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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1922)


일생

대한민국 최악의 전쟁범죄자이다. 경상북도 경산시 출신, 1922년 그는 악명 높은 일본 관동군 하사관에 자원입대하여 이후 파푸아뉴기니 전투, 필리핀 전투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해방 후 군사영어학교 1기를 수료하고 육군 제1대대 A중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그는 성격이 난폭하기로 유명했다. 파푸아뉴기니 전투 당시 인육을 먹었던 얘기를 태연히 하고 다녔으며, 육군 장교가 되기 전 잠시 경찰로 있으면서 하급자를 마구 폭행하는 등 여러 차례 말썽을 일으켰다. 군에 들어간 뒤에도 병사를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등 말이 많았고 파면이 되기도 했다.[1]

해방 후, 조선경비사관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했다. '육사졸업생'을 쓴 장창국 장군의 회고에 따르면 품행과 학업이 불량하여 퇴교대상에 올랐으나, 민족의식이 강한 한 생도가 일본군 하사관 출신들과 반목끝에 자퇴하여 김종원이 졸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군사고문단이 진압사령관 원용덕(元容德) 사령관에게 넘겨준 작전은 ‘4F 작전’으로서 ‘찾아서, 묶어둔 후에, 공격하여, 끝낸다(Finding-Fixing-Fighting-Finishing)’는 뜻이었다.(‘하우스만 증언’·184쪽) 4F 작전의 하수인은 세칭 백두산 호랑이인 김종원이었다. 전직 관동군 헌병 출신이었던 그는 여수 시민들을 공설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영문도 모르는 시민들은 날씨와 농사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김종원은 시민들에게 팬티만 입힌 상태에서 총살시키거나 철사로 손가락을 묶어 오동도 앞바다로 밀어넣었다. 자신이 차고 있던 일본도로 직접 피의자의 목을 베고 한자리에서 7~8명을 처형했다.(여순사건 실태조사보고서(1)·169, 213, 331쪽)
여순사건 당시 5연대 1대대장으로 진압하다 한심한 지휘와 통솔로 희생이 많이 따른 탓에 완전히 진압된 후 용공혐의자들을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쏘고 일본도로 목을 자르는 등 즉결처형으로 보복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고 한다. 개 버릇 남 못준다더니.. 이 때 희생자가 대충 100여명이란 설이 있다. 또한 참수한 용의자의 목을 자루에 담아 미군 고문관에게 선물하여 대경실색케 한 적도 있다고 한다. 가히 인간 쓰레기.

그러면서도 스스로를 백두산 호랑이라 자처하는 소리를 했다고 한다. 시라소니. 못난 호랑이 새끼라는 뜻이다.

6.25 전쟁 당시 동해안 방면의 8사단이 육군본부에서 내린 명령 때문에 원주-제천 방면으로 후퇴해버리자 그 빈자리를 매꾸기 위해 대구-부산을 담당하는 3사단 23연대가 차출되어 동해안방면으로 올라가 북한의 공격을 막았다. 이때의 23연대장이 김종원. 그러나 꼴랑 1개 연대로 북한의 최정예 5사단(중공군 164사단이 인민군으로 신분전환)과 예비사단인 인민군 12사단은 처음부터 중과부적이였다. 그바람에 연전연패하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적의 공격을 몸빵으로 막아내면서 선전하였다. 계속 후퇴하던중 경북 영덕군 봉화까지 후퇴하였을 때 김종원 중령의 23연대는 인민군과 7월 19일부터 공식 기록상으로만 4번 빼앗고 빼았기는 격전을 반복한다. 그러다 7월 25일경 봉화의 181고지를 사단장 이준식 준장에게 재탈환 하라고 명령을 받는데...

