 되었는데, 꿋꿋하게 혹사를 시켰다는 것.[* 참고로 2000년대 이후 한 시즌 200이닝 투구를 시킨 감독은 강병철, [[김응용]], [[김인식]], [[이광환]], [[김성한]], [[김경문]], [[김기태(1969)|김기태]], [[이종운]]인데 하나같이 소속팀과 끝이 영 좋지 않았거나 말년 커리어가 영 좋지 않았다는 특징이 있다. ~~'돌'이나 '킬' 같은 접두어 별명이 있다는 것도 공통된 특징이다.~~ ~~김기태는 특이하게 '런'이라는 접두어 별명이 있다.~~ ~~아니 그런데 KBO에서 소속팀과 끝도 좋고 말년 커리어도 좋은 감독이 얼마나 되지~~]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야구에서 마무리투수가 규정이닝을 넘기거나 거의 육박하는 경우는 다른 감독들도 마찬가지였지만, 강병철의 경우 단순히 마무리투수에게 이닝을 많이 맡기는 차원이 아니라 시즌중에 보직을 계속 바꾸면서 선발에게 마무리 알바를 시키거나 마무리를 선발로 돌리는 식의 무차별한 기용을 자주 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90년대 초에 [[김성근]]이 삼성에서 [[김성길]]을 써먹었던 방식이나 [[김인식]]이 쌍방울에서 [[조규제]]를 써먹었던 방식을 강병철은 무려 2000년대 초까지 고수했다.''' ~~역시 [[방망이 깎던 노인|투수 깎던 노인]]...~~ 논외로 김성근은 나중에 자신의 방식으로 2000년대 후반 SK 왕조라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고 이것 때문에 [[살려조|여전히]] [[김성근/2015년|그 방식을]] [[김성근/2016년|못 고치고 있다.]]
  • 공필성
         총평을 하자면 1995년 한 해 동안 스물 두 번이나 공에 맞으며 세웠던 신기록[* 1982년 [[김인식]]의 18개 기록을 갈아 치웠다가, 1999년 31개를 맞은 [[박종호]]에 의해 깨졌다.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 타격을 하는 버릇 때문에 당시 사구를 가장 많이 맞는 선수였다. 1995년엔 22개의 사구를 맞아 시즌 역대 최다 사구 기록을 경신했을 정도.] 정도가 자신의 커리어에서 자랑거리가 될까, 통산 0.248에 41홈런, 119실책은 평범한 선에서도 빠지는 기록이다. 그럼에도 그가 선수생활을 10년 정도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유리몸과는 거리가 멀었고 '''근성'''이라 할 정도로 그라운드에선 열정적이었기 때문. 그래서 선수 생활 후반에도 빠진 다른 선수들의 공백을 어느정도 메꿔주기엔 제격이었다. 물론 [[박현승]]이 나오기 전까진 별다른 3루수가 없었던 이유도 있지만...
         '''그러나''' 초반에는 실책 수가 많았지만 후반기로 가면 갈수록 두산의 수비는 안정되고 9월 현재 두산의 팀 실책 순위는 8위이다. 시즌을 다 치룬 뒤에는 9위, 즉 최소 2위로 끝냈다. 시즌 초 수비진이 단체로 삽질했던 건 대체적으로 당해 시즌 직전 [[김인식호/2017년|WBC]] 때 두산 선수들이 너무 많이 끌려나가는 바람에 주전 선수들이 스프링캠프 기간에 수비 합을 맞춰보지 못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는 이유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 김상진(1970)
          * [[1995년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한국시리즈에서도 김상진은 [[권명철]]과 함께 에이스였다. 그러나 에이스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했다는게 대체적인 평이다. 7차전 선발이었지만, 프로 입단부터 약점인 번트 수비가 발목을 잡았다. 7회초에 번트 후 1루 송구 에러하는 모습을 보이는등 그렇게 좋은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다. 결국 그 경기에서 [[김인식]] 감독이 투수를 [[권명철]]로 바꾼 이유도 가끔 나오던 번트 수비 후 악송구 우려 때문이었다.
  • 김인식 (1953년)
         |선수명 = 김인식
         '''김인식'''(金仁植, [[1953년]] [[11월 9일]] ~ )은 전 [[KBO 리그]] [[LG 트윈스|MBC 청룡]]의 [[내야수]]이자 현 [[코리아 드림 리그]] [[연천 미라클]] 감독이다.
