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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순이
         |기도 =
         그녀는 18세에 [[박종원 (종교인)|박종원]]에게 시집가서 3남매를 두었다. 그녀의 가족은 모두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자녀들은 천주교 [[교리]]에 따라 잘 교육받았고, 그 가족은 교우들에게 모범이 되었다. 고순이는 남편의 자선 사업을 도왔고, [[냉담자|냉담교우]]들을 [[교회]]로 돌아오도록 격려하였으며, [[문맹]]의 예비신자들을 가르쳤고, [[병자]]들을 보살폈다. [[선교사]]들이 입국하였을 때, 그녀는 [[성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에 행복해 했다. 그녀는 덕행과 [[기도]]를 늘려가며 [[순교]]에 대한 열망을 키웠다.
  • 권득인
         |기도 =
         권득인은 [[1805년]]에 서울의 한 [[로마 가톨릭교회|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에 부친을 여의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모친은 그가 16세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어머니가 보여준 모범은 그를 훌륭한 천주교 신자로 만들었다. 그는 새벽 수탉이 울기도 전에 일어나 동틀 때까지 [[기도]]했다. 그는 모두에게 친절을 베푸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 김효임
         |기도 =
         그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어머니는 여섯 명의 자녀와 함께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남매들은 각각 안토니오와 베네틱타, 효임 콜룸바, 효주 아녜스, 프란치스코 그리고 클라라이다. 김효임 콜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그리고 그들의 여동생 김 클라라는 모두 [[세례]]를 받고나서 곧바로 [[동정 (성 문화)|처녀]]로 살아서 [[하느님]]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봉헌키로 다짐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들이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결심을 돌리지 않았고 결혼한 여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쪽머리를 땋아 올렸다. 그들은 [[한양]] 근교의 [[고양군]] 용머리에 살고 있는 오빠 김 안토니오와 함께 살러 내려갔다. 그들은 [[기도]] 하기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히기, [[성경]] 읽기, [[묵주기도]] 그리고 빈자에게 [[자선]]을 베풀기 등을 하며 신앙 생활에 매진하였다. 그들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그들은 속세의 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기질적으로 온화하며 인정 깊었고, 그러함은 그들의 삶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에 박해]]가 발발하여 곳곳으로 퍼져나가 도처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세 자매는 두려워하지 않고 감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교우들을 위하여 매일 [[기도]]를 드렸다. [[5월 3일]], 같은 마을에 사는 [[김사문]]이라는 남자가 [[관아]]에다 김 안토니오가 [[천주교]]를 믿는 부자라고 고발했고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지역의 천주교인들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던 포졸들은 지체없이 용머리로 향했다. 당시 김 안토니오는 용무를 보고 [[궁술]] 연습도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포졸들이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을 김 안토니오의 부인 김 루치아는 김 베네딕타 그리고 김 클라라와 함께 황급히 집을 빠져나갔고, 김효임은 옆집 담장을 넘어 들어가서 장작더미 뒤에 숨었다. [[김효주]]는 달아나지 않고 포졸들이 침입할 때까지 세살 된 조카와 함께 방 안에 앉아 있었다. 흥분한 포졸들은 김효주를 가둬 놓고서 옆집도 습격하여 김효임을 발견하고는 그녀도 집에 끌고 들어왔다. 무례한 침임자들이 그녀의 여동생 김효주를 학대하는 것을 본 김효임은 그들에게 그들에게 화가 나서 위엄있게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체포하면 우리는 순순히 따라갈 터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이 나라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그런 몰지각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마치 마음 속으로 [[예수]]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를 번갈아 말하는 것 처럼 침묵으로 [[기도]]하였다. 형리들은 그들의 끈질긴 침묵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함은 형리들을 더욱 화나고 포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 두 여성이 극악무도한 [[마귀]]에 씌였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 자매의 옷을 벗기고 자매의 등에 [[주문]]을 적었다. 그리고는 빨갛게 달궈진 쇠꼬챙이를 사용하여 그 글자를 따라 그들의 등을 열세 차례나 불로 지졌다. 그러나 두 여성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듯 했다. 그들의 등가죽이 타들어가는데도 그들의 침착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 김효주 (종교인)