23연대장 김종원 중령은 자기연대가 181고지를 적에 빼앗기고 탈환공격에 실패했다는 이유로 소대장을 즉결처분하고 사병 1명도 즉결처분했다. 미군고문은 이런 김중령의 처사를 못마땅히 여기고 상부에 건의하여 그를 해임케 했다. 원래 김종원 중령은 6.25전에도 미고문관 구타사건으로 군을 떠나 경찰에 투신했다가 적의 남침 후 다시 군에 복귀했는데, 그 후에도 미고문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었다.
-중앙일보 <민족의 증언>(전8권)
대체 몇 번을 짤려야 만족하는 거냐?

김종원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으로 부임했으며, 전라북도청경상남도청경상북도청의 경찰국장을[2]

그 후 부산지구에서 계엄군 사령관을 하다가 거창 양민 학살사건으로 인해 직위 해제되면서 구속되었다. 다만 이때 행위가 엽기적인데, 휘하 부하들을 공비로 위장하여 조사를 위해 찾아온 국회의원들을 습격해버렸다! 이후 그대로 묻히는 듯 하였으나 외신들의 대대적인 언론보도[3]로 재수사가 진행되어 국회의원들의 조사를 방해한 혐의로 징역 3년의 가벼운 처벌을 받았다. 물론 다 복역하지 않고 3개월만에 이승만의 특사로 풀려난 후 전남경찰국장으로 임명된 후 승승장구 한다. 이승만은 "김종원은 애국 충정이 대단한 사람으로서 충무공 이순신과 견줄 만 하다이순신???"원균--며 풀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에서 재임하다가 1956년 내무부 치안국장으로 (1950년대~1960년대의 이사관급 경찰총수) 승진 되었으며, 1960년 4.19 혁명 이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었으나 1961년 12월 당뇨로 인해 병보석을 받았다. 이후 1964년 1월 30일, 천벌을 받아서 지병으로 뒈졌다. 향년 43세. 사망 후, 그에 의한 원귀들이 김종원을 무덤에서 끌어내 데려갔다는 '고만이 귀신'-도시괴담의 주인공이다. 죽을때까지 자기가 저지른 짓을 조금도 뉘우치지 않았다. 각 도청 산하의 경찰국장으로 근무한 시기에도 그는 이런저런 말썽을 일으켰다.

어찌나 찐따 같았는지 처조카 손자(구본환)조차 독립영화 「백두산 호랑이를 찾아서」로 자신의 이모할아버지[4]인 김종원의 행적을 찍으면서 김종원을 매우 부끄러워했다고 한다[5].

반공 극렬 수꼴조차도 웬만해서는 이 작자에 대하여 언급하는 걸 피하는데 (90년대 한국논단에서조차도! 일부 한국군이 너무 잔혹하게 굴긴 했다며 가볍게 언급할 정도이다!) 그 한국논단조차 외면했다. 위에 서술하듯이 참수하고 그걸 자랑하고 미군 고문관에게 선물한 탓에 당시 상관들조차도 미친 놈이라고 피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미군에서도 미친 놈으로 비난하고 60~80년대 반공이 팽배하던 시절에도 빨갱이를 학살하던 건 영웅이라고 찬양하던 프로파간다에서도 이 새킨 예외라고 묻혀졌다. 오죽하면 90년대 초에 KBS 1TV에서 하던 반공 다큐멘터리에서조차 무차별로 참수하고 자랑한 탓에 되려 반감만 불러왔다고 깠을 정도다! 당시 인터뷰하던 반공 수꼴 보수인사 오제도 조차도 이런 지나친 처벌이 되려 반국군 감정만 불러일으켰고 미군이나 해외에서 한국군을 부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김종원을 비난했다.

대중매체에서

제2공화국

제2공화국에서는 백인철이 담당했으며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다룬 장면에서 잠시 등장했다.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단순무식한 모습으로 나오며 처음에 양민 학살사건이 알려지자 분노를 터뜨리지만 이 사건을 그냥 덮자는 국방부 장관 신성모의 명령에 복종해 국회의 진상조사를 집요하게 방해한다.

조심하라고 김두한 씨. 나는 여기 계엄사령관이야. 조심하란 말이야!

