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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상하
         {{참고|기사환국|만동묘|대보단}}
         그는 [[주자 가례]]를 주장한 스승의 이론을 신봉하여 받들었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스승 [[송시열]]이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국문받으러 상륙하자 [[송시열]]의 다른 문도들을 이끌고 [[광양]]으로 내려가 그를 맞이하였다. 이후 스승 [[송시열]]의 [[한성부]]로 가는 길을 도보로 동행하였다. 그러나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게 되자, 권상하는 그 곳까지 가서 스승인 [[송시열]]에게 눈물로 이별을 고하고, 스승의 의복과 책을 선물로 물려받았으며, 그의 유지를 계승하였다.
  • 김만기 (1633년)
         같은 해, 허적(許積)의 서자 허견(許堅)과 종실인 [[복창군]]·복선군(福善君)·복평군(福平君) 등의 역모를 막은 공을 세워 분충효의병기협모보사공신 1등관에 책록되었고<ref name="다음"/>, 1686년(숙종 13) 풍정도감(豊呈都監) 도제조를 지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으면서 [[파직]]되었다가 뒤에 복직되었다. [[1685년]](숙종 11) 스승 [[송시열]] 등과 함께 증조부 사계 [[김장생]]의 미간행 저술, 시문 등을 모아 [[사계유고]] 27권(부록 3권 포함)을 간행하였다.<ref>이 중 일부는 1627년에 편찬한 사계문집에도 중복 수록된 것들도 존재한다.</ref>
  • 김장생
         [[1631년]] 11월에 진잠현 성북리 해좌(亥坐)의 언덕에 안장하였고 이 장례식에 문상하는 사람이 거의 천명에 달했다고 한다. [[1641년]](인조 19) [[충청남도]] [[논산시|논산군]] 할머니 허씨 묘의 후편으로 이장 하였으니, 현재의 [[충청남도|충남]] [[논산시]] 이다. [[1657년]](효종 9) [[증직|증]]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시|의정부]] (議政府領議政)에 추증되고 시호는 문원공(文元公)이다. 문(文)은 도덕을 널리 안다(道德博聞曰文)이고 원(元)은 의를 중심으로 덕을 행했다(主義行德曰元)이라는 뜻이다. [[1688년]](숙종 14년) [[성균관]]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문묘에서 출향되었다가 1717년(숙종 43) 문묘(文廟)에 다시 종향되었다.
  • 김창집
         5월 15일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8월 2일 응교(應敎)가 되었으나 숙종 15년(1689년) 기사 윤 3월 21일 [[기사환국]](己巳煥局)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선친(김수항)이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고 [[4월 9일]] [[남인]]의 집중 공세로 사사(賜死)되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여 장례를 치른 뒤 형제들과 함께 포천 영평(永平 = 경기도 포천) 백운산(白雲山)으로 들어가 산중에 숨어 지냈다.
  • 김춘택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ref name="inbeok01"/>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ref name="inbeok01"/> 김춘택은 [[인현왕후]]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소론]]은 [[김일경의 옥사]] 당시 [[조선 영조|영조]]가 [[조선 숙종|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조선 영조|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조선 숙종|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종조부 [[김만중]]과 가문의 당파인 [[서인]]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갑술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남인]]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갑술옥사]] 이후 [[1701년]]의 무고의 옥으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 오시만
         [[1680년]](숙종 6년) 이조좌랑을 거쳐 [[경신대출척]]으로 파면되었다가 [[1689년]] [[승지]]에 오르고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중용되면서 1690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부당하다 하여 다시 승지로 전임되었다.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으로 유배되었다. [[서인]] 인사 일부와도 인척관계였으나 [[허새의 옥사]]를 전후하여 원수가 되었다. 본관은 [[동복 오씨|동복]]이며, 자는 영석(永錫), 호는 춘헌(春軒)이다.
         [[1689년]] [[승지]]에 머물렀다. 그해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복귀하자 [[1691년]] 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부당하다 하여 다시 승지로 전임되었다. [[1692년]] [[좌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 이현조가 오정위를 공격하자 피혐으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숙종이 반려시켰다. [[1694년]](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남인]]이 실각되자, 바로 삭탈관직되고 유배당하였다. 지조가 깨끗하고 겸허 담백하였으나 [[1694년]] 당화(黨禍)(갑술환국)를 입어 [[전라북도]] [[전주시|전주]], [[전라남도]] [[무안군|무안]] 등지로 10여년간 유배살이를 하였다.