         |기도 =
         그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그들의 어머니는 여섯 명의 자녀와 함께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 남매들은 각각 안토니오와 베네틱타, 효임 콜룸바, 효주 아녜스, 프란치스코 그리고 클라라이다. [[김효임 콜룸바]]와 김효주 아녜스 그리고 그들의 여동생 김 클라라는 모두 [[세례]]를 받고나서 곧바로 [[동정 (성 문화)|처녀]]로 살아서 [[하느님]]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봉헌키로 다짐했다. 그들의 어머니는 그들이 결혼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들은 결심을 돌리지 않았고 결혼한 여자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쪽머리를 땋아 올렸다. 그들은 [[한양]] 근교의 [[고양시|고양군]] (현재의 덕양구)에 살고 있는 오빠 김 안토니오와 함께 살러 내려갔다. 그들은 [[기도]]하기와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기, [[성경]] 읽기, [[묵주기도]] 그리고 빈자에게 [[자선]]을 베풀기 등을 하며 신앙 생활에 매진하였다. 그들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그들은 속세의 재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기질적으로 온화하며 인정 깊었고, 그러함은 그들의 삶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1839년]] [[기해박해|기해년에 박해]]가 발발하여 곳곳으로 퍼져나가 도처의 천주교인들이 [[체포]]되었다. 그렇지만, 세 자매는 두려워하지 않고 감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교우들을 위하여 매일 [[기도]]를 드렸다. [[5월 3일]], 같은 마을에 사는 [[김사문]]이라는 남자가 [[관아]]에다 김 안토니오가 [[천주교]]를 믿는 부유한 사람이라고 고발했고 그의 집이 어디에 있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 지역의 천주교인들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있던 포졸들은 지체없이 용머리로 향했다. 당시 김 안토니오는 용무를 보고 [[궁술]] 연습도 하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였다. 포졸들이 습격한다는 소식을 들을 김 안토니오의 부인 김 루치아는 김 베네딕타 그리고 김 클라라와 함께 황급히 집을 빠져나갔고, [[김효임]]은 옆집 담장을 넘어 들어가서 장작더미 뒤에 숨었다. 김효주는 달아나지 않고 포졸들이 침입할 때까지 세살 된 조카와 함께 방 안에 앉아 있었다. 흥분한 포졸들은 김효주를 가둬 놓고서 옆집도 습격하여 김효임을 발견하고는 그녀도 집에 끌고 들어왔다. 무례한 침입자들이 그녀의 여동생 김효주를 학대하는 것을 본 김효임은 그들에게 그들에게 화가 나서 위엄있게 말했다. "당신들이 우리를 체포하면 우리는 순순히 따라갈 터인데, 어째서 당신들은 이 나라에서 죄인으로 여겨지는 사람에게 그런 몰지각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들은 마치 마음 속으로 [[예수]]와 [[마리아 (예수의 어머니)|마리아]]를 번갈아 말하는 것 처럼 침묵으로 [[기도]]하였다. 형리들은 그들의 끈질긴 침묵에 경악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함은 형리들을 더욱 화나고 포악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그 두 여성이 극악무도한 [[마귀]]에 씌였다고 여겼다. 그들은 그 자매의 옷을 벗기고 자매의 [[등]]에 [[주문]]을 적었다. 그리고는 빨갛게 달궈진 쇠꼬챙이를 사용하여 그 글자를 따라 그들의 등을 열세 차례나 불로 지졌다. 그러나 두 여성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듯 했다. 그들의 등가죽이 타들어가는데도 그들의 침착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 남명혁
         |기도 =
         또한 남명혁은 그의 종교를 부정하는 것과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누설하는 것을 거부하였으므로, 격심하게 고문 받았다. 그는 뼈가 부러졌고, 너무 심하게 얻어 맞아서 나흘간 의식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의식이 돌아오자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1839년]] [[5월 24일]] [[금요일]], 남명혁은 [[서소문]] 밖으로 압송되어 여덟 명의 교우들과 함께 [[참수]]되었다. 그는 머리가 잘려 나갈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영광스럽게 순교했을 때 그의 나이는 38세였다.