         [[쌍방울 레이더스]] 창단 감독을 지낸 [[투수]] 출신의 야구 지도자 [[김인식 (1947년)|김인식]]과는 동명이인이며, 그의 아들은 전 [[KIA 타이거즈]]의 [[투수]] [[김준 (야구 선수)|김준]]이다.
         [[동대문상업고등학교]]와 [[성균관대학교]]를 졸업했다. 실업 팀 롯데와 공군을 거쳐 [[LG 트윈스|MBC 청룡]]의 원년 멤버로 입단하여 현역 시절 포지션은 [[내야수]]였고,<ref>[http://english.ohmynews.com/articleview/article_view.asp?menu=c10700&no=287885&rel_no=29 투지로 날린 개막전 끝내기 만루 홈런 - 야구의 추억, 28번째 프로 야구 원년 청룡의 캡틴 이종도] 《오마이뉴스》, 2007년 1월 1일 김은식 작성</ref> 단신이지만 근성 있는 플레이로 몸에 맞는 볼을 많이 얻어 '데드볼왕'으로도 불렸다.<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35145&PAGE_CD=N0550 근성의 데드볼왕 '김인식' - 야구의 추억, 첫 번째 프로 원년 MBC 청룡의 2루수 김인식]《오마이뉴스》, 2006년 5월 30일 김은식 작성</ref>. 또한 113타수 동안 삼진을 당하지 않아 이 부문 최고 기록도 가지고 있다. [[KBO 리그]] 출범 원년인 [[1982년]] 전 경기 출장에 이어 [[1987년]]까지 606경기 연속 출장으로 그 때까지의 최고 기록을 갖고 있었다.<ref>{{뉴스 인용
         은퇴 후 [[LG 트윈스]]의 코치와 2군 감독을 지냈다. [[김재박]] 감독이 [[LG 트윈스]] 감독으로 오면서 2군 감독에서 물러나고 [[청원고등학교 (서울)|청원고]] 감독을 거쳐 [[2007년]] 11월 [[안양시|안양]] 의 창단 감독으로 선임<ref>{{뉴스 인용|제목=김인식 ‘외인구단’ 창단 첫 승|url = http://www.hani.co.kr/arti/sports/baseball/277133.html|출판사=한겨레신문|날짜=2008-03-20|확인날짜 = 2008-03-20|저자=이완}}</ref> 되어 [[2013년]]까지 재임했다.
         * '''4''' - [[김인식]]
  • 김인철
         2004 시즌 후 기아에서 방출되지만, 그를 눈여겨 보고 있던 한화의 [[김인식]] 감독이 그를 영입했다.
         2005 시즌은 대타요원으로 시즌을 시작하였는데 1호포를 대타홈런으로 때려낸 것을 시작으로 개막 후 4월 한달동안 6홈런을 때리며 잠깐 홈런 1위를 한 적도 있을 정도. 이 활약으로 톱타자로 선발출장하기도 했는데 이후 페이스가 떨어져서 두 자리수 홈런에 만족해야 했다. 그래도 이땐 철밥통 소리 들을 정도로 썼던 것도 아니고 대타요원으로 시작했다가 자기가 잘해서 주전을 꿰찼던 거라 그리 욕 먹지도 않았는데 이 때 이후로 성적이 하락하여 2006년~2007년에는 신인 외야수들의 앞길을 막는 존재로 인식되어 이도형 등과 함께 한화팬들에게 김인식의 양아들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엄청나게 비난을 받았었다. 그 와중에 문학서 끝내기패의 원흉이 되기도 했는데 연장전에 들어가고 SK의 공격때 주자 1루에서 히트앤드런이 걸렸고 1사 1,3루의 위기가 될 상황이었는데 좌익수이던 김인철이 포구후 바로 송구를 하지 않고 머뭇거리던 틈을 타 3루주자인 정근우가 홈을 파고 어이없게 끝내기 패배(즉 1사 1루에서 힛앤런이 걸렸는데 단타로 1루주자가 홈까지 접전상황도 만들지 않고 홈으로 들어와 경기가 끝나버린 상황이다)를 당해버렸었다. 그거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결국 2007 시즌이 끝난 후 방출되었다.