         * [[기사환국]]
  • 윤선도
         [[1678년]] [[9월]] [[허적]]과 [[허목]], [[윤휴]] 등이 그에게 시호를 내릴 것을 상주하여 [[1679년]](숙종 5년) [[8월]] [[김덕원]](金德遠)의 상주로 충헌(忠憲)의 시호가 내려졌다.<ref>남파 홍우원이 지은 시장에 의하면 危身奉上曰忠 博文多能曰憲이라 하여 충헌이 되었다.</ref> 그러나 [[1680년]](숙종 6년) [[8월]]에 [[허견의 옥사]]로 [[남인]]들이 [[서인]]에 의해 대거 숙청, [[허적]](許積), [[윤휴]] 등이 처형당하고 [[허목]], [[홍우원]] 등은 파직당하여 [[문외출송]]당한 뒤, [[이사명]](李師命) 등의 상소로 그해 윤 [[8월 10일]] 윤선도에게 내려진 [[증직]]과 [[시호]]도 함께 추탈당하였다. 그 뒤 [[1689년]](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면서 그해 [[2월]] 다시 복작되었다.
         * [[기사환국]]
  • 윤휴
         {{참고|기사환국|홍수의 변}}
         {{참고|허견의 옥사|경신환국|기사환국}}
         [[1689년]](숙종 15년) 왕이 그의 애매한 죽음을 알게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들이 재집권하자 아들 [[윤하제]](尹夏濟)의 신원이 받아들여져 신원, 복권되고, [[김익훈]], [[이사명]] 등을 처벌하였으며, 그해 [[3월]] 윤휴는 무죄처분되었다. [[10월 19일]] [[이현일]](李玄逸)의 건의로 관작을 회복시키고 같은 날 [[증직|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왕은 특명으로 예관을 보내어 그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 [[기사환국]]
  • 희빈 장씨
         산림숭용과 국혼물실을 당의 제1강령으로 추구했던 [[서인]], 특히 [[인현왕후]] 민씨의 배경 세력이었던 노론의 강력한 적으로 규정되었다. [[1701년]](숙종 36년) [[숙빈 최씨]]의 발고로 [[인현왕후]]의 죽음을 기원하는 저주굿을 한 혐의를 받고 [[조선 숙종|숙종]]에게 자진을 명받았다. 인현왕후전이나 수문록 등의 소설 야사에서는 사약을 마시고 사사된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숙종실록 등 정사기록은 주례의 규정에 따라 사사할 수 없음을 언급하고 목을 메어 자결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존재한다. 그녀의 아들인 [[조선 경종|경종]]이 사망하고 [[숙빈 최씨]]의 아들인 [[조선 영조|영조]]가 즉위하자 [[인현왕후]]의 오빠 [[민진원]]을 위시한 [[노론]] [[인현왕후|인현왕후]]의 폐위와 죽음의 범인이자 3대 환국([[기사환국]], [[갑술환국]], [[신임사화]])의 원흉으로 정의하여 비난하였다. 또한, 이 시기에 집필되어 민간으로 보급된 [[인현왕후전]], 수문록 등의 언문 소설과 야사집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역사 서적과 드라마 등에 중요 사료로 활용되었다.
         [[인현왕후]]는 직접적으로 숙종에게 숙원 장씨를 쫓아낼 것을 종용하기도 하였는데, 숙종에게 [[명성왕후]] 김씨가 꿈에서 계시를 내리길 장씨가 원한을 품고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남인)의 사주를 받고 입궁했으니 쫓아내야 한다고 발언했던 기록이 숙종실록에 실려 있다.<ref>숙종실록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5월 2일(정유) 2번째기사</ref> 또한, '장씨 팔자에 본디 아들이 없으니 노고하셔도 공이 없을 것이다'는 주장도 했는데 이는 모두 훗날 [[인현왕후]] 민씨가 폐서인이 되어 폐출되는 이유가 된다. [[조선 숙종|숙종]]은 원자([[조선 경종|경종]])가 탄생하자 [[인현왕후]]가 매우 노여워했으며, 급작스레 주가(主家: 공주의 처소. [[홍치상]]의 어미 [[숙안공주]] 혹은 [[명안공주]] 등을 의미한다)와 더욱 친밀해지고 [[1688년]] 2월, '[[조사석]]이 장씨 친정의 청촉으로 상신에 제배되었다'는 소문을 유포했던 것이 발각되어 유적에서 삭제되고 위리안치된 [[홍치상]]의 방면을 종용했던 것을 폭로하기도 했다.<ref group="주">[[1688년]] 4월에 발발한 [[기사환국]]의 여파로 [[노론]] 과격파였던 [[김만중]]이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국문되었는데 소문의 근원지가 [[조선 숙종|숙종]]의 고모인 [[숙안공주]] 들에게서라는 자복이 있자 [[홍치상]]에게 교형이 내려졌다. [[갑술환국]]으로 [[홍치상]]은 다시 복관되었지만 [[조선 숙종|숙종]]은 '매우 가까운 친척이고 높은 연세인 공주가 집에 있으니, 내가 차라리 떳떳하지 않은 데에 빠지겠다. 특별히 복관(復官)하라'하며 불쾌함을 드러냈으며, 1702년 [[홍치상]]의 아들이 [[홍치상]]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격쟁하자 '[[홍치상]]의 지은 죄는 만번 통분할 일인데 아들이 감히 격고하였다'며 분노를 터트렸고 곧 '지은 죄가 낭자한데도 관작이 그대로인 탓이다'하여 복관한 관작을 다시 거두었다.</ref>