  • 박아기
         |기도 =
         박아기는 [[강원도]] [[강촌]]<ref name=faithweb>http://newsaints.faithweb.com/martyrs/Korea1.htm</ref>의 [[한강]] 둔치의 한 작은 마을에 있는 한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똑똑하지 못하여 [[교리]]와 [[기도]]를 배우는데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였다.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가 원하는 만큼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저의 온 마음을 다해서 그분을 사랑하는데 힘쓸 수는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살가죽이 늘어지고 뼈가 튀어나올 때까지 매질을 당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계속했다. 결국 포장은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깨닫고 그녀를 [[형조]] 감옥으로 이송시켰다. 거기서 그녀는 더한 고문을 견뎠다. 형조 [[판서]]는 다른 죄수들에게 했던 것과 같은 제안을 던졌다. "너의 남편과 아들은 풀려났다. 너 또한 한 마디만 하면 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대답했다. "각자 알아서 할 일입니다. 저의 바람은 [[주님]]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 박주영
         박주영은 2005년 6월 정식 국가대표로 A매치에 출장해 첫 경기에서 득점을 올렸으며, 2008년 동아시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득점왕을 수상했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는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1골을 넣어 2-2무승부로 16강에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후 [[2012 런던 올림픽]] [[일본]]과의 [[카디프 대첩|동메달 결정전]]에서 그 유명한 '''[[박주영/국가대표 경력#s-3.2|박시탈]]'''을 선보이기도 했다.
         2006년에는 33경기 10골로 부진했으나 2007년에는 잦은 부상으로 출장 경기 수가 줄었음에도 15경기 5골의 성적을 냈다. 2008년 9월 프랑스의 AS모나코FC로 이적한 박주영은 첫 경기에서 1득점과 1어시스트를 하는 등 매 경기마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면서 단숨에 핵심선수로 부각되어 이적한 바로 다음 달인 10월에 팀 최우수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08-09시즌 35경기 출장 5골, 2009-10시즌 22경기 9골 등의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2010-11 시즌은 강등권 팀에서 12골을 넣으며 공격 전체적인 면에서 팀을 이끌었으나, 모나코는 강등되었다. 동시에 여러 명문 팀들과 이적설이 돌았으나, 결국 아스날을 선택했다.
         지금은 폼이 많이 하락했지만 한때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사실 부끄럽지만은 않은 선수였다. 특히, 이전까지의 한국 축구의 공격수들은 골대 앞에서 잔뜩 힘이 들어간 플레이를 하기가 일쑤였는데, 신인이던 당시 언론으로 부터 "한국 축구 최초로 골대 앞에서 침착함을 갖춘 천재"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골대 앞에서의 플레이가 여유있'''었'''다. 특히 팀 동료를 이용하는 플레이나 빈 공간으로의 쇄도, 2선에서의 침투는 대한민국에서는 발군의 능력을 자랑했다. 뛰어난 키핑력에 국대에서 차두리에 이은 2위에 랭크되는 스피드를 가지고 있으며, 점프력면에서도 뛰어나 (모나코 피지컬 테스트에서 점프기록 1M를 달성..~~마이클 조던 강백호와 동급이다~~) 180초반대라는 키를 생각해보면 상당한 제공권을 가지고 있다. 이 점프력을 이용한 정확한 떨구기도 수준급이었다. 이 당시 쉐도우 스트라이커로서의 능력을 바탕으로 판타지스타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 따봉[[벌레|충]](-蟲)[* 이 말은 [[페이스북]] 유저 비하 표현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의 추천 버튼인 '좋아요'(영어로는 'Like') 버튼에 그려진 아이콘이 엄지를 치켜드는 것([[따봉]])이기 때문.]
          * 밥줘, 밥줘영: 박주영의 이름을 비슷한 발음으로 웃기게 비튼 것.[* 사실 이는 [[상상플러스]]에서 네티즌 별명중 '축구스타 밥줘영'에서 나온것이다.] 줄여서 '밥줘'라고도 한다. 깔 때 쓰기도 하지만 그냥 쓰는 팬도 많으며 사실상 박주영의 주요 별명 중 하나로 정착했다. 알샤밥으로 이적하며 알샤밥줘영, 알샤밥줘, 알밥샤줘영 등의 바리에이션이 생겼다. 그러나 알 샤밥 시절에서 별다른 임팩트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바람에 알샤밥줘영 등은 조용히 묻혔다.