  • 김재박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반박도 존재한다. [[김인식]]감독도 [[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kbo&ctg=news&mod=read&office_id=144&article_id=0000025078|“기술적으로 국내 프로야구 정상급 타자보다 나을 게 없다”]]고 평가하며 대표팀 발탁에 반대한 만큼 [[추신수]]의 대표팀 탈락은 김재박의 독단적 판단이 아니었으며, 당시 대표팀에 최종선발된 외야수는 [[이병규]], [[이용규]], [[이진영]], [[이택근]], [[박재홍(야구)|박재홍]] 총 5명으로 [[김인식]]감독의 말대로 모두 국내 프로야구 정상급 외야수들로서, [[추신수]] 대신 이들이 대표팀에 선발된것이 대표팀의 전력을 약화시켜 승패에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는것이다. 하지만 이는 타당하지 못한 반박으로서, 당시 추신수는 AAA에서 OPS .893 메이저리그에서 OPS .812를 기록했는데 이는 한국으로 온 어떤 용병타자보다 좋은 기록이었으며, 리그의 수준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OPS만 비교한다 해도 이택근을 제외한 다른 국가대표 외야수들보다 OPS가 더 높았다. 명백히 급이 다른 선수를 검증이 되지 않았다며 뽑지 않은것이 맞다.
  • 김형석 (야구 선수)
         |1989.9.24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전부터 <br> 종전 : [[김인식]] : 606서울
  • 박동희(기자)
          * [[김성근]]감독 외에도 [[김응룡]], [[김인식]] 등 유독 80-90년대에 활약한 노감독들에게 굉장히 호의적인 모습을 보인다. 김응룡 회고록과, 김인식 감독의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지금이 제일 힘든 시기일 것이라면서 은근슬쩍 그래도 한화는 김인식 감독과 재계약을 해야한다. 라는 발언만 봐도 알 수 있다.
  • 서울특별시/인물
         * [[김인식]] - 성북구
  • 선동열
         [[2003년]] 시즌 후 [[김인식 (1947년)|김인식]]의 후임으로 [[두산 베어스]]가 그에게 감독직을 제의했으나, 조건에 이견을 보여 협상이 결렬됐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476668 프로야구 두산, 선동열 영입 포기] - 연합뉴스</ref> 협상이 결렬된 [[두산 베어스]]는 당시 배터리코치였던 [[김경문]]을 후임 감독으로 내정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476991 두산, 김경문 신임 감독과 계약] - 연합뉴스</ref> 이후 당시 감독이었던 [[김응용]]의 부름을 받아 라이벌 팀 [[삼성 라이온즈]]의 코치로 부임하여 본격적인 [[KBO 리그]]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0478631 선동열, 삼성 투수코치 계약] - 연합뉴스</ref> [[2004년 한국시리즈]] 이후 선수단 인사에서 [[김응용]]이 구단 사장으로 보직이 바뀌자 [[11월 9일]]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승격되었다. 부임하자마자 [[박진만]], [[심정수]]를 FA로 영입하여 호화 멤버진을 구축했으며, 이 때 [[삼성 라이온즈]]는 "레알 [[삼성 라이온즈|삼성]]"으로 불렸다. 감독으로 부임한 첫 시즌인 [[2005년]] 정규 리그 1위(74승 48패 4무)를 차지했고 정규 리그 2위 [[두산 베어스]]를 4연승으로 스윕하여 [[2005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했다. [[2006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정규 리그 3위였던 [[한화 이글스]]를 4승 1무 1패로 꺾고 2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2009년]]에는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으나 재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SK 와이번스]]와의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 별다른 전술 대처없이 무기력하게 4전 전패로 스윕당하며 준우승을 기록했다. 때마침 [[삼성그룹]]의 조직 개편이 겹치면서 구단 사장과 단장이 전부 바뀌자 그 해 말 당시 작전코치였던 [[류중일]]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물러나 구단의 운영 위원으로 활동했다.<ref>[http://sports.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baseball&ctg=news&mod=read&office_id=076&article_id=0002277799 '좋은 성적 내고도 경질된 프로야구 감독' 역대 베스트 5] - 스포츠조선</ref>
         {{s-bef | before = [[김인식]]}}
  • 연경흠
          당시 한화 외야엔 [[조원우|조로켓]], [[제이 데이비스|남연이 형]], [[고동진(야구선수)|고봉사]]가 자리잡고 있었지만 [[김인식]]감독의 꾸준한 신뢰로 많은 타석을 부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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