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업레이어 알림

팝업레이어 알림이 없습니다.
E D R , A S I H C RSS

"김선"에 대한 역링크 찾기

김선의 역링크


역링크만 찾기
검색 결과 문맥 보기
대소문자 구별
  • 윤치영
         한편 그는 [[한국독립당]] 탈당파 중 17명의 여성을 [[제헌국회의원]] 후보로 출마시켰다. [[황신덕]]의 언니인 [[황에스더]]도 윤치영이 마지막에 입후보시켰다.<ref name="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선인 2001) 48페이지</ref> 윤치영은 [[황에스더]]가 [[중구 (서울특별시)|서울 중구]]에 출마하도록 유도했는데, [[김선]]은 여기 중구에 살지도 않는데 왜 했느냐고 하자 윤치영은 상관없다고 했다.<ref name="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 그가 [[황에스더]]의 출마를 권한 것은 여자 후보를 더 내서 [[여자]] 유권자의 표를 분산시키려 했다는 의혹도 있다. 윤치영은 선거기간 중 편지로 유세를 하였는데, [[김선]]의 증언에 의하면 '전부 편지를 써서 [[보성중학교 (서울)|보성중학교]] 학생들한테 시켜서 각자의 집에 모두 편지를 보냈다. 우리(김선) 집에도 보냈다.<ref name="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는 것이다.
  • 정칠성
         [[1927년]] [[4월 26일]]에 [[경성]] 중앙유치원에서 좌우합작의 여성단체인 [[근우회]](槿友會)가 창설될 때 [[유각경]], [[황신덕]], [[김선]], [[허정숙]] 등과 함께 [[근우회]] 창립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운동의 연합체인 신간회의 자매단체로의 결연을 주선하였다. [[4월 28일]] [[근우회]]를 발족되자 [[근우회]] 회원모집부 부원이 되어 [[대구]]로 내려가 홍보, 회원을 모집하고 근우회 경상북도지회 조직을 주관하였다. 정칠성은 근우회가 전국에 지회를 결성할 때 대구지회 결성의 임무를 띠고 파견되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집행위원(당시 21명)을 구성하는 데까지 활약하였다.<ref name="dispose"/>
11830의 페이지중에 2개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을 눌러 제목 찾기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