          * 주님요 : (기도 세리머니→)주님 + 브라질 축구스타 [[주니뉴|주닝요]] 패러디. 당연히 이 별명은 비꼬는 맥락에서나 쓰이며, 주님영보다 귀염성이 덜하다.
          * 주영신(갓주영) : 비꼬는 의미로 더욱 많이 쓰이나 가끔 가다 현실이 되기도 한다. [[2012 런던 올림픽]]에서 동메달 결정전에서 한 골을 넣고 잠시 이런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가끔이라고 하기도 뭐한것이,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도 동메달 결정전 딱 한 순간뿐이고 그 이후에는 없다.~~가끔은 가끔인데 가끔이 너무 가끔이야. 그리고 사실 한일전 그것도 청대에서 한골 넣었다고 갓주영이면 역대 한일전 최다득점자인 [[최정민(축구)|최정민]]은 [[옥황상제]]인가?~~ 취소선 드립처럼 한계가 너무 명확하기 때문에 2017년까지도 가끔 축구 사이트에서 이런 말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집중포화를 맞고 사라지곤 한다. 그러나 슈틸리케호 말기 축구 국가대표팀의 부진이 너무나도 심했기 때문에 자조적인 의미로 상당한 호응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착각을 심하게 한 나머지 진지하게 주영신 같은 얘기를 과도하게 하면 집중포화를 맞고 버로우하게 되니 한계를 명확히 알고 주의하자. 박주영은 국대에서 잘 나갔던 시절은 정확히 말해 08-12년이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08년 동아시아컵부터 남아공시절엔 주전력으로 뽑혔고 본인도 피크시절 능력치지만 11년을 기준으로 터키 세르비아 가나 폴란드 는 평가전이었고[* 그렇다고해서 이걸 평가 절하할 필요는 없다. 전에 문서 작성에 세르비아는 2진 시차적응 등을 문제삼는 댓글이 있었으나 이런걸로 따지면 13년 스위스는 시합전날 입국했고 17년 콜롬비아는 3-4일전 입국해 더운데 사는놈들 추운데서 이겼다고 승리가 평가 절하됄 이유는 없다.가나는 주전력은 빠졌지만 기안이나 월드컵 주전은 대부분 출전했다]브라질 예선은 최종예선 같이 한국과 호각을 이룰만한 팀들이 아니었다.[* 레바논이 그나마 최종예선까지는 왔지만 주전력이 약하고 결국 최종예선에서 하위권 팀이었다]하지만 알다시피 13년은 이적실패와 벤치를 달구면서 월드컵에서 주적이 되고 부진한것은 부정할수 없다.
          * 기자들이 무척 싫어하는 선수들 중 한 명이다. 한창 박주영으로 뜨거울때 인터뷰 요청을 안 받아주고 피해다녀서 그렇다고 한다. 심지어는 [[셀타 비고]] 이적 후에도 저런 태도로 일관해서 결국 현지에서도 비난하는 기사가 나오기도 했다.[[http://shootkim.khan.kr/493|박주영의 인터뷰 거부에 대한 관련 글]] 공식 인터뷰는 피한 적이 없으나 축구 선수에게 이런저런 기자와 언론의 사적 인터뷰 제의를 다 거절하면 공식 인터뷰라는 것이 몹시 드물기 때문에 프로 선수는 구단의 사업을 돕고 지지해주며 돈을 쓰는 팬들에 대한 의리상 인터뷰에 적극적이어야 할 의무까지는 아니어도 필요가 있다. [[여담]]으로 그의 성격자체가 한 몫했고 그 성격의 소유자가 어린 시절 국내 기자들에게 시달리다보니 그렇게 된 듯.