         ==== 기사환국 전후 ====
         {{참고|기사환국}}
         25일 밤, [[오두인]] [[박태보]] 등 [[서인]] 86인이 상소를 올려 전날 국모의 위엄을 훼손한 [[조선 숙종|숙종]]의 발언을 맹렬히 비판하며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명예를 회복할 것을 요구했다. [[남인]]의 강경한 반발에 주춤하던 [[조선 숙종|숙종]]은 이 상소에 극노하여 [[오두인]] [[박태보]] 등 86인을 친국하였고, [[인현왕후|중전]] 민씨의 친오빠 [[민진원]] 형제에게도 국문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서인]]이 대거 연루되기에 이르자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적극 변호해왔던 [[남인]]은 정치보복을 위해 입장을 바꾸어 [[인현왕후|중전]] 민씨를 옹호한 상소의 내용을 적극 비판하며 [[서인]]에게 극형을 내릴 것을 종용한다. 이에 [[서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축출되고 [[남인]]이 정계를 독점하게 되는 [[기사환국]]이 발발했다.
         애초, 당시에 문제가 되었던 것은 "후궁(희빈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의 집과 친분이 있어서 그 연줄로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라는 김만중의 발언이었는데, 숙종 15년(1689년) 2월, 김만중의 아들 김진화의 공초 내용인 "후궁(後宮)의 어미는 예전에 조 정승의 집과 같은 방(坊: 동네)에서 살았는데, 근일(近日)에는 발걸음을 끊고 왕래하지 않는다."<ref>숙종실록 숙종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2월 28일(병인) 3번째기사</ref> 는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 처갓집의 여종이었기에 조사석과 친분이 있었던게 아니라 이웃에 살았기 때문에 친분이 있었던 것을 시사하며, 동시에 장씨의 어미가 조사석 처갓집의 여종이었다는 사실이 이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음을 상징한다. 더욱이 조사석이 정승에 제배된 것이 장씨와의 연줄 덕이라는 소문을 배포한 자가 [[홍치상]]이었다는 점은 순수성에도 의혹을 제기하는데, [[홍치상]]은 장씨에게 원한을 갖고 있던 [[영빈 김씨]](당시 귀인)의 이모부이기 때문이다.<ref group="주">[[홍치상]]의 첫아내는 [[영빈 김씨]]의 이모이다. [[홍치상]]의 아들인 [[홍태유]]는 아비를 구명하며 [[홍치상]]이 이모인 [[숙명공주]]에게서 소문을 얻은 것이라 주장하였는데, [[숙명공주]]의 아들인 [[심정보]] 또한 [[영빈 김씨]]의 이모부이다. [[영빈 김씨]]의 폐서인 사유는 궁내의 사정을 친정에 전달한 것과 주가(主家: 공·옹주를 의미)와 내통하여 분란을 일으킨 죄목이었으며, [[영빈 김씨]]는 [[인현왕후]]의 복위로 특별히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2차례나 홀로 승급에서 제외되는 등 [[조선 숙종|숙종]]의 외면을 받았다. [[기사환국]]때 교형을 당한 [[홍치상]] 또한 [[인현왕후]]의 복위로 특별히 복관되었지만 어머니인 [[숙안공주]]와 [[인현왕후]]가 모두 사망한 1702년에 다시 복관이 취소되고 국가 죄인으로 강등되었으며 [[조선 숙종|숙종]]은 이후에도 [[홍치상]]이 복관되지 않도록 다시금 엄명을 내릴 만큼 반감을 표명했다.</ref> [[홍치상]]이 계실의 지친인 [[이사명]]에게 소문을 전달했고, [[이사명]]이 사돈인 [[김만중]]에게 전달해 [[김만중]]이 [[조선 숙종|숙종]]에게 따진 것이 숙종실록 숙종 13년 6월 16일 기사에 기록된 사건의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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