야인시대에서는 오동영과 김세민이 담당해[6] 6.25 때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부산지구 계엄군 사령관으로 첫등장을 했다. 여기서도 실제 역사대로 매우 찌질한 인간 쓰레기. 미군을 상대로 파업하는 김두한과 임금협상을 하지만 계속 4달러만 요구하는 김두한에게 한발 물러선다.

사실 해방정국 때부터 일찍이 등장했는데, 김두한에게 압수한 아편을 홀랑 태워버릴 때 "각하께서 불을 지르라고 하신다."는 대사를 하며 조병옥을 수행하는 따까리가 김종원이다. 조병옥도 종아리"종원이"라고 이름을 언급한다. 김두한이 사딸라 장면에서 김종원에게 조병옥 박사께서 네가 이러시는 것을 알면 슬퍼할 것이다 운운하는 것이 그것을 의미하는 것.

거창 양민 학살사건 당시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국회조사단을 빨치산으로 위장한 한국군 병력으로 습격하다가 들통나 구속당한다. 그러나 자유당의 빽으로 다시 풀려나 치안국장에 앉는다.

이후 반독재시위를 진압하는 책임자로 다시 등장, 시위대를 폭력진압하나 앞에 서 있던 김두한의 대활약[7]으로 철수한다. 이후 이천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던가 마찬가지로 이천에서 출마하려던 이기붕의 자유당과 마찰을 일으키자 경찰병력을 동원해 이정재의 부하들을 잡아들이라 지시한다. 이후 출마를 포기한 이정재가 이기붕을 빈정거리자 발끈하는 것으로 직접 등장은 끝나고, 이기붕의 비서인 한백수가 '김종원 그 사람 일하는게 신통찮아 갈때가 되었습니다'라고만 언급한다. 부통령 저격 사건때문인가?

비중도 존재감도 별로 없는 인물이었으나, 4딸라에 나왔다는 이유만으로 4딸라가 합성 요소로 발굴된 이후로 MAD에서 자주 얼굴을 내비치고 있다.

참고로 오동영은 52화에서 단역인 백의사 단원 역도 맡았다. 이때 한 대사가 "우린 백의사 단원들이요. 국가와 민족을 위한 일이니, 우리와 함께 갑시다." 결국 김두한을 데려오는데는 실패하고 역으로 두들겨 맞는다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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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그럴 때마다 송호성 당시 육군총사령관이 그를 비호해서 넘어갔다고 한다.
  • [2] 지금의 지방경찰청(행정자치부 직할의 광역경찰청)과 전혀 다른 직제로서 XX도청 직할의 XX부국이다. 제1공화국미군정청의 경무부(警務部)와 관구경찰청(管區警察廳)을 내무부의 치안국과 10개 도청의 경찰국으로 축소했기 때문에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지방공무원으로 근무한 경찰관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렸지만, 내무부가 모든 도청의 고위직(예를 들면 대통령도지사/국무총리→부지사/내무부 장관국장/내무부 차관과장)을 임명하여 파견하는 방식으로 경찰국을 통제했다.
  • [3] 이때 이승만은 "치마폭 부끄러운 곳은 내보이지 말라고 했잖아"라는 말을 남겼다...
  • [4] 감독의 아버지의 이모부, 할아버지의 동서, 할머니의 형부라고 한다.
  • [5] 구본환은 EBS의 프로그램 다큐 시선(훈장의 품격)에서 나와 언급하길 이웃 어른들이 김종원에 대해 '이승만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다며 설명하자 어린 시절에 아무것도 몰랐던 그는 그저 자랑스럽게 생각해 친구들한테도 자랑했다고 한다(집안에서도 자랑이었는지 매번 무덤에 벌초를 하러 갈 정도로 챙겨줬다고 한다). 이후 김종원의 행적을 알게 되고 그가 받은 훈장을 보며 구본환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된다고 언급한다.
  • [6] 4달러 때만 오동영, 그 이후는 김세민이다.
  • [7] 김두한 VS 무술경관&기마대경찰이라는 이름의 동영상이 이 내용이다(114회).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했으나 세부적인 내용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