          * 골을 넣으면 항상 [[기도]] 세레머니를 하는데 이에 대해서 항상 많은 말이 있다. 하지만 정작 팀동료들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모양. [[애초에]] 세레머니 후에 멀쩡히 동료들과 교류를 하기 때문에 크게 문제될 것은 없다. [[리그앙]] 시절, [[스타드 렌 FC]]와의 리그경기에서는 골을 터뜨리고 [[세레머니]]를 할때 오히려 동료들이 장난을 치는걸 보면 그들도 즐기는 듯. [[여담]]이지만, [[웨인 루니]]의 슬라이딩 세레머니에선 아무말도 없다가 박주영의 세레머니에선 무릎다친다고 까는 해축팬들도 간혹 있다. [[본인]]은 안정감을 준다고 한다. 하지만 세레모니하다가 부상 당하는 선수들도 있기 때문에 팬들에게는 괜히 애먼 상황이 닥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줬는데... 2010년 12월 25일, [[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soccer&ctg=news&mod=read&office_id=001&article_id=0004837061|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부상으로 [[무릎]]에 크게 무리가 가서, 아직까지도 훈련장에서 무릎찜질을 하는 모습이 종종 포착되며, 비시즌 기간에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 2012년 즈음부터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탓에 까들의 활동이 부쩍 늘었다. 본진이라 할 수 있는 [[다음]] 해축게에서 공개적으로 타 사이트 [[공대]]를 모집하고 있을 정도.[[http://bbs.sports.media.daum.net/gaia/do/sports/read?articleId=329103&&bbsId=F004&searchKey=subjectNcontent&sortKey=depth&searchValue=%EA%B0%9C%EC%86%8C%EB%AC%B8%EB%8B%B7%EC%BB%B4&pageIndex=1|참고]]. 이런 무개념 박까들의 난입으로 [[개소문닷컴]]의 청정지대(?)[* 사실 여기도 파고들어 보면 문제가 많은 곳이기는 하지만 '''최소한 서로간에 심한 욕은 안하는 분위기가 정착되어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럭저럭 청정지대 소리는 들을 수 있을지도.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개소문닷컴에는 이것도 안 되는 지대가 많다] 중 한 곳이었던 축구 게시판이 이미 큰 피해를 입었다.
  • 신혜진
         그 [[사진]]들을 한장한장 넘겨보면서 때론 흐뭇하고 때론 또한번 [[감동]]받고 [[마음]]한켠이 간질간질하기도해요
         위의 [[편지]] 이후로는 전혀 소식이 없어 우려가 커지던 와중, 결국 [[2017년]] [[10월 30일]] 결국 [[WM엔터테인먼트|소속사]]와 전속[[계약]]을 해지하고 팀 활동에서 빠지게 되었다. 8명이 다 같이 컴백하길 [[기도]]해오던 찰나에 들려온 소식이라 여러모로 많은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더구나 진이는 전 [[APRIL]] 멤버인 [[전소민(KARD)|전소민]], [[이현주(배우)|이현주]]처럼 그룹 활동만 관두고 계속 연예계 활동을 이어가는 게 아니라, 아예 [[WM엔터테인먼트|소속사]]를 나왔다.][* 공교롭게도 진이의 [[탈퇴]] 이후 [[오마이걸]]이 낸 첫 [[앨범]]인 [[비밀정원]]에서 [[오마이걸]]이 [[데뷔]] 후 첫 [[음악 방송]] [[1위]]를 달성하자, 많은 [[미라클|팬들]]은 '진이도 함께 있었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하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그런데 [[은진|이와 같은]] [[DIA|일이]] 7개월 뒤에 [[Summer Ade|일어났다]].]
         우리 [[오마이걸]]! [[효정|효정이]], [[미미(오마이걸)|미현이]], [[유아(오마이걸)|시아]], [[승희(오마이걸)|승희]], [[지호]], [[비니(오마이걸)|유빈이]], [[아린(오마이걸)|예원이]]… [[오마이걸]]이라는 [[이름]]으로 그 안에서 각자 자기만의 [[색깔]]로 [[오마이걸]]을 지키는 모습이 너무나 빛나고 또, 그런 [[오마이걸]]을 [[사랑]]으로 지켜주는 [[미라클]]과 함께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멋있게 느껴져! [[무대]] 위에서 [[오마이걸]]의 [[노래]] 한 소절, 한 소절과 [[미라클]]의 [[응원]] [[소리]]가 [[화음]]을 이룰 때 가끔은 [[눈물]]이 날 것처럼 울컥할 만큼 [[감동]]이었어… 앞으로도 가끔 [[추억]]의 그리움에 [[마음]]이 울컥하기도 하겠지만 내 [[마음]] 속엔 그 누구보다 최고인 [[오마이걸]] 항상 [[마음]] 깊이 [[응원]]할게!
