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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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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굉필 . . . . 7회 일치
         '''김굉필'''(金宏弼, [[1454년]] ~ [[1504년]] [[10월 7일]])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 화가로 [[호 (이름)|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ref>[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25465&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1005F00410031003400350034005F0031005F0030003000300031003200360030&pName=AE40AD49D544002891D15B8F5F3C0029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시스템]{{깨진 링크|url=http://people.aks.ac.kr/front/srchservice/viewSearchPPL.jsp?pItemId=PPL&type=L&pType=P&pSearchSetId=25465&pTotalSearchCount=1&pPosition=0&pRecordId=00500050004C005F0036004A004F0061005F00410031003400350034005F0031005F0030003000300031003200360030&pName=AE40AD49D544002891D15B8F5F3C0029 }}</ref> 또는 한훤(寒暄), 말곡(末谷<ref>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 1월 4일 기유 8번째기사 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판중추부사 김안국의 졸기</ref>)이며 자(字)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칭하였고, 《소학》의 가르침대로 생활하였다.
         그는 [[1484년]] [[10월]] 스승 [[김종직]]이 [[이조]][[참판]]이 된 뒤에도 [[훈구파]]에 대해 간하지 않자, 이를 계기로 풍자시를 지었다가 [[김종직]]과 결별하게 되었다. 그 자신도 [[조광조]]·[[이장곤]]·[[주계정 이심원]]·[[김안국]]·[[이연경]] 등의 제자들을 배출했으며, [[김종직]] 사후 사림의 영수로 추대되었다. 김굉필의 문인들과 이들의 학통은 후대에 가서 [[조광조]], [[백인걸]]의 학통과 함께 기호 사림파를 거쳐 [[서인]]학파를 이루게 되었다. 《소학》을 행동의 근간으로 삼아 《소학》을 알지 못하고는 사서육경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본관]]은 [[서흥 김씨|서흥]](瑞興)이며, [[한성부]] 출신이다. [[문묘]]에 종사된 [[동방 18현|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한성]] [[정릉동]] 출신.
         수많은 양반 관료들과 중인들, 양인 자제들까지도 그의 문하에 찾아왔고, 그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문하생을 받아들였다. 재물 욕심이 없던 그는 일부 뜻있는 지인들과 제자들이 일부 수업료를 냈을 뿐, 수업료 역시 받지 않았다. 그의 문하에서는 모재 [[김안국]]과 [[김정국]] 형제, [[주계정]] [[이심원]], [[이연경]], [[이약수]](李若水), 문서귀(文瑞龜), 안우(安瑀) 등의 제자들이 이름이 알려졌다.
         그밖에도 [[이장곤]], [[김안국]], [[김정국]], 이장길, 정붕, 성세창, 강흔, 정응상, 이연경, 주계부정 이심원, 윤탁, 우성윤, 김구(金絿), 정응상, 허경, 박한참, 윤신, 유우, 민구손, 최수성, 이담 등이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소 육경(六經) 연구에 몰두하여 [[성리학]]에 통달했으며, 문하에서 조광조·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이연경 등이 배출되었다. [[조광조]]의 학맥은 [[조광조]]-[[성수침]]-[[성혼]]으로 이어지는 한편 [[율곡 이이]]와 [[성혼]]은 [[조광조]]의 문인 [[백인걸]]의 문하에서 수학, 사숙함으로써, [[조광조]]의 후계자들은 [[서인]] 학파를 이루게 된다. [[김안국]]의 제자는 [[김인후]]이고 [[김인후]]의 문인이 [[정철]]로, [[정철]] 역시 [[성혼]], [[이이]]와 함께 역시 [[서인]] 학파를 형성하였다.
                                          →[[김안국]]→[[김인후]]<br />
  • 박승임 . . . . 2회 일치
         1574년(선조 7) 경주 부윤으로 발령되었고 이후 1577년(선조 10) 강화 부사, 1578년(선조 11) 여주 목사 등으로 부임했다. 지방관을 역임하는 동안, 박승임은 세금을 가벼이 하고 진휼을 실시하여 민폐를 제거하였다. 한편 [[김안국|모재 김안국]] 제향한 기천서원(沂川書院)을 건립하는 등 민생의 안정과 교화의 보급에 커다란 공로를 세웠다. 이때 어사(御史)로 파견된 정이주(鄭以周)는 그의 치적을 조사하여 박승임의 치적이 가장 뛰어나다는 ‘치행제일(治行第一)’이라는 보고서를 올렸고, 선조는 박승임의 공로를 치하하여 특별히 옷을 하사하였다. 이듬해 박승임이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려 하자 백성들은 그가 가는 길을 막고서 눈물을 흘리며 전송하였다고 한다.
  • 허목 . . . . 1회 일치
         미수 허목은 [[1595년]](선조 28년) 또는 [[1593년]](선조 26년) [[12월 11일]] [[한성부]] 창선방(彰善坊)에서 [[포천]][[현감]](抱川縣監)으로 사후 [[증직|증]] [[의정부]][[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허교]](許喬)와 [[정랑]](正郞)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딸 임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증조는 동애 [[허자]](東厓 許磁)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증조모 전주이씨는 왕족으로 [[조선 태종|태종]]의 장남 [[양녕대군]](讓寧大君)의 증손녀였다. 할아버지는 퇴계(退溪)가 그 학문과 덕망을 기린 송호처사(松湖處士) 허강(許橿)이고, 할머니 진주강씨는 문량공 [[강희맹]](文良公 姜希孟)의 5대손이며, 사용(司勇) 강복(姜復)의 따님이다. 또한 할머니 진주강씨는 한훤당 [[김굉필]]의 문인이자 정암 [[조광조]]의 동문인 모재 [[김안국]](慕齋金安國)의 외손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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