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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규식 (서로군정서)
         [[경상북도]]출신이다. 안동 지역의 민족주의적 [[유교]] 세력이 [[1907년]] 설립된 [[협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가 이 학교 설립자들인 [[유인식]], [[김동삼]] 등이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만주]]로 망명할 때 김규식도 뜻을 같이 하여 독립운동 기지 설립에 참여했다.
  • 서상일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1909년 [[안희제]]·[[김동삼]]·[[윤병호]] 등과 함께 항일무장투쟁 단체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한때 만주에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1945년]] 8·15광복 후에는 [[송진우 (정치인)|송진우]]·[[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설하고, 사실상 집단지도체제하의 정당의 최고위원이라 할 수있는 8총무단의 일원으로 선임되었다.
         * [[김동삼]]
  • 신팔균
         [[1907년]] 8월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당하자 신팔균은 군 복무를 그만두고 낙향하여 향리인 진천군 [[이월면]](梨月面) 노원리(老院里)에서, 이월청년학교(梨月靑年學校)를 설립하였다. [[1909년]] [[안희제]], [[서상일]] 등이 조직한 비밀 결사 [[대동청년당 (1909년)|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에 가담하면서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경남 동래에서 결성되어 영남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된 대동청년당에는 [[윤세복]], [[김동삼]], [[이원식]](李元植), [[김사용]](金思容), [[윤병호]](尹炳浩) 등 80여 명이 참가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활동을 하였다.
  • 이경희 (1880년)
         실력을 양성하는 길만이 조국의 독립을 앞당긴다는 신념으로 고향으로 내려와 [[대구]] [[협성학교]](協成學校)의 교사가 되었으며 [[안동 협동학교]](協同學校)의 [[교사]]를 겸임하여, [[김동삼]](金東三) 등과 함께 안동 협동학교에도 출강하며 교편을 잡고 교육구국에 힘썼다. 이 무렵 그는 [[유교]] [[성리학]]에서 [[대종교]]로 개종하였다.
         * [[김동삼]]
  • 이광민
         1926년 1월 [[정의부]](正義府) 중앙총부의 결정에 따라 김세준(金世俊), 김홍식(金鴻植) 등과 함께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에서 군인과 군자금 모집을 담당했다. 1926년 11월 제3회 [[정의부]](正義府) 중앙의회에서 재무위원으로 선출되어 조직의 살림을 총괄했다.<ref>[http://www.mpva.go.kr/narasarang/month_hero_view.asp?id=371&ipp=12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ref> 같은 해 가을에 결성된 [[조선공산당]] 남만총국 조직부 간부에 선출됐다. 1927년 4월 15일 길림 남쪽 영길현(永吉縣) 신안둔(新安屯)에서 [[좌우합작]] 추진을 위한 유일당촉성회의가 열릴 때, [[정의부]] 중앙위원으로서 [[김동삼]](金東三), [[오동진 (1889년)|오동진]](吳東振), 김원식(金元植) 등과 함께 참석했다. 같은 해 5월 한족노동당 중앙집행위원이자 조선공산당 남만도 간부로서 기관지『농보(農報)』를 복간했다.<ref name="기념관" />
         1927년 9월 조선공산청년회 남만 제1구 선전부 간부에 임명됐고,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促成會派)인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로 선출됐다. 1930년 3월 전만한인반제국주의대동맹창립주비회(全滿韓人反帝國主義大同盟創立籌備會) 결성에 참여해 [[김동삼]]과 함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는 한편<ref name="기념관" /> [[정의부]] 대표로서 만주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에 힘썼다. 1932년 [[이상룡 (1858년)|이상룡]] 서거 후에도 중국에 남아 항일운동을 했다. 만주 서란현에 가매장 상태였던 백부 [[이상룡 (1858년)|이상룡]]의 유해를 [[하얼빈]] 취원창으로 이장해 후일 유해의 본국 송환을 가능케 했다.<ref name="이종서1" />
  • 이상룡 (1858년)
         유학자이며 의병장이었던 [[김흥락]]의 제자로서 의병 운동에 참가했으나, 50세 무렵인 [[1907년]]경부터 교육의 역할을 중시하는 애국계몽운동으로 방향을 전환, [[협동학교]] 설립 및 [[대한협회]] 안동지회 창설, 시국 강연 등을 벌였다. [[유인식]], [[김동삼]]이 이때부터의 동지들이다.
  • 이시영 (1882년)
         [[백남채]] 외에도 [[김좌진]](金佐鎭), [[김동삼]](金東三) 등과도 많은 일을 했다. [[1918년]] 귀국했고 [[1919년]] [[2월]], [[지청천]](池靑天), [[한용운]](韓龍雲) 등과 함께 [[영남]][[유림]]대표 2백여 명을 [[경성부|경성]]으로 보냈다. 그때 유림측에서 그에게 민족대표로 서명해 달라고 하자 '내 목적은 오직 왜놈과 싸우는 것'이라며 과격한 활동 노선을 밝혔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재무부장서리를 맡아 달라는 것도 거절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 />
         * [[김동삼]]
  • 이운형
         20살 되던 해 큰아버지 [[이상룡 (1858년)|이상룡]]을 따라 만주로 망명해 [[김동삼]](金東三), [[이청천]](李靑天) 등과 더불어 항일투쟁을 했다.<ref name="기념관" />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탑골공원]]에서 [[3.1만세운동|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서로군정서]] 비밀특파원으로 만주와 국내를 오가며 활동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복역했다.<ref name="보훈처">[[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ref>
  • 이인
         * [[1965년]] [[김동삼|일송 김동삼]]기념사업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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