          * <[[OH MY GIRL#s-2.2|CUPID]]> 활동을 [[시작]]하면서 [[앞머리]][* 사실은 헤어커프, 즉 [[가발]]이다.]를 내렸는데 이에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 대개 [[앞머리]]가 답답해 보여 [[눈썹]] 내놓은 걸 좋아하는 [[사람]]들과 [[앞머리]]를 내려서 더 예뻐졌다는 [[사람]]들, 즉 깐진파와 덮진파로 나뉜다. 가끔 묶진파도 보이기도 한다. ~~물론 [[덕후]] [[눈]]에는 뭔들~~ 모 [[팬]]이 [[팬사인회]]에서 진이에게 직접 [[앞머리]] 다시 없앨 [[생각]] 없냐니까 아직은 없다고 한다.
          * [[고기]] 광빠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고기]]라고 [[http://me2.do/FTjWTSZd|밝혔으며]], 뮤비뱅크에서 선보인 [[애교]] 멘트가 [[http://me2.do/F2GCHcOm|꼬기사주세요 `ㅁ`]]이기도. ~~귀엽다~~
          * 태어나서 한 번도 [[마라톤]]을 해본 적이 없어서, 기회가 된다면 [[미라클|팬들]]과 함께 [[마라톤]]을 하고 싶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다. 힘들고 지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서로를 [[응원]]할 수 있고, 그렇게 [[마라톤]]을 완주하게 되면 더욱 끈끈한 사이가 될 것 같다고. 또 [[마라톤]]을 하면 [[다이어트]] 효과도 있고, [[건강]]해질 것 같다고 말하기도. ~~기승전 [[다이어트]]~~
  • 유대철
         |기도 =
         부친은 [[1839년]] [[참수형]]으로 순교한 성인 [[유진길]](劉進吉,(1791∼1839)이다. 유진길은 정3품 당상역관(堂上譯官)으로 일한 역관이었으며 [[1823년]] [[중국]] [[선교사]] [[마테오 리치]] [[사제|신부]]가 쓴 ≪천주실의≫의 영향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부친의 영향으로 유대철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모친의 반대에도 믿음을 지키는 순수한 [[청소년]]이었다. 반면에, 그의 어머니와 누나는 천주교에 적대적이었으므로 그를 괴롭혔다. 그러나 유대철은 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했다.
  • 유소사
         |기도 =
         유소사는 [[1801년]] [[신유박해]] 때에 순교한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후처이며, [[정하상 바오로]]와 [[정정혜 엘리사벳]]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남편의 권유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박해]] 동안에 엄청난 신앙과 용기를 보여주었다. 그녀의 남편이 [[체포]]되자, 그녀 또한 세 자녀와 함께 체포되었다. 얼마 지나 그녀는 세 자녀와 함께 석방되었지만, 남편과 마찬가지로 전처의 아들 [[정철상 가롤로]]도 [[순교]]한 뒤였으며, 그녀의 가산은 모두 몰수되고 없었다. 그녀는 [[경기도]] [[광주시 (경기도)|광주]]의 [[마현 다산마을|마재(마현) 마을]]에 있는 시동생 [[정약용]]의 집에 가서 살았지만, 시아주머니는 그들에게 냉랭하였으므로, 그들은 갖은 고생을 다하였다.
         그녀는 늙어서 더 이상 일을 못하게 되자, [[기도]]에 매진했다. 또한 그녀는 깊은 자애심으로 자신이 굶어 다른 사람을 먹이곤 하였다.
  • 유진길
         |기도 =
         그는 [[이경언]]을 다시 찾아가 그로부터 [[주의 기도]]와 [[성모송]] 그리고 [[십계명]]을 배웠다. 그리고 곧바로 그는 입교할 의사를 밝혔다. 그는 [[서학]]과 [[동양]] 사상의 만남을 통해 그의 가장 큰 문젯거리를 해결했다. 그는 [[정하상 바오로]]를 비롯하여 여러 천주교인들에게 알려졌다.
