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년 일제강점기 시대에 경상남도 창원군 내서면(현 경상남도 마산회원구)에서 아버지 권영찬과 어머니 김해 허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찍이 밀양공립농잠학교를 졸업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 당시 창원군 [2] 서기로 근무한 바 있다.
8.15 광복 후 남조선로동당에 가입했다. 막걸리의 도수를 높이려고 메탄올을 넣어 친구와 마시다가 친구는 사망했으며 본인은 실명하였다.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른다의 현실버전 6.25 전쟁때엔 경남 창원군 노동당 부위원장, 반동조사위원회 부위원장 겸 조사원을 하였다. 이 때 양민학살에 가담하여 적어도 11명의 무고한 양민을 죽이는데 가담하였다. 당시 권오석은 반동분자, 즉 즉결처형할 대상을 골라내는 역할이었는데 눈이 먼 권오석은 아무것도 모르는 주민들을 모아다가 손을 만져보고 처형대상을 결정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학살 현장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신동아 보도 기사
이로 인해 체포되어 수감되었으나, 폐결핵 등 질병이 도져 1956년 집행정지가 내려진다. 이후 5년 동안 풀려나지만 1961년 다시 수감되어 10년을 마산 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71년 옥중 사망한다. 사망할 때까지 전향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비전향 장기수다.
이후 그의 시신은 마산합포구 고성터널 근처에 안장되었으며, 참여정부 시절 확장 묘역이 조성되고 컨테이너 초소가 설치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피해자 유가족들의 항의가 있었다. 가족으로 배우자 박덕남(2017년 2월 사망)과의 사이에서 딸 권창좌, 권양숙, 권진애, 아들 권기문을 두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는 장인 어른이 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2002년 대선 새천년민주당 경선에서 이인제측에게 빨갱이의 사위라는 공격을 받았지만 당시 노무현은 연설에서 인정할 것은 인정하면서도 "그럼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라고 대답, 오히려 좋은 이미지가 확대되고 동정론이 나오는 등 제대로 반격에 성공하고 결국 경선-대선에서 승리했다.