         그 당시, [[1801년]] [[신유박해|신유년의 박해]]로 인하여, [[베이징]]에서 온 [[중국인|청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하자, [[조선]]에는 사제가 한 명도 없게 되었다. 살아 남은 [[천주교]]인들은 [[교회]]의 재건과 [[청나라]]에서 또 다른 사제를 모셔오고자 고투했다. 유진길은 [[세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하상]]의 교수로 인해 매일마다 [[아침]] 기도와 저녁 기도를 암송했으며 충실하게 [[십계명]]을 따랐다.
         그는 숙소로 돌아왔지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어두운 방에서 그의 [[심장]]이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느꼈다. 그는 심원한 영적 체험에 감동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느님]], 저는 당신께서 저를 [[세례]]로 이끌어 주신 놀라운 경험에 대하여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희 나라에 [[사제]]들을 보내시어 어둠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성체]]를 모시는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하여 주소서. 비록 고난이나 [[박해]]가 찾아온다 하여도 이 어리석은 종이 저희 나라의 눈을 여시는 [[주님]]의 뜻 안에서 제 삶을 내놓아 당신을 [[증언]]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 깊은 신앙과 저에게 필요로 되는 힘과 용기를 주소서. 아멘"
  • 이 가타리나
         |기도 =
         그들 중 [[조 막달레나]]가 [[천주교]]에 가장 열심이었다. 그녀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고는 어머니의 삯바느질을 도왔다. 조 막달레나가 18세가 되자, 어머니 이 가타리나는 그녀를 한 교우에게 시집보내려 했지만, 조 막달레나는 어머니에게 [[처녀]]로 살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이 가타리나는 딸의 결심을 이해할 만큼 독실했지만, 이교도들이 딸을 의심할까봐 염려스러웠다. 왜냐하면, 만일 자신이 [[순교]]하면, 딸이 홀로 남겨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딸이 결혼하도록 설득했지만, 허사였다. 조 막달레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처녀로 살기를 고집했다.
  • 장성집
         |기도 =
         그는 30세에 [[천주교]]의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성육신]]과 [[동정 (성 문화)|동정]] [[탄생]]의 교리를 믿지 못하였다. 그는 [[하느님]]이 스스로 겸손하게 [[인간]] [[사랑]]을 위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었다. 의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그는 천주교의 교리 공부를 단념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 중에 천주교 신자가 한 명 있었는데, 그에게 [[하느님]]께로 돌아오도록 설득하였다. 장성집은 과거 자신의 죄를 뉘우쳤고, [[기도]]와 [[묵상]] 그리고 [[성경]] 읽기에 빠져 살았다.
  • 전경협
         |기도 =
         전경협은 [[한양]]의 한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래로, 그녀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안형광]]이라는 이름의 [[궁녀]]의 도움으로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서 전경협의 친오빠가 그녀를 결혼시키려 했지만, 궁녀 안형광은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는데, 그녀도 이미 궁녀 명부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박희순 루치아]]를 비롯한 [[천주교]]인 궁녀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인이 되었다. 박희순이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출궁한 후에, 전경협도 꽤병을 부려 궁궐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궁궐의 호사스러운 생활이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전경협은 박희순과 함께 살며 [[기도]]와 종교서적의 독서 그리고 선행에 전념했다. 그녀 주위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복했고, 그녀는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데 일조했다. 그녀는 극도의 가난과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번 없었다. 그녀는 그저 [[체포]]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전경협의 친오빠는 이교도였으며, [[조정 (정치)|조정]]의 고위 관리였다. 그는 [[왕|임금]]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그녀를 배교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의 간청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는 독이 든 계란 과자를 [[감옥]]에 있는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다. 수상스럽게 생각한 전경협은 과자를 비녀로 찔러 보았는데, 그 비녀의 색쌀이 금새 변했으므로 그 과자를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오빠는 형리장을 매수하여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도록 시켰다. 하지만 형리장은 여러 차례 그녀를 때리되 죽이지는 않았다. 전경협의 조카 즉 오빠의 딸이 그녀의 상처가 하루만에 다 낫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다. 전경협은 그녀의 오빠가 그녀가 감옥에 영원히 갖혀 있도록 요청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참수]]되기를 [[기도]]했고, 마침내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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